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강진 동구 밖 주막집의 옹색한 뒷방에 몸을 의탁하는 것으로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처음 그에게 쏟아진 건 냉대뿐이었다. ‘서학을 믿는 대역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그를 사람들은 전염병자 대하듯 배척했다. 유배의 시작은 그렇게 비참했다. 그러나 기이하도록 강인한 다산은 운명의 농간에 굴종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유배의 고난을 학문과 정신의 도약대로 삼아 오히려 일취월장했다.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18년 중 10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사무치는 고독을 피할 수 없는 게 유배다. 고결하고 개결한 풍모를 유지한 다산이었으나 때로 서러워 대성통곡을 했던가 보다.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취하여 산에 올라 목메어 우니/ 울음소리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지네.’
그러나 다산은 자폐적 감상이나 자기연민에 젖어 지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잠깐 외로움과 설움에 잠길망정, 그건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는 유배의 불운을 공부로 집어삼켜 해치웠다. 책상다리를 하고 일단 서책 앞에 앉았다 하면 일어날 줄 모른 다산이었다. 오죽했으면 방바닥에 눌려 닳은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겠는가.
이런 공부벌레가 드물다. 이런 기적적인 학문의 포식자가 다시없다. 이토록 초인적인 정진을 통해 다산은 이곳에서 학문과 사상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다. 다산초당은 이른바 ‘다산학’의 산실이며, ‘조선실학’의 태실이다.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해 자그마치 500여 권에 이르는 갖가지 경집과 문집이 이곳에서 생산되거나 기획되었다. 그 다산성과 품질의 우수성은 세상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산이라는 거목의 전모를 헤아리기란 어쩌면 가당치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얘기도 있지 않던가. ‘다산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다산을 아는 사람도 없다.’
다산초당은 원래 고산 윤선도의 가문인 해남 윤씨네 소유의 산정(山亭)이었다. 그런데 다산의 어머니가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이런 연고로 다산이 다산초당에 거처하게 됐던 거다. 다산초당은 중앙에 있는 본채 초당과 좌우편에 있는 동암과 서암으로 이루어졌다.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 쓴 편액이 있다. ‘정약용이라는 보배가 머문 산방’이라는 뜻을 지닌 이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다산보다 24세 연하였던 추사는 경학을 배우거나 차를 나눔으로써 다산과 교제하며 지냈는데, 편액으로 흠모의 마음을 전한 셈이다.
유배라는 궁지에 몰렸으나 다산은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과의 교유도 활발했다. 특히나 절친하게 지낸 승려 둘이 있는데, 저 아래 해남 두륜산 일지암에 머물렀던 초의선사와 여기 만덕산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이 바로 그들이다. 다산초당은 이렇게 학문 전당이자 담론과 우정이 오고간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진흙을 딛고 올라오는 연꽃처럼, 고통스러운 유배를 차라리 자양으로 삼아 삶다운 삶의 정상으로 날아오른 다산의 행장이 선연하게 서린 유적지라는 점에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다산초당의 특별한 가치가 또 하나 있다. 다산이 이곳에 조선 원림의 상징이라 일컬을 만한 정원을 조성했다는 게 그렇다. 유배객이 정원을? 언뜻 낯설게 들린다. 다산은 수원의 화성(華城)을 설계한 건축공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초당 일곽의 조경에 무신경했을 리 없다. 유배의 갑갑한 심사를 해갈하기 위해서라도 정원 조성이 필요했을 테다. 다산은 우선 연못을 파고 뒷산의 물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갯가에서 모아 가져온 괴석들로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놓고 ‘진짜 산보다 더 낫다’고 흡족해했다. 연못 주변엔 관상수를 심고 곳곳에 화단을 만들어 화초를 가꾸었다. 다산의 시를 보면 초당에 심은 식물 수가 30종에 달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정원이 다산 생시의 바로 그 정원?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와 비교하면 더러 다르다. 예컨대 원래 연못은 상지와 하지 두 곳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뿐이다. 초가였던 집들을 기와집으로 복원한 건 내내 입길에 오르고 있다.
답사 Tip
다산초당 들머리에 다산박물관이 있다. 다산의 친필 간찰과 다양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다산초당에서 천년고찰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도 빼어나다. 다산이 자주 걸었던 길이다. 거리는 약 1km.
사의재 (四宜齎)
꽃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죽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슬픔 어이 견디리...
‘그늘이 되어주시던 주상이 승하하시고 나니 이 한 몸 간수할 곳이 없구나. 주상이야말로 나에겐 꽃이셨네. 꽃 잎인 한 분 형님은 순교하시고, 다른 한 분 형님은 따로 떨어져 다른 곳으로 유배되고...... 견딜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의 창이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그의 형들과 함께 신유사옥(1801년) 때 유배를 당한다. 그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둘러싼 세상은 온통 절망이었다. 유배가 그렇듯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무의미해 보였다. 그의 나이 40세.
그는 길을 잃었다.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닌 마음의 길, 인생의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그가 선택한 것은 미친 듯이 걷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헤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라는 상실감이기도 했고, 끝나버린 인연의 아픔을 곱씹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치밀하게 준비했던 인생 계획표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진에 온 정약용의 초기 생활을 지켜보던 주막의 나이 든 주모가 어느 날 그에게 한마디 했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살려고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부터 그는 변했다. 스스로 생활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사소한 기대를 통해 우선 현실을 극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은 의미 부여와 노력을 통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태도를 바꾼 순간 다산은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4년 동안 그는 그곳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삶의 의미를 철저하게 현실 속에서 찾은 다산에게 이 시기는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묵묵하게 성실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해서 본인이 묵은 방을 ‘생각을 맑게, 용모를 단정히, 말은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라는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로 지었다.
본래 경세제민을 실천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이때의 시간이 그의 명저 ‘목민심서’를 구상하는데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강진군에서는 다산의 뜻을 기리고자 그가 유배를 와서 초기에 머물렀던 사의재를 복원하여 한옥 체험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으로 구성하였다.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사의재가 있는 위치가 강진읍의 중심지여서 걸어서 ‘영랑 생가’와 ‘세계 모란공원’도 둘러볼 수 있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함과 함께 마루 턱에 앉아 고즈넉한 가을밤 달구경 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산의 삶의 지혜가 울려오는 밤이 된다.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로, 어머니가 문인인 윤선도의 딸이다. 학문을 중시하는 외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왔지만, 외가인 해남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다산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남의 외가에는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보관해 놓는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배기간에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는 외가에서 마련해준 이곳 다산초당에서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나는 1818년까지 지냈다.
다산은 유배를 온 신분의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목민심서’,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 ‘흠흠신서’ 등 실학과 조선 유학, 법의학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썼다. 그의 생애 업적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에게 학문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다. 기본이 유학자이다 보니 먼저 자기 성찰과 세계 인식의 기준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실학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그토록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던 것이다.
다산의 유배 생활로 인한 세상과의 단절을 메꿔준 이는 벗이자 스승이며 제자인 ‘혜장선사’였다. 그들은 대화하고 공감하며 화합하기 위해 초당 뒤 만덕산 백련사 가는 오솔길을 무수히 걸었다. 제한된 세상과의 통로였지만 소나무 숲길, 동백꽃 길, 차 밭으로 이어진 이 길을 걸으며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터득했다.
가두어진 하루하루는 생의 의미를 사라지게 하는 물리적 장치다. 하지만 다산은 초당 지붕 끝에서 흘러내리는 가을비 소리에 번뇌를 멈추고, 약천(藥泉)에 달인 차로 속기(세속의 기운)를 씻으며 스스로 인생의 격조를 올렸다. 그가 위대한 이유다.
다산초당은 노후화되어 붕괴한 것을 1957년 복원한 것이다. 소나무 뿌리가 뒤엉킨 소나무 숲 ‘뿌리의 길’을 800m 정도 올라가면 고적한 유배 생활의 정취가 서려 있는 초당이 나타난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정석 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ㆍ 차 달이는 부뚜막)’ 등을 초당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초당으로 가는 숲속 길에서부터 절제되고 제어된 기운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은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다산 학문의 핵심과 통하는 것이다.
가을이어서 그런지 벌써 겨울이 기다려진다. 아마, 동백꽃 핀 다산초당 숲길을 걷고 싶어서 그런지 모른다.
백운동 원림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의 감옥과 유배 생활을 마친 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Notes from a dead house)”이라는 장편 소설을 썼다. 그는 감옥과 유배 생활을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집’으로 표현했다. 그만큼 유배의 시간은 고통이고 지옥 같은 생활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본인 문학의 화두로 삼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유배 생활을 통해 무엇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을까? 그것은 ‘단절’이었다. 단절은 고립이고 대립이며, 증오와 이기주의의 시작이다.
유배지의 폐쇄적 환경인 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다산이 선택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실천적 사랑과 공상적 사랑으로 나뉜다. 유배지에서 다산의 실천적 사랑은 후학 양성과 학문 탐구다. 공상적 사랑은 초의선사, 이시헌 등과의 교류와 월출산 줄기를 중심으로 한 자연과의 만남이었다.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강진의 자연을 만난 곳이 백운동 원림(園林)이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린다.
17세기에 이담로가 조성한 이곳은 자연과 인공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균형 잡힌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집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마당의 상지와 하지를 거쳐 아홉 굽이 휘돌아 나가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의 구조를 갖추었다. 화단에는 소나무, 대나무, 국화, 난초 등이 자라고 있다.
다산은 그림을 잘 그리는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 스스로는 12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칭송하는 시를 읊어 시와 그림을 묶은 ‘백운첩’을 남겼다.
백운첩에 담긴 12곳이 ‘백운동 12 승경’이다. 1경: 옥판봉 (절경의 월출산 산봉우리) 2경: 산다경 (원림입구 동백나무 숲길) 3경: 백매오 (집 주변 언덕의 매화나무) 4경: 홍옥포 (대문 앞 단풍나무와 작은 폭포) 5경: 유상곡수 (마당의 여섯 굽이 물굽이) 6경: 창하벽 (다산이 붉은 먹으로 쓴 푸른빛 석벽) 7경: 정유강 (언덕 위, 용 비늘처럼 생긴 소나무) 8경: 모란체 (본채 아래 3단의 화단) 9경: 취미선방 (고즈넉한 세 칸의 초가 사랑채) 10경: 풍단 (창하벽 위 단풍나무) 11경: 정선대 (창하벽 위 정자) 12경: 운당원 (왕대나무 숲)
강진의 자연을 정원에 담은 이곳에서 다산은 견뎌냈다. 유배지에서의 견뎌냄은 사랑의 힘이었다.
강진 백운동 원림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백운동 원림에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 옆에 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우거진 숲길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늘 그렇듯이 숲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신선한 자연의 공기가 온몸을 깨운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가을 햇살이 눈 부시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대문 앞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서려 있는 녹색 이끼는 자연의 시간이다. 낮은 담벽을 타고 올라오는 넝쿨은 수줍은 듯 여행자를 훔쳐본다.
곧게 뻗은 대나무 사이로 청정한 가을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앞마당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고 싶다. 다산처럼 건너편 차 밭에서 실려 오는 가을내음을 맡으면서 자연과 통(通)하는 시간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꽃이 핀다. 온갖 봄꽃들, 활짝 몸을 연다. 그러니 온 산야가 후끈하다. 백목련, 벚꽃, 동백꽃, 유채꽃, 개나리, 진달래…. 붉거나 희거나 샛노란 꽃들의 미색에 쓰러질 것 같다만 정신은 깬다. 순결한 꽃들의 성(聖)으로 내 안의 속진(俗塵)이 헹궈진다. 봐라, 절정이다! 꽃들은 그리 속살거린다. 잘난 척하는 바 없이, 뭘 내세우는 기척 없이, 수줍은 듯 바람결에 하늘거리며 자연스러운 제 생태에 당당함을 슬며시 웅변한다.
숲길을 오르자니 이내 다산초당. 기와를 입었으니 초당이 아니고 와당이겠으나, 숲속 산방이라 외져 수수롭다. 지금 이곳에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지만 다산 정약용, 그는 진정 꽃핀 사내였다. 꽃다운 한살이를 누리고 떠난 인물이었다.
꽃다운 한살이? 이는 웬 거친 은유? 다산은 다산초당에서의 10년을 포함, 강진 땅에서 도합 18년간 유배를 살았다. 말하자면 그는 이 적막한 숲에서 ‘지옥의 한철’을 살았다. 그러나 기이하도록 고등한 이 인물은 운명의 농간에 굴복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 유형 체험을 창작의 퇴비로 변용했듯이, 다산은 유배의 고난을 정련해 학문의 보검(寶劍)을 벼렸다. 그는 유례가 드문 운명의 연금술사이자 뛰어난 곡예사였다. 거대한 학문의 포식자이자 불굴의 강철 인간이었다.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를 비롯해, 자그마치 500여 권에 이르는 각종 경집과 문집이 다산초당에서 생산되거나 기획되었다. 독을 약으로 삼아 개화 만발한 특유의 기화(奇花). 후세에 쏟아진 갈채는 응분의 몫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꽃핀 다산의 한살이는 그 자신의 영광이자 시대의 쾌거였다.
유배객 신세에 고독인들 없었으랴. “봄잠 자고 술에 취해 사립문 닫았노라”, 다산은 그리 시를 썼다. 술과 시로도 누르지 못할 외로움이 들솟으면 숲을 배회했을 테지. 궁지에 몰릴수록 자연이 살가워지는 법. 만고에 믿을 만한 벗인 자연과 교유하며 시름과 갈증을 다독였을 게다. 나는 지금 다산이 즐겨 걸었다는 숲길을 밟아 나가고 있다.
만덕산 허리춤을 빙 에워 도는 숲길이다. 휘거나 꺾이거나 오르내리거나, 다채롭게 변주하는 오솔길이다. 숲을 이룬 수종 역시 다양하다. 흔전만전하기론 소나무·참나무·물푸레나무·조릿대·소사나무이지만, 남도 특유의 상록 교목인 동백나무·후박나무·비자나무·차나무 또한 숲을 채워 식생의 향연을 펼친다.
유배객 다산에겐 절친하게 지낸 승려 둘이 있었다. 저 아래 두륜산 일지암에 머물렀던 초의와 여기 만덕산 백련사 주지였던 혜장이 바로 그들.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두 스님은 연상의 다산을 스승으로 섬겼다지. 특히나 혜장은 다산의 고달픈 유배생활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더란다. 둘의 학문적·사상적 교류 또한 흐벅진 것이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1km 남짓한 숲길. 이 길이 바로 다산과 혜장이 만나고 통하고 논하고 배운 길이었다. 당대의 걸출한 석학과 선승이 교유한 ‘유(儒)·불(佛) 소통의 크로스로드’였다. 다산의 고독과 사색이 서린 길이기에 ‘다산의 철학 산책로’라 이를 수도 있겠지.
숲길 막판엔 백련사가 있다. 절 앞 저만치에서는 구강포 바닷물이 너울거린다. 꽃빛 낭자하게 번진 뒤편 만덕산은 젖을 내주는 어미의 표정을 지은 채 산사를 와락 보듬는다. 그리고 산사의 옆 자락엔 붉은 꽃초롱 총총! 동백꽃, 지천으로 흐드러져서다. 백련사 동백숲엔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있으며 수령 300년이 넘었다는 노거수들도 많다. 주름과 검버섯, 생채기와 옹이에 뒤덮인 거목들 가지마다에 붉디붉은 꽃이 피어 회춘의 일락(逸樂)을 구가한다. 동백 꿀을 탐하는 습성이 있어 마냥 동백숲에서 지지구재재구 노래하는 저 새들은 동박새.
이채로운 건 동백숲 안에 산재하는 석탑과 부도들이다. 이끼 낀 저 수려한 석물 사위로 동백꽃 향불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해서, 숲 안은 법당처럼 그윽하며, 불화(佛畫)처럼 장엄하다. 옛사람 납신다. 이 요요한 봄날의 동백꽃 제전을 바라보다 휘적휘적 숲 밖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환(幻)으로 오신 다산. 그는 동백숲이 못내 그리울 테고, 나는 외람되이 그가 그립다.
독기 탓에 추위에도 옷을 벗게 되나 (衣緣地瘴冬還減)
근심이 많으니 한밤 술은 되레 느네 (酒爲愁多夜更加)
그나마 나그네 시름 덜어주는 한 가지 (一事纔能消客慮)
동백이 설도 되기 전에 활짝 피었네 (山茶已吐臘前花)
1801년 겨울, ‘조선 최고의 지식인’ 다산 정약용이 중년에 막 접어든 39세 나이에 ‘하늘에 날리는 눈처럼 북풍에 떠밀려(北風吹我如飛雪)’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수찬, 좌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 급사 후 천주교도로 몰려 저 멀리 남녘땅까지 쫓겨난 것이지요.
죄인 신세가 된 다산을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으나, 다행히 강진에서 한 노파가 안쓰럽게 여겨 집을 내주고 밥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다산은 당시 ‘강진에 내려와 밥집에 기거하던 시절(南抵康津賣飯家)’의 심경을 ‘객중서회(客中書懷)’란 글로 남겼는데, 한겨울 붉게 핀 동백꽃이 곤궁했던 유배생활에서 마음의 큰 위안이 되었나봅니다. 지금도 겨울이면 매서운 강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경기도 남한강가에서 나고 자란 다산에게는 그야말로 설 명절도 지나지 않은 동지섣달에 붉게 핀 동백꽃이 생소하면서도 각별한 볼거리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로부터 39년 뒤인 1840년 겨울, 제주도로 유배된 ‘조선 최고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가 정월 그믐께부터 3월 사이 제주도 마을마다 동네마다 핀 수선화를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고 격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말처럼 ‘조선 최고의 지성’ 다산과 추사 선생에게는 ‘겨울꽃’ 동백과 수선화가 바로 피안의 창이 아니었을까요? 이렇듯 동백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으로 유명한데, 시인 박홍점은 ‘동백꽃’이란 시에서 “봄부터 맺었던 동백이/ 하필 설날 아침에 터졌다/… 따순 동백꽃 두 송이/ 아직 천방지축인 아이들과 둘러앉아/ 왁자지껄 세배를 한다”며 다산과 마찬가지로 동백이 설을 전후한 시기에 꽃망울을 활짝 연다고 꼬집어 이야기합니다.
동백(冬柏)이란 한자 이름은 한겨울에도 잣나무나 측백(側柏)나무처럼 잎이 푸르다고 해서 생겨났는데,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니 잣나무보다 낫다(亦能開雪裏 細思勝於栢)”면서 “동백이란 이름이 옳지 않다(冬栢名非是)”고 일찍이 주장한 바 있습니다. 다산이 말한 산다(山茶)가 곧 동백인데, ‘본초강목’에는 산다와 산다화(山茶花)로 기록돼 있습니다. 학명의 종명에 일본을 뜻하는 ‘자포니카(japonica)’가 쓰일 만큼 일본 전역이 주요 원산지인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와 중국, 타이완에서도 폭넓게 자생하는, 동아시아의 대표 식물이라는 게 식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동백나무는 대표적인 조매화(鳥媒花)입니다. 벌·나비가 거의 없는 늦가을부터 이른 봄 사이 꽃이 피기에, 곤충보다는 새에 의지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이지요. 특히 새는 사람의 눈처럼 붉은색을 붉게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백꽃은 이런 새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 붉게 더 붉게 타오른다고 합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의 농밀한 꿀을 빨면서 꽃가루받이를 돕는 새인데, 그 이름도 동백나무에서 따왔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를 비롯해 오동도와 거문도 등 남해 섬과, 동으로는 울릉도, 서로는 대청도와 백령도 등 섬 지역에서 특히 많이 자란다. 내륙에서는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서천의 마량 동백나무숲, 부산의 동백섬 등이 동백나무 군락지로 유명하다. 이름난 군락지는 아니어도 충청 이남의 웬만한 산사(山寺) 주변에 동백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는 걸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방화림(防火林)으로 활용되어온 결과로 추정된다. 제주의 올레길은 한겨울 동백꽃을 완상하는 최고의 길 중 하나다. 제주의 숲과 골짜기, 마을과 골목을 찬찬히 걷다 보면 키가 10m 넘는 자생 동백나무는 물론, 수십에서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룬 군락지, 나지막한 현무암 담장 위에 올라앉은 동백나무 등 다양한 형태의 나무와 붉은 꽃송이를 만날 수 있다. 강진의 다산초당 옆 작은 연못가에서도 고목은 아니어도, 수십 년 된 동백나무에 핀 꽃 몇 송이를 만날 수 있다.
2014년 새해가 밝았다. 금년 1월은 예년에 비해 큰 추위 없이 포근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이즈음부터 남쪽 지방에서는 때 이른 붉은 동백이 한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하얀 눈이 쌓인 나뭇가지 사이로 붉게 핀 동백과 푸른 잎사귀는 삭막한 겨울을 아름답게 빛내준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수많은 문인들이 한겨울의 세찬 눈보라를 견디고 피어나는 동백을 예찬했다.
동백은 흔히 자생 동백나무의 꽃을 일컫는 말이다. 제대로 표현을 하자면 ‘동백나무 꽃’으로 표기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멀리서 보는 동백나무 꽃은 짙은 녹색 잎에 가려져 그 화려함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붉은색 꽃잎과 희고 노란 꽃술이 완벽하게 조화된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동백나무는 꽃만 아름다운 식물이 아니다. 동백나무 종자로부터 얻는 불휘발성의 동백기름은 잘 굳지도 않고 강한 향기가 없어 예전부터 생활에 널리 이용됐다. 질 좋은 식용유는 물론이고 약용유, 화장유, 등잔기름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변변한 여성용 화장품이 많지 않았던 옛날에는 최고급 머릿기름이나 목욕 후에 바르는 향장유로 사랑받았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백기름에는 건강에 유익한 팔미트산, 스테아른산, 올레산, 리놀렌산 등의 지방산이 올리브유 이상으로 포함돼 있다고 밝혀졌다.
차나무와 동일한 차나무과에 속하는 동백나무의 어린 잎은 녹차 대용으로 마셔도 좋다고 한다. 동백나무차는 맛도 좋고 열탕으로 우려낸 차 추출물에는 다양한 종류의 항산화 물질과 항암 활성물질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백나무 목재는 담황색을 띠고 조직이 치밀하여 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사람 손을 많이 타는 다식판, 장기 알, 주판 알, 악기, 얼레빗 등을 비롯해 절에서 사용하는 목어, 견고한 농기구나 목공구를 제작하는 데 사용됐다. 또 동백나무로 구운 숯은 단단하고 그을음이 전혀 없으며 화력이 오래 가기 때문에 옛날에는 화로에 사용하거나 찻물을 달이는 데 이용됐다. 말린 동백나무 꽃봉오리는 ‘산다화’라 하여 한방에서는 귀중한 생약으로 이용하고 있다. 일 년 내내 번쩍이는 녹색 잎이 무성한 동백나무는 불에 잘 타지 않기 때문에 남부지방에서는 방화수로 많이 식재했다. 지금도 오래된 사찰 주변에는 인위적으로 식재한 것으로 보이는 동백나무 숲이 잘 보존돼 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북 고창 선운사, 전남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 등의 절 주변에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꽃도 아름답고 쓸모가 많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오던 동백나무가 어느 순간에 ‘일본을 상징하는 식물’ 혹은 ‘왜색(倭色)을 띠는 식물’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점차 우리와 멀어지게 됐다. 심지어는 1964년에 가수 이미자가 발표해 무려 35주 동안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하고 당시에 10만장의 음반이 판매됐던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의 ‘동백아가씨’라는 대중가요는 왜색풍이라는 이류로 한동안 방송이 금지되기도 했다.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동백나무의 자생지가 일본으로 알고 있다. 식물지리학적으로 일본에는 광범위하게 넓은 지역에 동백나무가 분포하고 있다. 또 일본인들이 동백나무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포 면적은 일본에 비해 적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름다운 동백나무가 흔하게 자생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동백나무는 위도상 가장 북쪽에 분포해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많은 학술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동백나무 분포 북한계선에 자생하는 한국의 동백나무는 성질이 강건해 혹독한 환경 하에서도 잘 적응하고 다양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선입관 때문인지 아직까지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나라의 동백나무는 주로 따뜻한 남부지방의 해안가에 많이 자생한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울산의 목도에서부터 남해안 일대 및 서쪽의 인천시 대청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것이 자생 동백나무이다. 해안가뿐만 아니라 기후가 온화한 남부지방의 상록수림에도 널리 자라는 수종이 동백나무이기도 하다.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귀중한 우리의 자생 식물자원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 안된다. 각국에서 21세기의 식물유전자원은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는 국부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의 자생 동백나무는 세계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알리고 우수한 형질을 개발하여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하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자생 동백나무에 대한 오해를 씻고 보전과 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