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필자와 친구들의 아지트는 등나무 밑이었다. 그런데 5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등나무 밑에 몇 명의 아저씨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작은 짐 보따리 앞에서 웅성거리다가 한 명이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열쇠를 가지고 와서 옆에 있던 건물의 쪽문을 열었다.
우리는 호기심에 모두 그리로 달려가서 안을 들여다봤다. 아저씨들은 상자를 열어 책을 꺼내기 시작했고 보따리를 풀어 옷들을 열심히 정리했다.
그때 아저씨들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갔다가 또다시 그곳으로 갔다. 수십 번을 그렇게 하면서 놀이처럼 즐겼다. 나중에는 아저씨들이 주는 과자도 받아먹고 이름을 물으면 대답하면서 친해졌다. 어머니한테 얘기하니 자취생들이겠지 했다.
아저씨들은 가끔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했고 우리에게 동화도 들려줬다. 그 뒤 아저씨들이 서울대 1학년이라는 것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다가 겨울방학이 되었고 그 다음해는 6학년이라 입학시험 대비로 바빠 아저씨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채 중학생이 되었다. 중2 때 혼자 집에 오는데 한 아저씨가 “야아~ 너로구나 많이 컸네!”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끄러움이 부쩍 많아진 필자는 그 말에 놀라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뛰어갔다. 씩씩거리는 필자에게 동생들이 “언니 왜 그래?” 하고 물었지만 “몰라!”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날부터 가끔 그 아저씨를 길에서 만났다. 자취생들 중 한 명이었는데 제대하고 복학했다고 들었다. 키가 무척 컸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별명이 개고기였다. 종종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랑 얘기도 하고 동생들과는 시시덕거리다가 가곤 했는데 필자는 특별하게 할 얘기도 없어 무시하고 지냈다. 이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 아저씨는 장학생으로 대학원까지 들어가 연구원이 되었다.
필자는 그 아저씨가 어느 과 학생이며 이름은 뭔지 동생들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당시 이성에 관해서는 무조건 멀리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형제가 없어 필자가 여동생이 되어줬으면 했던 거 같다. 물론 필자도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눈치만 보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필자가 결혼하고 몇십 년 뒤, 뜬금없이 개고기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개고기 아저씨가 떠올랐다. 뭔가 의논하고 싶을 때, 어려운 일을 겪을 때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는 오빠라는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어느 날 그 친구분을 어느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필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고는 개고기 아저씨가 폐가 안 좋아 고생하다가 갔다는 얘기를 해줬다. 지금이라면 살갑게 대해줬을 텐데…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친구와 묘소라도 찾아가볼 걸 그랬나? 왜 그런지 친구분을 만난 뒤로 개고기 아저씨 생각이 더 났다. 필자 오빠가 되어줄 사람이 이젠 영원히 떠나버렸다는 생각까지 들고, 아저씨가 “이제 내 마음 알겠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억울한 마음은 또 뭔지 알 수가 없고. 어쨌든 만나보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실이다. 이제는 마음껏 스스럼없이 굴 수 있는데… 아저씨가 이 세상에 없어 슬프다. 아니 그립기까지 하다.
한때 “칼질하러 가자”고 하면 그날은 ‘경양식집에 가서 돈가스 먹는 날’이었다. 요즘은 도시락 반찬이나 분식 정도로 생각하는 음식이 돼버렸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좋은 날 귀하게 먹던 고급 외식 메뉴였다. 멋스럽게 차려입고 나가 돈가스를 썰며 기분을 내던 그 시절의 추억을 재현한 맛집 ‘모단걸응접실’을 찾아갔다.
‘모단걸응접실’은 그 이름에서부터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모단걸’이라 불렸던 신여성들이 서양문물을 즐기던 고급 살롱을 모티브로 했다. 가게 입구에는 ‘우린 내일 큰일을 할 거잖아요. 오늘 꼭 만나요. 그때 먹었던 음식과 술을 준비할게요. 기다릴게요’라는 문구가 보인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이 메시지를 읽고, 지하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비밀스러운 아지트로 향하는 듯한 오묘한 기분마저 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강렬한 청록색 벽과 체스 무늬 바닥,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그리고 앤티크한 소파와 테이블이 앙상블을 이룬다. 예스럽지만 세련된 경양식집 특유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더불어 테이블마다 놓인 와인 잔과 포크·나이프·스푼이 돈가스의 품위를 더한다. 왕돈가스를 비롯해 함박스테이크나 비후가스 등 메인 메뉴를 주문하면 식전 빵과 수프가 나온다. “빵으로 드릴까요? 밥으로 드릴까요?”라는 정겨운 멘트는 들을 수 없지만, 빵과 밥 모두 즐길 수 있다(밥은 메인 메뉴와 함께 제공). 후춧가루를 톡톡 뿌려 나온 따뜻한 수프에 빵을 곁들여 먹어도 좋지만, 이곳에서는 더 특별하게 즐길 수 있다. 채 썬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버무려 만든 옛날식 샐러드, 일명 사라다가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모닝빵을 반으로 갈라 사라다로 속을 채우면 추억의 사라다빵으로 즐길 수 있다.
메인 메뉴 옛날 왕돈가스(9500원)는 김치와 단무지가 함께 차려진다. 최신식 패밀리레스토랑에서는 보기 힘든 경양식집만의 독특한 구성이다. 케첩 뿌린 반달 모양 감자튀김과 흰쌀밥은 돈가스와 한 그릇에 담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박한 차림에 더욱 정감이 간다. 새로운 조리법을 쓰는 것보다는 추억의 맛에 초점을 맞췄다. 돈가스 1인분에는 국내산 최상급 돼지 등심 250g이 사용된다. 질 좋은 재료로 만든 든든한 돈가스 한 접시는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외식 메뉴로 사랑받고 있다.
돈가스와 함께 경양식 대표 메뉴로 손꼽히는 오리지널 함박스테이크(1만2000원)를 찾는 이들도 많다. 진한 갈색 데미글라스 소스 위에 노란 반숙 달걀을 덮은 도톰한 함박스테이크가 입맛과 눈길을 사로잡는다.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가 함께 나오는 모단걸 세트(4만8000원)와 모단보이 세트(3만6000원)는 샐러드와 음료까지 즐길 수 있는 실속 구성이다. 음료 대신 1만2000원만 추가하면 와인 1병으로 변경할 수 있다. 분위기를 내고 싶은 날, 와인 한잔하며 여유롭게 식사하는 것은 어떨까? 식사보다는 알코올 위주로 즐기고 싶다면 바(bar) 자리를 추천한다. 높은 바 의자에 앉으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와인을 비롯한 맥주, 보드카, 위스키, 칵테일 등 다양한 주류를 판매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게 된다면 치즈 왕돈가스(1만1000원), 카르보나라 함박파스타(1만9000원), 고르곤졸라 버섯 크림 떡볶이(1만6000원) 등 퓨전 메뉴를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주소 (샤로수길점)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4길 11 (가로수길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9-1
모단걸응접실은 샤로수길점과 가로수길점 두 곳에서 운영 중이며, 실내 인테리어와 분위기, 메뉴는 동일하다.
고향에 둥지를 틀고 주말부부로 생활한 지도 어느덧 6개월로 접어든다. 아직도 마음은 반반이다. 사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만 달랑 보낸 시간은 불과 14년이지만 나머지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으니 어찌보면 내고향은 서울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은 없으련만 아직도 고향은 영종도라는 고정관념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고향은 영종도일지도 모르겠다. 조상대대로 터잡아 살아왔고 나 또한 이곳에 탯줄을 묻었으니 이곳이 고향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몇십년을 살아온 서울은 자연스럽게 타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서 홀로서기를 하는데는 나름 인내심이 필요했다. 달랑 거실 딸린 방하나 얻어서 숙식을 하고 회사에 출,퇴근을 하다보니 평소 겪어보지 못했던 불편한 일상의 많은 것들 앞에서 당황해 하기도 했다. 밥짓고 국이나 찌개 끓이고, 물론 기본 밑반찬은 서울에 있는 아내가 챙겨주지만 나머지 모든 것을 나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고교시절에 자취생활을 했던 경험을 되살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열심히 살다보니 이제는 나름 살림의 지혜도 새록새록 늘어가고 있다.
외로운 고향생활(?) 중에서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어린 시절 소꿉친구들이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각자의 처한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던 친구들이 은퇴시기를 맞이하여 고향에서 다시 뭉쳤으니 그 반가움이야 오죽하랴. 육십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나이에 소꿉친구들은 고향에서 의기투합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당연스레 아지트가 되어버린 당구장으로 모인다. 다섯명의 소꿉친구들이 모여 신나게 당구를 치고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반주도 겯들인다. 아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간 친구들은 잊혀져 가던 어린시절의 별명을 불러가며 걸죽한 입담을 자랑한다. 참으로 정겹다. 늦은 저녁을 먹고는 우르르 몰려가는 곳이 바로 나의 보금자리 원룸이다. 그곳에서 다시 바둑을 둔다. 고만고만한 실력에 서로 훈수 두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으름장을 놓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입이 근질근질하여 훈수를 안하고는 못배긴다.
그렇게 밤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왁자지껄 떠들면서 놀다보니 이제는 재미가 붙어 다음 약속까지 챙기고서야 헤어진다. 오늘은 주말도 아닌데 호출이 왔다. 퇴근하는 즉시 당구장으로 오란다. 퇴근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유다. 꽃피는 봄이 오면 주말에 모여서 이곳 저곳 고향 근처의 섬탐방을 계획하고 있다. 여름에는 텐트하나 싣고 무인도에라도 가서 낙시줄을 드리우다가 운수 사납게 걸려나온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소주 한 잔으로 우정을 다져볼 생각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수평선 아래로 꼴까닥 넘어가며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가라앉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기울어져 가는 소꿉친구들의 삶을 관조해 보는 시간도 가져볼 요량이다.
어둠이 장막을 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룻밤 야영을 하면서 조개도 줍고 낙지도 잡아 영양보충도 하면서 뒤늦은 우정을 활짝 피워볼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 소꿉친구들, 이래저래 소꿉친구들과의 우정이 깊어가는 삶을 구상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한 남학생이 쏜살같이 내달려왔다. 아무래도 부딪힐 거 같은 불안함으로 살짝 비켜서는데 어느새 필자의 오른쪽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필자는 당황해하면서 멈춰 섰고, 뒤를 돌아보자 남학생은 뒷모습을 보이며 벌써 저만큼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발에 뭔가 밟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려다보니 오른발 옆에 편지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누가 본 건 아니겠지? 혹시 아버지가?’ 하면서 주변을 돌아봤지만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이젠 남학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던 필자는 순간 화장실에 들어가 편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냅다 집으로 뛰어갔다. 살금살금 화장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보려는데 종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느껴지던지 방에 있는 엄마와 동생들이 들을 것만 같았다. 결국 화장실에서도 편지를 열어보지 못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 없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서관 가는 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큰 나무 밑에 편지를 던지고 간 남학생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필자는 쏜살같이 남학생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남학생 등 위로 열어보려다 만 편지를 휙 집어던지고는 돌아서서 도망치듯 달아났다. “저기요!” 하며 다급하게 필자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차서 씩씩거리며 겨우 멈춰 선 곳은 집 근처 숲 속, 필자가 자주 찾아가던 비밀 아지트였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혼자 엉엉 울다가 눈물을 닦고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필자를 안방으로 불렀다. 어떤 남학생이 불쑥 찾아와 엄마한테 필자를 동생 삼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면서 아는 사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엄마는 “이 편지도 주더라?” 하며 필자에게 돌려주었다.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읽어보니 “여동생이 되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평소에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 잠시 혹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엄마가 낳은 오빠가 아니라서 바로 단념했다. 필자는 평생 단 한 번도 ‘오빠’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 그때 생각을 바꿨다면 필자에게도 오빠가 한 명 생겼을지도 모른다. 오호 통재라!! 어쩌면 예쁘고 아름다운 첫사랑으로 엮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왜 오빠들이 못살게 군다는 친구들 말만 떠올랐는지…. 그렇게 용기 있던 남학생의 시도는 불발탄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남학생은 동네방네 소문이 날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원하는 대학에는 못 들어갔다고 한다. 대학도 낙방하고, 거기에 내 반응도 그랬으니 상심이 컸으리라. 혹시라도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직도 여동생이 필요하냐는 농담 같은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지난해 연말 편집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열어보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간의 끝이 없는 탐욕의 수렁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승의 혼탁함 속에서도, 평생 맑게 살다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난 대학 과동기인 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어느 지방대학 교수이면서 북한학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국제정치학 교수였는데, 그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오퍼를 받았지만 끝까지 강단과 연구실을 지켜온 천생 학자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어머니께서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로 몸이 약했는데 평생 담배를 염소같이 많이 피더니 결국 60대 중반에 폐암을 얻었고, 힘들게 치료를 해 몇 년 지나 완치가 되었나 했더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몇 달 있다가 한 열흘 전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와 몇 명 안 되는 과동기들은 천안의 공원묘지에 가서 그 친구를 전별했고 공원 입구에서 산 자들은 맛대가리 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씩 훌훌 먹고 그를 남겨둔 채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카톡을 통해 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우들에게
먼저 갑니다.
아직 책을 더 써야 하고 그 밖에도 못다 한 일들이 남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지만
게으른 천성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자족해야 하겠습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우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그 마음씨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보다 조용하고 겸허해지고 싶습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도연명)에서 도연명은 국화꽃 피고 술 익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갔다지요.
저는 아지랑이 피는 봄날,
장다리꽃 위로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드는
어릴 때 뛰어놀던 서울 근교의 밭길을 걷습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보입니다.
그 너머로 모든 미련이나 원망, 죄의식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을 지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곳으로 표표히 떠납니다.
인생이 한 조각 뜬구름이라 했거니와, 제게는 또한
한 가닥 미풍과 같습니다.
- ○○○ 드림
날짜는 없었습니다. 사후 발송 같습니다. 아마 떠나기 며칠 전 혼수상태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든지 또는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가족이 적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간 후에 발송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발송 경위를 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울컥 먹먹해지며, 그 친구가 떠나면서 봤을 것 같은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 배역)이 로마의 사악한 왕에게 비겁한 공격을 받고 죽어가면서 그가 보는 장면입니다. 어떤 좁은 문을 지나 고향의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족들을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이지요. 아마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늘로 떠나는 사람은 고향, 특히 어릴 적 놀던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했습니다.
자네 말마따나 게으르고 느려터진 친구가 갈 때는 왜 그렇게 성미 급하게 떠났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나도 암수술 후 6개월 정기검진 때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자네가 마침 이런 문자를 보낸 것 기억하나?
“조 사장! 수술 후 회복 잘되고 있으리라 믿소.
나는 지난달에 신우암이 또 생겨 좌측 신장 절제를 했는데
3년 전 수술한 폐암과는 다른 종류인데 모두 담배가 유력한 원인이라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번쯤 평생 담배 핀 것을 후회해볼까 생각하네.
우리 중고차 잘 유지 보수하며 삽시다.”
이런 내용을 보냈어. 내게 말이야….
그 후 9월까지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9월 이후 그렇게 급격히 악화될 줄 몰랐네.
그 성미에 아픈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나는 자네 병문안도 못 가지 않았나? 어차피 우리들도 하나둘 자네 뒤를 따라갈 것이니 자리 잘 잡아놓게.
그때 가서 너무 고참 행세 하지 말고.
그는 천재였습니다. 제가 1969년에 서울대 문리대(지금은 사회대, 인문대, 이과대를 합친 단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이 친구가 하필이면 같은 과에서 전체 단과대 수석 합격을 해서 나는 결국 수석도 못했고 등록금 면제 대상도 안 되게 만든 악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세대였던 우리는 극렬한 학생운동 대열에 들어가거나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민간기업에 취직할 기회도 적었지만 말썽꾸러기 데모꾼 정치학도를 받아줄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3의 길, 즉 드물게 학문을 하는 먼 길이 있었는데 그 천재는 그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없어서 박사학위도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늘 유쾌했고 잡학박사였고 잡담(농아리)의 대가로 이상파와 현실파가 다 좋아하는 뼈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늘 우리의 아지트였지요. 밥도 제일 많이 얻어먹었는데 어머니는 늦둥이 아들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그는 어떤 허세나 재주도 부리지 않고 올곧게 학자로만 일생을 살았고, 도대체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했고 담배만 열심히 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가 속한 학회의 회장으로서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는데 한전에서 조금만 협찬을 해달랬는데, 명분이 약하다고 못 해준 것이 지금 저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비슷하겠지만, 저는 매우 우울합니다. 어차피 티끌 같고 미풍 같은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절제 없는 욕망의 화차를 맹목적으로 몰다 온 나라의 전복을 걱정할 정도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야 할 신뢰가 더욱 아쉬운 이때에,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오후에, 주변머리 없이 제 가치를 지키다 맑고 아름답게 간
친구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직도 담배 피시는 분들, 이 글 읽고 한 번쯤 금연 시도해보시지요.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 혜화동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 3분가량을 걸었다. 한무숙 문학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심히 걷고 뛰던 대학로 길 옆. 이 익숙한 거리를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문학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니.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문학관 입구가 보였다. 긴 숨을 내쉬고, 무거운 나무 대문을 열고. 그녀와 첫인사를 나눴다.
한무숙(1918~1993)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소설가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학교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중이염, 폐결핵 등을 앓아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서른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서른까지만이라도 살아달라는 당부였다. 뇌막염으로 왼쪽 청력을 잃었지만 삶에 대한 의지와 탐구는 끊임없었다. 그림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일 베를린 만국 아동 전시회에서 입상했다. 언어 능력도 뛰어났다. 독학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혀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가를 꿈꿨지만 1940년 결혼 이후 그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아 펜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글쓰기로 전업했다. 1941년 잡지 장편소설 현상 공모에서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대표 소설로는 , 등이 있다. 은 폴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에스토니아어, 체코어, 중국어로 번역됐다. 대표적인 기념사업으로 1995년부터 한무숙문학상을 재정해 1년 중 활약이 돋보인 중견 소설가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한무숙 소설 독후감 쓰기 대회’도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작가의 흔적, 문학관에 담다
한무숙 문학관은 작가가 40년 동안 살았던 종로구 명륜 1가의 한옥집에 세워졌다. 대청마루에 꾸민 1전시실과 2전시실인 응접실, 집필실, 한무숙 작가의 사진과 다양한 소품 등을 전시해놓은 3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앞에 보이는 널찍한 대청마루가 1전시실이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설 에서부터 단행본, 평소 썼던 메모지, 여권, 여행을 하면서 가지고 다녔던 주사기 등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2전시실은 응접실이다. 한무숙 작가가 살았을 때보다 집안 내부 규모를 넓혔다. 2006년 공사를 진행했는데 응접실 중앙에 있는 기둥을 기점으로 왼쪽이 원래는 뒷마당이었다고 한다. 펄벅 여사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이곳에는 작가의 소품과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직접 선물한 족자 등이 전시돼 있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
한무숙 문학관의 백미는 집필실이다. 작가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살아생전에는 책이 더 많았는데 수천 권에 이르는 책을 숙명여대에 기증했다고 한다. 전시를 위해 책상의 방향을 관람객 쪽으로 돌려놓은 것 말고는 옛 모습 그대로다. 책상 위에는 작가가 쓰던 만년필과 잉크, 손녀가 그린 그림 등이 놓여 있어 따뜻함을 더해준다. 평소 사용했던 오래된 양산과 우산도 방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3전시실에 들어가면 작가가 시집갈 때 만들었던 수공예품을 비롯해 초기작 영인본을 감상할 수 있다. 드라마로 제작됐던 소설 의 비디오 등도 전시돼 있다.
한무숙 문학관은 사립박물관이지만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박물관보다 작다. 관람료는 받지 않지만 박물관 측은 방문 전에 꼭! 예약을 해달라고 당부한다. 예약을 하면 상주하는 문학사가 관람객들과 전시실을 함께 다니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한무숙 작가의 아들인 김호기 관장은 어머니의 소설을 이해하는 관람객을 소중히 모시고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매일 관람객이 꾸준히 찾고 있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평일 9:30~5:00 (전화 예약 후 관람 가능), 주말 및 공휴일 휴관 (토요일 오전 관람 가능) 입장료 무료 문의 및 예약 02-762-3093 위치 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33-100(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혜화초등학교 방향 약 200m) 홈페이지 www.hahnmoosook.com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식들을 바라보시며, 집안의 가훈처럼 또 세 번만 참으라고 하신다.
어머니의 49제 의식이 모두 끝났다. 아버님은 몇 날 며칠 생각한 끝에 그 자리, 그곳으로 어머님을 모신다고 했다. 어느 날 힘없이 자식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 앞에 있는 경기대 뒷산, 형제봉으로 가자." 그곳은 어머님과 아버님이 운동 삼아 매일 함께 오르시고 도시락을 까먹고 차를 나누었던 자리라고 하셨다.
그곳에서 두 분은 늘 자식들 얘기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시며 바람을 쐬고 쉬어가셨다. 아버님은 아주 담담하게 그렇게 하자고 하셨다. 자식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조용히 따르기로 했지만 너무 어이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알아주던 부잣집, 몇천 평의 넓고 넓은 대궐 같은 농장 터를 놔두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아버님은 채비를 차리시고 어머님을 모시고 집을 나섰다. 큰형님 작은형님들 여자들은 모두가 뚱뚱한 체구라 걷기가 힘들다며 못 간다고 했다. 아버님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막내며느리인 필자는 돌아가는 상황들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칠순이 넘으신 아버님, 남자 형제들은 함께 경기대 뒷산 형제봉으로 길을 나섰다. 피를 토하듯 대들던 셋째 형 가족은 49제에도 오지 않았다. 맨 앞에서 길을 인도하시는 아버님은 너무나도 정정하게 잘 걸으셨다. 어느새 낙엽이 떨어져 보이지 않는 길을 지팡이로 툭툭 쳐가시며 걸으셨다. 어머님과 함께 다니셨던 길이라 훤하게 꿰뚫고 계셨던 것이다.
자연의 푸름이 무거운 발걸음에 생기를 넣어주었지만 등산이 아닌 길이라서 가족들은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모두들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구불구불 비탈진 길을 따라 몇 능선을 돌고 돌았다. 결코 만만치 않은 산행길이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어떻게 이 길을 다니셨을까.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커다란 바위 밑 그늘지고 평평한 곳에 겨우 도착했다. 아버님은 바로 이곳이라며 손짓을 하셨다. 어머니를 모신 큰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막내며느리인 필자가 앞으로 나가서 어머니를 조심스레 받아 모셨다.
어머님이 앉아 계셨던 자리에는 낙엽들이 수북했다. 두 손으로 낙엽을 쓸어내고, 어머님의 육신이었던 유골 가루를 두 손으로 정중하게 모셔 군데군데 편안하게 뿌려드렸다. 하얀 가루로 변한 어머니가 춥고 외로워 보였다. 다시 낙엽과 흙을 모아 두툼하게 덮어드렸다. 그러고는 차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머님을 혼자 두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아버님과 남자 형제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몇 번을 뒤돌아 어머님이 계신 ‘어머님의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산다는 것이 그저 허무하기만 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늘 검소하셨던 어머니, 그저 자식들 생각해서 퍼주시기만 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떠나가셨다. 어머니가 황망하게 가시고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결국 며칠을 앓아 누웠다. 어머님을 그렇게 보내드리고 필자는 또 다른 많은 교훈을 얻었다.
가끔씩 산행을 하다 고개 들어 두 팔 벌려 하늘을 바라본다. 어머님이 그 자리에서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신다. 어쩌다 어려운 일이 찾아오면 어머님을 떠올리며 삶의 모든 것들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어느 날 가끔씩 어머님이 꿈에라도 나타나면 그날은 대박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들도 술술 풀려나간다.
'어머님이 계시는 그 자리'는 어쩌면 내 삶의 영원한 보금자리,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누구나 세상을 벗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장소를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 사전적인 정의로 아지트는 좌익운동과정에서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이동하며 소재를 모르게 하고 비밀지령을 발하는 지하운동의 집합소이다. 좀 나쁜 의미이다. 밀실이 더 적당한 용어로 보인다.
상상의 나래를 펴던 곳
나만의 밀실은 다락방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시골 외가에서 살았고, 방학 때만 되면 내려가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돌아 온곤 했다. 동네 친구들과 들과 산을 뛰어 다니며 매미, 잠자리, 풍뎅이, 메뚜기 등의 곤충을 잡으며 재미있게 놀았다. 싫증을 잘 느끼는 성격 탓일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곳을 찾다 발견한 곳이 다락방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곡식이나 과일과 잡동사니를 보관하기 위해 농촌에 집집마다 다락방이 있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을 때 몰래 혼자 다락방에 들어가 곳감이나 사과 같은 과일을 먹었다. 숨바꼭질 할 때는 술래를 피해 숨기도 했다. 다락방에 들어가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친구들과 몇 명이 들어가기도 했으나 주로 혼자 들어갔다.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기도 하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 잠이 들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소동이 난 적도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활력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몰래 책을 보던 곳
서울 집에도 조그만 다락방이 있었다. 거기서 문학전집이나 책을 보았다.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려 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외로움을 달래려고 책에 빠졌던 것 같다. 컴컴한 곳에서 몰래 책을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수준에 뜻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세계 문학전집과 철학책을 읽었다. 나중에 고둥학교에서 문학을 배울 때 그때 읽은 문학작품이 도움이 되었다. 어두운 곳에서 오랫동안 책을 보다 눈이 나빠졌지만 독서습관이 형성되어 학창시절에는 공부로 인해 별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과외보다 책 읽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고수하고 있다.
마음의 다락방
집 구조가 바뀌어 다락방이 없어졌다. 아쉽다. 그래도 다락방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니 다행이다. 대학교 기독학생 동아리 명칭이 다락방이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세상을 피해서 기독교인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의미가 있었을까. 다락방은 없어졌지만 머리가 복잡할 때나 마음이 울분이나 격정으로 안정이 안 될 때는 다락방이 필요해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지인이 없는 도서관이나 골방이 그것이다. 그곳에 가서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나면 지친 심신의 활력을 회복한다. 더 발전하여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 집중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면 다락방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사무실도 전철안도 거리도 다락방이 된다. 일명 마음의 다락방이다. 다락방은 그리워도 더 이상 가기가 어렵다. 추억의 다락방이다. 집을 새로 지을 때 다락방을 만들어 그곳에서 추억을 또 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올 여름은 내 생애 최고의 살인 더위였다. 실제 데이터는 아닐지 몰라도 기억과 느낌으론 그랬다. 그 온도의 높이 보다 그 지독한 더위가 낮 뿐 아니라 열대야로 보름 이상 이어짐이 몹시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일 뉴스에서 전기요금 폭탄이 중요 이슈까지 다뤄지니 에어컨도 마음 놓고 켜기가 두려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으로서는 가히 지옥을 맛 본 여름이었다.
이런 올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곳. 요금폭탄 걱정 없이 시원함을 만끽하며 보낼 수 있었던 곳. 바로 나만의 아지트 우리 동네 도서관이다.
자전거 타고 가는 길도 예술
서둘러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냉커피를 타서 보온병에 담고 간편한 과일을 약간 준비해 집을 나선다. 우리 집에서 도서관 까지는 자전거로 10 여분 거리. 아파트 단지를 벋어나자마자 시에서 조성한 ‘시민의 강’ 이라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게 된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강이라기보다는 시냇물에 가까운 길이지만 제법 자연미도 있고 예쁘다. 물길 따라 나무, 풀, 꽃들이 계절을 느끼게 해주어 평소 저녁 산책을 다니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 끝에 나만의 아지트 도서관이 있다. 가는 길 중간 중간에 간이 도서관과 벤치도 있다. 날씨만 좋다면 도서관 까지 가지 않고 자전거를 세우고 그 벤치에 앉아서 책을 볼 때도 있다. 봄. 가을에는 그 벤치가 나의 아지트로 도서관을 대신하곤 한다. 필자는 이 길을 자전거로 달려 도서관에 갈 때마다 부천시민으로 지방세를 꼬박꼬박 내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고 뿌듯하다. 그 길을 달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면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창가 자리가 있다. 통유리로 되어 있고 작은 파스텔 칼라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창을 통해 공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무더위도 맹추위도 돈 워리, 주말에도 늦저녁에도 오케이, 비가 오면 땡큐
올 여름처럼 살인적인 더위에 가져간 냉커피가 생각이 안날 정도로 에어컨이 말 그대로 빵빵하게 나오고, 와이파이도 팡팡 터지고, 만화책부터 전문서적까지 원하는 책 마음껏 볼 수 있는 곳. 과연 이곳 보다 더 좋은 아지트가 또 있을까? 필자는 이번 여름 거의 매일 도서관에 출근 하다 시피 했다. 그리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책을 보며 지냈다.
그렇다고 이곳이 어디 더위만 피할 뿐이겠는가? 한 겨울 추위에는 냉커피를 따뜻한 커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이 고마운 나의 아지트가 평일 금요일 만 빼고 주말에도 문이 열려 있다. 평일엔 저녁 10시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비가 오면 오히려 더 이곳을 찾는다. 통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준비해간 커피를 마시다 보면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북카페가 된다. 북카페에 음악을 빠질쏘냐? 음악은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들으면 간단히 해결된다. 와이파이가 되니 데이터 사용료 걱정 없이 음원사이트에서 분위기에 맞는 나만의 음악을 찾아서 들으면 뭐 하나 빠짐없는 북카페 완성이다. 실내가 지루할 때 즈음 잠깐 밖으로 나가보자. 문 열고 나가 몇 발자국만 가면 자그마한 인공폭포와 근사한 정자도 있다.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춥지만 않다면 간단히 준비해간 과일이나 간식을 먹으면서 소풍 기분을 내면 잠시 쉴 수도 있다. 안팎 모두 완벽한 나만의 아지트 이다.
IT시대 아지트는 하드웨어 성격보다 오히려 소프트웨어 적인 측면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아지트란 원래 비합법적인 운동의 근거지로 사용되는 집합장소를 뜻하나 여기서는 영어로 숨겨진 나만의 장소 ( Hiding place, safe house)의 의미로 해석해주면 좋겠다. 내가 편안하게 일을 하면서 글도 쓰고 책이나 신문을 읽을 수도 있는 아주 편안한 곳이다.
기업체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시니어로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나머지 삶을 보내는 아주 좋은 아지트가 나에게 있다.
그곳에서는 내가 평소 강조하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데 아주 좋은 장소로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다.
내가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으며 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어느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는 그곳에서 시간을 즐기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나의 아지트는 더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CM국제계약연구소 블로그가 인기를 점차 누리면서 나는 이제 블로그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가끔 블로그를 광고목적으로 임대하던지 아니면 사겠다는 제의도 받지만 나의 독자들이 편안하게 글을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일체 사양하고 있다. 나의 아지트를 도덕적으로 순수하게 운용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송파의 사무실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 성격의 아지트이고 나의 블로그는 수많은 소프트웨어 중에 하나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정동의 송파 사무실은 CM 국제계약연구소라는 공식적인 이름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나는 해외로 사업을 진출하고자 하는 모든 기업인들의 귀와 입이 되는 컨설팅을 하고 있다. 해외사업경험이 부족하거나 영어로 소통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제반 업무에 대한 컨설팅을 회사 실정에 맞게 나의 40여 년간의 직장생활 중에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근간으로 아주 저렴한 경비로 해주는 것이다.
아주 어려운 회사나 기업인을 위해서는 무료봉사도 한다.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서로 하는 계약업무나 합리적인 협상 등의 업무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국제적인 업무에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컨설턴트의 도움이 성공적인 업무수행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직 일반화가 되어 있지 않은 이 분야는 국가적으로 우리나라를 중진국으로 진입시켜 경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국가에서도 최근 이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대학원에서 국제계약학과를 신설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되었다.
좀 더 일찍 이 분야를 법무 분야처럼 일반화시켰다면 우리나라 해양플랜트 사업의 구조조정 문제는 사전 예방을 하였거나 적어도 반감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진해운 사태와 같은 문제도 생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항상 “계약이 반이다.”라는 말을 고객들에게 자주 사용한다. 그 만큼 제반 사업의 시작은 계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매사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추진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수 조원 대의 적자를 보고 있는 해양플랜트 및 건설 분야의 사건도 잘못된 계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런 꿈, 모든 해외사업자들이 경제의 흐름을 읽고 합리적인 계약을 해서 적자를 보지 않고 항상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의 저변을 확대하는 사업을 위해
나는 블로그 이름도 CM국제계약연구소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런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 나는 아직도 청춘이고 그 꿈을 향해 오늘도
Active Senior로서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