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훈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
온라인 게임에서 통용되는 단어인 본캐와 부캐. ‘본캐’는 주로 사용하는 본래 캐릭터, ‘부캐’는 본캐 생성 이후 만든 부차 캐릭터를 말한다. 근래 유명인들이 기존과는 다른 활동명과 캐릭터로 대중의 인기를 끌며 ‘부캐 열풍’이 일기도 했다. AI 전화 돌봄 서비스 ‘클로바 케어콜’을 성공적으로 이끈 옥상훈(53)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에게도 그런 부캐가 있다. 바로 인스타그래머 ‘컵누들러’다. 아직 본캐만큼 왕성하진 않지만, 여러 가능성을 품고 일상의 감칠맛을 더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캐를 일컬어 ‘히든캐’(숨겨진 캐릭터)라고도 부른다.
먼저 본캐 이야기부터 해보자. 본캐 타이틀은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 얼핏 앞뒤 키워드만 떼어 보더라도 국내 굴지의 IT 기업인 네이버에서 특정 사업의 리더인 셈인데, 일단 본캐의 레벨도 심상찮게 느껴진다. 참고로 사스(SaaS)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를 뜻하는데,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네이버클라우드’다. 옥상훈 리더는 한마디로 자신의 역할을 ‘BD’라고 소개했다. 여기에도 본래 뜻과 그만의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흔히 업계에서 BD라고 하면 비즈니스 디벨로퍼(Business Developer)를 말합니다. 직역하면 사업 개발자인데, 대개 새로운 사업에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담당하죠. 그것도 맞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비즈니스 디자이너(Business Designer)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AI 생태계를 만들어 클라우드 사업을 키우고 파트너로 성장시키는 과정이 비즈니스를 디자인하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같은 단어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본캐의 전환, 본업 모먼트 시작
옥상훈 리더의 대학 시절로 거슬러가 보면, 그때도 본캐와 부캐가 있었지 싶다. 한양대학교 90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생물학이 전공임에도 늘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더랬다. 그러다 졸업할 즈음 IT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았는데, 마침 관련 업계에서 개발자를 양산하던 분위기였다. 부캐도 쏠쏠히 키운 덕에 그는 IT 세계로 진입해 SI(System Integration) 개발자가 될 수 있었다. 부캐가 본캐로 전향된 것이다.
이후 본캐를 성장시키며 네이버와 인연을 맺었다. 2011년 입사 후에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아닌, 관련 사업을 만들고 제휴 맺는 업무를 맡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10여 년간 네이버 개발자센터 개편, 오픈 API 표준 제작, 네이버 D2 스타트업 팩토리 론칭 등 수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해왔다. 최근 그가 집중하는 사업은 전화 돌봄 서비스 ‘클로바 케어콜’이다. AI 기술을 적용해 어르신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기억까지 해내는 혁신적인 서비스로 주목받고 있다.
“코로나를 계기로 시작된 사업이에요. 당시 코로나 감염자에게 발열 여부 확인 전화를 사람이 일일이 했는데, 어느 순간 확진자가 대폭 늘어나며 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됐던 거죠. 처음에는 성남시와 협력해 전화 업무를 AI로 대체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후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도입하는 지자체가 더 많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서비스를 이용하는 지자체 쪽에서 아이디어를 주시더군요. 발열 여부만이 아니라 독거노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서비스로도 가능하겠느냐고요. 그렇게 부산 해운대구랑 도모해 처음 케어콜을 선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초반 성적은 저조했다. 실제 사용자인 독거노인들이 보인 만족도는 50% 남짓이었다. 옥상훈 리더는 실패에 가까웠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기술을 고도화해나갔고, 생성형 AI와 하이퍼 클로바 기술 등을 적용했다. 초기 버전에서는 AI와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해나가며 발전을 이뤄온 것이다.
“아무래도 대상자가 어르신이다 보니 AI 기술에 익숙하지 않으셨죠. 때문에 최대한 AI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 덕분인지 업그레이드한 서비스로 조사했을 때는 90% 정도의 만족도를 나타냈습니다. 놀라운 성장이죠. 그런데 이런 피드백이 있더라고요. AI가 말귀도 알아듣고 공감해주는 건 좋은데, 이전 대화를 기억 못 하니 얘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문제였죠. 결국 2022년에 기억하기 기능을 탑재해 출시했어요. AI가 질환이나 병원 이력 같은 걸 기억해주는 덕분에, 이제는 케어로봇처럼 어르신들의 건강관리 쪽으로 발전 가능성을 보고 있어요. 아직은 독거노인이나 취약계층으로 대상자가 한정되지만, 장차 누구나 자기 편의에 맞게 맞춤형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전망합니다.”
상극의 맛을 더할 때 최고의 궁합
본업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에도 그의 시선은 호시탐탐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촬영 소품으로 기자가 준비한 컵라면. 비닐봉지라는 베일에 가려진 컵라면들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제 본캐는 접고 부캐 이야기를 해보자고 운을 떼자,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여기에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웃음) 좀 꺼내봐도 될까요? 이야, 다 새로 나온 것들이네요. 아직 못 먹어본 것들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골라오셨어요?”
옥상훈 리더는 신기한 듯 물었지만, 방법은 간단했다. 그의 인스타그램을 봤기 때문이다.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400여 가지 컵라면 리뷰가 올라와 있는데, 첫 사진은 늘 위에서 찍은 컵라면 뚜껑이다. 메인 페이지만 봐도 그가 어떤 컵라면들을 먹었는지 한눈에 보인다. 리뷰도 간단명료하다. 면발, 맵기, 염도 등을 5점 만점으로 표기하고, 총평도 한두 줄 정도로 짤막하게 남긴다. 올리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편리한 방식이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있었다. 컵라면 종류가 워낙 많아 특정 제품의 리뷰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맞습니다. 저도 늘 새로운 컵라면을 사려고 하는데, 가끔은 ‘이걸 내가 먹어봤던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오죽하면 아예 내가 컵라면 검색 엔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그런데 뭐 마음만 먹고 아직 시도는 못 해봤습니다.”
지금의 컵라면 리뷰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시점도 클로바 케어콜이 탄생한 시기와 맞물린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며 바깥에서 타인과 식사하는 일이 어려워진 터였다. 혼자 먹는 식사이니 간편하면서도 기왕이면 요리다운 메뉴였으면 했다. 그 두 가지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게 컵라면이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컵라면을 잘 안 먹었어요. 그런데 계속 먹다 보니 나름의 철학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항상 이야기하는 건 ‘컵라면은 요리’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저 인스턴트식품 정도로 치부하지만 저는 하나의 요리로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궁극의 맛을 잘 응축해서 편리성을 극대화한 형태잖아요. 물만 부으면 끝나니까요. 게다가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면발 상태나 수프, 건더기 맛도 다양하고 훌륭해졌어요. 또 컵라면끼리 조합해서 먹어보는 것도 흥미롭죠. 가령 짜장과 짬뽕, 크림소스와 매운소스처럼 상극의 맛을 더할 때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아요. 또 이건 저만의 팁인데 짜장컵라면에 콜라를 한 숟갈 정도 넣어보세요. 단맛이 확 우러나서 훨씬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어요. 그거 말고도 팁은 무궁무진해요.”
컵라면 이야기라면 밤을 새도 모자라다는 옥상훈 리더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며 컵라면 먹는 일도 줄었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부캐의 장점 중 하나는 표면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큰 타격이 없다는 것 아닐까. 본캐처럼 책임이나 강박을 느낄 필요도 없다. 마음이 동하는 대로 이따금씩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만족이 된다. 그 과정에서 얻는 일상의 즐거움과 신선함은 덤이다.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새로운 컵라면을 찾았을 때예요. 라임 향 나는 컵라면이나 침대 회사에서 사은품으로 특별 제작한 컵라면을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도 잊을 수 없네요. 그렇게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맛을 찾아가는 게 참 흥미로워요. 편의점을 가더라도 컵라면 코너부터 둘러보고, 해외나 낯선 지역에 가도 컵라면부터 확인하죠.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게 편의점이고 컵라면인데, 손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또 그런 경험을 기록해가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나름 잘 정리해놓은 거라 라면 회사에서 제안이라도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아직 깜깜 무소식이네요.(웃음)”
본캐를 성장시키는 힘, ‘통찰력’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부캐를 키워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은퇴 이후쯤이 될 테다. 아직은 본업에서 할 일이 많고, 아직 학생인 아이들을 키우려면 더 오래 현업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다. 늘 선도하고 혁신을 일으키는 분야다 보니, 그에 따른 고충도 있으리라. 실제 그와 동년배인 50대 직장인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MZ세대의 문화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물론 그도 때때로 버거움을 느끼지만 독서와 학습을 통해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편이다. 일련의 노력을 통해 그가 본업에서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분야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가령 클로바 케어콜의 경우에도 지자체로 치면 100곳, 사용자로 치면 2만 명 정도 되는데요. 더 다양한 범위로 확장해서 사업적 성과를 이루는 동시에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사실 기술이라는 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과 도구이지, 어떤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기술들이 합리적인 비용으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면 꽤 의미 있는 성과가 아닐까 합니다.”
옥상훈 리더는 IT나 신기술 관련한 책뿐 아니라 새로운 분야의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책도 고루 섭렵 중이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인생에서 중요한 건 결국 ‘통찰력’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끝으로 그에게 다소 엉뚱한 말을 던져봤다. ‘자신의 인생과 컵라면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윽고 우문현답이 나왔다. 그간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든 컵라면이든 결국 ‘맛’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잘 숙성되고, 그것이 우러나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죠. 정말 괜찮은 컵라면은 물을 붓기 전에도 그 가치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뜯기 쉬운 포장, 친절한 설명글, 풍부한 건더기 등. 역시나 먹어보면 맛도 진국이죠. 반면에 별로인 컵라면은 겉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정말 대충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 같아요. 스스로가 만든 인생의 가치를 정성스럽게 담아내고, 잘 표현해야 하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너무 맛없어서 못 먹고 버린 컵라면이 딱 두 개 있는데요. 제 인생도 잘 가꿔서 누군가에게 버려지지 않고, 좀 먹을 만한 컵라면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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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도쿄필 내한공연
★5월 7일, 11일 공연은 조성진과 협연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 정명훈이 오랜 인연을 쌓아온 도쿄필하모닉과 내한한다. 19년 만의 정명훈X도쿄필 공식 내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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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청보리밭축제
★4월 20일부터 5월 12일까지
21회째를 맞는 이번 청보리밭축제 주제는 ‘초록물결 음악노트’. 드넓은 청보리밭을 무대로 다양한 음악공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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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임영웅 콘서트
★5월 25~2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임영웅의 티켓 파워가 다시 한번 입증됐다. 10만 석 전석 매진. 불법 거래 건은 사전 안내 없이 취소되니 암표 거래는 금물!
4
2024 서울페스타
★5월 1~6일까지, 서울 곳곳에서
5월 초 서울이 축제로 물든다. 주제는 ‘인조이 올 댓 서울’. K-POP 콘서트부터 로드쇼, 삼겹살 파티, 플레이 게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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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우주항공축제
★5월 4일부터 6일까지
한국형 최초 발사체 나로호와 누리호의 실물체를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다. 같은 기간 노로도에서 청정수산물 축제도 함께 열린다.
6
뮤지컬 ‘다시, 봄’
★5월 8일부터 6월 7일까지
중년 여성들의 인생 2막을 그린 뮤지컬 ‘다시, 봄’이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왕은숙, 문희경, 오성림, 예지원, 황석정 등 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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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녀장려금 제도
★신청은 5월 1일부터 31일까지
2024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 신청을 5월 내내 받는다. 올해부터 소득 요건이 기존 3800만 원에서 4400만 원으로 완화됐다.
는 노인 인식을 개선하고 세대 갈등을 해소할 여러분들의 사연을 기다립니다.
에디터 조형애 디자인 유영현
어쩌면 누군가는 ‘복길이’ 이미지에 가둬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를 벗기 위해 김지영은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덧 데뷔 30년 차 배우가 됐는데, 이제는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연기학과 교수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으며, 삶을 관망하는 여유도 생겼다. 유명인과 일반 대중의 관계는 ‘인기’로 증명되는 터. 그는 “인기란 야속한 것 같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면서 양면성을 언급했다. 현재는 큰 인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들한테 인기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희귀병을 앓아 부모님 속을 썩였다고 생각하는 딸이기에 자식을 향한 애정이 더욱 특별하다.
‘전원일기’와 가족의 탄생
MBC ‘전원일기’와 복길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복길이 이미지 때문에 다른 역할을 못 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도 많이 보고, 사이코패스 악역, 유흥업계 인물 등 갖은 역할에 도전해봤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복길이로 인해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죠. 나이 들고 보니 배우로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라도 있으면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마운 작품이죠. 그리고 좋은 선배님들과 호흡하면서 연기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전원일기’는 결국 저의 학교였다고 생각해요.
SBS ‘토마토’에서 악역 연기를 펼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때가 전성기였을까요?
MBC에서 ‘그대 그리고 나’(1997년)로 신인상을 수상한 후라 자신감이 올라와 있었죠. 악역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겠단 생각에 출연했고, 촬영도 재밌게 했죠. 광고도 그때 제일 많이 찍었어요. 그렇다고 그때를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매번 진심을 다해 연기해서 작품 할 때가 늘 전성기라고 느껴요.
남성진 씨와는 동료에서 남편이 된 케이스인데, 관계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전원일기’를 8년간 촬영하면서 정말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냈죠. 이후 남편의 고백으로 사귀었는데 연애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어요. 그중 5개월은 제가 중국에서 촬영했죠.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이 없는데 바로 결혼하려니 조금 무섭고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우정과 사랑을 구분 못 한 것이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사람, 내 가족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면서 사이가 깊어졌고, 고마워하고 있어요.
부부간 소통은 어떻게 하세요?
저희 부부는 성격이 극과 극이라서 지금도 종종 싸워요. 남편이 화가 많고, 버럭하는 스타일이에요. 불 같은 성격이죠. 그래서 말다툼으로 번지는데, 다행히도 저희 둘 다 금세 잊어 버리곤 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의견 차가 커도 남편한테 ‘고쳐줬으면 좋겠어’, ‘맞춰줘’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편의 말에는 짜증이 섞여 있지만, 내용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요. 그래서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가 될 때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려고 해요. 특히 아이 문제로 대화할 때는 아이의 생각을 가장 먼저 수렴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내리죠.
얘기를 나눠보니 아드님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이가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할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게 제 꿈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 네 삶이 너무 없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게 제 삶이라고 생각해요.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이 옆에 많이 있어 주려고 노력했어요. 평소에는 편지나 메모를 남겨서 마음을 표현했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죠. 그런데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되고 여자 친구가 생기면 나와 놀아줄 시간이 있을까 싶어요.(웃음)
과거 방송에서 보니 아드님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던데요. 3대 배우 가족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부모님, 조부모님한테 먹칠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더라고요. 그 부담감은 당연한 것 같아요. 저도 시부모님이 배우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남편은 평생 그 부담을 안고 살았죠. 우리 아이는 그 부담이 배로 커진 거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연기가 정말 하고 싶으면 해라. 너의 색깔을 찾으면 된다’고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인 배우 김용림 씨와의 고부 관계가 특히 주목받는데요.
굉장히 순탄한 고부 관계라고 생각해요. 같은 분야에 있으니까 잘 이해해주세요. 제가 종갓집 며느리인데 촬영 때문에 제사를 못 지낼 때도 있고, 촬영이 늦어져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갈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 어머니께서 이해를 넘어 ‘얼마나 힘드니’라고 위로해주시죠. 그런데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섭섭했던 부분을 말씀하시면, 저도 속상한 점을 얘기하기도 하죠.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이 20년 이나 되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어떠신지 알겠더라고요. 전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달려갑니다.(웃음)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부모님에게는 어떤 딸이었나요?
어릴 때부터 희귀병으로 몸이 약했으니까 늘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부모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었어요.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몸도 안 좋은 애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겠죠. 그런 마음을 아니까 창피하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어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느 순간, 너무 우리 애만 챙기느라 부모님에게 신경을 못 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회가 남지 않게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합니다.
희귀병 투병으로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겠어요.
등에 혈관이 엉겨 붙는 혈종이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가족들이 저를 살려보겠다고 별걸 다 해봤는데,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유서를 써놓기도 했어요. 말로 전하지 못한 얘기들을 남겨놓기도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수술 후 완치돼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주어진 삶이 감사하고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찌 보면 배우 활동이 체력이 강해진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제 50대가 되었는데, 중년 배우의 삶은 어떤가요?
20대 때는 작품을 한 번에 2~3개씩 하면서 바쁘게 보냈어요. 결혼 후인 30대, 40대 때 삶도 안정되고, 연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게 됐죠. 5년 전쯤부터 선배로서 안주하고 싶지 않고, 변화와 발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려고 했죠. 선배님 또는 감독님이 부르면 예술 영화도 카메오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예술대학교 연기예술과 학과장을 맡은 지도 7년이 됐네요.
저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선배라고 생각해요. 먼저 연기한 사람으로서 습득한 기술을 알려주려고 하죠. 오히려 제가 열정을 수혈받고 있어요. 사실 연기 활동을 하면서, 아이도 돌보면서, 학교 일도 하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학생들과의 연계성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김지영에게 ‘관계’란 무엇일까요?
저는 소심하기도 하고, 관계에 예민한 편이에요. 지인들에게 마음 표현도 잘 못 했는데, 이제 용기 내서 먼저 다가가려고 해요.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죠. 그런데 중요한 건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좋은 관계도 성립되고, 많은 상처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또 너무 애쓰지 않아야 재밌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Bravo Question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감사한 마음 아닐까요. 저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마음을 간과하느냐, 신경 쓰고 있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한데, 그 마음을 품고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렇게 힘이 큰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하나하나 쌓여서 저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고, 제가 하고 싶은 일도 하나하나 이루어온 거죠.
‘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들이 있다.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 가운데,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대표 인물로 꼽아봤다. 그들은 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장관을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김수환 추기경의 소통법
“여기 명동대성당부터 명동역을 넘어 신세계백화점까지 조문 행렬이 이어졌죠. 지금도 장례식 때의 장관을 잊지 못합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이자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 홍보를 담당한 허영엽 신부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후 5일간 명동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기간 동안 방문한 추모객은 약 40만 명에 이른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많았다. 허 신부는 “우리 사회 어른으로서 추기경님의 존재감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허영엽 신부. 신학대 학생 시절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한 그는 김 추기경과 처음 만났는데, 당시를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학생인데도 편안하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울대교구 홍보팀에 있으면서 김 추기경과의 만남이 종종 있었지만, 같은 성당에서 함께 지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얘기하는 대표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통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되며, 대표적으로 1987년 6·10 항쟁이 언급된다. 당시 대학생들은 피신을 위해 명동대성당에 들어왔고,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품어줬다.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김 추기경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다.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추기경은 교황 선출권을 가진 최고위 성직자다.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낮추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려고 했다. 힘들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달동네를 찾아다녔고, 일자리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인간적으로 연민이 많고 늘 베푸시는 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희망을 북돋아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선종 당시 김 추기경의 통장에는 1000만 원 정도의 잔액밖에 없었다. 그 돈마저도 신도들에게 묵주를 선물하라는 말을 남긴 터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왜 어른으로 통했을까. 허영엽 신부는 ‘소통법’이 답이라고 봤다. 허 신부는 “추기경님은 대화할 때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한다. 진심이 느껴진다. 대화의 시간을 그냥 때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기쁨을 느끼셨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에게 그동안 받은 편지는 지금도 값진 선물이다. 허 신부는 “크리스마스 때 신부, 수녀 등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주셨는데, 상투적인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하나하나 기억한 내용이 담겼다”면서 본받고 싶은 인간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무엇이 됐든, 상대방이 누구든지 간에 ‘어떻게 생각해?’라고 먼저 물어보고 상대방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다. 그 후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으면 바꾸기도 한다. 생각의 유연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분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허영엽 신부는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됐는데, 그중에서도 세대 갈등이 악화된 것을 우려했다. 이는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5060세대와 2030세대 간 갈등 요인을 묻는 질문에 ‘소통이나 세대 이해의 부족’(36.0%)이 1위를 차지했다. 나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소통하려고 했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어른이 필요한 이유다.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는 아랫사람도, 윗사람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책임감 있는 어른의 자세 아닐까요? 추기경님께서는 선종을 앞두고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큰어른이었던 추기경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집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를 지향하는 것일 테지요.”
◇이어령 장관의 감수성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영인문학관’. ‘영인’은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와 붙였다. 이곳에서는 이어령 장관의 문화적 업적과 철학을 되새길 수 있다. 현재도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시간이 갈수록 선생이 더 그리워진다. 60여 년을 늘 옆에 있던 사람이니까. 혼자 있는 걸 좋아했기에 벌을 받는 건가 싶기도 하다”고 마음을 표현했다.
강인숙 관장은 동갑내기 남편을 ‘이어령 선생’이라고 불렀다. 남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 관장은 “한눈 팔지 않고 원하는 길만 걸어간 선생의 용기를 존경한다”면서 “그와 함께하면서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정직성의 중요성을 알았고, 내 삶에서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은 가장으로서도 어른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강 관장은 “선생은 평생 직장 두 곳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바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고 책임감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했던 이유도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분이다”라고 답했다.
문학인부터 문화부 장관까지 직업도 다양했던 이 장관은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다. 다 좋아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따른다는 그는 “먹고 놀면 안 된다. 놀면서 먹어야 한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장관이 즐기면서 일하는 시간이 쌓이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의 글과 말, 즉 생각에서 배움을 얻었다. 강인숙 관장은 “이 선생은 팬이 많았다. 남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감동받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서 “팬은 정신적인 면에서 친지나 제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이 좋은 영향을 끼치는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유에 대해 강인숙 관장은 “여러 분야를 어우르는 지식, 미래를 투시하는 안목, 독보적인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 이 장관은 고독했던 것 같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저)을 보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척을 할 뿐이라면서, 모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고, 혼날 것이 두려워서 고분고분 둥글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전한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질문자의 삶을 산 이어령 장관은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라고 고백했다. 또한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모든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이어령 장관은 존경받았으나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살았을까. 강인숙 관장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얼마 전에 이 선생의 2주기였어요. 어느 회사의 회장인 제자가 큰 꽃을 집에 보내왔어요. 당시 저밖에 없어서 꽃을 방까지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죠. 연세가 많은 기사분이 꽃을 나르다가 선생의 사진을 보더니 짐을 내려놓고 넋을 잃은 채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애독자였다’면서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꽃 보내는 사람과 꽃 배달하는 사람 모두 진심으로 선생을 사랑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지금도 선생을 스승이라고 말하는 제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걸 보면, 이 선생은 잘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 서른 바퀴 넘는 길을 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은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 불릴 만큼 한국 해외여행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1958년부터 시작한 세계여행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에 이른다. 당시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때일 뿐 아니라 세계여행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걸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예나 지금이나 두말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여행의 아이콘이다. 하늘도시 영종에 그가 있다.
여신(旅神)이 내게 있어 내게 무슨 특혜를 베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매양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난은 인간 수업에 있어서 고귀한 경험들이었습니다.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 18쪽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을 기억하다
여행가 김찬삼 교수(1926~2003)는 인천인이며 세계인이다.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인 인천시 중구에서 성장하고 생을 마쳤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지리 교사와 대학에서 지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죽은 지식”이라며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찬삼 교수의 여행 이야기를 인천의 하늘도시 영종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와 공원이 어우러진 영종역사관은 봄을 코앞에 둔 계절에 여행가의 기획전시를 보여주는 중이다. 영종역사관 3층에서 열리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특별기획전’은 3부로 나뉘어 전시된다.
1부는 ‘세계를 꿈꾸다’ 편으로 김찬삼 교수가 세계인의 꿈을 키웠던 인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면모와 여행가로서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이 피부로 느껴진다. 2부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편. 세계여행의 경로와 여정이 담긴 기록들을 귀한 자료들과 함께 소개했다. 세계일주의 첫 여행지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40여 년 동안의 여행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는 ‘만인의 스승 김찬삼’으로 세계의 현장을 바탕으로 교육자로서 직접 보고 느낀 여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성장해온 인천과 후반기의 안식처였던 영종과 영종인으로서의 인연을 조명했다.
전시품 중 김 교수와 늘 함께했던 낡은 배낭과 모자와 신발은 특히 보는 이들에게 여행을 향한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마르코 폴로와 슈바이처를 사랑한 그는 여정 중에 슈바이처 박사도 만났다. 여행 중 굶주리다시피 해도 무한한 힘이 솟구치는 것은 매양 새로운 나라 사람들과 자연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영양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과 포스터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카메라와 낡은 지도, 꼼꼼히 기록한 여행일지와 수만 장의 슬라이드 필름. 그중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몰았던 빨간색 딱정벌레차도 인상적이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독일인 친구에게 선물받았다는 폭스바겐이다. 또한 지도가방은 지도를 고정하는 형태의 캔버스 가방으로, 아크릴 덮개가 있어 비나 눈이 오는 경우에도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행가에게 지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60년대 중남미와 아프리카 여행 전에 친구에게 맡긴 유서는 여행가로서, 가장으로서 진중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으련다. 설령 내가 무슨 사고로 죽더라도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부모에게 위로하여 줄 것이며 애들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 수업에 있어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보인다.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전시장의 모든 사진마다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김찬삼 교수는 진정 세계의 나그네였다. (전시 기간 5월 31일까지)
하늘도시 영종과 김찬삼
우리에게 영종도는 듣기만 해도 먼 곳을 향한 그리움으로 짜릿해지는 곳이다. 그곳 어디쯤에서든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고 여행의 열망이 솟구친다. 그 옛날부터 영종도는 공항터가 될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문자 그대로 자줏빛 제비섬이다. 제비는 그렇다 치고 자줏빛은 해 저무는 영종섬의 붉다 못해 자줏빛이었던 하늘을 말함이라. 일몰에 물든 자줏빛 제비의 모습으로 명명된 자연도라 하니, 옛사람들의 지명 정하기의 기지와 운치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영종 또한 긴 마루를 가진 섬이란 뜻으로, 오늘날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현재 그곳엔 몇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영종도는 김찬삼 교수에게 특별한 곳이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여행 책은 당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였다. 그 시절 웬만한 집의 책꽂이에는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이 있었다. 인천인인 그는 책의 인세로 영종도 구읍나루터 인근 바다 언덕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하고 여행 원고 집필에 몰두했다. 또한 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세계여행의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종국제도시가 생기면서 터를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근에 세계로 통하는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았고 이곳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영종역사관 밖으로
영종역사관은 영종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유적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전통정원이 앞마당이다. 정원을 몇 걸음 거닐다 보면 숲을 이룬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하다. 영종진공원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본의 급습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던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역사적 상징물인 전몰영령추모비와 태평루라는 누각을 설치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정원으로 조성했다.
바다 옆으로 난 영종둘레길을 따라 건강백년길, 치유하늘길, 힐링바닷길의 산책 코스 또한 자연스럽다. 영종역사관을 둘러싼 시사이드파크는 영종하늘도시 인근의 공원으로 8㎞의 해변공원이 일품이다. 해변길을 따라 조성된 왕복 5.6㎞의 레일바이크도 신나고, 캠핑장과 하늘구름광장, 스카이데크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저녁 무렵이면 갯벌 풍경과 어우러지는 일몰이 신비롭다.
인천의 작은 올레길 예단포둘레길
영종도의 예단포항 둘레길은 작은 올레길이라 할 만큼 예쁘다. 기왕 영종도에 갔다면 한 번쯤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선착장에 주차하고 출발하면 입구의 대나무숲과 잠깐 쉴 수 있는 정자를 만난다.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빠졌을 때는 갯벌이 진득하다. 길 옆으로 손톱만 한 야생화가 반짝이고, 오래된 나무가 여름이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시원한 풍경으로 가슴이 탁 트인다. 왕복 30분 정도 길이어서 가뿐히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영종도의 해변과 공항전망대
서해에 왔으면 바다를 따라 한 바퀴 달려보자. 마시안해변과 선녀바위해수욕장,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변이 멀지 않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으니 시원하게 돌아보면 된다. 해변가 주변으로 출렁다리와 숲도 있어서 시간이 여유롭다면 차분히 숲길을 걸어보는 맛도 운치 있다.
영종도 나들이길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 공항 서쪽 오성산 자락에 인천공항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해발고도는 172m지만 막상 올라보면 높은 느낌은 아니다. 오성산과 공항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발아래로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풍경은 덤이다.
1991년 3월 15일 그리고 2024년 3월 15일. 정확히 33년의 서사를 쓴 대학로 소극장 ‘학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부른 가수 김민기가 설립한 곳이다. ‘배울 학(學) 밭 전(田)’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문화예술계 인재들의 못자리가 되어줬다. 한국 대중문화의 산실이었으며 역사적인 공간이었기에 학전의 폐관은 유독 안타깝다.
3월 15일 폐관 당일. 문을 닫은 학전 앞마당에는 쓸쓸함만이 감돌았다. 2주간 이어진 ‘학전, 어게인 콘서트’도 전날 종료된 상황으로, 장비와 물품 등은 어딘가로 바삐 옮겨지고 있었다.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데 이렇게 바로 정리되다니, 너무나도 야속한 속도였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학전을 찾아오는 시민들도 종종 있었다. 학전 앞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을 남기는 사람들 사이로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연출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교수인 김재엽이었다. 야외수업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학전에 온 터였다.
199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김재엽 연출가는 학전에 자주 놀러왔고, 문화예술인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학전과의 특별한 인연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학전의 대표 아동극 ‘고추장 떡볶이’에 출연한 배우 이소영으로, 2월 24일 마지막 공연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김 연출가는 “학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연극인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로가 점점 상업화되어가는 와중에도 학전은 순수 창작 공연을 지향했다. 사람을 키워내는 예술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고,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창이었다”고 말하며, 학전의 정신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기획한 가수 박학기는 본지에 “학전은 제게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떠나 음악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평소에는 형님이라고 부르는 김민기 대표님을 뵈러 가끔 방문하면 큰 나무 그늘 아래 있는 것처럼 편안했고, 시골집에 온 기분이 들었다”며 아쉬움 가득한 소감을 전했다.
수많은 스타 배출한 학전
“모두 다 그저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지난 2월, ‘학전 블루 소극장이 2024년 3월 15일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밝히며 김민기 대표가 전한 인사다. 돈은 안 되지만 의미 있는 아동극 등의 공연을 이어가며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었던 학전. 여기에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었고, 위암 진단을 받은 김민기 대표가 투병하면서 결국 폐관을 택했다.
지난 33년간 학전에서 기획·제작된 작품은 총 359개다. 학전을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다. 학전은 180석 규모밖에 되지 않는데, 이 작품은 1994년 초연한 이래 4257회 공연, 누적 관객 73만 명을 돌파했다.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한 배우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는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불렸다. 특히 학전에서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설경구는 이 작품에 캐스팅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에게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또 학전은 라이브 콘서트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가수 고(故) 김광석은 이곳에서만 1000회 공연을 채웠다. 그래서 학전 앞에는 김광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노영심, 안치환, 동물원 등도 많은 공연을 펼쳤다. 주요 멤버였던 박학기는 “그때의 저는 나름 전성기였다. 학전 개관 멤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공연을 많이 하면서 김민기 대표님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 또한 대단한 영광이었다”고 회고했다.
학전 하면 아동극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을 김민기 대표가 번안, 연출한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등이 대표적이며, 순수 창작물도 많이 공연됐다. 김 대표는 돈을 더 벌 수도 있었으나 2008년 ‘지하철 1호선’ 공연을 돌연 중단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이 원했던 아동극 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TV와 미디어 외에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적·문화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졌던 터라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공연을 이어갔다.
김민기라는 존재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폐관 전날인 14일, 학전 소극장에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울려 퍼졌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이는 배우 황정민, 가수 박학기, 권진원, 노래를찾는사람들, 알리, 정동하.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의 마지막이자 학전의 33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는 학전 폐관 소식을 들은 후배들이 자발적으로 뭉쳐서 연 공연이다. 가장 학전다운 방식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하기 위해서다.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 20회의 릴레이 공연을 펼쳤고, 3000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다. 티켓은 단숨에 매진됐으며, 수익금은 모두 학전에 기부됐다. 윤도현을 시작으로 김현철, 윤종신, 유리상자 등 가수와 황정민, 설경구, 장현성, 이정은 등 배우들이 함께했다.
그렇다면 학전은 이제 어떻게 될까.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공연장으로 학전 공간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다만 ‘내가 없으면 학전은 없다’는 김민기 대표의 뜻을 존중해 ‘학전’ 명칭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 어린이극 등 학전의 기존 사업은 유지한다. 공연장 내부 시설 개보수 등을 거쳐 7월 재개관할 예정이다.
33년의 추억을 남긴 학전은 영영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학전을 일군 김민기 대표는 우리 곁에 있다. 과거 대한민국이 힘든 시기에 노래로 빛이 되어준 그. 이제는 후배들의 응원을 받아 다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다.
학전의 마무리에 쓰라며 1억 원 이상 기부한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김 대표에 대해 “조용하며 나서지 않고, 나서야 할 때는 묵묵히 책임만 감수하는 순수하고 맑은 시인”이라고 표현하며 존경심을 표한 바 있다. 조승우는 “선생님이 꼭 쾌차하셔서 같이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 말이 깊은 울림을 전한다. 박학기 역시 메시지를 남겼다.
“김민기 대표님은 그저 큰 산이고, 바다 같은 분이셨습니다. 더 이상의 수식어도 필요 없죠. 뻔히 손실 볼 것을 알면서도 꾸준히 어린이 연극과 뮤지컬을 해오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 분입니다. 우리 문화예술인 모두 대표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표님의 편안한 노후를 보장해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시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이케노카와 유치원(池の川幼稚園)은 설립된 지 60년 됐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70대 원장님과 한 달에 한 번 봉사활동을 오는 60대와 70대 두 선생님이 있다. 유치원은 보통 어른들이 짜놓은 프로그램에 맞춰 아이들을 교육하고,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관으로 생각한다.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다르다. 세 명의 선생님이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자 한 명 한 명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주의 깊게 관찰한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따뜻한 눈길로 보듬어주는 활동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번 취재를 하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료 교수에게 봉사활동을 권유받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동교육학과 히라구치 나오미(原口なおみ, 67) 교수가 한 달에 한 번 봉사활동을 가는 유치원이 있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히라구치 교수는 30년 넘게 여섯 곳의 유치원에서 구연동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곳이라며 나를 초대했다.
10월 청명한 날씨에 도쿄에서 특급열차로 1시간 40분 달리면 나오는 히타치역(日立駅)에 내려서 다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더 가니 유치원이 나왔다. 주택가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유치원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어서 옛날 시골에 있던 초등학교 같아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조그마한 집 두 채가 나무 옆에 있고, 그 사이로 선생님과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참새들의 합창처럼 끊이지 않았다.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소에지마 유미코(副島由美子, 73) 원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해 보육사 자격이 있었어요. 교육에 대해 특별히 공부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좀 남달랐어요.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보육하는 환경을 보고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취업이 예정되어 있던 회사에 가지 않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이곳에서 근무했어요.”
이곳에서 근무한 지 50년이 넘었다는 소에지마 원장은 교실을 둘러보면서 일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유치원의 유래도 들려주었다. 원장의 어머님이 자택 부지에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유치원
히라구치 교수는 대부분의 유치원이 일본 사회의 상식을 의심하지 않고 빨리 어른이 되도록 강요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개인의 성장을 소중히 여기고, 놀이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한다’는 보육 목표를 세운 유치원이 많지만, 실제로는 ‘책을 읽을 때 등을 곧게 펴고 조용히 듣자’며 아이들에게 명령하고, 빡빡하게 짠 주간 계획 일정을 밀어붙이는 곳이 많다고 했다. 일본에는 은연중에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다수 의견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문화가 있는데, 모두가 같은 일을 같은 방식과 동일한 속도로 처리하는 것이 ‘성장’이라는 동조 압력 같은 것이다. 대다수 유치원은 이런 일본 문화를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곤란을 겪지 않도록 가르친다.
“입 다물고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건 아이들에게 아무것에도 감동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달라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을 키우는 교육을 하거든요. 장애가 있는 아이나 외국인 자녀와 관계를 맺으면서 어린이다운 도덕관과 윤리관이 형성돼요. 일본도 예전에는 마을 촌민들이 매일 밤 모닥불을 피우고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즐기던 때가 있었죠. 그때는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촌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토의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키워갔어요. 그런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 이케노카와 유치원이에요.”
이케노카와 유치원은 다른 유치원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자폐증, 다운증후군, 발달장애, 외국인 자녀들도 원생으로 받고 있다. 이곳 아이들이 얼마나 구김살 없이 잘 자라고 있는지, 이 유치원의 교육이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한 히라구치 교수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왜 이곳으로 나를 초대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성장하는 시간
마쓰모토 하루미(松本晴美, 71) 선생님이 전신을 감싸는 검정색 옷을 입은 채 많은 종류의 인형을 들고 무대 뒤에서 인형극을 시작했다. 누워서 듣는 아이, 조용히 듣는 아이, 옆 친구와 이야기하는 아이, 블록을 가지고 노는 아이,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아이가 있었지만, 모든 선생님이 아이들을 그대로 두었다. ‘자 앉아요!’라든가 ‘조용히 들어야지!’라는 주의를 주지 않았다.
마쓰모토 선생님은 30여 년 동안 여러 유치원에서 인형극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인형극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특별했다. 선생님의 아이가 이케노카와 유치원에 입학했고 학부모들과 인형극단 모임을 했는데, 그때 인형극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고 한다. 마쓰모토 선생님은 이케노카와 유치원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케노카와 유치원의 교육은 아이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원생으로 받아주고, 애정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교육 방침을 보고 우리 엄마들도 건강해지더라고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고요. 엄마들도 함께 성장하는 거죠.”
이케노카와 유치원에는 학부모들이 고민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상담반 모임’,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 모임인 ‘살구반 모임’ 등 자율적인 학부모 동아리 활동이 많다고 한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엄마도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큰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만드는 ‘자율적인 커리큘럼’
유치원을 견학하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건 ‘자율적인 커리큘럼’이다. 소에지마 원장은 아이들을 관찰하는 데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각자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하고 싶은 것도 다른데, 그런 점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며 재미있는 걸 찾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저기 마당에 큰 은행나무 옆 나무로 된 집이 보이죠? 2019년 졸업반 아이들이 ‘같이 놀았던 중급반, 하급반 아이들이 기뻐할 걸 만들어주자!’라는 아이디어를 내서 선생님과 상의해 완성한 집이에요. 우리가 직접 할 수 없는 부분은 유치원 일을 봐주시는 목수에게 부탁했고, 아이들은 직접 나무를 나르거나 페인트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직접 완성한 게 두 개의 작은 집이에요. 그 외에 작은 연못도 만들고 봉제 인형이나 가방 등 만든 것들이 많아요. 그런 것이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재미있는 수업이 되죠.”
소에지마 원장이 마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무집은 자유시간에 아이들이 마음껏 들락거리는 은신처가 됐다고 한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
이케노카와 유치원도 저출산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때는 원생이 150명도 넘었지만, 현재는 64명이다. 다행히 2019년 10월부터 정부 보조금으로 유아 교육과 보육 요금이 무료가 되어 경영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부 교재비나 버스 요금 등은 학부모에게 받고 있다.
“제 급여는 40세에 유치원 원장이 되고 난 뒤로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돈 이상의 것을 아이들로부터 받고 있어서 만족합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원이 적으면 오히려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의 성장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죠.”
아이를 어른과 대등한 인격체로 보고 의사를 존중하며 학부모도 함께 배워나가는 유치원. 이런 선순환이 이뤄지는 유치원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졸업한 학부모로부터 많은 감사 편지가 온다.
“장애가 있거나,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있거나, 그 외에 여러 고민을 안고 있는 부모님들이 있죠. 그런 분들이 아이가 우리 유치원에 다니고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웃음이 넘치고, 행복해하는 얼굴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럴 때는 유치원을 운영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모두 구김살 없이 잘 어울려 노는 모습은 필자에게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모든 어린이가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유치원을 이끌어가는 소에지마 원장, 구연동화·인형극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사랑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히라구치 교수와 마쓰모토 선생님이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글을 마치며 소에지마 원장에게 보낸 한 학부모의 감사 편지를 소개한다.
‘우리 집의 제일 높은 곳 조그만 다락방. 넓고 큰 방도 있지만 난 그곳이 좋아요. 높푸른 하늘 품에 안겨져 있는 뾰족지붕 나의 다락방 나의 보금자리.’ 1970년대 활동했던 혼성 포크 듀오 ‘논두렁밭두렁’의 대표곡 ‘다락방’의 가사다. 이 노래를 알고 있다면 그들이 부부였다는 걸 기억할 테다. 두 사람은 부부의 연으로 가꾼 보금자리에서 더 많은 인연을 보듬어 가족으로 맞았다. 남편 김은광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 윤설희는 여전히 그 보금자리에 남아 사랑의 온기를 더하고 있다.
‘다락방’을 비롯해 ‘외할머니댁’, ‘영상’ 등의 곡으로 사랑받았던 논두렁밭두렁. 종종 방송이나 무대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처럼 활발한 소식을 듣긴 어려웠던 그들이다. 가수로서의 행보는 그러하나, 사실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온 터였다. 쉼 없는 지난날을 한눈에 보여주는 건 아내 윤설희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의 SNS 프로필이다. 논두렁밭두렁 멤버로 시작해 다리The Bridge청소년사업가지원센터 센터장, 사단법인 땡큐 이사장, 별빛내리는마을과 봄채 아동 그룹홈 설립자, 사랑하는교회 목사 그리고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까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음악학원과 24시 어린이집도 운영했다. 그런데 음악학원을 제외하면 가수와 연계된 활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수였던 그들이 이렇듯 의외의(?) 근황을 알리게 된 데에는 아내 윤 관장의 뜻이 컸단다.
“첫딸을 낳고 가수 활동은 그만뒀어요. 어려서부터 꿈이 현모양처나 교사였는데, 그 영향인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보면 어떨까 싶더군요. 작은 기타 학원을 운영하다가 종합적으로 음악 교육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연 방송음악학원이 꽤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날 보니 엄마들 사이에서 ‘값비싼 학원’으로 알려져 있더라고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짜느라 스무 명 넘는 강사를 초빙한 데다 건물 임대료까지 냈으니, 교육 원가 대비 수업료가 높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내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어요. 차라리 어린이집을 운영하면 국가의 보조를 받아 더 부담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어린이집을 열게 됐습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보금자리를 내어주다
어린이집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가장들은 회사 밖으로 내몰렸고, 집집마다 재정난에 시달렸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당시 그런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했던 윤 관장이다.
“IMF로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가는 걸 실감했어요. 낮뿐 아니라 밤에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생겨났죠. 그러면서 24시 어린이집을 떠올렸는데, 막상 우리나라에 몇 곳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지방 공연을 다니면서 아이들 맡기는 문제로 고민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고충을 해결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24시 어린이집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벼룩시장에 ‘무료탁아상담’이라는 1단짜리 광고도 냈죠. 말 그대로 무료로 탁아 상담을 했는데, 그러면서 정말 많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한 번 더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24시 어린이집에라도 오는 아이들은 다행이었다. 그곳마저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도망 나온 엄마와 아기, 생활고로 조부모에게 떠맡겨진 손주들, 호적도 없이 버려진 신생아까지. 저마다 딱한 사정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논두렁밭두렁 부부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2000년 6월이었어요. 미혼모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러면서 그게 바로 ‘그룹홈’이라는 걸 알게 됐죠. 2003년에 ‘별빛내리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아동 그룹홈을 설립했고, 10년 후인 2013년엔 여자 아동 그룹홈 ‘봄채’를 설립했습니다. 만든 두 개의 그룹홈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2000년 초만 해도 그룹홈이란 개념은 생소했다. 국내에 많지 않은 그룹홈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체로 종교인이었는데, 법적 근거가 부족해 이렇다 할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이르러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 발전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통과, 아동복지법 개정 등을 통해 관련 지원책들이 속속 생겨났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관심과 지원이 더 필요하지만, 과거 불모지 같았던 때를 생각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아진 셈이다. 제 가정도 돌보기 어려웠던 시절, 숱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정말 먹고살기 힘든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크게 어렵다고 느끼진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행복했죠. 나만 헌신한다고 여겼으면 여태껏 오래 해올 수 없었을 거예요. 결국은 나에게도 보탬이 되고 즐거운 일이었던 거죠. 요 며칠도 하루 세 시간 자고 밤을 꼴딱 새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피곤하긴 했지만 기쁨이 더 컸어요. 막상 제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건 얼마 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을 통해 성장했고, 많은 걸 이뤘죠. 결국 그 원동력은 이타심보다는 자기실현에 가까웠다고 봐요.”
남편의 유작 ‘사랑해봤나’를 완성하며
여러 아이를 돌봐야 하는 고단한 상황에서도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남편인 가수 故 김은광이었다. 오래오래 그들의 보금자리에 함께 머물렀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는 2010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단을 받고 1년 만에 이별을 겪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슬퍼할 새도 없이 아이들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던 윤 관장이다. 그러다 한 번씩 불현듯 찾아오는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부랴부랴 애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면 그제야 제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한바탕 울고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한번은 운전하고 가는데 길을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당장 전화해서 물어봤을 텐데, 그럼 그이가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설명해줬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부부는 반쪽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이었구나, 적어도 3분의 2쯤은 되겠구나, 다 내가 해온 일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 몫이 참 컸구나, 부부가 함께한다는 건 되게 좋은 거였구나 깨달은 거죠. 요즘도 그렇게 불쑥불쑥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최근 윤 관장은 남편의 유작을 하나 발견했다. 연필로 적은 악보였다. 논두렁밭두렁의 노래는 남편이 작곡, 아내가 작사하곤 했는데, 남편이 생전 작곡해둔 노트를 찾은 것이다. 함께 노래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좋은 노래는 듣자마자 좋은 가사가 생각나곤 했다. 남편의 악보를 피아노로 치다 보니 순간 가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사가 지어졌고, ‘사랑해봤나’라는 제목의 곡이 완성됐다.
“‘사랑해봤나’ 가사는 그런 내용이에요. 청춘이 빛났던 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는 더 사랑을 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곡을 지었고, 곧 음원으로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다가오는 4월에는 완성된 곡으로 남편을 위한 추모 공연을 열려고 해요. 근데 한번 불러보니까 음역대가 제가 소화하긴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동생(가수 윤설하)에게 부르라고 했더니 사랑 얘기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고사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제가 부르게 됐어요. 저도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지만, 남편을 생각하면서 최대한 잘 불러보려 합니다.”
아이들아, 언제든 편히 찾아오렴
남편의 추모 공연은 그룹홈이 있는 건물 지하의 소리 소극장에서 열린다. 같은 건물에 더브릿지 작은도서관이 있는데,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건 그룹홈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우리 애들이 보면 친구가 없더라고요. 학교 가면 엄마 아빠에 대해 얘기할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 못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자꾸 위축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마침 여기저기서 후원받은 책도 많겠다, 이걸 잘 모아서 지역사회와 공유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작은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주민분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교류하길 바랐죠.”
소극장과 작은도서관, 교회와 그룹홈까지 모두 한 건물에 있다 보니 간혹 윤 관장을 건물주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지원금과 후원금이 있긴 하지만, 공간을 유지하고 식솔들을 챙기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또 다른 형태의 그룹홈을 꿈꾸고 있었다. 바로 노인들을 위한 그룹홈이다.
“제가 부모 역할을 하지만 많이 부족했죠. 아이들 하나하나 눈 맞추고 마음을 어루만져줘야 하는데, 지원금이나 행정적인 업무들 처리하느라 서류 만지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든 생각이 외롭게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그룹홈을 만들고, 아이들과 교류하도록 하면 어떨까 한 거죠. 아이들 수만큼 어르신들이 있다면 저마다 충분히 사랑을 독차지할 테니까요. 가능하다면 언젠가 마당 있는 넓은 집을 마련해 그런 꿈을 이뤄보고 싶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일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자’라는 포부로 지난 20여 년을 달려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이라 믿으며, 그런 아름다운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며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올해로 칠순, 윤 관장 개인만을 생각한 노후의 꿈은 없을지 궁금했다.
“글쎄요. 지금처럼 계속 일하는 게 곧 노후의 꿈이자 준비 아닐까요. 요즘도 그룹홈 아이들을 대형 승합차에 태우고 여행도 다니고 하거든요. 그런 걸 보면 친구들이 이제 힘들 텐데 일을 그만하라 하죠. 근데 저는 오히려 일을 취미로 한다는 기분이에요. 지금이야 여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말 늙어서 뭘 못 하겠다 싶은 때가 오더라도 작은도서관 관장은 하려 해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도서관 귀퉁이 어딘가에 앉아 책 읽고 있으려고요.(웃음) 한편으론 그룹홈을 떠난 아이들이 종종 찾아오길 바라죠. 이번 설날에도 혹시나 해서 세뱃돈 챙겨 기다렸는데 많이 오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찾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형편도 이해합니다. 다만 살면서 힘들고 외로운 순간, 늘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고독 속에서 외로움을 채워줄 비밀스러운 친구를 찾는 고령자들의 성과 사랑에 대한 외침이다. 한국에서 흔히 쓰이는 “라면 먹고 갈래요?”의 일본 버전이랄까.
주인공 마나는 젊은 나이지만 ‘티 프렌드’(Tea Friend)라는 노인 전문 성매매 클럽을 만들었다. 65세 이상 여성들을 모으고 신문에 ‘차 마실 친구 구해요’라는 광고를 내 콜걸 서비스를 알선했다.
2023년 소토야마 분지 감독의 ‘차 마시는 친구’(茶飲友達, ちゃのみともだち)가 개봉했다. 일본에서 차 마시는 친구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허물없는 친구와 노후에 만난 부부다. 이 영화의 경우는 후자다.
놀랍게도 2013년 일본에서 고령자 성매매 클럽이 적발돼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소토야마 분지 감독은 “이 뉴스를 보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적발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흔들림을 느꼈고, 이를 영화에 담아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순간이라도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언제부터 노인에게 성과 사랑이 ‘꿈’이 된 걸까.
“성생활에 정년퇴직은 없다”
KNN 다큐멘터리 ‘노인의 그늘, 1부 황혼의 유혹 性’은 ‘성욕은 늙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고령자 전용 성매매 클럽이 적발된 건 놀랄 일이지만, AV 시장에서는 이미 고령 포르노 배우가 있을 정도로(도쿠다 시게오는 59세에 시작해 83세에 최고령 포르노 배우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노인의 성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 그런데 과연 이들에게 성생활이란 몸을 섞는 관계만을 말하는 걸까? 본능에 따른 욕구를 채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걸까?
일본 청년관 결혼상담소는 실버 미팅을 주최해 고령자들이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한다. 이곳에 참가한 사람들은 “노후에 함께 취미를 즐기며 지낼 파트너를 만나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결혼이나 성관계가 목적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아라키 치네코 덴엔초후대학 복지학과 교수는 KNN과의 인터뷰에서 “노년기를 행복하게 보내려면 사회가 고령자의 연애에 관심을 가지거나 응원하고 도와주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고령자의 연애에 대해 아직은 걱정 어린 시선이 더 많다. 라이플 개호는 “부모님이 요양 시설에 입주했는데, 입주자끼리 연애를 한다고 들었다”며 걱정하는 자녀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에 대해 다케야 미나코 시니어 라이프 컨설턴트는 “고령기에 연애 감정이 싹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노인의 성과 사랑에 대한 욕구가 반드시 성관계를 뜻하는 건 아니다. 남은 생을 함께할 친구이자 파트너라는 관계가 더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애는 고령자에게 잃어버린 활력을 되찾아주기도 하지만, 상실감으로 인한 의욕 저하를 가져오기도 한다. 다케야 미나코 컨설턴트는 “가족이라면 비난보다 지지를 해주고, 연애 감정이 나이와 관계없다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한다”면서 “연애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지켜봐 주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시설과 상담한다. 연애가 발전하는 것 같다면 상대 가족과도 협력 관계를 만들어두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나는 솔로’, ‘환승연애’ 등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시기에 실버세대도 사랑한다며 나타난 프로가 바로 HCN 충북방송 ‘홀로탈출’이다. 실버세대의 로맨스가 이렇게 귀엽고 순수하다니! 유튜브 채널 최고 조회수 57만 회를 넘을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실버 싱글 남녀의 끝 사랑을 찾아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조미선·이창수 PD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홀로 된 인생, 다시 한번 로맨스를 꿈꾸다.’ ‘홀로탈출’은 60·70대 싱글 남녀 8명이 짝을 찾는 과정을 담은 러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조미선 PD는 “문득 왜 젊은 사람들의 연애 프로그램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HCN의 주요 시청자층인 실버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면서 “처음 기획 때는 지금보다 출연진 연령대가 높았고, 경로당 미팅 콘셉트를 생각했다. 과거 ‘장수퀴즈’라는 프로그램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미선 PD는 든든한 후배 이창수 PD와 ‘홀로탈출’의 시작부터 함께했다. 두 사람 모두 PD 경력 10년이 넘었지만 예능 프로그램 제작은 처음이다. 섭외, 연출, 편집 뭐 하나 쉽지 않았다. 괜한 도전을 한 것인가 싶었는데, 내부 시사회에서 ‘재밌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행이구나 하고 마음을 쓸어내렸더니 이내 대중의 뜨거운 반응이 터졌다. TV 최고 시청률은 5.08%(디지털 케이블 플랫폼 전국 유료가구 기준)를 기록했으며, 유튜브 채널은 3월 현재 총 조회수 780만 회를 향해 간다.
나이 먹어도 똑같아
‘홀로탈출’의 기본 형식 자체가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출연진이 실버세대로 달라지니 변화가 확 느껴진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보통 사람들이 짝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의 로맨스가 친근하게 다가오며 더욱 응원하게 된다. 조미선 PD는 “우리 이웃 같은 사람들을 계속 출연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일부 연애 프로그램의 출연진은 방송계 진출이라든지 홍보를 목적으로 출연했다는 의혹을 받는데, ‘홀로탈출’은 이 부분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제작진이 출연진 검증에서 철저히 하는 부분이 있다. 면담 후 출연이 결정되면 혼인관계증명서를 무조건 받는다. 싱글임을 검증하는 것. 현재까지 지원자 및 출연자는 이혼 또는 사별을 경험한 돌싱이었으며, 미혼은 없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여성 지원자가 남성에 비해 훨씬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남성 싱글들의 성향은 정말 극과 극이라고 하더라고요. 외부 활동을 많이 해서 연인이 있거나, 아니면 외부 활동을 극도로 안 하거나. 그러니까 진짜 싱글은 후자인 경우가 많은데, 주변에서 방송 출연을 권유해도 내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즌1 때도 남성 출연자들을 겨우 섭외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죠. 여성들은 방송국 프로그램이라는 안정감 때문인지 많이 지원하세요. 경쟁률도 매 시즌 높아지고 있죠. 시즌1 때는 2:1, 시즌2 때는 8:1 정도였습니다. 현재는 시즌3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는데, 경쟁률이 벌써 10:1을 넘어섰습니다. 시즌3는 꽃피는 따스한 봄날인 4월에 촬영할 예정이에요. 시즌1, 2는 추울 때와 더울 때 촬영이 진행돼 출연진들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죄송했거든요. 출연자도 8명 이상 될 수도 있습니다.”
실버세대 싱글들이 원하는 이성상의 기준은 어떻게 될까. 조미선·이창수 PD는 “남성들은 여성을 볼 때 외모와 나이(연하)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을 볼 때 경제력 위주로 보는 것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또한 흥미로운 부분은 여성 출연자들이 ‘평범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패셔너블하거나 잘 꾸미는 남성을 보면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홀로탈출’의 여성 출연자는 대부분 ‘너무 튄다’면서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인다. 실버세대와 MZ세대의 싱글 남녀가 원하는 이성의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홀로 탈출이 필요한 이유
5070 싱글들이 사랑을 찾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은 사랑 앞에 매우 순수하고 솔직한 모습이다. 상대방이 좋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굴에 그대로 표가 난다. 또한 오랜만의 데이트에 설레는 모습을 보이지만, 마음만 앞서 말실수를 하기도 한다. 조미선·이창수 PD는 “실버세대의 로맨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젊은 층과 동일한데 좀 더 솔직한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남성 출연자들은 살림을 해줄 여성을 찾는 것 같다’는 시청자 반응이 나오기도 했죠. 그분들은 홀로 식사하고 살림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게 꼭 연애를 해서 이성이 해결해주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봐요. 잘 포장해서 말할 수도 있는데, 너무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말하다 보니 여성 출연자와 시청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 생긴 것 같습니다. 표현이 솔직하고 투박해서 벌어진 문제라는 거죠.”
유튜브 채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상은 시즌1의 자기소개 시간이 담긴 부분이다. 3월 현재 조회수 57만 회를 넘어섰다. 조미선 PD는 “연애 예능의 자기소개에서 사별 얘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 우리 유튜브 채널 시청자의 90%는 50대 이상이다. 출연진이 사별과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이 많이 공감하셨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버세대가 사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미선·이창수 PD는 결국 ‘외로움’이라고 얘기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조미선 PD는 “출연진과 인터뷰를 해보면 그동안은 자식 키우느라 정신없었는데 자식들이 결혼 후 혼자 남으니까 적적함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이제는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 나를 찾고, 로맨스를 나눌 친구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이창수 PD는 시즌1에 출연한 군인 출신 박영수 씨를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자로 뽑았다.
“처음엔 정말 밝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속사정을 들어보니 밝은 이면에 아픔을 가진 분이셨죠. 자신에 대해 ‘사별했고, 자식도 없고, 진짜 홀로라서 출연했다’고 덤덤하게 말하시는데, 외로움이 느껴지더라고요. 저희 프로그램의 취지와 정말 맞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촬영할 때도 성격이 좋으셔서 인기남에 등극했고, 네티즌한테도 응원을 많이 받으셨죠. 좋은 짝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조미선·이창수 PD는 젊은이들이 사랑하듯이, 실버세대도 똑같이 사랑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두 PD는 앞으로도 이 마음을 잃지 않고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홀로 되신 분들이 다시 설레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프로그램이 되고 싶고, 더 나아가 실버세대가 당당하게 사랑하는 문화가 형성됐으면 좋겠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홀로 탈출하세요!”
‘홀로탈출’ 커플 이충국♥최문숙 인터뷰
“사랑은 남사스러울 게 없다”
‘비주얼 커플’로 통하는 이충국·최문숙 씨는 ‘홀로탈출’ 시즌1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충국 씨는 촬영을 마친 후에도 직진 로맨스를 펼쳤고, 최문숙 씨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벌써 만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는 두 사람은 결혼도 계획하고 있다.
‘홀로탈출’ 촬영 당시 이충국 씨는 최문숙 씨의 어떤 점에 끌리셨나요? 최문숙 씨는 언제부터 마음이 열렸는지 궁금합니다.
이충국 최문숙 씨가 가장 예쁘기도 했고, 시니어 모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보니 호감이 갔습니다. 사실 저는 여성분들한테 관심을 많이 못 받았어요. 최문숙 씨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내게 호감을 갖도록 많이 노력했죠. 하하.
최문숙 이충국 씨의 첫인상은 날라리 같았고 비호감이었어요.(웃음) 그런데 데이트를 하면서 대화를 나눠보니 생의 아픔이 있는 분이더라고요. 그리고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있는 사람 같다고 느꼈죠. 그때부터 어떤 사람인지 탐구했어요. 촬영 후 5~6번 정도 만나서 얘기를 많이 나눈 뒤 교제를 결심했습니다.
교제하면서 느낀 연인의 장점에 대해 칭찬 부탁드립니다.
최문숙 이충국 씨는 굉장히 긍정적인 분이에요. 또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배려심이 깊다는 것도 장점이죠. 요리도 정말 잘해요. 또 시니어 모델로 통하는 점이 많아서 좋아요. 커플이자 동료로서 HCN 광고 촬영을 같이 할 때 편해서 좋았는데, 또 광고를 찍고 싶습니다!(웃음)
결혼 계획도 세우셨나요?
이충국 앞으로 1~2년 안에 혼인신고도 하고, 전원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최문숙 씨가 대전에 살고 있어서 그곳에서 살 가능성이 제일 큰 것 같아요. 혼인신고를 안 하고 동거만 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졸혼도 많이 한다는데, 저는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야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가 70세를 바라보고 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일할지 모르잖아요. 그 안에 빨리 자리를 잡아서 최문숙 씨를 행복하게 해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문숙 씨의 자녀분들도 만나보셨나요? 자녀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이충국 저는 방송에서 말했듯이 아들이 하늘나라로 떠났고 가족이 없죠. 자식을 먼저 보내면 평생 가슴에 안고 산다고 하잖아요. 최문숙 씨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최문숙 이충국 씨가 굉장히 사려 깊은 분이라 저희 애들이 잘 따르고, 응원을 많이 해줍니다. 손주들도 참 좋아하고요.
60대에 사랑을 찾은 소감과 함께 ‘홀로탈출’ 출연을 추천해주세요.
이충국 주변을 보면 방송 출연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용기를 내면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홀로탈출’에 출연하면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최문숙 씨를 만났죠.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하고, HCN 방송국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여왕님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최문숙 어렸을 때는 첫눈에 반해서 사랑할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여러 가지를 따지게 되더라고요. 동년배들에게 이제는 조건만 따지지 말고 나와 공통점이 있고 재밌게 잘살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혼자 지내면 외로운데 같이 밥 먹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세상사도 같이 논하는 사람이 생기면 인생이 참 즐겁답니다. 주변에서 ‘이 나이 먹어 연애하는 게 주책 아닌가, 남사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랑에는 남사스러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홀로탈출’ 출연도 좋고,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