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명: 읽다
- 지은이: 김영하
- 출판사: 문학동네
인간은 누구나 유한한 인생을 산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인간은 그 한계를 허물어트린다고 프랑스 작가 ‘샤를 단치’는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책을 어떤 방법으로 읽어야 소멸에 맞서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답이 이 책에 있다. 이 책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 ‘책’을, 백마 탄 왕자인 ‘독서’가 어떻게 깨워야 하는지, 작가의 문학 경험으로 부드럽고 자상하게 알려준다. 작가 ‘김영하’의 사유와 통찰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산문 3부작 ‘보다’, ‘말하다’에 이은 마지막 편이다.
작가는 그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에서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이 산문에서는 그가 시인이 되었다. 여섯 날 동안 책과 독서에 관해 거침없이 탐사하며 특유의 어법으로 ‘책의 우주’에 접속하는 길을 알려준다. 독자는 그 과정에서 문학이란 ‘타인의 삶’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 삶을 비춰보는 일임을 깨닫는다. 이런 책을 통한 사유의 행위야말로 내가 서 있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내적 근력을 키우는 일이며 때론 즐겁고, 때론 고통스러운 정신의 미로 세계를 여행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자각하게 된다.
카프카는 그의 대표작 ‘변신’에서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트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내가 읽는 책을 날이 선 도끼로 만드는 방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 책 읽은 소감: 책을 읽는 내내 처음 간 여행지를 그곳을 아주 잘 아는 현지인과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독서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설(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책의 에너지를 삶의 에너지로 변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은 후 가슴으로 전해지는 울림이 가벼운 점은 아쉬웠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문학적 경험의 매개로 사용한 작품이 서구 소설 중심이라는 점 역시 아쉬웠다.
▶ 평점: 3.91 (5점 만점)
▶ 논제
- 작가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을 하며, 한 편의 소설 읽기는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지는 크레페케이크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은 아니지만 본 도서 ‘읽기’는 여러분에게 어떤 맛으로 다가왔나요? (p.102)
- 작가는 "우리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 중에서 소설을 집어 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비유합니다.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 좋게 헤매는 경험"이라고 말하는데요. 이런 작가의 생각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p.101)
-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 특히 나를 작가로 만든 문학 작품들에 바치는 사랑 고백"이라고 하며, 책에서 계속 등장했던 ‘돈키호테’와 ‘에마 보봐리’, ‘라스꼴리니코프’ 같은 인물로부터 자신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책 속의 인물’을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p.207)
- 작가는 우리 손에 나뭇잎 한 장을 얹어주듯 책 '읽다'를 첫 장부터 차분하게 자연의 세계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면서 "소설은 일종의 자연이다. 독자는 그것의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그 자연을 탐험하면서 소설이라는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을 전개한다고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허구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현실처럼 존재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그럼 우리의 삶 역시 자연이 됩니다. 여러분이 기록에 남기고 싶은, 자연이 되는, 소설이 되는 여러분 인생 최고의 순간은 무엇인가요? (혹은 소설로 창작하고 싶은 내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p.110, p.132, pp.138~139)
- 작가는 소설을 읽는 것은 광대한 책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자 다른 책으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로 소설과 소설, 이야기와 이야기, 책과 책 사이의 연결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로서 큰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특히,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소설과 소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가 자기만의 책의 우주, 그 지도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는데요. 여러분이 읽은 소설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경우로 어떤 사례가 있나요?
대한민국을 재발견하는 재미와 별개로 간절한 것이 바로 ‘먼 이국’으로의 여행이지만 지금은 해외로 나가는 발길이 묶여버린 상황. 언제까지 코로나19가 잦아들기만을 넋 놓고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홀로,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저비용 고효율로 즐길 수 있는, 이름하여 ‘한국에서 즐기는 외국 여행’ 가이드. 인생은 짧고 갈 곳은 많다. 한국에서 만나는 독일, 스위스, 사막, 지중해, 중국, 스페인 산티아고, 아프리카 등 지금 당장 가슴이 끌리는 그곳으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해외여행)을 떠나보자!
한국에도 사막이 있다?
신두리 해안 사구
우리나라 최대의 해안 사구 지대로서 해안 사구가 지닌 환경적, 생태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2년 11월 해양수산부에 의해 생태계 보존 지역으로 지정됐다. 오랜 세월 바람에 의해 날려온 해안의 모래가 쌓여 만들어졌으며 길이 약 3.4㎞, 폭 약 200m에서 최대 1.3㎞ 규모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사구 표면은 대부분 사초로 덮여 있으나 육지 쪽에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고 해안 가까이 해당화도 자라 사구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두리 해안 사구는 현재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생태계 보존 지역이니 자연을 아끼는 각별한 마음도 가져가야 한다.
위치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유럽풍 숲속 정원을 거닐다
제이드 가든
숲속 정원 ‘제이드 가든’(Jade Garden). 새소리와 물소리가 어우러진 자연의 공간 만병초원을 비롯해 어릴 적 즐겨 읽고 보던 동화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모티브로 지은 유럽풍 마을, 젊은이들의 프러포즈 장소로 인기가 좋은 이탈리아 웨딩가든, 그리고 수생식물원, 고산식물원, 꽃물결원, 피크닉가든, 은행나무미로원, 키친가든, 재배온실 등을 천천히 거닐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보자.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 등의 휴게 공간도 마련돼 있고 가든 가꾸기 프로그램도 상시 진행한다. 하절기 기준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9500원, 경로우대 7000원. 굴봉산역-제이드 가든 왕복 셔틀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위치 강원 춘천시 남산면 서천리 햇골길 80
독일 교포들의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
독일마을
1960년대 독일의 광산과 병원에서 일해온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은퇴 후 한국에 돌아와 살 수 있도록 마련한 생활 터전이다. 독일에서 반백 년 가까이 살았던 교포들이 실제로 살고 있어 독일 정취와 문화를 느끼고 경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2001년, 남해군이 사업비 30여 억 원을 들여 40여 동의 건축물 택지를 교포들에게 분양했다. 그 후 이 주택들은 교포들의 주거지 또는 휴양지로 쓰이는 동시에 일반 관광객들을 위한 민박으로도 운영되고 있다. 독일 전통 소시지와 맥주 맛보기, 독일마을 추억 만들기, 전통의상 입어보기, 파독 전시관 관람하기 등이 대표 체험 프로그램이다. 상주하는 독일 교포들이 해설사 역할도 한다.
위치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1074-2
오감 만족 스위스
에델바이스 스위스 테마파크
아름다운 숲과 마을, 스위스풍 건축물과 공원을 통해 스위스의 자연과 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커피, 치즈, 초콜릿, 와인 등 스위스를 대표하는 다양한 주제별 박물관을 포함해 스위스 테마관, 동물농장, 양떼목장, 사랑의 연못, 에델바이스 광장, 갤러리, 포토존 등 전시 시설과 전원 시설을 다채롭게 누릴 수 있다. 어둑해지면 인터라켄 마을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날 수 있다. 주말 기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9000원, 경로우대 7000원.
위치 경기 가평군 설악면 다락재로 226-57
포천 숲속에서 느끼는 아프리카의 숨결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카라반펜션캠핑장
태천만 관장이 수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 30여 개국을 다니며 150여 부족에게 수집한 유물과 민예품 560여 점, 석목 조각 330점, 미술품 30점 등을 통해 아프리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인식, 토속 춤, 혼례 및 장례 등 제례의식과 왕족, 족장, 전쟁과 사냥 등과 관련한 유물 및 악기, 각종 생활용품도 감상할 수 있다. 최근에는 카라반펜션캠핑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도심을 벗어난 자연에서의 낭만적인 하룻밤까지 즐길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에서 저녁 6시까지 운영하며 요금은 성인 1만2000원, 경로우대 1만 원.
위치 경기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967
산토리니의 호젓한 골목을 걷고 싶다면
지중해마을
푸른 지붕에 파스텔 톤 골목들이 알록달록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지중해에 접한 그리스의 섬과 프랑스 남부의 건축 양식을 빌렸다. 지중해마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원래는 너른 포도밭이었는데 주변 땅이 개발하면서 탈바꿈의 시기를 거쳤다. 3층짜리 60여 동 건물에는 레스토랑, 와인바, 베이커리, 카페, 기념품 숍, 식당,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 주민들의 거주 공간 등이 마련돼 있다. 야간에는 골목 위로 은하수 조명이 매달려 마을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또 마을 공원 곳곳에는 벤치가 있어 이국적인 건물을 바라보며 호젓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
위치 충남 아산시 탕정면 탕정면로8번길 55-7
사진 출처 충남 홈페이지
한국적 정취와 어우러진 작은 산티아고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
신안군 다도해에 자리 잡은 작은 섬이다. 목포나 무안에서 배를 타고 30분에서 1시간이면 갈 수 있다. 썰물 때면 드러나는 노둣길이 대기점도, 기점도, 소악도, 진섬을 마치 하나의 섬처럼 이어준다.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은 하나로 이어진 이 섬들을 걷는 12㎞ 트레일이다. 길을 이어 걷는 중간에 예수의 제자 12사도의 이름을 딴 열두 개의 예배당을 쉼터처럼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섬에는 마을 사무국에서 운영하는 식당과 게스트하우스가 한 곳 있으며 섬 누리집에는 교통편과 노둣길 물때 등 여행에 필요한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어 처음 가는 사람도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
위치 전남 신안군 증도면 병풍리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오랜만에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 전하며,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들고 옛 친구들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지네! 이제는 다들 70이 다 되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다는 생각에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 전에 본 프로필 사진은 옛날 친구의 모습은 아닌 것 같아, 세월의 흔적이 너무나 우리의 마음에 쓸쓸함만 맴돌게 하는구만! 허긴 나도 늙어 머리는 올 백이고 살은 돼지처럼 쪄서 80키로가 넘어. 옛날의 날씬하던 철수는 아니지.”
철수가 날씬했었나? 카톡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80kg이 넘는 ‘돼지’의 모습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흘렀구나, 이런 생각만 하게 됐다.
철수는 내 초등학교 짝꿍이다. 나는 임철순, 갸는 임철수. 한자로 성은 다르지만 ‘ㄴ’ 하나 차이인 우리는 충남 공주군(지금은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2구 되찬이, 동네도 한동네다. 마을에 들어서면 철수네 집을 지나야 우리 집에 닿는데,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나이는 철수가 한 살 더 많다. 그러니 벌써 올해 칠순이다.
이렇게 이름도 비슷하고 사는 곳도 같은 녀석들을 선생님은 무슨 맘을 먹고 한 책상에 앉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음악 시간에 자기는 절대로 노래를 하지 않고 “여기 다시 불러” 그러면서 풍금만 치던 분이다. 장난삼아 둘을 일부러 짝 지웠을 리 없다. 아마도 순전히 가나다순이었나 보다.
그 선생님을 내가 전병선이라고 했더니 철수가 전병석이라고 바로잡아주었다. 섭섭한 게 있어서 이름을 확실히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그런 일이 있으면 더 정확하게 기억하게 되지. 철수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쓰라고 했을 때 “늬들 춥지? 추우면 산에다 불 놔.” 이렇게 썼다가 그 선생님한테 뒤지게 혼난 일이 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고, 다른 일이 더 있었나보다.
철수와 나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 갈라진 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살았다. 간혹 내가 고향에 가면 얼굴을 보긴 했지만 긴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이번에 알고 보니 철수는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서 큰애가 45세, 작은애가 42세에 손자녀가 넷이나 되는 완전 할아버지였다. 한동안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별 걱정 없이 대전의 그 집에서만 30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철수의 누나도 인근에 살고 있다니 우애가 여전히 좋은가보다. *누나 이야기는 다음 글 참고.
https://blog.naver.com/fusedtree/70085320452
내가 남들의 말[言]꼬리나 붙잡고 늘어지며 살 때, 철수는 열차 기관사로 30여 년간 철마의 말[馬]머리를 돌리며 살았다. 지금 큰돈은 없지만 그냥 놀러 다니고 건강에만 신경 쓰며 노년에 사람답게 살기 위해 “참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전도서 12장 13절)라고 한 성경의 교훈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서로 건강 이야기, 병 자랑을 하다가 “나는 지금도 약을 술에 타서 마신다”고 했더니 철수는 “전에 나도 유조차로 한 대 분량은 마셨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쩌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소주 반병 정도만 마신다고 한다.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에서 창조주를 섬기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름의 순 자 때문에 어려서 기집애 이름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그 ‘ㄴ’이 좋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한국어교육 전공)도 ‘니은 이야기’라는 글에서 니은은 따듯하면서도 오래 계속되는 느낌을 주는 소리인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을 나타내는 말에 니은이 많이 쓰이는 것은 사람도 이렇게 따뜻하게 오래 지속되어야 함을 은연중에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나랑 이름이 같은 사람 중에 이철순이라는 유명 인사가 있다. 양평 군립미술관장을 거친 문화행정가인데, 만날 적마다 나는 “어려서 미음도 못 먹고 자란 사람”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러니까 내 이름에는 니은도 있고 미음도 있는 것이다(장하다!).
철수는 “코로나 끝나면 언제 시간 한번 내서 만나자”고 했다. 좋지. 근데 그놈의, 아니 요놈의 코로나가 언제나 끝나나? 여섯 살 먹은 아이가 “코로나는 맨날 밖에서 노는데 나는 왜 못 나가?”라고 외치며 흐느꼈다던데, 그 아이 마음이 정말 잘 이해된다. 철수는 “건강에 한층 더 신경 써서 건강을 유지하며 행복한 노년이 되길 바랄게~~~!”라고 인사를 마무리했다. 나도 철수가 늘 그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영어로 “The same to you!”다. 이게 말이 되나? 되겠지, 뭐.
어딜 가도 좋을 때다. 혼자여도 좋고 함께라도 좋다. ‘걷기의 3요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걷기의 3요소’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날씨가 좋아야 하고, 풍광이 좋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함께 걷는 일행이 좋아야 한다. 특히, 처음 가보는 곳에 해설자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같은 풍경도 해설을 들으면 다르게 보이고, 안 보이는 것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서지역의 테라피 장소인 개화산 둘레길로 트레킹을 간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서울 근교를 걷는 ‘감성테마여행’ 밴드에 가입한 건 몇 년 전이었다. “북한산과 한강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고, 김포공항이 보이는 하늘길 전망대에서 풍경을 감상하겠습니다. 초록의 숲에서 ‘힐링 오침과 음악감상 테라피’의 시간도 가질 예정이니 개인용 돗자리를 준비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도보여행가이자 ‘여행과 인간’ 호비문화연구소장 이성한 씨의 안내 글이 걷기 욕망을 충동했다.
햇살이 따가운 평일 오전에 40대부터 60대까지 남녀 회원 25명이 모였다. 출발 지점인 개화산 미타사를 시작으로, 공원 조망점, 해맞이 전망대, 약사사, 치현산 꿩고개, 메타세쿼이아 숲을 거쳐 돌아오는 11km를 5시간에 걸쳐 걸었다. 미타사는 큰 절의 말사 같은 곳으로 암자처럼 규모가 작았다.
강서 둘레길이라고도 불리는 개화산 둘레길은 오르막이나 내리막의 경사가 심하지 않다. 초급자나 시니어들도 쉽게 걸을 수 있다. 마스크를 쓰다 보니 초반부터 땀이 쏟아졌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걸었다. 이렇게 천천히 걸으면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초록이고, 망초꽃은 하얗다.
개화산은 서울시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산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 보고 있다. 높이는 약 128m이며 신라시대 주룡거사(駐龍居士)가 득도를 하기 위해 머무른 곳이란다. 그런 이유로 한때 주룡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가 열반한 자리에서 꽃이 피어나 개화산(開花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바라보면 산 모양이 꽃의 형상처럼 보인다.
특히 이곳은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 요새로 활용됐다. 산 정상 두 곳에 있는 봉수대는 서쪽과 남쪽에서 봉화를 받았고,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불화(火) 자를 넣어 개화산(開火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풍수지리상으로는 ‘화리생연(火裏生蓮)’, 즉 불꽃 속에서 연꽃이 피는 형국이다. 말하자면, 개화산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꽃이 피어나는’ 산세라 할 수 있겠다.
한강, 방화대교, 북한산 등 멀리까지 보이는 해맞이 전망대를 지나 약사사, 치현산 꿩고개 둘레길을 거쳐 메타세쿼이아 숲에 들어서자 키 큰 나무들이 세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초록 잎이 무성한 길을 걸으며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려 심호흡을 했다. 산책로 끝까지 걷고 난 뒤에는 인적이 드문 숲속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이날 걷기의 하이라이트는 식사 후 1시간가량 숲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었다. 평소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데 숲의 기운 때문이었는지,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일행은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아니라, ‘숲속의 잠자는 시니어’가 되었다. 얼마 후 해설자가 틀어주는 음악소리에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피곤이 가셨는지 개운했다. 숲에서 잠이 든 것은 처음이었고, 깊은 잠을 잔 것도 신기했다. 사소한 피로와 가벼운 감기는 숲에 머물러 있으면 치료가 된다고 하던데 산림욕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해설사는 ‘걷기 예찬’의 작가 다비드 르 브르통의 책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꺼내 몇 구절을 읽어줬다.
"걷기는 세상의 쾌락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잠깐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내면의 평정도 찾을 수 있으며, 주변 환경과 함께 끊임없이 살을 맞대며 아무런 제한도 장애도 없이 장소의 탐험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은 감각을 통한 전진이요, 관능으로의 초대이다. 행복한 감각들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그곳에 있음을 수없이 확인시켜준다."
서울 근처에는 걷고 싶은 길이 많다. 개화산 둘레길도 그중 하나다. 원점 회귀 직전의 하늘길 전망대에서는 김포공항 활주로에 줄지어 있는 비행기들과 그 옆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논, 멀리 녹음이 우거진 계양산까지 보였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무겁게 마음을 누르고 있던 것들이 바람과 함께 흩어지는 듯했다. 상쾌했다. 디톡스란 생리학적 용어로 신체에서 노폐물이나 독성물질을 없애는 방법이다. 풍광이 좋고, 일행이 좋고, 날씨까지 좋을 때의 걷기는 마음의 불순물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 같다. 불꽃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꽃중년들이 함께 걸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 꽃들을 하나하나 만나는 일이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윤석산 시인이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제 문갑 맨 위 칸에는 아주 오래전에 시로 쓴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재작년에 딸내미한테 끌려 나가 이스탄불을 여행하면서 그 사람에게 줄까 하고 사온 나자르 본주우를 몰딩한 열쇠고리가 있고요.
편지를 시로 쓴 건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구구절절 말하기가 뭐해 제 뜻만 전하려고 그리했습니다.
제가 처음 그녀를 만난 건 9년 전 정년퇴임을 앞두고 제주문화원에서 개설한 시 창작 강좌에서입니다.
마침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강의가 있는 날엔 그녀 차를 타고 다녔지요.
우선 편지 내용부터 소개해볼까요?
오늘 저녁엔 당신 창가에 흰 달빛을 걸어주세요.
내가 기를 쓰고 아흔아홉 강을 건너 되돌아온 건
다시 어쩌자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겠다는 그 한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평생 그런 적이 없는데 어쩌다 당신께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쓴 건 다시 만나 뭘 어쩌자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못 보낸 건 또 외면당하면 어쩌나 하는 ‘거절 콤플렉스’ 때문만이 아닙니다. 변명 같지만 평생 사랑이 뭔가 생각하고 사랑의 시만 써왔으면서 ‘완벽한 사랑’을 못해보고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를 쓰고 ‘아흔아홉 강’을 건너왔다는 건 과장이 아닙니다. 그녀와 헤어진 다음 해 후두암에 걸려 성대를 잘라내고, 다시 3년 뒤 만성 백혈병에 걸려 지금도 병원을 들락거리는 벙어리 인생이니까요.
두 아이 엄마인 그녀가 제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작품도 잘 쓸 뿐만 아니라, 자기 집도 어려운데 빵을 만들어 무인 카페에 갖다 놓고 팔아 장애인 복지단체에 헌금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독거노인들 현관 앞에 놔두는….
아니, 정년퇴임을 앞두고 미칠 듯이 밀려드는 쓸쓸함을 보듬어줬기 때문입니다.
퇴임을 앞둔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보다 3년 먼저 ‘한국문학도서관’을 구축하기 시작해 전송권傳送權)을 위탁한 문인이 1만5000여 명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관계 기관을 쫓아다니며 지원해 달라고 매달리다가 거절당하고, 회원들에게 연회비 1만 원씩만 내서 우리 손으로 완성해보자고 애원했지만 몇백 명만 응해오고, 부채를 감당할 수 없어 ‘회생(回生) 신청’을 해야 할 처지라서….
미치겠데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식으로 말하면, 내 가치는 타자와 ‘맺은 관계의 질(質)’에 의해 결정된다며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왔는데 정부도, 같이 글을 쓰는 문인들도, 제자들도 외면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제 상황을 눈치 챈 그녀는 받아줄 수 있는 건 다 받아주데요. 절망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동안 쓴 책들을 다시 고쳐 쓰기 시작하자 원고 교정을 자청하고, “뭐해요?” 하고 카톡을 보내면 “드라이브 가실까요?” 하고 끌어내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제 눈빛이 흔들리면 “한잔하실래요?” 하면서 술집으로 안내하고….
사이다만 마시며 안주를 찢어 밀어놓고, 그러다가 간혹 새드르 웃는 그녀가 점점 제 마음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군요. 어떤 때는 술잔 밑에 그녀의 입술이 얼비치고, 어떤 때는 꿈속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해주면서 토닥여줬습니다.
그러던 우리에게 이별이라는 낯선 얼굴이 불쑥 고개를 드민 건 이의로 ‘회생 신청’이 부결되던 2013년 7월 초입니다. 카톡을 받고 나온 그녀는 엊저녁 제 원고 교정을 보다가 남편하고 다퉜다는 겁니다.
“왜요?”
“‘언제 교정이 끝나나. 우리 교수님이 기다리시겠다’고 했더니, 이젠 ‘우리 교수님’이냐고 트집을 잡아서요….”
저도 얼핏 뵌 적이 있지만 그럴 분이 아니었습니다.
순간 중학교 때 처음 쓴 연애편지를 보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사랑은 책임지는 거고,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해서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하신.
그날 저녁 그녀 차 속에 핸드폰을 놓고 내렸지요 아니, 흘리고 내렸으면서도 그렇게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그녀는 그 이튿날 우리 집 우편함에 핸드폰을 갖다 놓고는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받데요. 그리고 우연이겠지만 6개월 뒤에 이웃 마을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그녀가 교정을 봐줘 펴낸 ‘자서전을 덧붙여 고쳐 쓴 윤석산(尹石山) 시전집’ 첫 질이 나와 보내려고 카톡을 보내도 안 받아 못 부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바뀌었느냐고요? 그리고 뭐가 ‘완벽한 사랑’의 추구냐고요? 이 글의 제목으로 붙인 ‘동 쥐앙’의 의미를 생각해보세요….
윤석산 시인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문학박사, 시인). 한국문학도서관(www.kll.co.kr) 대표. 최근 저서로 ‘자서전을 덧붙여 고쳐 쓴 윤석산(尹石山) 시전집’이 있다.
올해에는 벚꽃놀이도 없었고 봄꽃의 흐드러짐도 만나지 못하였다.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지나는 가장 젊은 날의 봄이 아쉽다. 연두색 새잎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5월을 느끼기 좋은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 창덕궁 후원을 떠올렸다. 가을에는 몇 번이나 갔으나 봄은 처음이다.
창덕궁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때 만들어졌다. 형제의 피를 묻히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1405년 새롭게 창건된 창덕궁은 이궁(離宮)이었으나 조선의 역사 속에서 종종 법궁(法宮)의 역할을 하였고 현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 평가받고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회화나무 여덟 그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백 년 된 노구에 연두색 새잎이 돋고 있다. 궁궐 안의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를 건너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그 뒤로 편전이었던 선정전, 왕의 침전이었다가 편전으로 사용한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다.
왕과 왕비의 침실이기도 했고 왕자와 공주의 교육 장소로 쓰였던 대조전은 조선 멸망을 지켜본 비운의 전각이다.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합병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고 ‘창덕궁 전하’라 불리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이곳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전각들은 대부분 촘촘하게 붙어있어 수월하게 둘러볼 수 있다. 사대부 양식의 건물인 낙선재만 주 전각들과 약간 떨어져 있다. 이에 반해 후원은 꽤 발품을 팔아야 한다.
양옆에 긴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따라 후원으로 들어간다. 비밀의 정원답게 들어가는 입구가 길다. 이때부터 초록 샤워기를 틀고 그 아래에 선 듯 느껴진다. 대여섯 살 정도 된 딸 둘과 고궁 나들이에 나선 한 가족이 앞서 걷다가 감탄사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구부러진 길 끝부터는 더 깊은 초록의 터널이다.
싱그러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하게 달린다. 뽕나무, 은행나무, 쪽동백나무, 함박꽃나무, 느티나무.... 나뭇잎을, 그러쥐어 꾹 짜면 연두와 녹색이 절묘하게 섞인 5월의 색이 주르르 흘러내릴 듯하다.
숲 터널 끝에 자리한 부용지가 은밀하다. 사각의 연못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영화당이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 부용정과 주합루가 서 있다.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에 만든 주합루는 계단식 구조물 위에 2층 누각 형태를 띠고 있는데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이, 2층은 학자들의 배움터이자 토론장으로 애용되었다.
부용지를 나와 숙종 때 만들어진 애련지와 조선 시대 양반가옥을 본떠 만든 연경당을 둘러보고 다시 시작되는 초록 샤워 길을 지나 왕의 휴식공간이었던 존덕정에 이르러 발길을 멈춘다. 쉼조차 싱그러운 봄이다. 너른 숲길에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인공적으로 물길을 낸 옥류천이 나타난다. 이곳 또한 휴식처이다.
5월의 창덕궁은 어느 곳 하나 싱그럽지 않은 곳이 없다. 전각과 후원의 생기 가득한 풀과 나무 사이를 걸으며 코밑까지 온 봄을 느낀다. 숨바꼭질 동무를 찾아 기쁘듯 숨어있다 얼굴을 내미는 연못과 정자에서 휴식의 기쁨을 누린다. 가는 봄날의 아쉬움이 달래 진다.
관람 안내 : 창덕궁의 전각은 휴관 일(매주 월요일)을 제외하면 상시 관람이 가능하지만 후원은 궁궐 전각 관람료(대인 3000원)와는 별도의 후원 관람료(대인 5000원)를 내고 들어간다. 후원 관람은 90분 정도 소요되며 해설사와 함께 회차 별 100명으로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예약은 6일 전 오전 10시부터 입장 전날까지 받는다. 예약인원 50명, 당일 발권 50명이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해설사 없이 회차별로 입장하여 자유 관람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게 목발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다니던 1960년대 공주 시골의 청년들 중에 석싱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름이 김석성인데, 어른들은 대충 석싱이라고 불렀다. 기남이도 기냄이라고 부르는 게 충청도 사람들인데 뭐. 내 또래인 석싱이의 동생은 석윤이었지만 서균이가 아니라 성뉸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8~9세 많은 석싱 씨는 동네 새마을지도자였다. 아니,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4H운동이었지. 4H는 1902년 미국에서 처음 조직된, 두뇌(Head)·마음(Heart)·손(Hand)·건강(Health)의 이념을 지향하는 청소년 단체다. 국내에서는 4H가 지덕노체(知德勞體)로 번역돼 농업구조와 농촌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전개됐다.
조합원들이 행사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씩씩한 흙의 용사 송정4H”로 끝난다. 동네마다 지명만 바꿔 부르던 4H 주제가다. 우리 동네 이름은 되찬이인데, 목숨을 되찾고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한자로는 전혀 뜻이 다른 송정(松亭)이 돼버렸다.
석싱 씨는 농사든 무슨 일이든 다 잘했다. 지도력도 있고 조직력도 있는 우두머리 청년인 데다 얼굴도 잘생겨 동네 처녀들이 애를 태웠다. 어느 집에선가 열리던 4H회의엔 나 같은 초등학생 조무래기들도 갔는데, 밤마실 나오듯 거기 참석하는 처녀들한테서는 석싱 씨를 의식한 분 냄새와 교태를 쉽게 맡을 수 있었다.
우스운 것은 석싱 씨의 할머니였다. 평소 며느리와 사이가 좋다가도 수틀리면 “연애 걸어 시집온 년”이라고 흉보며 욕했다. 그 당시 남녀 간에 연애를 거는 건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과 연애를 해서 며느리가 됐는데도 그걸 흉을 잡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하여간 동네 처녀들은 석싱 씨와 연애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다 보였다.
그런 석싱 씨가 스타일 구긴 일이 한 번 있다. 어느 가을밤에 석싱 씨네 집에서 송정4H 주최 연극 공연이 열렸다. 무대는 마루, 객석은 마당. 동네 사람 다 모인 가운데 화톳불을 피우고 한바탕 판이 잘 벌어졌다.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가 양민들을 괴롭히는 내용인 건 생각나는데, 연극 제목은 잊어버렸다. 웬일인지 석싱 씨는 주연이 아니라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 악역을 맡았다. 일제 순사라고 해두자.
한 순사가 숨은 독립군을 찾아내라며 주인공 처녀를 마구 닦달했다. 처녀가 울부짖으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할 때 그 순사의 상급자인 우리의 석싱 씨가 등장했다. 등장이랬자 방 안에서 마루로 나오는 건데, 목총을 든 석싱 씨는 방문을 거세게 열고 대차게 마루로 내려서면서 “에누리 없어 이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소리를 지를 때 몸의 균형을 잃고 엎어져 사람들이 와 웃어버렸다. 울던 처녀까지 웃었다. 석싱 씨는 바로 멋쩍게 일어났지만 그다음 대사를 까먹어 연극이 영 거시기해졌다.
나는 그때 에누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만 각본에도 없는 말을 석싱 씨가 즉석에서 애드립(물론 이 말은 나중에 안 것)으로 외쳤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확 왔다. 에누리라는 말을 정확하게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다. 주로 물건을 깎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석싱 씨가 쓴 에누리는 ‘용서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에누리는 1)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물건 값을 부르는 일, 또는 그 물건 값, 2) 값을 깎는 일, 3) 실제보다 더 보태거나 깎아서 말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있고 네 번째로 석싱 씨의 에누리가 있었다. “일 년 열두 달도 다 사람이 만든 거고 노래도 다 사람이 만든 건데 에누리 없이 사는 사람 있던가?”(박경리 ‘토지’),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김구 ‘백범일지’) 이런 문장이 예로 제시돼 있다. 그런데 요즘은 에누리가 물건 값을 깎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 같다.
에누리가 유명해진 건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1928~1986)의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놀이’라는 노래 덕분이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달라고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기차는 삑 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 깎지 않고 돈 다 낼 테니 나 좀 태워주. 저 열차 좀 붙들어요. 돈 다 낼 테니. 삼등차는 만 원이라 자리가 없어 옆의 칸을 슬쩍 보니 자리가 비었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집어탔더니 삼등차에 이등칸이라 돈을 더 물어….” 이런 내용이다. 가사도 재미있지만 중간 중간의 웃음이 걸판지다.
에누리는 얼핏 일본 말 같지만 우리말이다. 세일이나 할인 이런 말보다 ‘에누리 몇 %’ 식으로 쓰면 참 좋을 것 같다. 값을 부풀리든 깎든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겠지만 값을 더 부르는 에누리를 대놓고 광고하는 상인들은 없겠지.
석싱 씨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농사를 버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대전인가 어디에선가 노동을 하며 산다는 말까지는 들었지만 그다음은 모르겠다. 하지만 에누리라는 말을 알려준 것 하나만으로도 석싱 씨는 내 삶에 의미가 있는 분이다. 선한 사람이니 어디에서든 부디 건강 평안하고 에누리 없는 복을 받으시기를.
요즘 여자들이 모였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이야기를 나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부터 시작돼 ‘밀회’를 거쳐 폭발한 김희애의 불륜 연기는 의사, 음악가 등 고스펙 불륜녀의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이번 ‘부부의 세계’에서는 너무 완벽한 삶의 조건으로 균열 하나 있을 것 같지 않던 부부 사이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남편의 오래된 불륜으로 급격하게 돌기 해 부부의 삶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인생까지 소용돌이치게 되는 부부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사실 간통죄까지 폐지된 마당이라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전대미문의 불륜들이 우리 주위에 넘실댄다. 드라마나 영화가 현실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침없고 솔직한 불륜들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은 이제 정치적인 은유는 물론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만 나무란다'라는 뜻으로 청소년들까지도 사용하는 대중적 언어가 된 지 오래다.
가만 생각해보면 한국의 중년 여성들에게 '불륜'이라는 단어가 은밀하게 회자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단아해 불륜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조용조용 속삭이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된 지 벌써 25년이 흘렀다.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의 시를 읽고 이탈리아 가곡을 듣는 지적이고 단아한 가정주부, 메릴 스트리프(프란체스카)는 아내의 취향은 전혀 모른 채 큰 소리로 떠들고 문을 쾅쾅 닫아 프란체스카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런 남편과 살고 있다. 엄마가 이탈리아 가곡을 듣고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자녀들은 요즘 유행하는 팝송으로 재빨리 바꿔버려 집안에서 프란체스카의 자리는 없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은 서로 나눌 이야기도 없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침묵의 시간으로 변한 지 오래. 가족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 채 그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부속품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생활에 찌들어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어느 날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바깥세상의 살아 숨 쉬는 인생을 동경하게 해주는 그런 남자가 불현듯 나타난다.
배경은 1965년, 미국 중부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조용한 시골 마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조만간 철거될 이 마을의 명물인 로즈먼 다리를 찍기 위해 이곳으로 트럭을 몰고 온다. 낡은 청바지에 셔츠, 니콘 카메라를 메고 프란체스카가 동경하는 세상의 냄새를 풍기며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로즈먼 다리가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마침 남편과 두 아이는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결혼 이후 처음 가족과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길을 묻는 그 순간에도 가족들의 빨래를 널고 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지구를 사랑하는 패션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이 잡지는 지구의 자연을 보호하고 현대화로 사라지고 있는 옛것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겨놓는 전통의 잡지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격조 높은 잡지다. 그러니 전 세계를 다니며 오지와 천혜의 자연을 촬영하는 로버트라는 사진작가의 영혼이 얼마나 깊고 넓을지 쉽게 상상하고도 남는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한 남자와 자식만을 위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세계의 풍물과 삶의 모습들을 렌즈에 담는 로버트의 인생은 동경 그 자체였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사는 로버트가 부럽기만 했다.
게다가 그와의 대화는 익숙하다 못해 더 이상은 나눌 이야기가 없는 남편과 나누는 대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문학과 여행, 음악과 미술… 그 자체로서 너무나 환상적인 감정이입의 순간들을 공유한다.
두 사람의 섬세한 감정이 떨릴 듯 화면에 전해지던 장면이 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저녁에 초대해서 함께 부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 감자 스튜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산스럽기만 하다. 감자는 미국 중부를 상징하는 아이오와주의 대표적인 농산물.
프란체스카의 부산스러움을 느낀 로버트는 “제가 도와드릴까요?” 란 말로 그녀의 맘을 빼앗아 버린다. 너무나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의 생활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요리를 도와주겠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요리를요?” “예… 요리를” “당근을 깎아주세요” “이거 말인가요” “예… 끝은 이렇게 다듬어야 해요”
짧은 단답식의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낯선 두 남녀가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세계를 향해 들어오는 타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부엌에서 함께 채소를 손질하고 감자 스튜를 저으며 그렇게 완성해갔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날 수 있다. 뒤늦게 사랑의 열병을 앓다 제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따라 지금까지 가꿔왔던 자신의 세상을 박차고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는 순서가 잘못돼 '만났어야 할 운명의 파트너'를 만나 인생을 살고 있기보다 '스치고 지나갔어야 할 그 누군가'를 만나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며 산다. 착각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 믿으며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다.
이렇게 착각으로 쌓아 올린 결혼이라는 견고한 성안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일상을 쌓고 그 일상이 다시 모여져 삶의 결로 퇴적된다. 퇴적된 내 인생의 결이 어느새 작은 봉우리가 되고 제법 봉긋한 작은 산 하나 만들어질 때쯤 우리네 인생은 노년의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 이 영화를 보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의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는 아직 중년의 감성은 아니었기에 100% 감정이입을 못했지만, 육체적 관계의 선을 넘는 것이 아닌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시선을 맞추며 안타까워하는 그런 '선'을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다.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그렇게 부산스럽게 타오르지 않는 사랑, 스튜처럼 오래 끓이며 뭉근히 재료의 맛을 우려내고 깊어지는 사랑. 하지만 ‘불륜’은 그러하지 못할 경우가 많으므로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속전속결로 잡아먹을 듯이 집안을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는 며칠간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대화하며 깊은 울림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랑을 흔히 남녀들이 하는 것처럼 세속에서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간절함을 뒤로하고 프란체스카는 이 작은 마을에 남아 가정을 지키고 자녀에게 헌신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버트의 유품이 프란체스카에게 도착한다. 로버트가 로즈먼 다리를 찍은 사진이 표지로 담긴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와 니콘 카메라, 그리고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남긴 다리 위의 쪽지.
프란체스카는 이 유품을 간직해오고 있다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남긴다. “살아온 인생은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니 죽은 뒤에는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에 뿌려 달라.”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로버트에 대한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화도 연령대에 따라 감상했을 때 차이가 크게 난다. 예전에는 이 부분이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프란체스카가 자신이 죽은 후,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 위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말의 뜻이 이제 정확하게 이해된다. 프란체스카는 죽어서까지 가부장적인 가족의 굴레에 매여있기 싫었던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죽으면 화장해서 유골을 태평양에 뿌려달라고 딸아이에게 말했더니 눈을 살짝 흘긴다. 바다를 떠다니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딸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갈 곳이 없어서 곤란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난 또 어쩔 수 없이 엄마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난 연휴 주말 방영된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가 자신의 아들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는 전 남편의 알리바이를 증언한다.
뒤를 이어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이미 헤어진 부부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고 옷이 흐드러진 침대를 보여주면서 끝나 전국의 여성들이 갑론을박 난리가 났다.
한번 갈라진 부부의 길은 다시 합쳐지지 않는다. 잠깐 합쳐지는 듯하다가도 이미 다시 파국을 맞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 스펙의 의사도 자신의 감정 다스리기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세계’를 시청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 19의 극복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부 혹은 가족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알아야 하고 간섭해야 하고 내 뜻대로 콘트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들이 의외로 많다. 내 눈앞에서 안보일 때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내 가시권 안에 있을 때는 완벽한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시혜를 베푸는 모양새다. 흔히 똑똑하고 성공했다는 고스펙 여성들의 결혼생활은 평강공주 신드롬에 빠져 온달들을 관리하느라 부산스럽기 그지없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부부 사이의 적정한 거리 두기는 결국 나에 대한 객관화로 이어져 보다 성숙한 자아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제발, 몰빵 하지 말 것이다.
사랑은 다 가질 수 없어 안타깝고 그래서 귀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시니어들은 감자 스튜 같은 뭉근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프라이팬에 와인을 부으면 불같이 일어났다가 금세 스러지는 그런 불꽃 같은 사랑을 꿈꾸나? 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이들은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로 논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하고 카톡을 하면서 주로 비대면으로 혼자 논다. 하지만 1960년대의 아이들은 또래들과 만나서 놀고, 동물들과 놀고, 말장난 수수께끼에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놀았다. 장난감이 없던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말이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숫자를 차례로 나열하는 말장난이나 끝말을 이어가면서 약간의 멜로디와 리듬을 붙여 소리치고 다니는 유희,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예를 들면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여어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또는 어려서 아이들이 날 놀려 먹던 노래(?) “순이 순이 철순이, 장가 장가들었다, 누라 누라 마누라, 개다 개다 두 개다.” 이런 거. 나는 요언(謠言)이라고 쓰려 했는데, 찾아보니 사전엔 뜬소문이라는 풀이밖에 없더라.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겠다. 나는 마누라가 두 개가 아니니까.
(여기서 잠깐~! 이쁘고 요리 잘하고 착한 마누라를 얻으려면? 답은 마누라를 셋 얻는 것이다. 마누라가 하나면 한심한 남자, 둘이면 양심적인 남자, 셋이면 세심한 남자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신소리 헛소리를 하면서 작전타임을 써 봐도 딱 맞는 말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게 바로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동요가 아닐까.)
나는 어려서 못된 말장난을 많이 하고 다녔다(물론 어른들이 못 듣는 데서). “일, 일본 년이 이,……, 삼, 삼밭으로 들어가 사. 사방을 둘러보니 오, 오는 사람이 없어 육, 육시랄 년이 칠,…… 팔, 팔뚝만한 XX로 구, …… 십,…을 하더라.” 이 칠 구의 말줄임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표시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형에게 물어봤지만 “난 너무 고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 생각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형과 나는 무슨 행진곡인가에 가사를 붙여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이렇게 발맞추어 노래 부르곤 했다. 그러면 안방에 있던 할머니가 “아, 얼렁 뒷간에 가. 오줌 참으면 병나”라고 소리쳤다(사실은 병이 된다는 말인데, 충청도 말 도+ㅑ가 표기되지 않는 게 유감이다).
그 형과 내가 공통적으로 완전하게 기억하는 건 이거다. “야 야 야마싯대가 담뱃대, 대 대 대꼬바리(담배통)가 홀애비짱, 장 장 장돌뱅이가 시리방구, 구 구 구두 신었다구 재지 마, 마 마 마루 밑에 달기똥(닭똥), 똥 똥 똥 싸놓고 도망갔다네, 내 내 냇가에서 놀다가, 가 가 가아련다 떠나려언다….” 무슨 뜻인지 지금도 모르는 말이 몇 개 있다. 네가 내로 바뀌는 대목이 어색하지만, 이 말장난의 끝은 유행가 ‘유정천리’로 이어진다.
1959년 박재홍이 불러 대히트를 한 그 노래의 1절은 이렇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드네.”
그런데, 우리 공주 시골동네 청년들은 다르게 불렀다. 가사를 바꾼 노래의 1절과 2절은 다음과 같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천리만리 타국 땅에 객사죽음 웬 말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에 조기 선거 웬 말이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네
노래가 발표된 1959년은 4·19 한 해 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독재가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다.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1894~1956) 후보가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했다. 이어 4년 후인 1960년 3·15 대선 때는 민주당 조병옥(1894~1960) 후보가 미국으로 신병 치료하러 갔다가 선거 한 달 전인 2월 15일에 타계했다. 그 상황에서 대중의 절망과 민주화 열망을 담은 노래가 “가련다 떠나련다”의 개사곡이다. 1960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마을 청년들은 작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불렀다.
또 하나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 해공 급서 이후 민주당의 당가처럼 불린 가요가 있다. 작사자 손로원, 작곡자 박춘석은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해공이 타계하기 석 달 전에 나온 노래였는데도 해공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거라는 오해를 받아 경찰에 소환당하며 시달렸다. 5월 5일 어제가 해공의 64주년 기일이었다.
사람은 가고 노래는 남았다. 그러나 가사를 바꾸거나 곡조도 없는 노래로 만든 말장난 동요는 불러본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전승되지 않는다. 동시대의 사람들이라도 잘 알지 못한다. 악보상의 노래와 달리 기억 속의 동요는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스스로 만들어 노래유희를 하는 아이들도 이제는 보기 어렵다.
● Exhibition
◇ 프렌치 모던: 모네에서 마티스까지, 1850-1950
일정 6월 14일까지 장소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미국 최초로 인상주의 전시를 열었던 브루클린 미술관의 유럽 컬렉션 중 59점의 대표작을 만날 기회다. 이번 전시에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프랑스 모더니즘 예술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폴 세잔,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클로드 모네 등 총 45명 작가의 작품들을 풍경, 정물, 인물, 누드 등 4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다. 각 작품의 의미와 특성을 통해 모더니즘 전반에 걸친 미술사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시간대별 관람 인원을 제한하며, 고양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사전 접수 후 입장 가능하다.
◇ 가능성에 대한 가능성: 오브제 시리즈
일정 7월 28일까지 장소 아이러브아트센터 셀린박 갤러리
개인과 사회, 정치적 이슈를 테마로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셀린박 디자이너가 작업한 사물 시리즈 전이다. 앞서 2018년 런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과 2019년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에 초청돼 전시한 바 있다. 비판적 디자인을 기반으로 사회 구조의 이면적인 모습을 사물기호증(움직이지 않는 특정 물체에 초점을 둔 성도착증의 일종)과 관련지어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사회적 이슈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관객 스스로 구조와 제도의 모순으로 생긴 결함을 통찰하도록 이끈다.
◇ 모두의 건축 소장품
일정 6월 14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관
서소문 본관 ‘모두의 소장품’ 전과 연계한 전시로, 동시대 수집의 범위와 행위를 성찰하고 미래의 소장품 형식을 탐색한다. 1980년대 초반 중구 회현동에서 현재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축된 서양 고전양식의 구 벨기에 영사관을 중심으로 건축 수집의 기원, 의미, 방법을 체험하는 2개의 섹션으로 마련했다. 건축을 수집하는 8개 국·공·사립 기관과 40여 명의 건축가가 함께한 150여 점의 전통 건축과 근·현대 건축자료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19로 인한 잠정 휴관으로 서울시립미술관 SNS 채널을 통해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다.
◇ 메이커 탐구생활
일정 9월 30일까지 장소 크리타
과학과 예술의 유쾌한 연결을 이어가는 메이커 세 팀이 함께한 전시다. 50만 구독자를 보유한 공학 유튜버 ‘긱불’(GEEKBLE), 을지로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디자인과 메이커의 경계를 허무는 ‘프래그’(PRAG), 가족과 어린이를 위한 메이커테인먼트 콘텐츠를 선보이는 ‘크리타’(CR!TA)가 참여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은 일상의 탐구에서 시작된다”라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 전시품 외 큐레이터 기획공간을 별도로 꾸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실천으로 최대 10인까지 입장 가능한 소규모 전시 예약제를 잠정 운영하며, 일일 8회 진행된다.
● Stage
◇ 2020 디즈니 인 콘서트
일정 5월 23~24일 장소 세종문화회관대극장 출연 디즈니 콘서트 싱어즈, 디토 오케스트라
미국 월트 디즈니 본사의 프로듀서이자 음악 작·편곡가로 활동해온 테드 리케츠가 전 세계를 무대로 선보였던 오리지널 프로덕션 공연이다. ‘인어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알라딘’을 비롯해 ‘겨울왕국 2’까지, 디즈니 대표 명작들을 대형 LED 화면과 더불어 60인조 이상의 풀 오케스트라 연주로 즐길 수 있다. 화려한 무대와 아름다운 선율의 향연으로, 손주와 함께라면 더더욱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 로빈
일정 5월 1일~8월 2일 장소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연출 정태영 출연 김대종, 임찬빈, 박정원 등
지구 밖 행성을 배경으로, 유능한 과학자이지만 자식과의 교감에 서툰 아빠와, 답답한 우주를 벗어나 지구로 돌아가려는 딸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다. 부녀 사이에 중재자로 나선 로봇 ‘레온’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기억, 가족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일정 6월 27일까지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출연 클레어 라이언, 맷 레이시, 커트 올즈 등
프랑스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최초 1만 회 공연을 돌파하며 가장 오래된 뮤지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새롭게 단장한 월드 프로덕션 팀이 8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아 더욱 압도적인 스케일의 무대와 진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 Movie
◇ 나는 보리
개봉 5월 21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진유 출연 김아송, 이린하, 곽진석, 허지나 등
농인 가족 사이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11세 ‘보리’는 왠지 모를 외로움을 느끼는 아이다. 그런 보리가 소외감을 벗어나기 위해 특별한 소원을 빌게 되며 벌어지는 일련의 성장 스토리를 담았다. 정겨운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보리네 가족의 일상과 주인공의 고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제24회 독일 슈링겔국제영화제 관객상과 켐니츠상, 제20회 가치봄영화제 대상 등을 수상해 국내외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 레미제라블: 뮤지컬 콘서트
개봉 5월 14일 장르 공연실황 감독 제임스 파우웰, 장 피에르 출연 마이클 볼, 알피 보 등
지난해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선보였던 ‘레미제라블: 뮤지컬 콘서트’를 스크린에서 만나게 됐다. 콘서트 형식의 작품으로 모든 대사가 노래로 진행되는 송스루 공연의 생생한 현장을 담았다
◇ 보이콰이어
개봉 5월 14일 장르 드라마 감독 프랑수와 지라르 출연 더스틴 호프만, 캐시 베이츠 등
상처가 있는 소년이 국립 소년합창단에서 인생 스승을 만나며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아카데미 주연상에 빛나는 더스틴 호프만과 캐시 베이츠 등 연기파 배우들의 참여로 기대를 모은다.
● Book
◇ 백세 일기 (김형서 저ㆍ김영사)
올해 4월, 만 100세 생일을 맞아 펴낸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신간. 소박하지만 특별한 ‘일상’, 온몸으로 겪어온 격랑의 ‘지난날’, 100세의 지혜가 깃든 ‘삶의 철학’, 고맙고 사랑하고 그리운 ‘사람’ 등 4가지 주제로 70여 편의 글을 엮었다. 한 세기를 살아보니 알게 된 깨달음과 솔직한 심정, 그간의 희로애락 등을 담담하면서도 재치 있게 들려준다.
◇ 천년의 수업 (김헌 저ㆍ다산초당)
존재와 죽음, 자존과 행복, 타인과의 관계 등 인생에서 주요한 9가지 질문에 대해 통찰한다.
수천 년 동안 서양 고전이 던져온 물음들을 통해 ‘나다운 삶은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한다.
◇ 50, 이제 나를 위해 산다 (호사카 다카시 저ㆍ상상출판)
50세를 앞두거나 접어든 사람이 참고할 만한 ‘행복 습관’ 80가지를 정리했다. 취미, 공부, 인간관계, 건강, 마음가짐 등 행복한 노후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상의 노하우를 소개한다.
◇ 더 월 (론 란체스터 저ㆍ서울문화사)
2019년 부커상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기후 변화로 인해 황폐해진 미래 세상에서 벌어질 문제를 그린다. 시사적이고 풍자적인 시선으로 갈등을 드러내면서 경고의 메시지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