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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드리 헵번의 숨겨진 이야기
- 오드리 헵번의 영화나 사진을 보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맑은 눈과 예쁜 미소를 지닐 수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만인의 연인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그녀가 주연을 맡은 몇 편의 영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표작 에서는 멋진 파티 걸로, 싸구려 패스트푸드로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유명한 보석가게 티파니의 쇼윈도를 구경하는 가난한 아가씨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해 잊지 못하는 장면으로 남게 해주었으며, 비상계단의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문 리버’ 라는 노래를 정말 달콤하게 불러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서는 작은 나라 공주님으로 여러 나라를 순방하던 중 공식적인 행사에 지쳐 잠시 뛰쳐나와 일반인처럼 로마의 이곳저곳을 경험하는 아름다운 아가씨 역을 연기했다. 경호원을 따돌리려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는 장면은 너무나 귀여웠다. 그 당시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정말 상큼하고 예쁜 모습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영화를 통해 즐거움과 감동을 줬던 오드리 헵번이 유니세프 홍보대사를 하면서 죽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젊었을 때는 아름다웠지만 나이 들어 그 모습을 잃어버리는 여배우들도 많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나이 들어서도 얼굴에 주름살만 생겼을 뿐 체형도 그대로인 채 미모가 여전했다. 게다가 좋은 일까지 많이 하니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도 있었다. 오드리 헵번이 봉사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벨기에에서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나치에 협력하면서 독일의 침략을 받은 벨기에에서 살던 어린 그녀와 어머니를 버렸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와 네덜란드로 이주한 뒤 아주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끌고 가는 광경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배우로 성공한 후 그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치 추종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배우로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어머니가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그녀에게 영화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많은 여배우들이 욕심을 내는 역이었지만 몇 날을 고민한 끝에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주연 캐스팅을 거절했다. 그 후 는 아카데미 3개 부문 수상을 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안네 역할을 꼭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나치 협력 때문에 양심상 수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60년, 영국에서 홀로 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간 그녀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유니세프 홍보대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말년에 대장암에 걸렸는데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에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보기만 해도 행복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를 시작했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참 슬프고 가슴 아프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방송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보다 오드리 헵번의 사망 소식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외모만큼 마음도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 영화배우만이 아닌 진실한 사람으로 언제까지나 필자에게 기억될 아름다운 여인이다.
- 2017-07-2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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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문화 들여다보기
- 지난 5월 익산 관광 때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유적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러나 발굴 중이라 땅만 파놓았지 막상 볼 것이 없어 실망했다. 제대로 보려면 익산까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함께 지정된 공주 부여를 돌아봐야 한다고 들었다. 검색으로 공주는 볼 것이 그리 많지 않고 부여에 유적지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부여로 향했다. 폭염의 날씨라 목적지는 실내 위주로 짤 수밖에 없었다. 첫 목적지는 부여 박물관이었다. 경로 우대를 생각하고 갔는데 무료입장이었다. 입구의 어린이박물관은 백제문화를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게 잘 꾸며놓았다. 백제시대의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는데 이 또한 무료였다. 바로 옆에서 왕흥사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본관으로 들어가니 천장에서 자연광이 들어오는 스카이라이트 지붕 아래 커다란 돌그릇이 있었다.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 시대별로 그릇, 무기의 변화를 유적으로 잘 전시해놓았다. 이 박물관의 대표 유물은 황금대향로였다. 백제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그런지 특별실에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얼마나 큰 감동이 있었을까 상상이 되었다. 크기로나 모양으로나 과연 대단한 보물처럼 보였다. 백제문화는 너무 오래된 역사이기 때문에 친숙하지 않다. 더구나 한성백제 500년도 있어 분산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본 문화가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한때는 한반도를 지배하기도 했던 백제였으므로 재조명을 해볼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낙화암에 갔다가 실망하고 온 적이 있다. 3천 궁녀가 신라의 침략에 강으로 투신했다는 야사만 기억에 있지, 정작 볼 것은 없다는 기억에 날씨도 더워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동네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부여 박물관 인근에 있는 신동엽문학관을 찾아갔다. 39세에 요절한 민족 시인이란다. 대표작으로 ‘껍데기는 가라’가 있다. 범상치 않은 외관이어서 알아보니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생가에 육필 원고와 신동엽 평전 등 관련 책자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궁남지였다. 7~8월이 절정이라는 연꽃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군에서 인근 논밭을 사서 계속 궁남지를 늘려간다고 했다. 과연 사람 키보다 더 큰 연꽃잎과 탐스러운 연꽃들이 볼만했다. 인근 음식점에서는 연밥을 팔고 있었다. 잡곡밥을 연잎에 싸서 내오는 것인데 다른 반찬은 평범했다. 원래 충청도 음식은 별 특징이 없다. 백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도자기류다. 백제요 등 도자기 굽는 가마가 근처에 있다 해서 찾아가 봤다. 거대한 가마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30분마다 버스가 있고 두 시간이면 도착한다. 유적지가 많아 당일로는 좀 빡빡하다. 여름은 너무 더우니 서늘한 봄가을에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 2017-07-2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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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병원 방문 투어
- 이전에 코엑스에서 노인 관련 박람회가 열려 다녀왔었다. 당시 눈여겨본 요양병원이 있어 충남 공주 탄천면에 있는 요양병원까지 방문 투어를 요청해 직접 다녀왔다. 공주역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공주가 시(市)이기는 해도 요양병원 근처는 논밭이었다. 병원 내에서나 활동해야지 나와봐야 갈 곳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환자들이니 나들이 목적보다는 치료가 목적일 것이다. 이곳은 항암 방사선 치료 중인 암 환자들의 치료 효과 극대화와 전이 및 재발 방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뇌경색 등으로 지체 장애가 발생해 재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재활 치료는 열심히만 하면 상태가 나아져 퇴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폐교를 사들여 펜션처럼 새로 꾸며 외관은 아늑해 보였다. 최신 병동 등 병상 수는 450여 개, 환자 수는 250여 명, 근무자 수도 150명 정도 된다고 했다. 암 재활 치료 등은 일대일 치료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근무자가 많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내부 식당은 자체적으로 기른 채소, 직접 만든 된장, 고추장 등을 사용하고 메뉴도 웬만한 식당 정도는 되어 보였다. 다양한 치료 프로그램이 있고 종교 예배 등 영적 지원도 한다고 했다. 인근에는 기공 운동 등을 위해 편백나무숲 등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은 나무들이 크게 자라지 않아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였다. 병실 1인실은 오피스텔처럼 공간이 비교적 넓고 화장실, 세탁기 등 여러 가지 기본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부부가 같이 기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용료는 하루에 7만 원 정도라고 했다. 3인실도 비교적 공간이 넓은 편이었다. 종합병원처럼 다닥다닥 붙은 침대가 아니라 널찍하게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괜찮은 요양병원이었다. 이런 시설을 이용하려면 재활의 경우는 월 100만 원 이하로도 가능하지만, 암 환자의 경우는 월 수백만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부유한 사람이라면 걱정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실손보험으로 입소가 가능하다고 했다. 4명 중 한 명이 암으로 죽는다는데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실손보험에 대한 제고가 필요해 보인다. 일반 보험도 막상 청구하면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거부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실손보험이 든든해 보인다. 요양병원도 천차만별이라서 선택이 어렵다고 한다. 괜찮은 요양병원은 입소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고 잘못 선택하면 돈은 돈대로 들고 인권을 무시당하는 등 고생한다고 들었다. 생각해보면 당장 살아 계신 어머님의 10년 후 정도의 거주지로 생각해볼 만하고 필자의 경우는 20년 후 정도가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당장 연고가 없어 서울에서 멀다는 공주까지 갈 명분은 없다. 또 교통이 좋아져 서울에서 한두 시간 거리인데도 지리적으로 멀다는 느낌도 걸림돌이다.
- 2017-07-2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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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바꾼 도시,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끼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유럽의 배꼽’이라 불리는 슬로바키아는 한국인에게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유명세는 적지만 매력이 폴폴 넘치는 곳. 사람들은 흥이 많고 무엇보다 물가가 싸니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다. 한국 기업들이 속속 자리를 튼 이유일 것이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다. 시내라고 해야 차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11세기의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다뉴브 강 조망 한국의 많은 이가 아직도 슬로바키아를 ‘체코 슬로바키아’로 안다. 현지인들에게 나라 명을 잘못 말하면 발끈하면서 다시 일러줄 것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월 1일,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시내는 걸어서 여행해도 충분하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호조로 광장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1760년에 건축된 그라살코비크 궁전을 현재 관저로 이용하고 있다.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브라티슬라바 성이 보인다.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해서 ‘테이블 캐슬’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납작한 사각형 상이 뒤엎어져 상다리 4개가 솟아오른 듯하다. 11세기에 지어진 후 1800년대 헝가리의 지배 때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성이다. 성안에 스바토플룩 1세와 모라비아인 동상이 있는 것은 당시 모라비아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가장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성 내부는 갤러리로 이용하고, 외부에는 성녀 엘리자베스의 동상과 부서진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성 니콜라이 교회의 첨탑 밑으로 보이는 구시가지의 지붕들, 다뉴브 강을 잇는 노비 모스트(Novy′ Most, 새로운 다리란 뜻), 성곽 옆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변 풍치가 아름답다. 간헐적으로 운행되는 도심 투어용 빨간 꼬마 열차도 예쁘다. 중세의 물결 일렁대는 올드 타운에 남은 교회와 건물들 성곽을 비껴 조약돌이 박힌 옛 골목길을 걸어 성벽 샛길로 들어서면 올드 타운이다. 성벽 앞에는 십자군 중세 군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카피툴스카 좁은 골목에서 만난 바는 와인이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포도 줄기를 넝쿨 채 치장했다. 해묵은 골목 바에 앉은 연인들의 속닥임이 잘 숙성된 포도주 향처럼 진하게 번진다. 회색빛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르틴 대성당(2002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이 가득하다. 무려 230여 년(1221~1452)에 걸쳐 완성된 성당에서는 합스부르크 왕 11명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베토벤(1770~1827)이 4년 동안 매달려 만든 ‘장엄미사(1823년 완성)’가 초연되었다. 이 도시를 사랑한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1801년 작곡)’를 만들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살아생전 15번이나 방문했다. 특히 브라티슬라바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리스트는 사망하기 1년 전(1885년)에도 이 성당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곤 했다고 한다. 또 성 프란시스칸 교회와 성녀 엘리자베스를 봉헌한 성 엘리자베스 교회도 유명하다. 특히 성 엘리자베스 교회는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건물 내·외부가 모두 푸른색이라 ‘블루처치’라고도 불린다. 헝가리 왕 앤드류 2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14세에 독일 튜링가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20세에 미망인이 된다. 이후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쳤다. 골목 속에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 찾기 올드 타운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골목은 더 규칙 없는 미로다. 국민 시인, 파볼 오르사그 흐비에즈도슬라브(1849~1921)의 이름을 붙인 광장에는 1572년,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분수대(롤랑드)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주변에는 구시청사, 국립미술관 등을 비롯해 온통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다. 특히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메인 광장 벤치에서 ‘대화를 엿듣는 나폴레옹’, ‘추밀(Cumil)’은 맨홀 뚜껑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 추밀의 동상 머리가 반질반질한 것은 만지면 행복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또 벽 뒤에 숨은 파파라치, 중절모를 벗고 인사하는 노신사 등. 모두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볼거리들이다. 길거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과 쉽게 구분되지 않아 동상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구시청사에서는 수시로 축제가 열린다. 때마침 중세 복장을 한 까마귀 무술단원들이 공연시간을 알리면서 손님몰이를 한다. 펜싱과 총을 들고 싸우는 전통극의 스토리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현지의 속살을 들여다본 듯 흐뭇하다. 타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14세기의 미하엘 성문이 있는 벤투르스카 거리에 이른다. 옛 도시 성벽의 4개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성문 주변은 중세 분위기다. 오래된 약국은 박물관이 되었고 연륜 깊은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길거리에서는 ‘섹시한 여성’이 와인 시음판을 펼치고 있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브라티슬라바. 경제 발전이 되지 않아 그대로 간직된 유적들이 여행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가른 도시 벤투르스카 골목의 데 파울리(De Pauli, 11번지) 궁 외벽에는 세기적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를 기념하는 명판이 새겨져 있다. “9세에 이 연주회를 발판으로 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당시 헝가리 땅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의 라이딩)에서 태어난 리스트.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의 토지 관리인이면서 궁정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리스트는 9세(1820년 11월 26일) 때 이 궁전에서 첫 연주회를 갖는다. 당시 이 도시의 귀족은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리스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고 그다음에는 즉흥 연주를 했다. 몇몇 귀족이 내민 악보의 난해한 곡도 거침없이 연주해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음악교육을 시킬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그를 6년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후원자 중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의 니콜라우스 후작도 있었다. 예술을 대대적으로 사랑하는 이 가문은 당시 궁정음악가로 하이든을 두었다. 이후 리스트는 19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리스트가 이 도시를 잊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올드 타운의 관광안내소 건물은 음악가 요한 네포묵 후멜(1778~1837)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피아노 교본을 써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유럽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거장이다. 당시 베토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사후에는 거의 잊히고 말았다. 또 이 도시가 음악의 도시임을 알려주는 멋진 국립극장도 있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체코 프라하나 오스트리아 빈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빈의 수드반호프 역에서는 평균 한 시간 단위로 열차가 다닌다. 1시간(50㎞ 정도) 정도 소요된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물가 정보 오스트리아, 체코 프라하보다 저렴하다. 맛집과 숙박정보 올드 타운의 레스토랑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또 도시에서 가장 큰 즐라테 피에스키 호수 옆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역피라미드 모양의 시내 라디오 방송국의 송전탑 위의 회전 레스토랑에서는 브라티슬라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류로는 와인은 물론 자두 증류주인 슬리보비츠가 괜찮다. 숙박은 올드 타운이나 시내 중심가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슬로바키아 북서부의 트르나바 주에 있는 피에스타니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스파 도시다. 수질과 효능이 좋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단지다. 숙박시설 등을 잘 갖추고 있어 휴양지로 아주 좋다. 또 폴란드의 슐레지엔(Schlesien,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체코어로는 슬레스코, 영어로는 실레지아) 산간 지역에도 수많은 온천이 있다. 슬로바키아 하면 떠오르는 ‘의적’ 유라이 야노식(Juraj Ja′nos˘k, 1688~1713)이 태어난 테르초바에서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전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 3개월 이상도 모자랄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겨도 경제적 부담이 적은 나라, 기억해둬야 할 곳이다.
- 2017-07-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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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오래된 이발소 이야기
-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 근처 좁은 골목 끝, 작은 이발소 하나가 있다. 이발소 딱 하나 말고는 그저 사람 사는 오래된 집들이다. 간판도 떼버리고 없는 이 안은 늘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후미지고 주위에 상점 하나 없는 이곳을 어떻게 알고들 찾아갈까. 전철이 오가는 바로 옆, 노래 후렴구마냥 ‘달그락, 철컥’ 전철 지나는 소리가 잊을 만하면 들린다. 이발소에 들어선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아빠 따라 들어갔던 옛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10년 단골은 기본 요즘 동네 이발소를 본 적이 있던가. 대형 미용실이 생겨나더니 상남자의 성지와도 같던 이발소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젠 필요가 없어 간판도 떼버렸다는 이곳은 ‘역전이용소’. 굳이 간판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냥 봐도 ‘역전 이발소’이니 말이다. 앉아 있는 손님마다 물어보면 이발소와 10년 넘는 우정을 과시한다. 이 동네 남자들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다. 손님들이 사는 곳도 다양하다. 멀리서는 충남 예산에서도 오는 손님이 있다. 37년 단골손님을 자처하는 정우석(89)씨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왔다. “여기에 다닌 지 30년이 넘었어요. 공화당이 망할 때부터 오기 시작했지. 내가 공화당에 있었거든. 오늘은 을지로에서 설렁탕 먹고 소주 한잔 하고 와서 힘들어 죽겠어. 여기 오면 반드시 이거(믹스커피) 한 잔 먹어. 이게 딱 낙이여.” 정우석씨는 고등학교 친구를 따라 처음 이곳을 방문했다. 친구들과 모여 이발소를 이용했는데 지금 혼자 남아 백발 머리를 다듬는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죽은 지가 오래됐어. 아마 7~8년은 된 것 같아. 친구가 여기를 다니더라고. 그래서 한번 와봤는데 잘해주데. 한 번 두 번 왔는데 언제든 잘해줘. 그러니 30년 넘게 올 수밖에. 염색 안 한 지는 10년 됐어. 내가 한 40년 가까이 염색을 했어. 30대 후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눈도 좀 안 좋아서 안 했어. 젊어 보이는 거 말짱 헛거예요.” 이발소를 나가는 정우석씨에게 “예뻐지셨다”고 말을 건넸더니 “나이 90까지 살면서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면서 웃는다. “이발하고 나면 여기 사장이 모자는 들고 가라고 하는데, 난 모자 쓰는 게 좋아요.” 15년째 그때 그 가격 권오복(81)씨는 한 달에 한 번 꼭 이곳에 와서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한다. 친절하고 무엇보다 머리를 잘자른다. 가격도 저렴해서 다닌 지 10년 됐다. “머리 자르고 염색하면 9000원입니다. 머리를 잘하시고 가격도 싸고 손님이 많아. 여기 오면 두세 시간은 기다려야 해요.” 이정학(62)씨도 역시 10년 넘은 단골. 아내가 말하길 지금까지 머리를 자르면서 최고로 잘 자르는 곳이라고 말해준다고. “마지막 마무리가 정말 깔끔해요. 한번 맛 들리면 다른 곳에 못 가요. 올 때마다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걸려요. 전화 예약하고 오면 순번이 조금 빠르기는 해요. 여기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아요. 사실 세면기도 완전 옛날 거였는데 몇 년 전에 새로 바꿨어요.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요.” 죽음, 대화의 흔한 주제가 되다 “이 자리에서 처음 이발 기술을 익혔습니다.” 50년 된 이 역전이용소의 주인인 임근묵(59)씨. 25년 전 원래 이곳 주인이었던 고모부로부터 이발소를 인수했다. “제가 공부를 잘 못해서 고등학교 떨어지고 충남 공주 집에서 빈둥거릴 때였어요. 야간학교에라도 들어가라며 고모부가 저를 서울로 불렀어요. 제가 공부 머리는 아니라서 시골집으로 도망갔죠. 그런데 또 잡으러 오시고요.” 처음에는 이발기술을 안 배우고 2년 동안 공장에 다녔다. 잠은 지금 이발소 바닥에서 직원들과 같이 자며 생활했다. “공장은 일요일에 놀지만 이발소는 바쁘잖아요. 그러니까 일요일에 일손이 부족하니까 손님 머리 감겨주는 방법을 배운 거예요. 몇 년 뒤 공장이 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명절에 이발소가 바쁘다면서 고모부가 자꾸 저를 서울로 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나 스무 살 때. 그때부터 마음먹고 이발을 배웠어요. 5년 머리 감기고, 면도 배우고 정말 하나씩 밟아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제가 일한 지도 40년이나 됐네요.” 이곳에서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이유인즉은 손님 대부분이 70을 훌쩍 넘은 시니어이기 때문이다. 1년이면 단골손님 스무 명은 세상과 인연을 다해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다. “오늘 오전에 의왕에서 아흔두 살 된 단골손님이 왔어요. 대방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20분이나 걸렸다 하시더라고요. 젊은 사람 걸음으로 5분이면 되는 거리죠. 다리가 무겁다고, 이제 그만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거동 못하는 손님들을 위해 가끔 머리를 잘라주러 집으로 병원으로 간다는 임근묵씨. 취재 당일도 못 오는 손님의 머리를 자르러 여의도에 가야 한다며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아파서 못 오시는 분이 계셔요. 제가 가요. 병원에도 가고요. 연세들이 많으시니까 매년 달라요. 몸이 힘들어 못 나가니 집에 좀 와달라고 하십니다. 그러다 돌아가시고 그래요.” 혹시 이 지역이 재개발된다면 이발소를 그만둘 생각이라면서도 불편해진 분들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이발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고, 손님들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상황. 그래서 임근묵씨는 옛날 방식의 정통 이발을 해온 대한민국 마지막 이발사를 꿈꾼다. “저를 찾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제가 없으면 불편해할 분들이 있으니까요.”
- 2017-07-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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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정동골2
-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이 있다.
- 2017-06-2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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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님과 기사님?
-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는 무척 조심스럽다. 진정성을 헤아리기보다는 얄팍한 호기심으로 남의 집 창문 들여다보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그러나 야학 시절 우리 가족을 가장 살뜰히 사랑해주셨기에 지금도 필자에게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는,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의미가 담긴 청춘의 빛깔 고운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려본다. “얘 네가 뭐 잘난 게 있다고 J선생님께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니?” “선생님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니? 그것도 모르고….” 요즘 만나는 야학 동급생들은 우연히 화제에 오른 J선생님 얘기를 하다가 필자를 무차별 공격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오만한 동물인가. 상대방이 조금만 잘해주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지 않는가. 라는 책 제목처럼 필자도 연애감정의 알파와 오메가를 10대인 야학 시절에 이미 다 터득했다. 순수한 선생님으로서 보여준 사랑이었는지, 약간은 감정이 있는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당시 필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J선생님께 차갑게 굴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를 J선생님께 두고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가난 때문에 다니게 된 야학교였지만 필자는 그 시절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선을 만났고 그 감동은 단지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살아오는 동안 필자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힘이 돼줬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모든 것에 우선한 아름다움이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영혼이다. 그 자체가 큰 감동이라서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야학 시절 그런 분들을 알았기에 이후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좋으신 분들을 한두 분도 아니고 몇십 분을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가. 달빛이 교교한 어느 10월의 밤이었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길섶 댑싸리에 내려앉은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도 달콤 상큼했다. 그날은 야학 수업이 끝난 뒤 J선생님이 필자를 집까지 데려다주시는 길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지만 당시 서울대 농대생들은 날이 선선해지면 감색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가슴에는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새겨진 배지를 달았다. 다들 어려운 때라서 사복 입을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들어가기 힘든 서울대 교복이었으므로 상당한 애착 내지는 긍지도 있었을 듯싶다. 우리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J선생님은 교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시더니 필자에게 내미셨다. “애란아 이거 내가 쓰던 건데 너 가져라.” “싫어요.” 그 시절 겨우 연필 아니면 볼펜 정도나 쓸 수 있었던 필자로서는 쉽게 갖기 힘든 필기구였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라.” “싫어요.” “제발 받아라.” 싫다는데 계속 받으라고 하자 짜증이 나버린 필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싫다니까요.” 몇 번 그렇게 거절하자 J선생님은 그만 땅바닥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그 만년필을 두 손으로 바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만년필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던 교교한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맙소사!’ 순간 필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황송해서 얼른 두 손으로 만년필을 받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제자인 필자가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온 뒤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 만년필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달빛이 노니는 마루 끝에 앉아서 선생님의 모습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었다. ‘아!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황홀한 밤이었어!’ 그 후 필자는 두고두고 그날 밤 그 장면을 떠올리며 황홀해했다. 17세 때였고 어느덧 3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날 그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달빛이 찬란히 빛나던 아름다운 젊은 날의 내 소중한 추억이여!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자존심만 시퍼렇게 돋아 있는 제자의 속내를 최대한 배려해주신 J선생님. 현실 속에서는 비록 비참한 신분일망정 상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고고한 공주였던 필자의 정신세계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날 기꺼이 최초의 기사님(?)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이런 일은 결코 흔치 않으며, 필자만큼 환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추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주인공은 단연 J선생님이다. 이 로맨틱한 멋진 기사님(?)을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 2017-06-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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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상의 갭
- ‘애란이도 이젠 시집가야지’ 그날 3학년 교실에서 목에 힘을 주시며 필자에게 이 말을 하신 분은 열일곱 살인 필자보다 한 살 더 많은 조봉환 선생님이었다. 순간 나는 속이 상해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필자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선생님의 잔인함이 미워서였다. 훤칠한 키,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용모, 목소리까지 좋았던 조 선생님. 싱긋 웃으며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농담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필자가 상처를 받은 것은 선생님에 대한 필자의 심상치 않은 감정 때문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 도중 내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더니 옆에 계신 아줌마가 조심조심 물으셨다. “얘 너 왜 우니?” 대답을 하지 않자 또 다른 아줌마가 말했다. “아마 설교 말씀에 감동해서겠지 뭐” 천만에 말씀. 그날 내가 운 것은 동생 연희 때문이었다. 목사님 설교 중에 동생은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내가 언니 편지에서 우표를 떼었어, 우표 수집하려고.” “말도 안 돼. 내 편지에 손을 대다니!” 선생님들의 편지를 보물처럼 아끼던 필자였다. 더군다나 조 선생님의 편지를?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조 선생님은 분명히 필자의 가슴 한 자락을 차지하고 계셨다.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조 선생님은 그해 어느 날 어머니께 매를 맞았는데 “잘못했다고 한 번만 빌어라.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애원하는 어머니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결국은 매를 맞다 견디지 못하고 기절까지 하셨다는, 필자 못지않은 고집쟁이 선생님이었다. 조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아리랑’의 가사를 이렇게 풀이해주셨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서 나한테 다시 돌아와라’가 아니라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 리도 못 가서 죽어버려라’라고 해야 한다.” 내게서 떠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하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의미가 여리고 정 많은 한국인의 정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이라서 충격을 금치 못했지만 필자도 모르는 사이 그 말씀이 점점 와 닿았다. 훗날 조 선생님은 우리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도록 그렇게 강인한 의지 내지는 투지를 의도적으로 심어주려고 그러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의 의도대로 필자는 강인함을 잘 키워나갔던 것 같다. 국어를 가르쳐주셨던 조 선생님이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등을 낭송하실 때면 그 멋진 모습에 푹 빠져들곤 했다. 금상첨화라고 조 선생님은 잘생긴 용모에 목소리도 일류 성우 못지않았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킹카였다. 필자는 혼자서 가슴을 태웠다. 그런데 어쩌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학생이었고 필자는 정규 중학교도 못 가서 야학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소녀였으니…. 필자가 만들어낸 동화에서는 필자가 공주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실이 필자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필자는 그때부터 아성을 굳게 쌓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자존심을 부르짖으며 상처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선생님이 아무리 좋아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야학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이 각별한 만큼 우리들 가슴속에 피어난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정도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수록 더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불운했던 10대에 야학 선생님들과의 신분상 장벽은 필자의 삶에서 결정적인 아픔이었고 상처까지 됐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근무하고 있던 평택여고 교무실에 학생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갓 부임한 총각 선생님의 얼굴을 보려고 몰려든 것이다.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얼굴이 울퉁불퉁 민주적으로 생겼거나 키 작은 분이라도 총각 선생님이라면 무조건 껌뻑 죽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필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필자의 야학 선생님들처럼 맑은 눈망울, 해맑은 표정의 선생님이 오신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그 상상만으로도 혼자 즐거울 때가 있다. 아마도 몇 명쯤은 심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속없이 외모만 잘난 남자처럼 경멸스러운 대상이 또 어디 있을까? 개성도 없고 평범한 용모의 필자는 순수하고 인품이 있으면서도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했는데 B선생님과 조 선생님은 야학 선생님들 중에서도 용모가 영화배우급으로 수려했으며 키도 훤칠했던 멋진 분들이었다. 또한 순수하면서도 의젓한 인품이 단연 돋보였다. 당시에는 신분상의 갭을 느끼며 가슴 아파했는데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필자가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커버해줄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만 가슴속에 넣어두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현실 감각도 없었던 필자는 오직 그런 사람들만 동경의 대상으로 모셔놓고 혼자 아파하고 상처받은 후 슬픔에 빠져 있기를 즐겼던 것이다. 그렇게 흠모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필자에게 품고 있는 고운 감정에는 아예 장님이 되어 깨닫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상처까지 주곤 했다.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 또한 소중한 것을 몰랐던 시절이다. 정신적 미숙아였던 것이다. 1993년 1월, 여의도에 있는 주택은행 본점을 찾았다. 조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야학 시절에는 몸이 마르신 편이었는데 적당히 살이 붙어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25년 만에 뵙는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도 필자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셨다. 단 1년 동안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절을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선생님 가슴속에 꼭 간직해두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필자가 10대에 지독한 가난 때문에 맺힌 한이 너무 많다고 하니까 “가난한 것이 그렇게 불편한 거였냐?’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당신도 가난했지만 크게 불편한 것을 몰랐다며, 당시 야학 선생님들도 대부분 어려운 처지였기에 우리들의 아픔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르쳐주려고 노력했다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은 당시의 야학활동이 ‘베풀고, 나누고, 사회에 동참한다’는 의미였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홀어머니도 삯바느질을 하시며 사셨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중․고교 때의 교복도 늘 남이 입던 것을 얻어 입었기 때문에 옷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교복 모자도 쓰레기통을 뒤져서 나오면 먼지를 ‘툭툭’ 털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이렇게 오랜만에 뵙기 전까지는 선생님 댁이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인 줄 알았다가 새삼 당신도 그렇게 어려운 처지였음에 놀랐고 그 상황에서도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셨다는 데 대해 깊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통은 그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고통을 많이 겪으신 선생님의 원숙함과 철학의 깊이에 필자의 마음은 고개를 숙였다. 조 선생님은 졸업식 날 집까지 데려다준 우리들이 다시 야학에 와서 선생님들을 붙잡고 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계셨다. 슬픔마저도 찬란하게 기억되는 그 시절! 서로가 애틋했던 시절의 소중하신 우리들의 선생님이시여.
- 2017-06-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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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벽증에 대하여
- 그녀는 완벽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성격도 밝았다. 외국어로 부르는 성악을 잘 불러 여러 사람들에게 인기도 높다. 부모에게 받은 유산이 많아 재력도 탄탄하다. 어딜 가나 공주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결벽증이 있다. 그래서 혼자 산다. 그녀가 결벽증이 심하다는 것은 악수를 거절했을 때 눈치 챘다. 다른 옆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는데 그녀 차례가 되자 그녀가 악수를 거절한 것이다. 금방 손을 씻었다고 했다. 그녀가 외출한 동안 그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친척뻘 되는 집사가 있었다. 차를 마시고 찻잔을 설거지를 하려 하자 집사가 그냥 두라고 했다. 남이 아무리 잘 씻어도 그녀가 나중에 또 씻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애용하는 특수한 세제가 있다고 했다. 이런 종류의 여성들을 몇 명 알고 있다. 비싸더라도 동네 유기농산품만 사다 먹는다. 일반 시장에서 파는 과일 및 채소류는 농약을 쓰기 때문이란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집에 누가 방문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잠시 앉아 있는데도 늘 옮긴 자리를 걸레로 닦는다. 집안 살림이 번쩍번쩍한다. 외출했을 때는 티슈와 물티슈를 늘 갖고 다닌다. 택배 기사나 고장 난 것을 고치러 기사가 왔다 가면 문고리부터 닦는다. 발자국마다 다 닦는다. 그러니 늘 쓸고 닦고 씻는다. 남들과 같이 식사를 할 때 소리 내면서 먹거나 입가에 음식물이 묻으면 질색을 한다. 찌개처럼 여럿이 같이 떠먹는 음식은 반드시 국자를 달라고 하여 나눠 먹어야 한다. 라면처럼 여럿이 냄비에 달려들어 젓가락으로 떠 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술 냄새가 나거나 흡연 냄새가 나면 질색한다. 심지어 남편과 키스하는 것도 못한단다. 외식을 해도 화장실이 지저분하면 용서 못한다. 재래시장처럼 공중화장실이 있는 곳은 그래서 못 간다. 그래서 음식점 고르기 전에 화장실 청결부터 점검해야 한다. 필자도 중학교 시절까지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고 매점에서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도시락을 펼치면 밥풀 묻은 젓가락들이 덤벼들어 식욕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비위가 약한 편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본인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전생에 북 유럽의 어느 나라 공주였다는 얘기도 한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 의식이 강하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그대로 인정해주면 된다. 악수를 꼭 할 필요도 없다. 악수를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그대로 봐주는 것이다. 단체 댄스 레슨에서 첫 시간에 남들과 홀드하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들이 종종 있다. 붙잡지 말고 춤을 추자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돌려보낸다. 체인징 파트너 해가며 같이 춤을 추는데 홀드를 거부하면 자칫하면 사람 무시한다고 싸움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같이 온 여자끼리만 추겠다거나 장갑을 끼고 춤을 추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도 어찌 보면 재주이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감염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면역력이 있으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알면서도 결벽증이 있다면 하기 싫은 것이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그대로 존중해줄 필요는 있다.
- 2017-06-2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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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죽비가 그립습니다”
- 을 집필한 김택근 작가가 성철 스님께 보내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요즘, 세상을 깨웠던 스님의 장군죽비가 그립다는 사연을 소개합니다. 김택근 작가·언론인 성철 스님, 감히 스님의 삶과 사상을 들춰서 을 출간했습니다. 책은 쇄를 거듭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자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남김없이 비우고 떠났지만 저는 스님의 생을 완전히 태우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세상에 계셨더라면 죽비를 들어 이렇게 일갈하셨을 것입니다. “어찌 사량분별로 허튼짓을 했단 말인가.” 일개 서생이 글자를 동원하여 고승의 생을 옮겼으니 실로 무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워보겠다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생을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영원한 자유를 얻는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곧장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얘기하셨지요.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갔지만 책은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를 읽다가 한 곳에 눈이 딱 멈췄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글자 한 자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발한다(我有一券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글자가 없는 경전. 스님의 수행은 결국 문자를 버리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깨달음은 책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글자로는 이룰 수 없는[不立文字] 것이었습니다. ‘교(敎)는 부처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다.’ 아, 얼마나 명징한 비유입니까. 이 구절을 읽으며 무릎을 쳤습니다. 스님께서는 결국 마음을 닦는 참선에 들었습니다. 스님의 수행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당시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스님께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신 지 벌써 24년이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우리는 이렇듯 시간을 헤아리지만 스님께서는 시간을 벗어나 계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1993년 11월의 해인사가 떠오릅니다. 다비식 날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찬비는 남은 자들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바람 불고 잎이 지고 사람들은 오열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지난날 지구라는 별에서 성철이라는 이름의 스님과 함께 또 다른 진리의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 간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음식 또한 가장 적게 드셨습니다. 아마도 세상에 머문 자리가 가장 적게 패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의 향기는 가장 멀리 날아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숱한 법어를 남기셨지만 제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82년 부처님오신날에 발표한 ‘자기를 바로 봅시다’였습니다. 스님, 다음 구절을 기억하시지요.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저는 이 법어를 읽으며 스님의 길을 따라 걷고 싶어졌습니다.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중생이 부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만 뜨면 자신의 본래 모습인 부처를 볼 수 있으니, 내가 있는 이곳이 부처가 사는 불국토요, 극락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은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먼 나라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이 불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지구라는 별에서 선포한 사람은 부처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분명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스님께서는 눕지 않는 수행 장좌불와(長坐不臥) 10년, 산문 밖을 나서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 10년 등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님께서 주도하신 봉암사결사야말로 비할 수 없는 위대한 불사(佛事)로 여깁니다. 마침 올해는 봉암사결사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도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산중의 포효는 지금도 선승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먹고살 길이 없으면 강도짓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에 거룩한 부처님을 팔아서야 되겠는가.” 한국 불교는 봉암사결사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봉암사에서는 법당에서 불교 아닌 것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오직 부처님과 그 제자들만 모셨습니다. 가사, 장삼도 새로 만들어 입었습니다. 원색을 추방하고 괴색으로 통일했습니다. 요즘 스님들의 장삼이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실천했습니다. 당나라 때 백장 스님의 청규정신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공주규약에 담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봉암사결사의 공주규약은 오래된 법이었지만 삿된 것들을 물리친 새 길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우리 불교계에 삼천 배를 남기셨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문을 들어올 때는 돈 보따리와 계급장은 소용없으니 일주문 밖에 걸어놓고 알몸만 들어오라고 하지요. 사람만 들어오라 이겁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내가 뭐가 잘났다고 당신을 먼저 만날 수 있나?’ 하지요. 부처님을 찾아왔다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정말로 뵈려면 절을 삼천 번은 해야지요.” 어찌 보면 절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像)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절을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흙덩이나 썩은 나무에게 절을 했더라도 성심을 다했다면 그 간절한 마음이 자신을 정화시킵니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지은 삼업(三業)의 몸뚱이를 아래로 내던지는 자체가 바로 참회입니다.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앞세우고 세상에 머리를 치켜든 사람들이 절을 하면 아만(我慢)이 사라집니다. 절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삼천 배를 하면 비로소 이웃과 생명이 보인다고 합니다. 삼천 배를 마치면 거의가 눈물을 쏟습니다. 참회의 눈물이며 환희의 눈물이며 고마움의 눈물인 것입니다. 삼천 배를 마친 신도들을 스님은 어떤 눈길로 바라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삼천 배는 분명 나를 씻기는 기도입니다. 스님께서 또 ‘남을 위해 기도하고, 남모르게 남을 도우라’고 이르셨습니다. “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를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깨친 사람은 은둔의 도사가 아니고, 신통력을 지녀 이를 과시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도를 얻었으면 중생을 사랑하고 제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구보리(上求菩提)면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남을 돕는 것도 어려운데 남몰래 남을 돕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에 남을 도왔다는 자국 자체가 없어야 진정한 불공입니다. 도와주었다는 뿌듯함이나 숭고함이 남아 있다면 진정한 보살도를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님의 호통이 귀에 쟁쟁합니다. “아까운 돈과 몸으로 남 도와주고 왜 입으로 공덕을 부수어버리는가?” 남을 돕고 불공을 자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성철 스님은 그래서 ‘자기를 속이지 말라(不欺自心)’고 이르셨습니다. 요즘 특별한 스님들, 목소리 큰 스님들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 감탄하고 자신을 숭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저마다 이름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 큰 밥그릇을 찾고 포만감에 뒤뚱거리고 있습니다. 자기 집의 무진장 보화는 놔두고 밖에서 거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삼 스님의 죽비가 그립습니다. 스님, 두서없이 길어졌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편지를 보낸다면 부칠 곳이 어딘지 생각해봤습니다. 스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 2017-06-17 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