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전으로 떡볶이를 사 먹고, 방 탈출을 즐기고, 시장 재료로 만든 밀키트를 사 간다. MZ세대부터 중장년까지 전 세대가 어울려 시간을 보낸다. 전통시장은 더이상 장보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온갖 제품과 식재료가 즐비한 좌판 사이를 헤치며 소소한 체험을 즐기는 곳이다.
◇경동시장
“오래된 공간을 활용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느낌을 줘요.” 미국 시민권자 앨리스 김(40대) 씨가 말했다. 외국에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경동시장을 꼭 들른단다. 함께 온 칭 리(대만, 40대) 씨는 방금 체험을 마치고 받은 친환경 화분을 들고 있다. 이제 옛 극장 분위기를 살린 스타벅스 경동1960점으로 가 시간을 보낼 참이란다.
1958년 창업한 LG전자가 1960년에 문을 연 경동시장을 활성화하고자 만든 금성전파사는 열자마자 입소문을 타 하루 3000여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오픈 1년 남짓 되었지만 여전히 인기가 많다. 금성전파사 직원은 “MZ세대가 전통시장을 더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과거를 추억하는 중장년 관광객도 많이 온다”고 했다. 다양한 체험을 즐기고 싶다면 경동시장으로 가보자.
※금성전파사 체험 운영시간 11:00~19:00
(고민탈출은 사전 예약해야 이용 가능)
◇수유시장
“수유시장의 식재료로 당일 생산, 당일 판매해서 ‘당당한셰프’예요. 가족이 즐기기 좋은, 술 안주하기 좋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저소득층을 위한 메뉴들을 개발했죠. 1년 남짓 됐는데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김대원 당당한셰프 사무국장이 설명하는 동안 한쪽에서는 머리카락이 새하얀 할머니가 밀키트를 고르고 있었다.
수유시장 내 당당한셰프 오프라인 매장에는 냉장 밀키트 4종과 냉동 밀키트 6종이 준비돼 있다.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도록 양을 늘린 꽈배기 핫도그도 있다. 하루에 얼마나 팔리는지 묻자 김 사무국장은 ‘영업비밀’ 이라며 웃었다. 밀키트는 쿠팡이츠, 네이버동네시장 장보기, 놀장 등 온라인에서도 구매 가능하다. 하지만 시장을 직접 방문해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한껏 즐긴 뒤, 마음에 드는 밀키트를 양손에 들고 전통시장의 신선함을 집까지 가져가 보는 건 어떨까.
※당당한셰프 오프라인 매장 운영시간 09:00~18:00
◇통인시장
“엄마, 엽전 주세요! 제가 낼래요!” 가족들이 엽전을 들고 통인시장 곳곳을 누빈다. 커플, 친구들과 놀러 온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한 상인은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경복궁 근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통인시장 내 ‘도시락카페’에서는 1만 원을 내면 엽전 20개와 빈 도시락을 준다.
엽전은 가맹 가게에서만 쓸 수 있다. 가맹점에는 통(通)이라는 글씨와 함께 엽전 모양의 간판이 입구에 달려 있다. 카페에서 QR코드로 지도를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만두 4냥, 떡볶이 4냥, 김밥 2냥이다. 길거리 음식뿐인가. 연잎밥, 구절판도 있다. 도시락을 채웠다면 카페로 돌아와 음식을 즐기면 된다. 남은 엽전은 환불받을 수 있다. 카페에서는 컵라면, 음료 등도 엽전으로 구매 가능하다. 수저는 무상 제공. 전자레인지도 비치돼 있다. 엽전을 들고 시장의 정취를 물씬 느껴보자.
※엽전·도시락카페 이용시간 11:00~15:00 (주말·공휴일은 16시까지)
매주 월요일·셋째 주 일요일 휴무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요즘. ‘방콕’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분들 계신가? 부부가 혹은 가족끼리 또는 동성 친구끼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 게다가 ‘먹방’까지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볼까 한다.
경춘선 기차여행[김유정역]_실레마을 이야기길 따라 점순이를 만나다
7호선과 경의중앙선이 교차하는 만남의 장, 상봉역. 춘천 가는 기차는 대성리, 가평을 지나 출발한 지 72분 만에 멈춘다. 내린 곳은 근대문학 ‘봄봄’, ‘동백꽃’의 산실, 실레마을이 있는 김유정역. 역사 맞은편으론 ‘비단으로 병풍을 두른 산’, 금병산이 포근하게 안아준다. 역사를 빠져나와 약 5분 정도 걸었을까. 버선발로 마중 나온 ‘점순이’를 만난다.
“그새 좀 컸는가? 반갑단 말보다 다짜고짜 키부터 재 보는데 잘 봐야 내 겨드랑 밑에서 넘을락 말락. 또 고갤 숙일밖엔 도리가 없다. 딸이 더 자라야 성례를 시켜줄 수 있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일만 시키는 장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면서 나를 충동질해대는 점순이, 반발하다가도 끝내 이용만 당하는 나는 정말 어리석은 머슴이던가. 빙장님, 올가을엔 꼭 성례를 시켜줘요. 더 이상은 못 참아요. 장인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며 뒷골 콩밭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린 비로 안 그래도 고즈넉한 잣나무, 소나무 숲 사이 길은 더없이 폭신폭신. 그 순간이다.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들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결코 머물 수 없는 눈웃음의 그녀들이.”
아주 치명적이었던 들병이들 ‘눈웃음 길’을 스치듯 빠져나오면서 그 들병이 꾐에 빠졌던 근식이가 걷던 그 ‘한숨사연 길’을 돌아본다. 오죽하면 자기 집 솥을 훔쳤을까? 세월의 무게만큼 겹겹이 쌓인 잣나무 가지들을 밟고선 심호흡 여러 번에 팔다리도 죽죽 펼쳐본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뿜어낸다지 아마. 이윽고 마주한 두 갈림길. 어느 쪽을 택할 텐가? 동백꽃(생강나무) 길 따라 정상도 좋겠고 산골나그네 길 따라 터벅터벅 걸어도 좋겠고. 오늘은 기어코 산골나그네가 병든 남편을 끌고 사라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가볼 텐가?
김유정역 실레마을에선 김유정문학촌을 구경하고 난 다음 둘레길인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반드시 한 바퀴 산책해야 한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그곳, 인쇄박물관이 지척에 있는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유정 선생이 귀향해 야학을 일으켰던 곳, 금병의숙(錦屛義塾)에서의 인증샷도 의미 있겠고 기차카페로 개조된 폐김유정역에서 타임킬링도 가성비 있다. 인근엔 레일바이크 장도 있고. 또 '먹방'도 빠질 수 없으리. 춘천 하면 닭갈비 아닌가? 역전에서 ‘점순네’를 찾으시라.
꽃 피고 새 우는 고궁 산책[창덕궁]_덕혜옹주가 남긴 마지막 메모를 찾아서
4월 어느 날. 마침 하늘빛은 미세먼지를 걷어내고 바깥 기운도 그리 차갑지 않다. 어제 생일을 챙겨주지 못한 아내를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하나? 눈치를 살피는데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잔다. 더 어려운 숙제라고?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반겨주는, 다리품 많이 팔지 않아도 되는,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어떨까.
1405년 태종 때 제2의 왕궁으로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한 곳. 마지막 임금 순종 때까지 약 270여 년간 왕조의 정궁 역할을 한 곳. 그나마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시크릿 가든’인 후원이 있어 자연과의 조화미와 전통의 조경미를 만끽한 적 있으신지. 그러나 오늘의 관심사는 따로 있다.
바로 낙선재! 경복궁의 건청궁이 그러하듯 창덕궁 내 단청을 하지 않은 유일한 곳. 여인의 '비운' 같은 게 서려 있다고나 할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낸 곳(정확히는 낙선재의 우측 끝에 있는 수강재). 두리번두리번 돌아서 드디어 만난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어쩌면 혼신의 힘으로 써내려간 것일까. 그녀의 마지막 편지(메모)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옹주는 1989년 4월 12일, 향년 77세로 이곳 낙선재에서 운명한다. 새들이 우짖고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이면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 올봄에 방문하신다면 한 가지 추가할 곳이 생겼다. 작년 말에 재개관한 창경궁 대온실이 바로 그곳. 후원 쪽으로 가면 이웃한 창경궁과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는데 지척이니 함께 둘러보면 ‘엄지 척’ 장담할 수 있다.
세종마을 도보여행_이 골목 저 골목 헤매기 좋아라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부 지역을 말한다. 경복궁 서편에 있다 하여 북촌에 대비해 ‘서촌’으로 소문난 곳이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입구를 나와 대로를 따라 걷노라면 이윽고 우리은행 건물이 나타난다. 도보여행은 여기서부터 ‘딱’이다.
좌측 골목길로 접어들면 세종마을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 ‘이상의 집(터)’이 나온다. 백부의 권유로 건축과에 입학한 시인은 1929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는데 화가의 꿈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고. 얼핏 카페 같은 이곳엔 비밀의 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하면 잠시나마 그와 호흡할 수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올라선 다음 이내 날개를 펼쳐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훨훨 날아올라보라. 이걸 놓치고선 여길 다녀갔다 말할 수 없으리.
할머님과 며느님께서 푸근한 미소와 여유로 차근차근 귀엣말하시듯 이곳저곳 소상히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는 헌책방’이 다음 코스다. 고인이 된 창업주 할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부부의 가운데 이름을 따서 상호로 정했다는 곳, 대오서점이다. 분수를 아는 즐거움 정도로 해석되는 가훈 이야기, 다락방 사연, 풍금 이야기, 드라마 ‘상어’의 주인공(손예진과 김남길) 뒷담화(둘은 흥행작 ‘해적’에서 다시 인연을 이어간다)까지 줄줄 풀어놓으셨는데 그동안 세월이 좀 흘렀나보다. 없던 액세서리 진열대도, 사진 촬영금지 팻말도 보이고 그새 입장료(2500원)도 훌쩍 인상됐다. 오늘따라 주인장도 안보이고 대신 시니어 알바께서 맞이해준다. 가수 아이유가 앨범사진을 찍었다는 상업적 내음 물씬 나는 설명엔 노코멘트할밖에.
좀 걷다 보면 공통으로 생각나는 건 뭐? 때맞춰 신기하게 나타난 곳이 ‘통인시장’이다. ‘골라먹는 맛과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잡도리 쉼터 파라솔 아래에서 ‘셀프’로 즐기기도 편하다. 먼저 1인 5000원 하는 도시락을 구입하면 되는데 엽전 열 냥을 제공하니 하나에 500원인 셈. 그 복잡한 골목길에서 기다랗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박노수미술관을 지나서 수성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기린교를 건너는 상상도 분명 힐링이다. 다리품을 팔아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북한산은 물론 북악산 아래 청와대, 경복궁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통 편리한 역세권에 세종대왕, 정철을 비롯해 수많은 다양한 인물들이 살다 간 흔적이 이리도 집약된 곳 또 어디에 있을까? 종로구에 신청하면 해설사와의 동반 투어도 가능하니 봄날엔 놓치지 마시라. 서촌에 바람이 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봄날은 가고 있다.
낙원상가는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 뒤에 있다. 종로 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가는 남북 도로가 낙원 상가를 통과한다. 질주하는 차 소리가 시끄럽고 컴컴해서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이다. 그런데 건물 밑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인사동이다. 나지막한 건물만 있는 인사동에서도 그래도 번듯한 고층 건물들이 있는 동네로 이어진다. 인사동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이 길을 경계로 탑골공원 쪽은 으슥하고 허름해서 안 간다고 한다. 한옥이 줄지어 있는 익선동도 이 건물을 경계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이 자리가 낙원 전통시장이 있던 자리이다. 서울시에서는 종로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도로를 내고 싶은데 수많은 시장 상인들의 삶터이니 철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도로도 건물 1층으로 통과하게 내고 시장은 낙원상가를 지어 지하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래서 낙원상가 지하는 전통시장에서 파는 생선가게, 정육점, 옷 가게 등 도심 속의 전통시장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지상에 안 보이기 때문에 인근 통인시장처럼 세인의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낙원상가는 나름대로 도시의 명물로 거듭났다. 1960년대에 주상 복합건물로 지어진 건물로 청계천의 세운 상가, 홍제동의 유진상가처럼 그 당시에는 알아주는 대형 건물이었다. 세운 상가처럼 철거 위기까지 처했던 이 건물이 지금은 미래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낙원상가 건물은 15층 건물로 6층부터 15층까지는 낙원 아파트이다. 5층이 사무실이고 4층이 옛 허리우드 극장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젊은 극장’이라 하여 ‘낭만 극장’과 ‘실버 영화관으로 변모했다, 입장료 3천원으로 고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상영하여 마지막 상영이 오후 6시 무렵이다. 그전에는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형 캬바레도 있었다.
악기상가가 된 것도 흥미롭다. 건립 당시 마침 종로 일대 정비 사업으로 악기 상들을 철거했는데 그때 철거된 가게들이 낙원상가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경험으로 서울시가 황학동 풍물시장을 신설동 한 건물로 몰아넣은 것이나, 청계천 공구상들을 장지동 가든 파이브로 유도한 것처럼 비슷한 업종은 한 건물로 몰아넣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70년대에는 포크송 시대였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통기타 하나쯤은 만질 줄 알던 시대라서 기타가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도 초급용 통기타는 10만 원 선이면 살 수 있다. 고가의 기타들은 몇 벡만 원 한다. 그 당시부터 교회 밴드도 급속도로 성장하여 악기 수요가 많았다. 1980년대는 통금이 해제되고 아시안게임, 88올림픽 특수로 흥청망청하던 시대였다. 인근에 요정이 많아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폭증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악기는 물론 낙원상가는 음악인의 동네로 밴드 공급 역할도 했다고 한다. 90년대에는 노래방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줄어들고 금융위기까지 덮쳐 낙원상가도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시봉 열풍, 아이돌 인기 등에 힘입어 다시 복고풍이 불면서 안정적인 위치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가게들이 환하게 정비되고 화장실도 깨끗해졌다. 주변 탑골 공원 주변은 허름하고 복잡하지만, 악기 상가는 쾌적한 분위기라서 돌아볼 만 하다.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89세가 되셨다. 예전 앨범 속에는 싱그럽고 꽃다운 모습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느새 아흔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다. 그래도 올 초까지는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버스투어를 즐기셨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이 고향인 엄마는 집 앞에서 버스에 올라 평창동 세검정과 부암동 윤동주기념관을 지나 엄마의 고향인 통인시장까지 가는 코스의 버스를 타고 나가 마음 내키는 정류장에 내려 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시고 오셨다.
그런데 요즘 다리가 무거워 영 버스투어를 갈 수 없다고 아쉬워하신다.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살면서 필자도 요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엄마를 자주 보러 가지 못하고 있어 항상 마음이 무겁고 편치 않았다. 다행히 아파트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계셔서 마당의 정자에 나가 이야기 듣는 게 새로운 재미가 있다며 즐거워하신다.
그런데 어느 날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 모습이 힘들게 보였는지 요양보호시설을 운영하는 분이 지나가다가 엄마에게 노인장기요양 등급을 신청하라고 했다. 등급 판정이 나면 일주일에 5번, 하루 세 시간씩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엄마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분을 위해 목욕이나 산책을 같이해주고 그 외에도 집안일이나 음식도 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필자의 마음도 좀 편해질 것 같아 건강보험공단에 신청했다.
예약된 날짜에서 보험공단에서 심사원이 오셨다. 신청자의 상태를 판단해 등급이 정해지는데 65세 이상이나 65세가 되지 않았어도 거동을 못 하는 분과 치매가 있는 분은 1, 2, 3등급을 받는다고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이란 고령이나 노인성 신체 질병 등으로 일상생활을 혼자 하기 어려운 노인에게 신체 인지 가사활동 지원 등의 급여를 제공하여 노후생활의 안정과 그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사회보험제도로 사회적 효를 실천하는 제도다. 우리는 그 제도에 드는 비용 중 15%만 내면 혜택을 볼 수 있다.
전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 1등급이 된다. 상당 부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면 2등급이 되고 부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75점 미만인 사람은 3등급, 일정 부분 도움이 필요하며 인정점수가 60점 미만일 경우 4등급을 받는다. 장기요양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은 1년이고 유효기간 끝나기 90일부터 30일 전에 갱신 신청을 해야 한다.
요양보호사는 수급자를 위해 신체활동으로 식사 및 약 챙겨드리기, 양치, 세면, 목욕, 머리 감기 돕기, 머리 손질 등을 도와주며 일상생활 및 정서지원 활동으로 장보기, 산책, 물품구매, 병원 동행, 수급자의 청소, 세탁, 식사준비, 조리, 설거지, 대화하기 등을 같이해준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들어 집안일 도와주기를 원했는데 이제 4등급을 받았으니 도움 요청을 할 수 있다. 이런 혜택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라도 나이는 드는 것이니 우리나라 노인복지제도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엄마와 잘 맞는 좋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필자 마음도 좀 편해지고 엄마도 일상생활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다.
하루해가 참 길다. 새벽 4시 반 무렵이면 훤해져 저녁 8시가 지나야 어두워진다. 하루해가 가장 길다는 절기 하지가 6월 21일이었다. 특별한 취미활동이나 소일거리가 없는 시니어는 잠을 깨는 순간부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를 걱정하기도 한다. 특히 날씨마저 흐리면 더 그런 생각을 한다. 이런 날이면 움츠리고 앉아 있기보다 바깥나들이를 하면 한결 기분이 상쾌해진다.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함께 챙길 수 있는 나들이를 하면 금상첨화지 싶다. 나이 든 사람에게 많이 권하는 운동이 걷기다. 둘레길이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져 많이 활용된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삭막한 도심의 길을 걷기보다 바람과 속삭이는 숲과 물과 산새 소리 들으며 걷는 자연 속의 걸음은 한결 가볍고 여유로운 시간이 될 터이다. 아울러 문화산책도 곁들이면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이룰 수 있어 좋지 싶다.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곳으로 석파정 산책 코스를 권하고 싶다.
석파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다. 전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청와대 옆길을 돌아 자하문 터널을 지나면 곧바로 좌측 언덕배기에 보인다. 석파정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쓰이던 곳이다. 보존이 잘 되어 현재 서울특별시 문화재 26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립 미술관인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석파정이 있는 지대가 미술관에 달린 사유지이기에 그렇다. 그 미술관도 여느 미술관과 다른 점이 있어 전시되거나 소장된 그림을 감상하는 문화 나들이도 되지만, 전시관 곳곳에 이벤트성 볼거리, 쉼터가 있어 관람을 여유롭게 재미를 더해준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도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 영상과 함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음악감상실, 영화를 볼 수 있는 영상 상영 코너도 마련해두어 재미를 더해준다. 현재 “신사임당, 그녀의 화원”이 관람객의 관심 속에 9월 3일까지 특별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 3층 옥탑을 거쳐서 외부로 나가 만나는 석파정 일원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쉼터와 힐링의 장소로 등장한다. 옥상 잔디정원에서 조각품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북한산의 모습도 새롭다. 선이 아름다운 대원군의 별장 기와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둘러 서 있는 산책로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듬성듬성 만들어 둔 벤치에 앉아 중간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배경 음악 삼고 새소리 들으면 그곳이 낙원 같다. 가파르지 않은 산책길을 따라 느리게 느리게 걸으면 자연의 소리에 취할 수 있다. “물을 품은 길”이라 이름 붙여진 좁은 산책로 또한 정겹고 주변 곳곳에 세워진 아름다운 문구의 팻말이 인생을 배우게 한다. 그 문구 중의 하나인 기욤 뮈소의 에 나오는 구절이 가슴에 와닿았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우리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미술관 관람과 힐링의 산책을 하며 하루를 너끈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곳이지 싶다. 돌아오는 길에 경복궁 옆에 있는 사람 냄새 나는 통인시장에 들러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면 행복한 하루가 되지 싶다. 필자는 올봄에 고등학교 후배인 대학교수이자 화가인 고등학교 후배의 안내로 처음 이곳을 다녀왔다.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어 안사람과 함께 친구와 가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필자에게 사진촬영법과 활용기술을 배우는 남녀 어르신 11분과 다녀왔다. 모두 즐거워하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하루가 되었다고 했다.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아우를 수 있는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산책 코스를 걸어보면 어떨까?
어느 날 거울을 문득 바라본다. 젊었던 시절 아리땁고 고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예전에 강남 거리를 걸어 다니면 예쁘다, 옷 잘 입는다는 소리를 한 번쯤 들었을 당신. 지금 그런 모습이 아니라서 속상하다면 참고하시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핫하게 꾸며줄 바로 그곳으로 안내한다.
남자들을 위한 공간, 남성 패션 편집숍
250년 된 해외 남성 브랜드를 만날 수 있는 서촌 ‘바버샵(Barbershop)’
통인시장을 지나 왼쪽 오르막길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남성 편집숍인 ‘바버샵’이 있다. 20대에서 60대까지 남자 이용객의 사랑을 고르게 받는 남성 패션 편집숍이다. 30대 고객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나이가 적든 많든 패션에 관심이 많은 남성들에게 어필할 만한 세련된 액세서리, 구두, 옷, 가방이 매장 한가득 있다. 매장에서도 구매가 가능하지만 주 고객층은 온라인을 이용한다고. 옷은 외국에서 열리는 패션 트레이드 쇼를 통해 직접 제품을 보고 수입한다. 미국, 프랑스,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독일 등에 본사를 둔 브랜드 등 다양하다. 250년, 100년 역사를 가진 브랜드도 ‘바버샵’에서 만날 수 있다. 시니어들은 모자를 많이 찾는다. 니트는 나이와 상관없이 편하게 구매할 수 있다. www.barbershop.co.kr.
남자들이 편한 쇼핑 ‘알란스(Alan's)’
알란스는 란스미어(삼성물산) 전 브랜드 매니저였던 남훈 대표가 2014년 1월에 론칭한 브랜드로 강남점, 영등포점, 판교점 총 3개 매장이 있다.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들이 두루 이용하고 있다. 자체 제작 제품과 위탁 판매하는 국내 브랜드 그리고 이탈리아, 영국, 일본에서 직접 들여온 고급 브랜드를 만날 수 있다. 편안한 매장 분위기 속에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관련된 다양한 상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재킷 종류가 많고 50대 고정 고객이 많다고 한다. 신중년들은 가격보다는 스타일을 보는 편이고, 20~30대 젊은 이용객들은 디자인과 함께 합리적인 가격을 선호한다. 강남점의 경우 1층은 캐주얼한 제품이 많고 2층은 수트 맞춤을 할 수 있다. 쇼핑시간이 길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커피나 녹차 등도 제공한다.
굳이 살 필요 없다, 바람돌이 선물 같은 패션 대여 서비스
우아하게 백화점에서 빌려 쓰자! ‘살롱 드 샬롯(Salon de Charlotte)’
최근 롯데백화점이 패션 대여 서비스를 시작했다. ‘살롱 드 샬롯(Salon de Charlotte)’이라 이름 붙인 이 서비스는 드레스, 정장, 보석 등 자주 착용하진 않지만 가격대가 높아 구매하기 어려운 패션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빌려주는 매장이다. ‘살롱 드 샬롯’ 매장은 여성, 남성 및 아동을 대상으로 돌잔치, 결혼식 등 특별한 날에 입는 프리미엄 의류 상품을 대여해주고 있다. 주요 품목은 드레스, 정장, 보석, 선글라스, 핸드백 등이다. 이용객은 매장에 있는 옷이나 잡화 상품을 착용해본 뒤 대여를 결정할 수 있다. 가격은 2박 3일 기준으로 여성 드레스와 남성 정장이 각각 30만원대, 아동 드레스 및 잡화 상품은 10만원대다. 여행가방도 대여가 가능하다. 이 매장 이용자는 주중에는 30명, 주말에는 50명 수준으로 고객 수는 매달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매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드레스, 정장 등과 아동용 의류 상품이다. 핸드백, 보석 등 잡화 상품 대여 이용자도 점점 늘고 있다.
명품가방 하나쯤 들어볼까? ‘더 클로젯(The Clozet)’
특별한 날 딱히 들고 싶은 가방이 없다면 ‘더 클로젯’의 명품가방 대여 서비스를 이용해보시라. ‘더 클로젯’은 월정액만 내면 다양한 종류의 가방을 이용할 수 있다. 명품가방에 대한 관심이 많은 여성들에게 높은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다. ‘더 클로젯’은 이용객의 높은 관심으로 최근 기존의 공개접수에서 사전예약으로 전환했다. 월 7만9000원으로 최대 세 번까지 원하는 가방을 이용할 수 있다. 홈페이지 주소 www.theclozet.co.kr/ 현재 모바일 서비스는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렌털한다 ‘프로젝트 앤(Project Anne)’
SK플래닛이 패션 O2O 서비스 ‘프로젝트 앤’ 사업을 시작했다. ‘프로젝트 앤’은 국내 최초로 해외 명품 브랜드와 국내 유명 브랜드,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다양한 최신 상품들 중 나에게 맞는 스타일을 추천받고 원하는 옷과 가방을 골라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마치 음악이나 영화 등을 다운받지 않고 모바일을 통해 스트리밍 방식으로 감상하는 것이 일반화된 것처럼, ‘프로젝트 앤’은 필요할 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골라서 입고 언제든 새로운 옷과 교환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패션 브랜드는 물론, 국내 신진 디자이너의 브랜드와 패션 브랜드 등 100여 곳의 최신 여성의류 상품 1만2000여 점을 확보했다. 모바일 앱을 다운받아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으며 전국 어디든 상품 배송이 가능하다. 의류 상품의 경우 한 달 기준, 한 벌씩 4회 이용할 때는 8만원, 두 벌씩 4회 이용할 때는 13만원의 월 이용권을 구매하면 된다.
10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 서울역 1·4호선 환승 통로에서 서울역 일대의 역사를 그린 만화가 김광성(金光星·62)의 그림이 전시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참 따뜻하다, 정겹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수묵담채로 그려진 한국적인 특유의 색감도 그렇거니와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과 풍경들에서 오래전에 볼 수 있었던 서울의 옛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주제와 소재들로 밀도 높은 작품세계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는 김 작가의 그림은 파리 크리스티 옥션에서 거래될 정도로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삶과 일에 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번째 만남인지라 준비해간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사동 통인가게 2층 찻집에서 내준 발효 생강차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대표작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앞으론 뭘 그리고 싶은가요?” 이런 질문은 ‘김광성’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아니, 이런 진부한 질문들을 의미 없이 던지는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노트북을 덮었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광성 작가는 올해 62세다. 만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다소 늦은 36세 때였다. 당시 인기 만화잡지였던 이 그 전까지 대기업 직장인, 가게 사장님으로 살았던 그를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했다. 이후 26년간 펜을 놓지 않은 그는 자신의 경력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만화가들은 대부분 30년 경력을 넘겼을 테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또래이면서 활동하는 만화가가 적은 현실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30대 후반에 도전하게 된 만화가의 삶
“학생 때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명랑만화에서부터 극화만화까지 만화란 만화는 다 좋아했죠. 살던 데가 부산 외곽 시골이었는데 만화방이 생긴 게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김 작가의 아버지는 남사당 사물놀이 꼭두쇠였다. 아버지는 농기구를 예술적으로 만들고 돗자리나 가마니도 전부 손으로 만들곤 했다. 그 끼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 사회에 나와서 십 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죠. 학창시절 때 그림을 그리면 아버지께 혼쭐이 났어요. ‘그림 그리지 마라, 빌어처먹는다’라는 말씀이셨죠(웃음). 그래서 그림을 접어야 했어요.”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의외로 끈질기다. 회사를 가니 유화반이 있었고, 그는 거기서 유화를 배우게 된다.
“회사 다닌 지 십 년째가 되니 사회 영향을 받아 회사에 변화가 생겼어요. 마침 저도 십 년 다녔으면 지긋지긋하게 했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죠. 1986년에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1988년에 올림픽이 있었죠. 그때 곳곳에서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어머니가 ‘넌 그림 실력이 있으니 간판집이나 해라’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괜찮겠다 싶어서 가게를 차려서 2년 동안 쏠쏠하니 재밌게 일했어요.”
간판집 사장으로 일하던 그는 그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만화를 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됐다. 당시 만화계에는 신인들이 올라오던 시절이었고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좋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가져와서 보는데, 만화 보느라 간판 제작일이 잘 안 됐어요(웃음).”
처음에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재료를 사서 허영만, 이현세 등 기성작가들의 작품을 베껴봤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시장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내가 거기에 끼어들면 색다른 작가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를 그렸죠. 그게 반응이 좀 좋았고, 그러면서 만화가로서의 삶이 시작됐어요.”
만화는 농사와 같다
이후 30여 년 가까이 만화가 생활을 했다. 이제 중견 만화가이자 인정받는 작가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만화는 농사다’라고 말한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농사를 지었어요. 만화도 농사처럼 뭔가 다져지고 공부하고 비축이 된 상태에서 나온다는 의미죠. 그림도 기초가 되어 있어야 표현을 하잖아요. 만화는 머리에서 먼저 그려야 해요. 머리에서 먼저 안 그려지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선 머리에서 그릴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이 쌓여야 하죠.”
김 작가는 우리만화연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리만화연대는 만화인들의 모임으로 이론적으로 만화계 저변을 단단하게 다듬는 걸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만화에 대한 분석과 만화계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해법 등을 제시하는 활동은 김 작가의 성향과 공명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요즘 바라보는 만화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나마 우리 만화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있어서 다른 예술 분야보다는 형편이 좀 좋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수년 전부터 만화에 대한 효용가치가 달라졌어요. 만화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인식하게 된 거죠. 요즘은 어디를 가더라도 만화가에 대한 대접이 과거에 비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문제는 이제 신인, 기성 할 것 없이 양질의 작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거죠. 잘나가는 작가들은 에이플러스 주고 싶을 정도로 잘해요. 그런데 그런 작가들은 한정되어 있거든요. 그 외의 친구들은 많이 분발해야 하는데, 최근 웹툰 업체들이 많이 생겼어요. 이 업체들은 작품을 달라고 성화죠. 그렇게 되면 작품성이 좀 떨어져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돼요. 작가들이 좀 더 자신의 개성을 살린 작품들을 발표하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죠.”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밖에 없는 일
김 작가는 만화를 그릴 때, 그 안에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감동받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잘 풀려나갈 때 느끼는 감동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대개 새벽 두세 시에 잠자리에 드는데, 그때 창문을 열고 밖을 보면 참 뿌듯해요. 화가를 꿈꿨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시 태어나도 만화가 할 건가요?’라고 누가 물으면 그러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어요. 직업적으로도 매력이 있고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며 즐거워하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나도 한 역할을 하고 있구나 느끼게 되고 동시에 조심도 하게 됩니다. 또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내 작품에 대해서는 스스로 평을 못 하잖아요. 그런데 시인 고은 선생의 글을 읽고 ‘맛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제 만화를 보고 맛이 있다고 하니 최고의 칭찬이죠.”
그는 아직도 자신이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저 말로만 청춘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여전히 어린이 만화 제작 요청을 받는 활발한 현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면서 그는 나이를 계속 ‘거꾸로’ 먹는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그릴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만화가는 동방신기도 알아야 하고 걸그룹도 알아야 하고 아이들의 언어도 알아야 해요. 그러다 보니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도 수시로 보게 되죠.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작품을 보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도태? 난 도태되고 싶어”
김 작가가 오랜 세월 만화계에서 일하면서 가져야 했던 작가적 태도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가 계속해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만화가 우월하다거나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활동하는 게 필요하니까, 직업일 뿐이니까 한 거죠. 직업이라고 말하면 한쪽에서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그런데 요즘 사회학자들이 인생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잖아요. 사람들이 소위 새로운 무언가에 몰입해서 휩쓸려 다니는 게 보이니까요. 이건 개개인의 문제여서 스스로 뭔가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감성이나 비전, 사유를 접하면 사유하고 감성이나 비전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는 자신이 겪은 반(反)문명론자로서의 사연(?)을 하나 소개했다.
“어떤 젊은이가 내게 핸드폰을 줬어요. 그런데 복잡해서 도대체 어떻게 써야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짜증을 내니까 그 젊은이가 ‘선생님, 그거 안 하면 도태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도태? 도태시켜. 난 도태되고 싶어’라고 말했죠(웃음). 뭔가 새로운 게 나오면 다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몰라도 된다고 봐요.”
‘역시 아날로그적 도구로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백다운 발언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김 작가는 SNS 등 인터넷 활용은 물론 포토샵까지 다룰 줄 안다. 심지어 권당 200페이지짜리인 전 10권을 모두 포토샵으로 컬러링 작업까지 한 디지털 능력자다. 제대로 반(反)문명론자가 되려면 문명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일까.
틈만 나면 놀러 다니고 싶은 나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김 작가의 미래는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남은 셈이다.
“요즘은 틈만 나면 놀러가려고 해요. 원래는 놀지 않고 일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돼요. 돈도 안 되는 걸 밤새면서 왜 그렇게 했나 싶고요.”
아직도 일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김 작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인 얘기일 수 있다.
“참 족쇄를 풀 수가 없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의무 같은 게 생겼어요. 그런데 의무가 무게를 가지면 참 골치가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2년 동안은 일 안 한다고 도망 다녔어요. 나중에 박재동 작가가 잡으러 왔어요(웃음).”
김 작가에게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비구니 스님과 함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고 제주도에 가서 스킨스쿠버를 하고 유명산 밑에 가서 패러글라이딩도 해봤다.
“스킨스쿠버를 하면 세상이 확 차단돼요. 거기가 천국이에요. 물고기들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스님이 다음에는 바이크 면허 따서 할리데이비슨 타자고 하더라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