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후드득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꼭두새벽부터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여니 더욱 요란했다. 아, 이런 날엔 비가 오면 안 되는데…! 하지만 전지전능한 하늘에서 하는 일에 무력한 인간이 대체 무슨 힘이 있을 텐가.
모쪼록 오전 중에나 비가 그쳤으면 하는 바람 간절했다. 시간은 저벅저벅 흘러 관광버스가 도착했다는 기사님의 전화가 왔다. 처조카의 차를 빌려 바리바리 짐을 싣고 동행할 하객들을 기다렸다.
더욱 거세진 폭우 탓에 하객들의 참석률은 매우 저조했다. 하는 수 없지 뭐, “선생님, 출발하시지요!” 관광버스 기사님도 따지고 보면 지입차(持入車) 형태의 ‘사장님’이다. 따라서 고루하게 ‘기사님’ 내지 ‘사장님’이라고 호칭하기보다는 ‘선생님’이 훨씬 낫다.
수원을 향해 출발한 버스가 도착한 건 예식 1시간 전인 오후 2시쯤.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시렁거렸다. 주변의 목련꽃은 진즉에 처참함의 종말을 고했고, 벚꽃 역시 어느새 모두 낙화한 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이윽고 하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빗길을 뚫고 와주신 분들이 정말 고마웠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와중에 호텔 직원이 와서 혼주 자리로 가서 앉으란다. 양복 왼쪽에 꽃을 꽂고 아내의 곁에 착석했다.
경력이 풍부해 보이는 사회자가 ‘성혼선언문’은 신랑 아버지께서 하실 거라며 필자를 무대 정중앙에 불러세웠다. 연습한 ‘성혼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바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양가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랑 홍관호 군과 신부 강미지 양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여러 하객들께서 모인 이 자리에서 일생 동안 함께할 부부가 되기로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이 혼인의 증인 중 한 사람으로서 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아울러 시종일관 믿음직하게 자라준 아들이 고맙고, 금지옥엽 고운 따님을 주신 사돈 어르신께도 감사 올립니다.
오늘 탄생한 이 부부가 건강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탑만을 견고히 쌓으면서 잘 살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이 덕담 하나를 추가하면서 마칩니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되 나이는 기억하지 말고, 아내는 남편의 용기는 기억하되 실수는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2018년 4월 14일 신랑 아버지 홍경석. 고맙습니다!”
다시금 허리를 꺾어 진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일반 예식장은 대부분 뷔페식이다. 따라서 정작 예식보다는 음식을 먹는 데 더 열중하는 구조다.
하여 신랑신부는 안중에 없고 축의금을 내는 즉시 식당으로 직행하는 게 관행이자 수순이다. 그러나 어제 아들의 예식은 ‘비싼’ 호텔에서 했기에 격부터 달랐다. 예식이 본 궤도에 올라야만 비로소 음식이 나왔다.
따라서 하객들은 꼼짝없이(?) 예식의 전 과정을 눈에 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덕분에 하객들의 이탈 없이 예식은 더욱 화려함을 뽐낼 수 있었다. 예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객들이 앉은 좌석을 돌며 인사를 시작했다.
아내의 옷깃을 잡아끌며 앞잡이에 나섰다. 친구와 동창들, 가족과 친인척 역시 이구동성으로 신랑 신부를 향한 칭찬을 남발했다. 어느새 만취한 죽마고우는 재작년의 딸에 이어 아들마저 결혼을 시켰으니 “너는 이제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 했다”며 부러워했다.
한술 더 떠 심지어 ‘브라보 유어 라이프(BRAVO YOUR LIFE)’라고까지 추켜세웠다.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그보다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가 더 맞는 거 아닐까 싶다.
예식을 마치니 비로소 비가 그쳤다. 집으로 돌아와 참았던 소주를 들이켰다. 술잔 속에서 “자네 오늘 수고 많았어! 이제 당신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로 더 멋지게 살아봐~”라며 주신(酒神) 바커스(Bacchus)까지 박수를 보냈다.
초등학교 친구인 옥자가 자신이 근무하던 서울대학교 농대 교양학과 사무실의 사환자리를 필자에게 물려주었다. 기회를 준 옥자가 참으로 고마웠다. 필자가 근무하던 자동차 노조 사무실은 한 달 봉급이 5000원이었지만 농대는 절반밖에 안 되었다. 그래도 그곳에 더 있다가는 숨통이 막혀버릴 것 같았기에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인생은 선택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맑은 공기를 나눠 마실 수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필자는 진흙탕에서도 살 수 있는 미꾸라지가 결코 아니었다. 물이 탁해지면 금방 숨이 끊어져버리고 마는 은어였다.
농대는 야학 시절 음악회나 연극이 있을 때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다. 농대 캠퍼스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그곳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뛸 듯이 기뻤다.
마음속에 ‘농대 교수님들은 필자가 그리도 좋아하는 서둔 야학 선생님들의 선생님들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조건 교수님들을 좋아하고 존경했다. 교양학과 교수님들은 한 분 한 분이 참으로 학구적이고 매너가 부드러운 신사들이었다. 필자에게도 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교양학과 과장님은 영어를 담당하신 조성지 교수님이었다.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하시며 혈색이 좋으신 조 선생님은 필자가 붙여드린 ‘영국 신사’라는 별명이 너무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인간성까지 좋으신 조 선생님은 흐트러진 구석을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학자로서 교재연구를 착실히 하면서도 글쓰기를 즐겨 생활수필을 써서 신동아 등의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원래 열렬한 기독교인이었으나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조 선생님은 ‘가톨릭이야말로 진짜 종교다’라고 역설하시곤 했다. 고향이 이북인 조 선생님은 근검절약의 표본이시기도 했다. 구두 뒤축이 다 닳으면 왼쪽과 오른쪽 구두의 굽을 바꿔 달아서 신으시는 등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절대로 지출을 하지 않았다.
필자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는 1원짜리로 세어서 왕복 14원을 주실 때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체구 큰 남자 어른이 잘아도 너무 잘다’라는 생각도 했지만 근검절약하시는 모습을 늘 보면서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절약하고 사셔서 그런지 자제분들을 꽤 많이 두었음에도 모두 대학교를 보냈다.
점심에는 주로 라면을 드셨다. 필자는 라면을 끓여드리곤 했다. 뚱뚱하신 체구에 땀을 뻘뻘 흘리며 라면을 드시는 모습을 뵙기가 안타까워 옆에서 부채질을 해드리기도 했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사양하시다가도 필자가 고집을 부리면서 부채질을 해드리면 어린애같이 좋아하셨다.
"내가 애란이 덕분에 너무 호강한다."
고교 시절, 필자는 적어도 세계문학전집만큼은 다 읽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농대 도서관과 학교에서 책을 빌려다 놓고 틈만 나면 책 속에 빠져 있곤 했다. 그때 조 선생님이 넌지시 지적해주셨다.
"애란아, 책은 그만 보고 공부에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니?"
그날 밖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점심식사를 하신 조 선생님이 싱글벙글 웃으시며 들어오더니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며 말씀하셨다.
“이거 우리 약혼 시계야.“
껄껄 웃으시며 시티즌 손목시계를 필자 손목에 맞게 조절해서 채워주셨다. 60대 노교수님 얼굴에 어린애같은 순진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차보는 손목시계의 차가운 감촉이 퍽 신선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시계는 얼마 안 가 고장이 났지만 조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만은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꼭 베일을 쓴 신부 같네.”
필자가 근무하는 곳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다. 사무실 탁자에 언제나 꽃을 꽂아 놓고 싶었으나 너무 가난했기에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화원에서 흰 국화와 아스파라가스를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커피 병에다 정성껏 꽂아놓았더니 교수님들이 즐거워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교양학과 교수님들은 대개 인품이 훌륭하셨다. 그중에서도 선하신 데다 겸양의 미덕까지 갖춘 이상철 철학 교수님은 철저한 학자이셨다. 이 교수님은 앉으나 서나 책만 봤다. 책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눈을 혹사시켰기에 그즈음 의사가 처방을 내리기를 “책을 그만 봐야 한다. 안 그러면 시력을 아주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했다.
교수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분은 책을 안 읽고 살 수 없는 분이셨다. 차라리 밥을 먹지 않는 게 그보다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좋은 눈을 갖고도 책 한 권 읽지 않고 방탕하게 세월을 보내는데, 열심히 연구하시는 분의 눈은 왜 나쁜 것일까. 안타까웠다. 이 교수님은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백면서생인 데다가 세속적인 영달도 바라지 않는 듯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의 남자였다. 독신주의자이셨던 교수님을 보면서 막연하게 이런 분 뒷바라지를 하며 생을 보내는 것도 행복하고도 보람 있는 삶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어 교수님은 릴케의 시 ‘가을날의 기도’를 번역하신 송영택 시인이었다. 배가 튀어나온 송 선생님은 흘러내리는 허리띠를 연신 치켜 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날렵한 몸매에 순수한 눈빛을 가진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고 있던 필자에게 배 나온 시인은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다.
가장 젊은 국어과 홍윤표 교수님은 정의감과 의협심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순수와 열정을 갖춘, 날카로운 지성과 달콤한 감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교수님은 필자만 보면 “이빨 두 개 내놔라, 이빨 두 개 내놔” 하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필자 이름이 ‘배비장전’에 나오는 기생 애랑과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악의 없는 농담에 한바탕 웃곤 했다.
교수님의 아버님은 평소에 “사람을 믿어라, 사람은 근본적으로 착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돈으로 어마어마한 3000만 원(?)인가를 사기당한 후부터는 “사람을 믿지 말아라” 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교수님은 사람을 믿고 싶고, 믿을 것이라고 하셨다. 천사가 따로 없었다. 필자 눈에 비친 교수님은 천사 같은 분이었다. 안경 쓴 남자 천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양학과 사무실이 있던 농대 신관은 가운데가 사각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잔디가 파랗게 심어져 있었다. 늦은 봄이면 초록색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가 여기저기 소담스럽게 환히 피어 있어서 너무도 아름다웠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아침마다 방긋 웃던 샛노란 민들레의 미소가 필자에게 행복감을 듬뿍 안겨주곤 했다. 그런데 5월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 필자는 참담해졌다. 어제까지 피어 있었던 민들레들이 모두 날카로운 낫에 베어져서 한쪽에 모아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베어져버린 민들레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기 좀 보세요. 베어진 민들레들이 마치 여인네의 퇴색한 옷자락 같아요.”
다른 교수님들도 있었지만 특별히 홍 교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다. 필자의 계산이 들어맞은 것인지 교수님께서 감탄했다.
“야! 박 양 표현력이 대단하구만”
따가운 햇볕에 지친 나무들이 ‘자울자울’ 졸고 있는 듯한 어느 날 오후였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홍 교수님과 같이 서호 둑을 거닐었다. 햇살이 온 천지에 내려앉아 눈이 부셨고 호수의 잔물결은 가장자리에 박혀 있는 돌들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비어 중에 배를 가리키는 비어로 ’배때기‘, ’배때지‘ 등이 있다니까 여대생들이 어찌나 배를 잡고 웃던지 강의를 계속할 수가 없었어요."
교수님은 강의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셨다. 그때 재미있게 들으며 웃던 필자의 눈에 호수 둑 밑에 피어 있는 자그마한 노란 꽃이 들어왔다.
"어머, 저 꽃 참 예쁘다."
무심결에 감탄했더니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박 양, 내가 저 꽃을 따다 줄까요?"
가지고 있던, 책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손가방을 필자에게 맡기시고는 조심조심 내려가 그 꽃을 따다 주셨다. 그 장면은 필자로 하여금 물망초의 전설을 연상시켰다. 나를 잊지 말라 했다는 슬프디슬픈 전설이.
교수님은 따다 주신 꽃을 소중하게 받아 들고 필자는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자유라 했다.
그날 홍 교수님은 너무나도 멋진 기사님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값진 것은 역시 사람의 인품이다. 교양학과 교수님들은 필자가 근무하는 3년 동안 늘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셨고 갈등을 겨자씨만큼도 보여주신 적이 없다. 주간으로 나오던 대학신문 또한 필자에게 좋은 선생님이 돼주었는데 훌륭한 소설평이나 칼럼 등은 반드시 그날 일기에 적어두고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참으로 훌륭한 집단에서 보낸 세월이었다. 그래서 취업을 앞둔 제자들에게 필자는 늘 이렇게 강조한다.
“돈 몇 푼 더 받는 곳보다 분위기 좋은 직장을 골라서 가라. 그래야 배울 것이 많고 좋은 배우자를 만날 확률도 높다.”
느닷없이 옛날 일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가다 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날보다 아팠던 상처들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딸들을 향한 시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며느리인 필자가 극심한 차별을 당했을 때, 또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아내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남편. 눈앞의 억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시절이다.
이럴 때 여자들은 대부분 친구나 지인을 만나 수다로 그 상처를 달래고 스트레스를 푼다. 그들은 함께 화내고, 욕하고, 흥분하면서 한마음이 되어준다. 그렇게 한편이 되어주는 게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도 결혼 초에는 친구들과 이런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푼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법은 품격만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을. 그 후로는 절대로 친구나 지인 앞에서 가정사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고통 속에서 힘겨운 날들을 보낼 때마다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지지해주면서 필자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필자의 두 언니들이다.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언니들에게 당장 이혼하겠다고 하면,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선물로 준 사람이니 좀 봐주면 안 될까?”
“하나님이 네 짝으로 맺어주셨잖니.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더 기다려보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또 딸들의 잘못은 감싸주면서 며느리인 필자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워 나무라는 시어머님과는 억울해서 더는 같이 못 살겠다고 하면, 이렇게 말했다.
“한 치 걸러 두 치라고, 며느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딸들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미처 며느리 입장을 헤아릴 여유가 없어서 그럴 거야. 시어머님보다 친정어머니에게 마음이 더 가는 우리들 입장과 같지 않겠니? 언니들 생각에는 네가 그렇게 이해하고 마음을 푸는 게 건강에도 좋고 네 마음도 평안해지지 않을까 한다.”
남편이 사업 실패를 해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제 가족도 못 지키는 무능한 남편과는 이혼하는 게 낫다고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니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삶이 막막해도 너는 엄마니까,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어려울수록 부부가 힘을 합해야지. 네 남편이 고의로 사업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려고 애쓰다가 그렇게 된 건데, 남편 심정은 지금 어떻겠니? 너도 힘들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네가 옆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면 좋겠다. 그런 게 부부가 아닐까?”
언니들은 단 한 번도 함께 화내고, 욕하고, 흥분한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면서 필자를 한결같이 지켜줬다. 어릴 때는 언니들의 존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언니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세상의 모든 언니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 든 지금에서야 언니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참 철이 없는 막내다. 그런데도 한 번도 언니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해본 적이 없다. 이제야 가슴 벅차게 마음을 전해본다.
“몇십 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언니들! 고맙습니다~”
그냥 개띠가 아니다. ‘58년’ 개띠라야 진짜다. 개띠 앞에 ‘58년’이 붙으면 마치 대단한 인증 마크를 받고 태어난 것만 같다. 전 세대를 아울러 태어나면서부터 기 쎈(?) 아이콘으로 살아가고 있는 58년 개띠가 올해 벌써 환갑을 맞이했다. 베이비부머로 불리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한국 사회 속 이야깃거리이자 사회 현상 지표가 됐다. 이들의 특별했던 인생 이야기와 지금의 모습을 담기 위해 58년 개띠 모임 현장에 찾아가 봤다.
58년 개띠 형님들 문 좀 열어주세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58년 개띠 모임은 많아 보였지만 저마다 철옹성을 방불케 하는 완벽 수비. 58년 개띠가 아니면 접근 불가였다. 빗장을 열어젖히는 게 쉽지 않았다. 모임 운영자에게 쪽지라도 보내봤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불허(不許). 그래도 기다림 끝에 낙이 있다고 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에서 연락이 왔다. 네이버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국 58개띠방’이다. 작년 1월 개설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4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여들어 밴드는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채팅방도 6개로 나눠져 300명 넘는 개띠 남녀가 온종일 뜨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게 바로 개판(?). 동갑 친구들은 이름을 트는 순간 반말을 하고 다짜고짜 이름을 부른다. 처음 들어온 회원이 당황하는 시간은 5분이면 충분하다고 모임의 리더를 맡고 있는 박지양 씨가 말했다.
“이 방은 말 그대로 전국 모임방입니다. 각지의 58년 개띠들이 모여 있어요. 사업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당연히 주부도 있습니다. 전국 58개띠 친구들의 친목단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화도 하고 서로 알고 지내자는 개념이죠.”
전국 58개띠방의 공개창 대화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이뤄진다. 새로운 친구들이 오면 반기고 마음속 깊이 잘 왔다며 안아주는 모습이 정답다. 대화창에서 자주 보고 대화를 하다 보니 실제로 만나 인사를 해도 금방 알아보고 쉽게 말을 놓는다고 한다. 옛 친구를 만난 느낌처럼 말이다.
2017년 12월 15일, 대망의 수도권 송년모임
마침 얘기를 나누고 정식으로 인터넷 밴드 모임에 들어가 보니 수도권에서 송년 번개모임을 갖는다는 소식! 그럼 어디 한번 급습해볼까? 염치불구하고 가겠다고 했더니 기분 좋게 반겨주신다. 서울·경기 지역에서 스무 명가량의 58개띠 친구들이 모여 친목을 다질 예정이라고 했다. 잠시 잠깐 느낀 인터넷 속 활기찬 느낌이 실제 얼굴을 봤을 때도 똑같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약속 당일, 시간에 맞춰 사당동의 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연말 송년모임이 많은 기간인 만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개띠 모임과의 만남. 벌써부터 고기를 굽고 술을 나눠 마시는 중이었다. 다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일까? 한두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날 첫 만남이라고 인천에 사는 최선희 씨가 귀띔해준다.
“친구 영림이가 우리 가게에 와서 재밌는 모임이 있다고 해서 들어와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여기 들어온 지 한 달 보름밖에 안 됐는데 만난 지 1년도 더 된 느낌이에요. 58년 개띠들은 이런게 좋아요. 이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게 이토록 설레는 일인 줄 몰랐어요.”
이때 전라도 지역 총무를 맡고 있는 김미정 씨가 등장. 회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미정 씨는 수도권 모임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 완주에서 본인이 직접 만든 유자차를 가지고 왔다.
“예전에 수도권 친구들이 호남 지역 모임에 참석했어요. 서로 이렇게 오고가는 거죠. 58년 개띠라는 것 하나만으로 부담이 없는 거 같아요. 진짜 친구를 만나는 거죠. 그리고 2018년은 우리 58년 개띠들에게 특별한 해입니다. 개띠 해이고, 또 우리 모두 환갑을 맞이하고요, 삼재도 나가는 삼재라고 하더라고요. 58년 개띠들 모두 행복한 한 해가 될 것 같아 좋습니다.”
‘베이비부머’, ‘무시험제도’
어찌됐든 ‘58년 개띠’. 무슨 때만 되면 세상의 화젯거리다. 그 어떤 연도에 태어난 이들이 환갑이 됐다고 집중조명 받은 적이 있던가? 자신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왜 그렇게 회자되고 있는지 신성애 씨에게 물었다.
“(한국)전쟁 끝나고 생활이 좀 안정될 때쯤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은 것 같아요. 1958년에 나라 재건하느라고 바쁘게 살면서도 어르신들이 집중적으로요.(웃음)”
무엇보다도 58년 개띠 하면 나오는 얘기가 중·고등학교 무시험 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곽기복 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입학할 때 무시험 제도로 바뀌었어요. 그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이어서 공형복 씨가 할 말 많은 듯 끼어들었다.
“우리가 어떤 세대냐 하면 한문을 배웠다가 안 배웠다가 했었어요. 박지만이 한문 싫다고 해서 한문이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중학교도 무시험으로 갔어요. 고등학교도 평준화가 됐어요.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가고 싶었는데 발이 묶였어요. 미쳐버리는 거죠. 우리 58년 개띠만큼 웃긴 세상을 산 세대도 없을 것입니다. 피해자죠. 내 인생을 확 바꿔버렸습니다.”
과거의 경쟁 상대, 지금은 얼싸안고 절친
역사적으로 척박했던 시절, 하필이면 같은 해에 많이도 태어나 피곤하고 힘든 삶을 함께 이겨낸 58년 개띠 사람들. 안양에서 온 박태관 씨는 나이가 들어 나름의 여유가 생겼기에 이렇게라도 안부를 묻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58년 개띠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성장해온 사람들입니다. 앞만 보고 치열하게 살았어요. 자식들 다 키우고 여유가 생기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온 거죠.”
모임에서 만나는 58년 개띠 친구들은 지역, 사회, 지위를 초월해 서로 교감하고 만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도 같은 시대를 산 너의 인생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처음 만남에도 불신 따위는 접어놓는단다. 뜨겁게 살아온 58년 개띠들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각종 포털 사이트에 ‘58’만 쳐도 줄줄이 나오는 58년 개띠들의 모임들. 왜 그들이 모이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56년 개띠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덕이 재주를 이긴다."
덕승재란 공자가 말한, ‘德勝才(덕승재) 謂之君子(위지군자), 才勝德(재승덕) 謂之小人(위지소인)’에 나오는 말이다. 즉 재주보다 덕이 높은 사람은 군자요, 재주에 덕이 못 미치는 사람은 소인이라는 의미다.
상암에 있는 맛집인 '덕승재'에서 근사한 한정식을 만났다. 비취색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그릇에 야채샐러드, 탕평채, 가자미구이, 매생이죽, 훈제 오리 등이 나왔고 후식으로는 잣이 동동 뜬 매실차가 나왔다. 밥그릇과 수저는 동으로 만든 제품을 쓰고 있었다. 플라스틱 그릇을 엄청 싫어하는 필자는 큰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훌륭한 맛집이었다.
영등포 비콤 회원과 더불어 담소를 나누며 가진 식사였는데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힐링을 시켜준 행복한 시간이었다. 가끔은 그동안 사느라고 수고한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는 생각으로 분위기 있는 맛집에서 밥과 분위기를 함께 먹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의 대장인 박계선 이장님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더 커 보였다. 한 해의 비콤 모임을 마감하는 오늘만큼은 이장님이 꼭 함께해주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일정은 시조 시인 차도연 선생님이 기획해주셨다.
"좋은 곳만 골라 안내해주신 차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독특한 구조의 '북 바이 북'이라는 서점은 상암에 있다. 카페와 함께 운영되어 책을 구입하는 고객에게는 한 잔의 차가 서비스로 제공된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서점의 구조는 여 사장님의 감성이 묻어나 있는 듯했다. 작은 공간에 고객카드와 책들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오밀조밀하니 예뻤다. 고객들이 손글씨로 적은 카드에는 그 책과의 만남에 얽힌 사연이 적혀 있었다. ‘북 바이 북’은 저자와 독자들이 수시로 만남을 갖는 공간인 듯싶었다. 일정표에는 저자와의 만남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필자가 평택여고에서 재직할 때 청명한 가을날이면 창밖을 내다보며 제자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이렇게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면 귀여운 병아리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해야 해요."
그러곤 필자와 제자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가꿔야 하는 것은 마음밭이다. 워드프로세서 수업을 할 때는 박목월 시인이나 서정주 시인의 시로 수업을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8세, 여고 2학년 제자들의 마음밭을 곱게 가꿔주고 싶어서였다. 바로 그 시를, 재직할 때 제자들 앞에서 몇십 번을 낭송했던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을 오늘 '북 바이 북' 카페에서 영등포 비콤 벗님들을 위해 낭송했다. 필자의 낭송이 잠자고 있던 벗님들의 감성을 제대로 깨웠나보다. 몇몇 분들은 눈물이 났다고 했다.
'공대생이 반한 정재찬 교수의 오감만족 시 강의'라는 책을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평생 시와 음악을 좋아하며 살아온 필자의 흥미를 끌 만한 책이었지만 끝까지 볼 자신이 없어 끝내는 놓고 왔다. 그리고 금세 후회하고 있다. 몇 페이지를 보더라도 샀어야 했는데 말이다.
요즘은 출산율 저하로 인구감소를 걱정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둘만 낳아 잘 키우자’는 표어가 골목마다 나붙을 정도로 정부에서 산아제한을 적극 장려했다. 당시의 자녀의 평균수가 6명이라고 했으니 많긴 많았다.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필자는 생일날 아침에 쌀밥정도 먹는 것으로 생일날 호사는 끝났다. 요즘처럼 저녁외식이나 가족들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의식은 아예 모르고 살았다. 다만 농경사회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니 부모님 생일은 생신이라고 높여 부르며 인근에 사는 자식들이 모여들었다.
가족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것은 서로 가족임을 인식시켜준다.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밖에 나가서도 천대 받는다는 생각은 옳다. 가족의 생일을 기념하고 챙겨주는 행사는 어느 집에서나 잘한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일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 외식도 하고 케이크 위에 나이숫자대로 촛불도 밝혀 생일축하 노래와 촛불 끄는 행사를 하고 있다. 가족들이 손뼉 치며 노래하고 웃음꽃이 핀다. 지켜보는 가장인 필자도 흐뭇하다. 돌아가며 생일을 맞은 식구에게 한마디씩 덕담을 하도록 한다.그러나 필자의 생일만은 필자가하는 독특한 의식이 있다. 식구들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간편한 옷을 고쳐 입은 후 부모님 산소 쪽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마음속으로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는 말을 먼저 한다. 다음에 자녀들의 근황도 말씀 올리며 지금처럼 계속 보살펴 달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렇게 큰절을 올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부모님의 영혼도 좋아하실 것 같다는 느낌은 받는다.
산소 쪽 방향은 마음속 느낌으로 판단한다. 나침판을 사용하지 않으니 틀릴지도 모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내는 이런 필자의 행동을 보고 있지만 특별한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너희네 가정사정 이런 문제를 조상님께 보고하더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뜻을 쫒아서 실행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보아 느낌으로 짐작할 뿐이다.
21세기 문명과학시대에 귀신은 없다. 하지만 잠시나마 부모님이 우릴 키울 때 고생하시던 모습도 떠올리며 건강한 몸을 주신데 대해 부모님께 늘 감사한다. 생전에 자식 걱정만 하시던 분들이 부모님들이시니 하늘나라에서도 언제나 가족을 지켜주실 것으로 믿으니 든든한 빽이 있는 기분이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생일날 축하 인사만 받으려 하지 말고 나를 있게 해준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먼저다. 건방진 소리지만 자식들에게 효행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의식이 나는 남과 다르다는 또 다른 자신감이다.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평범한 결혼식을 해왔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풍부한 것도 아니어서 보통 사람들이 해온 방식대로 그렇게 혼례를 준비하고 양가에서 교통이 편리하고 부담 없는 예식장을 잡았다. 그러나 필자가 지켜본 요즘의 결혼식은 다양했다. 필자는 이러저러한 사유로 제자들이 혹은 친척들이나 지인들이 주례를 부탁해 지금까지 100여 차례 주례를 섰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혼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첫째, 결혼식 장소다. 평범한 예식장이나 성당과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많이들 한다. 그러나 호텔에서 하는 것을 보면 좀 지나친 면이 있다. 물론 내가 돈 벌어 내 마음대로 돈 좀 쓴다는 데야 뭐라 할 수는 없다. 수십, 수백 개의 화환이 놓여 있고 웬만하면 조화를 사용하는 신랑신부들이 입장하는 통로가 생화를 꽂아 수천만원이 들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너무하다 싶다. 그렇다고 호텔 식사비가 기본 10만원씩 하니 일반 예식장의 두 배는 더 축의금을 내지 않을 수도 없다. 좀 가진 것을 자랑하려면 진정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해 ‘우리 자녀의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오셔서 고맙습니다. 약소하지만 간소한 음식을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축의금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이러면 얼마나 멋지겠나 싶다.
둘째, 축가다. 요즘은 전문 성악가가 많이 축가를 부르기도 하지만 신랑이 신부를 위해 부르는 축가도 제법 신선하다. 가끔 음 이탈을 하는 것은 분위기를 훨씬 더 재미있게 한다. 그러나 신랑만 부르지 말고 부부가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둘이 미래를 약속하며 손잡고 부르는 노래는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할까?
셋째, 화환이나 축의금이다. 수십 개 수백 개 화환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최소한 화한 두 개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화환은 쌀 쿠폰이나 기타 생필품 쿠폰으로 받아 보육원이나 양로원에 기부하면 어떨까 싶다. 화환은 몇 시간 후 용도를 다한다. 정말로 아까운 생각이 든다. 축의금도 의무적으로 몇십 퍼센트 정도는 유니세프에 기금으로 쾌척하여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다.
넷째, 혼수품이다. 혼수품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사고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사도록 서로가 협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로 혼수품 문제로 양쪽 집안의 감정이 악화되어 날짜까지 잡아놓은 결혼을 파기하는 경우도 봤다.
다섯째, 하객 문제다. 꼭 초대할 사람만 진심으로 초대하는 것이 좋겠다. 필자도 청첩장을 받아보지만 평소 연락도 없었던 그것도 수십 년 전 만남이 있었을 뿐인데 불쑥 청첩장을 보낸다. 그냥 무시하자니 찜찜하고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그럴 생각이라면 직접 전화 한 통 해서 안부도 묻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맞다.
여섯째, 주례 문제다. 주례는 평소 자신이 존경하는 은사나 주례를 하실 만한 자격을 갖춘 분이 하시는 게 맞다.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실 만한 어른을 모시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씀을 듣는 것이 원칙이다. 적어도 결혼식이 끝나면 전화를 드려 “저희 결혼을 축하해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희도 살아오신 것처럼 배우고 따르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는 해야 한다. 그러나 결혼식 후 감사 사례는 고사하고 전화 한 통 하는 사람도 드물다. 적어도 필자가 결혼했을 때는 결혼식 날 주례 선생님과 몇 해 동안 부부가 함께 만나 식사도 하고 그동안의 안부도 묻곤 했다. 요즘 결혼식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해서 씁쓸하다.
최근 결혼 모범 사례가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유명 탤런트 원빈과 이나영 부부가 톱스타의 편견을 깨고 조촐한 결혼식을 비밀리에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떠들썩하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톱스타 부부다. 그런데 언론도 철저히 따돌린 채 강원도 정선의 모처 계곡의 숲속 민박집에서 혼례를 올렸다. 양가 친지 한집에서 약 50명 정도씩만 초대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평소의 소신대로 “평생을 약속하는 자리! 최대한 조용히 치르고 싶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비록 필자와는 관계없는 남이지만 진정으로 이들 부부가 멋진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어주고 싶다.
이 얼마나 멋진 결혼식인가? 우리도 이제 성숙한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고 서로 이웃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례를 하다 보면 양가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축하해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마음 따뜻하게 보여 반가움이 앞선다.
함께 브라운관에 울려 퍼졌던 이 말. 바로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이 라는 군인 대상 TV 프로그램 사회를 보면서 마지막에 외치던 멘트다. 어느새 칠순을 훌쩍 넘긴 그는 요즘 인기 강연자로서 제2의 인생을 숨가쁘게 살고 있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그의 소식을 우리는 듣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프로그램의 종영,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졌던 그의 침묵 뒤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뽀빠이’다운 건강을 뽐내며 살고 있는 그를 만나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활동 안 하세요?”
‘뽀빠이’ 이상용과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인데, 식당 주인이 살갑게 물어왔다. 로 전국을 누비며 당대 최고의 MC로 활약했던 그를 한참 동안 TV에서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물을 것이다.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날리면서 대답했다.
“너무 많이 해요.”
그 말대로다. 그는 요즘 하루에 서너 개의 강연을 뛰고 있다. 한 달이면 쉬는 날을 빼고 대략 오륙십 건에 달한다. 기자가 그를 만난 것도 중구보훈회관의 강연이 끝난 뒤였다. 1990년대 전성기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는 다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73세의 나이에.
죽지 않으려고 한 운동
이상용이라고 하면 누구나 ‘건강’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듯이, 그는 7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건강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기초 체력이 약하지. 여섯 살 때까지 누워 있었거든. 일곱 살 때 처음 걸음마를 뗐어요. 그래서 안 죽으려고, 삶의 의욕이 강했지.”
그에게 건강은 태어날 때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서 쟁취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한 상태로 아버지를 만나러 열 달 동안 부여에서 백두산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만나지 못했고, 다시 부여로 돌아와 그를 낳았다.
열 달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그는 12세까지 여덟 가지 병을 앓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13세에 아령 운동을 시작해 18세에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 미스터 고려대, 고대 응원단장을 거쳐 ROTC 탱크 장교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는 우리가 아는 ‘뽀빠이’의 삶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 있음에 감사
그에게 70세가 넘어서도 젊음을 유지하는 건강 비법을 물어봤다.
“건강? 밥 먹으면 돼. 오래 살려면 나이를 먹으면 되고. 그리고 숨쉬기 운동이 중요해. 숨쉬기 운동은 하다가 안 하면 죽어(웃음).”
슬쩍 치고 들어온 농담과 함께 그는 자신이 평생 담배, 술, 커피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찬물을 마신다고 한다. 밤 동안 속에 쌓인 노폐물을 씻기 위해서다.
“아침은 치즈, 계란, 바나나 하나씩 먹어. 소식이야. 그리고 저녁은 일찍 먹고. 최근에는 콩비지와 두부를 좋아하게 됐어. 고기는 일주일에 두 번 먹고.”
그는 인생의 마지막 승리자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인명은 제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는 날까지 사람들이 자신만 보면 즐거워지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단다.
“사람들이 내 강연을 들으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헛살았다’ 하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
모든 것을 무너뜨린 억울한 누명
이상용과 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89년 4월에 처음 방송을 시작해 1997년 3월에 종영된 는 군인 위문을 예능으로 만든 신선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국민 예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지막 코너인 ‘그리운 어머니’는 를 상징하는 코너로 무수히 패러디되었다. 하면 “뒤에 계신 분은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를 외치는 장병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의 사회자였던 이상용은 를 의미하는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건이 터진다. 공금횡령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당시 그는 사회봉사와 모금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주력한 것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이었다. 그런데 1996년 11월
녹화 도중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쳤고 녹화가 중단됐다. 그들은 경찰이라고 주장하면서 심장병 어린이 기금 횡령 혐의로 이상용을 수사한다고 했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고 온갖 매체에서 그를 횡령범으로 몰았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출처 불명의 소문들이 퍼져나가더니 마치 진실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벤츠 S500을 탄다, 집이 40억짜리다, 만 평이나 되는 땅이 있다….’
진실은 얼마 안 가 드러났다. 검찰에서는 조사를 착수한 지 3개월 만에 그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을 이용해 횡령을 일삼은 파렴치범’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제대로 된 해명 기사도 내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아무도 나한테 확인조차 하지 않았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한지.”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용은 42만원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벤츠S500을 탄다’는 괴소문과는 달리,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 82억원을 쓴 그는 돈 한 푼 없었다. ‘횡령범’ 이미지가 씌워져 방송에서 활동할 수도 없었다. 먹고 살려고,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훈장을 세 개나 받았는데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고 대서특필하면 40년간 해온 일이 어떻게 돼? 나쁜 놈들이야.”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그에게 누명을 씌운 걸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가 당시 제안받은 국회의원 출마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권의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불쾌하다는 듯 그때의 기억을 단답형으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이상용의 목소리에는 아직 씻지 못한 분노와 억울함이 느껴졌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도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전 재산을 털어가며 무려 567명을 치료했다. 그러나 치료받은 아이들 중 단 3명만 연락이 닿았다.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는 안 해. 다만 좀 서운한 것뿐이지. ‘고맙습니다’ 한마디만 해줘도 좋을 텐데…. 그런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못 나서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힘든 시절, 이상용에게 위로가 됐던 것은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김동길 박사가 해준 말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걱정 마라. 눈이 왔다. 쓸지 마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난다’고 말씀하셨고, 법정 스님은 ‘자루에 너를 넣고 흔든다. 많이 담으려고 그런다. 하루 종일 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땅에다 놓으면 흔들림은 없어지고 너는 많이 담기는 자루가 된다’고 말씀 주셨지. 김동길 박사는 ‘강물이 흐르다 보면 위에서 오줌 누는 놈이 있다. 그렇다고 강이 지려지지 않는다. 너는 흘러가서 큰 바닷물이 되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고마운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준 말대로, 자신을 폄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단다. 그들은 이쪽에서 상관하지 않으면 스스로 죽는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견뎌내면서 단단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멋지게 살다 간 놈’으로 기억되고 싶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매일 명동성당에 간다. 아침 6시면 성당에 앉아 있는 그를 볼 수 있다. 눈비가 와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문득 그의 얼굴이 보살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가 겪은 일들, 그리고 그것을 견뎌낸 세월이 새겨졌기 때문일까.
“법정 스님이 ‘너는 불자다’라고 말씀하셨지. 내 얼굴이 지장보살인데, 지장보살은 베푸는 보살이라고 하시면서 절도 다니라고 하셨어. 그래서 절도 다녀(웃음).”
그는 사회를 보는 것보다 강연하러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서 외로울 때는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사우나, 그리고 독서를 하지. 내가 책을 좋아해.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도 하고.”
그의 큰딸은 쉰 살, 아들은 마흔두 살, 외손주는 열일곱 살이다. 그는 자제들이 잘 자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우직하게 한마디로 말했다.
“멋지게 살다 간 놈.”
그는 마지막으로 독자들을 위해서도 한마디했다.
“브라보 독자님들, 뺏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세요. 악착같이 사는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측은합니다. 돈은 쫓아가면 도망가고 외면하면 찾아옵니다. 그저 오늘을 즐기세요.”
‘행복’이라는 타이틀을 넣어 만든 명함이 많다. 이런 분들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남들에게 작은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로 대부분 뾰족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다. ‘행복 전도사’, ‘행복 바이러스’, ‘행복 코치’, ‘행복 아카데미’, ‘당신의 행복을 지켜드립니다’ 대략 이런 종류다. 방문 요양보호원을 운영하는 분인데 이분의 상호는 ‘00 행복 나눔 요양원’이다. 필자가 한마디 했다. ‘기왕이면 통 크게 행복 몽땅 드림 이라고 하지 쩨쩨하게 행복 나눔이라고 합니까?’ 하며 웃은 적이 있다.
누구든지 행복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말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명함에 행복을 드린다는 분들은 행복이 남아도는 진짜로 행복한 분일까? 자신 있게 ‘예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두가 평생을 행복이란 단어에 매달리며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왜 행복해지지 못할까?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삶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하다.’라고 한다. 즉 주관적이다. 아무리 비단옷에 고기반찬을 먹고 남들이 우러러 보면서 저분은 참 행복할 것이다. 라고 해도 막상 당사자가 ‘너희들은 모른다, 지금 내속이 얼마나 타 들어가는지.’ 하면서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많이 가지면 행복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로 생각한다. 남들보다 돈이 많고 잘생겼으면 행복할 것이다. 남들보다 건강하고 자식들도 다 잘되어 걱정근심이 없으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돈이 많아도 더 벌고 싶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도 더 잘하는 아이와 비교를 하면서 만족을 못한다. 몇 백억의 돈이 있으면서도 부정한 방법으로 검은 돈을 받아먹다 들켜 쇠고랑차고 재벌들도 형제간 더 가지려고 소송싸움 하는 걸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에게 아침인사로 ‘잘 잤어?’하고 먼저 물어본다. 쉽고 간단한 질문이다. 아내의 대답은 한결같다. ‘응 잘 잤어.’ 설령 몸이 찌뿌듯해도 ‘아니 잠 잘 못 잤어.’ 하지 않는다. 인사치례이고 잘 잤다고 말하는 것이 서로가 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사를 할 때 ‘안녕하세요?’하면 ‘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아니요. 안녕하지 못해요.’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긍정적인 답을 돌려받는다.
‘자발적 가난’ 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님이나 성철스님 같은 분들의 삶이다. 이분들은 스스로 가난의 길로 들어서며 남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본인은 행복한 삶을 마쳤다. 나이 들어가면서 욕심을 줄이기로 했다. 이 정도면 잘 사는 것이고 우리아이들도 이만하면 부모한테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워지고 행복해진다.
아내와도 가끔씩 행복을 이야기한다. 아직은 건강하고 직업도 있고 게다가 딸, 아들이 모두 결혼해서 손자, 손녀도 있으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서로 물으면 서로 행복하다고 대답을 해준다. 일용할 양식은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으면 만족해야 한다. 매사에 이만하면 풍족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이라고 자주 말하니 덩달아 행복해진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속담을 믿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니 행복하다. 나이 들면서 노욕을 버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식사 한 끼에 오천 원짜리도 있지만 오십만 원짜리도 있다. 내 마음을 낮추니 오천 원짜리 밥도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하다. 소박한 행복은 느끼는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