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 마실 공간이면 충분하다는 뜻일까. 용암정 별서(別墅)엔 별반 있는 게 없다. 물가에 정자 하나 세우고 끝! 조선의 별서치고 이보다 가뿐한 구성이 다시없다. 별서란 요즘 말로 ‘세컨드 하우스’다. 상주하는 살림집 인근의 경치 좋은 곳에 지은 별장으로, 사교와 공부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었다. 그래 일쑤 멋 부려 꾸몄다. 연못을 파거나 정원을 꾸리고, 객실을 보태기도 했다. 용암정은 다르다. 치레를 극구 삼갔다. 은자의 심중은 허허롭다. 차 몇 잔이면 하루가 가득 찬다. 그러니 정자 외에 무엇을 덧붙일 것인가.
용암정은 거창의 경승지인 위천(渭川) 중에서도 빼어나다는 요수천 계곡에 있다. 예로부터 신선이 살 만한 동천이라 이름난 골이다. 가을이 깊어 물가에 서린 고적한 정취가 짙다. 숲에선 단풍이 곱게 무르익다 못해 어느덧 잎잎이 지상으로 추락한다. 발길에 밟히는 마른 낙엽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짠해 정이 간다. 접때는 은성한 초록 잎이었던 게 순식간에 저물다니. 이게 잎사귀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나. 목숨 가진 것들 모두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다. 나날이 조락으로 가는 길이다. 가을은 이렇게 문득 삶의 순리를 바라보게 한다. 낭만과 여행을 즐기기에 제격인 계절이지만 그 뒷면엔 서러운 게 있다.
용암정으로도 낙엽이 분분히 흩날려 내린다. 고요한 눈길을 매달고 하늘하늘 내려오는 낙엽들. 스산하다기보다 애틋한 정경이라 가슴을 파고든다. 물가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늦가을의 정자 하나. 이는 어쩌면 내향적 풍경의 절정이다. 거기엔 뭔가 사람을 위무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그대여, 지친 마음을 여기에서 내려놓아라, 야윈 등을 기둥에 기대고 까짓것 세상 근심일랑 헹구어라. 정자가 그리 속삭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정자란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센서를 부착한 전위적 시설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안는 시(詩)이자 추상화다. 하기야 정자를 폼 잡자고 지었으랴. 허영으로 지었으랴. 마른 멸치대가리처럼 누추한 게 삶일망정 마음을 돋워 생기를 얻을 방편으로 지은 공간일 것이다. 정자에 올라 자연으로 진입, 뿔과 발톱이 없어도 야성으로 생동하는 초목을 닮고자 지은 ‘정신의 집’일 테다.
용암정은 향촌의 선비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지은 별서다. 그는 행실과 학문이 빼어나 당세는 물론 후세까지 추앙받았다더라. 그의 가문에는 벼슬길에 오르기보다 초야에 묻히기를 좋아하는 풍조가 대대로 이어졌다. 청빈을 삶의 꽃으로 삼았던가 보다. 임석형 역시 가풍의 영향을 받아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백수로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과 권세라면 껌뻑 넘어가는 게 사람이다. 임석형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취직을 한 바 없어 생계는 팍팍했겠지만 배포는 태산이었나? 그는 적게 먹고도 유유하게 노니는 재능을 발휘했다. 일러 안빈낙도다. 생의 절반쯤을 백수로 살며 찬연한 족적을 남긴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조선의 인걸들 중엔 궁색한 호구에도 아랑곳없는 뚝심으로 기차게 활갯짓한 아웃사이더가 많았다. 임석형이 바로 이 늠름한 계보에 속한다. 그는 숲을 소요하는 낙을 최상으로 쳤다. 용암정을 지어놓고 읊조린 노래가 이랬다. ‘이곳에 만약 학을 탄 나그네가 찾아온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숲에서 늙으리라.’
숲 사이 계곡으로는 물이 흐른다.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합쳐진 물길로 수정처럼 맑다. 깊디깊은 산골짝 물도 아닌 것이 티 없이 순수하니 희한하다. 여름철엔 여기서 텀벙, 저기서 풍덩, 물놀이하는 이들이 숱하다. 늦가을의 물은 차가워 물빛조차 푸르다. 파란 유리를 얹어놓은 듯이. 물 위로는 당싯당싯 낙엽이 떠내려간다. 물 아래는 숫제 낙원이다. 크리스털로 세공한 양 투명한 물고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풍처럼 몰려다닌다. ‘초사’(楚辭)에서 어부가 말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다.’ 청정한 물에서 담백한 처신의 방법을 읽은 셈이다. 임석형이 청명한 물을 그윽이 관조할 수 있는 냇가에 정자를 지은 이유가 또렷해진다.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 요란한 소동을 청류로 빗자루 삼아 쓸어냈을 테다. 그런 뒤에야 풍류도 옹골찬 법이다.
물만이 용암정의 뜻과 멋을 돋우는 건 아니다. 보라! 희디흰 기암괴석이 지천으로 널브러져 한바탕 경연을 벌이는 게 아닌가. 물에 발목을 담근 바위들. 바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沼). 바위벼랑을 쏜살처럼 내닫는 물살의 아우성. 이를 일러 임석형은 ‘하늘의 작품’이라 했다. 이곳을 ‘별유천지’라 일컬었다. 물과 바위의 컬래버레이션은 늘 성황리에 펼쳐지게 마련이다. 옛 선비, 자그만 정자 하나 짓고 볼 것 다 봤다. 큰돈 안 들이고 놀 것 다 놀았다. 풍류란 돈으로 살 수 없다. 주저앉은 생각을 탓할망정 주머니 사정 핑계될 일이 아니다.
답사 Tip
위천변엔 호젓한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승을 만날 수 있다. 용암정 위쪽에는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대와 강선정이, 아래쪽으로는 요수정과 수승대가 있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법률가 브리야 사바랭이 1825년 발간한 ‘미각의 생리학’(원제, 한국어판 제목 ‘미식 예찬’)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다. ‘미식과 식도락’의 경전이라 할 이 책은 인류 역사에서 음식을 학문적으로 살펴본 미식 담론의 첫 번째 책으로 꼽히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음식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질병 저항력을 높여주는 신체 면역력이 집중 조명되면서 면역력 향상을 통해 자연 치유력을 높이는 음식과 조리법 등을 너도나도 소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다 보면 건강하게 면역력을 높이고 자연 치유력을 기를 수 있는 식단이란 결국 공통적인 몇 가지로 압축된다. 건강한 식재료 사용, 가공 과정 최소화, 인공 조미료나 방부제, 풍미를 위한 착색제나 인공 향신료 사용 절제 등이다.
이런 담론을 거쳐 새롭게 부상하는 것이 유기농 재료로 구성된 친환경 생채식이다. 환자들이 먹는 특수한 식이요법이라고 생각했던 채식이 유기농과 친환경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한 면역력 체질 강화를 위해 유기농 식재료를 구매하고 채식을 하려는 가정이 늘고 있다.
백화점 식품매장의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던 친환경, 유기농 코너가 그 면적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물론, 1인 가구용 유기농 맞춤 밀키트 배송까지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걸쳐 친환경과 유기농을 향한 마케팅이 뜨겁다.
채식이 유행이라지만 그다지 맛도 없고 만들기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곳을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생채식 전문 식당 ‘날일달월’이다. 각종 신선한 채소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곳은 몸속 독소를 배출하고 면역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 식재료를 기본으로 한 생채식으로 구성한다. 여기에 맛까지 훌륭해 소리 소문 없이 진화 중이다.
유기농 친환경 채소들의 집합소
생채식 식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재료인 채소일 것이다. 어느 친환경 유기농 농장에서 구매하는 것일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어찌 보면 영업 비밀이랄 수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 같이 건강하게 맛있게 먹고 행복하게 살겠다는데 영업 비밀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날일달월의 초록초록 반짝이는 채소들의 원산지를 차례차례 들여다본다.
•쌈채소 전북 남원 사회적협동조합에서 배송
•파프리카 전북 무주와 남원 지지팜에서 배송
•잎줄기 채소 충남 홍성 젊은협업농장에서 배송
•표고버섯 경남 거창 빛솔농장에서 배송
•밤 충북 충주에 위치한 보늬숲농장에서 배송
•당근 & 깻잎 제주도 평대리 부석희 님이 농사지은 당근과 깻잎
•양배추 & 버섯 충북 괴산 박달마을에 위치한 꿈꾸는느티나무농장에서 배송
•양파 & 마늘 경남 창녕 낙붕이네농장에서 배송
•자색양파 & 청오이 전북 부안 총각네농장에서 기른 토종 청오이와 자색양파
•김치 생채소는 아니지만 배추를 발효시킨 김치 역시 채식의 주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음식이다. 날일달월에서는 경남 진주의 법성사 스님이 직접 농사짓고 담근 김치를 배송받고 있다. 종종 경주 김호 장군 종가집 종부의 김치도 테이블에 올라온다. 이밖에도 여희숙 대표가 회장으로 있는 전국의 도서관 친구들이 인근 로컬 농장에서 추천하는 건강한 채소를 필요할 때마다 배송받고 있다. 이외 채소류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자연드림’에서 신선한 것으로 구입한다.
몸속 독소 빼주고 면역력 높여주는 해조류 맛 일품
재료가 신선하면 그 자체가 훌륭한 음식이 되는 대표적인 식재료, 해조류. 그래서 해조류는 재료를 걷고 손질하는 정성이 더욱 중요하다. 날일달월에서 사용하는 해조류는 김, 미역, 다시마, 톳, 꼬시래기 등으로 다양하다.
•김 전남 장흥 김양진 님이 생산하는 무산 김
•미역 자연식 식재료 청미래의 자연산 미역
•다시마 전남 장흥 이승호 님이 청정 해역에서 채취한 다시마
•톳 & 꼬시래기 전남 장흥에 위치한 에벤수산의 제품
생채식에서 빠질 수 없는 식물성 단백질 보고, 두부와 콩물
생채식 메뉴에서 빠질 수 없는 두부는 생식에 알맞은 식물성 단백질 보고다. 전북 전주에 위치한 함씨네에서 직접 만든 토종 콩물과 두부, 순두부를 날일달월에서 선보인다. 또한 각종 소스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이는 발효효소들도 전국 각지에서 배송된 제품을 엄선해 사용한다.
•발효효소 변산공동체에서 만든 생강청과 자하생강가루, 경남 하동에서 만든 매실효소, 경남 함양의 오미자청과 양파효소, 버섯균사체 발효 특허품인 현미와 17곡물 발효효소 등이 소스에 사용된다.
디저트를 책임지는 견과류
•생견과 충북상회 광희네 작품이다. 해바라기씨와 호박씨, 아몬드를 72시간 정제해 만들었다.
•잣 경기도 가평은 한국의 유명한 잣 생산 가공지다. 날일달월의 디저트에 들어가는 잣은 경기도 가평 살구재에서 생산된 으뜸 잣을 사용하고 있다.
•대추 충북 보은 국악대추농원에는 유기농 대추가 주렁주렁 열린다. 열린 대추를 날일달월에서 맛볼 수 있다.
전국 제철 과일
•포도 경기도 가평 아름농장
•사과 충북 괴산 가을농원 선녀와 나뭇꾼의 껍질째 먹는 사과
•깐 밤 충북 충주 보늬숲 밤농장
•유기농 감귤 제주도 응모루농장 / 제주도 김건호농장 / 제주도 서귀포 김상현농장
•바나나 자연드림
•단감 & 블루베리 경남 의령군 고상근농장
재료 고유의 맛, 샐러드는 이렇게 만들어요
1 샐러드는 잎채소, 줄기채소, 뿌리채소가 10가지 이상 골고루 들어가게 한다. 요즘 만드는 샐러드에는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에서 공수해온 치커리, 적근대, 적치커리, 케일, 깻잎, 양배추, 트레비소, 겨자채, 뉴그린, 고구마, 당근, 양파 등이 들어간다.
2 먼저 양배추와 적양배추를 채썰어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놓는다. 양배추 물기 빼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한다.
3 양배추 다음에는 잎채소들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놓는다.
4 물기가 마르는 동안 고구마와 당근을 잘게 채썰어둔다.
5 양배추와 고구마, 당근이 준비되면 씻어놓은 잎채소에 남은 물기를 깨끗한 행주로 닦는다. 맛있는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기 제거가 가장 중요하므로 잎채소 한장 한장 깨끗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후 잘게 채썰어놓는다.
6 큰 볼에 잘게 채썰어놓은 채소를 모두 넣어 골고루 섞어준다. 7 양파는 따로 채썰어두었다가 샐러드 먹기 바로 전에 섞는 것이 좋다.
샐러드소스
1 무는 무쌈처럼 얇게 썰어놓고 일부는 깍둑썰기한다.
2 유기농 황설탕, 자연드림 현미식초와 물을 1:1:1 비율로 섞고 빛소금은 1큰스푼 넣는다.
3 2~3주 숙성시킨 후, 무쌈은 건져내 해조류나 채소를 싸 먹는 쌈으로 준비하고, 숙성시킨 액체는 잘 섞어 샐러드소스로 사용한다.
오행현미죽과 오행현미밥 만들기
1 영산농원의 신선한 오행현미를 발아시키고 깨끗이 씻어 그늘에서 일주일 이상 잘 말린다.
2 천천히 충분히 말린 오행현미를 방앗간에서 살짝 빻아 가루로 만든다.
3 찬물에 가루를 풀어 잘 저어가며 빠른 시간에 살짝 끓여 빛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4 정제한 견과류와 참깨를 얹어 오행현미죽을 완성한다.
✽오행현미밥은 오행현미와 찰현미를 섞어 밥을 짓는다.
맛있는 채식의 조건, 채소 맛을 깊게 해주는 레시피
▶쌈된장 만들기
1 오래 숙성시킨 약된장에 양파효소, 매실청, 생강청을 넣는다. 2 현미와 17가지 곡물 발효효소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상온에서 하루 동안 발효시킨다. 3 충분히 발효된 된장에 수수조청과 원당으로 맛을 낸다. 4 상에 내기 전 마지막에 참기름과 통깨를 넣어 섞는다.
▶초고추장 만들기
1 오래 숙성한 전통 고추장에 고춧가루와 매실효소, 양파효소, 오미자청, 생강청을 넣는다. 2 현미와 17가지 곡물 발효효소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상온에서 이틀 동안 숙성시킨다. 3 충분히 숙성된 초고추장에 수수조청과 원당, 현미식초와 빛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통깨를 넣어 섞는다.
▶양념간장 만들기
1 숙성된 죽염 약간장에 양조간장을 반반 넣고 고춧가루를 넣은 후, 매실효소와 양파효소, 생강청을 더한다. 2 현미와 17가지 곡물 발효효소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상온에서 하루 동안 숙성시킨다. 3 충분히 숙성된 간장에 수수조청과 원당, 빛소금으로 맛을 낸다. 4 여기에 다진 파, 생들기름, 통깨를 넣어 양념간장을 완성한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군 장수군과 경상남도 거창군 함양군에 걸쳐져 있다. 최고봉인 향적봉의 높이가 1614.2m.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 하여 덕유산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단다.
예년 같으면 10월 마지막 주말이 단풍이 가장 절정일 시기일 텐데 올해는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단풍색이 조금 아쉬운 정도였다. 그러나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서 점점 더 진한 색의 단풍을 만날 수 있다. 설천봉에 도착하니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찬바람에 몸이 움츠러든다. 그래도 코끝이 찡할 정도로 밀려오는 상쾌한 공기는 가슴까지 시원하게 뚫어주는 듯하다.
향적봉에 오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주의 덕유산 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다. 대략 20여 분을 타고 올라가면 설천봉에 도착하고(1520m) 거기서부터 600여 미터를 더 가면 향적봉에 오를 수 있다. 다소 부담되는 비용(대인 16000원 소인 12000원)이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편하게 보고 나면 결코 아깝지 않은 금액이라고 느껴진다.
10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최소한 하루 전에 인터넷 예약을 해야 곤돌라를 탈 수 있다.
우리 일행 중에는 다리가 불편한 분이 있어서 향적봉까지는 못 갔지만, 단풍과 탁 트인 전경, 시원한 산바람으로 제대로 에너지를 충전했다.
걷는 게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분들에게 덕유산 곤돌라 단풍 구경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인생을 2모작도 아닌 5모작까지 치르고 지금은 6모작을 준비 중이라는 사람, ‘N잡러’ 장필규 행복 제1연구소 소장은 1955년생으로 정확히 베이비붐 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100% 베이비부머다. 그는 요즘 프리워커로서 고용노동부 내공강사, 노사발전재단 전문강사, 경기도 6차산업 현장 코칭 컨설턴트, 인천농촌융복합 현장코칭 전문위원 등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년이라는 단어가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는 셈. 장차 6모작을 넘어 9모작까지 완성하는 게 꿈이라는 그가 말하는 인생 후반기의 삶과 잡(job)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제 인생의 4모작은 50플러스재단 컨설턴트였고, 5모작은 N잡러로 활동하는 지금이죠. 이제 6모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시니어에게 일은 새로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여행하듯이 즐거움을 찾는 거지요.”
‘N잡러’ 장필규 씨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일하고 있다. 현재 그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지방자치단체의 컨설턴트와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9모작을 최종 목표를 두고 6모작을 준비하기 위해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다.
“환갑을 넘어 케어를 받아야 할 사람이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고 집사람이 잔소리를 하네요.(웃음) 그런데 저와 같은 나이대에도 취약 계층이 있을 거예요. 제 연배의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예전에 거창에서 일할 때 요양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나도 머지않아 그분들과 같은 입장이 될 텐데 이야기 들어주고 도와주니 즐겁더라고요.”
퇴직 없는 삶 위한 평생현역 꿈꿨으나…
그의 이름에는 베풀 장(張), 도울 필(弼)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줄 때 베풀고 도와주라는 의미로 새긴 게 아닐까. 현재 그의 모습은 이미 숙명처럼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건국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81년 두산그룹 계열사인 배합사료 회사 두산곡산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이 펼쳐지던 시기였고 그의 삶 또한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그도 사회적 환경에 따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그에게 던져진 자리는 두산종합식품 식품사업 부문의 김치공장 관리부장. 고민을 했지만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김치공장으로 간 그는 관리부장, 공장장을 거치며 10여 년간 김치 제조의 일선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사 주인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두산이 식품사업 부문 전체가 대상에 매각될 때 그는 6년 후배가 상사로 승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는 대상 소속으로 2년 정도를 더 지내다 2008년 4월에 퇴직한다.
끊임없는 도전, N잡러로 거듭나다
54세의 나이, 인생 1막이었던 대기업 직장인으로서의 27년은 끝이 났다. 삶에 대한 허무감과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치주염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아야 했던 그는 수술 후 재취업을 도와주는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찾아가는 것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이력서 작성법, 면접 스킬 등을 교육받은 그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농업 최고경영자 경영대학원 과정에 합격한 뒤 몇 번의 테스트까지 통과하며 마침내 울진농수산물유통농업회사법인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토록 고생하며 올라간 자리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결국 대표 자리를 그만둔 그는 마침 일본 회사와 울진군의 합작 회사인 울진로하스코리아에서 대표 제안을 해와 CEO로서 3년을 지냈다.
“인생 2막의 과정은 지방에서 CEO로 일을 하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면서 재무 문제도 해결되고 가족관계는 물론 건강도 좋아졌죠.”
울진로하스코리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2012년 말부터 일자리희망센터를 찾고 취업박람회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농촌진흥청에서 마케팅 전문위원으로 인생 3막을 펼쳤다. 이곳에서 5년간 근무하며 농가 500곳을 대상으로 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이어 서울시 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고용노동부 등지에서 강사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4막의 장을 펼쳤고 진정한 N잡러가 되었다.
수입 적더라도 즐거움 주는 천직 찾아야
“이제 베이비부머들은 잡(job)이 아니라 워크(work)를 해야 해요. 워크는 천직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천직을 찾아야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시니어 구직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묻자 제2인생에서는 일이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일이 놀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다. 수입은 적더라도 길게 오래할 수 있는 천직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그가 N잡러로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의 직업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적어도 세 개 내지 다섯 개는 가지고 있어야 과거 연봉의 절반 정도가 되죠. 특히 시니어는 공부를 위한 비용이나 손주들 용돈, 네트워크 유지비 등 지출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가 또 강조하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 관계의 유연성이다.
“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제 주위를 보면 어떤 사람과는 케미가 맞지 않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그건 취향이기에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순 없죠. 다만 기왕이면 유연성을 갖고 적을 만들지 말아야 평화롭고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 유연함으로 세상 대하기
그런데 삶의 부침들을 겪으면서도 마음의 유연성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걸까?
“어느 접점에 있든 열린 마음을 실천하는 겁니다. 역지사지라고 하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많아져요.”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 그는 도전적이라기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해온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결과도 그의 열린 마음 덕분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박사학위를 가진 시니어도 일에 대한 욕망이 뜨거워요. 그런데 한국인은 디테일에 약해요. 그래서 매뉴얼이 있어도 막상 긴박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써먹지 못합니다. 습관화가 안 된 게 문제입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계속 반복하고 고치고 훈련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구직을 하려면 ‘어떻게’에 관한 디테일한 액션 플랜을 짜서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테스트에 통과하며 자신의 자리를 잡은 그이기에 신뢰가 갔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천직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는 그도 구직자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구직자들을 상담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삶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양쪽을 다 경험해본 그에게 두 입장에 대해 물어봤다.
“구직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들은 고객 니즈에 맞게 세분화, 효율화되고 향상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시도가 진행되다가도 중간중간 끊기더라고요. 그게 아쉽죠. 그리고 구직자들의 입장을 보면, 그래도 구직을 위해 오는 사람들은 열정이 있는 거예요. 흔히 퇴직하면 ‘또 직장생활을 해야 해?’, ‘날 찾아주는 데는 없어’ 하며 의욕이 없는 경우가 많죠. 목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퇴직하는 순간 놔버리는 거예요. 물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무책임한 거죠. 그런 심리를 어떻게 끌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그는 은퇴자 혹은 퇴직자들이 자기진단을 해보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적합한지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자신을 파악하고 일을 찾다 보면 현실의 갭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걸 인내하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인 중에 20년 동안 독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말하길 ‘결론은 나를 찾게 되더라’ 하더군요. 나를 찾는 노력을 하고 준비하면 일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 주위의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욕심의 분모 줄이면 행복이 찾아온다
자신이 이 사회에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때 더욱 의욕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 그는 100세 김형석 교수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은 것’이라고 한 말을 다시 전한다.
“사람은 일이 있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어요. ‘60~65세가 자신의 황금기였다’는 김형석 교수님 말에 공감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N잡러 장필규 소장은 자신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소욕지족(少欲知足)에 비유했다. 행복해지려면 욕심의 분모를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의 분모를 자꾸 키우면 내려놓기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100분의 60과 60분의 60을 비교해보세요. 후자는 60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죠. 이렇듯 분모를 줄이면 60분의 60이 1이 되듯 가벼워집니다.
‘1’과 ‘일’처럼 디테일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 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결국 ‘1’과 ‘일’처럼 은퇴 후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있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죠.”
노후에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 많고 적음을 떠나 돈과 건강, 관계, 여가 등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강조하는 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고 여행하듯 사는 게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담대하고,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김영철 건국대 명예교수가 세상을 먼저 떠난 제자 N 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N 군, 그간 잘 있었나. 자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년 전 자네 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 먹던 때였구먼. 그리 서둘러 떠날 줄 알았으면 고급 탕수육이라도 시켜 먹을 걸 후회가 되네. 이젠 먼 세상에 있어 이 편지를 받을 수 없겠으나 위로와 후회를 대신하여 글을 써보네.
제임스 힐턴의 소설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제자들이 학교를 떠나도 칩스 선생에겐 앳된 제자들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제자들의 생장점은 멈추고 영원히 학창 시절의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였네. 그렇듯이 친애하는 제자 N 군 자네도 팔팔한 청년 시절 모습으로 내 기억에 살아 있네.
자네를 처음 본 것은 밀양 낙동강변 유천 소풍 때였네. 선글라스를 쓰고 풀밭에 누워 있던 모습이 마치 알랭 들롱의 현신 같았네. 우리 과에도 저런 멋진 청년이 있나 싶었지. 그 도도하고 거만하기조차 한 자네가 가장 친애하는 제자로 남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네. 그날 자네와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지. 내게 자꾸 권하던 막걸리 덕분에 경부선 열차 추돌사고를 면한 기억이 나나? 수십 명의 인명 사고가 난 바로 그 열차를 타기로 했는데 자네가 권해서 마신 술 때문에 결국 다음 열차를 타고 말았지.
“선생님 한잔 드시고 강물처럼 흘러가입시더.”
그 절묘한 표현에 빠져 한 잔 두 잔 마신 술 덕분에 결국 기차를 놓치고, 사고를 면했지. 지금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네.
보기와는 다르게 자네는 인정도 많고 풍류를 아는 멋진 학생이었네. 넉넉지 않은 향토장학금으로 동기들,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인정을 베풀었지. 덕분에 등록금까지 날려 먹었다는 소문도 들었네. 아마 대구대 국문과 학생들 중에서 자네의 밥 한 끼, 술 한잔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네. 자네는 살아 있는 산타요, 후원자였지.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고 친구들을 좋아하다 보니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지. 학과 행사에 빠지면 학점 제한까지 있었건만 자네는 그날 친구 결혼식장에 다녀오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네. 그리고 평생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지.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이었네.
자네 덕분에 나는 공부하는 학자로서 체면을 지킬 수 있었네. 1982년 여름부터 거창 산골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지. 자네가 소개해준 거창 할머니 집에 머물며 많은 글들을 썼지. 내가 쓴 글과 책들은 대부분 고향이 그곳이네. 선생님 영양보충 해준다며 오토바이에 싣고 오던 그 까만 봉다리를 지금도 잊지 못하겠네. 그 속엔 늘 소고기 몇 근이 들어 있었지. 거창에서 위천까지 수십 리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오던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네.
내가 건국대로 옮긴 후에도 매년 여름마다 거창을 찾아가곤 했네.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그럴 때마다 자네는 잊지 않고 극진히 대해주었지.
“선생님 내가 돈 벌어 별장 하나 마련하겠슴더. 그때까지 기다려주이소.” 그런 약속을 지키려고 휠체어를 탄 불구의 몸으로 사업에 정진했지. 장애인이 된 뒤에도 까만 봉다리는 계속 배달되었고.
한번은 내가 머무는 방을 훤하게 도배까지 해놓았더군. 자네의 세심한 배려 지금도 감동이네. 서울 올라갈 때는 창고에 묻어둔 양파며, 밤, 홍당무 등 귀한 농산물을 차 안에 하나 가득 실어주곤 했지. 40년간 여름마다 거창을 빠지지 않고 간 것은 결국 자네의 훈훈한 인정과 추억 때문이었네.
어느 날 한밤중에 자네 전화를 받고 나도 울었네. 우연히 MRI 사진을 찍다가 학창 시절 교통사고 때 생긴 어깨의 뼛조각이 발견된 것이었지.
그것이 신경을 짓눌러 평생 불구의 몸이 된 것이고. 그 사실을 전하며 통곡하던 자네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 그 뼛조각 하나가 자네 인생을 망쳐놓을 줄이야. 조금만 일찍 발견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인생이 그런 건가보네. 그러다가 결국 사업에 실패하고 폐인이 되고 말았지.
사업 실패도 무슨 보증을 잘못 서서라고 들었네. 결국 사람 좋아하고 쉽게 믿는 자네의 성품 탓이었네. 사업이 망하자 자네는 주변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혼자만의 고립된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지. 그렇게 4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고통과 절망의 세월, 자네는 초인적인 힘으로 견뎌냈네.
그리 많던 친구들, 믿었던 친구들 다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지. 그런 게 현실이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삭막한 인간관계. 그 배신감에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나 역시 부끄럽고 죄스럽네. 방문은 고사하고 자네가 좋아하던 책 한 권, 시디 한 장도 못 보내준 게 한스럽네.
그렇게 신병과 외로움을 초인적으로 버티다가 육십 고개에 들어서자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지. 불구의 몸이 된 그때부터 30여 년의 세월, 홀몸으로 세상을 등지고 혼자만의 섬에 갇힌 4년의 세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그 세월을 홀로 쓸쓸히 지키다가 먼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지. 부고 소식도 이미 땅속에 묻힌 지 반년이 지나 우연히 알게 됐으니 이런 애통한 일이 어디 있겠나. 작년에 공원묘지를 찾았으나 끝내 무덤을 찾지 못해 소주 한잔 나누지도 못했네.
그저 자네가 묻혀 있을 만한 무덤가에서 “문식아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불러본 게 전부였네.
내 목소리 들었는가. 군사부(君師父) 일체라면 반대로 신제자(臣弟子)도 일체일 것이네. 스승보다 먼저 떠난 제자는 불효자인 셈이지. 은사인 내가 이리 살아 있는데 먼저 세상을 하직하다니 어찌 그리 무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천하의 불효막심한 제자가 됐지만 자네는 40년간 교단생활 중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였네. 자네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들고 오던 까만 봉다리, 그 모습으로 자네를 영원히 기억하겠네.
칩스 선생은 많은 제자를 세계대전에서 잃었지. 하지만 그는 기억 속에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자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믿었네. 자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죽지 않은 것이네. 내가 살아 있는 한 자네도 살아 있는 셈이지. 영면을 비네. 곧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겠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소주 한잔 합시다.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겠네. 안녕.
김영철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군사관학교 전임강사, 대구대학교, 건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우리말글학회·겨레어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건국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15년 전 둘째 동생의 추천으로 부여에 있는 작은 과수원을 동생과 함께 소유해 오고 있다. 농사일을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동생이 주로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함께 내려가 쉬고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만 하고 오는 농장인 셈이다. 그래도 우리는 가을에 밤과 감을 수확하고 좋은 대추는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재미로 농장을 가꾸어 왔다.
그러던 어느날,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농장 인근에 태양광 설치라는 현수막이 붙고 노후를 위해 2억을 투자하면 20년간 매월 일정 금액을 주겠다는 분양 광고가 나면서 마을이 소란스러워졌다. 과수원 인근 가파른 산의 녹지를 개발하여 태양광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주민들이 모여서 태양광 설치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진정서를 정부 각 기관에 내고 허가 반대 운동을 펼쳤다. 가정주부로 평범하게 살던 제수씨가 문서처리에 어두운 시골 주민들의 요청으로 전면에 나서 반대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평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자주 상담을 해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제수씨는 나에게 제반 문제에 대해 물어봤고 나도 간접적으로 이 운동에 개입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태양광 발전소 설치를 위한 작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정책적 대응방안으로 장려되고 있다. 태양광 발전은 태양광을 직접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기술이다. 즉 햇빛을 받으면 광전효과에 의해 전기를 발생하는 태양전지를 이용한 발전방식을 말한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 2010년 30ha였던 산지 내 태양광 사업 면적이 2017년 9월 기준으로 681ha까지 늘어났으며, 문재인 정부의 재생에너지 강화정책으로 인해 앞으로 그 추세는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태양광 사업이 멀쩡한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태양광을 설치함으로써 자연을 훼손시킨다는 점이다. 즉, 친환경 사업이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다. 이와 관련 거창군과 같은 지자체는 태양광 반대 견해에서 주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가 하면 일부 행정기관은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 정책에 호응하여 복지부동의 자세로 환경이나 안전을 뒷전으로 하여 추진하고 있는 사례가 있어 걱정스럽다.
최근 정부도 태양광 사업의 부작용을 이해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기 단계에서 문제점을 보완하여 실시하려고 하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수씨와 주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부여군청과 면사무소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허가를 보류시킬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제수씨의 환경 훼손 반대 운동을 보면서 민주주의는 앙가주망의 정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싸게 시골의 산지를 매입하여 일부 몰지각한 소수의 공무원과 이해관계자에게 이익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종용하여 국가의 자연경관을 훼손시키는 사례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것 같아 환경 훼손으로 인한 국가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다.
심청이는 효심만 깊은 게 아니라 음식 솜씨도 좋았나 보다. 특히 심청이가 만든 김부각은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양반집이나 이웃 절에 불려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졌다가 환생한 심청이는 왕비가 된 후 아버지를 만나려 맹인들을 잔치에 불러모았다. 오매불망 그리던 아버지를 위해 김부각을 정성껏 만들어 잔칫상에 올려놓았다. 심 봉사가 김부각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심청이는 아버지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심 봉사가 즐겨 먹던 부각은 옛날에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궁중이나 사대부 집에서 내려오는 고급음식인데, 지금은 누구나 즐기는 주전부리가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식품 명인 제25호 오희숙 명인의 공이 컸다. 그는 우리나라 유일의 전통 부각 분야 식품명인이다.
명인을 만난 건 강남역의 식품명인 홍보체험관에서였다. 이곳에선 토요일마다 명인들에게 한국전통식품 비법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가 공식 지정한 식품명인들과 함께 술이나 한과, 김치, 장류 등을 만드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어 한 번 발을 디디면 자꾸 찾아가게 되는 곳이다.
어른, 아이 모두 즐기는 부각이어서인지 다른 날에 비해 가족 체험객이 많았다. 오희숙 명인은 거창의 파평 윤씨 종갓집에 시집을 오면서 시어머니로부터 부각 제조법을 배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고 작은 집안 행사 때면 몸을 반쯤 넣어야 손이 닿는 커다란 항아리에 부각 거리를 꺼내 튀겼다. 손님들의 취향을 기억했다가 각자 기호에 맞는 부각을 튀기면 저마다 좋아했다고 한다. 명인의 이야기를 듣던 한 어린이는 “빨리 만들고 싶어요”라며 큰소리를 외쳤다. 명인을 재촉하는 꼬마 체험객 덕분에 웃음꽃이 터졌다.
부각은 재료에 찹쌀풀을 발라 건조하여 튀겨낸다. 전통부각의 제조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간다. 재료를 손질하고, 찹쌀풀을 만들어 바르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말린 후 다시 튀기는 등 12번의 손길을 거쳐야 탄생하는 정성 어린 음식이다.
체험은 준비된 재료에 찹쌀풀을 바르는 것부터 시작됐다. 테이블마다 찹쌀풀과 김, 다시마, 미역이 준비돼 있었다. 손끝에 풀을 묻힌 후 김과 다시마에 골고루 펴 바르기만 하면 되니 아이들도 쉽게 따라 했다. 미역은 찹쌀풀과 함께 손으로 조물조물하면 된다는 명인의 말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쥐고 놀이하듯 즐겁게 풀을 입혔다. 이렇게 찹쌀풀을 바른 재료들은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부각 만들기 마지막 단계는 말린 재료를 빠르게 기름에 튀겨내는 것이다. 김, 미역, 다시마는 물론 감자, 우엉, 연근 등 각종 부각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거무스름한 미역이 기름에 튀겨지면서 하얗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하얀 게 아까 바른 찹쌀풀이냐”고 재차 묻기도 했다.
막 튀겨진 부각을 그 자리에서 맛보았다. 기름에 튀긴 음식이지만 담백했다. 씹으니 ‘바삭바삭’ 경쾌한 소리가 났다. 고소하면서도 식재료마다 본래의 맛이 그대로 느껴져 재미있었다. 아이들은 부각이 수북이 쌓여있는 접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건 뭐야? 저건 뭐야?” 부각들이 어떤 식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물었다. 편식하던 아이가 우엉이나 연근도 맛있다고 손을 바삐 움직이는 모습에 부모들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삼국유사에 보면 시집오는 신부가 함 속에 부각을 넣어 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천년도 넘는 세월을 지내며 명문가에 전해져 온 부각이 이제는 컨테이너 속에 담겨 일본, 미국 등 12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국내산 제철 원료만을 사용하고 화학적인 색소나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먹을 수 전통부각.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Han Style snack’ 혹은 ‘Oriental natural chip’ 등으로 외국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
과거에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회생활을 하다가 7년 만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가려고 하자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대학 교수가 얼마나 너를 가르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네가 크게 배울 것이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지나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당시 필자가 5남매의 장남으로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말씀은 학문보다는 인격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뒤늦게라도 대학의 문으로 들어선 것은 참된 지식을 깨우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학문이란 무엇이며 왜 대학이라는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필자의 선택은 훌륭했다. 학문의 세계는 깊고 넓었다. 필자는 곧 국내외 경제의 흐름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법대에 진학해 법관이 되고 싶었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공직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를 나와 사업자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꿨다.
할머니는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세 살이나 연하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일가를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었다.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은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훗날 독일 백림대학을 나온 친구 김준연씨와 함께 학교에 갔다가 증조부님에게 매를 맞고 집에서 쫓겨나 한동안 처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필자는 아름다운 미모에 고매한 인격의 할머니를 두게 된 것이 어릴 때도 여간 자랑스럽지 않았다. 어릴 때 방학이 되어 시골에 가면 일꾼들을 두고 농사를 짓고 생활하시던 생각이 난다. 시골에 왔다고 특별히 달걀 하나를 뜨거운 밥 속에 넣어주시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누구를 크게 호통치는 법이 없었다.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대하니 할머니가 싫다는 친․인척들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는 과묵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손자가 방학이라고 시골집에 인사를 가면 혹시 집안 내력도 모르는 상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되어서인지 족보를 내어놓고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래서 필자가 족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거창 신가 집안의 32대 손이고, 고려시대 대장군으로 몽고군과 끝까지 항쟁하신 집자 평자 조부님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문무 고관대작의 집안이 되었던 내력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주셨다. 필자는 당시 할아버지에게서 배울 학(學)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확실하게 배웠다. 만일 필자가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한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나의 한자만 가르쳐주셨을까? 살면서 항상 배우면서 살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필자는 지금도 학문이 좋고 즐겁다. 어쩌면 학자를 많이 배출해낸 집안 내력 때문일 수도 있다.
작고하신 부산의 숙모님은 결혼 전에 선도 보지 않고 할머니만 보고 결혼했다고 이야기하실 정도로 할머니는 기품이 있고 위엄이 있는, 그러면서도 친절함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부모라는 사실은 항상 필자를 기쁘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95세까지 장수하신 조부모님의 영정을 필자의 집에 모시고 싶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양반 가문의 전통을 이어온 집안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우리 손자들에게도 들려주고 더욱 빛나는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또 후손들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 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에 썼다. 조경남의 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은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
처음 그를 봤던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감돌고 있는 전기맨(?) 같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나온 젊고 낯선 배우는 차갑고 깊은 까만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MBC 드라마 에서 열연한 배우 한갑수(韓甲洙·48)다. 불꽃 카리스마로 연극 무대를 내달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TV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강아지 같은 함박웃음과 함께 말이다. 연기 인생 30년. 그 누구도 몰랐던 반전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한갑수를 만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다는 대세 배우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많이도 알아봅니다
“촬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친구 부르듯 그냥 이름을 불러요. 제가 아무리 ‘이놈! 아저씨한테!’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MBC 주말 드라마 는 한갑수에게 드라마 하나 끝난 것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배우로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무대에 올라 관객의 박수를 받아왔지만, 조명이 없는 거리로 나서면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 드라마는 달랐다. 촬영장에 모인 아이들은 한갑수를 “아바디”를 목 놓아 외치는 또래 친구 대훈이로 대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봐도 너무 알아보니 인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바꿔준 대박 드라마가 된 것.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한갑수는 방송 연기 초반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해 고사하는 일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제 연극을 봤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한 회 잠깐 출연할 수 없냐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연극을 몇십 년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연락을 해오던 디렉터 중 한 명이 한갑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은 많이 했어도 카메라 연기는 안 해봤으니 경험해보라 권유했다. 미디어 매체에도 시선을 줬으면 한다고 말해줬다. 연극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 경찰이건 면접관이건 주어지는 역할은 작건 크건 열심히 해냈다. 한갑수가 시청자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작품은 MBC 드라마 과 이다.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이휘향에게 간 이식을 해주는 오빠 역할을 했던 은 인생작 로 가는 도움닫기 역할을 해주었다.
“의 김사경 작가님이 을 보시고 저를 추천하셨어요. 당시 북한 외교관 태영호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제 역할이 그와 비슷한 북한의 고위직이라더군요. 이제는 좀 지성인을 연기하나 싶었죠. 드라마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 제가 등장하는 대본이 나왔다며 작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열 살 아이 연기가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연극 에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윤원형을, 유진 이오네스코의 잔혹극 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했던 그다.
무대 위 선 굵은 배우, 아이를 연기하다
잔인함과 공포를 연기하던 배우가 열 살 아이 지능을 가진 연기라니.
“네? 저는 열 살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보냐고도 물어봤어요.”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상의 언어로 흐르는 드라마에 나이 든 남자가 아이처럼 연기하는 것이 과연 어울릴까 걱정에 걱정을 더해갔다. 이에 김사경 작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아이처럼 본능대로 말할 것과 북한 아이만의 순수함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순수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맑게 웃자는 것이 큰 콘셉트였어요. 내가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걸 시청자가 귀엽게 봐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휘향 선배님과 (임)수향이가 너무 악한데 제가 팍팍 시원하게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이야기하니까 많이들 좋아하신 것 같아요. 두 분이 잘했기 때문에 제가 덕 본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이가 나빴지만 평소에 제일 친했어요.”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역이었다. 시청자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보다 함께한 선후배의 도움이 컸다며 겸손하게 공을 돌리는 배우 한갑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 꽤 쓸모 있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인 한갑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우며 연극을 시작했다. 무일푼 극단 생활 3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오른 그는 경남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연극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눈여겨본 연출가 이윤택이 2001년 그를 서울 무대에 올려세웠다. 30대 중반의 한창 물이 오른 남자 배우의 연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역할은 늘 실제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많았다. 지금도 주어지는 역할은 실제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KBS 2TV 저녁 일일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나이가 많은 선배 연기자가 아들로 혹은 동생으로 등장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본인의 나이와 맞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했다.
“연출가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연출가님한테 흰머리가 좀 있는데 염색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헤어스타일이 좋다면서요. 한 촬영 감독님은 오히려 제가 늙어 보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실제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면 대사 암기가 좀 어렵고 50대 연기는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이 없다더라고요. 제가 사실 많이 하는 역할이 주인공 아버지 역할입니다. 대부분 60대 역할일 수밖에 없죠.”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 배역으로 등장한 배우가 예순두 살이었는데 한갑수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것. 결국, 상대 배역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분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내가 노안이라는 걸 알아요.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변희봉 선생님이 저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오십입니다’ 했더니 ‘애’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좋은 건 역할도 역할이지만, 나이가 한참 들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더라고요(웃음).”
천생 배우 어린 아내의 특급 매니지먼트
한갑수는 소속 회사 없이 아내 변혜경(39)씨와 촬영 현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한갑수의 매니저인 셈.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아내 변혜경씨를 더 많이 찾는다. 배우 이휘향도 그랬다.
“미스 변 어디 있느냐고 이휘향 선배님이 그러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요. 나랑 가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요. 감독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내는 현장 스태프와 친해질 수 있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잘 웃고,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인사를 잘했다.
“만약 저 혼자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제 스타일이 원래 연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랑 말도 안 하고, 친해질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옆 사람이 분장이나 의상 스태프랑 친하니까 편안하게 이것저것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우리 집사람 덕분에 참 좋죠. 현장에서 저 혼자 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아내가 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한갑수의 아내로 매니저로 사는 변혜경의 직업 또한 배우다. 그것도 천부적인 연기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 무대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과 호응하던 모습이 생생한 멋진 배우였다. 열 살 차이 어린 여배우는 2001년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한갑수를 보고 반해버렸다.
“거창에서 연희단거리패로 옮겨서 연극을 할 때였는데 밀양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아내는 연희단 소속 배우였고요. 아침마다 단원들이 조별로 다 모이는데 한 달 내내 아내가 ‘한갑수 내 꺼다’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저리 가라고도 했어요.”
장난 같던 아내 변혜경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결국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닷새 앞두고 아내는 사랑의 탈출(?)을 하고야 말았다. 장례가 촉망되는 여배우의 결혼을 극단은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도 극단 대표인 이윤택 선생님 마음에 우리가 남으셨나봐요. 진주에서 신혼살이할 때 그 지역으로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어요. 강연하시다가 ‘한갑수 저놈이 우리 혜경이를 훔쳐갔어요’ 그러셨답니다(웃음). 이 선생님이 아내를 딸처럼 예뻐해서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최악의 궁합을 이기고 최고 부부가 되다
“결혼 전에 저희가 결혼하면 아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를 못 낳거나 낳아도 불구가 될 거란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애도 낳고 별일 없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아이 낳고 100일 만에 쓰러졌습니다.”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생활도 잠시, 시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 변혜경씨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상대방의 말도 왜곡돼 들린다고 하다 정신을 잃었다. 뇌전증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도 원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의원에도 갔었고, 심지어 신병이란 말도 들었어요.”
처가에서 아이를 대신 키워주고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가족 부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이 서울대병원 앞에 가서 시위도 했어요. 딸의 머리라도 한 번 열어봐 달라고요.”
발병 7년 만에 아내 변혜경씨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두 번째에 문제의 위치를 찾아냈고, 세 번째 누운 수술대에서 원인을 제거했다. 수술 직후 만난 아내는 딸도 한갑수씨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이 좋아졌다.
배우가 숙명인 한갑수의 해피스토리
작년 하반기 한갑수는 가족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서울 근교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오고 얼마 안 있어 드라마를 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이 가진 숙명적 불안감과 사랑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진짜 배우였다.
“배우는 오래가기 쉽지 않습니다. 소모되고 금방 잊히죠. 평생 숙명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찾아줘야죠.”
한갑수라는 배우가 지금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소속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내와 함께 일할 생각이다. 지금의 상태로 소속이 되면 다작을 해야 하거나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스갯소리로 ‘10년 후에는 나는 일을 좀 쉬고 아내가 열심히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몸도 완쾌되고 아이도 다 키웠으니 아내도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혜경이가 나이 들면 연기자로서 더 빛을 낼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을 같이 다니는 이유가 많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거든요.”
현장을 함께 다닌 덕에 아내 변혜경씨도 잠깐이나마 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매니저 일을 하는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아내가 대견스럽다.
“부부생활 15년을 해보니 조금씩 서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힘든 것이 좀 거쳤으니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