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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의 최고 특산물은 풍기인삼이다. 매년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 축제에선 조선의 문신이자 도학자인 주세붕을 기리는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어떤 연유로? ‘풍기인삼의 아버지’랄까, 풍기인삼 재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주세붕이다. 당시 백성들은 나라에 산삼을 캐다 바치느라 고생이 자심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주세붕이 소백산 산삼 종자를 통한 인공 재배에 성공한 뒤 기술을 보급했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군수 노릇도 이쯤이면 최고봉이다.
주세붕의 명민한 행장은 또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조선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 백운동서원은 얼마 뒤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변신, 마침내 영주라는 작은 고을을 사림 집합소로 띄워 올렸다. 조선 말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00여 명. 그래 오늘날까지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 불린다.
백운동서원의 후신인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이 주도해 설립했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1549년 조정에 편액과 더불어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하길 요청했는데, 명종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열렸다. 입학 정원은 30명. 소수서원의 기틀을 잡아나간 건 퇴계였다. 천하의 퇴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알조다. 그는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 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학문을 할수록 길이 멀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기 검증에 엄격했다. 그러하니 서원 운영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는가? 학칙은 엄준해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수신(修身)엔 관심 없고 앉으나 서나 과시(科試)에 붙을 궁리만 하는 유생은 바로 쫓겨났다.
담장 사이로 난 출입문을 들어서자 소수서원의 내경이 좍 펼쳐진다. 평편한 터 곳곳에 다수의 건축물이 있어 조선 최고의 서원다운 위용을 과시한다. 크게 보면 학문을 익히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자연경관에 기대어 머리를 식히며 쉴 수 있는 유식(遊息) 공간은 담장 밖 외부에 조성했다.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으로 가장 큰 규모를 지녔다. 여기엔 ‘백운동’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소수서원의 시발이 백운동서원에 있다는 걸 잊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강학당 뒤편엔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와 직방재, 유생들이 기거한 지락재와 학구재를 배치했다. 유생들의 기숙사는 교수들의 숙소보다 작고 낮게 지어 흥미롭다.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게 도리라는 암시를 담은 구조일 터다.
책을 보관한 장서각 앞뜰엔 정료대가 있다. 밤이면 관솔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힌 일종의 가로등이다. 사람들은 일쑤 서원을 따분한 곳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라. 겹겹의 의미와 개성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소수서원의 모습은 여느 서원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 구성을 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조선 서원들은 통상 중국식 배치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쪽에 학당, 뒤쪽에 사당을 둠) 양식을 도입했다.
반면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 우측에 학당, 좌측에 사당을 둠) 형식을 구사했다. 아울러 건물들이 윷판에 윷가락 흩뿌려놓은 듯 헐겁게 널려 있다. 따라서 위엄을 갖춘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 사적인 대저택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소수서원의 이 활달한 구조는 사액서원의 효시로 등장, 참고할 만한 어떤 범례나 전형을 전제할 여지가 없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경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이제 냇물과 야산이 어우러진 유식 공간이다. 물 좋고 산 좋으면 정자가 필수 품목. 서원 정문 코앞에 있는 경렴정은 물소리로 귀를 씻기 좋은 정자다. 다소곳이 아담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현판은 두 개다. 해서체 현판은 퇴계가 썼고, 초서체 현판은 퇴계의 제자이자 초서의 달인인 황기로의 글씨다. 퇴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현판 글씨를 쓰던 황기로의 붓이 파르르 떨렸다던가. 흠모하는 스승의 눈길만으로도 레이저 맞은 듯 주눅 드는 게 제자다. 냇물 건너편 둔덕엔 퇴계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정자 취한대가 있다. 서원 들머리에 조성된 노송 숲도 빼어난 경관 요소다. 수백 년 수령의 노거수들이 끽해야 100년 안짝을 머물다 세상을 지나가는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노송들을 일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사시사철 푸른 솔의 기개 역시 공부감이라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소나무들이 서원 쪽으로 갸웃이 고개를 들이밀고 청강하는 품새를 연상해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학문의 바다 소수서원에선 노송도 학동으로 불려간다.
전통건축의 고전, 무량수전
이제 천년고찰 부석사를 찾아간다. 소수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영주시의 고품격 문화유산으로, 부석면 봉황산 자락에 있다. 산기슭을 타고 한참 이어지는 소로 끝자락에 닿자 부석사가 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막이 오르면서 무대가 펼쳐지듯이. 이렇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경사면과 구릉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터에 들어앉은 건축물의 조화미와 세련미가 매우 빼어나기 때문이다. 부석사 전각들을 일컬어 ‘한국 전통건축의 고전’이라 하는데 이게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부석사에서 천상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를 느낀다. 미학으로 간을 친 건축적 맛과 멋을 음미하는 사이에 불교적 상상력까지 나래를 펴는 셈이다.
부석사의 수려한 전각들 중에서도 뛰어난 건 무량수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는 법당이다. 고풍스러운 정취가 짙게 묻어난다. 아담하고 단아한 봉정사 극락전의 구조미가 우수하지만, 건물 규모나 법식의 완성도에선 무량수전이 한 수 위다. 무량수전 불단에 모신 소조여래좌상도 걸작이다. 한국의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불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이한 건 불상이 봉안된 위치다. 통상 법당 중앙 정면에 불상을 두지만 이곳에선 측면인 서쪽에 있다. 이런 배치법을 취한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소조여래좌상을 서방정토의 부처로 추정해 서쪽을 바라보게 배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려나 소조여래좌상의 상호에 기품과 위의가 넘쳐 눈을 뗄 수 없다. 숨소리 새어 나올 듯 입매는 생생하고, 눈은 반쯤 내리떠 그윽하다. 올려다보면 호방한 표정이고, 옆으로 보면 냉엄한데, 물러나며 돌아보자니 연민이 어린 얼굴이다. 이렇게 각도에 따라 기색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광 역시 가슴으로 들이친다. 저 멀리에서 출렁거리는 산군(山群)의 파노라마가 장엄한 화엄 세상의 축약도로 비쳐서.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고장”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우선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의 문신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퇴계가 소수서원을 설립해 학풍을 일으키고 수많은 선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선비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역시 선비 정신을 중심 가치로 삼고 산다.
“조선시대 영주에선 4000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영주에 살면서 지역 풍토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나쁜 짓을 삼가고, 조상과 문중에 부끄럽지 않은 처세를 하는 게 좋은 삶이라 여기는 이들에 의해 올바른 지역 정서가 형성된 측면이 여실하다. 다시 말해 영주는 살기 좋은 곳이다. 범죄 발생률도 낮다.”
김 원장은 독서 애호가라고 들었다.
“난 소백산 자락에 산다.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좋은 글을 읽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게 없더라.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덕분에 시집을 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다. 2023년엔 좋은 글들을 뽑아 엮은 책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출간했다.”
어디를 가나 과욕과 과속이 넘치는 세상이다. 영주라고 크게 다를까 싶은데.
“세상은 어지럽지만 올곧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동네에 옳고 그름을 아는 선비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 좋은 풍토가 유지될 수 있다. 영주엔 다행스럽게도 선비 정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들이 아직 많다. 내가 아는 영주 사람들은 다들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도 충실하다.”
영주엔 명산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은 어떤 산이라 보나?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예부터 흉년이 들어 막막할 때 영주 사람들은 된장 한 종지 들고 소백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해 생계를 해결했다. 소백산은 영주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물심양면으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산이다.”
좋아하는 명문 하나를 소개한다면?
“‘겸손함은 하늘과 통한다’는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산다. 젊을 때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많았다. 그런데 독서를 하며 자신을 꾸준히 다스리면서 사람이 변했다. 책이 곧 스승이었다.”
영주문화원을 통해 성취한 건 어떤 것이 있나?
“‘영주근현대사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역사는 보통 이름난 사람들 중심으로 쓰인다. 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게 아카이브 작업에 뛰어든 동기다. 2년여 동안 5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일을 완결했다. 큰 상도 받았다.”
문화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보나?
“첫째는 젊은 피의 수혈이고, 둘째는 열악한 예산 사정을 개선하는 일이다. 둘 다 난제지만.”
●Exhibition
◇수구다라니, 아주 오래된 비밀의 부적
일정 1월 28일까지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다라니’는 부처의 가르침 중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주문을 말한다. 이 가운데 ‘수구즉득다라니’라고도 불린 ‘수구다라니’는 말 그대로 외우는 즉시 바라는 바를 모두 얻을 수 있다고 여겨져 삼국시대부터 널리 유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염송 외에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불상이나 탑·무덤에 봉인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특별전 ‘수구다라니, 아주 오래된 비밀의 부적’을 통해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구다라니와 금동 경합(경전을 넣어두는 상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고대 인도어인 범자로 쓰인 것과 한자로 쓰인 것, 총 두 개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입수한 유물로, 경주 남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다라니 두 개가 한 종이에 같이 배접된 직사각 형태였다. 이후 보존 처리를 거치면서 각각 분리 복원해 범자(29.7×30.3cm)와 한자(29.5×30.9cm)가 수구다라니의 원래 형태인 정사각 모양을 찾았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다라니에 대한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이어져 고대 불교 문화의 진면목을 좀 더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황영성 : 우주 가족 이야기
일정 2월 18일까지 장소 전남도립미술관
황영성 작가의 1950년대 말 초기 구상회화 작품부터 2000년대 입체 작품과 최근 작품까지 총 110여 점을 선보인다. 그의 회화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가족’이다. 소박한 시골집 가족에서 대자연의 뭇 생명들로 확대되고, 세상 만물의 공생을 담은 우주 가족으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족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에 바탕을 두면서 세상과 화폭을 잇는 그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 관장은 “황영성 화백은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원로 작가로, 국내외 다양한 지역을 오가며 예술에 대한 쉼 없는 도전과 열정을 보였다. 이번 초대전을 통해 만물에 대한 포용과 인류애의 가치를 느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Stage
◇노트르담 드 파리
일정 1월 24일 ~ 3월 24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윤금정
출연 정성화, 양준모, 윤형렬, 유리아, 정유지, 솔라, 마이클 리, 이지훈 등
프랑스 3대 뮤지컬로 꼽히는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98년 프랑스 초연 이후 전 세계 23개국, 9개 언어로 번역되어 1500만 명 이상 관람한 대작이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며, 15세기 파리의 혼란한 사회상과 부당한 형벌 제도, 이방인들의 소외된 삶을 보여준다. 이번에 6년 만에 한국어 버전이 귀환해 관심을 받고 있다. 그에 걸맞은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데, 주인공인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역은 정성화, 양준모, 윤형렬이 연기한다. 추악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에스메랄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다.
◇스쿨 오브 락
일정 1월 12일 ~ 3월 24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로렌스 코너
출연 코너 글룰리, 사미아 로즈 어피파이, 알라나 에스피널, 마키시그 아키우미, 사무엘 빅모어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쿨 오브 락’이 5년 만에 내한 공연을 펼친다.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은 로커답지 않은 외모로 밴드에서 쫓겨나고 집에서도 구박받는 듀이가 친구 대신 명문 사립학교 대리 교사로 위장 취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듀이 역의 코너 글룰리는 “한국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줘서 다시 올 수밖에 없었다. 2024년을 함께 즐기자”고 전했다. 평균 연령 11.5세의 아역 배우 17명 또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 서울 공연은 3월 24일까지 열리며, 4월부터는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일정 1월 20일 ~ 3월 10일
장소 국립정동극장
연출 민새롬
출연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네 번째 공연으로 돌아와, 지난 시즌 참여했던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네 명의 배우가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난다. 1인극 형태로, 불의의 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은 19세 청년 ‘시몽’의 심장이 51세 여성 ‘끌레르’의 몸에 이식되는 24시간의 과정을 그린다. 한 명의 배우가 시몽,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 남겨진 가족, 장기이식 수혜자 등 총 16개 캐릭터를 연기한다. 장기기증 24시간의 기록을 다양한 인간들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극은 삶과 죽음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인간의 과거는 문자를 사용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문자 기록이 남아 있는 시대는 몇 천 년에 불과하다. 그보다 훨씬 오래된 700만 년 전 인간의 시간은 기호나 기록은 고사하고 삶의 희미한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엉성했던 시절이다. 김상태 고고학자는 기록이 없는 과거의 끝을 잡아 현재로 찬찬히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신간 ‘단단한 고고학’에는 고고학 중에서도 다소 별종으로 취급받는 구석기 고고학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
구석기 시대 도구사를 연구하는 김상태 고고학자는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고역사부장을 맡고 있다. 박물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상설 전시실인 1층의 선사·고대관과 중·근세관의 전시와 유물을 관리한다. 국립제주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제주도 최초의 구석기 유적을, 서귀포시에 있는 ‘생수궤’라는 동굴 유적을 발굴하기도 했다.
“역사교육과에 진학했지만 학과 공부보다는 인간의 진화와 관련된 분야에 더 관심이 있었어요. ‘고고학반’이라는 스터디 그룹에서 처음으로 고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1학년 때부터 별명이 ‘짱돌’이었죠. 문화인류학과에 진화를 전공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무작정 그분께 찾아가 직접 만든 주먹도끼를 선물로 드리면서 ‘이 분야에 대해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자료를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여쭤보기도 했습니다. 학과 학생도 아니었던 터라 거절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책을 여러 권 쥐어주시더라고요. 더 재밌게 고고학을 파고들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지금 친구들은 제가 구석기를 연구하는 걸 보고 ‘너 옛날부터 짱돌만 가지고 다니더니 직업이 됐구나!’라고 말해요.”
고고학자, 하는 것이 힘
많은 사람이 고고학자라 하면 고대의 신비를 찾는 탐험가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린다. 인디아나 존스는 평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흥미로운 유적 이야기를 들으면 중절모를 눌러쓰고 채찍을 두른 채 정신없이 달려나간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자들의 발굴 현장은 영화의 한 장면과 다르다. 온통 흙과 돌뿐인 곳에서 챙 넓은 밀짚모자에 의지한 채 하루 종일 돌을 솎아낸다. 모자 그림자 밖으로 바삐 움직인 팔은 빨개지다 못해 피부가 벗겨진다. 동굴 유적 발굴 현장에서는 해를 피할 수 있지만, 모기떼가 정신없이 달려드는 탓에 방충 모자를 쓰고 긴 기장의 옷과 장갑 등으로 온몸을 감싸야 한다. 거칠고 지루한 작업이다.
“구석기 고고학자들은 돌을 직접 깨보고, 석기를 재현해보기도 합니다. 특히 뗀석기는 언뜻 보면 주변의 흔한 돌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복원 연습을 부단히 반복하면서 보는 눈을 길러야 해요. 최소 1만 년, 최대 300만 년 전의 기술이라 제작 방법이 기록돼 있지 않기도 하고요. 재현한 석기로 창던지기와 활쏘기, 불 피우기 같은 구석기 시대의 생계 활동을 체험합니다. 복기하다 보면 당시의 도구와 생활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요.”
단단한 돌을 부드럽게 전하는 과정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매년 약 100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한다. 구석기 시대 유물은 역사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흔적이기 때문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공간에 전시돼 있다. 김 부장은 언젠가 단순하고 비슷비슷해 보이는 돌들이 전시된 구석기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관람객들을 발견했다. 석기는 화려한 금제 장신구와 불상, 예술성 높은 그림과 도자기들보다 선명한 형태가 보이지 않기도 하고, 사용 추정 시기와 발견 지역 정도만 적혀 있으니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와 닿지 않아 그런 게 아닐까 짐작했다.
그는 신간 ‘단단한 고고학’을 통해 구석기 스토리텔러(이야기꾼)로서 발돋움했다. 인간이 만든 고차원·고성능·다목적 도구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과거와 현재 사람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고인류처럼 실제로 돌을 깨 석기를 만들어보는 실험고고학 학자들의 연구 과정뿐 아니라, 한반도의 유적을 곁들인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사실, 원시 인류의 삶과 생각, 도구에 담긴 우리의 미래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했다.
“저는 도구의 힘을 믿어요. 확실한 형태가 있어 훨씬 더 강력하고 직접적입니다. 아무리 저명한 역사가일지라도 글은 개인적인 해석이 일부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반면 도구는 왜곡이 없어 담백한 해석이 가능하죠. 떼어낸 조각의 모양과 방향을 보면 계획을 실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만든 사람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요. 손때 묻은 도구 하나하나마다 다양한 선택과 가공이 결합돼 오늘날의 고도화된 결과물로 탄생한 거예요. 구석기인들을 ‘미개’하다고 여길 만큼 사회문화적으로도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인간 또한 본질적으로는 그들과 비슷한 방식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했다고 봅니다. 그만큼 구석기인의 돌에는 놓치기 아까운 소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각 도구의 특징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박물관 구석기실이 달라 보일 겁니다. 여러분에게 그 즐거움이 닿길 바랍니다.”
이야기를 좋아해 그 속에 푹 묻혀 살았다. 동네 사랑방, 길쌈하는 여인들 틈바구니 비집으며 이야기 구슬들을 집어 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다듬고 정리해 하나씩 쓸모 있게 만들기 시작했다.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장신구가 되듯이, 최상식(77) PD의 손에서 잘 꿰어진 고향의 전설들은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되었다.
최상식 PD는 1971년 서울중앙방송(현 KBS)에 PD로 입사했다. 1976년부터 1994년까지는 TV드라마 PD로서 ‘전설의 고향’(1977~1989), ‘보통사람들’(1982~1984), ‘춘향전’(1994) 등을 연출했다. 이후 KBS 드라마 제작주간으로 ‘젊은이의 양지’(1995), ‘첫사랑’(1996~1997), ‘태조왕건’(2000~2002), ‘겨울연가’(2002) 등을 기획 및 제작했다. 2002년 퇴사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 미디어공연영상대학 학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최상식 PD와 송도영 성우의 전설의 고향’을 운영하며 전설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다.
‘촌스러운’ 캐릭터의 창시자
최상식 PD의 이름 밑으로는 제목만 봐도 OST가 귀에 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이 빼곡하다. 그는 시청률 공식 집계 이래 대한민국 모든 프로그램을 통틀어 역대 최고 시청률인 65.8%를 기록한 KBS 2TV 주말 연속극 ‘첫사랑’의 책임 프로듀서다. 491회로 최장수 일일 연속극 기록을 보유한 ‘보통사람들’의 책임 프로듀서이며, 김희선, 배종옥, 배용준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사람들은 ‘전설의 고향’부터 떠올린다.
“1976년부터 드라마 PD로 일했어요. 1977년 10월에 시작한 ‘전설의 고향’은 PD로서 영글기 전에 만들었던 프로그램이죠. 저 스스로는 부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대표작으로 ‘전설의 고향’보다는 ‘보통사람들’을 꼽곤 하는데, 워낙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최 아무개 하면 ‘전설의 고향’부터 떠오르는 모양이에요.”
지금도 ‘납량 특집 드라마’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당시 파급력은 더욱 대단했다. TV 있는 집이라면 안 본 집이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전설의 고향’이 전파를 탄 다음 날이면 온통 전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2년 동안 프로그램을 제작한 불세출의 연출가임에도,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좋아할 만한 ‘전설’이란 소재 덕분에 인기 있었던 것이라며 겸손을 보인다.
마산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전설의 고향’ 역시 그가 유년 시절 접한 수많은 이야기들로부터 탄생했다. PD가 된 그는 연출자로서 어떤 점을 내세워야 성공할지 고심했고, 그동안 모아둔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야기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KBS에서 TV 드라마 방영을 시작한 지 10년이 막 지나던 즈음이었다. CG는커녕 촬영한 영상에 효과음을 넣는 편집 작업조차 다른 세상 이야기이던 시절, ‘전설 속 요괴와 귀신을 어떻게 구현하려고 하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려였다.
하지만 그는 제작을 밀어붙였다. 쑥을 태워 스튜디오에 연기를 자욱하게 내고, 시골 초가집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 바닥에 지푸라기를 잔뜩 가져다 깔았다. 물뿌리개로 카메라 렌즈 앞에서 물을 뿌려 비 오는 날씨를 연출했고,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뱀이나 구렁이를 직접 섭외(?)해 스튜디오에 풀기도 했다. 게다가 리얼함을 추구하는 연출자였던 그는 출연 배우에게 어떤 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미리 안내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 덕분에 촬영 중 실제로 울음을 터뜨리는 배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인 촬영 현장에서 생고생을 해야 하니, 배우고 제작진이고 ‘전설의 고향’ 참여를 원치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프로그램을 크게 흥행시킨 것 말고도 구미호나 저승사자를 한국 납량물의 대표 캐릭터로 정립한 까닭이다. 하얀 소복과 하얗게 센 머리, 희고 큰 꼬리 아홉 개를 가진 구미호, 검은 갓과 검은 도포, 하얀 얼굴에 까만 입술의 저승사자. 이제는 당연하다 못해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최상식 PD가 고민 끝에 구현해낸 엄연한 창작물이다.
“저는 어릴 적에 여우 이야기를 많이 접했어요. 농한기인 겨울에는 사람들이 큰방에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곤 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 여우가 굉장히 많았고, 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소만큼 중요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죠. 하지만 1979년 처음 에피소드를 제작할 때만 해도 구미호는 ‘남자 간 빼먹는 여우 같은 여자’ 같은 욕으로나 쓰였어요. 관련한 설화를 아는 사람도 얼마 없었죠. 그래서인지 반응이 좋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저를 포함한 제작진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했어요.”
1대 구미호를 연기한 배우 한혜숙은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구미호 나타났다’며 돌을 던졌다. 방송 잘 보고 있다는 전화가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걸려오기도 했다. ‘전설의 고향’ 출연 섭외와 프로그램의 인기는 반비례했지만, 구미호만큼은 예외였다. 구미호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이름 날리는 데 성공하면서 방송가에는 ‘여우 귀신이 도와줘 스타가 된다’는 소문까지 생겼다.
미래 콘텐츠 찾아 헤매는 이야기꾼
그의 취재 과정은 학자의 연구를 방불케 한다. 서재와 작업실, 거실을 가득 채운 책들과 고서, 그림 등 고문헌을 뒤지고, 취재하다 만난 동네 주민들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 기도 한다. 전설을 발견하면 현장에 직접 가서 증거물이 실제로 있는지, 전설에 등장하는 지역과 그 근방을 샅샅이 뒤진다. 이제는 동네의 오랜 전설을 아는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신 탓에 지역 주민이라도 전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네 여인 전설이 있는 서울 남산 부엉바위 약수터도 찾기 힘들었어요. 조사해보면 해방 전까지 한양, 경기 일대 최고의 약수터로 꼽혀서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남산을 아무리 오르내려도 전설에 등장하는 부엉바위 약수터는 없는 거예요. 2주일이 넘도록 찾다가 계단 난간을 넘고 가시덤불 밑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약수터가 있었어요. 하도 무당들이 찾아오니까 도시 정비를 하면서 그곳을 폐쇄해버렸던 거예요. 그러니 경비원도 주변 주민들도 전혀 몰랐던 거죠.”
그를 움직이는 건 사명감이다.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전국을 헤매며 현장의 영상을 담는 고생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1박 2일에 유튜브 방송 8~9회 분량을 취재하는 답사 일정이 점차 힘에 부친다. 그러나 그는 전설이 갖는 콘텐츠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만둘 수 없다. 한 가지 소재로 웹툰, TV 드라마, 뮤지컬, 영화까지 만드는 요즘이다. 전설이 빠지면 섭섭하다.
“전설은 이야기의 보물창고예요. 한국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구조의 이야기들이죠. 게다가 전설을 뜯어보면 당시 서민들이 무엇에 분노하거나 서러워했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알 수 있어요. 인간의 삶과 죽음, 한(恨)이나 정(情)이 한데 들어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스가 또 있을까요.”
그는 올해 초 국제영화제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안으면서 이를 증명해냈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측으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 11부 ‘짐승’ 편의 정재은 영화감독이 ‘전설의 고향-이어도’(1979)를 동반 초청작으로 직접 추천했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과거 선배들의 업적이 재조명된다는 점이 의미 있다’, ‘함께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다’라며 기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소식을 접하곤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처음 후배들한테 연락을 받고서는 ‘그걸 창피해서 어떻게 내느냐’면서 손사래를 쳤어요. 장비도 마땅치 않았고 편집은 거의 불가능한데다 막 컬러 영상이 도입되던 시절에 만든 영상이니 요즘 나온 작품들에 비하면 얼마나 어설프겠어요. 하지만 영화제 측에서 유튜브에 올라온 리마스터링 영상을 확인했고, 충분히 좋다며 재차 요청해서 결국 출품하게 됐죠. 그때 제주도에 태풍이 와서 비바람 부는 밖에서 힘들게 촬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유튜브로 옮겨붙은 열정
열흘에 한 번, 10분 내외의 분량.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지난해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했다. ‘10대가 보지 않으면 유튜브로 성공할 수 없다’, ‘이미 야사나 민담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 너무 많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등 대부분이 만류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제작을 밀어붙였다. 배우를 쓰는 대신 연필을 들었다. 직접 그린 삽화와 촬영해온 현장 영상,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메텔 역 등을 맡았던 유명 성우이자 아내 송도영의 더빙 음성을 합하면 ‘가내수공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퀄리티의 영상이 탄생한다.
유튜브 채널 운영은 순탄한 편이다. 구독자도 7만 명을 훌쩍 넘겼고, 영상의 조회수 추이도 좋다. 올린 지 한 달 만에 조회수 110만 회를 넘긴 영상도 있다. 야심차게 기획한 어버이날 특집 ‘고비사막을 넘은 효자’ 영상 조회수가 정작 낮다는 점이 아쉽지만 아무렴 괜찮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밑그림 작업이다.
지난해 4월부터 여태 그린 그림만 1000장이 넘는다. 이쯤 하면 실력이 늘 법도 하건만, 현장에서 연출할 때도 배우의 표정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그는 직접 그린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 마뜩찮아 애를 먹고 있다. ‘내가 남의 속에 들어앉는 게 아니고서야’ 맡길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오늘도 눈초리며 입 매무새를 그렸다 지우길 반복한다.
유튜브에는 과거 ‘전설의 고향’에서 다뤘던 전설과 새로운 전설에 대한 영상이 골고루 올라간다. 전설만 12년 넘도록 소개했지만 아직도 다루고 싶은 내용이 차고 넘친다. 일본에서 살았던,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리적·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깊은 나라예요. 이미 잘 알려진 귀무덤이나 코무덤 말고도 가야, 백제 때부터 임진왜란, 일제강점기까지 합치면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엄청날 거예요. 국내에서 다룰 전설도 많고 시간과 체력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뤄보려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 갔을 때 작은 돌다리 간판석에 백제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거나, 얼굴 반절이 탄 채로 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리나라 불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 유물, 지명에 담긴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은퇴 후 학생들 앞에 설 때도 좋았지만 무언가 부족했나 보다. 촬영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꿈을 종종 꿨다. 무언가 잘못돼서 촬영 전체가 어그러지는 꿈은 귀신 꿈보다 끔찍했다. 20년 가까이 그를 쫓아다니던 꿈은 지난해 유튜브 시작과 함께 멎었다. 천직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그가 소망하듯, 이야기꾼이 꿰어낸 보배는 길이길이 K-콘텐츠의 든든한 원형이 되어줄 것이다.
●Exhibition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
일정 5월 22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전시 ‘노실의 천사’(Angel of Atelier)가 이번 달까지 열린다. 전시 제목 ‘노실의 천사’는 권진규가 쓴 글에서 따온 것으로, 노실은 거미가 있는 방, 천사는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을 뜻한다.
권진규는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그는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편견 없이 넘나들었으며 세속을 떠나 이상을 추구했다.
권진규는 생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도 불렸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과 생활고 등으로 고통받던 그는 1973년 5월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유족이 기증한 작품(총 141점)과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학교박물관, 리움 등 기관과 개인 소장자로부터 대여받은 작품이 포함됐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개인 소장하던 작품 ‘말’도 있다. 총 240여 점으로 권진규 개인전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시는 자작시를 바탕으로 불교에 한평생 귀의해왔다는 점에 착안해 시기별로 입산(1947~1958), 수행(1959~1968), 피안(1969~1973)으로 구분해 진행한다.
◇화각 : 오색의 향연展
일정 5월 22일까지 장소 용산공예관
‘화각 : 오색의 향연’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이재만 특별초청전이다. 화각은 황소의 뿔을 이용한 우리나라 고유 각질 공예다. 황소 뿔 하나를 가공하면 10~20cm 정도의 작은 각지(角紙) 단 한 장이 만들어진다. 재료의 수급·가공 과정이 까다로워 예로부터 화각 공예품은 특수 귀족층이나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1996년 최연소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이재만 작가는 화각 공예로는 유일하게 지정된 장인이다. 유물을 재현한 화각 봉채함, 바둑판을 비롯해 이재만 화각장이 새롭게 창작한 12지신 필통, 불감, 보석함, 은장도, 가야금, 삼층장 등 화각 공예품 20여 점이 전시된다.
●Book
◇산산조각(정호승 우화소설)(정호승·시공사)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유명한 정호승 시인이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아 우화소설집 ‘산산조각’을 펴냈다. 시의 압축된 묘사 이면에 숨겨진 서사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재탄생시키고 우화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 보다 친근한 이야기로 인간의 삶이 지닌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산산조각’에 등장하는 화자와 주인공은 동식물과 사물이다. 망자(亡者)가 입는 수의, 못생긴 불상, 걸레, 숫돌, 오래된 절간 화장실의 받침돌 같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연히 이 세상에 실재하고, 심지어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참나무 이야기’의 참나무는 대웅전의 대들보나 목불(木佛)이 되겠다는 꿈을 키운다. ‘선암사 해우소’의 바윗돌은 싱그러운 차밭에서 안락하게 지낸다. 하지만 참나무와 바윗돌은 전혀 뜻하지 않은 처지에 놓인다. 참나무는 장작이 되고 바윗돌은 해우소의 기둥을 받치며 똥물을 맞고 사는 신세가 된다. 꿈꾸던 미래와 안락함을 빼앗긴 두 존재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묵묵히 견디는 가운데 삶의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듯 ‘나’ 역시 분명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이 세상에 왔으며 존재하기에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하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 그 가치를 통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화의 방법으로 성찰했다”고 말했다.
◇작별인사(김영하·복복서가)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란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등을 묻는다.
◇다시 말해 줄래요?(황승택·민음사)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의 채널A 황승택 기자가 쓴 두 번째 투병 에세이다. 저자는 인생 42년 만에 급작스럽게 찾아온 급성중이염으로 200여 일 동안 청력을 손실한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면면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혐오의 과학(매슈 윌리엄스·반니)
범죄학자인 저자가 혐오하는 마음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탐구한 책으로, 신경과학·심리학·사회학·통계학적 접근이 눈에 띈다. ‘혐오를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책을 찾고 혐오범죄 예방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탐구한다.
●Stage
◇넥스트 투 노멀
일정 5월 17일 ~ 7월 31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로라 피에트로핀토
출연 박칼린, 최정원, 남경주, 이건명, 양희준, 노윤, 이석준, 이아진, 이서영, 이정화 등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이 7년 만에 돌아온다. ‘넥스트 투 노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굿맨 패밀리 가족 구성원의 아픔과 화해,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16년째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 다이애나, 그런 엄마에게 소외감을 느끼는 딸 나탈리, 다이애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흔들리는 가정을 지켜내려 노력하는 아빠 댄, 다이애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아들 게이브까지 여러 상황으로 저마다 한계에 다다르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위태로웠던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작게 피어나기 시작한 희망을 붙잡으려 한다. 이번 프로덕션에는 연기력과 가창력을 갖춘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뭉쳤다. 국내 프로덕션 초연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재연까지 참여한 배우 박칼린이 다이애나 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국 뮤지컬계의 레전드라 불리는 배우 최정원도 다이애나로 새롭게 합류한다.
◇모래시계
일정 5월 26일 ~ 8월 14일
장소 대성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김동연
출연 민우혁, 온주완, 조형균, 최재웅, 송원근, 남우현, 박혜나, 유리아, 나하나 등
뮤지컬 ‘모래시계’가 2017년 초연 이후 5년 만에 돌아왔다. 동명의 SBS 드라마가 원작이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서사시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네 청춘의 이야기를 담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격동의 시대 속 엇갈린 선택과 운명에 처한 ‘태수’ 역에는 민우혁, 온주완, 조형균이 캐스팅됐다. 태수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상의 정의가 되고 싶었던 ‘우석’ 역은 최재웅, 송원근, 남우현이 연기한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좌절했던 ‘혜린’ 역에는 박혜나, 유리아, 나하나가 함께한다.
◇돌아온다
일정 5월 7일 ~ 6월 5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정범철
출연 강성진, 박정철, 김수로, 정상훈, 이아현, 홍은희, 김곽경희 등
연극은 ‘돌아온다’라는 이름의 식당을 배경으로 한다. 허름하고 작은 식당에서 욕쟁이 할머니,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초등학교 여교사,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 작은 절의 주지 스님 등의 사연이 펼쳐진다. ‘돌아온다’ 제작진은 “누구나 가슴속에 ‘그리운 사람 혹은 무언가’를 하나쯤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 주변에 있을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온 가족과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감동과 웃음을 선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산을 오르는 재미 중 하나는 명산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을 만나는 일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걱정을 한 줌 정도는 덜어놓고 올 수도 있고,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수행 중인 승려의 인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대웅전으로 향할 때 거치는 누각의 그늘 아래 앉아 맞는 산바람도 사찰이 주는 선물이다. 전국 명산마다 유명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곳은 역시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3대 사찰로 손꼽히는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를 취재를 핑계 삼아 다녀왔다.
자연의 멋 그대로 살린 쌍계사
주변 볼거리가 가장 많은 사찰이다. 섬진강을 따라가다 화개장터가 등장하면 화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볼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답다. ‘하동 십리벚꽃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벚꽃이 피는 시기가 아니더라도 늘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길을 걷다 마주하는 강가에 펼쳐진 녹차밭의 광경도 압도적이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쌍계사가 등장한다. 쌍계사는 계곡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거대한 사찰을 만들겠노라며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늘 계곡 물소리가 경내를 불경처럼 맴돈다. 주변에 앉아 한참이나 물속을 바라보며 소위 ‘물멍’이 요즘 유행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압도적인 것은 절 안 곳곳 장식처럼 서 있는 대나무 숲이다. 쌍계사의 창건 전설에 왜 호랑이가 등장하는지 이해될 정도.
쌍계라는 절의 이름이 처음부터 쓰인 것은 아니다. 신라 성덕왕 21년(722) 대비와 삼법 두 스님이 칡꽃이 핀 눈 쌓인 계곡을 찾아 호랑이의 인도로 이 절을 세웠을 때는 옥천사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 신라 헌강왕 때 동명의 다른 사찰과의 혼선을 막기 위해 절 앞에 흐르는 시냇물의 이름을 따 쌍계라는 호를 받았다. 신라의 문인 최치원이 쌍계석문 4자를 써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
경내에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가 버티고 서 있다.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道不遠人, 人無異國)”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마음의 안식을 원할 때 천은사
운전을 좋아한다면 알 만한 길 노고단로 초입에 위치한다. 이 길은 해발 1000m가 넘는 성삼재 휴게소까지 갈 수 있고, 길이 급격한 코너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와인딩을 즐기려는 많은 운전자들이 찾는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워낙 길의 굴곡이 심해 실제 차들의 운행 속도는 매우 느린 편이다.
성삼재에서 굽이치는 도로를 지나 천은사에 도착하면 매우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넓은 천은저수지의 잔잔한 물결과 공원처럼 펼쳐진 절 입구가 인상적이다. 산을 내려오며 격해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을 준다.
천은사로 가려면 감로천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그곳에서 수홍루를 만나게 된다. 다리 위에 정자가 지어진 독특한 형태다. 저수지와 입구에 조성된 공원의 규모를 생각하면 절 자체는 아기자기한 편이다. 거대한 구조물들이 위압감을 주거나 엄숙함을 강요하는 모양새도 아니다. 주변을 지나던 등산객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안정감을 준다.
이 절 역시 통일신라 시대인 흥덕왕 3년(828)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중건할 때 절터 주변에서 나오는 구렁이들을 잡았다가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 뒤로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대표적 천년고찰 화엄사
지리산이 낯선 이라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이다. 사찰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지리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등산로, 관광지로서의 매력도 충만하다. 특히 연기암까지 올라가는 등산로는 계곡과 숲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당일 등산 코스로 애용된다.
화엄사는 대표적인 천년고찰로 지리산에서 만날 수 있는 사찰 중 가장 큰 절로 손꼽힌다. 특히 중층으로 이뤄진 각황전은 전국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경복궁 근정전에 비교될 정도지만 그보다는 작다. 이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됐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엔 대웅전이 가장 큰 규모로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 보통이지만, 화엄사의 경우 각황전이 대웅전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최근 화엄사에는 새로운 볼거리가 등장했다. 각황전 좌측 길로 오르다 보면 사사자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말 그대로 4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탑이다. 탑을 완전히 해체해 새롭게 복원하는 데 무려 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국보 제35호로 지난 9월 말 관람객에게 공개됐다.
사찰의 규모만큼이나 유물도 많다. 각황전만큼 거대한 바로 앞 석등은 국보 제12호고, 영산회괘불탱과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도 국보로 등록됐다.
‘사적기’에 따르면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했다고 나온다. 문무왕 때는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때 의상대사가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곳이 지금의 각황전이다. 각황전은 조선 중후기인 숙종 때 지어진 건물로, 본래 장육전이 소실되어 복원하면서 숙종이 현판을 ‘각황전’이라 사액했다.
삼성전자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이끈 시니어들의 경제 영웅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그가 남긴 미술품 컬렉션을 전시할 '이건희 미술관(가칭)' 후보지가 서울로 결정됐다. 현재 송현동 부지와 용산 두 곳 중 하나를 최종 위치로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
고 이건희 회장에 대한 금관문화훈장 추서도 추진된다. 금관문화훈장은 문화훈장 중 최고 등급이다.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가거나 문화적으로 큰 공로를 세운 이에게 수여한다.
지난 4월 삼성가 유가족이 2만3000여 점에 달하는 ‘이건희 컬렉션’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한 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위한 활동으로 몇 개월 동안 전국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그리고 7월에 최종 지역을 서울로 확정했다.
이건희 미술관 부지가 서울로 정해지자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권과 관광 활성화를 내세웠던 지자체들의 반발이 잇달았다. 이에 대해 이건희 미술관 부지를 선정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실질적 역할을 고려해 서울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는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연 브리핑에서 ‘기증품의 통합적 관리·조사·연구시스템 구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유화부터 불상, 도자기까지 다양한 미술품을 보존·관리·전시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경험이 필요하다”면서 “인력의 한계로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다른 전문기관 협업도 필요하다. 기증품이 서울에 있어야 여러 가지로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용산이나 송현동에 이건희 미술관이 지어지면 연계할 수 있는 문화 인프라가 많다. 송현동 부지 주위에는 경복궁과 인사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있다. 15일에는 서울공예박물관도 개관한다. 가까운 삼청동 부근에 수십 개 미술 갤러리가 있고, 창덕궁·덕수궁·남대문까지 문화 자원이 풍부하다.
용산에서 후보지에 오른 땅은 용산가족공원 내 문체부 소유지다. 국립중앙박물관 바로 옆이고, 국립한글박물관과도 가깝다. 이건희 컬렉션의 일부를 기증했다고 할 만한 삼성미술관 리움이 용산구 한남동에 있다. 리움 말고도 아모레퍼시픽 미술관과 2022년 개관 예정인 용산역사박물관 등 20여 개 박물관과 미술관이 모여 있다. 문체부는 “용산 부지는 정부 땅이어서 별도 부지 매입비가 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송현동 부지는 서울시와 대한항공이 갈등을 빚었던 곳이다. 2008년 이 부지를 인수한 대한항공은 최고급 호텔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인허가를 놓고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와 갈등을 빚었다. 현재 이 부지는 서울시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대한항공으로부터 땅을 사고, LH는 서울시 사유지와 이 부지를 맞바꿀 계획이다.
후보지는 두 곳이지만 현재 송현동 건립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는 “송현동이 도시 중심지라 따로 진입로를 만들 필요가 없는 데다 젊은이들도 많이 즐기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미술관처럼 개인 기증을 계기로 정부가 나서 별도 시설을 만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은 ‘이홍근실’ 같이 기증자 이름을 딴 전시실을 운영해왔다. 고미술과 근현대미술을 한데 아우르는 국가 문화시설이 생기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문체부는 2028년께 이건희 미술관이 건립될 것으로 보고 있다. 황희 장관은 브리핑에서 “올해 2억 원 정도 예산으로 용역을 시작했다. 건축비는 지금 나올 수 없지만 1000억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부지 비용은 들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달 21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각각 ‘국가 기증 이건희 기증품 특별 공개전’을 동시 개막하고, 내년 4월 1주년 특별전을 연다. 내년 하반기부터는 연 3회 이상 지역별 대표 박물관·미술관 순회 전시를 이어서 추진할 계획이다.
강원도 정선 고한읍에서 인적이 가장 뜸했다는 고한18리 골목의 주변 명소&맛집을 소개합니다!
삼탄아트마인
2001년 폐광할 때까지 38년 동안 고한 지역 경제를 떠받쳐왔던 정암광업소를 도시재생한 문화예술 창작공간이다. 폐광 터에 150개국에서 수집한 10만여 점이 넘는 예술품을 접목해 독창적인 전시공간이 되었다. 안내데스크 옆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카페가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촬영 장소 및 배우 송중기가 묵었던 객실을 볼 수 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45-44, 09:30~17:30 월·화요일 휴관, 033-591-3001 어른 1만3000원
정암사
월정사 말사이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전해온다.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므로 적멸보궁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적멸보궁 앞 계곡은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의 열목어 서식지다. 적멸보궁 뒤쪽 언덕에 있는 수마노탑은 최근 국보 제332호로 지정되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 033-591-2469
예촌돌솥밥
고한 주민이 강력 추천한 돌솥밥 전문점이다. 식당 내부가 깔끔해 첫인상이 좋다. 주 메뉴는 영양돌솥밥과 곤드레돌솥밥이다. 정선 곤드레가 듬뿍 올라간 돌솥밥에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를 포함한 스무 가지 반찬이 딸려 나온다. 모두 맛깔나다. 제철 식자재를 사용하므로 반찬 종류는 수시로 바뀐다. 고한시장 갱도1 출입구 맞은편에 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6길 8, 10:00~21:00, 033-592-4610, 곤드레돌솥밥 1만2000원
● Exhibition
◇구정아: 2020
일정 11월 28일까지 장소 PKM 갤러리
특유의 기민한 감각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는 구정아 작가의 개인전. 야외 설치작업을 비롯해 회화, 드로잉, 조각 등 미공개 최신작 30점을 선보인다. 밤이 되면 녹색 빛을 뿜어내는 야광 스케이트 파크 ‘레조넌스’부터 어두운 전시장에서도 밝게 빛나는 ‘세븐 스타즈’까지 인광 페인트를 활용한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갤러리는 낮과 밤의 분위기가 다른 작품을 보다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일몰 이후인 저녁 9시까지 개방한다.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
일정 11월 1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빛을 통해 우리 문화재를 탐구한다. 제1부에서는 현미경으로 문화재의 빛과 색을 관찰하며, 2부에서는 빛으로 촬영한 문화재의 모습을 살펴본다. 특히 희미해진 유적 속 글귀나 그림 등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을 판독하는 과정을 밝힌다. 3부는 빛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국가지정문화재 10점을 비롯해 전체 57건 67점이 공개된다.
◇여행갈까요
일정 12월 27일까지 장소 뚝섬미술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코로나19)으로 여행을 가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기획한 전시. 하와이, 베트남,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여행지를 연상케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마치 세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전시장 입구를 공항처럼 연출하고 비행기 객실 모습을 재현해 여행 전의 설렘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전시 후반부에는 세계 각국 여행지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단순히 여행에 대한 향수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행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던진다.
● Book
◇비건 하이프로틴 쿡북 (쥘 노이만 저·든든)
고기 없이도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90여 가지의 비건 요리를 소개한다. 모든 요리에 1회분의 영양성분표가 적혀 있으며 30일 식단표가 함께 수록돼 있어 균형 잡힌 채식을 돕는다.
◇쓰레기 거절하기 (산드라 크라우트바슐 저·양철북)
플라스틱 제로 운동으로 시작해 10년째 쓰레기 제로 운동을 실천 중인 한 가족의 이야기. 이웃과 차를 공유하고 냉장고를 반만 채우는 등 색다른 방식으로 쓰레기를 줄이며 깨달은 내용을 담았다.
◇착한 소비는 없다 (최원형 저·자연과 생태)
인간의 무분별한 소비가 환경과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일상 속 사례를 통해 차근히 짚어준다. 더불어 덜 쓰고, 다시 쓰는 소비를 통해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들어나갈 것을 제안한다.
● Movie
◇도굴
개봉 11월 예정 장르 범죄 감독 박정배 출연 이제훈, 조우진, 신혜선, 임원희 등
흙 맛만 봐도 보물을 찾아내는 타고난 천재 도굴꾼 ‘강동구’가 전국의 전문가들과 함께 땅속에 숨어 있는 유물을 파헤치며 짜릿한 판을 벌이는 범죄 오락영화다. 황영사 금동불상, 고구려 고분 벽화, 서울 강남 한복판의 선릉까지 거침없이 파내려가는 도굴꾼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한국 영화에서 다룬 적 없는 기상천외한 도굴의 세계를 스릴 있게 조명한다.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지은 무덤과 화려한 유물 등 다양한 볼거리와 더불어 주연 배우 네 명의 환상적인 팀플레이가 작품의 재미를 높인다. ‘수상한 그녀’, ‘도가니’ 등 조감독을 거쳐 오랜 기간 노하우를 갈고 닦은 박정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내가 죽던 날
개봉 11월 12일 장르 드라마 감독 박지완 출연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등
오랜 공백 이후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 ‘세진’의 실종사건을 추적하며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현수는 세진의 사건을 담당했던 전직 형사와 연락 두절된 가족, 사건을 목격한 ‘순천댁’까지 차례로 만나며 감춰졌던 비밀에 가까워진다. 배우 김혜수의 2년 만의 스크린 컴백 작품이자, 여고생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포착한 단편영화 ‘여고생이다’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워 위드 그랜파
개봉 11월 예정 장르 코미디 감독 팀 힐 출연 로버트 드 니로, 우마 서먼, 오크스 페글리 등
같은 방을 쓰게 된 막무가내 할아버지 ‘에드’와 사춘기 손자 ‘피터’가 하나뿐인 방을 사수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골탕 먹이는 유쾌한 전쟁 이야기다. 아카데미상 2관왕, 골든글러브 2관왕에 빛나는 로버트 드 니로의 코믹한 연기와, 영화 ‘원더스트럭’으로 연기력을 입증한 아역배우 오크스 페글리의 호흡이 돋보인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각본을 쓴 팀 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웰메이드 코미디를 선보일 예정이다.
● Stage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정 11월 3일부터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연출 박해림 출연 강필석, 정운선, 윤석현 등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 시인의 시 ‘나와 나탸샤와 흰 당나귀’를 모티브로 삼은 동명의 창작 뮤지컬이다.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이자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렸던 ‘백석’과 그런 그를 못 잊어 평생을 그리움으로 살았던 기생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풀어낸다. 모든 뮤지컬 넘버의 가사에 백석이 쓴 시를 차용해 마치 한 권의 시집을 읽은 듯한 여운과 감동을 준다. 2015년 초연한 이 작품은 제1회 한국뮤지컬 어워즈에서 극본, 작사상, 연출상, 작품상 등을 받았고 차범석 희곡상에서도 뮤지컬 극본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초연 이후 세 번째로 관객 앞에 서는 이번 시즌에서는 극본을 쓴 박해림 작가가 연출까지 도맡아 작품의 서정성을 한층 더 높일 예정이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좌석 간 띄어 앉기를 실시한다.
◇블랙메리포핀스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대학로티오엠 1관 연출 서윤미 출연 김도빈, 임준혁, 임찬민 등
환상적인 동화 ‘메리 포핀스’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변주한 창작 뮤지컬. 1920년대 한 대저택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에 얽힌 유모 ‘메리’와 네 남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 시즌에는 둘째 ‘헤르만’의 시점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쳤다면, 이번 시즌에서는 막내 ‘요나스’로 중심 화자를 바꿔 같은 대본이지만 인물의 심리 변화를 색다르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퀄
일정 11월 22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2관 연출 이은영 출연 김지휘, 조성윤 등
어릴 적부터 폐병을 앓아온 ‘니콜라’와 그를 보살피는 친구이자 의사 ‘테오’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극작가, 배우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스에미츠 켄이치 원작의 작품이다. 2015년 도쿄에서 초연 후 한국에서는 처음 선보인다. 연금술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이용해 단 두 명의 출연진만으로도 긴박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강원도 정선 고한읍에서 인적이 가장 뜸했다는 고한18리 골목에 들렀다.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골목의 변화는 놀라웠다. 이곳 주민들은 ‘마을이 호텔’이라는 자부심으로 매일 집 앞 화단을 단장한다. 마을은 나날이 예뻐진다. 이제 시작이라고 하니, 앞으로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지 기대된다.
탄광촌 고한읍의 흥망성쇠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무궁화호는 3시간 20분 뒤 강원도 정선 고한역에 정차했다. 고한역은 고한읍내의 꽤 높은 언덕에 있다. 계단을 내려오니 고한시장 입구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표석이 눈에 띈다. ‘여기가 해발 700m'라 쓰여 있다.
고한읍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산지대다. 1950년대에는 화전민이 모여 살던 산촌이었다. 1960년대 고한읍과 사북읍에 탄광 개발이 시작되자 탄광촌이 되었다. 전국에서 일꾼들이 몰려왔다. 지역 경제는 호황을 맞았다. 1980년대 이후 석유와 도시가스가 보급되면서 석탄 산업은 쇠락했다. 결국 1989년 정부 정책에 따라 강원도의 탄광이 대부분 폐광됐다. 광부들은 마을을 떠났다. 정부가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한읍에 내국인 카지노 운영 공기업인 강원랜드를 설립했다. 하이원리조트도 건설했다. 경제 부활을 꿈꿨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한읍에 빈집이 점점 늘었다. 여러 마을 중에서도 고한18리가 가장 열악했다.
주민이 주도하는 도시재생사업
고한시장에서 광고기획사 하늘기획을 운영하던 김진용 씨는 낙후된 고향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2017년 10월 ‘마을 만들기’를 기획하고, 고한18리 골목의 빈집을 고쳐 사무실을 옮겼다. 얼마 뒤 맞은편 폐가에 공유 오피스 공간인 이음플랫폼이 입주했다. 두 빈집이 번듯하게 바뀌자 주민들도 희망을 품었다.
유영자 신임 이장과 김진용 씨가 주축이 되어 ‘마을 만들기 위원회’를 발족했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함께 모이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 공감대를 쌓아갔다. 주민들은 스스로 골목을 가꾸기 시작했다. 담장을 헐고, 골목 안 쓰레기와 폐전선을 치우고, 화단을 가꾸어 집 앞을 단장했다.
나아가 국토교통부와 강원도에서 시행하는 각종 폐·공간 재생사업에 참여해 관의 인적·경제적 지원을 받아냈다. 칙칙한 건물 외벽을 산뜻한 색으로 칠했다. 집주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원색을 좋아하는 할머니 집에는 원색을 칠하고, 1층만 칠하길 원하는 집에는 그렇게 해주었다. 지역 예술가는 담벼락에 소녀, 고양이, 꽃 등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렸다. 부녀회에서는 리스, 편지꽂이, 화분대, 벽걸이 등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만들어 골목을 장식했다.
마을호텔 18번가 탄생 스토리
골목은 예전보다 밝아졌지만, 지속가능한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다. 전문가들과 많이 고민한 끝에 ‘마을호텔’이라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도출해냈다. 호텔은 한 빌딩 안에 객실, 레스토랑, 카페, 리셉션, 라운지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마을 호텔은 골목 상점이 그것을 대체한다는 발상이다. 골목 안에 음식점, 카페, 사진관, 세탁소, 숙박업소 등 다양한 업종이 있는 고한18리의 장점을 살릴 방법이었다.
올해 4월 주민과 골목 상점 11곳이 합심해 ‘고한 18번가 협동조합’을 구성했다. 조합명은 가장 잘하고 좋아한다는 뜻을 지닌 ‘18’과 거리를 뜻하는 ‘번가’를 합쳐 만들었다. 고한 18번가 협동조합은 한우식당을 개조해 5월에 숙박시설 ‘마을호텔 18번가’를 개장했다. 마을호텔 18번가 골목은 호텔 로비, 골목 입구 마을회관은 호텔 세미나룸, 카페 수작은 호텔 라운지, 국일반점·구공탄구이·누리한우촌은 호텔 레스토랑 역할을 한다. 상점 주인은 모두 호텔리어인 셈이다.
고한 18번가 협동조합 총무 김진용 씨는 “18번가는 주민들이 주도한 사업”임을 강조했다.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 골목 상점을 활용해 하나의 호텔처럼 운영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마을 이장님이 호텔 지배인
숙박시설 ‘마을호텔 18번가’의 관리자는 유영자 이장이다. 명함에 ‘지배인 유영자’라 씌어 있다. 유 이장은 협동조합 일로 바쁜 중에도 호텔 설립 과정과 소개를 열심히 한다. “호텔 안을 장식한 조화 작품들은 주민들이 공예 작가에게 배워서 만든 LED 야생화예요. 함백산에서 매년 야생화 축제를 해요. 그 행사와 연계해 야생화를 테마로 잡았죠. 이 호텔이 제법 알려져 주말에는 빈 객실이 없어요. 이익은 주민들이 함께 나눠요.
”
마을호텔 18번가는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를 절충해놓은 분위기다. 한실과 양실 더블룸(2인실) 각각 1개, 트윈룸(3인실) 1개로 구성돼 있다. 시리얼과 토스트를 조식으로 제공한다. 숙박료는 9만~15만 원이다. 숙박 손님에게는 식당, 카페, 사진관 등의 협력업체 10% 할인 쿠폰을 준다. 삼탄아트마인은 무려 50%를 할인해준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LED 야생화 만들기와 다육아트 등 고한읍의 특색을 살린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바로 옆 카페 수작에 들렀다. 골목은 한산한데 손님이 많다. 주인장이 개발했다는 흑임자라떼를 기다리는 동안 부녀회에서 만든 소소한 공예품을 구경한다. 흑임자와 커피의 조화는 그럴싸하다. 커피 향보다 흑임자의 고소한 맛이 강한 편이다. 차를 마신 뒤 본격적으로 골목 산책에 나섰다.
사계절 꽃 피는 고한 18번가
우선 마을호텔 18번가 앞 꽃마차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골목을 깨알처럼 장식해놓은 벽화, 조형물, 화분을 감상한다. 골목에서 꽃이 가장 많은 곳은 권 씨 할머니 집이다. 담벼락에 꽃이 가득하다.
“몸이 안 좋아서 얼마 전에 장사를 그만뒀어요. 이렇게 꽃을 가꾸니까 시간도 잘 가고, 사람들이 예쁘다고 칭찬해주니까 보람도 있어요. 매일 한두 시간씩 꽃을 돌보는 시간이 아주 소중해요”
소녀 같은 권 씨 할머니다.
겨울이 오면 골목에서 꽃들이 사라진다. 골목이 썰렁해질까봐, 주민들은 한 잎 한 잎 공들여 만든 LED 야생화 화분을 화단에 설치한다. 낮에도 환히 빛나는 야생화 덕분에 이 마을을 지날 때 춥지 않을 것 같다.
18번가 골목을 빠져나오면 고한시장이 코앞이다. 시장 입구와 천장을 갱도처럼 꾸며놨다. 출입구에는 ‘갱도1’, ‘갱도2’라고 써놓았다. 시장 안 기둥에는 석탄을 캐는 광부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재현해놨다.
매월 끝자리 1일과 6일에는 오일장이 서 먹거리 장터가 열린다. 시장 내 ‘피고지고 다시 피고’ 카페에서 장미, 마리골드 꽃물과 꽃가루로 만든 꽃빵(머핀)과 오징어 먹물로 만든 숯빵(파운드케이크)을 판다. 3개 세트가 5000원이다. 지역색을 살린 먹거리라 호감이 간다. 촉촉하고 달달해 커피에 곁들이기 딱 좋다.
주변 명소&맛집
삼탄아트마인 2001년 폐광할 때까지 38년 동안 고한 지역 경제를 떠받쳐왔던 정암광업소를 도시재생한 문화예술 창작공간이다. 폐광 터에 150개국에서 수집한 10만여 점이 넘는 예술품을 접목해 독창적인 전시공간이 되었다. 안내데스크 옆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카페가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촬영 장소 및 배우 송중기가 묵었던 객실을 볼 수 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45-44, 09:30~17:30 월·화요일 휴관, 033-591-3001 어른 1만3000원
정암사 월정사 말사이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전해온다.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므로 적멸보궁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적멸보궁 앞 계곡은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의 열목어 서식지다. 적멸보궁 뒤쪽 언덕에 있는 수마노탑은 최근 국보 제332호로 지정되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 033-591-2469
예촌돌솥밥 고한 주민이 강력 추천한 돌솥밥 전문점이다. 식당 내부가 깔끔해 첫인상이 좋다. 주 메뉴는 영양돌솥밥과 곤드레돌솥밥이다. 정선 곤드레가 듬뿍 올라간 돌솥밥에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를 포함한 스무 가지 반찬이 딸려 나온다. 모두 맛깔나다. 제철 식자재를 사용하므로 반찬 종류는 수시로 바뀐다. 고한시장 갱도1 출입구 맞은편에 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6길 8, 10:00~21:00, 033-592-4610, 곤드레돌솥밥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