작년 호텔 디너파티 행사에서 필자는 출입관리 봉사를 맡았다. 1인당 20만 원짜리 티켓이 있는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는 행사여서 출입 통제는 중요한 임무였다. 참석자들은 모두 앉아서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먹었다. 필자와 입구 접수 봉사요원들은 그날 저녁을 굶었다. 주최 측에 여러 번 저녁식사에 대해 문의를 했는데도 서로 우물쭈물 답변을 미뤘다. 정작 봉사 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친했던 K라는 이웃이 있었다. 아내들끼리도 친하고 바깥 남편들도 뜻이 통했다. 나이도 비슷해서 생각하는 범주도 맞아 떨어졌다. 부모들이 친하면 자연히 아이들도 친해진다. 여름이면 피서도 같이 다니고 집안 길흉사에도 서로 오갔다. 끈끈한 정이 30여 년째 이어지고 있는 사이다. 지금은 서로 이사를 해서 떨어져 살지만
평사원 때였다. 직속상관으로는 주임, 계장, 과장, 지점장이 있었다. 체력단련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야유회를 갔던 날, 족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낸 뒤 오후에는 부서별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친목을 도모하는 윤활유 역할도 하지만 지나치면 싸움판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삼삼오오 나뉘어 술을 먹다가 다른 곳에서 온 행락객과 시비가 붙어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쯤은 있다. 필자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인기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필자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충남 태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또래가 모두 겪었듯 필자도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필자는 소위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
영하 15℃의 강한 한파가 몰려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던 어느 겨울날 저녁, 대학로로 연극 한 편을 보러 갔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꽃할배로 유명한 이순재, 신구 선생이 더블 캐스팅된 작품이다.
필자가 보러 간 날은 신구 선생이 열연을 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호통을 치는 광고로 매력을 발산하던 신구 선생. 고집불통
사진 촬영을 명령받을 때가 있다. 내 스스로 정한 곳이 아니라,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다녀와야 하는 지역과 대상이 정해질 때다. 프놈펜에서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트 길이 주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함께 지냈던 유엔 요원들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나를 떠나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필자는 서울에서 55년 넘게 살고 있지만, 고향은 대전이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대전에 살았던 기간은 어린 시절 10년 정도인데 그런데도 대전의 곳곳을 잘 알고 있고 대전에 대한 향수로 항상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는 서울로 이사를 온 이후에도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생이 되었을 때까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각 한 달간을 꼭 대전으로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만나자고 전화를 할 경우, 이 전화를 '콜드 콜(Cold Call)'이라고 한다. 사전에 만나자는 약속을 한 일도 없고 만날 필요가 있는 사람인지 조차 모른다. 누군지도 모르고 왜 만나자는 건지도 모르니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높은 사람들은 직접 전화를 받지 않고 비서를 통하게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매번 사전 약속을 하고 사람
필자도 너무나 차가운 체감에 외출할 엄두를 못 내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겨울이면 이만한 추위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 어릴 땐 한겨울에 영하 10도, 15도는 다반사였었다.
물론 삼한사온으로 며칠간 추운 후에는 또 얼마간은 기온이 올라 따뜻함을 느끼며 겨울을 지냈다.
요즘은 삼한사온도 없고 봄, 가을의 구분도 애매한 게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