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에게 글쓰기가 그렇게 좋다던데, 정말일까. 글쓰기 강사, 출간 작가, 출판 전문가 이야기까지 듣고도 글쓰기 교실의 생생한 목소리가 궁금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서울 양천구 개울건강도서관의 시니어 특화 프로그램 ‘마음이 치유되는 글쓰기’ 일일 수강생으로 함께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살면서 있었던 일을 다시 곰곰이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내 인생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뭐랄까, 단단해지는 느낌? 사방에 생각의 조각들이 흩어진 채 정신없이 살았는데 이제 정돈되는 것 같아요.” - 성영옥 씨
“한풀이가 되더라고요. 내 마음에서 다 끄집어 내놓으니까 병이 낫는 거죠. 정말이에요. 그동안 꽤 아팠어요. 그게 다 ‘내가 소심해서 오해하고 곡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먼저 손을 내밀게 되더라고요. 몇 년간 껄끄러운 관계였던 지인과 최근 다시 가까워졌어요.” - 이정임 씨
“이런 게 마음 치유구나 싶어요. 이젠 ‘어디까지 오픈해야 하나’ 하는 고민으로 넘어갔어요. 마음의 옷을 하나하나 벗다가 발가벗게 될 것 같아서요.(웃음)” - 김용희 씨
간증이 아니다. 글쓰기를 시작한 뒤로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 고백이다. “어 맞아, 맞아. 그런 게 있어!” 중간중간 수차례의 맞장구가 오간 열띤 증언이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찾은 곳은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위치한 개울건강도서관 2층 어울림실이다.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필기구를 챙겨 든 시니어들이 빼곡한 책 사이를 가로질러 도서관 내 아담한 교실에 모이고 있다. 지난 7월부터 시작된 독서 문화 프로그램 ‘마음이 치유되는 글쓰기’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마음이 치유되는 글쓰기’는 고령 이용자가 많은 개울건강도서관이 마련한 시니어 특화 프로그램이다. 노년을 대상으로 한 시니어 인문학으로 ‘서울형 독서문화 프로그램’ 우수 사례에 선정되기도 했던 개울건강도서관은 지난해부터 자체적으로 시니어 특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올해 개설한 프로그램은 ‘마음 건강’을 키워드로 한 글쓰기 교실이다. 박혜옥 도서관운영팀 주임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했다. “시니어층의 독서문화 프로그램 수요는 꾸준히 있었어요. 강의실 규모 때문에 10분만 모집하기로 했는데, 초과 접수됐습니다. 현재 11분이 해나가고 있고요. 이따 보세요. 출석률이 되게 높아요.”
맨 뒤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숨을 고르자 자리가 속속 채워지기 시작했다. 박 주임이 호언장담한 이유가 있었다. 8회 차 수업 역시 출석률 100%로 막이 올랐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가 이미지 카드를 가지고 왔어요. 본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이미지를 골라보시겠어요? 나와서 한 장씩 가져가세요. 고른 이유도 말씀해주시고요.” 박경숙 강사의 안내에 수강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학자가 꿈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못 갔는데, 책이 쌓여 있는 이미지를 보니 그때 생각이 딱 났습니다.”
“제 인생에 장기 해외여행은 2~3번 남았을까요? 손녀딸, 며느리와 이탈리아 여행 가는 것이 꿈입니다. 제가 비용을 다 지불하더라도 여자들끼리만 한번 가보고 싶어요.”
글쓰기는 돌아가며 발표를 마친 뒤 짧게는 2분, 길게는 10분씩 이어졌다. 박경숙 강사의 교수법이다.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말하듯이 쓰라’는 거예요. 다들 말은 재밌게 잘하는데 막상 글로 쓰면 그렇지 않거든요. 특히 시니어들은 어렵고 고급스러운 글이 좋은 글이라는 고정관념이 다들 조금씩 있어요. 어려운 어휘나 고사성어를 넣으려고 하죠. 저는 그걸 빼는 쪽으로 피드백해요.”
나쁜 습관 덜어내기를 한 지 어느덧 두어 달. 수강생들은 글쓰기 실력이 나아졌다며 눈을 밝혔다. 수업 내내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 ‘열혈 수강생’ 성영옥 씨도 그중 한 명이다. “블로그를 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생각나는 대로 써서 올렸는데, 이제는 어떻게 풀어나갈지 구상하고 써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잘 전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짝꿍 김용희 씨도 얼른 말을 보탰다. “저도 수백 번 글을 썼지만, 다 내 맘대로 쓴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가이드라인이 생겼어요. 내 글을 피드백 받아보는 경험도 했고요. 배운 점을 유의해서 쓰니까 사실 글쓰기는 더 어려운데(웃음) 참 유익한 것 같아요.”
며느리의 권유에 가벼운 마음으로 등록한 이정임 씨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자서전 쓰기를 버킷리스트에 넣었어요. 한동안 어딜 가든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드니까 괜히 위축됐는데 여기 와서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글쓰기는 정년이 없잖아요.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연장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수강생들은 글쓰기 실력 외에 마음 처방전을 각자 하나씩 챙겨 들고 어울림실을 나섰다. 10월, 그 손에는 4개월 동안 써낸 글을 모은 문집까지 쥐어질 예정이다.
얼핏 글쓰기는 문턱이 낮아 보인다. 고가의 장비가 필요하지도, 대단한 조건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상에 앉아보면 다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초보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노후를 바꾸는 글쓰기·책쓰기,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안내자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두 명의 길라잡이를 만났다.
글쓰기 편
2011년 10월, 조부의 친일 사실을 고백한 글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일제강점기 고위 관료 경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할아버지를 대신해 친손자는 “민족과 역사 앞에 사죄”했고, 곧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주인공 윤석윤 씨를 12년이 지나 마주했다.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용기를 냈던 중년의 글쓰기 교실 수강생은 어느덧 시니어 글쓰기 강사가 되어 있었다.
윤석윤 강사는 12년 전 집을 나선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 수강한 글쓰기 교실에서 내준 첫 과제가 가족을 주제로 에세이 쓰기였습니다. 할아버지를 그제야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내 나이 쉰다섯에요. 그렇게 쓴 글이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글쓰기가 막연하게 느껴지면, 저처럼 해보길 권합니다. 근처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에 가세요. 가서 글쓰기를 배우세요.”
그는 돈을 지불하고 배우는 길이 가장 빠르다고 말한다. 글 쓰고 받는 피드백 하나, 그리고 피드백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투자하면 달라집니다. ‘제대로 배우겠다’는 마음이 강해지죠. 결석하지도 않아요. 숙제도 다 제출합니다. 그게 돈을 지불하고 지불하지 않고의 차이예요.”
학교에는 교훈, 가정에는 가훈이 있듯, 윤석윤 강사의 강의에는 강훈이 있다. ‘숙제는 내는 것’이다. 그만큼 숙제를 강조하는 그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좋아집니다. 제아무리 글쓰기 책을 본들 한계가 있습니다. 요지는 거의 비슷하거든요. 문제는 저자가 우리 글을 봐주지 않는다는 거지요. 혼자 쓰면 잘 쓰고 있는지 아닌지 알기 어렵습니다.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내 글을 전문가에게 보이고 피드백을 받아봐야 합니다.”
윤석윤 강사는 이 과정을 2년여 거쳤다. 글쓰기 대학원에 다닌다는 생각으로 돈과 시간을 투자하며 한 번에 두세 과정을 듣기도 했다. 숙제는 악착같이 냈다. 피드백은 가장 매운 버전으로 받았다. 원고는 시뻘건 줄이 죽죽 그어져 돌아오기 일쑤였다. “저는 빨간 펜을 지나 고추밭을 넘어 피바다를 헤맸습니다.(웃음)” 혹독한 트레이닝 속 방황하고 성장하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윤석윤 수강생은 윤석윤 강사가 됐다.
“저는 글쓰기 ‘입문’ 강사입니다. 여전히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수강생이었던 오랜 경험이 있지요. 좋은 글을 보는 눈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답 노트도 있고요.”
그는 입문 단계에서 좋은 글을 쓰려면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쉬운 글, 재밌는 글, 짧은 글이다. 현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글을 지양하고, 독자의 흥미를 끝까지 끌고 가는 재밌는 글을 쓰라는 의미다. 이때 문장은 너무 길지 않게 단문 중심으로 쓰길 권했다. “글도 하나의 전달 수단입니다. 읽는 사람이 못 알아듣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에요. 어려운 내용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내용을 쓰더라도, 그 내용을 쉽게 풀어 써야 한다는 것이죠. 글에도 밀고 당기는 ‘밀당’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기억하세요. 그래야 뒤 내용이 궁금한 재밌는 글이 됩니다. 문장은 짧게 쓰는 것이 좋습니다. 입문 단계에서는 주술 호응이 틀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듯이 쓰면 정리가 되지 않아요. 문장을 짧게 정돈하며 쓰면 훨씬 더 잘 읽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겁니다.”
윤석윤 강사는 입문자를 상대로 방법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동기다. 그가 첫 수업마다 수강생을 향해 던지는 첫 질문도 ‘왜 글을 쓰려고 하느냐’다. “다들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으로 글쓰기 교실 문을 두드리지만, 실제 동력은 필요에서 옵니다. 끝까지 하는 힘은 구체적인 목표가 있을 때 배가됩니다. 욕망이 있는 사람과 필요가 있는 사람은 달라요.”
윤석윤 강사는 철저히 필요에 의해 움직였다. ‘책을 쓰겠다’는 버킷리스트가 그를 지치지 않게 했다. 저서가 필요했고, 그래서 글을 썼다. 조지 오웰이 ‘왜 나는 쓰는가’에서 말했듯, 순전한 이기심으로 시작한 일이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잘난 체하고 싶어서다.
기회가 오면 욕심을 부리고, 기회를 얻은 뒤엔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길 10여 년. 윤석윤 강사가 출간한 책은 벌써 공저 포함 다섯 권이 넘는다. 필요에 의해 시작된 글쓰기로 그는 화려한 노후 준비까지 마쳤다. 그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고 말한다. “혼자 있어도 글이 있어 외롭지 않습니다. 글을 쓰며 놀면 되니까요.”
책쓰기 편
‘순이 삼촌’부터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다. 1982년 출판계에 입문한 그는 1983년 출판사 ‘창비’에 입사한 뒤 15년간 영업자로 일하며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불렸다.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해 25년째 운영하고 있는 한 소장의 관심은 이제 더 이상 판매에 있지 않다. 책에 관한 담론을 담은 책을 펴내는 출판사 ‘북바이북’, 국내 최초 시니어 전문 출판사 ‘어른의시간’, 4090세대 여성을 위한 그림책을 펴내는 출판사 ‘백화만발’ 등 양질의 단행본 출간을 지향하는 출판 브랜드를 운영하며 신인 저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윤석윤 강사에게 출간 제의를 한 이도 다름 아닌 한 소장이었다.
‘출판계 전설’ 한기호 소장은 시니어 작가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독자들이 진정 원하는 건 삶을 살아낸 이들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이제 지식을 원하지 않아요. 지혜를 원하지요. 어떻게 살아왔는가, 또 살아냈는가가 중요합니다. 살아낸 이들이 편안하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를 담은 책이 이미 일본 출판 시장을 휩쓸었습니다.”
‘한국 문학의 어머니’ 박완서 작가는 말했다. “창작을 하는 데 가장 큰 자산은 습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이라고. 한 소장의 생각도 같다. 그는 고유한 삶의 지문을 가진 이를 발견할 때마다 따뜻한 말과 함께 손을 내민다. “책은 문장력으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축적된 삶으로 쓰는 것이지요. 책 써보지 않겠습니까?”
축적된 삶 중 어떤 부분을 보여줄지는 또 다른 문제다. 한기호 소장은 좋은 책을 쓰는 방법 중 단연 ‘트리밍’(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거나 격렬했던 순간을 몇 개 꼽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바로 트리밍입니다. 그 시기를 이야기하다 보면 앞뒤가 연결됩니다. 전후 맥락이 있을 테니까요. 그때 만난 사람, 겪은 일, 느낀 감정을 쓰다 보면 결국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정리가 중요해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는 팩트가 확실한 주관화도 강조한다.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만 해서는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느껴져야 해요. 어설프면 곤란하지만, 적당히 들어가야 합니다. 단, 팩트는 확실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팩트로 독자를 설득해야 하죠. 팩트는 사람, 사물, 사건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한 소장은 책을 쓰고자 한다면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편집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편집자적 글쓰기’를 하다 보면 글은 자연스럽게 나아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 소장은 유홍준 교수를 예로 들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자세히 보세요. 문화재청장 하기 전과 후의 글이 또 다릅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고 접하는 지식이 달라지면 글도 진화합니다.”
한기호 소장은 책쓰기 연습을 서평 쓰기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한 사람의 인사이트가 응축된 책을 읽고 압축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추천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구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이 권하는 좋은 책 쓰는 마지막 단계는 편집자와 같은 전문가를 만나 논의하는 과정이다. “책이 포트폴리오가 된다는 명분을 가지고 시쳇말로 ‘뜯어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을 제대로 읽고, 가치가 있는지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문가를 만나 피드백받는 게 가장 좋습니다.”
한 소장은 앞으로도 유명 저자를 섭외할 생각이 없다. 혹 출간 제안을 받으면 주저하지 말라고 말한다. “책을 내면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연결되고 또 연결되고 하는 거죠.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책을 쓰는 자체로 인생이 바뀝니다.”
첫 등굣길, 가방끈을 꼭 움켜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최순나 교사는 그런 부모의 걱정을 기대로, 아이의 설렘은 계기로 바꾼다. 어른들이 만든 딱딱한 교육의 틀은 잠시 접어둔 채 맨발로 땅을 딛거나 풀을 만지며 계절을 사색하게 하고, 글로 풀어내게 돕는다. 그 덕분인지 2학년이 되면서 1학년 후배들에게 전하고픈 글을 담은 ‘1학년이 쓴 1학년 가이드북’ 속 제자들은 말한다. “후배들아, 학교는 재미있어!”
“수업 중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시계를 볼 줄 모르는데, 쉬는 시간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먹기 싫은 반찬이 급식으로 나온다면?”
초등학교 생활을 앞둔 일곱 살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고민이다. ‘1학년이 쓴 1학년 가이드북’은 먼저 학교를 겪어본 대구 대봉초등학교 2학년과 최 교사가 모든 것이 낯선 예비 1학년을 위해 만든 책이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하지만 속 깊은 조언과 응원이 담겼다. 부모들을 위해서는 자립심이 부족한 아이를 학교에 잘 보내는 방법, 담임선생님과 원활히 소통하는 법, 자녀의 친구 관계에 대처하는 법 등 다양한 지침도 적었다.
‘1학년’을 위한 선생님
최 교사는 1988년 초등학교에 부임해 지금까지 열세 번을 1학년과 보냈다. 올해는 1학년 7반 담임을 맡았다. “초등학교 입학으로 아이는 자신의 삶을 근사하게 살아내기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되죠. 여덟 살 인생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는 첫 선생님이 되고자 해요.”
그는 주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향을 물씬 느낄 수 있다. 강아지풀로 손을 간질이거나, 여름비를 가만히 손으로 받아보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글로 쓰게 한다. 자연과 교감하며 관찰력과 감각을 발달시키고, 경험을 글로 쓰며 어휘력이 발달하도록 돕는다. 고사리손으로 눌러쓴 시와 이야기들이 모이면 최 교사는 책으로 엮어내고, 다시 선물한다. ‘어린이 저자’들의 탄생이다.
“신규 교사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매일 글쓰기를 권했어요. 바빠서 못 쓰는 날은 나름의 이유와 함께 바빴다고 한 줄이라도 쓰게 했죠. ‘글’이라는 표현 수단으로 저도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기록하며 스스로 한 다짐과 후회는 다음 날 아침, 조금은 괜찮은 선생으로 살아낼 힘이 됐어요. 아이들도 그 기분을 느꼈으면 해요. ‘일기’라는 이름보다 ‘하루 담기’, ‘삶이 있는 글쓰기’라는 다소 낯선 이름을 붙여 압박감을 줄여주고 재밌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했습니다. 아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어쩜 이렇게 정성껏, 따뜻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놀랄 때가 많아요.”
우리는 맨발 교실의 주인공
탁 트인 운동장에서 매일 아침 최 교사와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운동장을 빙빙 돈다. 해가 쨍쨍한 날은 발바닥을 뜨끈히 덥히고, 비 온 다음 날은 촉촉하고 되직한 흙을 느끼며 대화를 나눈다. 특히 줄넘기, 오래달리기 등을 통해 온몸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한다. 우선 억지로 시키기보다 얼마나 뛸 건지 먼저 묻는다. 스스로 목표를 선택하고, 그걸 이뤄냈을 때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다.
어떤 아이는 다섯 바퀴를 뛰고도 거뜬하지만, 또 다른 아이는 한 바퀴도 힘들어한다. 많이 달리지는 못하지만 ‘나는 행복하다’며 그대로를 즐기는 아이가 있고,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점차 나아지는 아이가 있다. 어떤 경험이든 다 배움이 된다. 그 상황을 온전히 겪어내면서 자신만의 대응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무엇이든 아이들에게 선택과 결정을 하도록 기회를 줘요. 어른이 되기 전,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기반을 닦아주는 거죠. 얼마 전 ‘교실의 주인은 당연히 선생님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교실의 주인은 우리였네요!’라는 한 아이의 말이 스미더라고요.”
엄마 아빠, 걱정 마세요!
최근 과도한 사교육, 끝없는 비교,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이 뒤섞여 학부모들의 염려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최 교사는 그럴수록 자녀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의젓하고 성숙하게 세상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삑삑 소리만 나던 리코더에서 어느 날 맑은 음이 날 때, ‘나, 이것도 해냈으니까 다른 일도 곧 잘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어른은 그저 지켜봐 주고, 응원하면 된다.
“공동체 사회에서 약간의 잡음을 견딜 줄 알아야 멋진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공교육의 위기 속에서도 학교는 여전히 의미 있는 곳이죠. 아이의 성취에 부모만큼 기뻐할 교사, 마음을 나누고 함께 자랄 친구들이 있어요.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죠. 학생을 존중하고 자존감을 키워주려 노력하는 선생님을 믿고 맡겨주세요. 경쟁과 결과 중심이 아닌, 본질을 깨닫는 교육을 위해 힘쓸 테니까요.”
중년은 삶의 인터미션이자 새로운 기로에 선 시기다. 늦은 때는 없다지만 새로운 도전은 겁이 난다. 가슴 뛰는 열정은 사라진 지 오래. 연극 연출가 안은영(55)도 평범한 중년들과 다르지 않았다. 연극에 마음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시련도 있었으나, 연극은 활기찬 2막을 위한 불쏘시개가 됐다. 아마추어 극단을 이끄는 연출가로서 연습실에 들어설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를 만나 연극의 매력과 도전하는 중년의 삶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코로나19 이후 막을 펼치지 못한 채 굳게 닫힌 극장이 수두룩하다. 시니어 배우들과 함께 극단을 이끄는 그녀도 연출가로서 고심이 깊었다.
“아마추어 극단이라 아직 연습실과 극장이 없다. 지난해에 연습실과 극장이 문 닫으면서 한동안 참 힘들었다. 대안으로 단편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찍거나 UCC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면서 단원들과 영상 분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50·60대분들이 반사판을 들거나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스태프로 임했다. 하지만 할수록 연극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다. 줌(ZOOM)으로도 연습을 했는데 한계가 많았다. 그래서 현재는 조심스럽지만 일전에 무대에 올렸던 ‘강 여사의 선택’을 바탕으로 대본을 보고 진행하는 입체 낭독극을 준비 중이다. 대본을 보고 하는 연극이지만, 80% 이상을 암기한 상태로 진행하고 실제 연극과 유사하게 음향이나 조명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가 찾은 현실적 대안이다. 지금도 매주 연습을 하고 있다.”
여성의 이름을 되찾는 일
연출가로 시작한 인생 2막. 이전에는 직장 때문에 10년 넘는 세월을 미국과 멕시코에서 보냈다.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려던 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의 문턱을 잠시 밟았다가 돌아왔다. 그 교통사고 때문에 척추 쪽에 심각한 장애가 생겼다.
“정말 고통스러워서 밤마다 울었다. 살아 있다는 게 기적과도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심리적 절망에는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정말 무서웠다.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너무나 준비 없이 귀국했다. 중장년의 재취업을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취업도 안 되고 경제적 형편도 어려웠다.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심지어 삶을 비관하고 저버릴 마음도 품었었다. 귀국해서 심리적 바닥을 제대로 찍었다.”
연극은 고통의 나날 속에 찾아온 멋진 반전이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홈페이지에 뜬 연극교실 모집 공고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공고를 보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지난날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동화 ‘의좋은 형제’로 연극 놀이를 하던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학교, 직장, 행사 등 어디서든 필요할 때마다 연극을 연출하고 있었더라.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즐거움을 다시금 내 삶에 등장시키고 싶었다. ‘내일 죽어도 오늘은 연극 한바탕 하고 죽자!’는 마음이었다. 물론 성치 않은 몸 탓에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을 감수해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이를 계기로 연극교실에서 만난 인연들과 함께 ‘강 여사의 선택’, ‘말괄량이가 길들이기’와 같은 창작극 2편을 무대에 올렸다. 평균 나이 55세 배우들과 함께 이뤄낸 결과였다.
“몸을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오히려 연극을 하면서 체력이 많이 길러졌다. 버티는 힘이 생긴 것이다. 연극이 정말 좋은 재활치료가 됐다. 또한 연출가로서 중년의 목소리를 연극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우리 사회는 중년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요구할 뿐, 정작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묻지 않더라. 이름은 있으나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로 불리며 무명(無名)이 된 그녀들에게 연극으로나마 다시금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하나의 꽃이 된다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창작극 ‘강 여사의 선택’은 늙어가는 부모와 커가는 자녀들 사이에서 중년의 주인공이 겪는 애환과 동시에 존엄사를 둘러싼 선택에 관한 내용이다. 존엄사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중년 여성인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다. 덧붙여 ‘말괄량이가 길들이기’는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달리 미혼의 중년 여성이 길들여지는 객체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오디션을 통해 배필을 찾는다는 얘기로, 그 과정에서 중년 여성의 주체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오롯이 중년에 의한 그리고 중년을 위한 창작극이다.
문화적 게릴라를 꿈꾸며
그녀는 2019년부터 단원들과 함께 표현하는인생연구소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이 협동조합의 대표이자 치유적 글쓰기와 표현력UP 훈련 강사로 활동 중이다.
“삶에서 표현이 정말 중요한데, 우리나라 중년들은 표현에 서툴다. 나 역시 그랬다. 표현이 서툴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쌓이면 불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연극을 바탕으로 표현력을 기르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연극은 표현의 예술이고, 배우는 하나의 캐릭터를 통해 삶을 배우지 않나? 이처럼 창작극을 통해 다양한 역할을 체험하면서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로 힘들면 글로 써보게끔 한다. 그 과정에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시금 배운다.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다양한 표현을 익힐 기회다. 표현이 다채로울수록 중년의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그렇다면 연출가와 대표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는 그녀의 희로애락은 무엇일까?
“협동조합의 대표보다 연출가란 말이 좋다. 물론 대표로서 늘 책임감을 느낀다. 조합원인 우리 단원들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닌다. 아직 수익 모델이 없기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현실의 벽이란 게 참 무섭다. 연극을 위한 살림을 꾸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연습실에 올 때만큼은 정말 행복하다.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구현하고자 하는 캐릭터에 대한 견해를 나눈다. 물론 서로 조금씩 어긋날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나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고 또 설득한다. 완벽히 역할에 몰입한 배우를 보면 정말 아름답다.”
끝으로 중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을 설명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중년에게 필요한 건 존중과 에너지다. 늙어갈수록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쉬운데 이러한 태도는 남을 대할 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반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아낄수록 남도 귀하게 대한다. 또한 우울감에 빠져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오기를 추천한다. 밖에서 어울리며 창작활동을 통해 자신 안에 감춰진 에너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 역시 그랬다. 중년도 할 수 있다는 걸 꾸준하게 보여주고 싶다. 최종적으론 문화적 게릴라가 되고 싶다. 중년으로 구성된 문화집단으로 문화예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
자기다움의 아름다움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나? 연극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열정은 인터뷰한 소극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안에는 중년을 바라보는 깊은 사유와 자신의 성찰을 바탕으로 한 내공이 존재했다. 그녀에게 연극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연극을 통해 중년‘다움’, 남성‘다움’, 여성‘다움’ 등 규격화된 이해가 아니라, 자기다움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움을 좇고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시간을 통해 일종의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엿볼 수 있었다. 흔히 아마추어를 초보자로 비견하지만, 아마추어리즘의 핵심은 가능성과 순수한 열정이다. 물론 가능성과 열정으로 해결하기엔 현실의 벽이 높을 때도 있다. 하지만 삶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좋아하는 것만큼 귀한 재능은 없다. 그녀가 가진 아마추어리즘의 아름다움이 더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기대하며 마친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디지털 실버, 액티브 시니어라는 말이 자주 귀에 들려오는 요즘이다.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시니어들의 삶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내가 청파 윤도균 님을 만난 건 순수문학 수필작가회에서다. 팔순을 코앞에 둔 나이에 아직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인천 N방송 시민기자로도 활동한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그 열정은 디지털 실버, 액티브 시니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인생 선배로서 닮고 싶은 분. 요즘은 주 3회 근처 초등학교에 나가 돌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단다. 천성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에게 시니어의 삶이란 뭘까.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은퇴 전에는 어떤 일을 하였는지?
처음에는 종로 세운상가에서 전자제품 판매사업을 했다. 그런데 일할 때 양심을 속일 때가 있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판매사업 일에 회의가 들던 차에 아이들 교육과 관련된 일이 연결되어 학원 사업으로 전환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마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교육과 관련된 일이 싫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학원 사업을 하며 20여 년간 독서실 운영도 했다. 하루에 100여 명 이상의 학생들을 통솔하며 아침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근무를 했다. 그 일도 판매 사업 못지않게 힘들었다. 하지만 해맑은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학생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조언도 해주고 예뻐하니까 아이들도 나를 따랐다.
교육 사업은 7년 전에 접었다. 시대의 큰 흐름이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정성들여 운영해오던 사업을 접을 때는 마음에 다소 서운한 감도 있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퇴 결정 과정은 어떠했는지?
20여 년간 일궈온 사업을 접을 때의 감정은 누구나 다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물론 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초조함도 있었고 욕심 같아서는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업자는 전망 흐름을 보고 빨리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마음을 내려놨고 한편으로는 편했다. 제2의 인생, 은퇴 후의 꿈을 설계하며 접었다.
이모작 인생은 계획한 대로 잘 이루어졌는지?
하던 일(직업)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처음엔 헛헛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내가 만약 어느 날 갑자기 퇴직했을 때’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마음속에 써두고 적응 훈련을 했다. 대안도 미리 생각해놔서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사업할 때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 ‘내 건강’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았다. 퇴직과 함께 잡념을 없애기 위해 먼저 운동(등산, 헬스)을 시작했다. 사실, 직장에서의 퇴직이 아니라 내 일을 하다가 일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반 은퇴자들보다 나는 나이가 많았다. 어느새 70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건강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평소 내 성격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있으나 마나 한 인간’으로 취급되는 걸 가장 싫어한다. 취미로 시작한 운동이지만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 땀 흘려 운동했다. 그러자 사업할 때와 비교해 건강이 몰라보게 향상됐다. 스스로 느낄 정도였고 마치 회춘하는 것 같았다. 자랑이 아니다. 몸이 달라지는 걸 실질적으로 체험했다. 건강하니까 매사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도 긍정적이고 의욕적이었다.
은퇴 전과 후의 생활은 어떤 차이가 있나?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은퇴 후의 생활이 많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퇴직 후 줄어든 수입으로 인해 생활이 척박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한도 끝도 없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 행복의 척도가 달라진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세월 따라 사람이든 자연이든 영원하지 못할 것이기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달으려고 했다. 작은 욕심조차 내려놓으면 편했다. 그렇게 즐거운 나의 ‘인생 이모작’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퇴직 전에는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꿈, 소망’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도 돈 생각으로 이어지면 애써 잊으며 살게 되더라. 그런데 이제 은퇴자가 되니 청년 시절 꿈꿔왔던 글쓰기, 사진, 컴퓨터, 운동, 여행, 친목모임, 봉사활동, 취재, 기타 등을 마음껏 하고 배울 수 있어 좋다.
우연한 기회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선발되어 13년에 걸쳐 약 300여 편의 기사도 썼다. 인천 N방송 시민기자로 영상뉴스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통해 수필작가로 정식 등단도 했다. 꾸준히 작품활동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지금의 삶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내 나이 일흔일곱이다.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그래도 십몇 년째 계속해온 새벽운동은 빼먹지 않는다. 아침 5시에 어김없이 일어나 동네 단골 헬스장으로 향한다.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한 시간에 걸친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으로 2시간을 보내고 나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렇게 하루를 열고 집으로 돌아와 개인 블로그 ‘청파의 사람 사는 이야기’에 새 글을 쓰고 댓글도 읽고 답장을 쓴다(그는 블로그 운영을 17년째 하고 있다. 요즘도 하루에 800~1000여 명이 다녀간다. 블로그 활동은 손자인 도영이를 돌보면서 시작했는데, 도영이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은퇴를 앞둔 시니어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지?
조언이랄 것은 못 되고, 은퇴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마음가짐을 바로 잡아야 한다. 사람마다 환경, 조건이 다르지만 인생 이모작 시대를 새로 개척해 살아야 하는 은퇴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첫째 : 자신의 현실에 맞는 소박한 은퇴 설계를 하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은퇴 설계에 포함하라.
둘째 : 가족과 시간을 많이 가져라. 지금까지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가족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가사분담 등).
셋째 : 꾸준히 운동하고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하라(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은퇴는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으로만 간직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여운이 남았다. 아울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떠올랐다.
그는 칠순 때, 북한산 인수봉 암벽등반을 하고 그 후 2년에 한 번씩 암벽등반을 꾸준히 하고 있다. 팔순에는 북한 암벽등반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니어에게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최돈선 님이 제자 최관용 님께 편지를 쓰셨습니다.
벌써 38년이 지났네. 자넬 처음 만난 지가. 이 사람아 자넬 만난 날이 무더운 한여름이었지. 8월의 매미가 지천으로 울어대던 그날, 나는 자네가 공부하는 2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들어간 자네 교실은 창문을 열어놓아 시원했어. 창가 미루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지. 그때마다 미루나무 잎들은 은어떼처럼 바람에 재잘거렸어. 왜 그날 난 그게 선명히 기억났을까 몰라.
먼 바다 섬에서 오셨다고, 유명한 시인이라고,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어서 이 학교가 정중히 모셨노라고… 과장되게 말씀을 마친 교장선생님이 나가신 뒤에도 난 한동안 창밖 미루나무 잎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었어. 이윽고 나는 칠판에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이렇게 말했지. 반가워요,
난 이 나라 남쪽 끝섬 완도에서 왔어요.
그 말에 학생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 그런데 그날 유난히도 두 학생이 내 시선을 끌었어. 한 학생은 미남형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한 학생은 소같이 우직한 인상에 곱슬머리였지. 책상에 앉은 둘의 눈빛이 어찌나 초롱초롱하던지…. 그랬어. 그렇게 자네들과 나는 만난 거야.
당시 강원고등학교에는 소설 쓰시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자네들은 그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어. 문예부원인 자네들은 시인 선생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 설랬는지 모른다고 했어. 그래, 그날의 엉뚱한 질문을 내 어찌 잊을 리가 있겠나.
자네 곁에 앉은 눈 초롱초롱한 최준 학생이 벌떡 일어났어. 선생님 한국에서 누가 제일 시를 잘 씁니까. 학생들이 모두 나를 주시했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어.
그야 물론…,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나? 그 대답에 학생들이 일제히 와! 환호성을 내질렀어. 책상을 쾅쾅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니까? 기억나나?
자넨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지. 질문을 던진 최준 학생은 어쩐 일인지 멍한 표정이었고…. 마치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니까.
자네들은 늘 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 하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어. 최준 군은 재기가 넘치는 학생이었어. 글쓰기는 물론이고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했지. 배구, 탁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 체육대회 때마다 학급 대표로 선발되어 혁혁한 승리를 따내곤 했지.
최준 군은 재기가 반짝였고 자넨 뚝심이 남달랐고. 그랬어. 확연히 다른 성격임에도 자네들은 단짝이었지. 자네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찾아와 꺼낸 말을 분명히 기억하네. 저희는 강원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강원고등학교 문예부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자네들의 이 오만과 자부심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자네들은 정말 시를 사랑하고 시에 온 정열을 쏟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 후 최준 군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당선으로 시작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자넨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장교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리고 이듬해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네. 바쁜 기자생활 중에도 자넨 이따금씩 내게 찾아와 좀 괴상한 시를 내밀곤 했어. 나는 늘, 생각이 엉뚱한 자네를 두둔했지. 시가 되든 안 되든 그 발상이 남다르다는 데 나는 엄지를 치켜세워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자넨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올랐건만 소설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어. 당시 시와 소설이 함께 겨루는 독특한 작가상이었지. 춘천 출신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란 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기억이 나네. 그 후 ‘오늘의 작가상’은 아예 소설 등용문으로 바뀌어버렸어.
하지만 자넨 뚝심의 소유자였네. 이듬해 낙선의 고배를 안긴 민음사 ‘세계의 문학’에 재도전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했으니까. 그 후 난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갔네. 그리고 틈틈이 자네 소식을 듣곤 했지.
이보게, 관용이. 그래도 자넨 뚝심의 소유자이네. 서울서 내가 춘천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자넨 염소를 키우는 농부가 되어 있었지. 밭일과 염소를 키우면서 격일제로 아파트에 보일러 놓는 일을 한다고 했어. 자넨 나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지. 전 길을 가다가도 친구나 아는 이를 만나면 얼른 골목으로 피하곤 했어요. 시도 못 쓰는 껍데기 시인, 직장도 없는 백수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내가 페이스북에다 자네를 염소시인이라 부르면서 사연을 적은 걸 기억하나? 그래서일까? 자넨 금세 염소시인이 되어 많은 페친과 사귀게 되었어. 그리고 드디어 자넨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길 가다가 골목으로 피하는 일도 없어졌고.
제가 요즘 푼돈을 모아두고 있어요. 시집 한 권 내려고요. 평생 단 한 권뿐인 시집을요. 자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을 때 난 가슴이 뭉클했다네. 그런데 그 모아둔 돈이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는 자네의 예쁜 딸 병원비로 보태어졌지. 그 돈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하고 자넨 말했어.
빼앗기듯 다 내주고 헐벗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더라도 덕두원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꼭꼭 가슴에 품고 싶다. 보석처럼 땅문서처럼 장롱 깊숙이 감추어두고 싶다.
애인처럼 아끼던 염소가 죽어 눈물 흘리며 묻어주면 염소는 밤하늘 별이 되어 시인의 밤길을 초롱꽃처럼 밝혀준다.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 아픈 글인지…. 자네 글을 메모해두었다가 이 편지에다 적어보네. 이 글은 차라리 소슬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아닌가.
그래, 자넨 메모 쪽지처럼 글을 쓰더라도 그 글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가?
결코 외롭다 생각 말게. 자넨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솔직한 시인일세. 춘천엔 염소시인 최관용이 있네. 그 염소시인을 멀리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한 노인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길 바라네.
최돈선(崔燉善) 시인
강원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칠년의 기다림과 일곱 날의 생’, ‘허수아비 사랑’, ‘물의 도시’,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 에세이집으로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종이 울린다’가 있다.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
사랑하는 스승을 하늘로 떠나보낸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느 해 같았으면 활기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는 엄숙했고, 숙연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길지 않다. 한국 연극계 큰 별이고 원로였던 故 윤조병(1939~2017) 극작가가 살아생전 죽을힘을 다해 정성을 쏟았던 희곡교실의 마지막 수업 현장. 제자들은 조명 켜진 무대에 올라 객석을 주시한다. 아이 볼에 입꼬리 닿는 것처럼 해맑게 웃던 윤조병 선생이 저만치 객석에 앉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또… 바라본다.
배우 입김을 불어넣은 희곡, 무대에 오르다
과천시설관리공단의 ‘극장에서 쓰는 희곡’ 프로그램은 2006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는 글쓰기 교실이다. 말 그대로 연극의 주재료이면서도 기초인 희곡을 극장에서 배우며 써보는 특별한 수업. 과천시민극장의 상주 단체인 극단 모시는사람들(대표 김정숙)과 함께 기획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작년 12월 5일 과천시민극장 소극장에서 가진 낭독회를 끝으로 2017년 전 과정을 마무리했다. 23명의 수강생 중 총 10명의 희곡이 낭독회 무대에 올랐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배우 3명(문상희, 신문성, 이재훤)과 수강생이 무대에 나와 앉아 배역을 나눠 실제 연기하듯 희곡을 읽었다. 세월호를 주제로 한 ‘갈매기가 전해준 편지(현재경 작)’를 시작으로 그로테스크한 반전이 돋보이는 ‘어디만치 왔어요(박수자 작)’, 노부부의 허망한 이별을 다룬 ‘늦은 오후에 병을 만나니(김영희 작)’, 연천 GOP 총기난사 사건을 생각하게 만드는 ‘나는 GOP 병장입니다(정진영 작)’ 등 작가 10명의 작품이 무대 조명 아래 빛을 발했다. 다양한 주제와 각기 다른 연령에서 담아낸 작품은 전문가 못지않았다. 글을 꾸준히 써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재수강이 가능해 오랜 시간 희곡을 쓰고 배우면서 나날이 성장한 결과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희곡을 알게 되고 또 작가로도 활약하는 수강생도 꽤 되는 내공 깊은 글쓰기 모임이다.
극작가 윤조병의 후학(後學)이 꽃피다
이날은 수강생의 희곡 발표와 함께 그리움을 나누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극장에서 쓰는 희곡’ 교실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극작가 겸 연출가 윤조병 선생이 마지막 수업 한 달여를 남기고 타계했다. 윤조병 선생은 수업이 하고 싶은 마음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최선을 다한 진정한 스승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극작가의 꿈을 꾸는 제자들에게 용기 북돋워주는 말은 물론이고 거침없는 독설까지 뱉어내면서 애정과 열정으로 가르쳤다. 제자들은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희곡을 써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희곡교실 전체가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제자들은 침통해했고 상황을 버거워했다. 이날 낭독에 앞서 추모글을 읽은 현재경 씨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글 한 줄을 적을 수 없었다”며 애끊는 마음을 전했다.
2011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열두 번의 강의를 한 윤조병 선생. 이를 통해 제자 240명을 만나 희곡을 가르쳤고 함께 성장했던 노장이자 현역 극작가였다. 윤조병 선생 사후 그가 각색한 연극 ‘위대한 놀이’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올라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윤조병 선생은 드라마센터연극아카데미 1기 출신으로 극작가 노경식과 함께 유치진, 차범석의 계보를 잇는 한국 사실주의극의 계승자였다. 윤조병 선생을 대신해 남은 수업을 진행해온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김정숙 대표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윤조병 선생님이 틀림없이 이곳 어딘가에서 앉아 여러분이 갈고닦은 보석 같은 작품을 함께 들어주실 것”이라면서 “밑거름이 돼주신 선생님이 더욱더 생각나는 밤”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조용한 가운데 낭독회를 마친 수강생들은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윤조병 선생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강생 강수정 씨는 “살아오면서 글 쓰는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작가라고 부르고 싶은 한 사람이 윤조병 선생님이고, 글쓰기를 즐길 수 있게 가르쳐주신 그분이 오늘 많이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현역 극작가인 정승진 씨는 “2015년부터 희곡교실을 다닌 덕에 희곡을 쓰며 살고 있는 것에 감사드리며 거짓 없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속으로 선생님과 약속했다”고 밝혔다.
살아생전 마지막 수업 날 몸이 너무 아파 목에 뭐가 넘어가지 않는다며 힘들어하던 윤조병 선생. 앉아 있기도 힘든 상황에도 끝까지 수업을 이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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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면 고생은 끝나고 안락한 행복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인생 100세 시대를 어떻게 하면 더 보람 있게 살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구석에 두고 실현하지 못한 글쓰기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문학소년의 꿈’이었다.
은퇴하자마자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이 관악 기자학교였다. 기사작성의 실전교육을 마친 후 몇 군데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하고 기자가 되었다. 밤새워 글을 쓰면서 블로그 활동도 했다. 세상과 대화하는 또 다른 길이 열렸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수년 동안 몇몇 신문과 블로그에 썼던 글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도 오프라인 기사가 몇 차례 실렸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아내와 아들이 ‘애독자’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가족은 평소 상대방의 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시인으로 활동하는 아내의 말처럼 실력도 문제이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문학도 아들에게도 독후감을 요구했으나 대답하지 않고 눈길을 피했다. 척하면 삼천리. 배워야 한다.
관악문화원 문학반을 찾았다. ‘맛보기 강의 들어보고 수강 신청하라’는 안내가 재미있었다. 아담한 강의실에서 몇십 명이 모여 오순도순 토론도 하며 문학수업이 진행되었다. 10년 넘도록 계속 이어져온 문학창작교실이란다. 매주 화요일 오후 저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강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에 수강생의 창작 시와 수필 낭독, 토론이 끝나면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바로 여기야!’ 무릎을 탁 쳤다. 이후 글쓰기에 코를 박았다.
박수진 지도교수는 저명 시인이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주옥같은 시와 동요가 여러 편 실렸다. 강의 전반에는 지도교수가 품격 높은 작품들에 대한 해설을 진행한다. 지도교수는 왕성한 창작활동과 재능기부를 하면서 매주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 열정적인 강의를 했다. 주입식이 아닌 토론이 곁들인 강의였다. 매번 예정시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누구 하나 지루해하지 않았다.
강의 때마다 수강생들은 시나 수필을 써와서 강의에 참가한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습작품 첨삭지도가 토론식으로 이루어진다. 작성자가 먼저 낭독하고 참가자들이 자유토론으로 의견을 말한다. 수강생들이 진땀 흘리는 시간이다. 남의 작품을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다가 자기 작품을 발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된다.
한 줌의 작품은 이리 찢기고 저리 벗겨진다. 앞과 뒤를 바꾸고 넘어진 가지를 자르고 나면 모양새가 갖춰진 한 편의 작품이 재탄생한다. 작품이 새로 태어나는 눈부신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들은 감동하며 박수를 친다. 살아 있는 문학 공부다.
단기가 아니고 연중 계속 이어지는 수업이 이곳의 특징이다. 마치 학교에 다니는 기분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 문우들을 사귀었다. 화려한 전직의 은퇴자와 문학에 관심 있는 가정주부가 많다. 이분들은 오랜 기간 문학반에서 수강하면서 현재 시인,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도 몇 번씩 한 프로들의 ‘심화 과정’이다. 수업이 끝나면 가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환담을 나눈다. 걸쭉한 인생 이야기는 훌륭한 글쓰기 소재가 된다.
관악문화원 문학아카데미 회원의 동인지 출판 준비가 한창이다. 모두가 두툼한 동인지에 작품과 이름을 올릴 것이다. 연말에는 합동으로 시를 낭송하고 수필을 발표한다. 젊은 시절 줄줄이 외었던 시 구절 하나 온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글을 쓰면서 그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 에 ‘기사’를 올리고 블로그에는 ‘작품’을 올린다. 신문기사가 감정을 섞지 않는 주지적인 글이라면, 문학은 주정적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배우면서 쓰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두 분야의 글쓰기는 동전의 양면 같다. 보는 관점만 다를 뿐이다. 양쪽을 어우를 수 있어 즐겁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살아온 삶 ‘70년 체험’ 이야기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손주를 돌보면서 옛 조상들의 삶을 생각한다. 이제 ‘30년‘ 삶에 대해 고민한다.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관악문화원 문학아카데미 동호회 안내
위치 관악문화원 관악산 입구 주차장 바로 위
전화번호 02-885-5975, 878-1931
강의와 토론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반부터 2시간
개설 과정 문학반 외 서예반, 무용반 등 40여 개
수강료 3개월분 6만원, 연중 강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