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재취업 과정은 녹록지 않다. 경력이 무색할 만큼 퇴짜 맞은 이력서가 쌓여가고, 면접 기회는 좀처럼 잡기 힘들다. 그마저도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 일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인데 뭐가 잘못된 걸까. 그 해답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단계다. 이에 재취업 상황별 전문 컨설턴트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장년 구직자의 행태를 짚어보고, 그 해결점을 모색해보려 한다. ‘시니어 잡:담회(Job:談會)’ 그 첫 순서는 ‘상담편’이다.
Episode_1 “대기업 출신인 나더러 중소기업을 가라고요?”
재취업은 전 직장과의 연장선이 아니다. 회사 규모는 물론, 그에 따른 직급이나 직무, 역할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전 직장의 명성에 얽매이는 구직자가 적지 않다는데.
진행자 상담하러 오는 구직자들의 과거 직군별 유형이 있나요?
권미경 커리어컨설팅 대표(이하 미경) 그럼요. 대기업 생산직 퇴직예정자 대상 프로젝트를 맡은 적이 있는데요. 일단 번아웃을 많이 호소하시고, 1년 정도는 쉬고 싶다고들 하세요. 그러고 난 뒤에 뭐 할 거냐 물으면, 절대 중소기업은 가지 않겠다고 해요. 대기업에 대한 자부심도 크시고, 그 타이틀을 버리기 쉽지 않으신 거죠. 사실 공백기가 생기고 취업 시장에 나오면 중소기업도 어렵거든요. 열심히 인식 개선을 해드리려 했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최성희 노사발전재단 중장년내일센터 책임컨설턴트(이하 성희) 아무래도 대기업은 교육이나 연수 기회가 많은 편이죠. 오히려 그만큼 (회사)안에서만 머무는 시간이 많아 바깥 상황은 잘 모르시더라고요.
황영희 노사발전재단 중장년내일센터 책임컨설턴트(이하 영희) 그래도 생산직에 계셨던 분들은 지게차운전기능사 같은 자격증이라도 따놓으시는 편이에요. 사무직은 학력도 높고,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차·부장급 출신이 많은데요.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 외에 개인이 주도적으로 경력 목표를 설정하거나 개발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이력서에 쓸 만한 내용은 있는데 실상 성장은 더딘 거죠.
황성철 상상우리 수석컨설턴트(이하 성철) 대기업이나 공무원 출신 분들의 특징은 일단 직장 백그라운드(배경)가 너무 좋았다는 거죠. 근데 회사의 명성을 자신의 전문성이라 오해하는 분이 많아요. 그 백그라운드 빼면 할 수 있는 게 없는데도 말이죠.
미경 엔지니어 직군은 전문성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컨설턴트 이야기를 잘 듣지 않더군요. 너희가 나보다 이 분야에 대해 더 잘 아냐 이거죠. 특수 분야에 계셨던 분들을 상담할 때는 사전 공부가 많이 필요해요.
성희 저는 작년에 대전에서 고경력 과학자분들을 만났는데요. 정말 희소한 인력이거든요. 결국 이분들의 기술이 사회로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취업 시장에서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요.
성철 안 그래도 제가 그동안 만나왔던 분들을 토대로 출신 직군별 구직자 특성을 적어봤어요. 맞는 말인지 들어보시고 아닌 건 말씀해주세요. ① 공무원이나 군인 출신, 부지런하고 학구적이지만 유연성 부족함 ② 대기업 출신, 기업 후광에 기대어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함 ③ 중소기업 출신, 다양한 경험을 보유했으나 추후 소기업 등으로 재취업되는 상황이 벌어지며 자신감이 하락함 ④ 금융기관 출신, 고임금자가 많아 눈높이가 높고 자신감도 높음 ⑤ 교사 출신, 컨설턴트를 가르치려 들고 자신을 과대 포장함 ⑥ 고기술 경력자, 자존심이 높고 전문성이 뛰어나지만 영역이 좁아 보편적인 재취업이 어려움, 그에 따라 자칫 우울해하기도 함. 자, 어떤가요?
미경 성희 영희 맞아요, 맞아요. 공감합니다!
Episode_2“실업급여 타고 좀 쉬다 보면 누가 연락하지 않겠어요?”
청년층 못지않게 퇴직자에게도 취업 공백이 생기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 퇴직 후 1~2년은 재취업을 위한 골든타임. 안일하게 스카우트 제의를 기다린다면 시간낭비일 뿐이다.
진행자 퇴직하고 리프레시할 겸 1~2년 쉬었다가 컨설턴트를 찾으면 늦은 걸까요?
미경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번아웃이 온 경우가 많거든요.
영희 마냥 쉰다고 리프레시가 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대개 퇴직하고 실업급여 받는 몇 개월 동안은 쉬겠다는 분이 많은데요. 그러다가 정말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어요. 꼭 전투적인 구직 활동을 하라는 건 아니에요. 운동을 한다거나, 요리를 배워본다거나, 기존에 결핍됐거나 못 해본 영역을 채워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떨어졌던 심리적 자원도 채워지고, 구직 활동에 긍정적 에너지로 쓰일 수 있습니다.
성희 당장 자기개발을 시작하기보다는 춤이든 낚시든 뭐라도 몰입하는 시간을 보내시는 걸로 충분하다고 봐요. 아무것도 안 하시고 단절해서 집에만 계시는 게 제일 위험합니다.
성철 공무원들은 퇴직하고 1년 동안 공로연수를 받아요. 그거 끝나고 나면 또 실업급여를 몇 개월 받고요. 그렇게 1~2년 동안 특별히 뭘 안 해요. 60세에 퇴직해서 결국 62세쯤에나 구직 활동을 하는데, 그땐 너무 늦죠. 근데 막상 그분들에게 교육받으시라 하면 신경질 내요. 그래서 저는 일단 ‘노시라’ 하고 대신 그 사이 생애설계도 받아보고, 여생이 기니까 뭐 하면 좋을지 검색도 좀 해보시라 해요. 막상 1년 놀잖아요. 그럼 미쳐요. 알아서들 나오십니다.
진행자 당장 전투적인 구직 활동은 미루더라도 바깥 활동은 좀 하시라는 거죠?
영희 네, 정보가 엄청 중요하거든요. 어디라도 가야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정보도 얻고 기회도 생기니까요. 아무리 스펙이 좋은 분이라도 1~2년 공백 거치면 재취업 연결은 쉽지 않아요.
성철 바깥으로 나와보면 딱 알게 되죠. 나만 놀고 있었구나. 다들 뭘 하고 있네? 근데 한편으론 이런 사람들도 많아요. 어디선가 연락이 오겠지. 같은 회사 다녔던 선배나 후배가 같이 일하자고 하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허송세월 보내는 경우도 상당해요.
영희 근데 연락이 안 오죠. 지혜로운 분들은 퇴직 전에 경력 목표를 설정하고 자격증이나 훈련을 미리 준비해요. 제가 만난 분 중에 재직자인데 구직자 대상 교육을 듣고 싶다고 사정해서 넣어드린 적이 있거든요. 건설업 종사자였는데, 드론 수업을 듣고는 관련 자격증 4종을 모두 따셨죠. 요즘은 건설업계에서도 안전관리 측면에서 높은 빌딩이나 댐 등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구조물에 드론을 활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전망을 이해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퇴직하고 한 달 만에 취업에 성공하셨답니다. 물론 이런 사례는 많지 않지만요.
성희 결국 의사결정이 중요하다고 봐요. 상담 과정에서 의사결정을 해야 다음 단계로 행동을 옮기는데, 아무런 선택도 못 하시고 시간만 보내다 가는 경우도 많아요. 좀 전 사례자 역시 스스로 교육을 듣겠다, 자격증을 따겠다, 이런 의사결정이 빨랐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성철 맞습니다. 저는 이런 구직자도 봤어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시키는 건 잘하니까 나더러 뭘 할지 알려달라는 거예요. 근데 그건 고등학생 때나 가능한 얘기죠.
성희 유망 직종이나 괜찮은 자격증 하나만 찍어달라는 분도 계셨어요. 막상 그 하나를 말씀드려도 실행에 옮기진 않으시더군요.
성철 직장에 종속돼 눈치 보며 지낸 세월이 길어서일까. 주도적으로 하는 힘을 잃은 거 같기도 해요.
Episode_3“이력서요? 컨설턴트가 대신 써주는 거 아닌가요?”
마음이 급한지, 의지가 부족한지, 쉽게 취업 정보를 얻어가려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무리한 요구에 성의 없는 태도까지 보인다면? 컨설팅의 가치는 떨어지고 재취업은 멀어지고 만다.
진행자 컨설팅 과정에서 어떤 상황이 가장 난처한가요?
성희 오시자마자 다짜고짜 뭐 해줄 수 있냐고, 내가 당장 갈 곳을 알려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안 해주시고 말이죠.
영희 마음을 여는 게 우선이고 참 중요한데, 라포(상호 신뢰관계) 형성이 쉽지 않아요.
미경 게다가 속으로 컨설턴트를 테스트하는 경우도 많죠.
성철 맞아요. 나한테 뭘 해주는지 봐서 나도 내 것을 보여주겠다, 이런 거예요.
성희 네, 확실히 경계하시는 분들이 있긴 해요. 때론 기 싸움도 벌어지죠.
미경 기관마다 다니면서 컨설턴트를 간 보는 분도 많아요.
성희 결국 가장 난처한 건, 구직자가 개방하지 않는 상황이에요. 가령 5회 진행하면 거의 끝나갈 때쯤 마음을 터놓는 분도 계세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오시는 분들은 그만큼 얻어가는 부분이 있으리라 봐요.
진행자 그럼 컨설턴트를 찾아가기로 했다면, 효과적인 상담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게 있을까요?
영희 저는 고객분들에게 사전에 이력서를 준비해 방문하시도록 공통적으로 요청 드려요. 그것이 그 고객분의 재취업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때도 있어요. 완벽한 이력서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컴퓨터로 프린트하여 방문하시든 문구점에서 이력서 양식을 구입해서 손으로 작성해서 오시든 어떤 형태로라도 작성해서 방문하는 고객분과 아닌 분은 큰 차이가 있어요. 빈손으로 오는 분들은 ‘취업까지 오래 걸리겠구나’ 생각해요. 그만큼 간절함이 덜하다는 건데, 어떻게 질 높은 상담이 이뤄질 수 있겠어요. 워크넷 잡케어 서비스나 테스트를 미리 해보셔도 좋아요. 그러면서 스스로 상태 파악도 되고, 진단 결과를 상담 자료로 쓰면 더 효율적인 컨설팅이 가능하죠.
진행자 무성의한 분들이 오면 컨설턴트들도 의욕이 떨어지죠?
성희 숙제 같은 거 안 해오시면, 아 저분은 다음엔 안 오시겠구나 싶죠.
성철 태도와 자세의 문제니까요.
영희 사실 중장년은 잠재력이 높은데, 그 안에 오래 쌓인 안 좋은 습관이나 행동도 섞여 있잖아요. 그래도 태도가 좋으면 취업 가능성을 높여갈 수 있죠.
성철 안 좋은 태도 중 하나는 ‘나이 탓’ 하는 거예요. 나이 때문에 떨어졌을 거야, 이 나이에 무슨 자격증? 그런 나이 탓은 안 하셨으면 해요. 또 남의 눈치 보는 것도 삼가야 해요. ‘이 일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주변 시선을 의식하느라 컨설팅해주는 직업을 탐탁지 않아 하기도 해요.
미경 그런 눈치는 보지 않되 네트워킹을 많이 하면 좋아요.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무조건 나가서 많이 만나라. 안에서 취업 사이트만 들여다보면 결국 찾을 수 있는 건 경비, 청소, 보험영업, 다단계 이런 것뿐이에요. 그런 상황에 놓이면 더 자존감이 떨어지죠.
성희 근데 참 안 나가려고들 하시잖아요. 특히 남자분들은 상대와의 스몰토크에도 부담을 많이 느끼시고요.
성철 저도 그렇지만 한국 중년 남성 특성상 그게 쉽지 않아요. 자기 외로움이나 어려움에 대해 얘기를 잘 못 해요. 그러다 한번 터지면 난리 나죠. 우리 컨설턴트 중에서도 중년 남성분들이 펑펑 우시는 걸 본 경우가 많아요. 어쩌면 그만큼 자기 얘기를 할 곳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영희 취업을 하는 게 목표이긴 하지만, 상담을 통한 건강한 자아 회복도 중요하다고 봐요. 저는 상담하면 가능한 한 그 분의 강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컨설턴트가 그 사람 본연의 자존감을 살려주고 응원함으로써 내면에 에너지가 가득 차게끔 돕는 거죠. 그런 마음가짐이 재취업 과정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합니다.
[시니어잡]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중요한 기술로 거론되는 ‘드론’은 자율 항법 장치에 의해 자동 조종되거나 무선 전파를 이용해 원격 조종되는 무인 비행 물체를 말한다. 군사용 무인항공기로 이용되다가 재난 감시, 농업, 방송, 물류 등으로 이용 범위가 폭넓어졌고, 필요성도 확대됐다. 이에 따라 드론과 관련된 직업도 다양해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인 드론교육지도사는 중장년층 여성의 유망 직업으로 통한다.
드론교육지도사는 학생들에게 드론과 관련해 교육해주는 선생님이자 드론조종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이 직접 드론을 조립하고 조종하게 해주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
드론교육지도사는 교육기관 및 시설 등 드론과 관련된 모든 현장 활동에서 드론에 관한 이론과 실무 교육을 할 수 있다. 단, 전문가용 드론이 아닌 토이 드론과 관련해 교육·지도를 할 수 있다.
드론교육지도사 자격을 취득한 후, 중학교 자유학기제 강사, 초등학교 방과후 교사, 문화센터 드론 전문 강사, 대학교 평생교육원 외부 강사, 도서관 아동기관 드론 전문 강사 등으로 보통 취업이 이루어진다. 홈스쿨 교습소 운영도 가능하다.
그러나 강사를 넘어 드론교관이 되거나 항공촬영 방제 등 국가 전문기관에서 일하고 싶다면 드론교육지도사가 아닌 전문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한다.
드론교육지도사 자격 취득
드론교육지도사 자격증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나오는 국가공인자격증이 아닌 민간자격증이다. 자격증 발급 기관은 100여개에 이른다. 한국 드론교육 협회, 대한 드론협회 등이 있다. 각 협회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자격증을 발급한다.
드론교육지도사 자격증은 ‘이수’의 개념이 강하다. 각 기관마다 배정된 교육 과정을 이수하면 수료증 혹은 자격증이 발급된다. 기관에서 자체적으로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교육을 성실히 받았는지 검사하는 수준으로 시험은 어렵지 않다. 필기시험은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면 충분히 풀 수 있고, 실기시험은 간단한 드론 조종 수준이라고 한다.
자격증에는 1급과 2급이 있는데, 2급은 보통 이론 60시간 이상, 실기 10시간 이상 교육을 수료하면 취득할 수 있다. 1급은 2급 취득 이후 이론 60시간 이상, 실기 20시간 이상 교육을 이수하면 취득 가능하다. 사실 1급과 2급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2급만 취득해도 강사로 일하는 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드론교육지도는 기본적으로 드론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드론 비행 원리, 조종 기초와 수리 방법 등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통신 방법, 드론 센서와 IOT(사물인터넷) 접목, 드론 재료와 부품, 임무 장비 등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드론 비행제어 시스템 SW(소프트웨어), 드론 자율주행과 코딩 SW, 드론 항공 촬영 방법 등도 알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드론 스포츠, 드론게임 등 드론을 다양하게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드론교육지도사는 드론에 대해 가르쳐주는 직업이기 때문에 스스로 드론 종사자라기보다는 드론선생님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학생을 이해하는 자세, 밝고 긍정적인 태도, 스피치 능력 등의 소양도 요구된다.
중장년 여성에게 추천 이유
앞서 말했듯이 드론교육지도사는 학교와 기관 등에서 일하는 편이다.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초등학교 전국 6040개), 중학교 자유학년제 드론 수업(중학교 전국 3213개), 고등학교 진로 체험(고등학교 전국 2360개), 대학교 비교과 과정 드론 수업 등에서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청소년회관, 다문화 지원센터, 여성회관, 서울 50+센터 등에서도 드론 교육을 할 수 있다.
특히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드론 교육이 늘어나고 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코딩(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컴퓨터에 명령하는 것) 교육을 배우는 경우도 많은데, 드론을 배우면 코딩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는 모형 비행기를 만들고 난리면서 창의력을 길렀다면, 현재는 드론이 그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다 보니 초등학교에서 드론교육지도사의 수요 또한 높아지고 있다. 특히 드론교육지도사는 중장년 여성에게 추천된다. 양육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엄마의 마음으로 친절하게 드론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드론교육지도사는 드론을 잘 다룬다면 좋겠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때문에 드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도 3개월 정도면 드론을 잘 다루고 지도교육사가 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물론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거나, 손 감각이 좋은 여성은 유리할 것으로 추천된다.
또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도 드론교육지도사의 장점이다. 드론교육지도사는 보통 프리랜서로서 일한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경력이 2~3년 이상 쌓이면 업계에서 인정받고 수익도 안정화된다. 초기 수입은 월 100~150만 원 수준이지만 경력이 쌓인 후 여러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 웬만한 직장인 부럽지 않을 만큼 벌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신이 하기에 달렸다.
정리하자면 드론교육지도사는 양육 경험이 있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중장년층 여성에게 특히 추천되는 직업이다. 이에 따라 여성회관,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등에서 드론교육지도사 양성 과정이 열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지자체에서 드론교육지도사 관련 강좌가 열린다면 겁내지 말고 도전해보자. 꼭 업으로 삼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녀를 키우거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친구가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1967년 프랑스 정부의 해외연수 담당부서. 담당관은 긴장한 한국인 유학생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프랑스어 실력은 기대 이하였지만, 돌려보낼 수는 없기에 체념해서 나온 말이었을 거다. 재미있게도 그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담당관이 베푼 작은 선의는 훗날 프랑스에 큰 기회를 제공했다. 그 청년은 프랑스의 고속열차 TGV와 선진 항만 기술의 도입을 주도했다. 또 그곳의 아름다운 와인을 소개하는 명사가 되었다. 최훈(86) 前 철도청장 이야기다.
“필연이죠.”
최훈 전 철도청장은 그의 인생에서 프랑스와 계속된 관계를 그렇게 설명했다. 사실 청년 시절 그의 관심은 오직 취직뿐이었다. 프랑스와 길고 긴 인연을 이어갈 것이란 생각은 꿈에서도 못 했다.
“경북대 사범대학을 졸업했을 때 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전쟁을 겪고 난 시기여서, 학교도 많지 않고 선생에 대한 수요도 적었죠. 일자리를 찾다가 국토건설단에 지원한 것이 공무원 생활의 계기가 됐어요. 영어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외무부 쪽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교통부 쪽에서 외무 업무를 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길래 배속을 받았죠.”
그렇게 영남 출신 청년의 서울 상경 생활이 시작된다. 1961년의 일이다. 바라던 해외 공관 자리는 아니었지만, 맡은 일은 재미있었다. 대한민국이 이제 막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춰가던 시기.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 과정에서 외국과 교류하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업무였다.
그의 첫 임무는 국제민간항공기구에 한국의 항공 운항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후에 미 제5공군 관할이었던 김포공항을 이양받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우리 의사를 정확히 제공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전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며 “그때 들인 습관을 아직까지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책상 정면에는 손때 묻은 낡은 사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 같았던 프랑스 유학
“교수님 믿어주세요.”
1967년 심사를 담당하던 교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 정부의 부탁을 받아 국비유학생을 선발하는 자리. 교통부에서 신청한 청년의 프랑스어 실력이 문제였다. 퇴짜 맞을 가능성이 컸지만, 자신을 뽑아주지 않으면 선발 예산은 다른 나라로 전용될 것이라는 이유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교통부에서 활약할 실력이면 현지에서 금방 배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결국 교수님이 제 설득에 넘어갔죠. 낭만이 넘치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죠. 프랑스 정부에서는 매년 국비유학생 형태로 지원자들을 받아 프랑스 유명 관광지의 호텔에 배치했어요. 프랑스의 선진 문화를 후진국에 전하면서 모자란 인력도 해결하는 정책이었죠. 결국 어렵게 프랑스에 도착하니, 현지 호텔에서도 제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다행히 현지 지배인이 기회를 줘서 프랑스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죠.”
그렇게 그의 프랑스 생활은 시작됐다. 세 개의 5성급 호텔에서 매니지먼트 과정을 이수했다. 고된 일들이 이어졌지만, 센강과 에펠탑, 샹송에 대한 로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가슴속 목마름과 호기심은 조금씩 기쁨으로 변해갔다. 임계점을 넘어 끓어 넘치던 프랑스의 다양한 문화는 열정 넘치는 청년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니스의 호텔에서는 모나코 왕비가 된 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파티에서 쟁반을 들고 수백 명의 귀부인 사이를 누비기도 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죠. 드레스를 차려입은 부인들로 가득했고, 하루에 수백 병의 최고급 샴페인이 소비될 정도였으니까요. 단순히 화려한 모습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회 문화나 와인 다루는 법 등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체득한 지식은 후에 제게 큰 도움이 됐죠.”
짧은 1년이었지만, 그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971년 교통부로 돌아온 그는 다시 프랑스행을 명받았다. 이번엔 출장이었다. 당시 영어와 프랑스어가 가능하고, 현지 경험 있는 공무원이 흔할 리 만무했다.
“인천에 항만 시설을 지어야 하는데, 서해의 심한 조석간만의 차를 극복할 갑문 운영 기술은 국내에 없었어요. 우리 바다의 조건과 유사한 선진국 항구에 가서, 항만 시설을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할지 배워와야 했죠. 그래서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의 항구를 차례차례 들렀어요. 르아브르와 케르크, 안트베르펜, 브리스톨 같은 곳들이었죠.”
당시 그가 만들었던 항만 운영 시스템 규정은 인천항 갑문 운영의 뼈대를 이루었다. 선진국의 운영 노하우를 집약한 결과물은 세세한 부분이 바뀌었어도, 기본적인 운영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항만청 국제과장 시절에는 항만 개발을 위한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개발은행 등 각종 국제기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오일쇼크로 중동에 돈이 넘친다는 말을 듣고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까지 달려갔다. 무엇보다 종교가 우선시되던 시절, 알라에게 절을 하라는 무례한 요구에 머리도 숙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는 “정확히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확보한 차관을 합치면 1억 8000만 달러 정도 될 것”이라며 웃었다.
운송실장 시절, 부처 내에서 다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번에는 열차였다. 국내 고속철도 도입이 검토되던 시기였다. 당시 국내 기류는 ‘당연히 신칸센’이라는 분위기였다. 철도 기술자 상당수가 일본을 통해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레 익숙한 일본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최고의 열차는 프랑스의 TGV였다. 최고 영업 속도가 일제에 비해 시속 90km 이상 빠른 기술력을 자랑했다.
“당시에 프랑스나 독일의 고속철도를 경험해본 사람이 부처 내에 많지 않았죠. 전 각종 국제회의나 조약 협상을 위해 왕래가 잦았으니 익숙했고요. 또다시 그렇게 프랑스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 열차의 속도는 시속 80km 정도였으니까 신칸센도 충분히 만족할 만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열차는 지연 없이 대량 수송이 가능한 최고의 물류 효율을 자랑하는 수단이었으니까, 경제 발전에 중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반대도 많았지만 세계 최고의 열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웠던 와인과의 재회
“여보! 이게 그 술이야! 바로 이 맛이야!”
1977년. 업무로 바쁜 일상을 보내던 그는 한국에서도 와인이 나온다는 소식에 가게에서 한 병을 집어 들었다. 마주앙 와인이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제조가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만든 와인이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모금이면 충분했다. 입에 대는 순간 의심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연수 시절 워낙 애주가였던 저는 밤마다 숙소 주변의 작은 가게에서 와인을 사 마셨어요. 1프랑짜리 싸구려 와인이었지만, 같은 값인 물을 사 먹을 순 없었죠. 저녁을 대신해 커다란 소시지 하나를 구워 와인 한 병을 비우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주앙을 먹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확 떠오르더라고요. 그 시절 추억의 맛이었어요. 미군에 연줄이 없으면 와인을 구하지 못하던 시절, 와인에 대한 갈증을 달랠 수 있었죠.”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그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핑계 삼아 여행도 갈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해답은 와인으로 귀결됐다. 우선 와인의 기본 정보를 요약해 알리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첫 번째 작품이 1997년 600페이지 분량의 저서 ‘포도주 그 모든 것’이라는 책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와인 불모지였으니까요. 와인에 대한 개론을 상식선에서 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책을 내고 나니까 주변에서 문의가 늘더라고요. 그래서 자원평가연구원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라는 교육기관을 세웠어요. 지금의 ‘와인 리뷰’라는 월간지도 그때 시작했죠. 처음엔 광고도 많지 않아 고생을 꽤 했지만, 몇 년 지나고 나니 업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지더라고요.”
2005년에는 국제 와인 대회인 코리아 와인 챌린지를 시작했다. 일본의 대회를 롤모델로 삼아 시작해 지금은 세계적인 대회가 됐다. 업계에서는 해외 와이너리의 와인을 가장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대회라는 평가를 듣는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21개국 888종의 와인이 출품됐다. 만나기 어려운 조지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의 와인도 참가했다. 대회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대회 심사위원들도 자긍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발행하는 ‘와인 리뷰’를 살펴보면 발행인인 최훈 前 철도청장이 작성한 기사들이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주요 기사의 대부분을 소화해내고 있다. 기사의 깊이도 대단하지만, 작성량 자체가 젊은 기자들을 뛰어넘는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유튜브도 시작했다. 와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채널이 필요하다는 유통업체들의 요청이 있었다. 와인 산지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특징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지잖아요. ‘와인 리뷰’를 발행하면서부터 새벽에 원고 작성하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새벽에 차분하게 글을 쓰다 보면 기사에 필요한 추가적인 자료나, 과거에 썼던 원고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과거에 다녀왔던 여행의 기억까지 말이죠. 기본적으로 와인을 이야기할 때 제가 가보지 않은 곳의 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부끄럽더라고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쓰는 것 같아서. 지역의 로컬 와인이나 토양, 기후 등을 겪어봐야 그 와인에 대해 정확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마트에서 칠레 와인만 사다 마신다는 말에 그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그저 털털한 인상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순간 ‘무언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진 그의 조언으로 오해는 풀렸다.
“어느 나라의 와인이라도 시작을 위해 저렴한 와인을 마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좀 더 좋은 와인을 찾는 모험을 권하고 싶어요. 여러 나라에서 훌륭한 와인이 나오고 있으니까 너무 빨리 한정 지어 고집하기보다는 다양한 체험으로 와인의 즐거움을 누려보세요.”
기본만 하자. 수없이 하는 말이지만 정작 지켜지는 일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그만큼 기본을 지키기도 어려운 세상일지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 기본을 지키는 이는 도리어 빛이 난다. 김진숙(71) 이사가 그렇다. 모래에 덮인 금이 시간 지나 점차 드러나듯, 나서서 설명하지 않아도 가치를 알아주는 이 말이다.
방송인 홍진경의 어머니 김진숙이 품질관리이사를 맡고 있는 주식회사 홍진경은 ‘더김치’를 비롯해 만두, 다시팩, 된장 등 양념류를 판매하는 식품 회사다. 대물림한 방식으로 담가 먹던 김치 판매를 시작으로 다른 상품들을 내놓으며 18년째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느님, 김치가 맛있어지게 도와주세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전 김 이사는 1년 정도 김치를 판매한 적이 있다. 집에서 직접 만든 것을 지인들에게만 조금씩 팔았던 건데, 이를 눈여겨본 딸 홍진경이 사업 제안을 해왔다. 아예 회사를 차리지 않겠냐는 본격적인 사업 제안이었다.
그는 강하게 반대했다. 망신당할까봐, 딸 이름에 먹칠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선 나머지 한 달 정도 도망까지 다녔다. “우리 식구 먹는 거야 내가 한다지만 이걸 어떻게 대중 상대로 판매한다고 이러나 싶었어요. 대량으로 만든 김치가 우리 해 먹는 김치랑 같은 맛이 나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죠. 만약 맛이 제대로 나지 않으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나한테 그 어려운 걸 시키느냐고 거절했어요.”
딸은 포기하는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쇼케이스라는 걸 해보자. 신사동에 있는 식당 하나를 빌려서 지인과 기자들을 초청하는 거야. 엄마가 찾아오는 사람들 대접할 배추김치랑 총각김치를 맛있게 만들어줘.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면 사업을 하고, 맛이 없다고 하면 내가 포기할게.” 김 이사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쇼케이스를 앞두고 김치를 담글 때 매일 기도드렸다. “하느님, 이 김치가 맛있게 익도록 도와주세요. 이거 정말 중요한 겁니다. 이게 잘돼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면 김치 담그느라 고생하는 주부들 수고도 덜어줄 수 있어요.”
신선한 재료, 굽히지 않는 원칙
행사 당일, 식당에는 돼지고기 수육과 조밥, 배추김치와 총각김치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김치 본연의 맛을 느끼라고 새우젓은 일부러 챙기지 않았다. 목 축이는 데 필요한 직접 담근 식혜는 덤. 당시 쇼케이스를 위해 빌린 식당은 홍진경의 지인들로 북적거렸다. 엄정화, 최화정, 이영자 등 홍진경의 연예인 지인들부터 코미디언, 모델, 가수, 작곡가, 당시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 잡지사 기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최화정은 ‘어머니, 김치 맛이 살아 있어요’라고 했고, 이영자는 ‘엄마, 김치 진짜 맛있어’ 그랬죠.” 모인 사람들 전부 김치가 맛있다며 싸달라고 난리일 정도였다. 미리 소분해 포장해둔 김치를 한 봉지씩 챙겨 보냈고, 그 다음 날부터 신문이며 잡지에 ‘홍진경네 김치 맛있더라’는 기사가 잔뜩 실렸다.
2003년, 그는 결국 딸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집에서 직접 김치를 담가서는 주문량을 채울 수 없으니 OEM(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해내는 주문자위탁생산)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김치 10kg 기준으로 필요한 재료와 김치를 담그는 순서를 세세하게 설명한 레시피를 정리했다. 공장 측에 레시피를 전달하기로 한 미팅 전날 밤, 그는 딸을 불러 앉혀놓고 약속을 받아냈다.
“재료에 돈 쓰는 거 아까워하면 나는 이 일 못 한다.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집에서 하던 것처럼 좋은 재료로 만들 거고, 어느 공장 어느 사장님이 만들더라도 내가 써둔 이 레시피 그대로 만들어야 해. 그거 약속해야 엄마는 이 일 할 수 있어. 그랬더니 진경이가 눈을 딱 쳐다보면서 ‘엄마,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그러더라고요.”
처음 계약을 맺은 건 평택의 한 김치 공장이었다. 당시 레시피를 받아든 공장장은 “이거 대박날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만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조미료랑 설탕이 하나도 안 들어가. 그러니까 성공할 수밖에 없지.”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역할 분담은 확실했다. 마케팅이나 회사를 경영하는 부분은 딸이 맡고, 재료부터 제품 품질 관리, 레시피 관련된 일은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사업 초기에는 힘든 줄도 모르고 공장과 배추밭에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곤 했다. 비 내린 뒤 질척한 배추밭을 얼마나 걸었는지 엄지발톱이 빠진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에겐 영광의 상처일 뿐이었다. 딸의 이름을 걸고 하는 사업인 만큼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직원 수도 몇 명 안 되고 주문받은 물량도 적어 공장 한켠으로 물러나 직원들과 함께 조용히 김치를 버무렸다. 그러나 김 이사의 고집과 원칙이 통했는지, 하루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배가 넘는 양의 주문이 쏟아졌다. “지난주는 200kg, 이번 주는 300kg, 500kg 주문이 들어오더니 그 다음 주는 1000kg을 막 넘어갔어요. 1년 지난 뒤에는 우리 회사 김치부터 먼저 담그고, 그 공장에서 원래 담그던 김치를 자투리 시간으로 넘겨야 했죠.”
주문량이 많아졌어도 원칙은 그대로 유지됐다. 김 이사는 품질 관리를 위해 언제든 공장에 찾아와 김치에 쓰일 재료를 살펴볼 수 있고, 양념 맛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잎이 꺾이거나 푸른 이파리 많은 배추는 아예 쓰지 않고, 풀을 쑬 때도 무조건 국산 찹쌀만 고집했다. 배추 한 포기를 그냥 넘기지 않고 모든 배추에 양념이 고루 발리도록 했다. 다른 사업체 김치랑 섞이지 않게 철저히 관리해달라는 부탁도 빼놓지 않았다.
김치의 질이 좋으니 주문이 폭주하는 건 당연한 일. 홈쇼핑에서 매진시킨 물량을 감당 못 하니 직접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직원들과 함께 김치를 담갔다. 방송에서 약속한 날짜까지 배송이 완료되지 않으면 소비자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거래하는 공장을 자주 바꾸지 않고 최대한 조율해 계약을 유지하는 이유도 김치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는 음식의 맛 역시 소비자와 기업 간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는 신뢰와 신용을 중요시한다. 소비자와의 약속, 직원과의 신뢰, 혹은 공장과의 신용.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어려워도 “하던 대로 해요, 순리대로”
좋은 식재료를 판단하는 높은 기준, 재료의 맛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웰빙’ 조리법, 회사 직원들의 끈끈한 단합력. 더김치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서 매출은 계속 우상향 곡선만 그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치를 판매하는 회사가 몇 없었어요. 외국에 수출할 만큼 큰 회사랑 전체 판매량으로는 못 견줘도 그때 온라인 판매는 더김치가 1위였어요. 180억, 200억, 220억, 270억, 매출도 쭉쭉 올라갔어요. 주춤할 새가 없었죠.”
인기가 한풀 꺾인 건 3년 전쯤부터다. 연예인들이 직접 브랜드를 세워 판매하는 김치가 시중에 다양해지자 자연스레 매출 곡선이 꺾인 것이다. 다양한 회사,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제품들이 많아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전에는 김 이사 혼자 혹은 딸 홍진경과 함께 홈쇼핑에 출연하는 일이 잦았지만, 최근 몇 년은 홈쇼핑에 베테랑 방송인 홍진경만 출연하고 있다. 타사 김치 매출을 따라잡기 위한 맞수다.
김 이사는 요즘 ‘혼자 홈쇼핑에 출연해도 매출을 올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방송 출연에 유튜브 콘텐츠 기획 및 촬영, 홈쇼핑 출연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딸을 걱정하는, 영락없는 엄마 마음이다.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기보단 하고 있는 식품에 집중하려고 해요. 하고 있는 걸 잘 지켜내자는 마음이 커요. 제품 하나 출시하기까지 레시피 정리하고 필요한 재료 하나하나 찾느라 몇 년은 걸리거든요.”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새로운 제품을 함께 내보자는 제안이 수없이 들어온다. 육수를 간편하게 우려낼 수 있는 ‘더다시팩’을 출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리 정해둔 출시일 이전에 경쟁사에서 비슷한 제품을 먼저 내버리는 허망한 일도 겪었다.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당황하고 힘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공정을 마무리했다. 예정대로 출시된 더다시팩은 좋은 재료로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아 지금도 꾸준히 매출을 올리고 있다.
“처음 매출 부진을 겪을 때 걱정한 건 사실이에요. 그때 아들이 ‘우리 순리대로 해요.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거니까, 너무 남을 쫓아가려고 하지 말고 하던 대로.’ 말해줬는데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자식들에게 배운 기분이었죠.”
조용한 응원이 만든 빛나는 것들
유명 방송인의 엄마라고 다른 어머니와 뭐가 다를까. 그는 항상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워낙 통통 튀는 성격인 딸이 어릴 때는 마음 놓을 새가 없었다. 하지만 딸을 지켜봐 온 엄마의 마음에는 언제나 신뢰가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진경이 유튜브에서도 그랬어요. 누나가 갖고 있는 내공은 우리 가족들만 알고 있다고. 그게 정말 맞는 말이에요. 학교 공부는 안 했어도 책을 많이 읽어서 똑똑하고 명석하거든요.”
TV 방송부터 넷플릭스 예능, 유튜브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는 딸을 보는 요즘은 감사하기만 하다. ‘우리 딸의 진가를 세상이 알아주는구나’ 싶어 내심 뿌듯한 마음도 든다. ‘공부왕찐천재 홍진경’ 유튜브 채널에 달리는 댓글도 전부 읽는다. 구독자 수만 100만 명을 넘길 만큼 인기 있는 데다 댓글엔 적재적소에 터지는 멘트, 짜임새 있는 영상 기획력 등 칭찬 일색이라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느님께 매일 기도했어요. 우리 아이에게 지혜를 주세요. 방송에서 빛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맡은 방송들 전부 다 빛나게 해주세요. 요즘은 딸이 그래요. ‘엄마가 맨날 기도했잖아. 그 기도대로 되고 있는 것 같아.’”
일이 바빠도 모녀는 하루에 한 번씩 꼭 안부 문자를 주고받는다. 딸이 출연한 방송 모니터링 후 칭찬은 필수다. 어느 부분이 좋았다고 콕 짚어주기도 하고, 재능은 항상 네 안에 있다며 북돋아주는 말도 한다. 아낌없는 응원이 홍진경과 라엘 모녀 특유의 솔직 당당한 매력을 자아냈다.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열었던 가족회의도 구김살 없는 성격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대화로 해결하는 시간을 만든 것이다. 덕분에 큰 소리를 내거나 험한 말 오가지 않고도 두 아이를 바르게 키워낼 수 있었다.
그는 엄마와 사업인으로서의 삶 중 무엇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힘든 때도 많았지만 매사에 즐겁게 임했다. 일하면서 항상 나 아닌 가족, 지인,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잘 되기를 염원한다.
“배추나 무 농장에 가보면 일해주시는 동네 어르신들이 그래요. 용돈벌이 하면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저희는 좋은 재료 받아 좋은 음식 만들 수 있어 좋고, 어르신들은 일거리도 생기고 돈도 벌 수 있어 좋고. 아무리 돈 버는 기업이라도 저희만 잘 돼서는 안 되잖아요.”
그는 앞으로도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일상과 직업, 신앙을 굳이 구분하진 않는다. 무엇이든 기본에 충실해서, 지금 당장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시간 지나면 진가가 드러나는 사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부연하여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고개 끄덕이는 사람 말이다. 그가 키워낸 아이들이 그랬고, 담그는 김치가 그렇듯. 그가 소망하는 일을 이룰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우리는 사업을 하는 연예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사업을 할 때 장점이 많기 때문일 것. 자본도 어느 정도 모아졌고, TV에 사업에 대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노출돼 홍보를 하기 용이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고운 시선만이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우려를 넘어서 자신의 사업에서 성공한 중년 연예인들이 있다. 누군가는 꿈을 쫓아서,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서 등, 그 이유 또한 다양하다.
정보석, 빛나는 빵집 사장님
지난 1986년 데뷔한 연기 35년차의 배우 정보석. 그는 극 중 맡는 역할 때문에 '명품 악역 배우'로 통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성이 좋기로 유명한 배우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푸근한 인상의 빵집 사장님으로 변신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정보석은 지난 6월 서울 성북구에 빵집 '우주제빵소'를 오픈했다. 18년 전에 지은 자신의 집을 개조한 것. 원래는 카페를 하려고 했는데, 빵이 맛있다고 난리가 나서 빵집이 됐다. 특히 둘째 아들이 제빵사, 아내가 바리스타의 역할을 각각 맡아서 하고 있다. 정보석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스스로 "빵 만드는 일 외에는 다 한다", "허드렛일 담당이다"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정보석은 최근 빵집 사장님으로 변신한 것에 대해서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알리고, SNS인 인스타그램도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빵집에서의 일상 사진을 게재하며 호기심을 자극하고 방문으로 이어지도록 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정보석은 연기 활동을 지속하면서 가맹점, 프랜차이즈 빵집을 내는 것이 목표다.
임채무, 빚 내면서까지 두리랜드 운영
배우 임채무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그 이름 '두리랜드'. 예전부터 아이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놀이공원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두리랜드 사장님이 됐고, 빚을 지면서까지 운영하고 있어 귀감을 사고 있다.
임채무는 지난 1989년 사비 130억 원을 들여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약 3000평에 달하는 테마파크 두리랜드를 오픈했다.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 위주로 구성됐고, 임채무는 30년 동안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부가 돈이 없어 주저하는 모습을 본 뒤로 입장료를 없애버렸다.
이로 인해 수년 간 적자 상태로 경영난이 일어 2006년부터 약 3년 간은 휴업했다. 그리고 2009년 30억 원을 들여 구조를 바꾼 후 재개장했다. 2017년 10월에는 미세먼지 등 환경적인 문제로 두리랜드를 휴장했고, 2년 6개월 만인 2020년 4월 24일 콘텐츠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뉴얼한 뒤 다시 문을 열었다. 인건비와 전기세를 감당할 수 없어 입장료도 받기 시작했다.
임채무는 놀이공원 리뉴얼 전 아내와 두리랜드 화장실에서 1년 간 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더불어 그는 지난 9월에도 "앞으로도 갚아야 할 돈이 140억, 150억이 된다"고 밝혀 이목을 사로잡은 바 있다. 이와 같이 임채무는 자신이 빚을 감당하면서까지 두리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하지만, 동심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진심은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이무송, 결혼정보업체 대표 우뚝
가수 이무송은 노사연의 남편 혹은 결혼정보업체 대표로 더 유명하다. 이무송은 지난 2010년 결혼정보업체 '바로연'을 론칭했고, 업계에서 손에 꼽히는 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이무송은 론칭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결혼정보업체 사업 구상은 10년 전부터 해왔다"며 오랜 시간 고심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나이나 주변 상황에 못 이겨 결혼한 경우가 많았다. 서로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결혼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 부부는 많이 싸웠다. 싸움도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어 부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결혼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바로연이 잘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무송과 노사연이 스타 부부라는 데 있다. 이무송과 노사연은 각각 회사의 대표이사, 홍보이사를 맡고 있다. 그들은 각종 방송에 출연하면서 바로연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알렸는데, 이는 바로연을 이용하면 두 사람처럼 알콩달콩 살 수 있다는 왠지 모를 믿음을 갖게 했다. 여기에 실제로 이용해본 고객들의 만족스러운 후기가 더해져 현재의 위치에 이른 것으로 해석된다.
으리으리한 웨딩홀과 값비싼 예물까지 자녀의 완벽한 하루를 위해 정신없이 준비하다 보면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등한시될 때가 있다. 반면 이곳의 예식은 소박하지만 늘 한결같고 경건하다. 가난 때문에 결혼식을 미뤄야 했던 아픔을 교훈 삼아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이들에게 무료 예식을 올려준다. 그 철학은 50여 년째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에게는 유명 호텔보다 더 근사하고 특별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이곳, 경상남도 마산의 ‘신신예식장’을 찾았다.
“자, 여기 보세요. 찍습니다. 김치, 참치, 꽁치~” 늦지 않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식장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찰칵’ 하는 셔터음이 울린 뒤였다. 백낙삼(90) 사장이 들고 있는 카메라 맞은편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부부가 어색하게 서 있다. 최필순(80) 이사는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신부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날은 이광현(78)·박숙자(74) 부부의 리마인드 웨딩이 있는 날이다. 순백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신부는 아이처럼 “가자”며 신랑을 재촉했다. 신부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동안, 신랑에게 이곳을 찾은 사연을 물었다.
“6년 전 오늘, 아내가 사고를 당했어요. 뇌를 다쳐서 6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다가 기적적으로 일어났죠. 올해가 결혼 50주년이기도 하고, 오늘이 다시 태어난 날이잖아요. 그래서 겸사겸사 기념하려고 서울에서 예약하고 왔어요. 기분이 참 묘하네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보통의 식장은 아니구나 싶었다. 삼색 페인트가 칠해진 건물 외벽과 ‘완전 무료’라고 큼직하게 적힌 간판이 그 비범한(?) 분위기를 증명해주는 듯했다. 내부로 입장하면 1960년대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웨딩홀은 드라마 세트장이 아닌 그 시절의 잔상이다. 백낙삼·최필순 부부는 1967년부터 이곳에서 예식을 올리고 있다. 직원에게 들어가는 수고비 70만 원을 제외하고 예식에 드는 비용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백년가약을 맺어준 부부만 1만4000쌍이다.
거리의 사진가에서 예식장 사장으로
“삼국사기는 들어봤어도 ‘신신사기’는 처음이지요? 허허.” 식을 마치고 몇 시간 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백 사장은 한숨 돌리기도 전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식업을 시작한 계기를 묻자 대답 대신 두꺼운 사진 앨범을 꺼내왔다. 겉표지에 ‘신신사기’란 글자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이곳의 50년 역사를 모아둔 그의 보물 1호다. 낡은 종이를 넘기며 그는 90년 인생을 회고했다.
젊은 시절 백 사장은 교육자를 꿈꾼 포부 가득한 청년이었다. 마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밥을 굶주리면서도 중앙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해 여섯 학기를 다녔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웠지만, 자동차 정비소부터 공장까지 허드렛일을 하며 밤낮없이 교육 사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정부의 검열로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무산됐다.
그는 좌절할 틈도 없이 밥벌이를 찾아 나섰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한강에서 보트 타고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트장에 놀러 온 이들을 상대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거리 사진가로 일을 시작했다. 먹고살 만큼의 돈이 모였을 때쯤, 서른한 살 노총각이 돼 있었다.
“고향 사람들이 나보고 몽달귀신 되겠다고 난리가 난 거야. 그래서 중매를 해줬어요. 지금의 아내가 나왔지. 아내한테 ‘내가 가진 건 이 몸뚱이 하나뿐이다. 고생 많이 해야 될 거다. 그래도 고생 안 하게 최선을 다해보겠다’ 말했어요. 그 한마디 믿고 시집을 온 거예요.”
가난한 부부의 예식장은 작은 초가집 마당이었다. 축가는 새들의 노랫소리로 대신했다. 백 사장은 아무려나 행복했지만, 식을 올린 후 아내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맞아야 했다. 있는 집이라고는 열세 명의 식구가 생활하는 작은 단칸방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그는 1년 만에 아내와 함께 살 셋방을 마련하고, 뒤이어 3·15의거기념탑 뒷골목에 세워진 건물을 매입했다.
“이 건물에 무얼 할까 하다가 나처럼 돈이 없어서 결혼 못 하고 애만 태우는 사람들 결혼시켜줘야겠다 생각했어요. 돈은 사진값만 받아도 충분했지.”
1만4000쌍의 웃음과 눈물이 깃들다
1967년 6월 문을 연 신신예식장은 얼마 되지 않아 요즘 말로 ‘핫플레이스’가 됐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손님이 물밀 듯 밀려왔다. 사진값 6000원만 내고 예식을 올릴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창 잘될 때는 하루에 17쌍씩 식을 올려줄 정도였다. 그간 수많은 이들이 거쳐간 만큼 다양한 사연이 예식장을 채웠다.
“11시 30분에 식을 예약한 신랑이 미용사에게 신부 패물을 전해달라 부탁했는데, 나중에 보니 신부는 받은 게 없다는 거예요. 내가 다른 주례를 보는 사이 미용사가 도둑으로 몰려서 파출소 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11시 신부 것인 줄 착각하고 잘못 건네준 거였죠. 이 일로 부부끼리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더라고요. 참 재미있는 인연이지요.”
유쾌한 에피소드만큼 뭉클한 기억도 많다. 자신이 식의 주인공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아픈 신랑의 주례를 봐준 적도 있고, 6년 전 가출한 큰딸이 둘째 딸 결혼 전날 기적적으로 돌아와 자매의 결혼식을 한날한시에 올려준 적도 있다. 그러나 가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백 사장이 잊을 수 없는 손님은 따로 있다.
“사진 값을 안 내고 도망간 부부가 있었어요. 당시에는 휴대폰 번호 대신 주소를 적었던 때라 집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집에는 아픈 사람이 누워 있고, 너무 어렵게 살고 있는 거야. 차마 돈을 받을 수가 없어서 쌀 한 말 사주고 돌아왔어요. 도울 수 있어 그저 행복했지요. 지금도 이렇게 좋은 직업이 세상에 또 있겠나 싶어요. 내가 그동안 행복했던 일을 죽 적어봤는데, 행복하다는 말만 백스물일곱 개가 나와.”
그 따뜻한 인심 덕분일까. 어느 날부터 ‘신신예식장에서 결혼하면 잘산다’는 소문이 돌며 장사는 더 번창했다. 백수 생활을 하던 큰아들이 식을 올린 뒤 직장을 구하자, 여섯 남매가 줄줄이 이곳에서 결혼을 했을 정도다. 그 소문은 최근까지도 이어지는 듯했다.
“작년에 부산에서 전화가 왔어요. 1977년에 선생님 은덕으로 겨우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제는 부자가 됐다며 사례를 하겠다는 거예요. 아내가 그 얘기를 듣더니 보이스피싱이라는 거야.(웃음) 괜히 겁이 나서 밤에 자다가 ATM기기 가서 돈을 빼왔어요. 그리고 자고 일어났는데 휴대폰에서 띵 소리가 나대. 100만 원이 들어와 있더라고. 고마워서 가족사진, 리마인드 웨딩, 영정사진까지 다 찍어줄 테니까 언제든 오라고 했지요.”
100세까지 즐겁게, 성실하게, 보람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어느 추억의 장소를 회고하는 것 같지만, 신신예식장은 오늘날도 여전히 씩씩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예약 문의도 꾸준히 들어온다. 2014년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에 등장한 후로는 젊은 사람들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그 덕에 두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웨딩 트렌드까지 공부하느라 바쁘다. 인터뷰를 하던 날에도 연구(?)는 계속됐다. 어느새 백 사장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최 이사는 앨범을 펼쳐 보이며 열띤 설명을 했다.
“옛날에는 부케가 이렇게 길었어. 바닥까지 왔다고. 그러다 조금씩 길이가 줄어들면서 짧아졌지. 드레스도 얼마 전까지 치렁치렁 뭐가 많이 달린 게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액세서리랑 큐빅을 거의 안 붙여. 아주 옛날에 유행했던 게 다시 돌아오더라고. 여보, 이 사진 괜찮지 않나. 우리도 젊은 신랑 신부 오거든 이렇게 찍어주자.”
나이가 나이인 만큼 힘이 들 법도 한데, 두 사람의 열정은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사무실 벽 한쪽에 붙여둔 생활신조가 젊게 사는 비결인 듯했다. ‘생활은 즐겁게, 임무는 성실하게, 인생은 보람되게.’ 그래도 이제는 노후를 즐길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100살까지는 일하고 싶어요. 앞으로 10년! 그다음에는 자식, 손주가 대대로 이어나갔으면 좋겠어요. 은퇴하면 이 장부를 배낭에 넣어 메고 아내와 전국 일주를 하면서 예식장에 와주었던 손님들을 만날 겁니다. 그 얘기를 하면, 다들 우리 집에 꼭 오래요. 다 보러 가야지요.”
맞잡은 손 놓지 말고, 서로 깊이 이해하고, 꽃길 따라 함께 걸어가야 한다. 50년 동안 백 사장의 주례사에 빠지지 않은 단골 멘트다. 이 덕담을 한평생 지켜온 부부가 있을까. 잠시 의심했지만 그 주인공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초가집 앞마당에서 두 손 맞잡은 순간부터 수많은 이들의 앞길에 꽃을 수놓아준 오늘까지 두 사람이 걸어온 인생 여정이 그 자체로 ‘꽃길’이었다.
고전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인류의 보물창고입니다. 사람은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축적된 지혜는 면면히 이어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생각과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전에 담긴 지혜는 삶의 고갱이가 되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영혼의 혼밥’을 짓는 신아연 작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을 위해 동양 고전을 재료로 솥단지를 걸었습니다.
“집에 글쎄 도둑이 들었지 뭐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요즘 하고 있는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기발랄한 아가씨가 데이트 상대에게 던진 대사입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젊은 층에서 딴에는 재치로 하는 말, 단순 유행어라고 하기엔 그 철없음에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일상의 자잘한 사건 사고를 장난삼아 6.25 난리를 끌어들여 말할까요. 6.25를 직접 겪은 세대가 이 말을 들을 때 느낌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거겠지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면 그만인 거지요.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괴리, 허탈, 상처, 분노를 더해 세대 간의 정서적 공감력 단절에서 오는 잔인한 슬픔이 가슴에 멍울질지도 모릅니다.
‘도덕경’을 쓴 노자는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애곡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만 자라고,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땅이 피로 저주받아 흉년이 들며, 만물을 낳는 흙조차 모성을 잃어버린다고. 무고한 백성들뿐 아니라 전쟁터에 끌려간 말이 전선에서 새끼를 낳는다고. 그러니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겼다 해도 승리를 미화하지 않고 상례(喪禮)로 처리해야 한다고. 그것은 흉사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기리는 자리, 즉 오른쪽에 최고 지휘관이 서야 한다고.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며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큰 뜻을 펼칠 수 없다.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서고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는 상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므로 이를 애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상례로 치러야 한다.
-노자 ‘도덕경’ 31장
올해로 6.25전쟁 71주년을 맞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시작됐으니 전쟁의 참혹함을 새삼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6.25전쟁은 분단의 고통과 함께 여전히 살아 있는 슬픔입니다. 그 슬픔을 함께 아파하지는 못할망정 조롱하는 듯한 유행어를 듣는 것은 언짢고 화가 납니다.
‘전쟁이 나쁘지, 농담이 나쁜가’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해학과 촌철의 달인 장자의 비유를 들어볼까요?
‘장자’ 칙양편에는 인간사를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비유한 글이 나옵니다.
달팽이 머리 위에 뿔이 두 개 나 있는데
각각이 하나의 나라다.
왼쪽 뿔은 촉나라고, 오른쪽 뿔은 만나라다.
이 두 나라는 서로 땅을 빼앗기 위해
틈만 나면 전쟁을 벌였다.
그 싸움이 워낙 치열해서
널브러진 병사의 시체가 수만 구나 되고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면
15일이나 걸려야 돌아왔다.
촉만지쟁, 와각지쟁으로 불리는 장자가 만든 우화입니다. 두 나라 간의 싸움이 처절하기 그지없지만 기껏해야 달팽이 뿔 위에서의 일이니 그야말로 하찮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늘이나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달팽이의 두 뿔은 한 몸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두 뿔 중 하나를 잃게 되면 달팽이는 부상을 입거나 죽음을 맞게 되겠지요.
결국 전쟁은 승자가 없습니다. 노자 말씀대로 오른쪽을 높인들, 상례로 치른들 모두가 희생자요, 부질없는 일인 거지요. 병법가인 손자조차 이익을 얻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해도 감정이나 기분이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지혜의 대가들은 입을 모아 전쟁은 가급적 치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니….
이익이 아니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가능성이 높지 않으면 군사를 쓰지 않으며, 위험이 없으면 결코 싸우지 않는다. 군주는 분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고, 장군은 화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망한 나라는 다시 살릴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래서 밝은 군주는 전쟁에 신중하고, 뛰어난 장군은 깊이 경계한다. 이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군대를 온전히 하는 길이다.
- 신정근 ‘공자와 손자’
산 좋고 물 좋으니 그냥 놔둘 리 없다. 용인시 고기동 산간에 있는 뮤지엄 그라운드로 접어드는 들머리의 풍경이 가히 난리 블루스다. 산자락 물가에 마음 내려놓고 쉬기 좋았던 이곳에 요즘 개발 바람이 한창이다. 보이느니 빈틈없이 들어선 카페와 식당, 부동산 업소들이다. 뮤지엄 그라운드는 용케도 이 난장의 끝자락, 비로소 시퍼런 산과 하늘이 후련하게 펼쳐지는 고샅에 있다. 폐부로 스며드는 산기운이 맑아 기분을 돋워준다.
뮤지엄 그라운드는 화가 전광영(79)이 설립한 사립미술관이다. 그는 이름을 좀 날린 정도에 그치는 화가가 아니다. 해외 화단에서도 알아주는 눈이 많다. 미국 뉴욕의 5대 미술관에 속하는 브루클린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 그가 미술관을 개설한 이유가 있다. ‘후배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 이게 무슨 얘기? 열정과 재능을 다해 성장을 도모하는 신진 작가들에게 사심 없는 멍석을 깔아주겠다는 뜻이다.
인생 문제의 대부분이 노력 여부, 또는 운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전광영은 화가들에겐 노력과 운보다 공정한 전시 기회를 부여받는 일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건 그의 생생한 체험에서 유래한 진단이자 처방이다. 뮤지엄 그라운드 개관식 때 가진 간담회에서 그는 죽을힘을 다해 작업을 했지만 찬밥처럼 괄시받았던 젊은 날엔 ‘너무도 외롭고 힘들었다’며 개관의 변을 이렇게 토로했다.
“대한민국은 화가가 작업하기 어려운 곳이다. 학연과 지연, 인맥을 통하지 않고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 않은가?”
이런 발설은 드문 게 아니다. 미술동네에도 너절한 승자독식의 풍조와 무리 짓기의 쇼가 일각에서 판을 친다는 걸 모르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전광영은 이 코믹한 고질을 소리 소문 없이 조금치나마 깨트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렇다 할 전시 공간을 부여받지 못해 남몰래 애태우는 젊은 후배들에게 뮤지엄 그라운드를 ‘선물’로 제공, 거침없이 날아오르라 등을 밀어주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해서 미술관을 개관한 게 2018년. 그의 아들 전용운이 관장 직분을 맡았다.
뮤지엄 그라운드는 2500여 평 부지 안에 지은 지상 3층, 지하 2층 건물, 그리고 야외 잔디광장으로 구성됐다. 건축 설계를 맡은 사람은 전광영의 막내아들 전용천으로, 그는 ‘미술관 건물 자체를 작품’으로 생각하고 설계했다고 한다.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틀을 깨고 개성 넘치는 미술관 건물을 짓고 싶었다는 얘기다. 말은 그러했으나 묘한 발상과 기발한 파격 따위를 동원하는 일은 자제해서인가, 건물의 안팎 모습은 대체로 평범하고 수굿해 밋밋하지만 안정감을 준다. 개성을 추구하되 자칫 요란한 치레로 흐를 경우 오히려 건물의 품격을 떨어뜨릴 수 있으니, 미감을 돋우되 기능성과 실용성을 중심에 둔 설계에 방점을 찍었던가 보다.
재미있는 건 미술관 건물 입구로 연결되는 통로다. 건물 외벽과 병행하는 가벽 형태의 구조물을 덧대어 조성한 좁고 어둑한 뜻밖의 통로. 관람객은 잠시 골목길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을 주는 이 통로를 통해 마치 물살에 쓸려 흐르듯 미술관 현관문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위트와 센스가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이왕 미술관에 왔으니 딴 생각 말고 미술과 만날 즐거움 하나로 설레어보라는 뜻으로 만든 통로라 보면 되겠다.
개관 이후 뮤지엄 그라운드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019년 7월,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사진 작품 130여 점과 영상을 전시한 특별기획전을 통해서였다.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마그리트는 기상천외한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다. 상식 파괴를 본령으로 삼고 마치 가상현실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마그리트의 사진 작품과 영상을 국내 최초로 애호가들에게 선보인 뮤지엄 그라운드의 특별기획전은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알아서 찾아오는 관람객 수가 확 늘었다는 게 아닌가. 기획전의 품질이 미술관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주요 변수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옥상에서 커피 한잔을
이제 그림 구경을 해볼까. 전시실은 지하 2층에 있으며 모두 세 개다. 현재 세 가지 전시회가 펼쳐지는데 전부 2021년 10월 3일까지 계속된다. 제1전시실에선 설치미술가 정찬부의 ‘곰돌이 J의 2050년으로부터 온 초대장’전을 볼 수 있다. 정찬부는 다량의 플라스틱 빨대를 꼼꼼히 잇고 붙이고 색칠해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현시대를 플라스틱 문명기, 또는 플라스틱 천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플라스틱만큼 현대를 사는 인간의 편리와 복리에 기여한 물건이 다시 있겠는가. 그러나 해양의 물고기들 뱃속에서조차 미세플라스틱이 나온다. 인간은 그 위험한 물고기를 먹는다. 사용엔 편리하나 사후 쓰레기 처리엔 난감해 골머리를 앓게 하는 게 플라스틱이다. 정찬부의 작품은 이 미워할 수 없으나 끌어안고 살 수만도 없는 플라스틱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환경 메시지를 담은, 이를테면 ‘플라스틱 프리’ 운동 차원의 작품이 아니다.
정찬부는 플라스틱 빨대를 촘촘히 엮어 동물이나 식물의 형상을 만들어 흥미롭고 어여쁘게 재생시켰다. 보잘것없는 쓰레기로 전락할 운명을 지닌 빨대에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폐기될 사물마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머리와 영혼을 쥐어짜는 심각한 창작 행위만이 예술인 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주변에 흔하디흔한 재료마저 흥미진진한 미술 작품의 원천이 된다는 걸 무언중에 귀띔하면서 삶의 모든 현상과 물상을 예술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달아준다.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슴을 탕! 치고 들어오는 뭔가 짜릿한 맛은 없어 아쉽다.
제2전시실에선 설립자 전광용의 작품전이 펼쳐지고 있다. ‘전광영 Chapter3: 집합 화법의 완성기 1996~2003’이라는 타이틀로. 그는 우리의 전통 한지를 오브제로 평면과 입체 작품을 해온 작가다. 어렸을 때 본 한약방의 약봉다리에서 영감을 얻은 그만의 한지 작업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자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번 ‘집합’ 시리즈에 나온 유별한 작품들을 보면 그가 상상력의 대가임을 직감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스티로폼들을 고서 한지로 일일이 싸맨 무수히 많은 조각들을 프레임에 깨알처럼 촘촘히 붙여 대지의 원초를 느끼게 하거나, 한국적 전통 정서의 끌텅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건 다분히 실험적인 형태의 조형물이다. 전시실 하나를 통째로 장악하고 허공에 매달린 구체(球體) 작품은 시공의 벽을 뚫고 외계에서 날아와 멈춘 별똥별 같은 걸 연상시킨다. 전체적으로 모든 작품이 아름답다기보다 신비로우며, 추상적이지만 거침없는 직정(直情)의 산물이라서 감정이입이 수월하다.
그림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걸 포기할 각오가 돼 있는 게 화가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그림 하나에만 들입다 몰입하는 게 진짜 그림쟁이다. 전광영은 그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극단적인 시도까지 두 차례나 했던 인물이다. 목을 걸고 그림에 매달렸으니 독종이다. 매너리즘을 극구 경계하며 작풍의 변신을 무수히 시도하기도 했다. 작품 세계의 확장과 성장에 대한 본능이 그토록 강렬하다. 그는 미술관 뒤편에 있는 대형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다. ‘하루에 다만 1cm라도 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조형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거다. 애석하게도 이 치열한 사람과의 인터뷰가 예정됐었으나 불발에 그쳤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하니 어쩔 수 없다.
미술관 건물 옥상 테라스는 ‘카페 그라운드’다. 그림을 감상한 뒤 향긋한 커피 한잔 즐기기에 적격인 공간이다. 저만치 사위에서 술렁이는 산야와 흰 구름, 그리고 햇살과 바람…. 근사한 세상을 여기에서 다 보고 느낄 수 있다.
3학년 2반 수업은 현재진행형
덕포진교육박물관 1층의 난로 옆에 앉아서 이인숙 선생님을 기다리며 남편이신 김동선 관장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적함이 적당히 어울리는 박물관 외부와는 달리 전시관 내부는 아주 오래전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와글거리는 듯하다.
“박물관이 조용하지요. 코로나19 이전엔 동창회 모임이나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왔는데 요즘은 모든 게 뜸해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은 이인숙 선생님의 교직 생활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이 있는 1층 인성교육관, 일제강점기부터의 교육과정 관련 사료가 전시된 2층, 3층의 농경문화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의 방대한 교육 자료들이 새록새록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감성 문화공간이다.
“우린 부부 교사였지요. 어느 날부터인지 아내가 자꾸 눈이 침침하다고 해요. 그래서 병원을 갔다가 시력이 아주 많이 나빠진 걸 알았어요. 한 6년 정도 병원을 계속 다니다가 더 이상 회복 불능… 의사가 그만 와도 된다고 해요. 그래서 빨리 사표를 내게 했어요. 시력을 잃고 평생 천직이었던 일을 그만두는데 그 좌절감에 난리가 났지. 그 기분을 이해하죠. 그래서 살고 있던 대치동 아파트를 팔고 이 박물관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도 재현해서 지금도 아내의 수업은 진행 중인 듯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녀의 풍금 소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시관 입구를 향해 이인숙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슬로 모션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동시에 들려오는 콧노래가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반가워요. 여긴 처음인가?” 하이톤 목소리가 힘차다. 오래전에 놀러 온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풍금 치며 ‘오빠 생각’을 들려주었다고 했더니 “그럼 노래 먼저 불러줄까?” 하면서 풍금 앞에 앉아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를 시작으로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에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시냇물은 졸졸졸 노래하며 흐른다~”를 불러주신다.
3학년 2반 교실에 퍼지는 풍금 소리가 마법처럼 금방 추억 속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전에 들었다던 ‘오빠 생각’도 불러줄게요” 하면서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늪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실 제~♪” 순식간에 기분이 경쾌해졌다. 그리고 따뜻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있을 때 새로움이 보인다
마주 앉은 이인숙 선생님의 가꾸지 않은 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인다.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겼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한 듯, 그런데 잘 살펴보면 좀 바뀐 듯도 합니다.
“바뀌어야지.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고 생각해요. 그대로인 것만 좋은 것은 아니잖아. 그대로이면 고리타분해져요. 디지털과 섞어놔야 추억의 새로운 면도 보이거든.”
요즘은 영국에서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덕포진교육박물관 일을 함께 한다. 젊은 세대인 아들 덕분에 새롭게 바뀌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동심이라는 추억이 늘 기억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기억력도 더 좋아져요. 살다 보면 오래된 것들을 소홀하게 생각하는데 이것들을 디딤돌로 삼아 가꾸어진 것에 나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요즘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현재의 디지털 밑거름이 아날로그입니다. 고생 없는 성공을 사상누각이라고 하듯 어르신들의 역사는 오늘의 든든한 밑거름입니다. 뿌리를 단단하게 해야 튼튼한 나무로 키울 수 있어요. 이 박물관에 저장된 모든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고 행복한 추억입니다.”
인정하기와 경청
그렇다면 시니어들과 젊은 세대의 간격을 잘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일이나 어떤 해법이 있을까요.
“난 어르신이나 실버란 말보다는 선배라는 말이 좋아요. 노인대학보다는 선배대학이 어떨지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선배와 후배잖아요. ‘라테는…’으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젊은 그들을 인정해야 해요. 도움을 주고 싶다면 짧고 임팩트 있게 전해야겠지요.
특히 시니어들에겐 경청이 중요해요. 독불장군처럼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겐 치매나 우울증도 빨리 온다는군요. 성경에도 있잖아요.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긍정의 힘은 아주 세다
어려움이 많은 요즘입니다. 흔들림 없이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이런 말이 있어요. ‘행운은 지각은 하되 결석은 하지 않는다.’ 언제든 온다는 말이죠. 무엇을 이루려면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습, 연습, 죽도록 연습입니다. 죽도록 연습해도 죽지는 않아요. 하하. 그리하여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현실 탓, 환경 탓 하기 전에 너 자신을 바꾸어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염두에 두는 가치나 마음가짐이 있을까요.
“간단하죠. 내겐 긍정의 힘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살림집에 화장실이 없고 문 밖에 있어요.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다시 양말을 신고 주섬주섬 옷을 잔뜩 입고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걸어 나와야 해요. 귀찮다고 생각 않고 운동하러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앞을 못 보니까 캄캄한 밤이어도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하면서 나옵니다. 하하하. 내 불편을 배우자나 자식이 대신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나 자신의 일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어려움을 넘어선 힘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한탄스러웠지만 빠르게 긍정적으로 바뀌려고 노력했습니다. 말로만으로는 될 리 없어요. 방법을 찾았죠. 좋은 말 외우기입니다. 가장 최고는 노래죠. 내가 생각할 때 대부분의 노랫말은 가장 맞는 말입니다. 노래가 암흑기의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뀌게 했지요.”
그러면서 갑자기 “노래 한번 해볼까”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이어서 패티김의 “사랑이란 두 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가곡 그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까지 부르신다. 타고난 출중한 노래 실력이었다.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도중에 틈틈이 들려준 노래가 10곡이 넘었다.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있고 맑은 소프라노여서 들으면서 즐거운 기운을 얻는다. 매사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다. 노래와 함께 즐기는 것이 시 외우기라고 말한다. ‘나만의 두뇌 스포츠’라면서 150편의 시를 외우고 있다니 놀랍다. 그러면서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줄줄이 읊는다.
나 자신을 가르치면서 산다
이처럼 시종일관 긍정적이고 기운찬 시간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 시도 외우고 노래도 하고, 운동 삼아 박물관 3층을 오르내려요. 그러다 보면 주변도 보입니다. 내 앞가림만 하려고 하지 말고 소외된 사람을 찾아보고 마음을 나누다 보면 이게 내 행복이다 생각되고 마음이 열리죠. 시니어라면 그러다가 하고 싶은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고요. 무심히 시간을 보내는 셀프 킬링이 아닌 셀프 힐링이 된다는 거죠.”
이화여대 초등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직 22년, 시력을 잃고 교직을 떠났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지금도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렇지만 외부에 기대할 만한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자신만의 멘털 스포츠라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번씩 좋은 일 하고, 10번 웃고, 100자 쓰고, 1000자 읽고, 10000보 걷기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여건상 쉽지 않다.
“하루 100자 쓰기는 어느 노래든 1절 가사를 꼭꼭 눌러 쓰면 얼추 100자 됩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몇 줄 가사 쓰기 쉽잖아요. 나 그게 하고 싶어요. 또 요즘엔 없으면 불편한 스마트폰과 운전면허… 이 두 가지, 내가 그게 없어요.”
유쾌하다가 간간이 쓸쓸할 때도 있다.
선생님께 박물관은 시간 여행이나 마음 나누기 말고도 또 어떤 의미일까요.
“내 마음의 보물입니다. 질 바이든 여사가 백악관에 들어가서도 교직을 유지하잖아요. ‘남을 가르치는 것은 나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라면서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의 3학년 2반 교실이 있어서 지금도 나 자신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살게 합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침 뉴스쇼를 보는데 구역질이 났다. TV를 끄고 싶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다. 그래도 켜놓는다. 저것들의 사악함에 치가 떨리지만 지켜본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그 기분을 완전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구역질에 대해 찾아 공부하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게 됐다. 고치는 방법까지 연구하지는 못했다.
구역질은 구토와는 좀 다르다. 속이 메스꺼워서 구토하려 하는 상태가 구역질이다. 바꿔 말하면 욕지기(토할 듯 메스꺼운 느낌)다. 오심(惡心)도 비슷한 상태다. 위가 허하거나 위에 한(寒)ㆍ습(濕)ㆍ열(熱)ㆍ담(痰)ㆍ식체(食滯) 따위가 있어 가슴속이 불쾌하고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나면서도 토하지 못하고 신물이 올라오는 게 오심이다. 이 단계를 넘으면 반위(反胃), 구역질을 해 위에 들어갔던 음식이 입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욕지기가 나서 몸이 괴롭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향해, 지 몸에 대해 욕지거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경남 통영의 욕지도 출신 언론인은 즤네 고향의 거리 이름이 욕지거리라고 하더라. 그럴듯한 농담이지만 고향을 그렇게 욕보이면 되겠나. 욕지(欲知)는 불교 화엄경 구절에서 따온 좋은 말인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유배 시절 시에는 울다가 앓다가 딸꾹질에 구역질에 대낮에도 이불을 끼고 방구석에 엎드려 있는데, 강진 사람 윤시유(尹詩有, 1780~1833)가 목이 긴 술병에 석 자가 실히 되는 농어를 들고 와 손수 회를 떠주어서 함께 먹고 즐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배부르고 취한다고 병이 나으랴만 당장의 괴로움을 그렇게 해서 잠시 잊었다고 한다.
구역질이라는 거부반응은 신체적 원인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에서 빚어지는 현상인 경우가 많다. 단종실록엔 단종이 즉위하던 해에 “내가 본래 구역질이 심하다”며 자주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열두 살 소년이 실록의 표현대로 혈기가 아직 충실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재위 3년 만에 비극적으로 몰려나야 했던,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한 조짐으로 읽힌다.
명종~선조 연간의 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절친했던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이 타계하자 아래와 같은 제문(祭文)을 지어 애도했다. “아, 슬픕니다. 공은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와 같이 여겨 구역질을 했습니다. 더불어 눈 마주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혹 서로 가까워질까 두려워했는데, 지금 혼이 올라간 하늘에서도 저들의 추악함을 차마 보실 수 있겠습니까?[嗚呼哀哉 公之疾惡 如臭斯嘔 羞與交目 恐或相狃 今也魂升 能忍彼醜]” 미추(美醜)와 은원(恩怨)의 시비가 없다는 저세상에서도 더러운 꼬라지는 못 볼 만큼 개결(介潔)한 분이라는 말이다.
구역질은 트림, 재채기, 기침, 하품, 기지개와 함께 자연스러운 신체반응이지만 점잖은 자리나 어른 앞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부모나 시부모가 계신 곳에서는 (…) 감히 구역질하고 트림하며, 재채기하고 기침하며, 하품하고 기지개 켜며, 한 발로 기울여 서거나 기대지 않으며, 곁눈질하여 보지 않으며, 감히 침을 뱉거나 코를 풀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추워도 감히 옷을 껴입지 않으며, 가려워도 감히 긁지 말라니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동지(動止)에도 하지 말라는 행동이 참 많다. 그러니까 글 제목이 그렇게 돼 있겠지만.
-남이 보는 앞에서는 가려운 데를 긁지 말고, 이를 쑤시지 말고, 귀를 후비지 말고, 손톱을 깎지 말고, 때를 밀지 말고, 땀을 뿌리지 말고, 상투를 드러내지 말고, 버선을 벗지 말고, 벌거벗고 이[蝨]를 잡지 말고, 잡은 이를 화로에 던져서 더러운 연기가 나지 않게 하며, 손톱에 묻은 이의 피를 씻지 않아 남이 추하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말할 때 몸을 흔들지도 말고 머리를 흔들지도 말고 손을 흔들지도 말고 무릎을 흔들지도 말고 발을 흔들지도 말며, 눈을 깜빡이거나 눈동자를 굴리지도 말고, 입술을 삐쭉거리거나 침을 흘리지도 말며, 턱을 받치지도 말고 수염을 쓰다듬지도 말고 혀를 내밀지도 말고 손바닥을 치지도 말고 손가락을 튀기지도 말고 팔뚝을 뽐내지도 말고 얼굴을 쳐들지도 말며, 자리를 긁지도 말고 옷을 끌어 잡지도 말며, 부채 머리를 거꾸로 던지지도 말고, 허리띠 끝을 돌리지도 말라.
구역질에 관한 대목도 있다. “거울을 늘 손에 쥐고 눈썹과 수염을 매만지며 날마다 고운 자태를 일삼는 자가 있는데, 이런 짓은 부녀의 행동이다. 옛날 어떤 천부(賤夫)가 거울을 보고 찡그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등 온갖 모습을 짓다가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태도를 택해 습관적으로 용모를 꾸미는 일이 있었는데 남들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 같은 사람은 나를 구역질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런데 왕 앞에서 구역질 핑계를 댄 사람이 있었다. 성종 때의 병조참판 김순명(金順命, 1435~1487)은 유명한 술꾼이었나보다. 성종이 아침부터 비틀거린다고 지적하자 “신은 평소 구역질이 나서 숨이 막혀 얼굴로 올라와 그런 것이지 술에 취했던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성종은 “거의 넘어질 뻔한 걸 내 눈으로 봤다”면서 “병조는 직임이 가볍지 않으니 이 뒤로는 몹시 취해 직무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훈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11년간 일기를 써서 널리 알려진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가문의 생활수칙이라 할 수 있는 ‘정훈(庭訓)’ 내편(內篇)에 이렇게 썼다. “무릇 존자(尊者)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조금 낮추고 머리를 들지 않는다. 비록 방기(放氣, 방귀)는 소리 없이 내더라도 구역질이나 트림이나 재채기나 기침이 나오면 머리를 돌려 피해야 한다.” 해도 괜찮은 게 있으니 그나마 참 다행이다. 소리만 내지 않으면 어른 앞에서 방귀를 막 뀌어도 되는가보다(근데 냄새는 어떡하지?).
이덕무도 ‘해도 된다’를 넘어 하라고 권장한 게 많다. 앞에 인용한 그 글이다. “글을 읽다가 옛 사람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정의를 위해 강개한 나머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일이 적힌 대문을 만나면, 마땅히 비장강개한 마음으로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설화로만 보지 말고 두고두고 생각하여 비록 나라에 몸은 바치지 않았을망정 나라에 난리가 나거든 정의를 위해 절개를 지키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기약해야 한다.”
그런데 구역질을 어떻게 참고, 눈물을 어떻게 만들어 내나. 그게 맘대로 되는 건가. 어쨌든 뉴스를 보고 구역질을 하는 사람이여, 잘못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은 계속 구역질하며 미워하시되 정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도록 노력해보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