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

입력 2025-12-27 06:00

[‘나의 브라보! 순간’ 공모전 당선작]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세상은 인연과 행운으로 인해 꿈이 싹트고 변화가 일어나는 멋진 곳이다. 근래 이미지 변화가 생긴 내 모습도 이와 무관치 않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일은 운이 7할, 실력이나 기술이 3할을 차지한다는 7:3 법칙이다. 비근한 예로 고스톱을 쳐보면 그날의 승리자는 화투패가 잘 들어오고 뒤집는 패가 잘 맞는 사람이다. 경마의 경우 경주마 :기수=7:3.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의 경우 장사 길목 : 음식 솜씨=7:3.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운이 생기는지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부모운, 배우자 운, 친구 운, 상사 운, 동료 운 등등.

대기업 31년과 중소기업 약 6년 근무를 마치고 은퇴한 내가 60대 중반이 넘어 자전 에세이 ‘뜨겁게 전진하고 쿨하게 돌아서라’를 출간했다. 당초 계획했던 일도 아니었다. 일의 발단은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대기업 은퇴자 OB 모임회에 ‘글쓰기 동아리’가 생겼다는 공지가 떴다.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어느 날, 동아리 사무총장을 맡게 되었다는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님, 회원 모집을 하고 있는데 형님은 회원 가입을 하셔야죠.”무슨 글을 쓰냐며 보이콧을 하자 운영에 필요한 인원이 부족하니 가입해달라는 것이었다. 후배의 청을 저버릴 수 없어 끌려가는 심정으로 동의했다.

2023년 3월 첫 모임이 있었는데, 인원이 부족해 회원 확보를 한 후 6월에 정식 발족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외출한 김에 다른 일도 보고 집으로 오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시를 써본다고 끄적거렸던 학창 시절, 직장 생활하면서 기록했던 메모들, 10년 넘게 적어온 일기장, 지인들이 준 자서전 등이 갑자기 동영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도전해봐!’라는 메시지로 변했다. ‘그래, 막연하나마 책 한 권이라도 내봤으면 하는 소망을 가진 적도 있었잖아’ 하고 혼잣말을 속삭였다.

‘그래, 쇠뿔도 단 김에 빼자.’ 집에 오자마자 종이를 펴놓고 개략적인 책 골격을 그렸다. 다른 저자들의 책 목차 및 소제목 구성도 참고하되 차별화된 자전 에세이를 구상했다. 소제목 밑 소소제목 단위로 하나의 글이 되고, 웹툰 같은 구성으로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고, 직장 후배들에게 실무적으로 도움을 주고, 절대 자랑하는 글이 되지 않겠다는 원칙을 정했다. 대략 골격을 잡으니 글쓰기 속도가 오르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밤낮으로 매진했다. 시력도 저하되었다. 아내가 “작가 났네. 작가 났어!” 하면서 놀리고 “책을 발간하면 팔릴 거라고 생각하냐?” 등 고약한 질문을 하며 의욕을 꺾기도 했다. 그러나 책 완성을 향한 의지가 활활 타면서 6개월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혼자 만들어낸 중간 결과물을 보니 참으로 흐뭇하고 내 자신이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글을 차곡차곡 써가면서 누구에게도 책 출간에 관해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목표 일자가 없으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며 출판 계약부터 하라고 독려한 그랜플루언서(Grandparents + Influencer)를 만나 엉겁결에 계약까지 해버렸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운까지 동행한 것이다. 초고를 출판사에 전달하니 원고 내용과 구성이 괜찮다며 전문 작가의 도움 없이 배정된 편집자 한 명과 부분적인 글 수정을 마쳤다. 출간 일자가 정해진 뒤에야 친구들, 지인, 선후배에게 책 출간 사실을 알렸더니 난리가 났다. 박 아무개가 책을 낸다고? 가히 메가톤급 충격이라고 했다. 특히 자주 만나고 가까이 지낸 고교 친구조차 전혀 예상 못 한 일종의 지진이 일어났다. 아무도 내가 책을 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나를 향한 기존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다소 비아냥거렸던 아내의 눈빛도 바뀌었다.

그 후부터는 긍정적인 나비 효과들이 줄을 이었다. 조촐한 출판기념회와 함께 후배가 만들어준 작가 명함이 생겼다. 그간 동네에서 바쁜 화백(화려한 백수)이 졸지에 ‘작가’로 변신했다. 만나는 사람들의 명함을 받기만 하다가 명함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이틀 만에 완독을 했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문장이 단문 위주로 되어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부담이 없으며, 책 스토리가 재미있다는 평이 들려왔다. 심지어 책을 읽다 자신의 경우와 비슷한 상황을 접한 사람들이 울기까지 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내 스스로도 놀랐다. 책에서 감명을 받아 울었고, 공부가 많이 되었고, 다음 글에는 뭐가 나올까 궁금해서 계속 읽었다고. 모든 것이 감사하기만 했다.

SNS 도전 필요성이 생겼다. 직장 생활 중 문 닫아두었던 SNS 활동을 검토했다. 명색이 작가라는 사람이 이메일 주소 하나 가지고 소극적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가족과 의논 끝에 블로그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서툰 초보 작가가 사전 경험이나 지식도 없이 무조건 도전했다. 엉거주춤, 우왕좌왕,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이력이 붙은 블로거가 됐다. 책 내용을 차별화했듯 블로그도 독자들이 읽고 건져갈 것이 있는 글을 쓰는 것으로 정했다. 이를테면 조회수에 연연하지 않고 글과 내용으로 승부하는 것. 블로그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행, 등산, 맛집, 사진, 타인의 글 퍼오기 등과는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책에서 출발해 날기 시작한 나비는 그리운 사람들까지 찾아주었다. 책 내용 중에 50여 년 전에 헤어진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찾는 글이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이 극히 제한되어 찾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돼, 운영하는 블로그에 ‘그리운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뵙고 싶은 음악 선생님과의 추억을 기술했다. 연세 때문에 돌아가셨을지도 모르지만 생존해 계시면 꼭 뵙고 싶다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30대 초반 여성이 우연히 내 블로그 사연을 보다가 선생님 이름을 발견, 블로그에 댓글을 달았다. 본인이 다니는 탁구장에 같은 이름의 성악을 하셨다는 연세 든 분이 있는데 찾는 사람 같다고. 연락처를 받아 통화해보니 그렇게 애타게 찾던 선생님이었다. 그것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살고 있었다. 바로 만나뵙고 서로 기나긴 대화를 나누었다. 감격 그 자체였다.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결정이었는지 새삼 느끼며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군 복무 시절 같이 근무하면서 예뻐했던 부하 사병이 내 책을 보고 연락이 왔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가끔 궁금했던지라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0여 년이 지난 군대 인연이 다시 연결된 것이다.

은퇴 후 행운처럼 찾아온 글쓰기에 요즘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늘 새로운 글을 쓰고, 글쓰기 수업과 합평을 하는 문우들과 잦은 교류를 하면서 일상이 활기차게 돌아간다. 4월 들어 유수 문학지에 내가 쓴 수필이 당선돼 공식적인 등단도 했다. 이제 주업이 되어버린 글쓰기가 인생 제2막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좋은 글을 쓰려고, 오류 없는 글을 쓰려고, 남들이 못 본 부분을 찾으려 사색하고 관찰하고 순간 포착도 한다. 아이디어나 소재가 눈에 띄거나 생각나면 스마트폰에 수시로 기록한다. 블로그에 적었던 글과 평소 적어가는 수필들을 정선해 제2의 수필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변신했다고 한다. 전국 200대 명산 및 유적지 탐방과 축구 대신 탁구를 즐기는 햔량으로만 나를 알던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의 변신은 인연이 된 주위 좋은 분들이 도움을 줘 가능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자기 능력으로 성공을 이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세상 이치를 아직 이해 못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물론 운이라는 것도 평소 목표 의식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은퇴 후의 삶이 지루하거나 건조하다고 느껴진다면,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열정을 깨워보는 것은 어떨지. 나이 들었다고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평생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더해져 더 깊이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그랬듯 누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기회와 인연을 만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일 것이다.

잠들기 전에 몇 자 적고 잠에서 깨어 새로운 글을 구상하는 요즘의 생활은 에너지를 채워준다. 글 쓰는 계기를 만들어준 분들과 덤으로 찾아온 행운 덕에 나는 마음의 부자가 됐다. 이런 나의 늦바람에 올라탄 나비와 아무 때나 머릿속을 떠다니는 상상이 항상 자유로운 영혼처럼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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