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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0 액티브 시니어의 은퇴재무설계 가이드① 왜 은퇴재무설계인가?
- 은퇴의 시작은 여행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사전 체크 5070 액티브 시니어들은 앞으로 그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삶의 중심은 일에서 여가로, 직장에서 가정으로, 성장에서 관리로 변한다. 이에 따라 재산을 관리하는 재무설계 방식도 바꿔야 한다. 은퇴의 시작은 여행 가방을 준비하듯 꼼꼼히 챙겨야 즐겁고 안전하다. 은퇴재무 전문가 3인의 ‘믿고 맡기는 평안한 노후의 길’을 함께 떠나보자. 김태우 한화생명 은퇴연구소 부소장 평균수명이 50세를 조금 웃돌던 1960년(남 51.1세, 여 53.7세)에 5070은 그야말로 뒷방 늙은이였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한 지금 5070은 액티브 시니어로서 인생 황금기의 주인공들이다. 반백년 만에 완벽한 신분세탁이 이뤄진 셈이다. 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는 라는 저서에서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인간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올해 김형석 교수의 나이는 98세다.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 정도(78.3%)는 70세를 노인 연령의 기준으로 보고 있다. 인생 100세 시대에 5070은 노년으로 넘어가기 전의 ‘신중년’인 셈이다. 지금의 5070세대는 그 전까지 일과 가족 때문에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했지만, 50세를 넘기면서 ‘신중년’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줄 경제적 토대다. 5070 액티브 시니어가 2040일 때는 월급이라는 끊이지 않는 현금흐름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해왔지만 지금은 다르다. 물론 아직 현역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5070은 여전히 풍부한 현금흐름을 확보하고 있겠지만, 이미 은퇴한 5070은 사정이 다르다. 안정적 현금흐름이 끊긴 상태에서 그동안의 관행을 답습하며 모아놓은 돈을 빼내 쓰는 행위로는 평안한 노후생활을 장담하기 어렵다. 현역 시절 안정적인 생활이 노후에도 이어지기 위해서는 5070 시절을 잘 보내야 한다. 특히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지위를 노후에도 이어가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스마트한 재무설계가 필요하다. 재무설계는 재무 상황을 파악하여 관련 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추어 구체적인 자금 준비 등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5070세대가 이전까지는 월급을 통해 재테크, 저축, 목돈 중심의 재무설계를 해왔다면 지금은 새로운 관점, 가치관의 재무설계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재무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5070세대의 특성을 충분히 감안한 재무설계를 특별히 ‘은퇴재무설계’라 부르기로 한다. 여기서는 먼저 5070세대에게 ‘은퇴재무설계’가 필요한 이유 5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은퇴재무설계’가 필요한 이유 5가지 첫째, 속성이 다르다. 재무설계 측면에서 5070세대와 2040세대는 그 속성이 다르다. 2040세대가 샘물이 계속 솟아나는 우물이라면 5070세대는 더 이상 샘물이 솟아나지 않는 우물이다. 5070세대가 자신의 우물에서 죽을 때까지 목을 축이기 위해서는 막혀버린 샘물이 다시 나오도록 다른 길을 뚫거나, 우물의 물이 썩지 않은 상태에서 고갈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속성이 다른 2040세대 때 해오던 재무설계를 5070에도 그대로 적용할 경우 적잖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패션쇼에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2040 시절에 고수익·자산 중심의 재무설계로 재미를 봤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게 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5070 은퇴재무설계는 모아둔 자산을 어떻게 소비하고 지출할 것인가 하는 현금흐름 중심의 재무설계로 바뀌어야 한다. 둘째, 현역 때인 2040 시절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음악이 바뀌면 춤도 바뀌어야 한다(When the music change, So does the dance)”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전을 노멀(normal) 시대, 그 후부터는 경제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고 해서 뉴노멀(new normal) 시대라고 한다. 최근에는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져 기존의 경제이론으로는 예측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뉴애브노멀(new abnormal)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 5070세대가 살아왔던 노멀 시대는 어디에 투자하든 무슨 장사를 하든, 그리고 저축만 열심히 해도 돈을 불릴 수 있는 시절이었고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재무설계였다. 1980년에 시중은행의 평균금리는 24%였다. 5년 만기 재형저축상품의 금리는 무려 36%였던 적도 있다. 목돈을 만드는 데 얼마의 기간이 걸리는지를 간단하게 알아보는 방법으로 72법칙이 있다. 72법칙은 원금이 2배가 되는 데 걸리는 기간을 계산하는 공식으로 ‘72÷금리=기간’으로 산출한다. 과거 금리가 24%였던 시절에 1억 원을 예금해두었다면 원금은 3년(72÷24=3) 만에 2배로 불어난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엔 어떨까? 예금 금리를 2%로 가정하더라도 원금을 2배로 만드는 데 36년(72÷2=36)이나 걸린다. 예전처럼 예금으로 자산을 급속히 늘려가는 시대는 끝났다. 다른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 모아놓은 한정된 자산으로 긴 노후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엔 은퇴 자금으로 제법 큰돈을 모아놓았다 해도 안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은퇴할 때 노후자금으로 3억원을 준비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매년 2400만원을 노후생활비로 사용하고, 물가상승률은 2%라 가정하자. 이 사람이 3억원에서 언제까지 노후생활비를 꺼내 쓸 수 있을까? 이는 3억원의 운용수익률에 따라 달라진다. 3억원을 예금도 적금도 아닌 자신의 금고나 장롱에 넣어두고 사용할 경우(운용수익률 0%) 약 11년이면 소진된다. 운용수익률이 2%일 때는 12년, 4%일 때는 14년으로 큰 차이가 없지만, 7%일 때는 약 20년으로 노후자금 사용기간이 늘어나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요즘은 노후생활비를 이자로 조달하며 살아가는 금리생활자의 설 자리가 사라졌음을 뜻한다. 보다 적극적인 운용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셋째, 수명 증가 속도를 간과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100세 이상의 어르신은 몇 명일까? 통계청(2016) 자료에 따르면 3159명이다. 90세 이상 인구는 이보다 약 50배 많은 15만 명 정도다. 100세 이상 인구는 5년 전에 비해 72%, 90세 이상 인구는 67% 증가했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대수명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1980년에 66.1세였던 기대수명은 2015년 기준으로 82.1세로 2년마다 기대수명이 1년씩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생명공학 분야 전문가들은 금세기 안에 인간의 평균수명이 120세, 심지어는 140세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기도 한다. 5070세대가 2040 시절에 경험했던 것처럼 퇴직 후 10~20년을 더 산다는 전제로 노후를 준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5070세대 중 액티브 시니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의 기대수명은 더 길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서울대 의료관리학연구소와 건강보험공단 분석에 따르면, 소득이나 거주지역에 따라 기대수명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상위 20%에 속한 사람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83.7세로 소득 하위 20%의 기대수명(77.6세)보다 6년이나 더 길다. 한마디로 부자가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2011년에 상영된 이라는 영화를 보면 돈으로 인간의 수명을 거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상위 1%의 부자들은 불로장생(不老長生)하고, 나머지는 고된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영화 같은 현실이 우리 주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넷째, 가계 재무상태가 적절치 못하다. 5070세대는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이다. 이 세대는 전쟁과 굶주림, 경제개발과 IMF 경제위기 등 롤러코스트와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축적한 자산은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물질적 토대가 되고 있다. 통계청 ‘가계금융조사(2016)’ 조사에 따르면, 50대의 자산은 4억4302만원, 부채는 8385만원으로 순자산이 3억5917만원이다. 60대 이상은 자산 3억6648만원, 부채 4926만원, 순자산 3억1722만원이다. 5070세대는 평균적으로 3억원 정도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액수다. 문제는 자산의 구성이다. 50대는 전체 자산의 69%가 부동산이고, 60대의 부동산 비중은 79.1%나 된다. 60대 이상의 경우 금융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금융자산은 1656만원에 불과하다. 전형적인 ‘하우스 리치(house rich)’, ‘캐시 푸어(cash poor)’ 현상이다. 자산은 많으나 현금이 없는 것이다. 자산으로부터 현금흐름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조그마한 유동성 위기에 봉착해도 파산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어떻게 하면 자산에서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을까? 5070세대의 가장 큰 숙제다. 다섯째, ‘노후난민’만은 피해야 한다. 지금은 5070세대가 액티브 시니어로서 충분한 생활기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80세 이후에도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리란 보장은 없다. ‘노후난민’은 은퇴 후 자산이 계속 줄어드는 바람에 급기야는 의식주 같은 기본생활을 충족할 만한 자금조차 없는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돈과 수명의 경주에서 수명이 이기는 바람에 노후파산이라는 역설에 직면하고 만다. 적잖은 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명과의 경쟁에서 돈이 지도록 만드는 원인은 뭘까? 자산관리 소홀, 의료비 부담, 자녀부양 문제 등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자산관리 소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즘 같은 시대에 안전하다는 이유로 자금을 원금보장형 상품에 묻어두고 곶감 빼먹듯 빼먹으면 고갈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안전심리가 노후난민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셈이다. 일에서 은퇴했다고 투자활동까지 막을 내리면 곤란하다. 은퇴 이후에는 나를 대신해 돈이 일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은퇴 및 투자전문가인 노지리 사토시는 노후난민을 피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삶을 은퇴 전과 은퇴 후의 2단계로 구분하지 말고 3단계로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즉 ①직장생활로 ‘돈 버는 시기’, ②은퇴 후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자산 투자기’, ③투자활동을 끝내고 불린 자산을 느긋하게 소진하는 ‘완전 은퇴기’로 구성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을 쓰면서 불려나가는 ‘자산 투자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지리 소장은 은퇴 후에도 20년 정도는 자산을 불려나간다는 생각으로 투자를 계속하고, 75세쯤에야 투자로부터 은퇴를 선언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2. 의료비 부담: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본적인 의식주 관련 생활비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의료비는 늘어나는 게 보통이다. 운동과 식이요법 등으로 건강관리를 해보지만 도적처럼 슬며시 찾아오는 것이 ‘노후 질병’이다. 게다가 꽤 큰돈까지 삼켜버린다.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1인당 월평균 진료비는 30만2904원으로 전체 인구의 1인당 월평균 진료비(9만9315원)보다 3배 이상 많다. 70세 이후 보건의료비 지출은 소비지출의 15.5%나 차지한다. 노인이 금융자산의 상당 부분을 보유하고 있어 노인 부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조차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40년간 저축과 연금을 통해 노후를 대비했으나 배우자의 질병, 자녀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의 문제로 노후에 파산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 사회문제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후 의료비 지출은 일정연령이 되면 반드시 찾아온다는 점과 오래 살수록 위험이 급증하고 정도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3.자녀부양 문제: ‘73만7000원!’ 25세 자녀를 둔 부모가 한 달 자녀에게 쓰는 부양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성인 자녀를 둔 부모 10명 중 4명은 학교를 졸업했거나 취업, 결혼한 자녀를 계속해서 부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자녀가 사회에 진출해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면 부모의 자녀부양 의무는 끝나고, 부모가 노인이 되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선순환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요즘은 캥거루족, 부메랑족이란 단어가 유행할 만큼 부모가 성인 자녀를 돌보는 역부양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자녀부양’과 ‘부모봉양’이란 ‘더블케어(double care)’ 현상에 직면해 있는 5070세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 보인다.
- 2017-03-0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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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75세 청년' 김수경 생식박사, 건강의 진정한 의미와 정의를 말하다
- ‘생식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수경(金秀經·75) 박사는 식품기술사, 이학박사로서 1988년에 처음으로 케일을 동결건조, 생식제품을 만들었다. 이후 생식 전문기업 ‘다움생식’을 만들어 3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는 최근 를 집필하고 있으며 중국 쪽과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팔순을 향해 가고 있는 나이이지만 여전히 건강을 지키며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가 말하는 진정한 건강의 의미를 들어본다. 김수경 박사가 생식 전문기업인 ‘다움생식’을 만들면서 세운 모토가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원래 건강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인간 위주로 바꾸어갈 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것을 찾을 때가 아니라 원래의 먹거리, 원형에 가까운 먹거리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병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병을 고치나 김 박사는 최근 중국 쪽과 긴밀하게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중국에 가서 공산당 간부와 얘기했어요. 산업혁명 이후에 산업이 발전되며 걸어온 길이 미국이 가장 먼저다, 그런데 산업화하면서부터 공해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도 산업사회가 되면 미국이 걸어온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말해줬죠. 그런데 미국과 중국의 패러다임은 다릅니다. 미국은 예전부터 유목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김 박사는 미국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이기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김 박사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전체 13억 인구 중 당뇨 인구가 1억7000만 명입니다. 그리고 고소득 인구가 5억 명인데 그 5억 명도 다 환자라고 봐야 해요.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결과적으론 삶을 고쳐야 건강해지는데, 건강을 잃은 사람들이 의학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거예요.” 건강을 고치려면 삶을 고쳐야 한다. 이것이 김 박사가 지향하는 건강법의 핵심이다. “병원은 병이 있는 곳이지 건강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병이 있는 곳에 가서 병을 어찌 고칩니까?” 건강은 자신의 삶의 결과 “건강이라는 것이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있는 것도 아냐. 나한테 있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걸 발견해야 합니다. 왜 내가 건강이 나빠졌는가, 스스로 화두를 던져야 해요.” 김 박사는 선천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거나 불의의 사고를 겪었다든가 하는 것 외에는 전부 다 어떤 형태가 됐든 병은 자신의 삶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건강에 대해 말할 때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로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 남이 사는 게 아닙니다. 잘못 살아놓고 남보고 고쳐달라는 얘기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부부도 서로를 잘 모른다.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산다. 김 박사는 낮은 밤을 알 수 없고 밤은 낮을 알 수 없으며 낮은 영원히 낮이고 밤은 영원히 밤이라고 했다. 부부는 그런 낮과 밤과 같다. 부부도 서로를 모르는데 의사가 피 몇 방울 뽑아서 분석해보고 CT나 MRI로 조사한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생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저 그 순간 그 사람의 상태일 뿐. 그 정도의 정보로 한 사람의 건강을 논하는 거 자체가 난센스라는 게 김 박사의 주장이다. 내 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건강 김 박사가 바라보는 건강에 대한 시선이나 각도는 일반적인 의료의 정의와는 달랐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아주 안 좋았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말라리아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앓았거든요. 당시에는 모기를 쫓는 유일한 방법이 모닥불을 피우는 거였죠.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짐승 수준이었어요. 먹는 거, 입는 것이 그랬고, 몸을 씻는 것도 추석 때 한 번, 설 때 한 번 하는 수준이었으니. 아무튼 고등학교 3학년 때는 6개월간 허리를 못 폈어요. 20대에는 편도선염으로 두세 달에 한 번씩 열이 39도로 치솟았고 서른두 살 때는 척추디스크에 걸렸어요, 서른일곱 살 때는 폐결핵, 마흔두 살 때는 통풍이 왔죠. 집사람이 약사이고 주치의가 있었지만 해소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사람이 안 아프고 살 수 있을까가 제게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병으로 계속됐던 인생이었다. 고통을 통해 치유의 힘을 알았고 스스로의 몸을 낫게 한 것은 자연 치유의 힘이었다고 단정짓는다. “제 인생이 마흔다섯 살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어요. 사업에 실패했고, 온갖 병을 달고 살다 씨눈, 엽록소, 효소를 연구하고 그 식이요법을 직접 실천하면서 심신의 병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에 차서 씨눈, 엽록소. 효소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고 1988년 서해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생식사업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자연 형태 그대로 먹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생식사업이어서 그런지 그가 생각하는 건강에 대한 정의는 매우 간단명료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건강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의 건강은 자력으로 화장실을 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죠. 그럴 수 있다면 건강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 자력으로 화장실만 가도 건강한 것이다? 너무 늙게 보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중풍이 오죠. 그러면 화장실 못 갑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걸려도 화장실에 자력으로 못 가요. 지팡이 짚고 가면, 그것도 엄밀하게 보면 자력이 아니죠.” 하, 독특하고 확고한 신념이 있으신 분이다. 민망하지만 이를 어째. 어디 더 들어볼까. 매 맞는 남자들의 진짜 비밀 그는 특히 남자들의 건강은 여자들과 잠을 잘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여자와 잘 수 없다면 명만 붙어 있는 것이지 생명의 의미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975년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총 맞아 죽을 때 인천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집사람을 돕는 셔터맨이었죠. 그때 일흔세 살이었던 한 영감님이 ‘이보게 젊은이, 여기 100만원이 있네. 이 돈을 매일 자네에게 줄 테니 날 좀 젊게 해주게’라고 말했어요. 1975년에 100만원이에요. 엄청난 돈이죠.” 노인은 6·25전쟁 때 월남해서 돈을 벌었고 부동산 임대 수입만 월 1억원이 되는 자산가였다. 매일 100만원씩이면 한 달이면 3000만원 정도. 노인은 재차 그렇게 줄 테니 날 좀 젊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노인이 젊게 해달라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성 기능이었다. 근처 다방 여자에게 빠져 있었던 노인은 절실했다. “노인의 그런 행동이 내가 70이 되니까 이해가 돼요. 여자들한테 매 맞는 할아버지들 있죠? 그 능력이 안 되면 매를 맞게 돼 있어요. 남자가 힘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비아그라는 의료혁명입니다. 그건 그냥 의약품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건강에 대한 개념 정립이다 물론 김 박사도 나이듦이 자유롭지는 않았다. “이 나이 되니 술도 기운으로 먹어요. 친구들과 고스톱을 쳐도 옛날에는 밤을 샜는데 지금은 아파서 택도 없고요. 여자? 양귀비가 만나자고 하면 겁부터 나죠.” 그는 노화를 막을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다만 지연시킬 수는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 화장품은 피부를 보호하고 예쁘게 만드는 개념이었죠. 지금은 안티에이징입니다. 주름살을 없애고 지방을 빼는 등 화장품이 의료의 보조 기능을 하고 있죠. 물도 옛날에는 그냥 마시는 것이었지만 이제 물을 말할 때 건강 도모에 치료까지 얘기하고 있어요. 먹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건강식이란 것을 몰라요. TV에서 선전하는 건 건강식이 아니거든요.” 그는 건강식을 먹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건강식이 아니라 건강이란 개념부터 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두 가지 때문에 삽니다. 우선 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살죠. 내가 살기 위해서 숨 쉬고 물 마시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결혼해서 자신을 닮은 다른 나를 만들어서 종족보존을 성공시키는 거죠. 내가 사는 것과 또 다른 나를 살리는 삶이 온전하게 정립될 때가 건강한 삶인 겁니다.” 즐겁고 행복하려면 내려놔야 그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사람이 사는 것과 야생동물이 사는 것이 다를 게 없었다고 주장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삶은 사람이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이용하고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야생동물과 별 차이 없잖아요?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부터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어요. 그로 인해 수만 년, 수십만 년 이어온 인류 역사가 200년 만에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그 태풍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산업혁명과 통신혁명이 100세 시대를 만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예요.” 케일을 동결건조한 이유도 단순하다. “다른 채소보다 각종 미네랄 등이 많고 ‘야생의 힘’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란다. 어느 날 아내 엄성희 약사에게 간에 이상이 생긴 환자가 찾아왔다. 동결건조한 케일 분말을 권했더니 환자의 얼굴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환자는 병원에서 간 완치 통보를 받았다. 그 환자를 통해 약이나 수술이 아닌 자연의 치유력으로 건강과 면역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지금까지 그가 생식 등 건강보조식품을 만들고 있는 이유다.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 병이 저절로 도망가게 만들자는 그의 건강론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인생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은 어떤 전제가 있어야 가능할까? “내려놔야 해요. 내가 김정일과 이건희 회장과 동갑이거든요. 그런데 그들보다 행복해요. 이룬 일이 그들보다 많다는 게 아니라 현 시점에서의 얘기입니다. 한 사람은 엄청난 재산이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이고 한 사람은 죽었잖아요.” 대체의학과 한방을 공부한 그는 ‘자연음식 전문가’ 아내와 경남 사천의 바닷가에 황토집을 짓고 산다. 효소가 살아 있는 생식 밥상으로 건강을 챙기며 치유의 식재료들을 찾고, 개발하고, 널리 알리고 있다. “‘치료(cure)’는 의료적 행위입니다. 의사는 그래서 치료를 하죠. 우리 할머니들이 아픈 손자의 배를 쓰다듬었던 것은 치유(care)로 치료와는 다른 것이죠. 내가 나 자신을 돌보는 행위도 ‘치유’라고 하죠. 운동을 해서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은 ‘치유’의 행위입니다. 운동도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기에 치유의 영역인 것이죠. 좋은 음식도 면역력을 높여주기에 역시 치유죠. 그래서 면역에 좋은 음식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삽니다.” △ 김수경(金秀經) 고려대 농학과 졸업, 고려대 식품가공학 석사, 고려대 생명공학원 이학박사, 다움생식 대표.
- 2016-12-2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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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천재화가 이중섭을 만나고 오다
- 천재화가 이중섭의 삶을 조명한 연극 지난 9월 10일부터 25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됐다. 이번 공연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과 연희단거리패 30주년 기념, 올봄 세상을 떠난 의 극작가 김의경을 추모하는 무대였다. 김갑수(1991년), 지현준(2014년)에 이어 연희단거리패의 새로운 간판 남자배우로 자리 잡은 윤정섭이 이중섭 역을 맡았다. 윤정섭은 말 그대로 ‘무대 위에 이중섭을 올려놓았다’는 평을 들으며 매 공연을 흥분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의 동년기자단은 공연 첫날 공연을 관람하고 관극 소감을 나눴다. 비전문가 시니어의 입장에서 공연에 관해 순수하게 나눈 대화 내용임을 밝힌다. 편집자 주 동년기자단 김종억, 백외섭, 최원국, 전용욱, 장영희 이중섭의 생애와 화가로서의 활동에 드리운 한국 현대사의 비극, 가난, 이데올로기 문제가 교직된다. 고향 원산에서 조선의 황소를 민족 혼으로 여기며 소나 한국의 자연을 그리던 중섭은 스승의 권유로 동경 유학을 떠난다. 그는 일본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인 마사코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찾아와 결혼식을 올린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형이 공산당에 끌려가 처형당하자 어머니와 헤어져 가족들을 데리고 월남한다.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예술정신을 고집하는 중섭 때문에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고, 마사코는 애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며 그림에 몰두하지만 가난에 시달리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죽음을 맞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영희 연극 시작할 때 화가 이중섭이 언제 태어났고, 어떤 일이 있을 겪고 살아왔다는 것을 극 초반에 보여주는 장면이 멋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중섭 일대기를 표현하게 위해 사용된 소품과 음악 등이 감동이었습니다. 이윤택 연출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연극 곳곳에서 느꼈어요. 아주 작은 것들도 이렇게 세심하게 볼 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김종억 맨 처음에 연극 제목인 과 연극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연출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말했을 때 이중섭 화가의 그림을 보고 제목을 정했다고 해서 고민해 봤는데 저는 그 제목의 의미를 마지막 장면에서 찾았습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이중섭의 죽은 영혼이 먼저 간 첫째 아들의 손을 잡고 먼 길을 떠난다. 그래서 길 떠나는 가족이구나라고 이해했습니다. 전용욱 저는 이 연극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중섭의 가족이 다 나타났다가 일제강점기 유학생활로 한국을 떠나는가 싶더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태어나 살아왔던 원산을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이 모두 떠나가잖아요? 이중섭 삶 자체를 가족이 흩어지고 모이는 상황을 하이라이트로 묶은 것 같습니다. 가족이 헤어지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아이를 만나서 이승을 떠나 가족들한테 떠나는 과정 아닐까요? 김종억 그렇게만 설명을 하신다면 일반 평범한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특별히 이중섭이라는 화가의 삶에 집중을 하고 조명을 했다는 것은 그렇게 현실적으로 길을 떠나는 것에만 조명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 작가의 일대기를 통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고뇌를 하고 또 그 속에서 화가로서 살아온 이중섭을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냥 길만 떠나는 건만 생각했다면 일반이랑 똑같은 거잖아요. 장영희 저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맞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중섭이 원산에서 어머니를 떠나오고, 부인인 남덕이 일본으로 가버리면서 상당한 외로움을 느끼죠. 그러면서 자기의 성기에 소금도 바르고 안타까운 장면들이 나왔잖아요. 마지막에 하늘로 가는 장면에서는 아들과 함께 가요. 어머니, 남덕이, 아들들과의 이별로 인해 굉장한 상처를 받았구나. 그 의미에서 길 떠나는 가족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리고 연극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데 정말 가슴이 설렜어요. 이중섭이라는 영혼을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거였잖아요. 그래서 아주 기분이 묘했습니다. 두 시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극을 기다렸습니다. 전용욱 이중섭 보다 더 많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이 시대의 아픔을 간직해왔기 때문에 인지도도 높고 그 사람을 택했기 때문에 극화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거라고 봅니다. 사실 나이 들어보니까 젊은 시절을 살아봐서 그런 건지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장영희 첫째는 이중섭이 화가로 살면서 돈이 없었죠. 일본에 갔더니 장모는 자기 딸만 지키겠다고 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잖아요. 이중섭 평전을 읽은 뒤 연극으로 봐서 그런지 실제 이중섭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에서 이윤택 연출가가 큰 아들을 목각인형으로 만들어서 표현한 마지막 장면이 최고의 명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연극이라는 특유의 매체를 통해서 우리한테 들려주고자 했던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 같아요. 김종억 누구나 결국에는 가야하는 곳이잖아요. 이중섭이 자기 부인을 사랑해서 일본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결국은 “나는 여기 고향, 흙이 땅이 있어야 자기 작품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막상 못가는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고향, 땅, 어머니 이런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정서를 예술가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나도 수필을 쓰는데 결국은 글의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 고향이 깔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어린 시절 시골집이 지금의 인천 공항이 있는 곳이에요. 지금 내 마음 속에서만 자리하고 있어요. 언젠가 제가 미술을 배우면 상상 속에 있는 내 어릴 적에 집을 좀 그려보고 싶어요. 전용욱 유년기 땅, 우리 동네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소중하고 오래가는지 알 수 있는 거죠. 이중섭의 땅도 그렇게 밖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최원국 저는 연극이 예술가로서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조명하는지 알았는데 예술가라면 어떻게 하면 예술가로서 성공했다 이런 것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인간 이중섭만을 다뤘더라고요.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을 거 같다고 느꼈습니다. 일본에서 딴 화가의 그림을 모방했다고 했을 때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을텐데 생각했습니다. 백외섭 연출가 설명 중에 미술은 연극에서 표현을 할 수 없으니까 7분 동안 그린 것이고 무대를 하나의 그림처럼 표현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솔직히 연극을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사실 적응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이중섭에 대해서는 알고 있고 좀 재미있는 장면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을 위해 눈이 번쩍 뜨이는 무대가 좀 더 있었으면 했습니다. 연극을 좀 더 많이 보면 이해할까요? 장영희 저는 이 작품에서 핵심만 얘기했다고 생각해요. 연극에서 잘 표현했고 전달했어요. 그 사람의 고뇌, 사상, 왜 제목을 길 떠나는 가족이라고 지었어야 했는지 많이 공감했습니다. 이중섭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조금 알고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종억 인간적인 고뇌가 결국 어떻게 녹아서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됐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상병 시인도 말입니다. 그 분 또한 남겨진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삶을 조명해보면 술을 한시도 입에서 떼지 않으시고 사시다 생을 마감했잖아요. 하지만 예술가로서 족적 남길만한 시를 남겼잖아요. 그런 삶의 과정 속에서 글을 남길 수 있다. 예술가의 현재성이 말할 수 있죠. 맥락에서 보면 이중섭도 정말 평탄한 집안에서 잘 만나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가세가 기울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등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좋은 작품으로 승화됐다고 유추 해석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용욱 순탄한 삶을 살아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예술가가 드물잖아요. 이중섭도 기복이 크고 힘든 삶을 살았던 거죠. 그랬기 때문에 시대에 남는 강렬한 작품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2016-10-11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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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역사, 인천 상륙작전
- ‘세월은 인생을 주름지게 하고, 포기는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가슴을 진하게 울린다. 필자는 수많은 혹평 속에서도 상영되는 영화, 나라의 역사를 좀 더 알기 위한 이 작전을 보기 위하여 영화관을 찾았다. 우리나라 아픈 역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실질적인 정부가 없었던 한반도는 38선 이북, 북한군의 기습 아래 남북 전쟁이 발발한다. 불과 사흘 만에 남한의 서울은 북한군에게 함락이 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이 모두 점령을 당한다. 국제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반도의 허리인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고, 그 기세로 강원도까지 남한에서 북한군을 몰아내기 위한 엄청난 작전을 시도한다. 일명 'OPERATION CHROMITE' 라고 한다. 이름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더글러스 맥아더는 대한민국의 대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천 상륙작전은 대략 5000:1이라는 성공 희박의 전투 앞에, 맥아더가 이끄는 국제 연합군이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 험난한 전세를 대 역전시킨 아주 기념비적인 군사 작전이다. 첫 번째로 맥아더의 지시 아래 대북 첩보 작전, 일명 X- RAY 작전에 투입되는 해군 첩보부대의 임무가 주어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인천 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작전으로, 인천으로 가는 길, 즉 서해를 뚫고 가는 기뢰를 확보하는 일이다. 영화는 X-RAY 작전에 투입되는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950년 9월 15일 8인의 첩보원들은 장학수 대장(이정재) 주도 아래 북한군 스파이로 잠입한다. 그들은 인천의 수문을 뚫어야 하는 임무로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한다. 북한군은 인천 앞바다 수로 주위에 주둔하며 수많은 포대가 바다를 향해 포진하고 있다. 이 삼엄한 부대에 첩보원들은 북한군으로 위장하고 잠입하여 스파이로 활동을 시작한다. 8명의 첩보원들은 모두가 오로지 조국을 위해서 가족, 자식을 등지고 몸 바친 장병들이다. 특히 장학수 대장에게 왜 이 전투에 지원을 했느냐고 맥아더는 묻는다. 장학수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어서 지원했다.’라고 대답한다. 그 말에 맥아더는 감동을 받는다. 맥아더(리암 니슨)의 특명을 받고 인천으로 떠나는 장학수는 대원들에게 말한다. ‘단 한 명이 남더라도 인천의 길을 열어줄 작전을 꼭 실행하자’라고 모두에게 당부한다. 이에 맞서는 잔인 무도한 북한군 사령관 림계진(이범수), 그는 스탈린 사상과 김정일 1인 독재체재의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북한의 인천 교두 보를 지키기 위해 주둔한 극악무도한 북한군 사령관이다. 장학수가 이끄는 팀이 스파이임을 알게 되며 두 사람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며 흥미진진하다. 림계진의 잔혹한 연기와 대위 장학수(이정재)의 멋진 순발력은 과히 탑 배우의 이름값을 한다. 끝내, 장학수는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며 조명탄 신호를 쏘아 올려 보내고, 이것을 본 맥아더는 드디어 인천으로 향한다. 긴장과 소름이 끼치며 스릴이 넘치는 장면들이다. 보급로가 끊긴, 남한 주둔 북한군과 국제 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은 시작되고 장학수는 임무를 마치고 림계 진과 처절하게 싸우다 결국, 함께 목숨을 거둔다.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실질적 주역들, 8인의 숨은 영웅들의 애달픈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줄거리였다. 우리나라 과거를 비추는 거울 역할의 아픈 사연들이다. 이 영화는 결코 단순한 첩보영화가 아니었다. 유엔군의 참여로 9.28수복까지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애써온 우리 영웅들의 이야기를 인간적으로 재구성한 참으로 의미 있는 대 역사극이었다. 마지막으로 승리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장병들 속에서 장학수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장면이 눈시울을 적시며 감동으로 다가왔다. X-RAY 작전으로 사라져간, 실제적 모든 부대원들에게 깊은 애도와 박수를 보내며 이 역사적 슬픈 사건을 필자는 후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 ‘세월은 인생을 주름지게 하고, 포기는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는 명언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 2016-08-0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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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6월에 생각하는 어느 소녀의 기억 1. 2. 3
-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 2016-06-1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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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바다의 푸른 넋, 한 생애 젖어들고
- 이재준(아호 송유재) 봄 바다, 물이랑 위 바람이 너울질 때, 깊이 따라 색의 스펙트럼(spectrum)이 펼쳐진다. 더 깊은 곳의 쪽빛에서 옥빛으로, 얕은 모래톱 연두의 물빛까지 그 환상의 색 띠를 보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쉽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이 아프게 떠오른다. 바람 따라 물결은 끝없이 흘러가고 또 밀려오지만, 사념(思念)의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는다. -밤하늘 별빛 바라보는/맑은 눈에 고이는/한 방울 눈물의 깊이에서/바다가 태어나듯- (허만하 시 ‘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에서) 전혁림(全爀林 1916~2010) 화백은 남해의 통영에서 태어나 94세로 장서(長逝)할 때까지 바닷가를 떠난 일이 없었다. 통영수산학교 재학 시부터 그림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해방 후에는 유치진(희곡, 1905~1974), 유치환(시, 1908~1967), 윤이상(음악, 1917~1995), 김상옥(시조, 1920~2004), 김춘수(시, 1922~2004)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정물’ 입선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1952년 그 유명한 ‘밀다원(蜜茶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1950년 부산지방 최초로 추상회화를 수용한 주인공이며 1955년까지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미술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는 부산 대한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연구하여 훗날 도자화(陶瓷畵), 도조(陶彫), 채색테라코타의 내공을 쌓았다. 1976년대까지 부산에 주로 머물되 통영 일대와 바닷가 갯마을 풍경을 진한 청색조의 활달한 붓놀림으로 그리면서 추상화와 부감(俯瞰)의 구도를 과감히 활용하였다. 1977년 통영으로 귀향, 임종 시까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5월 ‘전혁림 미술관’을 향리에 세웠으며 2005년에는 ‘구십 아직은 젊다’의 표제로 개인전을 여는 등 오방색의 평면, 입체오브제, 도자기, 목조(木彫) 등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활동으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이 그림 ‘충무항’은 1980년대 통영 귀향 후의 작품으로, 반추상의 부감법이 나타난다. ‘김 과장 전시장 가는 날’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아트페어 개막 날, 참여한 화랑에서 원로·중진미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저렴하게 판매할 때 구입한 작품이다. 그 화랑 대표는 요즈음 만나도 이 작품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산자락은 노을에 설핏 물들고, 조감(鳥瞰)으로 된 구도 속 낮은 산과 바위로 나뉜 바다엔 고깃배 몇 척이 한가하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어항의 실경이 반추상 기법의 꽉 찬 밀도로 그려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바다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일상의 리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화가는 정물이나 모판[木板] 위에 올린 채색화, 도자화 여타의 작품 속에서도 푸른 바다 이미지는 빠뜨리는 일이 없다. ‘장롱 깊숙이 보관되었던 한복에 저절로 바랜 색상이나, 건물에 칠한 단청의 미’가 있다고 평자는 말한다. 노상, 바다가 이 화가 의식에 잠재되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도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바다 이미지가 여러 장르의 미술 작품으로 스며들게 된 것이리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 유학도 하지 않고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나라 미술의 연원을 찾고자 한다.’는 이 화가의 부단한 노력이, 한때는 지방에 묻힌 채 저평가되었던 질곡의 시절을 넘어, 큰 예술인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바다를 주제로 미술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어찌 한 둘일까마는, 온 생애를 푸른 바다에 넋을 적신 김한(1931~2013) 화백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함경북도 바닷가 명천포구의 ‘솔골마을’에서 태어나 조금 남쪽, 성진항의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졸업 시 발군의 그림 그리기로 특기상을 받으며 화가를 꿈꾸었다. 한 집안의 장손이 ‘환쟁이’가 될 수 없다는 부친의 결사반대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식만 마치고 가출하여 그림과 문학에 골몰하며 어려운 현실과 부딪쳐 나갔다. 6·25가 터지자 그 와중에도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만으로 단신 남하하였다. 네 해 뒤 천신만고 끝에 따로 남하한 부모와 동생들과 부산에서 상봉하였으나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던 조부모와 남동생 하나는 고향에 남은 채였다.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장남의 사명감과 냉혹한 삶의 괴리 속에서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였지만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비로소 화가의 길에 입문하였다. 간판을 그리고, 무대장치를 돕거나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미군의 후의(厚意)로 베트남 전쟁 시 파월, 3년 여 동안 초상화 등을 그리며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주제는 두고 온 고향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고깃배 몇 척이 고작인 가난한 포구, 어민의 고단한 삶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려냈다. 특히 남편의 무사 귀가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 어부 아낙의 아픔을 멍 자국 같은 짙은 청회색으로 표현하였다. 화가 자신이 문학에 심취했던 깊은 소양이 화문집(畵文集)을 출간할 만큼 높은 수준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서사적이며 설화적이다. 이 그림 ‘회(懷)’도 열매 가득 달린 나무 아래 모자의 행복한 순간을 우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좁은 화폭 속에서도 사랑과 풍요로움이 가득 넘친다. 푸른 이마에 어린 우수를 노란 꽃 한 송이가 달래주고 있다. 과장된 눈빛이나 부푼 손가락은 역설적임에 틀림없다. 가난하고 피곤한 아낙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려는 화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사동 화랑 경매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낙찰 받을 수 있었다. 1995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여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천착(穿鑿)한 공로를 공인 받았다. 이후 왕성한 작업으로 2013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줄곧 푸른색 고향바다를 화폭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온통 고향과 추억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그림은 목젖을 메이게 하는 아릿함이 가득 고여 있는, 그림으로 그리는 애조 띤 서정시이다. 그의 푸른색은 공간을 알리는 색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색”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한다. 전혁림이나 김한 화가에게 바다는 푸른 넋이었으며, 피돌기와 같은 숙명이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 2016-06-1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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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인천상륙작전 격전지를 가다... (1)인천 자유공원에서
- 5월의 마지막 주말에 친구와 월미공원을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동인천역에서 만난 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지사 발걸음을 하였으니 동인천에서 시작하여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그리고 월미공원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하였다. 동인천역전은 50여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50여년이라고 하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세월인데 막상 그곳은 세월의 무게가 살짝 비켜간 것처럼 올드한 모습에 왠지 모를 정겨움과 친근감이 느껴졌다. 역에서 출발하여 자유공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면도로에는 철물점, 전기 및 전자제품 상점 등이 다닥다닥 접해 있었고 그 옆으로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 희생자 추모탑이 나타났다. 참으로 끔찍했던 그 사건도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는 지워버린지 오래되었으니 인간의 뇌의 저장능력에 한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9년 10월의 마지막 날에 인현동 5층 건물 2층에 있던 40여평 규모의 호프집에서 불이나 순식간에 3층 당구장까지 솟아오르면서 52여명의 희생자가 났는데, 그 중에서도 학교 가을축제후에 뒤풀이 하던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던 안타까운 사고였다. 잠시 희생자 추모탑에서 머물다가 발길을 옮겼다. 제물포 고등학교를 끼고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주택 담장에는 무르익어가는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인천에 머물렀던 필자는 옛 생각에 젖어 친구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면서 오르는데 추억의 홍예문이 불쑥 나타났다. 청소년 시절에 잠시 이 곳을 지나다니면서 신문배달을 하든 고단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인천 홍예문(虹霓門)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으로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석문(石門)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08년도에 일본공병대가 만들어 혈문(穴門)이라고 불렸다. 당시 인천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다고 한다. 광복 70년이 지난 아직도 일제의 흔적들이 이렇듯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에겐 아픈 기억이지만 절대 잊지는 말아야겠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어 쾌적했다. 특히 곳곳의 나무그늘 정자에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였고 그들 옆에서는 할머니들이 그룹을 지어 음식을 드시면서 이야기장단에 빠졌다. 참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자 인천지역의 학도들은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유지에 힘쓰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남녀대원 3,000여명은 각각 현역으로 자원입대하여 조국에 젊음을 바쳤다. 드디어 자유공원 정상에 오르니 거대한 동상 하나가 불쑥 눈에 들어온다. 한 손에는 쌍안경을 들고 인천상륙작전 지역이었던 월미도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자유공원의 상징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단체로 가끔 한번씩 와 보았던 추억의 그 장소에는 옅은 분홍색 장미와 노란색의 탐스러운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잘 가꾸어져 있었다. 훌쩍 지나가버린 50여년의 세월이 무상하다.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다. 우리나라와는 역사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여 있다. 하지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혹, 그 때 내친김에 만주를 폭격했다면? 지금의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통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2005년 9월11일에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55주년을 나흘 앞둔 11일 인천 자유공원 일대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의 대규모 동시 집회가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이때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폭력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경찰 모두 부상자가 속출하고 공원 일대는 난장판이 됐다. 결국 동상은 존치되었고 지금은 평화롭게 월미도를 응시하고 있는 예의 그 모습으로 역사의 현장에 남아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직은 뿌연 황사가 시야를 가려 월미도가 흐릿한 안개 속에 떠있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차이나 타운 으로 발길을 옳겼다.
- 2016-06-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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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유혹 Part 1 문사철] 문사철(文史哲)이 묻어나는 삶, 인문학과 교제하다 성찰에 빠지다
- 박원식 소설가 인문학 열풍이 거세다. 인문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강좌와 콘서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얼마 전 나는 찻집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옆 자리에 앉은 50대 꽃중년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걸 보았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을 두고 벌이는 갑론을박이었다. 은 여순반란사건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동과 굴곡을 파헤친 소설로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봄날의 햇살이 화사하게 들이치는 찻집 창가에 둘러앉은 꽃중년들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 모두 흐뭇하게 합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한 아줌마가 조정래 소설의 문체가 지닌 몰개성(沒個性)을 문제 삼으면서 갑자기 논쟁의 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꽃중년 특유의 드높은 목청이 실내 가득 번지어 자못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귀는 은근히 즐거웠다. 흔히 찻집에 모여 앉은 아줌마들의 화제라는 게 돈 얘기나 건강 타령, 또는 자식 자랑 따위의 수다이기 십상이지 않던가. 범속한 일상의 권태와 스트레스를 그저 범속하게 푸는 일을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게 우리네 삶이지 않던가. 그러나 이 아줌마들은 ‘역사’와 ‘문학’을 얘기하며 봄꽃처럼 생동하는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신선하고도 수려한 정경이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해방전후사를 주제로 삼은 어느 인문학 강좌의 수강생들이었다. ‘문사철(文史哲)’에 주목하는 이유 인문학이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에 관한 통찰을 돋울 수 있는 공부이다. 머리에 지식을 우겨넣는 지식 축적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파랑(波浪)을 유쾌하게 건널 수 있는 구체적 항해술을 배울 수 있는 지혜의 전당이다. 자비로운 신에게 의탁하고서도 어쩔 수 없이 엄습하는 불안과 고독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올 수 있는 노하우의 숲이다. 나이를 먹는 일, 늙어가는 일은 쾌거일 수 있다. 내부에서 날뛰는 욕망이라는 망둥이를 잘 제어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살아온 경륜의 힘으로 눈 없이 헤매는 욕망에 눈을 달아줄 수만 있다면 노경(老境)이란 실로 삶의 절정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놈이 어디 만만하던가.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욕망이라는 난적을 어떻게 해치우느냐에 달려 있다. 인문학이라는 인간학에 조예를 키울 경우 이 난처한 욕망의 농간을 제어할 병법을 체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 움직이는 방향과 동향을 성찰하고 통찰하게 하는 학문이 아니던가. 시니어의 삶에 문사철이 붙어 있을 경우 더 즐겁고 더 행복할 수 있다.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노년의 정신에 촉과 가락이 서려 새삼 감각적일 수 있으며 한결 치열할 수 있다. 세상은 그럴싸한 욕망들이 날뛰는 난장이지만 대체로 재미가 없다. 삶이 재미없는 건 빤한 수족관처럼 너무도 범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학과 긴밀한 교제를 할 경우, 범속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이 한낱 진부한 습성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밤하늘에 빛나는 초록별 하나처럼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현실의 억압과 틀에 얽매일 수만은 없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문학은 일깨워준다. 인문학에 취하다 내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아울러 여자로 몸 바꾸어 조선을 만날 수 있다면, 꼭 한번 만나 수작을 걸어보고 싶은 사내 하나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다. 예술에, 학문에, 처신에 추사는 인생의 모든 종목에 탁발(卓拔)했다. 타고난 준재였는가 하면,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추사를 생각하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그가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홀로 엄동설한을 견디던 모습이 떠오른다. 병든 몸으로 사시나무처럼 삭풍에 떨면서도,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곧추세운 자세로 방바닥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는 게 아닌가. 후세 사람들 그 누구도 추사의 정신세계를 따를 수 없다는 게 이미 중론이지만, 추사가 지녔던 시적 상상력, 다시 말해 문기(文氣)라는 건 가히 독보적이자 독창적인 것이었다. 추사는 이 장려한 자기 세계를 무엇으로 구축했는가. 모태에서 받은 천품(天稟)이라는 게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 문사철의 힘이 그를 추동했다. 문사철의 방대한 섭렵과 그에 따른 도저한 서권기(書卷氣)! 추사는 그 자체로 인문학의 바다이자 대륙붕이었다. 공부가 많았으니 혜안이 열렸으렷다. 삶이란 실로 가소로운 곡예일 수 있으나 추사에 이르러선 얘기가 달라진다. 추사는 이마에 매단 등불처럼 환한 혜안으로 걸릴 게 없는 활보를 거듭했으며, 예술과 학문의 산정에 도달했다. 풍류에도 소홀한 바가 없었으니 그가 후끈하게 열을 냈던 로맨스가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이 매력적인 조선의 인걸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남정네들에게 널리 권장한 풍류의 필수 종목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독서요, 둘째는 여색이고, 셋째는 음주다. 고명한 사대부가 웬 여색과 음주를 권했을까, 그렇게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셋 중 독서를 으뜸으로 내세운 데에서 추사의 깊고 깐깐한 속뜻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을 견디자면 때로 주색잡기도 썩 괜찮은 묘약일 수 있지만, 그러나 야야, 놀 때는 흐벅지게 놀더라도 미리 공부부터 해두렴! 이런 훈계였을 게다. 나날이 일삼은 독서로 세상 물정과 인간에 대한 개안이 있고 난 뒤여야 풍류도 비로소 떳떳하다는 경책일 게다. 삶을 읽는 꿈과 지향을 가지지 못한 자는 여색과 음주를 즐길 자격조차 없다는 힐난으로도 들린다. 추사뿐이랴. 아름다운 생을 살다 떠난 사람들의 족적엔 인문학적 수련과 체험의 양광(量光)이 아롱진다. 인문학의 저수지에 풍덩 몸을 담가 얻은 에너지로, 삶의 시원한 지평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얘기는 신빙성 있는 오래된 뉴스다. 시니어들은 대체로 건강과 시간, 그리고 돈을 행복의 척도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들에 관한 과욕은 오히려 타락을 부추긴다. 인문학이 유혹하는 대로 부응하여 지혜를 거둬들일 경우 행복의 척도부터가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인문학은, 물신(物神)이라는 주님에게 길들여진 욕망기제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대안과 상상력을 열어주기도 한다. 인문학이라는 성찰의 숲에 뛰어드는 일은, 그래서 기쁜 제전이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6-06-0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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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6년生, 결핍과 허기의 시대
-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
- 2016-06-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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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6월은 나라를 생각하자
- 5·18 유혈진압, 권력형 비리와 부패, 언론통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등에 대항하여 민주화 요구가 심화되자 전두환 정부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단체로 구성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1987. 6. 10. 박종철 고문 살인 규탄과 호헌 철폐를 촉구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범국민적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이에 차기 여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6.29 선언 후 IMF 구제금융을 받기까지 10년간 노사분규가 극심하였다.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산업현장도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6.29선언 보름 전 서울 강북구 소재 S버스회사 간부가 한 근로자를 해고하겠다며 당시 담당 근로감독관이었던 기자에게 찾아왔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날 강남구 소재 버스회사에서 노사분규를 주동하다가 해고되었는데, 근무이력을 숨기고 입사하였다가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지자 전력을 공표하며 근로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해고사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고시기가 좋지 않다. 6개월 전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지금 해고하면 섶에 불을 지르는 격이어서 분규가 장기화될 수 있으니, 노동조합 위원장과 사장님 및 간부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전하고 오히려 회유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 회사는 듣지 않고 그 근로자를 해고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태우 후보의 6.29 민주화선언이 있었고, 노사분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회사도 해고된 근로자가 주동이 되어 노사분규를 야기하여 6개월가량 버스운행이 중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사 간부 한명이 답답한 나머지 차량운행을 시도하기 위하여 농성장으로 버스를 진입시키다 근로자를 다치게 하여 구속당하는 사건이 있었고(당시 버스회사는 간부들이 버스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행이 중단될 경우 거액의 버스 구입비가 잠식됨), 노동조합 위원장도 어용노조로 몰려 물러났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문제가 발생해야 일을 한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매번 좋지 않은 앞날이 예견되는데도 대책 없이 정쟁만 일삼다가 큰 고역을 치르곤 하였다. 임진왜란은 이율곡 선생 등이 왜의 침략을 예견하며 10만 양병설을 제안하였음에도 노론과 소론이 나뉘어 정쟁만 일삼다가 7년간 전국이 유린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병자호란 역시 당시 정치권이 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전파와 화해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대비책 없이 다투다 침략을 당해 왕이 남한산성 앞에서 항복하고 공물 공녀를 받치는 치욕을 당했다. 한일합방 역시 쇄국파와 개화파가 대책 없이 대립만하다가 1910년 이후 45년간 일제에 강점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 밖의 6.25 전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건사고 역시 대책 없이 수수방관하다가 발생하였다.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첫째, 저출산과 고령화로 항아리형 인구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노동력과 소비가 줄어 산업활동이 크게 위축됨은 물론, 복지비의 증가로 국가재정이 크게 악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가계부채는 세계 2~3위이고, 청년실업률은 11%(체감실업률 25%)나 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효 사상도 무너져 우리 사회가 암담하다. 둘째, 건설 금융 전자 화학 통신 조선 자동차 등의 기술력이 선진국에 뒤지고, 중국 인도 등 후발국은 턱 밑까지 쫒아왔을 뿐만 아니라, 이세돌과 알파고 대결이 시사하듯이 자동화 등으로 앞으로 일자리가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셋째, 북한은 핵실험을 비롯한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고, 일본 중국 등 주변 열강 역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1조원이 넘는 방산비리가 적발되는 등 모든 곳에 비효율(부패 부조리 편가름 등)이 많다. 넷째, 미래가 불투명함에도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비전하나 제시하는 법 없이 패권경쟁만 일삼고 국민은 단합하지 못하고 이합집산하고 있다. 6월은 나라를 생각하자. 우리는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한 후 대안을 만든다고 법석을 떨지 말고 조금 여유가 있는 지금 대안을 만들 것을 권한다. 가령, “미래위원회” 같은 범 기구를 만들어 최소 100년 앞을 내다보며 대한민국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과 함께 공유하며 개선해나가야 한다.
- 2016-05-10 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