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양력으로 11월 3일에 태어났다. 경주 외곽에 있는 나원, 외갓집에서였다. 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호르몬 작용의 산물이라 했고, 엄마는 운명이라고 했다. 1947년에 서울로 갔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서 다시 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검은색 토탄 가루를 뿌려가며 밥을 짓던 것과 고무줄 장사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글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전쟁이 났다. 양친이 이혼한 뒤였고 엄마는 나를 이끌고 피난행 열차를 탔다. 엄마는 아버지가 거짓말쟁이에 술고래여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쟁 기간에 통역관을 지냈다던 것도 믿지 않았는데 성장한 뒤에 만난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보여준 아버지의 사진, 미군과 찍은 것들을 보고 그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 피난 열차가 오산에서 쉴 때 엄마가 나를 개울로 데려가 몸을 씻겨주었다. 그때 기차가 폭발했다. 오지리 폭격기가 위치 오착으로 폭격했다는 것은 엄마의 얘기와 기록에서 확인했다. 엄마와 나는 몇 날 며칠 걸어서 경주, 외가로 갔는데 걸으면서 잤던 기억, 자느라 엄마를 놓쳐 울고불고했던 일, 원두막에서 참외를 훔쳐 먹던 일들이 지금도 흐린 필름처럼 떠오른다.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그날로 떠났다. 내가 잠든 사이였다. 나는 밤새껏 울었고 외삼촌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업고 달래주었다. 큰외삼촌은 나보다 14세, 막내 삼촌은 10세가 많았다. 그들은 나의 어버이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공부를 잘하고 시를 쓰던 막내 삼촌은 공일이면 새를 보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사상계’ 애독자였는데 그가 모은 책들을 나에게 전수했으나 이사가 잦았던 나는 수년 전 그 책들을 정리하고 말았다.
나는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전쟁이 난 다음 해,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나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두 번 낙제를 했다. 입학 당시 내 동기로 14세 소녀도 있었다. 최초로 본 활동사진은 아홉 살 때 동사(洞社) 마당에서 본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들던 장면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던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57년, 부산 동래온천으로 이사를 했다. 우장춘 박사가 돌아가셨을 때 원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운구를 하고 온천장을 한 바퀴 돌았고 그때 행렬을 따라다녔던 것은 그분이 훌륭한 육종학자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관을 멘 오빠들이 잘 생기고 멋있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사회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댁은 동래였고 나는 종점인 온천장이라 가끔 같은 전차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반 아이들과 어울려 선생님 집엘 갔는데 딸이 넷이었다. 나는 대뜸 “기생을 맞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학생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살던 온천장엔 권번이 있었고 세 살던 집 다른 방에도 기생들이 살아 첩이나 씨받이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아들을 낳아 대접받는 기생들이 생각나서 그렇게 지껄인 것인데 선생님은 내 저능한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고 조용히 나무라셨다.
나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시험기간 동안 생물시험지 뒷장에는 또 만화 라이파이 여주인공 제비를 그려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생물 선생님은 나의 정신 감정을 주장했고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못생긴 데다 공부도 못하는 나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두둔하고 또 챙기셨을까?
중3 때, 5·16 군사 정변이 터졌다. 중2 때 담임,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교직원노동조합)원으로 잡혀가셨다. 잡혀가신 선생님들이 부산에서만도 수백 명이라 했고 그분들이 갇혀 있는 곳은 서면에 있는 태화극장 뒤였다.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여서 점심시간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철조망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았다고 학교로 돌아온 뒤 다른 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도에 그분 아드님을 만났다. 교노조 사건 뒤에 태어났다던 잘생긴 아들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내 얘기를 하셔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찌 아들에게까지 내 얘길 하셨고 또 만나보라고 하셨을까. 중학교 때 내가 했던 실언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에 와서는 김동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곁엔 우수하고 잘난 제자들이 많았다. 학생 스타들이 여럿이었고 한 해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된 천재도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열등생이었고 그럼에도 나는 재학생 작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장편을 써서 김동리 선생님에게 가져가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선생님 제자로선 수준 미달이란 것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책은 내고 싶고 출판사에서는 선생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데요.”
며칠 후 추천사 원고를 주시면서 “앞으론 단편을 많이 쓰면서 문장을 치밀하게 직조하는 공부를 해라”고 하셨다. 이때부터는 문예지로의 진입이 내 열렬한 소망이 되었고 한분순 선배가 문을 열어주어 간신히 꿈을 이룰 수 있었다.(한 선배,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대학 졸업 후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내 독서량은 대부분 교정을 보면서 채운 것들이다. 세계명작들, 종교와 사상에 대한 책들도 그때 읽었고 전에 본 것들을 수차례나 다시 본 것들도 많았다.
1971년 범우사에서 일할 때였다. 범우사는 ‘다리’라는 시사잡지사에 속한 출판사였고 간행은 주로 번역물로 하이데거, 융, 러셀, 칸트, 토인비, 문예물 등이었으며 더러는 시대진단 비평지도 출간했다. 이때 ‘상황’이라는 시사지 교정을 보았는데 내 무지로 몇 개의 오자를 내고 말았다. 그때 그 책을 주관하던 임헌영씨가 “오자가 하나도 없으면 읽을 때 지루하잖아요. 괜찮아요”하고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임헌영 선생은 지금도 내겐 자상한 선배님이다.
주어진 인생 뚜벅뚜벅 걷다
1972년 10월 17일, 경향신문사에 있던 임헌영씨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광화문으로 탱크가 들어오고 있다”, “쿠데타인 것 같으니 어서 피하라”고 말했다. 마침 주변에 김상현 의원 차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차로 몰려가서 유신선포에 대한 방송을 들었다. 윤형두 사장은 도피를 하면서 내게 중요 원고들을 옮길 것을 지시했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출간을 앞둔 원고와 서류 등을 챙긴 뒤 뒷길로 해서 귀가했다. 그 이후로는 살벌한 시기였다. 출판물은 전부 사전 검열을 했고 검열 장소는 시청이었다. 내가 가져간 교정본들은 거의 반 이상이 빨간 줄이 그어졌고 그게 귀찮아 나는 동서문화사로 직장을 옮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학동창 오정희가 이상문학상을 받던 날이었다. 그녀의 축하연은 다음 날 식당에서 열었는데 그때 모인 동창들은 그 충격 때문에 제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1980년, 제 5공화국이 들어섰다. 출판사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5, 6년 가까이 해오던 리라이팅(극본을 소설로 쓰는 일)도, 외주로 나오던 교정일도 다 끊겨 버렸다. 5월 말경이었다. 광주에서 여성회를 하던 홍희담(깃발을 쓴 소설가)씨가 올라와 광주항쟁 수배자 두 사람을 숨겨주면 매달 생활비를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돈도 받고 좋은 일도 하고, 그건 횡재였다. 더 행운이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실학과 사회, 역사는 물론 리얼리즘 공부도 했다. 1982년, 남영동 정보원으로부터 은닉에 대한 조사를 받긴 했지만 그건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2초쯤 지나간 소나기에 불과했다.
1982년 정신대 이름으로 징집된 위안부 이야기를 썼다. 남태평양 현지 상황까지 사실적으로 쓴 소설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고 이 또한 수배자들이 일러준 책 ‘정신대 실록’을 읽은 덕이다. 굳이 이 사실을 밝히는 까닭은 피해국 중에서도 위안부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나는 여러 나라에 초청되기도 했고, 1992년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있었던 ‘일제 만행사에 대한 규탄대회 겸 심포지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내가 발표한 내용은 미얀마 위안소와 직접 취재를 했던 필리핀 상황에 대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종국 선생님을 소개했다. 그분은 정신대로 징집된 위안부 기록을 찾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해서 관보 2만 장을 복사했고 신문 기사들을 필사했다. 정신대로 간 여성 20만 명 중에서 반 이상이 성노예로 배치된 실태는 그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그분인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추모박수를 보냈다. 4박 5일의 심포지엄이 끝난 후 모나시 대학에 초청을 받았고 일본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씨와는 시드니 대학에서 합동 강연도 했다. 오늘도 나는 빌고 있다. 할머님들의 상처가 봉합이라도 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1997년, 딸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때 나도 따라갔다. 성장한 아이와 함께 지낸 타국생활, 그 3년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행복의 결과는 가산이 모두 탕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그 또한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인 것을.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정신연령조차 낮았던 내가 참으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멋진 선후배를 얻었으며 대중소설가로 출발해서 본격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삼촌이 다른 책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 날 사랑하고 보호해주었던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로 잡혀갔다는 것, 범우사에서 일하면서 유신을 맞았던 일, 광주항쟁 수배자들을 숨겨주었던 것 등이다. 이데올로기나 사회비평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주어진 삶이 그랬다는 것, 그 덕에 여러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내 삶의 색채가 어떠했든 분명한 것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
‘한국영화에 복고 코드가 있다’란 말이 잊힐 만하면 나온다. , , 등이 복고 정서를 드러내는 영화인데, 흥행 또한 만만치 않더니 여기에 영화 까지 이에 가세했다. 어느 비평가는 이런 현상을 ‘필연’이라며, 그 이유를 거창하게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 많은 사회구조와 연결 짓는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들인 군복, 바싹 처올린 새마을 머리, 청바지, 고고장, 월남치마, 씨레이션 등 시대를 상징하는 풍경과 어휘들의 퇴장이 문화 스펙트럼을 보여 왔다. 영화는 이런 시대의 표정을 정교하게 포착, ‘그 시대의 이야기’로 빚어내는 것이다
글 김정수 시인 / 문학박사
추억으로 가는 청춘열차
먼저 오늘의 ‘추억영화’를 영화 으로 시작할까 한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우중충한 우리의 한 시절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재방(再放)되는 듯하다. 한때 주말 마다 TV로 찾아오던 ‘명화극장’처럼. 성우의 ‘오버 랭귀지(?)’ 더빙으로 더 친숙했던 게리 쿠퍼니, 소피아 로렌이니, 딘 마틴이니, 오드리 햅번처럼 다소 철 지난 그러나 어딘지 살가운 눅눅한 질감의 문화와 추억을 만난다.
어두컴컴한 조명에 궁기마저 보이는 실내 분위기에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지금은 이 바닥에 ‘큰 산‘이 된 앳된 그래서 무모해 보였던 ‘쎄시봉’ 지기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등 자칭 ‘싱어송 라이터’들이 통기타를 뜯으며 노래하고, 걸쭉한 ‘구라’도 날리던 곳이었다.
여기서 잠깐, 오늘의 주제는 도, ‘어두웠던 한 철’도 아니다. ‘한 시대의 풍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남아있으며, 이 ‘과거소환’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며, 거기에서 오늘의 주제인 ‘영화음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일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음악’도 듣고 또 본다. 그러나 결코 이 사건은 당연치 않다. 100년도 채 안된 ‘뉴 테크놀로지’. 1920년대 후반, 무성영화 시대가 발성영화에 밀려나고, 영화에 ‘소리’가 등장했고, 그 소리에 대한 욕구의 정점에 ‘영화 음악’이 꽃 피웠다.
‘영화음악’은 사전적으로는 ‘영화를 위한 작곡·편곡·선곡된 음악’이다. 그러나 이전 무미건조한 뜻풀이에도 불구하고, ‘영화음악’은 무서운 속도로 진화, 발전했다. 영화음악은 필연적으로 영화를 더욱 ‘영화’이게 하는 절대 영역이 됐다.
처음엔 영화음악을 ‘영상의 덧칠’ 정도로 여기다가, 점차 ‘영사의 또 다른 자아’로 신분이 상승한 데 이어, 급기야 ‘영상 너머’까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전쟁마저 기적으로 바꾸는
본격적인 ‘영화음악’과 ‘추억’을 풀어볼까 한다. 한 시대를 군림하고, 기어이 문화가 되고, 곰삭은 추억이 되어, 아직도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한 현상을 이야기하려 한다. 혹자들은 늘 ‘이 영화’를 비망록의 첫 자리에 앉히곤 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 유태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Wladyslaw Szpilman·1911~2000)’의 실화 영화.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나치에 점령당한 폴란드의 유명 음악가였던 주인공이 단지 유태계라는 이유로, 쫓기고 테러를 당하고, 가두어지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나들다가 탈출했으나, 폐허에 버려져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질 즈음, 음악을 좋아하는 독일군 장교를 만나 구사일생 살아남는다는 평이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단순한 서사구조지만 ‘음악’이라는 촉매를 통해 절망과 희망, 휴머니즘과 사랑까지를 말하게 된다. 영화 전편을 차지하는 황량한 폐허 속에서, 헐벗고 굶주려 목숨조차 이을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의 주인공이 언 손을 녹이면서 연주하는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op. 23’은 서러우면서 환희에 찬 울림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피골이 상접한 스필만을 연기한 애드리안 블로디(Adrian Brody)와 그의 목숨을 구해준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Hosenfelt) 역의 ‘토마스 크레취만(Thomas Kretchmann)의 탁월한 연기는 이 음악 속에서 비로소 완성에 도달한다. 특히 처음 서툴게 음 하나하나를 눌러가다가 곡의 진행에 따라 점차 안정되어 가면서 예전의 기량과 완숙도에 몰입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의 감동을 절정으로 몰아가 결국 눈물을 체험하게 한다. 이 연주를 시종 바라보는 호젠펠트의 표정 변화는 완성도 높은 연주와 함께 상승효과를 일으켜 감상자들의 호흡까지 가쁘게 한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폐허 위로 울려 퍼지는 쇼팽의 음악은, 아니 스필만의 연주는 처참한 전쟁의 참사조차 감동의 배경으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품은
롤랑 조페 감독이 1986년 발표한 은, 그 해 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명화다.
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 각축을 벌였던 아마존 상류 원주민 마을에서 있었던 선교와 순교라는 다소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아마존의 거대한 원시림과 장쾌한 이구아수 폭포라는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토리 라인이 몰입도를 높이는데 전혀 손색이 없었다.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음악성이 한껏 발휘된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와 오보에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는 영화음악을 말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명곡이다.
특히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노예상인에서 신부로 변신, 선과 악을 넘나드는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인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와 엄격한 신행과 아가페적 사랑을 몸 전체로 표출한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의 연기가 음악과 어우러져 영화 전체의 격(格)과 디테일을 살렸다. 침략자들이 총과 화포를 난사하며 학살과 파괴를 자행하는데도 그 한가운데로 묵묵히 행진하는 무리들이 끝내 죽어가며 흩뿌리는 선혈과 비명 사이로 넬라 환타지아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극한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느끼게 했다. 유난히 깡마른 가브리엘 신부가 맨 몸에 십자가를 멘 채 이구아수 폭포로 떨어지는 극적 상황에서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엑스터시와 눈물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이렇듯 영화음악은 절정의 완숙한 연기와 하나가 되어, 관객의 감성을 절정으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감당한다.
도 보석
이 밖에도 쉬 잊히지 않은 영화와 영화음악이 몇 편 있다.
자크 드미 감독의 에서 안타까운 연인들의 눈으로 주고 받는 밀어를 느끼게 해주는 ‘미쉘 르망’의 ‘I will wait for you’는 감정의 잔물결을 보는 듯 애잔했다. 특히 1965년의 에서의 ‘My favorite things’, ‘도레미송’, ‘에델바이스’ 등은 알프스를 배경으로 낭랑하게 퍼지는 ‘줄리 엔드류스(Julie Andrews)’의 맑은 음색으로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에서는 사이먼(Simon)과 가펑클(Garfunkle)이라는 걸출한 듀엣의 목소리로 ‘Sound of silence’ ‘로빈슨 부인’ ‘스카보로의 추억’ 등의 밀리언셀러를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의 명감독 뤽 베송 감독의 은 킬러라는 비정한 세계를 한 여자 아이와의 감정선과 교차시키면서, 또 다른 휴머니티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라스트신에서 킬러가 생전에 아끼던 화분을 땅에 묻는 소녀의 무표정 위로 ‘스팅(Sting)’의 기타 선율의 ‘Shape of my heart’은 ‘아픈 위로’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줬다.
‘아랑 들롱’의 출세작 는 1960년 르네 끌레망 감독 작품으로, 푸른 지중해와 인간의 탐욕을 교직해, ‘니노 로타(Nino Rota)’의 애절한 트럼펫곡 ‘태양은 가득히’를 감싸 만든 명작이다. 방화도 추억 갈피에서 몇 꺼내본다.
에서 비 오는 텅 빈 사십 계단을 배경으로 잔잔히 깔리는 ‘비지스’의 ‘홀리데이’는 곧이어 벌어질 잔인한 살인을 예감케 하는 묵시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 몫을 했고, 또 오늘의 박찬욱 감독을 있게 한 에서는 이미 작고한 가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선곡, 남과 북의 무거운 체제에 눌려 아파하는 젊은이들의 혼란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이준익 감독은 에서 가수 이선희의 ‘인연’의 서사적 가사를 영화 감성으로 이입시켰다.
느닷없이 한 음절의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이 때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영화 그 음악이 마음에 머물고 감돈다는 것은, 끝내 우리가 교환과 거래가 아닌 공감과 추억이라는 가치를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추억은 늘 일인칭일 수밖에 없다.
추억도 힐링이란다. 모쪼록 꼼꼼하게 쌓아가야 할 일이지 싶다.
‘비지스‘의 할리데이를 자주 들었던 ‘열차집’에 가서 돼지기름에 노릇노릇 부친 빈대떡을 어리굴젓 한 점 얹어 막걸리나 한 주전자 마실까 싶다.
개인도 손쉽게 인터넷에 자기 방을 만들어 세상에 정보를 전파하는 블로그는 쌍방향 소통이 핵심정신인 웹2.0시대의 총아입니다.
블로그는 컴퓨터 언어를 모르는 개인들도 운영할수 있게 잘 고안됐습니다. 지구촌 수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고, 생업을 영위하며,세상을 바꿔가니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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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는 귀퉁이에 있더라도 글-사진을 올리는 순간 포털 사이트의 검색에 걸리는게 큰 강점입니다. 전파력이 홈페이지의 수십배에 이릅니다. 게다가 블로그는 개설-운영 비용이 공짜입니다. 그러니 이제 ‘홈페이지 시대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포털인 네이버, 다음이나 블로그 전문 사이트(티스토리, 이글루스, 워드프레스 등)에 자기 블로그를 만들 수 있습니다. 디자인도 여러 가지 중 선택 가능.
교직 은퇴후 소나무 취미를 살려 블로그로 성공한 남궁길님의 사례입니다. 인터넷 마케팅 교육을 받고,‘소나무팜’이란 개인 블로그(www.ng3030.blog.me)를 만들어 소통했습니다.
아라키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을 올리면서 합리적 가격을 제시하고 주문도 받았습니다. 10개월만에 몇천만원의 수익을 냈다고 합니다.
블로그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블로그로 영향력을 가진‘블로거팁닷’(www.bloggertip.com) 장두현님.블로그 가이드, 블로그에 대한 100가지 글, 베스트 블로그 100개 등 좋은 정보가 많으니 가보세요. 컨설팅 등으로 수익도 냅니다. 파워 블로거로 여러번
선정됐고 미디어에도 나갑니다.
한국광고학회가 2013년 조사한 결과 한국에서 가장 많이 활용(구독 및 게시)되는 SNS는 각각 65% 활용율을 보인 유튜브와 블로그였습니다. 블로그 탐방은 6회에 계속됩니다.
김일 소셜미디어나눔연구소장/본지 대기자
“어린시절 철도는 저의 모든 것이었다. 부친이 철도 공무원을 하셨고 열차로 부상을 입고 건널목 간수로 근무하다가 정년을 맞았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심포리 철도변에서 철도와 함께 생활했다.”
‘철도시인’ 김민정(55·사진)씨는 철길 옆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철도 관련 시를 쓰고 있는 사연을 털어놨다.
김씨는 “부친이 철도 공무원을 하시다가 (열차 때문에) 부상을 당해 건널목지기를 하신 탓에 철도는 항상 애잔하고 고향처럼 포근한 단어”라며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철도 건널목 근처가 고향이고 태어난 곳이기에 철도는 나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계역과 흥전 심포 통리 역 등 폐선된 역을 시에 달고 ‘영동선의 긴 봄날’이라는 시집도 발표했다. 또한 2009년 경의선 복선전철이 개통될 때는 축시도 했고, 지난 5월 4일 평화열차(서울역~도라산역) 개통 때는 이를 기념하는 시도 발표했다.
김씨는 “철도 관련 시를 자주 그리고 많이 쓰다보니 철도공사에서 철도시인으로 인정해 준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의 산소도 고향 철도변에 모셨다. 나는 철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고 회상했다.
‘영동선의 긴 봄날’ 외에도 ‘추전역’, ‘도계역’ 등 그는 철도와 관련된 시를 100편 이상 발표해 한국철도공사로부터 유일하게 ‘철도시인’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그에게는 아직도 문학소녀의 순수함이 살아 있었다.
그는 “여중에 다니면서는 시를 읊고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하던 꿈 많은 문학소녀였다. 6남매의 막내인 나는 서울에 사는 오빠 덕분에 중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갔다”고 말했다.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늦은 진학이었기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부전공으로 교직을 택했고 1985년 꿈에 그리던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는 앞으로 꿈에 대해 국내 철도 문학을 정리해 발표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김씨는 “많은 날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어차피 철도시인으로 불리는 사람으로서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 문학박사, 상지대학교 대학원 강사를 거친 그는 현재 서울 강일중학교 부장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또 한국여성시조문학회장, 강동문인회 부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서울교원문학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여성문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간암으로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간의 일부를 떼어 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감동을 주고 있다.
감동의 주인공은 정현종(18)군. 경남 김해 경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정군은 13일 부산 동아대병원에서 아버지 정성균(48)씨에게 자신의 간 일부를 떼어줬다.
하늘도 감복했는지 수술도 성공적이었다. 만성 간염을 앓아오던 정씨는 지난 2월 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간 이식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이 이뤄져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군은 흔쾌히 자신의 간을 아버지와 나누기로 결정했다. 대학 입시가 7개월 남았음에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군은 “대학 입시는 다음에 볼 수 있지만, 아버지 건강은 한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씨 부자는 현재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
경원고의 전성호 담임교사는 “이런 큰일을 하게 돼 대견하다”며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내색하지 않고 교사가 되기 위해 성실히 공부하며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심성이 고운 학생”이라고 정군에 대해 설명했다.
정군의 병원비 지원을 위해 경원고 전교생 1300명과 교직원 90여 명은 지난 18일부터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 모은 기금은 이번 주 중에 전달한 계획이다.
최자웅 한국시니어클럽협회 회장, 어르신 일자리 현실에 날리는 직설
‘노인들의 4苦’ 즉 신체적 질병, 정신적 고독, 경제적 빈곤, 사회적 고립 등에 시름이 더 깊어져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시니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복지의 폭을 넓혀도 일자리가 없는 한 시니어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주지 못한다. 일자리는 그 규모와 수입과 무관하게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혜적인 일자리 제공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들의 가지고 있는 노하우와 지식을 사회 에너지 안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문제는 이 사회의 활력과 역동성을 담보하는 최고의 복지수단이다.
시니어 일자리 사업은 블루오션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명제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과연 그 영역을 어떻게 접해서 풀어야 블루오션이 될 것인가?
여기에 그 하나의 증거가 있다. 한국시니어클럽협회는 전국 120개 시니어클럽을 거느리고 활발하게 노인 일자리 사업을 펼치고 있는 정부 수행 기관이다. 그 역사가 벌써 14년.
최자웅 한국시니어클럽협회 회장은 협회, 노인 일자리, 사회, 그리고 미래에 대해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노인 일자리 현실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노인 일자리 분야의 현실을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13,000,000. 이 숫자는 65세 이상 노인과 베이비붐 세대의 신(新)노인을 모두 합한 숫자다. 노인 일자리 산업의 규모를 단번에 설명해 줄 수 있는 숫자이기도 하다.
120. 이 숫자는 전국에 설치된 시니어클럽의 숫자다. 시니어클럽은 자체적으로 일자리 23만 개를 담당하고 있으며 노인들이 직접 생산하는 쇼핑몰 하나하나몰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는 일선 수행기관이다. 노인들과 실제 대면하면서 실제 현장에서도 함께하기 때문에 지역 사령관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지난 14년 동안 노인 복지의 최전선에서 일자리 만들기에 전력을 다한 시니어클럽은 작년 2013년에 마침내 완전한 법인기관이 됐다.
“그 전까지는 거의 공인된 준기관이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법인기관으로 법적 보장이 이뤄진 것이 작년의 쾌거입니다. 노인 일자리에 엄청난 수요가 있음에도 전국 시니어클럽은 아직 120지부로 이는 전체 지자체 관련 기관의 총량에 비교하면 50% 정도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니어클럽을 통해서 일자리를 얻은 노인들이 50%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제 남은 50%를 채울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일 계획입니다.”
최자웅 한국시니어클럽협회 회장의 말에는 현장에서 일하며 고락을 겪었던 사람 특유의 거침없음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회적 사안에 대한 목소리에서도 ‘할 말은 하는’ 솔직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자체장들에게 시니어 일자리 분야는 표밭이나 다름없다”
“시니어 일자리 분야는 목민관 입장에서는 아낌없이 투자해도 좋을 분야입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표심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노인 일자리와 복지에 대한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최 회장은 시니어로서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의 수가 천만 명이 넘어가는 걸 예로 들며 그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강할 것인지를 역설했다. 그러나 동시에 ‘표심을 얻기 위해 단기적으로 노인 복지를 이용하려는’ 지자체장 후보들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시니어 분야를 정치적인 무기와 도구로서 이용하려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보면 다 안다”라는 것. 최 회장은 시니어 일자리를 정치적으로 잠깐 이용하는 것이 아닌 장기적으로 큰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한다고 충고했다.
20만 원으로 고정된 노인 급여에 대해서는 분통을 터뜨렸다. 10여 년 전부터 묶여있는 금액이며 말도 안 된다는 게 최 회장의 설명이었다.
“시니어클럽이 생긴지 14년이 됐는데 그때와 지금의 노인 급여가 같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이슈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이제는 노인 복지를 빼면 말이 안 되는 시국에 사회는 양극화되고 국부는 증가됐는데도 그대로 20만 원이라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부는 노력한다고 하지만 정치인도, 노인들 스스로도 목소리를 내야하는 부분이며 사회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큰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노인 급여 20만 원… 개선을 위해 우리 스스로도 뭉치고 노력해야
요즘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복지다. 그러나 실제 노인에게 제공되는 복지 차원의 투자는 미약하다. 최 회장은 과거 노인들은 산업화 이전의 시기에서도 가난과 전쟁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노인 대접을 받았었고 삶의 최소한의 자존심, 존엄이 있었지만, 이제는 유감스럽게도 무너졌다고 말했다.
“핵가족 세태가 나빠졌다고만 볼 수 없지만, 젊은 사람들이 효심이 꼭 없어서만이 아니라 효도를 할 수 없는 사회 구조가 됐습니다. 이 문제를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무위와 외로움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노인 분들이 많습니다. 20만 원이라는 돈이 삶의 여유를 만드는 부분이 아니라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런 절박한 삶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너무 처절합니다. 이런 문제가 10년 동안이나 방치되고 있는 겁니다. 대통령도 사회도 반성해야 합니다. 경제 발전도 중요하고 국가 발전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절대선입니다. 저는 최대선으로 끌어 올려야겠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20만 원 신화가 제발 깨져야한다고 말하는 최 회장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국가나 지자체의 도움뿐만 아니라 노인들 스스로가 자각하고 노력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줘야한다고 강조했다. 공동체적인 관계나 조직(일하는 노인연대 전국조직, 시니어클럽 산하 조직 등)을 통해 노인들이 자기 주체적인 공동체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공동의 힘을 빌려 단결해야만 한다는 것.
시니어들은 정부 정책과 지자체 정책에 의존해 따라오라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닌 주체로서 ‘우리의 삶, 우리의 일자리, 우리의 소득을, 우리가 노력하고 찾아낸다’는 정신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시니어의 취업 - 일단 시니어클럽에 가입하라
시니어클럽은 일단 전국 각지에 있는 시니어클럽에 가입해 최소한의 절차와 계약 조건을 통해 회원이 되면, 일자리 상담 등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형태다. 최 회장에게 시니어클럽에서 인기 있는 직종에 대해 물어봤다.
“다양하게 있지만 자기가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소일삼아 하시는 분들에게는 괜찮겠지만 절박하신 분들에게는 알맞지 않습니다. 그중에 택배인데, 노력하는 것에 따라 50만~90만 원을 벌기 때문에 평균적인 소득이 높아 인기 있는 편입니다. 또 이전 직장 경험(교직 생활 등)이나 취미 겸 자기 지식을 살려 문화재 해설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올해는 3월에 발대식을 했고 이미 일들을 시작했다. 보통 일자리(20만 원 일자리)는 겨울에는 쉰다. 1년에 8,9개월만 일한다.
각 지구 시니어클럽에는 전담 인력과 보조 전담 인력이 있다. 전담 인력들도 아주 추울 때 1개월 정도는 쉬고, 11개월을 일한다. 보통 일자리가 겨울에는 쉬기 때문에 평소 노인 일자리를 도와주지만 1개월은 빼고 일한다고 한다.
전담 인력은 각 시니어클럽에 일반적으로 평균 2명 이상이고, 일자리가 많으면 많이 쓸 수 있다. 다만 전담 인력의 보수는 낮은 편이다. 전담 인력은 정규직은 아니고 시니어나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들을 인턴으로 채용하고 있다고 한다.
최 회장은 이러한 부분에서는 청년 일자리도 도모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약하긴 하지만 전담 인력 인건비의 강화 필요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마인드와 기획재정부의 마인드가 서로 달라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게 최 회장의 아쉬움이었다. 또한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한 사업 확장도 개인적 사명을 갖고 있지만 착수를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삶은 타오르는 불꽃’ 행복한 젊음은 마음으로부터 온다
최 회장은 행복한 노년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삶의 꿈과 의지를 강조했다. 예전에 비해 지금 노년은 청춘이지만 젊은 날과 연배가 달라진 것 또한 사실이다. 노년화라는 육체적 변화를 뛰어넘을 수 있게끔 정신적인 부분이 중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딜타이가 한 말 중에 ‘삶은 타오르는 불꽃이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불꽃이 타오르기를 멈추면 죽음과 같습니다. 아직도 인생의 꿈과 그리움을 가지고 진정한 행복과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노인들은 노년이지만 청춘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 이모작과도 연결됩니다. 인생 전반부는 의무적으로 산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회 고정관념에 의해 외길로 달려온 부분이 있지만 노년기엔 이러한 의무와 절박한 것에서는 해방됩니다. 원하는 것과 아닌 것에 대한 판단도 서고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기 일자리, 취미, 자기창조를 찾는 것을 우리 사회가 제공해줘야 합니다.”
최 회장은 독일에서는 시니어들에게 자신을 재발견하게끔 도와주는 것을 거의 제도화시켰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도 사회적으로 개인의 선택이 아닌 국가적으로 노인들의 인생 이모작을 확실하게 보장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최 회장의 신념이었다.
마음이 젊으면 그것이야말로 젊음 그 자체라는 신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최 회장은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최 회장은 이미 협회장 전이었던 3년 전에 ‘복지시대 시니어·주니어 노동 연합’을 만들었다. ‘일자리, 세대 차이를 극복해서 윈윈하자’는 생각에서다. 둘(시니어·주니어) 다 심각하지만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보완하고 상생해야 하는 문제라는 관점에서였다.
“‘시니어·주니어 노동연합’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청년과 노년이 연합해서 윈윈하는 쪽으로 힘을 합쳐, 요구할 것은 요구하며 풀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점을 특화시켜 ‘노년유니온’도 만들게 됐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함께 뭉쳐야 힘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시니어와 주니어가 함께 상생하고 윈윈하는 길을 꿈꾼다
시니어들은 국민의 거대한 부분이며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구매력 창출의 장이다. 최 회장은 총체적인 삶의 가치로도 조명해야겠지만 모든 국가 관념을 국민 복지와 행복에 맞춰 경제보다 복지를 우위에 두는 가치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말 이상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가지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 증거는 부단한 연구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최 회장 또한 그런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다.
“시니어클럽도 지난 14년간 열심히 했지만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복지의 주체로서 나서자’, ‘우리도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다. 즉 우리가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노인조직화 사업이 중요합니다. 그에 대한 연구를 위해 시니어클럽 내 싱크탱크 연구소를 만들어 발족했습니다. 시니어클럽이 싱크탱크 역할을 다하기 위함입니다. 하나하나몰을 인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노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내신 생산품을 통해 노인의 삶을 가치로 꽃피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생산품을 통해 삶의 모든 내공과 가치를 나놀 수 있기에 일반 상품의 가치를 뛰어 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함께 상생하고 윈윈합시다.”
숨도 멈추고 혼을 담아 셔터를 기운차게 누른다.
다소 무거운 디에스엘알(DSLR) 카메라지만 사진을 향한 열정이 있기에 몸은 가볍기만 하다.
1956년생으로 서울 한성고 24회 동창 ‘한사회’ 회원들은 올해 59살의 동갑내기들이다. 이들은 사진에 생각을 담아 세상과 소통하고 각자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있다.
등산복 차림의 10여명의 중년들이 3월 초 북촌 골목길 장독대를 향하여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몰입의 순간이다. 꽃샘 추위도 아랑곳없다.
어떠한 구도로 카메라 위치는 어떤 쪽이 좋을까? 햇빛은 어느 방향에서 비취고 있나?
카메라의 조리개와 셔터속도로 빛과 어둠을 조절해 사진을 찍는다. 거기다가 광각 또는 망원렌즈를 통해 담은 세상은 무아지경에 이른 순간이 된다.
노재덕 한사회 회장은 “고교 동창들로 구성되다보니 팀웍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을 통하여 자기표현 방법이 생겨 자신감도 향상되는 등 아름다움을 추구하기에 마음도 정신도 맑고 젊어졌다”고 강조했다.
한사회 회원들은 어울려 사진 촬영하기에 좋은 곳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손주를 비롯하여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즐거움도 있다. 뒤늦게 배운 사진 취미가 이들의 노후생활 준비를 탄탄하게 하고 있다. 하루가 너무도 빨리 간다.
어떠한 취미든 그 속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의 눈은 열정으로 빛난다. 취미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스스로 헤쳐나가는 특성이 있으며 그 결과물 또한 놀라운 경우가 많다.
사진기자의 관록을 지닌 노 회장은 “나이가 들면서 즐길 수 있는 취미로는 사진촬영이 제격”이라며 “무엇보다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후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피력했다.
그는 “사진은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 디딤돌과 같습니다. 사진을 배우고 찍는 과정을 통해 일상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사회와 인간 간의 관계도 더욱 단단해진다”고 말했다.
일상의 사소한 대상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나이 들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사진 창작을 한다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며 행복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거나 짜증이 날 겨를이 없다. 많이 생각하고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결과물을 만들어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늙을 새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지난 5년 동안 결과물의 사진작업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회원 A씨는 아직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겸손해 한다. 사진촬영을 할 때는 혼을 담아 찍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하는 등 자부심도 대단하다.
“사진은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디딤돌”
지난 2008년 우연히 모이기 시작한 이들은 그동안 50여 차례에 걸쳐 국내 추억공간과 사건의 뒤안길, 풍물문화 유적지를 답사하며 우정을 키워왔다.
사진기자협회장 직을 지낸 노재덕 회장에게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사진의 이론 강의와 출사를 통해 사진의 깊은 세계에 빠져들었다. 1년에 10회 꼴로 출사를 다녔으니 주로 고궁, 잊혀져 가는 곳들, 아름다운 흔적, 추억의 장소들 중심으로 사진을 담아왔다.
출사를 가는 곳은 사진 선생인 노재덕 회장이 일상에서 공감하는 곳을 선정한다.
그래서인지 한사회 회원들의 카메라는 경치나 일출이 아닌 평소 동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등에 진 배낭에 무서운 카메라를 메고 온 회원 B씨는 “대학 때 사학을 전공해 문화 유적을 답사하다 보니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제는 교직을 나오고 보니 사진이 필수가 됐다”며 친구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회원인 C씨는 “사진을 찍는 그 순간은 삶을 배우는 겸허한 값진 시간이고 중년에 만난 건전한 취미는 일상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보배와도 같다”고 밝히며 “사진의 역사부터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직접 보며 가르쳐 주신 노 회장 덕분에 사진에 대한 열의가 더욱 뜨거워졌다”는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서울 한성고 24회 동창 ‘한사회’ 회원 12명은 지난 2월 충무로에서 ‘풍경속으로’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모두 생업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짬을 내 작업한 작품 사진 24점을 내걸었다. 갯벌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해안가의 일몰, 메밀꽃과 소나무, 골목길과 아이의 미소 등 우리 주변의 풍경들이다.
노 회장은 “전국 곳곳을 누비며 담아낸 작품들을 하나 둘 모아 일반에 공개하는 자리였다”면서 “사진은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 쑥스럽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비춰 본 거울을 가감 없이 보여드린다는 점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사진전에서 만난 한사회 D회원은 “제 사진이 작품의 완성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세상살이는 이런 것이다’라며 들려주고 싶은 사진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회원들 대부분이 현재는 전시에 참여 할 정도로 실력들이 출중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동호회에 가입하기 전에는 그저 핸드폰 사진 찍듯이 하나하나 담아 놓기에 위해 찍는 수준이었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만큼은 컸다.
경향신문사에서 30년 동안 일하다 정년퇴직한 노 회장에게 인생 2막 1장의 길을 물었다.
“해왔던 일의 연관된 길에서 답을 찾아야 노후가 평화로울 수 있다”며 그는 새로운 일을 하더라도 자기가 해 오던 분야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며 사진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을 맺었다.
활기차게 노후를 사진으로 즐기려는 한사회 회원들의 모습을 보며 찰나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주는 사진, 그들이 있어 중년들이 바라보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