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과 오브제 아트의 세계 최고의 디자인·제조 업체로 널리 알려진 까르띠에는 167년의 역사를 지닌 브랜드다. 파리의 한 보석상의 숙련공이었던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1847년, 그의 주인이었던 아돌프 피카르로부터 파리 몽토르겨이가 29번지, 보석 아뜰리에를 인수 받으면서 시작된 까르띠에.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그의 이니셜인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을 그의 장인 마크로 등록한다. 바로 이것이 까르띠에 하우스의 탄생, 기나긴 러브 스토리의 시작이었다.
◇영국 황실의 보석상= 1899년 까르띠에는 보금자리를 옮겨 뤼드라뻬 13번지에 작업장을 연다. 이때부터 알프레드는 그의 세 아들에게 까르띠에 하우스의 해외 경영을 맡김으로써 국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루이 조제프(1875~1942)는 파리를 맡고, 자끄 떼오뒬(1884~1942)은 런던, 삐에르 까미유(1878~1964)는 뉴욕에 각각 터를 마련해 사업 영역을 넓혀간다.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왕의 보석상, 보석상 중의 왕(Jeweler to kings, king of jewelers)’이라는 칭송을 받은 까르띠에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에드워드 7세는 1902년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27개 티아라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이후 에드워드 7세는 까르띠에를 최초로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했다.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 받은 이후 까르띠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시암(현 태국), 그리스, 세르비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집트, 알바니아 왕실과 오를레앙 일가, 모나코 공국으로부터 그와 비슷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명작 ‘트리니티’의 탄생= 오늘날 까르띠에를 있게 한 최고의 작품 ‘트리니티’는 창업자의 손자 루이 까르띠에가 1924년 친구인 시인 장 꼭도를 위한 반지를 만들어 선물한 순간 시작됐다. 이 반지는 까르띠에의 심볼이자 뮤즈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 걸친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화이트골드, 옐로우 골드, 핑크 골드 3가지 색 골드의 환상적인 하모니, 우아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반지 ‘트리니티’는 세 개의 밴드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우아함을 표현하는 까르띠에의 명작으로 꼽힌다.
손목 위에 핀 불멸의 사랑, 까르띠에의 또 다른 명작 ‘LOVE(러브)’ 팔찌는 1969년 탄생했다. 뉴욕 작업장에서 디자이너 알도 치풀로는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남녀공용 팔찌를 제작했다. 팔에 일단 이 팔찌를 끼운 다음 특수 제작된 스크류 드라이버를 이용해 영원히 빠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중세의 기사가 아내에게 매단 정조대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 디자인은 주얼리를 몸에 걸치는 방식에 혁명을 불러왔다. 팔찌는 더 이상 옷이나 그 날의 활동에 맞춰 선택하는 액세서리가 아니게 됐다.
까르띠에 ‘러브 브레이슬릿’은 전용 드라이버가 있어야만 착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착용할 수 없다. 러브 콜렉션의 상징인 스크류 모티브 부분에 다이아몬드가 총 4개 세팅돼 있다. 팔찌의 인기에 힘입어 반지 ‘러브 반지(LOVE Ring)’도 탄생했다. 이들은 이제 전 세계 까르띠에 소비자들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러브 반지 역시 까르띠에의 대표적인 문양인 스크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핑크골드 컬러로 다이아몬드가 3개 세팅돼 있다.
◇세계 최고의 보석상 까르띠에의 장인정신= 보석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예술적 영감으로 만들어낸 까르띠에 하우스의 장인정신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수많은 매력적인 제품들로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하나의 보석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까르띠에 하우스는 수많은 단계를 거친다. 까르띠에의 예술적 영감을 통해 생성되는 모티브의 콘셉트는 처음에는 단어로만 존재한다. 무수한 스케치와 회의, 수정의 반복 과정을 통해 레이아웃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제작 단계에 들어간다.
여러 색의 왁스로 테스트용의 기초적인 형태를 제작해 아이디어를 더욱 구체화한다. 석회 주물, 연마과정, 광택과정, 양각세공과정, 비늘 세공, 브러싱 공정, 보석의 세팅 과정 등을 거치게 되며, 각 과정마다 또 다시 수많은 검사와 수정이 이루어진다. 까르띠에의 모든 작업은 자연광을 이용한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다.
◇액세서리에서 ‘시계의 명가’로도 부상= 보석으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사실 창립 초창기부터 손목시계 제조사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시계를 선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산토스(Santos)’와 ‘탱크(Tank)’는 까르띠에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표 컬렉션이다.
까르띠에가 시계를 생산하게 된 것은 알프레드 까르띠에의 아들, 루이 까르띠에에 의해서였다. 시계 디자인과 제조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루이는 까르띠에만의 보석 디자인, 세공을 응용해 벽시계, 탁상시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3년에 최고의 예술미와 기술이 조화를 이룬 ‘포르티끄 미스터리 클락(Portico mystery clock)’을 제작, 특허권을 따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시계 전문가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기술적인 완성을 더해오던 까르띠에는 시계 전문가인 모리스 코우와 함께 미스터리 클락의 성능을 개발, 향상시켰다.
1907년에 에드몬드 예거와의 공동작업으로 특허권을 딴 손목시계 버클은 시계 제조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까르띠에의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는 대부분 왕실, 귀족, 대부호를 위한 것이였다. 때문에 최고의 디자이너, 시계 기술자, 감정사, 세공 전문가, 광택 전문가들의 손과 최상의 소재가 사용됐다. 이러한 엄격한 소재 선택과 완벽한 세공, 제조 기술은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대에 접어 들면서 까르띠에는 여러 라인의 시계를 개발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달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뉴시니어라이프 교육장. 비니 모자 밑으로 내려온 부스스한 펌 헤어, 마치 로커를 연상케 하는 한 여성이 등장했다. 나이 지긋한 그의 옷차림은 젊은이 못지않게 파격적이었다. 검은색 레이스 치마에 우주 풍경이 프린트된 화려한 레깅스는 트렌디한 홍대 거리에서 마주치더라도 시선이 꽂힐 만큼 시크하고 도발적인 패션이었다. 얼핏 보면 20대 초반의 개성 있는 아가씨처럼 보였다.
가수 싸이의 노래에 맞춰 안무를 익히느라 여념 없는 그는 올해 쉰여덟의 원윤희(58) 씨. 문화센터에서 미술 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원 씨는 “평소 입기 어려운 옷도 이곳에서는 마음껏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원 씨는 뉴시니어라이프의 시니어 모델이다. 뉴시니어라이프는 50세 이상의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시니어 모델 교실’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이다. 이곳의 수강생들은 지난해에만 17회 정도 패션쇼 무대에 올랐다. 이날 역시 30명가량의 시니어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런웨이 위에서 또각또각 워킹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니어 모델들은 매주 3시간씩 강남과 성북의 연습장에 모여 패션쇼 연습에 매진한다. 방문 당시 곧 있을 백화점 패션쇼를 연습중이라던 이들은 작년에는 독일까지 가서 패션쇼 무대를 선보였으며 올해 다시 초청돼 또 독일과 중국 등지에서 패션쇼 무대를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는 군부대 등 다양한 곳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갈 예정이라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곳을 찾아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채련(85·여·사물놀이 강사) 씨는 한 TV프로그램에 나오는 뉴시니어라이프의 시니어 모델들을 보고 직접 방송사로 전화를 걸어 이 곳의 번호를 알아냈다. 그는 “전화를 걸어 내가 나이 83세인데 가도 되냐고 물었다”며 웃었다. 권혜영(62·여·주부) 씨는 자녀들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장 홍보 모델을 권유받고 가슴이 뛰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그때는 며느리 앞에서 사진 찍기가 미안해서 안한다고 말하고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이 곳을 찾아왔다”고 이 곳에 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인생 2막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 곳을 찾은 이들에게 있어서 연습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매번 연습을 할 때마다 무대에 오른다는 기분으로 이 곳에 모여든다고 말했다. 연습이라고 해서 트레이닝복을 입는다고 생각하면 오산. 타이트한 원피스에서부터 검은 가죽 자켓으로 멋을 낸 올 블랙 패션, 치파오로 개성을 살린 패션까지 젊은 패셔니스타들과 비교해도 손색 없을만한 모습으로 그들은 매번 진지하게 연습 무대에 임했다.
허미숙(60·여·주부) 씨는 “일주일에 세 시간, 이 시간을 위해서 일주일간 정성껏 의상을 고른다. 액세서리 하나까지 세밀하게 신경 쓰며 다들 최고의 모습으로 연습 무대에 오른다”고 말했다.
젊은이들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가 있는 시니어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의상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외교관의 아내로 내조에만 힘쓰며 살아왔던 이오영(69·여·주부) 씨는 이곳에 와서 가장 크게 변한 것 중에 하나가 ‘패션’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는 그냥 평범하게 입었다. 이곳에 와서 강사로부터 몸매가 드러나게 입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조금씩 의상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며 “예전에 사 놓은 것들은 상표 안 띤 것 까지 다 주변에 나눠줬다. 내 옷을 보며 ‘내가 예전에 어떻게 이런 것을 입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는 요즘 스키니 진과 하이힐을 즐겨 신으며 진짜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패션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녀들의 하이힐이었다. 연습장을 누비는 시니어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모두가 높은 하이힐을 신고 연습에 임하고 있었다. 권 씨는 “하이힐의 굽 높이가 기본 7cm지만 서로 더 키가 커 보이고 싶어 10~15cm까지 서슴지 않는다”며 웃었다.
지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녀는 연습 세 시간 동안 꼬박 높은 하이힐을 신고 연습장 곳곳을 누볐다. 강원도 원주에서부터 왕복 7시간 거리의 강남 연습장까지 올만큼 열성적인 그녀는 벌써 2년차의 시니어 모델로 “이제는 하이힐이 익숙하다”고 말했다.
남자 시니어 모델들도 마찬가지다. 보라색 바지에 빨간 벨트, 주황색 선글라스로 멋을 낸 이동열(84) 씨는 직업 군인으로 복무했을 당시 “제복으로 억눌려 있었던 끼를 이 곳에서 마음껏 펼치고 있다”고 말하며 패션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변한 것은 이들의 의상뿐만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 손잡이를 반드시 잡고 내려가야 할 만큼 허리가 많이 아팠다”던 이오영 씨는 “여기 와서 벽에 몸을 붙이며 자세를 교정했고 워킹을 연습했더니 바르게 걷는 습관이 몸에 붙었다. 지금은 아침마다 20층 계단을 왕복 5번 오르락내리락 할 만큼 무릎이며 허리가 건강해졌다”고 설명했다.
권 씨는 “부끄러움이 많아서 학교 다닐 때도 반장을 시키면 숨어버리곤 했다. 여기 와서 차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게 됐다”며 “수줍음이 사라지니 무대 아래에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와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즐겁다”고 활기차게 말했다.
“연습을 하다가 힘들었던 순간은 없었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던 이들은 “일주일 내내 이 날만을 기다릴 만큼 너무나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오영씨는 “패션 모델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시간이 많아서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열정과 보람을 느낄 수 있기에 하는 일”이라며 “지금은 제2의 직업이 됐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나이는, 순간을 즐기며 열심히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쌓여 있는 것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