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고령자의 여가라고 하면 바둑, 장기, 하이쿠(일본의 짧은 시), 게이트볼이 대표적이었다. 조용히 앉아 담소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오랫동안 ‘이상적인 노후’의 풍경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지금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県) 사이타마시에서는 그 고정관념을 뒤집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바로 ‘실버 e스포츠’를 즐기는 고령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좋아, 지금이야!”
“아, 아깝다!”
행사장 안에서 연신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화면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젊은 세대가 아니다. 70대와 80대는 물론, 91세 이사장까지 컨트롤러를 손에 쥔 채 경기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지팡이나 찻잔이 아니라 게임기다.
현장은 예상보다 훨씬 뜨겁다. 이들이 즐기는 e스포츠(Electronic Sports)는 컴퓨터나 콘솔 게임을 활용해 여러 사람이 함께 경쟁하거나 협력하며 즐기는 디지털 스포츠를 말한다.
고령자가 게임을 즐긴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사이타마시에서 시작된 이 활동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고립감 해소, 외출 기회 확대, 세대 간 교류 활성화 등 예상 밖의 사회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노후의 풍경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왜 지금, 고령자에게 e스포츠인가
사이타마시민실버e스포츠협회 대표를 맡고 있는 가미구치(神口) 씨는 4년 전 정년퇴직했다. 원래 컴퓨터 게임을 즐기던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게임을 계속 즐기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협회에서 e스포츠 활동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고령자들 사이의 교류, 외출 기회 창출 등 기대 이상으로 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남성 고령자의 경우 변화가 더 두드러졌다. 평생 일을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일수록 퇴직 후 사회적 역할과 관계망이 급격히 줄어드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럽게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대화와 외출 빈도가 감소한다. 이는 결국 신체 기능 저하와 정신적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때 새로운 연결 고리로 등장한 것이 바로 게임이다.
게임은 격렬한 운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면을 보고 판단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뇌와 신체 활동이 이뤄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재미’다.
“건강을 위해 노력하자”는 말만으로는 행동을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또 가고 싶다”는 감정은 사람을 움직인다. 바로 이 지점에 실버 e스포츠의 가장 큰 힘이 있다.
사무총장 미즈노(水野) 씨 역시 “지금의 시니어 세대는 과거 우리가 생각했던 고령자 이미지와는 다르다”라고 설명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시니어 세대는 40여 년 전 TV 게임 붐을 경험했고, 록과 팝 음악을 들으며 청춘을 보낸 세대입니다.”
즉 디지털 문화 자체가 낯선 세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노인에게는 노인다운 취미가 어울린다’는 고정관념 자체가 이미 시대 변화 속에서 힘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기기보다, 연결되기 위해서다
일반적인 e스포츠는 빠른 반사신경과 높은 기술을 겨루는 경쟁의 세계다. 때로는 거액의 상금과 상업성이 중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타마시민실버e스포츠협회가 지향하는 방향은 조금 다르다. 이곳에서 게임은 승패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다.
미즈노 씨는 협회의 목적이 분명히 ‘사회 공헌’에 있다고 강조한다.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중요한 것은 함께 즐기는 과정입니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생기고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그는 기존 고령자 커뮤니티 활동과의 차이점도 설명했다.
“게이트볼이나 그라운드골프처럼 상하관계나 보이지 않는 서열이 형성되는 분위기가 거의 없습니다. 누가 더 오래 활동했고, 누가 더 잘하는지를 따지기보다 모두가 편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실제로 실버 e스포츠 현장에서는 경쟁보다 웃음이 먼저 나온다. 게임을 하다 실수하면 서로 웃어주고,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조작법을 알려준다. 익숙하지 않은 기계를 함께 배우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대화가 된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함께하고 있다’는 감각이 참가자들을 움직인다.
도입이 쉽다는 점 역시 실버 e스포츠의 강점으로 꼽힌다.
“넓은 경기장도, 값비싼 장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니터와 게임기, 의자, 그리고 약간의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민센터나 복지관, 도서관 등 지역 곳곳의 유휴 공간이 자연스럽게 교류의 거점으로 바뀌고 있다. 거창한 시설을 새로 짓지 않아도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는 셈이다.
초고령사회에 필요한 것은 어쩌면 거대한 복지 인프라보다 ‘다시 밖으로 나오고 싶게 만드는 작은 계기’인지도 모른다. 실버 e스포츠는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이 활동은 상금이나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경쟁과 소비를 앞세우기보다 고령자의 고립 예방이라는 공공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개입하지 않는 ‘무욕(無欲)’의 자세와 공공성을 중시하는 운영 방식이야말로 행정기관과 대학, 기업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러한 철학이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관심받는 배경이죠.”

참가자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실버 e스포츠 활동에 참여한 고령자들에게 예상보다 큰 심신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취미를 넘어 삶의 리듬과 인간관계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외출 의욕 증가다. ‘오늘은 게임하는 날’이라는 생각에 수염을 깎고, 옷차림을 신경 쓰고, 약속 시간에 맞춰 집 밖으로 나간다. 고령자에게 ‘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진다. 삶의 활력을 되찾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변화는 가족 간의 대화가 늘어났다. 일부 참가자들은 손주와 함께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손주들은 “우리 할아버지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 “집에서는 말수가 적은데 여기서는 가장 활기차다”며 놀라워한다고 한다.
세 번째 변화는 고립감에서 벗어나게 된 점이다. 참가자들은 게임을 하며 함께 웃고, 경기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를 이어간다. 그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은퇴 후 끊어졌던 사회적 관계망이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노년기의 고독은 복지제도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하지만 ‘재미있는 장소’, ‘다시 가고 싶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관계는 노후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힘이 된다.
부회장 칸노(菅野) 씨는 인상적인 사례를 소개했다.
“50대 중반의 한 참가자는 딸에게 ‘게임 좀 그만하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녀와 함께 전 세계 플레이어들과 게임을 하며 그 누구보다 즐기고 있습니다.”
게임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놀이 문화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핵가족화와 개인화 속에서 점차 약해지는 가족 간 연결을 다시 회복시키는 새로운 도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세계가 주목하는 ‘사이타마시 모델’
사이타마시의 실버 e스포츠 활동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지역 행사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 모델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활동에 행정과 대학, 기업이 함께 참여하며 지역 전체가 하나의 실험을 만들어가고 있다.
사이타마현과 사이타마시는 공공시설 제공과 게임 장비 지원 등을 통해 활동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상업성을 앞세우기보다 누구나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는 공공성을 강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민센터와 복지관 같은 지역 공간이 자연스럽게 교류 거점으로 바뀌는 셈이다.
대학 역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본약과대학은 실버 e스포츠가 인지기능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며 관련 연구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게임은 단순히 버튼만 누르는 활동이 아니다. 화면의 움직임을 읽고 판단하며, 손가락으로 즉각 반응해야 한다. 기억력과 집중력, 순발력은 물론 시각·청각·운동감각까지 동시에 사용한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지기능과 신체 활동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일본 각지에서 실버 e스포츠를 ‘인지 저하 예방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기업들의 관심도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게임 기업 텐센트(Tencent)는 사회 공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활동에 주목하고 있다. 텐센트 사회공헌팀이 제작한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은 유튜브에서 150만 회 이상 재생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글로벌 기업이 ‘실버 e스포츠’를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미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 모델로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비전도 흥미롭다. 미즈노 씨는 “실버 e스포츠를 단순한 게임 활동이 아니라, ‘설레고 두근거리는 경험’으로 확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게임을 더욱 즐겁게 즐길 수 있도록 현실감과 몰입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예를 들어 게임을 할 때 가발이나 의상을 활용한 코스프레 요소를 더하거나, 여성 참가자를 위한 메이크업 지원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여기에 더해 1920~30년대 일본 거리 풍경을 가상현실(VR)로 구현해 고령자들이 추억 속 공간을 산책하듯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도 검토하고 있다.
한국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한국 역시 같은 질문에 직면해 있다. 고령자 빈곤, 고독사, 사회적 고립, 세대 간 단절, 지방 소멸 위기.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많은 고령자 정책이 ‘보호, 지원, 관리’ 중심에 머물러 있다.
물론 지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고령자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변화다.
‘고령자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에 머무르는가, 아니면 여전히 즐기고 배우고 도전하며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존재인가.
사이타마시의 실험은 그 질문에 분명한 답을 보여준다. 고령자는 단순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문화를 소비하며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라는 것이다.
이 모델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거창한 시설이나 막대한 예산 없이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역시 경로당, 복지관, 도서관, 주민센터, 빈 점포 등 지역 안의 유휴 공간을 활용하면 충분히 비슷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청년 자원봉사자와 시니어가 함께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대학과 연계해 디지털 교육과 건강 연구를 접목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거대한 인프라보다 ‘고령자도 새로운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일지도 모른다.
91세의 고령자가 게임기를 손에 쥔 순간, 우리는 ‘노년은 조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초고령사회에서 사람은 어떻게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 고독을 줄이고, 삶의 활력을 되찾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쩌면 그 해답의 일부가 일본 사이타마의 작은 행사장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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