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에 노후 자산관리의 한 방법으로 신탁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고령사회가 되어가면서 사전·사후의 자산관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우리나라와 사정이 좀 다르긴 하지만 해외 사례들을 보면서 신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 보호하는 공적신탁
현재 은행, 증권사, 보험사, 부동산신탁사 등 다양한 기관에서 신탁제도를 운용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보험금대용신탁, 유언대용신탁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관에서 신탁을 설정하려면 최소 몇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허들이 존재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 사후 자산관리를 위해 신탁 설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또 다른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셈.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관리자가 되어 재산을 관리해주는 공적후견신탁(이하 공적신탁)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일본, 독일, 영국, 미국, 호주 등 주요 선진국은 고령화 문제와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공적신탁제도를 도입했다. 이들 국가는 법원 감독, 후견인 역할, 신탁 계좌 활용 등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재산의 안전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오영걸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적신탁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치매 노인, 미성년자 등을 위한 좋은 후견인을 필터링할 수 있으면서 신탁기관 수수료도 낮아 수급자의 부담을 줄인 제도”라고 덧붙였다. 재산을 보고 후견인이 되겠다고 나타나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의미다.
고령자에게 참 좋은 신탁
신탁제도는 영국에서 시작돼 영연방국가, 미국, 싱가포르와 홍콩 등 다양한 나라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초고령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은 투자의 개념으로 운용하던 신탁제도를 2006년 법 개정을 통해 자산관리의 일환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11년 신탁법 개정 후 2012년부터 신탁 설정을 시행했다. 하지만 신탁 전문가도 없고 신탁을 취급하는 곳도 극소수로 지지부진한 상태를 지나, 2016년부터 그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신탁은 계약에 기반을 둔 자산관리 시스템입니다. 스스로 온전하게 자산관리를 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운영과 관리 방법을 계약 안에 녹이는 거죠. 생전에 본인을 위해 자산을 관리하거나, 사망 시 자산 분배 및 사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이에요. 그러니 자산가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갑자기 신탁 열풍이 불기 시작한 데 대해 오 교수는 “자산 축적의 시대를 지나 이제 자산관리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라며 “아무리 법이 좋아도 사용하지 않으면 그냥 묻혀 있기 마련인데 초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자산을 운용하고 관리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었고, 마침 신탁법이 개정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자수성가든,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산이든 하루아침에 자신이 가진 재산을 탕진하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다.
이어 그는 “부모의 사망 후 재산분할 분쟁 같은 불미스러운 일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증되지 않은 유언장의 경우 먼저 발견한 자식이 없애버리거나 유언장을 분실했을 경우 확인할 길이 없으며, 부모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남긴 것이라고 주장하면 이를 반박할 근거가 없죠. 하지만 신탁의 경우 수탁기관과 계약서를 체결하고, 체결할 때 그 상황 전체를 녹화하여 이 모든 것을 수탁기관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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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법과 신탁의 동상이몽
재산을 지키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었을 텐데, 그동안 신탁이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분명 있을 터. 오 교수는 ‘세법의 문제 때문’이라고 봤다. 세법이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실생활에 더 적합하게 변화한 반면, 신탁법은 변화가 더딘 상태인 데다 이제 와서 신탁에 맞게 세법을 개정하기에는 여러 아쉬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얘기다.
“위탁자에게 수익권이 없어도 세금이 부과되는 규정, 재건축 조합 대신 신탁업자가 부동산을 보유할 때의 세금 규정, 장애인신탁에서 비과세액에 관한 규정, 유언대용신탁에서 상속세 규정 등에 문제가 있어요. 유언대용신탁이나 유언신탁에서 유류분*을 계산할 때, 상황에 따라 정확한 계산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도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세법을 개정하기에는 ‘부유층을 위한 세법 개정’이라는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오 교수는 “신탁이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신탁에 맞춰 세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부자를 위한 방책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쉽지 않다”면서 “신탁이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바뀌고, 세금 문제가 해결되어야 신탁제도가 좀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활용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시장법이 규제해야 하는 범위는 투자자들과 이해관계가 엮인 투자신탁 등에 한정돼야 합니다. 고령자를 위한 신탁은 투자신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에요. 자본시장법에 예외를 두고 영국, 미국처럼 적극 허용해야 더 많은 사람이 신탁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마법의 사탕보관소, 신탁
오영걸 교수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신탁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적고, 법적 제도가 탄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적신탁 시행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꼬집었다.
영국, 싱가포르 등의 경우 신탁제도 시행의 기본이 되는 공공신탁법 등 법적 제도가 탄탄하게 마련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후견제도와 신탁제도가 분리 운영되고 있는 데다 이 두 제도를 통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없다.
게다가 전문 인력과 재원의 부족도 공적신탁 시행의 걸림돌이다. 오 교수는 “효과적으로 공적신탁을 운영하려면 전문성 높은 신탁 전문가와 신탁 관리자를 양성해야 하나, 관련 교육 과정을 제공하는 대학이나 기관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이 때문에 전문가가 부족하니 공적신탁 운영 시 발생할 수 있는 관리 책임, 사기, 비리 등의 문제에 대한 감독과 제재 체계도 미비한 것”이라며 일침을 가했다.
“신탁을 ‘마법의 사탕 보관소’로 비유할 수 있는데요. 사탕 보관소에 사탕을 맡김으로써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사탕(재산)을 분란 없이 물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신탁 전문가가 부족한 상황이에요. 전문가가 없으니 사탕 보관소에 사탕을 맡기고 싶어도 쉽지 않은 상황이죠.”
이어 그는 공적신탁을 운영할 때 드는 제반 비용에 대한 법령 등이 뒷받침되지 않은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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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사회 대응책으로 공적신탁 도입되어야
현재 우리나라의 신탁은 기한이 없다. 이에 대해 그는 “저승에서 이승의 재산을 영원히 지배해서는 안 된다며”며 신탁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법률·규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이어 “법률의 충돌, 규제 등은 입법부와 학계가 힘을 모아 디테일한 부분까지 고려한 법안 개정에 나서야 한다”면서 “신탁 실무자들은 일정 유형의 신탁에 대해 변화 또는 규제 완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야 한다”고 밝혔다.
자본시장법 중 신탁업자의 분야 역시 신탁시장 발전의 걸림돌이다. 실제로 자본시장법상 신탁업자는 은행·증권·보험·부동산신탁사 정도다. 로펌 등 법률사무소의 신탁 영업은 원천 봉쇄돼 있다.
오영걸 교수는 제대로 된 공적신탁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로스쿨이나 금융 연수기관 등의 체계적인 교육으로 문제점을 풀어가야 한다고 언급하며, 신탁업계 종사자 교육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또한 “신탁시장의 실무 전문가들은 국내 실정에 맞는 신탁 설계 샘플을 만들어가야 한다. 해외 사례를 통해 다양한 방향을 고민하다 보면 우리나라에 맞는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특정 유형의 신탁을 실무에서 다룬다 하더라도 신탁 전반의 기본 원리를 반드시 익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신탁이 기형적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복지 확대, 주거 문제 등 다른 사회적 이슈에 비해 우선순위가 낮게 평가될 수도 있으나 고령사회의 대응책으로 공적신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대상자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의 긍정적인 이미지부터 알려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공적신탁을 시행하려면 관련 법률 제정, 전문 인력 양성, 국민적 인식 제고, 운영 자원 확보 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공적신탁이 초고령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복지를 증진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