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 부서져도 눈 덮인 산을 그리워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가며 설상 경사로를 질주했다. 수줍은 미소로 시작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시간이 갈수록 반전에 반전을 더했다.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다! 겨울 놀이에 인생을 던진 두 남자를 만났다.
이들은 1994년 처음 만났다. 도봉산에 있는 한국등산학교에서. 전영래(55) 씨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임세훈(51세) 씨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자주 보면서 살게 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체격도 비슷하고 뭔가 풍기는 느낌도 다르지 않다. 한국등산학교 강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정작 본업은 따로 있다. 임세훈 씨는 음향 엔지니어, 전영래 씨는 건설업자다. 겨울 놀이에 빠져 산다는 이 두 남자의 시작은 모두 산(山)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암벽 등반한 임세훈 씨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장교 부인들과 어울리셨는데 절에 자주 갔습니다. 저도 따라다녔어요. 대부분 절은 산에 있잖아요.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됐습니다. 기웃거리면서 ‘저게 뭐하는 것이냐’며 사람들에게 자꾸 물어보니까 알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암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 되니까 선배들이 산에 간다면서 스키를 메고 가더라고요. 겨울 산행을 하려면 스키를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알프스스키장에 가서 처음으로 스키를 접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적설량이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중학교 때만 해도 산에 가면 보통 허리까지 눈이 왔어요. 눈을 그냥 등산화로 헤치고 밟아가며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그걸 ‘러셀’이라고 하는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뭔가 편안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는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다니더라고요. 러셀로 오르면 4~6시간 걸려 올라가는 산을 스키로는 2시간이나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시간도 단축되고 체력 소모도 없어요. 그때부터 산악스키에 빠져든 거죠.”
스키를 계속 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있었다. 눈 쌓인 겨울 산을 보는 게 좋았다.
“아무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에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 경치를 보고 싶어서 자꾸 올라갔습니다. 등산과 스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유럽 스키의 벽을 깨고 겨울을 찾아다니다
임세훈 씨는 스키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빙벽에도 오른다. 어린 시절 태권도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입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특전사로 차출됐다. 군에서 패러글라이딩 팀에 있었고 스키도 좀 타봤다. 7년 넘게 부사관으로 있다가 1991년 3월에 전역했다.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역시나 스키장이었다. 스키장 패트롤(안전요원)로 들어가 일도 하고 원 없이 스키 슬로프를 질주했다.
“스키 시즌이 끝날 무렵 스키 강사와 패트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어요. 지금도 종종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데 강사와 패트롤 중 누가 더 스키를 잘 타냐는 거였어요. 그때 마침 자리에 한국스키협회 이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너희 시합해봐.’”
매력적인 경품도 걸렸다. 10명에게 스위스 스키장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다. 스키장이 폐장할 때쯤 슬로프를 정리하고 스키대회처럼 기문을 설치하고 각각 10명씩 20명이 맞붙었다. 협회 이사장이 연수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10명에는 강사 4명과 패트롤 6명. 그중에는 임세훈 씨도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체르마트 스키장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래도 스키 좀 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연수 첫날 체르마트 스키장의 A급 패트롤과 최정상 슬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 2급에서 같이 스키를 타고 내려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중 가장 늦게 내려온 사람과 20분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저희 실력이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는지 점점 슬로프 경사도가 낮아졌어요. 강사도 패트롤 A급에서 C급으로 내려갔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슬로프 근처에도 못 가고 평지에서 자세만 배웠습니다.”
8일간의 연수를 마친 뒤 임세훈 씨는 함께 갔던 협회 이사장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돈을 끌어모아도 1000프랑(유로 가입 전 프랑스 화폐 단위)이 안 됐다. 한국에서 송금받을 방법도 알아냈다. 스위스 스키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요. 형편없더라고요. 제 실력이요. 한국스키협회 추천을 받아서 일단 스위스 국립스키학교에 등록했어요.”
입교 허락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돈도 없고 영어도 안 되니 학교 측에서 걱정했다.
“한국어로 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사전을 스위스 현지에서 샀습니다. 스스로 교재를 번역해서라도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어차피 내용의 80%는 전문용어이니까요. 제가 영어를 못하니까 강사들이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알선해주고 브랜드 협찬도 연결해주셨어요. 2년 공부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레벨3을 땄습니다. 개인 강습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학업을 마친 후 스키 전문 브랜드의 데몬스트레이터(최고 스키 지도자) 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스키도 열심히 탔고, 동양인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월급 받으면서 세계의 유명 스키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겨울에는 국내에 들어와서 스키도 타고 제가 하던 음향 일도 했습니다. 겨울만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스키의 재미에 빠져 살았다. 브랜드 홍보차 유럽의 한 스키장에서 모굴스키를 타다가 앞서 타던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고 피하려다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미칠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존심 때문에 싫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스키와 등산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재작년에는 남극에도 다녀왔습니다. 스키는 노는 날 탔죠.(웃음)”
2014년, 한국은 남극 대륙 본토인 테라노바 만에 두 번째 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를 건설했다. 임세훈 씨는 이곳에서 연구하는 박사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안전요원으로 파견된 것. 크레바스를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고 블리자드가 부는 극한 상황을 해결하는 등 더 원활하게 연구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돌아왔다.
“사실상 백수입니다. 그래도 군에서 연금도 나오고요. 남극 안전요원으로 활동도 했고, 동호회 형식의 스키 교실, 등산학교 등에서 강연도 합니다. 봉사에 가깝지만 교통비 정도는 주십니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키와 등산은 생활이자 직업입니다.”
신장 투석하면서 해외로 스키 타러 다닌 전영래 씨
“매년 스키장 시즌권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샀어요. 구입하고 나면 누구랑 갈까 생각해요.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요.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가야 하니까 함께 스키 탈 친구들 목록을 정리합니다. 젊었을 때는 스키 시즌 내내 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때 산악인이던 삼촌을 따라서 이 산 저 산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다. 암벽등반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산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차서 결국 교복을 입고 성인들 틈 사이에서 산행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산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성북동 살았는데 우이동에 선배가 하는 산장이 있었어요. 책가방 거기다 가져다 놓고 등반하고 자고 아침에 학교 가고 또 등반하고. 그러다 산악스키에 빠지게 됐어요. 형들이랑 있으면 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눈이 많은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스키를 탄다고요. 그리고 스키를 타야 산을 오르내리는 게 쉽고 빠르다고 했어요. 1985년도에 스키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제대로 타려면 스키도 타야 했어요.”
지금처럼 스키장이 많을 때가 아니라 선배들이 차를 몰고 스키장에 갈 때 따라갔다. 스키 타는 시간보다 선배들 밥 챙기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그런데 정작 산악스키의 매력 포인트는 알고 있어도 산악스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라 정보도 풍부하지 않았다. 혹여 누군가 외국에 나가서 배워오면 그게 정확한 정보라고 믿을 때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알게 된 정도였다.
스키장 가려고 사표 낸 건설사 직원
“직장생활할 때는 퇴근과 동시에 스키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회사가 방배동 쪽이어서 용인 양지에 있는 스키장을 이용했죠.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4~5년 동안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쇼트트랙을 했어요. 이상화 선수를 배출한 은석초등학교의 빙상부원이었습니다. 성북동에서 목동, 방배동으로 출근했다가 양지로 이어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에 피로를 느껴 사표 던지고 나왔습니다.(웃음)”
1997년 직장을 그만둔 그는 회사의 대표가 되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등반하고 스키장가는 일에 더 몰두했다. 정말 원 없이 갔다. 4일, 5일 정도는 스키장에서 혼자 지낸 적도 있다.
“아침에 스케이트장, 저녁에 스키장. 몇 년 하다 보니까 슬로프를 타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산악스키처럼 좀 색다르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2003년에 강원도지사배 강원 산악스키대회가 열렸어요. 그때 출전했습니다. 산악스키대회 장면을 영상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참가하려니 많이 떨렸습니다. 산악용 스키가 원래는 따로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엄홍길 선배에게 빌렸습니다. 스키장의 곤돌라가 돌기 전인 새벽 5시쯤에 대회를 시작해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끝냈어요.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보더군요.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니까요.”
이렇게 신나게 살던 전영래 씨의 인생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2005년 고산에 다녀온 뒤로 신장이 망가졌다. 7년 동안을 자가 투석해야 했다. 성격상 집에서 쉴 수 없었던 전영래 씨는 투석에 필요한 장비와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악착같이 스키를 탔다.
“제가 좀 외향적이에요.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몸이 안 좋아도 삿포로나 나가노에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갔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다니는 약이 꽤 무거운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각자 짐에 나누어 넣고 다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투석하고 열심히 스키 타고, 돌아와서 남들 한잔씩 할 때, 자기 전에도 투석하고 그랬어요.”
스키 타고 등반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신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유럽의 스키장을 다닌다고 했다.
“2012년에 투석기를 꽂고 운전까지 해가면서 새벽에 스키장에 가고 있는데 일산 백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저와 조직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있으니 수술받으려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후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아내가 옆에서 듣고는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더라고요. 바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갔죠. 투석할 때는 어디든 3시간 이내로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환자니까 장시간 비행도 쉽지 않죠. 신장 이식하고 6개월 후에 바로 프랑스의 샤모니몽블랑으로 날아갔습니다.”
매년 못 가면 한 번, 기본 두 번은 해외 스키장으로 나간다. 산 다니고 스키 타는 사람들의 건배사에 ‘백두산’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100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민폐 끼치지 않을 때까지 스키도 타고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겨울 스포츠 즐기는 Tip
1 시즌권은 8월부터 준비한다. 홈페이지를 꾸준히 확인하기 싫으면 애플리케이션 알람 신청을 해놓으면 된다.
2 부상 없이 스키를 안전하게 오래 타고 싶으면 다운힐(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기술)은 최소한 정식 자격을 갖춘 곳에서 강습을 받아야 한다.
3 레벨에 맞는 강사에게 강습받기를 권한다.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이 최고급 지식을 가르치는 데몬스트레이터에게 교육을 받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들은 스키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스키스쿨에서 최소한 3회 이상 교육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4 시니어에게 산악스키를 권한다. 산릉선을 스키를 신고 돌면서 경치도 보고 운동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스키를 타고 올라갔다가, 스키로 내려오기 어려우면 짊어지고 내려와도 된다. 산악스키용 부츠는 등산화와 비슷해 신고 내려올 수 있다. 완만한 경사를 임도 따라서 산행하듯이 스키를 신고 걸으면 된다. 크게 힘들지 않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블리자드 쌓인 눈이 강풍에 휘날려 일어나는 눈보라.
•러셀 등산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길을 뚫는 방법.
사람들은 제각각 피로를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 경우에는 ‘나‘를 벗어나 조금이나마 ’다른 존재‘로 살아보기 위해 아무 연고가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번 가을에도 그런 이유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찾은 곳이 동해시다. 오래전부터 두타산과 청옥산의 무릉계곡이 있는 동해시에 가고 싶었다.
동해시의 무릉계곡은 백두대간의 줄기로 동서 간 분수령을 이루는 깊고 험준한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다. 내가 동해시의 무릉계곡에 갔을 때 두타산과 청옥산의 능선에 내려온 가을은 노랑, 빨강의 색들이 서로 합쳐지며 있었다. 그들은 서로 뒤엉키고 섞이면서 하나의 층을 이루었다. 가을 햇빛은 차가운 공기와 잘 어우러졌다. 언제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지. 갈색 나뭇잎들은 가지를 길게 빼고 툭툭 떨어졌다. 숲속 길에, 골짜기 흐르는 물 위에.
아프리카 격언- ‘너무 빨리 걷지 말아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어라.’
그렇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무릉계곡의 길이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남’이 되어 걸으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이다.
입구의 관리사무소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계곡 바로 옆에 있는 1,500평 정도의 넓은 반석을 만나게 된다. 이 반석 위에는 이곳에 왔던 명필가와 묵객들이 새겨놓은 수 많은 크고 작은 석각들이 있다. 그 글 중 이 계곡을 무릉선원(武陵仙源)으로 표현한 글귀가 있다.
무릉반석 위쪽에는 유서 깊은 사찰인 삼화사가 있다. 신라 시대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창건한 사찰로 고려 태조 때 ‘삼화사’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철조 노사나불 좌상’이 있다. 길을 따라 서 있는 사찰의 담에는 배고픈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절경들로 학소대, 관음폭포,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 등이 있다. 화강암 암반 위에서 떨어지는 이 폭포와 소(沼)들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풍경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와 풍경을 함께 하다 보면 유체 이탈된 나를 만나게 된다.
무릉계곡 입구 맞은편에 맑은 공기와 물소리, 새소리로 신선한 기운을 찾을 수 있는 ‘동해무릉 건강숲’이 있다. 이곳은 심각해지는 환경성 질환을 예방하고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하루 1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숙박동과 테마체험실, 자연식 건강 식당 등을 갖추고 있다. 친환경 숙박 시설은 황토와 편백나무 등 친환경 자재를 이용해 만든 숙박 시설로 38개의 객실이 있다. 테마체험실에는 건강에 좋은 소금 동굴 등 각종 찜질방과 산소힐링방 등을 갖추고 있다.
‘동해 무릉 건강 숲’에서 힐링의 밤을 보낸 다음 날 ‘한국인이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선정되었던 ‘추암촛대바위’가 있는 해안으로 갔다. 미묘한 해안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길에서부터 이어진 추암근린공원까지 잘 조성된 하나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동해의 맑은 바닷물과 크고 작은 바위에 잘게 부서지는 파도, 그리움이 배인 촛대바위는 해안의 주인공이었다. 촛대바위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리움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그 그리움은 단지 힘이 세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움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움츠러든 가을 여행자의 마음을 토닥거려주었다.
동해시는 너무 볼 것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연체험 학습장인 ‘천곡천연동굴’도 도심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VR 체험 시설과 함께 석회암 동굴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긴 걷는 길인 ‘해파랑길’에 속하는 바닷가 길도 동해시에 있다. 해파랑길은 총 길이 770km로 부산의 오륙도에서부터 고성군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이다. 이중 ‘해파랑길 33코스’와 ‘34코스’가 동해시에 속하는 길이다. 한섬에서 출발해 천곡항을 향해 걸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바다를 낀 소나무 숲길도 좋았고, 잘 닦여진 데크의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도 좋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해파랑길을 걸을 때 들었다. 누구라도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데... 아직도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내가 꿈꾸는 나가 내 안에서 두 개의 심연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고 가슴 아픈 방황을 계속해보자. 내 마음 깊은 곳의 온갖 울림과 떨림, 미세한 균열과 변화의 틈새를 지켜보자. 조금씩 전과 다른 나를 향해 아주 느리게 변해가는 나를 발견해보자.’
가을의 어느 날에 간 동해시 여행을 통해 1㎜(밀리미터) 변한 내가 보였다.
▪ 무릉계곡: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38.
▪ 동해 무릉 건강 숲: 관련내용 홈페이지 참조 (http://forest.dh.go.kr)
▪ 천곡천연동굴: 강원도 동해시 동굴로 50.
▪ 추암촛대바위: 강원도 동해시 촛대바위길 6.
▪ 해파랑길: 동해시청 관광과
무슨 일을 하건, 그 분야의 최고가 돼라! 자주 듣는 얘기다. ‘최고’에겐 갈채가 쏟아진다. 다들 ‘최고’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을 파는 결탁마저 불사한다. 삶의 눈먼 과속은 대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총구에서 발사된 열정의 탄환. 이 위험한 물질은 과녁을 맞히고도 좌절한다. ‘최고’가 되고서도 감옥에 끌려가는 사람조차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자전거 세계여행가 차백성은 권장한다. “꿈을 좇아 최고가 돼라!”고. 그가 말하는 최고란 뭘까. 자전거 여행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자전거로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점점 늘고 있다. 주로 청년층이 즐긴다. 차백성도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68세.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애늙은이도 있지 않던가. 가슴에 시퍼런 청년이 살아 있으면 청년이다. 정열과 패기로, 차백성은 청년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로다. ‘전업 자전거 세계여행가’로 통한다. 직업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거다. 그의 여행엔 협찬이 붙는단다. 여행서 집필과 강의도 어언 직업화됐다.
자전거로 지구를 누비는 사람이라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주앉고 보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이다. 맑은 표정으로 보자면 학자풍이다. 여기저기 관절이 결릴 시절이지만 몸짓이 곧고 민첩하다. 육체에도 정신에도 강골이 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의 황혼에 무슨 수로 청년의 새아침을 열었겠나. 그는 바야흐로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즘 최상의 행복을 느끼며 산다. 골든 에이지!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나에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 가지 일과가 있다. 운동, 독서, 글쓰기가 그렇다. 이 셋은 새로운 여행에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자 일상을 맘껏 즐기는 방식이다.”
나이 들며 사람들은 흔히 습관에 안주한다. 나이 타령이나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처럼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늙었다고 자조할수록 퇴보한다. 늙음 안에는 경륜이나 지혜 등 좋은 가치들이 들어 있지 않던가. 역사를 보더라도 60세 이후에 위업을 남긴 사람이 많지 않던가. 나는 늙음이라는 걸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산다. 이 나이에도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그 경쟁력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자동차 여행은 어떤가? 굳이 자전거만을 수단으로 고수하는 이유는?”
“어릴 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자전거 여행에 동경심을 품었다. 그때 꿈이 생긴 것이지. 나, 어른이 되면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할래! 그랬던 소년기의 꿈을 뒤늦게 이룬 셈이다. 김찬삼 선생이야말로 내 인생의 위대한 멘토다.”
김찬삼(1926~2003)은 ‘여행의 신’으로 불렸다. 비(非)문명, 오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여행 원칙을 끝까지 관철한 인물이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이른 작고도 어린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염세주의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선친은 우주처럼 큰 존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어린 내게 인생은 유한하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좀 조숙하지 않았을까. 이미 발아한 여행에의 꿈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한층 영글었던 것이다. 내게 꿈이라는 게 없었다면 평생을 방황으로 허비하고 말았겠지.”
날마다 100km씩 달렸다
삶이 부끄러운 건, 꿈을 잃었을 때다. 꿈의 관리에 능란하지 못한 채, 꿈을 배반하고 엉뚱한 행로를 헤맸다는 자각이 찾아들 때다. 차백성에게도 그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더란다. 200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진부함에 소스라쳤던 것 같다. 살아온 날들 전체에 회의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어라,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나여! 이건 나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자가 심문을 했던 모양이다. 대우건설 임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매장된 꿈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전거 세계여행의 시동이 걸렸다. 첫 여행은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 태평양을 끼고 이어지는 ‘하이웨이 원’을 달렸다. 하루 평균 100km씩, 한 달에 걸쳐 완주했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는 감개무량했지. 나도 드디어 자전거 여행가 대열에 올라섰다는 만족감이 컸다. 오래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는 쾌감은 더 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체력을 다져 떠났겠지? 하루 100km를 날마다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준비기간이 있었다. 미국 종주를 하기 이전에도 자전거를 자주 탔다. 나는 매번 엄청난 준비를 하고 떠난다. ‘고생한 그대여, 다 놓고 훌쩍 떠나라!’ 그런 식의 구호를 불신한다. 준비가 충실하지 않은 여행엔 폐단이 많아서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불가피한 경우엔 모텔에 투숙했지만, 거의 캠핑을 했다. 자전거엔 7개쯤의 가방을 매단다.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꽤 무거워진다. 30kg 이상 된다. 나의 모든 해외여행이 그런 식이다.”
하룻밤만으로도 온몸이 쑤시는 게 캠핑일 수 있다. 말 못할 불편이 많았겠다. 캠핑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점 때문이다. 하나는 캠핑장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한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경비 세이브! 불편? 별안간 설사 날 때가 가장 난감하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더라고.”
칼을 두 자루나 들고 덤비는 강도도 만나게 되는 게 자유여행이다. 사고는 겪지 않았나?
“내겐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미리 면밀히 예방하는 것이지. 유럽 여행의 경우엔 집시들을 특히 조심한다. 순식간에 자전거를 훔쳐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닌다. 캠핑할 때도 자전거를 분해해 텐트 안에서 끌어안고 잔다. 미국에선 송아지만 한 개가 공격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용케 모면했다. 미국 개들이 다들 훈련됐다는 게 퍼뜩 생각나 외쳤다. 싯 다운!(sit down) 그러자 대번에 주저앉던걸. 하하핫. 여행엔 기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사고는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다. 일테면, 길을 잃을 경우,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길이란 결국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그러나 차백성에게 길을 잃는 식의 얼간이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고율 제로! 노련한 여행자의 기록이 혁혁하다.
자전거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근사한 물건에 속한다. 자동차가 지구덩이를 까맣게 뒤덮은 이 시대까지 사멸하지 않은 그 생명력이라니. 이른바 적정기술의 산물이다. 이 주목할 만한 철 구조물에 인간의 숨결과 피를 부여하는 게 차백성이다. 페달을 밟는 그의 거친 숨결에 자전거도 격동하겠지. 그의 몸통에 흐르는 피가 핸들을 거쳐 바퀴까지 설레어 번질 테지. 사물과 인간의 동체대비, 그 사랑과 안심이 여행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
그런데, 고독하지 않을까? 그는 늘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페달만 밟는 날도 많다는 게 아닌가.
‘나 홀로 여행’을 수칙으로 삼은 사람에게선 독특한 취향 이상의 자기폐칩이랄까, 뭔가 집요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외바퀴 자전거처럼 고독하지 않을까? 고행을 자행하나?
“고독. 사실 그게 가장 힘겹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고독과의 동행이지 아니한가? 당신 역시 곁에 와이프가 있더라도 외로울 게 아닌가? 고독이란 사귈 만한 벗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은 고독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인생과 편차 없이 닮은 것 같다.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전망대, 그게 자전거 세계여행이지. 그러고 보면 이건 구도 내지는 탐구여행이겠네.”
차백성은 책벌레에 가깝다. 여행 중에도 자주 책을 읽는다지. 그게 고독을 녹여 친구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인 모양이다. 여권처럼 항상 들고 다니는 책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부러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 카잔차키스의 묘를 참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비명(碑銘)으로, 차백성의 가슴에도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것 같다.
자전거는 느리다. 느려서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 모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 풍경이 잽싼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흘러간다. 풍경은 물론 삶의 풍속까지.
세계 각국을 섭렵하는 중에 본 최고의 비경은 어디였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였다. 만년설 빙하가 흘러내려 형성된 협곡이다. 숨이 멎는 듯한 경이를 느꼈다. 그런데 비경보다 감동적인 건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의 비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미움이 쌓이는 게 인간사이지만, 늘 그리운 건 사람이다. 봄날의 여행처럼 따뜻한 존재.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인가 없는 오지의 어둠 속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정 비범한 인간애로 나를 도왔다. 눈물겨워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다음에 너도 남을 도우면 되지 않니?’ 그 한마디는, 이후 내 삶의 푯대가 되었지.”
부인에게 헌신적일 거 같다. 그런데 어쩌자고 20년째 ‘홀로 여행’만 하지?
“아내에겐 동의를 미리 구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 존중하기. 이는 현명한 부부애이지 않을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잃은 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그건 일종의 방황이었다. 비관적으로 산 세월이었지. 쉰 살에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예했던 꿈을 실현했다. 그러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더군.”
별 꿈 없는 보편적 인생도 얼마든지 어엿할 수 있다. 꿈으로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지 않을까?
“꿈이 없는 건 강아지나 시체일 뿐이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다 꿈이 있다.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겠지. 꿈을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라는 얘기다. 도전했다면 최고가 되어야겠지.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겠지. 꿈이라는 산소통이 빠져나간 삶은 자아를 질식시킨다는 얘기일 테고.
“자전거 여행의 꿈을 이루자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다. 한결 농밀한 삶이 가능해졌지. 그게 왜냐면, 가령 한자리에서 90년을 산 사람의 삶과 90년을 여행하며 산 사람의 그것은, 질적으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비단 여행만이 아니라 뭐든 꿈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다.”
차백성은 자전거 세계여행만을 꿈으로 삼진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뿌리 깊은 것이었단다. 굴레를 벗어나고픈 그의 유목적 개성이 문예 욕망으로 번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세 권의 여행기를 낸 작가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셋 모두 인문학적 내공과 글맛으로 버무려진 가작이다.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딘다. 그보다 더 그를 달구는 건 물론 여행 충동이지만.
“고2 때 친구들과 남산에 올라갔어요. 서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여고 동창생들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학생, 사진 좀 찍어줄래?’ 하며 카메라를 내밀더라고요.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라서 언감생심 만져보지도 못한 카메라였어요. 친구들끼리 서로 미루다가 그분들이 일러준 대로 셔터를 눌렀죠. ‘찰칵’ 하는 소리가 기막히더라고요.”
까까머리 소년은 그날 손끝으로 느꼈던 셔터 음의 짜릿함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칠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카메라와 함께 살고 있다. 사진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까지 가르치느라 하루도 쉴 틈이 없다는 한국사진작가협회 교육이사 문제민(文濟珉·76) 씨. 현역 시절보다 더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나기로 한 날, 그가 들고 온 가방에는 노트북과 각종 자료들이 가득했다.
“법무부 산하 기관에서 공무원 생활을 끝낼 무렵 퇴직 후의 시간을 생각해봤어요. 평생 카메라를 끼고 다녔으니 디피점이나 열어볼까 했죠. 그런데 그 무렵 디지털카메라가 막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사진 관련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잠깐씩 사진 강의도 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사진 교육 강의를 하게 됐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고민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진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공무원 시절 국비유학으로 일본 연수를 떠났을 때도 시간만 나면 도쿄의 책방을 드나들며 사진 책을 봤다.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귀국할 땐 사진 관련 서적을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 공부는 그에게 일상이다.
“은퇴 후에는 누구든 한동안 공허함 속에 있게 돼요. 그러나 이 무렵의 위기는 성장을 견인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매일이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면 미리미리 조금씩 준비하는 게 중요해요.”
집념의 한 우물이 열어준 인생 2막
요즘도 그는 사진 수업 준비를 하느라 컴퓨터 작업에 여념이 없다. 나날이 도약하는 제자들의 실력에 용기를 주는 것도 큰 일과다. 그의 인터넷 카페엔 제자들 사진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두 시간 정도 올라온 사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감상평을 남긴다.
그는 늘 긍정적이다. 학생들 사진을 보며 절대 부정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특성을 존중한다. 이런 태도는 오랜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법무부에서 청소년 보호 관찰 업무를 담당할 때도 비행청소년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문책을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단점은 감싸주고 장점은 열심히 칭찬해주는 것이 오히려 재발 방지에 효과적이더라고요. 그렇게 지낸 40년의 사회생활이 퇴직 후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준 셈이죠.”
물론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도 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대부분은 연륜이 있는 시니어. 자기 삶의 방식으로 오랜 세월 지내온 이들이라 자아가 강한 사람도 더러 있다. 그렇지만 그런 딜레마조차 약으로 삼고 보람으로 채운다. 그는 특히 제자들의 개인전 초대장을 받았을 때, 함께 단체전을 기획하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다. 사진 작업을 통해 멋진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받는 위로가 참 좋아요. 사진을 통한 교류는 예술 감각도 키워주고, 자연 속으로 돌아다니며 풍경을 찍으니 건강에도 도움이 돼요. 사진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멋지게 살아가는 제자들을 보면 뿌듯합니다.”
별명은 제비콩, 콩샘
‘제비콩’은 그의 별명이다. 문제민이라는 이름의 ‘제’ 자를 따 어린 시절 친구들이 지어줬다. 그때는 그 별명이 왜 그렇게 싫던지 친구들에게 화를 내며 못 부르게 했다. 그런데 한참 세월이 지나 사진 관련 사이트를 만들게 됐을 때, 닉네임을 무엇으로 만들까 고민하다가 어릴 적 친구들이 만들어준 별명이 문득 생각났다. 그 호칭이 이제는 제자들에게까지 사랑스럽게 불리게 됐다. ‘콩샘’이라는 귀여운 애칭까지 생겼다.
그에게서 강의를 들은 한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해 겨울, 교외로 출사를 나간 적이 있어요. 쨍! 하고 얼음이 갈라질 만큼 추웠던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장갑을 안 가지고 나갔어요. 셔터만 누르면 되는데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어’ 하는 배짱으로 나갔다가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어요. 손이 너무 시려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 지도교수로 오셨던 콩샘이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셔서 장갑을 가져다주셨어요. 제 손에는 커서 헐렁거렸지만 그렇게 따뜻한 장갑은 처음이었어요. 그날의 기억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누구나 은퇴 후의 삶을 걱정합니다. 더구나 콩샘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제2의 업으로 삼기는 쉽지 않죠. 그런 면에서 콩샘이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문제민 씨는 제2의 인생을 쉽게 맞이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운명처럼 카메라를 만났을 때 미친 듯이 빠져들었고, 거짓말을 하고 사진을 찍으러 가느라 돌아가신 어르신을 또 한 번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하며 웃는다. 박봉의 공무원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내 적금을 들고 그 돈으로 아내 몰래 카메라와 렌즈를 구입하면서 그때마다 들키지 않으려 숨겼던 일도 있었단다.
“그 비싼 필름을 사서 정신없이 찍었어요. 그야말로 카메라에 미쳤던 거지요.(웃음)”
칠순이 되었을 때 지인들이 잔치를 해라, 개인전을 해라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사진과 십수 년간 가르친 제자들의 사진 500점을 정리해 함께 실은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동안 나눈 대화와 댓글 내용도 실었다. 그리고 300여 명의 제자들과 출판기념 자리도 마련했다.
“이 책은 나의 역사입니다. 은퇴 후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수강자 몰리는 인기 강사
지금도 그가 강의하는 수업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문화원 수강 신청은 금방 마감된다. 주부, 퇴직자, 젊은이, 심지어 아픈 환자도 그의 강의를 듣고 싶어 한다. 한때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 큰 강당을 빌려야 했다. 입소문을 타며 인기 강사가 된 그는 백화점 문화센터와 다양한 지역에서 강의를 한다. 17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요즘은 사진 출사만을 위해 오는 수강생들도 있다고 한다. 전국의 풍광 좋은 자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니 소문이 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관심사로만 사진을 대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라도 사진을 찍으면 좋아요. 그런데 컴퓨터도 배우고 사진 폴더 관리도 할 줄 알면 더 좋아요. 포토샵도 배우고 인터넷 카페를 통해 서로 정보를 나누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시니어는 디지털 퍼스트 시대의 순기능을 적극 이용해야 해요. 컴퓨터는 여러 가지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놀이기구이거든요. 더불어 테마를 정해 자신만의 사진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야 실력이 향상되고 오랫동안 사진을 즐길 수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어느 신문에서 “예술가 중 가장 오래 사는 사람들은 사진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연 속에서 잡념을 버리고 즐길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안개 속 몽환적 풍경, 계절의 변화를 담아내는 셔터 소리는 짜릿함의 끝판왕이다.
그는 지금도 1960년대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나라 각 지방은 물론이고 중국의 오지 차마고도, 티베트 등지로 출사를 다녀오곤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지 물었다.
“잘 찍은 사진요? 그런 거 없어요. 앞으로 찍어야죠. 건강하게 계속, 강의도 하고요.”
그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사진을 통한 건강한 삶은 그의 모토다. 그리고 언제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심리학자들은 “행복하고 싶으면 친구와 여행을 가 맛있는 것을 먹으라”고 말한다.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오죽하면 ‘친구를 알고자 하면 사흘만 같이 여행해보라’는 말이 있을까. 여행 중엔 본성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일정에 지치고, 취향과 지향이 부딪치다 보면 날카로워지기도 한다. 특히나 해외 자유여행은 사전에 준비할 일도, 멤버 간 선택할 일도, 조정할 일도 많다. 요컨대 ‘갈등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다. 꼼꼼한 룰을 사전에 세워놓으면 좋다.
역할분담
각자의 특성대로 맡아서 하기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역할분담이다. 한 친구가 도맡아 하면 피로가 쌓이고 결국 “내가 혼자 애쓰는데 너희들은 뭘 했느냐” 하는 불평이 생기고 균열이 발생한다. 단 공정한 역할분담은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각자 똑같은 분량으로 일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장기, 재능별로 역할을 맡는 것이 좋다. 여행 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일정 기획, 예약, 회계 총무역할이다. 각자 자신 있는 분야를 맡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우리는 크게 건강(비상의약품, 음식), 회계 총무, 기획·예약, 기록담당 등으로 역할을 나눴다.
항공권 및 숙박호텔 예약
품 들인 만큼 싸게 살 수 있다
행복한 여행을 하려면 치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품 들이는 만큼 가성비는 높아진다. 여행준비의 핵심은 항공권과 숙박호텔 예약이다. 여기서 여행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린 비용보다 비행시간을 최소화해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기로 했기 때문에 직행 항공권만을 집중 검색했다. 품을 들이는 거에 따라 200만 원짜리 항공권을 절반에 살 수도 있다. 항공권을 싸게 샀을 때의 뿌듯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항공권은 일찍 예약한다고 반드시 싼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추이를 살피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예약’하는 게 필수다. 요컨대 항공권 비용 절약의 왕도는 결국 손품이다. 아울러 적당한 시기에 표를 사는 결단도 필요하다.
호텔 예약을 할 땐 비용과 교통편의를 함께 감안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로테르담과 벨기에의 브뤼셀, 호텔 3곳. 열흘 치 짐이 든 가방을 들고 이동하는 게 부담이었다. 대중교통 이동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역에서 가까운 호텔을 찾는 데 중점을 뒀다. 해당 도시 호텔들을 하도 많이 검색해 여행을 떠나기 전쯤에는 그 도시 시가지를 머릿속에 훤히 그릴 정도였다. 호텔 등급은 여행 전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점점 더 고급형으로 높이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끝이 좋아야 다 좋다. 뭐든 좀 불편한 데서 좋은 곳으로 업그레이드돼야 만족도가 높아지고 여독을 풀기에도 좋다. 전체 동선은 함께 가고 싶은 나라를 결정한 후, 여행지 안내서를 중심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여행사의 패키지 프로그램 일정표를 참고하고, 멤버들이 가고 싶은 곳을 반영해 최종 정리했다.
데이터 이용
여행 목적, 멤버 구성에 따라 수단을 찾는다
해외여행에서 데이터 사용은 필수다. 헤어졌을 때 멤버 간 비상연락망은 물론, 길을 찾을 때, 유적지 관련 정보를 찾아볼 때 필요하다. 해외에서 데이터 사용 수단으로는 유심, 휴대용 와이파이 공유기, 해외로밍 등이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으므로 비교 후 결정하는 것이 좋다. 유심은 전화번호가 바뀌기 때문에 국내에서 오는 문자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게 불편하다. 휴대용 와이파이 공유기는 일행이 인터넷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불편한 점은 공유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 수시로 별도 충전해야 하는 것도 단점이다. 또 멤버가 같이 사용하려면 일정 범위 내에서 붙어 다녀야 한다. 로밍은 편의성 면에서 가장 좋지만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짐 싸기
여행은 채우러 가는 게 아니라 비우고 오는 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 새 옷, 새 신발을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반대였다. 옷도, 양말도, 신발도 헌것으로 가져간다. 여행 중에 옷장 속에 놔두고 오기도 하고 매번 빨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새 옷과 새 신발이면 낭패다. 여행을 하다가 가방을 비워야 하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여행은 바리바리 채우러 가는 게 아니라 비우러 가는 것이다. 당연히 여행 짐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여행지 정보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을 할 때도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국과 관련한 영화, 소설 등을 읽고 가면 이해가 빨라 흥미롭다. 영화를 다운받아서 비행 중에 보면 지루함도 덜 수 있다. 네덜란드와 관련한 영화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튤립 피버’가 있고 책으로는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 편’,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산책’, ‘플랑드르 미술여행’, ‘네덜란드에 묻다, 행복의 조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등이 있다.
지출 비용
항목별로 미리 짜놓은 예산에 따라 쓴다
비행기표, 숙박비(별 4개 수준의 호텔 숙박비 기준), 입장권, 교통비, 투어비 등은 예약이 필요해서 미리 비용 파악을 할 수 있다. 굵직굵직한 일정들은 되도록 예약을 했다. 유명한 곳은 2개월 전 예약이 필수이고, 현장 판매가 안 되는 곳이 많으므로 확인이 꼭 필요하다.
현지에서 써야 하는 비용도 미리 예산을 세워 분류했다(여행지에서 현찰이 모자라 송금을 부탁하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식비는 끼니당 100유로씩 예상했다. 유럽 식당에선 1인 1식이 필수라 하지만 수프, 샐러드, 메인 요리 3개를 시켜도 무방하다. 또 호텔에서 팁을 줘야 할 때를 대비해 1달러짜리 지폐를 별도로 준비했다(동전을 싫어한다 해서). 교통비, 입장료도 미리 책정했다. 이외에 예비비를 편성해놓으면 여행 중 발생할 수 있는 돌발변수에 대처할 수 있어 좋다. 여행에선 크든 작든 사고가 발생한다. 여행 도중 우리는 일정이 변경되어 예약한 버스표와 기차표를 취소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아뿔싸, 버스나 기차는 하루 전에 취소해도 환불이 불가하고 현지에서 1년 내에 사용할 수 있는 티켓으로만 바꿔줄 수 있다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총액 28만 원 정도여서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때 예비비가 유용하게 쓰였다.
여행 중 비용 지불은 카드와 현찰 모두 가능하지만, 편의와 안전을 위해 적절히 배분해 다니기로 했다. 현찰로 지불할 때는 즉시 기록했다. 매일 저녁 영수증을 펴놓고 돈 계산하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현찰은 멤버들에게 N분의 1로 분배, 각자 가지고 다녔다. 혹시 모를 도난이나 분실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또 카드의 경우, 여행공금카드(체크카드)를 국내에서 미리 만들어갔다. 여행 후 가계부 앱을 돌려 지출비를 카테고리별로 점검해보니 ‘교통비 36%≻투어와 기타 31%≻숙박비 16%≻식비 13%’의 순이었다(그림 참조). 이런 기록 시도는 처음 해봤는데 다음 여행 계획 때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프로그램은 종합구성으로
해외 자유여행은 현지 가이드, 현지 관광상품, 프리 워킹투어 등으로 종합구성하면 좋다. 렌트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짐까지 계산해 동선 계획에 넣어야 한다. 체크아웃을 하고서도 호텔에 짐을 맡길 수 있는지, 역에 라커가 있는지 등도 확인한다. 교외 관광지는 이동수단의 불편이 많기 때문에 현지 관광버스투어, 현지 가이드를 활용하고, 목적지가 편한 곳일 때는 구글 앱 도움을 받아 이동하면 된다. 도심의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할 때는 워킹투어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역사문화유적지는 현지 한국어 가이드를 섭외하는 것이 좋다.
역사문화유적지
같은 곳을 봤어도 스토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추억이 달라진다. 미리 공부를 해가도 문외한의 눈으로는 한계가 있고 차이도 구별하기 힘들다. 우리는 역사문화유적지를 갈 때는 현지 한국인 가이드를 섭외해 설명을 들었다. 영어로 설명하는 가이드도 있지만 복잡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다행히 20여 년 이상 그곳에서 산 분이 가이드를 해줘 역사, 문화, 시사, 그리고 현지의 생활문화까지 들려줘 매우 유익했다. 현지 한국인 가이드 섭외는 ‘자전거여행’, ‘마이리얼트립’ 등을 이용하면 된다.
교외 유명 자연관광지
교외 유명 자연관광지는 현지 교통 사정에 어두운 외지인이 찾아가려면 힘들다. 관광버스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편하다. 역 터미널, 공항 터미널에 티켓센터가 있고, 국내에서 예매도 가능하다. 단 주의할 것은 버스 출발 장소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우리도 출발지와 티켓 발매처가 헷갈려 엉뚱한 곳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뒤늦게 혼비백산해 버스 출발 5분 전에 모임장소에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심은 워킹투어 프로그램 이용
대부분의 도시에는 워킹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걸어서 두세 시간가량 도심을 돌며 주요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한국인과 외국인 가이드 모두 가능하고 유료와 무료가 있으니 일정에 맞춰 예약하면 된다. 우린 암스테르담에서 무료 워킹투어 프로그램(영어)을 신청했다. 무료는 실력 차가 나는 경우가 많다. 효율성을 따진다면 유료 워킹투어를 이용하는 게 낫다.
한곳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면 구글앱 사용
한곳에서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면 일행끼리 움직이면 된다. 길치 4인방인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갈 때 구글 앱과 지도를 보거나, 현지인에게 물었다. 구글 앱이 잘돼 있어 길 안내를 상세하게 받을 수 있다. 트램(노면열차)을 타도 내려야 할 정거장, 경로까지 꼼꼼하게 안내해줘 편리하다.
인생을 재밌고 멋지게 사는 액티브 시니어가 많다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이리도 신나게 유쾌하게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마치 나이를 거꾸로 거스르며 사는 사람 같았다. 말투건 표현이건 도무지 언제 태어났는지 가늠 불가다. 그의 취미는 디제잉과 수상 스포츠. 그리고 라틴댄스도 요즘 온몸으로 접수 중이다. 올해 나이 64세, 젊음 지수는 딱 그 반의반으로 느껴지는 이 사람. 전 홍익대학교 건축도시 대학원 겸임교수이자 아방디자인그룹의 최범찬(崔範瓚·64) 소장을 서울마리나에서 만났다.
“이런 거 봤어요? 얼마나 폼나요.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전화번호까지 다 적혀 있잖아요. 이런 명함 처음 볼 거예요. 게다가 이 작은 명함을 뒤집으면 승선권이에요.”
서울마리나(서울 영등포구 여의서로)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최범찬 소장이 가방에서 명함 몇 가지를 찾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아방가르드호 요트 탑승권’이라고 쓰여 있는 명함에는 요트를 조종하는 선장이라는 뜻의 스키퍼로 자신을 명명해놓았다. 최범찬 소장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건축 업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능력자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올해 홍익대학교 건축도시 대학원 겸임교수에서 온전하게 물러나면서 요트와 취미에 투자하는 시간이 좀 많이 늘어났을 뿐. 늘 그랬듯이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다.
꼴찌 학생, 건축에 매료되다
“제 인생이 꽤나 재미있어요. 영등포구 당산동이 제 고향입니다. 파란만장했던 시절 제 일터였던 곳이 바로 여의도고요. 정년 마치고 당산역 근처 한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 제가 나고 젊은 시절을 보낸 곳에 돌아와 있는 느낌은 매번 좋습니다.”
요트를 타고, 홍대 클럽 구석구석 안 가본 곳 없다는 60대. 젊음의 거리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구태의연함을 증명하며 사는 사람.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입학이었다고 입을 뗐다.
“운명이죠. 홍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거 말입니다. 대학 시험을 앞두고 뭐에 홀리듯 놀아서 홍대 건축학과를 최하위로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더군요. 35명 중에 34등이었어요. 다행이었던 점은 전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는 겁니다.”
최하위 등수로 입학했지만 전공에 대한 매력에 흠뻑 젖어 살았다. 친구들 놀러 다닐 때 최대한 자제했다고. 대신 돈이 모이면 외국 건축 서적을 구해봤다. 꼴찌 학생에서 장학생으로 환골탈태했다. 건축학도로서 학업에 대한 깊은 애정은 대기업 마다하고 힘들기로 정평이 난 한국의 건축 거장인 김중업 선생의 건축연구소에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가시밭길에 고행이었다.
“당시 각 대학교에서 공부 잘하던 사람들이 일곱 명이나 김중업 선생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2년 사이에 다 떠나고 저 혼자만 남더라고요. 아버지 같고 너무 좋아했지만 넘지 못하는 큰 바위 같은 존재였죠. 제가 학교 다닐 때 체격이 좋았어요. 그런데 김중업 선생님 사무실 그만둘 때가 64kg이었습니다. 이후에 위암수술도 했는데 그때는 74kg이었어요. 힘들고 외롭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을 두고 다른 회사로 가는 모습이 제 생각에는 좋지 않아 모교 대학원에 진학해 조교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한 바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난 뒤 몸담은 곳은 일리노이공과대(IIT) 학장을 지냈던 김종성 교수가 문을 연 서울건축종합건축사 사무소였다. 중동 건설 현장 사업 수주가 많던 시절 최범찬 소장은 힘겹던 리비아 현장에서 완벽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 바로 수상 스포츠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저는 리비아 정부 종합청사 프로젝트 설계팀에서 1년 반을 근무했어요. 리비아 내전 훨씬 전이었는데 수도 트리폴리의 항구가 세계적인 미항으로 꼽히던 곳입니다. 부호들이 출입하는 고급 마리나(요트나 모터보트의 계류·연료 보급 등을 위한 기지)가 많아서 다양한 요트도 보게 됐어요. 그때 스쿠버 다이빙도 배웠습니다. 돈이 생기면 외국산 수상 장비들을 사 모았죠.”
리비아 시절 뭔가 잘 안 풀리면 넋 놓고 바라보던 달력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항공사 이름이 새겨진 달력이었는데 다이빙, 요트를 비롯해 각종 수상 스포츠의 시원한 사진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줬다. 훗날 다시 보니 그 달력에 소개된 수상 스포츠들을 다 섭렵했더란다.
“아직도 당시의 달력을 가지고 있어요. 리비아 시절 눈과 마음으로 담았던 것들을 실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리비아 업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과장 명찰을 달기도 전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대학 동창들과 함께 작은 건축인테리어 사무실을 열고 사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성과를 내면서 오랜 시간 승승장구했다. 홍익대학교 야간대학원 출강은 1997년도부터 했다. 학생들은 현업에서 10년 이상 일하고 있는 경험자들. 최범찬 소장은 그들 앞에 설 수 있는 적임자였다. 스스로도 50세 정도에 명예롭게 대학 강단에 서보겠노라 생각했는데 10년 앞당겨 강단에 섰다. 성공가도와도 같던 인생이었지만 IMF 금융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병마와도 싸워서 이겨내야만 했다.
암에는 해피바이러스가 특효, 요트에 입문하다
“2002년도에 사업체를 부도 처리하고 등촌동에 사시던 누님 집에서 살았어요. 학교 수업만 신경 쓰면서 프리랜서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2010년도에 위암이 발병했어요. 가톨릭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잘라낸 암 부위가 워낙 컸나봐요. 11cm에 가까웠대요. 수련의가 제 수술 장면을 참관할 정도였답니다. 수술 후 시간이 많아 빈둥거릴 때 리비아에서 가져온 달력을 꺼내봤습니다. 문득 ‘내 소원 중 하나가 요트 타는 거였지!’ 하고 요트를 배우게 됐습니다.”
1980년대 말 사업을 시작했을 때 윈드서핑을 좀 배웠는데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 비슷해서 그런지 요트에도 금방 적응했다.
“암 투병하고, 항암치료제를 먹으면서 요트를 배웠어요. 왜냐?! 죽기 전에 타야 하잖아요.(웃음) 사실 암 걸리기 전에도 요트에 관심이 많아서 서울마리나 분양 카탈로그를 가지고 다녔어요.”
현재 최범찬 소장이 운영하는 ‘아방가르드호’는 J/24 기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연안용 요트다. 10명이 공동 출자해서 산 중고 요트인데 지금은 멤버들이 다 떠나고 요트만 남았다. 돈이 좀 생기면 사비를 들여 요트를 유지 관리했고 지금껏 즐기고 있다.
“정년퇴임 이후 저의 놀거리를 위해서 요트 조정을 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울마리나 창립 때부터 이곳에 나왔어요. 그러니까 제가 소속해 있는 탑세일 요트클럽이 가장 오래됐습니다.”
사실 요트는 혼자서만 타는 것이 아니다. 요트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해도 보고 편하게 탈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제가 홍대에서 DJ를 하니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요트를 타보라고 권합니다. 서울마리나에서 요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서 한 번씩 말하죠. 어렵게 생각 말고 일단 요트에 와보라고요.”
홍대 놀이터의 늦은 밤은 ‘DJ 차니’
수상 스포츠에 대한 갈망과 함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음악 이야기였다. 홍대 앞 젊은이들이 모여 춤을 추고 버스킹을 하는 문화 공간에 떡하니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최범찬, ‘DJ 차니’다.
“저 젊을 때만 해도 그랜드하얏트호텔 JJ마호니가 최고 클럽이었어요. 저는 그곳 VVIP 단골일 정도로 많이 갔어요. 건축 일과 관련한 사람들도 주로 그곳에서 만났죠. 그리고 홍대건 이태원 클럽이건 음악을 들으러 다녔어요. 춤추는 거도 좋아했고요. 주말마다 한 20군데 돌아다니다 보니까 딱 클럽마다 일정하게 음악을 트는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싫증나더라고요. 직접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DJ 개인 강습을 받았어요. 3년 동안 암 투병하면서요.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라 수업 끝나고 학교 앞 놀이터에서 음악 틀고, 그 옆 피시방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살았어요. 피시방은 인터넷 속도가 빠르니까 웹서핑하기가 너무 좋잖아요. 지금은 제가 홍대 놀이터에 등장하면 애들이 자리를 비워줍니다.”
최근에 젊은 사람들이 주로 추는 라틴댄스인 살사에도 도전했다. ‘DJ 차니’로 활동하다 보니 주어진 미션과도 같았다.
“지난해 11월부터 살사를 배우고 있는데 잘 안 늘어요. 배우게 된 동기는 제가 라틴팝 음악을 틀었는데 남미에서 온 외국인들 호응이 좋더라고요. 뭐든 올인하는 성격이라서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서울마리나 루프톱에서 살사 파티 같은 걸 열어볼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멋있을 것 같아요.”
큰 암 덩어리를 잘라내고 시작한 요트와 DJ, 같은 세대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젊음의 춤 살사 도전까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암은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행운이죠 두 번 사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 나이에 요트도 타고 춤까지 배우고 있으니 즐거운 인생이죠.”
세상에 참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같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말했다.
“사실 사업체 부도가 크게 나서 제 소유로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실제 소유주는 다 다른 사람이에요. 요트도 운영은 제가 하지만 동호회 요트잖아요. 저에게는 소유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참 속 편하게 살고 있죠?”
행복하게 살다 고민 없이 세상과 이별할 계획이지만 언제든지 실내 건축가로서 현장에 뛰어들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좋은 일이 있으면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전 제 일을 정말 사랑하니까요. 단 아무 일이나 안 하겠죠. 정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그나저나 지금 제 바람은 살사 춤 실력이 좀 빨리 늘었으면 하는 겁니다.(웃음)”
스케줄이 빡빡하다고 했다. 아침 시간에는 요양원 봉사에 오후에는 영화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바쁜 일정 쪼개서 만난 이 사람. 발그레한 볼에서 빛이 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웃으며 나왔을 것 같은 표정. 미련 없이 용서하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그 누구에게도 남부끄럽지 않은 환한 미소의 주인공이 됐다.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이 꿈의 무대. 시니어 마술사 겸 영화인 조용서(趙鏞瑞·92) 씨를 만나 90대 소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전 11시에 복음병원에서 6월 생일인 분들의 생일잔치가 있었어요. 거기에 20명가량이 모였는데 그 앞에서 제가 마술을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는 서울노인복지센터 영화교실에서 영화 만들기 수업을 들었어요.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할 영화 막바지 작업을 해야 해서 요즘 좀 정신이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요즘 왜 바쁜지 설명하는 조용서 씨다. 배낭에는 뭣이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지 무거워 보였다. 영화 제작에 마술 공연도 하기 때문에 가방은 가벼워질 날이 없을 듯싶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총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입선해 실력을 인정받은 시니어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손수 영상물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촬영에 대본에 내레이션도 직접 한다.
“서울노인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등에서 시니어 감독으로 네 차례 입선했습니다. ‘어르신 통역사들’이라는 작품은 작년에 대한극장에서 상영했어요.”
이번 영화 ‘긴 세월 살았다네’는 조용서 씨와 아내가 주인공이다. 단편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난 이후 영화제 출품을 마쳤다고 전해들었다.
“작업을 해보니 러닝타임이 5분 40초더라고요. 90세 노년의 생활은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0월에 영화제가 있는데 입선이 되면 상영할 겁니다.”
조용서 씨가 만든 영상은 담담하고 담백한 게 매력이다.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자신과 주위 동료가 배우이자 주인공. 이 시대 시니어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방송인 송해 선생이라고 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송해 선생이 건강하게 전국을 누비는 모습이 참 훌륭해 보입니다. 저에게 많은 소재와 영감을 주십니다. 나이가 많아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시는 삶의 지표 같은 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나이를 먹고 머리도 하얗게 변해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잖아요. 제가 팔십이 넘어 영화를 만들게 될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2008년부터 영화 수업을 받고, 영화 제작을 하고,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어서일까? 봉준호 감독 부럽지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반짝이는 관객들의 눈이 좋다
영화와 엇비슷한 시절에 입문한 것이 바로 마술이다. 현재 조용서 씨는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의 ‘꿈전파 문화공연단’ 마술팀 소속으로 매주 틈새 없이 복지관, 병원, 어린이 도서관 등을 돌며 공연을 펼친다.
“영화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는데 마침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에서 마술 교육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웠습니다. 붓글씨나 노래교실도 있었는데 마술 수업을 보자마자 좋았어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제가 할 수 있는 마술은 200여 가지 됩니다. 손에 완벽하게 익어서 공연할 수 있는 마술은 30개 정도 되고요.”
조용서 씨의 마술 도구는 큰 공연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많게는 200~300명 정도의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마술을 주로 구현한다고.
“손재주가 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없어요. 그래서 동작도 크고 화려해 보이는 마술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마술은 분위기에 따라서 다른데 부채 마술이랑 인형 비둘기가 나오는 마술입니다. 스펀지나 꽃을 사용하는 마술도 있고요. 특별히 잘하는 건 우산과 꽃을 이용한 마술입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신기해 보이겠죠?”
애로사항이 있다면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은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서는 이유는 관객들의 눈 때문이라고 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반짝반짝 빛나요. 어린아이들이 손뼉 치는 거 보면 희망을 주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저는 무대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봐주는 게 행복해요. 자부심도 갖게 되고 말이죠.”
92세 시니어가 하는 말이 소년 감수성 저리 가라다. 사실 조용서 씨는 꽤나 매스컴을 탄 인물이다. 장수 관련 방송 다큐멘터리와 시니어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꼭 물어볼 질문이 생겼다. 장수 비결 말이다.
“저는 90대의 모범생으로 살고 있다고 봅니다. 바쁘게 살아요. 그게 장수하는 비결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뭐하겠어요.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노인 일자리를 통해서 시니어나 어린이들 앞에서 공연하고 박수 받는 시간들이 기쁘고 즐거워요.”
90년 인생 철학을 묻다
장수의 관문인 구십 문턱을 넘어 건강하게 살고 있는 시니어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안 해봤던 옛이야기 혹은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쉼 없이 이야기를 펼치며 한껏 들떠 있던 그의 들숨날숨이 순간 잔잔해졌다. 그리고 정적이… 잠시 동안의 정적이 이어졌다.
“그저 하루하루 마음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게 복이고요. 아프지 않게 우리 부부가 더 오래오래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 한숨 돌리더니 옛일이 파란만장했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의 제1차 경제 부흥을 일으켰던 세대에 속합니다. 서독 간호사, 광부들 아시죠? 그 시절 사람이에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 있었잖아요. 제 삶도 주인공과 비슷해요. 베트남전쟁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도 항만하역 근로자로 긴 시간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이제 몇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백전백패의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다시 일어나서 오늘이 있는 거 같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오늘 하루 즐겁게 행복하게사는 것이 지금 제 인생 최대의 바람입니다.”
이후에도 나긋하게 살아온 얘기를 하는 얼굴에 잔잔한 평화가 보였다. 본인 스스로를 연예인이라고 했던 초반의 긴장감이 없어서 더욱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도 그 미소 잊지 말고 마술가로 영화감독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시기를….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회사가 있다. 구성원이 6명인 작은 회사. 다른 회사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사무실을 조금만 둘러보면 독특한 분위기를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 회사 구성원은 60대 이상으로 모두 정년을 마친 사람들. 이들은 한목소리로 “정년 걱정이 없어 고용불안이 존재하지 않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동료들과 함께 보람 있는 제2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삼성기술안전의 최동기(崔東基·64) 씨를 만났다.
“정년퇴직 후의 꿈은 건물 관리소장이었죠. 서울교통공사에 다닐 때 자격증을 보유한 직원들에게 수당을 주는 제도가 있어 산업안전기사와 산업안전산업기사 자격증을 따놓았거든요. 여기에 몇 가지만 더 공부하면 될 것 같아 빌딩경영관리사와 사용시설가스안전관리자,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 등을 정년 직전에 땄어요.”
취업박람회 문턱 닳도록 다녀
그가 자격증에 매달린 것은 정년퇴직 후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체력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은 데다, 퇴직자를 받아줄 회사 또한 찾기 힘들다고 판단해서다.
“공부는 어렵지 않았어요. 원래 시험을 보면 잘 붙는 편이었고, 기출 문제 위주로 공부하는 요령도 생겼죠. 열심히 하는 모습을 칭찬하는 아내 응원에 더 힘이 났어요. 퇴직해도 놀 사람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웃음)”
2015년 2월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에 차 있었다. 지하철 역장 출신으로 조직관리와 기술 분야와 관련한 오랜 경험이 있었고, 자격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퇴직 후 곧바로 제안받은 일자리도 거절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퇴직 후 몇 달간 숨 고르기를 한 뒤에 다시 일을 시작하자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일터는 많지 않았다.
“취업박람회를 수없이 다녔죠. 이력서도 계속 넣고.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취업활동 요령도 알게 됐죠. 하지만 늘 나이가 문제였어요. 퇴짜 맞기 일쑤였죠. 거절이 반복되자 아침에 가방 들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 취업 제안을 받았어요. 안전관리자 대행업체였어요. 50인 이상 사업장은 사내에 안전관리자를 선임하거나 외부 전문기관에 대행을 의뢰하게 되어 있는데, 이 일을 하는 회사에서 안전관리자로 활동하게 된 것이죠.”
3년간의 회사생활은 그에게 산업안전관리 분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줬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이 있었다. 바로 ‘파리목숨’ 같은 계약직 신분이었다.
“‘당신 계약직이잖아, 내년은 장담 못해’ 등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렸죠. 명절 떡값에서부터 계약직에 대한 차별은 곳곳에 있었어요. 사장이나 젊은 상사들의 말이 곧 법이었으니까. 그렇게 불안에 떨다가 어느 순간 결정했어요. 더 이상 안 되겠다, 회사를 차리자! 하고 말이죠.”
“정년 없애자” 6인의 의기투합
1959년생이 막내인 젊은(?) 회사는 그렇게 태어났다. 지난해 10월, 6명의 안전관리 전문가가 함께 투자하고 의기투합해 설립한 회사는 ‘삼성기술안전’. 역할은 각자의 전문 분야에 따라 나눴다. 이곳에서 최 씨의 직함은 이사다.
“우리 회사 구성원들의 자격증 개수를 합치면 50개가 넘어요. 나이는 많지만, 실력과 경력은 모두 출중하죠. 수익보다는 보람 있는 인생에 더 가치를 두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설움을 느껴봤으니 정년 없는 회사를 만들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신바람 나게 일을 해보자고 말이죠. 처음 6개월은 집에 가져가는 돈이 없을 거란 각오로 일했죠. 그래도 나이 먹었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들 초로의 길목에 서 있는 만큼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은 서로의 건강이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은퇴 시기까지 건강하게 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최 씨는 75세까지는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함께 모였을 때 외치는 구호도 안전과 함께 건강을 빼놓지 않는다.
사실 안전관리자는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직종 중 하나다. 각종 산업시설을 방문해 안전상 위험요소를 찾아내 해결하거나 조치가 되도록 조언하는 역할이다 보니 사업장 구석구석을 살펴야 한다. 특히 고층 건물은 지하층부터 꼭대기까지 빠짐없이 다니며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이 떨어지면 일을 할 수 없다. 또 시간이 남을 땐 신규 사업장 확보를 위해 영업도 다녀야 한다. 최 씨는 “구성원이 6명밖에 안 되지만 회사에서 다 함께 얼굴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다들 바쁘다”고 말했다.
35년 직장생활, 지하철에 바쳐
최 씨는 1979년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해 35년을 지하철과 함께 근무하다 정년퇴직했다. 그가 입사했을 때 서울교통공사는 아직 서울시 산하의 지하철운영사업소로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지하철 운임은 30원. 9개 역 운수 수입은 하루 553만 원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판매하는 역무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에드몬슨식 승차권을 사용했어요. 탑승객들의 표를 역무원이 일일이 구멍을 뚫으며 검표를 했죠.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지하철에 익숙지 않아 지금은 상상도 못할 촌극이 많이 벌어졌어요. 특히 서울역은 시골에서 오시는 분이 많아 더욱 심했죠.”
2009년 신촌역 역장으로 부임했다가 대림역 역장으로 정년퇴직했다. 평생을 쉬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 옆에 서서 대한민국의 산업화, 민주화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공기업에서 정년을 마쳐 생활비 조달이 급급한 상황은 아닐 텐데, 투자까지 해가며 회사 설립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 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에만 있으면 안 돼요. 소속된 곳이 있어야 힘이 솟고, 활력을 유지할 수 있어요. 주변 동년배 중 건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물론 지금의 회사는 예전에 다녔던 직장과는 구조도 문화도 다르죠.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되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는 서로 상의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어요. 함께 꿈을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더 열중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또래의 퇴직자, 퇴직 예정자들에게 “나이가 많다는 이유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세상엔 말도 안 되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기적 같은 일을 해낸 사람이 수없이 많잖아요. ‘왜 나만 힘들지?’ 하는 생각 속에 사는, 나이 든 사람을 종종 만나요. 하지만 꿈을 향해 뛰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고민이 느껴지지 않아요. 꿈과 목표를 분명히 세우면 노후의 삶도 바쁘게, 치열하게, 보람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조금 일찍 찾아온 여름 때문에 봄이 짧아졌다.
맑게 갠 파란 하늘 아래서는 아카시아 향기가 희미해져 가고 장미는 못 참겠다는 듯 붉은 아름다움을 터트린다. 연녹색 나뭇잎을 타고 구르는 물방울이 싱그럽다. 이토록 푸르른 날 자연을 담지 않는다면 내 카메라에 미안한 일이다. 가방을 메고 나섰다.
신록의 기운을 하나 가득 받기 위해 찾아간 곳은 강화도다. 강화도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가 있는 걷기 여행길이 있다. 총 20개 코스가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의 5개 섬에 ‘강화 나들길’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돼있다. ‘강화 나들길’은 코스마다 해당 코스를 상징하는 이름이 있다. 그 중 ‘호국돈대길’이라는 이름의 제2코스를 걸었다. ‘돈대’란 성벽 위에 석재 또는 벽돌을 쌓아서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높은 누를 말한다. 강화도가 근대사에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반영한 이름이다.
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와 마주 보는 해협을 따라 있다. 초지진에서 시작해 덕진진, 용두돈대, 광성보, 오두돈대, 화도돈대, 용당돈대, 용진진을 거쳐 갑곶돈대까지 가는 17km의 거리다.
김포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초지진이 있다. 초지진은 병인ㆍ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근대에 가장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다. 해상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다.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을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도 보수하고, 조선군이 쓰던 대포도 전시해 놓았다.
‘강화 나들길 2코스’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자전거 여행자들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전용 도로가 길옆으로 잘 만들어져있다.
걷다가 바라본 파란 하늘 아래 길가에 은행나무 연두색 잎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왜 이즈음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논에서는 모내기를 끝낸 후 뿌리가 자리를 잘 잡으라고 물을 대주고 있다. 갓 심은 모의 푸르름도 이즈음에 맞는 연녹색의 향연이다. 그 잔칫상으로 하얀 백로들이 날아왔다.
덕진진은 강화도 12개 진․ 보의 하나로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다. 덕진돈대 앞에는 흥선대원군이 ‘어떠한 외국 선박도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당시 쇄국 의지를 나타낸 경고비가 있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서 해협을 따라 길게 쌓았던 성이다. 이를 167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다. 이곳에 당시 전사한 무명 용사들과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가 있다.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일 년에 한 번 ‘광성제’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 주변에 가볼 만 한 곳
ㆍRose Bay: 초지진에서 덕진진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커피 숍이다. 커피와 갓 구운 빵은 물론이고 도자기와 다육식물을 전시, 판매하는 온실도 있다.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든은 덤이다.
ㆍ대명항 포구: 초지대교 김포 방면. 5~6월은 병어, 밴댕이 회 철이다. 현대식 시설로 깨끗한 환경을 갖춘 젓갈 시장도 있다. 5~6월은 황석어, 밴댕이 젓갈 철이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릴 때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 눈물의 언덕을 / 피ㄹ 닐니리.
한하운 시인의 애달픈 시 ‘보리피리’다. 소록도를 다녀오고 나서 비로소 그 고독과 고통을 백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한 채 시를 읊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나병으로 한 맺힌 일생을 살아간 분들의 절망을 비로소 마음속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다.
전남 고흥에서 소록도 가는 바다는 평화롭기만 하다. 해안 울창한 솔 숲 옆으로 도로가 길게 나 있다.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뿐인 한센인들의 면회가 먼발치로 떨어진 채 이루어진다. 행여 바람결에 병이 옮겨질까 봐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고 한다. 부모형제여도 손잡아 볼 수도 없고 서로의 숨결 한번 느껴보지 못하던 아픔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애환 어린 탄식의 장소란 뜻으로 수탄장(愁嘆場)이다.
일생을 소외와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편견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병원 치료도 못 받고 부모형제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간 곳이 소록도다. 103년 전부터였다. 한때는 6000여 명 정도 수용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500여 명의 환우들이 남아있다.
그 세월 소록도 병원의 나무는 자라서 울창해졌다.
그분들의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고 있을 건물들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검문소를 지나 수술대와 검시대, 세척실, 감금실, 시체 해부실, 형무소를 돌아보며 처절했을 그 시간들을 짐작해 본다.
밖으로 나오면 6000여 평의 공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환자들의 강제노역으로 조성된 곳이다. 환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한으로 만들어진 공원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다. 편백나무, 소나무, 향나무, 철쭉과 종려나무, 장미터널 등 각종 꽃과 나무, 그리고 잘 가꾸어진 푸른 잔디 위에 그들의 아픔을 표현한 시화가 줄지어 서있다.
공원 중앙에 하얀 탑이 하늘 높이 눈부시다.
성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인 한센병을 발로 밟고 박멸하듯 창으로 찌르는 형상이다. 그 아래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있다. 옆면으로는 1963년 당시 근로봉사단이었던 국제워크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의 대학생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것이 소록도의 랜드마크 구라탑(救癩塔)이다. 말 그대로 나병에서 구함을 얻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탑이 있다.
1962년 소록도의 나환자를 돌보러 오스트리아에서 멀고 먼 이 땅으로 온 마리안과 마가렛 두 수녀님의 공적비다. 40년이 넘도록 맹목적인 헌신으로 수많은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았던 분이다. 연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 봐 편지 한 장 남기고 40년 전에 들고 왔던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고향으로 떠났다고 한다. 현재 두 수녀님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을 위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소록도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지켜주고 덮어주지 못한 세월을 산 분들에게 가졌던 편견의 벽이 부끄럽다. 그들이 소록도에 갇혀 산 시간에 편안히 살아서 미안하다.
전남 고흥의 끝자락인 녹동항 앞바다에 있는 아기 사슴의 머리 모양을 닮은 작은 섬 소록도(小鹿島), 지금은 그 섬의 생명력을 닮은 푸르른 등나무가 붉은 벽돌담을 가득 덮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