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미국 두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전시를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가며 촬영할 때입니다. 지금은 모든 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소위 큰 나라라고 불리는 대국들로부터 여러 방면에서 휘둘리며 IMF를 선고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연신 어깨동무라고 표현했지만, 그 상태에선 누가 봐도 두 나라가 어깨동무를 하기에는 서로 무리였습니다. 내 눈엔 덩치가 크고 팔도 긴 미국의 손은 그래도 우리의 어깨에 닿았지만,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팔도 짧은 우리의 손은 미국의 어깨에 닿지 않는 안타까운 뒷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럴수록 예술을 통해 이 문제를 접근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사진은 이 일을 담당하기에 좋은 점이 많은 예술장르라는 접근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를 대강 훑으며 스케치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나름 충분히 준비하고 로드맵까지 미리 짜고 갔지만, 막상 현장에 들어서니 얼이 멍멍해집니다. 우선 미국이란 나라의 크기와 다양성 그리고 찾아 다녀야 할 장소와 그 거리를 인식하니, 주눅이 든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과 문화원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고 일터와 집에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다시 촬영 현장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진 작업은 현장에서 사진기 뷰 파인더를 통해 나를 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풍광만 렌즈와 눈에 비칠 뿐,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가 들어간 현장이 스스로 감당되지 않을 때, 사진가로 사진기의 셔터를 도통 누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우리나라의 담양 소쇄원을 촬영할 때도 그랬습니다. 소쇄원의 계곡과 광풍각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제월당에 올라섰는데도 소쇄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월당까지 포함해 소쇄원 담장과 소쇄원으로 들어오는 대나무 숲 모두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뒷동산엘 올라갔다 왔는데도 셔터를 누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은 소쇄원 양재혁 원장이 준비해준 한 보따리의 책을 받아들고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훑어 본 얼마 후, 다시 소쇄원에 내려가 몇 번 소쇄원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경우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미국동포들에게 힘을 얻고나서, 북미주에서 가장 높다는 위트니 마운틴(4500m)을 향했습니다. 그 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락에서 시작해 봉우리들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 좋은 장소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렇게 위트니 마운틴의 산세에 한동안이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위풍당당합니다. 시샘이 날 정도로 여러 모로 아름다운 산입니다. 그 산의 여기저기를 오르다, 무심코 밟고 가는 발밑 길바닥에 들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보니 그냥 맨땅인 줄 알았던 흙바닥에 많은 작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서는 몸을 더 낮추어야 했습니다. 아예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서야 눈높이가 겨우 맞았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는 들풀들이 한층 반짝거리는 것은 햇살도 그렇지만 높은 산이 그 뒤에서 그늘 배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산자락의 그늘은 색 온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었습니다. 감동이 커져, 평상심을 찾으려 숨을 크게 쉬며 작은 들풀에 초점을 맞추니, 카메라 뷰 파인더 안에서 웅장한 산자락이 정말 하늘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들풀의 반짝거림이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전체 노출을 셔터 스피드를 이용해 한 단계 줄였습니다. 피사계 심도는 뷰 파인더에 보이는 그대로 유지하고 명도와 채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나온 이미지입니다. 위풍당당한 위트니 산도 좋았지만, 작고 이름 모를 들꽃들 또한 연약하고 낮은 것이 갖고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한국을 떠나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참으며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동포들이 뷰 파인더 안의 들풀과 겹쳐 보인 것입니다.
‘내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어져 ‘이 땅의 주인은 이 땅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라는 전시 주제가 생겼습니다. 전체 전시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보낸 편지’로 잡아 보았습니다. 나라와 민족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경쟁하고 반목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서로 다른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사진 작업을 하다 우연처럼 만들어진 생각입니다.
크고 웅장한 아름다움은 섬세하고 연한 것을 만날 때 더 돋보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비되어 서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바꿀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나름의 가치인 것입니다.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사람들이 나라의 영역이나 민족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그때 그렇게 사진에 담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나라들은 국경을 서로 낮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권을 어렵지 않게 정부로부터 발급 받고 있으며, 외국 방문과 거주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젠 누가 어느 땅에 살든 그곳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 그 땅의 주인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우리 부부는 중앙아시아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몽골국제대학교의 예술 감독으로, 나는 사진으로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가는 하나의 길을 교수와 홍보대사로 이곳의 젊은이들과 의논하며 살고 있습니다.
봄 나들이를 가 보았습니다.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따끔거리는 봄볕을 피해 들어간 대나무 숲
대나무와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마음까지 푸르게 만드는 대나무 숲의 이야기를 축제 현장에서 확인해보세요.
담양 - 대나무 축제 5월 1~5일 담양 죽녹원 인근,
거제 - 맹종죽테마공원(국내 죽순 생산량의 80%차지)
익산 -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구룡마을 대나무숲
(한때 대부분이 고사했으나 지금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중이다.)
‘총체적 예인.’
박윤초 명장을 칭하는 문화예술계의 표현이다. 세기의 명창이었던 만정 김소희 선생의 딸로,그녀의 예술적 기질을 모두 가진 듯한 박 명창은 판소리, 가야금 병창, 전통 춤 등 많은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TV 출연과 같은 요란한 활동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은 채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욱 공고하게 다듬으면서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박 명창의 열정은 어머니를 향한 사무침을 시대의 소리꾼답게 불사르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가 말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김소희. 본명은 김순옥. 아호는 만정(晩汀). 지난 세기를 살았던 한국 사람이라면 그 이름 익숙할, 5척의 작은 몸에서 나오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던 명창. 고창에서 태어나 6개월간의 배움으로 14살의 나이에 남원명창대회 1등을 거머쥔 김소희 씨는 일제 강점기에 이미 레코드 회사들 사이에서 섭외 1순위였다.
또한 판소리뿐만 아니라 춤, 악기 연주, 서예 등에서도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국악계의 대모로 불리웠고 1964년에는 인간문화재 5호로 지정된 김소희 씨는 세계 속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창이었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후학들의 존경은 그녀의 영향력이 격함을 알려준다.
만정 김소희 씨에겐 딸이 한 명 있다. 바로 박윤초 명창이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처럼 자연스럽게 명창의 자리에 올라 국악계의 거목이 됐다.
“제 어머니는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소리꾼입니다. 성음이 청미한 애원성으로 심금을 울렸죠. 여기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더해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창이 됐습니다.”
고맙디 고마운 ‘어머니이자 스승’
1944년생인 박 명창은 20년 전부터 목이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여전히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어머니께서 1995년에 돌아가시면서 제게 미안하니까 목을 주고 가신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선몽을 자주 꿉니다.어머니가 온화하게 웃으시면서 나쁜 일을 암시해 주는 꿈을요. 어머니께서 곱게 화장하고 푸른색 한복을 입고 업어달라는 꿈을 꾸는 날에는 제가 다리가 아파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겨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일기를 써 왔다는 박 명창은 자신의 역사와도 같은 일기장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기장을 보여줄 수 있겠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게 말이 됩니까”라는 말이 시크하게 돌아왔다.
“일기장에 어머니에 대한 글을 투덜투덜 썼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그 글들이 시가 되어 있더군요.” 당연한 일이었지만, 만정 김소희는 박 명창의 어머니인 동시에 스승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 시절 뉴욕타임스에 보도되었듯이 마리아 칼라스를 능가하는 분이었어요. 어머니는 제게 판소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발림(춤)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죠. 다행히 저는 발림의 중요성을 포인트로 하는 편이라 소리는 어머니보다 형편없지만 발림은 제가 더 잘했어요.”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된 어머니의 외로움
그러나 국악인이라는 쉽지 않은 삶.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평범한 아낙으로 요조숙녀의 길을 가지, 가시밭길 같은 국악인의 길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생전에 말했다고 한다. 와 같은 영화에서 봤던 치열하고 기구한 국악인들의 삶을 기억하는가.
그런 삶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박 명창이 기억하고 바라보는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는 애증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천상 여자였지만, 사랑을 받는 걸 못했어요. 제가 남편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아보니 알게 됐어요.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으셨던 어머니가 외로운 여자였다는 걸.”
박 명창의 아버지인 박석기는 거문고 산조의 달인으로 부잣집 둘째 아들에 동경제국대학교를 나온 재사였다. 그는 담양에 별당을 하나 만들어서 전국에서 똑똑하고 장래성 있는 사람들을 뽑아 모아서 국악을 가르치기로 했다. 국악을 지켜야만 문화적으로 일제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거기에 뽑혀서오게 된 어머니 김소희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게 이 모든 인연의 시작이었다.
재회, 어머니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그러나 지성과 남성적 매력을 갖춰 인기가 많아 ‘걸물’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애정을 많이 주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그토록 여성스러웠음에도 정작 사랑받는 법은 몰랐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기에 분노한 어머니는 박 명창이 2~3살 되던 때 박 명창을 두고 서울로 올라 갔고 박 명창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와 더 친할 수밖에 없었죠. 제가 요조숙녀로 예쁘게 크시길 바랐던 아버지였어요. 그분은 노래를 돈 받고 팔지 말라고 가르치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6·25 피난길에서 얻은 병으로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어요.”
박 명창은 12살이 됐을 때, 다시 어머니를 만나게 됐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막내 동생이고 박 명창을 잘 살펴 주던 큰어머니가 박 명창을 이끌어서 어머니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오매불망 저를 보고 싶었나 봐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서도 함께 살고 싶진 않았어요. 나쁜 애였지(웃음). 그래서 만나긴 해도 서먹서먹했죠. 그때부터 어머니와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근본부터 완전히 달랐던 모녀
“저년은 사막에 내놔도 안 죽고 살 거다.”
어머니가 박 명창을 가리켜 했던 말이란다. 거친 표현이지만 그 정도로 박 명창을 믿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런 굳은 믿음이 있었음에도 만나면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건, 원래 서로의 성정부터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색깔부터가 달라요. 저는 쥐색이라든지 어두운 색을 선호하는데 어머니는 주황색, 분홍색 같은 밝은 색들을 좋아했어요. 눈썹이 좋은데도 거기에 또 뭔가를 그리려고 하시고. 완전 달랐지. 저는 어머니 속에서 나왔지만 아버지 딸이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대로 박 명창을 키우려고 했다고 한다.
그 근저에는 어머니 나름의 걱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너는 세상에 의해 멍들 거라고 하시며 저를 길들이려고 하셨죠. 하지만 전 절대로 엄마 스타일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어요.”
완벽한 소리꾼으로 살아간다는 고독
그녀는 어머니가 한 말 중 ‘나는 슬퍼도 기뻐도 그리워도 외로워도 소리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있는 명창으로서의 무게만큼이나 말 그대로 예인으로서의 생활이 인생 그 자체였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제자들이 많았고, 그 제자들이 좀 성장했다 싶으면 어머니를 밟으려고 그러고. 저는 그게 보였어요. 하지만 제가 그걸 지적하며 어머니께 뭐라고 하면 제가 그들을 질투하는 거라고 화를 내시니….” 국가를 대표하는 명창의 딸이라는 입장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부딪치는 혈육이기에 기운이 빠져서, 어머니는 박 명창을 일대일로 못 가르쳐줬다. 그래서 박 명창은 몰래 어머니의 소리를 녹음기에 녹음해서 혼자 집에서 들으며 소리를 배웠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목소리의 키를 높일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 소리를 높여서 부르곤 하셨습니다. 그거 사람 죽이는 일이에요. 그런데 어머니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인지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고달팠던 건지도 몰라요. 그에 비하면 저는 소리를 즐기는 편이었죠. 그렇게 높이지 않아도 하늘에서 내린 목소리라는 평을 받던 분이셨는데.” 하고 말하는 박 명창의 목소리에선 늦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한의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박 명창은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와의 갈등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대신 그 정이 벌판의 풀처럼 부드럽고 강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늦은 깨달음은 안타까움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멈추어만 준다면 죽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어머니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빌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승에서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굴곡 졌는지 알고 있는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안식을 바란다면 죽어도 품어서는 안 될 소망입니다.”
78세의 어머니를 보내면서 박 명창은 아무런 준비를 못했다고 자책했다. 할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긴 세월 동안 맺히고 맺힌 한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를 몰라서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한마디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가 없지만, 사랑과 미움의 뒤엉킴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평생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슨 천형이라도 되는 양 남이 볼까봐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놓고 거칠고 드센 미움으로 어머니를 대했습니다. 마음 밑바닥에 있던 내 삶의 불행의 근원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를 위한 후회 없는 20주년을 만들고 싶어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해독하기 어려운 상형문자라고 표현하는 박 명창은 자신의 부족했던 바를 늦게라도 채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김소희라는 거목을 둘러싼 주변의 잡음은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같은 일을 하는 명창들과의 알력들도 있었죠. 어머니 추모 1주기 때 어머니에 대한 사무침이 워낙 강했어요. 그래서 후원을 받아서 넉넉하게 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런 제 행동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허무했죠. 저는 딸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는 것뿐인데.”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내년 2015년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된다. 박 명창은 이번에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모로 고민하던 차에 이명희 선생님, 김미숙 씨 등 진정으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분들로부터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시금석이 되어 내년의 20주년은 부끄러
움 없이 치르고, 그 이후로는 그분들이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알림. 가슴 한 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리움, 안타까움을 쏟아내고
싶을 때 기자를 부르세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두 스푼, 추억 세
스푼 담아 차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기꺼이 차 한 잔 마주하고서 부모님을 향한 마음을 온전히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보세요.
제보 받습니다.
유재철 씨를 설명할 때는 꼭 붙는 명칭이 있다. 바로 ‘대통령 염장이.’ 최규하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하고 장례 전반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와 같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서경보 스님, 정몽헌 회장, 정대 스님, 법장 스님, 법정 스님, 여운계씨와 같은 큰스님들과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도맡아서 진행했던 유재철 연화회 대표지만, 시작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염장이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는 염습이라는 쉽지 않은 분야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장인의 소명의식으로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염습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생각한 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를 느끼는 고귀한 업으로 일한다.”
염습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업의 험상궂은 이미지와는 달리, 유재철 연화회 대표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맑고 순하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말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유 대표가 염장이가 된 것은 우연의 힘,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처럼 보인다. 경기도 광주에 고향이 있는 유 대표는 일찍이 집안 내에서 시행되던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까다롭고 복잡한 상례 또한 낯설지 않았다. 돌아가신 가족들을 위한 염을 진행하곤 했다. 즉 장례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염에 대해 일찌감치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방황 끝에 발견한 ‘대통령 염장이’의 시작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익숙했어도 장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녔다. 27살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파트 섀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어느 사업도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에서 능인회라는 장의업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두 친구들은 불교 청년 운동에 소속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장의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 일을 도우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성공을 보고 장의업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대표처럼 직접 염을 하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유 대표는 이내 친구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 대표가 염을 업으로 하게 된 것은 방황 끝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염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자 유 대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을 만나 배움을 구한 것도 그 증거다.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지식들이 전수되고 있었고 유 대표는 그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맞추며 정돈된 염습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중반에 광주 친구들에게 석달 배워 서울에 장의사를 시작했죠. 3년을 틈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며 염하는 걸 배웠어요. 막상 가서 염하는 걸 보면 참고할 수 있는 분도 있었지만 배울 게 없는 분도 있는 등 상황이 여러 가지였어요.”
당시 장의업이나 상조회사들은 서울 밖 지방에서 발달되어 있었으나 시장으로서는 역시 서울이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상조회사들은 지방에 머무르려 하고 있었고 영업 조직만 서울에 올려 놓은 형국이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어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
염장이로서 자신을 쌓아가던 유 대표에게 마침내 삶의 전환점이 왔다. 2005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유 대표는 단체장에 관한 논문 작성에 착수했다. 대통령 관련 자료는 행정자치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기밀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김구 선생 자료와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의 장례 자료를 입수하여 논문을 준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직이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는 큰 문제 없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죠.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는 최 전 대통령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셔서, 미리 장례를 치르다 보니 현충원이 아니라 원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홍기 여사를 이장하여 현충원에 함께 합장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국장은 행자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지만 매뉴얼은 없고 파편적인 자료들만 모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5일장을 진행하면서 날밤을 새면서 공부를 하고 그걸 쉼 없이 적용하며 악전고투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였지만 유 대표는 결국은 해냈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의 종친회도 장례 과정에 참석했었는데, 종친회에서 제안한 명정, 그러니까 관직과 이름을 쓰는 명정 문구를 봤더니 일반 양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좀 더 격이 높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명정 문구로 교체할 수 있었죠.”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례의 최고 전문가가 되다
최 전 대통령의 장례는 유 대표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복사나 촬영을 불허하는 박정희,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장례 자료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익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40여 건에 달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장례 역사를 공부하여 전체 장례에 대한 지식을 통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장례 전체 일정에 대한 관리가 맡겨졌다. 그는 그때의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장 매뉴얼을 만들었다.
“수원성은 건축 기록 덕분에 지금도 지을 수 있을 정도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저밖에 없어요. 행안부가 이사를 다니면서 자료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축과 정리,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진행한 커다란 경험들까지, 유 대표가 단숨에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 만들어준 다리에 최선을 다한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또한 유 대표의 관리 아래에 진행하게 됐다. 워낙 큰 일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국가급 규모의 장례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던 유 대표로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대나무를 구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담양군청에 요청을 했더니 다음 날 트럭에 2000개를 실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장에 쓰일 글씨는 명정을 써주신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님께 부탁 드려서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총장님 선후배들이 모여서 800장을 만들었고, 조계사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니 전국의 서예가들이 올라 와서 하루만에 1200장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1500개 정도 작업을 끝냈을 때, 발인 전날 오전에 행안부에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나무가 아니라 PVC로 만장대를 교체하라는 전달을 받았죠. 밤샘해서 겨우 발인 날 새벽에야 완성하여 시청 앞으로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장이 가능할까?
아직 단체장, 특히 국가장에 대해선 민감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이 제각각인 건 기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네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낸 미묘한 사안들이 돌출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장법을 보면 가족들이 요청하면 국가장을 치를 수 있고, 국가장을 치르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요. 그런데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서훈이 취소되어 현충원 안장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국가장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국가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 대표는 이어서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약식행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아니면 약식행사인지를 가르는 건 애국가 제창을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문제는 국가장에서 애국가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유 대표는 또한 국가장에서 종교 색채를 유지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 국가장인데 식순에 4대종교 의식을 굳이 보여주는 건 시간적으로 낭비라는 것. 또한 다른 종교인이 봤을 때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장례는 엄연한 문화, ‘제대로 하자’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서 일제 문화 좀 없애고 싶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건 일본 쪽 문화예요. 3.1 운동이 고종 황제 국장 치르면서 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얀 옷 입는 거에 거부감 있는 거야 일본인들이. 그래서 머리 자르고 까만 옷 입으라고 했어요. 그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게끔 선전도 했고. 그리고 모두가 까만 옷 입으니까 그 중에서 상주를 구분시킨다고 완장을 차게 한 거예요. 일제 때 했던 걸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인터뷰 말미로 가며 ‘제대로 하자’는 말을 거듭 했다. 그 말에서는 문화로서의 장례가 그 자체로 권위와 전통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극단적으로 드물고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유 대표가 얻게 된 고유한 꿈이자 마땅한 자격이기도 할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전남 구례의 산수유농업과 담양의 대나무밭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3호, 제4호로 각각 지정했다고 25일 밝혔다.
구례 산수유농업은 2012년 기준으로 전국 생산량의 53%인 114t을 생산하고 있으며, 농지가 부족한 지리산 산간지에서 재배가능해 지역주민의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다고 농식품부는 설명했다.
마을 주변에는 수령 100년을 넘는 산수유 1천여그루가 군락을 형성해 경관이 아름다우며 주변의 생물다양성을 높이고 토양유실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담양 대나무 밭은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 가뭄시 주변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데다 농경지 주변의 생물다양성 증진에 기여하는 점 등이 높게 평가받았다.
대나무는 못자리·시설하우스 등 농업시설과 삼태기·도리께 등 농기구, 대바구니·조리 등 생활용품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농식품부는 18건의 신청을 접수해 서류심사와 현장조사를 거쳤으며 농업유산심의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했다.
농업유산을 보전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역당 3년간 10억5천만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장성 요양병원 화재 당시 대형 인명피해를 유발한 다량의 유독 가스가 매트리스폼에서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30일 담양소방서에 따르면 불이 난 병원 3006호에는 침대 6개와 매트리스가 있었다. 소방 당국은 매트리스폼에서 상당 부분 유독가스가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인조가죽 소재 덮개로 쌓인 매트리스폼에 열이 가해지면서 유독가스를 배출했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병실들을 잇는 건물 내부 벽이 샌드위치 패널로 이어진 것도 인명피해에 영향을 준 것 아니냔 분석을 내놨지만 소방당국은 불이 3006호만 태우고 6분 만에 진화돼 연관성이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소방 당국은 병실마다 천장 부분이 뚫린 채 연결돼 있고 병실의 문도 미닫이가 아닌 블라인드 형태로 완전히 폐쇄되지 않은 탓에 유독가스가 병실로 급속히 퍼졌기 때문에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한편 지난 28일 새벽 전남 장성군 삼계면 효실천사랑나눔요양병원에서 화재가 발생, 21명이 목숨을 잃었다.30일 담양소방서에 따르면 불이 난 병원 3006호에는 침대 6개와 매트리스가 있었다.
다용도실로 활용된 이곳에는 매트리스, 침구류, 일부 의료기기를 보관했다고 병원 측은 밝혔지만 대부분 불에 타 정확한 수량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가족끼리 농촌체험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마을 10곳을 선정했다고 19일 밝혔다.
휴양마을 10곳은 가평 초롱이둥지마을과 홍천 무궁화마을, 횡성 산채마을, 단양감골 바람개비 마을, 아산 외암마을, 완주 창포마을, 담양 삼지내마을, 고령 개실마을, 남해 해바리마을, 제주 아홉굿마을 등이다. 자세한 정보는 웰촌포털(www.welchon.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농식품부는 4월 봄꽃, 5월 가족여행에 이어 6월 여름휴가, 8월 물·계곡, 9월 과일수확 등 계절별 테마가 있는 농촌체험 명소마을을 선정해 농촌관광을 떠나는 여행객들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진룡)와 한국관광공사(사장 변추석)는 외래관광객 대상 음식소재 관광활성화 거점을 육성하기 위해 음식테마거리 3개소를 추가로 선정 발표했다.
이번에 선정된 3개 거리는 함평천지한우비빔밥거리, 남한산성닭오리백숙거리, 포항과메기물회거리로, 한국음식의 대표성과 함께 상품화 가능성이 있는 단일음식거리를 대상으로 선정했다.
선정방법은 공모를 통해 해당 광역시ㆍ도 지자체 1차 심사를 통과한 14개 시ㆍ군ㆍ구 지역 16개 거리에 대해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평가위원들이 서류심사 및 현장방문 실사를 통해 평가기준 점수가 높은 우선순위에 따라 선정됐다.
관광공사는 2012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전국에 5개 음식테마거리(신당동떡볶이ㆍ강릉초당두부ㆍ대구안지랑곱창ㆍ남원추어탕ㆍ부산민락횟집거리)를 선정하고, 외국어 메뉴판 제작 지원, 환경 개선 물품 등 음식 서비스 인프라 개선, 온ㆍ오프라인 홍보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통해 국내외 이용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2013년에는 담양죽순푸드빌리지, 영덕대게거리, 춘천명동닭갈비거리를 선정한 바 있다.
한국관광공사 김정아 관광환경개선팀장은 “향후 해당 거리에 전문가 컨설팅 등을 통해 테마음식 브랜드 강화, 접객환경 개선뿐 아니라 연계 관광 테마상품을 발굴하는 등 음식 관광 서비스를 개선해 음식관광거점으로 지원 육성하고, 매년 우수한 음식테마 거리를 발굴 선정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모과나무의 종소명 시넨시스(sinensis)는 중국이 원산인 것을 나타내며, 중국에서는 2,000년 전부터 열매를 약제로 사용했다. 모과나무가 우리나라에서 과수로 식재된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광해조 때 허균이 쓴 에 예천에서 생산되는 맛있고 배같이 즙을 많은 과일로 소개되어 있다. 당시의 모과는 맛있는 과일로 소개되어 있지만, 사실 모과는 과일이면서도 과육이 석세포로 되어 있어 생식을 할 수 없어 과일대접을 받지 못 하고 있다. 하지만 모과의 향기만은 어느 과일이나 꽃에 비길 데 없이 좋아서, 예로부터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문갑 위에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모과가 나오는 철이면 승용차 안의 방향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모과를 보고 세 번 놀란다고 한다. 먼저 못 생긴 열매를 보고 한번 놀라고, 그 다음에 향기로운 향에 한번 더 놀라고, 마지막으로 열매의 떫은 맛에 깜짝 놀란다고 한다.
모과란 이름은 중국이름 목과(木瓜)가 발음하기 편한 모과(木瓜)로 변한 것으로, 나무[木]에 참외같은 열매[瓜]가 달린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매끈하게 잘 생긴 참외와는 달리 울퉁불퉁하고 못 생긴 과일로 이름이 나 있다. 그래서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생겼고, 못생긴 사람을 가리켜 ‘모과같이 생겼다’라고 한다.
10월에 노랗게 익는 모과는 향기는 좋지만 과육이 딱딱하고 신맛이 강해서 생으로 먹을 수는 없다. 차, 잼, 과일주로 만들어 먹는데 기침과 가래를 삭이는 데는 모과차를 최고로 친다. 이 외에도 감기,천식,토사,곽난,각기 등에 효과가 좋은 민간약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 나무의 재질이 붉고 치밀하며 광택이 나기 때문에 고급 가구재로 사용되었다. 모과나무로 만든 장롱을 화류장(樺榴欌)이라 하여, 자단(紫檀), 화류(樺榴) 등으로 만든 진품 화류장의 모조품으로 화류장 구실을 했다. 놀부가 흥부 집에 가서 얻어가는 화초장도 바로 이 모과나무로 만든 장롱이다.
연분홍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오래될수록 껍질이 비늘 조각처럼 벗겨지는 수피도 운치가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정자목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청원 연제리의 천연기념물 제522호 모과나무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에 있는 수령 1,000년을 헤아리는 노거수 등 보호수로 지정된 것도 20여 그루에 이른다. 이러한 모과나무가 최근에 조경수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조상들이 남겨준 노거수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못 생겨서 비난 받고, 잘 생겨서 수난 받는 모과나무의 불편한 진실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