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내린 비로 배롱나무꽃이 많이 떨어졌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꽃을 보기란 참 애매하다고는 하나 배롱나무는 가을의 문턱을 넘었어도 붉은 꽃을 보여준다. 요즘 하는 말로 핫핑크 색감이다.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기 시작해서 가을까지 피고 지는 식물, 강한 생명력으로 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화려한 꽃 호강을 선사한다. 배롱나무꽃을 보려거든 서천이다. 서천의 해안도로를 달리면 배롱나무꽃 길이 우리를 맞아주고 전통 건축과 어우러진 꽃 무리가 운치를 더한다.
빗소리는 주룩주룩 빈 당에 가득한데 / 낮 꿈을 막 깨고 나서 붓을 바삐 찾노니 / 마음이 맑아 절로 사사로운 뜻 없는지라 / 더위 한 번 식혀준 은혜 하늘에 감사하네.
고려 삼은 중 한 분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시를 찾아보았다.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은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은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창건 연대는 1594년이고 당시 이름은 효정사였다. 그 후 정유재란으로 소진되었으나 이전하여 광해군 때 문헌(文獻)이라 사액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고종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으나 뜻있는 유림들이 복설하였고, 문헌서원 역사마을 조성사업에 따라 현재에 이르렀다.
배롱나무꽃과 함께하는 서원의 품격
서천 솔바람길을 따라 이색 선생 동상이 보이는 정원이 평온하다. 서원의 홍살문을 넘으면 연지 위 경현루의 반영이 잔잔히 흔들린다. 예스러움이 은은한 연못은 배우 박보검이나 유아인이 드라마와 영화를 촬영하던 곳이기도 하다.
널찍한 잔디밭을 걸어 외삼문인 진수문과 정면의 진수당에 들면 양쪽으로 유생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이라는 현판은 진수당 마루 안쪽으로 걸려 있어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뒤편 돌계단으로 오르면 떡하니 장판각이 중심 잡듯 위치한다.
담장 따라 효정사, 교육관, 영모재, 그 길 안으로 목은 선생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당(影堂)을 따로 앉혀 아늑하다. 이색의 선비 정신과 성리학, 그리고 풍류가 깃든 기린산 중턱의 묘소를 바라보며 세월을 거슬러 보는 시간이다. 산수 좋은 수려한 자연 속을 산책하다 보면 옛 어른의 멋과 정취, 정신과 자연관의 교감에 빠진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힐링 여행지다. 숲이 감싼 산줄기 뒤편으로 선비의 기개를 닮은 듯 쭉쭉 뻗어 울창한 소나무가 든든하다.
바로 영당 뒤편 노거수 두 그루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을 풍성하게 피워 올린다. 전통 건축의 지붕 위로 진분홍 배롱나무꽃 무리가 몽글몽글하다. 지난밤의 비바람으로 이미 많은 꽃이 떨어졌지만 배롱나무의 강한 생명력은 계속 이어진다. 아무리 꽃이 붉어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대단한 권력 또한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서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무려 석 달 열흘 동안 피어나니 비바람에 꽃을 좀 떨구었기로서니 그저 슬플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지대에 의지한 채 노구를 딛고 서서 해마다 꽃을 피워내는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를 본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하다.
문헌서원 옆 전통 한옥 숙소
이렇게 고즈넉한 곳에 짐을 풀고 하루나 이틀쯤 쉬며 돌아보는 소도시 여행은 휴식이 된다. 하룻밤 묵어갈 숙소로 문헌서원 전통호텔이 서원 입구에 있다. 정부와 서천군의 전통역사마을 조성사업계획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지은 우리나라 고유의 한옥마을 형태다. 나무를 이용한 서까래와 온돌, 돌을 이용한 기단, 문풍지가 정겨운 두 겹 곁문을 열면 친환경자연 속에 스미듯 지은 옛 가옥의 따스함이 다가온다. 안온하게 스며든 햇살을 받으며 툇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가만히 쉴 수 있는 시간은 가히 ‘득템’이다.
한옥 스테이를 할 경우 미리 예약하면 식사도 가능하다. 문헌 전통 밥상은 모두 지역 제철 농수산물을 사용해 만든 신토불이 건강식이다. 상쾌한 새벽 산책 후 한옥 마당을 내다보며 받는 소박하고 정갈한 아침 밥상은 추천할 만하다.
한산 모시와 소곡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산 모시 짜기. 전통의 맥을 잇고자 서천에서는 모시풀을 처음 발견한 건지산 기슭에 한산모시관을 개관했다. 모시관 담장 아래 푸릇하게 자라고 있는 모시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시관에서 모시의 모든 것을 관람한 후, 모시 체험과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직조기능 보유자의 시연 공방도 볼 수 있다. 모시 짜는 여인상이 있는 정원 아래 너른 마당에서는 여행자들이 투호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옛날 백제 유민이 나라를 잃고 한을 달래기 위해 빚어 마신 백제 궁중 술이라고 전하는 한산 소곡주. 보통 추수가 끝난 가을에 빚어서 100일 동안 땅에 묻는다. 술이 독해서 며느리가 젓가락으로 찍어 맛보면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서 엉금엉금 긴다는 일화는 물론, 조선 시대에 과거 보러 가던 선비가 한산에서 쉬다가 술맛에 눌러앉아 과거 시험장에 가지 못했다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전해 내려오는 소곡주다. 취해도 좋을 가을이다.
솔바람 숲 맥문동과 서해 갯벌
다시 꽃구경, 서천의 장항 쪽으로 달리다 보면 장항 송림 산림욕장이 나타난다. 방풍림만으로도 압도한다. 수령 50년 이상 된 해송이 하늘을 가려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해송 아래 온통 보랏빛 맥문동 물결이다. 이곳에 오토캠핑장이 있어서 공기 밀도 걱정 없이 휴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해솔밭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기벌포 장항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바다 위로 우뚝하다. 15m 높은 상공에서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상쾌한 시간 속에 서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이곳 이름이 기벌포 해전 전망대인데 백제의 마지막 해전지였다. 발아래로 해송림이 있고 눈앞에는 서천 바다 갯벌이 있다. 멀리 서해 근대산업의 중흥을 이끈 장항제련소도 보인다.
레트로 장항 골목 여행과 서천 맛집
옛날 기찻길을 지나 장항 골목 여행의 묘미도 쏠쏠하다. 편하게 레트로 흐름대로 놀거나 시대극처럼 양산 예쁘게 쓰고 느린 감성으로 즐기는 여행도 어울릴 듯한 곳이다.
장항에 맛집들이 즐비한 6080 음식 골목 맛나로(路). 특히 홍어탕과 아귀찜이나 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몇 군데 있으니 그중에서 끌리는 곳으로 들어가면 바로 맛집이다. 탕에 향긋한 미나리가 푸짐하다. 식사 후 맛나로 옆 골목을 걷노라면 레트로 분위기가 솔솔 난다. 라테 위에 달고나 듬뿍 얹은 달고나 라테를 먹을 수 있는 명물 카페도 빠뜨릴 수 없다. 때에 따라 체험도 가능하다. 지역의 젊은 청년들이 지역사회 살리기를 위한 건강한 일꾼 역할을 자처했다.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전통 횟집 또한 장항 부근에 많다. 매일 공급되는 제철 해산물을 이용해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소박한 물회 한 상으로도 바닷가 식사를 만끽할 수 있다. 이제 홍원항 전어가 제철이다.
꽃이 필 즈음의 이른 새벽, 쪽을 잘라내 하루이틀 물에 우려낸다. 자연산 굴 껍질을 구워 만든 석회를 섞고, 잿물을 부어 발효시켜야 준비가 끝난다. 손등이 파랗게 물들 때까지 커다란 천을 쪽물에 담갔다 빼는 과정은 고된 빨래를 연상시킨다. 지난한 과정이 꽃피운 쪽빛은 탄성을 자아낸다. 철 따라 탈바꿈하는 자연 풍광, 20년 넘게 이어지는 장인의 열정 앞에서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감탄 말이다. 쪽 염색에 대해 묻자 푸른 산에 흐르는 물(靑山流水)처럼 애정과 자부심이 쏟아졌다.
홍루까 하늘물빛 전통천연염색연구소 대표는 20년 넘게 전통 천연 염색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쪽 염색을 활용한 회화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책 ‘한국 천연 염색 백서 2017’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인 쪽염 보존을 위해 힘썼다. 현재는 쪽 염색 체험, 천연 염색 자격증 강좌 및 전문가 양성 과정을 운영하며 쪽 염색의 전통과 미래를 잇고 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더라
처음부터 가업을 이으려던 건 아니었다. 여름 휴가철에 어머니인 조일순 전통매듭 장인이 매듭실 염색할 때 도와드렸을 뿐이다. 천연 염색에 대한 열정을 지핀 것은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형형색색의 천이 펄럭이는 장면이었다.
“염색이라는 게 빨래나 다름없어요. 색이 제대로 날 때까지 염색물에 넣었다가 꺼내서 헹구고, 다시 넣었다가 헹구는 과정의 반복이거든요. 그걸 다 도와드리고 쉬려고 평상에 누웠는데, 그날따라 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더라고요.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도 어머니를 도와드렸지만 한 번도 예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도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나 봐요.”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자연 색만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들어온 화학 염색이 제아무리 다양한 색을 뽑아낸대도, 자연의 빛에 견줄 수는 없었다. 길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에선 ‘와’ 하고 탄성이 터져 나오지만, 동대문 원단 시장을 가득 채운 원단들을 본다고 해서 감탄하는 사람은 없잖은가.
염색 경력만 스무 해를 훌쩍 넘는다. 한창 때 응했던 인터뷰 기사의 제목 ‘나는 아직도 미쳐 있다’가 과장이 아니었다. 자려고 누우면 바람에 날리는 천이 아른거렸다. 눈에 담는 모든 색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전통염색에 대한 책이 없었기 때문에 온갖 문헌을 뒤지며 전통을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열정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게 한다.
그의 열정을 논할 때 어머니 조일순 장인을 빼놓을 수 없다. 화학 염색에 밀려나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춘 쪽을 다시 살려낸 데에는 조 장인의 역할이 컸다. 1년생 풀인 쪽은 염색에 쓰이지 않으면 잡초나 다름없었고, 1970년대 당시 쪽 염색을 할 줄 아는 이도 전무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직접 구해온 쪽 씨앗을 전라남도 나주에 심었다. 현재 나주 문평읍, 당시 문평마을에서는 찬물염색이라 불리던 쪽염이 마을 단위로 행해지곤 했다. 그는 어머니가 윤병운 인간문화재와 쪽염을 재현해내기까지 갖은 노력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제대로 쪽염을 성공한 게 1980년대 초반이었어요. 어머니는 ‘이 기술을 무조건 살려야 한다. 꼭 살려내서 후대에 전달해야 한다’고 하셨죠. 윤병운 어르신이 염색 분야에서 최초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당신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우셨고요. 다른 사람들은 ‘최초 인간문화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왜 남에게 주느냐고 아까워했는데, 어머니는 ‘나는 매듭 장인일 뿐, 염색 전문가는 아니다.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고 대답하셨어요. 확고한 면모가 정말 존경스럽죠.”
염색 0.5세대의 열정
‘염색 0세대’ 어머니의 열정은 고스란히 아들에게 가 닿았다. 천연 염색 분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없으면 서운할 지경이다. 그는 쪽염을 최초로 시작했고, 무늬를 내어 염색하는 문양염 기법을 최초로 개발한 염색 전문가이며, 찹쌀풀을 이용해 산수화를 최초로 그린 작가다. 자연에서 새로운 염색 재료를 발굴해내 소개하거나, 인도나 일본 등 해외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알리는 역할도 기꺼이 맡았다. 1세대보다는 앞서 염색을 시작했기에 그는 스스로를 염색 0.5세대라고 칭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 년에 한 번씩 해외도 꼭 나갔어요. 원래 쪽빛, 즉 남색이 인도에서 온 푸른색이라 영어로는 Indigo Blue라고 불러요. 우리나라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건데, 세계 천연염색 심포지움(ISEND)이나 자연염색교류전으로 미국, 브라질, 호주, 일본, 한국 등지의 작가들이 모여서 교류하곤 했어요. 염색된 색상을 직접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3년째 모임을 못 갖고 있죠. 일본도 자주 갔어요. 쪽염이 마치 제 것인 양 특화를 잘 시켜뒀더라고요. 쪽은 독초과에 속하는데, 어떻게 한 건지 쪽으로 차도 만들고 쿠키도 만들더라니까요. 여러모로 빨리 하늘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열정으로 덮지 못하는 어려움도 분명 있었다. 지금은 연구소를 옮겼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울 도심, 그것도 북촌 한가운데 한옥에 있다 보니 환경이 항상 아쉬웠다. 마당이나 밭이 있었다면 천도 널어놓고, 염료 식물도 매일 관리하며 다양하게 염색할 수 있었을 테니까. 특히 쪽이나 염료 식물을 재배할 때는 새벽에 잡초를 뽑아줘야 하는데, 그나마 가진 땅에 심자니 짬 내서 들러도 잡초만 어마무시하게 자라 관리하기 어려웠다. 쪽이 열대 식물인지라 나주나 김천에서 자리를 잡을까도 고민했다. 결국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서울에서 버텨왔지만, 어려움을 견뎠기에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어렵게 연구를 이어나가면서도 그는 원칙을 고수했다. 전시회에 작가로 참여해 열 필의 천을 전시해두고 그 앞을 지킬 때였다. 관람객 서넛이 다가오더니 천 앞뒷면을 한참 번갈아 보더란다. 무얼 그리 뚫어져라 보느냐 묻자 색상이 어쩜 이렇게 균일하냐, 정말 천연 염색한 것이 맞냐고 도리어 되물었다. ‘천연 염색 작품이라고 플래카드 걸어두고 거짓말을 하겠나, 그러니 전문가가 아니겠느냐’ 하고 당당하게 받아쳤다.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열 번이든, 그 이상이든 반복하는 고집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카프만 한 크기든 20m에 달하는 천을 염색하든 다르지 않다.
“처음 염색한 천을 보면 균염(均染)된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햇볕에 널어두고 보면 군데군데 물이 덜 들어서 빈 곳이 보이거든요. 그러면 염색 과정을 반복하는 거예요. 저는 기본 열 번은 해요. 그러니까 10년이 지나도 색이 안 바래고 그대로인 거죠. 물론 천연 염색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어머니만 해도 얼룩이 있어야 천연 염색이 아니겠느냐고 하셨고요. 주먹구구식이던 예전과는 염색 방법이 달라졌으니 그 영향도 있겠죠.”
이제는 원칙을 지켜야 할 때
쪽의 매력은 고운 빛깔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환경오염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화학 염색과 달리 친환경적인 천연 염색은 패션업계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기업뿐 아니라 소비자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천연 염색된 옷을 사거나 직접 염색을 배우는 등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쪽으로 염색된 천은 방충, 방균, 방염 성능을 지니고 있다. 쪽 염색된 옷을 걸치는 것만으로도 피부의 상처나 아토피 같은 질환이 완화되는 경우도 있더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다. 일본의 한 교수가 쪽 성분을 분석해, 여드름을 유발하는 포도상구균 항균 기능이 있다는 걸 밝혀내기도 했으니 검증까지 된 셈이다. 게다가 쪽염된 옷은 여름철 높아진 체온을 어느 정도 낮춰주는 ‘쿨링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부르던 노랫말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싶다.
중년들이 특히나 천연 염색을 자주 찾는다. 자연의 빛에 부쩍 관심이 많아질 나이인 데다, 눈 번쩍 뜨일 효능에 반해서 그러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천연 염색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걸 원치 않는다. 천연 염색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흔들리는 일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천연 염색한 옷을 판매하는 분들 중에서 필요 이상으로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전 일부러 같은 옷을 팔더라도 훨씬 싼 값에 내놓죠. 항의받을 때도 있지만 저는 당당하게 그래요. ‘작품하고 상품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기껏 만든 옷이 안 팔리면 그건 무슨 소용이 있냐. 그래서 밥 벌어먹고 살겠냐’고요.”
전문가 양성 과정에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천연 염색 체험 프로그램에서 한두 번 염색하고서 끝났다고 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직접 가르치는 제자들에겐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천연 염색을 배워 창업하려는 중년들에게는 디자인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여유가 된다면 디자이너와 계약하거나, 의상이나 디자인을 전공한 대학생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전통문화산업 지원 사업을 활용할 수도 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자연
염색 일은 앞으로 5년 정도나 더 할까 싶다. 다만 문화재 보존과학과 염색을 동시에 전공한 전문가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스스로 선구자가 되어 후학을 이끌고자 산업대학원 섬유예술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문화재보존과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출토복식특별전 및 학술 세미나에 참석해보면, 시신이 입고 있던 옷을 분석해서 바느질 기법, 원단 종류를 밝혀내는데 염색에 대해선 전문가가 없어 추측만 하는 현실이 아쉬웠던 탓이다. 지금은 마음을 접었지만, 전통염색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전문가가 꼭 생기기를 소망하고 있다. 아들이 그 역할을 맡아주길 내심 바라고 있지만 강요하진 않는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최근에는 염색에 대한 애정 뒤편으로 숲 해설가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자라났다. 염색밖에 모르던 외골수의 도전이다. 하던 일과 대단히 다른가 싶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숲 해설가는 자연휴양림, 유아숲체험원, 숲길 등에서 국민이 산림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설하거나 지도하는 직업이다. 숲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물 이야기, 나무나 식물에 대한 지식, 숲에 얽힌 역사, 숲과 인간의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처음엔 풀만 보면 ‘저걸로 염색하면 무슨 색이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죠. 자연에서 난 재료를 다루긴 했지만 평생 염색만 하고 살았는데, 직접 숲속에 들어와 보니 훨씬 좋더군요.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숲에 직접 나가 해설사 강의를 듣고 있어요. 어떨 땐 배를 잡고 웃고, 어떨 땐 감동받기도 해요. 듣다 보니 재미있어서 공부 좀 제대로 해봐야겠다 마음먹었죠. 석 달 뒤에 자격증 시험을 보는데 경쟁률이 만만찮아요. 느리더라도 꾸준히, 열심히 하려고요.”
돌고 돌아 자연이다. 쪽빛으로 물든 손과 흙 잔뜩 묻은 등산화가 전혀 거슬림 없이 자연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먹은 것은 이뤄내는 끈기와 열정이 뒷받침되기에 그럴 것이다. 그의 한결같음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꽃이 가득 핀 오월의 봄 거리가 그렇듯.
3학년 2반 수업은 현재진행형
덕포진교육박물관 1층의 난로 옆에 앉아서 이인숙 선생님을 기다리며 남편이신 김동선 관장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적함이 적당히 어울리는 박물관 외부와는 달리 전시관 내부는 아주 오래전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와글거리는 듯하다.
“박물관이 조용하지요. 코로나19 이전엔 동창회 모임이나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왔는데 요즘은 모든 게 뜸해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은 이인숙 선생님의 교직 생활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이 있는 1층 인성교육관, 일제강점기부터의 교육과정 관련 사료가 전시된 2층, 3층의 농경문화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의 방대한 교육 자료들이 새록새록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감성 문화공간이다.
“우린 부부 교사였지요. 어느 날부터인지 아내가 자꾸 눈이 침침하다고 해요. 그래서 병원을 갔다가 시력이 아주 많이 나빠진 걸 알았어요. 한 6년 정도 병원을 계속 다니다가 더 이상 회복 불능… 의사가 그만 와도 된다고 해요. 그래서 빨리 사표를 내게 했어요. 시력을 잃고 평생 천직이었던 일을 그만두는데 그 좌절감에 난리가 났지. 그 기분을 이해하죠. 그래서 살고 있던 대치동 아파트를 팔고 이 박물관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도 재현해서 지금도 아내의 수업은 진행 중인 듯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녀의 풍금 소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시관 입구를 향해 이인숙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슬로 모션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동시에 들려오는 콧노래가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반가워요. 여긴 처음인가?” 하이톤 목소리가 힘차다. 오래전에 놀러 온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풍금 치며 ‘오빠 생각’을 들려주었다고 했더니 “그럼 노래 먼저 불러줄까?” 하면서 풍금 앞에 앉아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를 시작으로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에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시냇물은 졸졸졸 노래하며 흐른다~”를 불러주신다.
3학년 2반 교실에 퍼지는 풍금 소리가 마법처럼 금방 추억 속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전에 들었다던 ‘오빠 생각’도 불러줄게요” 하면서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늪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실 제~♪” 순식간에 기분이 경쾌해졌다. 그리고 따뜻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있을 때 새로움이 보인다
마주 앉은 이인숙 선생님의 가꾸지 않은 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인다.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겼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한 듯, 그런데 잘 살펴보면 좀 바뀐 듯도 합니다.
“바뀌어야지.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고 생각해요. 그대로인 것만 좋은 것은 아니잖아. 그대로이면 고리타분해져요. 디지털과 섞어놔야 추억의 새로운 면도 보이거든.”
요즘은 영국에서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덕포진교육박물관 일을 함께 한다. 젊은 세대인 아들 덕분에 새롭게 바뀌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동심이라는 추억이 늘 기억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기억력도 더 좋아져요. 살다 보면 오래된 것들을 소홀하게 생각하는데 이것들을 디딤돌로 삼아 가꾸어진 것에 나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요즘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현재의 디지털 밑거름이 아날로그입니다. 고생 없는 성공을 사상누각이라고 하듯 어르신들의 역사는 오늘의 든든한 밑거름입니다. 뿌리를 단단하게 해야 튼튼한 나무로 키울 수 있어요. 이 박물관에 저장된 모든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고 행복한 추억입니다.”
인정하기와 경청
그렇다면 시니어들과 젊은 세대의 간격을 잘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일이나 어떤 해법이 있을까요.
“난 어르신이나 실버란 말보다는 선배라는 말이 좋아요. 노인대학보다는 선배대학이 어떨지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선배와 후배잖아요. ‘라테는…’으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젊은 그들을 인정해야 해요. 도움을 주고 싶다면 짧고 임팩트 있게 전해야겠지요.
특히 시니어들에겐 경청이 중요해요. 독불장군처럼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겐 치매나 우울증도 빨리 온다는군요. 성경에도 있잖아요.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긍정의 힘은 아주 세다
어려움이 많은 요즘입니다. 흔들림 없이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이런 말이 있어요. ‘행운은 지각은 하되 결석은 하지 않는다.’ 언제든 온다는 말이죠. 무엇을 이루려면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습, 연습, 죽도록 연습입니다. 죽도록 연습해도 죽지는 않아요. 하하. 그리하여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현실 탓, 환경 탓 하기 전에 너 자신을 바꾸어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염두에 두는 가치나 마음가짐이 있을까요.
“간단하죠. 내겐 긍정의 힘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살림집에 화장실이 없고 문 밖에 있어요.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다시 양말을 신고 주섬주섬 옷을 잔뜩 입고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걸어 나와야 해요. 귀찮다고 생각 않고 운동하러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앞을 못 보니까 캄캄한 밤이어도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하면서 나옵니다. 하하하. 내 불편을 배우자나 자식이 대신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나 자신의 일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어려움을 넘어선 힘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한탄스러웠지만 빠르게 긍정적으로 바뀌려고 노력했습니다. 말로만으로는 될 리 없어요. 방법을 찾았죠. 좋은 말 외우기입니다. 가장 최고는 노래죠. 내가 생각할 때 대부분의 노랫말은 가장 맞는 말입니다. 노래가 암흑기의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뀌게 했지요.”
그러면서 갑자기 “노래 한번 해볼까”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이어서 패티김의 “사랑이란 두 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가곡 그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까지 부르신다. 타고난 출중한 노래 실력이었다.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도중에 틈틈이 들려준 노래가 10곡이 넘었다.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있고 맑은 소프라노여서 들으면서 즐거운 기운을 얻는다. 매사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다. 노래와 함께 즐기는 것이 시 외우기라고 말한다. ‘나만의 두뇌 스포츠’라면서 150편의 시를 외우고 있다니 놀랍다. 그러면서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줄줄이 읊는다.
나 자신을 가르치면서 산다
이처럼 시종일관 긍정적이고 기운찬 시간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 시도 외우고 노래도 하고, 운동 삼아 박물관 3층을 오르내려요. 그러다 보면 주변도 보입니다. 내 앞가림만 하려고 하지 말고 소외된 사람을 찾아보고 마음을 나누다 보면 이게 내 행복이다 생각되고 마음이 열리죠. 시니어라면 그러다가 하고 싶은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고요. 무심히 시간을 보내는 셀프 킬링이 아닌 셀프 힐링이 된다는 거죠.”
이화여대 초등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직 22년, 시력을 잃고 교직을 떠났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지금도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렇지만 외부에 기대할 만한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자신만의 멘털 스포츠라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번씩 좋은 일 하고, 10번 웃고, 100자 쓰고, 1000자 읽고, 10000보 걷기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여건상 쉽지 않다.
“하루 100자 쓰기는 어느 노래든 1절 가사를 꼭꼭 눌러 쓰면 얼추 100자 됩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몇 줄 가사 쓰기 쉽잖아요. 나 그게 하고 싶어요. 또 요즘엔 없으면 불편한 스마트폰과 운전면허… 이 두 가지, 내가 그게 없어요.”
유쾌하다가 간간이 쓸쓸할 때도 있다.
선생님께 박물관은 시간 여행이나 마음 나누기 말고도 또 어떤 의미일까요.
“내 마음의 보물입니다. 질 바이든 여사가 백악관에 들어가서도 교직을 유지하잖아요. ‘남을 가르치는 것은 나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라면서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의 3학년 2반 교실이 있어서 지금도 나 자신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살게 합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몰려오고 있다. 충남 서천 여행 중에 마침 한산 모시관이 있어 들렀다. 예로부터 한산 모시는 정갈하면서도 우아한 맵시를 보여주는 한여름 최고의 전통 옷감이었다. 무더위를 이기게 해줄 간소하면서도 시원한 옷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요즘이지만 옛 어른들은 모시옷으로 더위를 잊었다.
산아래 멋진 한옥으로 단정하게 지어진 한산 모시관으로 들어가니 저절로 차분해졌다. 백제시대 때 모시풀을 처음으로 발견한 곳이 바로 이곳 건지산 기슭이었기 때문에 모시관을 이 땅에 지었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가니 뜰 한쪽 작은 밭에서 재배되고 있는 모시풀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심어놓은 듯했는데, 마치 깻잎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모시풀은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은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산 모시로 만들어진 품격 있는 역사 속 옷들을 보고 싶었다. 지하 1층에는 삼국⋅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시의 역사와 함께 시대별 전통 복식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신분과 관계없이 옛 조상들이 입었던 옷과 의복 재료로 다양하게 사용된 모시의 우수한 품질을 볼 수 있다.
1층에서는 한산 모시의 유래와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한산에서 모시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전시된 글에는 “통일신라시대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건지산에 올라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하여 모시 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2층에서는 4000번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한산 모시의 제작 과정을 영상과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동양의 5원색 백․청․황․적․흑의 천연염료로 만들어낸 우아하고 아름다운 옷들도 감상할 수 있다. 역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무화유산으로 불릴 만하다.
전통관 안채에서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 모시 짜기 보유자 방연옥 선생의 시연을 보며 전통 공예의 섬세함과 인내의 작업 과정을 이해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다는 모시올은 작업자들의 입술과 이로 뽑아낸다고 한다. 그렇게 뽑은 모시올을 모아 모시실을 만들고 그 모시실을 베틀에 올려 한 필을 만들어내는 데 무려 5개월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 과정을 직접 보니 소중함과 특별함이 더했다.
베틀 앞에 앉아 베를 짜기까지의 많은 과정 중에 모시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모시 째기’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이[齒]를 사용하는데, 아랫니와 윗니로 태모시를 물어 쪼개다 보면 피가 나고 이가 깨지는 고통스러움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백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에 골이 파지고 모시 째기가 수월해진단다. “길이 들어 몸에 푹 밴 버릇”일 때 흔히들 “이골이 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분들의‘이골이 나는’작업에서 생겨난 말이다.
한산 모시 홍보관에서는 모시로 만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립 농산물품질관리원의 엄격한 품질 기준에 따라 유통 판매가 이뤄지고 있어 믿음이 간다.
모시 전시관에서 연결된 육교 건너편에 한산모시 공예마을이 있어 넘어가 봤다. 1500년 전통의 한산 모시를 현대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모시옷 입기 체험, 미니베틀 체험, 천연염색, 부채 만들기, 모시 공예, 한산 모시식품 체험 등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모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시간이다. 미리 예약하고 방문하면 즐거운 체험을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시옷은 더운 여름 특별한 경우에만 입거나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옷이 되었다. 손이 많이 가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가격도 아니어서 대중적이지 못한 편이다. 하지만 직접 보고 듣고 살펴보니 한 번쯤 입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왕에게 진상했다는 한산 모시가 얼마나 시원하고 착용감이 좋은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결이 가늘고 고울 뿐 아니라 통풍까지 잘되는 우리의 여름옷이 바로 모시옷이다.
설을 앞두고 영등포 전통시장을 찾아갔다. 설 대목이라서 시장 전체가 깨끗하게 정리됐다. 옛날 상품들이 거의 모두 갖춰져 있는 게 영등포 전통시장의 특징이다.
상인들은 영등포 전통시장을 “서민들의 쉼터와 같은 곳” 또는 “옛 시골 시장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장 골목이 오래되기도 하고 아직 리모델링도 안 돼 허름하고 다소 복잡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정감을 느끼게 하는 시장이다.
현장에서 느낀 영등포 전통시장의 특징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다른 곳에서 팔지 않는 독특한 물건을 판다. 옛날 제주도에서 목욕할 때 발뒷꿈치의 각질을 제거하는 데 쓰던 귀중한 돌을 팔고 있었다. 현무암으로 작은 구멍이 나 있고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가벼운 돌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그 돌로 발뒷꿈치의 굳은살을 없애는 데 쓰곤 했다. 지금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과거 제사를 지내던 제사용 도구도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옛날 모습 그대로 제작을 해서 팔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옛날 촛대, 잔, 그릇 등이 보였다.
둘째 물건 대부분이 싸다. 서민들이 찾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옷 종류, 신발, 가구, 주방용품, 음식 등이 모두 싼 값에 팔리고 있다.
콩국수 2000원, 고급부추 5000원, 대형머플러 3000원, 고급장갑 3900원, 티셔츠 5000원, 이발 5000원, 염색 5000원, 세발(머리를 감고 다듬는 것) 2000원 등이었다.
셋째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상품 종류가 다양했다. 다른 곳에서 구하기 힘든 것도 영등포 전통시장에 가면 구할 수 있다.
각종 약초, 옛날 방한복, 군 전용 잠바, 세계 주류 할인점, 옛날 술, 개량 한복, 각종 털실, 만물상회, 올갱이 해장국, 인삼, 옛날 고향 순댓국집 등을 볼 수 있었다.
넷째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물건들이 많았다.
옷을 짜던 편물짜집기, 이름 짓는 곳, 모시 전문, 자수, 옛 방앗간, 메밀가루, 전통식품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시장이다. 그러나 시장 건물이 너무 오래돼 안전문제 등이 염려된다. 리모델링이라도 해서 전통시장으로 맥을 이어가게 했으면 좋겠다.
“겨울은 껴입기라도 하는데 여름은 그게 아니라 힘들다.” 여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얘기다. 덥더라도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어야 할 때가 있고 취침 시에도 아무것도 덮지 않으면 숙면이 어렵다. 땀 흡수만 생각해 ‘면’ 100%를 고집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원단이 출시되면서 땀 흡수는 물론 시원함까지 챙길 수 있게 됐다. 2019년 여름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무더위를 견디게 해줄 시원한 원단 아이템을 소개한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이브자리, 까사미아, 연희데코, 유니클로, BYC
친환경 청량감 ‘인견·모달·뱀부’
여름 원단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통기성과 흡습성, 수분 발산성과 열 발산성이다. 공기가 시원하게 잘 통과하는 통기성, 자는 동안 흘리는 땀의 흡수는 물론 말려주는 흡습성과 수분 발산성, 흡수한 열을 빨리 식혀주는 열 발산성이 좋아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인견은 100% 레이온으로 면이나 종이 등의 원료인 목재 펄프에서 추출한 천연섬유다. 통기성도 좋고 시원한 촉감이 특징이라 누빔이불, 홑이불, 파자마, 여름 속옷 등의 소재로 많이 쓰인다. 원래는 삼베, 모시같이 약간 까슬한 질감이지만 워싱(고온에서 삶는 공정) 가공을 거친, 좀 더 부드러운 인견이 인기다. 시원한 촉감 때문에 50~60대는 물론 전 연령층이 선호한다고. 요즘은 화려함보다는 깔끔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더 찾는다. 침구 전문 브랜드 이브자리는 시원하고 파란 색감의 현대적인 디자인을 더한 것과 은은한 회색빛과 하얀색이 조화롭게 배치된 인견 제품을 추천했다.
최근에는 원단의 촉감을 중요하게 여겨 100% 모달 소재도 많이 이용한다. 모달(modal)은 너도밤나무에서 추출한 원료를 사용한 친환경 소재. 실크 같은 부드러운 느낌은 물론 흡수성이 뛰어나 민감성 피부에 좋다. 60수로 평직한 아사 원단 조직으로 얇고 부드럽게 직조해 여름철에 사용하기 알맞다. 촘촘하게 누빈 여름 이불, 에어컨 바람에 보온성을 유지하기 좋은 얇은 차렵이불로도 선호한다. 원래도 부드럽지만, 더 고운 질감을 위해 워싱 가공했다. 모달 소재도 여름용에 맞게 파란색과 남색 계열의 색감 디자인이 많다.
뱀부는 대나무(bamboo)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친환경 소재다. 마, 린넨 소재와 같이 흡습성과 수분 발산성이 뛰어나고 촉감이 상당히 부드러워 자극적이지 않다. 대나무 자체에 항균, 항취효능이 있기 때문에 민감한 피부에 적합하다.
모시와 리플 가공 원단
모시와 함께 아마가 원재료인 린넨도 여름철에 자주 쓰이는 소재다. ‘라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모시는 삼베(대마)나 린넨(아마)에 비해 결이 곱고 치밀하다. 직물의 강도가 마 섬유 중 가장 높고 튼튼하다. 전통적으로 여름 한복에 자주 사용된 소재로 시원하며 통기성이 뛰어나다. 린넨은 은은한 광택이 있고 구김이 잘 가기 때문에 침구류나 의상에는 면 혼방으로 사용한다. 모시와 마찬가지로 통기성이 좋고 피부에 닿았을 때 감기지 않고 청량감이 느껴지는 소재다. 유니클로도 2019년 여름을 겨냥한 린넨 소재 제품을 선보였다. 가벼움과 자연스러운 구김이 인상적인데 부드러운 감촉은 물론 땀을 빠르게 흡수해주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도 쾌적하게 입을 수 있다. 시니어가 선호하는 차분한 색상은 물론 분홍과 노랑 등 발랄한 색상과 스트라이프, 체크 등 다양한 무늬와 디자인이 있다.
이 외에도 원단 표면에도 엠보싱 효과를 주어 몸에 달라붙지 않게 하는 리플 가공법이 있다. 주로 면이나 린넨, 모달 소재가 리플 가공을 통해 상품화된다. 단, 이 과정에서 가공을 위한 화학처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리플 원단을 선택할 경우 자연 소재 원단인지 따져봐야 한다. 리플 가공 원단은 피부에 닿는 면적이 적고, 몸에 감기지 않아 여름 침구는 물론 블라우스 소재 등으로 애용되고 있다. 까사미아의 모달 리플 소재 중에서도 연한 하늘색과 아이보리색 배치로 은은하고 시원한 감촉을 주는 제품이 인기가 높다.
옷 사이로 바람길 내는 냉감 의류
바깥 활동을 하는 동안 땀 흡수뿐만 아니라 통기성을 겸비한 기능성 원단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하나가 BYC 제품인 ‘보디드라이’다. 2019년에 나온 보디드라이는 시원한 성질의 냉감 원사에 땀과 습기를 빠르게 흡수하는 흡습기능과 건조기능, 그리고 자외선 차단기능을 강화해 활동성을 높였다.
유니클로도 최근 ‘에어리즘 심리스 V넥 브라 캐미솔’을 내놓았다. 봉제선이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디자인으로 얇은 겉옷을 입을 때 유용하다. 특히 ‘브라탑’은 따로 속옷을 착용할 필요가 없고, 소재와 디자인이 다양해 이너웨어부터 패션 아이템까지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고, 신축성이 뛰어나 활동하기도 편안하다. 단, 여성 심리스 제품의 경우 바지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서 단단히 보정하며 입을 것을 권한다.
“먼 길 오셔서 뭐라도 건져 가셔야 할 텐데 저는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한 땀 한 땀 공들여 바느질하듯 상대를 배려하는 목소리는 촘촘하고 결이 고왔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이 조각보를 구입해 소장할 만큼 경지에 이른 솜씨이지만 헝겊 자투리 갖고 잘 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이소라(53) 섬유공예작가.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을 앉아 바느질을 해도 지루하지 않다니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고수 아닌가. 그녀의 손바느질이 피어나는 공간을 들여다보니 제대로 놀아본(?) 사람의 방이 맞았다.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 조각 천이 수북이 쌓여 있는 낮은 나무 탁자, 바늘 바구니, 작고 오래된 분홍색 라디오 하나, 그리고 막 구상을 끝낸 듯한 조각보 도면 위로 감칠질한 조각 천들이 알록달록 놓여 있다.
삶의 공간은 주인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녀 방에는 유별난 포즈도 없고 포장된 풍경도 없다. 그저 반짝이는 것들에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한 사람이 앉으면 종종 시간을 잊어버리는 곳이다. 하루는 거실 한쪽에 쪼그려 앉아 매일 바느질만 해대는 이소라 작가에게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당신은 한 평짜리 인생이야.”
그러나 한 평짜리에서 시작된 그녀의 바느질은 10여 년 전부터 전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일 공예특별전, 프랑스 보졸레 섬유엑스포 등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 그녀의 작품이 걸려 있을 만큼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바느질 놀이가 좋았다
뭐든 만들어 남 주기를 좋아했다. 바느질의 매력은 퀼트를 배우면서 알았다. 누가 아이를 낳으면 손수 예쁜 이름 수놓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불도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한 바느질이 조각보로까지 이어질 줄은 그녀도 몰랐다.
“딸이 서너 살 되었을 무렵 남편과 주말 부부가 됐어요. 남편도 없고 아이가 일찍 자면 할 일이 없어 너무 무료한 거예요. 그때 문득 ‘아이가 다 커서 내 손을 안 타고 직장도 관두고 나면 난 뭘 해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대학원에 들어가 산업공예를 배웠어요.”
그러나 대학원 공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심지어 실크스크린을 공부할 때 맡게 되는 물감 냄새조차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김현희 자수 명장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하는 단기 강좌 정보를 접하고 서울까지 올라가 수강을 했는데 그 뒤 조각보 바느질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조각보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세 번 기초 강의를 듣고 그다음부터는 저 혼자 공부하며 바느질 기법을 터득했어요. 더 배우고 싶었지만 수강료가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냈거든요. 비록 혼자 하는 공부였지만 좋아서 하는 거라 열정이 넘쳤죠. 청주에 천연염색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염색을 조각보에 응용하면 좋겠다 싶어 배워뒀지요. 나중에 여러모로 도움이 됐어요.”
조각보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좋아서,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10만 원 어치 재료만 사면 몇 달 잘 놀 수 있어서” 바느질을 했다. 그런데도 좋은 결과들이 자꾸 이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점점 조각보의 세계로 그녀를 이끄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 옻칠을 적용해 모시의 단점 보완과 함께 개성 있는 조각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입상도 했다.
2007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구입했을 때는 뉴스 보도가 쏟아졌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청주시가 2년마다 개최하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사전홍보행사 일환으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한·미보자기-동서의 만남’ 특별 전시회가 열렸는데, 저명한 대학교수들 작품과 함께 출품된 50여 점 중에서 그녀의 작품이 박물관 관계자 눈에 띈 것이다.
“죽기 전에 개인전 한 번 열 수 있으려나 했는데 운이 좋았던 거죠. 당시 청주시 담당자가 특별 전시회에 참가할 작가 선정을 할 때 평소 조각보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배제했대요. 저로서는 특별한 기회가 된 거죠. 그게 인연이 되어 해외 전시회에 계속 참여하게 됐어요.”
조각보와 함께 써나가는 이야기
우리의 조각보는 조선시대 때 서민들이 자투리 천도 버리기 아까워 만들어 쓴 물건이지만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교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이소라 작가는 요즘은 생활문화가 바뀌어 조각보를 실생활에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의 전통 규방공예를 세계에 알리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강조한다.
“해외 전시회에 나가보면 외국인들이 우리 조각보를 보며 많이 놀라워해요. 기하학적 무늬가 아름답다며 감탄도 하지만 홑보자기의 바느질 앞뒤가 없는 게 굉장히 신기한가봐요. 믿기 힘든지 정말 손으로 바느질한 게 맞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바느질 기법으로 보면 별것 아닌데 말이죠. 서양의 퀼트는 홈질이 많고 조각보는 감칠질이 많아요. 그 차이로 보면 돼요. 조각보를 바느질할 때는 바늘땀을 뒤로 숨기기도 하지만 실 색깔을 달리해서 아예 장식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법도 써요. 서양 사람들은 그런 바느질 기법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죠.”
20여 년간 바느질을 해온 그녀의 손끝은 오래전부터 굳은살이다. 간혹 바늘에 찔려 고통스러워도 골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골무를 끼면 섬세한 바느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의자 위에는 똬리방석도 놓여 있다. 작업량이 많아 하루 10시간씩 앉아 있다 보면 엉덩이가 짓물러 사용하고 있단다. 그래도 여전히 손바느질이 고달프거나 지루하지 않다니 그녀의 조각보는 아무래도 유희의 물건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녀 스스로도 ‘놀이’에 적극 비유하곤 한다.
“저는 자투리 천만 있으면 하루 종일 잘 놀아요. 제 주변엔 골프 치는 지인도 있고 이틀만 집에 있어도 못 견뎌하는 친구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일 행복할 때가 일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때예요.(웃음) 뭔가 조몰락거리며 혼자 노는 시간을 정말 좋아해요.”
그러나 8000여 개의 조각 천을 이어 붙이고도 “어느 날 한번 세어보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놀이’라는 저 의미심장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놀이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이었을 결기의 시간들을 자꾸 헤아려보게 되는 것이다.
조각보가 그녀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생’이라는 답변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저는 조각보 만드는 사람이에요. 제 인생은 조각보를 떼어놓고는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어요.”
그녀가 보석처럼 발견해낸 이 황홀한 놀이가, 우연이 빚어준 조각보와의 필연적인 동행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지 궁금하다. 놀이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작품세계도 확대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혼자 있는 시간을 제대로 마주하는 이유다.
엄마는 요리솜씨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엄마의 요리가 최고인 줄 알았다. 주발에 담는 밥도 엄마만 세워서 담을 수 있고 세상의 맛이 엄마의 손끝에 다 있는 줄 알았다. 그 환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친구 엄마의 요리가 더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천성이 부지런해서 늘 무언가를 열심히 만드셨다. 학구열이나 실험정신은 타고난 것 같았다. 자식들이 다 출가하고 혼자 사실 때도 온갖 것을 다 만드셨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꼼꼼하고 질서정연했다. 늘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흥얼거리며 바느질을 하셨다. 손바느질로 하는 누비나 골무를 만들고 가끔은 조각 천에 수를 놓은 상보와 옷을 만드셨다. 밤늦도록 엄마의 손에 들려 있는 천이 아침에 일어나면 거의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신기해 자꾸 쓰다듬어보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장성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엄마가 말씀하셨다.
“네가 올해 몇 살이니?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니? 그러니 내가 얼마나 늙었는지 알겠다.”
그날 엄마가 장롱 정리하는 것을 지켜봤다. 치마저고리를 곱게 접어 사이사이에 마분지를 끼우고 좀약을 넣었다. 손으로 짠 모시저고리와 치마가 고왔다. 비단치마, 함경도식 고쟁이, 올을 뺀 상보. 시집 올 때 가져온 수놓은 베갯잇. 장롱에는 엄마의 일생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매년 빨고 햇볕에 말리고 곱게 접어 넣던, 그렇게 의식처럼 되풀이되곤 했던. 나는 엄마의 고쟁이와 검은 비단치마를 집어 들었다. 엄마는 ‘이거 저 주세요’ 하는 무언의 내 표정을 알아차리셨다. 비단치마는 원래 검은색이 아니었다. 여러 번 빨아서 옅은 색의 비단이 빛을 잃자 염색을 해서 입었는데 그 색마저 낡아 검은색이 된 것이다. 비단치마는 엄마가 30대부터 손바느질로 뜯고 만들기를 수없이 반복한, 엄마의 손에 길이 든 그런 옷이었다. 비단치마에서 어떤 기품 같은 것을 느꼈다면 과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네가 간직하렴.”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느껴졌다. 그 치마를 받고 신이 나서 출장 가는 길에 백에 넣어갔는데 마침 저녁모임이 있었다. 외국에선 한복을 입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서 허리에 걸쳐 치마끈을 동이고 위엔 단순한 니트를 입었다. 근사한 파티복이 되었다. 부드러운 촉감과 작은 무늬가 여성스러워 좋았다.
어느 날 인생 이모작을 잘 준비했다는 지인을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부분이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엔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또 죽을 때까지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 하기 싫은 일이나 시험을 위해 하던 공부에서 해방되었으니 허락된 시간을 누리자는 생각이었다.
인문학 책을 함께 읽고 나눌 그룹을 찾다가 독서클럽은 아니지만,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그룹이 있어 탐색 겸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보통은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 모두가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 글은 좋은데 강의는 엉망인, 작가 반열에 오른 분을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잠깐 들어본 강의가 맘에 척 달라붙어서 계속 듣게 되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주옥같은 박식함이 무슨 보석처럼 인생의 경험에 녹아 나오면 수업 내내 행복한 마음으로 강의를 경청하곤 했다. 3개월 12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주 1회 1시간 30분씩 듣는 강의였다.
수필을 쓰고 퇴고를 거치며 글쓰기를 연마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솔직한 표현들이 좋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따스함으로 가만가만 스밀 때는 저절로 눈이 감긴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수필을 외워서 문학회의 ‘연간 행사’로 무대에 올라 낭송하게 되었다.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엔 외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요령은 그냥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어느 단계가 되면 저절로 외워진다. 외우다 보면 작품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 독자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좀 힘들어도 얻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좋은 작품을 외우게 되면 글쓰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수적으로 발성, 호흡에 대해서도 기본 훈련을 하게 되어 발음이 정확해진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느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고, 무대 울렁증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열심히 외웠어도 보통 7분 정도 소요되는 중간에 잊어버리거나 어색해져서 진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한번은 남여 듀엣으로 아포리즘 고전 수필 낭송을 했었다.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신흠’의 아름다운 수필이었다.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으로 한가로움과 풍류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필자와 남자는 함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며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작은 몸짓까지도 맞추며 우린 무대 위 완벽한 커플로 탄생할 참이었다. 그는 감청색 양복을, 필자는 양반가의 여인답게 하늘색 모시 저고리와 연청색 모시 치마를 기품 있게 받쳐 입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인사도 맵시 나게 연습한 대로 잘했다.
이제 마이크를 숨소리 같은 부담스러운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절하며 낭창거리는 소리로 낭송을 시작했다. 그와 필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비의 멋스러움과 풍류를 살려가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갔다. 필자의 대사가 끝나고 그가 할 차례가 되었다. 시작을 잘하는가 싶었는데 아뿔싸! 이상하게 같은 대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두 번쯤 그러더니 소리가 끊겼다. 난감했다. 필자는 그의 대사까지 외우지 못했다. 스토리가 연결되는 글은 잊어먹어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만 이런 수필은 단락이 끊어져 있어 외우기도 어렵고 중간에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20개 정도의 단락을 각자 외우고 있었는데 단락의 시작을 찾아야 꼬이지 않고 술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는 순간 당황했는지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을 맺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혹시 잊었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해도 사람들은 반복이겠거니 생각하기도 한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별로 없다.
묵독이 아닌 낭독의 문화 즐기기
시는 글이 짧고 은유가 많아 청취자에게 전달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에서 나온 글이라 이해가 쉽고 공감이 잘된다. 그 대신 시보다는 외워야 할 분량이 많다는 어려움이 있다. 시와 비교해서 감정을 잘 살리면 즐거운 시간이지만 아니면 지루한 시간이 되기도 쉽다.
작품에 따라 무대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효과음악을 고르고 표정과 작은 몸짓도 연구하고 무대에 오른다. 작품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마치 새로운 연인을 만나듯 가슴이 뛰고 활기가 넘친다.
필자는 4년째 기획, 연출, 낭송을 즐겁게 하고 있다. 함께하는 회원(10명)과 1년에 두 번씩 공식무대를 만들고 외부 초청 낭송에도 응한다. 작가의 강연 때 그의 작품을 낭송해 강의를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꼭 문학단체가 아니라도 격조 있는 모임에서 옛 선비들이 시조를 읊듯 시나 수필 낭송을 원할 때도 있다. 종종 감동한 관객이 끝나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보람이다. 얼마 전 어떤 문학회 출판기념회에서 초청, 낭송을 했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그 모임 지도교수님의 대표작 낭송이 끝나자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 젖은 눈으로 다가와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 잘했다, 문우들은 그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작품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말했다. 낭송하는 시간은 마치 앞에 앉은 사람이 필자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얘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듯하다. 그래서 몰입하면 깊은 내면을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수입은 낭송 작품당 보통 20~30만원을 받는다.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해서 그리 주시는 것 같다. 필자는 현재 두 개의 작품이 예약되어 있다. 하나는 피천득 기념 강좌에서 선생님의 작품 ‘보스턴 심포니’를 낭송하고, 또 하나는 일현수필문학회 송년회에서 손광성 선생님의 ‘누나의 붓꽃’을 낭송하기로 되어 있다.
2011년 대전 유성구 금고동 ‘안정 나씨’ 종중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미라 4기가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안정 나씨’ 묘에서 출토된 미라 4기는 나신걸(1461~1524)과 부인 신창 맹씨(15세기 말~16세기 초), 그리고 나부와 부인, 용인 이씨가 각각 합장된 부부의 미라다. 이때, 무덤 안에 있던 조선시대 복식 150여점과 다양한 부장품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16세기 초의 의생활을 알 수 있어서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크다.
그런데, 당시 출토된 것 중에 아주 중요한 유물이 또 있다. 바로 나신걸이 부인인 신창 맹씨 묘에서 나온 편지인데, 이 편지는 현재까지 발견된 편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다. 한글이 1446년에 창제, 반포되었고, 한글을 반포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편지는 군관으로 영안도에 나가있는 남편 나신걸(1461~1524)이 고향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것인데, 영안도는 1470년부터 1498년까지 사용한 함경도의 옛 지명으로, 이 편지를 쓴 시점은 적어도 1498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편지 내용은, 군관 등 남성들이 입던 철릭(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을 보내달라는 이야기와 부인을 위해 분과 바늘을 사서 보낸다는 것, 그리고 “너무 농사에 힘쓰지 말라”는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물론, 편지를 고이 간직해온 것으로 봐서,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편지의 일부분이다.
‘안부를 끝이 없이, 수없이 하네,
집에 가서 어머님이랑 아기랑 다 반가이 보고자 하다가
장수가 혼자 가시며 날 못 가게 하시니 못 다녀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꼬.
또 내 삼베 철릭이랑 모시 철릭이랑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 보내소.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님과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필자의 남편도 ‘안정 나씨 문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500년 전의 조상도 이렇듯 아내에게 애틋한데, 필자의 남편은 그런 조상의 피를 물려받았을 만도 하건만, 무뚝뚝하기가 한이 없다. 남편에게 지금까지 편지는커녕, 메모 한 장도 받아 본 적 없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나씨 부인’ 맹씨가 한 없이 부럽기만 하다. 그래도 더 기다려 보면 필자도 남편에게 연서(戀書) 한 장 받아 볼 수 있을까? 혹시 연서(戀書)라도 한 장 받게 되면 액자에 넣어서 거실에 걸어 두었다가 무덤에 넣어 달라고 해야겠다. 누가 알겠는가! 혹시 500년 뒤에 출토 될지!
‘나씨 부인 김영선, 묘에서 연서(戀書) 나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