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이애순(90) 씨. 1인가구상담헬퍼 사업을 비롯해 사회의 여러 도움 덕분에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지만, 좁은 방을 가득 채우는 따스한 미소가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마땅치 않은 환경에서도 무기력함을 떨치려는 그에게 되레 희망이 비쳤다.
서울시 중구 을지로동. 촘촘히 들어선 빌라와 상점들 사이 자칫 지나치기 십상인 고옥. 시멘트를 덕지덕지 덧바른 계단을 오르면 낡은 나무 현관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살짝 열린 세 번째 문 사이, 활짝 웃고 있는 이애순 씨가 보였다.
“어서 와요! 반가워. 오늘은 손님이 많이 왔네. 혼자 살고 있어 적적한데,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아.”
이 씨는 30년 넘도록 혼자 지냈다. 30대 초반에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자식 넷을 키워냈다. 청소노동자로 일하면서 치열하게 버텼다. 명절 때나 자녀들과 연락이 닿긴 하지만 서로 형편이 여의찮아 막내딸을 제외하곤 자주 만나지 못한다.
“남편이 하늘나라 갔을 때가 우리 막내 아장아장 걸을 즈음이었지. 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만 보는데 어떡하겠어요. 열심히 돈 벌어야지.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청소 일로 평생을 먹고살았어. 가끔 껌 팔러 다니고. 이제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리려고 해요. 생각만 해도 너무 힘들거든. 자꾸 떠올리며 가슴 아파봐야 소용없기도 하고.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자세히 말도 못 해요. 오죽했으면 한쪽 귀가 먹어버렸을까요.”
맞춤형 서비스로 개선된 생활
이애순 씨는 적적할 때면 근처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사람 구경을 한다. 그러나 오래 걷지는 못한다. 일하며 상한 무릎은 몇 년 전 수술을 받았다. 짧은 산책이 끝나면 TV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듣는다. 특히 가수 임영웅의 애틋한 노랫말은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줬다. 노래 제목이나 정확한 가사는 잘 모르지만 마음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가운데 이 씨처럼 혼자 사는 노인의 비율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22년 기준 홀몸 노인 비율은 20.8%로 1년 전보다 0.2%포인트 늘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무렵 상황은 더 심각했다. 관련 기관과 커뮤니티 센터가 문을 닫은 탓에 홀몸 노인을 포함한 1인 가구가 사회 안전망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례가 종종 생겼다. 서울시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좀 더 면밀히 보호하기 위해 1인가구상담헬퍼 사업을 진행했다.
1인가구상담헬퍼 사업은 참여자로 선정된 1인가구상담헬퍼가 주거 환경이나 경제 상황이 열악하거나 정서적으로 고립되는 등 다인 가구에 비해 열악한 중장년 1인 가구를 발굴하고, 주기적으로 전화·방문해 안부를 확인한다. 사회와 단절된 채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정서를 살피고,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게 돕는다.
잊고, 나아가기
이 씨는 해당 사업으로 조금 더 나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를 살피는 1인가구상담헬퍼 참여자에 따르면, 그는 수혜자 중 비교적 몸과 마음이 건강한 편이라고 했다. 거동이 불가하거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경우에는 고립 상태가 더욱 심화되고 삶의 의지가 떨어져 식사, 취미, 인간관계에 관한 욕구가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단다.
계절이 지나도, 명절에도 그의 일상은 여전하다. 가족과 만나 멀리 나들이를 가거나 명절 음식을 먹지는 않지만 속상하거나 서운한 기색은 없다. 욕심을 부리기보다 주어진 삶에 집중하며 평탄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이애순 씨다.
“혼자 사는 집에 매번 찾아주어 고맙지.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낯설지도 않아요. 와서 뭐가 필요한지, 어떤 부분이 힘든지 다 물어보고, 필요한 게 있으면 갖다주더라고. 전기장판이 고장 났었는데 새 걸로 바꿔줬어. 그저 내 다리가 걱정이지. 언제까지 걸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지금은 모르는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요 앞 상가 아가씨한테 물어보기도 하는데, 몸 상태가 나빠지면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음에 감사해. 친절한 분들 덕에 긴 하루 중에 즐거운 시간이 늘 있네.”
만남을 뒤로하고 낡은 문을 나서려는 찰나에도 이 씨는 그를 찾은 사람들의 손을 꼭 잡아주거나 끌어안았다. 특유의 밝은 미소와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음이라면, 충분히 현재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본, 세계 최초 고령화사회로 진입한 나라. 100세 이상 노인이 9만 2000명에 달하며, 최고령자 나이는 남자 111세, 여자 115세에 이른다. 인구 10명 중 1명이 80세 이상이다. 일본인들이 65세 정년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들의 삶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현장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은 우리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웃이지만, 고령화를 먼저 겪어본 선배이기도 합니다. 아직 우리 주변엔 은퇴 후의 삶을 휴식으로만 보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가는 일본 노인들의 삶을 신미화 교수와 함께 들여다봅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70대와 80대 할머니들이 함께 작은 피자 가게를 운영하며 얻는 행복과 소중한 순간을 담은 이야기다. 이들은 작은 가게에서 끊임없이 웃으면서 함께 일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행복을 찾는다. 어떤 목표나 성취보다는 서로의 존재와 관계 속에서 소중한 순간을 찾아가며 행복을 느낀다. 이번 취재를 통해 노년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시작은 지역 봉사활동으로부터
구름 한 점 없는 7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도쿄에서 전철을 3번 갈아탄 후 다시 택시를 타고 3시간 만에 도착한 곳에는 한적한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쪽 길가에 아담한 가게가 보였다. 간판에는 ‘바바(할머니)피자’라고 적혀있었다.
바바피자는 이름 그대로 73세부터 86세까지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피자 전문점이다. 피자 가게 앞 넓은 밭 이름도 BaBa(ばぁば)밭이다. 할머니들이 채소를 직접 재배하고, 그 채소를 피자에 토핑으로 올린다.
2019년 6월 오픈한 바바피자는 매주 금·토·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문을 연다. 할머니들은 오전 9시부터 개점 준비로 분주하다. 밭에서 직접 거둔 신선한 재료를 쓰고 인근 항구에서 잡히는 정어리와 대합을 넣어 만든 순수한 맛의 피자. 건강하고 활기찬 할머니 여섯 명(토키·86, 쿄오코·85, 미에코·77, 마츠에·75, 타카코·73, 야스에·73)이 운영하는 곳으로, 매스컴에 알려져 지금은 전국에서 손님들이 방문하는 인기 있는 가게다.
지바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인 산무시. 바바피자의 시작은 85세인 쿄오코 씨와 86세인 토키 씨가 50여 년 전에 지역 봉사단체인 부인회에서 만나 아는 사이가 되고부터다.
“남편을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큰아들까지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보냈죠. 혼자 살고 있던 제가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마츠에 씨가 구급차를 불러주었고 함께 병원으로 가주었어요. 그때 위로해준 사람들이 여기 있는 다섯 명이랍니다”라며 미소 짓는 쿄오코 씨.
2년간 무보수였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쿄오코 씨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그라운드 골프를 시작했고, 마침 골프장에 설치돼 있던 화덕에 피자를 구워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줬더니 호평이었다. 부인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함께해온 여섯 명이 모여 가까운 구주쿠리 항구에서 잡은 신선한 대합과 정어리, 산무시 특산물인 파와 양파를 넣어 피자를 만들어 팔자고 의견을 모았다.
쿄오코 씨는 우연히 산무시가 관리하는 집 한 채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 수도 시설도 화장실도 있어서 바로 신청해 무상으로 빌렸다. 워낙 오랜 세월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한 할머니들이라 공무원들이 쉽게 승낙해주었다.
하지만 개점 초기 피자 반죽이 잘 늘어나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가장 젊은 타카코 씨가 고생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반죽을 둥근 나무봉으로 얇게 밀어도 좀처럼 둥그렇게 되지 않고, 반죽도 찢어져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우연히 TV를 보니 피자 세계 챔피언 대회가 열리고 있었어요. 거기에서 반죽에다 가루를 대량으로 뿌리는 걸 보고 그걸 흉내내니까 잘 만들어졌죠.”
여섯 명이 모이니까 아이디어가 자꾸 나오더라며 말이 끊어질 새 없이 이어졌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우리 중에 병이 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각자 역할이 나누어져 있어서 쉴 수가 없어요. 우리 중에 제일 건강한 사람은 최고령자인 토키 씨예요.” 이야기를 듣던 야스에 씨가 처음으로 참견하며 말을 보탰다.
“토키 씨는 병원에서 청소하는 일을 매주 이틀씩 하고 있는데, 여기서 약을 먹지 않는 사람은 토키 씨뿐이에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혈압약이라든지 한 가지씩은 먹거든요.” 타카코 씨가 덧붙였다.
이들이 선택한 색다른 ‘창업’
“창업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셨죠?” 필자의 전공이 경영학이라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다.
“제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어요. ‘당신은 얼마 낼 수 있죠?’라고 물었고, 각자 낼 수 있는 형편대로 20만 엔, 30만 엔 씩 내서 150만 엔(약 1350만 원)을 모았어요.” 쿄오코 씨가 대답했다.
“그러면 불공평하지 않나요?”
“우린 50년 이상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귄 사람들이라 각자 사정을 다 알아요. 저 집에는 올해 손자가 대학에 입학하니까 축하금이 들어갔다든지, 남편이 입원해서 돈을 써 버리고 없을 거라든지….”
출자금은 150만 엔이었고, 점포 인테리어는 가능하면 돈을 들이지 않기 위해 건설 현장에서 남은 목재를 받아와 만들었다.
“장사를 하려면 손해 보는 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죠. 꼭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게 저의 방침이에요.” 쿄오코 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처음 오픈했을 때는 매출이 오르지 않았고, 이듬해 코로나19가 시작되어 6개월 동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2년간 보수가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만두자고 하지 않았다. 그 후 우연히 지방신문에 소개되어 여섯 명의 할머니가 피자집을 운영한다는 게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는 손님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이익금을 모아 각자 출자한 금액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수익이 어느 정도 되나요?”
“1시간에 900엔(약 8100원) 정도.”
“하루 6시간, 금·토•일요일 계산하면 한달에 6만 5000엔 정도네요.”
“요즘 재료비도 오르고 공과금도 올라서 빠듯해요.”
“우린 다들 월•화•수요일 중에 이틀은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요. 그러니까 모두들 연금을 받고 있지만, 연금은 쓰지 않고 그대로 저축해도 충분히 생활은 돼요.” 조용히 듣고 있던 미에코 씨가 말했다. 지금 목표는 가능한 한 가게를 오랫동안 운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있는 70대들에게는 80대인 쿄오코 씨와 토키 씨가 목표랍니다. 저희의 롤모델이죠. 그러니까 두 분이 100세까지 일해주셔야 해요. 하하하.” 타카코 씨가 힘주어 말했다.
피자의 마지막 토핑은 ‘웃음’
“제가 오늘 아침 나오면서 남편한테 할머니 여섯 분이 경영하는 바바피자에 취재하러 간다고 하니까, ‘빨리 한국에 할아버지 여섯 명을 모아서 지지(할아버지)파스타를 만들어야겠네’라고 하더라고요.”
“어머머 너무 좋아요! 하하하.”
“이 참에 한일 간 바바와 지지 교류회를 갖는 건 어떨까요?”
“대찬성이에요.”
“선도 보면 어떨까요?”라고 짓궂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장 우리 바바부터 한국으로 갈게요.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아시죠?”
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끊임없이 웃는다. 손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도 웃고, 주방에서 누군가 실수해도 웃는다. 돌이 굴러가도 깔깔거리는 소녀 같은 웃음을 피자의 마지막 토핑으로 선사한다.
가게에 테이블은 세 개지만 가까운 해수욕장에 들렀다가 오는 포장 손님이 끊임없이 들어와 오후 3시 문을 닫을 때까지 바빴다. 조금 한가한 틈을 찾아 정어리 피자와 대합 피자를 시켜서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순수한 맛이었다. 할머니들이 직접 재배한 양파와 파는 바닷물이 섞인 토양에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작은 일을 통해 얻는 행복감
“언제가 가장 행복하던가요?”라고 여섯 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지금!”
모두가 동시에 같은 대답을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왜죠?”라고 질문하니, 각자 한마디씩 거든다.
“우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잖아요.”
“3시가 되면 가게 문을 닫잖아요? 그때부터 차를 마시면서 반성회를 가져요. ‘오늘 피자에 넣은 정어리는 조금 짠 것 같아. 다음번에는 소금을 적게 넣어야겠어’, ‘오늘 너무 바빠서 포장 손님이 나가실 때 서비스로 드리는 가지하고 피망을 챙겨드리지 못했는데, 다음번에는 좀 더 신경 써야겠어’라고요.”
“무엇보다 여기 오면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다른 날은 각자 다른 곳에서 일하지만 빨리 금요일이 오길 기다려요.”
할머니들이 작은 일을 통해 하루하루 얻는 행복감. 이 행복은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돈, 명예, 권력, 성공, 성취감, 목표 달성 같은 것이 기준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찰나에 그치는 일과성에 불과하다.
할머니들이 찾은 행복은 여섯 명의 관계 속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 아닐까? 매주 모여 함께 일하고 담소 나누면서, 때로는 고통도 공유하고 우정을 쌓아가면서, 달성해야 할 목표도 없이 오로지 자기들만의 행복한 낙원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노년에도 친구와 함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언제 한번 그들의 피자집을 찾아가 보지 않겠어요?”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點)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다.”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알프레드 아들러는 연결된 선처럼 보이는 삶이 사실은 수많은 점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두려워 말고, 현재를 살아가라는 의미다. 중장년에게 독서와 글쓰기는 삶에 점을 찍는 과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책의 해’ 지정 이후, 2020년부터 매년 특정 부문 계층별로 ‘책의 해’ 사업을 진행했다. 2023년은 ‘4050 책의 해’다. 이번 사업을 위해 출판, 독서, 도서관, 서점, 작가, 중장년 등 10개 단체가 모여 ‘2023년 4050 책의 해 추진단’을 꾸렸다.
‘4050 책의 해’는 ‘당신 꿈에 더 가까이’라는 슬로건으로 4050세대가 지난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를 담았다. 중장년이 자신을 위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4050 맞춤형 독서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작가와 함께하는 행BOOK학교’, ‘도서관 중장년 독서 살롱’, ‘4050, 책에서 길을 묻다’, ‘책과 생일-4050 CEO가 주도하는 독서복지’, ‘4050 책 추천 영상 챌린지’, ‘4050 책 생태계 포럼’ 등이다.
허건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간사는 “중장년이 책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고, 자신의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면서 “책 속에서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단편적으로 얻을 수도 있지만, 나아가 근본적인 삶의 철학과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인생 후반전을 맞이한 중장년에게 특히 독서가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읽고, 쓰고, 이야기 나누며
‘4050 책의 해’ 사업은 동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더 많은 중장년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책’을 매개체로 나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프로그램 참여자인 김지영(58) 씨와 곽선미(49) 씨도 독서와 함께 반드시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을 읽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글로 기록을 남기면서 불안을 해소하고 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천 미래문고에서 ‘작가와 함께하는 행BOOK학교’에 참여한 김지영 씨는 아들러의 문장을 인용하며 독서와 글쓰기가 삶에 점을 찍는 행위라고 했다. 그 점들을 기록하면 삶이 더 풍부해진단다. “삶에 쫓기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하루하루 나의 경험을 아주 작더라도 점으로 찍어서 남긴다면, 그것이 내 삶의 흔적이 아닐까 해요. 우리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이잖아요. 수많은 책을 억지로 읽기보다 나와 맞는 책을 읽고, 감동한 내용을 짧게라도 기록해보세요.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나도 몰랐던 내 삶의 줄거리를 보게 됩니다.”
전주시립효자도서관에서 ‘도서관 중장년 독서 살롱’에 참가한 곽선미 씨 역시 독서를 기반으로 한 모임이 중장년의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에 담긴 내용을 사색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핵심이라고. “40대가 되면 그간 살아온 경험에서 얻는 지식이 있어요. 이제는 책을 양으로 읽기보다 질적으로 읽을 때인 것 같아요. 중장년의 경험이 그 질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책만 읽으면 지루할 수 있으니 책과 관련된 장소에 가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추천하는 책도 읽어보면서 즐겁기도 하고 위안을 얻기도 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연극 무대에 올랐다가 홍상수 감독의 눈에 띄어 데뷔한 배우 조은숙. 일이 천직이라고 느끼는 그는 배우가 될 운명이었다.
“점점 연기가 치열하다고 느껴지고, 잘하고 싶어져요.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이 일을 정말 사랑하고 진심이구나를 느꼈어요.”
조은숙은 MBC ‘하늘의 인연’에서 가슴으로 낳은 딸을 품은 엄마 나정임 역을 연기하고 있다. 실제로도 그는 가슴으로 낳은 자식들이 많다.
“내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는 내가 낳은 또 다른 생명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이 끝나도 그 캐릭터는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현실에서는 세 딸의 엄마인 조은숙은 가족을 산소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다.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의미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
“개인적으로 ‘꽃길만 걸어요’라는 표현을 지양해요. 꽃길을 걷기 위해서는 누군가 돌을 치웠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돌을 치워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끊임없이 도전하는 배우 조은숙은 찰나의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과거를 후회해도 그게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To. 브라보 독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꼭 도전해보세요.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년 여러분, 늘 응원합니다!”
배우 조은숙(53)은 열정적인 사람이다. 어느 순간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배우가 된 그는 데뷔와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남들 다 겪는다는 무명 시절도 없었다. 그러나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도 늘 가슴속에 자리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진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찾고 있다.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를 지녀 동네에서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소녀 조은숙. 연예인을 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는데 정작 그는 네모 상자 텔레비전 속에 출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텔레비전을 막 흔든 적이 있어요. 그 안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싫었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중에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했는데, 다 재미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연기는 정말 할수록 재밌어요. 결국에는 배우가 될 운명이었을까요? 신기한 일이죠.”
텔레비전 일화만 봐도 조은숙은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다. 그 감수성을 글로 풀었고, 미모 칭찬만큼 글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그는 어느 날 지인이 연출한 연극을 보러 갔다가 극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다. 그게 이어져 몇 번 무대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홍상수 감독의 눈에 띄었다. 그 계기로 1996년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출연한 조은숙은 1996년 ‘제17회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 1997년 ‘제20회 황금촬영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배우를 꿈꾼 적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배우가 된 거죠. 무명 시절도 없었고요. 갑자기 얼굴이 알려진 셈인데,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낯설고 힘들었어요.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죠. 연기라는 게 얼마나 치열해요. 너무 긴박하게 촬영이 진행될 때는 덩달아 쫓기면서 연기하게 되는데, 집에 돌아가면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스스로한테 너무 화가 나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구나, 이 일을 정말 사랑하고 진심이구나를 느꼈습니다.”
‘하늘의 인연’으로 고민 해소
“지금까지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가령 불편한 옷을 입고 있으면 아무리 예뻐 보이려고 해도 어색하잖아요. 그렇다고 하면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고민이 많은 거죠.”
조은숙이 최근까지 품고 있던 고민이다. 연기 활동은 오래 했지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KBS 2TV ‘야망의 전설’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에서 비련의 여인 역할을 소화했고, KBS 2TV ‘내 딸 서영이’, ‘별이 되어 빛나리’ 등에서는 사연 있는 악녀로 분했다. MBC ‘세 친구’에서 코믹한 캐릭터를 맡은 것이 그나마 자신의 실제 성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저를 처음 보면 까칠하다거나 말수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조금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의외로 털털하다며 놀라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허당기가 많고 소녀 같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오죽하면 제 별명이 새우깡이랍니다. 계속 챙겨줘야 해서 손이 많이 간다는 의미예요.(웃음)”
이러한 고민에 한창 빠져 있을 때 MBC 일일 드라마 ‘하늘의 인연’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조은숙이 맡은 나정임은 모든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캐릭터인데, 산장 화재 사고로 기억을 잃고 어린아이처럼 된 상태다. 가끔씩 기억이 돌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는 복수의 핵심 열쇠로 활약할 것을 기대케 한다.
“제가 성격이 어리바리하다 보니 실제 나와 비슷하면서 재밌게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죠. 어딘가 모자란 바보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나정임을 연기하면서 제가 갖고 있던 고민이 조금은 해소됐죠. 그동안 KBS 드라마 위주로 출연해서 MBC 드라마 출연은 오랜만이었어요. 처음에는 낯을 가렸는데, 금세 제 실제 성격이 나오더라고요. 스태프분들이 ‘그냥 평상시대로 연기하면 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연기가 자연스럽게 잘 나오고, 재밌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모성애 넘치는 엄마
‘하늘의 인연’의 나정임이 이전 캐릭터들과 차별되는 지점은 또 있다. 바로 가슴으로 낳은 딸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조은숙은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한 누군가의 고모나 이모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기혼 캐릭터라고 해도 남편은 있어도 자녀는 없었다. 실제 세 딸의 엄마이기도 한 조은숙은 나정임의 모성애에 매우 공감하며 연기를 펼치고 있다.
“‘하늘의 인연’을 찍으면서 SNS로 좋은 반응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어요. 고아로 자란 분인데 저의 SNS에 ‘상처를 치유받았습니다’라고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너무 감사한 거죠. 지금도 그분과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또 결혼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고아나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많이 했어요. 당시 만났던 한 친구가 SNS로 연락을 해왔더라고요. 감동적이고 감사했어요. 선한 영향력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은데,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조은숙이 가슴으로 낳은 자식들은 또 있다. 아니, 매우 많다. 바로 그동안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들이다. 조은숙은 “내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는 내가 낳은 또 다른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이 끝나면 나는 떨어져 나가지만, 그 캐릭터는 살아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애정을 전했다.
그럼에도 친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2005년 광고기획사 대표인 박덕균 씨와 결혼한 조은숙은 슬하에 세 딸을 두고 있다. “가족은 산소 같은 존재다. 산소의 소중함을 평소에는 못 느끼지만 산소가 없으면 죽지 않나”라고 표현한 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세 딸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자랑은 물론 교육, 가치관 등에 대해 얘기했는데, 천생 엄마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원래 아이를 셋 낳고 싶었는데, 신기하게 그렇게 됐죠. 아이들이 다 다르게 생겼고, 매력도 다 달라요. 저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줄 거예요. 엄마를 따라 연예인을 하는 것도 찬성입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이타적인 사람이에요. 아이들한테도 항상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죠. 살면서 힘든 일을 겪을 수도 있고 고통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꽃길만 걸어요’라는 표현을 지양해요. 그 꽃길을 걷기 위해서는 누군가 돌을 치워놓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 아이들이 그 돌을 치워주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꿈 찾는 중년
조은숙은 2012년 ‘초콜릿 복근’을 공개해 ‘몸짱 스타’로 화제를 모았다. 셋째를 출산하고 3개월 만에 20kg을 감량하고 얻은 식스팩이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었는데 그는 여전히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매일 근력 위주 운동을 즐기면서 한 덕분이다.
“몸매 관리 때문에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정도의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준점도 없어요. 그냥 운동을 좋아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젊은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촬영할 때 주얼리가 많이 필요하잖아요. 담을 곳이 없었는데 마침 한 번도 안 쓴 쓰레기통이 있어서 거기에 주얼리를 담았죠. 그랬더니 그 쓰레기통이 보석함이 된 거에요. 반대로 보석함에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통이 되겠죠. 그때부터 살면서 나에게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까 많이 생각한 것 같아요.”
예체능에 능통한 조은숙은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배우는 늘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미국 액팅 스쿨에서 공부하기’라고 밝혔다.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고 남들한테 밀린다는 생각에 갈급했다. 연기에 관한 책이 나오면 바로 사서 읽으면서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연기가 그 안에 갇혀버린 때가 있었다”면서 “지금은 극복 중인 단계에 있는데, 미국에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워보고 싶다. 예전처럼 자유롭게 연기하던 때가 그립다”라고 설명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엄마는 꿈이 뭐야?’라고 묻는데 갑자기 울컥하더라고요. 사람들은 제 꿈이 배우라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배우가 인생의 끝일지, 또 다른 뭐가 될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저는 여전히 꿈이 뭔지 찾고 싶고, 그래서 계속 뭔가를 배우려는 것 같아요. 저의 또 다른 버킷리스트는 대형 오토바이 타기예요. 자격증은 취득했고, 오토바이를 구입해 타고 싶어요. 연기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싶기 때문인 것 같아요.”
조은숙은 주어진 삶을, 찰나의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시간 아까운 일이다. “지난 과거를 후회할 때가 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게 최선이고 최상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차피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배우는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우연히 하게 된 일이지만 즐기면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조은숙은 배우가 되어 지금처럼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것 같다.
“중년의 시기에 힘들고 외롭고 헛헛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벌써 이렇게 살아왔나 싶고, 지나간 세월이 너무 아쉬울 테니까요. 후회되는 순간도 많겠죠.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최선이고 최상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나간 날은 돌아오지 않아요.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꼭 도전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힘든 시간을 살아가는 중년 여러분, 늘 응원합니다!”
사람의 뇌에는 학습과 기억을 만들고 저장하는 세포들이 얽혀 있다. 뇌는 기억이 사는 집인 셈이다. 기억이 오래도록 뇌라는 집에 머물도록 지켜주고 싶은 의사와 과학자가 있다.
디지털 치매 치료제를 만든 이준영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오른쪽)와 노유헌 이모코그 공동대표(이하 대표, 왼쪽)의 이야기다.
가슴 뛰는 삶, 이모코그의 시작
‘내가 병원에서 의사로 사는 이유가 뭘까?’ 문득 이준영 교수는 생각했다.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기관지 천식은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거의 매일 자지 못하고 외래 진료를 보면서도 그가 놓지 않았던 건 뇌에 관한 연구였다. 치매와 기억력 연구다.
이 교수는 2002년 국내 최초로 치매 발병률을 연구해 데이터를 구축했다. 문맹 노인의 치매 검사 도구도 처음으로 만들었고, 그들을 위한 훈련 도구도 만들었다. 컴퓨터로 치매 평가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2004년에는 윤정혜 차의과대학 상담심리학 교수와 함께 치매를 막기 위한 프로그램을 연구했다. ‘메타 기억 교실’은 그렇게 탄생했다. 치매 센터를 중심으로 보급한 프로그램은 꽤 결과가 좋았다. 뇌의 기억력 주변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서 기억력이 좋아졌다. 특히 문맹 노인들은 머리에 기억을 띄우는 ‘작업 기억’ 기능이 떨어지는데, 프로그램을 통해 도움을 받는 걸 확인했다. 이렇게 유의미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이 교수는 여전히 대학병원 의사로 산다는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바닥으로 끝없이 내려가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이 시기에 이 교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저녁 남산을 올랐다. 보통은 20분이면 갈 곳을 천식때문에 1시간씩 오르면서. 그러자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이 보였다.
“어떻게 되더라도, 누가 뭐래도, 뇌를 고치는 의사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더라고요. 노인 정신학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어요. ‘잠자리에 누워 다음 날을 기다리는데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늙은 거다’라는 거예요. 저에게는 뇌를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이 가슴 뛰게 하더라고요.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쑥스러웠지만 ‘뇌를 고치는 의사로 살겠다’고 선언하기 위해 명함을 만들고 주변에 나눠주었다. 그때부터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SKT에서 스마트 스피커 몇백만 대를 보급했대요. 여기에 윤 교수님과 만든 ‘메타 기억 교실’, 그러니까 기억 훈련 프로그램을 넣고 싶다는 거예요. 처음으로 사람이 개입하지 않고 스마트 스피커만으로 시도한 것이었죠. 기억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이걸로 논문을 썼는데, 학교에서 창업을 권유하더라고요. 노유헌 대표에게 바로 함께하자고 했죠.”
진짜 환자를 위하는 삶
노유헌 대표는 중앙대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다. 이 교수로부터 창업하자는 전화를 받은 날, 노 대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이 교수를 향한 굳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 대표는 ‘과연 내가 하는 연구가 정말 환자들을 위해 쓰이는 걸까?’라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역시 당시를 “바닥을 찍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그런 와중에 여동생이 출산을 하다가 암을 발견했다.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며 만난 교수들이 동생의 치료를 도왔지만, 모든 예후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가 진정 환자를 위한 것인가 고민하던 찰나에 아픈 여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자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노 대표는 “모든 것이 다 끊어지는 시기였죠. 아마 다른 분이 제안했다면 거절했을 거예요. 이 교수님의 제안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이라면 믿고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라고요. 교수님은 지금까지 제가 도와달라고 할 때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거든요.”라고 회상했다.
노 대표와 이 교수의 인연은 2008~2009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원생이자 과학자를 꿈꾸었던 노유헌 대표는 러닝 메모리를 연구하고 싶었다. 학습과 기억의 작동 원리를 배우고자 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잘 몰랐던 분야로, 뇌세포의 구조나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일이었다. 학습과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분자적으로, 구조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컴퓨터공학부터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 전공자까지 모아서 ‘브레인’이라는 소모임 활동도 했다. 하지만 대학원 생활은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박학다식했던 노 대표는 해부학, 줄기세포, 건강기능식품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임상 연구를 할 때마다 그는 늘 이준영 교수를 떠올렸다.
“마치 어제 통화한 것처럼 반갑고 다정하게 늘 받아주셨어요. 교수님만큼 안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임상 시험 설계를 잘 해주시는 분이 없었어요. 덕분에 연구 성과들이 계속 잘 나올 수 있었죠. 교수님이 가끔 환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가족에 대해 말할 때 그 마음이 이해가 됐어요. 뇌를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는 교수님의 소명과 목표가 저를 이끌어가는 느낌이에요. 교수님이 ‘이 방향으로 가자’고 하면 그 방향이 정말 진심으로 환자와 가족을 위한 방향이라고 믿어요. 그 신뢰가 저의 소명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더라고요.”
노 대표는 2007년부터 10년 넘게 야학에서 노인들을 가르쳤다. 국비 지원으로 석·박사까지 마칠 수 있었던 그는 공짜로 배웠으니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야학 불빛을 보게 된 날 바로 찾아갔다. 노 대표는 그때의 경험이 이모코그를 꾸려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야학에 오는 노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결국 자신이 도움을 받은 셈이라 했다. 이준영 교수를 향한 노유헌 대표의 무한한 신뢰는 지난 15년 동안 쌓아온 두 사람의 우정에서 비롯됐다. 처음에는 이 교수를 향한 믿음으로 창업에 뛰어든 것이지만, 노 대표도 이모코그를 통해 ‘노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이루고 있다.
기억력 높이는 디지털 치료제
2021년 1월 19일 이준영 교수, 노유헌 대표, 윤정혜 교수는 디지털 치매 치료제를 만드는 회사 ‘이모코그’를 공동 창업했다. 연구 결과가 좋아 창업으로 이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이 기억 때문에 고통받는 어르신들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억을 검사하거나 훈련받는 과정을 간단하게 만들어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을 담은 창업이었다. 이 교수는 “저의 인지 훈련, 윤 교수의 심리, 노 대표의 생화학이 콤비를 이루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모코그’(Emocog)는 감정(Emotion)과 인지(Cognition)의 영어 앞 세 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감정과 인지를 평가하고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회사임을 보여주는 사명이다. 두 사람이 목표하는 바는 치매 진단과 인지 훈련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준영 교수는 현재 치매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만약 내가 치매인지 아닌지 고민된다고 생각해볼까요. 먼저 병원에 진료 예약을 해야 하는데, 기다리면서 몇 개월이 지납니다. 병원을 가면 의사를 만나고 기억력 테스트를 비롯해 다양한 검사를 합니다. 피 검사를 해서 나쁜 단백질이 쌓였는지도 보고요. 검사를 하면서 몇 개월이 또 흐릅니다. 만약 치매라는 결과가 나오면 약을 처방받는데요. 기억력이 좋아지는 건 아니고, 기억력이 나빠지는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있을 뿐입니다. 본인은 기억력이 점차 나빠지니까 뭐라도 하고 싶죠. 그런데 훈련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치매 센터를 가야 하는데, 가도 프로그램이 없는 곳도 있고요. 혹은 6개월이고 1년이고 대기하기도 합니다. 치매가 있다면 생활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는 가족이 짊어지고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물어볼 곳도 없어요. 병원에 물어보려면 또 몇 개월을 기다려 예약을 해야 하죠. 그래서 병원에 가서 물어보지 않고도 궁금한 점을 해결할 수 있도록 디지털로 구현하고 싶습니다. 치매 선별부터 진단, 훈련, 도움까지 전 과정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이모코그’는 치매 검사 도구, 디지털 치료제, 기억력·인지 케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치매 조기 선별 도구인 ‘코그스크린’(Cogscreen)은 3~5분 내로 셀프 검사가 가능하다. 집에서 스스로 인지 기능이 저하된 것인지 확인하는 방법이다. ‘코그노시스’(Cognosis)는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위해 사용하는 감별진단 도구다. 약 40분에 걸쳐 검사가 진행된다. 노유헌 대표가 코그노시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검사라고 강조했다.
“기존에 1시간 반 정도 하던 검사를 40분으로 줄였어요. 병원에서는 검사 후 보고서를 받기까지 한 달에서 여섯 달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요. 코그노시스는 디지털을 적용해 보고서도 자동으로 나옵니다. 병원에서 종이로 하는 검사를 직접 해본 적이 있는데요. 한 시간 넘게 집중해야 하고, 검사 방법도 어렵더라고요. 내가 치매일까 무서운 마당에 시험 보는 기분까지 들어요. 코그노시스는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직관적으로 하라는 걸 하다 보면 40분이 금방 흘러갑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더 쉽고 편안하게 치매 검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디지털 도구인 만큼 자동으로 검사 후 치매를 종류별로 원인에 따라 분류하는 기술도 특허화했습니다.”
이모코그 서비스의 핵심은 ‘단순화’다. 별도의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할 필요 없이 문자로 링크를 받아 웹으로 검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경도인지장애 개선을 위한 디지털 치료제인 ‘코그테라’(Cogthera)는 말로 하는 인지 훈련 프로그램이다. 병원에서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으면 처방을 받아 사용할 수 있다. 처음 코그테라를 만들었을 때 경도인지장애가 있는 노인 중 이 훈련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20%에 불과했다. 혼자 살면서 인지 저하가 있는 상태의 노인이어도 이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알아야 기억력 개선도 이어지는 것. 목소리 속도, 색깔, 글씨 크기 등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나온 코그테라는 경도인지장애 노인의 95%가 혼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준영 교수는 앞으로 기억 훈련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4년 말쯤이면 치매 항체 치료제가 나올 거예요. 치매 항체 치료를 하면 치매의 진행이 아주 느려질 겁니다. 경도인지장애인 상태로 보내는 기간이 엄청 길어지는 거죠. 이때 기억 훈련을 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코그스크린, 코그노시스, 코그테라는 개발을 마치고 임상 시험 단계에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도 기술력과 해외 상용화를 기대하며 초기 투자부터 시리즈A 투자까지 모두 참여했다. 코그테라는 임상 시험 승인 자체가 최초인 치매 디지털 치료제로, 국내에서는 2024년부터, 해외에서는 2026년부터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모코그는 경도인지장애 전 단계인 주관적인지저하가 있는 사람들도 기억력을 개선할 수 있는 케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윤정혜 교수와 함께 개발했던 ‘메타 기억 훈련’ 프로그램이다. 보험심사평가원에서 인지 중지 치료와 동일 기술임을 확인받았으며, 병원에서 치료 기술로 사용할 수 있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은퇴한 무용수들이 프로그램을 가르칠 수 있도록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이준영 교수가 발레 줄거리에 단어와 문장 수를 정해 외우도록 하는 특허를 낸 기억 훈련법이다. 이 프로그램을 마치면 ‘백조의 호수’ 무용 작품 하나를 기억하게 된다. 이 교수는 기회가 된다면 치매 안심 지역을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다. 인지와 기억에 관한 콘텐츠를 종합해 지역의 치매 발병률이 줄어드는 ‘치매 안심 구역’을 만드는 것. 이렇게 이준영 교수와 노유헌 대표는 이모코그를 통해 뇌를 고치는 의사와 과학자로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저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꿈을 좇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꿈이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보성 사람이 잘라 말한다. “보성군이야말로 남도 여행 1번지이지!” 볼 것도 즐길 것도 먹을 것도 기억에 남을 것도 숱하다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이야 캐묻지 않아도 알겠다. 주마간산식으로나마 예전에 보성 땅을 훑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풍경도 풍물도 역사도 문화도 개성이 있어 오래가는 여운을 남겨준 게 아닌가. 하오의 해변에 앉아 멍 때리며 바라본 바다에 일렁이던 붉은 윤슬을 잊을 수 없다. 찰나의 잔물결에 불과한 삶의 눈부신 슬픔을 환기시켜 죽비처럼 가슴을 쳤으니. 해서 내겐 그날의 윤슬이 보성 최고의 명장면으로 새겨졌지만, 여행자의 눈과 감성을 일깨우는 이 고장의 명소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기가 부족할 지경으로 즐비하다. 오늘은 건축문화유산을 답사할 참이다.
보성여관을 찾아간다. 벌교읍 다운타운 중심지에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그 시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형 여관이었다. 건물 7채에 방이 13개나 됐다. 요즘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이렇게 화려한 여관이 어떤 연유로 남도 끝자락 포구 벌교에 들어서게 됐을까?
당시 벌교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이었다. 전남의 4대 도시에 들었다고 하니 기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벌교의 번성은 일본인들의 거주와 왕래가 잦은 데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접점인 벌교의 지리적 이점을 영리하게 간파했다. 전남 내륙의 곡창에서 긁어모은 양곡을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했다. 즉 식민지 수탈기지의 한 전형이었다. 하루 20여 차례 화물선이 드나들 정도였으니 가혹한 정황이 훤히 비친다. 여하튼 벌교는 인파가 북적이는 도시였다. ‘본정통’이라 부른 신시가지가 형성됐다. 보성여관이 들어선 시대적 배경이 완연하다.
소설 ‘태백산맥’의 남도여관 그곳
보성여관은 건축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 2012년 복원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일본식 건물의 특징인가? 전체적으로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 전면을 가득 채운 유리문들과, 2층에 줄느런한 창문들이 외부의 햇빛과 거리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덕분에 오밀조밀해서 갑갑해 보일 수 있는 내부 구조에 생기가 돋는다. 주로 직선과 사각의 연쇄로 이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우리의 전통 건축과 다른 걸 알 만하다. 가늘고 날렵하게 깎아 세운 사각기둥, 널빤지로 마무리한 벽면과 천장, 다다미방, 중정에 조성한 작은 정원…. 곳곳에서 일본식 작풍이 느껴진다. 독특하기론 원래의 용도대로 지금도 여전히 여관과 찻집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관람만 할 수 있는 여느 근대 건축유산과 달리 보성여관은 실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정래는 성장기 한때를 벌교에서 살았다. 벌교의 변천사와 벌교 사람의 희로애락에 밝다. 그래 ‘태백산맥’에 벌교의 지형지물과 풍속과 인물을 끌어들여 리얼하게 묘사하곤 했는데, 보성여관은 그중 한 곳이다. 거장의 소설에 출연한 보성여관의 운세는 별안간 환하게 열려 드라마틱한 상승을 하기에 이르렀다. ‘글 감옥에 갇혀 살면서도 황홀하다’는 조정래의 치열한 문학정신까지 더듬어보게 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까. 보성여관만이 아니다. 벌교읍이 통째 ‘태백산맥’의 아우라에 힘입어 활기를 띠게 됐다. 답사객들이 밀려들면서였다. 조정래의 문학 장정과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이 건립되고, 덩달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도 마련되면서 문예적 공기마저 감도는 곳으로 변했다. 소설 한 편이,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이, 고즈넉했던 지방 소읍을 생동감 넘치는 문화지구로 바꿔놓은 셈이다.
참 아름다운 숲속의 정자, 열화정
이제 조선 고택을 만나기 위해 강골마을로 접어든다.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다. 강골마을은 원래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들이 펼쳐지고, 자연이 연주하는 원초적 선율에 다름 아닌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저 멀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강골마을은 여전히 수려하다.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그러니 눈 밝은 옛사람들의 정주가 필연이었겠지. 이곳엔 ‘이진래 고택’과 ‘이정래 고택’이 있다. ‘이준회 고택’도 있다. 보성 지역 사대부 가문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구현한 셋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을 뒷산 초록 풀숲엔 살포시 감춰진 듯 조붓한 길이 하나 있다. 섬려한 발길을 기다리는 오솔길인가? 바닥에 희고 미끈한 박석들이 깔려 있다. 이윽고 길 끝에서 열화정(悅話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숲속에 묻혀 사는 은자처럼 평온한 정자다. 아름다워 첫눈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작은 집이다. 협착한 산골짝에 걸맞은 크기라서 조화롭다. 조선 후기 문신 이진만이 지은 정자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정자다. 덤벙 주춧돌 위에 세운 둥근기둥, 누마루와 쪽마루와 툇마루, 기능성을 고려해 배치한 방들, 방과 아궁이를 연결하는 작은 쪽문 등 고수의 배합 솜씨가 능란하다.
숲은 초록 일색이다.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이 토하는 저 초록빛 아우성이라니. 실바람 한 뭉텅이에도 서슴없이 설레어 몸을 흔드는 꽃들, 잎사귀들. 식물들의 희열과 자유를 이해할 만하다. 열화정 주인은 이 청산에 묻혀 나무처럼 살고 싶었나? 속세의 탐욕과 광기를 밀어내며?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심정일 때 의지할 곳은 자연이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
‘막걸리 페스티벌’로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
보성은 예로부터 산·바다·호수를 일컫는 3경(三景)과 의향·예향·다향을 뜻하는 3보향(三寶鄕)의 고장이라 불렸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에게 보성의 문화에 관해 이모저모 얘기를 청해 들었다.
“먼저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에 관해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인데, 보성 땅 벌교가 마치 주먹으로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많은 고장인 양 엉뚱한 오해를 초래했다. 팩트는 그게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가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안규홍 의병장이 일본 순사를 한주먹으로 때려눕힌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보성은 항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펼친 고장이다. 보성군은 의병장 안규홍의 동상과 ‘황금주먹’ 조형물을 만들어 설치했다. 사실관계를 외부에 알려야 할 필요를 느껴서인 것 같다.
흔히 가치 있는 근대 건축유산들이 속절없이 사라지거나 망가졌다. 반면 보성여관은 원형 훼손 없이 잘 보존됐다. 그 배경이 있다면?
“보성 사람들은 일찍부터 보성여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개발 바람이 거셌던 새마을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관리에 나섬으로써 안전한 보존 조건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자체마다 문화원의 역할도 그만큼 커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화원의 존재감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 그렇다고 보나?
“아쉬운 대목이다. 문화원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단체지만 혁신에 소홀하다. 침체를 털어내고 이미지를 제고해야 하는데 잘 구현되지 않고 있다. 문화원은 지역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그릇을 채워야 하는데 여전히 구습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7년째 보성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그간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새롭게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내심 전국 최고의 문화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러자 성과가 나오더라. 다양한 문화 테마를 설정, 내실 있는 운영을 하자 주민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줬다. 보성문화원은 이미 주민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셈이다. 보성문화원을 통해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청년층의 동참도 적극적이다.”
보성군은 ‘서편제보성소리축제’로 2022년부터 2년 연속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을 받았다. 김 원장은 내년에 흥미로운 축제 하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전국의 모든 막걸리와 국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막걸리 페스티벌’을 열어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는 것.
“아무도 없다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고 세상이 무채색이 되었다가 누군가 날 알아주면, 단 한 명이라도, 갑자기 숨이 쉬어지고 세상이 색깔을 입게 돼. 그제야 살아볼까 하지.”
가정의 달을 맞아 5월호 주제를 일찌감치 ‘날 알아주는 한 사람의 힘’으로 잡고 여유를 부리던 필자는 마감이 점점 다가오면서 여러 목소리와 이야기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가 시댁 형님들과 나눈 대화방에서 글머리를 찾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큰형님!
‘하늘꽃’ 지고 ‘땅꽃’ 피는 계절
모진 서너 해, 역병 맞은 세상 꿋꿋하게 견디더니 긴 세월 품었던 설움 한꺼번에 폭발한 올봄. 산수유, 벚꽃이 천지사방 만발했습니다. 그동안 자기 순서 지키며 차례로 피던 봄꽃이 너나 할 것 없이 꽃망울 펑 펑 펑 터트렸으니까요. 긴 겨울 메마른 가지 애써 외면하면서 덩달아 하늘 볼 일 마다했는데, 마을마다 거리마다 천변(川邊) 따라 펼쳐진 꽃 대궐 덕분에 하늘 한껏 올려다보며 봄을 만끽했습니다. 필 때도 갑자기, 질 때도 후두둑 하더니 행여 아쉬울세라 영산홍, 철쭉, 민들레, 오랑캐꽃, 할미꽃까지 땅꽃이 뒤를 이었습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시샘이나 하듯 노랑, 보라, 진분홍, 연분홍 색색 향연을 펼치지 뭡니까. 독자분들이 이 글을 읽을 5월엔 아마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담쟁이덩굴, 등나무 잎겨드랑이에서 주렁주렁 앙증맞은 꽃을 피우겠지요.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을 연결해 가득 충전해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 아닐까요. 이름 모를 혹은 이름 없던 꽃에 일일이 이름 붙여 불러주면 내게 다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에 낳아 이름 지어 명자야, 경희야, 향순아, 옥임아, 종섭아 부르고 또 부르던 부모.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부모.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어버이날, 스물넷 어린 새댁이던 필자는 같이 살던 시부모님 몰래 친정에 다니러 갔습니다. ‘힘들다, 시어른과 같이 지내기 참 무섭다, 엄마 아버지 너무 보고 싶다’ 입 밖으로 하소연이 시작되려던 찰나 한 말씀 하셨습니다. “얼른 집에 가거라. 어른들 걱정하실라.”
아버지는 딸내미 옷차림새만으로도 허락 없이 왔다는 게 보이는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참 서운하고 서러웠는데 철이 조금 든 지금 생각해보니 시어른들 눈 밖에 날까 봐 애틋한 마음 숨기고 서둘러 시댁으로 보내셨다는 걸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내 편’ 응원이 필요할 때면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좋아하는 배추전 잔뜩 부쳐주시면 손으로 주욱 찢어 양념장 콕 찍어 맛나게 먹습니다. 사랑 한가득 충전해 배부르면 그제야 웃음 찾아 돌아오곤 합니다.
아름다운 신부, 두봉 주교
올해 93세를 맞은 두봉(杜峰, 본명 르네 뒤퐁) 주교는 1969년부터 1990년 정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지냈습니다.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그의 한국식 이름 두봉(杜峰)을 풀면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라는군요. 극빈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였던 한국에 파견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어려운 나라로 가는 것만큼 기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는 그는 마음 그릇 크기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꼬박 두 달 반 배를 타고 도착한 한국에서 스물여섯부터 구순이 넘은 지금까지 헌신하고 봉사한 두봉 주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당시 한국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 시절 한국 사람은 좋았다며, 그렇게 참담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참 떳떳하고 친절하고 인간다운 인간이랄까 한국 사람이 풍기는 인상이 좋았다고 회고합니다. 불우한 청소년과 농민을 돌보고 교육하고 인권을 신장하는 일에 한평생 헌신해온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기쁘고 떳떳한 삶의 원동력
한국으로 선교 온 32년간 신부가 된 아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온 아버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자식을 한국에 바치는 입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며 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두봉 주교 품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습니다.
“일어나서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나의 작은 르네야. 나는 어둡고 흔들리는 외로움 속에 서서 편지를 쓰고 있단다. 여긴 비가 너무 많고, 한국에는 비가 너무 적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늘에서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니.”
어머니도 떠난 텅 빈 집, 병상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들에게 삐뚤빼뚤 써 내려간 편지를 생전 아버지 대하듯 귀하게 여기는 두봉 주교. 특히 1986년 5월 9일 아흔이 되신 아버지가 부친 마지막 편지를 자주 꺼내봅니다. 보름에 한 번 프랑스로 답장을 보내던, 이제는 구십 훌쩍 넘긴 아들이 1986년 구십 아버지한테 시간여행하듯 답장을 합니다.
“아빠, 고마워요. 내가 아빠 엄마로부터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이 편지 30년 동안 계속 보내주신 것 고마워요. 난 아빠 엄마 너무 좋아. 하늘나라에서 기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 나도 언젠가 따라갈 거예요. 따라갈 때까지는 돌봐주시고, 그 다음에도 함께 기뻐할 거예요. 고마워요, 고마워.”
누군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두봉 주교는 생전이나 돌아가신 뒤나 아버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 힘이 70년 가까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나누고 헌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누군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느끼나요. 곁에 가족이 있어도 고립과 단절로 외로워하는 게 요즘 우리 모습입니다. 각자 방문 쾅 닫고 마음도 굳게 닫아걸고 말입니다. 열려고 있는 문인지, 닫으려고 있는 문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두드립니다. 문도 두드리고 맘도 두드려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통 트이고 휴, 살 만해지니까요.
진정 난 몰랐었네
다리가 불편한 아들에게 곁을 주지도,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은 엄마. 학교에서 직장에서 불구라고 차별받으며 서러움만 켜켜이 쌓여가던 아들. 남편마저 일찍 여읜 엄마는 아들이 약해질까 하는 노파심에 되레 강하게 키우려 했지만, 평생 아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아파합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에 등장하는 엄마와 아들 이야기입니다. 그런 엄마가 덜컥 치매에 걸리면서 가족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고통은 증폭됩니다. 치매로 기억을 잃은 엄마가 어느 날 요양원에서 사라집니다. 불편한 다리로 주변을 찾던 아들은 저만치 요양원 마당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치우는 엄마를 발견합니다. 자식 고생시키는 엄마에게 버럭 화가 났다가 불현듯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릅니다.
내 앞의 눈을 쓸어준 사람
가난했던 그때 달동네 꼭대기에 살던 모자는 한겨울 내리는 눈 때문에 엄청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등교할 때마다 누군가 깨끗하게 쓸어놓은 덕에 눈길을 넘어지지 않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랫집 아저씨가 눈 쓰는 모습을 본 아들은 ‘아, 저분이 그동안 눈을 쓸어주셨구나’ 합니다.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은 엄마가 습관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빗자루로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내가 비탈길에서 넘어질까 봐 엄마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눈을 쓸었던 거구나.’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엄마는 또 눈을 쓸러 나갔던 것입니다. 그제야 얼어붙은 아들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엄마를 향한 원망과 서러움과 미움이 한순간에 눈물로 녹아내립니다.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 돋도록
자녀의 경제적 독립과 출세, 아니 취업과 결혼이 힘겨운 최근엔 사람 노릇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비는 게 부모 심정입니다. 내 자식 걱정에만 우리가 안달할 때, 사회 한편에서는 부모 학대와 유기로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시설 보호를 마치고 해마다 2000~3000명씩 ‘자립준비청년’(예전에 ‘보호종료아동’으로 불렸던)이란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보육원 졸업할 때 지급되는 정착금(1000만 원)과 자립수당(5년간 월 40만 원)이 조금씩 올라서 경제적으로 힘이 된다지만,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 불안과 무력감이 삶을 포기하도록 몰고 가는 경우도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슷하게 힘든 상황에서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한 청년의 경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고 합니다. 소통하고 의논하고 연락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고 없고가 생사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사례가 참 많다네요. 보육원 원장님이나, 시설 프로그램에서 만난 멘토나, 그 누구든 고민을 들어주고 모르는 것 물어보면 가르쳐줄 수 있는 어른 한 명만 있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나를 지켜줘야 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도록 저부터 움직여야겠습니다.
내가 당신 받침이 될게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귀 기울이고, 가슴으로 안아줄 때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갓난아기 업을 때 포대기 두르고 아기 엉덩이를 손으로 받쳐주면 한결 가볍습니다. 책이며 서류며 물건이며 온갖 것 가득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멜 때도 한 손으로 아래를 살짝만 받쳐줘도 아프던 어깨가 훨씬 가볍습니다. 공책에 교과서에 연필로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면 뒷장에 우툴두툴 글자가 튀어나오고 물듭니다. 그럴 때 플라스틱 책받침 하나 끼우면 뒤탈이 없어 속상하지 않습니다. 살짝만 받쳐주어도 우리 짐은 가벼워지고 삶의 무게는 덜어지고 아팠던 어깨는 견딜 만해집니다. 서로 받쳐주며 손 잡고 맘 잡고 살아볼까요?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택시라는 공간은 참 묘하다. 내 앞에 멈춰 선 택시에 오르는 순간 택시 운전사와 잠시 잠깐이나마 인연의 호흡을 함께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화를 나누든 안 나누든 서로의 에너지가 엉기고, 그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일부러 생각에 빠져들거나 짐짓 딴청을 하기도 하지만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내내 운전사의 존재가 의식되어 도무지 편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쪽에서 말을 걸어주면 편할 것 같지만 그 말이라는 것이 도통 내게는 관심도 없는 주제이기 일쑤라 여전히 고역이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게 뱃속 편하다. 어지간해서는 내가 택시를 타지 않는 이유다. 몸 좀 편하자고 마음은 좌불안석이니. 비싼 돈까지 내고서 말이다.
유난한 예민함이라고? 그쯤되면 병이라고? 택시를 모는 사람은 그게 직업인지라 승객에 대해 시시콜콜 관심을 갖진 않을 거라고? 승객의 인상이 아주 험상궂어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 같은 불안감이나 늦은 밤 취객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는 한. 물론 섹시하고 야한 여성이 탔을 때 슬쩍 성적 호기심이 동하기도 할 테지만. 여하튼 그런 좀 별난 경우가 아니고서야 승객에게 무슨 그리 관심이 있겠냐고? 혹 말을 시키더라도 대꾸를 안 하면 그쪽에서도 알아서 입을 다물 텐데 뭐가 걱정이냐고? 이런 나를 두고 친구들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운전사 거슬려 택시 못 탄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며 놀린다.
1년 만에 탄 택시, 인연이 기가 막혀
그날도 그랬다. 평소처럼 그날 또한 택시를 탈 불가피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벚꽃에 취해 발을 접지르기 전까지는. 봄바람 안온한 지난해 4월 중순,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었다. 딱 1년 전 일이다. 어디 멀리 따로 꽃 구경을 갈 필요는 없었다. 온 천지가 벚꽃이었으니까. 집 앞, 동네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만족스러웠으니. 땅에 시선 둘 짬 없이 고개를 온통 쳐들고 다니는 시기가 1년 중 꽃철과 단풍철이 아닌가.
아뿔사! 동네 벚꽃길에 이런 턱이 있었나. 도저히 ‘턱이 있을 턱이 없는 곳’에서 발목을 삐끗했다. 발등이 커브를 그리듯 휘어지며 시큰한 느낌과 동시에 눈앞이 아득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지와 겨우 3cm 정도 차이 나는, 보통 계단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단차를 가진 곳에서 발목을 접지른 것이다. 어이없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거짓말처럼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으니. 그 위치 그대로 퍼질러 앉아 발목만 하릴없이 주물러야 할 상황인데, 이번에도 또 거짓말처럼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어디 다치셨어요? 병원이나 댁에 모셔다드릴까요?”
조수석 창문을 내리면서 나이가 꽤나 들어 보이는 운전기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요즘 택시에는 고령 운전자가 많다더니.
‘이게 무슨 경우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나? 지나가는 택시가 먼저 나서다니….’
운신을 전혀 못 하는 처지에서 반갑기도 했지만 반사적으로 긴장과 의심이 올라왔다. 평소 택시 타기 싫어하는 이유와는 차원이 다른. 아무리 60줄에 든 여자라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다친 자리 1m 전쯤에서 승객을 내려주고 출발하려던 찰나 주저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고, 혹시나 운이 좋아 승객일 수 있을까 하여 친절을 겸해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니, 특별히 수상한 상황도 아니었다.
“네… 그럼, 요 앞 정형외과로 저를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제가 발목을 다쳐 꼼짝을 할 수가 없네요. 짧은 거리지만 부탁드립니다.”
실로 1년 만에 타는 택시다. 봄볕 화사한 정오 무렵이었고, 병원은 코앞이다. 무슨 흉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차창 밖으로 말을 붙일 때 본 운전사의 인상도 온화하고 곱상하다. 말투도 배운 사람 분위기다. 얼굴 보고 마음까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안심이 된다.
사별 아내 못 잊어 잡은 운전대
그 사이 발목 아래부터 발등이 자색고구마 색을 띠면서 소복하게 부어올랐다. 통증보다 겉의 상태가 더 겁이 났다. 기사는 나를 배려해 병원 입구에 바투 택시를 세웠지만 나는 도무지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돌아보던 기사가 지체 없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끌어올리더니 운전석에서 내려 돌아와 나를 부축했다. 황공스럽도록 고마웠다. 병원 로비 원무과 앞 빈자리에 나를 앉혀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황급히 자리를 뜨나 싶더니 5분쯤 지나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마도 안전한 곳에 주차를 해놓고 급히 다시 돌아온 듯싶었다.
그가 없었다면 접수도, 진료도, 처치 후 다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반나절을 내 옆에 있어 주었다. 나는 돈벌이를공친 그의 시간을 걱정하면서도,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옆에 붙어 있는 어색함과 황당함에 어쩌지 못하면서도, 과분한 신세를 졌다며 이제 그만 가보시라고 하지는 못했다. 병원에서도 그를 나의 보호자로 알고는 그에게 이런저런 지시와 주의사항을 전하고 있었으니.
그와 나의 만남은 그런 기연으로 시작되었다.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그가 택시를 몬 경력이라야 1년 남짓. 4년 전 별안간 사별한 아내를 이렇게도 못 잊고 저렇게도 못 잊어서 마음 대신 운전대를 잡았단다. 택시를 몰면 싫어도 이리저리 쏘다니게 되고, 손님을 태우고 긴장하는 사이 피곤으로 지친 몸 그대로 쓰러져 자다 보면 아내 없는 일상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그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꽤 규모가 큰 건축회사의 임원을 지내다 정년 퇴임을 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이제야 오붓하게 부부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으려니 했는데, 퇴임한 지 3년 만에 아내가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는 허망하게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직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여자였다며, 그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본인도 슬하의 1남 1녀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며, 내 앞에서도 서슴없이 아내를 그리워하고 아내에게 미안해했다. 워낙 규모 있게 살림을 꾸려온 사람이라 노후자금도 부족하지 않게 비축되어 있었고, ‘삼식이’ 대열은 완전히 남의 일일 뿐 부부 금슬도 유달리 좋았다고.
이제 우리 함께 달릴까요?
“그러면 뭐하나요? 결정적으로 건강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는 걸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살아서 병이 났지 싶어요. 자기 주장은 고사하고 너무나 헌신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세월이 4년 남짓 흘렀지만 아직도 아내의 빈자리가 커서 하루 일을 마쳐도 집에 들어가기 두렵곤 했지요. 그때 마침 발을 다친 당신이 눈에 띄었고 내친김에 병원까지 동행했던 거지요. 당신은 먼저 간 아내와 많이 닮았어요. 죽은 사람과 비교되니 기분이 별로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단아한 분위기에 조신한 행동거지, 나이까지 비슷하니 내게는 마치 아내가 환생한 것만 같네요.”
몇 차례 더 나를 태워 병원을 오가며 만난 지 석 달쯤 되었을 무렵, 이런 말을 하면서 겸연쩍게 그러나 만족스레 웃는 그를 보며 나도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 말이 나에 대한 고백이자 청혼처럼 들렸다면 괜히 오버하는 것일까.
“아내 연배의 여성을 태우거나 거리에서 지나치듯 볼 때면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금 올라와 마음이 힘들어지곤 했더랬지요. 그런 내게 신이 선물을 주신 거지요. 그날 아내와 닮은 당신을 만나게 해주셨으니까요. 몇 년이나 끙끙대며 자기를 잊지 못하는 내가 딱하고 안쓰러워서 아내가 당신을 보내줬는지도 모르죠.”
이쯤 되면 오버가 아니지 않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첫 만남 이후 한결같이 내 곁을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접지른 발은 이미 다 나았건만 여전히 내 발이 되어주고 있으니. 영업용 택시에서 자가용 승용차로 갈아탔다는 차이만 있을 뿐.
참, 그러고 보니 내 이야기를 전혀 안 했네. ‘택시를 기피하는 여자’라는 것 말고는. 나도 그와 같은 사별자다. 나는 50세에 남편을 간암으로 보냈다. 그러곤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얼추 십 몇 년을 혼자 지냈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남기고 간 돈이 좀 있어서 생활이 그다지 쪼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평생 살림만 한 터라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대부분 집에서 책을 보며 소일한다. 이따금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가 있지만, 내가 택시를 매개로 한 ‘황혼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친구들은 ‘택시 대박’이라는 둥, ‘택시 내숭’이라는 둥 나를 놀린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뒤늦게 찾아온 나의 사랑이 좋아 보인다는 뜻이겠지.
작가에게 사진은 말 없는 시(詩)다. 아승기겁(阿僧祇劫)에서 찰나지간(刹那之間)을 포착하는 빛의 광시곡이다. 사진작가 유병용이 오는 5월 10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법련사(송광사 분원) 불일미술관에서 초대전 ‘절로 절로 저절로’를 갖고 사진집을 발행한다.
50여 년 동안 장미, 들꽃, 인물, 도시 풍경 등에 집중했던 유병용 작가는 지난 2017년 ‘사진, 말 없는 시’ 전시 후 6년 만에 초대전을 갖는다. ‘절로 절로 저절로’는 작가가 그동안 찾아갔던 200여 곳의 절 가운데 가슴에 갈무리해 온 절 풍경 100여 점을 통해 절에 머물던 자신의 시간을 들려준다.
유병용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젖은 땅을 열과 정성으로 말리던 사람들, 처연하게 들리던 처마 끝 풍경 소리에 담긴 불자들의 꿈, 결 좋은 바람의 속삭임을 위안의 귓속말로 절절히 풀어놓았다. 이런저런 일로 찾았던 절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감히 만나 뵐 수 없는 큰스님께서 내려 주시는 차를 마시며 귀한 말씀을 듣기도 했고, 속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스님들의 일상을 편하게 접하기도 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은 사진이기 때문일까. 그의 사진을 마주하면 산사에 발을 딛고 있는 듯 편하다.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석불사 주지 경륜 스님은 “몇 년 전 노스님께서 열반하시어 매주 수요일 청도 운문사, 담양 부용암, 안동 봉서사, 당진 안국사, 세종 광덕사 등 이 절 저 절 다니며 칠칠이를 지낼 때 그 큰 카메라를 매시고 모든 과정을 찍으시고 그날그날로 정리하시더니 49재를 지낸 후 두툼한 기록 사진집을 봉정해 주셨다. 이번 전시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낸 한 장의 사진이 시인이 쓴 시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가수가 부르는 노래보다 더 심금을 울려주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고 축하했다.
시인 김삼환은 ‘절로 절로 저절로’ 사진전은 “절의 일상, 풍경, 도구, 기원, 생사, 계절 등 절에 관한 모든 것을 한자리에 모았다. 직접 발품을 팔아야만 하는 노력과 예술가적 앵글의 혼이 잘 혼융된 장기간의 결과물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언어는 보이는 대상 뒤에 숨는다. 각자 적당한 위치에서 자신의 눈으로 작품이 가르키는 대상을 바라보면 된다”고 평했다.
작가는 현재 마포 한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300여 년 고찰 석불사 종무실장이며 석불사
주지 경륜 스님의 유발 상좌로 ‘웅산’(雄山)이라는 수계명도 받았다. 1988년 1월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0년간 근무한 은행 은퇴 후에도 사진가로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유병용 작가는 오는 5월 10일(수) 오후 6시 개막식 겸 사진집 출판기념회를 하고, 5월 13일(토) 오후 3시에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