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공인 한국 문화 지킴이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울림을 주는 홍보 영상, 잘 정리된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을 어언 30년 가까이 해보니 깨달은 점이다. 기존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더 효과적인 방식을 찾았기 때문에, 그는 2019년부터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홍보학자입니다.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자 노력해왔어요. 누군가 제게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현장’이라고 답할 겁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자타공인 한국 문화 지킴이다. 주변국의 역사 왜곡 시도에 항의하고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홍보 영상을 만들거나 독립운동 유적지에 비치할 안내서를 발간하고 한국어 간판을 제작해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해왔다.
서 교수는 일 년 중 여섯 달은 해외에 있을 정도로 출장이 잦다. 그는 아무리 일정이 빡빡해도 여유 시간으로 반나절 정도는 꼭 마련해둔다고 한다. 관리를 전혀 받지 못해 방치돼 있거나, 이름은 알려져 있으나 안내 시설 등이 노화돼 찾기 힘든 유적지가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서 교수는 다니면 다닐수록 관리가 부족한 지역이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했다. 하지만 유적지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려면 지속적인 관심과 방문이 필요하다.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면 현지에서도 해당 장소를 관리하기 위해 신경을 쓰게 되고, 관리가 잘 된 유적지를 방문해 좋은 인상을 받은 관광객들은 입소문을 내며, 그로 인해 점차 방문객이 늘어나는 흐름이 만들어지기 때문. 이러한 선순환이 많은 유적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면, 시민들의 전반적인 역사 인식도 향상되는 결과까지 기대해볼 수 있다.
그가 다크 투어 분야에 뛰어든 것은 2019년. 여태 해오던 일을 확장시켜 ‘이제는 내가 직접 나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각지를 돌며 직접 보고 느낀 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뜻이 맞는 여행사를 찾은 그는 직접 다녔던 루트 그대로 여행 코스를 짰고, 다달이 진행되는 모든 프로그램에 재능기부 차원에서 참여하며 정성을 들였다. 지금까지 서 교수와 함께하는 여행사 ‘자유여행기술연구소 투리스타’ 역시 실비만 받고 다크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홍보학자, 현장에 직접 나서다
첫해의 성공으로 시즌2를 계획하던 2020년 2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아쉬움을 삼키며 온라인으로만 활동해야 했던 서 교수는 지난 2월 말, 3년 만에 오프라인 다크 투어 프로그램 ‘항일운동 역사투어’를 진행했다. 삼일절을 기념하고자 기획한 프로그램이라 목적지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도로 결정했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주민만 스무 명이 넘고, 그 후손들은 일 년 내내 태극기를 걸어둔 채 생활해 ‘항일의 섬’, ‘태극기의 섬’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함경도 북청군, 부산시 동래군과 더불어 국내 3대 항일운동 성지로 불리지만 인지도는 훨씬 낮다는 점이 아쉽던 차, 이번 기회에 소안도를 제대로 소개해보리라 마음먹은 것.
“이번에는 45인승 차 한 대를 빌렸어요. 이 차만 다 채워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죠.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통해 일본 하시마 섬(군함도)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고, 배우 송혜교 씨의 후원으로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는 안내서를 온·오프라인으로 발간하는 등의 활동이 매체를 통해 많이 소개되면서 다크 투어에 관심 갖는 분위기가 고조되던 2019년과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그런데 웬걸, 막상 신청을 받아보니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함께할 분들을 ‘선정’해야 했어요. 놀랄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안도의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온 것은 처음입니다.” 소안도에서 만난 지역 해설사의 한마디는 서 교수를 포함한 모두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그는 40여 명과 함께 소안도 외에도 국내 최대 강제노동 지역인 ‘옥매광산’, 안중근 의사 위패가 있는 ‘해동사’를 찾았다. 사람들은 설명을 들으며 함께 분노하고 슬퍼했다.
성공적인 다크 투어의 필요조건으로는 좋은 스토리텔링이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방문해 그곳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어땠는지, 우리 조상들은 하필 이 지역에서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짜인 하나의 이야기처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 교수는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 발발 당시의 현장 사진을 큰 종이에 출력해오기도 하고, 지역 해설가를 섭외하기도 한다. 좋은 스토리텔링을 위한 사전 준비가 탄탄해야 관광객들이 현장에서 더욱 감명받고, 그렇게 느낀 교훈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재적소에 더해지는 서경덕 교수의 너스레는 분위기가 과열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또 일정이 끝난 뒤 지역 대표 맛집에서 여행의 고단함을 해소하는 시간을 꼭 가졌다. 아무리 의미와 교훈이 중요한 여행이라도, 여행만의 잔재미를 느낄 구간 또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여행 전문가도 아니에요. 역사적 지식을 어떻게 해야 잘 홍보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죠. 다크 투어를 통해서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깨닫고 교훈을 얻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핵심은 입소문이죠. 그래야 좋은 후기들이 퍼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유적지를 찾고, 그렇게 우리의 소중한 유적지를 지켜 후대에 물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소안도를 함께 방문했던 분들도 ‘SNS 홍보단’이라고 부르면서 많이 공유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앞으로 3년이 적기인 이유
서경덕 교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국내 유적지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명소를 돌아보는 여행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홍보 방식으로 다크 투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떠올린 갈래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오히려 K-콘텐츠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제 해외여행도 자유로워졌으니 그 어느 때보다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으리라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올해 외국인 관광객 3000만 명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예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2025년까지의 행보가 중요해요. 그들이 관심 있어 하는 먹거리, 화려한 경복궁, 대도시 서울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신들이 관심을 가지는 우리나라에는 사실 이런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하고 유적지도 방문하게끔 하는 거죠. 당장 올해는 정전 70주년이자 한인 이민 120주년이에요. 그러니 한국전쟁과 연관 있는 배우들을 초청해 기념행사를 진행하거나, 유해 발굴 현장을 외국인이 직접 방문하는 식의 프로그램을 기획해도 괜찮겠죠.”
공식적인 행사나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아쉽겠지만, 그렇다고 귀중한 시기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진행한 다크 투어 코스를 SNS에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한국 문화 알림이로 유명세를 탄 서 교수의 개인 SNS 계정을 구경하던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한 번이라도 더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다크 투어는 굉장히 효과적인 홍보 방식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참여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3040 부부가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으로 다른 지역을 방문할 때 그 지역의 유적지를 짧게나마 다녀오는 일이 일상화됐으면 해요. 이런 문화가 자리 잡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저도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대학 시절 한시(漢詩)에 매료된 적이 있다. 시를 짓기보다 읽고 감상하는 데 치중했다. 지리산 청학동 태생이라 서당을 보고 자란 영향 때문일 게다. 한시에는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한자도 있어 옥편을 찾아 읽곤 했다. 뚜렷이 생각은 나지 않으나 ‘물 졸졸 흐른다’는 뜻의 한자를 비롯해 시구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의성어 글자가 있었다. 신기하게 여겨졌고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됐다. 제법 많은 한시를 외웠으나 지금은 시의 내용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황진이의 ‘詠半月(영반월)’도 자주 암송했던 시다.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우직녀의 이야기에 비유해 읊은 감성적 시다. 기다리던 화담이 오지 않는 외로운 밤이 깊어가고 그리움만 쌓인다. 황진이는 거문고를 뜯다가 창밖을 내다본다. 어스름 밤하늘에 한 조각의 반달이 눈에 들어온다. 명경 앞에서 다소곳이 앉아 임을 기다리는 처자의 머리를 곱게 단장해주던 얼레빗을 닮았다. 버선발로 달려나가 마중할 화담이 오지 않으니 몸단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얼레빗도 더는 필요하지 않으니 하늘에 던지고 싶다. 황진이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읊조린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崙玉(수단곤륜옥) 누가 곤륜산의 옥을 쪼개어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나
牵牛一去後(견우일거후) 견우가 한 번 떠나간 후
愁擲碧空虛(수척벽공허) 수심에 젖어 머리빗 하늘에 던졌네
옥황상제의 딸이었던 베 짜는 직녀는 소를 모는 동네 총각 견우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맡은 일을 게을리하자 옥황상제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둘이 떨어져 살게 했다. 다만 1년에 단 한 번, 칠월 칠석 밤에 오작교에서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견우를 만나고 돌아온 직녀는 1년 후 다시 만날 때까지 몸을 치장할 이유가 없어졌다. “지아비가 집에 없으면 몸단장을 화려하게 하지 않는다.” 직녀는 머리를 빗던 반월형 얼레빗을 허공에 던져버렸다. 그 얼레빗은 반달(半月)이 되었고, 황진이의 시 ‘영반월(詠半月)’ 시상이 되었다.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는 자신의 처지가 직녀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황진이는 자기가 쓰는 얼레빗을 반달에 비유해 자신의 속내를 한 편의 시에 절절하게 담아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학 소설가께서 故김용덕 교수님께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더러 예전 초등학교 시절의 방학숙제를 떠올리듯 가끔 교수님을 생각하긴 했지만 ‘인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잘 계시겠지요? 이런 치렛말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그곳’, ‘계시다’ 등등의 언어들과도 전혀 무관하실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제 인사는 단지 저 혼자의 회억이고,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전해, 한국일보사가 우리나라 사상 초유인 1000만원의 원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일이 있었지요. 대상은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73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저는 그 몇 년 사이 작품 발표의 지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낙백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광고를 보곤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다시 공개 경쟁에 나서보자. 무명 신인작가의 설움을 씻을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한 조그만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동료 직원들의 양해를 얻어 반년 넘게 소설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신촌의 와우아파트라고 아시죠? 어느 날 한 동(棟)이 와르르 무너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파트. 제가 그 아파트의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딸애가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면 발로 아이를 밀어내면서 원고 칸을 메워나갔지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신문 한 면 가득히 심사평, 당선소감, 인터뷰 등 저에 관한 기사가 실린 다음 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작품을 들고 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학지 편집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작품을 달라지 않나, 미리 장편 출판을 계약하자면서 출판사 사장들이 번갈아 찾아오질 않나(교수님 생전에는 문자메시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요즘은 이런 문장 뒤에는 꼭 ‘ㅎㅎ’ 혹은 ‘ㅋㅋ’ 같은 이상한 부호를 붙인답니다. 옛사람들이 쓰던 ‘가가(呵呵)’와 흡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덕에 화곡동에 마흔두 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으며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고 출판사도 때려치웠습니다.
매일 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 해,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좋은 역사소설거리가 있어서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존함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옆에 있던 ‘종로다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말씀도 적으셨지요. 뒤늦게 셈해보건대, 그때 교수님은 쉰을 갓 넘긴 연세였고 저는 겨우 서른에 올라선 철부지였습니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때 주신 말씀의 대강은, 여러 해 동안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연구를 해봤는데 연구를 할수록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는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할 수가 없다, 누군가 역사에 관심 있는 작가가 이를 소설로 형상화해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관련 저술이 든 노란 봉투를 제게 넘겨주셨지요. ‘역사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작가는 위대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저를 부추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선선히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 또한 이전부터 이 사건에 소설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89년 전주에서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고 이로써 수백 명이 희생을 당한 옥사의 실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송익필 등의 음모론을 실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현대 역사가가 바로 교수님임은 누구도 부인치 못합니다.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조식 같은 선학(先學)은 물론 정철, 유성룡, 이발, 김성일, 이산해, 김장생, 조헌, 허엽, 허봉, 김우옹, 성혼 등 조선 중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죄 이 사건에 관련돼 있었기에 이를 소설화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소설의 한 정점을 긋는 일이며 그 작업은 지난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는 당시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교수님께 약속을 드리고서도 저는 쉬 작업에 들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딴짓거리를 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중에도 그 약속은 무슨 채무인 양 제 심중에 남아 무게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10년이 더 지나서였습니다. 홀연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저는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에 한동안 몸을 떨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쯤이었던가요? 교수님은 또 한 번 제게 서신을 주셨지요. 대전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 지내느냐? 그런 안부의 글이었지만 저는 마치 질책하시는 것만 같아 답장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15년 전쯤 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여겨 방학을 맞아 안동 지례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산골 한옥 뒷방에 들앉아 한 주일 꼬박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500여 장을 만들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한 달 후, 읽어보곤 주저 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2005년 교환교수로 중국 남경에 가 있는 동안은 전초작업이라 여기며 화담 서경덕에 관한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교수님, 종로다방에서 만났던 그 새파란 작가가 어느새 교수님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학 교단에 있다가 재작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그러곤 소설을 쓰겠다고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임시 거처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첫해를 어영부영 보낸 뒤, 올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주말 1300장을 넘겼습니다. 2500장은 돼야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주재하는 동안은 퇴계, 율곡 같은 이도 사료를 근거로 제 의도껏 주물러볼 요량입니다. 제가 이미 율곡 죽은 나이보다 17년을 더 살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1584년에서 1589년, 이 과거 5년의 시간에 몰입돼 있는 요즘의 나날이 제겐 경이입니다. 제 거처에서 5분만 걸어 나가면 김장생이 걸었던 길을 만나고, 차로 10분만 나가면 정여립이 머물렀던 절간 마당에 섭니다. 아, 그래서 누군가가 저로 하여금 이맘때 이곳에 있게 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많습니다. 명랑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새소리도 제겐 16세기 말의 것이 됩니다.
성패는 뒷전으로 돌리겠습니다. 내년 봄날, 상하 두 권짜리 소설책을 존경하는 김용덕 교수님 묘소에 놓을 수 있다면, 종로다방에서 드렸던 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여기겠습니다.
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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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저서로 창작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등.
중년은 인생의 황금기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사람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기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시간과 금전 때문에 미뤘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 전문가로 우뚝 서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서기도 한다. 중년이 만족스러워 중년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의 절정기여서 유혹을 제일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누가 기반을 잡지 못한 청년 혹은 활력이 떨어지는 노인을 유혹하겠는가? 성공한 사람은 권력, 명예, 재물, 이성의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이성의 유혹이다. 가정 파괴와 가족 구성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외도는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외의 이성과 깊은 관계에 빠지는 것이다. 중년에 이성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뭘까? 열심히 살아온 인생, 이제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며 허무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유혹은 이러한 틈새를 타고 시작된다. 외도를 해도 평생 들키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대가를 치른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부모님의 이혼으로 학창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안 올랐고 외톨이처럼 우울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수십 년이 지난 뒤 알게 됐다. 의사로 성공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한 뒤 재혼을 해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친구는 상당 기간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첫째, 유혹에 빠질 환경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인간은 약한 존재다.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한다. 은밀한 만남은 피해야 한다. 유혹을 받을 경우가 생기면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게 현명한 일이다. 둘째,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지만 반드시 그 값을 치른다. 조금만 즐겨보자고 시작한 관계는 결국 인생을 망친다. 마약환자, 도박중독자도 다 그렇게 시작한다. 자신에게 그러한 결단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빠져보고 그만두자는 생각은 위험하다. 순간의 유혹에 빠질 때는 달콤하지만 그 결과는 가혹하다. 유혹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절세미인 황진이의 유혹을 견딘 서경덕은 얼마나 대단한가. 셋째,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나태해질 때야말로 유혹에 빠지기 쉽다. 다윗 왕이 부하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륜에 빠진 것도 전쟁터가 아닌 한가하게 낮잠 잘 때 발생했다. 넷째,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최고의 이상형을 만난 것처럼 느껴져도 살다 보면 단점이 발견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상형을 택한 사람은 그래서 대부분 후회한다.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짧은 인생 한 사람만 죽도록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 최고의 이상형과 사랑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필자는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같이 살기로 약속했으니 그럴 기회가 없지만 말이다.
중년에 어렵게 얻은 가치들을 외도로 날려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순간의 유혹들이 있어도 그때마다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유혹을 이겨낸 인생이야말로 멋진 인생이다. 자만심이나 공허감을 극복하고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우리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또 좀 더 성숙된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본격적인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7월 많은 사람들이 산과 화려한 해변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조금 설레고 기다려지는 달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년과는 조금 다른 조용한 여가를 준비하는 듯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금년 휴가를 조금 조용히 보내고 싶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충북 단양은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운치 있는 여행을 하기 좋은 곳이다.
신라 진흥왕 때 이사부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전쟁에 나가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에 진흥왕은 그들을 포상하고 공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단양에 단양적성비를 세운다. 단양적성비가 있는 적성산성에 올라서면 춘천과 대구를 잇는 중앙고속도로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남한강의 굽이굽이 꺾여 있는 운치 있는 모습이 더 눈에 띈다.
본격적인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7월은 각종 기암괴석과 청풍호 그리고 황정산 산행을 하면서 조금 여유 있고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러 단양의 황정산자연휴양림으로 떠나본다
계절은 마치 초음속 비행기를 타는 듯 가로수에 벚꽃으로 화려했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여름의 입구에 와 있다. 숲은 울창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짙은 녹음을 자랑한다. 황정산휴양림에 도착된 시각은 오후2시. 매표소 앞에서 10분정도 서 있었지만 속옷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햇볕이 뜨겁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것 같다.
매표소에서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캠핑장 지구와 우측으로 해서 조금 더 올라가면 숙박지구가 나온다.
캠핑장으로 가는 길 중간의 계곡이 가로질러 흐르는데 황정교 바로 아래에는 단양8경중 하나인 사인암 축소판과 같은 기암들이 눈의 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고래바위가 휴양림을 당당한 위엄으로 지키고 서 있다.
우측으로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오토캠핑장 8개와 15개의 일반 야영 데크가 있는 캠핑장은 평일 한낮인데도 벌써 캠퍼들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텐트를 설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 조금 젊은 부부가 있어 몇 마디 말을 걸어 이야기를 나눠봤다. 평일에는 사람들이 적어 아이들도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고 조용해서 너무 좋다고 하셨다. 아이들은 낯선 사람이 다가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까봐 작은 선물보따리를 아이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하면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객실지구로 이동했다. 2007년에 개장한 황정산자연휴양림의 객실은 잘 정리된 덕분에 쾌적함을 보인다. 객실은 7인실의 숲속의 집 3동과 6인실 8인실의 연립동(2층 건물)은 2동으로 이뤄져 있다. 101호~104호까지의 연림동 1동은 매표소 뒤편에 위치하며, 201호~204호까지의 연립동 1동은 숲속의 집과 함께 상단지구에 있다. 연립동 2층은 빛이 잘 드는 옥탑방이 있어,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다. 신발을 내 벗고 2층으로 뛰어올라갈 그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붉은 빛깔의 연립동과 숲속의 집은 녹색의 숲과 잘 어우러져 표현 못 할 운치 있는 모습을 자랑한다. 특히 측백나무 객실 앞 진입로에 서서 저 멀리 기암으로 만들어진 ‘올산’을 바라보면 탁 트인 광경에 그동안 쌓여왔던 세상의 시름은 온데간곳이 없다.
이렇게 휴양림 내에서도 황정산 3경(계곡, 고래바위, 측백나무객실 앞)이 만들어 진다. 이곳에서 황정산 자락의 석화봉까지는 1.2km 걸어서 왕복 3시간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저녁 무렵 저녁식사를 하고 캠핑장을 다시 찾았다. 달빛이 비춰지는 캠핑장에는 이용객이 3팀 더 늘었다. 대부분 30~40대의 젊은 캠핑족 이었다. 아이들은 숲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이 한층 더 밝았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텐트와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여름저녁의 캠핑장은 한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비록 규모가 작지만 화려한 여름휴가보다는 단양의 맛과 멋을 알고 조용하고 운치있는 캠핑과 여유있는 힐링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단양 8경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휴양림에서 황정산 3경을 만끽하면서 즐거운 힐링을 하러 황정산자연휴양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호국보훈의 달 6월은 철원에서..
현충일 6.25사변일이 있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남북의 분단으로 아직 우리는 휴전의 상태에서 서로를 향해 많은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다.
철원지역도 그 긴장감을 평상시에도 느낄수 있을 정도로 군용트럭과 군용지프는 지동차의 10대중 1대꼴 쉽게 눈에 띈다.
한반도의 중심부 그리고 남한 제일 북쪽 철원이 봄은 그 긴장감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남부지방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창했다. 오히려 햇볕은 더 따가웠고, 곧 여름이 시작 될 것만큼 기온이 높았다.
곳곳의 군사시설로 민간의 손을 쉽게 허락하지 않아 신비스럽기만 하지만 숲에서 흘러내려오는 맑고 시원한 계곡과 데크로드를 통해 그 속을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복주산자연휴양림 그리고 철원에서 힐링과 안보의 여행을 시작해본다.
대전에서 출발하여 6일과 1일은 철원 와수시장이 서는 날이라 장에 들러 시골장의 풍경을 담고 복주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하니 시가는 어느덧 오후 4시를 가르키고 있다. 낮시간이 길어진 탓에 아직 해는 중천을 갓 넘은 듯 생동감이 넘쳐 있다.
복주산자연휴양림의 가장 큰 자랑은 역시 숲이다. 대부분 강원지방의 숲은 뾰족한 낙엽송, 굵은 금강소나무가 자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곳의 숲은 대부분 활엽수림으로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감돈다. 쪽동백, 생강나무와 오리나무가 모여 울창한 활엽수림을 이루고 곳곳에 낙엽송과 자작나무가 휴양림 외곽을 병풍처럼 안고 있어 입구에서부터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매표소를 지나 순환되는 산책로에 들어서면 옆으로 화려한 벚꽃을 떨어뜨리고 녹색잎으로 갈아잎은 벚나무가 자라고 있다. 다리에서 좌측은 산림문화휴양관, 연립동, 숲속의 집이 있는 숙박지구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쳐 조금더 위로 올라가면 복주산(1,152m)로 올라가는 등산로로 연결된다.
하단부에서 용탕폭포까지는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다.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데크로드에 들어서면 복주산에서 흘러드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에 옆사람과 대화를 쉽게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게 흐른다. 또한 각종 활엽수림이 터널을 만들어 햇볕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산책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계곡을 따라 데크로드를 이용하여 10분정도 올라가면 복주산자연휴양림의 제1명소인 용탕폭포를 만날 수 있다. 옛날 옛적 용으로 승천하기 위해 천년을 기다렸던 이무기가 저주에 묶여 승천을 하지 못하고 복주산계곡 이곳저곳을 누비다가 어느날 천둥이 치고 저주가 풀리면서 승천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 전설은 굽이굽이 꺽인 계곡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순환하는 데크로드를 따라 다시 숙박지구로 내려오면 휴양림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계곡을 볼 수 있는데.. 무더웠던 날씨로 더위를 식히려 계곡으로 내려와 발은 넣는순간 짜릿한 차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금방 발은 빼게 된다. 역시 강원도 계곡은 차갑다.
휴양림의 숙박지구는 2층 건물의 ‘산림문화휴양관’과 휴양관 아래의 ‘숲속의 집’과 ‘연립동‘이 한 곳에 모여있다. 휴양림의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윤기완 주무관은 숙박지구와 산책지구가 완전히 분리되어야 완전한 힐링을 할수 있다며 숙박과 산책을 분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연립동은 최근에 신축되어 쾌적한 시설과 전망이 좋다.
저녁이 되면서 붉게 물들어가는 일몰을 감상하고 아침의 휴양림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한 몸에 받는 것은 힐링의 정점이 된다. 할머니와 손녀가 손잡고 운동을 하는 모습과 어린아이가 밖에서 조금 더 놀다가 들어가고 싶은지 때를 쓰는 모습도 보이는데.. 역시 휴양림은 레저의 공간이 아닌 가족이 함께 추억을 만드는 장소이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 않게 소박한 복주산자연휴양림. 6월은 다소 엄숙하고 숙연해지는 시간일지 모르지만.. 6월과 딱 맞는 복주산자연휴양림에서 제대로 힐링한번 해보자!
올해는 봄이 빨리 왔다가 빨리 간다는 뉴스를 접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예년에 비해 화려한 벚꽃이 빨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벚꽃이 지고 녹색의 잎이 돋아나면 이제 따뜻한 봄이 가고 곧 여름이 올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봄을 포괄적으로 볼 때 녹색의 푸르름이 가득한 생동감 넘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화려한 봄꽃은 떨어졌지만 절기상 봄의 중심은 5월이 아닐까 한다.
특히 경북 문경에 위치하는 대야산자연휴양림은 눈이 가는 곳마다 녹색의 푸르름과 생동감있는 변화를 볼때 지금이 봄의 절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용추계곡으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와 파릇파릇한 새싹 그리고 시원한 바람에 소리를 내면서 늬엇늬엇 춤추는 조릿대 숲은 완연한 봄을 느끼기에 아주 좋은 시기이다.
대야산자연휴양림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 중 하나는 용추계곡이 가장 으뜸으로 손꼽힌다. 가은읍에서 괴산군 칠성면으로 넘어가는 지방도를 따라 선유동계곡 입구를 지나 1㎞정도 더 올라가면 대야산자연휴양림의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용추계곡으로 올라가는 길과 휴양림을로 올라가는 길로 계곡에 의해 나눠지는다. 여기서부터 용추계곡의 비경이 조금씩 드러난다. 오리나무와 오동나무 그리고 굴참나무에서 돋아나는 작고 노란 잎들은 시원한 계곡의 모습을 더욱 화려하게 수식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철쭉이 온 숲을 울긋불긋하게 만들었다. 하얀 벚꽃이 떨어지니 철쭉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휴양림 곳곳에 피여 있다.
우측으로는 용추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주 진입로에서 용추계곡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용추계곡은 용이 승천하면서 생긴 계곡의 작은 웅덩이다. 계곡안내는 남부지역팀 정상수 사업팀장께서 해주셨다. 팀장님 말씀에 의하면 용이 승천하면서 큰 몸짓으로 웅덩이 양 끝을 긁고 지나갔다고 하시는데 긁힌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전설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하트무늬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는 시원한 계곡은 휴양림의 전부를 말하는 듯 하였다.
다시 주 진입로로 나와 객실지구로 올라가면 연립동 4동과 1동의 산림문화휴양관이 있다.
울창한 참나무와 조릿대가 많이 자라고 있어 웅장함보다는 따뜻한 느낌을 많이 주며, 봄바람으로 조릿대는 쉼 없이 “쉬~쉬~”소리를 내면서 흔들흔들 좌우로 흔든다. 저녁에도 온도가 많이 낮지 않아 간단히 운동하는 이용객이 눈에 띄었고, 젊은 부부의 사랑스런 모습에 카메라에 잡혔다.
이튿날 새벽부터 작은 가랑비가 떨어진다. 하지만 저 멀리 장군봉 등의 능선에는 햇볕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봐서는 아마 지나가는 비일 것이다. 오늘은 2일과 7일에 열린다는 문경 5일장과 문경세재를 방문하기 위해 아침부터 길을 나선다.
대야산자연휴양림은 2009년에 개장하여 아직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군살 없는 탄탄한 몸매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절제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봄의 끝자락에 접어드는 5월.. 가벼운 산책 그리고 용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용추계곡으로 힐링여행을 떠나보는 것을 어떨까?
서경덕의 전국 유명 휴양림을 찾아서
강원도는 혼자 떠나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원주를 지나 본격적으로 강원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울창한 산림은 인간의 손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듯 우뚝 솟은 모습에 항상 든든함을 느낀다. 얼마 전 강원지방에 폭설이 내린 덕에 이곳은 마치 하얀 종이에 묵으로 선을 이리저리 그어 놓은 듯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산봉우리 곳곳에 걸려 있는 구름은 그 산수화를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아깝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흠뻑 취해 있을 때는 그 누군가와의 대화로 그 기분을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을 다녀도 횡성으로 향하는 내내 강원도의 멋진 자연환경을 바라보는 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둔내IC에서 나와 둔내면소재지 방면으로 이동 후 강원도 평창으로 연결되는 옛 영동고속도로인 19번 군도를 이용하면 청태산자연휴양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청태산자연휴양림에서 이번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청태산자연휴양림이 위치하는 둔내는 조선 역사지리지 ‘여지도서’에 따르면 둔전에서 수확되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는 곳이라 하여 둔창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됐고 둔창이 있는 곳이라 하여 둔창내로 불리다가 지금의 둔내로 바뀌었다고 한다.
청태산(1200m) 북쪽 자락에 위치하는 청태산자연휴양림은 잣나무 숲 가운데 위치해 사시사철 푸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은 관동지방으로 향하다가 지금의 청태산휴양림 자리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청태산의 산세가 아름답고 큰 바위가 있어 놀랄 만하다고 하여 청태산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횡성 수령에게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입구에서 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겨울왕국’의 모습으로 또 한 번의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 몸보다 굵은 잣나무와 전나무는 휴양림 입구에서 웅장함과 풍성함을 더해준다.
잣나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피톤치드 향을 맡으면서 매표소로 올라간다. 매표소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잔디광장으로 연결되는 진입로, 왼쪽은 숙박시설로 연결되는 진입로다.
먼저 왼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또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약 1.2km 떨어진 곳의 제2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숲속의집과 제1산림문화휴양관으로 이어진다.
4~9인실의 숲속의 집은 잣나무 숲 아래에서 저마다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굵직한 잣나무 숲 아래에서는 피톤치드를 연신 뿜어내듯 상쾌한 기분에 그동안의 스트레스는 온데간데없어진다.
4인실에서 8인실로 구성되어 있는 산림문화휴양관은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복도를 이용해 방으로 들어가는 특이한 구조다. 방에 들어가면 잔디광장으로 창이 있어 멋진 휴양림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다. 재계단은 사람이 올라갈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 ‘아~ 내가 정말 숲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청태산자연휴양림은 역시 잣나무 숲 아래 놓인 데크로드가 힐링의 최고봉이다.
제1산림문화휴양관 뒤편에서 야영장으로 이어지는 건강숲길까지 데크로드가 설치돼 있다. 평일임에도 등산객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고, 태어나서 숲이라는 곳에 처음 오는 어린 친구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충청북도 청원과 청주를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져 있는 상당산성은 조선시대 대표적 석성이다. 백제시대 토성을 조선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지금은 사적 제21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상당산성 정상에 서면 청주시내가 한눈에 훤히 보인다. 상당산성 북쪽 자락에 위치하는 충북 청원의 상당산성 자연휴양림은 국립자연휴양림 중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고 2012년 개장돼 쾌적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상당산성 자연휴양림이 있는 충북 청원은 조선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 대표 석성인 상당산성을 비롯해 세종이 60일 동안 머물면서 눈병을 고쳤으며, 세조도 피부병을 치료했다고 전해지는 세계 3대 광천수 중 하나인 초정약수가 있는 곳이다. 또 동학, 천도교 그리고 독립운동가 중 대표적 인물인 손병희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매표소를 지나 산림문화휴양관으로 향하는 진입로에는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저마다 잎을 떨어뜨려 바닥 곳곳에는 낙엽으로 가득했다. 오른쪽에는 중부지방산림청 보은국유림관리소에서 잘 보존하고 가꾸고 있는 참나무숲이 손님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휴양림 입구에서 임도를 이용하면 휴양림 외곽을 산책(약 1시간 30분 소요)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상당산성(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약 1시간 소요)와 휴양림 시설지구로 연결되는 산책로도 잘 정비돼 있어 산행하기에도 좋다. 휴양림 왼쪽에는 비교적 큰 잔디구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축구와 발야구 등 야외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또한 원반을 던져 바구니에 집어넣는 프라잉디스크 시설도 있어 간단한 레포츠 또한 가능하다.
휴양림 상단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숲속수련장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1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세미나실과 식당이 갖춰져 있다. 숲속수련장 옆 건물에는 2층 규모의 숙박시설인 산림문화휴양관이 있다. 산림문화휴양관은 6인실 4개와 7인실 6개로 구성된 숙박시설이다. 객실의 현관문을 열면 쾌적해 당장 눕고 싶은 생각이 든다. 창문을 열고 테라스에 팔을 괘고 서 있으면 깊은 산자락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소리와 새소리로 잠시나마 힐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상당산성 자연휴양림은 규모가 아담하지만 접근성과 쾌적성, 다양성을 모두 갖춘 알찬 힐링 장소다.
2014년 말의 해에는 상당산성 자연휴양림이 말처럼 거침없이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 상당산성 자연휴양림에서 힐링으로 새해를 시작해 보자.
오대산 자락 가장 북쪽 그리고 첫머리에 위치한 방태산(1435m)은 구룡덕봉(1388m)과 주억봉(1443m) 등의 능선으로 연결돼 있는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 오지다. 국내 최고·최대의 자연림을 이루고 있어 산림이 울창하며 원시 형태로 잘 보존돼 있다. 계곡이 깊고 큰 산으로 이뤄져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며 희귀식물과 어종이 풍부하다.
1997년 개장한 방태산자연휴양림은 구룡덕봉과 주억봉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수원 덕분에 수량이 풍부하고 마당바위와 이단폭포가 방태산자연휴양림의 랜드마크를 이뤄 멋진 절경을 자랑한다.
방태산 숲은 피나무, 박달나무, 소나무, 참나무류 등 수종이 다양한 천연림과 낙엽송 인공림으로 구성돼 계절에 따라 녹음, 단풍, 설경 등 자연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열목어, 메기, 꺽지 등의 물고기와 멧돼지, 토끼, 꿩, 노루, 다람쥐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마당바위와 이단폭포는 방태산자연휴양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특히 이단폭포의 주변 활엽수림은 가을철 단풍이 들면 폭포와 단풍이 딱 들어맞게 잘 어울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에 담기위해 산행객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이 새벽부터 휴양림 입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린다고 한다.
휴양림 입구에 있는 매표소를 통과하면 숲으로 올라가는 외길의 진입로가 있다. 진입로 우측에는 방태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국립자연휴양림 중에서 숲과 계곡이 잘 어울어진 휴양림 중 하나다.
매표소에서 약 1km 상부에 위치하는 곳에는 산림문화휴양관과 숲속의 집 그리고 마당바위가 있다. 산림문화휴양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제1야영장이 있는데 이곳은 10개의 야영데크가 설치돼 있다. 신갈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참나무류가 적절한 공간을 두고 자라고 있으며 곳곳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사이좋게 잘 자라고 있다.
상부로 10분 정도 더 올라가면 이단폭포를 만나게 된다. 이단폭포를 지나 제2야영장까지 올라가면 숲은 조금 더 원시의 형태를 자랑한다.
방태산자연휴양림은 방태산의 주억봉, 구룡덕봉의 산행자들에게 더 잘 알려진 휴양림이다. 온 숲이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옷을 입는 가을의 절정인 10월에는 방태산자연휴양림에서 가을의 정취에 흠뻑 취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