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일, 서울시 낭송협회 '시음'의 창립총회가 양평의 황순원문학관에서 열렸다. , 등 그의 소설을 읽고 좋아하게 된 소설가 황순원은 평생 잡문을 쓰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순수 소설만 썼다고 한다. 시음의 창립총회가 필자가 존경하는 그분의 문학관에서 열리는 것은 아주 뜻깊은 일이었다.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기에 장소를 알았을 때 무척 기뻤다.
단편소설 는 이제 막 이성에 눈떠가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애틋한 첫사랑을 아름답고도 서정적으로 잘 그려냈다. 야학 시절 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은 열여덟 살 소년인 조 선생님이었고, 그 선생님께 마음을 빼앗겼던 필자는 열일곱 살 소녀였다. 극과 현실을 구별 못해 비극이 벌어지는 오페라는 네온 카발로의 베리스모 오페라 다. 의 주인공 소년은 조 선생님으로, 소녀는 필자로 설정해놓고 이 소설을 배웠으니 그 시간이 필자에게 얼마나 각별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으련다.
조 선생님은 당시 필자 눈에는 가장 멋진 국어 선생님이었다. 영화배우같이 잘생긴데다가 목소리까지 좋았다. 그 목소리로 수업을 하면 필자 가슴은 마냥 두근거렸다. 이렇게 멋진 조 선생님에게 필자가 좋아하는 소설, 를 배운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필자에게 는 마치 10대의 상징 같은 소설이었다.
소설가 김동리, 황순원은 우리 문학계의 거목이다. 황순원은 평생 선비 같은 올곧음으로,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살다 가셨다. 그분의 아들인 황동규는 서울대 교수이자 시인으로 대를 이어 독자들에게 좋은 작품을 선물했다. 그의 대표 시 '즐거운 편지'는 못지않게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친일 행적이 있는 김동리의 아들 김평우 변호사는 이번 촛불집회 때 그의 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무지 지성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개념의 막말로 국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가 변호사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막말이었다. 그가 처음에 언론을 시끄럽게 했을 때 ‘웬 듣보잡이 떠들고 있나?’ 했다. 그리고 필자는 세 번이나 경악했다. 첫 번째는 우리 문학계의 거목. 김동리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두 번째는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늙으신 자신의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살뜰히 보살펴드린 소설가 서영은에게 한 막말 때문이다. 김평우는 김동리의 사망 후 재산분배 과정에서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서영은을 무일푼으로 쫓아내면서 “너는 내 아버지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요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왜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을 좋아할까? 그것은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뭔가 사회를 위해 한몫 해낼 거라는 희망 같은 것 말이다.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약자들을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 아무리 대단한 하버드대의 교육과 졸업장도 실제로 인류를 위해 훌륭한 일에 쓰이지 못한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나이지리아의 전쟁고아 출신으로 많은 어려움 끝에 하버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 한 여성이 하버드대의 졸업식에서 '약자를 보호하라'는 제목으로 한 말이다.
양질의 서울대 교육이 약자를 괴롭히는 데 쓰이면, 삶의 도구인 지식이 악의 칼날이 되면 그것은 아니 배우니만 못하다. 더구나 이젠 70이 넘은 사람이 어쩌자고 철학부재의 삶을 살아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지 참으로 딱하고 또 딱해 보였다.
"인생은 짧고 오명은 길다" 찰나의 삶을 사는 이승에서의 잘못된 판단으로 후세에 길이길이 오명으로 남게 됨을 그는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아들의 잘못된 행동거지로 인해 조용히 잠들어 있던, 아버지 김동리의 잘못된 과거 행적까지 들춰졌다. 급기야는 국민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길에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할 말이 있다.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사고는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평소에 충분히 잔병치레를 했다고 봐주는 일은 없다. 부양하는 가족이 있어도 피해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것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강서 나누리병원에서 만난 이미정(李美正·54)씨도 그랬다. 연이어 시험에 들듯 시련이 다가왔지만, 그저 묵묵히 이겨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배정식(裵政植·41) 병원장을 만난 것은 자신과 주변 것들에 대해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삶에 준 선물 같은 보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그저 즐거운 일뿐이었다. 악몽 같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전조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사우나의 열기가 아직 몸에 미열처럼 남아 있었지만, 바람을 시원하게 느끼게 해주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옆자리 동네 언니와의 대화 주제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즐거웠다. 늘 다니던 길 위에서 달리는 차들이 주는 공포도 없었다.
그때였다. 승용차 한 대가 벼락같이 나타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차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속도를 줄일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속도는 왜 줄이지 않는 건지,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는 건지, 찰나에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 의문들이 머리를 떠나기도 전에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사이렌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구급차 안이었다.
음주 차량이 빼앗아가 버린 삶
이미정씨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유난히 미간을 찌푸렸다.
“2010년 사고가 났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가해 차량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했다더라고요. 제대로 감속할 생각도 못하고 냅다 들이받았나 봐요. 119 구조대원들이 저를 차에서 꺼내기 위해서 절단 장비까지 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결국 그날의 사고는 이미정씨의 몸에 생채기를 냈다. 치아가 4개나 부러졌고, 늑골도 부러져 꽤 오랫동안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정말 치명적인 상처는 다른 곳에 났다. 바로 허리였다.
“허리 디스크 파열이었어요. 디스크 수핵이 터져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대학병원에서 수술 후 퇴원하기까지 3주나 걸렸어요.”
사고 후 몇 년이 지나면서 허리는 조금씩 나아지는 듯싶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동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됐지만, 성급한 그녀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반찬장사를 하면서 보낸 십수 년의 세월은 그녀를 뭐든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성격이 이번에는 화를 불렀다.
“건강에 좋다고 등산을 다녔어요. 허리 아픈 사람한테는 쥐약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죠. 허리가 아파오길래 더 열심히 운동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대였어요.”
상태는 수술 직후보다 더 좋지 않았다. 집에서 20분 거리인 시장까지 한 번에 걸어갈 수가 없었다. 10분만 걸으면 온몸의 맥이 풀리면서 주저앉았다. 밤이 되면 다리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저려왔다. 그 고통의 날들 속에서 배정식 병원장을 만났다.
‘척추수술 후 통증 증후군’으로 다시 병원에
배정식 병원장은 이미정씨를 쉽지 않은 환자로 기억했다.
“임상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전후 사정이 좀 복잡했어요. 일단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오신 상태였고, 또 그 수술이 잘못된 수술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미정씨의 경우는 두 가지 증상이 겹친 상태였어요. 척추에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인 척추관이 좁아져서 생기는 척추관협착증 증세도 있었고, 척추수술을 한 환자에게서 간혹 나타나는 척추수술 후 통증 증후군 증상도 있었죠.”
증후군은 치료 과정에서 섬세한 주의가 필요하다. 트라우마라는 심리적 불안이 병의 치료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만성통증 환자는 우울증을 동반하기도 해서 배 원장은 신체적인 치료도 중요하지만 환자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환자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가가 치료에 많은 영향을 끼쳐요. 환자의 표정을 보면 치료가 어떻게 진행될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데요, 경험상 환자가 시술에 대한 믿음이 높으면 수술이나 예후가 좋은 경우가 많아요. 의심하거나 불안해하면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척추관협착증은 시니어들이 노화 과정에서 자주 겪는 병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척추가 노화되면서 척추 뼈마디가 굵어지고 뼈와 뼈 사이에 있는 인대가 두꺼워지는데 이 과정에서 신경이 압박당하기 때문이다.
허리 디스크와 구분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허리를 굽혀보는 것이다.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았을 때 통증이 사라지면 척추관협착증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허리보다 허벅지나 엉치 같은 부위에 더 큰 통증이 있다.
“허리를 많이 쓰는 직업을 가진 분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어요. 농부나 주부에게서도 이런 증상이 나타나곤 하죠. 보통은 약물을 이용한 주사 요법으로 3개월 정도 치료해보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심한 경우 대소변 기능 장애가 오기도 해요. 하지만 실제로 수술을 하는 경우는 1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허리 질환 예방은 근육 강화가 최고
그렇다면 건강한 허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배 원장은 허리 근력을 강화할 수 있는 운동을 하라고 권고한다.
“척추 근육이 단단해지면 뼈와 신경, 인대에 주어지는 스트레스가 분산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허리 디스크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을 통해 근육을 강화하면 허리 질환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배 원장이 추천한 운동은 30분 정도 속보로 걷는 것이다. 시간을 30분 정도로 제한한 것은 너무 많이 걷게 되면 오히려 척추관협착증을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일 차량으로 이동하는 일상이라면 두 정거장 정도 미리 내려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동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배 원장의 설명이다.
또 다른 추천 운동은 수영이나 아쿠아로빅 같은 수중 운동. 물속에서 운동을 하면 척추나 무릎 관절에 중력으로 인한 부하가 적게 걸리기 때문에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바닥 생활은 허리에 안 좋다.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의 반복이나 바닥에 허리를 굽히고 앉는 자세, 무거운 물건을 드는 자세는 허리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배 원장은 설명한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는 가급적 물건과 몸을 밀착시켜 들고, 정면을 바라보면서 들어야 허리 부상을 예방할 수 있어요. 쉴 때는 가급적 등받이 있는 의자를 이용하시고요. 재채기할 때도 복압으로 인해 디스크 파열이 올 수 있으니 체중 분산 등 주의가 필요해요.”
허리수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정씨도 약물 요법으로 치료를 시작했지만, 예후가 그리 좋지 않았다. 결국 배 원장은 수술을 결정했고, 이씨는 수술 결정에 동의하는 데 큰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사고를 당하고 처음 수술대에 누웠을 때가 무척 겁이 났죠. 허리수술은 위험하다는데 큰 사고로 수술까지 하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 수술은 담담하더라고요. 수술을 결정하는 것도, 수술대에 누워서도 마음이 편안했어요. 원장님을 믿고 모든 걸 맡기자고 생각했어요.”
외과의사 입장에선 의사를 믿고 몸을 맡겨주는 환자가 고맙다. 허리수술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와 소문들이 쌓이면서,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환자들이 적지 않은 탓이다. 배 원장도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실제로 무조건 수술을 거절하는 환자도 있어요. 하반신에 마비가 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데 말이죠. 치료는 모든 방법을 다 고려해야 해요. 약물이나 비수술적 처치도 당연히 고려해야 하고, 만약 수술이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치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검토하고, 환자 상태에 맞는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치료법만 고집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미정씨가 병을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데는 딸의 존재가 컸다. 사실 이씨가 큰 병을 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의 표현대로 “웬만한 병원은 다 가봤다”고 할 정도로 이런저런 질환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2007년에는 갑상선암 수술을 했고, 그다음 해에는 난소에 문제가 생겨 절제를 해야 했어요. C형 간염 합병증으로 간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올라간 적도 있고요. 그때마다 딸아이가 제 간병인 역할을 했는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어요. 당연히 허리 때문에 입원했을 때도 큰 도움을 받았죠. 그런 경험 때문인지 지금은 사회복지 쪽으로 진로도 변경했어요. 간병이요? 전문 간병인보다 나아요(웃음).”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해준 신앙의 힘
이어지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를 구원한 존재는 또 있다. 바로 신앙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씨는 최근 총회신학대학원 과정을 수강 중에 있다.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이 꿈이다. 그녀는 힘들 때마다 예수님의 고통과 희생을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 그분에게 서운한 것이 있어 잠시 교회를 멀리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종이 되어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여러 가지 병이 겹치면서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는데,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죠. 어릴 때 제 꿈 중 하나는 힘든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 같은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지금도 그 꿈은 유효해요. 건강을 되찾으면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는,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수술 후 재활을 통해 다시 정상적인 삶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 몸을 써야 하는 직업인데다, 급한 성격이 허리에 가끔씩 무리를 주는 탓이다.
“조심해야 하는 건 아는데 괜찮다 싶어 최근 몸을 좀 움직였더니 다시 상태가 나빠지려고 해요. 이전보다 몸이 많이 둔해진 걸 알면서도 자꾸 마음이 앞서나 봐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에도 이젠 익숙해져야겠어요. 요즘엔 다시 조심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스트레칭도 자주 하고, 걷는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허리를 관리하고 있어요. 또 병원 신세 져서 딸아이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요(웃음).”
돈 아미엘 감독 작품으로, 주연에 아론 에크하트(죠시 역), 힐러리 스웽크(레베카 소령 역)가 나온다. 필자는 과학은 잘 모르지만, 이 영화는 과학을 쉽게 이해시키고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만든다.
이 영화는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도움도 주지만,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 현상까지 바꿀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냉전 시대에 소련이 인공지진을 일으켜 상대국을 공격하는 무기 체계를 갖추자 미국도 이에 대응하여 ‘데스티니’라는 인공지진 체계를 갖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구를 구성하는 핵(The Core)에 이상이 발생한다. 내핵을 둘러 싼 외핵이 액체 형태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자기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사선도 막고 지구 자기의 균형을 맞춰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스티니 때문에 외핵의 흐름이 정지되고 지구곳곳에서 자기장 이상을 일으킨다. 우주선이 에러로 엉뚱한 궤도를 타게 되고 로마의 콜롯세움 등 세계 도시가 파괴된다. 그대로 두면 과도한 정전기 발생으로 모든 전자제품이 파괴되고 건물 등 도시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방사선을 막아주지 못하니 생물체도 3개월 안에 모두 죽게 된다.
NASA는 비밀리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한 팀을 구성하고 탐사선으로 지구 내부로 들어가 멈춰버린 외핵을 다시 회전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인간은 우주로 진출한 과학의 진보를 가져 왔으나 우주는 빈 공간이어서 가능했지, 지구의 핵까지의 도달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럴싸한 과학적 이론으로 지구 밖뿐 아니라 지구 내부로 갈 수 있는 탐사선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탐사선은 지구 핵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해저 면을 택한다. 그리고 맹렬하게 중심을 향해 돌진한다. 우리 상상은 지구는 단단하게 다져져 있을 것 같지만, 수정 동굴 층, 다이아몬드 동굴, 용암 층 등 공간이나 액체 상태인 구간도 있다. 중간에 탐사선이 고장 나거나 걸려 있을 때 탐사선 밖으로 나가서 수리해야 하는데 수천도의 고열이므로 액화 질소를 분사하며 열을 이겨 낸다는 발상도 기발하다.
지구 외핵을 회전시키기 위해 핵폭탄을 탑재했지만, 외핵의 밀도를 다시 계산해 보니 가지고 간 핵폭탄으로는 부족하다는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다시 파장의 원리를 이용하여 파장이 이어지는 곳에 정확하게 연쇄적으로 다시 파장을 일으키면 파장이 이어진다는 과학적 이론이 등장한다.
NASA본부에서는 탐사선의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간주해서 최종적으로 데스티니를 가동할 준비를 한다. 그러면 탐사선 사람들은 돌아 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이다. 지휘본부의 지휘하는 사람의 친딸이 탐사선의 조종사이다. 그러나 탐사선에서는 탁월한 전문가들이 탑승하고 있으므로 파장의 원리를 이용하여 외핵의 회전에 성공한다. 임무는 완수했으나 탐사선은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다시 돌아갈 방법이 없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짜낸 결과 핵의 열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다는 과학의 힘을 이용하여 일단 멘틀 층을 지나 해저 면까지 나간다. 그런 해저에 나오자 열이 없어 탐사선은 에너지를 잃어 다시 연락 불통 상태에 빠진다. 그대로 아무도 모른 채 죽어갈 찰나에 남은 희미한 주파수를 분사 시킨 것이 해군 수색대의 음파 탐지기에 잡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이 영화에서도 이름 없는 영웅들에 초점을 맞춘다. 탐사선의 탐사원은 원래 6명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원해서 희생양이 되어 임무를 완성한다. 살아남은 두 사람, 조쉬와 레베카가 영웅이 되었지만, 이름 없는 영웅들도 잊지 말자며 대대적인 축하를 해준다
“고등학교를 남보다 두 해 늦게, 고향 김천에 있는 농고(農高)로 들어갔지요. 그 무렵 구루병을 앓고 있는 사촌 누이동생과 문학을 교류하며 지냈는데, 그 누이가 이듬해 시름시름 앓다 사망했어요. 그 시절의 누이 모습이 잊히지 않아 ‘소녀’의 그림을 그려왔지요.”
창문이 열린 화실 밖, 밤나무에서 매미가 울었다. 박항률(朴沆律, 1950~ ) 화가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읊조리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화상 같은 소년의 모습들은 누이의 눈동자에 비쳤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그렸고요.”
화실 바닥에는 최근에 완성했다는 이 있었다. 1995년 전시 때 그의 그림을 눈여겨봐왔던 잔잔한 감동이 드디어 이태 뒤 그의 청담동 화실까지 찾게 한 것이다. 인물화만 그리지 말고 풍경화도 그려달라 부탁하려다 그만두었다. 동갑의 우리는 40대 후반의 가장으로서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뿐만 아니라 시대의 서글픈 사회상을 공유하고 있어서 서너 시간 더 대화할 수 있었다. 그땐 머리 위에 삼층탑을 이고 있는 과 물고기를 안고 있는 의 두 그림을 갖고 있던 터라 한결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탁자 위에서 소리 없이 타오르는 침향(沈香)의 그윽한 향내가 화실을 맴돌다 옅은 보라의 연기 띠를 이루며 창가로 흩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같은 미술학도인 아내와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낳고 전업작가를 선언하며 그림그리기에 용맹 정진할 무렵이었다. 그가 건네준 자작 시집 과 드로잉 한 점을 받고 돌아선 첫 만남은 한 화가의 진솔한 심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단발의 소녀, 까까머리의 소년, 한 일사(逸士)의 인물 그림이지만 주변의 치밀한 장치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새벽의 안개, 고요히 타오르는 등잔불 등은 보는 이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禪)과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어떨 때는 신화(神話)와 현실이 혼재되면서 끝없는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후 두 번의 화실 방문과 전시회장에서 여러 번의 만남이 이어졌다. 그의 화풍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침묵의 적막함, 고요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탈속(脫俗)한 사색인의 경지를 리듬감 있게 그리고 있다. 1~2호 크기의 소품에서도 그의 면밀한 구도와 아크릴 물감의 잔 붓질이 높은 밀도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몽환적인 이상향 같은 새벽 풍경
서너 해 전, 잘 아는 인사동 화랑 주인이 이른 봄 섬진강으로의 탐매(探梅) 여행을 계획하면서 박항률 화가도 동행한다며 동행을 권유했으나, 가정사로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일이 있었다. 남도의 강안(江岸)에 작은 배를 띄우고 강 건너 안개 낀 새벽 풍경을 특유의 스케치로 그려오더니, 드디어 채색이 완성되었다며 초청하기에 즉시 달려갔다. 그의 풍경화는 본 일이 없었으므로 설레는 마음이 더 가득했다. 30호(90.8cm×72.7cm) 크기의 대작이었다. 짙은 안개의 강둑 너머 고목이 즐비한 작은 마을에 소담한 집 몇 채의 안온한 정경이 새벽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몽환적인 이상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네 권의 시집을 출간했는데 시인의 짙은 감성이 그대로 배어 나왔다. 절제되고 아껴왔던 시정(詩情)이 수묵담채처럼 새벽 강을 따라 질펀히 흘러 눈길을 비끄러매었다.
그는 늘 생각의 두께가 그림의 색칠로 침윤되기를 기원하는 구도자의 붓질로 화폭을 채운다. 은 목련꽃 아래 한 소년이 팔에 얼굴을 괴고 사색에 잠기는 찰나를 그린 아주 작은 작품이다[그림 1]. 이 소년이 곧 화가의 자화상이 되고, 보는 이의 감성에 이입되어 일체를 이룬다. 나른한 봄날의 한때가 침묵 속에 머물러 있다.
깨끗함과 따뜻함 보여주는 화가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제일 큰 갈등이 일어날 때는 작품을 고르는 순간이다. 작가의 이력이나 다른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없을 때는 더 곤혹스럽다. 눈과 가슴을 일렁거리게 하는 작품들이 안 보일 때 그 답답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늦겨울 인사동을 거닐다가 한 화랑 전시대에 걸린
을 만났다[그림 2]. 인도 위에는 잔설이 아직 희끗희끗한데,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진 곳에서 하얀 어미 닭과 노란 병아리 세 마리가 한낮의 햇빛을 즐기는 이 그림은 무한한 희열과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사실 이 그림을 만나기 전까지 권사극(權師極, 1959~ )이란 화가를 알지 못했다. 한참을 서서 그림에 빠져 있는데 화랑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 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우중충한 겨울이 싫어서 빠른 봄맞이를 해봤다”는 주인과 함께 을 찬찬히 감상했다. 무성한 개나리꽃이 농염한 가지에, 파릇한 잎도 슬며시 내밀고 어미 닭의 흰색과 옅게 찍어놓은 붉은 벼슬, 병아리의 붉은 발목이 거슬리지 않게 조화를 이루었다.
인사동 화랑들은 우리나라 그림시장의 방향타 같아서 화력이 짧은 아마추어들의 작품을 내거는 일이 없다. 그만큼 전시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다. 주인이 내민 몇 권의 도록으로 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보았다. 대부분 꽃을 그린 그의 작품들에서 받는 공통된 느낌은 ‘따뜻함’과 ‘깨끗함’이었다.
마음에 든다면 주저 말고 수집
이 화가의 그림에서는 꽃들의 잔향이 뿜어져 나온다. 발로 열심히 다니며 찾다 보면 비록 화력(畵歷)이 짧고 값비싸지 않아도, 예술성 높은 작품을 찾아내고 수집하는 기회가 온다. 무명의 작가가 훗날 미술계에 우뚝 서는 작가로 성장해 작품 가격이 치솟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품을 만나면 주저 없이 수집해야 한다’는 수집가들의 격언이 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
나의 경우, 미술품 수집의 우선순위는 오랜 시간의 깊은 관찰이다.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보면 볼수록 괜찮은 그림을 보면 작가의 이력과 다른 작품도 보게 되고, 화랑 주인이나 다른 수집가의 조언도 참조한다. 작가를 직접 찾아가 그의 예술관도 경청해본다. 작가가 교만하거나 작품이 기교에 차 있으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1940)을 추모하여 그의 아호를 딴 ‘주호(珠壺)회’를 구성,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황유엽(黃瑜燁, 1916~2010),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박영선(朴泳善, 1910~1994), 윤중식(尹仲植, 1913~2012) 등과 5년간 동인전을 열어 평양 미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50년 7월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 벽화 작업에 동원되어 평양을 떠난 뒤, 북진(北進)한 국군 원산 해군기지 사령부에 입대, 종군하게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1951년 1·4후퇴 때 제주도까지 내려가 4년 여 체류한 인연으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이 특선되고, 1958년 제7회 국전에 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81년까지 서라벌예대,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구상회화의 산증인이 되었다. 주로 제주에 머무르며 서민들의 일상,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해녀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그리고 있다. 2005년에는 제주도에 그림 110여 점을 기증하여 2009년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 내의 ‘장리석 기념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14년에는 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두고 온 고향풍 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보았던 겨울 풍경은 , , 세 작품이었다. 눈 내린 시골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도 보이고 밤나무 옆길로 엄마와 아기, 소년과 강아지 등이 눈길을 걸어가는 시정어린 그림으로 화가의 유년시절 외가 마을의 설경을 그린 것이다.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노화백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슴푸레한 기억들이 연작으로 화폭에 옮겨져, 보는 이들을 묻혔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이 따뜻하게 해 준다. 이 작품 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낙찰받은 작품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그림 아래 아내와 차를 끓이고, 가야금 산조를 들으며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은 박용인(朴容仁, 1944~ ) 화가의 유럽 여행 중의 한 작품이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 1981~1983년 프랑스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Chaumière)에서 유학하고 국내 여러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북한산, 제주도 등 곳곳의 풍경이나 와인, 과일, 꽃의 정물도 많이 그렸다. “남극과 북극을 빼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유럽에 자주 머물며 알프스의 마터호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세계적 명산은 물론 고성(古城)들을 그렸다.
이 화가는 회화의 기법상 캔버스에 나이프를 주로 써서 유화물감을 바른다. 나이프를 쓰면 그림의 두께를 더하여 마티에르(matiere, 물감의 질감)가 무겁고 깊이 있게 보이고, 평면의 화면도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미술시장에서, 외국 풍경을 그린 작품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 작품보다 다소 가격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 시작가가 높아 의외였다. “이 작가나 권옥연(權玉淵, 1923~2011) 화백 같은 경우, 외국 풍경이나 인물을 워낙 심도 있게 작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경매 회사의 설명이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교외, 한적한 도로를 건너 왼편으로, 고색창연한 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후원에 나뭇잎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에도 눈이 덮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성당의 첨탑도 잿빛 하늘에 묻혀 희미하다. 지붕은 흰 눈으로 적요하다. 고목의 가로수 위에도, 풀밭에도 깊게 눈이 내려 사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아늑함과 경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속세의 혼탁함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이 화폭에 질펀히 흐르고 있다. ‘잘 된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아주 잘 된 그림이며, 동시에 좋은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소재에 대한 친근감과 따뜻한 눈길이 와 닿는다. 거기에는 격정의 향수와 서정성 짙은 은유의 시어(詩語)로 잔잔한 감동이 다가온다. 정직, 성실한 자태와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작가적 심성이 화면 깊숙이 투영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화가는 “내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럽풍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고 한다.”고 미소 짓는다.
사실 화가들은 설경(雪景) 그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흰색이 다른 색에 묻히고 그 밋밋함이 화폭을 평이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도 화선지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두어 눈[雪]의 형상화가 어려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눈 내리는 날은 마음이 설렌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노라면 마음도 경건해진다. 입속으로 가만히 어떤 바람이라도 읊조리고 싶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작은 오두막, 무쇠난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한때를 회상해본다. 눈설레 속에서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작곡가, 1935~ )의 몇 곡을 듣다 보면 정화(淨化)된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적멸감(寂滅感), 시공을 넘어 유년의 뜰로 이어진다.
‘외가’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의 친정’ 이라는 뜻만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함축된 말이다. 외가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내 모든 투정이나 허물도 기꺼이 품어 주는 따뜻한 풀솜 속 같은 곳이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선 느껴볼 수 없는 자글자글한 정이, 외할머니 치마폭에서 피어난다. 김칫국물 얼룩진 저고리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다. 어머니의 어머니로 농축된 모정이 “아이고, 내 강아지” 한마디 속에 묻어난다. 진종일 눈사람을 만들다, 강아지와 뛰놀다, 눈이 그치면, 보랏빛 하늘 위에 연을 띄워 날리며 얼레에 대고 ‘우우우’ 입김을 뿜던, 그 아름답던 시절이여!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엄마 배속에서 탯줄을 달고 나온다. 탯줄은 아기의 생명줄이자 엄마와 이어지는 인연 줄이다. 부모와의 인연 줄에 따라 인생의 운명이 달라진다. 귀하디귀한 왕족으로 태어나면 호의호식하지만 무지렁이 줄을 잡고 태어나면 살아가기에 고달프다. 돈은 살아가는 밥줄인데 재벌그룹의 자식들은 몇 천억의 유산을 받지만 서민의 자식은 적자라는 붉은 줄 위에서 춤을 춰야 산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핀다거나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돈줄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외국에 원정출산도 미리 좋은 줄을 잡아주려는 힘 있는 부모의 빽 줄이다. 유아원 때부터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 좋은 유아원이나 좋은 어린이집에 배정받아 다니려면 미리 그 동네에 가서 살아야한다. 집값이 비싼 이유 중 하나가 학군이고 학군은 다른 말로 줄 좋은 동네다. 아무리 좋은 줄 동네에 살아도 줄 보는 눈이 없으면 헛방이다. 좋은 줄을 잘 골라서 남들보다 빨리 앞줄에 서야 한다.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줄을 보는 눈이 있어야하고 실천하는 힘줄이 있어야 한다.
노숙자 공짜 밥줄도 늦게 가면 밥줄이 끊어지고 헛고생 줄서기다. 일찍부터 줄을 서야 한다. 동네 경노잔치에 12시부터 밥 주는데 10시부터 줄을 서야 얻어먹는다. 노래도 불러주고 밥값 내는 사람이 일장 연설을 한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필요도 없는 노인들에게 알량한 밥 준다고 지겹도록 줄을 세운다. 밥 준 사람은 함께 찍은 사진과 실적이 필요할 뿐이어서 사진을 찍은 후는 바쁘다는 핑계로 줄행랑을 친다. 생명줄이 곧 밥줄이니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면 밥줄이 끊어진다.
좋은 줄을 잡았다고 성공을 자신해서도 안 된다. 성공 길을 가려면 줄의 본류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가끔씩 줄을 흔들어본다. 떨어지면 그냥 나락이다. 남들이 다 서있는 줄이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는 민주주의 줄이고 정답일 확률은 높다. 그러나 그 줄은 그냥 백성 줄이다. 줄은 굵다고 튼튼하고 좋은 것이 아니다. 짚으로 엮은 새끼줄은 굵기가 반에 반도 못한 나일론 줄한테 번번이 나동그라진다. 군에서도 길게 이어진 줄은 제대할 때까지 걸어 다녀야 하는 보병 줄이다. 알맞게 싹둑 잘라지는 줄이 특과병 줄이다. 특과병 줄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신으로부터 선택된 일부만 어찌 알고 용케 서있는 줄이다.
세상을 하직할 때는 세상의 인연 줄을 놓으면 끝이다. 천하 없는 장사도 돈 많은 재벌도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때가 되면 세상의 인연 줄을 놓아야한다. 링거 줄 주렁주렁 매달고 아등바등 버티어 봤자 조물주 눈에는 찰나를 더 버티려는 거미줄에 매달린 아침이슬에 불과하다. 생명줄을 놓아야 할 때는 웃으며 놓아야 웰다잉이다.
줄은 씨줄과 날줄이 있다. 이 두 줄이 합쳐져서 인생이라는 천이된다. 씨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줄이지만 날줄은 스스로 노력해서 지혜와 덕을 쌓고 주위 좋은 사람들과 연대해서 만드는 후천적 줄이다. 씨줄이 좀 연약해도 날줄이 튼튼하면 좋은 천을 만들 수 있다. 좋은 천은 추위를 막는 옷감도 되고 이불도 된다. 행복을 감싸는 보자기도 만들 수 있다.
남의 생각에 움직이는 끄나풀 줄이 되지 말고 소나 개의 목줄처럼 강한 자에 끌려 다니지도 말자. 병들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목숨 줄이 되고 좋은 소식 전해주는 전화 줄이 되고 어둠을 밝혀주는 전깃줄로 살자. 매일 아침이면 줄을 서서 전철을 타고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지만 줄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있는 특권이다. 줄이 곧 인생이다.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말이 있다, 친구가 중요하다는 말로, 노력을 해야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과연 어디까지를 친구라고 해야 하나. 50대가 되어 만나야 진짜 친구다. 필저와 그는 50대에 만났다. 그래서 친구로 잘 지내고 싶었다.
서로 도움이 되어야 친구가 된다. 말이 통해야 친구다. 그러러면 친구와 내가 열심히 노력만큼 얻어진다. 술집에 가서 술 먹었다고 친구가 아니다. 초등학교 동창도 친구는 아니다. 서로 사는 방식이 다른 한 사람은 고향에서 소와 더 친구가 됐고 다른 한 사람은 도시에서 살았다면 가는 길이 다르다. 그렇다면 그냥 고향사람인 것이다.
친구는 매우 매력적인 주제다. 만인의 관심사일 뿐 아이라 노년의 적합한 주제다. 필자 또래들이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가끔 들은 적이 있다 왜 유유상종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주로 전에는 늘 자기들을 존경하던 사람들에게서 이제 멸시를 당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쾌락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된 것을 기뻐했고, 주위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지 않는다. 그런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성격 탓이지 나이 탓이 아니다.
늙어서도 절제할 줄 알고 까다롭거나 퉁명스럽지 않은 사람은 노년을 잘 참고 견딘다. 무례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은 나이에 관계없이 인생이 괴롭다.
이모작센터에서 강사콘서트에 대해 그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서울시청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관한 논의다. 큰 행사를 조율하다 보니 서로 의견차이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필자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의 태도가 얄미운 것으로 비쳐졌다. 책상을 치게 되었고, 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를 냈다. 서로 미안하다며 지나갔다.
전철을 같이 타고 가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게 되었다. 몇 번 상처가 있는 터. ‘그래 알았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런데 그가 막 전철에서 내리는 찰나 “그렇게 하면 안 돼.” 훈계조로 다짐을 강요했다. 필자가 말할 틈이 없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이젠 다시는 안 만난다.” 그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전철 문은 쿵 닫혔다. 마치 짱돌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이런 그의 말하는 태도가 마음을 편치 않게 했다. 이번을 기회로 터져 버린 것이다. 어떤 이성의 힘도 절제할 수 없었다. 그 다음부터 그를 만나고 싶은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와는 동갑이고, 고향이 같으며, 비슷한 처지에서 자랐다. 아무리 후한 점수로 감하려고 해도 되질 않았다. 연락도 안하고 지낸다. 연락을 해볼까 마음먹다가도 다시 그런 일이 반복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두렵다.
충고를 하는 것도 충고를 받는 것도 진정한 우정의 특징이다. 충고를 할 때는 거리낌은 없되 거칠지 말아야 하며, 충고를 받을 때는 참을성은 있되 대들지 말아야 한다.
그 친구는 괜찮은 사람이다. 가끔 지인을 통해 넌지시 안부를 물어본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가.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1966년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교양학부 도서관의 세미나 룸에서 송년다과회가 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 매월 책 한 권을 정해 읽고 토론회를 열어온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마지막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그 모임을 지도해온 철학과 S 교수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S 교수가 말을 마치더니, 학생들에게 새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다. 여러 명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이, 2학년에 올라가면 전공 공부를 하면서 교양도서도 열심히 읽겠다고 말했다. 기대한 반응이었는지, S 교수는 줄곧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J 차례가 되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남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많은 학생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에 여학생이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J는 언행을 절제하는 모범생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그렇게 당돌함을 보이기도 했다.
차례가 오자 나는 J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빤히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나는 ‘남학생’을 ‘여학생’으로 바꾼 것 말고는 J의 말에 한 자도 보태지도, 덜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J도, S 교수도 웃었다.
내가 J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학기 초 독서토론회 이후였다. 지정도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두 연인의 순수성을 예찬했다.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 희곡의 주제이자, 대학 새내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몇 학생이 두 연인의 무모함이나 맹목성을 지적했다. 어떤 학생은 우연한 사건이 중첩되고 있다며 작품의 플롯을 비판했다. 그러나 누구도 분위기를 뒤엎지는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를 보며 S 교수가 말했다.
“김 군. 작품을 읽었을 텐데, 독후감을 말해보게.”
기다리던 바였다. 1학기 말의 토론회에서 S 교수로부터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교수가 나에게 반드시 발언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저는 이 희곡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도 사회적 상황을 덮어두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보면, 스토리가 전개되는 16세기 후반에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시작됩니다.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새 세력이 대두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구세력은 뒤로 밀립니다.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뒤흔든 엄청난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구세력 지배층인 귀족 자녀들이 사랑에 탐닉해 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회변화의 변곡점에서 볼 수 있는 말기적 현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역사성이나 사회성이 배제된 그런 사랑을 지고지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나는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제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제 곁에 줄리엣 같은 여인이 있었다면, 물론 저 역시 앞뒤 살피지 않고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었다. 누구보다도 S 교수의 웃음소리가 컸다. 토론회가 끝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J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나요?”
“가지고 놀다니?”
“학생들 뒤통수를 쳐놓고, 마무리로 앞이마까지 쳤잖아요?”
J는 고개를 돌려 상긋 웃고는 버스에 올랐다. 바로 그 미소가 화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찰나에 J는 말 위에서 등을 돌리고 화살을 쏜 고구려 궁사였다.
1967년 1월 1일 자정이 되자 나는 5분 동안 나와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종교가 없는 내가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철필에 검은 잉크를 찍었다. 편지를 다 쓴 뒤에 날짜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땐 0시 5분이 훨씬 지난 뒤일 것이었다. 나는 편지지 맨 위에 ‘1968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J에게 보낼 편지였다. 마을 앞에도 우체통이 있지만,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십리를 걸어 우체국으로 가서 편지를 부쳤다.
드디어 1월 4일이 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도 없는데 울안에 서 있는 동백나무에서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뚝 떨어졌다. 이건 길조일까, 흉조일까? 나는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집배원이 우편물을 가져왔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J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그 편지지 맨 위에도 ‘1967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J의 편지를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그야말로 천하가 내 손 안에 있었다.
편지 내용에, 보고 싶다든가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상대를 마음에 담고 있음을 서로 확인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 후 2월 20일까지 5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받고 그 답을 쓰는 식이 아니었다. 답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편지를 썼다. 나도 그도 몇 번인가는 하루에 두 통을 써서 부치기도 했다. 평생 쓸 편지의 반쯤을 50여 일 동안에 쓴 셈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안개처럼 말없이 다가와 나를 휘감는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사랑이라면 나의 J에 대한 사랑은 안개보다 짙었다. 사랑이란 내 곁에 그가 없어도 그를 내 마음에 담는 것일까? 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 마음에서 사랑은 흘러넘쳤다.
그래서 나는 편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쓸까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끼고 싶었다. 그래. 그 말은 직접 만나서 할 거야. 그것도 여러 번 만난 뒤에 해야 해. 나는 그런 절제가 사랑의 품격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2월 20일에 상경할 예정이라며 21일에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J는 하루 뒤에 보자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숫자를 맞추어 2월 22일 오후 두시에 둘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장소도 J가 정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근사한 곳을 찾으려고 여러 군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가 결론을 내린 곳이 바로 신설동 로터리의 어느 다방이었다.
둘이 만나 나눌 이야깃거리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J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삶의 지표 셋을 밝혔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게 그것이었다.
J는 처음에는 가난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라고 했다. J가 강조한 것은 전문성이었다. 언젠가 나라가 전문인을 요구할 것이고, 그 준비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서른 통쯤 주고받은 무렵부터, J도 가난의 의미를 재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기 강조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둘이 만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접점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터였다.
21일 상경한 나는 절친인 P의 집으로 갔다. P는 나에게 깜짝 놀랄 사실을 털어놓았다. 겨울방학 동안에 다른 사람이 아닌 J에게 집요하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편지도 보내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골목길에서 기다리다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J가 끄덕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P가 말했다.
“나는 부모 없이 자랐어. 피난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잃었어. 내 꿈은 출세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야. 난 여자를 찾았어. J야. 내가 걔하고 결혼한다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 그렇지 못하면 난 살 이유가 없어.”
사랑에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P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결연했다.
그날 저녁 나는 P의 집을 나와 제기천 천변의 어느 판잣집 주막에 들어가 혼자서 막걸리를 마셨다. 주막을 나온 나는 무심결에 J의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는 기억에 생생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섰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식 2층 저택이 골목 양 쪽에 죽 늘어서 있었다. J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부티가 났다.
문득 희곡 이 생각났다. J는 줄리엣이지만, 안타깝게도 로미오와 나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었다. 오래전부터 심하게 해소를 앓는 아버지와 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더욱 불행한 것은, 독서토론회에서 내가 한 말,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내 말이 J의 집 앞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도 친구려니와, 이런 부잣집 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2월 22일 오후 두 시에 J와 만나기로 한 다방에 가지 않았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것이 젊은 시절의 내 삶의 지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삶의 지표를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내 뜻과는 무관하게 아직 가난하게 살고는 있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내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서울의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J는 빈민운동을 하는 가난한 목사와 결혼해 평생을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미 손자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어 있을 J가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