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그건 좀 미친 짓 아닌가?” 김화자(59, ‘꽃피는 산골농원’ 대표)는 이런 핀잔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귀에 담지 않았다. 시골살이의 고독과 농사의 고난을 헤쳐나가느라 몸은 물론 마음마저 상할 수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라는 충고쯤으로 여기고 시골행에 시동을 걸었다. 시골살이는 김화자 부부에게 오래 묵은 로망이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부부 단둘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김화자에게 귀농은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었던 같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것과도 같은 순행. 올해로 그는 귀농 11년 차를 맞이했다. 애초 귀농을 만류했던 이들의 말이 이젠 사뭇 달라졌단다. “어라, 이 사람들 성공했네!”
김화자의 집은 무주군의 명산 적상산 아래에 있다. 한갓진 외딴집이다. 집 앞엔 개활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상적인 건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 풍경이다. 뒤편으로는 적상산이 떡 버티어 집을 보듬었고, 앞쪽에선 대호산이 뭔가 서기를 풍겨 생동감을 부여한다. 저 멀리 아스라이 덕유산도 보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 산의 정상부는 아예 설산인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편집해 붙인 듯 신비감이 감돈다. 여기나 저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산들의 동향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산경(山景)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 적격인 삶터다. 김화자는 마땅한 시골을 물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온 이곳을 둘러보고 곧바로 부지를 사들였단다. 첫눈에 호감이 가서.
“이왕이면 산세 좋은 곳에 터를 마련하고 싶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 곳곳을 답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곳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강원도의 산세를 닮은 분위기에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깊은 맛을 풍기는 산세에다 탁 트인 경관까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즉시 매입했다. 철탑이나 축사가 인근에 없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갖가지 꼼꼼한 점검부터 하는 게 매입 수칙이라지만 그런 걸 다 생략하고 샀다.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싼 땅값을 치렀더라.(웃음)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취향에 맞는 터를 구입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터를 정하고 나자 지인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또 끄집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주에서 무슨 재주로 살 거냐면서.(웃음)”
초기 5년은 혹한기
터 일대의 자연환경 하나에 꽂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시골살이를 해왔으니까 말이다. 터에 서린 무슨 지령(地靈)의 선한 감독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눈에 반한 땅이 주는 만족감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아 순항을 해왔으니 김화자에겐 영락없는 명당이다. 귀농 전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문구점을 18년간 운영하다가 접고 시골로 들어온 것.
“자영업이 대부분 그렇듯 자유시간이 없다. 스트레스도 많고 갑갑증이 난다. 더구나 우리는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았다. 덕분에 문구점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일찍부터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엔 시골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작정을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 가게를 청산하고 2013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도시에도 장점과 매력 요소가 많다. 시골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돈을 벌기엔 도시가 한결 유리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삶을 꾸리는 데엔 시골이 더 낫다고 봤다. 그리고 그 좋은 삶이란 시골의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식의 여유로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오랫동안 시골을 꿈꾸었던 거다. 어휴, 도시는 참 싫다. 스트레스와 부자유는 물론 교통체증과 매연에 질렸다.”
농사는 어떤 작물을 하나?
“농원의 전체 부지 1800평 중 1500평에다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를 한다. 처음엔 사과 농사만 하다 나중에 블루베리를 추가했다. 애초 우리는 귀촌 형태의 시골살이를 구상했다. 호미자루 한 번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인근에 구천동 관광지구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민박집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고 나서는 귀농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겠지?
“원래 이 터 일부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던 데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라 권유를 해 입문했다. 무주는 사과 특산지구다.”
농사 초심자가 과수원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게 많지 않았을까?
“처음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호미로 풀을 메다가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문제는 농사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무주농업대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열심히 배웠다. 여러 해에 걸쳐 농업교육을 이수하면서 농촌체험학습지도사, 농식품가공기능사, 팜파티플래너 1급 지도사, 다육아트지도사 등 다수의 자격증을 땄다. 농촌융복합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고.”
당초 귀농에 뜻을 두지 않고 내려왔지만 어차피 본격 농사에 승차했으니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 아마도 그런 결기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김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걸로 귀농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그러자 매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즐거워졌다. 비록 고달픈 노동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에서와 달리 마음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농사로 얻는 수익은 쉬 오르지 않더란다. 초기 5년은 혹한기였다는 것.
“월 300만 원, 즉 연간 3500만 원 정도의 순소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쯤이면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충분할 거라 봤다. 하지만 손에 쥘 게 거의 없었던 초기 5년간은 많은 고심을 하며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 잡는 데 5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 괜찮은 성적이지 않나? 10여 년이 지나서야 궤도에 오르는 귀농인도 많다.
“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와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품질이 좋다. 이게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 자체는 쉽지 않다. 특히 자연재해엔 속수무책이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물과 햇빛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칠 수 있다.”
일찍이 현자가 말했더라. 하늘은 때로 사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고. 어떤 식의 자연재해를 경험했나?
“태풍이 몰아쳐 사과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낙과 발생이 극심해 팔 만한 게 없었다. 밤낮없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며 울었다.(웃음) 봄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긴 장마, 겨울 가뭄 등 수시로 악재와 부닥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며 산다. 그러나 행복감을 맛보는 때가 아주 많다.”
어떤 때에?
“창밖이 밝아오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가만히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참 좋다. 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자각을 할 때도 행복하다. 이건 도시에서 가게를 할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다.”
괜히 시골에 들어왔다는 후회는 없었는지?
“한번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를 돌보다가 떨어져 발목뼈 세 군데가 부러졌다. 게다가 수술마저 잘못돼 무려 2년간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아이고, 내가 왜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을 하지?’(웃음) 하지만 잠깐 스쳐가는 후회에 불과했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
그의 농원은 정갈하고 쾌적하다. 2층으로 지은 살림집과 정원 공간, 체험장과 가공공장, 사과와 블루베리 밭, 또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통로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조화로운 한편 기능성을 극대화했다. 부부가 쏟아부은 비지땀과 능력과 시간의 산물이다. 농장의 핵심 공간은 체험장이다. 이곳은 급조한 비닐하우스지만 내부 치장이 꽤 흥미롭다. 벽면에 걸린 수예품과 그림들, 선반에 올라앉은 공예품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재잘거리는 수백 점의 다육식물들. 이것들은 모두 김화자가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창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농원은 무주군 1호 치유농장이다. 과수 농사만 하다가 치유체험농장으로 전환한 이후 나름의 성장을 해왔다. 체험장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치유 프로그램 소재로 쓰인다. 이건 실로 만족스런 대목이다. 나의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을 프로그램화해 남들과 공유하고 소득까지 올리고 있으니까.”
일과 취미를 접목한 셈인가?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게 기본 목표였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농사만 했지만 노동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취미 역시 제대로 즐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흔히 원주민이나 귀농인이나 농사에 매몰돼 취미 내지는 문화 활동과 무관한 일상을 산다. 당신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내가 경험한 시골 인심은 정겹고 순박하다. 그러나 평생 호미를 쥐고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안타깝다. 때로 그들을 농원에 모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러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귀농인들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난 읍내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즐기기도 하는데, 문화 동아리도 많고 싼값에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이벤트도 풍성한 게 요즘의 지방이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지? 이제 농원에 무엇을 더 보탤 계획인가?
“2023년 매출이 약 9000만 원이다. 이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차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지만 사실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부부가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고, 자식들이 놀러 와 맘껏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바랐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 기쁘다.”
원했던 곳에서 원했던 삶을 발굴해 지속한다는 건 아마도 인생의 최고봉이다. 섣부른 귀농으로 인생이 외려 꼬이는 수도 있지만 과욕 없는 열렬한 행보라면? 김화자의 방식엔 은근히 개성과 패기가 박혀 있다.
김화자가 주는 귀농 Tip
•마음을 비우고 귀농하자. 꽉 채워진 마음엔 새로운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향이나 기질이 농촌 생활과 어울릴지 면밀히 점검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귀농 초기의 고생은 통과의례로 여기고 귀농하자. 5년 차까진 수련기로 작정하는 게 현명하다.
•처음엔 집을 빌려 쓰라고들 하지만 아예 내 소유 집부터 짓는 게 좋을 수 있다. 초기의 어려움에 질려 너무 쉽게 역귀농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집을 지어놨을 경우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인내하며 활로를 찾아가기도 한다.
•작목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하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생산물 유통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만의 귀농은 금물이다.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단양은 행정구역상으로 충청북도다. 하지만 북쪽으로 강원도 영월군, 동쪽으로 경상북도 영주시, 남쪽으로 경상북도 예천군과 문경시, 서쪽으로 충청북도 제천시와 접해 있어서 주변과 연계한 여행을 계획할 때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단양의 자연은 짓누르던 일상의 무게를 날려버리고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단양의 깊은 산과 계곡이 주는 힐링이 더할 나위 없다. 계절이 바뀌어가는 자연 속에서 한시름 내려놓고 푹 쉴 수 있는 푸근함 그 자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가게 주인이나 지나가는 분들 모두 선량하고 친절해서,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인 듯 느끼게 해주었다.
태풍, 시루섬의 기적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나 순항만 이어질 수 있을까. 지난여름의 장마와 더위, 그리고 무시무시한 태풍은 평온했던 일상을 바꿔놓고 사라졌다. 이처럼 해마다 맞닥뜨리는 장마와 태풍으로 무수한 아픔이 기억 속에 남겨진다. 1972년 8월 이곳 단양의 남한강 유역에 위치한 시루섬 마을에도 태풍이 강타했다.
당시 25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시루섬을 삼킨 태풍 ‘베티’. 남한강의 갑작스러운 범람이 시작되자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빗줄기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모두 피신했다. 높이 6m, 지름 5m짜리 물탱크에 올라선 마을 주민은 198명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로 팔짱을 낀 채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고립된 상태로 14시간을 버텼다. 이때 엄마가 안고 있던 백일이 지난 아기가 압박에 못 이겨 끝내 숨을 거뒀다. 사람들이 동요하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처지여서 혼자만 슬픔을 삼키던 아기 엄마의 이야기를 시루섬은 기억한다.
어쩌면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었던 14시간의 절박한 사투였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서로 손을 잡고 버텨낸 협동·단결·인내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단양군에서는 시루섬의 기적을 콘텐츠화했다. 이제는 시루섬의 차분해진 자연 속에서 되짚어보는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현재를 본다. 부근에 이끼터널과 수양개빛터널, 잔도길과 만천하스카이워크가 있다. 느림보 강물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아보며 조용히 자연을 즐겨볼 산책 코스다.
신선이 노닐던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이어서 단양 8경 중 제1경인 하선암, 제2경인 중선암, 제3경인 상선암을 돌아볼 차례다. 자동차로 달리면 바로바로 이어져 있어서 느긋하게 단양의 비경을 구경할 수 있다. 조약돌 탑이 즐비한 하선암 계곡의 느릿한 물 흐름을 바라보는 여행자들이 마냥 여유롭기만 하다. 출렁다리가 이어져 있는 중선암 숲은 고요하다. 출렁다리 앞 벤치에 앉아 가게 주인과 단양의 자연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하기도 하고 중선암을 찾는 이들과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참 쉴 수도 있으니, 이 아니 느긋할 수가.
중선암에서 상선암으로 가는 길목에 특이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길 옆으로 소형 동물 옹벽 탈출 시설이다. 도로 건설 등으로 많은 소형 동물이 측구 등에 빠져 죽기도 한다. 이때 소형 동물의 탈출이 어려워, 배수관에 경사로를 설치하여 소형 동물의 탈출을 도와주는 시설이다. 도로를 횡단하는 동물이 높은 옹벽에 막혀 탈출하지 못해 로드킬당한 모습을 가끔 본 적 있다. 이렇게 섬세하고 친절한 인공 구조물이라니, 고마울 따름이다.
상선암 계곡에서 마을로 오르면 집집마다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가 빨갛게 잘 마르고 있다. 이런 태양초라면 김치도 맛있고 어떤 요리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옆 마당의 평상에 고사리, 다래순, 오미자 진액, 취나물 등을 소쿠리에 담아놓고 가격을 적어놓았다. 3000원, 5000원… 이른바 무인 상점이다. 시골 분들의 정성이 담긴 식재료 맛은 남다를 듯하다. 지나던 마을 어르신이 앞산을 바라보면서 예부터 신선이 머물렀다는 전설의 상선암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신다. 덕분에 단양의 산천에 얽힌 구수한 이야기도 듣는다. 자신이 사는 곳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들려줄 수 있는 자부심은 매우 멋지다.
오랜 시간 속의 풍경, 사인암
단원 김홍도가 이곳 겹겹의 격자무늬인 사인암을 그리려고 붓을 잡고 1년여를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절경을 보여준다. 흔히 말하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배경을 이룬다. 사인암은 약 50m 높이의 멋진 바위 아래 남조천이라는 못이 함께하고 있어서,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 안에 들어가서 물장구도 치고 물고기도 잡는다. 거기에 산 정상의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단양 8경 중 4경에 속한다.
바로 옆으로 출렁다리를 건너기 전 청련암을 둘러보아야 한다. 청련암은 사인암과 맞닿은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속리산의 말사다. 팔작지붕 구조의 극락 칠성각이 차분히 맞는다. 무엇보다 사인암 뒤편 암반지대 사이의 삼성각이 눈에 들어온다. 가파른 계단 옆으로 많은 이들의 염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단양 도담삼봉(島潭三峰)의 풍류
단양 여행 중이라면 도담삼봉은 기본 코스인 양 당연히 들를 곳으로 생각한다. 많이 알려져 있고 몇 번씩 보았던 곳이어도 단양 시내에서 가까워 다시 한번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남한강이 휘도는 곳에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반영을 이루어 그 형상만으로도 눈에 담아둘 만하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이곳을 사랑했다 하니, 옛 시절의 풍류도 떠올려본다. 도담삼봉 하류의 석문까지 돌아보고, 여유롭다면 유람선과 모터보트의 즐거움도 챙겨보자.
참고로 단양팔경은 단양군의 8군데 명승지로, 단양을 중심으로 12km 내외에 모두 자리 잡고 있다.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이다.
구경(九景)시장의 마늘 맛 이야기
숙소로 가는 길에 단양 구경시장을 지나칠 수 없다. 단양팔경에 이은 아홉 번째 볼거리라는 뜻의 구경(九景)시장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간다. 구경시장은 상가건물형의 중형 시장으로, 장날은 매월 1일과 6일이다. 길 건너 맞은편에 주차장이 있다. 시장 근처에 드니 마늘 냄새가 확 풍긴다. 마늘로 유명한 단양임을 절로 실감한다. 입구부터 마늘이 주렁주렁, 마늘순대, 마늘만두, 마늘닭강정, 마늘빵, 마늘전병 등 끝도 없는 마늘 먹거리다. 몇 군데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이루고 있다.
숙소, 소선암 자연휴양림으로
자연휴양림은 각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PC나 모바일 앱으로 ‘숲나들e’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하다. 비용이 대체로 저렴해 매월 예약창이 열리면 재빨리 예약해야 한다. 각기 차이는 있지만 신청 시 경쟁률이 높다.
단양 선암계곡 가장자리에 자리한 소선암 자연휴양림은 숲속의 집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산중이어서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속세를 벗어나는 기분이다. 자연의 풍경 속에 잠겨 마음껏 몸에 생기를 집어넣을 기회다.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은 자연스럽게 숲 놀이터와 물놀이장이 된다. 휴양림 안에 두악산 등산로가 연결되었고, 유아숲체험관과 목재체험관도 있다. 숲 내부의 다양한 시설을 이용하며 평온하게 이곳에서만 시간을 보내도 문제없다.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으며 고요한 숲에 푹 잠겼다.
이지훈 하면 30대 이상은 ‘왜 하늘은’이라는 노래를 떠올린다. 30대 이하는 그를 뮤지컬 배우라고 생각한다. 가수로 데뷔한 이지훈은 2006년부터 뮤지컬 배우로 활동 중이다.
벌써 17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인정받지 못한 것 같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러나 언젠가 진심이 통하는 때가 온다고 믿는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왜 하늘은’으로 데뷔한 이지훈. 어느덧 40대가 된 그는 자신의 삶을 관망하는 여유를 가졌다. “데뷔 때가 제일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현재의 모습이다. 과거의 타성에 젖어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과거의 인기는 소중하고 감사한 추억이지만,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왜 하늘은’은 제게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 곡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아직도 대중들이 ‘왜 하늘은’을 기억해주시는 것이 신기해요. 최근에 한 행사를 다녀왔는데, 마지막으로 ‘왜 하늘을’을 불렀어요. 그런데 관객분들이 노래 가사를 다 따라 부르는 거예요. 벌써 27년 된 노래인데 말이죠.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혹독한 뮤지컬 배우 성장기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에 큰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뮤지컬 배우로 진출한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그저 제안이 들어와서 ‘얼떨결에’ 출연하게 됐다. 이지훈의 첫 뮤지컬 작품은 ‘알타 보이즈’다. 호기롭게 도전했는데,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가수고 연기 활동도 했으니까 뮤지컬도 잘 소화할 수 있겠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혹독하게 당했죠. 그 작품이 보이그룹 이야기를 다뤄서 춤을 많이 춰야 했어요. 저는 발라드 가수였기 때문에 춤추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준비하면서도 힘들었는데 무대에 올라가니까 혹평 세례가 쏟아지더라고요. 그때 상처를 받고 뮤지컬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마음을 접었습니다.”
이지훈은 자신의 인생에 뮤지컬은 다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2년 후인 2008년 뮤지컬 ‘햄릿’ 제안이 들어왔고,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무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첫 작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뮤지컬의 매력을 깨달았다. 뮤지컬 배우 이지훈이 눈뜬 순간이다.
“독창 무대의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의 반응과 환호가 터졌어요. 그게 뮤지컬의 희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아, 이거구나! 관객 중에는 제 팬이 아닌 분들이 더 많잖아요. 그런 분들한테도 박수를 받을 수 있다니 감동적이었죠. 그 뒤로 꾸준하게 작품이 많이 들어왔어요.”
이지훈은 이후 ‘엘리자벳’, ‘위키드’, ‘엑스칼리버’ 등의 작품을 통해 호평을 받으며 뮤지컬 업계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엘리자벳’은 그에 대한 대중과 평단의 인식이 180도 바뀐 작품이다. 극 중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루케니 역을 맡은 이지훈은 맛깔나는 연기로 캐릭터를 소화했다. 2013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지훈은 ‘뮤지컬 배우’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뮤지컬 배우 앞에 붙는 ‘가수 출신’이라는 꼬리표에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했다. 가창력을 입증받았던 그는 무대에서도 성량이 풍부하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가수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대보다는 우려를 받는다. ‘원래 이렇게 연기 잘했나’, ‘뮤지컬 언제부터 했지?’, ‘뮤지컬 배우로 재발견’ 등의 악의 없는 표현도 때로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사실 제가 처음 활동할 때만 해도 텃세가 있었어요. 지금은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많지만, 그때는 작품이 많지도 않았고 대중화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세계가 치열했거든요. 같이 연기하면서 진심을 느낀 후에야 동료들이 저를 인정해주셨죠. 또 워낙 뮤지컬 업계는 마니아층이 탄탄하니까 제 캐스팅 소식이 들리면 우려부터 표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지금도 색안경 끼고 보시는 분들이 있죠. 그래서 아직 뮤지컬 배우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중년은 아니지만
이지훈은 현재 뮤지컬 ‘벤허’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1세기 초 로마를 배경으로 하며, 유다 벤허라는 남성의 삶을 통해 고난과 역경, 사랑과 헌신 등의 휴먼 스토리를 담아낸 작품이다. 극 중 그가 맡은 역할은 ‘메셀라’다. 로마의 장교로 오랜 친구인 벤허를 배신하는 인물이다.
“메셀라가 악역이긴 하지만 관객들이 보시기에 연민의 감정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욕망덩어리가 된 서사를 잘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메셀라가 유복한 벤허 집안으로 입양되고 사랑받으면서 자랐지만, 마음속에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쌓여서 로마 장교로 승격된 후 더 출세하기 위해 벤허를 배신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겠죠.”
이지훈은 메셀라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느낀다. ‘나 메셀라’라는 넘버(곡)가 있는데, 100m 거리를 전력 질주하는 느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진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느낌을 오랜만에 느껴본다”고 토로하지만, 좋은 자극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지훈은 혹독한 연습으로 단점을 보완하면서 좋은 무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40대 중반인 이지훈은 “원래는 40대부터 중년이라고 하지만, 100세 시대인 현재는 50대는 되어야 중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중년이 아니다. 5년 남았다”라고 말하면서 웃음 지었다. 그는 메셀라 역을 소화하기 위해 7kg을 감량하는 열정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강한 성취감을 느꼈다면서 동년배에게 동기 부여 메시지를 전했다.
“저도 이 나이에 다이어트를 하면서 솔직히 버거웠어요. 그런데 결국 몸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느꼈죠. 해낼 수 있다는 나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무슨 일이든 늦은 것은 없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늦은 나이라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됐든 꼭 도전해보십시오.”
18명 대가족 라이프
무명 시절이 없어서일까. 이지훈은 귀공자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그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정형편이 불우했다. 영화 ‘기생충’ 현실판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가족에 대한 마음이 상당히 애틋한 이지훈. 삶의 원동력이 종교와 가족이라고 할 정도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건설회사에 다니셨어요. 가족들한테 헌신하는 삶을 사셨고, 그때 돈을 좀 모았죠.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돈을 다 날리고 우리 집은 점점 밑바닥으로 내려갔어요. 정말 힘들었을 때는 반지하 단칸방에 살았죠.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장마철이 되면 물이 엄청 새서 장판을 걷어 올리고 그랬어요. 곰팡이 냄새도 심했죠. 어린 마음에 창피해서 친구들을 한 번도 집에 부른 적이 없었어요.”
이지훈이 데뷔하면서 가세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가 전세 자금을 마련한 덕에 단칸방에서 아파트로 단번에 옮겨갔다. 현재는 온 가족이 모여 산다. 5층짜리 빌라에 무려 18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1층에는 부모님이 살고, 2층에는 형, 3층에는 누나, 4~5층에는 이지훈 가족이 각각 거주한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성공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소년의 꿈이 실현됐다.
“같이 사는 것은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서로 도와주는 부분도, 의지되는 부분도 많아요. 큰 조카들이 어린 조카들을 정말 많이 봐줬어요. 그 애들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희 집도 강아지가 있는데, 저랑 아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가족들에게 맡겨요. 또 방송에 나왔듯이 엘리베이터로 음식을 배달해서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큰 마당 하나를 두고 집을 네 채 지어서 살고 싶어요. 외국의 타운하우스처럼 말이죠.”
이지훈의 대가족 삶을 보는 대중의 시선은 양가적이다. 효심 깊은 아들이라는 사실이 느껴지지만, 그가 늦은 나이에 그것도 외국인과 결혼한 이유는 시집살이 때문이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이지훈은 2021년 14살 연하의 일본인 미우라 아야네(이하 아야네)와 결혼했다. 대중의 우려 섞인 반응에 그는 “시집살이는 없다”고 강조했다.
“며칠 전 제가 행사에 다녀왔는데, 아내가 집에 없는 거예요. 알고 보니 2층 형네 집에서 밥 먹고, 막내 조카한테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더라고요. 사실 대중의 걱정은 알지만 저희 집은 서로 터치하지 않아요. 아내도 정말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모든 가족이 식사를 같이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가족은 저희 집이 꼭대기 층에 있다 보니 올라오지도 않아요.(웃음)”
이지훈은 1970년대생, 아야네는 1990년대생이다. 성향도 극과 극으로 정반대인 두 사람이지만 세대 차이 없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취미 생활도 같다. 요즘 골프에 푹 빠진 부부는 언젠가 세계 100대 골프장 투어를 가고 싶단다. 이지훈은 “아내는 정말 착한 사람이다. 결혼 후에 성격도 유해지고,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극찬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첫 번째 좋은 아빠 되기, 두 번째 세계적으로 이름 한번 떨쳐보기라는 이지훈. “꿈은 원대하게 가질수록 좋지 않나”라며 웃음을 덧붙였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그이기에 행복한 미래도 꿈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뭔가? 세상에 뭐 이런 병이 다 있나?’ 몸 안에 심각한 병이 들이닥쳐 횡포를 부리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병명조차 알 수 없었던 정규원(54, 백민구절초연구소 대표)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며 갖가지 검사를 해봤지만 별 이상 없다는 얘기만 들었다. 조만간 죽음이 방문할 듯 몸의 통증이 자심했는데도 말이다.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다. 고민과 궁리를 한 끝에 그는 마침내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시골이라는 의사에게 몸을 맡기기로 한 거다. 시골의 자연환경이 괴로운 육체는 물론 덩달아 저하된 정신까지 끌어올려 줄 거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의 귀농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규원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농한 건 2010년, 41세의 한창 나이 때였다. 인생의 전성기라 할 시즌이었으니 정리가 쉬웠으랴. 만족스럽던 직업(의류 관련 액세서리 사업)을 일거에 접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게다가 그의 곁엔 살뜰한 아내와 토끼 같은 어린 자식 둘이 있어 발목 잡히기 십상이었다. 과연 아내가 귀농에 동의할지, 무엇보다 가족을 동반하고 귀농할 경우라도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래저래 고심이 많았다. 그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우선은 혼자 외진 산속에 들어가 쑥이나 고사리처럼 조용히 사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TV에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며 병부터 다스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야 했다. 아내가 동행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만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아내는 남편이 귀농을 선창할 경우 일단 반기를 든다. 매우 영민한 종족인 아내들은 날이면 날마다 풀을 뽑다가 뱀을 만나 까무러칠 가능성이 농후한 귀농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걸 직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정규원의 아내는 시골행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아마도 아내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민만큼이나 어려운 역경과 맞닥뜨릴 수 있는 게 귀농이다. 하물며 남편만의 단독 귀농이라면? 이는 가정의 불안정을 촉진하는 지름길이다. 최악의 경우 가정의 해체까지 불러들일 수 있다. 정규원의 아내는 이와 같은 리스크를 고려해 전향적인 판단을 했을 테다. 아내의 대범한 태도에 힘을 얻은 정규원은 마침내 귀농 거사를 착수하게 됐다. 서울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사업을 정리한 뒤 가족 모두를 대동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가 귀농한 곳은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북 청주시 문의면이다. 이왕이면 아주 낯선 객지보다 연고가 좀 있는 곳이 정착에 유리하겠다는 생각으로 점찍은 곳이다. 거처는 농촌 마을이 아닌 면 소재지에 마련했다. 초등생 아이들의 등하교 편의를 배려한 결정이었다.
“귀농 초기엔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다. 텃밭 농사를 통해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음식을 주로 먹었고, 부지런히 뒷산을 오르내렸다. 명상센터에 나가 수련을 하며 마음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농사에 대한 구상도 많이 했다. 논을 사 벼농사를 시도하기도 했다. 쌀만큼은 직접 농사지어 먹자는 아내의 의견에 공감해서였다.”
귀농 전에 미리 받아둔 귀농교육이나 농사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나?
“서울에서 ‘인드라망 생명공동체’가 주관한 귀농교육에 관심이 있어 아내와 함께 참여한 경험이 있다. 경기도 의왕에 텃밭을 마련해 작은 농사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소소한 경험치에 불과했다. 사실 계획 없이 막연한 귀농을 한 셈이었다. 건강 문제가 화급해 사전 준비를 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농업만큼 만만치 않은 직업이 드물다고 알려져 있다. 섣불리 농사에 뛰어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농사로 가족을 건사하느라 고생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농업에 매력을 느껴보진 못했다. 하지만 한줄기 동경 같은 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알겠더라. 농부로서 긍정적인 풍모를 지녔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귀농교육은 귀농 이후 적극적으로 받았다. 이를테면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서 1년간 교육을 받았다. 친환경 농업을 기본 방향으로 정한 바 있어 관련 공부를 해 유기농업기능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전자상거래 등 다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에 적응할 필요를 느껴 E-비즈니스 교육도 받아두었다.”
일련의 농업교육을 이수한 뒤 비로소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나? 아니면 몸 치유에 치중한 시간이 더 많았나?
“치유와 농사를 병행했다. 그게 바람직한 길이기도 했다. 농사일을 하면서 건강도 서서히 좋아졌고, 좋아지는 건강 상태에 따라 농사에 대한 의욕도 상승했으니까. 2013년엔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는 귀농인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상생의 토대를 마련했다.”
멧돼지들이 농장을 초토화하기도
정규원이 선택한 주 작목은 구절초다. 구절초를 재배, 가공식품을 만들어 판매한다. 현재 그는 산속에 있는 4000평 규모의 구절초 농장을 운영한다. 바야흐로 유능한 구절초 농부로 부상하고 있다. 출발은 미미하고 미묘했다. 할머니 묘소에 벌초를 하러 갔다가 가을바람에 살랑대는 구절초 꽃을 본 기억을 잊을 수 없어 200평 남짓한 작은 땅에 구절초를 심은 게 구절초와 인연을 맺은 계기라는 게 아닌가. 일종의 감성적 충동으로 시험 재배 삼아 구절초를 심어봤을 뿐인데 이게 향후의 길을 환하게 열어줬다.
“남에게 빌린 200평짜리 작은 밭에서 거둔 구절초로 조청을 만들어봤는데 50인분 밥솥 하나 분량의 조청이 나왔다. 판매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조청 품질이 좋다며 구입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홍보도 해주었고.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판매 효과까지 거둔 뒤엔 서서히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자연스럽게 구절초 농사에 본격 입문한 셈이다.”
조청만 생산하는 건 아니겠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구절초꽃차, 모종, 체험 상품인 에코화분, 그리고 구절초블랙이라 이름 붙인 농축액 등을 생산한다. 주력 상품은 구절초블랙이다. 이건 유기농 구절초 함량 97%에 달하는 제품으로 나름 야심을 가지고 개발했다. 현재 상표출원 절차를 밟고 있다. 소비자의 80% 이상은 구절초 제품을 약용 목적으로 구입한다. 구절초블랙은 이와 같은 소비자의 니즈에 부응하기 위해 개발됐다.”
구절초 농사 전체 과정 가운데 어려운 부분은 어떤 것인가?
“모든 농사가 그렇듯 구절초 역시 제초 작업부터 뭐 하나 손쉬운 게 없다. 재배 기술 습득은 비교적 용이하다. 문제는 날씨 변동이다. 예상하지 못한 폭우와 긴 장마엔 구절초가 맥을 못 춘다. 과도한 습기에 약한 작물이니까. 배수시설을 완비하고 밭에 경사도를 만들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병충해 예방을 위한 선제적 대응 능력도 필요하다.”
흔히 병충해 방제는 농약에 의존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유기농업은 농약 없는 농사를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 생태환경 유지에 공을 들인다. 난 구절초 농장 복판에 억새섬이라 부르는 작은 숲을 조성해 자연생태와 평형을 이루도록 했다. 이 작은 숲은 병충해의 기습을 완충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사마귀 알집도 활용한다. 미리 채집한 사마귀 알집을 봄철에 방사하는 것인데, 부화된 사마귀들이 해충들을 먹어치운다. 이렇게 사마귀들이 농장을 지켜준다. 그런데 난해한 복병이 하나 있다. 바로 멧돼지다.”
멧돼지 피해가 심각했다는 얘기겠지? 그런데 멧돼지가 구절초도 먹나?
“구절초를 먹는 건 아니고 땅속에 있는 굼벵이를 꺼내 먹기 위해 밭을 아예 농부처럼 갈아엎는다. 한번은 멧돼지 군단이 몰려와 농장을 투철하게 초토화했다. 징을 쳐대고, 포수를 불렀지만 아무 소용없더라. 포수들이 야간 매복을 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녀석들의 공격은 한 달간 이어졌다.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울고 싶은 심정이다.(웃음)”
구절초 향수를 개발하고 싶어
농사로 긍정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안락을 얻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죽하면 귀농을 고행에 견주랴. 정규원은 비지땀 이상의 피땀을 쏟았다. 덕분에 순항을 거듭했다. 매우 어려운 사안으로 알려진 판로 문제도 길을 잘 찾아 해결했다. 생명운동을 지향하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관계를 맺어 상품을 납품, 꾸준히 안정적인 경영을 해왔다. 세상에서 익힌 처신과 경험을 슬기롭게 제련해 귀농 생활의 재료로 활용하는 능력도 뛰어나 안정적인 행보의 거름이 됐다. 그의 언사는 나직하고 다소 어눌하다. 반면 내부엔 뭔가 강철 같은 게 들어 있다는 느낌을 풍긴다. 이기심은 줄이고 이타적 선의를 키워 나아가는 게 삶의 정수를 맛보는 길이라는 신념을 육화한 인간 유형이랄까. 그는 사실상 신념을 밀어붙이며 당찬 귀농 생활을 해왔다. 2013년에 결성한 문화적 농업 공동체인 유기농협동조합에 이어, 2017년엔 경제 공동체인 마을기업 ‘백민구절초연구소’를 만들어 리드하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 문제는? 여전히 아픈 몸을 고독하게 끌어안고 농장에서 뛰나?
“실로 고통스러웠다. 오죽하면 몸 하나 살려보자고 귀농을 했겠는가? 몸이 추락하자 온갖 회의가 몰려들기도 했다. 이 지경으로 몸을 망쳐놓다니, 난 패배자야! 그런 넋두리가 잦았다. 그런데 기대보다 빠르게 건강이 회복됐다. 2017년에 이르러선 병의 늪에서 거의 완전히 해방된 걸 알았다. 따라서 마을기업 결성에 나설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느덧 대학생으로 자랐다지? 뒷바라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가계 형편은 어떤가?
“서울에 있던 집을 판 자금의 절반쯤은 귀농 초기에 다 까먹었다.(웃음) 농업으로 소득을 거둔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젠 꾸준히 소득이 늘고 있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부인은 당신의 농사에 어떤 식으로 조력하나?
“아내는 아내대로 일이 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한다. 각자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상황에 우리 부부는 만족한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게 아내이고.”
만약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귀농을 하게 된다면 지금과 어떤 점이 달라질 거라고 보나?
“(잠깐 생각하다가) 일을 좀 줄여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귀농 방식을 모색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내겐 아직 꿈이 많다.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는 과욕과 과속 없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농장을 키워왔다. 하지만 확장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구절초 가공 제품을 세계 시장에 선보이고 싶고, 구절초의 아찔한 향을 재료로 한 향수 개발에도 뜻을 두고 있다. 그 매너리즘 없는 정신이 그의 돛을 밀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정규원이 주는 귀농 Tip
•집과 농지를 서둘러 구입할 것 없다. 평생의 삶터로 삼을 경우엔 더 신중해야 한다. 처음엔 남의 농지를 빌려 활용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처음부터 농사 규모를 크게 설정하는 건 금물이다. 내 농사는 작게, 그리고 남의 일도 도와주면서 농사 물정을 익히는 게 필요하다.
•농업 교육기관에서 만난 귀농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자. 모임을 만들어도 좋다. 결국은 귀농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농사만으로 자립하기 쉽지 않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을 살린 일거리를 만들어 수입을 보완하자.
•구절초 농사에 뜻이 있을 경우 500평 정도의 작은 규모로 시작해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판로 문제에 대한 사전 연구도 필수다. ‘한살림’ 같은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해 활로를 모색하자.
폭염이 잇따르면서 온열질환자 발생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17일까지 올 여름 서울의 누적 온열질환자는 17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어제인 17일에도 온열질환자 한 명이 추가로 발생했다.
온열질환은 뜨거운 환경에 장시간으로 노출되면서 두통, 근육경련, 의식저하 등의 증상을 보이는 급성질환이다. 대표적으로 열사병, 열탈진이 온열질환에 해당하는데, 증상을 무시하고 방치하게 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질병관리청은 장마가 종료된 지난 7월 26일부터 8월 2일까지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로 신고된 온열질환자는 628명이었고 전체 환자의 45.3%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온열질환자 1385명 중의 277명은 50대로 전체 나이 중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직업별로는 단순노무 종사자와 농림어업숙련종사자에서 많이 발생했다.
2023년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 운영 결과에서 나온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 18명 중 9명은 농업 분야의 70대 이상 고령층이었다. 발생 시간은 오후 3시에서 4시에 많이 발생했고 장소는 실외작업장(31.9%)과 논밭(14.9%)에서 증상이 발생했다.
고용노동부는 ‘폭우‧폭염 특별 대응기간’을 8월 말까지 운영하고 있다. 다수의 기관장이 폭염에 취약한 건설현장 등을 점검하면서 행정역량을 투입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이정식 장관은 “온열질환 발생의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등 선제적인 조치를 해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보건복지부는 폭염에 취약한 어르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8월 31일까지 경로당 운영시간을 연장하도록 권고했다.
경로당은 통상 9시부터 18시까지 운영되었다가 31일까지 21시로 늘어난다. 기간은 필요시에 연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고, 경로당 비회원도 연장 시간까지 이용할 수 있다.
폭염 시 국민행동요령으로는 다음과 같다. ▲폭염특보가 발령되면 외출을 자제해야 한다. ▲외출이 꼭 필요한 경우는 챙 넓은 모자, 밝고 헐렁한 옷을 착용하고 물병을 휴대한다.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나 주류는 되도록 자제한다. ▲온열질환 증세 발생 시에 시원한 곳으로 이동하고 시원한 음료를 섭취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 신체허약자, 환자 등을 남겨두고 장시간 외출할 때 주변에 수시로 안부를 확인해야 한다.
올여름 역대급 불볕더위와 장마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전력 사용량 증가에 따른 사람들의 요금 부담이 커지는 분위기다. 에너지 절감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주요 IT 기업들이 각 사의 IoT(사물인터넷) 기술을 연계한 전기 절약 스마트홈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가 기관과 협력해 시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스마트싱스를 통해 ‘스마트싱스 홈 라이프’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스마트싱스를 가정의 삼성가전과 연동하면 해당 기기의 전력량을 모니터링 하고 관리할 수 있다. 이외에도 스마트싱스의 ‘AI절약 모드’를 사용하면 누진 구간 도달 전 절전모드로 자동 전환된다.
더불어 제품이 꺼져 있을 때 온도·습도·공기 청정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스마트싱스 에어케어 서비스’와 반려동물의 털 길이를 고려해 에어컨 온도를 자동 조절하는 ‘스마트싱스 펫케어 서비스’를 선보였다. 스마트싱스 자동화 루틴을 설정하면 외출·기상·귀가·펫 케어 등 상황에 맞게 공기 질을 관리한다.
LG전자는 스마트홈 플랫폼 ‘LG씽큐’를 이용해 자동 수요반응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전력 사용이 많은 시간대에 스스로 가전제품별 전력 소비량을 측정, 분석하고 절전모드를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사용자들은 해당 서비스를 활용해 소비전력을 기존보다 쉽게 아낄 수 있다.
‘LG씽큐’ 앱은 ‘가전 에너지 모니터링’ 서비스를 통해 LG 가전제품의 전력 사용량과 전월 사용량을 알려준다. 사용자가 월간 전력 사용량 목표를 설정하면 지금까지 사용했던 전력량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이후 예상 사용량을 예측해 준다.
한편, 두 기업은 홈 IoT 기술을 가전제품의 전력 관리에 활용하는 것을 넘어 서울시, 한국전력공사, IT 기업 헤리트와 함께 아파트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주민 수요반응(DR, Demand Response) 서비스’ 시범사업을 추진한다. 주민 DR 사업은 전력거래소 혹은 서울시에서 요청(DR 발령) 시 개별 세대가 전기 사용량을 줄이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제도다.
각 세대가 주민DR 서비스에 참여해 주 1~2회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요청된 시간에 평균 사용량의 10% 이상 에너지를 절감하면 절감 성공 횟수 당 1000원을 제공한다. 참여자는 연간 최대 6만 원 상당의 포인트를 받아 카페 등에서 사용 가능한 쿠폰과 지역화폐 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찾아온 여름에 고온다습한 날씨가 연일 지속되고 있다. 이런 날씨에는 몸도 천근만근 힘들 뿐 아니라 전신에 뻐근함이 느껴졌던 경험이 다들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실제로 꿉꿉한 날씨가 이어지는 이맘때면 허리와 무릎 등에 통증을 호소하며 진료실을 찾는 시니어 환자들이 유독 많아진다.
이와 유사한 결과는 해외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 데이비드 슐츠 교수 연구진은 만성 통증을 앓고 있는 환자 1만 3000명을 대상으로 통증과 특정 날씨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했다. 그 결과 환자들이 가장 통증을 호소한 날의 기압은 평년보다 낮았던 반면 습도와 강수량은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흐린 날씨로 인해 낮아진 기압은 척추 내부의 압력을 높인다. 또한 높아진 습도도 추간판(디스크)의 영양 대사를 방해하는 등 쉽게 요통을 발생시킨다. 한의학적 해석도 이와 비슷하다. 한의학에서는 장마와 관련된 요통의 원인을 크게 ‘습’(濕)과 ‘한’(寒) 두 가지로 꼽는다.
첫 번째 ‘습(濕)요통’이란 말 그대로 높은 습기로 인해 발생하는 허리 통증이다. 무더운 여름에는 땀 배출이 많아지고 피로가 쉽게 이어지면서 항상성 유지에 문제가 생긴다. 이는 면역력과 전신의 근육 상태에도 악영향을 끼쳐 디스크 주변 염증을 악화시키고 더 강한 통증을 유발한다.
습요통은 물속에 있는 듯 허리에 묵직하고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심한 경우에는 몸이 붓기도 하며 소변 마려운 느낌이 잦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 말려 최대한 쾌적하게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귀가 후에 드라이어나 선풍기로 물기를 말린 후 잘 건조한 옷으로 갈아입자. 또한 습요통이 있는 환자들은 신장이나 방광 등의 문제로 수분 배출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례도 많다. 이때는 기저질환에 대한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두 번째 ‘한(寒)요통’은 추운 기운이 허리로 침입해 발생한다. 여름철에는 냉방이 강한 실내에 오래 머물다 보니 체온이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잦다. 이렇듯 신체가 한기에 노출될 경우 전신의 근육 및 인대에 과긴장 상태가 유발된다. 그만큼 척추 신경이 받는 압박이 커지고 혈액순환도 방해를 받는다.
뼈와 근육을 주관하는 장기인 신장과 간 기능이 약한 환자가 한요통을 겪으면 허리에 시린 느낌과 함께 통증이 나타난다. 특히 오른쪽이나 왼쪽 둘 중 한쪽 다리로 통증이 이어져 뻣뻣하게 땅기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허리 주변을 따뜻하게 유지해줘야 한다. 과도한 냉방으로 추위가 느껴진다면 외투나 담요로 척추 주변을 보온하는 것이 좋으며, 온수로 30분 이상 반신욕이나 샤워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기온이나 습도에 의해 나타나는 요통은 자칫 일시적으로 보일지라도 대수롭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요통이 잦고 심해질수록 척추를 둘러싼 근육과 인대가 비대칭적으로 굳어져 신체 불균형과 퇴행을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척추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도 될 수 있다.
에어컨 바람이나 장마철 습한 기운으로 허리 통증이 지속된다면 추나요법, 침, 한약 처방 등 한방통합치료를 통해 완화시킬 수 있다. 대표적인 한방 수기요법인 추나요법은 척추 주변 근육, 인대의 긴장을 이완하고 틀어진 척추를 바로잡아 통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침 치료도 기혈순환을 원활히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성질이 따뜻하고 습기를 비롯한 노폐물 배출을 촉진하는 진피·백출 등의 한약 처방도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침 치료는 다양한 국내외 연구 결과를 통해 요통 치료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가 SCI(E)급 국제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요통 환자가 침 치료를 받을 경우 수술률이 36% 이상 감소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름철 건강한 허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서 소개한 평소 생활습관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습기와 한기에 신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필요할 경우 전문가를 찾아 적절한 치료에 나설 것을 추천한다.
다크 투어리즘은 여러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전 세계적인 핵심 테마는 전쟁과 항쟁(식민지)이다.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들 수 있다. 아직 생소한 개념인 다크 투어리즘을 어떻게 계획하고 즐길지 모르겠다면, 위의 두 역사를 중심으로 명소를 찾는 것도 방법이다.
PART1. 항쟁의 역사 : 일제강점기
[1] 남산 국치의 길
남산은 낭만적인 야경이 돋보이는 명소로 유명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를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남산 자락에 조선 통치를 위한 시설들이 자리 잡았다. 당시의 상흔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성된 길이 바로 ‘남산 국치의 길’이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통감관저 터에는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기억의 터’가 마련돼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거꾸로 세운 동상’이 눈에 띈다. 과거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공을 인정해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통감관저 앞에 설치했다. 해방 후 당시의 치욕스러움을 기억하고자 사라진 동상의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운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이어 리라초교와 숭의여대로 향해 노기신사와 경성신사 터를 둘러본 뒤에는 케이블카 탑승장 인근 한양공원을 찾는다. 1910년 일본인들이 조성한 곳으로, 당시 공원 입구에 세웠던 비석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남산을 향해 걷다 보면 옛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가 나온다. 조선신궁은 조선총독부가 조성한 신사로, 해방 후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철거되며 현재 우리가 아는 남산공원으로 탈바꿈했다. 한때 연인과의 데이트나 가족 나들이로 남산을 찾았다면, 한 번쯤 이러한 역사를 한발 한발 따라가 보길 추천한다.
[코스] 명동역 1번 출구 ▶ 한국통감관저 터·기억의 터(현 서울유스호스텔 아래) ▶ 한국통감부(서울애니메이션센터) ▶ 노기신사(리라초교 내 남산원) ▶ 경성신사(숭의여대) ▶ 한양공원 ▶ 조선신궁(한양도성 발굴지) *상당 구간이 언덕길이니 이 점 참고하자. 반대 방향으로 돌아봐도 괜찮다.
[2]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하 서대문형무소)은 일제강점기 시절 4만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가 수감됐던 곳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철거 논의도 이뤄졌으나, 교육의 현장으로 기능하기 위해 현재의 역사관 형태로 복원됐다. 서대문형무소 하면 붉은 벽돌로 이뤄진 외관이 상징적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도 따스한 봄볕 아래 그림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외관과 비교해 내부는 삭막하고 음울한 기운이 느껴진다. 독방과 고문실, 시구문 등을 복원해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생생히 드러냈다. 당시의 수형기록표나 사진들을 보노라면, 독립투사들의 모진 세월이 전해져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든다. 서대문형무소는 올 한 해 ‘이달의 독립운동가 시민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온라인을 통해 예약하면 된다. 방문 당시에는 ‘한국 독립운동을 이끈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외교’를 주제로 강의가 열렸다. 이날 소개된 독립운동가는 황기환, 이희경, 나용균이었다. 강의에 참여한 한 시민은 “김구나 윤봉길처럼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처음엔 생소했다. 세 분의 역사를 들으면서 나의 무지함을 깨달았고,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강의를 준비한 김철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학예사는 “과거 서대문형무소는 인왕산, 안산, 무악재 고개로 둘러싸여 있어 수감자들의 탈출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에 현저동에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산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 때문에 중장년 방문객들이 등산을 겸해 오시기도 한다. 아울러 실제 수감자들의 후손이나 가족들이 오기도 하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모임을 꾸려 자체적으로 투어를 즐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역사교훈여행(다크 투어리즘의 우리말)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분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신념을 느껴보셨으면 한다. 또한,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보신 후에는 근처의 독립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 등도 찾아도 좋겠다”고 조언했다.
[코스] 독립문역 5번 출구 ▶ 서대문독립공원 입구 ▶ 독립문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집(독립문 맞은편) *독립문을 기점으로 왕복하는 코스로, 역사적 사건 순으로 둘러볼 수 있다.
PART2. 전쟁의 역사 : 한국전쟁
[1] 피란수도 부산 소막마을
지난해 ‘피란수도 부산 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가 확정됐다. 현재 부산시는 2028년 등재를 목표로 지속 연구와 관리에 힘쓰고 있다. 부산에는 유독 가파른 언덕에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광경이 눈에 띄는데, 이 또한 피란기의 흔적이다. 한국전쟁 후 40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100만 명까지 늘어났다. 몰려든 피란민들은 생존과 생계를 위해 높은 언덕까지 판잣집을 지어 올렸던 것이다.
선별된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총 9곳으로, 그중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도 피란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2018,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15호 지정) 소막마을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 소를 수출하기 위한 검역소와 소막사가 있었던 곳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공업화·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여러 형태의 집들로 변모해 현재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한국의 근대화 과정 등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산물인 셈이다.
[코스]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경무대(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임시중앙청(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하야리아 기지(부산시민공원), 유엔묘지,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등 총 9곳이다. 하루에 몽땅 급하게 둘러보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피란민들의 삶을 음미하며 살펴보길 바란다.
[2] DMZ 평화의 길
시간을 두고 여러 날에 걸쳐 다크 투어리즘을 계획한다면, ‘DMZ 평화의 길’을 추천한다. 도보 여행가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테마 코스 중 하나로 문화체육관광부, 환경부, 국방부, 행정안전부, 통일부 등 5개 부처가 합동으로 조성한 길이다. 2018년 4월 27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꼬박 1년 뒤인 2019년 4월 27일 강원도 고성 구간이 처음으로 개방됐다. 이로써 일반 시민들도 DMZ(비무장지대)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철원, 파주, 양구 등 구간이 속속 개방되며 현재 총 11개 코스가 마련됐다. 전 구간 예약탐방제(두루누비 사이트 이용)로 운영되며, 올해는 대체로 4월 하순부터 예약을 시작해 11월 전후로 마감될 예정이다.(여름 혹서기 및 장마 기간 임시중단)
[코스] 강화 코스, 김포 코스, 고양 코스, 파주 코스, 연천 코스, 철원 코스, 화천 코스, 양구 코스, 인제 코스, 고성 A코스, 고성 B코스 *현재 고성B코스는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해 한시적으로 중단됐다.
[Interview]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어두운 역사의 흔적에서 오늘의 교훈을 얻길”
최근 유행인 ‘다크 투어리즘’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해온 이가 있다. 2017년 출간 도서 ‘다크투어’의 저자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다. 서울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그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곳곳을 여행하다 다크 투어리즘에 눈을 떴다. 현재 그는 역사문화 여행 모임 ‘컬처클럽’을 7년째 운영 중이다. 모임을 통해 국내외를 누비며 직접 도보여행 길도 발굴한다. 저서에 소개된 '대한 제국의 길', '서대문의 길', '용산의 길' 등도 직접 개발한 다크 투어리즘 루트다. 그런 김 대표를 통해 다크 투어리즘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봤다.
Q. 중장년들에게 다크 투어리즘을 권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A. 사람은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역사가가 됩니다. 각자 역사의 증인이고, 역사평론가가 되며, 아마추어 역사가가 되지요. 어떤 의미에서든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역사관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관광을 하면 화려한 곳, 훌륭한 곳, 멋진 곳을 가기 쉽습니다. 이런 것을 그랜드투어(grand tour)라고 하죠. 하지만 다소 불편하더라도 과거의 어두운 곳을 찾아 역사의 교훈을 얻는 다크 투어(dark tour)도 필요합니다. 이런 곳에서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이 현장에 없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또, 역사의 교훈을 얻어 앞으로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실패에서 얻는 교훈, 재발방지 다짐을 하게 되는 거죠.
Q. 다크 투어리즘 현장에서 유념해야 할 에티켓이 있을까요?
A.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모르면 자신의 단견으로 이해해버리거나 현지에서 가볍게 말하기 쉽니다. 즉 공부가 필요하죠. 사건과 관련된 주민들도 만날 수 있는데 역사를 모르면 섣부른 행동으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념에 치우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장에서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큰 목소리는 삼가는 게 좋습니다.
Q. 해외와 비교해 국내 다크 투어리즘이 지니는 특징이 있나요?
A. 예전에는 한국에서 다크 투어리즘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현장에 가면 안내판이 없고, 유적, 유물이 제대로 보존돼 있지 않았지요. 근래에는 다크 투어리즘 관련 문화 유적을 많이 발굴하고, 기념관, 유적지, 친절한 안내판, 간단한 표지석 등을 두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현재는 외국과 수준이 비슷해졌습니다. 다만 몇몇 장소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어둡게 만들어져 있어 과도한 긴장감을 주기도 합니다.
Q. 다크 투어리즘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A. 다크 투어를 할 때에는 진정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열 군데, 스무 군데 리스트를 만들어 많이 다녀왔다한들 큰 의미는 없습니다. 현장을 제대로 알려는 호기심, 진정성이 바탕이지요. 다크 투어리즘이 좋다고 너무 연달아 가는 것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너무 몰입하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밝은 여행지와 섞어서 다니길 권합니다.
※ 자료 제공 및 도움말 한국관광공사, 서울관광재단,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에 살던 장영수(65, 보은 두드림농원)가 충북 보은군으로 귀농한 건 건강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 좋고 산 좋은 시골에 살며 몸은 물론 마음까지 다스리고 싶었다. 그는 광고대행사 직원으로, 또는 개인사업자로 일하며 긴긴 서울 생활을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다. 폭탄주를 돌리는 술자리도 매우 잦았다지. 마침내 심혈관 질환이 그를 방문했는데, 좁아진 관상동맥을 스텐트 삽입으로 뚫는 시술을 한 뒤 2011년에 귀농했다.
장영수가 사는 마을은 딱히 경관이 빼어나거나 유별한 특징 없이 그저 평범한 농촌이다. 인가와 전답이 고르게 섞여 아늑하다. 그는 이 한적한 농촌에서 여생을 원만하게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농사를 통한 건전한 육체노동으로 몸을 북돋우고, 마음엔 여유를 부여해 즐겁게 살고 싶다는 또렷한 목적을 정하고 귀농했다. 부연하자면 농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경제적 성과를 거둘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돈벌이야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시골에서 가당키나 하겠나?” 귀농 이후 시종일관한 그의 기본 관념이 그렇다. 한마디로 쉬엄쉬엄 살고 싶었던 것이며, 귀농은 그러한 삶의 방식에 적격일 뿐 결코 돈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아니라는 신념을 고수해왔다.
귀농 초기 개척기에 장영수는 혼자 살았다. 농업 소득이 발생하기까지 한동안 동갑내기 아내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해 가계를 꾸려나갔던 것. 한편 장영수가 선택한 재배 작목은 보은군의 전통 특용작물인 대추. 1800평 규모의 농원을 조성해 600여 주의 대추나무를 심었다. 이 아담한 농장에서 소득이 나오기 시작한 2014년부터 비로소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와 합류했다. 순리를 좇아 세운 계획대로 차질 없는 행진이었다. 대추나무 묘목이 성장해 생산물이 나오기까지 3년여 동안 장영수는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 수입을 올렸다. 이 역시 서울에서 미리 구상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내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귀농 전엔 소비자 심리와 경영 마케팅을 공부했다. 이게 유용하게 쓰였다. 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했으며, 충북농업기술원이 주관하는 강소농 교육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귀농 초기의 필요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농사 경험이 없었던 귀농 직후 강소농 강사로 나서는 게 어떻게 가능했지?
“강소농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하는 식의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개별 농가를 방문, 재배 기술이 아닌 경영 마케팅을 가르쳤다. 나에겐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농촌과 농업, 귀농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농사를 짓는 기본 자세와 흙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음으로 양으로 나의 대추 농사에 큰 도움이 됐다.”
대추를 전공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사실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소나무 농원이었다. 강원도로 귀농해 소나무를 기르고 싶어 한동안 적지를 찾아 강원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차에 마침 보은군으로 귀촌한 처형 내외의 권유에 이끌려 이곳으로 귀농한 뒤 대추 농사를 선택했다.”
보은군은 조선 중기부터 대추 주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 1200여 농가가 대추를 재배한다.
귀농인들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재배하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점이 많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렇던가?
“장점이 많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판로 확보인데 특산물의 경우 이 점에서 확실히 유리하다. 이미 꽤 안정된 유통 루트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재배 기술 수준도 높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초심자에겐 당연하지만 어려움이 많다. 우선 병충해에 관한 대처 능력을 갖추기 어렵더라. 수확 뒤의 전면적인 전지 작업에도 진땀을 쏟아야 한다. 무엇보다 난감한 건 종잡을 수 없는 기상 변동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이래저래 자칫 흉작을 볼 수 있다.”
심신 치유에 치중하다
장영수는 작년의 대추 농사에서 최대의 흉작을 기록했다. 날씨 조건이 따라주지 않아서였다. 보은엔 예로부터 ‘삼복에 비가 내리면 보은 아가씨들이 시집을 못 갈까 봐 운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추알이 영그는 여름철에 가장 필요한 게 햇빛인데, 줄기차게 비가 내리면 성숙이 부실해 거둘 게 적어진다. 장마가 길었던 작년, 그는 평년 대비 50% 남짓 수확했을 뿐이다.
“농사의 관건은 사람의 손길이 얼마나 가느냐에 달려 있다지만,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하지만, 요즘은 이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기후 변동이 심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인간이 제어하겠나. 이상 기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상책이지만 대추 전문가도, 대추 연구기관도 이 문제에 관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물어볼 곳조차 없는 것이다. 따라서 노련한 농부들도 전전긍긍한다. 이는 물론 대추 농사만의 난제는 아니다.”
당신은 보은군 귀농귀촌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이 지역 귀농 현실에 누구보다 밝을 테지. 대추를 재배하는 귀농인들의 일반적인 실태는 어떻다고 보나?
“복합영농을 하는 고령층 중심의 원주민 농부들에 비해 귀농인들이 한결 좋은 방식으로 대추 농사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농가마다 편차가 크다. 농사를 접고 역귀농을 하는 사례도 가끔 보인다.”
누군가 귀농을 해 대추 농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
“갖가지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굳센 의지가 있는지부터 스스로 점검하라 말하고 싶다. 또 하나. 농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는 건 위험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은퇴자들에겐 더욱 버거운 게 농사다. 몸을 부지런히 써야 하는 게 농업이니까. 힘과 패기를 갖춘 젊은이들의 귀농은 비즈니스로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농촌 청년들이 대부분 도시로 빠져나간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촌에서 경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현실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하는 거다.”
대추 농사 경력이 10년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제 안정 궤도에 올라섰나?
“겨우 10년 차일 뿐이다. 아직 뭘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부부 둘이 감당할 수 있는 소형 농원을 그럭저럭 원만하게 운영하고 있다. 순소득은 연평균 2500만 원가량이다. 이쯤이면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여행 경비까지 나오는 수익 수준은 아니라 아쉽긴 하지. 하지만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 없다. 도시보다 생활비가 한결 덜 드는 게 시골이니까.”
다년간 귀농인 취재를 해온 내 경험에 따르면, 귀농 10년이 지나도 안정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고심하는 사례가 많았다. 농업이란 왜 이렇게 힘든가? 무엇이 문제라 보는가?
“첫째는 농사로 돈을 벌기엔 구조적 한계가 너무 많다. 과격하게 말하면, 귀농으로 대단한 수준의 수입을 올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흔히 치밀한 준비 없이 대충 귀농하는 경향도 문제다. 가령 중국식당을 하려면 사전에 짜장면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뛰어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무작정 식당부터 차려놓고 보자는 식의 귀농이 너무 흔하다. 난 귀농 전에 이러한 상황을 미리 간파하고 아예 돈벌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수입은 소박한 수준에 만족하자, 대신 심신 치유에 더 치중한 생활을 하는 걸 지향으로 삼았다.”
됐다! 이쯤에서 만족하며 산다
귀농으로 경제적 성취를 해 삶을 고양하기보다 몸과 마음을 돌보는 데 방점을 찍었다는 얘기다. 농사는 물론 최선을 다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닳도록 썼다. 그러자 피가 잘 돌지 않던 혈관의 형편이 좋아지더라는 게 아닌가. 근면한 노동만이 아니라, 시골에 지천으로 존재하는 햇빛과 바람과 꽃과 새소리 역시 쓰러질 듯 궁지에 몰린 그의 건강을 일으켜 세우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귀농 전엔 야트막한 언덕을 걷기조차 어려웠다. 얼굴색이 너무 안 좋다는 소리를 수시로 듣고 살았다. 그러나 귀농 후엔 한라산 정상도 가볍게 오를 수 있을 만큼 호전되더라. 몸 건강이 좋아지면서 마음도 평온해졌다. 사실 도시에 살 때 내 성격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늘 화를 품고 살았으니까. 그러나 귀농 이후 변하더군, 상당히 느긋한 인간으로.”
마을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얘기가 흔하다. 어떤 처신이 필요하다 보나?
“무조건 인사 잘하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진심을 담아서. 소소한 일에 도움 주는 걸 인색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나 10년을 살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 귀농인은 여전히 외지인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다. 이걸 인정하고, 마을의 기본 질서를 존중하는 게 좋겠다. 그런데 텃세니 불화니 하는 건 대체로 땅 문제에서 발생한다. 토지 경계가 모호한 게 시골인데, 귀농인들은 대뜸 측량부터 하고 자기 땅에 울타리를 친다. 이렇게 되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양보와 양해를 통해 해결하는 게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다.”
소형 농원의 이상적인 모델을 추구하며 대추 농사를 한층 성장시킬 구상을 가지고 있진 않은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쯤에서 만족하며 산다.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농원이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됐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큰 굴곡 없이 무난하게 정착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게다가 나이 들어 이젠 힘도 좀 딸린다. 아내와 나의 건강을 유지하며 이대로만 살면 행복하겠지. 그런데 어떻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지? 아는 게 있다면 말해달라.(웃음)”
재미있게 살며 하루에 15초만 크게 웃어도 근육은 물론 장기까지 운동이 돼 건강해진다 하더라. 문제는 크게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거겠지.(웃음)
“모든 하루를 즐겁게 살고 싶다. 가급적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즐거운 삶이라는 생각으로 귀농했다. 그 목적을 꽤 달성한 셈이다. ‘아, 나도 이렇게 편안하게, 여유롭게 살 수 있다니!’ 속으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자연과 근접해 사는 것만으로도 시골 생활의 가치는 크다는 생각도 하고.”
그의 얘기는 자주 맥락이 끊겨 뒤엉기곤 했다. 하지만 할 말 다 했다. 간추려놓고 보니 애써 최선을 다한 언설이었다 할까? 이게 좋은 여운으로 남는다.
장영수가 주는 귀농 Tip
•사전에 귀농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설정하자. 그러기 위해선 귀농 교육기관을 통한 학습을 미리 충실하게 해야 한다.
•농토를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제약 조건이 많아 시설물 설치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집은 빌려 쓰더라도 농토만은 내 소유여야 유리하다.
•가급적 부부가 함께 귀농하라. 단신 귀농을 할 경우엔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피할 수 없어 손실이 커진다.
•이왕 귀농할 거라면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귀농하자. 농사는 체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직업이다.
•귀농지에 특화된 농작물을 재배하라. 생산품의 마케팅과 유통에 유리하니까.
•반짝하다 사라지기 십상인 유행 작물에 편승하는 건 위험하다.
키만 자랐지 영 부실하고 어딘가 비뚤어진 식물을 가리켜 ‘웃자랐다’고 말한다. 부족한 일조량이나 통풍, 지나치게 높거나 낮은 온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줘버린 물 등 원인은 다양하다. 지나치게 다양한 나머지 ‘식물 좀 키워봤다’는 경력 ‘식집사’(식물+집사)까지 비뚜름하게 자란 식물을 보며 시름한다. 웃자람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 정녕 없을까?
식집사도 ‘장비빨’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말이 있다. 식집사 ‘만렙’(최고 수준)까지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기술의 발전은 반려식물에게도 유의미한 장비를 남겼다. 어화둥둥 우리 집 식물, 웃자람 없이 튼튼하도록 도와줄 장비를 정리해봤다.
참고 책 ‘식물 상담’, ‘식물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제품 사진 각 사 홈페이지
빛 - 식물생장등
빛은 식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3대 요소 중 하나다. 빛이 없어도 잘 ‘버티는’ 식물은 있지만 빛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식물은 없다. 식물의 영양 상태는 일조량이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공간별 일조량과 키우는 식물의 적정 일조량을 파악해 맞춰주면 좋다.
실외 정원이나 옥상에는 유리에 통과되지 않은 햇빛이 들어온다. 집이 저층이고 남향이 아니거나, 다른 건물에 가로막혀 있다면 일조량이 적어진다. 전망이 좋아도 유리창을 통과한다면 햇빛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 하물며 유리를 통과한 직사광선조차 받지 못하는 그늘에 있다면? 식물이 웃자랄 수밖에 없다.
식물생장등
이제 채광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식집사 생활을 청산하지 않아도 된다. 형태는 전구형, 바(Bar)형, 우산형 등이 있다. 보통의 식물 생장용 LED는 자주색 빛을 낸다. 광합성 및 생육을 촉진하는 빨간빛(개화용)과 잎 형태를 형성하고 웃자람을 막는 파란빛(성장용)을 동시에 공급하기 때문이다. 진한 자줏빛 조명이 인테리어나 미관을 망친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백색광을 내는 LED 생장등도 출시되고 있다. 또한 탁상 스탠드와 유사한 인테리어 겸용 생장등도 판매되고 있다.
식물과 생장등 사이는 30cm 이내 거리가 좋다. 너무 멀거나 가까우면 효과가 미비하거나, 엽록소 손상으로 잎이 검거나 하얗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밤보다는 낮에,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 사용하도록 하자.
[TIP] 식물생장등 잘 고르려면?
식물생장등을 구매하기 전 ‘PPFD’(Photosynthetic Photon Flux Density)를 확인하자.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광량자의 양을 나타내는 수치로, 같은 조건이면 PPFD 수치가 높은 생장등이 식물 생장을 수월하게 한다.
물 – 수분측정기, 분무기
식물을 떠올렸을 때 가장 연상하기 쉽고, 그만큼 중요한 요소다. 물을 제때 적절하게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초보 식집사가 가장 어려워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물의 양이나 때를 조금만 혼동해도 마르거나(건조) 물러버리는(과습) 불상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겉흙이 파이고 물이 고루 퍼지지 않기 때문에 한 번에 부어서도 안 된다. 이런 고질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는 도구가 식집사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지고 있다. 속흙이 말랐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이나 나무젓가락을 찔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날은 이제 안녕이다.
수분측정기(토양수분계)
작동 방식에 따라 건전지가 없어도 쓸 수 있는 무동력 측정기와 배터리‧필터를 갈아줘야 하는 디지털 기기로 나뉜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뿌리를 피해 절반 이상 흙에 파묻히도록 곧게 꽂으면 된다. 막대나 막대 끝에 달린 금속으로 흙의 수분 정도를 측정하고, 건조‧적당‧축축(과습) 단계별로 안내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화분별로 하나씩 꽂아야 하니 화분이 많은 경우 비용이 부담되는 단점도 있다. 또 식물에 따라 꼭 필요로 하는 물의 양이 다르므로, ‘건조’가 무조건 좋지 않거나 ‘적당’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키우는 식물에게 맞는 적정 상태가 어느 단계인지 미리 체크해두자.
전동분무기
물뿌리개 혹은 분무기를 들 때 손목이 시큰거린다면 구매를 고려해봄직한 장비다. 농사를 짓거나 텃밭을 가꿀 때 사용하는 스프링클러의 가정용인 셈이다. 일직선으로 물이 분사되는 직분사, 안개처럼 물이 퍼지는 안개분사 등 분사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영양제나 병충해 방지 약품을 희석해 방제용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자동 분사 모드를 사용하면 일일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설정한 만큼 물이 분사된다. USB 포트로 충전해 무선으로 사용한다.
온·습도 – 가습기, 에어포트 화분
일반적으로 실내에서 자라는 식물의 적정 온도는 23~25℃ 수준이다. 하지만 모든 식물이 같은 온도를 반기지는 않는다. 식물을 탈 없이 키우고 싶다면 자생지의 기후를 확인해보자. 온습도계를 마련하고, 아래 소개하는 장비를 이용해 자생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온도와 습도를 맞춰주면 식물도 화답하듯 쑥쑥 자랄 것이다.
식물용 가습기
촉촉한 공기를 좋아하는 어린 식물과 관엽식물을 위한 장비다. 대기가 건조한 겨울에는 식물 겉 테두리가 갈변하는 일이 흔한데, 이를 방지해준다.
에어포트 화분
과습으로 죽어가는 식물도 살린다 하여 ‘마술화분’, ‘도깨비화분’ 등의 별명을 얻었다. 화분 전체에 숨구멍이 나 있어, 무르기 쉬운 뿌리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한다. 뿌리를 차가운 공기에 접촉시켜 뿌리와 식물 전체의 생장을 촉진하는 ‘공기단근’(Root Air Pruning)이 일어난 덕분이다. 다소 못생긴 외관에 비해 효과가 탁월하고 분갈이가 간편한 장점이 있어 식집사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장비다. 상당수 후기가 몬스테라 알보와 궁합이 좋다고 증언하고 있다.
통풍(바람) - 서큘레이터
바람도 식물에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고로 통풍을 돕는 서큘레이터나 선풍기는 식물 키우는 데 필수 장비다. 통풍이 원활하지 않으면 식물이 배출한 산소의 농도가 높아지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낮아져 광합성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과습을 유발하거나 해충이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장비가 선풍기 혹은 서큘레이터다. 경우에 따라서는 캠핑용 실링팬을 사용하기도 한다.
서큘레이터를 이용해 약풍 혹은 미풍으로 약한 바람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8시간 이상 약풍이나 미풍 단계로 틀어주면 좋다.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장마철이라 환기하기 어려울 때 특히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