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하루살이와 비슷하다지만, 하루라도 온전한 기쁨으로 두근거리며 살기가 쉽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생활도 욕망도 가벼워지면 좋겠지만, 실상은 달라 정반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흔하다. 이럴 때 들솟는 게 변화에의 욕구이며, 시골살이를 하나의 활로로 모색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광주광역시에서 학원 강사로 살았던 강승호(60, ‘지리산과 하나 되기 농원’)의 귀농 역시 활로 찾기의 방편으로 결행되었다.
강승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로 귀농했다. 귀농의 직접적인 동기는 건강 문제였다고 한다. 그는 대입학원의 유능한 수학강사였다. 입시학원 강사란 피 말리는 직업이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혹처럼 붙이고 산다. 그럼에도 과속질주를 습으로 삼았고, 마침내 몸에 이상이 온 것이다.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동안 주력한 건 등산이었다. 백두대간 산행에 몰두하기도 했다. 산이 주는 좋은 에너지와 자연 생태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더라. 긍정적인 가치를 산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아예 산에서 살고 싶더군. 결국 아내의 동의를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처음의 구상은 간결했다. 조용한 산자락에 작은 집 하나 짓고 텃밭이나 일구며 한가하게 살 계획이었으니까. 일에 덜미 잡히지 않아도 좋을, 덜 벌고 덜 소비하는 산골 생활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 북돋아 진정한 만족을 누리고 싶었다. 단순 소박한 삶이 주는 행복을 원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딱히 일 없이 술렁술렁 텃밭이나 가꾸는 생활은 그의 적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단순한 생활이 어디 쉽던가. 채우기보다 어려운 게 비우기다. 일벌레로 살기보다 어려운 게 별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다. 게다가 강승호는 일을 거침없이 벌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적막한 산촌에 들어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백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강승호는 일을 도모하기로 작심하고 약초 농사에 뛰어들었다. 한결 야심만만하게 덤벼든 건 토종벌 농사였다. 하지만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치사율 90%에 달하는 전염병인 ‘낭충봉아부패병’의 기습으로 벌들이 대부분 괴사했던 것. 이렇게 초장부터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밤잠을 설치며 궁리하고 연구해 찾은 대안이 펜션 운영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최상의 무기에 속할 추진력을 발동했다. 초봄이면 와글와글 피어나는 산수유 노랑꽃 화신(花信)으로 세상의 겨울잠을 깨우는 산수유 마을 중에서도 가장 높고 수려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터를 사들여 펜션을 짓고 이사했다.
“펜션에 어울릴 땅을 마련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뒤져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하고 지주를 찾아 매입한 뒤엔 건축 허가 문제를 해결하느라 뛰어다닌 곳이 많았다. 길을 내기 위해 마을 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아낸다든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더라고.”
귀농해서 민박이나 펜션을 차리는 이들이 많지만 실패 사례가 흔하다. 당신의 펜션은 어떤가? 기대치가 있었을 텐데.
“순조롭게 돌아간다. 입지의 자연환경이 좋은 덕분이다. 보다시피 산 중턱에 자리해 조망부터 뛰어나다. 지리산의 풍치를 한눈에 만끽할 수 있는 자리로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얘기를 흔히 듣거든. 미디어에도 수차례 소개되면서 꽤 알려졌다.”
펜션 투숙객에게 인생을 배워
펜션의 성공 관건은 입지 여건에 달려 있다. 강승호는 썩 이상적인 자리를 잡았다. 터전의 저 아래로 높고 낮은 산들이 펼쳐지고, 골짜기로는 농가들이 올망졸망 들어앉아 정겹다. 그는 조경에도 공을 들였다. 널찍한 잔디 뜰과 정원수를 적절히 조합해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물도 있다. 하나는 벼락을 맞고 무 토막처럼 통째로 절묘하게 갈라진 벼락바위. 산 너머 어느 집에서 구해왔다는 이 바위 두 덩어리를 그는 열린 문처럼 배치해 펜션의 상징물로 삼았다. 지하수와 약수, 계곡물 세 가지 식수를 세 개의 수도꼭지를 통해 동시에 비교하며 맛볼 수 있는 샘터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강승호의 재주와 수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어떻게든 펜션 손님들의 흥미와 호감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고객의 뒤치다꺼리로 피곤해지기 쉬운 게 숙박업이다. 강승호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접근했다. 손님들과 요령껏 어울려 산중 생활의 무료감을 달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거다.
“도시와 달라 시골에선 사람들과 교유할 기회가 드물다.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투숙객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귀농 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숙박업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단지 수익 목적으로만 차린 펜션이 아니라는 얘기다.”
민박집을 하다 평생의 벗을 얻는 경우도 있더라.
“손님들의 요구와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는 않다. 주말 밤마다 술 시중꾼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웃음) 그러나 포용해서 함께 어울리다 보면 누구나 마음을 연다. 감동적인 사연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럴 때면 나는 인생을 배운다.”
이를테면 어떤 사연을?
“꽉 찬 예약으로 공실이 없던 어느 날, 어떤 이가 방을 하나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 예약 손님의 양해를 구해 방을 마련해줬다. 알고 보니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더군. 그날이 아내의 환갑날이라며 ‘오늘을 위해 2년 전부터 색소폰을 배웠다’는 게 아닌가. 색소폰을 연주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날 밤 그는 가수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연주했다.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토록 뜨거운 부부애라니! 수십 년을 함께 살아도 부부 사이에 빙하가 흐를 수 있다.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서는 부부간의 유대가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무조건 아내 말을 따르면 탈 날 게 없다. 남자보다 매사에 현명한 게 여자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강승호는 지역에서 잘 알려진 귀농인이다. 이름 있는 기관이 주는 상도 받았다. 유기농으로 지은 산수유를 가공해 현대백화점 명인명촌관에 납품도 한다. 물정도 기술도 모르는 초심자로 귀농했지만 거둔 성과가 한둘이 아니다. 아내 이경영(54)의 조력이 있어 가능했던 성적이다. 처음 귀농 제안을 했을 때 아내는 망설였다. 그러나 긴 고민 없이 동의하더란다. ‘그토록 원하는 귀농이라면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그 한마디 던지며.
‘분산 전략’을 구사하다
강승호에겐 할 일이 많고 많다. 벌여놓은 일이 여러 개라 몸이 닳도록 뛰어야 한다. 펜션에 쏟아부은 땀과 정성도 수북할 테지만, 갖가지 약용작물을 기르고, 찻집을 운영하고, 산수유마을학교를 이끌며, 산촌 유학을 테마로 한 마을사업까지 주도한다. 일복이 터졌다. 열심히 몸 놀려 일하는 것만이 유일한 비법이라는 듯 동으로 뛰고 서로 달린다. 여하튼 그의 귀농은 탕탕 순항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단다.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다. 순탄하게 흘러온 게 아니다. 농산물을 생산해 그대로 파는 1차 농업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가공 판매와 체험 교육까지 접목한 6차 농업을 지향해야 한다. 이게 만만한 일이겠나? 가공 농가가 타산을 맞출 확률은 10% 미만이다.”
귀농 전에 농업 교육은 받았나?
“아니다. 귀농을 하고 나서야 사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거든. 뒤늦게 부지런히 기관을 쫓아다니며 배웠다. 숲 해설사, 문화 해설사 등 자격증도 여섯 가지나 땄다. 이렇게 나름대로 분발해 자리를 잡은 편이지만 경제적 애환도 있었다. 그로 인해 아내와 자식들을 고생시켰다. 이건 귀농 이후 내 삶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일의 규모와 방향을 과도하게 설정한 걸까?
“농촌에 와서 안타까운 건 주민들의 열악한 현실이었다. 나만 편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뭔가 작으나마 주민들에게도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거다. 귀촌이나 귀농을 해서 이웃들이야 어떻든 나만 즐겁게 살면 된다는 생각, 살다가 정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지만 이는 무모하다. 외지인들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지는 건 원주민 농부들일 뿐이다.”
똑똑하고 이타적인 귀농인이 나서서 마을 공동사업을 추진하더라도 벽에 부닥쳐 좌초하는 사례가 많다. 아예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라 조언하는 이들도 있더군.
“그 대목이 참 어렵다. 원주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가 만만치 않아서다. 합리성과 효용성이 명백한 경우에도 색안경부터 쓰는 이들이 있다. 나는 현재 산촌 유학 관련 사회적 기업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으로부터 이미 승인도 받았다. 그러나 부지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주민들이 반대해서지. 귀농인이 선의를 가지고 앞장서도 외지인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이랄까, 원주민들에겐 그런 게 있어 난처하다. 차라리 나서지 않는 게 현명한 처신이라는 견해는 어쩌면 탁견이다.”
귀농을 고려하는 사람들 중엔 ‘아주 작은 농사’로 ‘소확행’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소규모 농사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어 쓸 수 있을까?
“흠, 가능하다. 작물을 길러 가족이 먹고 남는 걸 수시로 로컬 매장에 가져가 손수 팔면 된다. SNS를 통한 직거래도 유망하다. 이 문제엔 관이 나서야 한다. 소규모 귀농 농가 지원을 위한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
강승호는 10여 종의 명함을 지니고 산다. 햐, 그는 문어발식 농업의 선수? 그게 아니란다. 분산 전략이 아니고선 가망성이 낮아 다종다양한 일을 펼쳤다. 지독한 승부욕이 그를 몰아치는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표는 조신하다. “결론은 비우고 살기다!” 무욕으로 진정한 행복을 맛보겠다는 얘기다.
강승호 씨가 주는 귀촌 Tip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함께 귀농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민보다 정착하기 ㅁ더 힘든 게 귀농임을 명심하자.
•원주민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극구 피하라.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게 상책이다.
•작물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자.
•종묘상이나 묘목 상인의 얄팍한 상술에 현혹되지 마라.
•농업기관이 주관하는 농업 교육이나 영농 상담 창구를 적극 활용하자.
1991년 한국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동계 등정에 성공했으며, 이후 가셔브룸 2봉을 포함한 여러 고봉을 등정했다. 베테랑 산악인 박경이(57)는 교사, 국제 산악스키 심판, 산악전문지 편집장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국립산악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활동 중이다. 산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를 만나서, 그간의 여정과 더불어 알피니즘(Alpinism)의 가치와 매력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1985년 대학교 산악부를 시작으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악인으로 살아왔다. 최근엔 그간의 세월을 정리하며 책 ‘영혼을 품다, 히말라야’를 출간했다.
“산악인으로 살았던 시간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직접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고산 등반에 도전했던 동료에 관한 기록, 고산 등반의 의미와 산에서의 죽음의 가치에 대해 논픽션처럼 담담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더불어 이 책이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고산 트레킹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유용한 지침서가 되기를 바랐다. 마스크 없이 트레킹하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얼마 전 김홍빈 대장은 히말라야의 브로드피크 등반 후 실종되는 사고를 당했다. 책의 첫 장에도 나오지만, 추억을 나눈 동료 중에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신 분이 많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김홍빈 대장과 밤새도록 인터뷰를 했었고, 내밀한 얘기를 나눌 정도로 많이 친했다. 동료를 잃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프다. 다만 등반가가 산에서 죽는 것은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글을 쓰다가 책상에 앉아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작가의 숭고함 같은 것이 아닐까? 함께 늙어갈 수 없어서 슬프지만, 이제는 히말라야가 된 그들의 영혼이 부디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들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그리움을 품고 있다.”
어쩌다 산악인의 운명
친척의 권유로 성적에 맞춰서 교대에 입학했는데, 우연히 들어간 산악부는 삶의 이정표를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어쩌다 산악인이 됐지만, 뒤돌아보니 그 선택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악부라고 해서 계곡 가서 기타 치고 노는 동아리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부원으로 처음 한 것이 암벽등반이었다. 도봉산의 오봉에 올라가 암벽등반을 처음 했는데, 정말로 아찔했다. 선배들은 가느다란 줄 하나를 믿고 올라오라고 하는데 오금이 절로 저렸다. 가뜩이나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엉엉 울다가 내려왔다. 이후에 선배들이 ‘쟤는 곧 나가겠다’고 했지만 오기가 생겨 이 악물고 버텼다. 그때 신입생으로 13명이 들어왔는데, 2학년 때는 나 포함 3명이 남았다. 당시에 선배들한테 끈기와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4학년 때는 한국대학산악연맹 부회장을 맡아서 백두대간 종주를 기획했다.
“84학번 선배들이 백두대간과 조선 시대 지리서 ‘산경표’ 연구자인 이우영 선생님과 백두대간 종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만 선배들이 끝내지 못해서 자연스럽게 바로 아래 학번 집행부였던 우리가 이어나갔다. 백두대간 개념이 생소하던 때라서, 집행부가 약 4달 동안 지도 수십 장을 강의실에 깔아놓고 ‘산경표’를 바탕으로 지도의 능선을 잇는 작업을 했다. 지금이야 백두대간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때는 정보도 없고 개인이나 산악회 차원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백두대간을 15구간으로 나눈 후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지도를 들고 7월에 4박 5일간의 종주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GPS 기술이 발달해서 문제가 없겠지만, 그때는 개념조차 없을 때라 상당히 열악했을 것 같은데 실제론 어땠을까?
“당시 이화령에서 속리산까지 내려가는 구간의 대장이었다. 지도가 있어도 구간의 지형이 불확실한 탓에 나무 위에 올라가서 지형을 살펴봤다. 여름이라 물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덤불 지대를 지나다가 후배들이 배낭에 달아놓은 물통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찾지 못한 채 근처에 있는 오디로 목을 축였다. 구간에서 잠시 벗어나 샘이 있을 것 같은 골짜기로 내려가서 물을 채워오기도 했다. 당시에 수월하게 종주한 팀이 없었다. 종주 후에 우리가 쓴 보고서가 발표되고, 1990년대부터 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어났다.”
언니와 형, 그리고 가족을 위해
그녀는 건장한 청년들도 올라가면 쓰러진다는 고봉을 두 번이나 올랐다. 첫 원정은 아마다블람(6856m)이었다.
“첫 원정은 제일 좋아하던 4학년 언니와 84학번 형(선배) 때문이었다. 둘과 정말 친했다. 언니는 나랑 통하는 구석이 많았고, 나중에 꼭 히말라야에 같이 가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형은 에베레스트에서, 언니는 설악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술만 먹으면 둘이 자꾸 눈에 아른거려서 매일 울었다. 꿈에도 자주 나왔다. 등반을 통해 그들의 못다 이룬 꿈과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정상에 올랐을 때, 꼭 형과 언니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후엔 그들이 꿈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언니와 형은 히말라야가 됐다.”
신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히말라야의 고봉, 그곳에 오르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두 번째 원정은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가셔브룸 2봉(8035m)으로 갔는데, 정상을 앞두고 얼음 화살이 온몸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잘려도 정상에 꼭 오르고 싶었다. 학교의 졸업생 대표로 왔다는 책임감, 가족의 희생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수 없었다. 흔히 고산에서는 정신을 잃는다고 하는데,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정상을 찍고 무사히 귀환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8000m가 됐다.
“가셔브룸 2봉은 결혼 후 다녀온 원정이었는데, 당시 위성 전화로 아이들과 통화할 때 매번 눈물이 날 정도로 보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공항에서 아이들을 마주했는데,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안 놓더라. 엄마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것 같았다. 만일 내가 혹시 잘못됐을 때 자식들에게 남을 상처를 생각하니 맘이 아팠다. 그때부터는 낮고 안전한 구간의 산으로 다녔다. 산악인이기 전에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산과 사람
8000m를 대신하여 낮고 짧은 구간의 산을 다녔고,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겨울마다 스키를 탔다. 공교롭게도 산악스키 선수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한창 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스키를 탈 때가 있었다. 우연히 산악계 선배가 그 모습을 보고 산악스키 아시안컵 대회를 권유했다. 등산과 스키를 워낙 좋아했는데, 둘 다 할 수 있는 장르가 산악스키더라. 당시 대중적인 스포츠가 아니라서 장비를 어렵게 구했다. 발 사이즈보다 큰 부츠라 경기 내내 물집으로 고생했지만, 3위란 기록을 세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 산악스키 심판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후엔 실업팀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가르치는 게 천성인 것 같다.(웃음) 내 자식에게는 소고기를 못 사줘도 선수들과는 자주 소고기 회식을 할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아웃도어학과 교수, 산악잡지 편집장, 산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는데, 이렇게 달려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산에서 단련하고 쌓아온 경험과 교육자로서의 DNA가 많은 도움을 줬다. 교사를 그만둔 후 운명처럼 교수 제의가 왔는데, 그간 교사와 산악인으로 쌓은 내공 덕분에 무사히 할 수 있었다. 다만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제자들과 학교에 미안함이 크다. 편집장 시절엔 전문성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했고, 학예사로서는 산악인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자칫하면 사라질 뻔했던 유물을 박물관 수장고로 가져왔다. 이 모든 건 산을 좋아했기에 가능했지만, 무엇보다 산을 통해 연을 맺은 이들의 격려와 신뢰 덕분이었다. 나의 쓰임새를 알아봐 준 이들에게 항상 감사한 맘으로 살고 있다. 그들에게 마음의 빚이 많다.”
현재 그녀가 일하고 있는 국립산악박물관은 2014년에 산악 문화의 대중화를 목표로 개관했다. 매년 1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으며, 유물 수집 및 보존, 연구와 교육, 전시 및 학술 업무 등을 통해 산악 문화의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산악 문화의 역사를 온몸으로 습득한 그녀는 편집장 이력과 교수 시절에 진행했던 전시와 학술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학예 연구에 매진 중이다.
경이로운 삶
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성 위주의 문화 때문에 여성 산악인으로서 힘들었던 경험도 있었을 터.
“대학 시절엔 여자들도 함께 등반했는데, 주위에서 여자들은 졸업하면 나오지 말고 집에서 애들 잘 키우라고 그랬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기와 승부욕이 생겨서, 오히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산에 다녔다. 실제로 언니들은 다 결혼 후엔 등반을 안 했다. 나만 아직 유일하게 등반을 한다. 예전에 산 관련 일을 할 때 여자가 업무 분담과 지시를 한다고 말을 안 듣는 남자 분들이 더러 있었다. 결국 그들의 일도 내 몫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꿋꿋이 버텼다. 언제나 ‘여자’가 아니라 동등한 ‘산악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알피니스트로서 30년 이상 산에 올랐는데, 산은 그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산 덕분에 경이로운 삶을 살았다. 등반은 한계를 넘기 위한 행위이자 몰입도가 높은 스포츠다. 한계가 높을수록 도전하는 짜릿함이 크다. 그것을 극복했을 때 생기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됐다. 올림픽 메달처럼 외적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 보상이 크다. 도전을 완수하는 과정, 이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일상에서는 평범한 아줌마 박경이라 할지라도, 산에 올라서 정상에 서는 순간 ‘산악인 박경이’로서 깃발을 꽂는 것이다. 한계, 몰입, 성취. 이 3박자가 내 삶에 큰 행복이었다.”
끝으로 트레킹 입문자에 대한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고산 트레킹을 꿈꾸는 중년이 많은데 국내에서도 준비할 수 있다. 겨울의 설악산이나 한라산은 히말라야에 버금가는 강추위와 거친 환경을 자랑한다. 실제로 그곳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낮더라도 그런 산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론 마스크가 사라지는 세상이 오면, 가족과 함께 트레킹을 떠나는 것이 소박한 목표다. 공적으로는 여성 산악인의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관련된 내용을 책으로 엮어서, 역사에 가려진 여성 산악인을 조명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열등감에서 나온 오기였다”라고 말했다. 여자, 작은 체구, 고소공포증. 핸디캡으로부터 생긴 열등감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패배감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 오기를 꾸준한 실천으로 옮겼고, 목표를 이루겠다는 집념과 끈기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알피니스트의 경험은 그렇게 그녀의 삶을 바꿨다.
진정한 알피니즘의 조건은 “미터가 아니라 태도”라며 “결과보다는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산악인의 전부가 아니다. 실전을 위해서 훈련을 꾸준하게 하고, 극한의 순간일지라도 동료와의 협동심을 발휘해야 비로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산이 좋아도, 신뢰할 수 있는 동료와 연습을 통해 쌓은 내공이 없다면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그녀의 경이로운 삶은 좋아하는 산과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과정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결국 유종의 미는 과정의 아름다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아름다운 과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멋지게 완수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외출이나 퇴근하고 집으로 가야 하는 순간,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고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제약이 발목을 잡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떠나기엔 체력과 힘에 부쳐서, 가족이나 반려동물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등등.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외출이나 퇴근 후 지친 시니어의 몸과 마음을 달래줄, 집에서도 여행온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매일 보는 창밖 풍경 지겹다면, 윈도우 스왑(window swap)
‘윈도우 스왑’(window swap)은 지구촌 곳곳에 사는 누군가의 창문 밖 풍경을 약 5~10분간 영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사이트다. 지난해 여름 개설된 이 사이트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한 부부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지인이 매일 보는 창밖 풍경이 지겹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듣고 고안해냈다.
해당 사이트에 접속해 메인 페이지 내 ‘세계 어딘가에서 새 창 열기’ 버튼을 누르면 랜덤으로 세계 곳곳의 창문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창을 새로고침하거나 버튼을 누르면 다른 나라, 새로운 지역의 창밖을 감상할 수 있다. 컴퓨터나 모바일 둘 다 접속할 수 있으며, 큰 화면에 띄워놓고 소리까지 켠다면 더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창문 밖 풍경은 사이트 전용 이메일로 보내진 영상들로 채워진다. 영상 좌측 상단에 보낸 이의 이름이 나와 있고, 우측 상단에는 나라와 영상 위치가 소개된다.
미국과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 세계 각지에서 보낸 해질녘 노을이 비치는 바닷가, 불 켜진 도심의 야경, 정원에서 낮잠을 자는 반려동물,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등 다양한 영상이 코로나19로 잊고 지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것이다.
시원한 계곡과 기차 소리 그립다면…한국관광공사 힐링사운드 여행 ASMR
화면 보는 것조차 지친다면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에서는 힐링 귀캉스를 위한 여행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콘텐츠는 흠뻑 노는 물놀이 여행, 맑고 푸른 산 여행, 체험이 있는 로컬 여행 등 세 종류 12가지의 소리로 구성돼 있다. 거제 학동흑진주몽돌해변의 파도 소리, 평창 월정사의 은은한 풍경 소리, 삼척 하이원추추파크의 폐역을 달리는 증기기관차 소리, 남해 상상양떼목장의 양떼 우는 소리 등 클릭 한 번으로 산과 바다, 초원과 계곡을 오갈 수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다양한 여행지의 생생한 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편하게 힐링하고픈 시니어에게 안성맞춤이다.
여름의 막바지인 지금 이 순간 겨울의 정취가 그리울 시니어를 위한 맞춤형 ASMR 콘텐츠도 있다. ‘겨울을 느껴봐! 힐링사운드 여행’에서는 철원 한탄강에 부는 매서운 강바람 소리, 충주 목계솔밭에서 모닥불 타는 소리, 포천 산정호수에서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얼음 스케이트 타는 소리 등 시니어의 향수를 자극할 다양한 소리가 준비돼 있다. 컴퓨터와 모바일 둘 다 접속할 수 있다. 편하게 누워 그리운 곳의 소리를 ASMR로 즐겨보자.
대세는 우주여행? 방구석에서 떠나는 우주여행 ‘Space Videos’
색다른 힐링여행을 원한다면 아예 지구 밖으로 떠나보자. 직접 떠나는 우주여행은 아직 요원하지만 유튜브 채널 ‘우주영상(Space Videos)’과 함께라면 우주여행을 떠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1200여 개의 우주 동영상을 보유한 이 채널에서는 우주정거장에서 실시간으로 촬영한 지구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이 송출하는 실시간 영상을 24시간 내내 끊김 없이 제공한다.
이 외에도 알프스 산맥, 안데스 산지 등 세계 각지의 고원지대를 우주에서 바라본 모습, 초고화질로 즐기는 극지방의 오로라, 날짜별로 달라지는 달의 모습을 담은 영상 등 다양한 영상이 업로드 돼 있다. 평소 우주에 관심이 많았던 시니어라면 현재 우주정거장이 지구의 어느 곳을 지나고 있는지, 검은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감상하는 재미에 빠질 수 있다. 어두운 방안에서 영상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실제로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나직이 숨을 고르고는 붓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왠지 붓끝이 가볍다. 이제 한 획만 쓰면 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긋는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붓끝이 전서체의 획을 마무리했다. 나는 황색 부적지에서 붓을 떼고 지긋이 글씨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 마리의 용이 화목하게 깃들어 있는 모양새다. 마주 보는 획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게다가 단아한 글씨와 잡귀를 물리치는 담백한 운필로 금방이라도 집안 가득 화평한 꽃 기운이 생동할 것만 같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붓을 옆에 나란히 놓았다.
보통 부적符籍이라 함은 대개 한 해의 액厄을 피하거나 벽사壁邪와 기복祈福의 민간 신앙을 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글씨체를 통해 무병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긴 부적을 주로 찾는다. 적당한 먹의 농담과 담백한 운필. 그리고 기운 생동한 붓질과 여백 등이 조화롭게 그려진 부적을 높이 쳐 준다. 가게 진열대에 인쇄소에서 찍어낸 부적이 다발로 있지만 단골 손님들은 내가 직접 쓴 부적을 원한다. 내가 직접 써서 파는 것은 한 장에 십만 원 정도를 받는다. 부적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장에 백만 원까지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경지의 부적은 가로세로 획마다 금석기金石氣가 있으며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다양한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보다 한술 더 뜬 최고 경지에 이른 부적은 완연한 획의 흐름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감지되며 파격적인 데다 변화무쌍하고 괴기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부적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쓴다. 부적을 쓰는 날은 보통 손 없는 날을 잡는다. 부적을 쓸 때는 신령한 공력이 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주문한 손님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린 뒤 경건하게 붓을 든다.
나는 진열장 겸 책상으로 쓰는 계산대에 앉아 방금 쓴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색종이 위에 마르지 않는 붉은 글씨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부적지로 사용하는 종이는 홰나무로 만든 괴황지다. 크기는 가로 1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다. 붉은 먹물은 흔한 물감이 아니라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 특별한 안료이다. 그것의 원료는 붉은색을 띠는 광석에서 채굴한다. 원료를 작은 용기에 넣고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부적유符籍油로는 참기름이나 백설탕을 녹인 액체를 가루와 섞으면 부적 특유의 붉은 색깔과 특유의 향을 풍기는데 이것을 경면주사라 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벽시계는 한겨울의 나른한 오후를 가리키고 있다. 가게 중앙에는 활활 타는 전기난로가 썰렁한 가게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는 무속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제의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맞은편 붙박이 진열장에는 망자들의 넋을 달래줄 영가 옷이 촘촘히 쌓여있고 그 옆에는 무속인들이 굿할 때 쓰는 무신도 대신방울 오방기 장군칼 향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무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등 뒤로는 기도할 때 쓰는 등초 무지개초와 목향 금난향 궁연향 등 각종 향과 초가 칸칸마다 들어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실내에 놓인 간이 탁자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장판을 씌운 자그마한 작업용 탁자다. 무속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탁자에 놓으면 그것들을 큰 보자기로 싸서 묶는 곳이다. 그들이 한 번씩 가게에 들러 굿판에 쓸 제의 용품을 고르면 보통 서너 보따리가 넘을 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인, 하면 무당이라 하여 천시하는데 정작 그들의 신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령님을 섬긴다. 신령님을 무가에서는 보통 몸주라 부르는데, 그들은 몸주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영매자靈媒者이기 때문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부렸다. 하늘이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팔짱을 낀 연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걸어왔다. 세련된 차림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의 어깨엔 얼음 가루가 묻은 스케이트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디 스케이트장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눈길을 당겨 부적을 봤다. 부적이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부적을 조심히 집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지금은 명절 전이어서 손님이 뜸한 편이다. 설이 지나면 한해의 액땜이나 복을 바라는 부적 주문이 들어오고 굿판도 자주 열릴 것이다. 내가 부적을 쓰게 된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부적을 찾는 손님마다 직접 손으로 쓴 걸 원하기에 오빠를 통해 부적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팔리던 것이 지금은 소문이 좋게 돌아 단골로 내 부적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쨍그렁, 하고 울렸다. 출입문 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던 연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언니, 우리가요, 만난 지 꼭 백 일째거든요. 그래서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을 찾는데, 어떤 게 있어요?”
“그러세요? 축하드려요.”
나는 현대적으로 고안된 액세서리 부적 용품이 걸려 있는 매대로 그들을 안내한다. 진열대에는 갖가지 액세서리 부적 용품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것저것 가늠해보다 그중 하나를 고른다.
“언니, 이걸로 할게요.”
그들이 고른 것은 나비 문양의 매듭 핸드폰 줄이다. 날개 사이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옴(범어)자가 새겨져 있다. 옴이란 길상의 뜻을 지닌다. 전통 문양인 나비 그림에 상감기법을 적용한 앙증맞은 부적이다.
“나비 문양이네요. 나비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상징한대요. 게다가 사이좋은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 고른 거네요, 호호.”
풋풋한 연인들이 싱그러운 웃음을 떨어뜨려 놓고 나가자 마음 한곳이 공허해졌다. 나는 콤팩디스크를 켰다. 오카리나의 잔잔한 소리가 가게 안을 흘렀다.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듣는 음악이다. 나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소리에 잠겨 들었다. 짙고 푸른 숲이 보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한 저녁을 먹고 달빛 맑은 산중에서 도란도란 자연과 대화하는 소리. 때로는 별빛 아래에 앉은 외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 마냥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부었다. 계산대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집안일 외엔 다른 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던 내가 10년 전에 불교용품점을 차리게 된 까닭은 불의의 화재 때문이다. 그 화재로 인해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을 빼앗아간 그 화마의 기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어느 한켠에는 여전히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뚜렷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내 곁에 존재하는 듯 그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빼앗아가 버린 그 악몽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동차 딜러였던 남편은 여느 날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 다려놓은 하얀 와이셔츠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는 셋집 빌라 이 층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남편은 남보다 항상 먼저 출근을 했다. 또한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남편은 동기들보다도 먼저 승진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잠시 뒤 남편이 투덜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자가용 바퀴가 펑크 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씨가 풀렸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여서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한 겹 더 입혀주며 잘 다녀와요, 라고 하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라고.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후에 청소를 하며 TV를 켜는데,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오전 9시 경 ㅇㅇ역 전철 내에서 50대 남성이 플라스틱 통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객실 내에 던져 차량 내부를 완전히 전소시켰다는 뉴스였다.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ㅇㅇ역은 남편이 종종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할 때 이용하는 전철역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범인의 방화시간과 남편의 출근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9시 경이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은 보통 회사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화마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직업상 외근이 잦은 업무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줄곧 들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더니 겨우 연결이 되었다.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사모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과장님이 9시 경에 ㅇㅇ역 방향으로 외근을 나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지금 연락이 안 돼...‘ 나는 저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철 화재는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남편의 시신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오열과 통곡을 하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빙의 상태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넋을 놓고 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꿈속이든 현실이든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할 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마음 졸이며 봤던 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저릿하게 관람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몇 년 후 내 얘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을 잃은 그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무렵. 친오빠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이사한 뒤 ’종로불교사‘라는 가게를 열었다. 친오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불교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후로 나는 남편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다. 행여 힘든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이 나약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천나무에도 조용히 눈이 쌓여갔다. 붉게 물든 채로 말라버린 남천나무 이파리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다. 나는 시선을 당겨 계산대 끝에 놓인 모래시계를 발견했다. 유리로 된 호리병 모양의 입구가 위아래로 마주 보게 붙어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들어있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자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모래 알갱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쌓인다.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 5년쯤 후에 문득 내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평소 친한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다. 언젠가 그 남자와 애들이랑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기념품이다. 피차 서로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어서 추억이 깃든 모래시계를 굳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초혼일 때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고, 재혼일 경우에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던가. 만약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지금처럼 혼자의 삶을 선택하게 될까. 지혜롭게 사랑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운명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바꾸기 나름일까. 여전히 나는 홀로서기라는 무거운 숙제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그 남자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은혜 씨를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도 몇 년 전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첫인상에 호감이 갔다.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남자가 모 문예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축하를 건넸다. 그날 밤 우리는 수상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남자는 감격하며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그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인 데 반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은근히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면 낯선 남자에게 엄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 날이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어느 공원에 나들이 가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를 뿌렸는데 자꾸 앞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서 뿌예졌다. 아직 새 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어떻게 성에를 제거하는지를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자는 차량 조작법을 몰라 당황하던 터라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가끔씩 남자를 만나는 동안 유독 예민해진 아들이 은근히 속을 끓였다. 어느 날은 밥을 먹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는가 하면 예전에 안 하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한편으로는 안 되어서 하루는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눴다.
“엄마, 그 아저씨랑 함께 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나, 그 아저씨 싫어.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마, 그 아저씨랑 살지 마. 알았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설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아무하고도 안 살아. 우리 아들하고만 살 거야.”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날은 잠시 놀러왔던 남자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거실에서 깜박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온 아들이 그걸 보고는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터라 마침 잠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발로 밟아버렸다. 남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너무 황당하고 화가났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아이로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빼앗아가는 남자가 오죽 미웠으면 그랬겠는가, 싶기도 했다. 남자는 어린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해서는 그날 이후로 발길도 뜸하다가 자동차를 돌려주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남자도 자신의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감당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남자와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 최근에 그 남자로부터 시집이 배달되었다. 등단 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이 거의 다 흘러내릴쯤 유리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궁 보살이다. 보살은 올해 쉰 줄로 머리가 벌써 반백이다.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쪘다. 굿이 있는 날이면 가게에는 가끔씩 들렀다. 그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가격을 흥정할 때도 고갯짓으로 거의 다 하곤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쉽게 속내를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될 때도 필요한 말이 끝나면 도로 입이 닫힌다. 나는 예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살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보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에 앉았다. 그날따라 보살은 더욱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차를 타서 보살에게 건네고 곁에 앉았다. 볼륨을 줄인 오카리나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히 흐르고 있다. 보살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입에 댔다가 뗐다.
“부적이나 한 장 받을까 하고….”
“부적이라면 보살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무속인들에게 부적은 필수여서 대개가 다 직접 써서 판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내게 부적을 써 달라니.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적이라면 신통력이 있는 무속인들의 부적을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무속인 중에도 세습무인 숙무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있는데, 특히 강신무의 부적이 더 영험하다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천궁보살도 내 짐작으론 강신무降神巫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어느 손님이 천궁보살한테 부적을 받은 거라면서 쓴 지 오래된 부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흔히 보는 부적이 아니라 자동 기술된 검은색 글씨였다.
“나, 부적 안 쓰네.”
“아니, 부적을 안 쓰다니요?”
“…….”
“아무렴, 제가 쓴 부적보다야 보살님이 쓴 부적이 훨씬 더 영험하지 않아요.”
“영험은 무슨...우리 집 영감이 엊그제 죽었네. 그래서 저승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부적 보시나 하려고.”
“그렇다면 영감님을 위해서 더욱 부적을 쓰셔야죠.”
“급살 맞을 냥반….”
보살은 퀭하게 들어간 눈언저리를 비비며 물기를 닦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어지간히 한 것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보살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 같다. 어쩌면 보살의 마음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처럼 한없이 쓸쓸하리라. 남편이 떠난 이후에 내게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남편이 손짓하는 듯한 환영. 꿈속을 찾아온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면 문득 혼자란 생각에 하염없이 베개를 적시던 눈물. 내 안에 간직된 남편이라는 슬픈 단어. 신의 시샘을 받은 것일까. 남편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려고 내게 많은 사랑을 안겨주었는지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게 결혼한 만큼 남편은 나를 더욱 아껴주었지. 그런 남편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온실 식물처럼 살았다.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는 게 취미인 듯, 바다로 가서 개펄을 파헤치거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 토끼풀이 수북이 우거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잎크로버를 찾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한 잎을 찾자 남편도 곧이어 찾았다. 그리고는 네잎크로버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행운이 줄줄이 오려나 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했던 시간들. 남편은 발견한 네잎크로버를 행운의 부적이라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실내를 흐르던 오카리나 멜로디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살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생전에 보살님한테 잘못한 게 많으신가 보네요?”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지. 불쌍하기도 하고….”
목이 타는 듯 보살은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가 길게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를 잃은 반백의 머리가 빗질을 자주 하지 않아서 부스스 일어나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살이 부적을 쓰지 않을까. 보통 무속인들은 굿이 없을 때는 사주를 봐주거나 부적을 써서 생업을 이어간다. 더러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기도 하지만. 보살은 찻잔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목청을 다듬었다.
“우리 집 냥반이 젊었을 적부터 내 속께나 썩였지. 아들을 하나 낳고 둘째를 가지려는데 어떤 영문인지 들어서지가 않더구먼. 그래서 외아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키웠네. 그런데 원래 난봉기질이 있던 냥반이 슬슬 바람을 피우더란 말일세. 그래서 바람기를 잡으려고 점쟁이 집에 가서 부부금슬이 좋아지는 애정 부적을 샀네. 부적은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이 있잖은가. 그래서 두 장을 받아서는 한 장은 꼭 접어서 영감 바지춤에 몰래 숨겨놓고 또 한 장은 베개 속에 넣었지. 그런데 부적이 효험이 없는지 이 냥반의 바람기는 갈수록 심해지더구먼. 그래서 다음번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비방을 물어봤네. 남편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는 여우자궁 만큼 좋은 부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요새 살아있는 여우도 보기 힘든데 어디서 여우자궁을 구하냐니까. 다 구하는 수가 있다며 알려주데.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 몰래 사가지고 들어온다는구먼. 그래서 얻기 힘든 여우자궁을 하나 얻지 않았겠나. 그리고는 그것을 내 속옷에 몰래 숨기고 있었지. 그러고 한 며칠 지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냥반의 바람기가 수그러들더란 말일세. 집에도 곧장 들어오고 사업차 출장 간다는 핑계도 줄어들고 말이지. 그게 정말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람기는 없어졌네.”
“아휴, 보살님. 사내들은 젊을 적에 한 번씩 다 바람을 피운다잖아요.”
남편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한번은 빨래를 하려고 남편 바지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하나 나왔다. 업무적인 메모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메모 내용이 아니라 글이 적힌 메모지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메모지가 아니고 하트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저녁에 퇴근하자 대뜸 당신, 어디 숨겨놓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뜨악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으며, 당연히 있지. 여기 당신, 하고는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이 뭔가 숨긴다 싶어 감추고 있던 메모지를 얼굴에 디밀었다. 메모지를 본 남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아, 그거! 하면서 고백을 했다. 며칠 전 출장길에 우연히 결혼 전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질 때 여자가 남편에게 메모지를 건네준 거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딴 메모지를 받지 말라며 못을 박고는 씩씩댔던 기억이 났다.
보살은 눈이 약간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비비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일별했다. 어젯밤에 잠을 옳게 못 잤는지 눈동자도 붉게 번져있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붓고는,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이 냥반의 바람기도 좀 잠잠해지고 사업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나버렸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다니는데, 철로에서 놀고 있던 외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었어. 부도난 이후로 이 냥반은 도망다니느라 기별도 없고, 외아들은 죽고. 나는 실성하다시피 해서 사는 걸 작파했지. 그러다가 종종 부적을 받으러 드나들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 넋이나 달래주려고 굿을 부탁했어. 그리고 굿판이 한창 열리고 연신 비나리를 하는데 천궁에서 온 신령神靈이 그예 턱 하니 내 몸주로 들어와 버렸다네. 그때가 아마 20여 년 전이었지.”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늘 입을 닫고 살아가는 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게다가 가게에 올 때마다 늘 추레한 옷차림. 영감님의 행방불명과 외동 아들의 불의의 사고. 아마 보살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중한 자식을 잃고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저 앙상한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한을 담고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날이 어쩌면 죽는 일보다 못한 형벌의 삶이리라. 내 삶이란 것도.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슬픈 날들. 아침이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를 안고 또 흐느껴야 하는 텅 빈 시간. 남편이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나는 습관처럼, 불쑥 화장실에서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물끄러미 화장실 문을 응시하기도 했다. 다른 남편들은 반찬 타박도 잘한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음식솜씨도 별로인 내가 밥상을 차려주면 꾸역꾸역 군소리 없이 잘도 먹었다. 한번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때는 정말 남편이 귀엽게 보여서, 일부러 맵고 짜게 국을 끓였더니 내 입맛이 변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편이다. 남편과 사내 결혼한 내가 잠깐 직장 생활한 것 말고는 결혼한 이후 줄곧 살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남편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문득문득 며칠 전의 아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침울한 아이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 놓고 힘없이 앉아 남편의 체취가 밴 가구들을 만져보다 울컥 슬픔이 복받쳐오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마침 눈이 내려 산길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덜렁 업고 가면서 내 와이프가 보기보다 무겁네, 하며 놀려댔었지. 엊그제 남편의 쉰 번째 생일날, 생일상에 밥과 미역국을 떠 놓고 그의 부재에 난 또 얼마나 흐느꼈던가. 남편은 결혼하고 십 년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리고 홀로 견뎌온 십 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가끔씩 모든 게 허무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으면서 이렇듯 무감각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지금의 나.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매사에 흐느적거리다 하루해를 넘기기도. 그럴 때면 거울을 들고 또 다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조각난 얼굴이 슬픈 눈으로 나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날, 처연한 장면을 봤다. 국도 한복판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에 하얀 털이 날리고 있었다. 만지면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들개의 주검. 나는 문득 죽어있는 들개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타고 끔찍한 소름과 시체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 온 것 같아 몸을 가늘게 떨며 움츠렸다. 사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들이 들개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죽은 들개의 머리가 들썩거렸다. 죽기 전까지도 한 발만 더 뛰면 바퀴에 치여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을 미련한 짐승. 어쩌면 내 삶도 길 위에 죽어있는 그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욱한 존재. 어느 순간 내 앞에 깊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책갈피에 끼워놓은 네잎크로버의 행운이 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여기듯. 슬픔과 행복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둘이 아님을, 남편을 잃고서야 가슴이 저리도록 와 닿았다. 전철 화재사건 뒤 처참한 내 심정은 길에서 죽은 개의 사체 같았다. 개의 몸뚱이 위로 차바퀴가 수없이 지나다 보면 나중에는 털가죽만 남듯, 남편을 잃고 한동안 방황한 내 삶은 생명을 잃은 털가죽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바닷가 큰바위에 서서, 우리도 여기 온 기념으로 글을 새겨두자고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싫어할 텐데,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옛날 선사시대에 바위에 그렸던 암각화라는 것도 일종의 행운을 비는 부적이래. 그때 사람들도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풍요를 빌었을 거야. 그리고 바위에 새긴 동물마다 상징하는 그들의 소망도 깃들어 있는 거래,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색깔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찾아서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현우와 은혜 다녀감. 글을 다 쓰고 난 남편의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시간. 어느 순간 남편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과 나를 지켜보리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 때도 있다. 언뜻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얼핏 뒤돌아보면 무료한 정물 풍경만이 헛헛한 가슴으로 밀려들던 상실감에 몸을 떨기도.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유독 아빠를 잘 따랐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할 때면 은근히 질투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떠난 것 같다. 평생 나누어 줄 사랑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려는 것처럼.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 온 보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많이 잡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저 보살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보살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갈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그렇게 집안 폭삭 망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 되었지. 사는 게 힘들 때는 한 많은 이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골백번도 마음먹었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모진 게 목숨인가 벼. 이를 악물었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냥반이 집에 돌아오는 것 보고 죽겠다고. 그래서 내가 배운 짓이라고는 푸닥거리밖에 없으니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쓰면서 연명했네. 시난고난 갖은 고생하며 사는데 한날은 파출소에서 깜깜무소식이던 그 냥반 소식이 들려오더란 말이여. 웬 부랑인이 나를 찾더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가보니 허, 이 냥반이 거지꼴을 하고 쭈그려 앉아있는데, 우리 집 영감이 맞는가 싶더구먼. 가만히 보니 눈도 좀 이상해 보이는 게 정신도 온전치 않더라니. 옛날에 그 번지르르하던 행색은 어디 가고 꼭 비렁뱅이 짝이었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사락사락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멎었다. 그 눈발은 보살의 앙상한 가슴속에서 여전히 날리는 것 같다. 황량한 들판 위로 가뭇없이 날리는 눈보라처럼. 보살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다. 생기라곤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그런 눈빛. 예전에 내 눈빛이 그랬었지.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에서 낯선 이가 앉았다 간 빈자리도 쓸쓸해 보이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임에랴. 혼자인 시간에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햇빛 쨍쨍한 대낮이 걸려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는 굵은 눈발이 날렸다. 하루하루가 혼돈과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행여 시장이라도 다녀오다 아는 이를 마주치면 왠지 미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저이와 나는 행복의 저울질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형편과 비슷한 집이나 조금 잘 사는 집의 행복을 저울질하며 그렇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 오면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며 내 처지에 대해 원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전에는 간혹 싱크대 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라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면 징그러워 비명을 질렀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은 늘 공허했다. 부적 쓰는 법을 배운 뒤 처음으로 남편의 넋을 위해 붓을 잡던 날. 나는 한 획도 쓰지 못하고 펼쳐진 부적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는 붉어진 눈언저리를 닦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리라. 만약 신의 시샘이라면 멋지게 살아서 초라해진 내 삶을 복수하리라고. 그리고는 다시 붓을 잡고 온 기력을 쏟아 부적을 썼다.
나는 고즈넉이 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로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된 이후 나는 한동안 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불을 보면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 악몽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에서도 남편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나타나곤 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남편과 내가, 그리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이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오카리나 소리도 멎어있었다. 보살은 회한이 밀려오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다시금 눈에서 물기가 나오는지 손등으로 살짝 훔치더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냥반이 그래도 핏줄은 보고 싶었는지 아들을 찾더라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살아올 리는 없고. 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은 걸 알고는 점점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지. 그래서 굿판도 열어 푸닥거리도 해보고 부적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도 봤지만 효험이 없더구먼.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냥반이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다네. 다시 찾고 보니 이 양반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큰 사고를 내지 않았겠나. 그 사고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여태까지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네. 그러다가 결국 저승사자가 불러서 엊그제 저 세상으로 갔네.”
“참 안 되셨네요. 그런데 영감님이 무슨 사고를 냈는데요?”
“급살 맞을 냥반이 글쎄, 귀신에 홀렸는지 전철 안에다 불을….”
“전철요? 아니, 영감님이 전철에다 불을 냈다구요?”
“…….”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혹시 보살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그날의 악몽을 잊기 위해 그곳에서 이사를 왔는데, 설마 그 사건의 방화범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보살의 영감님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내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키어버린 듯 복잡해졌다. 나는 보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입매가 씰룩이고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냥반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로 부적을 끊었네.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여편네가 무슨 낯으로 부적을 쓰겠나. 죽는 날까지 그저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지….”
고개를 세우고는 남편의 부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쓴 남편의 부적을 들고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화재 현장에는 여러 유해가 뒤엉켜있어 그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함에 부적을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무리의 새 떼가 황혼의 서편 하늘가를 나는 게 보였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는 노을이 스러져 가고, 아래로는 완만한 능선이 아름답게 보일 무렵이었다. 새들은 황혼을 날면서도 서두름 없이 날고 있었다. 뒤 쳐진 새 한 마리가 바삐 무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서편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천궁 보살이 가게를 나간 뒤 시계를 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줄곧 앉아있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부적지를 꺼내어 조심히 유리판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망자의 부적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수상소감 - 최우수상 단편소설 박도열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코로나 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뜻밖에 소설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올 한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과 생업 때문에 소설 쓰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비로소 소설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응모를 하게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십 대에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볼펜으로 필사를 해 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저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소설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기에는 한동안 시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 종종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소설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소 저의 시를 보셨는지 하루는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나서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게 가장 큰 소망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게는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늘 무거운 짐으로 제 가슴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찌된 셈인지 가슴을 후벼 파는 일이 잦은 게 인생살이다. 애초 뜻밖의 고난을 만나 나동그라지도록 기획된 게 삶이지 않을까. 고통을 통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옛 선비들은 수상한 세상에 질려 일쑤 산야로 스며들었다.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도 그랬다. 그는 잘나가던 스승 조광조가 훈구파에 몰려 유배되자 세상에 염증을 느껴 산골짝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선 줄곧 산중 원림을 가꾸며 살았다. 그게 소쇄원(瀟灑園)이다.
소쇄원의 들머리엔 대숲이 성성하다. 대나무를 청허자(淸虛子)라 이른 건 맑게 속을 비운 겸허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마디마디 단단하게 맺혀 올곧게 쭉쭉 자라는 품새는 절개를 상징한다. 세상의 풍상이 사납다고 굽힐까보냐, 부러질까보냐, 대나무가 하는 말이 그렇다. 양산보가 원림 초입에 대숲을 조성한 까닭이 쉬 읽힌다.
대숲 사이 조붓한 소로를 지나자 소쇄원의 내부가 훤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천국’이라 탄복한 소쇄원의 가경(佳景)이. 이곳이 천국이라면 대숲 저 바깥은 감옥인가. 대숲으로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삼았다? 그리 봐도 지나칠 게 없겠다. 양산보는 권력의 횡포로 어지러운 속세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산야에 은둔했다. 소쇄원의 조영을 통해 꿈에서나 만났을 법한 이상 세계 건설을 추구했다. 지지고 볶는 세속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자연 속에 몸을 두고 풍성한 내면의 선율을 즐기는 삶이 한결 낫다는 걸 오롯이 구현했다.
소쇄원의 구조물들은 깊지 않지만 옹골찬 맛을 풍기는 계곡 좌우의 경사지와 둔덕으로 펼쳐진다. 대청마루 정갈한 작은 집, 모정(茅亭), 연못, 담장, 화단, 외나무다리 등 세우고 꾸미고 덧붙인 것들이 많다. 그러나 짜임새가 좋아 답답한 구석이 없다. 탁 트인 느낌을 준다. 부지의 면적은 1400평쯤으로 널찍하다. 조선의 원림치고 이 정도 넓이를 가진 곳이 드물다.
일찌감치 젊은 시절에 세상을 등진 산림처사 양산보. 그에게 벼슬은 멀고 가난은 가까웠다. 그리운 건 그저 마음의 평화? 밖으로는 문을 닫은 대신 안으로는 광활한 사이즈의 자유를 들여놓고 유유자적하고 싶었을 테다. 그러하니 빈 마음으로 꾸린 원림이다. 그렇다면 오두막 하나와 탁족하기 좋은 계곡의 나무 그늘 하나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양산보는 그러지 않았다. 대범하고도 활달하게 구조물들을 조성했다. 번듯한 원림으로 자신의 뜻과 지향을 면밀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를테면 삿갓지붕을 올린 자그만 정자엔 대봉대(待鳳臺)라 이름 붙여 봉황을, 즉 성군(聖君)을 갈망하는 마음을 담았다. 소쇄원의 두 축인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의 당호는 송나라의 명필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예찬하며 쓴 글귀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빌렸다. ‘맑은 날의 바람, 비 갠 뒤의 달’을 닮은 인품을 선망했던 거다. 이렇게 보면 소쇄원은 세월을 낚는 낚시터가 아니다. 마음을 닦는 교실이요, 깨어 있는 정신의 전시장이다.
산중에 사는 이에겐 고독마저 기껍다. 적막이야 연인이고. 양산보가 공들여 소쇄원을 꾸린 건 내면의 웅장한 심지를 남들에게 티 내고 싶어서가 아니었을 거다. 우선은 내가 나를 만족시키고서야 이타(利他)도 헌신도 가능한 게 사람이지 않던가. 양산보는 유한한 인생을 산중의 독존(獨存)으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유유하게 노닐었다. 지상의 주인으로 살았다. 그랬으니 소문나지 않을 리가. 양산보가 소쇄원을 꾸리고 소쇄하게(맑고 깨끗하게)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걸들이 숱하게 찾아들었다. 기대승, 고경명, 정철, 송순, 임억령 등 당대의 스타급 문사들이 드나들며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었다는 게 아닌가. 기대승은 양산보를 일컬어 ‘만사를 낙관하는 군자’라 했다.
소쇄원은 아름다워 정들기 쉽다. 물소리 바람 소리는 귓전을 스치며 덧없는 세상을 너무 용쓰지 말라 한다. 매인 것 없이, 다툴 것 없이, 그저 살갑게 물처럼 구름처럼 흐르라 귀띔한다. 이래저래 경탄할 만한 옛날 정원이다. 놓치지 말 게 하나 있다. 정조 임금이 ‘호남의 공자’라 부른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48영시’다. 제월당 마루에 편액으로 걸려 있다. 소쇄원의 경관을 48수 오언절구로 노래한 것인데, 이 시편들은 소쇄원의 풍광에 혼을 훅 불어넣었다.
계절마다 짜맞춘 듯 떠오르는 여행지가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는 시원한 바다와 계곡 생각이 절로 나고, 함박눈 내리는 겨울에는 산지 가득 핀 눈꽃 구경이 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당장 어디론가 떠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방구석 피서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38도를 웃도는 역대급 폭염에 시달리는 시니어를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줄 여행지로 남아메리카의 이구아수 폭포를 선정했다. 근심을 덜어줄 위대한 물줄기에 풍덩 빠져보자.
이구아수는 지역 원주민인 과라니(Guarani) 족 언어로, ‘큰 물’ 또는 ‘위대한 물’이라는 뜻이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을 따라 3km 가량 이어져 있으며, 높이는 60~82m에 달해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이구아수 폭포는 강수량이 풍부한 아열대 기후대에 자리잡고 있다. 폭포로 흘러 들어오는 물의 양은 초당 1000톤으로 어마어마하다. 압도적인 규모에 감탄한 것일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는 “아, 나이아가라는 어쩌면 좋아!(Poor Niagara)”라는 감상평을 남겼다.
이구아수 강물의 절반은 U자형 폭포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으로 쏟아져 내린다. 이구아수 폭포의 하이라이트로도 손꼽히는 이 곳의 이름에 악마가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1분을 바라보면 근심이 사라지지만 30분을 바라보면 영혼을 뺏긴다는 것.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설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물줄기와 피어오르는 물안개, 엄청난 유량을 직접 보고 압도당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구아수 폭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파라과이까지 총 3개 나라에 걸쳐 있다. 각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 달라, 관광객들은 육로로 국경을 오가며 폭포를 감상한다. 아르헨티나 령 이구아수 국립 공원 내의 ‘뜨레스 프론테라스(Tres Fronteras)’는 3개국 국경이 만나는 곳으로, 분수 쇼와 멋진 야경을 볼 수 있는 숨겨진 명소다.
이구아수 폭포는 그 웅장함 덕분에 영화 속 배경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문명과 비문명 사이의 대립을 그린 종교 영화 ‘미션(The Mission)’에서 노예 상인과 과라니 원주민들이 돌짐을 지고 걷던 곳이 이구아수 폭포였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탈 해골왕국’에서도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구아수 폭포를 보려면 열대우림 생태 기차나 폭포 기차를 타고 숲을 가로질러야 한다. 브라질 방향에서는 환경 보호를 위해 만든 통로를 걸어서 폭포 인근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걷기 힘들거나 폭포를 하늘 위에서 즐기고픈 시니어 관광객들은 헬리콥터를 탄 채로 관광을 즐길 수도 있다. 장엄하고 거대한 물줄기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산을 애호하는 건 산에 사는 나무나 다람쥐만이 아니다. 사람도 산을 좋아한다. 특히나 한국인은 등산을 유난히 좋아하는 민족이다. 등산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냐고, 다투어 천명하는 이들이 많다. 등산에 거의 미친 사람도 숱하다. 손에 쥐면 쥘수록 번뇌의 개수도 많아지는 게 인생이다.
작가 조세희의 말마따나 ‘정신만 빼고 모든 게 다 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욕망과 물신의 사주로 뭐든 배가 터지도록 탐닉하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지구라는 행성이다. 그러나 마음은 때로 갈피 없이 흔들린다. 모래밭에 세운 부실한 가건물처럼 자주 휘청거린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산을 찾아간다. 몸 건강을 생각해 산을 ‘야외 헬스장’처럼 애용하는 이들도 많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초록으로 반짝이는 별이 지구라지. 뭔가 고차원의 다른 별에서 바라보면 지지고 볶는 인간들로 바글거리는 지구가 영락없는 지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러기만 하랴. 희로애락의 요지경으로 점철되는 게 지구 위의 풍정이지만, 한 번 태어나 근사한 인생을 실현하고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몸을 벗기에 좋은 게 지구별에서의 삶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 등산의 효시
이렇게 골치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 행성에서 최초로 산에 오른 이는 누구였을까? 등산의 효시를 또렷하게 짚어내기는 어렵다. 창으로 먹이를 꿰기 위해 산야를 누빈 선사시대의 호모사피엔스를 등산의 시조로 봐야 할까? 저 높은 산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으로 산에 오르거나, 하늘의 별과 달, 또는 신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보려고 산정에 오른 자를, 혹은 산 너머 부족들의 동향을 영특하게 탐지하기 위해 은밀히 고산에 올라간 자를 최초의 등산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게다.
여하튼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행위는 아득한 과거부터 계속 이어졌다. 우리의 선조들도 일찍부터 산에 올라가 다양한 용무를 봤다. 고대부터 숭산(崇山)을 신앙으로 삼은 민족이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그리고 대체로 산이 나지막하고 아기자기해 오르기도 쉽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이런 유순한 산세는 오늘날까지 한국에 산행이 성행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다.
역사서를 보면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에서도 등산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행이 더욱 활발했다. 학술적·군사전략적·유람적 성격의 산행이 잦았다. 암벽을 오르느라 용을 쓰는 모습이 드러나는 민화까지 보여 흥미롭다. 무엇보다 확연한 건 문인 사대부들이 즐긴 유람 성격의 산행 역사다. 자연에서, 즉 산수의 본질에서 삶의 유토피아와 학문의 지향점을 찾은 게 성리학자들이지 않은가. 사대부들은 산처럼 물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는데, 그들은 산행 뒤에 흔히 ‘유산기’(遊山記)를 기록해 남겼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은 1900년대 중반, 서구의 알피니즘(Alpinism)을 통해 유입됐다. 정상 정복의 성취 욕구를 중심에 둔 등산의 이념과 기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급적 더 높은 산을, 가급적 더 단시간에 후다닥 오르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등산이 대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조선 선비들이 산을 즐긴 전통적 방식은 이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대략 세 가지 코드로 산을 즐겼다. 가만히 앉아서 산을 관조하는 ‘관산’(觀山)과 흐뭇한 경치를 즐기는 ‘요산’(樂山), 산을 돌아다니며 노니는 ‘유산’(遊山)이 그것이다.
이 셋 가운데 ‘유산’의 방식으로 산행을 했던 이들이 남긴 기행산문이 바로 유산기다. 유산기 안에는 물론 ‘관산’과 ‘요산’의 정신과 감성 역시 화학적 합성처럼 결부돼 있다. 조선이 남긴 진귀한 문화유산인 유산기는 총 560여 편에 달한다. 한가락 한 선비들이라면 다들 유산기를 남긴 것 같다.
자못 거창했던 선비들의 유산(遊山) 대열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의 산행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번거로운 행위였다. 접근 경로도 열악하고 맹수가 들끓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산을 우주의 축약으로 본 거시적 자연관을 지닌 선비들에겐 산이야말로 생생한 체험을 해볼 만한 수신(修身)의 아카데미였던 것이다. ‘나여! 너는 누구냐?’ 그런 자문자답을 습으로 삼았던 선비들은 산행을 또한 자성(自省)의 찬스로 삼았다.
아무도 뜯어말릴 길이 없도록 지독한 유산의 버릇을 가진 걸로 유명한 이는 남명 조식(1501∼1572)이다. 그는 지리산의 ‘황소갈비 같은 산마루’를 무려 열일곱 번이나 주파했으며, ‘유두류록’(流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차라리 지리산의 넋이 되고 싶었나? 기행문을 보면 “(지리산 탐승을 하다가) 초가지붕에 걸린 박처럼 죽은 송장이 되고 싶었다”고 썼으니 말이다.
남명은 평생을 일관해 경(敬)과 의(義)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새벽처럼 명증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고자 진력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쩔렁쩔렁 소리를 내는 방울인 성성자(惺惺子)를 늘 허리춤에 차고 살았던 건 정신의 해이를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이런 그에게 지리산은 도심(道心)을 기르는 수련장이었다. 비지땀을 쏟으며 오르막을 오르는 것을 ‘선(善)을 좇는 것’이라 했고, 내리막에서 힘쓰는 것 없이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것을 ‘악(惡)을 좇는 일과 같다’고 빗댔다.
선을 행하긴 어렵고 악에 편승하긴 쉽다는 것을 얘기한 셈이다. 산의 운치를 맛보고, 풍경의 미태를 반기며, 벼랑을 움켜쥐고 버티는 노송의 고고한 기품을 감상하는 데에서 나아가, 인간됨의 도리를 산을 통해 새삼 깨닫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었던 거다.
그런데 조선 선비들이 고리타분한 공부벌레에 그친 건 아니었다. 풍류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살았으니까. 공부는 공부대로 열나게 하고, 짬짬이 놀 때는 또한 열나게 놀았다. 해서, 유산 목적의 산행은 풍류를 즐기는 여정이기도 했다. 주로 명산을 골라 탐승했던 그들의 유산 행차는 자못 거창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 빙벽을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이 셰르파를 고용하고 원정대를 조직하는 정도는 저리 가라는 듯 화려하게 팀을 짜고 산에 올랐다.
지리산을 오를 때 남명이 거느린 무리의 면면은 실로 다양했다. 선두 대열엔 예인이나 기생들을 배치해 허리에 찬 북을 치거나 피리를 불게 했으며, 남명과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뒤를 따르며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음식 꾸러미나 술통을 짊어진 짐꾼들은 후미 대열을 형성했고, 길 안내는 지리산의 물정을 잘 아는 승려가 맡았다.
유산기의 귀감으로 꼽히는 ‘청량산 유록’을 남긴 주세붕(1495~1554)이 청량산을 오르며 대동한 유흥 그룹의 구색도 장관이었다. 당대 풍류계의 선수였던 주세붕 역시 인근의 공무원과 선비, 기생과 가수, 연주하는 재인, 여종 등을 두루 대동했으니, 마치 물고기들을 꼬챙이에 꿴 두름처럼 기다란 행렬이 산길을 따라 주르륵 이어졌다.
선비들의 유산에 술과 가무가 있는 유흥은 아마도 유행 품목이었던 것 같다. 요즘의 등산객들도 일쑤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나 하산 뒤에 기념으로 한잔 걸치곤 하는데, 조선 선비들의 풍성한 유흥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음마야, 선비들이 엄청 요상하게 놀았네?” 이렇게 의아해하며 눈에 쌍심지를 켤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왕지사 노닐 거라면 제대로 노니는 게 사리에 맞겠다.
게다가 조선 선비들이 유산 중에 즐긴 풍류는 어디까지나 청유(淸遊)였다. 거칠거나 혼탁한 구석이 없었다. 산중 유숙의 달밤에 한잔 마시며 주거니 받거니 음풍영월의 시를 지어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분수와 염치를 중히 여겨 처신을 맑게 하길 본분으로 삼은 게 선비 정신이지 않겠는가. 두 눈으로 보지 않아서 모를 일이긴 하지만, 산에 올라 엉덩이에 뿔난 짓을 한 삐딱이 선비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이제 퇴계 이황(1501~1570)이 산을 사랑한 방식을 살펴볼까? 퇴계는 산을 연인처럼 평생 애지중지했다. 고도로 발육한 합리적 이성과 세련된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산은 족집게 레슨 교사처럼 믿을 만한 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도학(道學)의 번성을 평생 과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거경궁리(居敬窮理, 경건한 마음으로 이치를 추구함)로 일관한 석학이었다. 그리고 그 위업에 부합하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퇴계 본인은 자신을 매우 혹평했다.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다”고 탄식했다. 어이 하나? 그는 산에서 배우는 것으로 부족분을 채우고자 했다. 그에게 산은 ‘보는’ 게 아니고 ‘읽는’ 대상이었다.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 하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그는 시를 통해 이렇게 읊었다. 사람들은 흔히 산의 외물(外物)에 경도된다. 그러나 퇴계는 근원적인 묘리를 내장하고 있는 게 산이라 보았다. 글을 읽어 진리를 길어 올리듯, 산 또한 근본 이치를 깨칠 수 있는 학당이니 산을 유람하는 일이란 결국 인생 공부라 판단했던 거다.
퇴계도 유산기를 남겼다. 소백산을 탐승한 뒤 ‘유소백산록’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 유산 일정은 3박 4일. 당시의 직분은 풍기군수. 건강 상태는 매우 불량해 대동한 승려들이 의논을 하더니 견여(肩輿, 좁은 길을 오를 때 잠시 쓰는 간단한 가마)를 타고 오르라고 권유했고, 퇴계는 응했다. 이렇게 해서 때로는 두 다리로, 때로는 말을 타고, 비탈길에선 견여를 이동 장비 삼아 유산을 했다.
이런! 견여를 탄 퇴계야 편했겠지만, 가마꾼들은 그 무슨 고생이람.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꼴불견이겠으나 만족스러웠던 퇴계는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마”라는 논평을 적어두었다. 사람의 도리를 평생 궁구한 천하의 도학자였지만 내 몸 편하고자 남의 몸에 얹혀가는 결례엔 마음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윗분’이 따로 있고, ‘아랫것’이 별도로 있었던 계급사회에서의 일이었으니, 퇴계보다는 시대가 자아낸 소극(笑劇)이라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퇴계는 말했다. “나는 산야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DNA 자체가 산에 심취하게 구성됐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그의 호 ‘퇴계’(退溪)의 뜻이 선연해진다. 그는 항상 뒤로 물러서 계곡으로,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산을 체험하고 궁구하며 얻은 특유의 지론도 많았다.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도산잡영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예로부터 산림을 즐겼던 사람엔 두 종류가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섬기며 즐기는 사람이 있었고, 도의(道義)를 기쁘게 여기고 심성을 기르면서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를 따르자면 윤리를 어지럽힐까 두렵고, 후자의 경우는 성현이 남긴 글 찌꺼기를 탐하는 데에 그칠까 두렵다.
그러나 차라리 후자를 위해 힘쓸지언정 앞의 것을 위해 스스로를 속이진 않으리라.”
지금까지 조선조에 성행한 유산기와 선비들의 산에 관한 생각을 대략 살펴봤지만 편린에 불과할 따름이다. 고릿적 선비들의 유산과 오늘날의 등산이 서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요량해볼 만한 대목도 없진 않을 게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잴 것도 없다. 풍속이란 어차피 시대를 따라 변전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산을 탐스럽게 주유한 건 옛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풍류는 오졌고, 심성은 산에다 조율했으니까. 특히 퇴계의 지론은 청명해 구미가 동한다. 그를 통째 청산이라 일러도 실언은 아니리라.
조상의 얼이 담긴 성곽과 고즈넉한 멋이 흐르는 선운사 등의 문화유적과 수박, 풍천장어, 복분자 등 각양각색의 먹거리가 넘치는 고창. 봄이면 짙푸른 청보리밭이 반기고, 여름에는 샛노란 해바라기가 인사한다. 가을에는 마치 구름이 내려앉은 듯한 하얀 메밀꽃밭이 손짓하고, 겨울이면 눈 덮인 하얀 설원도 유혹한다. 한반도 첫 수도 고창군은 농생명 식품산업을 천년대계로 설정한 도시답게 이름난 특산물이 넘쳐나며, 유입 인구도 많아 귀농귀촌인의 만족도가 특히 높은 곳이다.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나려는 예비 귀농귀촌인이 산, 들, 바다, 강, 갯벌이 모두 있는 고창을 선택하는 이유를 찾았다.
걸음걸음마다 문화와 치유가 깃들다
도시 생활에 지친 예비 귀농귀촌인이 정착지를 고를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연 환경이다. 고창은 청정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생태계의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초로 2013년 5월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신비로운 원시 해안을 간직한 갯벌을 비롯해 고인돌 박물관, 선운산 도립공원, 운곡람사르습지, 동림저수지 등이 핵심 관광지로 특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머물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고창군의 다양한 즐거움
또한 고창에는 구석구석 전통과 문화가 새겨진 명소가 꽤 많다. 산세 좋고 물소리 좋은 선운사 계곡 아래 홀로 핀 한 송이 꽃이 그림 같다. 누군가는 사계절 모두 명소가 되는 고창 선운사로 진입하는 첫 관문인 선운산 도립공원에 발을 들이고서야 고창 여행이 시작됐음을 실감한다고도 말한다. 그만큼 선운사는 고창을 대표하는 명소다. 선운사는 고즈넉한 멋이 어우러진 외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백제 위덕왕 24년인 57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산이고, 조선 후기에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서 장엄한 불국토를 이뤘다. 그림자 짙은 숲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사찰에서는 흔하지 않은 강당 건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봄을 알리는 3~4월의 동백꽃과, 9~12월 초 꽃무릇과 단풍으로 이어지는 가을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약 5000평의 동백나무숲과 높이가 15m나 되는 천연기념물 제367호인 삼인리 송악도 있다.
선운사에서 역사와 자연의 진수를 경험했다면 발걸음을 옮겨 성곽길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좋다. 고창의 중심에 다다르면 길게 뻗은 성곽과 웅장한 문이 시선을 사로잡는데, 바로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1년인 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축성했는데, 원형이 잘 보존된 성곽으로 평가받는다. 현지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모양성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활약했다. 30~40분 동안 고창의 전경과 숲을 보며 느긋이 성곽을 걸어 보면 고창읍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고창을 채색하는 또 하나의 색다른 문화지로 학원관광농장을 들 수 있다. 학원농장은 청보리밭축제로 유명한 관광 농장이며, 봄이 되면 청보리밭과 함께 광활한 유채꽃밭이 장관을 이룬다. 서울 여의도의 4.5배에 달하는 면적이 노란 유채꽃으로 뒤덮인 땅은 고창의 새로운 봄 풍경으로 각광받는 중이다. 또한 여름에는 수천 수만 그루의 샛노란 해바라기가 인사하며 가을에는 메밀꽃이 이어지는 등 봄, 여름, 가을에 걸쳐 꽃의 축제가 계속된다.
3만 평에 달하는 대지에 만들어진 농촌 체험형 테마공원인 상하농원으로 들어서면 우선 유럽풍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부에는 햄 공방, 과일 공방, 빵 공방, 발효 공방 등이 있어 다양한 가공품을 만드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고, 농원상회에서는 각각의 공방에서 솜씨 좋은 농부들이 만들어낸 먹거리들을 구입할 수 있다. 가볍게 공방과 상회를 구경한 후 유기농 목장으로 향하면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옆에는 양떼 목장이 있어 귀여운 양들을 구경할 수 있는 등 이국적인 광경들을 볼 수 있다.
고창군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특산품 먹거리
고창 하면 볼거리와 함께 먹거리로도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복분자와 풍천장어다. 단맛과 신맛을 함께 지닌 복분자는 뛰어난 효능으로도 유명한데 간을 보호하고, 눈을 밝게 하며, 기운을 도와 몸을 가뿐하게 만든다고 한다. 특히 복분자로 만든 담금주는 기름진 장어와 궁합이 좋아 고창 내 어느 장어 식당을 가더라도 판매하니 풍천장어 구이와의 절묘한 맛의 조화를 느껴보자.
선운산 일대에 서식하는 풍천장어는 고창의 으뜸 식재료로 유명하다. 풍천은 선운사 어귀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인천강 지역을 뜻한다. 실뱀장어는 민물에 올라와 7~9년 이상 성장하다 산란을 위해 태평양 깊은 곳으로 회유하기 전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지역에 머무는데, 이때 잡힌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한다.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들이칠 때 장어가 바람과 함께 바닷물을 몰고 온다고 해서 풍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창의 풍천장어는 유달리 고소한 맛이 강하며 육질이 탱탱해 씹는 맛도 좋다.
고창 먹거리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고품질 다품종이라는 것이다. 고창군은 최고의 자연 생태 환경을 자랑하듯 복분자, 수박, 멜론, 고추, 땅콩, 고구마, 아로니아, 블루베리, 풍천장어, 바지락, 천일염 등 전국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가진 농특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기업에서도 그러한 고창 먹거리의 강점과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있다. 예를 들어 하이트진로는 고창군의 흑보리를 이용해 인공 첨가제가 없는 기능성 건강음료 ‘블랙보리’를 출시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인 고창 식품 산업 성공 신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복분자 발사믹 ‘식초’도 핫하다. 2019년에는 국내 최초로 ‘식초문화도시’ 선포식을 했는데,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면역력 열풍을 타고 복분자 발사믹 생산 업체가 4배 이상 매출 증대를 기록했을 정도다.
귀농귀촌 1번지, 고창군의 귀농귀촌 정책들
살아보니 더 좋아진다는 입소문이 도는 고창군은 대한민국 귀농귀촌 1번지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귀농귀촌인이 다른 지역보다 고창군을 더 많이 찾는 요인으로는 지자체의 적극적인 귀농귀촌인 유치 노력이 꼽힌다. 고창군은 2007년 전북 최초로 귀농인 지원 조례를 제정하고 귀농귀촌 전담 부서를 설치했다. 또 귀농귀촌인 모임과 협의 체제를 구축해 귀농귀촌인의 눈높이에 맞는 차별화된 귀농귀촌 정책을 펼치고 있다.
고창군 대산면으로 내려온 지 4년째라는 한 60대 귀농인은 “주변의 많은 귀농귀촌 선배들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고창은 외지인이 텃새 걱정 없이 뿌리 내리기 좋은 곳”이라며 “온천과 실버타운이 있어 적당히 바쁘게 살면서 농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즐기며 노후를 꿈꿔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1년 고창군 귀농귀촌 관련 총사업비는 7억5100만 원으로 4개 분야, 20개 사업을 추진한다. 4개 분야는 귀농귀촌 유치와 활성화, 정착, 귀농창업 활성화다. ▲귀농귀촌 유치 사업비는 2억1000만 원으로 귀농귀촌의 최적지로서 고창을 홍보하기 위한 박람회 참가와 농촌 체험을 위한 홈스테이, 고창에서 한 달 살아보기, 초보 귀농인 서포트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한다. ▲귀농귀촌 활성화 사업비는 1억7600만 원으로 마을환영회, 재능기부, 실용교육, 동아리 지원, 귀농체험학교 등으로 꾸려진다. ▲귀농귀촌 정착 지원 사업비는 3억3250만 원으로 영농 정착금과 농가주택 수리비, 소규모 귀농귀촌 기반 조성을 지원한다. ▲귀농창업 활성화 사업비는 3250만 원으로 컨설팅과 창업 실행비로 구성되어 있다.
본지에서 기획한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 10選의 심사 기준은 귀농귀촌을 선택한 퇴직 예정자들이 △지원정책 내용 △자연과 문화환경 △ 귀농귀촌 멘토 조언 △토양 특산물 현황 등을 고려해 선정했다.
베이비붐 세대 김시골(가명)씨는 퇴직을 앞두고 고민이 많다. 공단에서 32년을 일한 그도 노후가 걱정이긴 마찬가지다. 연금은 받겠지만 아직도 군대 간 아들 복학 후 몇 년을 더 AS해야 해야 하니 주름이 늘 수밖에 없다. 사실 퇴직 후 시골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이처럼 은퇴자들은 시골살이를 꿈꾸지만 귀농과 귀촌은 선뜻 도전하기가 만만치 않다.
2020년 진행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도시민의 41.4%가 은퇴 후 귀농귀촌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2019년보다 6.8% 증가한 수치다. 또한 지자체들은 인구 감소에 따른 해결책의 일환으로 귀농귀촌 인구 유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제 귀농귀촌이 퇴직자들의 전유물이란 통념에서 벗어나 도농 균형발전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 연금이나 금융소득의 수입원이 있는 은퇴자들은 귀농보다는 귀촌에 힘이 더 실려 있다. 때문에 지자체들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수요자 눈높이에 맞는 귀농귀촌 정책 지원 확대에 발벗고 나섰다. 예비 귀농귀촌인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가보고 싶은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 10選을 기획했다. 그 첫 번째로 경북 성주군 편을 담았다.
귀농귀촌으로 가는 길 [경북 성주군 편]
샛노란 성주참외로 부자농촌 대명사 등극
경상북도 성주군의 4월은 온통 노랗다. 성주의 들판을 뒤덮은 수만 동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참외 때문이다. 전국 최고의 단일 품종 최대의 부자농촌 대명사가 됐다. 성주군은 지난 한 해 동안 성주참외 농사로 억대 매출을 올린 농가가 1230가구로 조사됐다. 전국 참외 재배 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참외 최대 생산지 성주군을 귀농귀촌 최대 수혜지로 찾았다.
성주군의 4200여 농가에서 생산되는 연간 15만 톤 안팎의 참외는 전국 유통 물량의 70%를 차지한다. 성주참외 맛의 비밀은 자연환경에 있다. 풍부한 물과 기름진 토양에 영남 내륙 분지라는 지리적 이점까지 갖췄다. 분지는 태풍·눈·비·바람을 막아줘 참외가 자라는 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전국에서 가장 긴 일조 시간도 한몫해 성주참외를 더 단단하게, 더 달게 한다.
이 지역의 참외 재배 역사는 60년이 넘지만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건 1990년대부터다.
참외는 여러 모로 우리나라에 특화된 채소다. 멜론의 변종인 참외는 해외에서는 Korean Melon, 즉 ‘한국 멜론’으로 불린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소비하며,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90%가 수분으로 이뤄진 시원함과 특유의 아삭하고 달콤한 맛이 특징인 참외는 삼국시대부터 재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개량을 거듭하여 2000년대 후반부터는 오복꿀, 바른꿀 등 ‘꿀 시리즈’로 알려진 참외들이 시장을 장악했다.
이러한 참외를 생산하는 땅이 가장 집중된 곳이 경상북도 성주군이다. 전국 참외 재배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성주군은 그야말로 참외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참외에는 ‘성주참외’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주군에서 참외 하나로 벌어들이는 조수입(비용 포함 수입)이 연 5000억 원 이상이라니,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대표 농작물로 계속 언급되는 이유다.
최고의 참외 전문가들과 함께 품질 유지
물론 성주군에서도 성주참외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작년에 성주참외 50년을 기념하고 미래 50년을 준비하는 성주군에는 전국 224명, 경상북도에 46명 있는 농업 마이스터가 6명 있다. 이들은 모두 참외 재배 분야 마이스터다. 또한 참외명인 1명, 참외명장 2명을 두어 우수 기술을 계속적으로 컨설팅하며 성주참외의 위상과 품질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명장들의 손길 덕분인지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 따르면 성주참외에는 베타카로틴이 딸기에 비해 3배, 감귤에 비해 2배 함유되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또한 성주참외를 위한 새로운 로고와 캐릭터, 포장재 등을 개발했으며, 전국 최초로 농식품부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100억 원을 투자하는 비상품화농산물자원센터를 2023년까지 건립할 예정이다. 이 센터를 통해 상품화되지 못한 참외들을 효율적으로 분류하여 다양한 재가공을 통해 한우 사료 및 기타 가공품으로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성주참외는 코로나19 확산과 소비 침체 와중에도 해외 수출 415톤을 기록했다. 해외 시장 진출은 K 시리즈로 대변되는 해외 문화 수출 기획과 함께 이뤄지고 있다.
1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기억들
인구 4만3000여 명의 성주군은 성공적인 참외 산지 외에도 다양한 문화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주군은 1800년 전 고대 가야 연맹국 중 하나인 성산가야가 있었던 곳이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경상도에서 개간된 농토가 가장 넓었던 자리였으니 농업 지역으로서 일찌감치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또한 태종, 단종, 세조의 태실이 자리할 정도로 명당의 평가를 받았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도 있었다. 성주군은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도심 공원형 복합문화공간 ‘성주역사테마공원’을 만들었다.
2020년 10월 말에 준공된 성주역사테마공원에는 조선시대 영남의 큰 고을로 위상을 떨쳤던 성주목의 옛 모습인 성주읍성 북문과 성곽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 하나인 성주사고와 조선시대 전통 연못인 쌍도정도 있다. 밤이면 은은한 조명이 성곽과 문루를 비춰 고즈넉한 야간 명소로 각광받는 중이다.
해발 1433m의 가야산을 품은 가야산국립공원도 성주에서 경험할 수 있는 천혜의 공간이다. 특히 정견모주길은 가야산국립공원 속에 숨어 있는 진주로 불리는데, 봄에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고 그늘이 계속되는 숲길과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가득하다.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군의 역사를 활용한 또 하나의 대표 관광지다. 참외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것과 맞물리는 묘한 인연이랄까.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성산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거대한 규모의 고분들이 집결되어 있으며, 가야부터 신라까지 이르는 다양한 토기와 마구류 등이 출토되어 우리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든 중요한 유적지다.
성주군의 문화 명소
천연기념물 제403호인 성밖숲은 2017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2018~21년에는 대한민국 생태테마관광지로 선정되었다. 이곳에는 500년 긴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신비롭고 기이한 형상을 지닌 52그루의 왕버들이 모여 산다. 매년 7~8월이면 맥문동이 피어 성밖숲을 시원한 자줏빛으로 물들이며 짙푸른 왕버들과 보색(補色) 대비를 연출하기에 사진작가와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인간적인 전통을 느껴보고 싶다면 한개민속마을로 가보는 것도 좋다. 이곳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60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하회마을·양동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7대 민속마을 중 하나이며, 경북도지정문화재 9채와 6채의 재실을 포함한 총 75채의 초가집·기와집이 돌담길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주의 명소 무흘구곡과 성주호 둘레길의 드라이브 코스는 하나의 길 안에 있다. 아라월드 입구에 들어서자 만나는 성주호 둘레길은 호반을 끼고 이어지는 숲길이다. 이 길은 숲으로 호수로 구불구불 이어져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자동차로 59번 국도를 따라 북진하다가 30번 국도와 만나는 교차점에서 서남쪽으로 우회전하면 성주호를 끼고 돌게 된다. 이 길은 매년 봄이면 벚꽃 터널로 덮여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 드라이브 코스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성주댐을 지나 김천시 증산면 청암사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의 입구를 지나면 무흘구곡을 만날 수 있다.
일연 스님(1206~1289)은 몽골의 침입이라는 국난에 맞서 한민족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 5년 동안 5권 2책의 ‘삼국유사’를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나름의 답을 했다. 정사에서는 볼 수 없는 한민족 역사의 대기록이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밝힌 고조선과 단군신화, 14수의 신라 향가는 고대 문학사를 실증하고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이 남긴 기억을 모아 통일된 서사를 완성했다.
이처럼 한민족 정신사에 족적을 남긴 일연 선사의 자취는 군위의 인각사(麟角寺, 사적 제374호)에 남아 있다. 그의 생애를 기록해두었다는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를 보러 가자. 인각사로 가는 여행은 일연 스님의 정신과 그 비문에 얽힌 간곡한 마음 하나 알아보려고 떠난다.
인각사의 비문에 존재한다는 문장을 마음속에서 떠올려본다. 그 비문의 이름은 보각국사비다. 당시 이름난 민지(閔漬)라는 문장가가 글을 지었고, 왕희지의 서체로 4000여 자를 집자했다고 한다. 인각사라 자리한 군위로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가는 김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다는 혜원(김태리 분)의 근사한 집도 들러보고 추억의 기차역 화본역도 다녀왔다. 카메라와 번역본 ‘삼국유사’ 한 권을 배낭에 짊어지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거쳤다. 과연 온전히 이 글의 주인공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느끼고 비문을 찾아볼 수 있을까? 비에 새겨졌다는 일연 스님을 찬하는 민지의 문장이다.
“말할 때 우스개가 없고(語無戱謔), 꾸며대지 않는 성품이며(性無緣飾), 참된 마음으로 사물을 대했다(以眞情遇物). 여럿이 함께 있어도 홀로인 것 같았으며(處衆若獨), 높은 위치에서도 낮게 처신했다(居尊若卑). 스승에게서 배워 공부하지 않고(於學不由於師), 저절로 환하게 알았다(自然通曉).”
인각사를 빛내주는 것은 바로 학소대에 노니는 학처럼 고고한 선사의 정신세계다.
참된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는 힘은 일연 스님의 끝없는 수행의 결과가 아닐까?
경북 군위는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고장이다. 대구에서 가수 김광석 거리와 달성공원을 둘러보고 하루의 일정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군위로 향했다. 간밤에 눈이 내려 앞산 정상이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내는 금세 녹았지만 대구를 분지로 만들며 빙 둘러 병풍처럼 서 있는 산들은 만년설을 두른 듯 하얗다. 군위 방면에 있는 팔공산의 설경은 겨울답게 눈이 부시다. 대구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힘이 눈으로 더욱 영험해진 듯하다.
일연 스님이 말하고 싶은것은?
팔공산의 품은 넓고도 높아 군위로 향하는 내내 시선을 머물게 한다. 군위로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추위 탓인가, 코로나19 때문인가? 텅 빈 들판과 낙엽이 떨어져 벌거벗은 겨울나무 숲은 조용히 추위를 견디고 있다. 응달에는 아직도 하얀 눈이 쌓여 있다. 인각사로 향하는 지방도로는 산길로 접어들어 굽이진 길을 간다.
영천 방향으로 산길을 위태롭게 오르내리며 가는데 영락없는 산촌 풍경이다. 이런 궁벽한 산골에서 고려의 국사였던 일연 선사가 하안소(下安所)로 인각사를 선택하고 ‘삼국유사’의 저술을 마무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얼마나 멀고 먼 땅이던가? 어렵게 산길을 거쳐 왔어도 막상 사찰은 평지에 있었다. 화산의 봉우리 끝에 상상의 동물인 기린의 뿔과 닮은 곳에 세웠다 하여 인각사라 명명했다 한다. 절의 맞은편 위천(渭川)이 흘러가는 강변에는 학이 깃들어 산다는 학소대(鶴巢臺)가 우뚝하다. 일반 여행객이라면 절에 눈길을 주기 전에 틀림없이 이 절벽에 주목할 만큼 절은 평범하다.
고려의 명승 일연 스님이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천년 고찰 인각사도 온통 추위 속에 서 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 이곳에서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국 불교의 본산임을 알 수 있다. 인각사 경내에는 보물 제428호인 보각국사탑과 비가 있다.
도로변 평지에 위치한 인각사에는 엄청난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침 주지 스님은 본찰인 은해사에 가서 부재중이었다. 직원에게 딸기 공양을 맡기러 컨테이너로 된 종무소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순간 발이 얼어붙는 듯했다. 계곡 바람이 차가웠다. 문을 닫고 종무소 안으로 들어가니 시골집 아랫목처럼 따뜻했고 뜨거운 차는 반가웠다. 부처님 품속에라도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보각국사탑과 비를 본다. 비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몇 동강 나 있고 글자는 알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30여 개의 탁본이 남았고 금석학자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해독이 가능하다고 한다. 글자가 명필 왕희지체여서 인기가 많아 수많은 탁본을 떴으며, 과거를 보는 선비들이 효험을 보려고 비를 갈아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게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연 스님이 남긴 민족 역사의 대기록 ‘삼국유사’
민지의 비문으로 일연 스님을 기억한다면 우리 가슴에 새겨진 영원한 비문은 ‘삼국유사’다. 40년간의 몽골항쟁 후 ‘삼국유사’가 쓰였다. 외세 침략을 극복하고 민족 자존감을 고취하기 위해 한민족의 자존 용기와 기백을 그렸다. 스님이 활약하던 시기는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몽골과의 길고 긴 항쟁을 하던 시기였다. 결국 장년기에 들어서는 원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대장경 간행에도 관여했으며, 출가 시절부터 전국의 사찰을 다니면서 민초들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았고 누구보다 그들의 힘을 믿었다. 국사라는 안락한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효도의 예를 다했으며, 당시 시대의 과제를 피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700여 년 전 일연 스님이 남긴 민족 역사의 대기록 ‘삼국유사’, 마지막 생을 불태운 그의 기록은 민족의 뿌리를 기억하게 하는 보물이다.
지금 이 시대에 왜 ‘삼국유사’이고 보각국사비인가? 인간이 되려고 인고의 21일을 견딘 웅녀의 끈기와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나라를 세우며 내세운 홍익인간 같은 사상이 필요한 때다. ‘삼국유사’에는 따뜻한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한민족 최초의 스트리퍼라 불리는 정수 스님의 이야기는 상징적이다. 한겨울 길거리에서 만난 산모에게 옷을 다 벗어주고 간 스님의 이야기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일연 스님의 생애를 새긴 보각국사비 양기(陽記)의 마지막 문장은 ‘온 산하가 다 불타 없어지더라도, 이 비만은 홀로 남아 전해주소서’라는 뜻이다. 비록 비는 부서졌어도 일연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뜻과 문장은 향기롭게 남아 시대의 등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군위 여행의 맛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많은 저작을 남긴 이윤기 작가의 고향이다. 그도 자신의 고향이 ‘삼국유사’의 고향인지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이 고을의 대표 브랜드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다. 군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김수환 추기경의 자서전을 읽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 지역의 사계와 먹거리를 요리로 표현한 김태리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가면 더욱 알찬 여행을 할 수 있다. 영화는 경쟁적 도회의 삶에 지치고 허기져서 귀향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추억 속의 시루떡은 달지 않은데 단맛이 나고 지금 먹는 떡은 짜지 않은데 짠맛이 난다.” 영화는 엄마가 딸에게 주는 인생 레시피다. 군위에서 듣는 일연 스님의 이야기는 시대와 역사가 주는 가르침이다. 군위 여행은 ‘삼국유사’라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뜻밖의 깊은 맛이 난다. 우울함을 단번에 행복감으로 바꿔주는 영화 속 음식 크렘 브륄레처럼, 코로나19 시대 위기를 극복하는 ‘삼국유사’의 비기를 찾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