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제 어머니는 밑으로 두 여동생을 뒀습니다. 부안에 사시던 어머니가 금산(錦山)으로 시집오자 두 이모도 언니 따라 금산으로 혼처를 정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첫째 이모는 금산 읍내에서 삼십 리 떨어진 ‘장둥이’에 사는 시골마을의 갑부한테 시집갔습니다.
글 김승웅 언론인
그 이모네 집 마당 대문 곁엔 높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습니다. ‘가죽나무‘로 불리던 기분 나쁠 정도의 큰 거목으로, 집 전체가 노상 그 그늘에 덮여, 6·25 나던 해 여름 한 철을 그 집 머슴방을 빌려 피난살이를 하던 우리 식구들 눈에도 왠지 흉가 같다는 인상을 짙게 드리우던 나무였습니다.
이 인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석 달 후 집주인 이모부가 9·28 직후 북으로 도망치던 동네 빨갱이들의 기습을 받아 피살된 곳이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이모부가 변을 당하기 직전 우리 식구는 그 집에서 피난살이를 끝내고 금산 읍내의 우리 집으로 돌아와 살던 때였지만. 반대로 동네 소작인들에게 쫓기던 이모부한테는 그때부터 피난살이가 시작돼, 장둥이 소작인들의 눈을 피해 열흘 남짓 읍내 우리 집에 숨어 지냈습니다.
이모부는 장둥이의 소문난 지주의 아들로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였습니다. 귀국 후 그는 선친의 뒤를 이어 장둥이 대지주가 됐고, 아침 산보 길에 동네 소작인 김 아무개를 논길에서 만나 간밤에 논물을 대라 지시했거늘 왜 지시를 따르지 않았는지를 추궁하다 평소 불복해온 김 아무개의 말대꾸에 격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발길질을 퍼부어 그를 논두렁 구석에 처박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져 하루아침에 소작인들 세상으로 바뀌면서 김 아무개로부터 당할 보복이 두려워 석 달 동안 장둥이를 떠나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다 9·28이 되자 일단 안심하고 읍내 우리 집으로 거처를 정해 열흘 남짓 숨어 살던 중이었습니다.
쫓겨 새우잠을 자는 이모부를 볼 때마다 어린 제게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 같은 변고가 생기면 제일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이 바로 이모부처럼 남한테 원한을 지고 사는 사람이구나 여겼습니다. 인간이 인간한테 겪는 변고란 그러고 보면 으레 화산 같은 것이어서, 원한이라는 제일 여린 지층을 뚫고 분출되기 마련 아닙니까.
장둥이 가죽나무의 저주
이모부는 참변당하기 하루 전 날 “오늘 밤만은 오랜만에 다리 좀 뻗고 자겠다”며 장둥이로 귀가하더니 말이 씨가 된 듯 그대로 다리 뻗고 영면한 것입니다. 이모부의 귀가 소문은 당일로 장둥이 모두에게 퍼졌고 퇴각 중이던 김 아무개의 귀에까지 닿았던 것 같습니다. 퇴각을 멈춘 김 아무개가 그날 밤 장둥이로 돌아와 다른 소작인들과 작당하여 이모부 집을 덮친 것입니다.
이모가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깬 이모부가 문을 박차고 담을 넘었습니다만, 김 아무개가 쏜 총이 더 빨랐습니다. 담을 채 넘지도 못한 채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담벼락 밑에 휴지처럼 구겨져 숨을 거둔 것입니다.
장례식 날 어머니를 따라 이모 집에 갔다가, 이모부가 담을 넘으려 움켜잡다 놓친 지푸라기 더미가 담 밑에 수북이 흩어져 있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모는 장례식 날까지도 실신상태에 놓여 “날 샜네, 날 샜네!”만을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남편의 참변에 놀란 나머지 부엌 아궁이에 머릴 박고 날이 어서 새기만을 기다렸다는 이야기지요.
더위가 한풀 가신 지금 같은 초가을 날씨였는데도 상갓집 구석구석에 흥건히 밴 피 냄새가 왜 그리 독하고 역겨웠는지 지금껏 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미식거리고 토할 것 같던 그 냄새는 아무래도 마당 한구석 대문 옆에 선 가죽나무가 뿜어대는 냄새려니 여겼습니다. 그 가죽나무가 제 뇌리에 아직껏 저주의 나무로 남아 있는 건, 죽음이 뭔지를 그 나무가 풍기던 피 냄새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설까, 지금 이 나이에도 거목 곁에 서기가 싫습니다.
이번 글 제목을 ‘무나죽가이둥장’이라 단 이유도 그 가죽나무의 저주를 말하기 위해섭니다. ‘장둥이 가죽나무’를 거꾸로 뒤집은 글자 조립으로, 이모부의 참변 후 그 집 가죽나무 이야기만 나오면 파랗게 질려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이 겁보 아들을 놀려먹으려, 제 선친이 툭하면 꺼내던 악의의 말장난이었습니다. 겁보 아들을 다독이기는커녕 평생을 이처럼 철 안 든 아이로 살다 가신 아버지였습니다.
이모의 비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과부로 바뀐 이모는 두 아들을 금산 장둥이 시가 댁에 맡기고 언니 되는 우리 어머니가 살고 있던 전주로 이사 왔습니다. 과부 이모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 동란 직후 잘나가던 군복차림의 노 대위였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김종필과 동기 되는 육사8기 장교로, 수송 병과였습니다.
그 노 대위가 술이 취해 전주 이모네 집 담 옆에 차를 주차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여자 집주인과 인사를 트다보니 여주인이 30대 초반의 과부라는 것, 더구나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 과부라는 걸 알자 노 대위 쪽에서 노골적으로 달라붙어 첩으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저는 전주에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닐 때였는데,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대낮임에도 잠옷차림에 흐트러진 머리로 이모 방에서 나오는 노 대위를 여러 번 목격했고, 그때마다 심한 배신감에 떨었습니다. 국졸에 불과했던 우리 어머니와는 달리 일제 때 경성사범을 거쳐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 이모가 아니던가. 서예에 뛰어나고 평소 다감하기 이를 데 없던 그 인텔리 이모가 어찌 저리 쉬 무너진단 말인가… 전쟁을 치르면, 또 과부가 되면 다 저리 되는 건가, 도시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버려진 이모, 잊혀진 친정동생
그 이모가 어느 날 밤 군복차림의 노 대위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둘의 동거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언니 되는 제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내려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놀란 건 호되게 나무랄 줄 알았던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둘의 동거를 너무도 순순히 승낙하고 말더라는 것, 더욱 놀란 건 당시 노 대위가 허리에 차고 왔던 권총이었습니다.
제 어린 소견으로도 결코 권총 차고 나타날 자리가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차치하더라도 경우 밝고 매사 똑 소리 나게 다부지던 어머니마저 그 권총의 위력 앞에 저토록 꼼짝달싹 못 하다니… 어린 제 생각에도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그때의 억울함은 지나놓고 생각해 보니 정확히 10년 후 5·16이 터지면서 이 나라에 덮친 ‘권총문화’의 도래를 알리는 예고였습니다.
5·16이 나던 해 대학에 입학한 저와 동급생들은 두어 달 후 강의실을 박차고 진입한 무장계엄군들한테 밀려 교문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면전에서 쾅하고 닫히던 교문 밖에 우두망철 선 채 캠퍼스 안쪽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때, 푸드득 머릿속을 스쳐가던 한 컷의 환영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뜬금없게도, 10년 전 그날 밤 저희 집을 찾아와 어머니를 침묵시켰던 노 대위의 성난 표정, 그리고 그의 허리에 달린 예의 권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저더러 5·16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라면 저는 지금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권총이라고. 모든 걸 침묵케 만들던 권총문화의 도래였노라고, 또 그 결말이 18년 후 궁정동 시해(弑害)로 입증되지 않더냐고.
계엄이 풀린 후 노 대위를 수소문한즉 5·16주역들의 동기답게 그 사이 대령으로 진급했고, 얼마 뒤 예편되더니 전주 병무청장으로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을 풍편에 접했습니다.
이모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노 대령과 계속 동거 중인지 아니면 헤어졌는지, 이도저도 아니면 떳떳하게 그의 후처 자리를 차지해 안방에 들어앉았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로부터 서대문 로터리 근처의 ‘별’다방이라는 곳에서 마담으로 일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풍편에 들었지만 어머니를 포함한 저의 집 식구 누구도 이를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식구 모두에게 그녀는 이미 버려진 이모, 잊혀진 친정동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친정언니 손을 잡고 저세상 동행한 이모
그러던 이모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내민 것은 5·16이 나고 근 30여 년이 지나섭니다. 그것도 하필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발인을 하루 앞둔 몹시 흐린 날 하오였습니다. 언니의 죽음을 누구로부터 듣고 왔는지, 하얀 상복 차림으로 들어선 이모는 몰라볼 정도의 노인으로 바뀌어 있더이다. 조카들의 인사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언니의 주검 앞에 다가서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는데, “언니는 좋겠네!”만을 되풀이하던 그 곡소리가 지금껏 생생합니다. 무엇이 그리 좋다는 말인지 문상객 모두가 궁금히 여겼습니다만 이따금 “이제 내 죽으면 누가 초상을 치러줄꼬?”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걸로 미뤄 이모부 사후 장둥이 시가 댁에 버리고 떠난 두 아들을 목 타게 그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입술이 점차 검푸르게 타들어 가던 이모가 언니의 주검 앞에서 혼절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상주였던 가형과 제가 안 되겠다 싶어 병원 응급실로 옮기려 했으나 구급차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만 숨을 거두는 것 아닙니까? 아니, 도대체 이럴 수가… 말로만 듣던 줄초상이 난 것입니다. 절로 개탄이 터져 나오더이다. ‘아, 끝마무리까지 이토록 변고를 동반하시는 분이로구나!’ 억지로 짜 맞춰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이모의 기막힌 팔자였습니다.
미뤄 짐작컨대 이모는 자신의 명이 다 한 걸 이미 감지하고 언니의 상가를 찾아왔던 성싶습니다. 마지막 여행길에나마 어려서 그토록 따르고 그리워했다던 친정언니의 손을 잡고 동행하고 싶어서였겠지요. 이모의 눈을 감겨드리며,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제 생각이 미치지 않던 어머니의 소녀시절이, 곁들여 두 자매가 나누던 동기간의 우애가 엄존했음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수년 전 우연히 고향 금산에 갈 일이 생겨 내친 김에 30~40리를 걸어 ‘장둥이’에까지 갔습니다만 가죽나무는 고사하고 그 집 그 동네마저 깡그리 사라져 버린 데 놀랐습니다.
60여 년의 세월은 그토록 무섭습니다. 집터만이라도 찾을까 싶어 동네 몇몇 노인한테 이모부 존함과, 혹시나 싶어 소작인 김 아무개와의 사연까지 설명하자 노인 모두가 아예 손사래까지 쳐가며 “왜 그런 걸 알려고 하느냐?”며 나무라는 데 더 놀랐습니다. 노인 두세 분은 저를 혹시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닌지 대놓고 의심하는 눈치까지 보이기에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동네를 빠져나왔습니다.
원로가수 명국환(82)의 명함은 상당히 단순하다. 한문으로 원로가수 明國煥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덩그러니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뒷면에는 데뷔연도와 히트곡 4곡이 적혀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무심함 속에 보이는 원로의 품격은 비로소 말을 해보니 알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장에 눈썹이 짙은 노신사가 포토월 앞에 섰다. 기자들은 ‘누구지? 일단 찍고 보자’라며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허나 노신사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포토월에 서 있으니 어떠한 상을 받는 수상자 정도로만 짐작할 뿐,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이름 석자를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영등포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수많은 인파 속에 뒤섞여 있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듯한 그의 이름은 명국환. 60년 전에는 한국 가요계를 주름 잡았던 가수, 지금은 원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수다.데뷔연도는 1954년. 그가 데뷔했을 때 태어난 사람도 이미 환갑을 넘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가수 명국환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단어는 고귀하다.
원로(元老).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 결국 명국환에게 원로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참석한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자리를 빛낸 이유도 이와 같다.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 둘. 어쩌면 가수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지도 모르는 이때. 그는 가장 큰 보상을 받은 셈이다.
노신사 명국환이 인터뷰 도중 노래를 한다.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 부르는 그의 노래는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구슬프고 애잔하다. 하지만 그 깊이는 황혼이 돼서야 더욱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여든 둘의 나이에도 자신은 아직도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라고 표현하는 명국환. 나이 탓인지 사람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주 커지지만 옛 시절의 기억들을 토해내는 목소리는 꽤나 또렷하다.
◇악극단원을 꿈꾸던 소년
소년 명국환의 꿈은 악극단원이 되는 것이었다. 악극단원이 돼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노래하는 것. 그에게 그 꿈은 최고의 낭만이자 로망이었다. 밤이면 동구밖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던 소년.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그는 이미 귀여운 스타였다.
“노래 한곡 해 보거라”하는 어른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수하고 애달픈 노래 솜씨를 뽐낸다. 신청하는 노래 대부분 다 불렀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던 소년 명국환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은 목청 하나 믿고 돈을 번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노래를 잘 해봐야 얼마나 잘 하겠느냐’는 생각에 악극단원이 된다는 꿈을 포기하라며 소년 명국환에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부모님의 결사반대였던 것이다.
“제 성격이 온순해서 그렇지 않은데 그때는 아버지가 반대하시자 대들었어요. 나는 가수가 될 거라면서요. 간섭하면 반항을 하겠다고 역으로 아버지께 엄포를 놓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지역 콩쿠르 대회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에 입선해 가수가 될 소질을 보이더니, 6·25전쟁이 끝난 직후 열린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가수의 꿈을 마침내 이룬다.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정식적인 가수로 데뷔를 했죠. 그게 1954년입니다. 그때 생각했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말이죠.”
◇없어서 못 팔았던 레코드
“6·25전쟁 이후 이북의 실향민을 달래는 노래인 ‘백마야 울지마라’가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여기에서 ‘백마’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이 실향민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 줬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노랫말과 애절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명작 한 곡이 탄생했다. ‘백마야 울지 마라’다. 이 노래가 전파를 타자 전국 팔도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레코드 상들은 이 레코드를 사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다. 레코드 가게 근처의 여관에서 발매 전날 밤을 새워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했다.
그가 백마야 울지 마라, 아리조나 카우보이, 방랑시인 김삿갓,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던 그 시기에 대중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수단은 레코드가 아니면 라디오뿐이었다. 그마저도 여건이 열악해 사전 녹음방송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라디오 생방송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많다.
“1960년대 흑백TV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라디오 전성 시대였죠. 그런데 오로지 생방송밖에 할 수 없었죠. 라디오에 출연하면 모든 장르의 노래를 총망라해서 불러야 했는데, 어떤 때는 음정과 가사를 모르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라디오에도 방청객이 있던 그때에는 가사를 틀리면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청춘의 삼색 깃발
“장미꽃이 피어나는 새파란 가슴 / 저 하늘에 펄럭이는 청춘의 삼색 깃발 / 달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 별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명국환의 노래 ‘청춘의 삼색 깃발’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그의 이 노래는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통제가 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6·25전쟁 이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이 노래는 사찰계(현 국정원)의 타깃이 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작사가 손로원은 노랫말을 쓰면서 전후의 아픔을 딛고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그 가사가 발목을 잡았다. ‘장미꽃’과 ‘깃발’ 그리고 ‘달려가자’는 노랫말이 문제였다. 지금이야 장미의 색깔도 가지각색이지만 통상 ‘장미는 빨간색’이라는 통념이 있던 시절, 그것은 공산주의의 빨간색을 상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깃발’ 또한 북을 상징하고 ‘청노새가 달려가자’는 것도 ‘북으로 당장 넘어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6·25전쟁 때 뿜었던 피가 채 마르지 않았던 그 시절 그 곡은 그렇게 해석됐다.
작사가 손로원과 명국환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상이 의심된다며 사찰계에 불려갔던 것도 수차례. 졸지에 ‘빨갱이’로 낙인 찍힐 판이었다.
“정말 당혹스러웠죠. 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빨갱이’로 몰릴 판이었으니까요. 조사 과정에서 손로원 작사가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을 강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죠.”
◇원로의 꿈
명국환은 여전히 현역이다. 그리고 왕성하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 날에도 부산에 공연을 하러 갈 만큼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전국 팔도를 누빈다. 하지만 이런 현재가 오기까지 오랜 기간의 정처 없는 휴식 기간이 있었다.
“1985년에 KBS에 ‘가요무대’가 생기고 나서 무대에 많이 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이 자리를 채우면서 제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원하지 않게 계속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미련하죠.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다른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었지 뭐.”
이제는 후배 가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품고 있는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꿈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머쓱해 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한다.
“남들이 이 나이 들어서 이런 말을 하면 욕심이라고 해요. 앞으로 10년만 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사실 제 목소리가 살아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 나이에 현역으로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아직도 공연장에 가면 한 차례 공연에 몇 백만원을 받으니 이만한 능력이 어디 있겠어요?”
1970년대부터 KBS 가요무대가 시작됐던 1985년까지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이, 노래만 불렀던 ‘숙맥 원로’ 명국환은 이제 옛 것을 그리워하는 오늘날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론인 출신 시인 유자효의 시에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추석’, ‘가족’ 등의 일상 시에 젖어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고난의 시대에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유육출 씨와 어머니 김순금 씨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의 아버지 유육출 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부위독급래”
대학교 4학년생 유자효에게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신속하게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내용.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리던 찰나,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든다.
“모사망급래”
전보를 본 유자효의 가슴이 미어진다. 또 그 미어지는 가슴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더 무겁게 했다. 46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어머니 김순금 씨. 그 나이에 돌아가신 것조차 오래 버텼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숨어서 울 뿐이었다.
유자효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일가친척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1층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가 2층에서 홀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친척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버지도 중태에 빠졌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 둔 채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겁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뇌혈관이 터졌던 아버지는 조금만 늦었더라도 사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유자효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이미 어머니의 변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담대한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아버지의 성공신화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2위를 했어요. 건축업을 시작으로 청과물 회사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담대하고 남자다운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문의 7대손이었던 아버지는 10대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7세 때 경남 삼천포로 이거한 후 곤궁했던 삶에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후 유육출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거기에서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일을 배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그렇게 건설업으로 승승장구를 할 때 찾아온 광복은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도 그는 또 다른 기회로 삼아 청과물 회사를 차렸다. 경남 지역에서 오는 모든 청과물은 그 회사를 거쳐 부산 일대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됐다. 그렇게 청년 사업가 유육출은 어느새 부산의 소득세 납부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유육출은 그때 분명 미래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화마(火魔)가 일으킨 ‘재기’의 광기(狂氣)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사업장이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영주동에서 발화한 불은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를 휩쓸었고, 결국 중구 일대가 모두 폐허가 됐죠. 당시 보험 제도라는 게 없었던 터라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납품했던 화주들에게 보상했어요. 아버지 사업에 첫 제동이 걸린 순간이자, ‘재기’를 위한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이었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유자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광산업, 경마장, 극장, 간척사업 등 재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브레이크는 없었다.
재기의 발판을 찾던 유육출이 경남 지역의 고령토 광산의 채굴권을 사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폭력배들의 기습과 협박에 결국 채굴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 고령토 광산의 소유는 결국 지역 연고가 있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혼란의 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손을 댄 것은 경마장 사업.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경주마가 아닌 조랑말로 운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자랑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구매한 영사기가 말썽이었다. 음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필름은 끊기기 일쑤. 첫 날부터 분노한 관객들의 환불 요구 소동에 휩싸이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덕도 간척사업이다. 분명 이 사업은 유육출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말이다.
그가 계획한 가덕도 간척 사업은 당시 국토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장면 정권의 국책과 맞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그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에 가덕도 간척사업은 그저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여겨졌고, 이것에 눈을 돌리는 정부인사는 전무했다. 그도 이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공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Go’할 것이냐 ‘Stop’을 할 것이냐는 기로에서 그는 과감히 ‘Go’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가덕도에 투자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간척지는 메워지지 못했고, 재산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게 빚더미에 앉게 됐죠. 소송이 빗발치고, 어머니는 빚쟁이들 앞에서 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재기를 꿈꾸었어요. 이후에도 부산 산업전시회 개최를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니까요.”
◇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아버지
시인 유자효가 결혼을 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를 두고 결혼을 하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재혼. 마침 응암동 시장에서 교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있어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하늘을 찔렀고, 불화가 가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자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분과 헤어져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았다. 일어나거라. 네가 먼저 죽겠구나.”
다음 날 어찌된 영문이지 유자효의 새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그렇게 사납던 사람이 조용하게 떠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버지도 얼마나 헤어지기 괴로웠겠어요. 그런데 몸과 정신이 부실했던 상황에서도 그렇게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젊은 저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강인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했죠. 종교가 없는 제가 살아가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저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죠.”
유자효는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을 배려해 돌아가셨다고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기 좋은 1990년 맑은 가을에 하늘로 떠났으니 말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운용(金雲龍·85)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정치인과 관료, 경제인이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거쳐 갔지만 유치 준비부터 폐막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 이는 김 전 부위원장이 유일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6·25전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의미를 돌이켜본다면
지금은 저절로 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나는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역사에서 6·25전쟁에 비견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무엇보다 축 늘어져 있던 한국 국민이 ‘우리는 할 수 있다, 해 냈다’고 느끼면서 의식을 개혁하게 됐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사에 남긴 의미는 단순한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적인 의식을 개혁했다는 데 있다. 서울올림픽의 모토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세계무대에서 정말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문화국가로서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됐다.
서울올림픽이 최초로 기획된 것은 언제인가
얘기를 하려면 먼저 1978년 제49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씨와 함께 유치한 대회였다. 멕시코에서 선수단 숙식을 하루 10달러에 제공해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급해진 나는 하루 5달러면 된다고 ‘뻥’을 쳤고 결과적으로 대회를 잘 치르게 됐다. 사격대회 다음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약간 허황된 건의를 했다. 박 대통령이 검토해보라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정부가 올림픽 유치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국민체육심의위원회라는 게 있었다. 정부에서 국무총리, 문교부 장관, 서울시장 등이 참석했고 나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로서 참석했다. 대부분 올림픽 유치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박종규 씨가 “유치에 직을 걸자”고 주장하면 김택수(전 IOC위원) 씨는 “내가 왜 그만두느냐, 당신이나 그만둬” 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뭘 해보기도 전에 10·26사태가 터졌다. 세상이 뒤집혔으니 (올림픽 유치계획도) 그렇게 스톱이 됐다.
다시 정부가 유치방안을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직후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여러모로 어려울 때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나라를 끌어올리기 위해 올림픽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신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열악했다. 얼마 전에 전 전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때는 IOC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더라. 돈도 참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 국제심판도 없고 국제회의에서 한국인이 나밖에 없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좌우지간 우리나라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나고야가 우세했는데 어떻게 역전했나
나고야는 승리를 과신했다. IOC총회를 맞는 자세나 준비는 부실했다. 나고야의 전시실에는 여성 홍보요원 두 명에 사진 몇 장이 전시돼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얼마나 열정을 쏟고 있는지 보여줬다. 일본은 나고야가 중심이었지만 우리는 거국적으로 나섰다. 서울과 나고야가 아니라 한국과 나고야가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개최지 발표 순간 “쎄울, 꼬레아” 소리에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멍해졌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아쉬움이 남는 순간은
2001년 총회에서 유색인종 최초로 IOC위원장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쉽고, 2005년 5월 구속된 상태에서 불명예스럽게 IOC위원을 사퇴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2008년 복권이 돼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고,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 연례보고서에서 ‘김운용씨가 한국 정치인들에 의해 2003년 실시된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의 희생양이 된 양심수’라고 기록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최근 활발히 힘을 쏟고 있는 일이 있는지
집필 활동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온다. 현업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은 많이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경험하고 배웠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기려고 한다. 만나게 해달라면 연결해주고 얘길 해달라면 해주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돕겠다. 이름을 빌려달라면 빌려주고 뛰어 달라면 뛴다. 한국에서 IOC위원 50명과 아무 때나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밖에 없다. 아직 운동도 하고 있다.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필라테스도 한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어렸을때부터 피아노를 무척 열심히 쳤다. 서울 삼선교 인근에 사시던 신재덕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배웠다. 1947년 당시 레슨비가 한달에 2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내게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피아니스트가 꼭 돼보고 싶다. 연세대 재학시절 내가 피아노를 가장 잘 쳤다. 대학 1학년때는 전교 음악회에서 독주도 했다. 쇼팽의 음악을 곧잘 연주했다. ‘즉흥환상곡’을 가장 좋아했다. 쇼팽의 음악에는 연인에 대한 로맨스와 조국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6·25가 발발하면서 공부도, 음악도 그만둬야 했다. 외교관으로 주미 대사를 하면서 국제법 학자이자 피아니스트를 해보고 싶다.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1986년 IOC 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국제경기연맹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 분과위원장, IOC 집행위원, IOC 부위원장 등을 맡아 국내외 체육계에서 맹활약했다.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비롯해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2부산아시안게임 등 대한민국이 주요 국제대회의 국내 유치하는 과정은 대부분 김 전 부위원장의 손을 거쳤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에서는 남북한 공동입장을 성사시켰다.
그는 태권도 세계화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 취임 이후 국기원을 건립하고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효자종목’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김 전 부위원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적으로는 대통령특사 국제교류대사를 맡은 바 있으며 16대 국회에서는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교수, 미국아메리칸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 석좌교수 등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1989년부터는 아호인 윤곡(允谷)을 따 국내 최대 여성 스포츠 시상식인 윤곡여성체육대상을 시행해 왔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인 박동숙씨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약력
1931년 대구 출생(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美메리빌大 법학박사)
1961년 내각수반 비서관·국방장관 보좌관
1963년 주미대사관·주UN대표부·주영대사관 참사관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대한체육회 이사
1972년 국기원 건립, 국기원 이사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창설총재
1985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및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986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1988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TV 분과위원장
1990년 대통령특사(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1992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1993년 대한체육회(KS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1996년 외무부 국제체육교류 대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9년 현재 아메리칸스포츠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학교 석좌교수, 대한체육회(KOC) 고문,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
21년 동안 108억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기부한 기업인이 있다. 1994년 8월에 창립해 국가유공자들의 복지 증진과 한미 우호 증진을 기업 목표로 삼고 유통, 서비스, 판매 사업을 하고 있는 상훈유통의 이현옥(李鉉玉·77) 회장이 주인공이다. 알게 모르게 꾸준하게 이뤄진 그의 기부는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2014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보훈 관련 단체에서는 ‘기부천사’라고 불리는 이 회장의 삶과 실천을 통해 돈 쓰는 철학을 짚어본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눈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배려 그 자체다. 돈이 있는 사람만이 나누는 건 아니다. 각자 자신만의 ‘달란트(재능)’를 필요로 하는 타인이나 단체에 선물하는 ‘재능기부’도 확산되고 있다. 일회성 봉사나 한시적인 거창한 후원보다는 소박한 실천적 나눔으로 사회 곳곳에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기부이다. 나눔과 기부가 ‘있는 사람들’만의 문화가 아님을 알려주는 일이다.
연매출 300억~400억 원의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이현옥 회장은 첫 대면에서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따뜻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곧 자신의 따뜻함을 남과 함께 나누고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또한 어느 순간부터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되어 기부에 ‘중독된’ 대표적인 경영자다. 보훈처 퇴직 후 상훈유통을 설립한 다음 해인 1995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국가유공자와 보훈단체에 성금을 기탁한 이 회장이 낸 돈의 액수는 108억 원. 10억 원이 부(富)의 대표적 기준이 된 사회에서 이 회장은 그 열 배가 넘는 돈을 자신의 주머니 속이 아니라 남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나 그 막대한 기부금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25년이 된 30평짜리 작은 빌라에 살고 있다.
국가 은혜 갚으려고 국민으로서 기부한다
이 회장은 베트남전에 하사로 참전했던 국가유공자이기도 하다. 격렬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함과 죽어나가는 전우들, 그리고 국가가 없는 삶의 비참함을 깨달은 이 회장은 국가 보훈을 위한 기부를 반드시 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복귀한 이후 20여 년간 보훈단체에서 공직 생활을 한 그는 상훈유통을 세울 때 국가 보훈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진행했다. 상훈유통은 SOFA 면세품 양도 양수 사업,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홍삼 제품 및 홍삼 음료 판매 사업 등을 갖고 있으며 1사 1촌 농촌사랑운동의 일환으로 자회사인 상훈영농조합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의 기부 대상은 당연하다는 듯 보훈 단체들이었다. 국가유공자단체와 보훈병원에서부터 광복회, 전몰군경 유족회, 미망인회, 월남전참전자회, 상이군경 복지회관, 안중근의사기념관, 천안함 관련 단체 등등 그는 보훈을 위해 만들어진 곳을 향해 아낌없이 돈을 냈다. 국가유공자들의 자녀들에게 지급하는 나라사랑 큰나무 장학금도 운영하고 있다. “부국의 원천은 강병이요, 강병의 뿌리는 보훈에 있다”라고 누누이 말하는 그다운 일이다. 그는 보훈이야말로 국민의 도리요, 의무이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동참하자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거창한 기부가 아닌 작은 배려와 실천의 기부로 행복을 누리자”
“덕을 베풀고 나누다 보니까 행복해지더군요. 복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고요.”
이 회장은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일을 실천하며 살자”고 말했다. 지금까지 인터뷰했던 전형적인 기부중독자들과 똑같은 말이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야말로 곧 행복’이며 ‘그래서 자신은 기부를 멈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기부라는 행복을 깨달은 사람이라지만 25년 동안 검소한 빌라에 살면서 10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낸 건, 정말 그게 가능할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그게 가능한 사람이었다. 돈을 기부에 쓸 수 있었던 것은 회사를 세운 후 21년 동안 매년 수익금의 50%를 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을 들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수익금의 50%를 기부금으로 낸다니,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그러나 이 회장은 그러한 아버지를 자식들이 이해해주고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자식들에게 가업을 이어주지 않고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했다.
“억지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가업 승계 문제는 전적으로 자식들 본인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한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넘겨 줄 수 없습니다. 회사에는 좋은 경영 성과를 내는 직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회사를 넘기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소유하느냐보다 누가 기업을 존속할 수 있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맞는 작은 실천이 큰 힘
인터뷰 내내 말을 아꼈던 이 회장은 기부의 보람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만큼은 수다쟁이가 됐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것들이라도 모이면 큰 힘을 낸다는 말인데, 제 기부 철학을 그대로 표현한 문구인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많은 이가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작은 나눔에 동참한다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회장이 기부를 통해 꿈꾸는 미래기도 했다.
베푸는 일은 자기의 위치에서 적당한 규모로 하는 것이 좋다. ‘쓸 수 있는 돈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쓰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좋다’는 유태인의 속담이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은 보기만 해도 행복한 에너지를 선물 받게 되죠. 우리는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남들과 행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자고 늘 다짐해요. 나누지 않는 사람은 이 기쁨을 모를 겁니다. 직접 기부를 해보고 기부가 어려운 게 아니라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창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작은 배려와 실천이 얼마나 소중한가를요.”
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오후 2시. 약속시간을 부득이하게 미뤄야겠다고 알려왔다. 겨우 10분 늦는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색을 표하는 이만의 전 장관은 근처 회의에 참석했다가 점심도 못 먹고 걸어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BMW(Bus&Bicycle, Metro, Walk) 예찬론자’라고 말한다. 장관 재임 시절에도 전용차량 ‘에쿠스’를 반납하고 ‘아반떼 하이브리드’를 타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질적 가치보다 사람을 아끼고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다. 높은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해도 더욱 더 겸손해야 한다는 그다. 그런 그를 만든 어머니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6살 꼬마 이만의의 집에 인민군들이 몰려왔다. “이승만을 내놔라.” 이승만이 그려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기르던 소를 가지고 가버렸다. 앞산과 뒷산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히도 무서웠던 기억, 어머니의 품속에서 6·25전쟁을 견뎠다. 어머니는 굳세게 하루하루를 이겨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에 각인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남 담양 산골마을에서 살았는데, 다들 먹고사는 게 힘든 시절이었죠. 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어머니는 들풀을 베어다 국을 끓였고 밀개떡을 해서 먹였죠. 그렇게 못 먹고 살다 보니까 위장도 약해졌죠. 어느 날 체했는데, 당시만 해도 근처에 병원이 없어 체를 내리는 곳에 가야 했어요. 어머니는 고무신이 벗겨지는데도 산을 뛰어넘어 가며 그곳에 도착했죠. 당시만 해도 별거 아닌 일로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저를 살리려고 치열하게 사셨던 거죠.”
팔자 센 어머니의 인생
“실은 제가 넷째인데 장남이 됐어요. 어머니는 저 위로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하늘로 보냈죠. 어머니는 팔자 센 여자의 인상을 줄까 봐 신경을 무척 쓰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넷째 녀석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셨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게 됐죠.”
어머니는 평생 많은 것을 잃고 살았다. 뱀띠 어머니는 범띠 아버지를 만나 무엇이건 재빠르게 완벽히 해내야 하는 긴장감으로 마음의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살포시 웃으시고는 금방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무엇보다 강한 모성애를 느끼곤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아버지가 싫어서 항상 어머니와 함께 안방에서 잠자는 아들을 살피느라 수면조차 부족했던 어머니는 이른 새벽녘, 동네 우물에서 그날의 ‘첫 물’을 길러오셨다. 부엌에 마련된 정화수 종지에 그 물을 채워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달 밝은 밤에는 앞마당 한가운데에 물동이를 놓고 절을 하며 가족의 평안을 기원했다. 초등학생 이만의의 눈에 어머니의 기도는 사랑, 그 자체였다.
중·고등학교는 광주에 있는 가난한 이모님 댁에서 머물며 다녔다. 한 달에 두 번쯤 집에 가면 어머니는 무거운 곡식자루를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을 걸어 큰 길이 나오면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태워주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죠. 열심히 이 악물고 공부하며 최대한 검약하게 지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차마 참고서 사게 돈 달라는 말을 못해 교과서로 고 2까지 견뎠던 것은 홀로서기에 방부제 같은 효과를 냈죠.”
어머니의 고생이 가중된 것은 아버지께서 50대 후반에 도랑을 건너다 대퇴골 골절상을 입었는데, 그때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목발을 짚으신 이후였다. 거의 모든 일들을 홀로 해치우셔야 했다. 그야말로 과로에 지쳤을 텐데도 자식들 앞에서는 힘들다고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래서였을까. 60대에 접어들면서 담배와 커피를 즐기셨어요. 전 아버지의 끽연에 반감을 가졌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담배에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부여되더라고요. 쓰레기 소각장에서 전기를 뽑아내고 분출하는 배기가스라고나 할까. 그렇게 힘에 부친 삶을 담배 연기에 실어 내보내셨던 거라고 느껴졌어요.”
심은 만큼만 거두고 불쌍한 사람 편에 서라
어느 날 청년 이만의는 시골 친구들이 화투 치는 데 구경 갔다가 집으로 불려가서 혼이 났다. 그때 어머니는 “농민들처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게 훌륭한 사람이다. 심은 만큼만 거두어라”라고 강조하셨다. 노력 없이 좋은 결실을 원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지금의 이만의를 만든 중요한 지침이 됐다.
“돈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자세를 길렀던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심어서 그만큼만 거두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죠. 명예나 지위를 통해 좋은 것을 원하거나 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건 어머니의 꾸지람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내부무 공무원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평생 공직자로 가져야 할 자세를 강조했었다. “펜대를 굴려먹고 살아도, 항상 불쌍한 사람들의 편에 서라.” 당시 시골에서는 공무원들이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지도 단속을 했는데, 같은 내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곤 했다. 친절하고 따듯한 사람, 오만하고 강압적인 사람 등 구분이 명확했다. 어머니는 이만의가 앞만 보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공직자보다는 따듯한 사람으로 살아 나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다.
“내 어머니는 평생 시골에서 사셨고 배움도 짧은 여인이셨죠. 하지만 몸소 가르쳐 주신 중요한 덕목은 잊힐 수가 없고 평생 가는 겁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라났고, 어머니의 투박한 한마디에 교훈을 얻고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게 된 거죠.”
시장(市長) 어머니의 소박한 장례식장
어느덧 이만의의 직함은 시장으로 바뀐다. 전라남도 여천시 시장, 목포시 시장을 지내고 제주도 부시장, 광주시 부시장을 거쳤다. 그리고 국방대학교에 들어가 국장급 공무원 연수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시장 출신 공무원의 모친상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화환은 1개밖에 안 들어왔다.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뜻이었고, 그래서 소박하지만 정성껏 모셨죠. 조문객을 많이 받아서 체면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허세를 경계하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소박함은 삶의 궤적과 동일했다. 아들이 잘돼서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환갑이나 칠순잔치도 마다했던 사람이다.
“제가 장관이 된 모습을 어머니가 못 보시고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 아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물론 장관이 됐어도 ‘애썼다’라는 말과 엷은 미소로 화답하셨겠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고생하신 만큼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것을. 한평생 가난에 찌들면서도 모정의 도를 실천하신 어머니의 생각과 말씀은 여전히 제게 존재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오늘도 제 곁에 여전히 살아계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머니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 현 로하스코리아포럼 이사장은 오늘날 어머니가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개인이든, 국가든 행복해지려면 어머니라는 존재가 전제돼야 하는데 이혼율 증가 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얼마 전 예비군 총기사고 문제가 생긴 것도 결손 가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걱정은 더 많아졌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위대함이 사라지게 되면, 가정의 문제로 시작해 여러 사회적 문제로 번지게 되죠. 결국은 국가적 문제로 자리 잡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에 나와서 행복한 꿈을 그리며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머니라는 이름이 무엇보다 강조돼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소중함을 되찾는 것 아닐까요?”
광복 70년을 맞는 2015년 현재, 스포츠는 경제와 함께 신생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한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된 이후 한국인들의 스포츠 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으면서도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를 창립하는 등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했다.
글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 아래 한국인의 국제무대 활약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하계대회(마라톤 김은배·권태하, 복싱 황을수), 1936년 베를린 하계대회(마라톤 손기정·남승룡, 축구 김용식, 농구 이성구·장이진·염은현, 복싱 이규환) 그리고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독일) 동계대회(스피드스케이팅 김정연·이성덕·장우식) 등 총 3차례의 올림픽에 모두 13명의 선수가 출전했을 뿐이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1900년 제2회 파리 대회부터 올림픽에 나섰고, 필리핀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1924년 제8회 파리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일본은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대회에 처음 참가한 뒤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에서 종합 8위(금 6, 은 4, 동 8)에 오르는 등 193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스포츠는 세계 수준은커녕 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안에 한국은 세계 스포츠 10강으로 성장했다. 놀라운 성장 속도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나라를 먹고살 만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줬던 한국 스포츠의 광복 후 70년을 살펴본다.
혼란기 이끈 두 효자 종목 복싱과 역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미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35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으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도 혼란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45년 11월 26일 이 땅의 체육인들은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경기 단체도 조선육상경기연맹과 조선축구협회 등이 속속 탄생했다. 1945년 10월 27일 열린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는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이어졌다. 올해 제96회를 맞는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은 1920년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조선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고 1948년 7월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 각각 동메달을 따며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온 세계에 알렸다.
이에 앞서 그해 2월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 한국은 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두 대회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열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열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강준호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과 1952년에도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전쟁 탓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195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한국은 복싱의 송순천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고 역도의 김창희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1940~50년대에 참가한 3차례 올림픽에서 한국의 메달박스는 복싱과 역도였다.
한국 스포츠의 메카 태릉선수촌 개장… 치열한 남북 경쟁
해방 이후 70년, 한국 스포츠 발전 과정에서 태릉선수촌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진천선수촌에 자기 자리를 거의 물려줬지만,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태릉선수촌과 인연을 맺지 않은 한국 운동선수는 거의 없다. 196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로, 국가 대표 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이 1966년 문을 열었다.
1960년대에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그리고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1966년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종합경기대회에서 선전하는 한편 196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장창선이 해방 이후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박신자를 앞세워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국제 대회에서 ‘스포츠 코리아’를 알리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도쿄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이 스위스와 홍콩에서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난 회담이었으나 남북 스포츠 관계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초반 탁구와 청소년 축구의 단일팀 구성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공동 입장 등 일정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1960년대에는 개인 종목의 프로 스포츠가 활기를 띤다. 1966년 6월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고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고, 김일이 이끈 프로 레슬링은 당시 국내에서 해마다 개최한 유일한 국제 대회인 동남아여자농구대회와 함께 국민적 볼거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아시아 무대에서 벗어나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1972년 뮌헨 대회 때 처음으로 올림픽에 얼굴을 내민 북한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1972년 뮌헨 대회 사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먼저 따자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양정모(레슬링)의 금메달로 응수하는 등 1970년대 내내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1974년 테헤란·1978년 방콕)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체제 경쟁의 측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스포츠의 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시기,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표어가 ‘선 체력 후 기술’이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전관왕에 오른 김진호, 1978년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인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 등이 이 무렵 한국 스포츠의 슈퍼스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1988년 서울 올림픽, 한국 스포츠 도약의 발판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발전의 토대를 착실하게 만든 한국 스포츠는 1980년대 들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꽃을 피운다.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은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 온 국력의 집결 과정이었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했던 아픈 기억은 두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체제를 넘어서서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서 화합의 계기가 된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1980년대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프로 스포츠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축구와 민속 경기인 씨름이 프로화돼 스포츠의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됐다. 축구의 경우 프로화에 따른 경기력의 발전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하는 등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28개와 은메달 28개, 동메달 37개를 획득했고 북한은 금메달 17개와 은메달 19개, 동메달 20개를 차지해 스포츠의 남북 경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등은 스포츠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1980년대의 스타플레이어다.
한국 스포츠 세계 10강을 굳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홈의 이점을 살려 종합 순위 4위(금 12, 은 10, 동 11)에 오른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종합 순위 7위(금 12, 은 5, 동 12)를 차지하면서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확실히 다졌다. 그해 알베르빌(프랑스)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동계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후 2006년 토리노 대회까지 한국은 쇼트트랙을 주력 종목으로 동계 올림픽에서도 세계 10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피겨스케이팅 김연아와 스피드스케이팅 이상화와 모태범, 이승훈 등의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2014년 소치 대회에서는 김연아가 금메달을 도둑맞는 등으로 인해 종합 순위 13위(금 3, 은 3, 동 2)로 주춤했지만 2018년 평창 대회에서는 다시 한 번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
하계 올림픽에서도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은 8, 동 7)이 쏟아지면서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원정 대회 최고의 순위였다. 축구가 박주영, 구자철, 기성용 등의 활약에 힘입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동메달을 따 국민들에게 금메달 이상의 기쁨을 안겼다. 이에 앞서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이승엽, 류현진, 이대호 등이 힘을 모은 야구가 9전 전승 금메달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 스포츠는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아마추어의 경우 국제 대회 성적이 특정 종목에 치우치지 않고 있으며, 프로에서는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선수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뛰고 있다. 특히 여자 골프는 1998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 투어 4관왕에 오른 데 이어 2015년 현재 통산 25승에 빛나는 박세리의 뒤를 잇는 ‘박세리 키즈들’이 세계의 그린을 휘어잡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진 사실은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신세대 선수들은 동메달을 따도 금메달을 딴 듯 기뻐한다.
한국 스포츠는 올해 프로 야구가 800만 관중을 겨냥하고 있고 다양한 종목의 생활 체육이 활성화돼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는 스포츠와 즐기는 스포츠가 엘리트 스포츠와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해방 후 70년, 속도를 우선시하며 나타난 압축 성장의 폐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 신명철(申明徹) 스포츠 평론가
편집국장과 편집위원, 편집위원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993년 버팔로(뉴욕주) 유니버시아드대회, 1995년 프로 야구 한일슈퍼게임,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주요 국제 대회를 취재했다.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이상헌의 칼럼이 실리지 않은 여성지가 없었다. 세계일보 칼럼 1000회를 기해 시작한 ‘기쁨세상’은 한 달에 한 번씩 가진 모임이 200회를 훌쩍 넘겼다. 이상헌(李相憲·79) 한국심리교육협회 회장은 이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전파한다. 그는 감사와 기쁨, 이른바 ‘감기’가 자신을 살렸다고 말한다. 강연과 집필활동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vk팔순이 다 된 나이에도 섹시한 뇌를 가진 이상헌 씨의 늙지 않은 삶의 나침반을 찾아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아기일 때 양잿물을 실수로 마신 저를 동네 장정들이 거꾸로 들고 병원까지 20리 길을 달려가 경추 연골이 닳아 체머리가 생겼고 이렇게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두뇌가 개발됐고 성장판이 늘어나 키까지 컸어요.(웃음)”
이상헌 회장은 ‘예비된 화였지만 화를 품은 복이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집필한 책만 150여 권, 이 중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3년 전에는 국민성공시대 대한민국 CEO독서대상도 수상했다. 평생 동안 어림잡아 한 2만권쯤 읽었다. 읽고 쓰는 일에 대해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연명하느라 절실히 매달렸다”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부터 얼마 못 산다는 선고를 수시로 들었다. 그만큼 몸이 여러 질병에 시달린 터라 몰입만이 고통을 잊을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었고 방송을 했고 강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의 대표작 도 이런 그를 우려하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가르침에서 시작됐다. “제가 ‘아파죽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그러더시더라고요. ‘죽겠다고 하면 죽는다. 아프면 견딜 만하다고 해라’라고. 그래서 통증이 죽을 것 같을 때도 ‘견딜 만하다’고 말하니까 또 견딜 만하게 변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 생명을 연장시킬까’하고 살아온 그는 “고난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방주사와 같다”고 한다.
80년이 가까운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그는 자신의 평생에서 지금이 가장 젊고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드는 것이야 어쩌겠냐마는 모든 기능상으로 가장 젊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전에는 늘 불안, 초조에 시달려 생전 웃지 않던 그는 70세가 넘으면서 해탈했는지 웃는 표정도 갖게 됐다.
그는 요즘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70대가 넘으면서 그를 괴롭히던 병들과 아픔도 하나둘 떠나가고 ‘오늘이 가장 젊을 때이고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라고 한다.
‘감기’가 그를 살렸다…‘운을 부르는 남자’
그는 매일 일기를 쓴다. 다만 일기장에 그날의 일 중 고마웠던 것, 좋았던 것, 기뻤던 것만 적는다. 그러다보니 매일 좋은 날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살다보니 평생 그를 괴롭힌 아픔도 감사할 일이다. 그는 “아픔도 즐기자고 마음먹었어요. 난 아파보니까 안 아픈 게 얼마나 행복한지도 알고, 다른 사람들 만나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에도 감사하게 됐죠. 남들은 못 아파봐서 모르잖아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데 뭐가 문제겠어요”라며 질곡의 삶에서 나온 긍정을 드러냈다.
감사나 감동할 때 엔도르핀의 4000배가 되는 다이도르핀이 생겨 신체의 각 기관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기적을 경험한 그이기에 가능한 것.
그는 어려서부터 오랜 투병 생활을 해서인지 의사들은 40세를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몸에 저체온증, 심근경색, 부정맥 등 25가지 병이 있다는 의사의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듣고 나서 그는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갖고 살아왔다. 그래서 두려움을 잊기 위해 눈만 뜨면 책을 손에 쥐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15년 동안 책 1만여 권을 읽었다. 책을 통해서 스스로 희망을 찾고 행복을 배워간 것이다. 책이 그를 변화시키고 희망, 성공과 행복에 대한 베스트셀러 저자로 설 수 있게 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강의와 글을 쓴 것도 죽음에 대한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강의를 하다가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하고 집 앞에서 길을 건너다가 오토바이사고로 의식을 잃기도 했다.
12년 전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허공에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기억이 끊겼던 이 사고로 무릎 연골이 상했고 요추 신경을 건드려 걸음이 편치 않아 지금까지도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또한 감사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얘기인즉슨 그 전까지는 매일 바쁘게 강연을 다니고 글을 쓰느라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해서 과로가 심했는데, 사고 덕분에 과로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유다. 또 다리를 다치고 나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고. 다리를 다쳐 거동이 어렵게 되자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집필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사고로 인해 집필한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전에는 강연과 병행하느라 시간에 치이면서 쓰던 글에 더 집중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글을 쓸 때는 몰입을 하므로 아픈 게 없다. 방송, 강연도 그렇고 끝나기 시작하면 또 아프다.
고난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방주사
그는 매일매일 애국가를 부른다. 혹자는 그를 애국자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안 부르면 죽을 것 같아서’ 부른다. 중학교 2학년때 6·25전쟁을 겪은 그는 피난길 폭격에 형제들을 잃었다. 눈앞에서 둘이 죽고 누이 하나가 중상을 입고 헐떡이는 동안 곧 따라오신다던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공포를 견디기 위해 울면서 애국가를 불렀다.
“해는 넘어가고 새소리만 들리고. 아는 노래라고는 애국가뿐이었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니 가사도 얼마나 좋아요. 울다가 노래 부르다가 졸다가 하고 있는데, 새벽 3~4시쯤 저 산 쪽에서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오시더라고요.” 평생 몸과 마음에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그에게 애국가는 일종의 진통제인 셈이다.
그는 “사람들이 불편한 건 불편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불편한 걸 참다보니 불편한 거예요. 저는 아픔도 즐기거든요. 남들이 못하는 경험을 하는 건데, 돈이 드는 것도 당연하고. 그게 다 제 재산의 일부예요”라며 가급적 긍정적으로 감사한 일을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이 회장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찾는다. 완전히 좌절했던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은 그의 전문, 큰 보람 중 하나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만 보니까 나빠 보이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자기 입장만 보기 때문에 서로 이해를 못하여 가정도 국가도 힘들어지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운의 늪에 빠져 있다면 이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삐걱거리는 한 걸음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한 걸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이렇게 하면 운이 좋아져. 자, 넌 할 수 있어”라고 하는 유쾌한 뻥과 긍정의 마취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다.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라는 의욕을 가지고 헤쳐 나갈 때, 뇌는 더욱 더 능력을 발휘한다고 그는 자신한다. “영원히 노화를 막을 수는 없죠.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살고 싶다는 유쾌한 예방주사 한 방으로 뇌 노화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살면 재밌잖소.”
그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면서도 정작 저는 아내(장윤정·70)와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는 아내와 40년 전, 50년 전 추억의 장소를 찾아 함께 식사를 해요. 할 얘기도 많아지고 너무 좋죠.”
매순간 그에게는 삶이 절실했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긍정에너지지만, 그의 앞에서 긍정적일 수 없는 일, 감사하지 못할 일이 얼마나 될까. 뇌의 스위치를 온오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그의 노후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이상헌 회장이 제안하다/건강한 뇌, 젊게 사는 법 30가지
01.아침에 깨어나면 맨손체조부터 하라. 에너지가 넘친다.
02. 하루 5분 마음의 양식을 소화하라.
03. 긍정적인 언어만 사용하라. 말대로 이뤄진다.
04. 날마다 30분을 걸어라. 헬스클럽보다 효과가 크다.
05. 친구 3명과 통화하라. 나이 들면 친구가 보물이다.
06. 날마다 친구 1명씩 만나라.
07. 좋았던 기억을 재생하라. 그래야 천국의 문이 열린다.
08. TV시청은 줄여라. 소모적인 프로가 자신을 황폐화시킨다.
09. 미리미리 치아를 손봐라. 호랑이도 이빨 빠지면 맥을 못 춘다.
10. 호기심을 가져라. 그것이 젊음의 비결이다.
11. 하루 100자를 쓰고 1000자 글을 읽어라. 뇌가 젊어진다.
12. 감사와 기쁨을 기록하라. 하루하루 성장한다.
13. 좋은 취미를 살려라. 취미가 없으면 무미건조해진다.
14. 웃음의 시간을 늘려라. 기쁨이 100배로 증폭된다.
15. 피로가 쌓이기 전에 휴식하라. 의사가 필요 없다.
16. 생각의 폭을 넓혀라. 그래야 존경받는다.
17. 노여움, 미움은 뼈를 삭게 만든다. 용서의 달인이 되라.
18. 진실하라. 그래야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
19.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노화가 발붙이지 못한다.
20. 과로는 노화의 주범이다. 알맞게 일하라.
21. 젊은이들과 어울려라. 나도 모르게 젊어진다.
22. 누구에게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위험한 말버릇이다.
23. 좋았던 일만 기록하라. 그것이 행복일기다.
24. 통화 대신 편지를 써라. 사고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
25. 손 운동을 하라. 뇌가 활성화된다.
26. 명상을 배워라. 신선 같은 사람이 된다.
27. 남이 잘하는 것을 찾아라. 장점을 보면 행복하다.
28. 불평은 불운을 끌고 다닌다. 좋은 말만 골라서 하라.
29. 누가 뭐라면 맞장구쳐라. 대인관계가 좋아진다.
30. 손주의 그림 하나 정도는 걸어둬라. 감동은 좋은 기운이 난다.
그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머니 생각을 하며 3일 동안 고심하며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원고를 보내왔다.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영락없는 조선시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아내,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며느리,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 그래서 안영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았다. 이 글은 안 씨가 보낸 글을 바탕으로 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도 더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밤,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철없는 그녀와 자매들은 동구 밖으로 은행을 주우러 갔다. 동구 밖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에선 비바람 부는 날이면 은행이 후드득 떨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은행을 줍겠다고 모여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두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은행을 줍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언니들과 신나게 주운 은행을 한 소쿠리에 채워 돌아오니,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곧 사랑채에 계시던 할아버지도 모셔오고, 온 가족이 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았다. 숨이 가빠 어쩔 줄 모르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보낸 지 5년 만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 여고 1학년이었다.
◇“모두들 어머니를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겐 방문객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마다 모든 상차림은 어머니가 맡았죠. 손님뿐만이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도 늘 고향 친척이 함께 묵었고 광주, 전주에 있을 때도 사촌 형제들이 함께 와서 학교를 다녔으니 언제나 대가족이었죠.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희생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어머니를 친척들은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의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 그리고 바른 품행은 시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시부모(안씨의 조부모)는 존중과 사랑으로 며느리를 지극히 아꼈다. 시아버지는 훗날 며느리의 병상이 깊어지자 온갖 한약을 지어다 손수 약탕관에 달이며 정성을 다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안씨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에 오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며 예절을 가르치고 바삐 움직이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일어나는 건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안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다. 막내인 안씨를 끔찍하게 귀여워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밉다는 안씨다. 아버지는 해방 후 군정 당시 중앙청 인사행정처 총무과장, 전라남도 도청 지방 행정 인사처장, 전주 도청 상공 국장, 초대 전주시장 등을 해 전근을 수도 없이 했다. 때문에 공직자들은 물론 이름 있는 예술인들, 안씨 종친들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오시면 어머니가 음식을 하셨어요. 손님들은 이 산골 벽지에 어찌 이토록 격식 있는 음식이 나오느냐고 놀란 적도 많아요. 큰 손님이 올 때면 아버지는 기생들도 데려다 가야금을 켜게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셨어요. 어머니의 그 인내와 음식 솜씨는 제가 평생 살아도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6·25,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는 꿈자리가 사납다고 했다. 공산군이 집을 차지하고 피난 간 아버지가 어디 숨었냐며 안씨 자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 고약한 꿈자리가 맞는지 확인하기 하기 위해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50리를 걸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피난처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동행했던 오빠가 어제 저녁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면서 벌벌 떨고 있더란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산을 넘어오다가 시체를 여러 구 봤다는 제보를 받고 할아버지는 오빠를 데리고 산자락을 뒤졌다. 아버지의 몸은 차가웠다. 7월 25일, 전쟁이 난 지 꼭 한 달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할아버지는 오빠와 둘이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산자락에 묻었다고 해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만 알리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감추셨어요. 우리들이 놀랄까 봐 울지도 못하고 슬픔을 삼키셨겠죠. 그때 제 나이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방마다 들어와 있던 공산당 무리도 나갔다. 정부는 동사무소 단위로 공안 위원을 뽑아 공산군 색출에 나섰다. 안씨의 오빠는 공안위원으로 뽑혀 공산군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복수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 있기는커녕 회의에 참석하는 아들에게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량이 넓은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이 공산군과 합세해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복수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어요. 혹여 오빠 말 한마디로 양민증을 못 얻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당시에는 위원 중 한 사람만 거부해도 양민증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양민증이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거든요.”
◇신앙과 가족 그리고 문학
“사춘기 소녀 시절 부모가 안 계신다는 상실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편지로 항상 ‘바르게 크거라’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죠. 그래서 매일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면서 고독을 달랬어요. 그리고 부모님 이름에 누가 될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문학과 가족, 그리고 신앙이었다. 여고 시절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성당 안. 그 성당 한가운데 맨발로 팔 벌려 서 있는 성모상에서 버선발로 달려와 그녀를 반겨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에 입교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의지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때로는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낸 그녀였다.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녀의 소녀 시절 인성 교육에 올바른 길잡이가 돼 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부모 없이 커가는 손녀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베푸는 삶과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은 그녀가 문학소녀로 바르게 성장하는 초석이 됐다.
“제가 25세 때 황순원 선생님께서 등단 추천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셨어요. 그러시더니 집에 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저희 할아버지가 계신 광양 집에 오시더니 할아버지의 선비 정신에 매료되셨는지 흔쾌히 추천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계기로 문학계에 등단한 지 올해로 50년, 천주교에 입교한 지도 50년이다. 등단 이후 수많은 수필과 소설 등의 글을 써 왔다. 특히, 그녀의 장편소설 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신사임당을 닮은 어머니 말이다. 효도만 잘 가르쳐도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그런 확신을 펼쳐 보고자 효도로 극진한 신사임당 가정을 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