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맥판막 협착증… 발견 못하면 2년 생존율 절반으로 뚝
약물 치료 불가능… 개흉없이 시술하는 치료법 TAVI 주목
트로트계의 BTS, 가수 진성은 ‘안동역에서’로 활발한 활동에 나선 지 2년 만에 혈액암과 심장 판막 질환을 진단받으며 힘겨운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암흑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온 그는 병을 이겨내고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극복의 아이콘으로 재조명됐다. 혈액암과 함께 진성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심장 판막 질환이란 무엇인지 대동맥판막 협착증의 최소침습적 치료법인 TAVI 시술의 교육 및 관리 자격을 갖춘 한양대학교병원 심장내과 국형돈 교수와 함께 그 증상과 치료법을 포함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심장 판막 질환이 생기는 이유
심장에는 경계가 분명한 네 개의 방이 존재하고, 그 사이에는 판막이라는 구조물이 있다. 판막은 심장이 온몸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담은 피를 내보내는 과정에서 마치 문과 같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혈액이 역류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판막에 문제가 생겨 원활하게 열리고 닫히지 못하는 상태를 심장 판막 질환이라고 부르며, 대표적으로는 판막이 잘 열리지 않아 혈액이 원활하게 나가지 못하는 ‘협착증’과 반대로 잘 닫히지 않아 혈액이 새는 ‘역류증’이 있다.
심장 판막 질환 중에서도 대동맥판막 협착증을 진단받은 환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대동맥판막 협착증의 국내 환자 수는 2010년 4600여 명에서 2021년 1만 9000여 명으로 10년간 4배 이상 급증했다.
평생 쉼 없이 움직이는 판막은 사용할수록 노화된다. 나이 든 판막에 칼슘이 쌓여 판막이 딱딱해지면 순환의 과정에서 혈액이 이동하는 통로가 좁아져 우리 몸의 여러 장기 기관에 적정량의 혈액이 도달하지 못하게 되고, 연쇄적으로 여러 증상을 낳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동맥판막 협착증이다.
국형돈 교수는 “대동맥판막 협착증이 악화되면 우리 심장은 온몸으로 피를 내보내는 것을 힘겨워한다. 심장에서 피가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하면 심장이 비대해지고 종국에는 펌프 기능이 저하되는 심부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뇌까지 충분한 피가 가지 못하면 잦은 실신을 경험할 수도 있다”라며 심한 경우 급사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동맥판막 협착증은 질환 특성상 초기 단계에 증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심지어는 중증에 이르러서도 증상을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증 대동맥판막 협착증은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2년 내 사망률이 50%, 5년 내 사망률이 무려 80%에 육박할 뿐만 아니라 주요 전이암보다 예후가 좋지 않은 심각한 질환이다.
대동맥판막 협착증, 조기 발견하려면?
다행히 검사 방법이 복잡하지 않다. 대동맥판막 협착증은 청진 시 특유의 심잡음이 있기 때문에 주변 일반 내과나 심장내과, 순환기내과에서 간단한 청진으로도 1차 소견을 낼 수 있다. 이후 심장 초음파를 통해 확정 진단한다. 심 초음파는 의사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 국민건강보험 적용이 되기 때문에 비용 부담이 경감된 상태다.
국 교수는 대동맥판막 협착증의 증상이 주로 흉통, 호흡곤란, 실신 등 대부분 다른 질환으로 오해하기 쉬운 증상들인 점을 조기 발견을 막는 문제로 지적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일상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우리 몸은 일상을 멈추는 경고가 아니더라도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방법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하니 의심된다면 병원을 꼭 찾으세요. 판막 교체 치료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감수해야 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초기 단계에 시술하는 것이 예후가 훨씬 좋아요”
개흉 부담 없이 치료하는 TAVI
중증 대동맥판막 협착증은 아직 그 원인을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반드시 수술 혹은 시술 등의 물리적인 개입을 통해 협착된 판막을 갈아주어야 한다.
과거에는 가슴을 열어 협착된 판막을 제거하고 인공 판막을 이식하는 수술적 대동맥판막 치환술(SAVR)만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그러나 고령의 환자가 많은 대동맥판막 협착증 특성상 동반 질환 및 컨디션 문제로 수술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에 수술 고위험군과 불가능군을 치료할 수 있도록 2000년 대 초반 새롭게 고안된 치료법이 바로 경피적 대동맥판막 삽입술(TAVI)이다. TAVI는 개흉 없이 대퇴동맥을 통해 카테터를 삽입, 기존 대동맥판막 부위에 인공 판막을 삽입하는 시술이다. 우리나라에는 지난 2010년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초기 안정기를 거쳐 최근에는 50여 개의 TAVI 센터에서 시행되고 있다.
TAVI는 전신 마취가 필요 없고, 시술 시간이 짧아 입원 기간이 크게 단축되고 자연스럽게 환자의 일상 복귀 시점 또한 크게 앞당기게 됐다. 또한, SAVR보다 대등하거나 우수한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 인정되어, 2019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수술이 가능한 수술 저위험군 환자에도 TAVI 시술이 가능하도록 적응증 확대를 승인했다.
국형돈 교수는 현재 국내에서 시판되는 모든 유형의 TAVI 기기에 대한 최연소 프록터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 TAVI 프록터(Proctor)란 TAVI 시술 자격을 갖춘 의료진 중 국제적으로 인증 받은 TAVI 시술 교육 및 관리 감독 권한이 있는 의료진을 뜻한다. 신규 TAVI 센터의 경우, TAVI 프록터의 실시간 참관하에 시행되는 TAVI 프록터링을 일정 건수 이상 반드시 이수해야 인증을 받을 수 있다.
국 교수는 “지난해 5월 국민건강보험 적용 기준이 확대되면서 환자의 나이가 80세 이상이거나 수술 불가능군 혹은 수술 고위험군 환자는 시술 시 자기부담금이 5%로 감소하여 부담이 크게 경감됐어요.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중증도에 따라 50%까지 시술비가 차등 지원되고요. 이제는 고령이라서, 비용이 비싸서 시술을 외면할 이유는 적어진 셈이죠.”
예방 위해선 걷기, 달리기 효과적
대동맥판막 협착증은 고령 인구에서 발병률이 높은 만큼 동반 질환의 발생률이 높다. 고혈압, 관상동맥질환과 같은 심혈관질환이 가장 빈번하게 발견되며, 심혈관질환의 위험 요인인 고지혈증 역시 중증 대동맥판막 협착증 환자에게 흔히 동반된다.
국형돈 교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평소 다양한 영양소를 포함한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 습관을 들이고, 짜지 않게 먹는 것이 좋다. 그리고 건강한 심장을 위한 규칙적인 운동 역시 중요하다”며, “간단한 걷기 운동을 비롯해 계단 오르기, 달리기, 줄넘기, 수영 등 몸을 깨우고 긴장을 풀어주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 심장 질환의 위험이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일상적인 활동량이 평소보다 버겁게 느껴지거나 조금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진료를 받아 보길 바란다”라며 질환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대동맥판막 협착증, 좀 더 알고 싶다면
대동맥판막 협착증은 적시에 포착해서 관리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질병인 만큼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주변인, 의사까지도 반드시 알고 준비해야 하는 질환이다. 건강한 2막을 응원하기 위해 뉴하트밸브닷컴을 소개한다. 뉴하트밸브닷컴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심장 판막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를 비롯해 대동맥판막 협착증에 관한 소개, 증상 및 진단 방법, 치료 방법 등을 알기 쉽게 안내하고 있다. 또한, 대동맥판막 협착증을 진단받은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대동맥판막 치환술 시행 전에 준비할 내용, 의료진 상담 시 꼭 물어보아야 할 체크리스트, 시행 후 회복을 위해 알아 둘 정보 등의 내용이다. 웹사이트 방문자라면 누구든 신청을 통해 대동맥판막 협착증에 관한 정보를 담은 뉴스레터를 받아볼 수 있으며, 추가로 심장 판막 질환, 대동맥판막 협착증, 의료진과의 진료 상담 가이드를 포함한 자료집을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베테랑 연기자이자 30년 넘는 경력의 라디오 진행자, 예능 MC로 종횡무진하는 탤런트 김성환(72)을 실제로 보면 칠순을 넘긴 나이를 쉬이 믿기 힘들다.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젊음이 분명하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과 젊음에 대해 겸손하게 부모님께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얼굴에 뭔가 바르는 걸 싫어해서 로션도 잘 쓰지 않고 운동도 걷기 위주로 한다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타고난 선물이 부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부모님께 받은 ‘선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성공한 방송인이자 가수,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 김성환에게 지금의 삶을 만든 해법과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요즘 탤런트 김성환을 바쁘게 만드는 일에는 노인의료나눔재단이 있다. 처음에는 홍보대사를 하다가 2018년부터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노인의료나눔재단은 1년에 30억 원 정도의 예산으로 시니어들의 무릎 수술비를 지원하는 공익 재단이다. 주로 저소득층 시니어, 연고자가 없거나 홀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그 지원 대상이다.
어르신들과의 계속된 접점, 이사장까지 되다
“탤런트를 하면서 교양 프로그램, 노래 등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해서 어르신들과 인연이 많았죠. 저도 고향이 시골이라 농사 등 어르신들의 생활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고요. 그러다 보니 MBC ‘고향이 좋다’에서 20년 넘게 MC를 하기도 했어요. 하다 보니 어르신들과 접촉이 많았고, 많이 알게 되고, 어르신들이 저를 좋아하시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어르신들 위하는 일이 뭘까 관심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한노인회 홍보대사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인연 덕분에 노인의료나눔재단 홍보대사도 하게 되었죠.”
그는 요즘도 대한노인회 홍보대사 일을 겸하고 있기에, 보건소나 경로당에 가면 그의 사진이 있는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김성환은 시니어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밀접하게 접하는 연예인일 것이다.
“노인의료나눔재단 홍보대사 일을 하다 보니 열 분의 이사님이 만장일치로 저를 이사장으로 추대해주셨죠. 저보다 먼저 이사장을 맡았던 분들이 다들 쟁쟁하신 분들인데, 영광일 뿐입니다.”
30여 년간의 라디오 DJ 생활
김성환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동시에 스스로도 현재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연기와 경영을 공부하기 위해 53세에 경기대학교에 진학한 일 또한 그렇다.
“10년 동안 다녔어요. 탤런트 김영철과 함께 들어갔죠. 열심히 해서 예술학 박사과정까지 마쳤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일이 대학교 다닌 일과 라디오 방송을 30년 동안 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가 처음 맡은 라디오는 KBS의 ‘세월 60년 노래 60년’이었다. 5년 동안 KBS 라디오에 몸을 담았던 그는 교통방송(현 TBS)이 개국하자 이적하여 작년 11월까지 무려 26년 동안 라디오를 진행했다. ‘9595쇼’, ‘서울 부르스’, ‘비바 트롯’ 등을 맡았던 그는 TBS 라디오의 터줏대감으로 불렸다. 그는 이러한 장수 방송인의 비결에 대해 단순히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열심히를 넘어 죽기 살기로 해야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렇게만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뭐든지 죽기 살기로 해야 해요. 거친 표현이지만 모든 것을 죽기 살기로. 라디오를 30년 이상 한 것도, ‘고향이 좋다’를 20년 넘게 한 것도, 경인방송 ‘성인가요 베스트 30’을 7년 한 것도 그랬어요. 뭐를 하나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 죽기 살기로 해야 됩니다. 그리고 대인관계도 열심히 해야지 대충 하면 안 돼요. 그 사람이 10을 줄 때 나는 20, 30을 준다는 다짐과 여유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도 나를 믿고 함께할 수 있거든요.”
그는 방송을 10년 하려면 삼위일체가 아니라 오위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잘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고, 운이 좋아서 프로그램이 사랑을 받아야 하고, 부지런해야 해요. 10년, 20년, 30년이란 세월 동안 방송을 한다는 건 정말 여러 가지가 어우러져야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김성환은 제주도도 한 번 못 가보고 살았다. 제주도에 가서 쉬면 방송이 펑크 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과거에는 부산조차 못 갔다. 이제는 KTX가 있어 가능해졌지만. 교통방송에서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17년 동안 맡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모든 걸 다 바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튜브 조회수 1000만 회 넘은 그의 노래
인생은 자신의 모든 걸 방송에 바친 김성환에게 또 다른 선물도 주었다. 바로 가수로서의 성공이다. 유튜브에서 김성환의 이름을 치면 그가 가수로 공연한 방송 클립들이 나오는데 그 조회수에 놀라게 된다. 가장 많은 조회수를 올린 동영상이 대표곡 ‘묻지마세요’를 포함한 그의 히트곡 메들리인데 1030만 회에 달하니, 숫자로만 보면 우리나라 국민 5명 중 한 명이 그의 공연을 봤다는 얘기가 된다.
“1997년에 ‘거시기 인생’이라는 노래를 드라마에서 부르면서 히트를 쳤죠. 어르신들이 좋아하셔서 ‘가요무대’나 ‘전국노래자랑’에서 부르게 됐어요. 물론 본격적인 가수라기보다는 탤런트 중 노래 좀 부른다는 쪽이었는데, 2014년에 발표한 ‘묻지마세요’가 아주 행운이었죠. 이 노래는 원래 진성 씨 노래였는데 팬이 생긴 인기 좋은 노래가 됐어요.”
그가 ‘묻지마세요’ 이후 밀고 있는 노래는 ‘보고픈 친구야’다. ‘묻지마세요’의 작곡가 이충재가 그에게 직접 가사를 써보라고 해서 가사도 자신이 직접 썼다. 나이를 먹으면 친구밖에 없다, 친구 하나를 제대로 사귀면 평생 최고라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노래다.
“제 노래가 아무나 편안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예요. 가수가 한 곡 히트하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세 곡이 히트한 걸 보면 가수로서도 성공했다고 봐야겠죠?(웃음)”
‘미운 놈이 되지 말라’는 아버지 말씀을 지키다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 이야기에 김성환이 변죽이 좋은 걸로 유명하다는 게 떠올랐다. 그 스스로도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소질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 때문에 애로사항도 있었다고 한다.
“제가 얼굴과 행동과 말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방송국에서 역할을 줄 수 없었어요. 재미있는 역할을 주려고 하면 얼굴이 잘생겼고, 얼굴이 잘생겨서 주인공을 주려고 하면 사투리가 막 튀어나와서 주인공 같지 않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사투리를 고치고 공부해서 제대 후에는 다양한 역할을 맡았어요.”
좌절할 수도 있었던 젊은 날 고민에 적극적으로 도전해 기회로 만든 점이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 그간 방송인이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행적을 보면 멘탈 관리도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 자랑스럽고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누구와도 싸워본 적 없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아버지께서는 ‘미운 놈이 되면 안 된다’라고 자주 말씀해주시곤 했어요. 왜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실까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가슴에 와 닿더군요. 저는 성격도 그렇지만 ‘미운 사람이 되지 말자’가 인생 모토예요. 괜히 미운 사람으로 보이겠냐 싶은 거죠. 다른 사람에게 왜 미운 사람으로 보일까요? 말 한마디에 미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천 냥 빚은 못 갚아도 미운 사람이 되면 안 되잖아요.”
아버지의 말씀을 깊이 새긴 그의 인생 모토는 ‘말 한마디 때문에 다투지 말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를 흉봐서도 안 되고 헐뜯어서도 안 되고 탓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의 깨달음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나를 닮으라는 얘기는 안 하지만, 절대 미운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자식과 부모 간에도 하기에 따라 밉거나 존경할 수 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기 손으로 탈락시킨 냉정한 아버지
그러고 보니 김성환의 둘째 아들(김도성)은 연기자라는 점에서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 입학한 재원인 아들이 우리나라로 돌아와 연기자가 되겠다고 하자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말려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니까요. 방송은 정말 힘들다고 충고했지만 결국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으면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예술대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 연기를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는 본인이 연기자였기에 연기에서만큼은 냉정한 아버지였다. 그가 심사를 보게 된 KBS 탤런트 공채에 아들이 지원했었다고 한다. 20명을 뽑는데 3만 명이 지원한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그는 아들의 연기자 심사를 보고 1차에서 탈락시켜버렸다.
“아들이 아버지 맞냐고 묻더군요.(웃음) 그래서 어떻게 탤런트를 뽑는지, 어떻게 탤런트가 되는지 네가 알아야 한다면서 심사 과정을 알려줬어요. 정말 힘들거든요. 대사 외우기, 노래, 운동, 특기, 악기 사용, 성실함 등등. 저도 50년 했지만 정말 힘든 게 이 길이에요.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길이죠.”
싫어하는 말은 ‘졸혼’, 그리고 부부관계의 해법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부부로 황혼을 지내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는 부부관계가 원만한 비결로 서로에 대한 배려를 들었다.
“뭐든지 일방적인 게 없어요. 내가 아무리 잘했어도 상대가 잘했다고 생각해주지 않으면 잘 안 된 거죠. 반면 ‘저 사람이 열심히 살면서 밖으로 많이 돌고 집안일을 안 도와주는 거 같아도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다’ 싶으면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라는 게 서로 잘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어요. 섭섭할 수 있고, 권태기 때문에 싫어질 수도 있어요. 요즘은 헤어지는 게 다반사 아닙니까.”
그는 너무나 싫어하는 단어가 졸혼이라고도 했다.
“백일섭 형님에게도 이건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어요. ‘수많은 사람 앞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잘 살겠다 해놓고 조금 싫다고 헤어지면 되겠느냐’ 했더니 ‘누가 헤어지냐? 누가 이혼한다냐? 조금 떨어져 있겠다는 거다’ 하시더군요. 남진 형님은 ‘그것도 괜찮다’ 하시는데 나는 끝까지 그건 안 된다고 했어요. 아이가 없거나 주변인이 없으면 그럴 수 있죠. 지금 사는 게 나 혼자만이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남들 눈이 있으면 못 하는 일이 있죠. 하물며 내 자식들이 보고 있는데, 자식들이 괜찮다 해도 부모로선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누구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것은 또한 김성환이 계속 지켜온 사람에 대한 예의, 타인을 위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답을 갖고 있는 그는 자신만의 길을 올곧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꿋꿋이 걸어갈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편스토랑이라는 요리 프로그램이 있다. 미식가 스타들이 혼자만 먹기에는 아까운 필살의 메뉴를 공개하고 이 중 승리한 메뉴는 방송 다음 날 전국 편의점에 출시되는 신개념 신상 메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가수 장윤정 남편으로 잘 알려진 도경완, 규라인으로 유명한 이경규, 개그우먼 이영자 , 중식으로 유명한 이연복 셰프 등이 고정 출연하고 매회 메뉴를 소개할 초대 손님이 나온다.
최근 트로트계의 BTS로 불리는 가수 진성이 출연하여 자신의 건강 식단을 소개했다. 이름하여 항당뇨 식단.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이리저리 살았을 거라/ 착각도 마라/ 그래 한때 삶의 무게/ 견디지 못해/ 긴긴 세월 방황 속에/ 청춘을 묻었다/ 어허허 어허허 속절없는/ 세월 탓해서 무얼 해/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인 것을~ / 지금부터 뛰어/ 앞만 보고 뛰어~/ 내 인생의 태클을 걸지 마
인생에 태클 걸지 말라는 트로트 가수 진성은 시니어 공감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8월호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밝힌 바 있다. 어려서부터 잡초처럼, 고생인지도 모르고 그저 살아왔다는 진성은 오랜 무명생활 끝에 '안동역에서'로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등을 맞대고 온다는 말처럼 안동역에 노래비가 세워질 만큼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 혈액암과 심장판막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고된 투병은 그에게 건강한 식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그 후 각종 건강 발효액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간을 맞출 때도 함초소금을 사용하는 등 늘 신경을 쓴다.
화면을 따라가니 아침은 자신의 땅에서 직접 키운 오이를 따서 먹거나 그 옆에서 자라는 토마토를 따서 옷에 쓱쓱 문질러 먹는다. 노래하느라 바쁜 중에도 건강을 챙기는 생활이 습관이 된 듯하다. 항암치료 후 기억력이 감퇴되어 호랑이콩과 식초콩을 수시로 먹는다는 그는 꿀벌 화분도 챙겨 먹는데 꽃에서 직접 따는 거라 몸에 좋을 거라면서 웃는다. 촬영 중 이 사진은 여러분이 꼭 보셔야 한다며 표지모델로 나온 ‘브라보 마이 라이프’ 8월호를 들어 자랑하는 진성. 확실히 자랑할 만한 멋진 모습이다.
진성이 소개한 항당뇨 식단 재료는 돼지감자와 여주다. 만들기도 쉽다. 나이가 들면 더 신경 써야 하는 당뇨에 좋은 건강 식단. 건강전도사로 불리는 진성의 건강한 식단을 배워보자.
진성의 항당뇨 식단 만드는 법
1. 돼지감자 물김치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게 썬다.
-큰 볼에 담는다.
-당근, 쪽파, 파프리카, 붉은 청양고추를 넣는다.
-생수를 자박하게 부어준다.
-함초소금으로 간을 맞춘다(짠맛이 덜해서 넉넉하게 넣어줘도 된다).
-마지막으로 개복숭아 발효액을 넣어준다.
2. 천연 인슐린 여주 볶음
-여주는 씨를 제거한 후 적당히 썰어준다.
-썬 여주를 넣은 팬에 꾸지뽕 기름을 넉넉하게 두른다.
-파프리카, 양파 등 갖은 채소를 넣어준다.
-재료가 익을 정도로 볶아준다.
-마지막에 스테비아로 여주의 쌉싸름한 맛을 완화한다.
3. 도미찜
-도미를 깨끗하게 손질한다.
-양념이 잘 배도록 적당한 간격으로 칼집을 낸다.
-고춧가루, 스테비아, 진성표 간장, 물 약간, 홍고추, 다진 마늘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생선 비린내를 잡기 위해 마가목 술을 넣어준다.
(마가목 술은 마가목의 열매로 만든 약용주다. 중풍과 어혈을 치료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칼집 사이로 양념장을 골고루 발라준다.
-뚜껑을 덮고 30분 찐다.
4. 그 외 팁
-된장찌개에 배추 대용으로 상추를 넣어주면 색다른 맛이 있다
-가지와 울금을 넣고 밥을 지으면 색도 예쁘고 밥맛이 훨씬 더 좋아진다.
먹방이 단연코 대세다. TV를 틀면 맛있게 먹는 화면들이 이제는 식상할 정도다. 그런데도 식생활은 중요하기에 간간이 요리 프로그램을 본다. 농어민을 응원하는 프로그램이나 소규모 자영업자 식당을 찾아가 애환을 듣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방송을 보면서 식재료 정보나 요리법의 깨알 팁을 얻기도 한다. 요즘에는 맛을 잘 아는 스타들이 그들만의 환경에서 만들어내는 요리의 필살기가 인기다.
연예인들의 주방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과연 주방일을 어떻게 할까. 그릇을 좋아하는 나는 그들이 어떤 감각으로 플레이팅을 하는지도 눈여겨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요리를 평가단들이 평가하고, 승리하면 편의점에서 출시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신상 출시 편스토랑'은 요리 정보는 물론이고 이런 호기심들을 해소해준다.
스타들이 만들어내는 요리는 다양하다. 또 간단한 듯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쉽게 구하기 어려운 희귀 재료가 나올 때도 많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괴리감이 들 만큼 유난한 주방 도구와 호화로운 인테리어는 그저 눈요깃감으로만 좋을 뿐이다. 버터나 치즈가 넘쳐나는 요리 과정을 보면서 출연자들이 “오, 맛있겠다”를 연발할 때는 느끼한 음식에 진저리치는 나와는 너무 달라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트로트 가수 진성이 이 프로그램에 나왔다. 생각 외로 소박하고 진솔한 일상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이 무심코 봤는데 볼수록 식생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놀랄 만큼 특별했다. 그의 일상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진성은 ‘면역력 밥상’이라는 주제로 요리를 했다. 대부분의 재료는 그가 가꾸는 텃밭에서 가져왔다. 바쁜 스케줄에 쫓기면서도 텃밭을 가꿔 채소를 키워내고 직접 장까지 담그는 걸 보고 놀랐다. 생소하고 진귀한 약재로 발효시킨 발효액들은 자연 조미료가 됐다. 밀짚모자를 쓰고 밭에 들어가 주렁주렁 달린 토마토를 따서 크게 한입 베어 물더니 “신선도 A++급 무공해니까 밭에서 따 바로 먹는다”고 말했다. 신선한 식재료가 풍성한 텃밭과 거기서 수확한 채소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부러울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요리 솜씨였다. 텃밭에서 따온 몇 가지 재료로 직접 담근 효소를 이용해 부추 돌나물 샐러드, 오가피순 간장 무침, 돼지감자 물김치 등 건강 밥상을 뚝딱 만들어냈다. 한때 식당을 운영한 경험도 있었다는데, 요리를 해내는 노련한 손놀림이 역시 남달랐다.
진성이 자연식을 하기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때 림프종 혈액암과 심장판막증을 동시에 진단받아 한 달에 체중이 20kg이나 줄고 걷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고통스런 수술과 투병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연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를 찾아서 먹게 됐고, 그로 인해 다시 건강을 회복한 사연을 들려줬다. 그 시절 아내는 남편을 위해 항암에 좋다는 약초를 따다가 절벽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단다.
그는 눈물겨운 아내의 헌신과 항암 비법이 담긴 자연 밥상을 소개하면서 “이제 이 모든 것을 필요한 이들에게 알려드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함께 출연한 개그맨 이경규가 그에게서 살짝 허준이 느껴진다고 농담할 정도로 식재료에 훤한 지식을 자랑했다. 진성은 건강식의 아이콘이 되어 좋은 나눔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픈 분들에게 직접 담근 발효액을 보내주고 지인들과는 청국장을 나누기도 한다.
요리를 하며 구수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에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이의 깨달음과 여유와 너그러움이 묻어났다. 간간이 특유의 사투리를 쓰며 던지는 긍정의 유머는 음식 맛을 돋우는 조미료가 됐다. 그는 가수로서도 신화 같은 존재이지만, 소탈한 웃음과 함께 건강 정보까지 선사하는 건강 전도사로서도 손색없어 보였다.
여유롭게 유기농 간식을 먹던 그가 문득 옆에 있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식으로 자화자찬을 하며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순간 잡지 표지에 나온 사진이 낯익다. 아니,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아냐? 지난 8월호의 모델로 표지를 멋있게 장식했는데, TV로 다시 보다니!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 61세, 액티브 시니어다.
동서양 구별 없는 글로벌한 음식을 우리는 날마다 접한다. 이럴 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먹거리로 투병을 이겨냈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태풍이 서너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농가의 시름이 한가득이다. 누구라도 우리 농산물 소비 촉진에 참여할 때다. 신선한 우리 농산물이 건강의 첫걸음이다. 괜히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아니다.
아내 외에 진성이 고마워하는 사람이 또 있다. 올여름에 집에 초대할 두 명을 꼽아 달라고 하자 그는 서슴없이 탤런트 김성환과 가수 남진을 말했다.
“무명 시절 야간업소를 전전할 때 김성환 씨를 알게 됐어요.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연기자이지요. 제가 아플 때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가슴속으로 늘 형님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진 형님도 수십 년 전부터 저를 만나면 항상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노력하면 언제든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셨죠. 대중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중가수의 참모습을 두 분에게서 봅니다.”
그렇다면 가수 진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저는 시골에서 자란 촌놈이에요. 어렸을 때 마음먹은 거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히트곡 한두 개 만들면 ‘그 친구 그런 대로 노래는 좀 했지’라고, 그렇게만 기억해주면 인생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해요. 인생에는 음과 양이 있는데 양은 언제든 음으로 변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너무 칭찬하면 불안해요. 그냥 ‘그 가수 괜찮았어’ 하면, 그 정도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성다움은 ‘진정성’에 있다
진성은 이제 다수의 오리지널 히트곡을 보유한 트로트계의 스타로서 ‘괜찮았다’라는 평가 이상을 받는 가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존경한다는 남진처럼 적극적이고 꾸준하게 자기관리를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못난놈’, ‘상팔자’ 등 신곡 4곡이 담긴 EP를 발매하고 적극적인 예능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년에 올해의 계획을 세워놨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대중과 가깝게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방송을 많이 하는데 방송의 본질을 잘 알고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얼굴을 그저 알리는 데 포맷을 맞추다 보니 ‘오버’도 하고 더러 눈살 찌푸리게 하는 행동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모습이 제가 봐도 좋지 않아 보일 때가 있어요. 물론 버라이어티적 관점으로 보면 그런 재미도 필요하지만, 그 경계를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정성 있게 가는 게 진성답다’라는 얘기를 많이 듣기도 하고요,”
나이 들면서 좋아지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완숙미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는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했다.
“멋지게 나이 들려면 자신을 낮추면 돼요. 옛날 얘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잖아요. 우리 나이가 되면 그걸 터득해야 해요. 저는 100%는 아니지만 이제 50%는 겨우 알 거 같아요.(웃음)”
최고의 음악 선보이며 마무리하고파
진성은 40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노후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어 불안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젠 먹고살 만한 정도는 됐고, 홀가분해졌다고.
“히트곡이 한두 개 더 나와줬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하지만 일흔을 넘어서까지 노래를 하고 싶진 않아요. 60대 중후반 정도에 은퇴할까 생각 중입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지만 그간의 삶이 쉽지만은 않았던 때문일까. 그는 이미 30년 전부터 은퇴 나이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가수로서의 진성을 볼 수 있는 시간은 5~6년 정도 남은 셈이다.
“노래 봉사도 눈동자가 살아 있을 때 해야죠.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자리를 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과거의 그처럼 지금도 수십 년째 무명생활을 하고 있을 누군가가 생각나서일까. 그러나 당장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진성을 사랑하는 팬이 있고 코로나19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라도 더 그렇다.
“지금 전국적으로 행사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방송에 매진하다 보니 팬들과 가깝게 교류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고요. 하지만 가수를 일 년 하고 끝낼 것도 아니고 몇 년은 더해야 하니까 좋은 시절이 오면 여러분 곁에 가고 싶어요. 저는 라이브 가수예요. 좀 더 내실 있는 음악을 만들고 선보이면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어요.”
“바쁘니까 행복한 게 많이 없어졌어요.”
지금 트로트 열풍에 휩싸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가수 진성(61)에게 행복에 관해 묻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수십 년에 걸친 오랜 무명생활 끝에 ‘태클을 걸지마’, ‘보릿고개’, ‘안동역에서’ 등으로 육십이 넘어 전성기를 맞이한 그는 요즘 방송가의 가장 뜨거운 블루칩이다. 그런 그가 “행복한 게 많이 사라졌다”는 말을 한다. 거친 쇼비즈니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고민처럼, 혹은 그 누구보다 격렬한 인생 후반전을 치르는 이의 깨달음처럼 들려왔다. 진성의 목소리로 삶과 노래, 그리고 다짐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40년 동안 가수로 지내면서 히트곡 하나 내기 위해서 부단히 달려왔잖아요? 히트곡이 나오는 그 순간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인터뷰를 하며 진성은 세상살이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지내왔다고 고백했다. 개인의 상상을 초월한 곳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에고이스트로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관계를 제대로 못했다”는 진성의 고백 뒤에는 그만의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60년생인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기구함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이 가정불화로 집을 나간 후 고아가 됐다. 겨우 세 살 때였다. 할머니가 계시긴 했지만 중풍으로 얼마 못 살고 돌아가셨기에 그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열한 살 때 부모님이 극적으로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됐지만, 차라리 안 만나느니만 못한 관계였다. 결국 가족들은 다시 헤어졌다.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야간업소에서 서빙을 하고 노래도 하는 거친 인생살이를 시작한다. 그러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삶의 고단함은 이후 30여 년간 계속될 길고 긴 무명가수 생활의 출발이기도 했다. 2012년이 돼서야 ‘안동역에서’가 히트를 치고 안동역에 비석이 세워질 정도로 대성공을 했지만 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혈액암과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았다. 진성은 성공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고된 투병 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그의 지나온 삶을 보면, 헤어진 부모에 대해,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불운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자라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가 스스로 칭한 ‘에고이스트’란 거친 세상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쌓아야 했던 어떤 보호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안동역에서’가 히트를 친 후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자 그 보호막이 문제가 되었다.
맨주먹으로 이룬 성공
“체력적으로도 사람 관리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오해를 많이 샀어요. 소개를 받아도 사람들을 관리해본 적이 없어요. 명함을 하나 받고 한두 달 전화 안 하면 상대가 저를 건방지다 생각하겠죠. 그런데 저는 그 사람과 가는 길이 달라요. 그게 제 아집이었지. 앞으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 체력이 안 되니까.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선생님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제 생활 자체로도 힘들다’고 말해주죠.”
진성의 ‘아집’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그는 수십 년 동안 오롯이 혼자서 싸우고 극복했다. 사람들을 동원하거나 지인들을 통해 노래해온 사람이 아니다. 민초처럼,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남아 성공했다는 자존심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무명생활이 너무 길어서 고생을 해도 ‘이게 고생인가?’ 하며 무심히 살았어요. 그게 제일 큰 장점이죠. 덕분에 트로트 막차를 타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좌절감에 술도 많이 먹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면서 인생을 허투루 살았다면 종착역에 아름답게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전한 사고방식도 도움이 됐다고 봐요.”
모든 아름다움은 겸손에서 나온다
인터뷰 중에 진성은 거듭 뒤를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생의 최전성기인 지금 그가 보이는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그 누구보다도 삶의 질곡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욱 진정성 있게 들렸다.
“모든 아름다움은 겸손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언제부턴가 저는 돌다리 두드리며 건너듯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았어요.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즐겁게 살기 위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잘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스로 뿌린 것들을 잘 가꿔야겠다는 책임감도 생기고요.”
갑작스럽게 성공한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소위 ‘졸부 의식’을 그는 철저히 경계한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성격이 다 다르고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상대를 먼저 배려하기보다는 내 기준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니 안 맞을 때가 있어요. 대중들과 함께하는 연예인은 이런 태도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다가오는 사람을 파악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하고, 마음도 자주 비워야겠죠.”
부부관계는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이뤄져야
나이가 들어도 인간관계가 여전히 서투르다고 말하는 진성이 가장 아끼는 이는 그의 곁에 있는 아내다. 오십이 돼서야 아내와 공식적인 부부가 됐다. 그는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해했다.
“아내는 저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것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집에 와서 괴로워할 때가 있죠. 그런 모습을 안 보이려고 해도 저도 모르게 내색을 하곤 했죠. 그래도 다 받아주는 아내를 보며 스스로 이겨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팠을 때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아내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아내를 생각하면 그냥 고마워요.”
그에게 있어 아내는 이제 믿음의 대상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말하는 부부관계의 해법도 믿음에 있었다.
“요즘은 옛날보다 이혼율이 높잖아요. 사랑이 바탕에 깔려야겠지만, 50대가 넘어가면 정열적인 사랑은 퇴색하죠. 그래서 성공적인 부부관계란 서로에 대한 믿음을 얼마나 쌓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젊을 때는 함부로 말했어도 나이가 들면 그런 버릇을 지양하고 상대를 아낄 줄 아는 마음도 생겨야 하지 않을까요? 뜨거운 사랑은 아니어도 배려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동 역에서’라는 노래를 폭발적으로 히트시킨 가수 진성이 최근 노래 부른 ‘보릿고개’를 들으면 가난했던 옛날기억이 떠오른다. 보릿고개란 예전에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로서 음력 3, 4월에 해당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쌀이 없어서 밥을 굶은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면 쌀이 없으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보릿고개 시절을 통 모르는 아이들에게 보릿고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애창가요로 사랑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보릿고개의 전설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내가 겪은 6.25이야기처럼 내가 겪은 보릿고개 이야기를 토해내어 우리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들이 똑 같은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보릿고개를 몸으로 직접 겪었고 눈으로 참상을 봤고 더 참혹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먼저 진성이라는 가수가 부른 보릿고개라는 노래의 가사를 들어보자.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흉년에 콩죽 한 그릇하고 논 서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배고픔은 참기 힘들다. 부잣집에서 초봄에 쌀 한가마니를 장리쌀로 빌리면 가을에 추수하면 한가마니 반을 갚아야한다. 이자로 치면 10개월에 50%인 셈이다. 과히 살인적이다. 장리쌀을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덜익은 보리를 먹어야 한다. 보리가 덜 여물면 껍질을 벗기는 방아를 찧을 수가 없다. 보리이삭을 낫으로 잘라서 가마솥에서 덖으면 익으면서 딱딱해진다. 이를 대충 껍질만 벗겨서 밥을 한다. 이 밥을 삼킬 때 목이 뜨끔뜨끔 할 정도로 보리가시가 목을 찔러댄다. 물로 배를 채운다는 말이 있는데 소금이라도 먹어야 물이 삼켜지지 그냥 물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먹었다고 하는데 무었을 먹었을까? 산나물이나 쑥을 많이 채취해서 먹는다. 나물 자체만으로는 반찬이나 되지 요기는 될 수 없다. 밀가루나 하다못해 보릿가루라도 있어야 버무려 쪄서 식사대용으로 한다. 뿌리로는 칡뿌리에서 녹말을 내어 먹었다. 아이들이 칡뿌리를 학교에까지 들고 와서 먹었다. 목피라고하면 나무껍질인데 대표적인 것이 소나무 속껍질이다. 이것은 워낙 딱딱해서 그냥 먹을 수는 없다. 먹으면 죽는다는 양잿물을 넣고 삶으면 부드럽게 풀어진다. 이를 물에 담가 양잿물 독성을 빼고 먹었다. 거의 섬유질로 구성된 음식을 먹으니 변 보기가 어렵다. 위장의 기능이나 배변 힘이 약한 노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보릿고개를 넘은 사람은 다행이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해 장리쌀에 손을 대면 자식을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거나 농토를 팔아야 했다.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토를 헐값에 파는 것이 그나마 살길이다. 자기의 농토가 줄어들면 다음해는 더 고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논 한마지기 사려고 하지 말고 입하나 덜라고 했다. 새 중에서 제일 큰새가 먹새라고 먹을 입인 식구를 줄이는 것이 필요했다. 딸은 남의 집 식모로 공장으로 보내고 아들은 머슴으로 이발소나 관공서 사환으로 취직했다.
어렸을 적에는 가난은 개인이 게으르거나 부모를 잘못만난 탓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이유의 대부분은 지배계급의 착취가 바탕에 있다. 장리쌀의 횡포도 그렇거니와 남의 농토를 경작하면 가을에 추수해서 절반씩 나눈다. 하지만 나쁜 지주는 미리절반의 수확을 정해놓고 흉년이 들어 수확이 형편없는데도 약속된 절반을 가져가버린다. 불공정계약이지만 소작인은 힘이 없으니 대항할 수가 없다. 이를 잘 아는 위정자들이 가난한 소작농을 보호하기는커녕 지주와 한 통속이 되어 착취자의 편에 섰다.
지금의 세상은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부모세대보다 훨씬 공정하고 살기 좋은 세상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의 세상이 살기어렵다고 헬 조선이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우리 부모세대의 보릿고개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열심히만 살면 배고픔에서는 해방된다. 대통령께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참혹한 보릿고개는 이제는 없는 세상이다. 보릿고개라는 단어도 우리세대를 끝으로 모두의 기억에서 잊어지기를 희망한다.
은퇴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로 살 수 있다는 등 제2의 인생에 대한 말도 많다. 하지만 그 달콤쌉싸름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전하려고 하면 어렵다. 무슨 일이든 첫 시작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베테랑 보험설계사가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자신감 하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황보환(黃寶煥·52) 메트라이프 보험설계사. 그는 얼마 전 트로트 가수 하진필이라는 이름으로 ‘난 당신 편이야’를 녹음했다. 보험설계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경력을 가진 그가 트로트 가수라는 외도를 과감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명 황보환. 메트라이프의 베테랑 보험설계사로서 자신만의 탄탄한 영역을 갖고 있는 그는 최근 하진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멋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과감한 선택을 위한 준비를 나름 충실히 하고 있다. ‘행사’를 뛸 준비를 신경 써서 갖출 정도로 말이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기념으로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해서 가죽 재킷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요새 패션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어요(웃음). 아는 사람들이 보더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입냐고 타박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패션이 트로트 행사용으로는 어필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인연을 통해 이어진 트로트 가수로의 길
보험설계사가 갑자기 가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된 걸까?
“10여 년 전부터는 CEO 위주로 보험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CEO 과정에서 일 년 정도 성악을 배우게 됐어요. 거기서 작곡가 최왕국 교수님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제게 가곡을 하나 선물해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이라는 노래였어요. 그 후 최 교수님이 이번에는 트로트 곡을 작곡했다고, 저에게 맞을 것 같다며 주시더군요. 그러니까 트로트 가수를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고 급작스럽게 이뤄진 거죠(웃음). 그런데 저도 이게 제2의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조금씩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하진필씨는 아직 트로트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데뷔를 위해 트로트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아직 성악 톤을 완전히 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과 함께했던 인생
하씨의 도전이 마냥 뜬금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음악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는 청소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학력고사 세대인 그는 옥상에 올라가 자주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고 한다.
“제가 84학번인데 대학가요제를 나가서 1차 예선은 붙었지만 2차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갑작스럽게 출전 일주일 전에 후배 여대생을 소개받고 듀엣을 하게 됐죠. 300여 팀에서 50팀 뽑는데 통과가 되더라구요. 사실 너무 쉽게 통과한 거예요. 연습도 많이 안 했고. 그때 선배님이 작사 작곡을 해주셨는데, 사회운동을 많이 하던 때라서 가사가 사회 풍자적이었죠. 결국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제게는 큰 추억이 됐습니다. 그때 대상을 유열씨가 탔어요. 이정석씨는 제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299번, 이정석씨가 298번이었죠.”
그는 또 모교인 연세대학교 100주년을 기념해 연세글리클럽이 조직됐을 때 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봉사로 노래를 하고 합창단원으로 행사를 뛰는 등 노래와 함께한 그의 삶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보험설계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계속 억대 연봉이었죠. 보험 업계에서 19년 일하면 굉장히 오래한 겁니다. 저는 외국계 보험사에서 일한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외국계 보험사는 90년대 초반에 들어왔거든요.”
그는 한국타이어에서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큰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6년 담당하며 9년동안 다니고 그후 푸르덴셜에 입사하여 영업을 하다 부지점장 업무를 맡으면서 8년을 다녔다. 당연히 사람 관리가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럴 바에는 다시 영업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메트라이프로 옮긴지 12년 째다. 메트라이프에서는 중소기업 CEO 위주로 보험설계 업무를 맡고 있다.
한 달 만에 첫 트로트를 녹음하다
“최왕국 교수님과 통화하다 보니까 저를 위한 트로트 곡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보자 해서 다음 날 만났어요.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난 당신 편이야’래요. 그 제목이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누구라도 끝까지 자기편이 돼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잖아요. 악보를 받아 가사를 보니 가사 내용도 너무 좋은 거예요. 멜로디도 너무 쉽고.”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들자 트로트 가수를 해보자는 마음도 먹게 됐다. 그는 곧장 보컬 트레이너를 소개받아 트레이닝을 받고 불과 한 달 만에 노래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런데 제가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후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열악하죠(웃음). 그래서인지 믹싱 작업이 약간 잘못돼서 제 목소리가 작게 나왔어요. 조만간 수정할 예정입니다.”
트로트 가수로의 삶을 선언한 그에 대한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의외라는 사람도 있고 ‘너에게 딱 맞는다’ 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된 일이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수로 데뷔했으니 앞으로 노래 부르는 게 경제적인 부분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가수 데뷔 전에는 동기들하고 노래 봉사도 다녔어요. 생각해보니 봉사 때는 묘하게 트로트를 많이 불렀네요. 그리고 저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트로트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친구들도 네가 하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는 트로트를 배우게 되면서 트로트의 넓은 세계를 새삼 깨닫게 됐다.
“진성씨의 ‘안동역에서’라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였는데, 어느 날 친구가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작년부터 뜨는 노래라고 하더군요. 안동역에는 그 노래의 비석도 있다고 해요. 노래라는 게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노래를 통해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가 베푸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신념과 경험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인생에서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2014년 9월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종합검진을 하다가 우연히 췌장에서 종양을 발견한 거예요. 암일 확률이 굉장히 컸어요. 특히 췌장암은 생존율도 적고 암으로 진단받으면 일 년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검사해보고 암이든 아니든 수술해야 한다 해서 9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죠. 그때 CEO 과정에서 성악했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고, 최왕국 교수님이 제 소식을 듣고 끝이 안 풀리던 가곡 ‘바람이 불어오면’을 마무리했다고 해요.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저는 그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악보를 보자마자 확신이 든 노래, ‘난 당신 편이야’
하씨가 트로트 가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회장이 제 선배예요. 그래서 그분께 ‘이런 곡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문의했죠. 당연히 말리셨죠(웃음). 그분이 워낙 연예계를 잘 아시니까 ‘네가 돈이 있냐, 젊길 하냐, 특출나게 잘생겼냐, 과연 시장에서 먹힐 거냐’ 하는 것들이 의문이었죠. 그런데 지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면 반응은 굉장히 좋아요. 가사도 좋고 중독성도 있고. 사실 이건 좋은 쪽 얘기고, 나쁜 쪽으로는 확 부각되는 게 없다는 얘기가 있긴 했어요. 트로트라면 어떤 부분이 확 튀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확 느꼈거든요.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도 와 닿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곡이든 발라드든 다 좋아했어요. 트로트는 관심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트로트는 이렇다’라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좇고 싶지는 않아요. 특히 너무 튀고 화려한 정형화된 이미지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노래도 좋고 가사도 좋은 트로트 가수로 평가받고 싶어요.”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 이미지에 국한되고 싶지 않아
하씨는 올해 중에 ‘난 당신 편이야’의 녹음을 새로 할 예정이다. 그리고 현재 유튜브에 노래를 올려놓은 상태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그가 앞으로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요즘은 늦은 나이에 트로트 가수로 입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30여 년을 있다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마땅히 박수 받아도 될 일이다. 그는 현실을 냉정히 보면서도 자신의 도전이 앞으로의 삶에 즐거움과 희망과 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디너쇼까지 할 수 있는 경지가 된다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해보고 싶어요. 트로트, 가곡, 발라드… 다만 댄스는 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