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은 6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전시) 샤갈 러브 앤 라이프展: 그것은 사랑의 색이다
일정 6월 5일~9월 26일 장소 한가람미술관
이스라엘 박물관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샤갈(Chagall)과 그의 딸 이다(Ida)가 직접 기증하거나 후원자로부터 기증받은 샤갈 작품 중 150여 점을 소개한다. 앞서 이탈리아 로마와 카타니아에서 전시가 이뤄져 총 30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한 바 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총 7섹션(초상화, 나의 인생, 연인들, 성서, 죽은 혼, 라퐁텐의 우화, 벨라의 책)으로 구성해 샤갈의 사랑과 삶을 집중 조명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일정 6월 8일~8월 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출연 케이윌, 윤형렬, 차지연 등
추한 외모를 지닌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와 아름다운 집시 여인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룬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98년 프랑스 파리 초연부터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어 버전은 2008년 초연 이후 올해 10주년을 맞이했다. 초연 캐스트인 윤형렬과 최수형의 복귀, 실력파 가수 케이윌과 배우 차지연 등의 합류로 기대를 모은다.
(무용) 발레 춘향
일정 6월 9~10일 장소 CJ토월극장 출연 강미선, 이현준, 홍향기 등
한국의 아름다운 고전 ‘춘향전’이 발레로 재탄생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대표작이자 두 번째 창작 발레인 ‘발레 춘향’이 4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 공연에서 눈여겨봐야 할 장면은 춘향과 몽룡의 ‘긴장과 설렘, 슬픔과 애틋함, 기쁨과 환희’라는 세 가지 유형에 사랑의 감정을 아름다운 몸짓의 언어로 담아낸 2인무다. 수석무용수 강미선과 이현준, 홍향기와 이동탁이 각각 춘향과 몽룡으로 분해 열연을 펼친다.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일정 6월 12일~9월 2일 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출연 서현철, 오용, 장이주, 양소민 등
100세 생일날 잠옷 차림으로 양로원을 탈출한 ‘알란’이 우연히 갱단의 돈 가방을 훔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다.
(영화) 아일라
개봉 6월 21일 장르 드라마, 전쟁 감독 칸 울카이 출연 김설, 이스마일 하지오글루
한국 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양국에서 공동으로 제작한 영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참전 용사 ‘슐레이만’과 전쟁으로 고아가 된 소녀 ‘아일라’가 휴전 이후 60년 만에 재회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전시) 니키 드 생팔展: 마즈다 컬렉션
일정 6월 30일~9월 25일 장소 한가람미술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은 1961년에 발표한 ‘사격회화(shooting painting)’라는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후 그는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작품처럼 풍만한 체형의 여인을 온갖 자세로 표현한 ‘나나(Nana)’ 연작 작업에 주력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마즈다 컬렉션의 대표 작품 127점을 만나볼 수 있다.
송홧가루 날리는 5월의 산천(山川)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새빨간 덩굴장미가 담장을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는 모퉁이에서 단발머리 소녀가 손짓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5월 중순의 어느 날, 철원평야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창 모내기 철의 철원평야에는 싱그러움이 내려앉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묻어난다. 얼마쯤 달렸을까? 영북면을 지나 넓은 평야 지대와 개활지를 가로질러 달리다 보니 관인으로 접어들면서 한탄강 줄기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녹음이 짙은 금학산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온다. 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곳이 40여 년 전, 초산 부대에서 소대장 실습을 하던 곳이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초록의 물결을 헤치며 도착한 곳은 한탄강 자락에 있는 민물매운탕집. 요 며칠째 전국적으로 쏟아부은 비로 인해 흙탕물이 된 강물은 강기슭 전체에 범람해 있었고 요란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와 강가에 앉아 장어구이와 민물매운탕으로 배를 불리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맥주 한 잔을 반주 삼아 맛있는 점심을 먹은 우리는 “어디로 갈까?”, “여기까지 왔으니 노동 당사를 들러 백마고지로 가면 어떨까?”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동당사가 나타났다.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건물은 뒤는 무너지고 앞부분만 겨우 구색을 갖춰놓은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시멘트 건물과 대비되는 새파란 잔디밭이 싱그러웠다. 노동 당사에서는 공산당 사무도 보고, 사람들 고문도 했다고 한다. 건물 벽 여기저기에 총탄 흔적이 그때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듯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준 노동당사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참혹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철수하면서 지역의 유지들을 붙잡아 건물 지하에 가두어 놓은 채 학살하고 매몰했는데 이후에 그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밤마다 슬픈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노동당사 앞에서는 넓은 개활지에 천막을 치고 지역특산품을 진열한 장이 들어서 있었다. 한쪽에서는 무대까지 설치한 채, 두 남녀가 구성지게 색소폰을 불고 있었고 사람들이 쭉 둘러서서 흥겨움에 몸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강원도는 2018년 5월 1일부터 북한과 접경지역을 ‘평화지역’으로 바꾸기로 했다. 4·27 판문점 선언으로 하늘, 땅, 바다 교통망이 열리고 강원도는 남북경협 통일시대 준비에 돌입하면서 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접경지역의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는 가운데 경기 북부인 연천군에 이어 강원도 지역도 활발하게 거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민통선 인근 지역의 땅값도 덩달아 들썩이며 지금은 많이 오른 상태라고도 한다.
노동 당사를 견학하고 바로 백마고지 쪽으로 차를 몰았다. 멀리서 보이던 높은 백마고지 기념비가 가까워져 오자 하늘 높이 승천이라도 할 듯이 발을 번쩍 치켜든 백마의 동상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백마고지전투위령비를 지나 한참을 올라가니 드디어 역사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 벼가 바람에 간들거리는 광활한 평야 건너에 백마고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군 GP 초소가 보이고 그 너머에 북녘땅도 보였다. 말 없는 백마산 기슭, 백마고지는 해발 395m의 고지로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마고지 전투는 정전협정을 앞둔 1952년 10월6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등 아군과 중공군 간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던 피의 고지전이었다. 28만 발의 포탄으로 15,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10일간의 싸움 끝에 24번 만에야 우리 손에 들어온 격전의 고지 백마산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있다.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 고지 백마를 탈취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운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 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원, 김화, 평강 즉 철의 삼각지대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어김없이 6월이 오면 이 땅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전쟁인 6·25전쟁이 기억난다. 이제는 명분 없는 전쟁의 역사에서 우리 모두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철원평야를 지나면서 이토록 평화로운 이 강산을 고스란히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귀갓길을 서둘렀다.
지금은 다 성인이 된 아들과 딸의 출생일자는 양력 일자다.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했고 담당의사의 출생증명서를 첨부해 출생신고를 했으니 틀림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때는 달랐다. 대부분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왔다. 주민등록부에 있는 출생일자와 실제 출생일자가 똑같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당시에는 출생 사실을 늑장신고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늑장신고한 이유를 들어보면 이렇다. 첫째, 글자깨나 배웠다는 동네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했는데 이장이 깜박하고 몇 달을 그냥 있다가 ‘아차차!’ 하고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 환경위생이 열악한 시대여서 갓난아기의 죽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백일이 지나거나 돌이 지나야 출생신고를 하는 집이 많았다. 심지어 우리 부모 세대는 죽은 형의 출생신고 날짜를 동생이 물려받아 실제 제 나이보다 두 살이나 많은 사람도 봤다. 이럴 경우 이름까지 그대로 물려받아 호적상으로는 형의 이름이 되어 있고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자기 이름인 사람도 있었다. 필자의 아버지가 그런 경우다. 셋째, 당시에도 출생신고를 늦게 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는데 벌금까지 물어가면서 실제 생일을 기재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때는 대부분 집에서 출산을 했기 때문에 행정당국 입장에서는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당사자가 기재한 날짜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출생신고를 제때 하라고 만든 법이 엉터리 생일을 양산한 셈이다.
필자도 주민등록부상의 생일과 실제 생일이 약 6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6·25전쟁 통이라 정신이 없었던 탓으로 생각한다. 출생신고를 왜 늦게 했는지 그 이유를 한 번도 부모님께 물어본 적은 없다. 주위에 그런 사람 천지였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고 생일 날짜가 틀리다고 살아오면서 불이익을 받은 적도 없다. 오히려 직장을 6개월 더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실제 태어난 날짜와 다른 생일 날짜 때문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래 은행이나 영업 전략으로 여러 업체에서 주민등록표상의 생일에 맞춰 축전이 날아온다. 이 정도는 그래도 약과다, 난감한 상황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 웹 사이트에서 친구맺기를 한 수많은 사람이 생일 축전을 보내올 때다. 웹 사이트 축전이니 요령만 알면 사진으로 화려한 꽃바구니 사진도 보내고 값비싼 와인 사진까지 보낸다.
웹 사이트에서야 서비스 차원으로 입력된 자료에 의해 알려주는 것뿐이니 항의할 일도 아니다. 축전을 보내온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머쓱해서 실제 생일이 아니고 주민등록부상 생일이고 진짜 생일은 음력으로 보낸다고 정중히 말씀드리고 생일 인사는 고맙다고 답장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해명하기도 지쳐서 가짜 생일이니 뭐니 하는 말은 아예 하지 않는다. 보내오는 문자마다 무조건 생일을 축하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올린다. 어떤 웹 사이트는 실제 생일인 음력 날을 기록하도록 해서 제대로 된 생일을 알려주는 곳도 있다. 이러다 보니 일 년에 생일을 두 번이나 맞는다.
드물지만 생일을 두 번 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특별한 그날을 기념한단다. 또 실제 태어난 날도 무시할 수 없어서 결국 일 년에 두 번 생일을 치른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비교하면 필자는 공짜로 생일을 하루 더 얻은 셈이니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생일이라고 해서 소 잡고 돼지 잡는 거창한 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벼운 덕담과 그때그때 적절한 식사 정도만 하는 것이니 생일이 두 번이라고 짜증낼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고 해결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일 년에 두 번의 생일을 즐기면서 살아가니 이제는 기분이 더 좋다.
북촌 8경길, 여의도생태순환길, 서리풀공원길 등 서울 시내에 산책 삼아, 운동 삼아 걷기 좋은 길들이 많아졌다. 그중 어디를 걸어도 좋지만, 원하는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코스라면 더욱 환영이다. 서울 곳곳 50가지 걷기 코스의 지도, 소요 시간, 여행 정보 등을 비롯해 길의 역사와 문화 정보까지 알차게 담은 ‘서울 산책길 50’을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서울 산책길 50’ 최미선·신석교 저, 넥서스BOOKS
5가지 테마로 떠나는 걷기 여행
야트막한 산자락 숲길, 도시와 숲을 잇는 공원&숲길, 물길 따라 걷는 한강&천변길, 재미있는 골목길, 걸으며 배우는 역사문화길 등 5가지 테마로 나눠 50가지 길을 소개한다. 굳이 첫 페이지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고, 목차를 펼쳐 익숙한 길이나 궁금했던 길부터 찾아봐도 괜찮다. 또는 책을 후루룩 훑어보며 마음에 드는 곳부터 읽어도 좋다. 가방에 넣어 다니기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125×205mm)로 평상시 이곳저곳 걸으며 활용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책 표지 양 날개를 펼치면 앞장에는 서울시 지도가, 뒷장에는 지하철 노선도가 나와 서울 주요 걷기 코스의 위치와 교통편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걷기 코스 정보와 약도를 한눈에
책에서 각각의 걷기 코스를 소개하는 첫 장에는 코스의 이름과 길에 대한 역사와 문화 정보, 대표 사진이 실려 있다. 바로 옆 장에는 걷는 데 꼭 필요한 이정표를 중심으로 전체 코스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표시한 약도가 나온다. 그 아래 걷는 거리(km)와 소요 시간, 출발점을 상세하게 적어 걷기 전 미리 시간과 거리 파악이 가능하다. 더불어 길 주변 맛집과 그밖에 정보, 참고 사항 등을 친절하게 담았다. 이 두 페이지에 담긴 정보만으로도 코스의 풍경과 진행 방향, 난이도, 특징 등을 가늠할 수 있다.
구간마다 거리와 사진을 알차게
출발 지점부터 목표 지점까지 코스를 세분화해 각각 이정표로 구분하고, 순서대로 번호를 달았다. 이정표와 이정표 사이 거리를 미터(m) 단위로 표시해 길을 걸으며 쉬는 구간이나 중간 목표 지점을 계획성 있게 짤 수 있다. 이정표마다 정보 글과 함께 그곳에서 보이는 주변 풍경 사진을 넣어 코스를 헤매지 않도록 돕는다. 그밖에 박물관이나 미술관, 사적에 대한 설명과 이용 방법, 요금 등을 담아 도보여행을 하는 데 더욱 유익하고 편리하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 1
책 속의 맛집 ‘남산공원 둘레길’은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출발해 명동역까지 총 8.2km, 약 3시간이 소요된다. N서울타워를 중심으로 남산 자락을 한 바퀴 도는 코스로, 둘레길을 빠져나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부터 명동역까지 이어진 만화골목길을 걸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향하기 약 400m 전 산채비빔밥과 전통차를 즐길 수 있는 ‘목멱산방’이 나온다. 코스 거리와 시간을 조절해 식사 때에 맞춰 방문해보면 좋겠다.
#plus 2
책 속의 영화 ‘홍제동 개미마을’은 6·25전쟁 이후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인왕산 자락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1980년대,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이곳은 골목마다 그려진 알록달록한 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 속 등장한 벽화를 찾아보면서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plus 3
책 속의 미술관 석촌호수 산책로는 봄이면 화사한 벚꽃과 철쭉이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 석촌호수 꽃길을 걷다가 곰말다리를 지나 몽촌토성길을 향하다 보면 올림픽공원 내 자리 잡은 소마미술관을 발견할 수 있다. 43만 평에 이르는 드넓은 녹지와 어우러진 소마미술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를 이용해 자연친화적인 외관을 자랑한다. 전시 외에도 다양한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봄꽃이 만발하는 4월에는 ‘작가 재조명 展-황창배, 유쾌한 창작의 장막’을 관람할 수 있다(5월 20일까지, 회화·드로잉·영상 등 200여 점 전시).
모든 부모가 처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상상하지 못할 뿐, 그들에게도 감수성 예민한 10대 사춘기, 호기롭고 꿈 많던 20대 시절이 있었다. 노명우(盧明愚·52)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그런 부모의 삶을 대신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원고를 완성하기 전 2015년과 2016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이어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부모를 잃는다는 건 ‘응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응석’을 비워내기 위해 잠시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호칭을 유예하고, ‘자연인 노병욱’과 ‘자연인 김완숙’의 삶을 ‘인생극장’에 담았다.
노명우 교수는 ‘인생극장’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통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동시대 평범한 이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3년에 걸쳐 탄생한 이 책의 집필은 본래 대학생들에게 과거 대중영화를 매개로 한국 사회의 형성 과정을 이야기할 목적에서 ‘영상사회학’ 강의를 개설한 것이 계기가 됐다. 노 교수의 아이디어를 눈여겨본 ‘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저·사계절출판사)의 편집자가 이 강의를 캠퍼스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꺼냈고, 고전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세상물정극장’을 만들었다. 일종의 확장된 거실처럼 작은 극장엔 많은 사람이 모여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고, 그 자리엔 늘 노 교수의 어머니가 관객으로 함께했다.
“세상물정극장이 열리는 날이 어머니에겐 일주일에 하루뿐인 소중한 외출 시간이었어요. 당시 아버지가 치매를 심하게 앓으셔서 어머니가 돌보고 계셨거든요. 그때 아버지의 삶과 고전영화를 연결해 ‘인생극장’의 초고를 쓰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죠. 그러고 7개월 후엔 어머니가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도 어머니도 충격이 꽤 컸어요.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나는 어머니가 하루를 살더라도 열흘처럼 느끼게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삶을 대신 써드리는 것이더라고요. 그렇게 책의 주인공을 더블캐스팅으로 바꾸게 됐습니다.”
‘아버지이기도 했던’ 한 남자의 인생
어머니 생전 책을 완성하려 했지만, 간호를 병행하며 원고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책이 나오면 아들과 함께 출판기념회이든 강연회이든 다니고 싶다던 어머니의 바람은 안타깝게도 이뤄드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남짓 만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시면서 반년 정도는 원고를 한 자도 못 썼어요.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감정이 솟구치고 한이 생겨서 키보드 끌어안고 울고…. 또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인생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죠. 한 사람의 삶을 쓰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떤 가치평가라는 게 들어가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과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에 주저하던 시간이 길었어요.”
마음을 잡고 글을 쓰려 해도 부모의 삶을 객관화해 바라보기는 어려웠다.태어날 때부터 내 아버지, 어머니였던 그들의 삶을 회고할 때마다 어떠한 한계에 부딪히는 답답함이 생기곤 했다. 그러던 그에게 돌파구처럼 한 단어가 떠올랐다.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나 제가 가진 정보만으로 인생을 써내기엔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세상을 살다 간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전환하니 비로소 보이는 삶의 궤적들이 있더라고요. 그때 떠오른 단어가 ‘심정’이었어요. 아버지는 결혼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설을까? 엄마를 사랑했을까? 첫아이를 낳았을 땐 어땠을까? 그런 심정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죠.”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수록 노 교수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누구보다 평범했던, 그래서 그 스스로 ‘그저 그런’이라 표현할 정도로 보편적인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야말로 그 시대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역사였다.
“아주 부자이거나 엘리트라서 시대가 주는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님의 이야기 속에 동시대인들이 공감하는 놀라운 삶의 공통분모가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들의 삶이 얼마만큼 우리 시대에 기록되고 전달되나 고민해보니 아들로서의 의무감을 넘어 사회학자로서의 책임감까지 생기더라고요.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이들의 삶을 남겨야겠다고 강하게 느꼈어요. 그때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은 오늘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니까요.”
유예된 사춘기,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다
젊은 시절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려 노 교수는 직접 추억의 장소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청년기를 간접 경험하기 위해 만주 선양, 일본 나고야를 순회했고, 어머니의 사춘기를 엿보고자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일대를 ‘소녀’의 심정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엄마의 흔적을 따라서 창신동 꼭대기에서 출발해 효제초등학교까지 걸어갔어요. ‘나는 가난한 집에서 구박받는 한 소녀다’라고 감정이입을 하고 그 길에 서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모습이 허깨비처럼 나타나기 시작했죠. 당시 산동네에서 내려오면 고래 등처럼 으리으리해 보였을 이화장, 조금 지나면 눈에 들어오는 경성제국대학, 그 거리를 오가는 예쁜 여대생과 멋진 신여성들을 보며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저들과 같은 삶을 살겠지’ 라는 희망을 안고 학교에 가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끊어진 삶의 조각들을 이어갈 수 있었죠.”
소녀였던 어머니도 세월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노 교수는 6·25전쟁이라는 사건과 겹쳐 볼 때 어머니는 ‘증발된 사춘기’를 보냈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 역시 사춘기를 겪었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너무나 다른 경험을 했어요. 특히 어머니는 전쟁통에 사춘기를 보내셔야 했죠. 원래 사춘기는 자기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도 ‘사춘기’라는 핑계로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그런 감정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전쟁을 겪으며 뭐든 꾹꾹 눌러 담고 숨기는 데 선수가 되어버리신 거죠. 유예된 사춘기를 보내셨다고 생각해요. 그 영향으로 어머니 또래 분들은 평생 하고 싶은 것, 필요한 것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고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파고들수록 절절히 전해지는 심정은 노 교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해 마음이 ‘아리다’고 표현했다. 두 단어가 주는 차이는 ‘부모의 부재’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장례를 치를 때만 해도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다 마치고 집에 오니 슬픔이 확 밀려오더라고요. 힘든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엄마가 딱 ‘고생했네 우리 아들’이라고 하는 게 익숙한 경험인데,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허전함이 컸어요. 칼국수를 먹다가도 느닷없이 엄마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리고…. 슬프고 힘든 건 남에게 설명이 돼요. 그런데 아린 감정은 말로 설명하려면 너무나 길고 복잡해서 표현이 안 되죠. 그전까지는 슬픔을 제어할 수 있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짜 성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찾아오는 아린 감정을 느끼고, 그것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까지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부모님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그는 아린 마음을 ‘인생극장’을 쓰면서 달랬다. 노 교수는 책을 엮는 동안이 극복의 과정이었고,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듯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내면의 성숙을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전에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내가 이걸 성공했을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참 좋아하시겠다’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어요.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슬픈 일보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더 마음이 아려요. 뭔가를 해냈을 때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네’라는 환청까지 들리는데, 실제 전할 대상은 없잖아요. 그러면 앞으로 내 삶의 동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전까지는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며 힘을 얻었다면, 요즘은 내 부모처럼 글로 전하지 못하는 삶을 산 이들과 이후 세대의 가교역할을 해내는 것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고 있어요. 그렇게 사회학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신간들을 소개한다.
◇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아이라 바이오크 저ㆍ위즈덤하우스
40년간 응급의학과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종사해온 웰다잉 전문가 아이라 바이오크 교수의 에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을 온전히 치유하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령 오랜 독설, 외면, 실망으로 얼룩진 사이라 해도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 소중한 네 마디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네 마디 말은 “사랑해”, “고마워”, “용서할게”, “용서해줘”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했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해 뼈저리게 후회하는 수많은 사람을 경험하며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할 말을 하자’라는 자세를 통해 소중한 사람들과 깊은 정을 나누길 희망한다.
아이라 바이오크는 꼭 죽음을 목전에 둔 이가 아닐지라도 평상시 다양한 상황에서 이 네 마디 말을 잘 활용해 건강한 인간관계와 정서적 안녕을 누릴 것을 조언한다. 누구든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용서, 감사, 사랑을 틈틈이 표현해야 한다는 것. 그는 책에서 네 마디 말을 서로에게 건넨 환자와 가족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소개한다. 가족의 불화, 개인의 비극, 이혼 등 어긋난 관계를 치유하고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는 단순하지만 귀중한 네 마디 말이었음을 되새긴다. 이해인 수녀는 “매일의 인생 여정에서 이 네 마디를 꾸준히 말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행복이 바로 곁에 있음을 새롭게 깨우쳐준다”며 “당장 사랑을 시작하자고 우리를 재촉하는 이 책을 많은 이와 나누고 싶다”고 했다.
◇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김형석 저ㆍ김영사
100세를 앞둔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저서 중에서 그의 삶의 철학 전반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추렸다. 1부 ‘잃어감에 관하여’, 2부 ‘살아간다는 것’, 3부 ‘영원을 꿈꾸는 자의 사색’, 4부 ‘조금, 오래된 이야기’ 등으로 나눠 삶의 의미에 대해 폭넓게 아우른다.
◇ 죽을 때 추억하는 것 코리 테일러 저ㆍ스토리유
소설가 코일 테일러가 뇌종양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 쓴 회고록이다. 유년 시절과 가족에 대한 추억,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고찰 등을 문학적 사색을 담아 표현했다. 아울러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추억하게 될지 물으며 삶의 방향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저ㆍ청미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대표작이다. 부정과 고립,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죽음의 5단계’를 정의하며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반응, 시한부 환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소개하며 죽음과 죽어감의 의미를 이해하게 만든다.
◇ 인간가족 에드워드 스타이컨 저ㆍ알에이치코리아
1955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인 대규모 전시 ‘인간가족’ 전에 소개된 68개국 273명 사진작가의 흑백사진 작품 503점을 수록했다. 냉전시대에 지구촌 인간가족의 일상과 희로애락이 담긴 사진들 속에서 과거 6·25전쟁 당시 우리의 모습도 돌아볼 수 있다.
필자가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살았던 곳은 돈암동이다. 당시 돈암동 랜드마크는 태극당이라는 제과점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정할 때 ‘태극당 앞 몇 시’ 하면 다 통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규모도 상당히 컸고 빵도 맛있고 고급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자주 이용했으며 그땐 데이트도 제과점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중학교 때 필자는 전차 통학을 했다. 전차 종점도 태극당 바로 앞이어서 사람들도 많이 몰리는 장소였다. 요즘엔 성신여대입구역이 있어 명동 못지않은 복잡하고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태극당 제과점이 그 자리에 있지만 이전의 반 정도로 규모가 줄어서 아쉬운 느낌이다.
태극당에서 미아리 쪽으로 넘어가는 곳에 미아리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알고 있듯이 미아리고개는 ‘한 많은’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한때 지자체에서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이미지를 없애려 언덕 양편 축대 담벼락에 샛노란 개나리를 잔뜩 심어 개나리고개로 부르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언덕 양편에 흐드러지게 피어 늘어져 있는 노랑 개나리가 매우 보기 좋았고 한 많은 미아리고개보다는 예쁜 개나리고개로 변신한 것이 즐겁기도 했는데 요즘은 아파트 공사가 많아서인지 봄이어도 개나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미아리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미아리고개였다. 한이 많다는 표현에서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가 짐작된다. 필자가 6·25전쟁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퇴각하는 북한군이 우리나라의 고위인사나 죄 없는 사람들을 북으로 끌고 갔는데 그때 이 미아리고개를 통해 넘어갔다고 한다. 끌려가는 가족을 이 언덕에서 가족들이 지켜보았다니 정말 단장의 고개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노랫말을 들어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프다.
그러나 필자에게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픈 느낌만 있는 건 아니다. 중·고교 시절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면 삼류극장인 미도극장이 있었다. 동시상영 극장이었는데 한 번 들어가면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학생은 출입 불가였지만 변두리 극장이어서 무사통과가 가능했다. 영화보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이곳으로 자주 영화를 보러 갔다. “선도부 선생님 떴다!” 하면 화장실로, 계단 뒤로 도망다니기도 했던 짜릿하고 신나는 추억도 있으니 필자에겐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프기만 한 고개는 아닌 것이다.
또 다른 기억도 있다. 돈암동 쪽에서 바라다보이는 미아리고개 왼쪽 언덕 위에 양옥집이 있었다.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고 소문이 나서 친구들도 모두 무서워했다. 그 집을 싸게 사들이려는 사람의 음모였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언덕 위의 그 양옥집을 보면서 오싹함을 즐기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양쪽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와 아리랑 아트홀이라는 문화공간도 생겼다.
미아리고개를 넘으면 바로 길음 뉴타운이 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유명 여고를 유치하는 등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이상 슬픈 동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필자가 수십 년 지나다닌 미아리고개가 한과 슬픔의 이미지를 벗고 더욱 발전된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노인이 돌아가시면 동네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처럼 지혜의 보고가 사라졌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살아있을 때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필자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먼저 살아 본 인생선배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반면교사로 삼는 것을 좋아한다.
올해 86세인 ‘이00’ 할아버지는 필자와 치매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함께 하시는 분이다. 치매환자가 대부분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다. 형님이 동생들을 케어 하는 형상이다. 이분은 6·25전쟁 때 함경남도에서 피난을 내려왔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고 한다. 19세라는 한창 때에 피난을 오다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산처럼 쌓여있다. 명함에 함경남도 중앙도민회 지문위원이라는 직함을 새겨서 다니신다. 치매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이유도 건강관리에 있다며 고향땅을 밟아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고향 사랑이 워낙 크다보니 고향 사람이 큰일을 당하면 부조금이나 축의금으로 몇 십 만원씩을 낸다. 그 바람에 아내의 눈 밖에 나서 매월 600만 원씩 들어오는 건물 가게세의 처분권도 아내 손으로 넘어갔다.
올해를 마감하는 치매센터 월례회에 정신과의사인 센터장이 참석한 가운데 각자 한해를 보내는 소감 한마디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00’ 할아버지가 몸이 늙어감에 대해 안타까운 말씀을 하시는데 손자 손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참 답답하다고 하신다. 손자 손녀를 보면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그래 너 왔구나!’라고만 말해야 할 때 아! 나도 늙어가는구나 혹 나도 치매가 아닌가하고 겁이 덜컥 난다고 말씀하신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데 대해 섭섭해 하는 눈치가 보일 때는 미안하다는 말씀도 하신다.
정신과 의사인 센터장이 대답으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절대 치매가 아니며 그 연세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끊임없이 메모하고 적어야 하는 점을 강조 했다. 치매전문가이며 정신과 의사가 말씀 하시니 맞는 말이다. 노인의 필수품으로 메모장이 각광받아야 한다.
필자는 ‘이00’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제 어머니도 여럿 자식을 두었는데 급하게 부를 때는 자식들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는 아차 하고 다시 고쳐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 상태를 미리 말씀해 두면 어떨까요. 즉 “할아버지가 이제 나이가 많아 깜빡 할 때가 있으니 앞으로는 할아버지를 보면 ’할아버지 저 00이가 왔어요’하고 미리 이름을 말하게 하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친자식의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한 다리가 먼 손자손녀의 이름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노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노인과 대화를 나눌 때 어른을 공경한다고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지 말고 기억이 가물거리는 부분에서 추임새처럼 한마디씩 거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가족은 6·25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셨다. 어머님은 저의 결혼 후 평생 우리랑 함께 사시다가 5년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6·25를 맞아서 정부로부터 를 받고 남편은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아버님의 납치 후 직장 생활 초기에는 혹시라도 이북의 아버님과 접촉할까봐 출장 허가도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던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때는 지금처럼 건강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 뇌졸중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내가 쓰러지자 가정 생활은 즉시 엉망이 되었고 또 남편은 곧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모 방송국에서 30 년 넘게 근무하고 정년 퇴직을 한 남편의 퇴직금은 그 때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그 때는 퇴직금도 미래가 어떨지 모른다며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받지 않고 일시불로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은행의 이자도 상당히 높아서 이자로만 살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그 때만 해도 장수 시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은퇴 후의 생활 준비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떻게 퇴직금을 관리 해야할 줄도 몰랐다. 그 때는 지금 유행하는 ‘은퇴 이후의 재무 설계’ 같은 말은 존재 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할 일을 못 찾아 힘들어 하던 어느 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주례 협회에서 직업적 주례사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남편 몰래 응모를 했다. 남편이 방송국에서 방송 경험이 있으니 주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실제로 주례 경험도 많았기에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남편 대신 응모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하루 하루 똑같은 무료한 생활로 시간 보내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나름대로 활력을 줄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합격 통지를 받고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더니 엄청 화를 내면서 누굴 뭘로 보냐며 자기를 무시 했다고 몇 달 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 남이 자길 얼마나 궁하게 보겠냐며 자긴 앞으로 돈을 버는 일은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 출근만 하면 하루 종일 온통 내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기가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요령이 생겨, 퇴직 초기처럼 싸우지도 않고 서로 각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필자를 보면 대견한 생각이 든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