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 일부를 옮겨 싣는다. 열두 번째 주제는 ‘니트’다.
1 ‘김우일 작가님’. 어느 날 길을 걷다 꽃 모양 자수가 인상적인 재킷을 입은 분이 눈이 띄었다. 사진 요청에 그분은 “너 진짜 운이 좋아. 나도 사진 찍는 사람이야”라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알고 보니 1세대 광고사진 작가인 김우일 작가님이었다. 여전히 노출과 핀에 대해 고찰한다는 작가님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시간의 대화는 선물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2 ‘스트라이프 아버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는 스타일링이다. 무엇보다 스트라이프 니트와 양말 색깔을 맞추셨는데, 패션 센스가 엿보인다.
3 ‘주황 카디건 어머님’.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원색으로 멋을 낸 어머님의 패션은 봄나들이 갈 때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동묘 칼라 카디건 아버님’. 카디건을 재킷처럼 매치해 전체적으로 댄디한 스타일을 연출했다.
5 ‘다홍색 조끼 아버님’. 가까이서 보니 조끼 안의 니트에는 영국의 빅벤 시계탑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영국 감성의 패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 ‘맨투맨 아버님’. 한눈에 봐도 이 구역의 패셔니스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맨투맨 니트와 함께 레드로 포인트를 준 패션이 멋스럽다.
7 ‘동묘 흰색 카디건 아버님’. 패션 트렌드인 올 화이트(All-White) 룩을 소화하셨다. 카디건 문양이 심심할 수 있는 패션에 포인트가 됐다.
지난달 국내 인구 이동자 수가 49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인구 고령화 추세와 주택 매매 감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4일 통계청이 발표한 ‘7월 국내인구이동’ 통계에 따르면, 7월 이동자 수는 46만 명으로 1년 전과 비교하면 18.3%(10만 3000명) 줄었다.
이동자수는 조사 대상 기간 전입 신고자 가운데 읍‧면‧동 경계를 넘어 주소지를 옮긴 사람을 집계한 것이다.
이는 7월 기준으로는 1973년 7월(44만 8000명) 이후 49년 만에 가장 적은 숫자다. 모든 월(月)을 기준으로는 1976년 1월(43만 3000명) 이후 46년 6개월 만에 인구 이동이 가장 적었다.
이로써 이동자 수는 지난해 1월부터 올해 7월까지 19개월 연속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감소세를 이어갔다.
총 이동자 중 시도 내 이동자는 64.7%, 시도 간 이동자는 35.3%를 차지했다. 전년 동월 대비 시도 내 이동자는 20.0%, 시도 간 이동자는 15.1% 각각 감소했다. 인구 100명당 이동자 수를 의미하는 인구이동률은 10.6%로 전년보다 2.4%포인트(p) 줄었다.
통계청은 주택 매매 감소와 인구 고령화를 인구이동 감소 요인으로 꼽았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향이 있는 60세 이상 고령자가 늘어난 반면, 이동이 활발한 편인 20·30대 청년층은 줄어든 결과다.
실제로 7월 인구이동에 영향을 미친 5∼6월 주택 매매량은 11만 3504호로 작년 같은 기간(18만 6446호)에 비해서 27.5%(6만 5천 건) 줄었다. 2년 전 같은 기간(22만 2072호)의 절반에 그쳤다.
지난달 인구이동을 시도별로 보면 인천(3628명), 경기(2228명), 충남(1252명) 등 7개 시도는 전입이 전출보다 많은 순 유입이 일어났다. 서울(-1576명), 부산(-1544명), 경남(-1268명) 등 10개 시도는 순유출됐다.
시도별 순 이동률은 세종(1.7%), 인천(1.5%), 제주(0.9%) 등은 순유입, 울산(-0.9%), 부산(-0.5%), 전북(-0.5%) 등은 순유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보행사상자의 59%가 65세 이상 고령자로 나타났다. 아울러 OECD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10만 명당 보행 중 사망자수 통계에서도 압도적 1위로, 전체 회원국 평균(2.5명)보다 4배에 가까운(9.7명) 수치를 기록했다.
이에 노인의 무단횡단 등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으나,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17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 다발지역 교통사고 특성’ 통계 등을 보면 안전운전 불이행(68%)이 가장 큰 이유로 꼽혔다. 그밖에 교통사고가 지속 발생하는 장소 역시 시장, 병원 등 노인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나타나며, 노인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노력이 촉구되는 시점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노인보호구역’(실버존, Silver Zone)을 예로 들 수 있다. 노인 보행자 사고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2008년부터 도입된 교통약자 보호 제도 인데, 노인들의 통행량이 많은 구역을 선정해 차량 속도 제한 및 일정 시설을 설치하는 형태다. 주로 경로당, 노인복지시설, 공원, 시장 인근을 지정하는데, 사실상 그 존재가 미미하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과 비교해 살펴보면, 먼저 그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2021년 기준 스쿨존 1만 6700여 곳, 실버존 2600여 곳). 또 두 곳 모두 해당 구역에서는 주정차가 금지되고 차량 운행 속도는 시속 30km로 제한되지만, 실버존의 경우 12대 교통사고 중과실에 포함되지 않아 사고가 났더라도 무조건 형사 처벌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어린이보호구역 안전운전의무 위반의 경우 포함).
이에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행정안전부장관 및 경창철장에게 노인보호구역 지정, 관리 실태 점검 및 확대, 대책 강화 방안 등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도로교통법 개정안에는 자동차 통행속도 제한(30km) 및 무인 교통단속용 장비 설치 등을 통한 노인보호구역 내 안전 강화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다.
고령 보행자는 거동이 불편한 경우가 많아, 일반인에 비해 보행 신호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 자칫 사고로 이어질 위험성도 적지 않은데, 이러한 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스마트 횡단보도’를 설치, 점차 확대해나갈 전망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개발한 ‘스마트 횡단보도’는 횡단보도에 사람이 접근하거나 신호가 끝났는데 아직 머물러 있는 경우, 차량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음성 경고 신호를 보낸다.
그밖에 노인 무단횡단 사고의 경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 더욱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무단횡단을 하는 노인이 적지 않다는 것. 이에 최근에는 횡단보도 대기 중 더위를 막아주는 (스마트)그늘막이나 간이의자 등을 설치해 이러한 사고를 방지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 정책연구처 이세원 연구원은 “방호울타리 무단횡단방지펜스 등도 고령자 무단횡단을 물리적으로 방지하는 시설이다”라며 “넓은 대로에 있는 횡단보도의 경우 상대적으로 걸음이 느린 고령 보행자들이 한번 쉬어갈 수 있도록 중앙보행섬이나 횡단대기공간에 그늘막 등을 설치한다. 다만 중앙보행섬의 경우 설치 목적과 다르게 대기 공간 내 안전상의 문제나 무단횡단을 더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30년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인 남편, 함께 보내는 시간이 영 답답한 아내. 깊어지는 황혼의 동상이몽,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이를 회복하는 데 그리 대단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배우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공유하고, 부족한 부분을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신혼의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되찾을 수 있다. 아래 사례가 자신의 이야기 같아 ‘뜨끔’했다면, 부부 사이를 개선하는 생활 속 크고 작은 행동 가이드를 실천해보자. 시작이 반이다!
CASE 1
은퇴 증후군 VS 갱년기
김은퇴 35년 일한 대기업에서 퇴직했다. 한동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고생 끝에 얻은 명예와 남부럽지 않은 연봉, 화려한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듯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당신 뒷바라지하느라 내 인생이 끝났다”며 언성을 높이고 잔소리를 한다. 잘나가던 시절이 꿈만 같고 매일이 우울하다.
이홍조 어느 날부터 몸이 자주 홧홧하더니 관절통, 근육통, 불면증까지 전에 없던 증상이 밤마다 괴롭힌다. 한평생 반복된 가사노동에 체력은 점점 떨어져가는데, 남편은 은퇴하고도 하루 종일 누워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동안의 인생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억울함과 분함, 회한이 사무친다. 밤만 되면 20~30년 전 서운했던 일까지 하나하나 생각나 일일이 따지고 싶은 기분까지 든다.
행복 솔루션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활동을 하던 시절 직장은 밥벌이 수단 그 이상의 개념이었다. 성공의 상징이며,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였다. 또 오늘날과 달리 ‘워라밸’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당시에는 가족에 소홀할지언정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풍족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가정 평화를 위한 최선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30~35년간 직장에 헌신하다 은퇴한 이들은 가정과 직장 모두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에 상실감을 느낀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존감 회복이다. 먼저 아내는 앞선 상황을 이해하고 남편의 장점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재취업을 독촉하는 대신 승진한 날, 큰 프로젝트를 성사한 순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자식 대학 보낸 때 등 생애 성취 경험을 되짚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며 의욕을 북돋아준다. 회상의 시간을 가지다 보면 아내 또한 그동안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남편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정에 최선을 다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또 남편 역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 회사의 책임자가 아닌 배우자와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고민해보고, 가정에서의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편 남편은 아내가 ‘갱년기’라는 인생의 터널을 지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가시 돋친 말과 행동이 진심이 아닌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외면하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준다. “왜 또 그래”, “당신 그거 병이야. 병원 가” 등의 반응은 전쟁의 총성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표현하는 게 어색하다면 갱년기 증상에 좋은 음식, 영양제 등을 챙겨주며 ‘당신의 상태를 이해한다’는 마음을 슬쩍 내비쳐본다. 나이 들수록 배우자의 건강을 챙기는 것만큼 소중한 애정 표현은 없다.
CASE 2
여가 시간의 동상이몽
강바다 회사 다닐 때부터 쉬는 날마다 낚시를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은퇴 후에는 막연한 불안과 우울함이 찾아올 때마다 종종 바다를 찾는다. 낚싯대를 잡고 머리를 식히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내가 혼자 즐기는 취미 생활에 불평을 토로한다. 운동은 취미가 없는데, 자꾸만 함께할 것을 강요해 잦은 언쟁이 벌어진다.
최운동 은퇴 전 해외 주재원이었던 남편은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았다. 그러다 간혹 시간이 나면 집에서 누워 있거나 홀랑 낚시를 하러 바다로 떠나버렸다. 용기 내 함께 운동할 것을 제안하면 “일 때문에 바빠 그렇다. 퇴직하면 같이 놀러 다니자”며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은퇴하니 이제는 “취미가 다르지 않느냐”는 핑계를 대며 함께하는 시간을 피한다.
행복 솔루션 20~30년 함께 산 부부라도 관심사가 다르면 공통의 취미를 갖기 어렵다. 은퇴 전부터 각자의 여가 시간을 보낸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이가 더 소원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부부끼리 ‘따로 또 같이’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
먼저 지난 일주일간 부부가 함께한 시간, 활동, 대화 내용 등을 적어본다. 그 다음 이를 반성의 지표로 삼아 ‘주 3회 저녁 식사 후 산책하기’, ‘주 1회 같이 문화생활 하기’ 등 실천하기 쉬운 부부 생활 강령을 만들어본다. 요일별로 정해도 좋다. 이를테면 월·수·금은 ‘부부 동반의 날’, 화·목·토는 ‘혼자만의 날’을 보내기로 약속한다. 다소 숙제처럼 느껴져도 긴 시간 쌓인 마음의 벽을 서서히 허물고 함께하는 시간을 길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다음 서로의 취미에 발을 들인다. 반드시 같은 ‘활동’을 하지 않아도 좋다.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데 방점을 둔다. 이를테면 남편이 낚시를 할 때 옆에서 자수를 하거나, 아내가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동안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상대는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존중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본인은 배우자에 대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이 즐길 수 있는 활동을 찾고 싶다면, 서로의 관심사를 탐색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이때 배우자의 관심사를 다 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데이터가 연애 시절에 멈춰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상대방을 알아가던 풋풋한 그때처럼 “당신이 요즘 재미있어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 “당신, 예전에 ○○하는 것 좋아했던 것 같은데 맞아?” 등 호기심 어린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CASE 3
다시 불붙은 경제권 전쟁
박지출 은퇴 전 가정의 경제권은 아내가 책임졌다. 월급은 타는 족족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30년 넘도록 용돈을 받아 썼다.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진 결정이기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과자 한 봉지를 사더라도 아내 눈치를 보느라 답답할 때가 많았다. 노년기만큼은 주도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은퇴 후에는 소일거리를 찾아 직접 번 돈으로 골프용품을 사고 소소한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아내가 간섭하려 든다.
오경제 남편이 피땀 흘려 벌어온 돈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결혼 생활 내내 꼬박꼬박 가계부를 정리하며 재산을 불리는 데 힘썼다. 덕분에 노후 자금에 보탬이 될 건물을 사고, 투자로도 수익을 얻었다. 그래도 자식 결혼 전까지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데, 남편이 은퇴 후 소일거리를 시작한 뒤부터 벌이를 공개하지 않고 고가의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남편의 태도가 당황스럽다.
행복 솔루션 경제권은 신혼, 황혼을 막론하고 부부 사이 다툼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결혼 생활을 갓 시작한 신혼부부는 경제권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언쟁이 오고 간다면, 황혼 부부의 갈등은 그동안 참아온 불만이 특정 계기로 폭발하면서 시작된다.
특히 가정에서 성 역할이 비교적 뚜렷한 베이비붐 세대 부부는 주로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가 경제권을 관리해, 돈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내 쪽으로 힘이 편중되며 갈등이 빚어진다. 이에 많은 남편이 은퇴를 기점으로 재정 독립을 선언하고, 아내는 달라진 남편의 태도를 비협조적으로 느낀다.
비슷한 상황으로 갈등을 겪는 부부가 있다면 두 사람의 합의를 거쳐 경제권을 교체해보는 것이 좋다. 남편은 가계부 작성, 대금 납부 등 재정 관리를 오롯이 책임지고, 아내는 정해진 용돈으로 한 달간 생활하는 것이다. 역할을 바꾸면 각자가 진 부담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자의 고충을 깨닫고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매달 ‘가계 대화의 날’을 정해두는 것도 방법이다. 가계 대화의 날에는 가계 자산과 부채, 현금 흐름 등을 공유하고 재테크 계획을 논의한다. 모래시계를 활용하면 발언권을 보다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 날짜는 매월 말이나 초가 적당하다. 지난 한 달간의 재무 상황을 살펴보며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되 배우자의 잘못을 질책하지 않는다.
도움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
청운의 꿈을 품은 채 서울로 상경해 20여 년 동안 공직에서 일하고, 공직을 나와서는 한국신용평가 CEO로 활동했다. 은퇴 후 인생 2막으로 택한 것이 바로 ‘시조’였다. 2017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송태준(75) 시조 시인은 성실한 공무원처럼 시조도 성실하게 쓰는 노력파였다. 그를 만나 그간의 여정과 더불어 시조의 가치와 매력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201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수원화성을 배경으로 한 노인의 삶을 그린 시조 ‘다산(茶山), 마임 무대에 선’이 당선되면서 시조 시인으로 등단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1세. 늦은 나이로 등단한 후, 4년 만에 첫 시조집 ‘바람의 노래’를 출간했다.
“등단 직후엔 때가 아니라고 봤어요. 책을 신중하게 내고 싶었어요. 성격상 대충 하는 건 못 견뎌요. 일종의 결벽이라고 할까요? 종잇값이 아깝지 않은 시조집을 내고 싶었어요. 공을 들여서 책을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4년이란 세월이 훌쩍 가더군요. 습작한 지 10년 만에 나온 첫 책이라 원래는 작년 말쯤 출간하고 독자분들과 얘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올해 4월에 드디어 출간하게 됐죠.”
늦깎이 시인이 10년의 세월을 압축해 만든 시조집 제목은 ‘바람의 노래’. 그는 어떤 바람을 담았던 걸까?
“중의적인 의미예요. 하나는 자연현상으로서 바람(wind)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바람(want)이에요.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하지만, 자연현상만큼 보편적 공감과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또 있을까요? 자연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며, 그중에서 바람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바람은 기척도 없이 왔다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사라지는 것. 인간의 삶도 바람과 매우 닮았죠. 바람과 닮은 삶의 유한함과 공허, 그런 것을 시조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더 나아가 좋은 시조를 쓰고 싶은 결연한 의지와 소망이 담긴 책이에요.”'
시조와 첫사랑
70년은 반세기를 넘어 한 세기에 가까운 나이다. 그가 처음 시조에 눈을 뜨게 된 시기는 언제였을지 궁금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학교 시절 문학에 막연한 관심이 있어서 특별활동으로 문예반을 골랐어요. 알고 보니 문예반 지도 선생님이 그해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자였죠. 문예반 활동 자체에 대한 기대도 컸는데, 신춘문예 당선자인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게 돼 더 즐거웠어요. 선생님이 직접 쓴 시부터 시작해 다양한 시조를 배웠죠. 시조 시인으로서의 기초체력을 다진 시기라고 할까요?”
시조의 포문은 문예반 선생님과 함께 열었지만, 시심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첫사랑’ 덕분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유로운 연애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윗동네 여학생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얼마나 좋아했는지 잠도 못 자고, 온종일 그녀 생각밖에 안 했어요. 그렇게 밤마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시조를 매일 한 편씩 적어나갔는데, 1년 6개월 정도 지나니 대학노트 3권 정도 분량이 나오더군요.(웃음) 이대론 안 될 것 같아 고민 끝에 그 동네에 사는 동급생을 통해 편지와 함께 가장 잘 쓴 시조 한 편을 그녀에게 보냈어요. 바로 답이 없어서 차였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긍정의 답장이 오더군요. 시조는 첫사랑과의 연을 이어준 큐피드 화살이었죠.”
사귄 지 얼마 안 돼 그녀는 떠나갔고, 시조도 그와 멀어져갔다.
“첫사랑과 헤어진 후론 시조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대신 문학적 재능을 수필이나 소설로 옮기려고 부단히 노력했죠. 고등학교 때는 신춘문예에 2번이나 지원했는데 매번 떨어지더군요. 더불어 문학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한편으론 글쟁이의 삶이 너무 고단해 보였어요. 가난한 예술가보다는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고 싶었어요.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출세와 사회적인 성공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대학도 서울로 오기 위해 죽어라 공부했죠.”
공직은 실패작
순수한 시골 청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당당하게 서울대학교에 합격했고, 남들처럼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대학 졸업반 시절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해 2번 만에 합격했다. 그는 “당시 공직에 진출해서 이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공직에 나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공직은 제 인생의 실패작이에요. 국무총리실로 첫 발령을 받고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할 때는 몰랐어요. 동기 중에서 진급이 빠른 편이라서, ‘이대로만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죠. 이후 대대적인 부서 통폐합으로 인해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받았어요. 근데 다른 부서에서 와서 그런지 알게 모르게 텃세가 심했어요. 그래도 견뎌냈는데, 상사와의 갈등이 심했어요. 원리 원칙대로 일을 진행하고 보고드렸는데, 그 상사분이 일을 이따위로 하냐며 면전에 서류를 집어던졌어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이외에도 이유 없이 불합리한 대우를 많이 받았어요. 승진에서도 밀려났는데, 나중엔 그 상사가 저를 좌천시키려고 하더군요.”
이런 갖은 수모를 견뎌냈지만, 그는 끝내 22년 만에 공직 생활을 접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다만 이 선택도 그에게 불가피한 일이었다.
“상사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시련도 있었어요. 빚보증을 서달라는 친한 친구의 부탁을 받았어요. 정말로 친한 친구라 거절하기 힘들었죠. 보증인 중에 공무원이 꼭 필요하다고 신신당부를 하길래 무심코 해줬는데, 이로 인해 끝내 친구 하나를 잃게 됐어요. 그 친구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빚을 못 갚게 된 거죠. 공무원 월급의 반을 압류당해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때 마침 좋은 제의가 와서 한국신용평가 CEO로 활동했는데, 그 월급마저도 빚 갚느라 전부 썼어요. 제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마음의 숨구멍
22년의 공직 생활. 한국신용평가, 한국농어촌공사 등에서 대표와 비상임이사로 활동. 숨 가쁘게 달려오다 10년 전에 은퇴했다. 그간의 경력으로 볼 때 다른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터. 어쩌다 시조 시인의 길로 가게 된 것일까?
“뜻밖의 우연이 겹쳤어요. 은퇴 이후 시간이 많이 생겨 취미를 찾다가 우연히 도보동호회를 알게 됐죠. 전국에 도보동호회가 참 많더군요. 한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뒤도 보지 않고 달리는 성격인데, 걷는 재미에 빠져서 동호회에 가입하게 됐어요. 전국 각지의 도보 대회를 다녔는데 우연히 강원도 고성에 갔다가 축제에서 하는 백일장을 발견했어요. 이런 백일장은 보통 하루 만에 끝나는 것이 다반사죠. 그런데 이 대회는 보름 정도 제출기한이 있더군요. 학창 시절에 썼던 시조 생각이 나서 응모했는데 덜컥 대상을 받았어요. 예전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그때부터 습작을 시작했죠.”
아무리 좋은 연장이라도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녹이 슬기 마련이다. 그도 창작의 고통을 수없이 맛봐야 했다.
“은퇴 후 남는 게 시간인데, 삶이 무료하더라고요. 이왕 하는 거 신춘문예 당선을 목표로 삼아 시조 시인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었어요. 육십 넘어 시작한 일인데, 몇 년 더 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요. 다만 시조 부문이 있는 신문사도 적고, 인원도 한 명밖에 안 뽑아서 고시보다 더 치열했어요. 앉으나 서나 시조 생각만 했죠. 길 가다가도 메모를 하고, 한밤중에 시상이 떠오르면 불을 켜고 시조를 쓰기도 했고요. 들인 노력에 비해 매번 떨어지다 보니 이 무모한 객기를 그만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2017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덜컥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운이 정말 좋았어요.”
삶을 이기는 글은 없다고 하는데, 그간의 경험이 시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공직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순탄치 못했죠. 억울한 일이 많다 보니 반항심이 커졌어요. 상사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대드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요. 젊은 날의 치기 어린 객기였죠. 다만 실패가 자꾸 쌓이면 성찰이 발달하는 것 같아요. 항상 마음을 돌아보고, 삶의 상태를 점검하는 게 습관이 된 탓에 글을 안 쓸 수가 없더군요. 창작의 고통은 괴로운데, 어느샌가 본능처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어요. 제게 시조는 마음의 숨구멍과도 같아요. 제 안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편히 눕힐 수 있는 쉼터예요.”
롤모델은 두보
사실 시조는 자유시와 비교해 인기 있는 분야는 아닌데, 그가 생각하는 시조의 매력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시조는 간결한 언어의 리듬이에요. 글자 수의 제약 안에서 절제된 언어, 규칙적인 반복과 특유의 배열을 통해 리듬을 만들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르죠. 몇 자 되지 않는 단어의 배열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죠. 규칙이 없는 스포츠는 의미가 없죠. 규칙이란 제약 안에서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선수의 덕목이 아닐까요? 시조도 마찬가지예요. 자수의 제한 안에서 함축된 언어를 통해 독자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문장을 남기는 일. 그게 시조의 미학이죠.”
시조 시인으로서의 지향점과 시조를 쓰는 자신만의 철학에 관해 물었다.
“타성을 경계하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해요. 타성을 거꾸로 되짚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에요. 시조를 쓸 때는 관념적인 언어가 아닌 감각적인 언어를 쓰려고 노력해요. ‘꽃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보다 ‘꽃은 너의 입술이다’처럼 감각적으로 명확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죠. 그 이미지가 오랫동안 맴도는 것. 그게 정말 좋은 시조예요. 이태백처럼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퇴고의 달인 두보처럼 한 편 쓸 때마다 수백 번을 고쳐요. 두보처럼 사회적 문제를 시조에 녹이려고 하고요. 일종의 롤모델이죠.”
끝으로 시조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시조 시인을 꿈꾸고 있다면 일기 쓰듯 가볍게 써보는 게 좋아요. 스타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학도 흐름이 있어서 시대성을 잃어버리면 안 되죠. 이론서부터 시작해 다양한 시조를 읽어보는 게 좋고, 일본의 하이쿠도 좋아요. 시조는 민족 문화의 자산이라고 할 정도로 역사가 깊고,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장르예요. 시조의 매력과 가치를 알리는 데 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현재는 단시조집 출간을 위해 매일 시조를 쓰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단 한 편이라도 좋으니 독자에게 여운을 깊게 남기는 시조를 쓰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삶을 “무모한 객기가 부른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처럼 객기가 객기로만 남았다면 그의 삶은 정말로 재앙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잠시나마 엿본 그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은퇴 후 그가 시조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성실함 덕분이었고, 성실함의 바탕은 성찰에 있었다. 시련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부단히 반성하고 노력했다. 그의 객기는 용기였고, 시조는 시련 속에서 피워낸 하나의 꽃이었다. 활짝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운 시조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마친다.
산들바람 산들 분다 (최성각 저·오월의봄)
‘환경운동 하는 작가’로 알려진 저자가 18여 년간 강원도 춘천에서 산촌 생활을 하며 느낀 점을 모은 책이다. 겸손하게 사는 삶, 자연과 인간의 공존 등의 메시지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울리 하우저 저·두시의나무)
독일 중년 저널리스트가 100일간 떠난 걷기 여행기. 저자만의 생생한 경험과 더불어 걷기 전문가의 의학적인 견해, 세계 곳곳의 길에 얽힌 역사 등 ‘걷는 일’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았다.
당신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됩니다 (시미즈 켄 저·시그마북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저자가 인생에 ‘오춘기’가 찾아온 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솔루션을 제시한다. ‘남이 원하는 나’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나’로 사는 법을 이야기한다.
선동열 야구학 (선동열 저·생각의힘)
레전드 투수 출신 선동열이 국내 프로야구와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특징을 흥미롭고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현 야구 선수와 코치, 감독 인터뷰도 수록돼 현장감을 더한다.
입체 꽃자수 수업 (이연희 저·나무수)
우리 꽃 야생화를 입체 자수로 표현한다. 초심자도 도전할 수 있도록 15가지 기초 자수법만으로 완성할 수 있게 구성했으며, QR코드를 수록해 영상으로도 이해를 돕는다.
발효식탁 (김봉경 저·수작걸다)
누룩소금, 누룩간장 등 10가지 누룩발효조미료로 만든 72가지 발효 요리 레시피를 소개한다. 시판 조미료에 누룩만 더하는 간편한 방법으로 발효 식품의 효능을 낼 수 있게 했다.
싱크 어게인 (애덤 그랜트 저·한국경제신문)
베스트셀러 ‘오리지널스’를 쓴 애덤 그랜트의 신작. 확실한 것도 다시 생각하고, 배운 것도 고의적으로 잊어야 한다는 사고법을 제시하며 급변하는 세계에 필요한 인생 철학을 소개한다.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저·아날로그)
고대 로마의 문인이자 철학자, 정치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원문을 새롭게 구성한 책이다. 고전의 지혜로 노년기를 빛나게 만드는 마음가짐과 방법을 전한다.
소금길 (레이너 윈 저·쌤앤파커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중년의 부부가 영국에서 제일 긴 산행로로 배낭여행을 떠나며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1000km가 넘는 길을 걷는 동안 자연에 얻은 위로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모두 웃는 장례식 (홍민정 저·별숲)
암에 걸린 할머니가 ‘생전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선언하며 일어나는 일을 그린 장편 동화다. 잔치 같은 장례식으로 할머니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나가는 가족들의 모습이 감동을 전한다.
새의 언어 (데이비드 앨런 시블리·윌북)
조류관찰자인 저자가 새에 관련한 크고 작은 궁금증을 직접 그린 200여 종의 일러스트와 함께 흥미롭게 풀어낸다. 길 위의 새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 가이드’도 부록으로 수록했다.
초록빛 식물 자수를 소개합니다 (김여울 외 공저·동양북스)
식물을 수놓을 때 예쁜 스티치만을 한데 모았다. 자수 초보를 위해 도안을 단순화하면서도 13개의 실만으로 풍부한 색감을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상세한 과정 사진도 함께 담았다.
습도가 제법 높았던 날이었다. 다녀온 지 시간이 좀 지났어도 머체왓 숲길은 아직도 가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도 그 숲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 단지 안개비 뿌리던 날의 감성이 보태져서는 아니다.
햇살 쏟아지는 한낮이거나 숲이 일렁이며 바람소리 윙윙거리는 날이었다 해도 신비롭던 풍광의 그 숲은 여전히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숲은 저만치서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수한 풍치에 끌리듯 다가갔다. 거길 걷는 이들의 오롯한 순례는 머체왓이기에 가능했다. 빼곡했던 숲의 적막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발걸음 소리마저 자연 속에서 일부가 되었다. 머체왓 숲은 그런 곳이었다. 오감이 열리던 그날의 시크릿한 숲의 언어를 기억한다.
머체왓 숲은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있다. 머체왓이란 낱말은 제주도민에게도 익숙지 않다. '머체'는 '돌이 엉기성기 쌓이고 잡목이 우거진 곳', '왓'은 '밭'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를테면 돌과 나무가 우거진 척박한 숲길이라는 뜻이다. 오르내림 경사의 난이도도 거의 없는 쉬운 길인데도 말 그대로 군데군데 이끼 낀 돌무더기가 있고 쭉 평탄하지는 않다. 제주엔 무수한 오름과 둘레길이 있지만 이처럼 손이 덜 탄 머체왓 숲길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한가롭게 걸을 수 있다.
입구 안내판의 머체왓 숲 프로그램과 숲길 안내도를 들여다본다. 희망자는 체험 프로그램이나 숲길 탐방코스별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숲길은 두 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는 머체왓 숲길(느쟁이왓 다리- 방애 혹- 제밤낭 기원 쉼터- 조록낭길- 전망대- 옛집터- 서중천 전망대(다리)- 숲터널- 올리튼물- 연제비도를 돌아 6.7㎞, 약 2시간 30분),
2코스는 머체왓 소롱콧길(방사탑 쉼터- 움막 쉼터- 편백낭 쉼터- 소롱콧 옛길- 중잣성- 편백낭 치유의 숲- 오글레기도- 서중천 습지- 숲터널- 전망대(다리)부터는 1코스와 중복되는 6.3㎞, 약 2시간 20분).
그 외 남쪽으로 3㎞의 서중천 탐방로가 있다. 진입하다 보면 저류지 공사를 하는 곳이 있어 코스를 조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머체왓 숲길은 지난번 태풍 복구 작업으로 탐방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을 걸어놓았다.
머체왓 소롱콧 숲길에 들기 전, 눈앞에 새하얀 메밀밭이 펼쳐졌다. 마치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문장처럼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한 그 광경이었다.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은 아니었지만 초입의 드넓은 목장지대 초원을 뒤덮고 자잘하게 피어난 메밀꽃이 비에 젖어 촉촉했다. 고립무원처럼 적막하던 숲에 젊은 남녀 한 팀이 들어서니 비로소 자연과 사람의 어우러짐이 조화롭다.
소롱콧길은 일대의 지형지세가 작은 용(龍)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코’의 의미는 ‘코지’, ‘곶’의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서중천 주변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 둘레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피톤치드의 숲 내음이 늘 고여 있는 듯하다. 빼곡한 숲 틈으로 가끔씩 하늘이 열리고 조금씩 걸어 들어갈수록 청정 숲은 마치 제주의 속살로 파고드는 듯 신비로웠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초원을 지나 온통 숲인데도 돌담이 가끔 보였다. 밭을 둘러친 돌담을 밭담, 무덤 둘레의 돌담을 산담이라 하는데 경계를 짓기 위함이라고 한다. 집과 집을 구획하는 울담, 전통 초가의 외벽에 쌓은 축담 등 역할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지닌 돌담들은 경계의 의미를 넘어 있는 그대로를 삶 속에 끌어들인 제주 사람들의 혼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밭 한가운데 돌담이 둘러친 묘지가 독특했다. 자손들이 밭을 매다가 "할무니이~" 하고 불러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쉬면서 할머니에게 가슴속에 담아둔 고자질도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돌무덤이 어쩐지 정겨워 보였다.
조금씩 비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숲길은 고요했다. 이끼와 고사리가 자라는 길을 걷다가 오래된 고목 아래 펼쳐진 젖은 평상에 앉아봤다. 이따금씩 이렇게 쉼터가 나타나고 숲놀이를 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공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나무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길 옆 아래에선 저속으로 흐르는 서중천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운치와 편백나무 향의 상쾌함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숲과 초원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된다. 어디서든 바다를 볼 수 있는 제주에서 이렇게 작은 냇물을 끼고 걷는 소소한 맛이라니, 그저 좋다. tvN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에 머체왓 숲이 나왔을 때 배우 공효진이 "여기 가만히 있으니까 정신이 사납지 않고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지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신비로운 숲, 인적 없이 적막해도 생동감이 넘친다. 곳곳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도 느껴진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건강한 기운이다. 마음껏 숨을 쉬어도 안전한 곳. 자연이 주는 자비로움에 둘러싸여 복 받은 느낌이다. 요즘 너무 흔해져버린 힐링이란 말을 이곳에서는 쓰고 싶지 않다. 머체왓이나 소롱콧처럼 제주만의 토속적인 말이 따로 없을까. 초원, 꽃, 나무, 하늘, 구름, 빗방울, 돌, 물, 바람까지 제주 근원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숲이다.
이토록 순수한 머쳇골에도 제주의 역사가 서려 있음을 상기할 일이다. 진입로에 들어서자 시비가 눈에 띈다. 비석에 '시비를 세우는 뜻'이라는 글이 있다. "한남리 머쳇골은 제주 역사 속에 '잃어버린 마을이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머쳇골에 살았다는 문태수(78세) 씨는 ‘4.3 이전까지는 조상 대대로 대여섯 가구가 목축업을 하며 살아왔다’라고 회고했다. 오승철 시조시인은 머쳇골 집터의 무늬, 4.3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터무니 있다'라는 시로 2014년 오늘의 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한남리 주민들과 서귀포문인협회에서는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을 복원하고 제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복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이것은 뜻있는 다양한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제작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오승철 시조시인의 시 '터무니 있다'도 새겨져 있다.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 꿩으로 우는 저녁
아름다운 제주가 아픔의 땅이기도 한 것을 숲길을 잠깐만 걸어도 알 수 있다. 원시의 자연을 내어주며 쉬다 가라고 숲은 말하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통증도 새겨져 있다. 발걸음을 늦추고 놀멍, 쉬멍, 걸으멍 정글 탐험하듯 미로와 같은 길을 걸으며 그들을 기억한다. 머체왓의 생생한 자연 속에 풍덩 빠져서 치유의 시간을 만나며 삶의 에너지를 얻고 가벼워지는 곳, 기어이 다시 올 수 있도록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한 구절처럼 또 다른 길을 남겨두었다.
*머체왓 숲길 방문객지원센터: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주변에 가볼 만한 곳과 맛집
△머체왓 식당
머체왓 식당은 머체왓 숲길 지원센터와 같은 건물에 있다. 주변엔 식당이 없고 오직 여기뿐이다. 그렇다고 밥상이 허술하지 않다. 오리백숙이나 옥돔구이 정식처럼 한상 차림도 있지만 단품 메뉴도 있다. 반찬이 깔끔하고 정갈하다. 맛도 괜찮다. 줄 서서 먹는 맛집보다 이렇게 그 자리에서 길 가던 사람에게 먹을 만한 밥 한 끼 내어주는 집이 정겹다. 머체왓 식당이 그런 곳이다(머체왓 숲에 들면 음주가무, 흡연, 음식물 반입, 취사 행위가 금지된다).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보룡제과
성산읍으로 나오면 시내에 유명한 빵집이 마주 보고 있다. 그중 보룡제과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클래식한 빵집의 분위기가 친근하다. 시그니처 마늘바게트를 비롯해 가격도 합리적이고 서비스도 후하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747-28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글라스 하우스’
머체왓에서 성산으로 나왔다면 섭지코지에 한번 들러보는 건 어떨지. 성산일출봉 옆 섭지코지는 제주엘 가면 누구나 가보는 곳 중 하나다. 게다가 영화나 드라마 촬영 단골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멋진 건축물이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글라스 하우스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이 제주에 제법 많은데 그중 글라스 하우스는 제주의 자연과 풍광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주의 햇살과 바다와 바람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했다는 건물 앞에서 인생 샷을 찍거나 실내의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봐도 좋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46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비(詩碑) 거리
성산포를 사랑한 이생진 시인의 시비공원이 성산포 해안에 조성되어 있다. 성산 일출봉이 건너편으로 보이고 제주의 바닷바람과 햇살이 시비 위로 뿌려지는 곳. 오가는 이 별로 없는 그 바닷가에 지나듯 들러 시인의 시를 천천히 읽어본다면 여행의 기억이 더 풍성해진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305-1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은 부모의 큰 즐거움이며 보람이다.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졌지만, 예전엔 부모들이 집안의 법도와 항렬을 지키면서 좋은 이름을 짓느라 정성을 들이며 많은 고심을 했다. 의미가 아무리 좋아도 발음이 우스우면 놀림감이 된다. 받침을 뻴 경우 이상해지는 이름도 되도록 삼가야 한다. 지난주 ‘바서오 선생님은 어디에’라는 글을 썼더니 그걸 읽은 송장진, 정봉직, 임연봉 이런 사람들이 어려서 받침을 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 시달렸다고 자수해왔다.
알고 보면 사연이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하도 빚쟁이에 시달려 “200만 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한탄을 했는데(1950년대 후반의 일이다), 마침 아기가 태어나 이백만이라고 이름 지은 경우가 있다. 일제 때 길에서 300원을 주운 사람은 세 아들의 이름을 이진삼, 이진백, 이진원 이렇게 삼, 백, 원으로 지었다(미확인 보도임). 아들을 더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이름에 숫자를 넣는 경우는 많다. 일본인들은 이치로(一郞), 지로(次郞), 사부로(三郎) 식으로 우리보다 더 노골적인 것 같다. 중국인들도 숫자를 잘 넣어 이름을 보면 장남인지 몇째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백 천 만 억, 이런 큰 숫자를 넣은 이름도 많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명종 연간에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분이다. 절조 있고 청렴결백하며 시와 초서에 능했다.
그런데 석천의 5형제 이름이 천으로 시작돼 아래로 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 임천령, 임만령, 임억령 이렇게. 억 다음엔 당연히 조, 경이 나와야 할 텐데 석천의 아버지(또는 할아버지)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넷째와 다섯째의 이름을 백령, 구(九)령으로 지었다. 따지고 보면 9도 구만리장천까지 뻗치는 무척 큰 글자이지만, 어쨌든 막내 이름의 숫자가 가장 작다.
석천의 두 형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기묘사화(1519년) 당시 함경도 단천에 유배돼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살 아래 동생 임백령(1498~1546)은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붙어 대윤(大尹) 윤임(尹任) 등을 제거한 을사사화(1545년)를 일으켰다. 석천은 동생이 그 공으로 위사공신 1등에 숭선부원군으로 책봉되자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면서 “잘 있거라 한강수야/고이 흘러 물결 일으키지 마라”[好在漢江水 安流不起波]고 시로 타일렀다. 그 뒤 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불태우고 의절한 채 해남에 은거하다 동생이 죽은 뒤에야 서울에 출입했다. 막내 구령도 백령을 따라 시류에 편승해 출세의 길을 걸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시를 가르치기도 했던 석천은 강원도 관찰사일 때 관동팔경을 시로 읊은 일도 있고, 김성원(金成遠), 고경명(高敬命), 정철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이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담양의 식영정은 사위이자 제자인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석천이 시속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이백을 배우려 노력했다며 자기 문집에 이런 시를 소개했다. “어떤 사람 물가에 기대어 서 있는데/ 해오라기도 여울가에 멈춰 섰네/ 머리가 흰 건 비슷하다만/ 나는 한가한데 해오라긴 여유가 없구나”[人方憑水檻 鷺亦立沙灘 白髮雖相似 吾閒鷺未閒].
허균(許筠)도 그를 찬탄하며 “마음은 흐르는 물과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꿈에는 백구 되어 강 위를 나네”[心同流水世間出 夢作白鷗江上飛]라는 시를 호평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긴 바람은 만리에 불고/ 조각달은 고금을 비추네”[長風一萬里 片月古今秋]라는 시구를 이백에 비기며 감탄하는 글을 남겼다.
석천의 시 중에서 널리 사랑을 받는 것은 ‘시자방’(示子芳), 친구 자방에게 보인 세 수 중 세 번째 시다. “옛 절 문 앞에서 또 봄을 전송하노라니/ 지는 꽃잎 비를 따라 옷에 붙는데/ 돌아와도 소매 가득 향기가 맑아/ 수많은 산벌들이 날 쫓아오네”[古寺門前又送春 殘花隨雨點衣頻 歸來滿袖淸香在 無數山蜂遠趁人].
형제의 스승이었던 청백리 박상(朴祥)은 형 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며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고 했고, 동생 백령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너는 정승이 되리라”고 했다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백령은 출세를 하긴 했지만 더러운 이름을 얻은 채 명나라에 다녀오다 객사했고, 형은 동생보다 22년을 더 살면서 맑은 이름을 후세에 드리웠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마흔 살이나 많은 임억령을 존경해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평생에 이 무릎 꿇지 않았다가/ 오늘날 공 앞에서 꿇는다오”[何幸同時出 生平不屈膝 今日爲公屈]라는 시를 썼다. 백령에 대해서는 선조에게 지어 올린 ‘동호문답’(東湖問答)에 “윤원형, 임백령 등 다섯 간흉은 그 죄가 하늘에 이르니 반드시 죽이고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자들”이라고 극언했다.
임억령 5형제의 이름엔 모두 장수의 기원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 단연 우뚝한 인물은 임억령이다. 이름 그대로 억 살을 살 것 같다. 그리 될 인물인 줄 알고 아버지가 가장 큰 숫자를 준 걸까, 아니면 가장 큰 숫자를 받아서 그에 걸맞게 자신을 수렴해가며 스스로 큰 인물이 된 걸까. 자꾸만 내 이름과 남들의 이름을 돌아보게 된다.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에 쫓겨나는 세상이어서 맑은 인격이 더 그리워진다.
슈퍼리치의 소비가 가치를 묻는다. 과거에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한 소비를 했다면 최근엔 가치를 따지고 스토리가 담긴 소비를 한다. 전 세계 슈퍼리치들은 과연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지 살펴봤다.
전 세계 슈퍼리치들은 어떤 상품과 어떤 서비스를 구매할까. 이들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비용에 상관없이 구매하는 소비성향이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주는 선물을 고를 때도 가치를 따진다. 슈퍼리치들이 소비의 새로운 기준으로 삼는 건 과연 무엇일까.
예술적 디자인 까다롭게 평가
슈퍼리치의 소비가 가치를 묻는다. 무작정 비싼 상품과 서비스에만 돈을 지불할 것 같았던 슈퍼리치들이 언젠가부터 가치를 따지고 스토리가 있는 상품과 서비스에 지갑을 연다. 먼저 슈퍼리치들이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것부터 살펴보자.
슈퍼리치들은 미용과 패션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인맥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향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들은 다른 슈퍼리치와의 만남에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미용에 대한 관심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높은데, 품위를 위해서라면 지불해야 할 가격이 높건 낮건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전 세계 여성 슈퍼리치들이 이용하는 런던 불가리 호텔의 샴페인 목욕 서비스는 부자들만 누릴 것 같은 사치스러움이 있지만 가격 부담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이곳을 이용하려면 약 67만 원의 호텔 예약비를 먼저 지불한 뒤 서비스를 받을 경우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샴페인 목욕에 사용되는 수십 병의 와인은 따로 구비돼 있고 90분짜리 전신마사지는 약 90만 원에 이용할 수 있다.
슈퍼리치들은 까르띠에, 티파니, 부첼라티, 반클리프앤아펠 등의 명품 주얼리를 너끈히 구매한다. 이들이 수억 원짜리 주얼리를 구매하는 건 과시욕보다는 감상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프랑스 하이엔드 주얼리 브랜드 ‘반클리프앤아펠’은 예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액세서리다. 반클리프앤아펠의 베스트셀러 중 ‘빈티지 알함브라 롱 네크리스’는 가격이 무려 7800만 원이나 되지만 상상력과 기술이 낳은 예술적 자태를 뽐낸다. 반클리프앤아펠은 할리우드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사랑한 주얼리로 유명하다.
‘희소성’ 있는 브랜드 선호
남성 슈퍼리치라면 자동차, 특히 명차를 빼놓을 수 없다. 벤틀리, 마이바흐와 함께 3대 명차로 꼽히는 ‘롤스로이스’는 과거엔 아무나 탈 수 없는 차였다.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자격이 안 된다는 이유로 구매를 거절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롤스로이스는 돈이 있어도 가질 수 없는 명차였기에 슈퍼리치들은 자신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이 차를 더 간절히 원했고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스스로 부여했다. 2009년 이후 롤스로이스는 ‘성공한 사람이면 누구나 탈 수 있는 차’라는 콘셉트를 내세웠고 전 세계는 물론 국내 슈퍼리치들도 기꺼이 거금을 내놓았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은 6억 원대인 ‘팬텀’보다는 저렴한 ‘고스트’. 이 역시 4억 원을 훌쩍 넘는다.
슈퍼리치는 트렌드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난해 JTBC의 ‘캠핑클럽’ 핑클 편이 시청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캠핑 열풍이 다시 몰아쳤다. 슈퍼리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이 캠핑카에 많은 관심을 보이자 시장은 메르세데스-벤츠 스프린터를 개조한 프리미엄 차량 ‘화이트 하우스B’를 슈퍼리치용으로 내놓았다. 이 차는 다임러트럭코리아의 2차 제조사 화이트하우스코리아가 스프린터 편의기능을 업그레이드해 제작한 1억600만 원대 모델이다.
홈파티에서 보여주는 특별한 안목
슈퍼리치에게 홈파티는 당연한 사교모임이다. 다른 슈퍼리치를 집에 초대해 그들만의 사교모임을 갖는 건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일종의 관례와 같다. 하지만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슈퍼리치의 홈파티는 의미가 없다. 이들은 집 안을 럭셔리하게 꾸며놓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안목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재력을 과시하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홈파티를 즐기는 슈퍼리치들은 집 안 가구에 많은 신경을 쓴다. 이들에게 인기 있는 가구는 북유럽 감성을 담은 덴마크의 ‘프리츠한센’이다. 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 등 프리츠한센이 추구하는 디자인과 슈퍼리치는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유명 아티스트 작품을 소장한다는 의미와 오랜 시간을 두고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 때문에 사랑받고 있다. 특히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의자들이 인기다. 동글동글한 디자인의 ‘에그체어’ 가격은 최고 1900만 원을 호가한다. 최근에는 하이메 아욘, 오키 사토, 세실리에 만즈 등 유명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새 가구를 만들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요리를 준비하는 주방도 슈퍼리치들이 당연히 신경 쓰는 장소다. 이곳에 놓는 오븐으로는 프랑스 ‘라꼬르뉴’가 손꼽힌다. 오븐계의 명품으로 알려진 라꼬르뉴는 전문 장인이 주문을 받아 제작하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를 자랑한다. 구매자가 컬러부터 소재, 외관 등 디테일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슈퍼리치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오븐’이라는 희소성은 가치 있는 스토리가 된다. 라꼬르뉴의 최고가 라인 ‘샤또 시리즈’ 가격은 오븐이 8700만 원, 후드가 2000만 원에 달한다. 이 오븐은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칼 라거펠트, 이브 생 로랑 등 수많은 유명인사가 애용하고 있다.
건강이 ‘최우선’
슈퍼리치는 건강을 위해 식재료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심지어 송로버섯이 들어간 소금만 먹는 슈퍼리치도 있다. 가격대가 20만 원을 훌쩍 넘지만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식료품점도 아무 곳이나 이용하지 않는다. 영국 런던의 부촌지역 첼시의 대형마트나 세계 최고의 백화점으로 선정된 셀프리지 등은 슈퍼리치가 애용하는 마켓이다. 이곳에서 파는 이베리코 돼지 뒷다리 가격은 200만 원이 넘고, 알비노 철갑상어 알 1㎏은 무려 2000만 원에 육박한다.
전 세계 슈퍼리치가 건강관리를 위해 찾는 의료관광 패키지도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EW 빌라 메디카’가 있다. 세포재생시술을 한 번 받는 데 드는 비용은 2000만 원, 3박 4일 의료관광 패키지는 약 3000만 원이다. 연회비가 1억 원이 넘지만 전 세계 부자들이 앞 다퉈 예약한다. 에스트라다 전 필리핀 대통령, 영화배우 미셸 로드리게스 등 유명인사가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피트니스센터도 인기다. 슈퍼리치가 주로 찾는 해외 유명 피트니스센터는 1년 회원권이 900만 원이나 하는 곳도 있다. 국내에도 고액의 피트니스센터를 즐겨 찾는 슈퍼리치가 많다. 이들은 근육운동보다는 자세교정을 위한 운동에 더 관심이 많다. 이들이 자세교정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은 시간당 7만~8만 원 선이다.
‘스토리’가 있는 선물
슈퍼리치들은 주변인들을 위한 소비에도 과감하다. 오히려 선물을 고를 때 까다로운 취향을 드러내며, 작은 펜 하나를 선택할 때도 스토리가 있는 상품을 선호한다. 슈퍼리치들이 좋아하는 펜을 꼽자면 희소성의 가치를 지닌 ‘파버카스텔’이 단연 최고다.
파버카스텔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브랜드. 슈퍼리치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구매하는 상품은 ‘클래식 퍼남부코’ 시리즈로, 가오리 가죽이나 상어 가죽, 스네이크우드, 말총, 상아 등을 소재로 사용하고 심지어 2억 년 이상 석화된 나무로 제작된 펜도 있다. 이 시리즈의 가격은 샤프와 볼펜이 각각 42만 원, 수성펜 55만 원, 만년필 80만 원이다.
그렇다면 슈퍼리치는 손자녀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영유아일 경우 유아용품을 선물할 것이다. 하지만 유아용품이라고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세계적인 부호들은 어린 손자녀를 위해 거액을 아끼지 않는다. 유모차 한 대를 사는 데 무려 500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도 있다. 영국 유모차 제조업체인 실버크로스가 600대 한정판으로 만든 유모차는 이너시트를 양털로 만들었고 캐시미어 담요도 딸려 있다. 이탈리아의 유아용 고급가구 제작업체인 ‘수오모’는 순금으로 만든 침대를 165억 원에 판매한다. 침구는 비단과 최고급 면인 피마 면을 소재로 사용했고 금실로 자수를 놓았다. 다이아몬드와 백금으로 이름을 새길 수도 있다.
국내 슈퍼리치는 자녀들에게 주식을 선물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후상속보다 사전증여를 통해 합법적으로 세금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성년자에게 주식을 선물한다는 이유로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2019년 5월, 자산 기준 5조 원 이상인 국내 대기업 59개사를 조사한 결과, 18세 미만 미성년자 주주가 19명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는 무려 335억 원에 달했다.
안타까운 한국 슈퍼리치의 ‘기부문화’
슈퍼리치에게 기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통한다. 세계 최대 면세점 전문기업 DFS의 창업주인 척 피니는 부자들이 롤 모델로 여기는 슈퍼리치다. 그는 15년 동안 약 8조4000억 원을 기부했는데, 정작 자신은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3만 원짜리 플라스틱 손목시계를 착용한다. 척 피니를 존경한다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도 40조 원이 훨씬 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하고 추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기부를 하면 돈의 가치가 한층 빛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한국에도 기부에 앞장서는 슈퍼리치가 있긴 하지만 선진국에 비해 적은 편이다. 평소에 삶에서 돈은 큰 의미가 없어 기부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부자가 많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부자는 이기적이고 인색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일까? 바로 세금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 기부를 하면 세금 부담이 많이 줄어드는 데 반해 한국은 혜택이 크지 않다. 그러나 세금 혜택을 떠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의식의 선진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