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강물을 배경으로 저녁노을의 붉은빛이 장막처럼 내려오더니 해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강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강물에 어린 석양의 은빛 너울은 700리 낙동강의 전설 속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멋진 풍경을 가슴에 품고 어느새 어둠이 점령해 버린 길을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꾸역꾸역 달리고 있었다.
어느덧 피로가 덕지덕지 몰려와 몸과 마음이 지쳐갈 무렵 전망 좋은 강가에 자리 잡은 산수정이라는 음식점에 여장을 풀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여주인이 맛깔스러운 솜씨로 만든 민물매운탕을 내오자 가뜩이나 시장하던 우리는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시원한 경주법주 쌀 막걸리로 갈증을 풀고 소주로 이어진 분위기는 기어코 노래방까지 계속되며 어느새 자정을 넘기고 말았다.
피로감과 술기운이 어우러지자 필자는 잠시 마당 가로 바람 쐬러 나왔다. 시원한 강바람이 확 불어왔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밤 풍경…. 밤벌레 소리와 강물의 뒤척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강 건너를 연결하는 영풍교(경북 문경시-예천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강 건너에서 소쩍새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쩍새 소리이던가?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에서 피아가 영풍교를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다고 하니 수많은 젊은이가 이곳에서 목숨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행여 그 슬픈 영혼들이 이 밤 소쩍새 울음으로 슬픈 사연을 전해주고 있는 건 아닌지?
고요히 흐르는 강물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비상이 이 밤 그들만의 멋진 세레모니로 우리를 환영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첫째 날 밤은 깊어갔다.
안동보에서 시작한 낙동강 700리 길 위에서 둘째 날이 밝아왔다. 새벽까지 마시고 부르다가 깜박 잠들었는데 어느새 아침이다. 완전한 숙면이었다. 과연 누가 그 깊은 잠의 의미를 이해할까? 꿀맛 같은 단잠을 깨운 것은 스피커에서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였다. 아마도 고단한 단잠에서의 기상에 대한 배려인 듯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일어나 마당으로 나오니 강가에는 평화가 햇살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연두색의 녹음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가슴이 시원하게 힐링 됐다. 그 강물에 작은 물고기들이 파르르 아침 유영을 즐기고 있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이곳에 정착했다는 여주인 부부가 정겨움과 정성으로 끓여낸 된장국은 해장으로는 그만이었다.
된장국뿐 아니라 반찬 하나하나에도 맛과 정성이 배여 있었다. 시시때때로 인터넷 맛집의 걸걸한 맛 자랑이 상투적인 단어는 아님이 분명하긴 했다. 아쉬움의 인사를 나누고 다시 자전거길로 나왔다. 강둑에 연결된 자전거 도로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내달리니 그 길 위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랐다.
몇 시간을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부모님을 따라 청량리역에 내린 시각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청량리역을 나서면서 필자 입에서 나온 일성은 ‘아부지! 하늘에 호롱불이 좍 걸려 삣네요’였다. 그때가 필자 나이 9세이던 1966년 가을이었다.
필자는 경주 인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논밭 사잇길을 지나 형산강 상류 얕은 곳을 건너고 긴 아카시아 터널과 무서운 보리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농사철이나 눈보라가 심한 겨울날에는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필자 집은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방이 두 개고 방 사이에 작은 부엌이 있는 초가집. 아버지는 일하러 서울에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철공소 일 하시던 아버지께서 다 망가져서 내다 버린 세발자전거를 주어다가 용접하고 색칠해서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신기한 물건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번 태워달라고 내 자전거 뒤로 동네 아이들이 긴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을 깨치시고 셈법을 배우셨다. 배움에 한이 맺히신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ㄱㄴㄷㄹ’ ‘가나다라’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책받침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966년 가을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며칠 동안 들고 다녔고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잡아넣은 호박꽃을 움켜쥐고 밤길을 뛰어다니던 천방지축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청량리역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가로등을 하늘에 좍 걸려 있는 호롱불로 알았던 것도 당연한 이치.
몸이 약하고 왜소했던 필자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심지어 선생님들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가난도 한몫했다. 솜틀집 귀퉁이 작은 방 하나에 우리 전 가족이 살았다.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던 필자는 자신감이 자꾸 사라졌다. 필자는 더 우울해지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외톨이가 돼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 기억에 없으나 어린 시절 은인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ㅁ‘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에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필자를 자기네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셨다. 반들반들 거리는 마루에 그 친구와 단 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 친구는바둑도 실력급이어서 필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네는 검은색 자가용이 있었는데 광나루에 물놀이 갈 때는 필자도 같이 데리고 가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단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4학년 때 필자 집이 멀리 이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있었다. 성씨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은 언제나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필자가 다시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준 친구. 우여곡절 끝에 나는 2008년에 그를 찾아냈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나간 사십여 년의 긴 시간도 같이 지낸 듯 친근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필자에게 했던 그 나눔을 평생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건네준 시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꼭 뵙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그림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철공소 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보내셨다. 그렇게 일하시면서 그림 공부를 하시고 그 시절 미대를 졸업하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재능인 그림 공부를 하신 후 평생 나염 공장에서 도안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셨다. 블록으로 지은 쪽방 도안실에서 꽃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남아 있다. 철공소의 험한 일은 그만하셨지만 나염공장도 열악하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고 다니시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필자가 고3 때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중ㆍ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받은 상은 전부 그림 상이었다. 사생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특선을 했다. 필자는 그림이 좋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건축과로 가라고 하셨다. 건축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 그림에 빠져있던 내가 공대 건축과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도 수학을 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건축과 학생 중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선후배가 모여서 작품전을 준비하는 써클에 가입했다. 1년에 5개월 정도를 써클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설계 공부를 하며 작품전을 준비했다. 그 당시 써클룸은 학교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있는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 옆 정화조 위에 있었다. 냄새 나는 좁은 공간에서 저학년들이 전체 인원이 먹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그 밥으로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다. 잠은 제도판 위에서 쪼그리고 잤다. 낮에는 자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설계하는 습관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졌다. 그러니 제때에 졸업 못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필자도 학점 미달로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졸업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후배들은 사회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필자는 그렇게 맺은 건축과 선후배들이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연결고리에서 도움을 받고 나누고 있다.
졸업 후 7년 동안 건축 설계사무실의 도제 생활을 거치고 나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두 살에 건축설계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하기 한 해 전에는 결혼해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세 식구가 살 작은 원룸 아파트도 돈을 빌려서 전세로 들어갔고 사무실 개업비도 전부 선배들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1989년이었다. 개업하자마자 일이 밀려 들어왔다. 그 시절 온 나라는 공사판이었고 설계일도 넘쳐났다. 삼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직원 수도 늘어났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많아졌다. 골프도 치러 다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엔 작은 전셋집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필자의 삼십대는 건축이 가져다준 풍요에 방향타를 놓치고 흥청거렸다. 그러나 그 풍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늦가을 어느 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그날 필자는 선후배 골프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설계, 감리를 시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여러 날 공사현장 사고 조사를 받는 중에 IMF가 터졌다.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거래하던 중소 건설회사는 전부 부도가 났고 예정된 모든 설계프로젝트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이 터지듯 사라졌다.
필자가 사십 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일어난 악몽이었다. 삼십 대에 이룬 것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일거리가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독촉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협심증과 감각마비라는 중증 질환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신경과 전문의인 둘째 처남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은 상태호전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가능하면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가족의 단결도 가져왔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해 주셨고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밤마다 뜸을 떠주고 필자 손바닥에 빽빽하게 수지침을 놓아 줬다. 몇 달 후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필자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피부. 그 당시 얼굴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런 가족의 성원에 보답하려고 당시 건축설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동안 건축을 하면서 예술가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살았으나 필자의 사십 대 건축은 단지 생계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빚을 정리하면서 사십 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의 키가 나보다 더 커져 있고 필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것을 알았다. 필자의 불혹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그러니까 2007년부터 매년 한가지씩 이루어 나가기로 했고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담배 끊기, 목 조각 배우기, 책 내기, 상담사 자격증 따기, 강의하러 다니기, 새로운 사람 오십 명 사귀기 등이 그동안 내가 실행한 일들이다. 올해는 캘리그라피에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성취 가능한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꼭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2007년도부터는 건축 분야 가운데서도 환경, 생태건축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류를 포함한 동물 공부도 하고 수목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면서 식물도 공부하고 있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환경이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소득이 있는 시니어타운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아파트 하나가 재산 전부인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지만 그림 같은 집을 갖게 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생 후반전을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에 필자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퇴직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생애 재설계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이것도 같은 차원이다. 사실 한국의 시니어들은 퇴직 후의 인생 2막에 대해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고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최근에 필자는 ‘5070세대의 가슴 펄떡이는 기사를 쓰실 기자를 찾습니다’라는 이투데이의 시니어기자단 모집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필자 희망대로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프랑스의 법적 와인등급 중에서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olée)이다. 그 아래로 뱅 드 페이와 테이블 와인이 존재한다. 물론 AOC 바로 다음에 우등한정등급(AOVDQS 이전에는 VDQS라고 했다)이 존재하지만 이는 AOC로 올라가기 위한 일종의 대기실인 데다 그 수도 얼마 되지 않아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와인 생산국가도 명칭과 구조는 각각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가 프랑스 제도를 모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AOC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의 명칭은 DOC 혹은 키안티의 경우 DOCG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우선 AOC에 대해 살펴보자. 1935년에 4개의 AOC를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한 프랑스의 AOC 제도는 현재 450개를 넘는다.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97% 정도가 AOC이니 보르도 와인은 AOC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현재 AOC는 와인의 품질을 보장하기에는 너무 허술하고 미약하다. AOC라는 법적 등급은 같아도, AOC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상과 최악이 공존한다. 그러니 소비자의 알 권리에 속하는 AOC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 그 내막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AOC의 내막을 살펴보면, 그 내부에 여러 계층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피라미드의 맨 위쪽엔 그랑 크뤼 AOC가 자리한다. 당연히 제약이 많다. 한 마을 단위에서 생산된 지정된 세빠주만으로 와인을 주조해야 하며, 수확량도 매우 제한적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 유명 소테른의 AOC는 포도나무 한 그루 당 와인 한 잔을 생산한다고 전해지는데, 지극히 사실에 가까운 전설이다.
그랑 크뤼 AOC 바로 아래 크뤼 AOC가 자리한다. 그랑 크뤼 AOC에 비해 수확량이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매우 한정적인 양이다. 사용하는 포도도 한 마을 단위에서만 생산해야 하며, 재배방식에 대한 규정도 까다롭다.
다음으로 AOC 빌라주(village)가 있다. 빌라주는 마을 단위보다는 지리적 개념이 광범위하고, 법적 제한도 위의 두 AOC에 비해 조금 느슨하다. 포도 재배는 한 마을 혹은 여러 마을에서 재배 가능하며, 수확량에 대한 제한도 있다.
끝으로 일반 AOC(AOC générique)가 있는데, AOC로 지정된 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알사스, 보르도, 보졸레, 부르고뉴, 꼬뜨-뒤-론 등이다. 그리고 생산지역의 명칭만 레이블에 붙인다. appellation Bordeaux controlée 이런 식이다. 수확량은 헥타르 당 40ℓ 정도로 제한되어 있지만, 지역에 따른 차이가 크다.
다음으로 AOVDQS가 있는데,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AOC로 들어가기 위한 대기실이다. 얼마 전까지는 VDQS(vin délimité de qualité supérieur)였는데 현재는 그 앞에 appellation d’origine이 첨가되어 AOVDQS가 되었다. 레이블에는 AOVDQS에다 와인의 이름이나 생산자의 이름이 첨가된다. AOC로 올라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와인이기에 질이 우수하다. AOC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면서 질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한 와인이 많으니 눈여겨 살펴보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단지 생산량이나 생산자 수가 적어 유감이다.
뱅 드 페이(vins de pays)는 프랑스의 여러 다양한 와인 생산지역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리고 그 내부에 3개의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1. 뱅 드 페이라는 표기에다 행정지역(région) 명칭이 따른다
2. 뱅 드 페이라는 표기에다 행정구역(département) 명칭이 따른다
3. 뱅 드 페이라는 표기에다 생산지역의 명칭이 따른다
프랑스에는 행정 구역 상 22개의 지역에 95개의 구역이 있다. 가장 적은 지역인 알사스(Alsace)에는 오-랭(Haut-Rhin)과 바-랭(Bas-Rhin) 두 개의 구역이 있고,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인 론-알프(Rhone-Alpes) 지역에는 론(Rhone), 이제르(Isére), 사브와(Savoie), 오뜨-사브와(Haute-Savoie) 등 8개의 구역이 있다.
참고로 일부 구역 명칭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뱅 드 페이 중 일부는 세빠주 와인인 것도 있다. 수확량은 나름대로 제한적이며, 일반적으로 헥타르 당 85~90헥토리터 정도로 높다. 뱅 드 페이라 해도 질을 높이기 위해 생산자가 수확량을 임의로 낮추는 경우도 있으며, 극히 일부이지만 생산량을 반으로 줄이는 생산자들도 있다. 꼬트 뒤 론의 에스테르자그(Esterzagues)도 이에 속한다.
뱅 드 페이에 대한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수입 판매되는 랑그독-루시용(Languedoc-Roussillion) 지역의 4개의 다른 구역에서 재배되는 포도로 주조한 뱅 드 페이 독(vin de pays d’Oc)도 좋은 예이다. 우선 가격에 부담이 없고, AOC처럼 여러 제약을 받지 않아 자신만의 독특한 와인을 생산하려는 생산자들이 고의로 뱅 드 페이에 남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와인은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특히 빼어난 질로 인기가 높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세빠주 와인은 포도 재배나 와인 생산에 대한 아무런 법적 제한이 없다. 단 하나 제한이 있다면 레이블에 적힌 포도 품종(세빠주)으로 주조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다. 예를 들어 가메이, 샤르도네 등이다. 어떤 경우에는 2개의 세빠주를 혼용하기도 하는데, 까베르네-소비뇽, 메를로 등이다. 일부 세빠주 와인의 경우 법적 제한을 받는 공식적인 명칭(appellation)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같은 세빠주의 이름을 상표로 붙이고 생산된 와인 사이에 질적인 격차가 하늘과 땅이라, 소비자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프랑스에서 유일한 예외는 전통적으로 세빠주 와인만을 생산하는 알사스 와인이며, 와인의 질도 우수하다.
뱅 드 타블르(테이블 와인)는 옛적에는 ‘상용 와인’(vin de consommation courante)이라 불렸는데,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나 와인으로 주조되며, 레이블에는 단지 뱅 드 타블르 그리고 상표명만 명시되어 있다.
현재까지의 법적 등급은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프랑스 와인을 소비하는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해 뱅 드 타블르보다 더 광범위한 명칭이 몇 년 안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 전조로 2009년에 AOC 랑그독(이전 명칭은 AOC céteaux-du-languedoc)이, 그리고 이보다 몇 년 앞서 랑그독-루시용(Languedoc-Roussillon) 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 와인(l’appellation Sud de France)이란 새로운 명칭이 탄생했다.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랑그독-루시용 지역은 연간 총 생산량이 무려 1500만 헥토리터나 되는 광대한 프랑스 최대의 와인 산지다.
그리고 2007년 꼬뜨-드-보르도(côtes-de-bordeaux)가 탄생했는데, 이는 그 이전의 꼬뜨-드-까스티용(côtes-de-castillon), 꼬뜨-드-프랑(côtes-de-francs), 꼬뜨-드-부르(côtes-de-bourg), 프레미에르-꼬뜨-드-블라이(premières-côtes-de-blaye) 그리고 프레미에르-꼬뜨-드-보르도(premières-côtes-de-bordeaux)를 규합한 것이다.
주로 수출을 위해 보다 더 광범위한 새로운 명칭도 나타나고 있다. 단순히 ‘프랑스’ 혹은 ‘프랑스의 포도원’이란 명칭이다. 프랑스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구역(dèpartements)은 총 95개 중에서 64구역인데 다른 두 지역 혹은 네 지역에서 생산된 뱅 드 페이를 어셈블리한 와인으로, 저가 수출 시장 공략을 우선적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와인은 세빠주 이름만 레이블에 기입하면 된다.
이런 혼란과 노력 뒤에는 얼마 전부터 프랑스 와인이 직면한 매우 모순적인 상황이 밑그림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 와인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그 떼루아의 다양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바로 이 같은 다양성 때문에 즉 너무 복잡해서 판매에 지장을 받고 있으며, 이는 특히 수출 분야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양성의 유지, 다른 한편으로 단순화라는 양립이 불가능한 두 요소 사이에서 갈등한 결과가 뱅 드 타블르보다 더 하위의 새로운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장 홍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
오랫동안 로제 와인은 하잘 것 없는 싸구려 와인으로 남프랑스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때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목마름을 가시게 하기 위해 마시는 휴가용 와인 정도로 치부되었다. 타벨(Tavel)이나 방돌(Bandol)과 같은 지극히 예외적인 몇 종류를 제외하면, 로제의 명성은 언제나 그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로제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마시기 편하고, 색깔이 아름답고, 향도 좋고, 가격도 적당하고, 게다가 질적인 면에서 괄목할 만한 향상을 이루었다. 한마디로 로제 와인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일종의 유행 혹은 모드가 되었다. 이는 기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우선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향상이 눈에 띈다. 발효 시 적절한 온도 조절로 향이 보다 향상되었고, 탄산가스의 사용으로 황의 첨가를 줄였고, 사용하는 효모의 선택도 보다 엄격해졌다. 다음으로 포도 재배와 품종의 선택과 같은,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다. 수확량의 감소, 농약 사용의 제한, 보다 고귀한 세빠주의 사용, 적절한 수확기의 선택을 통한 잘 익은 포도 수확 등등… 로제 와인의 이 같은 질적 향상을 위해 요술방망이 같은 특별한 무슨 비결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로제의 부상(浮上)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여러 작고 섬세한 노력이 모인 결과다.
아직 우리의 로제 와인 소비는 매우 적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와인이기도 하다. 흔히 로제 와인은 레드와 화이트를 섞어서 주조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와인 책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프랑스에서도 14%에 달하는 와인 소비자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조사도 있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2009년 유럽연합은 로제의 주조방식으로 레드와 화이트를 섞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프로방스를 중심으로 하는 로제 생산자들은 ‘섞는 것은 로제가 아니다!(Couper n’est pas rose!)’라는 기치 아래 거세게 저항했으며, 이에 세계의 언론들도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유럽연합이 제안한 법안은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같은 법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로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주조된다. 첫째, 가장 전통적인 마세라시옹(maceration) 방식이다. 수확한 적포도를 로제의 색깔이 우러날 때까지 24시간 혹은 48시간 정도의 짧은 기간 탱크(tank)에 담아둔다. 그런 다음 포도를 압착해서 즙을 짜고, 발효를 시킨다. 단지 그리(gris/grey) 방식은 마세라시옹 절차를 거치지 않고, 화이트 와인 주조처럼 바로 적포도를 압착해서 발효시키며, 그 결과 색깔이 대단히 옅다. 이런 로제를 따로 ‘그리’라 부른다. 둘째, 세눼 방식(methode saignee)이다. ‘세눼’는 불어로 ‘피를 흘리다’(saigner)라는 뜻의 동사에서 온 것인데, 수확한 적포도를 레드 와인을 주조하는 탱크에다 넣고 원하는 로제 색깔에 이르면 흐르는 즙의 일부를 받아 주조한다. 이렇게 생산된 로제는 부드럽고(supple), 섬세하며(fine), 민감(delicate)한 특성을 지닌다. 끝으로 샹파뉴 로제의 주조 방식이다. 일반 로제는 레드와 화이트를 섞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반면, 샹파뉴 로제를 주조하는 데는 유일하게 이 같은 방식이 허용되어 있다. 하지만 보다 구조가 탄탄한 샹파뉴 로제를 주조하기 위해 전통적인 마세라시옹 방식을 적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샹파뉴 로제의 주조에는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사용될 수 있다.
로제 하면 흔히 핑크(pink) 색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영어와 독어로는 그대로 ‘로제’, 스페인어로는 ‘로사도’(rosado), 이탈리아어로는 ‘로사토’(rosato)라 불리는데, 창백(pale)하거나 투명(clear)한 것, 양파껍질 색, 자고새 눈 색깔(eil-de-perdrix), 산호 색(coral), 연어 색, 체리 색, 기와 색(tuile) 등 매우 다양하다. 이는 사용하는 세빠주의 영향도 받지만, 위에서 설명한 주조 방식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혹 로제를 마실 기회가 있으면,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로제 색깔의 팔레트를 눈요기해보기 바란다.
와인을 색깔로 구분하면 레드·로제·화이트 세 종류가 있다. 레드와 화이트를 적절히 섞으면 얻을 수 있는 색깔이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샹파뉴 주조만 제외하고 아직 프랑스에서는 이 방식은 금지되어 있다. 문제는 ‘붉은색이 어느 정도 이상일 때 혹은 이하일 때 로제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명백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기에 지역에 따라 얼마간의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알사스에서 레드로 간주되는 많은 피노 누와는 사실 보르도에서 로제로 여겨지는 클라레(claret)에 비해 몸체나 색상이 로제에 가깝다.
로제는 최근의 인기와 더불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비롯해 많은 뉴 월드 지역에서도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로제 생산지역은 남부 프랑스의 프로방스(Provence) 지역이다. 총 2만6890ha의 재배면적을 지닌 프로방스는 프랑스 총 로제 생산량의 38%, 세계 총생산량의 8%를 차지하고 있다. 2년 전부터 프랑스는 화이트보다 로제를 더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만큼 최근 들어 로제의 성공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양질의 로제를 생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양조 테크닉과 다방면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마침내 오크 통에서 숙성시킨 로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로제가 과연 오크 통 숙성에 적합한 특성을 지닌 와인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지만 이제 막 시작단계라 충분한 검토가 어려워 여기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다만 로제의 인기와 더불어 로제의 가격도 들썩이고 있다. ‘모든 메달에는 이면이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누가 뭐래도 로제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쉽게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와인이라는 점이다. 색깔이 아름다워 우선 눈이 즐겁고, 타닌이 적은 대신 과일향이 좋아 코가 즐겁고, 더운 날 시원하게 한 잔 마시면 갈증이 말끔히 해소되어서 좋고, 술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알코올 도수가 다른 와인에 비해 낮아서 부담 없어 좋고,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 함께 마시면 분위기를 맞추는 데도 그만이다.
또한 서로 다른 음식을 주문해 레드와 화이트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해야 할 때 고민을 해결해줘서 좋고, 샌드위치나 치킨 등과 같은 간단한 음식과도 잘 어울려 좋고, 특히 가격이 부담 없어 주머니 사정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어 더욱 좋은 와인이 로제다. 물론 몸체가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우며, 깊고 복잡한 3차 향이 나는 고급의 훌륭한 와인을 마시고 싶을 때 어울리는 와인은 아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로제도 한번 즐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 장 홍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독일에 한 소년이 있었다. 호메로스의 를 사실이라고 믿어버린 아이는 언젠가 신화 속 도시 트로이를 발견해낼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어른이 되어 러시아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손에 쥔 소년은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했고, 그리스로 건너가 고대 유물 발굴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터키 히사를르크 언덕에서 꿈에 그리던 고대도시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한다. 그가 바로 고고학계에서 잘 알려진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竹山)에서 만난 윤민용(尹民鎔·79)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는 이 슐리만의 이야기와 묘하게 닮아 있다.글·사진 이준호기자 jhlee@etoday.co.kr
그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산과 들을 뛰놀던 유년시절 소년 윤민용은 이 돌들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지만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커서 돌들의 유래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0년이 훌쩍 넘어서야 겨우 알게 됐다. 그 소년이 봤던 돌들은 통일신라 때 축성돼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죽주산성(竹州山城)의 일부였고, 그의 고향 죽산은 ‘경기도의 경주’로 불릴 만큼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그가 어릴 적 꿈에 먼 길을 돌아 도착하게 된 이유는 가난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그는 학비를 벌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고향에서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한국일보를 배달했고, 졸업할 즈음에는 죽산지국장이 되어 있었다. 그때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신문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뜨게 됐고, 그의 타고난 웅변 실력은 세상이 그를 새 꿈에 다가가도록 종용했다. 정치였다.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하면서 그 꿈은 구체화되는 듯했지만, 5·16 군사정변을 만나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금배지 대신에 타워호텔의 총무부장 직함을 달았다. 롤링스톤스가 울려 퍼지던 1969년의 일이다. 타워호텔은 1961년 민간에 매각되기 전까지 군사정부의 외빈용 숙소로 사용되었던 만큼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곳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이 1972년에 시작돼 2년간 7차례 진행됐는데, 그 역사적 사건 실무의 중심에 그도 서 있었다. 그렇게 10년간 호텔리어로 생활했다. 다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화학장치주식회사에서 20년간 근무 한 뒤 정년을 앞두고서였다.
“당시 퇴직 이후 계획을 세우기 위해 고향을 자주 찾다 보니 칠장사(七長寺)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칠장사의 다양한 유물들을 호기심에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유년시절 꿈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2001년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고 해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고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화해설사로서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새로 했죠. 관련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곳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문화해설사는 단순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읊는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죠. 해설의 흥미와 사실감을 살리려고 정확한 역사 속 날짜와 시대적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뒤따라야 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간혹 스마트폰으로 내 해설을 확인하는 짓궂은 친구들도 있고,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전문가들도 만나는데, 해설을 듣고 나서 칭찬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가 문화관광해설사 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두 가지다. 역사적 근거를 통해 주류 사학(史學)과 향토사학(鄕土史學)의 올바른 접점을 찾는 것과 이를 통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노력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 중 대표적인 게 조선 최고의 어사로 손꼽히는 박문수(朴文秀·1691~1756)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다.
“칠장사에는 박문수가 세 번째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다가 이곳에 들러 나한전에 기도를 드린 덕분에 장원급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설화로 전해 내려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죽산에서부터 안성까지 자료가 될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고, 결국 천안 입장면에서 생가로 추정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수사를 하듯 박문수의 호 기은(耆隱)이 그의 고향인 천안시 북구 입장면 기로리(耆老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하고, 여러 사료 확인을 통해 그의 몽중등과시 중 마지막 구절에 있는 (대나무)피리 적(笛)으로 알려져 있던 글자가 풀피리 적(笛)이라는 사실을 밝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렇게 2년간 시간의 파편을 수집하고 확인하기를 거듭했고, 결국 어사 박문수의 장원급제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고령 박(朴)씨 대종회로부터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안성시에서는 이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그가 완성한 박문수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어머니의 간청을 흘려듣기 힘들었다. 선비로서 절에 기도를 올리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세 번째 과거시험 도전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면목도 없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 도착한 칠장사 나한전에서 그는 유과를 공양하며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날 밤 박문수는 꿈속에서 부처님을 만난다. 부처님은 시험에 나올 시제 7행을 알려주면서 나머지 행은 스스로 완성해야 하며 신중하지 못하면 시를 망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게 성균관 과장(科場)에서 박문수가 완성한 시가 몽중등과시다. 그는 이 시로 병과 진사과에 장원급제했다.
최근에 이 시구는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 칠장사로 복사본을 얻으러 오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그를 만난 당일은 2016학년도 공립 중등교사 임용고시가 있던 날이었는데, 나한전은 기도를 올리는 학부모들로 북적였다. 시의 효험 덕분인지 윤민용씨의 손주는 캐나다왕립사관학교에, 외손주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중년의 꿈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꿈은 그간 조사하고 연구한 자료와 그의 이야기를 엮어 도록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주변에 무료로 나눠주고 싶습니다”며 “사람들의 관심을 높여 역사를 소중히 하는 마음을 키우고 싶습니다”라고 밝혔다.
>> 브라보 커버스토리 Q&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꿈이 생겨났기 때문이죠. 그러다 새 꿈이 현실이 되고, 천직이 되면서 어릴 적 꿈은 꿈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중년이 되고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고향을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고향의 많은 문화재들을 다시 보게 됐고, 문화재들을 통해 다시 꿈꿀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이 막연한 희망이었다면, 중년 이후 새롭게 품은 꿈은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꿈이 호기심에서 비롯됐다면, 중년의 꿈은 베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기 위해 향토 사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료를 뒤지고 현장을 오가는 것이 즐거웠지만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구체적인 색보다는 밝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굳이 색을 고르라면 태양빛과 같은 주황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꿈은 인생에 희망을 주는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늘 긍정적인 태도와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됐습니다. 잔병치레도 사라졌습니다.
글 권택명(한국펄벅재단 이사, 시인)
애송시 을 쓴 故 청마 유치환 시인은 그의 시 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그 행복을 넘어서는 것이 사랑하는 것, 즉 사랑을 주는 것이라는 시인의 표현은 시적 수사(修辭)이고 역설적 표현이지만 한 차원 높은 행복론이다. 근원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받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켜서는 것이기에 그런 만큼 성숙함의 증표라 할 수 있다.
시혜(施惠)를 자랑하거나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아름답다. 이는 주위를 여유롭게 하고 선순환하게 한다. 물론 줄 수 있는 ‘여건’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는 대상물보다 주는 마음이고, 태도이며, 습관이다. 가진 것의 크기나 양보다 이를 나누려는 마음과 이웃과 세계의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惻隱之心: compassion/sympathy]이 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기부는 단순히 ‘GIVE’ 하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을 담은 자선 행위는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러 조사에 따르면, 자신보다 남을 위해 쓸 때 한 차원 높은 행복감을 느끼게 되며,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행위가 뇌에서 사회적 유대감과 관련된 부분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남을 돕는 사람들이 혈압과 스트레스 정도가 낮아 더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조사 자료도 있다.
기부가 바꾸는 세상
‘부자의 기부는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지난 8월, 2000억 원의 전 재산을 통일나눔펀드에 기부한,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관련 언론의 기사 제목이다. 세계 기부 역사를 새로 쓴 철강왕 카네기나 석유재벌 록펠러, 기업인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등의 거액 기부자들, 삼성·현대·LG 등 한국 대기업들의 기부, 그리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 원 이상 기부자 모임인 ‘Honors Club’ 등. 이들 고액의 기부 단체나 기부자가 복지 제고 차원에서 사회와 세계를 바꾸는 역할을 한 것은 자명하지만, 반드시 고액 기부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커피 2잔(1만 원)이면 아프리카 영양실조 아동 1명의 1주일 치 영양치료식, 치킨 1마리(2만 원)면 빈곤국가 6인 가족 한 달 치 식량, 회식 1회(3만 원)면 빈곤국가 6인 가족 1개월 치 식량 제공이 가능하다’는 어느 국내 비영리자선단체의 모금 광고처럼, 소액이라도 얼마든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복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국가만으로 사회 전반의 복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양식 있는 시민사회의 기부와 나눔 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때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생활고로 인한 송파동 세 모녀 자살 사건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돌봐야 할 벼랑 끝에 선 이웃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부문화의 현주소
2013년도 기준 총 기부금액 약 11조8000억 원(종교기부 포함) 중 개인이 7조7000억 원으로 65% 정도를 점하고 있다. 현금을 기부한 개인 비율 약 33%, 1인당 평균 기부금액 약 16만 원으로, 2011년도 기준 미국의 82%, 1000달러 수준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수치이다. 또한 고소득층의 기부 참여율이 중·저소득층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액 기부자들을 중심으로 기부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국제기부문화선진화컨퍼런스 주제 강연 차 방한한 영국 자선사업감독위원회의 케네스 디블 법률서비스국장이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에서 기부는 경제의 필수 요소다. 영국인의 삶 속에 기부는 관습(ethos)처럼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한 것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기부금 수준은 국민들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한 좋은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 축소 후 기부금이 많이 줄었다는 뉴스가 있다. 다행히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 법안들이 기부금의 세금공제 혜택을 늘리는 쪽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므로, 경주 최 부자나 제주 거상 김만덕, 개성상인의 나눔정신, 두레나 품앗이 등으로 이어져온, 우리의 나눔과 기부 전통이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손쉬운 기부의 실천
IT 기술과 SNS의 발달 등으로 기부의 방법도 다양화하고 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 또 그동안 모금을 하는 비영리자선단체들의 재정 투명성 문제로 기부를 꺼리게 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지금은 많은 모금단체들이 국세청 자료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재정 상태를 상세히 공개하고 있어서 신뢰성 확인도 쉬워졌다.
기부의 사전적 뜻은, ‘자선 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해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는 것’(네이버 국어사전)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즐겁게 낸다는 ‘희사(喜捨)’ 쪽을 더 선호하지만, 기부는 꼭 물질만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사회 지도층이나 문화·예술인, 연예인들의 재능기부를 비롯하여, 이·미용 기술, IT 등 각종 재능기부에서 장기기증까지 다양한 기부들이 실행되고 있다.
흔히 재산이 많은 부자를 ‘잘 산다’라고 표현하는데, ‘부자는 그저 재산이 많아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은 자신과 가족을 넘어 그 부를 사회 전반에 유익하게 사용하며 사는 훌륭한 품격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늘 주장하시던 필자의 친척 한 분이 생각난다. 이제 자선활동의 피크인 연말이 다가온다.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기부든, 국내외 불우아동에 대한 1:1 후원이든, 고액이든 소액이든, 한 해가 가기 전에 일단 기부를 하여 차원 높은 행복감을 맛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유한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1946년 양력으로 11월 3일에 태어났다. 경주 외곽에 있는 나원, 외갓집에서였다. 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호르몬 작용의 산물이라 했고, 엄마는 운명이라고 했다. 1947년에 서울로 갔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서 다시 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검은색 토탄 가루를 뿌려가며 밥을 짓던 것과 고무줄 장사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글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전쟁이 났다. 양친이 이혼한 뒤였고 엄마는 나를 이끌고 피난행 열차를 탔다. 엄마는 아버지가 거짓말쟁이에 술고래여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쟁 기간에 통역관을 지냈다던 것도 믿지 않았는데 성장한 뒤에 만난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보여준 아버지의 사진, 미군과 찍은 것들을 보고 그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 피난 열차가 오산에서 쉴 때 엄마가 나를 개울로 데려가 몸을 씻겨주었다. 그때 기차가 폭발했다. 오지리 폭격기가 위치 오착으로 폭격했다는 것은 엄마의 얘기와 기록에서 확인했다. 엄마와 나는 몇 날 며칠 걸어서 경주, 외가로 갔는데 걸으면서 잤던 기억, 자느라 엄마를 놓쳐 울고불고했던 일, 원두막에서 참외를 훔쳐 먹던 일들이 지금도 흐린 필름처럼 떠오른다.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그날로 떠났다. 내가 잠든 사이였다. 나는 밤새껏 울었고 외삼촌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업고 달래주었다. 큰외삼촌은 나보다 14세, 막내 삼촌은 10세가 많았다. 그들은 나의 어버이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공부를 잘하고 시를 쓰던 막내 삼촌은 공일이면 새를 보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사상계’ 애독자였는데 그가 모은 책들을 나에게 전수했으나 이사가 잦았던 나는 수년 전 그 책들을 정리하고 말았다.
나는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전쟁이 난 다음 해,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나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두 번 낙제를 했다. 입학 당시 내 동기로 14세 소녀도 있었다. 최초로 본 활동사진은 아홉 살 때 동사(洞社) 마당에서 본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들던 장면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던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57년, 부산 동래온천으로 이사를 했다. 우장춘 박사가 돌아가셨을 때 원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운구를 하고 온천장을 한 바퀴 돌았고 그때 행렬을 따라다녔던 것은 그분이 훌륭한 육종학자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관을 멘 오빠들이 잘 생기고 멋있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사회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댁은 동래였고 나는 종점인 온천장이라 가끔 같은 전차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반 아이들과 어울려 선생님 집엘 갔는데 딸이 넷이었다. 나는 대뜸 “기생을 맞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학생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살던 온천장엔 권번이 있었고 세 살던 집 다른 방에도 기생들이 살아 첩이나 씨받이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아들을 낳아 대접받는 기생들이 생각나서 그렇게 지껄인 것인데 선생님은 내 저능한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고 조용히 나무라셨다.
나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시험기간 동안 생물시험지 뒷장에는 또 만화 라이파이 여주인공 제비를 그려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생물 선생님은 나의 정신 감정을 주장했고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못생긴 데다 공부도 못하는 나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두둔하고 또 챙기셨을까?
중3 때, 5·16 군사 정변이 터졌다. 중2 때 담임,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교직원노동조합)원으로 잡혀가셨다. 잡혀가신 선생님들이 부산에서만도 수백 명이라 했고 그분들이 갇혀 있는 곳은 서면에 있는 태화극장 뒤였다.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여서 점심시간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철조망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았다고 학교로 돌아온 뒤 다른 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도에 그분 아드님을 만났다. 교노조 사건 뒤에 태어났다던 잘생긴 아들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내 얘기를 하셔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찌 아들에게까지 내 얘길 하셨고 또 만나보라고 하셨을까. 중학교 때 내가 했던 실언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에 와서는 김동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곁엔 우수하고 잘난 제자들이 많았다. 학생 스타들이 여럿이었고 한 해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된 천재도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열등생이었고 그럼에도 나는 재학생 작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장편을 써서 김동리 선생님에게 가져가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선생님 제자로선 수준 미달이란 것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책은 내고 싶고 출판사에서는 선생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데요.”
며칠 후 추천사 원고를 주시면서 “앞으론 단편을 많이 쓰면서 문장을 치밀하게 직조하는 공부를 해라”고 하셨다. 이때부터는 문예지로의 진입이 내 열렬한 소망이 되었고 한분순 선배가 문을 열어주어 간신히 꿈을 이룰 수 있었다.(한 선배,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대학 졸업 후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내 독서량은 대부분 교정을 보면서 채운 것들이다. 세계명작들, 종교와 사상에 대한 책들도 그때 읽었고 전에 본 것들을 수차례나 다시 본 것들도 많았다.
1971년 범우사에서 일할 때였다. 범우사는 ‘다리’라는 시사잡지사에 속한 출판사였고 간행은 주로 번역물로 하이데거, 융, 러셀, 칸트, 토인비, 문예물 등이었으며 더러는 시대진단 비평지도 출간했다. 이때 ‘상황’이라는 시사지 교정을 보았는데 내 무지로 몇 개의 오자를 내고 말았다. 그때 그 책을 주관하던 임헌영씨가 “오자가 하나도 없으면 읽을 때 지루하잖아요. 괜찮아요”하고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임헌영 선생은 지금도 내겐 자상한 선배님이다.
주어진 인생 뚜벅뚜벅 걷다
1972년 10월 17일, 경향신문사에 있던 임헌영씨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광화문으로 탱크가 들어오고 있다”, “쿠데타인 것 같으니 어서 피하라”고 말했다. 마침 주변에 김상현 의원 차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차로 몰려가서 유신선포에 대한 방송을 들었다. 윤형두 사장은 도피를 하면서 내게 중요 원고들을 옮길 것을 지시했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출간을 앞둔 원고와 서류 등을 챙긴 뒤 뒷길로 해서 귀가했다. 그 이후로는 살벌한 시기였다. 출판물은 전부 사전 검열을 했고 검열 장소는 시청이었다. 내가 가져간 교정본들은 거의 반 이상이 빨간 줄이 그어졌고 그게 귀찮아 나는 동서문화사로 직장을 옮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학동창 오정희가 이상문학상을 받던 날이었다. 그녀의 축하연은 다음 날 식당에서 열었는데 그때 모인 동창들은 그 충격 때문에 제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1980년, 제 5공화국이 들어섰다. 출판사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5, 6년 가까이 해오던 리라이팅(극본을 소설로 쓰는 일)도, 외주로 나오던 교정일도 다 끊겨 버렸다. 5월 말경이었다. 광주에서 여성회를 하던 홍희담(깃발을 쓴 소설가)씨가 올라와 광주항쟁 수배자 두 사람을 숨겨주면 매달 생활비를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돈도 받고 좋은 일도 하고, 그건 횡재였다. 더 행운이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실학과 사회, 역사는 물론 리얼리즘 공부도 했다. 1982년, 남영동 정보원으로부터 은닉에 대한 조사를 받긴 했지만 그건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2초쯤 지나간 소나기에 불과했다.
1982년 정신대 이름으로 징집된 위안부 이야기를 썼다. 남태평양 현지 상황까지 사실적으로 쓴 소설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고 이 또한 수배자들이 일러준 책 ‘정신대 실록’을 읽은 덕이다. 굳이 이 사실을 밝히는 까닭은 피해국 중에서도 위안부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나는 여러 나라에 초청되기도 했고, 1992년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있었던 ‘일제 만행사에 대한 규탄대회 겸 심포지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내가 발표한 내용은 미얀마 위안소와 직접 취재를 했던 필리핀 상황에 대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종국 선생님을 소개했다. 그분은 정신대로 징집된 위안부 기록을 찾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해서 관보 2만 장을 복사했고 신문 기사들을 필사했다. 정신대로 간 여성 20만 명 중에서 반 이상이 성노예로 배치된 실태는 그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그분인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추모박수를 보냈다. 4박 5일의 심포지엄이 끝난 후 모나시 대학에 초청을 받았고 일본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씨와는 시드니 대학에서 합동 강연도 했다. 오늘도 나는 빌고 있다. 할머님들의 상처가 봉합이라도 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1997년, 딸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때 나도 따라갔다. 성장한 아이와 함께 지낸 타국생활, 그 3년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행복의 결과는 가산이 모두 탕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그 또한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인 것을.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정신연령조차 낮았던 내가 참으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멋진 선후배를 얻었으며 대중소설가로 출발해서 본격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삼촌이 다른 책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 날 사랑하고 보호해주었던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로 잡혀갔다는 것, 범우사에서 일하면서 유신을 맞았던 일, 광주항쟁 수배자들을 숨겨주었던 것 등이다. 이데올로기나 사회비평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주어진 삶이 그랬다는 것, 그 덕에 여러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내 삶의 색채가 어떠했든 분명한 것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
그날 무너진 것은 국가시스템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였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멀쩡하던 한강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국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했던 10월을 맞아 21년 전 그날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1994년 10월 21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서울 전역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7시 40분을 약간 지난 시각,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발생했다.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의 중간지점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은 것. 다리를 지나던 여러 대의 차량도 함께 추락했다. 떨어져 내린 차량에는 등교 중인 학생과 출근 중인 직장인 등이 타고 있었다.
국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남아 있는 자료화면 속 현장의 모습은 처참하다. 내려앉은 교량 위로 찌그러진 버스와 승용차가 널려 있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끊어진 부분에는 철근이 흉측한 모습으로 구부러져 보는 이들을 섬뜩하게 했다. 아비규환의 현장 위로 눈물처럼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거짓말인 것만 같았던, 아니 거짓말이길 바랐던 뉴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복 이후 가장 불행한 사고 중 하나로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다리가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한편으로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성장일변도 대한민국의 그늘진 이면을 들춰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경찰청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최준영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팀장은 “정말이지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무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혼선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던 때였다.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무전을 누군가의 장난으로 의심했다.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해왔지만 이번은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근의 다른 근무자를 통해 확인한 후에야 그는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음을 실감했다고 했다.
총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했다. 24명은 16번 시내버스 승객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 1명이 포함돼 있었다. 하필이면 아침 등굣길에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범인은 대한민국... 안전 불감증이 부른 최악의 참사
성수대교는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9년 10월 개통됐다. 그 이전에 세워진 한강 다리와 달리 교량의 기능 외에 미적인 기준까지 고려한 첫 사례였다. 교량의 조형미를 높이려고 당시 국내에서는 파격적인 ‘트러스식 공법’으로 설계됐다. 시원한 경관, 입체교차로, 날렵한 곡선미는 당시 한강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개통된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성수대교가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수대교를 시공한 동아건설에는 새로운 공법에 대한 충분한 기술력이 없었다.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부실공사가 이뤄진 사실도 적발됐다.
붕괴 원인은 부실 용접과 설계였다.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철제구조물의 연결이음새 용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10㎜ 이상이어야 하는 용접두께도 8mm밖에 되지 않았다. 부식된 철제 구조물을 보수하지 않고 녹슨 부분만 페인트로 감추는 등 관리 부실도 드러났다. 안전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안일한 인식이 종합적으로 쌓여 빚어진 참사였다.
정부는 성수대교 안전에 무관심했다. 성수대교의 통행허용 한도는 32.4톤이었지만 40톤을 넘는 과적차량들이 제재조치 없이 지나다녔다. 1993년 동부간선도로 개통으로 교통량이 폭증했지만 서울시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성수대교 설계 당시의 하루 통행량은 8만 대 정도였지만, 붕괴 당시 하루 통행량은 그 두 배가 넘는 16만 대 이상이었다.
안전관리 국가적 전환 약속, 21년 지났지만
국민적 분노가 거세지자 이영덕 국무총리가 사임했고, 이원종 서울시장이 경질됐다. 사흘 뒤인 2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이뤄진 조치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신속한 대응이었다. 국민적 정서를 감안해 교량 건설과 안전관리 관련자들에게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정부는 건축물 안전에 대한 국가적 전환을 약속하고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한강 다리에 대한 일제점검을 실시해 당산철교, 광진교, 한남대교, 양화대교 등을 재시공하거나 전면보수했다. 제도적으로도 시설물안전 특별법이 제정됐고 부실공사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 시설물 안전관리를 전담하는 한국시설안전공단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부의 약속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대형 안전사고는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들의 경계심도 쉽게 희석됐다. 같은 달 충주호 유람선 화재가 발생했고, 이듬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 뒤로도 대구 지하철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형 안전사고가 이어졌다.
희미해지는 국민적 관심, 유족 아픔은 ‘진행형’
어느덧 21년이 지났다. 날벼락처럼 가족을 잃은 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을까. 몇몇 유족과 접촉했지만 이들은 사고와 관련한 인터뷰를 원치 않았다. 하나같이 돌아온 대답은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유족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이같이 전했다. “달라진 게 있나요? 앞으로도 사고가 일어나겠죠. 그리고 호들갑을 떨고 잊힐 겁니다. 연결해서 보면 사고는 그냥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요.”
희생자의 유지를 이어 세상에 등불을 밝힌 이들도 있다.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당시 21세)의 가족들이 승영씨의 생전 소원을 이뤄주려고 희생자 보상금 전액(2억5000만원)을 들여 만든 ‘승영장학회’는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도 해마다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사업 초기에는 원금을 운용한 이자수익으로 장학금을 지급해 왔지만 금리가 낮아지면서 원금을 까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서울교회 오성섭 집사(승영장학회 사무국장)는 “이대로라면 약 10~15년 정도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장학회 출신을 주축으로 기금을 만들어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성수대교 북단 인근에는 붕괴사고 희생자 유족들이 만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 옆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사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관리에 대한 의식을 높이겠다는 취지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자가 위령비를 찾았던 날에도 21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렸다. 그곳에서 위령비 부근을 오가는 시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