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지를 앞에 두고 잠깐 서 있었다. 천보산 기슭 아래 들판처럼 광활한 면적 위로 겨울이 지나가는 중이다. 조선 시대 최대 규모 사찰이던 회암사가 있던 곳, 회암사 절터에는 군데군데 아직 잔설이 희끗희끗하다. 그늘이 드리운 땅에는 녹지 않은 눈이 제법 하얗다. 여전히 쨍한 찬 기운을 제대로 맛본다. 머릿속이 시원하게 헹구어지는 느낌이다.
치유의 궁궐 회암사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딛고 있었던가. 그 옛날 건물만 262칸이었다던 조선시대 사찰 회암사가 있었던 회암사지에는 찬 공기를 실은 바람이 가끔씩 지나간다. 당시 승려만도 3000여 명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하니, 지금이어도 엄청난데 그 시절 대찰의 면모를 가히 짐작해볼 만하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14-1번지 일원, 천보산이 둘러싼 ‘회암사지’ 절터는 역사 속에서 잊혔던 곳이다. 그러다 1997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조사와 작업 과정에서 사찰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위상을 알 수 있는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절터의 제1권역부터 제2, 제3… 권역의 상세한 안내판이 여기저기 친절하다. 회암사지 사리탑은 물론이고 연못지와 우물지, 화장실 터까지 규모를 상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현재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천보산 아래쪽 계곡을 메워 계단식 석축을 쌓아 건물 구역을 조성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구역별 건물지도 발견되었다. 회암사지를 둘러보다 보면 거대한 석축과 반듯반듯하게 배치되었을 건축 형상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당대의 석공들이나 장인들이 이 절에 들인 공력조차 느껴질 정도이니 당시의 면모가 감히 가늠된다.
화암사지 중심에서 벗어나 산기슭 바로 아래에 위치한 회암사지 부도탑,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탑으로 추정하는데 사리탑(舍利塔)은 대체로 온전하게 남아 있어 귀중한 석조 유물로 전해진다. 특히 조선시대 부도 양식으로 건립된 사리탑 중에서 정교함과 화려한 조각 문양으로 수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규모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조형물이다.
사리탑 앞에서 너른 회암사지 방향으로 시선을 두고 서니 멀리 도심의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를 두고 과거와 현재가 마주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던 회암사지는 현재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1만여 평의 회암사지를 한 바퀴만 돌아도 당시의 거대한 규모와 불교 문화의 흔적이 역력하다. 회암사지를 내려오는 길목에 세워진, 회암사를 찾는 태조의 행차 장면 모형에서 이곳의 위상을 또 한 번 느낀다.
문화재 간직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지에서 발굴·출토된 유물들을 전시 중인 박물관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은 유물 전시 및 교육을 비롯해 쉼터 역할도 하는 등 친화적인 분위기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듯한 지역민들이 방문자센터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다. 대규모 절터 옆의 박물관이 주민들과 친근하게 이어진 모습이 보기 좋다. 박물관 안에서는 옛 복장을 한 아이들이 놀이하듯 교육 중이었다. 이곳에서는 이런 풍경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공·나옹·무학의 천년 고찰 회암사(檜岩寺)
회암사지에서 고개를 들어 보면 멀리 회암사 일주문이 보인다. 자동차로 5분쯤 달려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천보산회암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 옆으로 지공선사·나옹선사·무학대사 삼대 화상 수행성지라는 팻말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현재의 회암사는 옛 회암사의 삼대 화상 묘탑(廟塔)을 지키기 위한 작은 암자 터에 세워진 공간이라는 설명도 있다. 삼대 화상의 묘탑과 가람을 수호하고 수행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회암사다.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장대했던 대규모 사찰이 폐사되고 초석만 남아 있던 곳이었다. 200년 동안 엄청나게 번성했던 회암사는 그 시절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대부분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다고 전한다. 이제는 지공·나옹·무학 세 승려의 부도와 비(碑)를 중수하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지어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사찰이 넓진 않아도 천년의 문화유산이 숨 쉬는 듯 따뜻하고 고색창연하다. 대웅전 마당 옆으로 난 산길을 몇 걸음 옮기면 지공선사의 부도 및 석등, 나옹과 무학의 사리탑이 나란히 앉혀져 있는 언덕이 있다. 비탈진 사찰을 천천히 오르면서 그분들의 수행 향기를 느껴볼 만하다.
현재 회암사에서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맑은 자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시간은 진정 힐링일 것이다. 절의 격이 느껴지는 산사에서 마음을 열고 수행자의 일상을 경험하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볼 수 있다면 선물 같은 시간이 될 듯하다.
역사·문화 도시 양주에서는 또한 이 지역 출신 예술가들을 위한 기획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권율장군묘역이 있는 권율로를 달리다 보면 두 개의 미술관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도로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는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기획 전시도 진행하는 중이다.
화가 장욱진과 조각가 민복진의 예술 속으로
장욱진 화가의 그림 내용은 우선 가족이다. 그리고 나무, 새, 아이 등 일상의 소재들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그 속에는 자연과 사물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본질이 담겼다. 한국의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장욱진의 미술관은 조각상이 전시된 공원을 지나서 들어간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그림마다 가족이 등장한다. “나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가족을 통해 서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과 다를 뿐”이라고 했듯이. 이렇듯 전시장의 그림마다 화가의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영상을 통해 그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심플하다”는 화가의 말처럼 자연 속에서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특히 미술관 건물은 화가의 그림을 모티브로 설계된 새하얗고 독특한 구성의 건축으로 눈길을 끈다. 2014년 김수근건축상을 받기도 했다.
건너편의 민복진미술관은 입장 티켓 한 장으로 장욱진미술관과 함께 이용할 수 있다. 1층의 기획 전시를 보고 2층으로 올라가면 민복진 조각가의 현대 조각이 가득 차 있다.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조각 작품과 빛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역시 가족과 어머니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주제다.
돌아오는 길에 장흥면 방향으로 위치한 간이역 일영역을 거쳐서 오는 건 어떨지. 마침 노을이 내리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폐역이 된 일영역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로 알려졌는데, 이제는 BTS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스토리텔링에 기반을 둔 아련한 레트로 감성의 폐역을 거쳐 오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마무리다.
당일 코스로 역사와 문화를 두루 돌아볼 수 있는 경기도 양주의 하루는 풍성하다. 꽃잎이 날리는 봄·가을의 나리공원이나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출렁다리, 양주 별산대 놀이마당, 수목원이나 아트파크의 즐거움을 누릴 계절도 있다. 봄을 앞둔 시절에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림과 조각 작품의 예술에 깊이 빠져보는 것, 참 감사할 따름이다.
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실패’일 것이다. 경제적 타격도 상당하고, 이로 인한 정신적 타격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지난해 창업진흥원 재도전 성공 패키지 우수 사례에 이름을 올린 중장년 재창업가 3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료 제공 및 도움 창업진흥원
[1] 경영 파트너와의 호흡으로 기술에 탄력 더하다, 새솔테크(주) 한준혁 대표
ㆍ회사설립 2021년 5월 13일 ㆍ매출액 6억 원(2022년 기준)
ㆍ주요사업 자율주행, V2X 보안 토탈 솔루션 공급
한준혁 대표는 새솔테크 창업 이전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모바일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했었다. 한때 유행하던 피처폰 소프트웨어 개발 용역을 주로 맡았는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관련 사업은 외면받기 시작했다. 시대 흐름에 대응하지 못한 채, 자금난까지 더해지며 결국 폐업의 고배를 마셨다. 그렇게 폐업 후 10여 년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프리랜서 생활도 하고, 직장도 몇 군데 다니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Q. 폐업 이후 재창업 과정은 어땠나?
마지막 직장에서 자율주행 분야를 접했다. 기술적으로 노하우가 생기고 인적으로 네트워크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분야의 창업을 준비하게 됐다. 이전 사업에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다양한 지원 사업의 존재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 후회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법인 설립 전 개인사업자를 내자마자 창업진흥원의 재도전 성공 패키지를 포함해 정부나 기업 등의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찾아봤다. 그렇게 얻게 된 경제적 지원 덕분에 본격적인 사업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개발자 출신이라 경영적인 역량은 부족한 편이다. 사업의 방향성을 설계하고 운영해 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성공 경험을 지닌 이재성 대표님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현재는 이 대표님이 경영총괄, 내가 개발 총괄을 맡고 있다. 덕분에 이전보다 좋은 성과를 내는 중이다.
Q. 새솔테크(주)는 자율주행 V2X 보안기술 회사다. 이는 어떤 기술인가?
자율주행 자동차가 상용화되려면 사이버 보안이 전제돼야 한다. 이에 대한 글로벌 규제들도 생겨나는 추세다. 새솔테크(주)의 자율주행 V2X 보안기술은 인간의 생명 보호와 교통 효율화라는 큰 목표를 지닌다. 2021 하반기 ‘C-ITS 상호 호환성 시험행사’를 통해 국제보안규격 IEEE 1609.2 & SCMS 1.0(CAMP) 기반의 V2X 보안인증서 발행과 단말 탑재를 성공시키며 기술적으로 신뢰를 쌓았다. 앞으로 우리가 자부하는 기술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해 나갈 예정이다.
Q. 본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언 한다면?
일단 혼자서는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즈니스란 너무 복잡해서 본인이 가진 기술 역량만으로는 사업체를 이끌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보완해줄 파트너와 함께 시작하기를 추천한다. 또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관련 사업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프런트엔드(Front-end)와 백엔드(Back-end) 기술을 모두 섭렵하라는 거다. 사업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다른 개발자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기술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2] ㈜예성글로벌 김경태 대표, 독보적인 기술로 세계무대 꿈꾸다
ㆍ회사설립 2018년 12월 18일 ㆍ매출액 19억 1000만 원(2022년 기준)
ㆍ주요사업 친환경 생활용품군과 첨단 소방용품군을 개발·생산·유통
만 18세에 기술직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경태 대표는 서른 살이 되던 해 사직서를 냈다. 퇴직 후 10년은 아내와 디지털 도어록 대리점을 운영했다. 점차 디지털 도어록 보급률이 높아지며 역으로 고객이 줄었고, 그동안 터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 대표는 문에 부착하는 소방용품인 자동폐쇄장치와 도어 클로저를 사업 아이템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사업은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고, 결국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Q. 야심차게 준비한 사업이 폐업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뭐라 생각하나?
기술력이 있으니 얼른 자체 제품을 출시해서 도어록 대리점 운영하듯 유통하면 되겠다는 다소 안일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품 개발이 늦어졌다. 투자금은 자꾸 늘어나는데 비용 회수가 안 되니까 힘들어지고 결국 문을 닫게 된 거다. 또, 엔지니어로서 기술력은 자신 있었는데 경영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경영이나 재무, 조직 관리 등의 지식과 노하우가 좀 더 있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후회를 많이 했다. 그래서 폐업 이후 6년 정도 회사에 다니면서 제품 개발과 동시에 경영도 공부했다. 또 이전 사업에서 오로지 대출로만 사업 자금을 확보했던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재도전을 준비하면서 각종 지원 제도를 꼼꼼히 알아봤고 이를 통해 일정 부분 사업 자금을 만들었다. 폐업을 통해 배운 교훈인 셈이다.
Q. 폐업 이후 재도전은 어떤 과정으로 이뤄졌나?
회사는 폐업했지만, 제품 개발에 대한 의지는 멈추지 않았고 인적 인프라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재창업을 결심하고 창업진흥원 재도전 성공 패키지 사업을 신청했다. 현재는 공압식 도어클로저와 방화문 자동폐쇄장치, 두 제품에 주력하고 있다. 공압 도어클로저는 특허 및 디자인 등록이 20여 건, 출원 13건, 해외특허출원(PCT)이 1건이다. 특허는 출원 신청 이후 평균 1년 반 정도 지나 공개되는데, 자체 기술을 보유하면 남들보다 1년 반 정도는 앞서간 셈이다. 도어클로저는 현재 개발 막바지 단계이고, 올 가을 쯤 출시를 앞두고 있다. 방화문 자동폐쇄장치는 지난해 9월에 글로벌 기업에 공급 계약을 체결해 연간 40억 원 이상 매출이 발생하게 됐다. 두 제품 모두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관심이 높아 세계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Q. 기술 창업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기술력, 아이템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술 창업인으로 제조업에 뛰어들고 싶다면 더더욱 그렇다. 독자적인 기술력이 없다면 창업을 하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본인이 가진 기술, 만들고 싶은 제품이 없다면 차라리 기존에 잘 만들어진 제품을 사서 유통업을 하는 편이 나으니까. 또, 엔지니어 정체성을 지닌 대표라면 반드시 경영 관련 공부를 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나 좋은 제도들이 많다.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경영을 너무 모르면 그 무지가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3] 두 번의 폐업 후 세 번째 도전, 토미코리아 김성진 대표
ㆍ회사설립 2020년 10월 26일 ㆍ매출액 매출액 12억 원(2022년 기준)
ㆍ주요사업 고양이용품의 프리미엄 브랜드 묘우묘우 고양이 정수기
김성진 대표는 청년 시절 아파트 청소용역업체를 개업한 적이 있다. 그러다 트럭에서 떨어져 허리는 다치는 바람에 육체노동이 필요했던 해당 사업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이후 지인 추천으로 차량용 방향제 사업을 시작해 월마트 입점까지 내다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이 역시 좋지 않은 결과를 맞았다. 안일했던 독점거래로 적자를 떠안게 된 것. 다시 직장인이 되어 성실히 빚을 정리해가며 반려동물용품 사업으로 재도약을 꿈꾼 김 대표다.
Q. 두 번의 폐업 후, 새로운 창업 아이템으로 반려동물용품을 택한 이유는?
새로운 사업은 시장 규모가 크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일로 하고 싶었다. 자동차 방향제 시장이 200억 원 정도였는데, 반려동물용품 시장은 6조 원에 육박하더라.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 속에서 반려동물 인구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일본 바이어를 통해 강아지 패드를 수입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시드 머니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돈이 될 만한 물품은 무엇이든 수입해서 판매했다. 그러던 중 자체 브랜드 묘우묘우를 만들어 OEM으로 생산한 고양이 관련 제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체적으로 기획과 개발부터 생산까지 모두 담당한 고양이 정수기까지 이르렀다. 고양이 정수기 사업계획서로 창업진흥원의 재도전 성공 패키지에 응모해 지원금을 받아 곧바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2022년 1월에 브랜드 ‘묘우묘우’를 론칭했는데, 10년 후에는 고양이 정수기 하면 묘우묘우가 떠오르게 하고 싶다.
Q. 세 번째 창업을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쓴 것은 무엇인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쿠팡, 옥션 등 각종 온라인 마켓의 성장세가 놀라웠다. 이 플랫폼에서 물건을 팔아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컴퓨터라면 독수리 타법으로 겨우 칠 정도의 실력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 무상 교육을 찾아다니며 온라인 마켓 관련 수업을 듣는데, 답답한 마음에 처음엔 그야말로 울면서 배웠다. 열심히 배운 덕에 이제는 온라인 스토어의 메커니즘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 포토샵으로 기본적인 일러스트 작업도 가능하다. 또 창업진흥원의 재도전 성공 패키지를 포함해 여기저기 정부 무상 교육을 찾아다니며 100시간 넘는 수업을 들었다. 컴퓨터는 물론 직원 관리 방법이나 세무회계, 노무 등 기업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했다. 사업은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회계, 영업, 경영, 디자인, 관리 모든 분야를 다 알고 있어야 한다.
Q. 현재의 성과가 있기까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나?
2022년 기준 매출액이 12억 원 정도다. 중국, 일본으로 제품 수출도 하고 미국 아마존 입점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에 현재는 감사한 마음이 큰데, 사실 젊은 시절에는 감사함을 잘 몰랐다. 한때 매출 20억을 달성해도 감사하기보다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난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일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도, 물건이 팔리는 것도, 이런 감사한 마음을 갖고 계속 해나가려 한다. 무엇보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영원한 현역으로 남고 싶다. 그러려면 열린 마음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용기만 있다면 몇 살이 됐든 도전 가능하다고 믿는다.
숨 가쁘게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덧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겨울 차디찬 공기와 그 풍경 속으로 데려다주는 대청호의 새벽을 찾아간다. 자동차로 어두운 새벽길을 두 시간여 달려 쨍한 추위 속에 호수의 새벽 공기를 맞는 일, 신선하다.
엄동설한의 캄캄한 새벽길은 생각처럼 어렵진 않다. 달려갈수록 조금씩 걷혀가는 어둠을 확인하는 일도, 중간에 잠깐 들른 휴게소의 적막함도 어두운 길을 달리는 사람들만의 즐거움이다. 서울이나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새벽길을 달리면 시골길 드문드문 몇 채의 농가와 들판이 내다보이고 대청호를 향한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청호 오백리길 제4구간 출발점인 윗말뫼 주차장은 한적하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총 21개 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간 안에 대전, 청주, 충북 옥천군과 보은군이 경유한다. 그 속에 마을과 산과 들과 강과 호수가 오백리길을 이어준다. 원래는 대덕군과 청원군 사이에 있다고 하여 대청호라 이름 붙였다. 이 지역에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80년 대청댐 완공과 함께 지역 마을 담수화가 시작되면서 생겨난 인공 호수가 대청호다. 이때 수몰 지역은 86개 마을로 4000세대가 넘었고, 주민은 2만 6000여 명이나 되었다.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생긴 대청호로 인해 어릴 적 따뜻했던 추억 속 아름다운 시골 마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대청호는 인공 저수지로는 저수량 기준으로 소양호와 충주호에 이어 국내 세 번째다. 스무 개가 넘는 대청호 오백리길 구간을 편안히 즐기는 방법은 호수 둘레길을 산책하듯 걷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4코스 호반 낭만길은 대청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습지공원과 자연생태관 등이 걷는 길마다 이어지며, 총길이는 약 12.5㎞이고 5~6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지금도 호반길을 걷기 위해 찾아드는 이들에게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2023년 열린관광지 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대청호 일대는 장애인, 노약자 등 이동 약자들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무장애 관광 환경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이제는 이동 약자의 문턱이 더욱 낮아진 대청호 오백리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정보취약계층이 불편 없이 관련 홈페이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도 개선한다.
취향에 따른 구간별 길을 걷다가 갈대숲이나 호숫가에 멈춰서 조용히 대청호를 즐길 수도 있고, 또는 드라이브만으로도 좋다. 굳이 걷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발걸음에 따라 또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일부를 걷거나 쉼을 택하면 된다. 걷는 속도나 그 길을 모두 걸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일인가. 단 한두 시간을 걸었어도 그저 자연 속에서 음미하는 시간이 의미 있다.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다독이는 그 순간만으로도 충만하다.
동이 트기 전 호수에 도착하는 이들에겐 새벽 물안개에 대한 기대가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마냥 맑고 쾌청한 호수를 보게 된다. 일교차가 큰 봄과 가을에 주로 발생하는 물안개가 이날따라 피어오르지 않았다고 글렀구나 생각할 일은 아니다. 새벽의 거대한 호숫가에 서보았는가. 온몸이 떨리고 시리도록 쨍한 상쾌함으로 간단하게 마음의 평안을 던져준다. 이렇게 겨울과 마주한다.
호수 주변에 들면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공기 맛이 다르다. 건너편의 산과 능선이 호수 안으로 잠겨 흔들림 없는 반영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호반 둘레길에 깊숙하게 들어가면 질퍽한 습지 위로 풍성한 억새가 숲을 이루었다. 가끔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가 나곤 한다.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철새가 푸드덕 날고 먹잇감을 찾는 백로의 날갯짓을 보게 된다. 계절에 따라 개구리는 물론이고 메뚜기나 거북도 볼 수 있다. 자연환경이 청정해 구간 안에 자연생태관도 운영한다.
수변탐방로에서 한없이 호수에 취했다가 명상정원 방향으로 향하면 무엇이 기다릴까. 호수와 숲이 함께하는 곳이다 보니 발밑에는 여전히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10분여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숲길의 자연스러움에 젖어든다. 호수와 정원 사이 언덕처럼 완만한 등성이에 ‘대청호 오백리길’ 표지판이 보인다. 쉼을 제공하는 벤치와 정자가 호수를 앞두고 나무 아래 고즈넉하다. 이곳에서 호수를 빙 돌아보며 각자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명상정원은 물속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건네주는 공간인 듯싶다. 한 번쯤 들러서 간단하게라도 그리움을 풀어보도록 전통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옛 마을길의 한옥 담장, 장독대, 널찍한 평상 등으로 그들의 깊은 그리움이 해소될까마는 수몰민들을 위로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마을 어귀에서 자라던 나무였는지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나무는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어 언제까지나 물속에 잠겨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물속의 작은 섬들이 이루는 반영의 멋과 함께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상정원에는 드라마 ‘슬픈 연가’, 영화 ‘역린’, ‘창궐’, ‘7년의 밤’ 등의 촬영지였다는 안내가 줄을 잇는다. 이런 이유 말고도 이곳에 서면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아련한 마음이 생겨난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가는 현장과 그들의 어제와 오늘, 그뿐 아니라 이 모습을 대하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힐링의 장소로 이곳을 찾는다. 포토존에서 셔터를 누르고 나무 그네에 앉아 눈앞의 호수를 마냥 누리며 새벽의 호수를 만끽한다.
4구간 호반 낭만길은 계속 이어지는데, 명상공원에서 조붓한 길을 따라 1km쯤 거리에 자연생태공원과 추동 취수탑이 자리 잡고 있다. 상수원 취수구역이다. 가래울 마을과 황새바위와 연꽃마을에 이어진 오리골 제방이 시원하다. 철 지난 논과 밭을 끼고 걷는 길에 몇 가구 안 되는 작은 마을도 지나고, 데크로 연결되는 길도 나온다.
감나무에 넉넉히 남겨둔 까치밥의 푸근함을 올려다보면서 마을 옆 데크를 걷다가 예닐곱 단쯤 되어 보이는 알타리 무더기를 보았다.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라는 인심이었다. 이런 인정 넘치는 구경은 여행의 덤이다. 도로 옆으로 나오니 자전거 부대들이 씽씽 달린다. 시골길을 달리는 라이딩족들의 활기찬 질주가 상쾌함을 듬뿍 얹어준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을 찾는 이들이 들르는 곳이 또 있다. 3구간 종착지인 윗말뫼의 더리스. 호수를 앞에 두고 탁 트인 풍경이 압도한다. 더리스&테라베오는 슈하스코 브라질 바비큐 전통요리 레스토랑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청호 오백리길 산책로와 호숫가의 전경을 보려고 찾아온다. 더리스 정원 아래로 계단을 내려가면 프라이빗한 장소가 나타난다. 커플 의자에 앉아 마음껏 물멍에 빠져들면 된다. 때가 맞으면 거위 떼가 찾아와 물속에서 노니는 모습도 볼 수 있는 평온한 시간이다. 혹시나 비가 많이 내린 후라면 벤치와 나무가 물속에 잠긴 그림 같은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추운 겨울날 그리움 속 마을을 찾아 떠난 여행지에서 문득 유년의 시간을 발견한다. 그 길 위에서 기억 저편의 할머니와 내 부모 형제들을 만난 듯 뭉클함도 얻는다. 소박한 자연 속에서 비로소 들여다보는 내면 깊숙이에 위로 한 줌 들여놓았다. 떠돌던 마음은 차분히 잦아들고 한없이 따뜻하다. 세상 소음 따윈 잊고 호숫가를 걷는 내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전부였던 하루가 한동안 몇 알의 비타민이 되어줄 것이다.
여행 정보
자동차로 서울 기준 두 시간 정도 소요. 특히 청주에서 출발해 근교 문의문화재단지와 대청호를 함께 둘러보는 코스도 좋다. 전통문화와 호수의 멋을 제대로 느껴볼 만한 곳이다. 대청호 코스 대전역발 시티투어 순환버스가 토·일 주말에 있다.(2시간 반 정도 소요)
그 무렵 일상이 심드렁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상 최고의 폭염이라는 여름도 간신히 버텨냈고 슬슬 가을이 되고 있었다. 툭하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고 개운치 않은 컨디션은 때로 우울하게 했다. 누군가의 낯부끄러운 이기심을 보며 가까이한 것을 후회했고 어떤 이의 유치하고 얄팍한 이중성은 슬프거나 정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내야 하는 소심함이 힘겨웠다. 무엇이 기다릴지 몰라도 잠깐이라도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끓던 중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파리를 제안해 왔다. 거기서 며칠 쉬다가 세비야와 마드리드를 거쳐서 돌아오자고 말하는 남편의 생각에 묻지도 따질 것도 없이 동의했다. 눈 빠지게 그의 휴가 승인을 기다리느라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파리를 거쳐 또 다른 유럽으로 가는 일정이다. 파리를 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거쳐가는 도시로 파리가 좋았다. 잠깐이어도 괜찮다. 스치듯 지나쳐온 단 이틀간의 파리가 가라앉은 내 심장을 조금씩 살아나게 했으니까.
예측하지 못했던 일로 지치고 기운 다 빠졌던 드골공항에서 탄 RER 열차가 뤽상부르 역에 닿았다. 파리다. 파리라는 것만으로도 슬슬 기분전환이 되기 시작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살짝 어이없는 일이 있었지만 가라앉았던 기분은 집어치우자며 심기일전의 심호흡을 길게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날린다. 여기도 가을과 겨울 사이쯤이다. 마음껏 늦가을을 즐기는 파리지엔들 틈에서 내 기분도 조금씩 생생해졌다. 빵집 진열장의 알록달록한 마카롱 더미를 보면서 아하, 파리구나 했고 샹송에서나 듣던 어조를 지나가는 연인들의 말소리에서 들으며 나 떠나왔구나 실감했다.
떠나옴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주변을 온통 둘러쌌다. 거리의 밤바람이 그랬다. 걸을 때마다 눈앞 여행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상의 이야기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발 딛고 서 있는 낯선 풍경 속에서 심장의 동요가 느껴지는 것, 이미 두근거리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소르본 대학 주변의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대학가의 학구열보다는 어렴풋한 소설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제목도 내용도 기억에 없지만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한 점 빛나던 소르본의 골목 풍경을 읽었던 듯했다. 어렴풋한 기억이 오히려 아련한 기분으로 감성을 부추긴다.
그리고 문득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재클린이 생각났다. 소르본이라는 이름으로 얼핏 그 두 명이 떠올랐던 것이다. 고작 대중적 인지도만으로 떠올려지는 내 수준으로 연결되는 소르본 골목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결 친근하다. 연상법의 흐름이란 참 편리하다. 그녀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문학적 배경이 되고 그녀들의 빛났던 인생의 초석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며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여자가 소르본 대학 학생이었다. 비엔나행 열차에서 만난 남녀의 끊이지 않던 대화가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낸 것으로 기억한다. 어딜 가든 영화 속의 풍경이나 ost가 순간순간 떠오르거나 책 속의 배경이나 여행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시도 때도 없이 생뚱맞게 불쑥 오버랩되는 건 오랜 내 습관이다.
무엇보다도 어둔 밤거리가 활기차다. 구획이나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는 생미셸 거리의 대학가는 가을바람이 휙휙 불어대는 쌀쌀함 덕분인지 순식간에 상쾌하게 기분전환이 된다. 백 년 전에도 있었을 듯한 골목이다. 대학 건물 벽의 오래된 낙서가 이야기가 있는 벽화처럼 재미있는 볼거리다. 길 가다 손잡이를 열면 나를 압도할 그들의 견고한 학문이 맞아줄 것 같은 상상을 하며 그 담벼락 옆 소르본의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젖은 낙엽이 발에 밟히는 거리 주점에선 젊은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밤늦도록 들려왔다. 숙소 창문을 열고 그런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스민 골목을 자정이 넘도록 내다보았다. 노천카페와 서점들로 이어지는 소르본 대학 주변을 산책하며 비로소 심폐 소생하듯 되살아나는 기분을 감지했다.
소르본 근처 호텔의 아침식사는 간단했다. 그런데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며 신기한 실내 구조를 보며 놀랐다. 마치 마리앙뜨와넷뜨나 루이 14세 시절에 죄수나 반역자들을 가두었던 지하 감옥이 떠올려진다. 언젠가 책에서 그 옛날 프랑스 어느 지하 감옥이 대학 주점으로 변모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또한 떠올려졌다. 역사가 느껴지는 특별한 실내 분위기였다. 참 쓸데없는 상상력이란.
천정이나 벽이 울퉁불퉁하다. 실내가 네모거나 원형도 아닌 멋대로 삐뚜름한 내부 공간에 정갈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요란하게 잘 차려진 아침이라기보다는, 갓 구운 빵 냄새가 솔솔 나는 누군가의 소박한 주방의 간편한 아침시간 같은~수수한 듯 참 인상적인 분위기여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특히 뭐니 뭐니 해도 바게트 맛은 내가 맛본 중에서 가장 최고다. 쌉싸래한 커피와도 잘 어울린다. 통통한 빵의 굵기와 겉 부분의 크러스트가 단단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하다. 그 안의 빵 결은 촉촉하고 쫄깃해서 물리지 않고 끝없이 먹게 된다. 그 맛에 배가 부른데도 마구 먹어댔다.
우리의 주식은 밥이기에 빵만으로는 오래 먹기 쉽지 않다. 우리는 밥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빵심으로 산다는 걸 이해하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맛이다. 다음에 또 갈 일이 있을까만 만일 다시 간다면 맛있는 바게트를 찾아서 실컷 먹고 올 생각이다. 빵이 맛있던 소르본 어드메의 골목길이 유난히 떠오른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거나 수려한 산세에 파묻혀 보았다면 한나절쯤 호젓하게 고즈넉해보는 시간도 가져볼 만하다. 더구나 깊어가는 계절에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울창한 숲은 가슴속 깊이 풍성함을 준다. 지리산은 전남과 전북, 경남의 5개 시군에 걸쳐진 거대하게 넓은 면적의 웅장한 산이다. 이번에는 그중에서 전북 남원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있는 고을 남원. 남원에는 오래된 마을마다 아름드리 당산나무는 물론이고 곳곳에서 아름다운 숲을 본다. 여행길에 한나절 쉬어가기, 계절 따라 쉬어갈 이유가 달리 있겠지만 지리산 아래 남원골의 숲은 마을과 함께 있어서 따뜻한 정취를 전한다. 숲을 찾아가는 테마 여행이라고나 할까.
남원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멀리 들판 속에 섬처럼 숲이 자리 잡은 게 보인다. 100여 그루의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 서어나무숲은 그렇게 산과 들과 마을에 깃들듯 존재감을 보여준다.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 조화가 아름답다. 아름답기로는 올해의 아름다운 숲으로 산림청이 실시하는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기도 했다. (산림청이 (사) 생명의 숲 국민운동 • 유한킴벌리(주)와 공동으로 2000년부터 우리 생활 주변의 아름다운 숲을 찾아내어 알리기 위한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는 숲이 가진 경제, 환경, 문화 자원적 가치를 깨닫고, 숲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한 목적이다)
지리산 운봉 자락의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들판을 달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가 마을 골목쯤에서 멈췄다. 마을 속 논과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에 쭈뼛거리며 이곳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그럼 걸어가 보지 뭐 하고 조금 걸었다. 골목을 걷다가 보니 주민이신 할머니께서 마당에 앉아 혼자서 콩 타작을 하고 계셨다. 곁에 가서 나도 쪼그리고 앉아 서어나무숲을 물어보니 "아이고, 길을 잘 못 들었네, 저 짝으로 람천 둑길로 차를 몰고 가면 서어나무숲 쪽 가는 길이 있는데 기왕 여기로 왔으니 걸어서 요기로 넘어가 봐요"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대로 뒷문과도 같은 곳으로 넘어가니 계절의 청취가 가득 고여 있는 숲이 거기 있다.
빼곡한 서어나무숲의 세상이다. 숲에 바람이 불어 쏟아지듯 낙엽이 우수수 날린다. 발아래로는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나무의 뿌리발육이 드러나 있다. 숲속에 들어 친구들과 숲 놀이를 하는 사람들, 두 손 꼭 잡은 다정한 부부의 모습, 그 숲의 풍경이 된다. 나무의 줄기가 튼튼하여 근육질과 같다는 의미로 근육질 나무라고도 불리는 서어나무. 여름엔 숲 그늘이 15℃ 안팎으로 주민들과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제공하는 남원의 핫플이다. 숲에서 멀리 바라보면 지리산의 서북 능선이 흐른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에 속하는 마을이고 바래봉 둘레길의 출발지이다.
이백면 닭뫼마을 숲
서어나무숲을 나와 20분쯤 달리면 닭뫼마을이 나온다. 알을 품고 있는 닭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닭뫼마을은 1455년 단종 왕위찬탈 반대로 낙향한 순흥 안씨 조상이 이 마을을 이루며 만든 숲이다. 한적함과 고즈넉함이 최고다. 들판의 강한 북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그리고 마을을 지나는 섬진강 지류의 범람으로 인한 재난예방의 기능도 겸하는데 이런 숲을 비보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이 숲에서 떨어지는 낙엽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신성시한다고 전한다. 조상들의 지혜가 스민 마을 오솔길의 고즈넉함이 힐링을 불러온다. 느릅나무와 팽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70여 그루의 수목들이 주변 들판과 마을을 바라보는 듯한 정경이 느긋하고 푸근하다. 둑길 위로 거대한 나무들의 행렬이 아름다운 닭뫼마을 숲이다. 남원시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허브밸리로 가는 방향으로 있다. 남원시 이백면 닭뫼마을 숲이 우수상인 공존상에 선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남원 용성고등학교 숲
찾아가기 쉬운 남원 시내의 용성고등학교에도 아름다운 숲이 있다. 숲이 있는 학교로 매일 다니는 학생들은 그 아름다움이 그저 당연한 듯하다. 숲이 어느 쪽인가 물어보니, 숲요? 하더니 아, 저거요? 한다. 새롭게 조성되었거나 인공적 멋이 아닌 오랜 세월을 견뎌온 천혜의 자연과 사람의 보존 노력으로 나이 많은 나무들이 입구 한쪽에 숲을 이루고 있다. 푸른 노송과 삼나무, 메타세쿼이아... 봄이면 벚나무가 눈부시다고 한다. 숲이 있는 학교로 근처의 주생초등학교도 있다. 생명력 넘치는 나무와 숲이 있는 학교에서 여유와 창의성을 배우며 숲과 더불어 성장하는 아이들의 인성은 훗날 나무를 닮아가지 않을까 싶다. (2006년 아름다운 숲 제7회 우수상 용성고등학교 숲, 장려상 주생초등학교 숲)
자연과 공존하는 지리산 기슭 평지 사찰 실상사(實相寺)
가을의 지리산을 생각하며 실상사도 떠올리게 된다. 흔히들 사찰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거나 산 위로 올라가는 위치에 자리 잡는 게 흔한 예이다. 실상사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지리산 기슭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일단 절에 찾아들기 쉽다. 돌장승이 버티고 있는 입구를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곧장 사찰 내부에 들어선다. 이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경내로 입장하는 경험도 특별하다.
실상사는 통일신라의 승려 홍척이 창건한 사찰이며 사적이다. 전북 남원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실상사는 지리산 평화연대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인드라망 공동체. 모든 실상이 연결된 유기적 공동체라는 걸 가치로 창립되어 실상사를 중심으로 대안적 살림 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이기도 하다.
또한 국보와 보물이 많은 사찰이면서 생태화장실로도 유명하다. 요즈음의 좋은 화장지나 비데와는 사뭇 다른 생태뒷간이라니 무슨 말일까 할 것이다. 휴지나 물 대신 톱밥 뒤처리로 청결을 유지하고 배설물 발효 후 퇴비로 사용하는 생태적 순환 원리의 구현을 실천하는 일이다.
넓은 평지에 펼쳐진 오랜 건축의 멋을 일단 한눈에 둘러본다. 띄엄띄엄 아담한 전각들과 석등 사이로 웅장한 삼층석탑과 보광전의 고즈넉함에 차분해진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와 경내의 나뭇잎을 날리는 걸 보니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 실상사는 남원의 황금들판 한가운데 나지막한 담장으로 두르고 묵직하고 자비로운 기운을 퍼뜨리는 듯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승방 문고리에는 밭으로 나간 스님의 적삼 위로 실상사에서만 받아볼 수 있는 햇볕을 들이붓는다.
계절이 끝나가는 오래된 나무들이 절 마당을 내려다보고 지리산이 사찰을 에워싼 모습이 든든하다. 뒤편 텃밭 주변으로 노래처럼 국화꽃 저버린 겨울 뜨락에 /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섬이니까 늘 감싸주는 바다가 있다. 마을마다 바람막이처럼 산이 든든하다. 너른 평야는 풍요한 사계절을 보여준다. 긴 역사를 품은 유적과 숨 쉬는 자연의 강화 섬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거길 걷기만 해도 이름이 붙는 여행길이 반기는 곳, 강화 나들길이다.
강화나들길은 20개 코스가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각 코스별 특색이 담긴 도보여행 길을 걷는 맛은 가히 중독이다. 무엇 하나 지루할 틈 없다. 코스마다 오랜 시간이 담긴 자연 속으로 사람이 걸어간다. 지형상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던 돈대와 유구한 역사 이야기, 고인돌이나 옛 건축물, 갯벌 위로 저어새가 나는 생태 이야기, 들녘의 바람길 따라 해가 지는 포구마을까지 이 땅의 멋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 펼쳐진다.
가을이다. 이번에는 강화나들길 16코스인 서해황금들녘길이다. 가을 길이라면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고 갈대숲이 일렁이고 온 누리에 뿌려지는 가을 햇살과 기왕이면 시원한 바닷바람까지 불어주는 곳을 떠올려 본다. 그런 곳이 있을까 싶지만 이곳 서해황금들녘길이 가을 길로 딱 맞춤 코스다. 걸으며 강화 스탬프 투어를 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course16. 서해황금들녘길 -창후리 선착장- 망월돈대- 계룡 돈대- 용두레 마을- 황청 저수지- 망양 돈대- 외포 여객터미널 - 거리 13.5km / 소요시간 대략 4시간 / 난이도: 하
가을 하늘 아래 청정자연, 창후리 포구의 힐링
창후리 포구 가까이 갈수록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갯내음이 반긴다. 예전엔 강화의 교동섬을 가려면 이곳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이제는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왕래가 편리해졌지만, 창후리 앞바다가 삶의 터전이던 주민들에겐 뱃길이 끊겨 상권의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인적이 뜸해진 창후리 작은 포구엔 가을을 맞아 가게마다 갓 잡아 쏟아낸 생새우가 산더미였고 소금에 버무리는 풍경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다. 반쯤 물이 빠진 한적한 앞바다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여유롭다.
황금빛 너른 들 따라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
가을 들녘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길이 눈앞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다. 넓디넓은 강화 들판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가 자리 잡았는데 그 길 끄트머리에 망월돈대가 있다. 하점면의 망월돈대는 드넓은 망월 평야 속에 놓여있어서 찾아가는 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사실 망월 평야는 애초엔 바다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고 갑작스러운 이주로 늘어난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망월 평야 역시 간척을 한 땅이다.
황금들녘을 마음껏 누리며 지나다 보면 가끔씩 도보여행자들이 좀머 씨처럼 묵묵히 걷는 걸 본다. 어쩌다 그 사이로 라이딩족들이 휙휙 지나가기도 한다. 논 옆으로 드문드문 정미소나 미곡창고와 같은 커다란 건물이 들녘의 풍경으로 한 몫 한다. 아예 들판에서 바로 탈곡을 하고 도정을 하느라 분주히 기계가 돌아가는 걸 볼 수도 있다. 강화의 너른 들판에서 밥맛 좋기로 이름난 강화 섬쌀이 이렇게 생산되는 것이었다.
망월돈대는 들판의 둑 옆으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돈대가 약간의 높이가 있는 해안가의 언덕쯤에 놓인 것과는 달리 갯가 낮은 지역에 설치되었다. 외적이 수로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비책이다.
가을에 망월돈대에 가면 강화의 가을을 모두 맛볼 수 있다. 들판은 물론이고 천혜의 갯벌이 어찌나 고스란한지. 그 갯벌 위로 꽃처럼 자라난 염생식물이 붉게 퍼져있다. 갈대와 가을꽃으로 뒤덮인 한적한 그 제방으론 도보 여행자들이 서너 명 걸어오는 게 보인다. 돈대 좌우로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둑은 강화 나들길 16코스인 창후리 선착장과 황청리 용두레 마을로 이어진다.
멀지 않은 곳의 계룡 돈대도 들녘에 위치해 있다. 계룡 돈대는 망월 평야의 독립된 고지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다. 현재 강화도에는 53개소의 돈대가 남아있는데 계룡 돈대는 조선 숙종 때 설치된 구조물이다. 돈대 위에 서면 양쪽으로 바다와 평야가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다.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민의 모습과 갯벌 위 군락지를 이루어 피어난 붉게 물든 칠면초, 서해의 가을 풍경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곳에서 조금 전 망월돈대에서 만났던 일행들을 또 만났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사는 즐겁다. 황금 들녘은 끝없고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갈대와 들꽃은 반짝이는 가을볕에 더없이 예쁘다.
호젓한 마을에 잠기다, 용두레마을과 황청 저수지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전승민요 용두레질 노랫가락이 들녘으로 퍼지고 예부터 맑은 물이 흘러 큰 인물이 난다는 용두레 마을, 주변으로 석모도와 서해가 보인다. 마을에서 보는 노을이 일품인 마을이다. 들판의 농로엔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몇 마리 학이 이삭을 쪼고 있다.
곧 이어지는 내가면의 황청 저수지는 낚시터로 조성되어 짜릿한 손맛을 즐기는 강태공들을 위한 좌대가 즐비하다. 깊은 산과 노송들로 아늑한 저수지 제방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과 들판이 고즈넉하다.
언덕 위 숲 속 망양 돈대와 외포항의 갯내음
이제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의 막바지다. 외포항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워진 망양 돈대는 고려 삼별초와 인연이 깊다. 역사적으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는 몽고의 정책과 종속적 위치로 특권을 유지하려던 일파들에게 항거한 병사들의 항쟁이다. 결국 진도로 떠나가는 것은 쫓겨가는 길이었고 거기서 다시 제주로 떠나면서 항쟁의 불꽃은 꺼져만 갔다. 그렇게 삼별초가 떠났던 외포항에 400년이 넘어서 들어선 돈대가 망양 돈대다.
망양 돈대 오르는 길에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라고 새겨진 삼별초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뒤에는 비석을 세운 취지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제주와 진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과 진돗개 조형물이 우뚝하다. 진도군이 삼별초 호국 항몽의 역사를 바탕으로 자매결연을 맺고 진도군민이 진돗개상을 기증했다.
유허비 뒤편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널찍한 망양 돈대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외침의 불안 따윈 없지만 역사적 의의를 알게 하는 돈대와 강화나들길의 의미를 이렇게라도 되새겨 본다. 그 옛날 삼별초가 출항했던 물 빠진 앞바다에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돈대 저편 외포항 바닷가 마을엔 오늘을 살고 있는 여행자들이 오간다. 선선한 가을을 맞아 해산물과 젓갈을 찾는 이들로 외포리 수산물 직판장이 분주한 모습이다.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들녘을 걷고 살아있는 갯벌을 곁에 둔 생태마을을 지났다. 가끔씩 바다와 논둑 사이 풀숲에 앉아 몸과 마음을 열고 자연과 소통을 하던 한나절, 강화의 자연이 나를 보듬어주고 역사가 말을 건네 오던 시간들. 오롯하게 강화를 만끽할 수 있는 하루다. 창후리 여객터미널부터 외포 여객터미널에 이르는 비순환형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길의 종료 스탬프를 찍는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전화 주실 줄 알고 기다리다 다시 해요.”
“응… 손님 만나는 중이어서….”
“그랬어요? 그럼 그렇다고 문자라도 주시지… 나는 함께 점심하려고 전화했던 건데.”
“손님과 점심 약속을 했던 터라… 미리 말하지 그랬어?”
“미리 말한다고 약속 잡아주실 것도 아니면서.”
“뭐 어쨌든. 그나저나 잘 지내고?”
“네, 저는 잘 지내요. 조만간 점심 사드리고 싶네요.”
“점심은 무슨. 됐고.”
“그럴 줄 알았어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예의 그 ‘손님’이 화장실을 가는 척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는 바람에 통화가 오히려 길어졌다. 점심 식사 중에 그 여자의 전화가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 손님과의 자리가 대단히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핑계 삼아 그 여자의 전화를 따돌리고 싶었을 뿐. 손님이라야 등산을 함께 다니는 동네 지인으로 별 용건 없이 그냥 점심이나 함께하자는 게 다였으니까.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전화했어?”
“보고 싶으니까 했죠. 얼굴 본 지도 오래됐고.”
“우리가 얼굴 보고 싶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만날 사인가? 아무튼 난 지금 바빠. 그만 끊자고.”
얼굴 보고 싶다며 자유로이 만날 수 없는 사이, 만나면 부담스러운 사이, 껄끄러운 사이. 그렇다, 그녀와 나는 옛 연인 사이다. 눈 씻고 찾으려 들면야 한 자락 추억이야 없지는 않겠지만 그딴 건 찾고 싶지도 않고, 생각할수록 씁쓰레함만 남은 관계.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건가.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는 걸 보면 아직도 내게 미련이 있다는 거겠지만, 나는 한마디로 노 생큐!다. 안 그러면 또 뭘 어쩔 건데? 지금 와서 내가 뭘 해줄 수 있다고. 헤어진 지 벌써 3년인데.
사업 실패와 연이은 가정 붕괴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100억 정도 가진 재산가다. 굳이 돈을 강조하는 이유는 돈밖에 가진 것이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적다.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그런 조건 좋은 여자가 내게 안달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얼마나 조건이 좋은 남자길래 그런 잘난 여자가 죽자고 매달리는 거냐고?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그렇다고 백수건달이나 제비족은 아닌, 어쨌거나 그녀에게 만만하게 보인 50대 중반 독신남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세 번째 남편감이냐고? 천만에 말씀! 누구 맘대로!
10년 전 나는 사업에 실패했다. 40대 중반이었다. 그 여파로 아내가 당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이던 남매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버리자 가족들로부터 보기 좋게 버림을 받았다. 물론 내 잘못이 컸다. 외국 유명 브랜드 의류 수입상을 했던 나는 불황을 맞아 기울어가는 사업체를 정리할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어떻게든 살려보리라 무모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나를 설득하며 마음 졸이다 못해 인내심이 바닥 난 아내는 반은 홧김에, 반은 살 길을 찾아 미국 친정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가정과 사업체가 박살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물론 생이별한 자식들의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
실낱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자살할 궁리만 모색하던 처참한 나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고통 많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으로 가득 찼다. 1년 후 이혼 서류를 보내온 아내의 요구에 이렇다 할 대꾸나 변명 한마디 없이 응했던 것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탓이었다.
그럼에도 늘그막에 외손주 둘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해주시는 장인 장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처가의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어쨌거나 두 아이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보다 장래가 밝아진 게 아닌가. 그 와중에 아내는 나에 대한 원망과 일말의 복수심으로 나와 아이들의 관계를 차단한 것이리라. 나는 나대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그때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내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일거리도 없고 재기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간간이 들어오는 경영 계통 강연 수입으로 그때그때 생활비를 벌며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등산과 마음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망한 나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아, 그녀는 사업상 나의 고객이었다. 내가 쫄딱 망한 것을 알고 호감을 표해온 것이었다. 쫄딱 망한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게다가 한 미모하는 이혼녀. 로또 대박과 맞먹는 행운이 아니냐고? 게다가 아내까지 미국으로 내뺀 상황이었으니. 글쎄, 계속 들어보시라.
나도 처음엔 그녀라는 동아줄을 붙잡고 재기를 꿈꿨다. 그녀를, 아니 그녀의 돈을 통해 회생할 가능성을 탐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불쌍한 여자다. 그녀의 인간관계, 특히 남자관계는 늘 돈이 중심이었다. 첫 결혼도 두 집안이 서로 돈을 보고 딸과 아들을 교환했던 것이니 애정 없는 혼인 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고, 결국 남편의 외도로 3년 만에 파탄이 났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그녀 측에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탐냄으로써 이뤄졌다. 20년 연상의 재벌급 홀아비, 그녀로서는 재력적 지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기쁨도 하늘을 찔렀다. 재물에 마음이 꽂힌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권력을 탐하는 부류들은 더 높은 자리를, 인기몰이에 집착하는 자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무한 인기를 갈구하는 법이니. 사람은 저마다 우상을 모시고 살며, 우상 숭배란 맹목적인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미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돈에 집착하고 돈에 갈증이 든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게 아닌가.
그녀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에너지를 쏟을 곳이라곤 오직 돈에 관계된 것이었기에, 앞뒤 재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업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돈을 잃고 그만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 이혼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만난 것이다. 비록 이혼을 했어도 받은 위자료와 본인 재산 등으로 내게 대줄 수 있는 사업자금은 충분했다.
자, 이런 상황이다. 처음에야 나도 횡재한 기분이었다. 속물이라 욕해도 상관없다. 사실이니까. 거처가 마땅찮았던 나는 바로 강남에 있는 그녀의 80평대 아파트로 들어갔고,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됐다. 1년이 지났을 무렵, 한마디로 나는 그녀에게서 환멸을 느꼈다. 그녀는 오직 돈, 돈, 돈만 알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돈 타령에, 아마 꿈조차 돈에 대한 것을 꿨으리라.
그녀에게서는 어떤 내면의 향기도, 내적 감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사는 동안 책은 고사하고 글 한 줄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사색에 잠긴다거나 주변이나 일상에서 감동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자연에 대해서도 교감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아마도 푸른 여름은 만 원권 지폐로, 노란 가을은 오만 원권 지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1년 만에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들어갈 때도 맨몸, 나올 때도 맨몸. 여전히 집도 절도 없었던 나는 TV 프로그램 속 자연인처럼 어느 산자락 빈집에서 한 달가량 몸을 의지해 있었다. 그 후 낯선 소도시로 흘러들어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작은 강연, 독서 모임 등을 이끌면서 내 입을 먹이며 살고 있다.
나와 그녀의 관계에는 환멸만 남고
혹자는 배부른 투정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내면이니 감수성이니 그딴 게 밥 먹여주냐고. 봉을 잡았으니 빌붙어서 몸이라도 편할 수 있지 않았냐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단 한번 살아보시라. 입만 열면 돈타령에 무식이 하늘을 찌르는 여자, 나는 열을 준대도 덧정 없다.
만약 그 여자가 그나마 머리에 든 것이 있는 나를 흠모하여 자신에게는 없는 지성이나 교양을 취해보리라는 갸륵함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환멸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애초에 그런 코드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서 무엇을 보고, 내가 가진 어떤 점이 그녀를 끌어당겼을까.
돌이켜보면 그녀는 나를 자기 재산 증식시켜주고 관리해주는 머슴 정도로 취급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어디 가서 재산을 불릴지, 하나보다는 둘이 힘이 되니 속된 말로 만만한 나를 ‘꼬붕’으로 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 애초 애정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녀에게 애정 같은 감정과 정서가 있기나 할까. 내가 아는 한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신뢰나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했으니. 설혹 내게 사업자금을 대주었다 해도 내가 원하는 일을 자유로이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녀의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것에 한해서 허용하는 게 고작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그녀가 지금도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불쾌할 수밖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여자는 지성, 외모, 상식과 자존감을 갖춘 사람이기가 어려울까? 솔직히 그럴 것 같다. 그런 여자들은 남자 또한 엇비슷한 수준에서 만나고 싶어 할 텐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능력 면에서 현저히 기울어져 있으니 두루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여자들만 꼬인다고 할지. 겨우 한 여자 만난 것을 두고 성급한 일반화를 하냐고? 내가 설마 한 여자만 두고 그러겠나. 그 사이에 두 여자가 더 내게 호감을 표해왔는데 역시 비슷한 여자들이었다. 돈밖에 없고 천박한. 돈 많고 무식한 여자, 돈밖에 모르는 여자들이 꼬이는 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10월은 야외 활동하기 좋은 청명한 날씨와 단풍 구경 등으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기다. 실제로 10월 중순 경 단풍이 지기 시작해 내장산 기준 11월 7일경 단풍이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에 행정안전부는 산행 시 실족‧추락, 조난 등 등산 사고 예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했다. 등산객이 늘어남에 따라 등산 사고 발생 위험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5년간 발생한 등산 사고는 총 3만 5185건이며, 2020년에만 8454건으로 457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10월에는 1317건이 발생해 연중 등산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 총 743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으며 이 중 16명이 사망했다. 10월 한 달간 전국 각지에서 국립공원을 다녀간 탐방객은 월 평균치인 231만 명보다 1.8배 많은 410만 명으로 집계됐다.
등산 사고는 발을 헛디디며 발생하는 실족 사고가 491건(37%)으로 가장 많고, 길을 잃고 헤매는 조난 사고 388건(29%), 지병 등 신체질환으로 인한 사고 254건(19%) 순으로 발생했다. 시간대별로는 등산이 어느 정도 진행된 점심시간 이후인 12시에서 15시 사이에 31.6%(416건) 발생했고,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18시 이후의 사고도 17%(230건)로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행정안전부가 안내하는 가을철 등산 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수칙은 다음과 같다.
산행을 나서기 전에는 등산로와 산행 소요시간, 대피소, 산악날씨 등의 산행 정보를 미리 확인하고 출발하도록 한다. 산행 정보는 생활안전지도(모바일 웹, 애플리케이션)에서 ‘생활’, ‘산행안전지도(국립공원)’을 순서대로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다.
산행은 가벼운 몸풀기로 시작하여 자신의 체력에 맞는 등산로를 선택하고, 산행 중이라도 몸에 무리가 오면 즉시 하산하도록 한다. 산행은 지정된 등산로를 이용하고 입산이 통제된 위험‧금지 구역은 절대 출입하지 않도록 한다. 가벼운 타박상이나 긁힘 등 사고에 대비해 반창고, 붕대 등이 들어있는 간단한 구급약을 챙기고, 유사시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도 챙기는 것이 좋다.
오는 8일과 23일, 절기상 한로와 상강을 지나며 풀숲에 이슬이 맺히고 서리가 내리면 등산로가 생각보다 미끄러울 수 있으므로 이 역시 주의해야 한다. 또한 추분을 지나며 낮의 길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산에서는 생각보다 주위가 빨리 어두워져 조난 등의 사고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산행은 아침 일찍 시작해 해가 지기 한두 시간 전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혹 길을 잃었을 경우 헤매지 말고 왔던 길을 따라 아는 곳까지 되돌아오는 것이 안전하다. 갑자기 기온이 낮아지거나 찬 바람이 불 때 덧입을 수 있는 여벌의 옷과 장갑을 챙겨 추위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조상명 행정안전부 안전정책실장은 가을 단풍철을 맞아 산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집 근처의 가까운 야산을 가더라도 주변에 행선지를 알려달라”며 “요즘에는 해가 지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어 자칫 산에서 늑장을 부리다 늦어지면 위험하니, 평소보다 하산을 서둘러 안전하게 산행을 즐기기 바란다”고 말했다.
귀농 11년 차 김명옥(60, ‘영동구구농원’ 대표). 그는 잠자는 시간 외엔 일에 폭 파묻혀 산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일에 매몰된 인생은 노예와 다름없다.’ 김명옥에게 이건 썰렁한 농담일 뿐이다. 그에게 일은 몸에 붙은 피부와 마찬가지다. 날이면 날마다 농사라는 레일 위를 열차처럼 질주한다. 그래 현재 도착한 역은 어디인가? 목적한 종착역은 여전히 멀다. 뒤로 달리거나 멈춘 적은 없다. 하지만 사고가 잦았다.
귀농 초기의 양상은 한마디로 실패의 전시장이었다. 실패라는 건 묘하다. 삶을 숙성시키는 효모니까. 김명옥은 실패 경험을 연료로 삼아 질주에 가속을 붙인 게 아닌가. 말하자면 그의 귀농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로까지 추락할 수 있는 인생사의 위험 요소를 어떻게 비켜나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처세서이기도 하다.
김명옥은 나무를 가꾸는 취미를 한껏 살려 조경용 나무를 심기로 하고 귀농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후미진 산골의 싼 땅을 사들여 주목을 잔뜩 심으며 나무농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전에 살았던 곳은 대전. 거기에서 호프집이나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속세의 희로애락을 충분히 경험한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도시 생활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나무와 새, 구름을 동급생으로 삼아 산골에 입학했던 것이다.
“자연 속에서 쉬고 싶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 질리고 지쳐서. 농원에 심은 나무들이 자라나는 걸 바라보면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우아하게 살고 싶어 산골에 들어온 것이다. 시간에 얽매이고 사람 관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도시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할 기회를 마련했던 셈이다.”
자연과 음악을 즐기는 산골 생활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시골이 적성에 맞기도 해 만족감이 컸다. 나무농원으로 당장 소득을 거둘 순 없었지만 생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철도공사 직원인 남편의 월급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딱 반년쯤 지나자 슬슬 지루해지더라.(웃음) 나에겐 역시 집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농사를 시작했다. 산야에 흔한 냉이를 캐 농산물 시장에 팔았던 게 출발점이었지. 그러나 대가가 보잘것없어 포기하고, 하우스 두 동을 지어 상추농사를 시작했다.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실패한 이유가 있겠지?
“농산물경매장에 가져갔는데 사정없이 가격을 후려쳤다. 죄목은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상추라는 데 있었다. 상추의 외모마저 농약으로 조절해 키운 농약농법 상추보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얘기였지. 예쁘게, 너무 크지 않게, 입에 넣기 좋도록 손바닥만 하게 만들기 위해 성장억제제를 사용한다는 걸 알고선 기가 막혔다. 허탈해 의욕을 잃을 지경이었지. 게다가 폭우가 하우스를 쓰러뜨려 깨끗이 접었다.”
이후 어떤 작물을 재배했나?
“복숭아와 자두로 수익을 거두는 농가들이 있는 걸 보고 이번엔 그 둘을 심었다.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어떤 자두 농가는 1000평 과수원에서 수천만 원의 소득을 올렸는데, 내가 기른 자두들은 대부분 벌레 먹어 팔 수 없는 식의 난항이 거듭되었다. 결국 자두나무를 모두 캐낼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땀 흘렸지만 결과가 그렇게 허무했다.”
최선을 다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농사란 왜 그리 어려울까. 그런데 귀농 초기의 실패는 공부이지 않나? 시행착오라는 통과의례를 심하게 겪지 않은 귀농인을 보기 힘들다.
“귀농 11년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건 농사로 돈을 벌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 농산물 생산만을 전적으로 하는 귀농은 반대한다. 가공과 관광, 체험 프로그램을 병행하는 게 그나마 가망성 있다. 복숭아와 자두에 실패한 뒤 새로운 타자로 복숭아 농장 체험 프로그램을 내세웠다.
복숭아로 통쾌한 홈런을 쳤나?
“어림없더라. 또다시 실패했다. 애로점이 한둘에 그치지 않았다. 가령 체험자들이 복숭아를 따서 집으로 가져가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따도 되는 복숭아들을 지정해줘도 통하지 않았다. 무작정 따놓고선 맘에 들지 않으면 그냥 땅바닥에 버리거나, 덜 익은 걸 따 팽개치기도 했다. 아이고, 체험 프로그램도 소용없었던 거다.(웃음) 이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덤벼든 게 산골오징어 사업이었다. 물오징어를 사다가 산골의 청정한 햇살과 바람에 건조시키는 오징어 사업으로 판세를 역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신통치 않아 몇 해 만에 접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던 셈이다. 당연하게도 김명옥의 농사를 훼방한 어떤 세력의 음모나 간계가 작동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동쪽을 향해 뛰었으나 서쪽에 닿는 식의 요상한 결과가 웬일인지 그냥 반복됐을 뿐이다. 이렇게 매사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는 게 농사다. 그걸 깨닫는 데 수년이 걸렸다. 비싼 수업료를 치렀던 거다. 덕분에 그는 비로소 농사의 방식을 바꿀 수 있었다.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농산물 가공과 위탁판매에도 나섰으며, SNS 마케팅으로 직거래 고객을 확보했다.
힘들수록 밀어붙인다, 끝을 보려고
김명옥이 현재 운영하고 있는 농사 종목은 자그마치 40여 종. 숲속에 묻힌 농원은 은둔처럼 잠잠해 보이지만 너른 터 도처가 생산 현장이다. 농원 뒤편 둔덕은 후덕하게 펑퍼짐한 장독들로 빼곡하다. 그가 만든 된장은 구수한 맛으로 인기가 있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귀농 초기의 시련은 가혹했으나 이젠 기틀이 잡혔다. 궤도에 올라섰다. 작물들의 비위를 능숙하게 맞춰줄 수 있게 됐으며, 그토록 힘겨웠던 판로 확보 문제에서도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농사에 번번이 타격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더 세차게 밀어붙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더 크게 일을 벌였다. 대전에 살 때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11번이나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목발을 짚고 장사를 했다. 나 자신도 통제하지 못할 뭔가 끈질긴 게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뭐든 좋은 뜻으로 시작한 거라면 난관을 넘어 끝을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 하나는 놓지 않고 살아왔다.”
남다른 뚝심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한계마저 도전해온 셈인가? 귀농 후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것이었나?
“나무농원을 조성하던 초기에 나를 땅 투기꾼으로 여긴 일부 원주민들의 색안경에 씁쓸했다. 그들은 심지어 길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른바 텃세를 맛봤던 셈이다. 외지인이 들어오면 일단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게 시골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인간관계에 충돌과 불합리가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길까지 끊는 건 너무했다.
“이곳에 내려와 큰 배신을 당한 일도 두 번 있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상처도 깊었지. 아예 떠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떠나는 건 지는 거라서 주저앉았다.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좋은 인연, 나쁜 인연 고루 있는 법인데, 사실 이곳에서 맺은 좋은 인연이 더 많다. 도시의 각박함에 비하면 한결 나은 곳이 시골이고. 처음에만 문을 닫을 뿐 알고 보면 정겨운 게 시골 사람들이다.”
농원의 크기는 광활하고, 일은 숱하게 많다. 이를 혼자 감당하다니.
“내가 걷는 모양새를 보라. 보행이 자유롭지 않은 걸 알 만하지 않나? 연일 계속되는 노동으로 관절 곳곳에 무리가 간 탓이다. 몸을 상해가면서도 일을 줄이기는커녕 갈수록 늘리는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남편이다. 우리 부부는 사실 이상적인 동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농원의 모든 실무를 맡았고, 남편은 직장에서 받아온 월급을 농장 조성과 유지에 털어 넣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남편은 이상적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가 자주 내뱉는 푸념이 있다. ‘아니,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툭하면 일을 벌이는 나를 못마땅해한다.”
부군이 뭐라 하든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으로 응수할 뿐인가?
“그냥 밀고 나간다. 끝까지 가볼 참이다. 이런 나를 남편은 이제 포기했다.(웃음)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둘의 성향엔 차이가 있다. 난 긍정을 중심에 둔 반면 남편은 신중하다. 그런 남편과 마주 앉아 커피 마시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때이기도 하다.”
아마추어 연극 단체 창단하기도
현존하는 조류 가운데 가장 작은 새인 벌새는 1초에 80번의 날갯짓을 한다던가? 김명옥은 벌새를 닮았다. 부지런한 노동력을 발휘해 성취를 향한 날갯짓을 하니까. 그는 몸이 닳을 때까지 일하고 또 일을 하는 게 요번 세상의 역할이라는 양 연일 농원의 사방팔방을 누빈다. 그는 어쩌면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한 최초의 인간이거나 마지막 인간일지도.
농원 일만이 다가 아니다. 낮이면 면 소재지로 조르륵 달려가 가게를 연다. ‘구구사랑방’이라는 간판을 단 이 가게에서 그는 양푼이비빔밥과 옛날식 토스트를 만들어 점심 영업을 한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는 사랑방이기도 하고, 농산물 직거래 마켓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이곳이 아마추어 연극 단체의 아지트라는 점이다. 극단 이름은 ‘구구극단’이다. 김명옥은 이 극단의 창단 주역이자 연출을 맡고 있다. 올가을엔 ‘콩나물연가’라는 제목의 연극을 올릴 참이다. 참여 연기자들은 모두 지역민이다. 얼마 전 김명옥과의 인연에 이끌려 이 동네로 귀촌한 배우 주부진이 조력자로 나서 공연 준비에 탄력이 붙었다.
“심천면 소재지는 고풍스레 아름답다. 그러나 쥐죽은 듯 고즈넉하다. 뭔가 생기를 부여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극단을 만들게 됐다. 난 20대 때 대전에서 극단 활동을 했는데, 30여 년 만에 다시 연극을 즐기게 된 거다. 이건 귀농으로 얻은 보너스다. 그런데 귀농으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내 안에 있는 성취욕을 분출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지난 11년간의 농업 소득은 열악해 오히려 까먹은 게 더 많지만, 뭐 그런들 어떤가? 목표는 높게 잡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산다. 향후 목표는 농원에 예술촌을 접목해 성장시키는 데 두고 있다.”
그는 물심양면의 불황으로 괴로웠던 귀농 전반전의 애환을 거름 삼아 정신적 체력을 단련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질주한다. 예술이 실린 농원을 향해. 하지만 설령 어긋나도 무방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담대하다.
김명옥이 주는 귀농 Tip
•귀농으로 수입을 창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귀농 3년 차쯤에 철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최소 3년은 버틸 수 있는 자금력과 정신력을 미리 다지자.
•농토 구입과 집짓기를 서두르지 마라. 일단 시골집을 임대해 살며 농사 수련을 하자. 과연 버틸 수 있을지 미리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급적 ‘즐길 수 있는 귀농’을 구상하자. 그러자면 농사 규모를 작게 잡고, 집도 작게 짓는 게 필요하다. 농막식 소형 주택을 짓고 실속 있게 사는 게 좋겠다. 대신 조경엔 신경 쓰자.
•농기계 장만 목적의 자금 투자를 자제하라. 귀농인 상당수가 고가의 농업 장비 구입 때 받은 대출 이자 상환 부담에 허덕인다. 임대 장비를 빌려 쓰는 게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