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레모(Beret帽)는 챙이 없고 둥글며 펠트로 만든 모자다. 원래는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대에 사는 바스크족의 전통 모자였는데 세계 각국 군인들의 제식 모자가 되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어느 가을날, 베레모를 쓰고 사진 촬영을 하러 나갔다. 공원 벤치에 친구도 없이 쓸쓸히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사전 동의 없이 서너 컷을 찍는데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속으로 ‘아! 동의 없이 찍으니 한마디하려나보다’ 했다. 그리고 방금 찍은 사진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명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카메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예술 하시는 분인가봐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 “아~ 네” 하고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럼 그렇지. 내 눈은 정확해. 베레모가 잘 어울려 예술가인 줄 한눈에 알아봤지.”
낯선 사람의 말 한마디에 나는 졸지에 예술가가 되었다. 아니 베레모 예술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힘이 넘쳐났다. 그 후 어디를 가든 붉은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든 뒤 마지막으로 베레모를 꼭 쓴다. 베레모는 나를 예술가 위치에 올려놓고 예술가의 신분은 내 사진 촬영 활동에 적지 않은 면책특권을 부여했다.
바깥에서 유리문 가까이 고개를 낮춰 눈을 들이밀었을 때 그녀의 얼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깜짝 놀라 몸이 뒤로 밀렸다. 점심시간.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손맛 좋기로 소문난 동네 맛집으로 고민 없이 향했다. 가을볕 맞으며 맛난 된장찌개 삭삭 긁어 나눠 먹고는 그녀의 별로 들어가 향 깊은 커피를 마주하고 앉았다. 음악소리가 나뭇결을 타고 전해지는 문화살롱 ‘아리랑’ 안. 그곳에서 노래하는 예술가 최은진(崔銀眞·58)의 지나온 인생과 살아갈 날의 이야기 실타래를 조금이나마 풀어봤다.
“문화쟁이들은 나 모르면 간첩이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옆에 예술인 최은진의 문화공간 ‘아리랑’이 있다. 사람들이 익히 알 만한 설명이라면 말 많고 탈 많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의 주요 무대가 바로 아리랑이다. 낮에는 손님 받을 생각 없는 듯 늘어지고 한산한 모습이다. 밤이 되면 그녀의 별 ‘아리랑’에서는 따뜻한 불빛 아래 술잔이 오간다. 기분이 좀 오른다 싶으면 최은진의 노랫가락에 흠뻑 젖을 수도 있다. 화가, 글 쓰는 작가, 건축가, 교수 등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이들은 성지마냥 이곳을 찾는다.
“예술가들 많이 오죠. ‘평범’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인들이 많이 와요.”
최은진의 인생 스토리를 다룬 한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만요 가수로만 소개한 것이 아까울 정도로 재능이 많다. 타고난 음색은 노래 분위기에 따라 아이 목소리도 됐다가 농염한 재즈가수도 된다. 옛 가요에 세련미와 특별함을 더해 사랑받고 있다.
인천 출신인 최은진은 초등학교때 인생 최초로 듣게 된 ‘흑자청춘(1966년·정원 노래)’ 한 곡으로 노래에 빠져들었다. 동춘 서커스단 공연 모습을 보고는 교내 체조부에 입단해 활동했다. 20대에는 영혼에 대한 갈증으로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도 꿈꿨다. 지금은 동서양 모든 종교와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 정신세계에 관한 공부와 수행, 묵상하는 삶을 산다. 젊은 시절연극배우로서도 두각을 보여 각종 무대에 올랐다. 그 후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1999년 현대방송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수상을 타면서 매스컴 앞에 섰다. 그때 최은진 나이 마흔. 예인의 길을 걷고자 신중하게 진로를 고민하면서 우리의 음악 아리랑과 인연을 맺었다.
아리랑에 정착하다
“젊지도 않은 나이에 방송사에서 시키는 거 하는 게 싫었어요. 대신 재즈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뉴욕으로 유학을 가려고 마음을 굳혔어요. 그때 우리 아들이 어리니 한 5년만 다녀올까 생각했는데 제 앞에 아리랑이 다가왔어요. 오케스트라 협주로 된 아리랑을 듣고 눈물을 잔뜩 쏟아냈습니다. 이게 내 운명인가보다. 아리랑도 결국 재즈잖아요. 우리만의 소울이 깃든 재즈요. 2003년에 나운규 탄생 100주년 음반 ‘다시 찾은 아리랑’을 낸 것이 새로운 삶의 시초가 됐습니다.”
진정한 음악을 찾아 뉴욕에 가고자 했다. 알고 보니 영혼이 깃든 음악의 본질은 최은진 자신이 서 있는 토양에도 있었다.
“이생에서 정체성을 찾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아리랑을 하러 세상에 왔구나. 아리랑 음반을 내고 나서 이곳에 터를 잡았어요. 마이크랑 스피커도 가져다 놓고요. 여기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더니… 희한해요. 사람 구경 못하던 거리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저기 가면 옛날 목소리 나는 여자가 있다면서요.”
아리랑에 무슨 애환이 있기에 최은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는 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언젠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국제교류 아리랑 축제에 초청돼 갔어요. 그때가 추석쯤이었는데 아리랑 요양원이라는 곳에서 위문공연을 했어요.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목화밭에서 그렇게나 많이 고생하셨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나도 모르게 입구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공연을 못할 뻔했어요. 너무 울어가지고요. 일주일 전쯤 소록도에 갔을 때도 화장장 근처에서 비슷한 경험을 또 했죠. 교감이 되는 거죠. 그 당시 힘들었던 사람들의 삶이 저에게 그대로 오는 거예요. 나도 조금은 특별한 별인 셈이죠.”
다가오는 영혼들의 울림이 있기에 곡마다 정성과 마음을 담아낸다. 2010년에는 지극정성의 보답처럼 2집 음반 ‘풍각쟁이 은진’이 1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인기를 얻었다.
“‘오빠는 풍각쟁이(1938)’를 리메이크한 앨범을 냈어요. 처음에 음반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줄 서서 구입했다더군요. 서점에 가서 모르는 척하고 물어봤죠.(웃음) 인터넷도 안 하고 매일 이곳에 있으니 알 수 있겠어요? 마니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었대요. 이 여자가 누구냐고요.”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강산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부른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도 그녀의 왕팬을 자처했다. 그렇게 최은진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소문을 타고 흘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에게도 알려졌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기타리스트 하치가 세션과 프로듀싱을 담당하면서 그녀의 두 번째 음악 작업에 힘을 보탰다.
진정한 레트로 음반 ‘헌법재판소’
최근 최은진은 엄청난 시도를 감행했다. 아리랑 소리꾼 혹은 조금 현대적인 느낌으로 편곡된 옛 곡을 부르던 것과 차원이 다른 음악 장르에 도전한 것. 바로 옛 가요를 1980~90년 대 인기를 끌었던 일렉트로닉 스타일로 재해석한 세 번째 앨범 ‘헌법재판소’다.
아들 또래인 젊은 음악가와 작업을 하고 음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으로 앨범을 제작했다. 그녀의 이전 음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이 불렀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 그 자체다. 시니어가 노래방에 가서 18번으로 잘 부르는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1960)’과 백년설의 ‘아주까리 수첩(1942)’은 젊은 세대의 숨을 불어넣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으로 거듭났다. 원곡을 즐겨듣던 시니어에게는 신선함을, 곡을 전혀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음악으로 느껴질 만하다. 지난 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로 다뤘던, 진화하는 레트로 열풍의 기류에 최은진의 새 앨범도 합류했다.
“정말 현대적으로 만든 거예요. 나이어린 음악인들과 같이 작업하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거죠. 젊은 세대도 저하고 음악을 만들면서 배우는 게 있었을 겁니다. 옛날 정서를 무시하고 과정 없는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해줘요. 그리고 가사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요즘은 ‘아리랑’ 문을 여는 일 외에는 새 앨범 홍보 쇼케이스 무대에 선다. 12월 1일에는 홍대 더스텀프에서 새 앨범을 소개하고 알리는 쇼케이스를 열어 성황을 이뤘다.
“처음에는 ‘아우! 전자악기 반주에 맞춰 어떻게 노래하지?’ 그랬는데 들을수록 좋아요. 이게 정서에 맞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제가 작사, 작곡한 음악도 수록했고요.”
군대 간 아들을 생각하며 썼다는 ‘양구’는 최은진이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어 있는 노래인데 여성들은 무덤덤하게 듣는 반면 남성들은 곡을 듣자마자 “엄마 보고 싶다”를 연발한단다.
삶의 씻김, 문화살롱 ‘아리랑’
3집 타이틀곡인 ‘헌법재판소’는 이노경이 쓴 곡에 최은진이 가사를 붙였다. ‘아리랑’에서 만나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모든 세대를 위로하고 싶어 만든 곡이다.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면 그렇게들 울어요.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낸단 말이죠. 대부분 다 울어. 그러면 나도 울고. 저마다의 인생에는 어마어마한 일이 많잖아요. 위로가 필요한 모두를 위해 썼어요. 해우소라는 말 있잖아요. 내가 볼 때 이 집은 울다가 웃다가 위로받는 집이야.(웃음)”
어떤 것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뭘 하든 이렇게 가는 거지 뭐”라고 답한다. 그냥 매일을 사는 것. 시상이 떠오르면 적고 악상이 떠오르면 함께 작업하는 음악인들과 얘기하면 된단다.
“그 젊은 친구들 밴드 이름도 만들었어요. 대열차강도밴드래요.(웃음)”
무엇보다 공연에 힘을 좀 기울이고 싶다고 했다. 무대가 늘 그리운 천생 무대 체질 그녀다. 세상을 위한 조언이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머리 말고 가슴을 써야 해요. 그래야 바로 연결될 수 있죠. 소통 말입니다. 그러려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요. 후배들에게 고독한 시간이 중요하다고 조언해요. 오늘 인터뷰 때문에 산책을 못했는데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걸까. 헌법재판소 옆. 땅거미가 지면 작은 별 하나가 떠오른다. 위로받고 싶은 이들이 호주머니에 손 넣고 한 명, 두 명 들어와 착석. 위로가 필요한 당신들을 위해 오늘밤도 아리랑의 문은 열린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브라보!”
산골짝 사이로 강물이 흐른다. 강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선율처럼 부드럽다. 오솔길 위에 곱살한 낙엽들 폭신히 얹혀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숲엔 화염이 너울거렸으리라. 붉디붉은 단풍이 산을 태우고 숲을 살랐으리라. 그즈음, 조용히 흐르는 강물 위에 어린 건 홍조(紅潮) 아니면 황홀한 신열이었을 테지.
강가엔 절이 있어 풍경에 성(聖)을 입힌다. 여기에서 부처에 이르는 길이 가까운가? 반야사(般若寺)다. 항상 새벽처럼 깨어 있으라! 반야의 지혜를 길어 올려라! 불가의 전갈은 친절하다. 그러나 내 안에 뒤엉킨 무지몽매는 진흙처럼 뻑뻑해 깨어날 기색이 없다. 진흙을 움켜쥐고서도 꽃을 피워 올리는 연(蓮)의 뉴스는, 그저 잠시 잠깐 귓전을 스쳐갈 뿐이다. 하릴없이 저무는 가을이, 덧없이 지는 잎들이 애잔해 마음만 마냥 잠 못 이루는 밤처럼 뒤척인다.
법당 뜰에 선 배롱나무는 오백 살 나이를 자셨다. 어쩌면 반야사의 최고참 선승에 속할 이 나무는 이미 일체의 잎을 떨군 알몸이다. 오백 년을 살았으니 오백 번을 옷 벗었겠지. 오백 차례의 늦가을마다 서둘러 군더더기 털어내듯 훌훌 잎을 떨구었을 터이다. 분연한 정진의 화신이라 해야 하나? 속진을 세속을 후련히 털어버린 성자처럼 개결한 모습이다. 허영을 말끔히 벗은 뒤 드디어 본질만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자태이지 않은가.
벗이여! 삶이 기막혀 홀로 외로운 그대여! 반야사에 가거들랑 배롱나무와 눈 맞출 일이다. 버리고 또 버려 가뿐해지는 무욕의 이치를 선생으로 삼아볼 요량이라도 해볼 일이다. 싱긋, 노거수에게 윙크라도 하며 억지로 붙잡아 낑낑거렸던 마지막 사랑마저 놓아버릴 일이다.
산의 이름은 백화산, 강 이름은 구수천(일명 석천). 강과 산과 절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반야사 둘레길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급작스레 인기를 누리는, 일테면 둘레길의 신예다. 여보게! 우리 반야사 둘레길이나 걸어보세! 거기가 엄청 좋다는 것이여! 그리 선창하며 찾아드는 사람이 많다.
숲속 나뭇잎들은 거의 누렇게 말랐다. 찰랑이며 쏟아지는 햇살의 조명에도 아랑곳없이 핼쑥한 산색이 마냥 스산하다. 여전히 붉은 빛을 머금은 나무들도 있지만, 부질없다. 이수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심순애처럼, 서둘러 떠나는 가을을 애써 잡아두려 하지만, 이미 홍염의 한때는 저물었다.
오솔길 길섶에 뒹구는 돌들을 주워 모아 자그만 돌탑을 쌓는다. 돌 하나에 희망을 담고, 돌 둘에 용서를 쓰고, 돌 셋에 슬픔을 얹고, 돌 넷엔 슬픔 뒤에도 남는 한 점의 기쁨을 기입하며….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에 돌탑이 있다. 기원하거나 기도하지 않고서 견딜 수 있는 삶이 있던가. 형체 없는 게 마음이지만, 돌탑을 쌓은 이들의 마음이 숲속에 서성거리는 것만 같다.
숲길에 정적이 고인다. 떨어진 낙엽을 보듬으며, 비처럼 눈물처럼 떨어지는 마른 잎들을 껴안으며, 늦가을 오솔길은 묵은 시간처럼 고요하다. 문득 일렁이는 바람의 기척인가. 다시금, 간신히 나무의 몸에 달려 있던 잎사귀들이 흩날려 내린다. 조락의 연속이다. 잎은 입이 없으니 지면서도 유언이 없다. 눈이 없어 눈물이 없고, 여한이 없으니 부음을 전갈할 일이 없다. 떠나면서 티를 내는 건 어쩌면 사람뿐이다.
시드는 단풍 빛은 어디로 가나. 떨어진 잎들은 어디로 가나. 차가운 숲속 맨땅이 종착역일 리 없다. 일일호시일(日日好是日)이라. 어쨌거나 절정의 날은 오늘 바로 이 순간이다. 조락조차 괜찮으니 애도하지 마소! 낙엽이 그리 말하는 걸 늦가을의 숲에서 깨닫는다. 질 것들 지고, 떠날 것들 떠나는 오늘도 길일(吉日)인가?
탐방 Tip
반야사 둘레길 총연장은 7km. 경부고속도로 황간IC를 벗어나 10분을 달리면 반야사 주차장에 닿는다. 반야사, 망경대 문수전, 임천석대, 옥화서원 등 볼 만한 게 많다. 충북 영동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라 꼽는 이가 많은 숲길이다.
켜켜이 쌓인 해안 절벽이 오후 햇살이 들어오자 보랏빛으로 반짝입니다. 늘 서쪽 바다를 향해 있는 탓에 제아무리 찬란한 일출이라도 남의 떡 보듯 아예 거들떠보지 않지만, 해가 중천을 지나 뉘엿뉘엿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그 누구보다 활짝 가슴을 열고 해바라기에 열중하는 변산반도 바닷가의 층층(層層) 단애(斷崖). 깎아지른 절벽에 보랏빛이 번지는 걸 보고 처음엔 석양빛에 붉은 물이 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곰곰 살펴보니 오랜 세월 강한 바람과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형성된 퇴적암에 번지는 색이 석양빛과는 다릅니다. 노루 꼬리만큼 짧은 오후 햇살이 거무튀튀한 바위 절벽을 붉게 달구는 건 맞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수직 절벽 곳곳에 촘촘히 박힌 자주색 꽃송이가 눈부신 석양빛을 온몸으로 받아 찬란한 빛을 발하며 해안 전체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해 못지않게 다사다난했던 2018년 한 해도 이제 저물어갑니다. 12월이면 많은 사람이 장엄하게 지는 해를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겠다면서 서녘 바다를 찾습니다. 서해 3대 낙조 명소의 하나라는 솔섬 등이 있는 변산반도도 제법 찾는 이가 많습니다.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있지?”로 시작하는 안도현 시인의 ‘모항으로 가는 길’이란 시가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문득 변산반도를 찾는 발걸음도 생겨났습니다. 시인은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 밥 먹다가 석삼년 만에 제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라며 꼬드깁니다. 그러면서 변산해수욕장이나 모두가 꼽는 변산반도의 최고 비경인 채석강에는 잠시만 머무르라고 짐짓 어깃장을 놓습니다.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그런데 수직 단애가 수천 권의 책을 켜켜이 쌓은 것 같다는 채석강(彩石江)과 붉은색 암반 및 절벽으로 유명한 적벽강(赤壁江) 등의 변산반도 해안 절벽은 지질학적 명승지일 뿐 아니라, 특산식물인 변산향유의 유일한 자생지여서 ‘한 해 야생화 탐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꽃쟁이’들도 불러 모읍니다. 변산향유는 2012년 꽃향유와 가는잎향유, 애기향유, 좀향유 등 기존의 향유속 유사종과는 구별되는 신종으로 발표되었으나, 아직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오르지 않은 종입니다.
꽃향유(香油)는 줄기는 물론 가지 끝에 칫솔처럼 한쪽으로 뭉쳐서 피는 꽃이 아름답고 식물체 전체에 향기로운 정유(精油)가 함유되어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는데, 변산향유는 꽃향유를 닮았지만 분자생물학적 분석 결과 몇몇 차이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먼저 몸집이 꽃향유에 비해 작을 뿐 아니라, 줄기가 녹색의 꽃향유와 달리 자주색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넓은 달걀형 또는 타원형으로 마주나는 잎도 가죽처럼 두껍고 윤기가 나는 혁질(革質)이어서 초질(草質)인 꽃향유와 비교가 됩니다. 높이 30cm 안팎의 줄기나 잎자루 등에 털이 전혀 없이 밋밋한 것도 큰 차이입니다. 자생지도 크게 다릅니다. 꽃향유는 전국 어디서나 숲 가장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변산향유는 변산반도 해안 절벽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향유속 다른 유사종들과 마찬가지로 가을에 꽃이 피지만, 늦가을인 11월까지도 꽃을 볼 수 있어 앞서 언급했듯 ‘한해 마지막 꽃 탐사 대상’으로 꽃쟁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Where is it?
변산에서 처음 발견된 꽃향유의 일종이라는 이름답게, 변산반도가 자생지다. 학명 중 종소명 byeonsanensis는 자생지가 바로 전북 변산임을 말해준다. 신종 발표 이후 추가 연구 조사 결과가 없어 변산반도 이외 자생지는 알려진 바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큰 자생지는 변산반도 안에서도 격포항 인근 해안 절벽이다. 10~11월 격포항 방파제 내 수직 절벽에 자생하는 변산향유는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그 외 지역은 바닷물이 빠지는 간조 시각에 맞춰 찾아가야 한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
2018년 11월 8일 ‘브라보 2018 헬스콘서트’에 다녀왔다. 입담 좋은 이윤철 아나운서의 소개로 이어 첫 순서로 김형석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백세를 눈앞에 두고도 젊은이와 비교해 손색없는 꼿꼿한 모습은 강연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닮고 싶은 소망 하나를 슬며시 얹어 놓기에 손색이 없다. 백세를 살아도 저리 건강할 수만 있다면!
이투데이 김상철 대표의 간략한 인사말이 있은 후 자생한방병원의 한창 원장과 예풍한의원 백태선 원장이 나와서 우리 몸의 건강과 관련한 강연을 했다. 특히 혈압으로 가족력이 있는 나는 백태선 박사의 혈압에 대한 얘기가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특히 혈압 약은 꼭 양약으로 챙겨 먹으라고 했는데, 한약으로 혈압을 어느 정도 낮출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다는 것. 양약은 약값으로 한 달에 만원이면 가능하니 부담도 없다는 것이 백태선 박사의 추천 이유다.
1부 순서가 끝나고 잠시 휴식이 있은 후 2부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그 사이 근처에서 다른 동년기자가 인터뷰 중인 이윤철 아나운서의 영상을 조금 찍을 수 있었다. 운이 좋다. 스스로 60이 넘었다고 밝힌 그의 외모는 10년은 젊어 보였다. 비결이 궁금했지만 2부가 시작되어 인터뷰를 끝내는 바람에 영 알 수 없게 되었다.
2부에는 평균 나이 75세 시니어 치어리더 '낭랑18세'가 첫무대를 열었다. 공연을 보는데 얼마 전 쓰러져 요양병원에 계신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이제 겨우 81세이신데…. 이어서 신계행의 ‘가을사랑’을 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음색이 그대로였다. 김목경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쓸쓸한 심정이 되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콘서트를 보면서 동년기자로서 영상을 찍다 보니 '그동안 이곳이 많이 익숙하고 편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설레는 마음으로 동년기자 신청을 하고 1차 합격을 거쳐 면접을 본 후 발표까지 마음 졸이며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사람이 처음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은 반성도 한다. 어설프고 정제되지 않은 실력으로 글 쓰는 현장에 겁 없이 뛰어든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막연히 글 쓰는 게 좋다고 기자라는 명함을 받아들고 과연 그 책임을 다했는가? 하고 말이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이야기는 그냥 적으면 된다. 하지만 기자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되면 읽을 대상, 즉 독자를 고려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누가 읽을 것인지. 읽는 대상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글인지, 자기생각에 빠져 독자가 이해 못할 글을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생각하여 글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으니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그러는 사이 시간만 하릴없이 보낸 것 같다.
경품추첨을 하는 중에 영상을 찍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신기하게 내가 초대한 분도 작은 행운을 잡았다. 영상을 찍느라 바로 인사를 못 건네고 끝난 후에 축하를 해주었다. 집 밥 활동가인 이 분은 치아를 보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주변에 베풀기를 좋아하는 이 분. 무언가 주는 기쁨도 좋지만 우연찮은 곳에서 받는 기쁨도 만만치 않게 좋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동년기자가 된 덕분에 경험하게 된 것들이 꽤 많다. 중년 이후를 건강하게 사는 분들의 좋은 기운을 받은 ‘브라보!2018헬스콘서트’에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치며 1년 후에도 이 자리에 있기를 바라본다. 물론, 더 좋은 모습으로!
하늘과 구름, 강물과 바람소리, 햇살, 새들의 합주, 강변 단애, 그리고 숲 사이 오솔길. 있을 게 다 있다. 언제나 거기에 있어온, 본래 그러한 채로 있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저 완전한 충만. 그래서 아름답고, 그렇기에 신성하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진실하다. 사람 안엔 결핍된 수려한 맑음과 밝음으로, 그지없이 온전한 자연다운 푸른 아우라를 뿜으며 순수의 향연을 펼친다.
모두가 청량산의 식솔들이다. 저만치서 우뚝한 청량산의 모성을 젖줄 삼아 태어나거나 성장한 낙동강과 야산들과 나무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져 풍경의 절창을 빚어낸다. 청량산이라 하면 생각나지 않는가?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를 쓰며 줄곧 청량산을 사랑한 사람,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냈던 공부벌레, 천 원짜리 지폐의 인물 도안에 불려나온 영감님. 바로 퇴계 이황(1501∼1570)이시다.
이 숲길에 ‘퇴계 오솔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퇴계가 거닐었던 길이어서다. 퇴계의 시구(詩句)에서 따 지은 ‘예던길’, 혹은 ‘녀던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청량산 자락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온 퇴계는 평생 청량산을 애지중지했다. 끝내는 청량산 자락에 묻혔다. 그는 소싯적부터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기력이 쇠한 노년에도 느릿느릿 산언저리를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러하니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숲길에 퇴계의 숨결이 감돌 수밖에. 퇴계가 내딛었던 발길에 내 발자국이 포개지고 있을 테니 홍복(洪福)이다.
퇴계 오솔길은 퇴계 종택에서부터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길 50여 리 구간에 걸쳐 있다.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 일대의 강변 오솔길이 단연 백미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34세 연하의 퇴계와 격의 없는 교유를 했다지. 서로의 거처를 방문해 즉흥시를 주고받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덧없는 세사와 뜻 깊은 자연을 교감했다. 이 연상연하 커플의 교제는 문사들답게 낭만적이었다. 실천적 도학자들답게 준절했으며, 산천 애호가들답게 관조적이었다.
숲길에 강물소리 들이친다. 맑고 세차고 기찬 물줄기와 고요하게 좌정한 나무들의 숲길이 동행을 하니 절경이다. 숲에서 강으로, 강에서 숲으로 불어제치는 바람의 거친 애무에 산천이 부르르 통째 몸을 떤다.
가을 들꽃들로 오솔길이 밝다. 핀 꽃술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억새, 청초해서 애틋한 쑥부쟁이, 살랑살랑 몸 흔들어 향을 뿜는 산국(山菊). 저 멀리 도시는 소음과 매연의 저주에 붙들려 있지만 이 숲길엔 가을꽃 향 그윽하니 이방(異邦)이다. 숲길 어간의 쉴 만한 자리에 이르자 물가에 도드라진 너럭바위가 보인다. 퇴계가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경암(景巖)이다. 자연을 통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구(窮究)를 일삼았던 퇴계는 이 바윗덩어리를 보고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천년을 변함없이 흐르는 물과 부평초처럼 덧없는 인간사를 빗댄 시를.
길을 돌아 나와 고산정(孤山亭)에 닿자 다시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찬연한 풍광!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물과 단애(斷崖)와 산이 합작한 풍경의 드라마를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난해한 세상 속에도 개결한 세상이 있었구나! 풍경의 매혹에 고단한 인생을, 별 볼 일 없는 삶의 남루를 돌아보게 된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금난수(1530~1604)가 세운 정자다. 퇴계는 자주 고산정을 찾아 노닐었다. 주변 일대의 가경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이 누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시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을 퇴계의 심취한 모습이 환(幻)처럼 정자에 아롱진다. 이곳에서 수많은 시편을 썼다 하니 말이다.
나는 퇴계를 뵌 적이 없고, 고인(古人) 역시 나를 알 바가 없다. 그러나 유려한 숲을 서성이며 종일 퇴계를 만난 것만 같다. 퇴계를 생각하면 왜 심장이 뛰나. 그는 자신의 기질이 산야(山野)와 닮았다 했다. 독일의 거장 괴테가 울고 갈 만한 학문의 숲을 쌓았다. 그러고서도 겸양으로 일관했다. ‘학문의 길은 구할수록 멀었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풍모는 임종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국장(國葬), 그런 거 부질없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는 그리 당부했다. 이승을 떠나는, 이토록 가뿐한 행보를 본 적이 있는가?
탐방 Tip
농암종택 주차장에 주차하고 농암종택, 경암, 학소대, 고산정을 답사한다. 평평한 강변 숲길이 걷기에 좋다. 등산으로 벽력암까지 오르면 강물 굽이치는 통쾌한 산경(山景)이 저 아래에 전개된다. 퇴계 오솔길 인근엔 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묘소가 있다.
유행이 돌고 돌아 올가을에 호피무늬가 대유행이라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라미란 역)가 즐겨 입던 호피무늬 옷을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될 줄이야.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삶이 고달파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옛것을 통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월은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힘이 있으니. 세월을 비껴간 곳을 찾아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빈티지의 끝판왕, 을지로 인쇄소 골목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모든 업종이 서울 을지로3가와 4가 일대에 자리 잡았다. 공구 골목, 도기·타일 골목, 재봉틀 골목, 조명 골목, 인쇄 골목 등이 거미줄 치듯 모여 거대한 산업단지를 이뤘다.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도 을지로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동원집’의 감잣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던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전성기인 것 같다.
후미진 인쇄소 골목에는 임대료가 저렴한 건물을 찾아 들어온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카페, 술집,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대부분 을지로 특유의 허름한 분위기를 부각해 건물을 꾸몄다. 카페 ‘커피한약방’과 양과자점 ‘혜민당’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개화기 때 차림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촌스러운 색유리 창문, 100년 된 자개장,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문,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골목 풍경이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마저 멋스럽게 보이니, 내 눈이 ‘복고깍지’를 쓴 것이 틀림없다.
Tip
을지로 일대에 오구반점, 을지면옥, 통일집, 안성집, 양미옥, 을지다방 등 개점한 지 최소 30년 이상 된 노포들이 즐비하다. 노포 순례를 하며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사각지대 익선동 한옥마을
북촌과 서촌에 이어 익선동 한옥마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이후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옥이 잘 보존돼왔다. 전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과 인사동, 운현궁, 창덕궁, 종묘 등 서울 명소가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이 동네 시간만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오래된 식당과 한복집, 점집, 가정집 등 한옥 100여 채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익선동에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주택이 대부분 트렌디한 상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해 익선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옥인 ‘열두달’, ‘이태리총각’, ‘익선디미방’ 등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수플레팬케이크를 파는 복고풍 카페 ‘동백양과자점’이다. 평일에도 가게 앞으로 늘어선 줄이 엄청나다. 신생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에도 익선동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전통찻집 ‘뜰안’, 익선동이 인기를 끄는 데 일조한 빈티지 카페 ‘식물’, 착한 맛집 ‘익선동121’, 담장 허문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등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Tip
익선동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가깝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고즈넉한 서순라길(종묘의 서쪽 담장길)을 산책한 뒤 종묘까지 둘러보면 알찬 도보 코스가 완성된다.
서울의 사교육 일번지였던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에 있던 새문안 동네는 몇 해 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뻔한 동네였다. 서울시에서 헐지 않고, 도시 재생해 동네를 통째로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 도시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 등 각 시대상을 반영한 건축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었던 것. 동네 역사도 흥미롭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집마다 과외방이 있었다.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동네의 90%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당시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집이 유명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당시의 가옥 구조를 복원한 집 40채가 있으며 전시관, 연구실, 공예작가의 작업실 및 체험 공방으로 활용 중이다. 방문객은 그림 그리기, 와인 강좌, 쿠킹 클래스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선택해 체험해볼 수 있다. 이 중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도슨트와 마을 골목길을 함께 돌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건축 양식의 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무료로 30분 동안 진행되며, 신청은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www.dmvillage.info)에서 하면 된다.
Tip
돈의문박물관마을 맞은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이 있다. 서울 성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그땐 그랬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놓았다. 마치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창신사장(사진관), 근대화연쇄점, 장미의상실, 고향식당, 약속다방, 화개이발관, 고바우만화방, 인쇄소, 좋은소리사(레코드점) 등을 실물 크기로 짓고, 소품을 구색 맞춰 비치했다. 구멍가게 안에 진열된 과자, 음료수, 과일, 달걀,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장 부러워했다. 화개이발관에는 종로구 소격동에서 2007년까지 약 50년 동안 영업한 이발관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창신사장, 약속다방, 북촌국민학교는 내부 입장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창신사장에서는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옛날 사진관에서 사진 찍듯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이색 체험 공간으로, 재미를 선사한다.
Tip
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은 연결돼 있다. 단풍 고운 날, 고궁 산책과 더불어 추억의 거리를 거닐어보자.
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
포크 음악 시대의 막바지였던 1980년,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발표해 추억의 대명사로 각인된 가수 백영규. 이후로도 그는 제작자,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라는 현업들을 꾸준하게 지켜나가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노하우들을 하나로 모아 만든 청춘의 추억 ‘백다방’을 론칭해 업계로부터 ‘제대로 된 게 나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백영규’ 하면 떠오르는 계절, 가을. 그를 만나 그간의 삶과 현재에 대해 들어봤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1980년에 발표되어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는 제목이나 가사나 자연스럽게 가을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이 노래를 더욱더 가을답게 만드는 것은 백영규 특유의 처연하고도 서정적인 음색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인천에서 라디오 경인방송(FM 90.7㎒)의 최장수 간판 프로그램인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백가마)’ 디제이로 활동하면서 꾸준한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게 가수로서의 백영규와 디제이로서의 백영규가 합쳐진 이벤트가 얼마 전에 있었다. 바로 ‘백다방 콘서트’다.
원고까지 직접 쓴 ‘백다방 콘서트’
1970년대 한국 가요와 청춘 문화의 핵심이 음악다방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백다방 콘서트’는 그 시절의 음악다방을 음악적 콘셉트로 삼은 백영규의 공연 프로그램이다. 무대 한편에 뮤직박스를 차려놓고 음악다방이 인기 있던 시절 실제로 인기 있었던 디제이가 초빙되고 색다르게 연출 구성한 추억의 음악다방 분위기 속에서 백영규의 공연이 함께 어우러져 진행된다. 당연히 애청자가 보낸 사연을 읽는 시간도 있는데 그 전에 안내방송이 나오도록 설정하는 등 그야말로 ‘정통’ 음악다방의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1월에 시흥에서 처음 쇼케이스를 가졌고, 지난 5월 행사 이후로는 수정 보완을 해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백영규는 공연 기획뿐 아니라 원고까지 직접 쓰고 있다.
“디제이를 하면서 배운 게, 다른 사람 가슴속에 빠르게 들어가는 법이에요. 그래서 관객의 생각을 파악하며 원고를 썼죠. 음악다방이 중심이 된 무대를 세우니 과거와 추억을 소환하는 보람이 있어요. 음악다방이라는 콘셉트가 관객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어요. 저는 기분이 좋죠.”
‘인천가수’ 백영규의 보람
올해로 벌써 12년째인 디제이 생활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디제이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에 디제이를 시작할 때는 겸손하지 못했어요. 가수들이 왕자병 많잖아요.(웃음) 나니까, 인천 출신이니까 시켰겠지 싶었죠. 그게 좀 오래갔어요. 그런데 살다 보면 정신 바짝 차리게 되는 그런 일이 어느 순간 생기잖아요. 저도 그런 일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닫게 됐죠.”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백영규는 ‘촌장’으로 불린다. 프로그램명에 마을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 그렇다. 그는 “촌장이라는 칭호까지 붙었는데 이름값을 해야지” 하며 웃었다.
“제가 썩 좋은 성격은 아니었는데…. 중장년이 되면 배려 차원이든 자기 보호 차원이든 두 얼굴을 갖게 되잖아요. 가능하다면 (안 좋은 얼굴을) 버리는 척이라도 해야 해요. 척을 하다 보면 사람이 달라져요. 저는 특히 안병진 피디와 함께 일하면서 조직과 사회를 알게 됐어요. 큰 경험이죠.”
데뷔 40주년, 그리고 달라진 삶
아직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데 백영규가 중장년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1978년 그룹 물레방아로 데뷔한 그가 가수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40년이나 됐다. 이 특별한 숫자에 그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없어요. 괜히 40주년이니까 주위에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 그러지. 그런데 자꾸 그런 말 들으면 바람이 들게 되잖아요.(웃음) 그래서 백다방 콘서트도 시작하게 된 거고. 2016년 신곡 ‘술 한 잔’을 발표했어요. 그 음반이 대중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를 바랐는데… 올해 하나 더 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작업하고 있어요.”
그는 요즘 싱글로 발표할 곡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발표 후보 곡은 ‘그놈의 밥 때문에’라고. 디제이 일을 하고 있어도 가수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하는 그는 요즘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고 말했다.
“습관적으로 음반을 내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지더라고요. 한 곡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이유가 됐죠. 그래서 최근 3~4년간은 노래를 만들 때 수정작업을 많이 합니다. 과거에는 수정작업이 없었으니 완성도가 좀 떨어졌겠죠. 요즘은 노래 가사 토씨 하나 바꾸는 것도 하루 종일 고민하곤 해요. 신이 나요.”
노래 64곡을 다시 찾았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백영규의 노래는 총 210곡에 달한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210곡 중 64곡은 최근에 편입된 곡들이다. 한두 곡도 아니고 수십 곡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거는 지금처럼 곡들을 관리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얼마 전에 발견한 거죠. 그 곡들을 한꺼번에 가져갔더니 저작권협회가 뒤집어졌어요.”
그가 디제이를 하면서 싱어송라이터 편을 만들었던 게 그 시작이었다. 여러 싱어송라이터의 곡을 모아보다가 정작 자신의 노래들에 대한 정리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는 히트곡 모음, 다른 하나는 다른 가수들에게 준 노래들로 구분해 더블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팬클럽에 조사를 의뢰했는데, 그 과정에서 64곡이 빠져 있는 게 발견된 것이다.
“저작권협회에 이 사실을 얘기했고 협회가 검토한 결과 모두 내 노래였죠. 그래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며 옥신각신했죠. 처음에는 싸우려다가 언론사에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했어요. 기자들이 기사 쓸 일이 생겨서 그런지 신나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거기서 스톱했어요. 나이 들어 돈 벌려고 그런다는 말 듣는 게 싫어서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지만 협회도 잘못했다. 나 같은 컴맹을 위해 작품관리를 잘 좀 해줘라’ 하고 끝냈죠.”
그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속이 상해서 작곡을 전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제 개인의 역사이니까요. 또 계속 발전해나가는 중이니까 이런 일도 벌어지는 거겠고요…. 그래도 아쉽긴 했죠.”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건 음악밖에 없다
중장년의 나이에 이르면 삶과 생활 속에서 생긴 생채기들이 흉터처럼 남기 마련이다. 백영규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음악에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90년대 중반에 이혼하고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굉장히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 이겨내더라고요. 특별히 떼돈을 벌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제가 잘나갔다는 걸 잘 모르겠어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때는 그걸 느낄 새가 없었고. 저는 전초전이 없는 가수여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가수로 성공했죠. 가치라는 걸 몰랐어요. 그게 되게 아쉬워요.”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발표했을 때가 전성기 아니었을까?
“그때가 가장 유명했지만 경제적으론 힘들었어요. 지금은 매니저 시스템이 과학적이잖아요. 그때는 매니저가 가수가 큰다 싶으면 눌렀어요. 자기 말 잘 듣게 하기 위해서였죠. 언젠가 벽제에 공개방송이 있다고 해서 갔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허허벌판이었어요. 매니저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야 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그는 박정수의 히트곡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를 제작하면서 제작자로서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때 필드 매니저라 불리는, 이런저런 잡일까지 다하는 매니저로서의 역할도 해봤다. 그 경험은 지금도 그에게 삶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가요계의 정상에서부터 밑바닥 일까지 다해본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는 ‘고통이 자신을 만든다’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일 것이다.
세상을 넓게 보는 재미가 생겼다
백영규는 자신의 원래 꿈은 두루뭉술했다고 회고했다.
“확고한 신념이라는 것도 없었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나왔다 하면 사람들이 놀랍니다.(웃음) 공부는 일찍 포기했어요. 그리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가수가 되었으니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그러나 이제 그의 나이 예순일곱 살, 나이 듦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드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나이 듦이란 그렇게 달라지는 맛이 있죠. 가끔 웃게 돼요. ‘동갑내기들은 이걸 못 찾았을걸?’ 하면서요.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동네 사람을 마주쳤을 때 서로 외면하는 게 더 힘들지 않나요? 차라리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며칠 그랬더니 이제는 그 사람이 날 만나면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런 것이 바로 내 자신이 달라짐으로써 얻는 맛이죠.”
그가 변하자 노래도 달라졌다. 노래 주제가 예전처럼 서정적이거나 사랑은 빠지고 시사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을 다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그에게서 ‘계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사랑 이야기’ 같은 노래를 원한다는 게 그의 딜레마기도 했다.
“영감을 따로 얻는 원천은 없어요. 그래서 찾아야 해요. 제가 제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감성 지키기예요. 가진 거라곤 그것뿐인데 감성마저 잃으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할 거 다 하면서 감성이 나오기는 힘들죠. 감성을 지키기 위해 저는 주로 책을 읽어요.”
변화를 넘어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는 산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침마다 산을 탈 정도로 푹 빠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산에 갔다 와서 자투리 시간에 곡을 쓰고, 여유가 생기면 술 한잔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산은 그에게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답을 모색하도록 하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백다방 콘서트 같은 공연을 구상하고 연출한 것도 그런 시간들이 선물한 숙고의 시간 덕분이리라.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생각하다 말았다’고 답한다.
“계속 진화하는 중이라.(웃음) 그다음에야 할 수 있는 얘기인 것 같아요. 요즘은 ‘이러다 도인되는 거 아냐?’ 싶기도 한데, 그러면 재미없지. 술 한잔 먹고 귀여운 실수도 하고 그래야 사는 맛이 있잖아요. 사람이 완벽하면 쓸데없이 뻣뻣해지거든요. 요즘 고민이요? 이제 돈 좀 벌어야겠는데 돈 좀 벌려고 하니 길이 안 보이네요.(웃음) 그러니 하던 일이나 더 열심히 해야지요, 뭐.”
“우선 작품을 잘 써야죠” 하며 웃는 그를 보며 젊은 시절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했듯이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는 변화된 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옳게 나이 드는 일이야말로 노년의 보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전에는 뭘 모르고 썼는데, 이젠 정말 괜찮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작품 속에 내가 가진 마음 전부를 다 쏟아볼까 해요.”
가을의 끝 11월입니다. 이제 올해 달력도 마지막 한 장이 남았을 뿐입니다. 20대는 시속 20km로, 50대는 그 두 배가 넘는 50km로 세월이 간다더니, 나이 탓일까? 숨 가쁘게 달려온 2018년 한 해도 어느덧 역사의 저편으로 급속히 기울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화사하게 물들었던 단풍이 흩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즈음이면, 격동의 한 시기가 끝나고 그다음이 시작될 즈음이면 유난히 생각나는 야생화가 있습니다. 7월부터 피기 시작해 가을의 초입이라는 9월까지 고산 풀밭을 지키는 닻꽃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파란 하늘에 뜬 낮달을 향해 항해하는 듯 닻 모양의 꽃을 하늘 높이 매단 닻꽃. 닻을 올렸으니 분명 말달리듯 진군(進軍)하는 분망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 반대인 차분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왜일까. 아마도 하늘에 뜬 그 닻이 먼 길 나서려 막 올려진 게 아니라, 긴 여정 뒤에 찾은 쉼터에 내려질 닻으로 여긴 탓이겠지요.
꽃 모양이 배를 멈춰 세울 때 사용하는 닻을 닮았다 해서 닻꽃이란 이름을 얻었다는데, 실제로 꽃을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떡일 만큼 실감이 납니다. 식물체의 높이는 10~60cm. 연한 황록색으로 피는 꽃은 화관이 4갈래로 갈라져 아래쪽으로 길이 5~7mm의 원통형 뿔처럼 사방으로 뻗는데, 그게 배를 정박(碇泊)시킬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닻을 쏙 닮은 것이지요. 학명 중 종소명 ‘코르니쿨라타(corniculata)’도 바로 ‘작은 뿔 모양의’라는 뜻으로 외형을 잘 표현했습니다. 이런 생김새를 반영한 듯 ‘어부의 꽃’이란 꽃말을 갖고 있습니다. 봄철 피는 삼지구엽초도 꽃 모양이 매우 비슷해 닻풀이란 별칭으로 불립니다.
닻꽃은 그러나 2012년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돼 쭉 보호·관리 대상에 포함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보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야생화는 아닙니다. 7~9월 햇볕이 잘 드는 몇몇 높은 산의 풀밭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꽃을 피우는데, 이는 닻꽃이 북쪽에 고향을 둔 전형적인 북방계 식물임을 말해줍니다. 실제 2015년 7월 중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하는 안가라 강변에서, 그리고 올해 8월 백두산 인근 습지에서 누구의 각별한 관심도 받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 홀로 피어 있는 닻꽃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토(凍土)의 시베리아와 백두산이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본향이라는 말을 실감한 셈이지요. 한두해살이인 만큼, 한두 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뿌리까지 말라 사라집니다.
어쨌든 독특한 생김새 덕분에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누구든 처음 보는 순간 ‘아하!’ 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꽃 닻꽃. 높은 산 탁 트인 풀밭에 뿌리를 내린 닻꽃이 ‘천지간 바람 잘 날 없는 땅에서’ 수십 년간 치열하게 살아온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세대’에게 깊어가는 가을에 일갈합니다. ‘바쁘게 경쟁하며 앞만 보고 달리던 삶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을 위한 쉼터를 찾아 정주(定住)하라’고….
Where is it?
남한의 대표적인 고산인 설악산과 지리산에서도 자란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화악산(사진)에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생해 수도권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외 강원도 대암산과 한라산에도 자생하는데, 최근 한라산에서는 그 수가 크게 줄어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