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서 있는 듯하지만, 그의 손과 눈과 귀는 바삐 움직인다. 손목으로 주전자를 돌리며 커피를 내리고, 필터로 빠져나오는 커피 방울을 눈이 빠지게 지켜본다. 방울이 컵에 또르르 떨어져 쌓이는 소리를 듣는다. 박이추(74) 명장은 지금 커피와 대화 중이다. 커피 생각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는 그는 가끔 꿈에서도 커피를 만난다.
“이런 제가 비정상이라거나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미치지 않으면 맛있는 커피는 세상에 나올 수 없습니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보헤미안박이추커피공장’에서 커피업계의 큰어른 박이추 명장을 만났다. ‘바리스타 1세대’ 1서 3박(서정달·박원준·박상홍·박이추) 가운데 유일하게 현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에 드립커피 대중화를 이뤄낸 인물이다. 박 명장은 어른이라는 표현에 손사래를 치며 “바리스타 1세대로 불리는데, 짐을 메고 있는 기분이 든다. 부담이 아닌 숙제를 안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 같다”라고 생각을 전했다.
박이추 명장은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본점에 출근한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쉬는 까닭은 손목과 팔을 우려해서다. 하루에 300잔의 커피를 만든 적도 있다는 그는 현재도 하루 100여 잔을 손님에게 대접한다. 바리스타로 일한 지 40년이 되어가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커피가 탄생했을까. 그럼에도 명장은 아직 커피에 대해 다 깨우치지 못했노라고 겸손한 고백을 한다.
“몸, 마음, 커피가 하나 될 때 맛있는 커피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커피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사실 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죠. 그러나 아직 맛있는 커피를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든 커피가 맛이 없다거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족, 납득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커피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해야만 하죠. 내가 발전해야 커피 맛도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서울, 강릉, 그리고 울진
“커피를 배우지 않았다면 목장을 운영하고 있겠죠?” 갑자기 웬 목장이냐 하겠지만, 박이추 명장의 본래 꿈은 낙농인이었다. 재일교포인 그는 1974년 한국으로 와 경기도 포천에서 2만 5000평의 목장을 일궜다. 이후 경기도 광주, 강원도 원주에서도 소를 키웠지만, 모두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꿈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시금 도시에 살고 싶어져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려면 기술 하나쯤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배운 것이 바로 커피 만드는 방법이다.
“외식 산업에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를 배우다가 우연히 커피를 만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커피에 대한 마음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죠. 커피는 커피콩 수확, 로스팅, 핸드드립으로 내리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커피나무를 볼 때가 가장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자연을 좋아하나 봅니다. 2018년 라오스에 6000평짜리 커피 농장을 세웠습니다. 보통 3000평에 2000~3000그루를 심는 편입니다. 코로나 후에 못 가봤는데 나무들이 잘 있는지 궁금해서 가보고 싶네요.”
1988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박이추 명장은 서울 혜화동에 ‘가베 보헤미안’을 열었다. 이후 고려대 인근인 안암동으로 옮겨 10년을 보냈다. 믹스커피가 커피의 전부인 줄 알았던 1990년대. 박이추의 핸드드립 커피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새롭고 고급스런 커피 맛이 입소문 나면서 카페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 시작했을 때 카페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컸지만, 정작 커피 만드는 실력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손님을 만났지만, 서울에서 카페 할 때 만난 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건강이 좋지 않은 분이었는데, 의사가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도 한 달에 한 번은 저를 찾아왔죠. 그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셨기에 커피 내리는 입장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온전히 커피에 집중하고 싶었고, 바다를 보고 싶었던 박이추 명장은 이번에는 강원도로 내려갔다. 강원도 곳곳을 전전하던 그는 2004년 지금의 본점인 카페를 차리며 강릉에 정착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며 강릉까지 찾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 더해 2009년 강릉 커피축제가 개최되면서 강릉은 현재 커피의 메카가 됐다. 이러한 사연으로 강릉 커피의 원조로 통하는 그는 “저는 그냥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보헤미안박이추커피’는 서울에 두 곳(상암동·여의도), 강릉에 세 군데 있다. 연곡면의 본점, 사천면의 커피공장, 그리고 아버지의 추천으로 커피를 배운 아들 박태철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경포점. 이처럼 강릉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박 명장은 2025년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옮겨갈 계획을 갖고 있다. 그곳도 그가 가면 커피로 유명해질지 모를 일이다.
“강릉은 제게 특별한 곳이고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울진으로 가려는 이유는 강릉이 싫어져서가 아니에요. 서울을 떠나왔던 것과 같은 이유로, 사람이 아닌 커피와 대화하고 싶어서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겁니다. 커피와 가까워져야 하니까요. 그런데 내년이면 삼척~ 울진~포항을 잇는 철도가 개통된다고 해서 조금 걱정입니다. 하하.”
행복을 주는 사람
대한민국은 어느새 커피 공화국이 됐다. 시장조사 회사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405잔으로, 전 세계 소비량(152잔) 대비 두 배 이상 높았다. 박이추 명장은 “현대인에게 커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각 전환도 됩니다. 커피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죠. 저는 하루에 커피를 2~3잔 마십니다. 커피 마실 때도 물론 좋지만, 커피 생각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맛있는 커피로 행복을 주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제가 만든 커피로 누군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이 또 행복 아니겠습니까?”
커피 애호가가 늘어나면서 커피 산업이 활성화된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듯이, 커피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고 업계에 뛰어드는 사람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손을 거치는 모든 커피에 애정을 쏟는 박이추 명장이 가장 우려를 표하는 지점이다.
“제게 커피를 배운 제자들도 커피를 돈으로만 볼 때가 있어요. 정말 가슴 아픈 일이죠. 커피로 돈을 벌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마음이 급해져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카페를 열게 되죠. 커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카페를 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페 사장이기 이전에 바리스타로서 커피의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죠. 저는 사람이 아닌 커피를 위해서 커피를 만듭니다. 그저 주인공인 커피가 빛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니까요.”
로봇 바리스타의 등장에 대해 박 명장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커피를 한땀 한땀 장인정신으로 만드는 사람으로서 허무함을 느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AI가 우수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로봇이 커피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니 신기하다”면서 “맛은 사람만큼 안 날 수 있지만, 일손 해결 등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로봇 바리스타는 기술의 발전으로 이뤄진 일이지만, 커피로 돈을 벌려는 사람은 마음을 잘못 품은 것이기에 그 점을 질책한 것이라 해석된다.
박이추 명장은 커피를 ‘인생의 동반자’라고 표현한다. 커피를 못 만드는 날은 아마도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라고 덤덤하게 말하면서, 앞으로도 커피를 인생의 친구로 두고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박 명장은 어느 책에서 본 ‘맛있는 커피는 당신의 팔자와 운명을 바꾼다’는 문장을 언급하며, “나는 이 말을 믿는다”고 밝혔다. 그 말이 사실이 될 수 있음을 박 명장은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이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편이 못 되다 보니 가능하면 이럴 땐 피하고 싶기도 하다. 혼자 혹은 동행 한 명쯤과 다니기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은 어수선함이나 소음으로 피곤한 상황을 피하기 좋다. 혼자서 자기 속도대로 구경하고 한참씩 멈춰 있어도 뭐라 할 이 없으니 말이다. 동행이 있어도 각자 생각의 방향으로 돌아보고 나서 만나면 된다.
이번에 가본 안성의 한국조리박물관도 그렇게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조리박물관의 메인 전시관과 요리아트스쿨 교육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너른 공원과 잘 정돈된 조경, 예쁜 카페와 식당까지 고루 잘 조성된 테마파크형 박물관이다. 서양요리 100년의 역사를 갖춘 한국조리박물관은 국내 최초이면서 세계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한다.
전시관은 국내 서양요리 역사, 조리인, 메뉴 레시피, 식문화 조리단체, 조리기구와 도구, 소스와 향신료, 커피·바리스타·와인·베이커리 등 8개 테마로 구성되었다. 공간 구획에 따라 준비된 각종 자료들이 생생한 역사를 전달한다. 찬찬히 돌아보며 만난 도구 하나하나, 맛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이나 작은 소스 하나까지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한참씩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뜻깊은 관람이다. 이를 이루고자 한 걸음씩 심혈을 기울이며 나아간 이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총 부지 1만 평 정도의 테마파크형 박물관으로, 자연 속에서 관람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이번엔 조용히 혼자 전시장을 돌아보려던 생각을 바꿨다. 키오스크로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려는데 안내석에 계시던 분이 말을 건넨다. “해설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사실 해설을 들으며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며 그냥 들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제대로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해설사로 교육받으신 분답게 자신의 소개를 시작으로 친절한 안내와 꼼꼼한 설명으로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어찌나 성심성의껏 안내를 하시는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연륜이 돋보이는 분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안성시청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로서 현재 이곳 한국조리박물관에서 파견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하는 문화해설사는 20명 정도인데 우리가 사는 지역을 위한 일이어서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합니다. 이곳의 문화해설은 팀마다 다르지만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경우에 따라 세 시간 한 적도 있어요. 내가 즐거우면 관람객들도 즐겁고, 잘 따르도록 리드하는 능력도 생깁니다. 그런 즐거움이 날마다 여기로 나오게 합니다.”
맡은 일에 자부심이 넘치신다.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내용도 귀에 잘 들어오고 구수하기까지 하다. 주어진 일이 즐겁다고 연신 말한다. 유용한 시간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전해진다.
“내가 7학년입니다, 하하하. 건강관리만 잘하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죠. 지금 하는 일이 대가 여부를 떠나서 보람이 큽니다. 문화 관련 일을 접하는 것도, 또 전시관 주변의 자연도 아름다워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내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이렇게 보람찬 나날 속에 보내는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진심 어린 말이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고령화 시대를 사는 시니어에겐 안정된 노후나 취미 생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노후의 경제활동이나 적극적인 사회활동이 필요하다.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말처럼 일이란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진취적인 삶이 행복을 유지해준다.
마침 한국조리박물관 초대 관장을 맡은 최수근 관장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경희대 교수를 은퇴한 최 관장은 여러 호텔 근무 경력도 지닌 식품학 박사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분이다. 특히 ‘소스의 대가’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요리 일을 열심히 하다가 더 공부하기 위해 파리 르코르동블루로 유학을 갔지요. 그때 처음으로 이런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남프랑스 니스에 있는 개인박물관이었어요. 프랑스 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 셰프의 기념박물관에서 받은 감동을 오랜 꿈으로 간직해왔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방 관련 사업을 하는 이향천 대표를 만난 겁니다. 문화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인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셔서 한국 최초의 조리박물관 건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요리 분야 원로들이 귀한 자료들을 많이 주셨고 저 또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죠. 지금도 콘텐츠 발굴이나 행사 진행을 하고, 자문을 얻으며 공부합니다. 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든 언제든 이곳에 찾아오시면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넓은 공원의 자연과 전시관을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바쁜 와중에도 조리박물관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성의껏 이야기해주셨다. 일정 때문에 급히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다해 조리박물관의 의미를 전해주시는 마음이 와 닿았다.
한국조리박물관에 가면 근현대 요리와 조리의 방대한 자료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마주하게 된다. 조리계 원로들과 한국 조리명장들이 분야별 자문위원단으로 동참한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득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요리학교, 셰프들을 방문하고 벤치마킹하며 진행해온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주방 제조업계의 이향천 대표와 한국 조리업계의 역사를 보존하고 재조명하려는 최수근 관장의 열정이 힘을 합친 결과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현재 한국조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대통령의 밥상’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다. 청와대 요리사가 들려주는 대통령의 밥상 이야기와 청와대 요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대통령의 식기가 역사 순으로 전시되었는데 이 또한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빈 만찬에 일본 도자회사의 그릇을 사용해왔다. 이를 본 육영수 여사가 한국 도자기를 주문 생산했고, 그 뒤로 국빈들에게 당당히 우리 그릇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가히 요리와 먹방의 시대다. 맛있는 요리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 속의 전시장을 둘러보고 맛의 역사에 다가가 보는 시간이 알차다. 조리인들의 철학과 발자취를 돌아보며 흥미로운 요리 세계로 빠져볼 만하다. 안성 일죽면에 가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맛의 원천을 되새기는 시간을 만날 것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서일농원 한국조리박물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서일농원이 있다. 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2000여 개의 장독대에서 우리의 장맛이 익어가는 옛 정서를 만끽해볼 만하다. 연못가를 지나 산책로를 걸으며 차분히 사색에 빠져보아도 좋을 듯하다. 코로나19 이후 닫혔던 문이 비로소 올해는 열린다고 한다.
죽주산성 죽산면 쪽으로 조금만 더 달려보자. 시원하게 죽주산성에 올라 봄바람을 맞아볼 일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확실한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아들과 의절한 정 선생
지난 설날 고향 다니러 온 아들을 한밤중에 내쫓았다고 속상한 마음을 전한 정순일(가명) 씨. 올해 88세, 미수(米壽)가 되는 정 선생은 저녁상을 물리고 오십 넘은 아들과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한판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지지하는 사람과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이 달라서 그동안 선거를 치를 때마다 종종 부딪혔던 이력이 있었다는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첨예하게 맞붙어 서로 양보하지 못하고 으르렁대다 너무 화가 치밀어서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 다신 꼴도 보기 싫다!”고 덩치가 산만 한 아들 등을 밀어 기어이 쫓아내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밖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통에 말입니다.
격분해 자리를 박차고 나온 신 여사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러 광화문 나들이에 나선 신연정(가명) 여사. 집구석에 갇혀 있다 콧바람 쐬니 기분이 좋아 발걸음마저 가벼웠습니다. 초코 와플과 시저 샐러드 그리고 거품 가득 카푸치노까지 완벽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요. 당시 쟁점 한가운데 있던 성추행 사건을 두고 팽팽하게 입장 차를 보이던 두 사람. “자기는 가난하게 자랐는데 어떻게 보수가 되었어요?” 지인이 내뱉은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어하던 신 여사는 “그런 오만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나요? 진보는 다 그래요?” 맞받아치고 말았습니다. 주고받는 말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닌 평행선을 달리는 입씨름에 불과했습니다. 참다못한 신 여사는 마침내 카페 안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더 이상 당신이랑은 얘기 못 하겠어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는군요. 분이 안 풀려서 밖에 나와서도 씩씩거렸다고 합니다.
시비가 아니라 취향 차이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 혹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을 뜻합니다. 해 일(日) 밑에 바를 정(正) 자를 옆으로 펼쳐놓은 게 옳을 시(是)라는 글자입니다. 며칠 전 천지가 상쾌하게 맑은 공기로 가득 찬다는, 청명(淸明)이었잖아요. 보통 4월 5~6일 즈음이라 성묘도 하고 나무도 심고 그래왔습니다. 1년이 24개 절기(節氣)로 나뉘어 있는데 그 절기를 구분하는 경계, 기준이 바로 태양의 움직임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일, 계절의 변화, 낮과 밤, 이런 게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는 데서 시(是)라는 글자는 ‘옳다, 바르다, 어긋남이 없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닐 비(非)라는 글자는 새가 양 날개로 날아가는 모습, 두 날개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날개가 등을 대고 반대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르다, 틀리다, 아니다, 나아가서는 ‘비방(誹謗)하다’라는 뜻을 갖게 됩니다.
사람 사이 관계가 틀어지거나, 어떤 현상을 볼 때 논쟁을 넘어 언쟁이 되거나, 그래서 의절하거나 영영 안 보는 사이가 되는 경우가 바로 시비를 따질 때입니다.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고, 내 말은 맞고 네 말은 틀리다.’ 한 걸음도 양보 없는 이런 고집, 아집 때문에 관계가 어긋나고 상처를 받기 십상입니다.
봄이 좋은 시어머니와 겨울 좋은 며느리
당신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필자는 겨울을 좋아합니다. 정말 단순한 이유입니다. 겨울에 태어난 겨울 아이여서 겨울을 좋아합니다. 물론 눈이 좋아서도 그렇습니다.
“얘야, 너는 무슨 계절을 가장 좋아하니?”
“어머니, 저는 겨울이 좋아요.”
“야, 겨울이 뭐가 좋냐? 춥고 다 얼어붙고, 미끄러질까 무서워 외출도 못 하고.”
이렇게 시비가 붙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필자가 겨울을 좋아하는 거랑 시어머니가 봄을 좋아하는 것은 시비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호불호(好不好), 취향(趣向)인 거죠. 필자가 정윤희라는 배우를 좋아하고 다른 배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잖아요? 또 ‘미스터 트롯 시즌1’에서 경연(競演) 참가자 101명 가운데 이찬원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역시 필자가 옳고, 다른 참가자를 좋아하는 분이 그른 것이 아니듯이 말이죠.
‘부먹’과 ‘찍먹’ 사이
며칠 전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저녁을 먹고 빙수 가게에 갔습니다. 주문한 빙수가 나왔을 때 숟가락을 들기 전 필자가 먼저 물었습니다.
“그쪽은 빙수를 다 섞어 먹어요? 아니면 인절미 따로, 팥 따로, 얼음 따로 먹어요?”
그랬더니 다행히 한 사람은 둘 다 괜찮고, 나머지 두 사람은 얼음은 얼음대로, 콩가루는 그 맛대로, 팥은 팥 맛대로 느끼며 따로 먹는다는 거예요.
탕수육 ‘찍먹’과 ‘부먹’, 그걸로 논쟁이 많이 붙곤 합니다. 튀긴 고기 전체에 소스를 부어 먹느냐, 고기마다 따로 소스를 찍어 먹느냐로 어느 편이 더 맛있는지 곧잘 시비나 승부를 가리려 합니다. 누가 맞나요?
호불호나 취향이 반대되거나 확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게 부부든 자식이든 아주 친한 사이든 직장 동료든 간에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언짢을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취향이 다를 뿐인데 말입니다.
한신과 유방
누구나 한 번쯤 ‘삼국지’나 ‘초한지’에 빠져 영웅호걸들을 손꼽으면서 친구들과 침을 튀며 열띤 토론을 펼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화려한 라인업 가운데 필자는 금기(禁忌)였던 배수진(背水陣)을 처음으로 전략에 역이용한 불세출의 명장이자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패배를 몰랐던 병법(兵法)의 신, 한신(韓信)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비범한 능력으로 유방(劉邦)에게 천하 패권을 쥐어준 일등공신, 한신.
마침내 초패왕 항우(項羽)나 한고조 유방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름 없는 자신을 중용했던 유방이 베푼 은혜를 잊지 못해 멈추고 말았던 인물입니다. 자신이 가진 뛰어난 능력과 사양하는 마음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반란을 도모한다는 유방의 의심에 결국 처형당하고 마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역사적 인물인 한신과 유방을 놓고도 평가가 극과 극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밥을 얻어먹고 살 만큼 보잘것없던 자신에게 막중한 역할을 맡긴 은혜를 잊지 않았던 한신이 옳은가요? 아니면 출중한 부하에게 권력을 뺏길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반하게끔 몰고 가 싹을 잘라버린 유방이 옳은가요? 평가가 엇갈리는 만큼 시비 가리기 참 어렵습니다.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인물도 시비보다는 취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비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우리 삶에서 시비로 명확히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얼마나 있을까요. 태양의 움직임은 항상 일정하고 한결같지만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나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은 한결같을 수도 없고 쉽게 예측하기 힘듭니다. 동식물이나 물건도 좋아졌다 금방 싫증을 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성향도 진보와 보수라는 스펙트럼 안에서 결이 무척 다양합니다. 한쪽에 실망해서 반대편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다른 한쪽에 상처받아서 그 반대편으로 옮겨가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시비를 걸고 시비를 따지는 대신 취향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덜 고통스럽습니다.
취향이나 호불호에 시비 걸지 맙시다! 딱 시비 걸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필자가 앞서 들었던 예를 떠올리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아,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하나를 누가 좋아하는 게 죄가 아니고 틀린 게 아니지. 어리석은 게 아니지. 또 탕수육, 팥빙수도 그렇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관계가 좀 더 부드러워지고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질 거라 믿습니다. 그 사람 나름대로의 생각과 의견과 취향을 존중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정색해 따지지 말고 취향의 문제로 존중하고 이해하면 한결 따뜻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정답 없는 인생, 모범답안이 있을 뿐
나와 당신을 옳고 그름이라는 시비하는 마음으로 볼 때는 갈등이 고조되고 관계를 망치기 쉽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사람에게 공연한 적개심을 품어 이성을 잃은 행동을 저지르고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생깁니다. 우리 인간은 해와 달이 일정한 주기로 움직이듯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늦잠을 자는 해와 결근하는 달을 본 적이 있습니까. 봄이 지나가고 오뉴월에 겨울이 다시 온 적 있습니까. 정답이 하나인 수학 문제와 우리 인생은 다릅니다. 저마다 모범답안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답이 여러 개라고 틀린 삶이 아니고 그릇된 인생이 아니듯이요. 자신이 푼 답안을 존중받고 싶다면 남이 푼 답안도 존중해줘야 합니다.
잡초로 볼지 꽃으로 볼지
‘악장제거무비초(惡將除去無非草) 호취간래총시화(好取看來總是花).’
나쁘다고 없애고자 하면 풀 아닌 것이 없고, 좋아하여 취하고자 들여다보면 모두가 꽃이라는 뜻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취향이 다르다고 상대를 미워할 때 그 사람은 세상 쓸모없는 잡초밖에 되지 못합니다. 백해무익하다 단정해 얼른 뽑아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나와 다른 의견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묵혀온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되는 경우도 많이 경험합니다. 듣기 불편하고 괴로운 이야기도 좋게 새기려는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숨겨진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 우리 도전해볼까요. 내가 소중하듯 나와 다른 그 사람도 소중하니까요. 내가 아름다운 존재이듯 그 사람 역시 아름다운 존재니까요. 모두가 꽃입니다.
2007년 전통복식 분야 1호 유희경 박사의 집에 신사임당 초상을 그리기로 한 이종상 화백과 한국조폐공사 관계자, 석주선 단국대 기념박물관장 등이 모였다. 5만 원 지폐에 넣을 신사임당을 그리기 위해서다. 이날 신사임당의 초상 모델이 바로 임수빈 한국방송고전머리전문가협회장이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선한 눈매와 은은한 미소를 가진 그를 만나 고전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상에, 정말 이런 머리를 하고 살았을까?’
고전머리 미용대회를 준비하던 30대 늦깎이 학생은 머리를 올리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대회에 출품된 화려하고 다양한 고전머리 스타일이 신비로워 보였다. 고전머리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다. 1999년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미용실을 운영하던 임수빈 협회장은 미용을 더 알고 싶었다. 파마약을 바르면 왜 머리가 구불구불한 채로 모양이 잡히는지, 머리카락 속 단백질과 미용 약품 사이에 어떤 화학작용이 발생하는 건지 원리를 알고 싶었다. 2005년 국제대학교 피부미용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해 서경대 미용예술학과에서 불화에 표현된 고전머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다 보니 세월 흘러가는 줄 모르고 젖어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하래도 못 할 것 같아요.(웃음) 과거에도 지금도 고전머리를 하나의 학문으로 가르치는 곳은 없어요. 한복만큼 전통 가치가 지켜지고 있지 않아 아쉽습니다.”
K-헤어의 뿌리를 찾아서
어디에서도 고전머리를 배울 수가 없어 임 회장은 역사책을 뒤져가며 스스로 공부했다. 그는 고전머리야말로 현대 미용의 뿌리라고 했다. 고전머리는 청동기,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도자기 항아리나 벽화 등에 그려진 여성을 통해 머리 모양을 추론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서민들은 쪽머리, 댕기머리, 둘레머리, 얹은머리 형태를 고수했다. 왕족이나 귀족은 시대에 따라 복식과 머리가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소 한 마리 값에 맞먹어 부의 상징이 되어버린 가체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개화기에 우리 전통 고전머리가 사라졌어요. 역사적으로 쪽머리는 기생이 할 수 없는 머리예요. 용, 봉, 개구리 등으로 품계를 나타냈던 첩지머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개화기에 나라도 잃고 신분을 나누던 품계도 사라지면서 무거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기생들이 쪽머리와 첩지머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신여성이 등장했고, 서양에서 들어온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고전머리는 유야무야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실은 1933년 화신백화점 미용부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조선인 미용사 오엽주가 시초다. 이 최초의 미용실이 우리나라 미용 역사의 시작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임수빈 회장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오다 개화기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우리 머리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5천 년이라는 우리 고유의 머리 역사와 뿌리가 있는데도, 오엽주 미용사의 신여성 머리 스타일만 남은 거예요. 그런데 미용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이 뿌리부터 배우는 게 정석 아닐까요?”
고전머리에는 우리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한복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것처럼 머리 스타일도, 장신구도 역사에 따라 달라졌다. 한복에 관해서는 연구가 활발하고 이를 전통으로 지키려는 노력도 하지만, 고전머리에는 그 관심이 이어지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미용은 ‘학문’이 될 수 없을까?
임수빈 회장은 미용을 ‘과학’이라고 말했다. 미용을 전공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르면 중학생 때부터 미용을 배운다.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기술을 넘어 미용의 원리와 뿌리를 알고 싶었다.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으면 더 깊이 있는 배움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머리의 역사에 대한 연구, 미용의 과학적 부분에 대한 연구, 조금 더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미용의 질을 높이고 싶었어요.”
각종 불화와 문헌을 뒤져 고전머리를 연구하던 임수빈 회장은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5천 년 역사 속 장황하게 흩어져 있던 고전머리 자료를 모으고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귀족·사대부·천민들이 쓰는 장신구, 비녀, 꽂이, 장신구별 의미, 상징 등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문헌 속 고전머리를 전통 방식에 맞게 재현하고 트렌드에 맞춘 퓨전머리도 디자인했다. 이 내용을 학생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고전머리교실 : 이론과 실습’으로 펴냈다.
머리 스타일에 빠질 수 없는 게 장신구다. 또 복장과 머리 스타일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인터뷰를 하면서 머리 장식에 대해 묻자 협회 곳곳에서 최소 100년 넘은 온갖 장신구들이 나왔다. 임 회장의 할머니가 사용했다는 청색 족두리와 담비털 모자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에도 등장했다. 거실 액자 속에 늘 걸려 있었다는 담비털 모자는 구한말 할머님이 사용하시던 것이라고. 임수빈 회장이 고전머리에 매력을 느꼈던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트레머리가 없어지고 쪽머리가 정착되면서 비녀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어요. 서민들이 쓰던 비녀도 새겨진 무늬가 다 달라요. 천연 옥비녀에는 특유의 고운 빛깔과 흉내 내기 어려운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죠. 천연 옥의 종류도 이렇게나 다양해요. 여름에는 옥 소재 비녀를 많이 쓰고 겨울에는 따뜻한 소재를 썼죠. 뒤꽂이 종류도 무척 많아요. 주로 매미, 벌, 꽃, 나비 등이 소재로 쓰였죠. 조선시대에는 생콩을 빻아서 조롱박에 담아 세면대에 두었다가 세안할 때 비누 대신 콩을 비벼 사용했어요. 그러면 콩 비린내가 남거든요. 그래서 향주머니를 차고 다닌 거죠. 이 매미 모양의 향주머니는 매우 드문 거예요.”
고전머리는 머리 장식, 의복, 의복에 쓰이던 장신구까지 모두 이어져 있고, 각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렇게 역사 이야기와 임 회장이 그동안 수집한 온갖 장신구를 직접 눈앞에 펼쳐두고 강의를 하니 학생들은 그의 수업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머리에 몰입한 20년이라는 시간
고전머리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 그는 2012년 한국방송고전머리전문가협회를 세웠다. 10여 년 동안 임 회장은협회비를 받지 않고 개인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협회를 운영했다. 더 많은 이들이 고전머리 관련 활동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더 많은 미용사가 고전머리의 매력을 알고 자신의 가치를 높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고전가체 예능사 1~3급 자격제도를 만들었다. “고전머리도 머리를 만지는 일이기 때문에 미용 자격증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미용 관련 국가자격증이 여러 가지인데 고전머리 자격증은 없거든요. 수익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하고 싶어 만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오색단장, 수빈헤어&메이크업, 한국방송협회 일을 현업에서 계속하다 보니 자격제도를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활성화시키지 못했어요. 그러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추면서 저를 재정비하게 됐죠. 미용하는 분들이 고전머리를 통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지면 좋겠어요. 미용인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 개척해나가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고전머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제대로 고증되지 않은 고전머리 정보를 퍼트릴 때면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고민하기도 했다. 게다가 아무리 궁금한 게 많아 공부가 즐거웠다 해도, 매일 역사서를 들여다보며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치 과거에 사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조금만 더 해서 학생들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하나는 만들어두고 그만두자’고 마음을 달랬다.
미용을 시작한 후 20년을 온전히 고전머리에 몰입해 살았다. 처음 수빈헤어&메이크업을 열었을 때는 손님 한 명 보기가 어려웠지만, 이제는 주말이면 고전머리를 하려는 손님들이 줄을 선다. 임 회장이 반한 고전머리의 매력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것. 이제는 ‘고전머리’ 하면 많은 이들이 임수빈 회장을 떠올린다. 그럴 때 그는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보람을 느낀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임수빈 회장은 우리나라 가체장 1호 명장이 됐으며, 2019년에는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문화예술부문 한국전통문화최우수공로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2021년에는 한국예술문화명인 인증을 받았다.
고전머리가 K-헤어 트렌드
임수빈 회장은 복장과 헤어의 어울림을 강조한다. 전통 한복이라면 전통 고전머리를, 퓨전 한복이라면 퓨전 고전머리로 꾸며야 한다는 것. 전통 고전머리를 응용하면 한국식 현대 스타일을 무궁무진하게 창작할 수 있다. 고전머리야말로 현대 미용의 뿌리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요즘 흔하게 하는 ‘당고머리’는 ‘쪽머리’가 원조다. 쪽머리는 비녀가 없던 시절부터 해오던 머리 스타일이다. 항공사 승무원들의 머리 스타일은 ‘벼머리’에서 시작됐다. ‘포니테일’이라고 불리는 묶음머리는 ‘후두부로 흩어진 머리’라는 고전머리에서 출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머리는 5:5 가르마예요. 우리나라의 기본 스타일이죠. 과거 여인들도 모두 반머리를 했어요. 우리가 반묶음을 하는 것처럼요. 다만 그것을 장식하는 장신구가 바뀌었을 뿐이에요. 현대의 의복에 맞춰 고전머리 스타일이 현대에 맞게 바뀐 거죠.”
임 회장은 고전머리를 기반으로 한 한국 스타일의 퓨전 헤어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고전머리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으니 미용사들도 배워본 적이 없어 응용을 하고 싶어도 몰라서 못 하는 실정을 무척 아쉬워했다. 더 많은 미용사가 고전머리를 배워 자신만의 한국 스타일로 응용하면 그것이야말로 K-헤어가 되는 것 아닐까?
“고전머리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되는 게 마지막 꿈이에요. 고전머리를 만지는 기술도 서울무형문화재로 함께 인정받으면 금상첨화겠죠. 한복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처럼 고전머리도 우리의 것으로 역사성을 인정받고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합니다.”
삼성전자가 전문성을 인정받은 직원들이 정년 이후에도 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시니어 트랙’을 5월부터 본격 시행한다.
반도체와 같은 첨단 기술 산업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업무에 숙련된 인재는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이다.
삼성전자는 시니어 트랙 선발위원회를 꾸려 내년 2월까지 정년퇴직할 예정인 직원 중에서 대상자를 선발할 방침이다.
최근 3년 평균 ‘나’등급 이상을 받은 성과 우수자, 삼성 최고 기술전문가 ‘삼성 명장’, 소프트웨어 전문가 등 우수 자격 보유자 등을 최종 선발한다.
앞서 지난 2018년에는 SK하이닉스에서 기술인재를 중심으로 정년 이후 고용을 연장하는 ‘기술 전문가 제도’를 도입한 바 있으며, LG전자에서도 기술 인재를 대상으로 정년 이후 컨설팅 계약 및 자문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영국, 일본 등에서는 정년 폐지 움직임이 나오고 있으며, 정년 이후의 고령자를 다시 채용하는 움직임은 글로벌 트렌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생산인구 노령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만큼 시니어 인력을 놓치지 않기 위한 산업계의 움직임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이 우수 중소기업의 구인 수요와 청년, 중장년 등의 구직 수요를 연결하고 맞춤형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중기부는 구직·구인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 등 구직자와 중소기업 간의 일자리 연결(매칭)을 위해 '22년 기업인력애로센터 활용 취업 지원' 사업을 시행한다고 26일 밝혔다.
'기업인력애로센터'는 구직자와 구인 중소기업의 일자리 연결 오류(미스매치) 해소와 맞춤형 인력 양성 및 취업 지원을 위해 중진공 16개 지역 본부가 운영하는 맞춤형 '일자리 연결 체제(일자리 매칭 플랫폼)'이다.
지난해 중기부는 기업인력애로센터를 통해 청년, 중장년 등 다양한 구직자를 대상으로 직무 교육과 취업 상담(컨설팅)을 제공하고, 취업까지 연계해 1630개 사의 중소기업에 3080명이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올해 추진할 사업 첫 번째는 구직자 취업 상담(컨설팅) 및 취업 연결(매칭) 지원이다. 중소기업 취업 희망 구직자를 대상으로 전문 상담사가 취업 상담(컨설팅)을 제공하고,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하 중진공)의 정책 자금, 수출 등 지원 사업을 통해 발굴된 우수 중소기업의 일자리에 취업까지 지원한다.
두 번째로 대기업의 우수한 교육‧훈련 기반(인프라)를 활용해 청년 구직자에게 직무 교육을 제공하고 협력 중소기업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대‧중소기업 상생 일자리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올해는 인력 수요가 증가하고 청년이 선호하는 정보 기술(IT), 반도체, 소프트웨어(SW), 생명(바이오) 산업 등 신산업 분야 대‧중소기업 사업단의 참여를 확대해 취업 성과를 제고할 계획이다.
아울러 명장 등 기술·경영 전문가가 구직자에게 현장에 특화된 1:1 현장 코칭과 실습을 집중 지원해 숙련 인력으로 빠르게 안착하도록 돕는다. 이외에도 스마트공장 도입 기업을 중심으로 구직자와 구인 기업 간 '취업 매칭-스마트공장 직무 교육'까지 일괄 지원한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보다 예산을 7억 원에서 15억 원으로 2배로 확대해 더 많은 기업과 구직자가 혜택을 볼 수 있다.
중기부 원영준 기술혁신정책관은 "자금, 수출, 기술 분야 정책 지원 과정에서 발굴한 기업의 구인 수요를 기반으로 구직자를 맞춤 지원하기 때문에 높은 취업 만족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올해는 신규 개통한 '일자리연결체제(일자리매칭플랫폼)'을 활용, 구인·구직 정보에 기반한 인공지능(AI) 추천 매칭 등 취업 지원 기능을 강화해 중소기업과 구직자의 인력 수급 연결 오류(미스매치) 해소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참여를 희망하는 중소벤처기업과 구직자는 중진공 기업인력애로센터 일자리연결체제(일자리매칭플랫폼)(job.kosmes.or.kr)에 가입하거나 전화(1899-3001)로 문의하면 된다.
베이비붐 세대 김시골(가명)씨는 퇴직을 앞두고 고민이 많다. 공단에서 32년을 일한 그도 노후가 걱정이긴 마찬가지다. 연금은 받겠지만 아직도 군대 간 아들 복학 후 몇 년을 더 AS해야 해야 하니 주름이 늘 수밖에 없다. 사실 퇴직 후 시골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이처럼 은퇴자들은 시골살이를 꿈꾸지만 귀농과 귀촌은 선뜻 도전하기가 만만치 않다.
2020년 진행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도시민의 41.4%가 은퇴 후 귀농귀촌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2019년보다 6.8% 증가한 수치다. 또한 지자체들은 인구 감소에 따른 해결책의 일환으로 귀농귀촌 인구 유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제 귀농귀촌이 퇴직자들의 전유물이란 통념에서 벗어나 도농 균형발전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 연금이나 금융소득의 수입원이 있는 은퇴자들은 귀농보다는 귀촌에 힘이 더 실려 있다. 때문에 지자체들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수요자 눈높이에 맞는 귀농귀촌 정책 지원 확대에 발벗고 나섰다. 예비 귀농귀촌인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가보고 싶은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 10選을 기획했다. 그 첫 번째로 경북 성주군 편을 담았다.
귀농귀촌으로 가는 길 [경북 성주군 편]
샛노란 성주참외로 부자농촌 대명사 등극
경상북도 성주군의 4월은 온통 노랗다. 성주의 들판을 뒤덮은 수만 동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참외 때문이다. 전국 최고의 단일 품종 최대의 부자농촌 대명사가 됐다. 성주군은 지난 한 해 동안 성주참외 농사로 억대 매출을 올린 농가가 1230가구로 조사됐다. 전국 참외 재배 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참외 최대 생산지 성주군을 귀농귀촌 최대 수혜지로 찾았다.
성주군의 4200여 농가에서 생산되는 연간 15만 톤 안팎의 참외는 전국 유통 물량의 70%를 차지한다. 성주참외 맛의 비밀은 자연환경에 있다. 풍부한 물과 기름진 토양에 영남 내륙 분지라는 지리적 이점까지 갖췄다. 분지는 태풍·눈·비·바람을 막아줘 참외가 자라는 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전국에서 가장 긴 일조 시간도 한몫해 성주참외를 더 단단하게, 더 달게 한다.
이 지역의 참외 재배 역사는 60년이 넘지만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건 1990년대부터다.
참외는 여러 모로 우리나라에 특화된 채소다. 멜론의 변종인 참외는 해외에서는 Korean Melon, 즉 ‘한국 멜론’으로 불린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소비하며,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90%가 수분으로 이뤄진 시원함과 특유의 아삭하고 달콤한 맛이 특징인 참외는 삼국시대부터 재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개량을 거듭하여 2000년대 후반부터는 오복꿀, 바른꿀 등 ‘꿀 시리즈’로 알려진 참외들이 시장을 장악했다.
이러한 참외를 생산하는 땅이 가장 집중된 곳이 경상북도 성주군이다. 전국 참외 재배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성주군은 그야말로 참외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참외에는 ‘성주참외’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주군에서 참외 하나로 벌어들이는 조수입(비용 포함 수입)이 연 5000억 원 이상이라니,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대표 농작물로 계속 언급되는 이유다.
최고의 참외 전문가들과 함께 품질 유지
물론 성주군에서도 성주참외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작년에 성주참외 50년을 기념하고 미래 50년을 준비하는 성주군에는 전국 224명, 경상북도에 46명 있는 농업 마이스터가 6명 있다. 이들은 모두 참외 재배 분야 마이스터다. 또한 참외명인 1명, 참외명장 2명을 두어 우수 기술을 계속적으로 컨설팅하며 성주참외의 위상과 품질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명장들의 손길 덕분인지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 따르면 성주참외에는 베타카로틴이 딸기에 비해 3배, 감귤에 비해 2배 함유되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또한 성주참외를 위한 새로운 로고와 캐릭터, 포장재 등을 개발했으며, 전국 최초로 농식품부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100억 원을 투자하는 비상품화농산물자원센터를 2023년까지 건립할 예정이다. 이 센터를 통해 상품화되지 못한 참외들을 효율적으로 분류하여 다양한 재가공을 통해 한우 사료 및 기타 가공품으로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성주참외는 코로나19 확산과 소비 침체 와중에도 해외 수출 415톤을 기록했다. 해외 시장 진출은 K 시리즈로 대변되는 해외 문화 수출 기획과 함께 이뤄지고 있다.
1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기억들
인구 4만3000여 명의 성주군은 성공적인 참외 산지 외에도 다양한 문화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주군은 1800년 전 고대 가야 연맹국 중 하나인 성산가야가 있었던 곳이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경상도에서 개간된 농토가 가장 넓었던 자리였으니 농업 지역으로서 일찌감치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또한 태종, 단종, 세조의 태실이 자리할 정도로 명당의 평가를 받았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도 있었다. 성주군은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도심 공원형 복합문화공간 ‘성주역사테마공원’을 만들었다.
2020년 10월 말에 준공된 성주역사테마공원에는 조선시대 영남의 큰 고을로 위상을 떨쳤던 성주목의 옛 모습인 성주읍성 북문과 성곽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 하나인 성주사고와 조선시대 전통 연못인 쌍도정도 있다. 밤이면 은은한 조명이 성곽과 문루를 비춰 고즈넉한 야간 명소로 각광받는 중이다.
해발 1433m의 가야산을 품은 가야산국립공원도 성주에서 경험할 수 있는 천혜의 공간이다. 특히 정견모주길은 가야산국립공원 속에 숨어 있는 진주로 불리는데, 봄에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고 그늘이 계속되는 숲길과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가득하다.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군의 역사를 활용한 또 하나의 대표 관광지다. 참외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것과 맞물리는 묘한 인연이랄까.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성산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거대한 규모의 고분들이 집결되어 있으며, 가야부터 신라까지 이르는 다양한 토기와 마구류 등이 출토되어 우리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든 중요한 유적지다.
성주군의 문화 명소
천연기념물 제403호인 성밖숲은 2017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2018~21년에는 대한민국 생태테마관광지로 선정되었다. 이곳에는 500년 긴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신비롭고 기이한 형상을 지닌 52그루의 왕버들이 모여 산다. 매년 7~8월이면 맥문동이 피어 성밖숲을 시원한 자줏빛으로 물들이며 짙푸른 왕버들과 보색(補色) 대비를 연출하기에 사진작가와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인간적인 전통을 느껴보고 싶다면 한개민속마을로 가보는 것도 좋다. 이곳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60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하회마을·양동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7대 민속마을 중 하나이며, 경북도지정문화재 9채와 6채의 재실을 포함한 총 75채의 초가집·기와집이 돌담길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주의 명소 무흘구곡과 성주호 둘레길의 드라이브 코스는 하나의 길 안에 있다. 아라월드 입구에 들어서자 만나는 성주호 둘레길은 호반을 끼고 이어지는 숲길이다. 이 길은 숲으로 호수로 구불구불 이어져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자동차로 59번 국도를 따라 북진하다가 30번 국도와 만나는 교차점에서 서남쪽으로 우회전하면 성주호를 끼고 돌게 된다. 이 길은 매년 봄이면 벚꽃 터널로 덮여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 드라이브 코스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성주댐을 지나 김천시 증산면 청암사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의 입구를 지나면 무흘구곡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를 향해 약 800km의 길을 한 달가량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물론 출발지는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이제는 멀리 가지 않아도 국내에서도 섬이나 들판을 가로지르며 순례길처럼 걷는 길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안 섬의 12사도 순례길은‘섬티아고’라 부른다. 지난 초여름에 다녀온 신안 섬의 순례길은 갯벌이 살아 있는, 때가 묻지 않은 천혜의 섬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바로 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이다.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곳. 가을이 한창이던 지난달에 다녀와서 지금껏 그 들판이 차분하게 나를 다스린다. 여건상 순례길 일부만 돌아봤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찾아가 제대로 걸어볼 생각이다. 마음속에 기분 좋은 여정을 감춰두고 기다리는 은밀한 기분이다.
순례길의 주요 지점은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합덕제와 합덕성당, 원시장과 원시보 우물터를 거쳐 무명 순교자의 묘를 경유해 신리성지까지 약 13.3㎞ 코스로 비순환형이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의 길이다. 시간은 발걸음에 따라 4~5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름길이나 거친 길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해서 이곳이 더 알려지지 않고 지금만큼만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인 솔뫼성지,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 하여 솔뫼라는 순 우리말로 이름을 지었다. 이곳이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자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부터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으로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지난 2014년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전 세계적인 천주교 성지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곧 다가올 2021년은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의 해이다.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도 선정되어 당진 일대를 걷다 보면 곳곳에 행사를 예고하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솔뫼성당 입구로 들어서 조금 걸으면 원형 공연장 겸 야외 성당인 솔뫼 아레나가 쉼터처럼 펼쳐진다. 둘레에 12사도가 세워져 있어 야외 행사의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성당 주변을 둘러싼 솔밭 사이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조형물들이 이어진다. 천주교 전파를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의 모습이 노송들 사이에서 성스럽게 서 있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삽교천으로 흘러들어 만나는 물길로,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범근내포’에서 유래됐다. 이 물줄기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것이다. 이 길에 서린 순교와 박해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다.
발길 따라 계속 걷다 보면 합덕 평야에 농업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 합덕제를 거쳐 합덕성당을 만난다. 1929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페랭 신부가 봉헌한 합덕성당은 조용한 합덕 마을을 앞에 두고 고요히 서 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룬 두 개의 종탑이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은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경건함이 붉은 벽돌의 고딕과 어울려 아름답다. 가던 길 멈추고 이 지역의 랜드마크인 합덕성당에 들러 그 풍경 속에서 한참 머물다 가길 권한다. 100년쯤의 역사를 간직한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소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합덕의 너른 들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을 받으며 처절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을 기억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걸어간다. 바람 부는 평야를 지나 조붓한 둑길을 걸으면 평온한 자연 속에서 버그내 길이 이어진다. 걷고 또 걸으며 순례길이 품은 순교자들의 신념, 아픔, 그리고 뜨거웠던 영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위안을 받는 또 다른 시간이다.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는 말,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이 말이 당진 곳곳을 지나면서 자주 보였다. 여기에 이런 말이 있었구나 내심 생소했지만 하루쯤 걷고 둘러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된다.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로서 그들의 뿌리와 죽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아픔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란 것을.
걷기 열풍이 계속 이어지는 추세이지만 순례길만의 깊은 의미를 새기는 시간은 남다르다. 지난해엔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되었을 만큼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다만 주변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 묵상하면서 걷는 예의도 명심할 일이다. 비대면 여행이 강조되는 이즈음에 순례길 걷기는 더없이 좋다. 특히 이곳은 '혼행'으로 최적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아도, 애써 여러 날을 비울 필요도 없다. 어느 날 하루 훌쩍 떠나면 된다. 신념의 전파를 위해 피 흘리기를 택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무언가 가슴에 실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단 하루면 가능한 버그내 순례길의 여운은 아주 길다.
▲주변 명소& 맛집
당진 면천읍성(沔川邑城 ) 마을
당진시 면천읍성 일대를 성안마을로 부른다. 아주 오래된 이곳은 뉴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마을이다. 우체국을 미술관으로 만들어낸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 자전거포를 동네 책방으로 변신시킨 ‘오래된 미래’, 원래는 대폿집이었던 소품 가득 감성 가득 ‘진달래 상회’, 건너편에 면천향교를 둔 연꽃 가득한 연못 ‘골정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등 마을 전체가 개발이 제한된 유적지여서 푸근한 시간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 느리게 그러면서도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면천읍성 마을이다.
아미미술관
당진보다는 아미미술관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 같다. 들길을 지나고 산 아래로 다가가면 나타나는 맑은 공기 속 예술 공간 아미미술관. 덩굴로 뒤덮인 담장이 먼저 객을 맞이한다. 유동초등학교라는 이름의 폐교를 개조한 미술관이다. 주변의 자연, 낡은 학교 원형을 그대로 살려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랜만에 갔더니 복도의 설치 작품들이 교체되어 다시 새롭다. 실내의 전시작품, 마당의 너른 잔디밭과 핑크 뮬리가 혼잡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소설 '상록수'가 탄생한 곳, 심훈의 필경사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낙향해 터를 잡은 곳, 당진에 내려와 직접 설계해 지은 집 ‘필경사’(筆耕舍). 필경사라는 옥호는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 농촌 소설인 ‘상록수’가 집필되었다.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가는 것처럼 지식인은 붓으로 시대의 어둠을 가는 존재다"라는 심훈의 말처럼 당시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조형물들과 시비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그 옆 심훈기념관에는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따사로운 풍경 속에서 한참을 쉬어도 좋을 농촌 마을이다.
교황님도 다녀간 당진 식당 '길목'의 '꺼먹지 정식'
‘꺼먹지’는 당진의 향토음식이다. 가을 무청을 염장했다가 다음해에 먹을 수 있는 무청 짠지로 처음에는 파랗게 절여졌던 것이 검게 변했다 하여 꺼먹지라고 한다. 걸쭉한 들깨 찌개에 구수한 꺼먹지가 함께 어울려 맛을 내는 음식이다. 그릇도 흰 분청사기에 정갈하게 담겨 나온다. 손맛이 좋은 반찬들이다. 교황이 솔뫼성지 방문 후 사제단 만찬을 이곳에서 했을 때 꺼먹지 정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명장이 만든 떡, 민속떡집
민속떡집의 쑥 왕송편이 유명해서 당진을 떠나면서 늦은 저녁에 들렀더니 왕송편은 이미 다 팔린 후였다. 떡 명장이 만들어내는 민속떡집은 당진시 최초로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이 꽃 저 꽃 좋아라고 다투어 피어나지만 결국은 모두 진다. 사람의 일도 이와 같아 종국엔 모두 지상을 떠난다. 이 단순한 진실을 흔히들 잊고 산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흥청망청 시간을 허비한다. 장례 명장 유재철(61)은 이 기이한 착오에서 인생의 많은 병통이 생긴다고 본다. 그는 외치고 싶다. 기억하시오, 언젠간 닥쳐올 죽음을!
그리스의 어떤 신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신은 죽을 수 없지만 인간은 죽을 수 있어서. “야야 인간들아, 너희는 죽을 운명이기에 삶의 매순간을 마지막 순간인 양 절절하게 살 수 있잖니? 그래서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거 아니겠어?” 죽음을 맛볼 수 없는 불운을 영탄하며 인간의 죽을 운명을 질투하는 신. 그러하니 신이 전하는 뉴스의 뜻도 유재철의 전언과 이하동문이겠다. 삶과 죽음이 한몸에 붙어 있는 의미를 잊지 말라, 그런.
유재철인들 원래부터 매양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을 리가.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도 죽음을 남의 일로만 알고 살았다. 그저 출세와 돈을 좇아 치닫는 걸로 자신의 인생에 충성했다. 뿔을 벼려 들이밀고 생존의 들판을 뛰어 먹이를 물어와야만 하는 의무는 면제받을 길 없는 인간의 숙명. 그런데 이 사냥꾼은 그다지 노련하지 못했던 듯 발밑에 도사린 지뢰를 밟았다. 사업으로 애써 모은 걸 날려 결국은 난감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때 모친의 인도로 인연을 맺은 게 불교. 그는 재가 불자로 법정 스님에게 법명을 받았고 포교사 자격증도 얻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반쯤은 중으로 살았던 셈이다. 마음 안에 부처를 들여놓자 실성할 지경으로 자심했던 파산의 상처가 비로소 씻기더란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부처님은 업무에 바빠 그의 입에 밥까지 떠 넣어주진 않았다.
염 작업은 ‘기도’이자 ‘참선’이다
아이고, 뭘 해서 먹고사나? 궁리하고 연구하고 관찰한 끝에 덜커덕 뛰어든 게 장의업계였다. 사자(死者)의 몸을 씻기고 단장해 저승으로 고이 모시는 염습(殮襲)에 입문했던 것. 이게 탁월한 선택이었단다. 꿈자리부터 뒤숭숭할 업종일 것 같지만 그에겐 적성과 잘 어울려 일취월장한 게 아닌가. 시간이 흐르고 캐리어가 붙으면서 업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오나가나 그가 늘 듣는 소리가 있다. ‘대통령 염장이’가 그것. 최규하·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시신을 염습하거나 장례를 맡아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애당초 염장이로 나설 생각은 없었단다.
“친구가 장의사(葬儀社)를 운영했는데 잘되더라고. 아하, 저걸 하면 돈벌이가 되겠구나, 그런 판단으로 친구의 회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처음부터 염을 맡기더라. 내 목적은 사업이지 염장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어땠나? 잘 해냈나? “너, 체질이다! 곁에서 염습을 도왔던 친구가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 실력을 길렀다. 그러나 염을 한 뒤 며칠씩 꿈에 고인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이런 내게 백양사 암도 스님께서 호통을 치셨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염을 했느냐?’ 하며 한 수 가르쳐주셨던 거다.”
어떤 가르침을? “좋은 데로 가시라는 마음으로 염을 했다고 답하자 그건 틀려먹은 태도라 하셨다. 염장이가 주검에 너무 집착하면 영가(靈駕, 죽은 사람의 넋)가 떠나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저 최선을 다해 염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염이 너의 기도이자 참선이니라!’ 이후 스님의 분부대로 따랐다. 그러자 편해지더라고. 어느 시점부터서는 무념무상으로 일하게 됐다. 기도는 날마다 한다. 새벽에 일어나 ‘나무아미타불!’을 천 번씩 암송하거든.”
당신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다. 성공 비결이 뭐라 보나? “소는 코뚜레를 뚫어 움직이지만 사람은 마음을 사 움직여야 한다. 기능의 숙련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왔지만, 내가 더 주력한 건 유족에게 안심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좋은 매너가 필요하지. 10여 년 전만 해도 이 바닥엔 사기꾼들이 들끓었다. 굳이 바가지를 씌우거나 팁을 뜯어내지 않아도 대기업 연봉보다 나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게 장례 사업이다. 그러나 욕심들을 부렸다. 난 장의사를 운영하며 처음부터 정찰제를 도입하는 등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입소문이 났다.”
장례 기획과 연출은 혼자 해낸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3000여 건의 염을 했다. 윤달이면 숱하게 주문이 들어오는 개장유골 염까지 포함한 수치다. 도가 트일 만한 이력이다. 기능도 매너도 무르익을 수밖에 없는 경륜이지 않은가. 그는 여하튼 선의라는 걸 염의 정신으로 삼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재능은 공부 습성. 기량의 완숙을 위해 누구라도 쫓아다니며 배웠고 미국의 장의대학에서도 연수를 했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장례문화학과 개설을 제안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쉰 살 넘은 나이에 쓴 논문 ‘한국의 국가장(國家葬)’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강단에도 섰다. 2017년엔 ‘전통장례명장(제1호)’에 선정됐다. 줄기차게 실력을 닦아 영역을 확장해왔던 셈. 그는 여전히 ‘염장이’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지만 염만이 업무는 아니다. 장례의 전 과정을 도맡아 처리하니까. 가장 힘들었던 사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였단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영화배우 여운계 씨의 염을 하던 중에 노 대통령의 작고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기차를 타고 무조건 내려가는데 행자부에서 연락이 오더라. 유 교수, 지금 어디에 있느냐, 부산대 병원으로 가 김경수와 안희정을 만나라! 그런 요청을 받았다.”
관의 연락을 받기도 전에 일단 무조건 내려갔다고? 왜지? “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결국 염은 물론 장례의전 전체를 감독했다. 노 대통령의 피에 덮인 시신에 몹시 황망하더군. 피부터 닦아드리고 시신을 방부처리한 뒤 관에 모셨다. 장례의 모든 과정이 힘들었다. 만장 2000개를 만들어내는 일부터, 근 200여 개에 이르는 갖가지 결정 사항들에 벅찼다. 모든 게 드라마틱했지. 당시 정부는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
참혹한 상태의 주검을 만난 일이 잦았겠다. “몸의 5분의 1이 불에 타 사라진 시신을 염한 적이 있다. 이럴 땐 솜으로 형태를 만들고 한지로 싸 복원해드린다. 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난 염장이 일을 때려치울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가 점점 커졌다. 장례의 기획, 구성, 연출을 혼자 해내는 재미라니. 실용적 매력도 많은 게 장례 사업이다.”
어떤 매력? “별 투자하지 않고도 성취할 수 있다. 게다가 정년이 없는 직업이지 않은가. 관건은 실력과 극진한 정성에 달려 있다. 장례 후 내게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면 영가도 찜찜해 이승을 가뿐히 뜨지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염 자체가 기도이니 성심을 다해야 하는 거다.”
가장 까다로웠던 법정 스님의 ‘다비’
염이라는 기도. 기도라는 최대치의 선의. 이미 차갑게 식어 세상에 대한 그리움도, 사람의 손길을 향한 기다림도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게 주검이다. 그러나 염장이에게 주검은 완전한 종언이 아닌 게다. 넋이 남아 그의 마지막 배웅을 기다린다고 볼 테니까. 이왕 가시는 길, 사뿐히 가소서. 그는 그런 축원을 담은 기도로 사자와 소통하는 게 아닐까. 이런 선의를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염장이 직업에 옹골찬 자부심을 느끼는 까닭을 납득할 만하다.
유재철은 내로라하는 다비(茶毘, 불가의 화장 장례의식) 전문가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국내 사찰의 다비가 그에게 맡겨진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복이 있던가? 이 바닥인들 경쟁과 각축이 없겠는가? 그는 각별한 연구를 통해 세 건의 특허를 받는 등 다비 관련 실력을 쌓아 마침내 시장을 평정했다.
“25년 전, 내가 햇병아리였을 때 서경보 스님의 다비를 맡았다가 잔뜩 야단을 맞았다. 스님들이 까다롭기도 하지만 내가 서툴러서였다. 쓴맛은 항상 일찍 보는 게 낫더라. 혼쭐난 덕분에 오기가 생겨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다비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 더 배울 게 없을 때까지 배우자 일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다비에 어떤 특장이 있기에? “다비 시간, 즉 장작불 때는 시간부터 3시간으로 현격히 줄였다. 이게 나만의 노하우인데, 장작더미 밑바닥에 바람구멍을 설치해 화력을 높임으로써 얻은 효과다. 시간이 줄면서 비용도 반값으로 충분했지. 그러자 스님들 사이에 호평이 퍼진 거다.”
법정 스님 다비도 맡았다지? 이 스님은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고 유언하셨다. 다비는 어떻게 진행했나? “내가 경험한 가장 까다로운 의식이었다. 관마저 사용하지 말라 하셨으니 운구 수단부터가 난감했다. 스님의 생시 거처였던 오대산 토굴에서 부랴부랴 가져온 평상 위에 시신을 모시고 다비장까지 간신히 운구할 수 있었지. 49재 때엔 비바람이 엄청 거칠었다. ‘야 이놈들아, 이런 건 왜 하냐? 아무것도 하지 말랬잖아!’ 비바람 소리가 법정 스님의 호통으로 들렸다.(웃음)”
도력이 높아 앉은 채 열반에 드는 스님도 있다 들었다. 이 경우 운구는 어떻게 하지? “1957년, 백양사 만암 스님께서 좌탈입망(坐脫立亡)했다. 관 대신 상자 형태의 감실(監室)을 짜 다비했다고 하더라.”
다비 염불에 ‘쾌활 쾌활!’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니 이 얼마나 좋으냐는 거다. 죽음 뒤엔 무엇이 온다고 보나? “그걸 무슨 수로 알겠나? 다만 영가가 있다는 걸 가끔 실감할 뿐이다.”
돌아간 이의 넋이 염장이의 눈엔 보인다는 말인가? “아니다. 큰스님들의 영가는 짓궂은 장난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시한다. 염을 하다 보면 가위 등 분명히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물건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있다. 처음 이런 일을 겪었을 땐 너무도 당혹스러웠으나 거듭되자 예사로 넘기게 됐다.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웃음) 나는 영가들의 보호 덕분에 이만치 성장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영가들이 평안하도록 염을 진짜 잘 해야 한다. 염을 대충 하는 직원을 난 용납하지 않는다.”
염 판타지? 이승을 떠나는 영에게 무슨 미련이 있어 살아남은 자에게 호의를 베풀까보냐. 하지만 그게 꼭 그렇기만 할까. 사람의 상상력은 삶의 경험에 의해 지배된다. 평생 구두를 만들어 밥을 버는 사람에겐 구두가 그의 하늘일 수 있지 않겠는가. 구두가 고마울 게 아닌가. 유재철은 영혼의 초월적 힘까지 말하고 있지만 그가 그리 믿으면 그에겐 진실이다. 그가 이번엔 ‘영혼의 무게’를 얘기한다.
“어느 비구니 스님이 겨울 산중에서 추락해 돌아가셨다. 그의 몸은 가녀렸으나 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어 힘들었다. 불의의 추락사가 서러워 영가가 떠나지 않겠다고 떼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죽음의 양상에 따라 ‘영혼의 무게’라는 게 가변적일 수 있다고 느꼈다.”
가뿐한 죽음이랄까, 그런 걸 거쳐 원만하게 돌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산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 죽음을 자주 생각하며 준비를 하는 게 현명하겠지.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오늘이 마지막 하루라 되뇌었다 하지 않던가. 간단한 진리이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더욱 소중해진다. 마치 안 죽을 것처럼 사는 인생처럼 무모한 인생이 다시 있겠나?”
우주라는 미지의 이벤트 속으로 들어가는 죽음을 미리 두려워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을 연주와 노래, 시가 있는 추모제로 치르는 방법도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예우일 수 있다. 우울한 장례식을 능사로 삼을 일 아니다. 대만에서는 고인이 생시에 스트립쇼를 좋아했다면 장례에도 스트립쇼를 펼친다. 이게 무슨 허물이 되겠나? 안 그런가?”
풍금으로 전해지는 선율은 환상적이었다. 화음의 오묘함에 매료된 소년은 깊고 깊은 예술의 체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음악을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는 숨은 예술가, 이종열(李鍾烈·82)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를 만났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무대 뒤로 들어갔다. 크고 작은 무대 장비들 사이에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문패가 달린 방 하나, 이종열 조율사가 1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개인 공간이다.
“1995년 1월부터 예술의전당으로 출근했습니다. 원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오페라단, 발레단 등 예술 단체들이 상주해 있었어요. 조율사 공간은 없었지요. 우면산 중턱에 건물 새로 짓고 다들 그쪽으로 이전하고 나니 방이 생겨 하나 얻었습니다.”
올해로 피아노 조율만 64년. 수천 명의 연주자를 만났다. 2003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내한했을 때, 연주가 끝나고 이종열에게 경의를 표하며 청중의 박수를 이끌었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헝가리의 안드라스 시프, 이탈리아의 미켈레 캄파넬라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에게 인정받은 조율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종열의 손을 거치면 음에서 빛이 난다”며 그의 실력에 찬사를 보냈다.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 저는 국위선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도 이런 조율사가 있구나 하고 말이죠.”
세종문화회관에서 15년. 그리고 예술의전당에서 25년.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장 1호 조율사다. 2007년 피아노 조율사로서는 처음으로 명장 1호가 된 이종열 조율사는 오랜 시간 음악 안에서 살아왔다. “평생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하니 행복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요. 어떤 직업이든 다 스트레스가 있어요. 집에서 레코드판을 들을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 뭔가 잘못될까봐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제 직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유명한 연주자와 악수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 좋겠다’고 해요. 그런데 연주자마다 추구하는 소리와 음색이 다르죠. 어떤 연주자는 ‘피아노 소리를 브라이트(밝게)하게 해주세요’ 또 누구는 ‘이쪽 소리가 너무 쨍쨍거려요. 줄이면 안 될까요?’ 합니다. ‘건반을 눌렀을 때 건반이 저항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해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어제는 조율이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 날에는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게 제 일입니다.”
우리 가락을 통해 음을 알다
이종열 조율사는 전주 출신으로 전주 이 씨 종가에서 태어났다. 행동거지와 언어, 옷매무새에 제약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공구를 다루고 피아노와 가까이 사는 자신이 신기하다고 했다.
“양반은 뛰면 안 된다고 해서 조용조용 걸어 다녔습니다. 제사도 크게 지내는 집안이었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시조창을 참 잘 부르셨어요. 할아버지가 선창하면 동네 분들도 따라서 노래 부르곤 했죠.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른들이 기분 좋으니까 풍악을 한 거예요.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었는데 다 외워지더라고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거죠.”
학예회 때 친구들은 독창을 하거나 무용을 했는데 이종열 조율사는 무대에 올라 양반다리를 하고 시조창을 했다. 돈 벌어 제일 먼저 산 것도 클래식 음악이 아닌 시조창 레코드라고 말했다. 우리 가락에 귀가 열리더니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피아노 독주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교복을 입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풍금소리는 너무 좋은데 학교 비품이라 만질 수 없었어요. 여유 있는 집 자식들이 기타를 사서 배울 때 저는 달밤에 반딧불이가 돌아다니는 곳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어요. 할아버지가 단소를 자주 부셨는데 ‘궁상각치우’ 5음계였어요. 저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서양 음계가 필요해서 대나무를 뚫고 구멍 크기를 조절해가면서 직접 만들어 썼습니다.”
먼 훗날 생각해보니까 그 자체가 관악기 조율이었다. 불어보고 소리가 잘 나면 악기 하나를 완성해갔다.
조율을 만나다
풍금을 원 없이 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사촌이 끊임없이 전도를 하자 그는 못 이기는 척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가야 했던 명분은 바로 풍금. 페달을 밟으면서 풍금을 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교회 집사라는 분이 풍금으로 반주를 하는데 멜로디에 옥타브를 첨가하는 정도였어요. ‘아, 저걸 내가 배워?’, ‘그럼 열심히 교회에 다니자’ 했어요. 오르간 교본을 사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음악 통론’을 펼쳤죠.”
오르간 교본을 떼고 난 뒤에는 580개가 넘는 찬송가 전곡을 쳤다. 그런데 풍금을 치는 게 너무 좋아지자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단소와 하모니카를 불 때는 몰랐는데 똑같은 장조의 3음계라도 건반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났다. 집에 있는 공구를 교회로 가지고 가 풍금을 뜯어보고야 말았다. 풍금은 놋쇠 철판을 깎아서 조율하는데 점점 어려워지고 소리는 제 소리에서 점점 멀어졌다. 스스로 해보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풍금이 일본 제품이니까 어딘가 문원이 있을 것 같았어요. 서점에서 책을 찾아보니 ‘피아노 구조, 조율, 수리’라는 책이 일본에 있었어요. 장남으로서 농사 일구고 동생들 보살피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제가 이런 책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렵게 사정해서 용돈을 받아 책을 주문했어요.”
해방 후 일본과의 국교가 닫혀 있던 시절. 책이 한국으로 오는 데 두세 달이 걸렸다. 문제는 일본어였다. 해방이 되던 해 소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일본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한국식 교육을 받게 된 것. 해방 후 처음 발간된 ‘일본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사서 교본이 오기 전 열심히 독학하며 글자를 익혔다.
“기다리던 책이 왔을 때는 어느 정도 일본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빨리 보고 싶어서 샛길로 접어들어 논두렁에 앉아 책을 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피아노 구조 도면을 살펴봤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율을 시작한 거죠.”
풍금 조율을 시작하면서 피아노와 쳄발로와 파이프오르간 등의 악기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피아노를 조율해도 쳄발로 등 다른 건반악기까지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조율의 인생을 정리하다
작년 말 이종열 조율사는 60여 년 조율사로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조율의 시간’(민음사)을 펴냈다. 백전노장의 이야기는 담백했고 진솔했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사람들은 조율사 인생에 주목했다. 재미있는 것 하나. 책을 읽다 보니 마치 판소리의 아니리가 연상되는 박자감이 느껴졌다. 그와 인터뷰를 해보니 확실히 알았다. 어려서부터 시조창을 하는 할아버지의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으니 자연스레 리듬이 말하는 습관으로 밴 것. 박자처럼 글 속에도 묻어 있었다.
이종열 조율사는 말초신경을 보호하기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한다고 했다. 술은 모임에서 맥주 반 잔 정도, 담배는 피운 적 없다. 귀가 나빠지면 높고 낮은 음을 구별할 수 없다.
“조율 자체는 기계를 보고 해도 되지만 조율의 최고 생명은 ‘보이싱’입니다. 음색을 고르게 음량 크기를 같게, 밸런스를 제대로 맞춰야 하거든요.”
아무리 조율이 잘되어 있어도 보이싱이 안 좋으면 피아노를 못 치겠다며 일어나는 연주자도 있다고. 그는 앞서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지만 인생 끝까지 조율에 매진할 생각이다.
“지금도 할 게 많아 보입니다. 학문은 끝이 없잖아요. 죽기 전날에도 궁금한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늘 새로운 것들이 들리고 보입니다.(웃음)”
그는 한 차원 높은 피아노 조율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에서 발간한 기술 서적 중 보이싱 파트는 이종열 조율사가 집필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튜닝아트가’라는 모임도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튜닝아트, ‘조율은 예술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면서 조율에 관해 토론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서로 조언도 해줍니다. 지금 예술의전당에 새 공연장을 짓고 있는데 훌륭한 후배가 대기 중입니다. 이제 서서히 제자들에게 자리를 내줘야죠. 100년, 200년 할 수 없잖아요.”
그는 피아니스트 뒤에 선 조율사로서의 자부심을 조심스럽게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관객은 조율하는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요.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에게만 박수치고 소리 지르잖아요? 그런데 연주자들은 공연장에 오면 저한테 매달립니다. 조율사의 손에 멋진 공연이, 연주가 달려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