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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6월] 만약, 슬픔에 무게가 있다면
- 필자에게 외할머니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안방 한편 하얀 창호지를 바른 창살 한 부분에 한 뼘 정도의 작은 유리 조각을 덧대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앞에 앉아 계셨던 모습이다. 할머니의 쇠약한 손에는 항상 갈색의 묵주가 들려 있었고 시선은 우물이 있는 마당과 함께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을 향해 있었다. 한옥이라 대문이 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나면 종종 낮잠을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시곤 했다.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 마음에 ‘왜 우리 할머니는 나와 놀아주지도 않고 저렇게 앉아만 계신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언젠가는 엄마 앞에서 “외할머니 미워!” 했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두어 해 전이라 어렸을 때인데도 많이 섭섭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는 아들 1명과 딸 넷을 두셨는데 한 명뿐인 아들을 비롯해 첫째 딸과 셋째 딸의 남편인 사위 두 명까지 전쟁 통에 잃으셨다고 들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딸만 남은 집안에 막내딸이었다. 그 시대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일을 돕다가 결혼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나의 어머니는 막내라고 모 여전까지 보내셨다고 한다. 내게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나 외가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남아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두 이모님이 자주 오래 묵다 가시곤 했다. 그 가운데 큰이모는 유복자 아들과 함께 오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살아남은 네 딸 가운데 그중 형편이 좋았고 또 손 아래 제부인 내 아버지께서 마음 편하게 계실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혼자되신 이모들을 위해 방 하나를 따로 비워두기도 하셨다. 그 시대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가장 큰 슬픔으로 치는 세상이었을 텐데 내 외할머니의 심정은 분명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큰 슬픔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시고 당신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신 채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슬픔에 겨워 세상 모든 것이 즐겁지 않으셨을 수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에, 더군다나 딸이 줄줄이 넷이나 있는 집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잃으셨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이제 생각해 보니 죄송한 마음이 컸지만, 어린것이 뭘 알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핑계를 댄다. 필자에게 6월에 대한 기억은 외할머니의 슬픔과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은 이종사촌 형제들의 쓸쓸한 모습이다. 또 아들이 없는 처가를 위해 늘 마음 쓰시며 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6월을 맞아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만약, 슬픔에 무게가 있다면 내 외할머니의 슬픔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 2016-05-1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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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6월은 장애인댄스스포츠 경기대회 시작하는 달
- 나는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서울연맹 소속 선수 겸 코치이다. 자원봉사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비장애인이 파트너로 같이 경기대회에 나간다. 올해가 4년째이다. 장애인들은 겨울철 빙판이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훈련을 쉰다. 그리고 대략 4월부터 새로 선수등록을 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부터 대회에 출전한다. 겨울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신상의 변화도 생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안무를 새로 짜고 5월부터는 파트너와 만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4년 전 처음 만난 파트너는 60대 후반의 시각장애인 할머니였다. 선천적으로 전혀 앞을 못 보는 전맹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였다. 나이를 물어 보니 수줍은 듯 자기 나이를 밝히며 너무 늙지 않았느냐며 미안해했다. 나이도 많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자이브나 차차차 같은 격렬한 라틴댄스는 무리여서 다른 장애인들이 춤출 때 구경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많지 않은 라틴댄스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농구장에서 하는 경기대회에서 플로어 전체를 돌면서 추는 모던댄스는 무리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 손만 잡고 추는 라틴댄스보다 한손을 서로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을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남성은 여성의 등을 잡아주는 모던댄스가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왈츠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왈츠에서 그네의 흔들리는 스윙을 설명하기 위해 그네를 타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탱고의 동선을 가르치기 위해 게처럼 옆으로 가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역시 게를 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장애인처럼 점자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원래 학교를 전혀 다녀 보지 못한 무학이었기 때문에 점자도 배울 생각도 안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를 잡아 기본 동작을 가르치고 스텝을 외우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으나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내가 리드해 나가기 쉬웠다. 스텝을 외우지 못 했어도 내가 힘으로 밀고 나가면 내게 몸을 맡기기 때문에 춤추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성격도 좋았다. 얼마 안 되는 장애연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었으나 아침부터 복지회관에 나와 수영, 사물놀이 등 무료 강좌를 열성적으로 배웠다. 간식으로 주는 빵이나 떡, 과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받은 먹거리를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내게 줬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해 첫 대회는 6월에 열린 춘천 전국대회였다. 해마다 6월에는 장애인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 18개 시도에서 모인 선수들끼리 대회를 벌이는 것이다. 필자는 그와 왈츠로 출전했다. 그런데 당당히 3등을 한 것이다. 메달과 상장을 거머쥔 그는 너무나 감격해 했다. 그렇게 시작해 그해 왈츠와 탱고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가을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필자와 한 해를 보내고 그도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고령으로 은퇴했다. 다음해에 만난 파트너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시작장애인이었다. 겉보기에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약시였다. 댄스에 소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몸매도 예뻐서 같이 춤출 만했다. 장애인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5종목으로 출전할 정도로 출중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창동에서 열린 첫 대회에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장애인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반인대회에도 출전해 역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대회까지 나간 것도 처음이지만, 좋은 성적까지 거둔 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전 장애인대회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으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한다. 그때는 스텝을 전혀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에 일반인대회에 나가게 되자 안대를 벗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방향 감각에 혼란이 왔는지 댄스를 시작하는 코너를 멀쩡하게 잘했던 오전과 달리 반대편에서 해야 한다며 우기기도 했다. 관중들을 의식하면서 스텝을 간혹 틀리기도 했다. 이 파트너와는 그해 장애인대회는 물론 일반인 대회도 나란히 출전하면서 자랑스러운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그해 여름,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전에 대중 무용부문으로 참가하여 댄스스포츠로 수상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안마사로서 주야간으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건강을 상한 것이다. 올해도 6월부터 장애인 댄스대회가 시작된다. 지난겨울 동안 역시 서울연맹 소속 선수들의 신상에 변화가 많았다. 주로 청소년부 선수로 활동하던 남자 비장애인 선수들이 군 입대한 사람이 많아 새로 파트너를 짜야 한다. 내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단일 파트너가 아닌 종목별로 따로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월을 위해 지금부터 또 땀을 흘려야 한다.
- 2016-05-1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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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6월] 내 생일은 6.25
- 결혼하기 전에 누가 생일을 물어보면 양력 생일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고 둘러서 음력 생일을 말하곤 했다. 생일잔치도 제대로 한 기억도 없다. 조용히 생일이 아닌 것처럼 지냈다. 6월 25일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날이 생일이었으면 떳떳하게 보낼텐데’ 하고 바라기도 했다. 태어난 연도가 1950년은 아닌 몇 년 지난 해이지만 날짜가 같아서 민족의 슬픈 기념일에 생일을 기념하는 것이 왠지 어린 마음에도 어색했다. 나이가 떠깨를 입어 어느덧 환갑이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경험해 애증의 감정을 극복하고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어떤 말을 들어도 수용하는 이순(耳順)이다. 베이비 붐 세대는 힘든 상황에서 열심히 일해 최단 기간에 국가 발전을 이룩했다. 필자도 그 일원이었다. 그리고 영광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현역에서 물러나 세상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주역으로 더 오랫동안 활동하고 싶은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조병화 시인이 시 '의자'가 말했 듯 “때가 되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이치다. 다 내려놓고 후세대들이 잘살아가도록 지혜와 경험으로 지원하는 역할도 가치 있다. 편안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은 행복 그자체다. ‘노년 예찬’이라고나 할까. 평균수명 100세 시대에 사실 60살이 노년이라고 부르기도 이상하다. 올해 6월은 좋은 일들이 겹쳤다. 6월 초에 친구 부부 3쌍이 환갑 기념으로 9박 10일 크루즈 여행을 가기로 예정돼 있다. 지난해 결혼한 작은 딸이 6월 중순에 손주를 낳을 예정이어서 할 수 없이 할아버지가 된다. 나이 먹은 것 같아 약간 섭섭하기도 하지만, 예쁜 손주를 보면 나이도 잊을 듯싶다. 또 생일을 친지들과 함께 좀 성대하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 보상하는 차원이다. 개인적으로 전쟁의 아픈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가 전쟁 중에 실종됐고 큰아버지 두 분은 전사했으며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부상으로 의가사 제대했다. 또 할머니는 가족의 불행에서 오는 마음의 외로움으로 전쟁 후 몇 년 못 살고 돌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가 안타깝다. 남과 북이 이념 문제로 극한 대립에 섰던 아픈 상처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4월은 잔인한 달,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데 6월은 딱 정해진 명칭이 없는 것 같다. 올해를 기점으로 6월을 좋은 달로 여기고 싶다. 6월에 현충일과 한국전쟁 기념일과 같이 슬픈 기념일도 있지만 씨 뿌리기 좋은 망종, 단오, 낮이 제일 긴 하지가 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60여년이 지났다. 그 기간 폐허를 딛고 번영을 달성했다. 얻은 것이 있는 반면 잃은 것도 많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적응한다고 여유 없이 살아왔고 지킬 만한 가치가 없을 정도로 건조하게 살았다. 이제는 외면적 성장에서 내면적 성숙을 지향하는 사회가 될 시점에 왔다고 여겨진다. 이제부터 6월은 행복한 달이라고 여기고 기쁜 마음으로 멋지게 사는 우리 모습을 기대해 본다.
- 2016-05-1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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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和만사성의 조건 Part 2] 어머니 손맛 물려받은 복(福)자매 -요리연구가 한복려·복선
-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아한 한옥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옹기종기 장독들이 따스한 햇볕을 머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궁중음식연구원’이다. 1971년 궁중음식의 대가이자 인간문화재인 황혜성(黃慧性·1920~2006) 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현재는 맏딸인 한복려(韓福麗·69) 궁중음식연구원장과 둘째 딸인 한복선(韓福善·67) 한복선식문화연구원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그들에게 궁중음식이란 어머니의 삶이자, 한국 식문화의 큰 줄기, 그리고 곧 자신들의 삶과도 같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복려 원장과 한복선 원장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다. 자매의 어머니이자 큰 스승인 황혜성 선생에게 전수 받았는데, 셋째 딸인 한복진(64) 전주대학교 전통음식문화과 교수도 같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현재 한복진 교수는 일본에서 연구 중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대개 ‘세 자매가 어머니를 닮아 같은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식문화라는 큰 줄기를 이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특성을 살린 곁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한복선)각자의 성품이나 재능을 살려 저마다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언니는 맏딸로서 엄마의 연구원을 맡아 기능 전수와 교육을 위한 책임을 다하고, 저는 해외 생활과 TV 프로그램 경험 등을 살려 실생활 궁중음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죠. 셋째는 대학 교수니까 전문적인 연구와 학생 지도를 하며 인재 발굴에 힘쓰고요. 어머니가 활동하실 적에는 ‘요리 연구가’라는 말도 잘 안 쓰이던 시절인데, 요즘은 요리 분야도 아주 다양해졌잖아요. 어머니가 일궈놓으신 것들을 바탕으로 더 넓고 깊게 우리 식문화를 알려야죠.”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재산 아닌 정신 가업을 이어가는 형제들 사이에는 다툼이나 경쟁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들 자매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처럼 정답고 사랑이 넘친다. “(한복려)우리는 물질적인 재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당신의 정신과 배움을 우리 자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어요.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요. 저도 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는 요리를 전공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능적인 부분을 전수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만큼은 이어주기 위해 집안일에 어느 정도는 참여시키고 있어요.” 그렇다고 황혜성 선생이 유형의 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기능적인 전수나 손재주에 그칠 수 있는 궁중요리라는 분야를 글과 책을 통해 역사적 산물로 탄생시킨 것은 가보인 동시에 우리 식문화의 보물과도 같다. “(한복려) 내 어머니의 것이라 해서 지키고 물려주는 것 그 이상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책만이 아니라, 물건들도 있고 해서 이런 것들을 모아 황혜성 자료관 등의 이름으로 내려고 해요. 어머니는 한국 궁중음식 역사의 큰 표적과도 같으신데 우리가 무언가를 정립해서 다독거려 놓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커요. 어머니 제자들도 많기야 하지만, 자식이자 제자인 제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니 얼마가 걸리더라도 해내려고 해요.” 자매가 뜻을 모아 하는 일에 한복선 원장의 딸인 정라나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교수도 합세했다. 강 교수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현재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복선)할머니가 손주 진로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셨죠. 딸이 미대를 다닐 때 담당 교수가 미술 쪽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뉴욕에 있는 요리 학교를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일본에서 조리 공부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죠. 그때 손주의 입학식에도 같이 가시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역시 피는 못 속여~ 가장 좋은 스승이었던 어머니에게 배운 덕일까? 자매가 일을 대하는 방법이나 모습에는 황혜성 선생의 면모가 배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식을 하는 어머니의 손길만 닮는 것은 아니었다. “(한복선)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모아 여행도 다니고 먹을 거며 뭐며 다 대접해주셨어요. 연로하셔서 몸도 힘들고 하실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요즘 제가 딱 그래요. 내가 자리를 만들고 베푸는 게 훨씬 즐겁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전에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했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돼요.” 황혜성 선생의 따스함을 닮은 이가 한복선 원장이라면, 어머니의 단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가 한복려 원장이다. 이는 맏이로서 느낀 책임과 부담감을 숙명으로 여긴 데서 나온 성품이기도 하다. “(한복려) 동생들이 나 같으면 그렇게 못 산다고 얘기해요. 대를 이어가는 자식으로서 사람들이 ‘어머니는 훌륭한데 딸들은 그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점에서 동생들보다 어깨가 더 무거운 것 같아요. 제가 잘 이끌고 우리가 노력해야만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 2016-05-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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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담낭 담석과 마주친 금융맨과 간담췌외과 교수의 라뽀
- 인체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기관이라 어딘가 이상이 생기면 ‘이상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의사들은 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나중에서야 그것이 이상을 나타내는 신호였구나 하며 후회한다고 한다. 이번에 만난 홍유식(洪裕植·46)씨 역시 그랬다. 그의 몸이 두 번이나 말을 걸어왔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생명이 위독한 위기를 맞이했지만,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김형철(金炯喆·56) 교수의 도움으로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홍유식씨가 몸에 통증을 처음 느낀 것은 2014년 9월이었다. 여느 때처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저녁쯤 되었을 때 낯선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알고 있던 배앓이하고는 고통의 수준도, 시간도 차이가 있었다. 잠을 청해봤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동네의 큰 병원을 찾았다. “미치겠더라고요. 너무 아파 집 근처의 대학병원에 갔는데, 응급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X선 촬영과 CT(컴퓨터 단층촬영)를 찍자는데, 공복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겨우겨우 지쳐 잠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씻은 듯이 나았어요. 별일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응급실의 응대도 맘에 들지 않아 집으로 와버렸죠.” 그렇게 해프닝처럼 지나가나 보다 생각했다. 꽤 이름난 자산운용사의 마케팅 총괄로 근무 중인 홍씨는 몸도 별 탈 없어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지낼 때 즐기던 골프도 이상 없이 쳤다. 다음 통증은 2015년 12월에 찾아왔다. “연말에 집에 있을 때였죠. 갑자기 장이 꼬인 듯한 통증이 찾아왔어요. 고통이 시작되자마자 생각난 것이 1년 전 그때였어요. 안일하게도 그때 떠오른 생각은 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였어요. ‘ 나쁜 요령이 생긴 거죠. 그래서 무조건 자야 한다고 생각했고, 억지로 잠들었다 일어나니 또 멀쩡하더라고요.” 하지만 나쁜 요령은 다시는 통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다. 올해 2월 1일 홍씨는 똑같은 부위에 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죠. 다음 날 출근했는데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전에 찾았던 대학병원을 다시 찾았어요. 다행히 전에 촬영했던 사진들이 그대로 있어 진단에 도움이 됐죠. 담낭에 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에 도착해 병명도 알았고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술 날짜가 문제였다.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협의한 날이 2월 5일이었는데, 수술은 11일 후인 16일에나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곧 다가올 설 연휴 때문이었다. “명절이 있었으니까 병원으로선 어쩔 수 없었겠죠.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몸은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고통을 안고 열흘이나 넘게 버틸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던 중 김형철 교수님을 만나게 됐죠.” 김형철 교수는 그때의 홍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담낭 담석이었죠. 이 담낭 담석이라는 건 담낭 안에 작은 결석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다가 갑자기 급성담낭염으로 발전하는 때도 있어요. 염증이 생기는 축농증의 일종입니다. 급성괴사성 담낭염은 바로 조치를 안 하면 패혈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입니다.” 담낭 담석의 무서움은 무엇보다 통증에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옛날 할머니들이 갑자기 아팠다, 괜찮았다 하는 것을 가슴앓이 한다고 표현하잖아요? 아마 그런 경우 대부분 담낭 담석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겁니다. 숫자로 따지면 10단계에서 9에서 10 정도의 심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이런 통증을 앓는 환자에게 며칠이나 기다렸다 수술받으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당시 홍씨는 복막염까지 의심되는 소견이었어요. 그래서 바로 수술을 진행했죠.” 홍씨는 김 교수의 신속한 조치로 제때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가 설날을 이틀 앞둔 2월 6일이었다. 홍씨가 김 교수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김 교수는 어려운 외과 수술로 꼽히는 복강경 담낭절제술을 5000건 가까이 성공시킨 명의로 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뿐만 아니라 50회 이상의 간이식수술과 무수혈 간이식수술로도 병원을 알렸다. 수술은 복강경 담낭 제거 수술로 진행됐는데, 평균적인 수술 시간보다 두 배 이상 소요됐다. 담낭에 고인 고름이 생각보다 심해 시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강경 수술은 몸에 작은 구멍을 뚫어 카메라와 조명, 수술도구가 달린 작은 관을 넣어 수술하는 방식. 개복수술과 달리 환자 몸의 절개부위를 최소화하기 때문에 환자의 회복속도가 굉장히 빠른 장점이 있지만, 시야가 좁고 수술 부위에서 도구의 움직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집도의의 능력에 따라 수술 성공률이 달라진다. 김 교수는 당시 수술부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환부가 고름으로 덮여 수술에 애를 먹었습니다. 담낭 제거 수술의 어려운 점 중 하나는 간에서 내려오는 총수담관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고름과 섬유화변성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어요. 예를 들자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밤에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담낭을 그냥 떼어내도 괜찮은 걸까? 담석만 떼어낼 수는 없는 것인지 질문하니 불가능하다고 김 교수는 답한다. “반복적인 염증으로 담낭은 이미 그 기능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담낭은 소화에 필요한 쓸개즙을 분비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 몸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오래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몸이 적응하게 됩니다.” 우리 몸에서 생기는 담석의 종류는 세 가지라고 김 교수는 이야기한다. 담석은 성분에 따라 일반적으로 콜레스테롤 담석(cholesterol gallstone)과 색소성 담석(pigment gallstone), 혼합형 담석으로 크게 나눈다. 이런 담석이 당낭은 물론이고 간 내외의 담도에 발생하는 것을 담석증이라 부르고, 담석이 담낭에 생길 때 이를 담낭결석이라고 부른다. 담석증은 급성 담낭염이나 폐쇄성 황달, 심한 담도염의 원인이 되고, 췌장염까지 유발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색소성 담석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콜레스테롤 담석이 압도적입니다. 콜레스테롤 담석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증가해 침전되면서 담석이 형성되는 것인데, 원인으로는 서구적인 식생활로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한정식처럼 육류와 채소를 골고루 먹을 수 있는 균형 잡힌 식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홍씨는 다행히 수술이 잘 마무리돼 며칠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수술 후 생활이요? 많이 바뀌었죠. 2013년 이후 운동을 끊었었는데, 다시 시작했어요. 콜레스테롤 담석이라고 해서 음식에 주의하고 있죠. 특히 곱창을 좋아했는데, 이젠 될 수 있으면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삼겹살처럼 기름기 많은 음식도 자제하고 있어요. 집에서는 평소 아내가 워낙 잘 챙겨줬기 때문에 큰 신경은 안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몸에서 이상 신호가 느껴진다면 다시는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큰 교훈을 얻었어요.” 홍씨는 김형철 교수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몇 번이나 표현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수술을 하느라 김 교수가 연휴를 반납하고 병원으로 출근해 그의 수술 후 몸 상태에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런 김 교수의 모습에 홍씨의 아버지가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감사의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설날 휴가를 반납하고 정성을 다하여 수술하고 설날에도 출근하여 환자를 보살피는 그의 따듯한 마음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자의 덕목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김 교수는 당연한 일 아니냐며 되레 반문한다. “외과의에게 수술환자 때문에 휴일이 반납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죠. 병원이 위치한 부천 인근은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 살기 힘들잖아요. 아파서 수술하려 해도 회사 눈치, 윗사람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 아픈 것도 눈치 보는 사람들에게 수술이라도 원할 때 해줘야죠. 그래서 여긴 주말 수술이 꽤 많습니다. 병원 설립자께서도 의사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위한 존재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설립자인 고(故) 서석조(徐錫助, 1921~1999) 박사는 “의료인은 삶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치료하는 가장 낮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취재가 진행된 날은 주말 오전이었는데, 병원 곳곳은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김 교수는 취재에 응한 이날 수술을 두 건이나 소화해야 했다. 이런 김형철 교수의 성향은 병원 내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여러 가지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4월 김 교수는 국제진료센터 센터장 자격으로 병원과 협력관계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시 마시모프 헬스센터를 방문했다. 김 교수는 한 여자아이와 마주치게 되는데, 큰 눈이 귀여웠지만, 병색이 완연했다. 큼밧(kymbat)이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랑거한스세포 조직구증식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병은 백혈구의 일종인 ‘랑거한스세포’가 급증해 몸의 장기들을 침범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병으로, 특히 유아일수록 더 위험하다. 김 교수는 사연을 듣자마자 치료를 약속했고, 큼밧은 긴급 비자를 받아 아버지 카이랏(Kairat)씨와 함께 한국에 와 치료를 받고 호전될 수 있었다. 또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포기한 몽골인 근로자의 간이식을 집도한 것도 병원 내에서는 잘 알려진 일이다. 김 교수는 “국제진료센터를 맡아 외국인 환자 유치를 하고 있는데 책임감이 큽니다. 과거엔 공업이 국내 산업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의료가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무조건 돈 많은 환자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돈 없는 외국인도 환자니까요. 돈도 중요하지만 치료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명했다.
- 2016-05-0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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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라이프] 행복한 노후 제2 조건은 ‘손주’
- 지난해 3월 하순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축제현장을 거니는 도중 아내가 불쑥 얘기했습니다. “나무들은 매년 봄이면 다시 꽃을 피우는데, 사람은 한번 늙으면 그만이라는 게 참 허무하네요. 우리도 이 산수유 꽃처럼 다시 새봄을 맞을 수 있다면 좋겠네…”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무는 매년 꽃을 피워서 되살아나지만, 우리에게는 손자들이 있잖소. 그 녀석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새봄 아닐까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지난 호(號)에서 은퇴한 남자의 행복한 노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오늘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손주들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키(key)를 쥐고 있는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서 손주들과의 관계만을 애기하는 건 제게 외손주가 없기 때문일 뿐이지, 외손주들과의 관계가 친손주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친외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외손자들의 육아에 가담한 것은 오직 ‘내리사랑’이라고밖에는 일컬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제어 불능의 끌림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는 정석희 님의 증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정석희 저 - ) 이처럼 내 핏줄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니까요. 그는 외손자를 키우며 쓴 책의 말미에서 “내 인생이 다 저물기 전에 이처럼 아이들의 시작과 내 삶의 끄트머리가 겹쳐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중략) 아이들의 존재란, 경험한 적 없으나 응당 그럴 것이라 상상되는 마약처럼 황홀하고 중독성이 강했다. 나의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손자 녀석들과 함께 보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6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두 손자를 키워 온, 아니 그 녀석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저의 생각도 정석희 님의 고백과 꼭같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전형적인 ‘손자 바보’입니다. 그걸 부인하기보다는 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닙니다. 어찌 보면 구제불능인 사람이지요. 저는 두 손자가 태어난 이후로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손자들과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취미를 살려서 두 손자가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제 나름의 설명과 소회를 담아 ‘바보 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야! 뭐 때문에 그런 일에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나? 그래 봐야 손자들이 크고 나면 할아버지가 잘 해준 것 기억도 못한다”라고 타박을 하더군요. “그거야 자네 생각일 뿐이고…”라며 웃고 말았습니다. 두어 달 후 저녁 자리에서 바로 그 친구가 “나는 밥 후딱 먹고 먼저 갈 거다. 오늘 손자가 집에 오는 날이거든…” “손자가 얼마 만에 오는데?” 하고 물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하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두어 달 전 그 친구의 타박이 저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세 손주들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어떨 때는 녀석들이 집에 가지 않으려 해서 일주일 이상 함께 자고, 먹고, 뒹굴기도 하는 제 입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손자를 보려고 달려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니까요.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50~60대가 한자리에 모이면 저마다 손주들 사진 꺼내놓고 자랑하기가 바쁘다고 합니다. 동창 모임 같은 데서는 손자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만원씩을 내놓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지요. 뿐만 아니라, 손주가 있는 친구들은 예외 없이 지갑 속이나,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으로 가득합니다. 실버 라이프에 있어서 손주들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사례들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 손주들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애끓는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손주들을 매일 보고 싶은 실버들에게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이거나, 아니면 며느리들이 손주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주들을 자주 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과의 관계, 그리고 손주들의 엄마, 즉 며느리와의 관계를 보다 친밀한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주들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돈으로 손주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그때뿐입니다. 정말 손주들과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십시오. 즉, 할아버지가 먼저 동심으로 돌아가서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손주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녀석들과 친구가 되어 놉니다. 놀이터로 가 같이 미끄럼도 타고, 같이 달리기도 하며, 모래판에서 씨름도 합니다. 키즈 클럽에 가면 함께 작은 공이 가득한 풀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좁은 미로 속을 같이 기어 다니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같이 노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며느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시댁, 혹은 시부모와 자신의 아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사이가 썩 편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당연히 손자와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결혼 전에 심하게 반대를 했다거나, 예단 등의 문제로 며느리에게 격하게 스트레스를 준 원죄가 있다면 ‘구원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손주를 맡겨도 좋겠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 스스로가 자신이 어른으로서 예우 받아야 한다는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며느리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며느리가 자란 환경을 은연중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노후의 행복 한 가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체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사랑으로 먼저 다가갈 때, 며느리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며느리에게 시댁에 올 때 느끼게 되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은 기본적으로 외식을 하되, 메뉴는 반드시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게 저녁시간이면 아들, 며느리와 함께 폭탄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도 하지요. 시아버지가 ‘말아주는’ 폭탄주 한두 잔이면, 웬만큼 두터운 장벽도 다 허물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면 며느리가 시댁에 와도 밥 짓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기본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외식을 하게 되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가 되는 것이지요.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이 돌아갈 때 신사임당 초상화 몇 장 찔러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손주들과 노는 시간에 간혹 역사상의 위인 전기와 같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된다면 더욱 좋습니다. 손주들이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할아버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결론적으로, 손주들은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얻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건 인생 최고의 훈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축복, 이런 훈장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다른 어떤 것으로 노년의 무료함과 공허함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5-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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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속으로] ‘북촌유정(北村遊情)’도심 속에서 어머니 품을 느끼다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옥’은 낡은 것이었다. 선조들이 살던 빛을 잃은 퇴물. 역사 속으로 잊히는가 싶던 한옥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삶 속 깊숙이 다가왔다. 특히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 한옥마을’은 외국 관광객 필수 코스가 된 지 오래다. 1960~70년대 개발 바람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북촌의 한옥은 깔끔하게 다듬어져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조용히 곁을 내주고 있다. 에어비앤비 ‘북촌유정’도 그중 하나다. 그곳에 가면 어머니의 정성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환영인사는 덤으로 따라온다. ‘북촌유정’에서의 하룻밤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은 마루,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방이 한 개씩 있다. 처음에는 조금 좁은 느낌이지만 적응하다 보면 아늑함에 빠진다. 앉아 있으면 세상이 정지된 듯 묘한 감정마저 든다. 외국인 투숙객이라면 가끔 ‘행운의 조식(?)’을 맛볼 수도 있다. 단, 어머니 박소자(朴昭子·76)씨가 아프지 않을 경우다. 갈비찜, 불고기, 조기 등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은 요리가 식탁 위에 올라간다. 조식에 얽힌 일화도 있다. 에어비앤비 공동설립자인 네이선 블레차르지크가 묵었을 때다. 박씨는 아침밥으로 갈비찜을 만들어 줬는데 네이선이 아침밥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봤다고. 그것도 아무 말도 없이. 영화 의 할머니가 순간 생각났다. 그 뒤 네이선은 ‘그녀와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고 방문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북촌유정’은 박소자씨의 또 다른 봉사 공간이다. ‘북촌유정’에 오는 손님을 온정다해 맞이한다. 깨끗한 이불을 내고, 좋은 음식 맛보이고 싶어 장을 보는 어머니를 딸 이수연씨는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손님을 대할 때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 같기 때문. 이씨는 여기 오는 모든 사람이 박소자씨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 2016-05-0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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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窓 사진 촬영 가이드③]한국전쟁의 상흔 찍는 사진작가 이병용
- 사진은 아마추어나 비전문가에게 일종의 ‘오락 부산물’ 같은 것이다.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즐거운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즐거움과 기억, 과시하고픈 욕망을 사진에 담는다. 하지만 사진작가에게 사진은 창작의 고통이고, 노력만큼의 보상이다. 경기도 일산의 작은 작업실에서 만난 사진작가 이병용(李秉用·57)에게 사진은 마땅히 해야 할 감사를 담은 각고의 산물이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1968년 춘천. 한 소년은 동네에서 낯선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든 군중을 발견하고, 무슨일인가 싶어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늘 보아왔던 파월장병 행렬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금 기다리자 훈장이 잔뜩 달린 군복 차림의 외국인이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소년에게 그 모습은 강렬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사람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자국 군인의 참전비 제막식에 참석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였다. “나중에 일본에서 사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사진가로 활동하다 사고로 이전 작업물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맘을 추스리며 참전용사의 사진을 찍겠노라고 맘 먹은 것은 아마 그날 각인된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2006년 9월 참전용사 후손들의 한국 방문 행사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막연히 상상했던 용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죠. 생활에 찌든 그들에게 어떻게든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한국전쟁 참전국 중 에티오피아를 제일 먼저 선택한 것도 어릴 적 기억 때문일 겁니다.” 이 각오를 시작으로 이병용 작가는 2007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과 의료지원을 한 5개국 모두를 촬영할 계획을 세운다. 참전용사나 미망인, 유가족을 모두 찍겠노라고 맘먹는다. 그리고 2007년 에티오피아를 두 차례 촬영하고, 곧이어 2008년 터키를 방문해 5만장 분량의 작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이 결과물을 2008년과 2009년 에티오피아와 터키에서 발표하게 된다. 이 작가의 에티오피아 방문은 이전부터 에티오피아와 교류가 잦았던 동양일보 조철호(趙哲鎬) 회장을 만나 후원 약속을 얻어내면서,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2007년 2월 24일부터 10일간 방문했죠. 그 이후 4월 18일부터 6월 8일까지 다시 한 번 방문했고요.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해발 2400m가 넘는 고산지대라 고산병에 고생도 했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낙후된 지역이라 사진작업을 하기에는 최악의 장소였어요. 그래도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늘 촬영 전에는 그분들께 큰절을 올리고 작업을 시작했죠.” 터키는 프로젝트 준비 과정에서 한국을 방문한 참전용사와의 만남 덕분에 두 번째 국가로 결정됐다. 터키에서의 작업도 비슷했다. 열악하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따뜻한 환영 덕분에 6개월 동안 50개 도시를 돌았다. “그곳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죠. 아이세 두주균 여사라고. 그의 남편은 결혼한 지 2주만에 덜컥 입대해 한국으로 떠나버렸죠. 그리고 6개월 만에 전사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이후 그는 평생을 혼자 살았죠. 자식에 대한 모성애와 같은 평범한 감정을 평생 못 느끼고 사신거예요.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공식 문서에서 남편의 사진을 찾아 전해드리고, 그분의 사진도 찍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에게 실컷 어리광을 부린 일이에요. 제가 자식이 된 것같이 말이죠.” 이후 작가는 부산 유엔공원묘지에서 남편의 묘비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 시계는 2008년에 멈춰버렸다. “두 차례 대량의 작업을 하고 나면 그 이후의 작업을 위한 예산을 마련할 방법이 생길 줄 알았어요. 일본에서 유학하며 느꼈던 사진가나 사진 작품에 대한 대중이나 기관의 반응이 한국에서는 완전히 달랐어요. 어렵게 보훈처 관계자를 만났을 때는 ‘왜 개인이 이런 일을 하냐’라는 핀잔만 들었죠.” 그래도 다행히 터키에서의 작업을 정리한 책 를 지난 1월 발간할 수 있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후원 덕분인데, 진흥원이 사진집에 예산 지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책의 부제는 ‘한국전쟁 참전 UN 21개국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 Vol.2’이지만, Vol.1 그러니까 첫 번째 책은 아직 이 세상에 없다. 역시 예산 탓이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할 계획입니다. 애초 계획보다 10년 늦어져 2027년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가 됐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감사는 정말 제대로 이뤄졌는지 반문하고 싶어요. 정부대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행사 말고요. 한국전쟁과 관한 일로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며 되레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하신 그 어르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부에선 용병이라 비아냥거리지만, 그들이 받은 목숨 값은 정말 푼돈이었어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그분들에 대한 감사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찍는 사진은 그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부산물일지도 모르겠어요.” 한국전쟁 중 한반도에서 전사나 사망한 유엔 참전용사는 17만8569명이고, 부상은 55만5022명, 실종 2만8611명, 포로는 1만4158명이다.
- 2016-04-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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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맛] 남산의 풍류를 비비다
- 봄이 물씬 오른 4월이면 봄바람도 쐬고 꽃구경도 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등산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발길로 인근 식당이 북적북적해진다. 여러 음식이 있겠지만, 간단하면서도 든든한 산채비빔밥을 빼놓을 수 없다. 벚꽃놀이를 즐기기 좋은 남산 둘레길의 비빔밥 맛집 ‘목멱산방’을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남산 둘레길 관광객을 위한 아늑한 밥집 목멱산(木覓山)은 남산의 옛 이름이다. 그 이름을 딴 ‘목멱산방’은 남산 케이블카 정류장 맞은편 돌계단을 오르면 찾을 수 있다. 서울시가 15억원을 들여 지은 한옥으로, 아름다운 남산자락이 어우러져 멋을 더한다. 시에서 위탁관리를 하고 있지만, 음식의 맛은 운영자 장경순씨의 아내 강현영씨의 부모(강광전·조효숙씨) 역할이 컸다. 고품질·저가격, 무(無)화학 조미료, 족보 있는 먹거리를 지향하는 목멱산방, 이곳의 주재료인 장맛을 강씨 노부부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 메뉴인 비빔밥에는 ‘비빔 매실 고추장’이 빠지지 않는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노부부가 재배한 매실로 만든 매실청(청과 과육을 갈아 넣음)에 고춧가루와 비법이 담긴 육수를 더해 맛을 낸다. 이외에도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메주를 쑤어 만든 간장·된장 역시 나물과 음식에 들어가는 핵심 조미료다. 부모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장 덕분에 목멱산방의 음식은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산 둘레길을 끼고 있어 산책을 나온 시민이나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잦다. 또, 서울의 명소인 N서울타워를 보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한국미가 물씬 나는 외관에 이끌려 방문하곤 한다. 특히 남산 둘레길에 벚꽃이 개화하는 4월이면 손님이 늘어나 줄을 서기도 한다. 목멱산방에서 맛볼 수 있는 산방 비빔밥(7000원), 불고기 비빔밥(9000원), 육회 비빔밥(1만1000원)은 골고루 인기 있다. 나물과 밥, 고추장이 따로 나와 입맛에 맞게 비벼 먹을 수 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봄 향기 가득한 취나물부터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깻잎나물, 겨울 눈 속에서 자라는 부지깽이나물, 유채나물 등이다. 지리산 언저리에서 수십 명의 할머니·할아버지가 직접 채취한 나물을 사용한다. 나물에는 순도 99.9%의 들기름을 넣어 깊은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순도 99.9% 참기름은 밥에 들어간다) 목멱산방에는 정이오(鄭以吾)의 ‘남산팔영(南山八詠)’이라는 시에서 따온 여덟 개의 방(운횡북궐(雲橫北闕), 수창남강(水漲南江), 암저유화(岩底幽花), 영상장송(嶺上長松), 삼춘답청(三春踏靑), 구일등고(九日登高), 척헌관등(陟巘觀燈), 연계탁영(沿溪濯纓))이 있다. 방마다 있는 창문을 통해 남산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주기적으로 오가는 케이블카도 흔한 풍경이 된다. 뒤뜰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은 남산을 병풍 삼아 한적하게 식사와 전통차를 즐기기에 좋다. 한쪽에는 작은 인공폭포도 있어 상쾌한 분위기를 더한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경치를 보러 가는 것도 묘미다. 편안하고 아늑한 이미지이지만, 메뉴 주문과 서빙, 정리까지 셀프 서비스(self service)다. 조금 수고스럽긴 하지만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가 그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 있겠다. 봄과 가을에 추천하고 싶은 자리는 야외 테이블이 있는 뒤뜰이다. 봄이면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들이 비빔밥에 달달함을 더하고, 가을에 쌓인 알록달록 낙엽은 한옥과 어우러져 고아한 정취를 풍긴다. 비빔밥과 곁들이는 메뉴로는 해산물 부추전(1만2000원), 지리산 참도토리묵(1만원), 우리 콩 두부김치(1만원) 등이 있다. 그 외에 훈제오리와 참나물 무침·한우 육회 무침·묵은지 보쌈(각 2만5000원)도 푸짐한 저녁 식사를 원할 때 많이 찾는 메뉴다. 식사 후 차를 주문하면 1500원을 할인해준다. (모든 차 메뉴는 아이스로 주문 가능, 500원 추가) 목멱산방에 들어서면 한의원에서 맡을 수 있는 쌉싸름한 한약 향이 솔솔 난다. 십전대보탕·대추차(4500원), 오가피차·당귀차(5500원) 등 몸에 좋은 한약재로 만든 차를 매장에서 직접 끓여내기 때문이다. 유자차·모과차(4500원)는 시원하게 에이드(ade)처럼 즐겨도 좋다. 겨울이면 각종 청을 만드는 손길로 분주해진다. 전남 고흥의 유자, 전북 장수에서 재배한 생강과 경북 청도의 모과 등을 설탕에 재워둔다. 과일청이 들어간 전통차에 카운터에서 판매하는 모둠한과(4500원, 삼색유과·모둠강정·찹쌀약과)를 곁들이면 잘 어울린다. 주소 서울시 중구 남산공원길 627 영업시간 11:00~21:00 문의 02-318-4790
- 2016-04-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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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참 걸을만 하구나 PART4]'마음 따라 길 따라… 즐거움은 덩달아' - 65세부터 10년간 지구 반 바퀴를 걸은 황안나씨
- 800km 국토종단, 4200km 국내 해안 일주, 24시간 밤새 100km를 걷는 울트라 걷기 등 젊은이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을 65세가 넘어서 이뤄낸 도보여행가 황안나(본명:황경화(黃慶花)·76)씨. 그녀는 국내뿐만 아니라 산티아고, 네팔, 홍콩, 몽골, 부탄, 동티베트, 베트남, 아이슬란드, 시칠리아 등 50개 국의 길을 밟았다. 지리산 종주도 벌써 여덟 번 했고, 오지여행도 숱하게 다녀왔다. 나이를 두고 우려하는 이들에게 그녀는 말한다. “비록 나이는 적지 않지만 뜨겁게 갈망하는 것이 있고 그것들을 내 두 발로 해낼 수 있으니 이만하면 젊지 않은가?”라고. 황씨는 춘천사범학교를 나와 20세부터 교직 생활을 하다가 정년을 7년 앞두고 제2 인생을 위해 과감하게 퇴직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건강이었다. 건강검진 결과 고지혈증에 악성 빈혈 등 의사가 식단까지 짜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던 그녀다. 그런 그녀에게 의사는 운동을 권했고, 그때부터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씨는 TV 브라운관에 펼쳐진 땅끝마을의 풍경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드넓은 양파밭과 청보리순, 붉은 황토가 햇살에 반짝이는 그곳을 ‘한번 걸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땅끝마을이라는 그 단어도 무척이나 아득하게 느껴졌죠. 그때 마침, 제가 다니던 산악회에서 광주 무등산을 오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산에서 내려와 터미널로 가서 땅끝마을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순전히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걷기를 시작했고, 그 일이 계기가 돼 국토종단과 해안 일주에 도전했죠. 내 모든 시작과 도전은 65세부터였어요.” 장기 도보여행에 필요한 다섯 가지 그녀가 혼자 장기 도보여행을 한다고 했을 때 제일 걱정한 것은 ‘체력’이다. 그리고 체력과 함께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은 체력은 있는데 시간이나 경비가 부족하죠. 나이 든 사람들은 시간과 경비는 있지만 체력이나 용기가 부족하고요. 한 달에서 길게는 몇 개월씩 다니는 장기 여행이기 때문에 가족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4개월 해안 일주를 하는 데 700만원 정도 들었는데, 보통 할머니가 그만한 돈을 쓰기란 쉽지 않잖아요. 작정하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퇴직하고 3년 동안 뒷산을 운동 삼아 다닌 덕에 체력도 단련돼 있었죠. 남편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하니까 그이는 단순히 ‘해도 된다’ 정도가 아니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그렇게 체력, 시간, 경비, 그리고 가족의 이해까지 모두 해결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더라고요. 용기를 갖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여러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 혼자 떠나느냐”이다. 그녀는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를 갖춘 동행자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모두 갖춘 사람이라도 서로의 체력 정도나 관심사가 달라 나만을 위한 자유 여행을 즐기기 어렵다고 말한다. “누군가와 함께 가면 나는 조금 더 걷고 싶은데 상대에 맞추느라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고, 사진을 찍고 싶은데도 마음대로 멈출 수 없어요. 남편이나 동생들이랑 가면 좋은 숙소에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걷기는 뒷전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즐겁고 편안하지만 단순히 관광에 그치고 말죠. 혼자 걸으면 힘들고 외롭고 막막하지만 그 절박함을 안고 걷는 길에서 느끼는 게 참 많아요.” 그녀는 외로움이 몰려올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에 남아 있던 문구를 떠올린다. ‘자유로우려면 외로워야 한다!’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나 홀로 도보 여행’ 목적지는 정하지만, 목표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꼭 정상을 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가다가 힘들면 되돌아오면 된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하고 싶은 걸 그냥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남들이 못할 거라고 말린다고 해서 ‘나는 꼭 성공할 테다’ 하는 마음으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가서 못하나 보자’라고 생각해요. 그냥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확인해보는 편이 낫잖아요. 망설이고 주저할 시간에 그냥 하는 게 남는 거죠.” 그녀는 길 위에서 잊지 못할 추억도 쌓고, 건강도 챙기고, 친구들도 많이 생겼지만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많다고 했다. “정말 잡초처럼 험한 인생을 견디며 살아왔어요. 아마 걷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노년을 맞았다면 마음이 아주 괴로웠을 것 같아요. 지난날의 아픔과 걱정 등을 모두 길 위에서 치유했기 때문에 지금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길을 혼자 걷다 보면 마음도 편해지고, 집착이나 욕심도 다 내려놓게 되죠. 자연히 자기 성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이어트를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걷는 내내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길 위에서 그녀의 주특기는 바로 ‘멍 때리기’라고. 근심 없이 머리가 텅 빈 상태로 걷다 보면 몸도 마음도 아주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끈기’다. “도전해서 꼭 이루리라는 욕심은 없지만, 끈기 있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도전한 것은 대부분 해낼 수 있었죠. 머리가 가자고 하면 몸은 자연히 따라가게 돼 있거든요. 도보여행을 하다보면 소나기를 맞을 때도 있어요. 비에 홀딱 젖고 나면 대개 의욕을 잃거나 힘들어하죠.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외치며 한 발짝 더 내딛죠.”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
- 2016-04-19 0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