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서 때로는 아내, 며느리, 딸, 강사 등 상황에 따라 한바탕 역할극을 해내야 하는 필자에게 가면(페르소나, Persona)은 어쩌면 반드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은 가정, 학교, 직장 등 크고 작은 집단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좋은 점을 드러내고 나쁜 점을 감추려는 지극히 당연하고 본능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희비쌍곡선 롤러코스터 인생
글쓰기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은 강의입니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글쓰기입니다. 강의는 두 번째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무슨 장난이며 조화란 말입니까. 저만 이러는 걸까요? 똑같은 일이 어떨 땐 정말 행복하고, 어떨 땐 너무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고 당장 그만두고 싶으니 말입니다. 어느 힙합 뮤지션은 ‘음악은 행복이자 깊은 고통’이라고 노래했습니다. 행복과 고통은 둘이 아닌 하나라 앞뒤로 딱 붙어 있나 봅니다.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여러분도 하루하루 지내시나요?
칼춤 추는 여자
필자는 막대기처럼 뻣뻣한 몸이라 춤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자칭 춤꾼입니다. 30년이 넘도록 주부로서 싱크대를 점령하고 있는 망나니이기 때문입니다. 망나니가 술 뿜어내고 칼춤 추듯 저도 도마 위에서 바다며 뭍에서 포획한 먹잇감 대가리 치고 몸통 자르며 식구들 위해 칼춤 추니까요. 살리기 위해 죽이는 역설, 이게 어쩌면 삶의 양면성 아닐까요. 먹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거잖아요. 죽여서 먹이기도 하고요. 쓱싹쓱싹! 탕탕탕탕! 칼자루 쥐고 김치 썰고, 양파 다지고, 오징어 저미다가 혹 원망 한 줄기 툭 터져 나오면 칼끝에 살기 실려 손톱이 썰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싱크대 앞에서 칼춤 추다 나쁜 생각 못 하도록 마음 단속해주는 하늘의 보살핌 아닌가 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자기 내면에 억눌렀던 추악함과 잔인함을 가감 없이 표출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886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발표한 단편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아 존경받던 지킬 박사는 쾌락을 탐하는 욕망을 억누르며 두 개의 본성 사이에서 고민하다 선과 악을 분리해내는 약물을 만듭니다. 지킬 박사로서 품위에 흠집을 내지 않고도 하이드로 변신해 깊숙이 눌러놨던 쾌락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약을 마시지 않아도 지킬 박사가 계속 하이드로 변신하면서 본성의 균형이 깨지고 내면이 악으로 차올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하고 맙니다.
앞뒤가 똑같은 동전
500원짜리 동전을 볼까요? 어느 쪽이 앞면인가요? 필자도 갑자기 헷갈리네요. 하여튼 한쪽에 학이 그려져 있고 다른 면에 숫자 500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하나 볼까요. 1000원짜리 지폐 앞면엔 퇴계 이황 초상이 있고, 뒷면을 보면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있습니다. 막연히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원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완락재라는 작은 정자에 앉아서 조용히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집필하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돼지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내 은행에 입금하려는데 동전 하나가 앞면도 학이고 뒷면도 학이지 뭡니까. 또 어느 날은 편의점에서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앞면도 퇴계 이황 얼굴이고 뒷면도 똑같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동전과 지폐는 돈 구실을 할까요? 500원과 1000원이라는 돈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물건을 살 수 있는 교환이라는 값어치를 전혀 할 수 없게 됩니다.
둘이면서도 하나인, 하나이면서 둘인
손바닥이 있고 손등이 있는데 우리는 이 두 면을 합쳐 ‘손’이라고 부릅니다. 양면이 손바닥만 있거나 손등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인데 경우에 따라 둘로 구분해 부를 뿐입니다. 우리 삶, 사건, 사람도 흡사합니다. 양면이 있어야 제값, 제 역할을 합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습니다. 건전지 한 몸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습니다. 두 극성이 같이 있어야 전기 에너지가 생깁니다. 감정에도 애증(愛憎)이 함께합니다. 마치 동전 양면처럼 하나로 맞붙어 있습니다. 햇빛은 좋기만 하고, 어둠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양(陽)은 선(善)이고, 음(陰)은 악(惡)일까요.
겉과 속이 다른 게 나쁠까요?
어떤 사람을 평가하면서 “그 사람은 참 표리부동(表裏不同)해.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아주 형편없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속마음을 겉으로 곧장 드러내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고 올바른 것일까요?
평소에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앞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의 이러저러한 면이 정말 밥맛없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어요. 어쩌면 그렇게 재수가 없는지, 당신이 잘 안 됐으면 정말 쌤통이겠네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맞을까 생각해봅시다. 싫어하는 내색은 감춘 채 “저번에 만든 그 상품은 정말 근사하던데요. 아이디어가 탁월하십니다. 저는 그쪽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요. 하하하!” 이런다고 나쁜 사람일까요?
오히려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 더 위험하고 무례한 것은 아닐까요? 겉과 속이 하나라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수라 백작 같은 당신 그리고 나
우유부단(優柔不斷)과 심사숙고(深思熟考)는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놓고도 누구는 “참 깊이 있고 침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하지만 다른 누구는 “어째 사람이 결정장애야, 뭐야. 판단을 못 해”라고 하니까요. 한 사람, 한 사건을 놓고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반된 입장에 놓입니다.
말수가 적고 신중을 기하는 면이 좋아서, 또 남들 앞에서 나대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는 게 좋아서 그 남자랑 결혼했다는 301호 김 여사. 결혼 30년 차가 되도록 살다 보니 심사숙고하는 모습이 징글징글 싫어졌다고 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임기응변도 제대로 못 하는, 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는 꽉 막힌 남자라는 겁니다. 처세도 젬병인 데다 상황 판단하는 능력도 느려터진 한참 못난 남자로 보인다나요. 선택이나 결단을 미루는 것도 그렇고요. 내가 좋아서 선택했던 성격이나 특징, 외양이 싫어지곤 합니다.
인공지능(AI)의 양면성
도대체 양면성이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의를 풀자면, ‘한 가지 사물에 속해 있는 서로 맞서는 두 가지 성질’을 양면성이라고 합니다. 풀이는 간단해 보이는데 언뜻 와 닿지 않습니다. 최근 화제만발인 ‘챗GPT’라는 인공지능 오픈AI 시스템에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AI 가라사대
“인간의 양면성은 사람 안에 긍정적인 특성과 부정적인 특성이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개인은 선과 악, 빛과 어둠, 그리고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행동 모두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경향도 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측면이며 관계, 감정, 의사결정 등 삶의 많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일반 사전이나 학문적 정의보다 인공지능이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게 개념을 설명하는 것 같아 놀랍고 고마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특성은 문학, 철학, 종교에서 공통 주제이며,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탐구되어왔다. 그것은 인간의 복잡성과 그들이 일차원적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특성과 부정적인 특성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다면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 본성의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는 것은 개인이 더 자각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개발하고, 더 균형 있고 조화로운 삶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작가나 학자나 기자 같은 글 쓰고 분석하는 직업에 인공지능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는 것 아닌가 싶어 마냥 기쁘지는 않습니다.
덜 미워하며 살아가려면
필자가 강의 말미 칠판에 분필로 이런 글을 또박또박 적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기 존경스럽고, 각기 추악하다.”
이 양면을 어떻게 다스리고 잘 조절할지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그 허물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했듯이요. 동전이나 건전지가 음양이 있고 앞뒤가 공존해야 가치가 있고 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사물도 사람도 그렇습니다. 숙명처럼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균형과 조화를 찾아야겠습니다. 잘하려고, 인정과 칭찬만 받으려고 안달복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행일치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강박에 너무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때도 많습니다. 대신에 자신을 덜 미워하며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안의 허물, 추악함, 부끄러움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장단이 고루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 장단을 조율하며 오늘은 굿거리로 신명 나게, 내일은 세마치로 사뿐사뿐 가볍게, 모레는 진양조로 느릿느릿 장단 맞추며 살아보아요.
꽃이 필 즈음의 이른 새벽, 쪽을 잘라내 하루이틀 물에 우려낸다. 자연산 굴 껍질을 구워 만든 석회를 섞고, 잿물을 부어 발효시켜야 준비가 끝난다. 손등이 파랗게 물들 때까지 커다란 천을 쪽물에 담갔다 빼는 과정은 고된 빨래를 연상시킨다. 지난한 과정이 꽃피운 쪽빛은 탄성을 자아낸다. 철 따라 탈바꿈하는 자연 풍광, 20년 넘게 이어지는 장인의 열정 앞에서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감탄 말이다. 쪽 염색에 대해 묻자 푸른 산에 흐르는 물(靑山流水)처럼 애정과 자부심이 쏟아졌다.
홍루까 하늘물빛 전통천연염색연구소 대표는 20년 넘게 전통 천연 염색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쪽 염색을 활용한 회화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책 ‘한국 천연 염색 백서 2017’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인 쪽염 보존을 위해 힘썼다. 현재는 쪽 염색 체험, 천연 염색 자격증 강좌 및 전문가 양성 과정을 운영하며 쪽 염색의 전통과 미래를 잇고 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더라
처음부터 가업을 이으려던 건 아니었다. 여름 휴가철에 어머니인 조일순 전통매듭 장인이 매듭실 염색할 때 도와드렸을 뿐이다. 천연 염색에 대한 열정을 지핀 것은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형형색색의 천이 펄럭이는 장면이었다.
“염색이라는 게 빨래나 다름없어요. 색이 제대로 날 때까지 염색물에 넣었다가 꺼내서 헹구고, 다시 넣었다가 헹구는 과정의 반복이거든요. 그걸 다 도와드리고 쉬려고 평상에 누웠는데, 그날따라 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더라고요.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도 어머니를 도와드렸지만 한 번도 예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도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나 봐요.”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자연 색만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들어온 화학 염색이 제아무리 다양한 색을 뽑아낸대도, 자연의 빛에 견줄 수는 없었다. 길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에선 ‘와’ 하고 탄성이 터져 나오지만, 동대문 원단 시장을 가득 채운 원단들을 본다고 해서 감탄하는 사람은 없잖은가.
염색 경력만 스무 해를 훌쩍 넘는다. 한창 때 응했던 인터뷰 기사의 제목 ‘나는 아직도 미쳐 있다’가 과장이 아니었다. 자려고 누우면 바람에 날리는 천이 아른거렸다. 눈에 담는 모든 색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전통염색에 대한 책이 없었기 때문에 온갖 문헌을 뒤지며 전통을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열정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게 한다.
그의 열정을 논할 때 어머니 조일순 장인을 빼놓을 수 없다. 화학 염색에 밀려나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춘 쪽을 다시 살려낸 데에는 조 장인의 역할이 컸다. 1년생 풀인 쪽은 염색에 쓰이지 않으면 잡초나 다름없었고, 1970년대 당시 쪽 염색을 할 줄 아는 이도 전무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직접 구해온 쪽 씨앗을 전라남도 나주에 심었다. 현재 나주 문평읍, 당시 문평마을에서는 찬물염색이라 불리던 쪽염이 마을 단위로 행해지곤 했다. 그는 어머니가 윤병운 인간문화재와 쪽염을 재현해내기까지 갖은 노력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제대로 쪽염을 성공한 게 1980년대 초반이었어요. 어머니는 ‘이 기술을 무조건 살려야 한다. 꼭 살려내서 후대에 전달해야 한다’고 하셨죠. 윤병운 어르신이 염색 분야에서 최초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당신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우셨고요. 다른 사람들은 ‘최초 인간문화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왜 남에게 주느냐고 아까워했는데, 어머니는 ‘나는 매듭 장인일 뿐, 염색 전문가는 아니다.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고 대답하셨어요. 확고한 면모가 정말 존경스럽죠.”
염색 0.5세대의 열정
‘염색 0세대’ 어머니의 열정은 고스란히 아들에게 가 닿았다. 천연 염색 분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없으면 서운할 지경이다. 그는 쪽염을 최초로 시작했고, 무늬를 내어 염색하는 문양염 기법을 최초로 개발한 염색 전문가이며, 찹쌀풀을 이용해 산수화를 최초로 그린 작가다. 자연에서 새로운 염색 재료를 발굴해내 소개하거나, 인도나 일본 등 해외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알리는 역할도 기꺼이 맡았다. 1세대보다는 앞서 염색을 시작했기에 그는 스스로를 염색 0.5세대라고 칭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 년에 한 번씩 해외도 꼭 나갔어요. 원래 쪽빛, 즉 남색이 인도에서 온 푸른색이라 영어로는 Indigo Blue라고 불러요. 우리나라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건데, 세계 천연염색 심포지움(ISEND)이나 자연염색교류전으로 미국, 브라질, 호주, 일본, 한국 등지의 작가들이 모여서 교류하곤 했어요. 염색된 색상을 직접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3년째 모임을 못 갖고 있죠. 일본도 자주 갔어요. 쪽염이 마치 제 것인 양 특화를 잘 시켜뒀더라고요. 쪽은 독초과에 속하는데, 어떻게 한 건지 쪽으로 차도 만들고 쿠키도 만들더라니까요. 여러모로 빨리 하늘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열정으로 덮지 못하는 어려움도 분명 있었다. 지금은 연구소를 옮겼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울 도심, 그것도 북촌 한가운데 한옥에 있다 보니 환경이 항상 아쉬웠다. 마당이나 밭이 있었다면 천도 널어놓고, 염료 식물도 매일 관리하며 다양하게 염색할 수 있었을 테니까. 특히 쪽이나 염료 식물을 재배할 때는 새벽에 잡초를 뽑아줘야 하는데, 그나마 가진 땅에 심자니 짬 내서 들러도 잡초만 어마무시하게 자라 관리하기 어려웠다. 쪽이 열대 식물인지라 나주나 김천에서 자리를 잡을까도 고민했다. 결국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서울에서 버텨왔지만, 어려움을 견뎠기에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어렵게 연구를 이어나가면서도 그는 원칙을 고수했다. 전시회에 작가로 참여해 열 필의 천을 전시해두고 그 앞을 지킬 때였다. 관람객 서넛이 다가오더니 천 앞뒷면을 한참 번갈아 보더란다. 무얼 그리 뚫어져라 보느냐 묻자 색상이 어쩜 이렇게 균일하냐, 정말 천연 염색한 것이 맞냐고 도리어 되물었다. ‘천연 염색 작품이라고 플래카드 걸어두고 거짓말을 하겠나, 그러니 전문가가 아니겠느냐’ 하고 당당하게 받아쳤다.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열 번이든, 그 이상이든 반복하는 고집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카프만 한 크기든 20m에 달하는 천을 염색하든 다르지 않다.
“처음 염색한 천을 보면 균염(均染)된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햇볕에 널어두고 보면 군데군데 물이 덜 들어서 빈 곳이 보이거든요. 그러면 염색 과정을 반복하는 거예요. 저는 기본 열 번은 해요. 그러니까 10년이 지나도 색이 안 바래고 그대로인 거죠. 물론 천연 염색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어머니만 해도 얼룩이 있어야 천연 염색이 아니겠느냐고 하셨고요. 주먹구구식이던 예전과는 염색 방법이 달라졌으니 그 영향도 있겠죠.”
이제는 원칙을 지켜야 할 때
쪽의 매력은 고운 빛깔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환경오염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화학 염색과 달리 친환경적인 천연 염색은 패션업계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기업뿐 아니라 소비자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천연 염색된 옷을 사거나 직접 염색을 배우는 등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쪽으로 염색된 천은 방충, 방균, 방염 성능을 지니고 있다. 쪽 염색된 옷을 걸치는 것만으로도 피부의 상처나 아토피 같은 질환이 완화되는 경우도 있더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다. 일본의 한 교수가 쪽 성분을 분석해, 여드름을 유발하는 포도상구균 항균 기능이 있다는 걸 밝혀내기도 했으니 검증까지 된 셈이다. 게다가 쪽염된 옷은 여름철 높아진 체온을 어느 정도 낮춰주는 ‘쿨링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부르던 노랫말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싶다.
중년들이 특히나 천연 염색을 자주 찾는다. 자연의 빛에 부쩍 관심이 많아질 나이인 데다, 눈 번쩍 뜨일 효능에 반해서 그러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천연 염색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걸 원치 않는다. 천연 염색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흔들리는 일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천연 염색한 옷을 판매하는 분들 중에서 필요 이상으로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전 일부러 같은 옷을 팔더라도 훨씬 싼 값에 내놓죠. 항의받을 때도 있지만 저는 당당하게 그래요. ‘작품하고 상품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기껏 만든 옷이 안 팔리면 그건 무슨 소용이 있냐. 그래서 밥 벌어먹고 살겠냐’고요.”
전문가 양성 과정에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천연 염색 체험 프로그램에서 한두 번 염색하고서 끝났다고 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직접 가르치는 제자들에겐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천연 염색을 배워 창업하려는 중년들에게는 디자인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여유가 된다면 디자이너와 계약하거나, 의상이나 디자인을 전공한 대학생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전통문화산업 지원 사업을 활용할 수도 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자연
염색 일은 앞으로 5년 정도나 더 할까 싶다. 다만 문화재 보존과학과 염색을 동시에 전공한 전문가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스스로 선구자가 되어 후학을 이끌고자 산업대학원 섬유예술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문화재보존과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출토복식특별전 및 학술 세미나에 참석해보면, 시신이 입고 있던 옷을 분석해서 바느질 기법, 원단 종류를 밝혀내는데 염색에 대해선 전문가가 없어 추측만 하는 현실이 아쉬웠던 탓이다. 지금은 마음을 접었지만, 전통염색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전문가가 꼭 생기기를 소망하고 있다. 아들이 그 역할을 맡아주길 내심 바라고 있지만 강요하진 않는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최근에는 염색에 대한 애정 뒤편으로 숲 해설가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자라났다. 염색밖에 모르던 외골수의 도전이다. 하던 일과 대단히 다른가 싶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숲 해설가는 자연휴양림, 유아숲체험원, 숲길 등에서 국민이 산림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설하거나 지도하는 직업이다. 숲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물 이야기, 나무나 식물에 대한 지식, 숲에 얽힌 역사, 숲과 인간의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처음엔 풀만 보면 ‘저걸로 염색하면 무슨 색이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죠. 자연에서 난 재료를 다루긴 했지만 평생 염색만 하고 살았는데, 직접 숲속에 들어와 보니 훨씬 좋더군요.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숲에 직접 나가 해설사 강의를 듣고 있어요. 어떨 땐 배를 잡고 웃고, 어떨 땐 감동받기도 해요. 듣다 보니 재미있어서 공부 좀 제대로 해봐야겠다 마음먹었죠. 석 달 뒤에 자격증 시험을 보는데 경쟁률이 만만찮아요. 느리더라도 꾸준히, 열심히 하려고요.”
돌고 돌아 자연이다. 쪽빛으로 물든 손과 흙 잔뜩 묻은 등산화가 전혀 거슬림 없이 자연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먹은 것은 이뤄내는 끈기와 열정이 뒷받침되기에 그럴 것이다. 그의 한결같음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꽃이 가득 핀 오월의 봄 거리가 그렇듯.
●Exhibition
◇에릭 요한슨 사진전 Beyond Imagination
일정 2022년 10월 30일까지 장소 63아트
스웨덴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은 사진가이자 리터칭 전문가다. 그의 작품은 여타 초현실주의 작가의 작품처럼 단순한 디지털 기반의 합성 사진이 아니다. 그는 작품원(園)의 모든 요소를 직접 촬영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를 사진 속에 가능한 세계로 담아낸다. 요한슨은 상상의 풍부함이나 표현의 세심함, 특히 포토샵을 이용한 이미지 조작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디어로 탄생한 요한슨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으며, 다양한 연출로 구성된 여러 포토존을 통해 에릭 요한슨의 작품 속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요한슨은 해학과 풍자를 내포한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과 상충적 개념의 이미지 충돌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다.
◇상상의 정원
일정 11월 28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상상의 정원’은 조선 후기 ‘의원’(意園) 문화에서 탄생했다. 18~19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경제적 형편에 제한받지 않고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의원, 즉 ‘상상 속 정원’을 경영했다. 동시대 ‘의원’을 염두에 둔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에서 작가들은 정원의 역사, 실천을 다시 생각하면서 다양한 초점을 지닌 열린 정원을 만들어낸다.
각 작품은 자체로 이야기가 있는 하나의 정원이면서 동시에 서로 조화와 긴장 관계를 이루며 더 큰 정원을 구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 정원은 기존의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담의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인위적인 조경을 최소화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도록 조성해 동선도 자유롭다. 방문객은 다음에 이어지는 작품 설명 순서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마치 전통 정원을 산책하듯 덕수궁을 느긋하게 거닐며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Book
◇50 이후, 더 재미있게 나이 드는 법 (스벤 뵐펠·갈매나무)
우리는 100세 인생이 더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이제 괜한 수사가 아니다. 밀라논나도 윤여정도 청년들의 롤모델을 넘어 자신의 분야에서 인생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50대라고는 믿기 힘든 ‘동안’을 자랑하는 셀럽들의 이야기가 이제 놀랍지도 않으며, 50은 인생의 고작 절반을 상징하는 숫자가 됐다.
50세 이후, 즉 중년이 길어지고 있다. 보통 70세가 가까워질수록 암과 심혈관 질환 또는 심리 질환 같은 문명 질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급격히 높아지는데, 이때 삶의 질은 50세 이후 기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나이 들어서도 자신을 가꾸며 젊게 생활하려는 ‘신중년’(Young-Old)으로서의 삶이 인생 후반기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독일에서 사회 경제 분야와 연계해 선구적으로 노화 연구를 개척해온 스벤 뵐펠(Sven Voelpel)은 중년의 건강관리가 노화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 ‘늙지 않는 7가지 공식’(마음가짐, 식사, 운동, 수면, 호흡, 이완과 휴식, 사회관계)을 정리해 책으로 엮었다. 학문 연구와 사례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나이 드는 방법을 담은 이 책은 2020년 독일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았다. 유튜브 등을 통해 그는 재치와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몸소 보여준다.
선구적 노화 전문가가 제안하는 과학적 일상 루틴 가이드에 따라, 인생 후반기를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보자.
◇다산의 철학 (윤성희·포르체)
빠르게 변화하며 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게 알맞은 속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한 우리에게 이 책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다산의 철학을 보여준다.
◇면역 습관 (이병욱·비타북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보완통합의학 권위자인 이병욱 박사는 이럴 때일수록 면역과 개인 위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을 고치는 암 의사 이병욱 박사가 말하는 올바른 면역 습관에 귀 기울여보자.
◇나는 내 딸이 이기적으로 살기 바란다 (정연희·허밍버드)
“딸아 처음부터 너는 너였단다. 누구의 딸, 아내, 며느리, 엄마가 아닌 네 이름으로 살아가기를.” 눈부신 삶을 살아갈 사랑하는 딸에게 엄마로서, 한 시대를 먼저 산 여성으로서 ‘누구의 딸, 아내, 엄마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라는 애정 어린 당부를 전한다.
●Stage
◇지킬 앤 하이드
일정 10월 19일~2022년 5월 8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데이빗 스완
출연 류정한, 홍광호, 신성록, 윤공주, 아이비, 선민 등
국내 최초 스릴러 로맨스 뮤지컬로 150만 관객을 열광시키고 가슴 설레며 기다리게 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지킬앤하이드’는 1886년 초판된 영국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을 원작으로 선과 악, 인간의 이중성을 ‘지킬과 하이드’라는 인물을 통해 조명하는 작품이다. 무대를 압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더불어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극대화하는 연출로 관객에게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지킬앤하이드’는 2004년 초연 이후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누적 공연 횟수 1410회, 누적 관객 수 150만 명,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 95% 등 압도적인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리어왕
일정 10월 30일~2022년 11월 21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이현우
출연 이순재, 소유진, 지주연, 오정연, 서송희, 이연희 등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인간 존재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아우르는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압도적인 걸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와 올해 데뷔 65주년을 맞은 연기의 거장 이순재, 대문호와 대배우의 역사적인 만남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금껏 수많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출해온 이현우 교수가 기존의 공연에서 간과됐던 부분까지 면밀히 분석해 셰익스피어 본연의 ‘리어왕’을 선보일 예정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일정 10월 8일~11월 21일
장소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봉건
출연 박해미, 김예령, 고세원, 임강성, 임주환, 태항호 등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초연 직후인 194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미국 남부 명문가 출신의 한 여성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급변하는 미국 사회, 특히 남부 상류사회의 쇠퇴와 산업화 이후를 다소 충격적으로 전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 공연은 각색을 통해 주요 인물들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해 더욱 밀도 높게 극을 이끌어갈 예정이다.
코로나 시대의 끝이 보이는 걸까? 여러 종의 코로나19 백신들이 허가되기 시작했다는 뉴스들이 이곳저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백신이 나왔다고 이 전쟁이 바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백신이 코로나를 진정시키는 효과를 보이려면 인구의 70% 정도가 접종되어야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접종은 우선순위를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접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코로나19는 백신을 맞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계속 전파될 것이다. 백신 접종의 희망적인 소식들이 들려오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부터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 있다. 바로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면역력이다. 그리고 유산균이 면역력 개선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유산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면역력과 유산균
최근 다시 떠오른 유산균의 강자가 있다. 바로 김치 유산균이다. 사실 김치에 있는 유산균이 건강에 특별한 기능을 한다는 것은 과거부터 익히 들어온 얘기다. 코로나19로 유산균의 힘이 재조명받으면서 김치에 대한 연구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그런데 의외로 김치 유산균에 대한 긍정적인 소식은 코로나19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유럽에서부터 들려왔다. 프랑스 몽펠리에대학 장 부스케 명예교수가 이끄는 폐 의학 연구팀은 세계 각국의 코로나19 상황을 연구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발효된 배추를 먹는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와 한국, 대만이 코로나19 사망률이 낮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발효된 배추의 유효 성분이 효소 ACE2(안지오텐신 전환 효소2)를 억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ACE2는 사람 세포막에 존재하는 효소인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ACE2와 결합해야 세포 속으로 침투, 병을 일으킬 수 있다. 즉 ACE2가 일종의 매개체가 되는 것인데 발효된 배추가 그 역할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김치는 코로나19 감염을 억제하는 식품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사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효능 외에도 김치의 다양한 기능은 과거부터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우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항바이러스 효능이 2014년에 확인되었다. 당시 한국식품연구원에서 항바이러스 효능이 있는 김치 유산균 3종을 발굴했다. 김치 유산균을 먹인 쥐가 신종플루 및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 시 생존율이 40~50% 더 높은 결과와 김치 발효가 진행될수록 바이러스 감염이 더 억제되는 현상도 확인됐다.
2017년과 2018년에는 세계김치연구소에서 아토피피부염 예방과 증상 개선에 효과적인 김치 유산균 와이셀라 사이바리아(Weissella cibaria) WiKim28과 락토바실러스 사케이(Lactobacillus sakei) WiKim30을 찾아냈다. 연구를 맡은 최학종 박사팀은 장내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분석을 통해 아토피와 장내 공생 미생물 간의 상관관계를 구명하고, 김치 유산균이 장내 공생 미생물의 군집 변화를 조절해 아토피를 개선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마이크로바이옴은 ‘미생물’(microbe)과 ‘생태계’(biome)를 합친 용어로 우리 몸에 사는 미생물과 그 유전 정보 전체를 일컫는다. 이 미생물군이 질병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이 밝혀지면서 바이오 업계 차세대 산업으로 각광받는 마이크로바이옴은 앞으로 127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김치 유산균이 마이크로바이옴의 대표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업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보적인 미생물 신균주 순수분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코엔바이오는 우리의 발효 김치에서 세계 최초로 유산균 중 하나인 류코노스톡 홀잡펠리(Leuconostoc holzapfelii Ceb-kc-003)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균주에 대한 안전성 및 사용 기준이 적합하다고 인정되어 2020년 9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식품원료의 한시적 기준 및 규격 인정서’를 취득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류코노스톡 홀잡펠리 균주는 유산균 음료 닥터홍구르트와 닥터홍프로에 함유되어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됐다.
유익균, 유해균, 중간균
면역력을 키우려면 ‘장’(腸)이 건강해야 한다. 장에는 체내 면역세포의 약 70%가 분포해 있어 미생물이나 미생물의 부산물, 독소 등이 혈류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다.
장내에는 100조 개 이상의 균이 살고 있는데, 이 균들은 장에 유익한 ‘유익균’, 장에 유해한 ‘유해균’, 때에 따라 유익균도 유해균도 될 수 있는 ‘중간균’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대표적인 유익균인 ‘유산균’을 늘리는 게 핵심이다. 유산균은 직접 면역력을 높여주는 게 아니고 면역 세포가 가장 많은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
유익균이든 유해균이든 중간균이든 넘치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유산균은 작은 즐거움이 행복으로 전환하도록 삶의 생생함을 길어 나르는 최고의 무기다.
코로나가 바꾼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라고 불려야 할 세상에서 우리의 전통 음식인 김치가 바이러스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음식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선조가 후손에게 남긴 축복과도 같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해외시장을 열어갈 김치 유산균의 무궁무진한 미래가 기대된다.
코로나19로 계속되는 세계적 위기는 자연스럽게 면역력에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신뢰성 있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에 강한 면역력을 갖추는 것만이 코로나19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인 해법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산균이야말로 면역력을 증진시키는 대표적 건강보조제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주목도만큼 수많은 유산균 제품들이 나와 있기에 무엇이 정말 효과적인 유산균 제품인지 알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
국내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청국장의 항암 효과를 발견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홍영재 박사는 기존 유산균의 한계를 극복한 유산균을 발견했다. 해답은 우리에게 친숙한 ‘김치’였다.
김치는 미국의 유명 건강 잡지 ‘Health’에서 세계 5대 좋은 음식의 하나로 선정하였고 사스(SARS)가 우리나라를 피해간 이유로 꼽혔을 만큼 위대한 전통 발효 식품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런 검증된 사실들을 넘어서 홍 박사가 김치 유산균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김치 유산균 자체가 가진 강한 생존력이었다.
김치 유산균,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최고의 유산균
“김치 유산균은 마늘, 고추, 염분 등 산도가 높은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번식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그 어떤 유산균보다 강합니다. 따라서 서양인보다 더 긴 장(腸)을 가진 동양인의 장에서도 살 수 있죠.”
홍 박사는 이러한 김치 유산균의 특징을 살려 한국 토종 균주 전문 기업 코엔바이오(대표 염규진)와 함께 손잡고 기존 유산균 제품과는 차별화된 닥터홍프로와 닥터홍구르트를 개발하였다. 1500여 종의 균주를 보유하고 있고 10여 개 이상의 국내외 특허를 보유, 허가 진행을 추진 중인 코엔바이오의 염규진 대표는 특히 닥터홍프로를 진정한 플래그십 유산균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기존 유산균과의 차별화를 추구했다고 말한다.
“닥터홍프로는 세계 최초로 김치에서 추출한 지방 및 콜레스테롤 분해력이 뛰어난 균주인 류코노스톡 메센테로이데스, 락토바실루스 퍼멘텀, 락토바실루스 사케이 등 다양한 균주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들어간 6개 균주는 이미 미국 식품의약처 FDA의 HUMAN OTC DRUG에 등록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서목태와 하수오, 4년근 인삼 분말 등의 한방 원료를 넣어 항암 효과와 면역력 증가를 추구하였습니다.”
닥터홍프로와 기존 제품과 다른 것은 유산균의 효과, 천연 한방 재료들과의 결합뿐만 아니라 맛에서도 차별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 비결은 바로 스테비아. 스테비아의 원산지인 남미에서 A급 스테비아를 수입, 사용하여 특유의 달콤한 맛을 내게 된 닥터홍프로는 색소와 방부제 또한 전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순수하게 천연 제품으로 이뤄진 유산균 제품으로 만들어졌다.
닥터홍프로·닥터홍구르트 유산균 음료에 대량 함유된 균주들
홍 박사가 김치 유산균의 남다른 생명력에 주목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인의 식생활 때문이다.
장내에는 30%의 유익균과 10%의 유해균, 60%의 중간균으로 구성돼 있다. 홍 박사는 장내 질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닥터홍프로는 김치 유산균에 더해 홍 박사 자신의 ‘전공 분야’라 할 수 있는 재래 시골 청국장 분리 발효균과 발효 물질을 첨가하여 그 효과를 더했다. 그리고 원재료에 분유를 포함하지 않은 100% 식물성 제품으로 우유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시간이 서양인보다 짧은 동양인에게 잘 나타나는 유당불내증을 완화하는 효과도 노렸다. 이는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던 산부인과 의사로서, 그리고 암을 극복한 청국장 전도사이자 식당 경영인으로서의 삶을 가진 홍 박사의 해법이 느껴지는 부분들이다. 그야말로 그가 수십 년간 연구한 건강 연구의 결정체가 여기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홍 박사가 김치 유산균 발효액 96.7%를 함유한 ‘닥터홍프로’와 김치 유산균 발효액 93.05%를 함유한 ‘닥터홍구르트’를 만들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더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진단이 나오는 현재, 현대인에게 유산균은 점점 더 각별하게 필요한 영양 성분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현대인의 과도한 인스턴트 식품 의존 성향과 음식에 뿌려지는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은 몸속의 중간균과 유익균까지 몰살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홍영재 박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김치 유산균을 기본으로 하여 만든 닥터홍프로와 닥터홍구르트가 어떤 반응을 얻게 될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30팩에 닥터홍구르트는 4만3000원, 닥터홍프로는 9만5000원이며 생유산균이라서 유통기한 3개월, 반드시 냉장으로 보관해야 한다. 생유산균 알갱이들이 들어있는 닥터홍프로는 침전물이 골고루 섞일 수 있도록 잘 흔들어서 마셔야 한다. 아침에는 닥터홍구르트 저녁에는 닥터홍프로를 꾸준히 마시면 ‘腸 운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유산균 음료에 대량 함유된 균주들이 놀라운 대사순환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역력이 중요한 시대에 김치에서 찾은 한국형 유산균 음료의 효력이 포스트 코로나에 또 한 번 진가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산들산들 가을바람이 부는 9월 이달의 추천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일정 9월 3~15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하려 생체 실험을 하다가 자신의 숨은 자아에 영혼을 잠식당해버리는 지킬박사의 이야기를 그렸다. 대중에게 익숙한 ‘지금 이 순간’, ‘한때는 꿈에’ 등 서정적인 넘버와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앙상블을 이룬다.
◇ 영화 '집으로...'
개봉 9월 5일 출연 김을분, 유승호 등
한때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던 영화 ‘집으로...’가 추석을 맞아 18년 만에 재개봉한다. 일곱 살 개구쟁이 서울 소년 상우와 그런 손자를 무한한 사랑으로 돌보는 시골 외할머니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 제19회 불갑산 상사화 축제
일정 9월 18~24일 장소 전남 영광군 불갑사 관광지 일원
사시사철 야생화가 아름다운 불갑사 인근에서 매년 가을 상사화를 테마로 여는 축제다. 올해는 ‘상사화, 천년 사랑을 품다’를 주제로 상사화 꽃길 걷기, 국악공연, 앙상블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공연, 전시 및 체험 프로그램이 펼쳐질 예정이다.
◇ 음악극 '극장 앞 독립군'
일정 9월 20~2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봉오동 전투’를 배경으로, 세종문화회관 산하 7개 예술단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음악극이다. 대한독립군의 영웅이지만 인생의 말년에는 쓸쓸한 삶을 살아야 했던 홍범도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재조명한다.
◇ 제48회 안동 국제 탈춤페스티벌
일정 9월 27일~10월 6일 장소 경북 안동시 탈춤공원, 시내 일원
‘여성의 탈, 탈 속의 여성’을 주제로 펼쳐지는 이번 축제는 전통사회 속에 억눌려 있던 여성들의 삶과 꿈을 그려낼 계획이다. 행사 동안 할미탈, 부네탈, 왕비탈 등 다양한 여성 탈을 테마로 한 공연과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
◇ 서울숲 재즈페스티벌
일정 9월 28~29일 장소 서울 성동구 서울숲 일대
도심 속 자연을 벗 삼아 재즈의 선율에 흠뻑 빠져볼 기회다. 국내 정상급 재즈 뮤지션의 무대는 물론 대중음악과의 협업 무대까지 고루 경험할 수 있다. 재사용 가능한 용기에 도시락을 가져오는 캠페인도 함께 진행되니 가을 소풍 떠나듯 축제를 즐겨보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김영철 건국대 명예교수가 세상을 먼저 떠난 제자 N 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N 군, 그간 잘 있었나. 자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년 전 자네 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 먹던 때였구먼. 그리 서둘러 떠날 줄 알았으면 고급 탕수육이라도 시켜 먹을 걸 후회가 되네. 이젠 먼 세상에 있어 이 편지를 받을 수 없겠으나 위로와 후회를 대신하여 글을 써보네.
제임스 힐턴의 소설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제자들이 학교를 떠나도 칩스 선생에겐 앳된 제자들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제자들의 생장점은 멈추고 영원히 학창 시절의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였네. 그렇듯이 친애하는 제자 N 군 자네도 팔팔한 청년 시절 모습으로 내 기억에 살아 있네.
자네를 처음 본 것은 밀양 낙동강변 유천 소풍 때였네. 선글라스를 쓰고 풀밭에 누워 있던 모습이 마치 알랭 들롱의 현신 같았네. 우리 과에도 저런 멋진 청년이 있나 싶었지. 그 도도하고 거만하기조차 한 자네가 가장 친애하는 제자로 남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네. 그날 자네와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지. 내게 자꾸 권하던 막걸리 덕분에 경부선 열차 추돌사고를 면한 기억이 나나? 수십 명의 인명 사고가 난 바로 그 열차를 타기로 했는데 자네가 권해서 마신 술 때문에 결국 다음 열차를 타고 말았지.
“선생님 한잔 드시고 강물처럼 흘러가입시더.”
그 절묘한 표현에 빠져 한 잔 두 잔 마신 술 덕분에 결국 기차를 놓치고, 사고를 면했지. 지금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네.
보기와는 다르게 자네는 인정도 많고 풍류를 아는 멋진 학생이었네. 넉넉지 않은 향토장학금으로 동기들,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인정을 베풀었지. 덕분에 등록금까지 날려 먹었다는 소문도 들었네. 아마 대구대 국문과 학생들 중에서 자네의 밥 한 끼, 술 한잔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네. 자네는 살아 있는 산타요, 후원자였지.
워낙 주변에 사람이 많고 친구들을 좋아하다 보니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지. 학과 행사에 빠지면 학점 제한까지 있었건만 자네는 그날 친구 결혼식장에 다녀오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네. 그리고 평생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지.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이었네.
자네 덕분에 나는 공부하는 학자로서 체면을 지킬 수 있었네. 1982년 여름부터 거창 산골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지. 자네가 소개해준 거창 할머니 집에 머물며 많은 글들을 썼지. 내가 쓴 글과 책들은 대부분 고향이 그곳이네. 선생님 영양보충 해준다며 오토바이에 싣고 오던 그 까만 봉다리를 지금도 잊지 못하겠네. 그 속엔 늘 소고기 몇 근이 들어 있었지. 거창에서 위천까지 수십 리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오던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네.
내가 건국대로 옮긴 후에도 매년 여름마다 거창을 찾아가곤 했네.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그럴 때마다 자네는 잊지 않고 극진히 대해주었지.
“선생님 내가 돈 벌어 별장 하나 마련하겠슴더. 그때까지 기다려주이소.” 그런 약속을 지키려고 휠체어를 탄 불구의 몸으로 사업에 정진했지. 장애인이 된 뒤에도 까만 봉다리는 계속 배달되었고.
한번은 내가 머무는 방을 훤하게 도배까지 해놓았더군. 자네의 세심한 배려 지금도 감동이네. 서울 올라갈 때는 창고에 묻어둔 양파며, 밤, 홍당무 등 귀한 농산물을 차 안에 하나 가득 실어주곤 했지. 40년간 여름마다 거창을 빠지지 않고 간 것은 결국 자네의 훈훈한 인정과 추억 때문이었네.
어느 날 한밤중에 자네 전화를 받고 나도 울었네. 우연히 MRI 사진을 찍다가 학창 시절 교통사고 때 생긴 어깨의 뼛조각이 발견된 것이었지.
그것이 신경을 짓눌러 평생 불구의 몸이 된 것이고. 그 사실을 전하며 통곡하던 자네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 그 뼛조각 하나가 자네 인생을 망쳐놓을 줄이야. 조금만 일찍 발견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인생이 그런 건가보네. 그러다가 결국 사업에 실패하고 폐인이 되고 말았지.
사업 실패도 무슨 보증을 잘못 서서라고 들었네. 결국 사람 좋아하고 쉽게 믿는 자네의 성품 탓이었네. 사업이 망하자 자네는 주변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혼자만의 고립된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지. 그렇게 4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고통과 절망의 세월, 자네는 초인적인 힘으로 견뎌냈네.
그리 많던 친구들, 믿었던 친구들 다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지. 그런 게 현실이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삭막한 인간관계. 그 배신감에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나 역시 부끄럽고 죄스럽네. 방문은 고사하고 자네가 좋아하던 책 한 권, 시디 한 장도 못 보내준 게 한스럽네.
그렇게 신병과 외로움을 초인적으로 버티다가 육십 고개에 들어서자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지. 불구의 몸이 된 그때부터 30여 년의 세월, 홀몸으로 세상을 등지고 혼자만의 섬에 갇힌 4년의 세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그 세월을 홀로 쓸쓸히 지키다가 먼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지. 부고 소식도 이미 땅속에 묻힌 지 반년이 지나 우연히 알게 됐으니 이런 애통한 일이 어디 있겠나. 작년에 공원묘지를 찾았으나 끝내 무덤을 찾지 못해 소주 한잔 나누지도 못했네.
그저 자네가 묻혀 있을 만한 무덤가에서 “문식아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불러본 게 전부였네.
내 목소리 들었는가. 군사부(君師父) 일체라면 반대로 신제자(臣弟子)도 일체일 것이네. 스승보다 먼저 떠난 제자는 불효자인 셈이지. 은사인 내가 이리 살아 있는데 먼저 세상을 하직하다니 어찌 그리 무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천하의 불효막심한 제자가 됐지만 자네는 40년간 교단생활 중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였네. 자네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들고 오던 까만 봉다리, 그 모습으로 자네를 영원히 기억하겠네.
칩스 선생은 많은 제자를 세계대전에서 잃었지. 하지만 그는 기억 속에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자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믿었네. 자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죽지 않은 것이네. 내가 살아 있는 한 자네도 살아 있는 셈이지. 영면을 비네. 곧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겠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소주 한잔 합시다.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겠네. 안녕.
김영철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군사관학교 전임강사, 대구대학교, 건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우리말글학회·겨레어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건국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지난 주말 불꽃 같은 뮤지컬 한 편을 보았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지킬박사와 하이드이다.
불꽃 같았다고 표현한 건 필자 개인적인 의견으로 무대가 새빨간 조명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받은 느낌이다.
블루스퀘어에서의 이번 공연은 월드투어로 브로드웨이 유명 뮤지컬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국내 공연계에서는 전례가 없는 한국과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의 공동 제작으로 우리나라 크리에이브 팀이 주축이 되어 브로드웨이 배우들을 캐스팅했고 국내 공연 후 세계진출을 목표로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외국 배우가 다른 언어로 하는 뮤지컬이라 몰입할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되었지만, 무대 양옆의 스크린에 번역되는 대사가 있어 문제없이 그들의 열연에 빠질 수 있었다.
필자는 뮤지컬을 매우 좋아한다. 바로 눈앞에서 노래와 연기가 펼쳐지는 생동감이 가슴을 뛰게 하고 때로는 필자 자신이 무대에 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즐겁다.
오늘은 좌석이 무대에서 다섯 번째 줄이어서 배우들의 표정도 잘 알아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잊지 못할 장면으로 한 사람의 배우가 선한 모습의 지킬을 표현하며 연기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풀고 포악한 눈빛으로 변하며 하이드로 노래할 때 전율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어떻게 저리 서로 다른 인격체를 표현하는지 지킬과 하이드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량이 정말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단지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헤쳤을 뿐인데 선과 악이 교차하는 연기가 매우 카리스마 있고 자연스러웠다.
수시로 머리를 묶었다가 풀어헤치는 동작으로 한 사람 안의 두 인격을 훌륭하게 표현해 낸 장면이 가장 멋지고 놀라운 연기로 머리에 남았다.
어렸을 때 처음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고 정말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동시에 가진 남자의 변하는 과정이 재미있으면서도 오싹했었다.
뮤지컬의 첫 장면은 병원 이사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지킬박사가 자신의 연구를 실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서 선과 악을 분리해 악을 없애는 연구가 완성단계라며 실험할 대상을 찾겠다는데 이사회 전원의 반대에 부딪힌다.
유능한 의사이자 과학자인 헨리 지킬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인간의 정신을 분리하여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가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나 세인트 주드 병원 이사회 의결에서 전원 반대로 무산된다.
변호사인 친구가 낙담한 그를 위로하려고 웨스트 엔드의 한 클럽으로 데리고 간다.
선한 감성의 지킬은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 학대받는 루시에게 친구가 필요하면 찾아오라며 명함을 준다.
지킬박사는 이사회의 반대로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자 사랑하는 약혼녀 엠마와도 멀리하며 연구를 거듭해 성공단계에 이르고 자신이 직접 실험대상이 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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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을 통해 자신의 성질과는 정반대인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하이드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고 이사회 의결에서 반대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이고 만다.
계속되는 실험으로 선한 지킬 본연의 마음이 점점 사라지고 악한 하이드에게 지배당하는 걸 느끼며 괴로워한다.
잠재해 있던 하이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된 그는 친구에게 부탁해 자신이 하이드로 변할 때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행복해야 할 엠마와의 결혼식에서 하이드가 튀어나와 친구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사람의 마음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분리되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면 참으로 무서운 일일 것이다.
천사 같은 엠마와 정열적인 루시와의 비교도 재미있었는데 두 캐릭터가 서로 다른 이미지로 각자의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맑고 고운 음색의 엠마와 강렬한 느낌의 루시의 열연이 관객을 즐겁게 하고 박수도 많이 받았다.
특히 두 인격의 연기를 멋지게 해낸 지킬박사와 하이드 역의 카일 딘 매시 라는 배우에게 찬사를 보낸다.
뮤지컬이 끝났는데도 지킬이 실험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부르던 유명한 노래 ‘지금 이 순간’ (this is the moment) 멜로디의 여운이 길게 귓가에 남았다.
인간은 누구나 유혹과 충동 속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본능과 욕구를 자극하고 부추기는 것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제어하고 다스리면서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느냐가 인생의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혹 곤혹 매혹 미혹 유혹, 이런 말에 들어 있는 惑(혹)은 정신이 헷갈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의미상 헤맨다는 뜻인 迷(미)와 같습니다. 인간은 정신이 헷갈리는 상태인 채 아득한 미망(迷妄)의 바다에서 발전과 구원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괴테의 는 바로 지식과 학문에 절망한 노학자 파우스트의 미망과 구원의 노정을 그린 작품이 아닙니까.
에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유혹에 흔들리고, 곤혹을 겪고, 미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선한 인간이 더 나아지기 위해 모색하는 온갖 행동이거나 징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일컬어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된다’는 뜻의 불혹(不惑)이라고 했습니다. 나이 열다섯 살에 학문에 대한 뜻을 세우고[志于學], 삼십에 일어서고[而立], 그리고 마흔이 되면 불혹이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불혹이란 공자님 말씀처럼 그렇게 학문에 뜻을 세운 뒤 문자와 글에 대해 품었던 여러 가지 의문이나 의심을 치열한 궁구(窮究)를 통해 풀어 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일까? 글이나 책 속에 온갖 유혹이 있고, 그 온갖 유혹을 공부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과연 불혹의 경지인 것일까? 불혹을 지나면 지천명(知天命), 즉 자신의 천명을 아는 쉰 살이 되고, 또 더 지나면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거슬리지 않는 이순(耳順)의 예순 살이 되고, 좀 더 지나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걸릴 것 없고 거리낄 게 없는 불유구(不踰矩)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고전의 상식’에 동의하기 어렵고, 오래된 가르침을 배반하고 싶은 것이 오늘날 시니어들의 새로운 유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한 편지에 “모든 유혹 중에서 가장 강한 유혹은 본래의 자기와는 아주 딴판인 것이 되고 싶다고 바라고, 자기의 도달할 수 없는, 또 도달해서는 안 되는 모범이나 이상을 좇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유고에도 “가장 위험한 유혹, 그것은 무엇과 닮지 않겠다는 유혹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의 색깔이 약간 다르지만 헤세나 카뮈의 말은 자아 정체성의 확립, 독자적 자율성, 단독자로서의 삶, 이런 것에 관한 언급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스승, 역사적 인물들과 다르게 자신만의 얼굴과 특성을 만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자기와 다른 모습을 추구합니다. 남들이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킬 박사의 다른 얼굴이 하이드입니다. ‘동방의 주자(朱子)’ 또는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말을 들었던 퇴계 이황 선생은 남들에게 알려진 모습과 전혀 다른 면이 있어 ‘낮 퇴계, 밤 퇴계’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신 중에서 야누스의 얼굴은 전쟁과 평화를 다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어느 한쪽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2천년 교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스승이라는 고대 서양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성인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지만 젊어서는 정욕의 노예였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채 15년이나 동거하던 여자에게 아들을 낳게 하고 도둑질도 했던 그는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이성에 의하여, 눈앞에 주어지는 정욕의 유혹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지만 잠잘 때에는 거짓된 환상이 나를 유혹한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죄에 관한 질문을 통해 자신을 개조하고, 질문 속에서 새로운 삶을 완성해갔습니다. 그는 질문으로 가득 찬 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 태어나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은 선이신데 왜 악이 존재하며 그 악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그는 일생동안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실존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유혹은 어떤 내용의 것이든 거역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하고 치명적입니다. 유방의 군사(軍師) 장량이 받았다는 에는 ‘고막고어다원 비막비어정산(苦莫苦於多願 悲莫悲於精散)’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하는 게 많은 것보다 더 괴로운 게 없고 늙는 것보다 더 슬픈 게 없다는 뜻입니다. 다원(多願)을 다욕(多慾)이라고 쓴 자료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잠언에도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이 있다 하는도다”(9:17)고 하지 않았습니까?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은 인간에게는 세 가지 유혹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친 육체의 욕망, 제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교만, 졸렬하고 불손한 이기심입니다. 베이컨에 의하면 이 무서운 병에 대해 취해야 할 수단이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하는 수양 이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때로는 가장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또 때로는 가장 부패한 상태에 있으니 좋은 상태에 있을 때 조심하고 그 상태를 지탱해 악한 것을 몰아내라는 게 그의 충고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파우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
그러니 아무런 잘못이나 죄도 저지르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남의 모범이 되는 삶을 영위한 사람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온갖 유혹과 정신적 방황을 겪고 인격을 완성해 나간 사람이 더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에서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는 자신이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의 일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악마에 대한 내면의 저항은 선을 지키려는 의지를 강화시켜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느님에게 파우스트를 타락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자신하며 내기를 제의하자 하느님은 “착한 인간은 잠시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글쓰기이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인간의 삶 도처에 유혹이 있고, 가지 않은 길일수록, 해보지 않은 일일수록 손짓해 부르는 게 많습니다. 유혹이나 욕망이란 인간을 발전시키고 인격이 완성되도록 돕고 자극하는 삶의 에너지이며 촉매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토대로 지금 자신이 처한 유혹에 정면으로 맞서 잘 이겨나가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