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A는 B와 1980년 1월 1일 혼인하였으나 성격차이로 불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5년 1월경 A는 부모님을 위해 고향 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B와 갈등이 심해져 결국 이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B가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자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해 이혼을 못하고 있었다. A는 B와의 불화 중 C를 알게 되었고, C가 위자료를 빌려 주어 B와 이혼하였다. A는 B와 이혼 후 C와 1998년 1월 혼인신고를 하여 법률상 부부가 되었다. A와 C가 혼인한 이후 B는 A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데리고 나타나는 등 A와 C의 혼인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C는 A와 B가 위장이혼한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A와 C의 다툼이 심해져 1999년 1월부터 별거하기에 이르렀다. A는 C와 별거하게 되자 C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C는 직장도 그만두고 A와 혼인생활을 하였으나, 별거하면서 생활비를 받지 못하였다.
C는 2000년 1월 2일 A를 상대로 과거의 부양료 및 혼인해소시까지의 부양료를 청구하였다. C의 청구는 용인될까.
부부 사이의 부양의 의무는 민법 제826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다. 이는 혼인관계의 본질적 의무이고 부양을 받을 사람의 생활과 부양의무자의 생활을 같은 정도로 보장하여 부부 공동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으로 1차적 부양의무이다.
위 사례의 경우 A와 C는 법률상 부부이고, A는 C에 대하여 부양의무를 부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A는 자신의 급여를 통해 C가 자신과 같은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생활을 보장하여야 할 부양의 의무를 진다.
C가 A에게 청구한 부양료를 살펴보면 1999년 1월 1일부터 2000년 1월 1일까지의 부양료(과거 부양료)와 2000년 1월 2일부터 혼인해소 시(예를 들면 이혼할 때까지)까지의 부양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양의 의무는 혼인 시부터 부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부양의무자가 부양의무의 이행을 청구받기 이전의 부양료의 지급은 청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부양의무의 성질이나 형평의 관념에 합치된다”고 하여 과거의 부양료를 청구하기 위해서는 부양의무의 이행청구를 요구하고 있다(참조 : 대법원 2008.06.12. 자 2005스50 결정).
위 사례에서 C가 1999년 1월 1일부터 2000년 1월 1일 사이에 부양료를 청구하는 등 부양의무 이행을 A에게 요구하지 아니하였다면 위 기간의 부양료는 받을 수 없다. 따라서 C는 2000년 1월 2일부터 혼인이 종료하게 되는 시점까지의 부양료를 인정받을 수 있다.
참고로 자녀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양의무 이행의 청구가 있어야 과거의 부양료를 인정받을 수 있다.
양승동(梁勝童)
연세대 법대, 대학원졸. 사법연수원 32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현재 법무법인 지암 변호사,
양천사랑복지재단 고문변호사 겸 이사.
사실혼 배우자는 상대방이 자살하는 경우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할까? 그리고 사실혼 배우자가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사실혼을 해소하는 경우 재산분할 청구를 할 수 있을까?
사례 1 60대 여성 A는 B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B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는 B가 갑자기 자살한 것은 악의(惡意)의 유기(遺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B의 상속인인 B의 자녀들을 상대로 사실혼 부당 파기를 이유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A의 청구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사례 2 70대 여성 C는 D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D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였고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다. C는 D가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동안 사실혼 관계의 해소를 요구하면서 D를 상대로 재산분할 청구를 하였다. 그 후 D는 사망하였고, 소송은 D의 상속인들이 계속하였다. D의 재산분할 청구는 인정될까?
사실혼은 젊은 층보다는 노년층에서 더 문제가 되는 현상이다. 함께 살면서 부모를 봉양하는 자녀가 줄어들고 혼자 살기 원하는 부모세대가 늘어나면서 외로운 노인들이 결혼은 하지 않은 채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녀들이 싫어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노인들의 사실혼은 인정받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다만 법은 일정한 범위에서 사실혼을 보호하고 있다. 사실혼 부당파기로 인한 손해배상의 인정, 재산분할 청구권의 인정 등이 그런 경우다. 법률혼의 경우에만 보호되는 것이 있는데 상속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공무원연금법, 군인연금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에서도 법률혼 배우자와 동등하게 사실혼 배우자도 연금 수령권자로 인정해 주고 있다. 또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사실혼 배우자를 보호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사례 1의 경우 법률적인 측면에서는 B의 갑작스러운 자살이 A와의 사실혼을 부당하게 파기한 것이 되느냐가 문제이다. A가 소송을 제기한 배경으로는 B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였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A의 청구에 대해 법원은 ‘사실혼 관계에 있는 부부 일방이 자살한 것을 가지고 다른 일방이 악의적으로 유기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A의 청구를 기각했다. 따라서 A의 청구는 인용되지 않는다.
사례2의 경우 의식이 없는 D가 C와의 사실혼 관계에 대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C의 의사 표시만으로 사실혼이 해소되는지가 법률적 쟁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1심과 2심은 D의 의사를 중요시하여 C와 D의 사실혼은 D의 사망에 의해 해소되었다고 보았고, C의 재산분할 청구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법원은 당사자 일방의 의사 표시에 의해서도 사실혼 관계는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D가 사망하기 전에 C가 사실혼 해소의 의사 표시를 한 것으로 사실혼은 해소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C의 재산분할 청구를 인정하였다. (대법원 2009.2.9. 자 2008스105 결정 참조)
[사례] A는 B라는 여성에게 남편 C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B를 흠모하여 구애하기에 이르렀다. B는 A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당시 B는 A와의 결혼생활에 불만이 많았다. B는 C와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륜관계를 지속하다 남편 C에게 들키고 말았다.
B와 C 사이에는 자녀로 미성년자 D가 있었다. A와 B의 불륜 사실을 안 D는 상간자(相姦者)인 A에 대하여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C는 B의 불륜 사실을 안 후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 B와 이혼하면서 D에 대한 친권을 갖기로 하였다.
C는 가정을 파괴한 A를 용서할 수 없어 A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D는 어머니 B와 헤어져 살게 된 원인이 A에게 있다는 점을 이유로 A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C와 D의 A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어떻게 될까.
C는 B와 불륜관계로 결혼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한 A에 대해서는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 A는 B와 간통행위를 하였으므로 C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
D는 B와 C의 자녀로서 B가 A와 불륜관계에 빠지기 전에는 평온하게 살았으나, A가 나타남으로써 부모가 이혼하여 B와 별거하게 되는 등 평온한 삶을 방해받고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된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미성년 자녀인 D의 청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법원은 ‘간통행위를 한 부녀가 그 자녀에 대하여 불법행위 책임을 부담한다고 할 수 없고, 또한 간통행위를 한 제3자(상간자) 역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본다.
즉 D의 어머니인 B가 불륜행위를 하고, 그로 인해 이혼을 하더라도 어머니 B는 미성년 자녀인 D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고, 마찬가지로 A도 D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A도 D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대법원은 그 예로서 ‘간통행위를 한 제3자(상간자) 역시 해의(害意)를 가지고 부녀의 그 자녀에 대한 양육이나 보호 내지 교양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등’을 적시하고 있다.
만일 B가 어머니로서 D에 대한 양육이나 보호, 교양 등을 행하고자 하는데 A가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를 못하게 하는 경우, D는 A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종태(李鍾台·92) 법무사를 만나기 전 단서는 딱 두 가지였다. 90대 현역 법무사이고 봉사단체인 ‘망월원’의 이사장이라는 것. 90대 현역이라니. 고령의 노인이 여전히 일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고 놀라운 일 아닌가. 달리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년 가까운 시간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이종태 법무사가 입을 여는 순간,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뜨거운 7월의 어느 날, 목동 3단지 아파트 상가 건물 이종태 법무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20년간의 법원 생활을 접고 1979년 법무사로 일을 시작해 서소문, 여의도 사무실을 거쳐 1987년 이곳으로 와 일하고 있다.
우선 우리 잡지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뒤 취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 같은 사람 뭐 볼 게 있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전 사람인데 왜정(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 와서 광복 직후부터 14년 동안 국어 선생을 했어. 그리고 서울로 와서 법원 생활 20년을 마치고 법무사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라며 92년 인생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잘 짜여진 영화 로그라인(영화 투자를 위해 감독이 한두 마디로 영화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정확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공부하고 싶던 어린 이종태, 삶이 꼬이다
그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들어가는 시점에서 시작했다.
“당시 충청남도에는 중학교가 대전과 공주에 하나씩 있었어요. 대전에 있는 중학교는 일본 사람이나 총독부 직원의 자식들이 다니는 곳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없었어요. 그때 마침 큰 형님의 친구가 일본 도쿄의 메이지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그분 옆에서 고학(苦學)할 생각으로 일본행을 준비했습니다.”
내선일체라 했지만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 일본으로 가려면 관할 경찰서의 승인을 받은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일본의 사립학교 지원서를 만들어서 경찰서에 제출을 했는데 며칠을 계속 미루는 거예요. 얼마 안 있다 도항증명서가 아닌 일본군 지원병 훈련서를 순사들이 가지고 와서는 도장 찍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동아전쟁이 한창이고 군인이 너무나 부족한데 젊은 사람이 애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요. 지금은 쓸데없이 공부할 때가 아니다, 천황폐하(일왕)를 위해 싸우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가 아주 엄격하셨어요. 세수하실 때 수건 들고 서 있어도 봤고, 아버지 명령을 어긴 적도, 말대꾸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아버지에게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순사가 ‘아버지가 일왕보다 더 중요하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원서를 쓴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기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1924년 갑자생의 비애, 첫 징병 대상자로 기억되다
결과는 뻔했다. 빵점을 맞기 싫어 필기시험은 한두 개 정도 맞혔다. 이 정도면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신체검사에 합격했고 결국 징집 대상이 됐다. 그 다음 해인 1941년 6월 14일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있던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 전투 훈련을 받았다.
“1942년 1월에 용산 제23부대에서 입영통지서가 왔어요. 이제 진짜 전쟁에 나가는 거였죠. 제가 1924년생인데 우리 나이서부터 징병 실시를 했습니다. 나보다 윗사람들은 탄광으로 징용 끌려가 고생했고, 우리 때부터는 징병돼 전투에 나가게 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자대인 제42사단으로 가기 전 중국 칭타오(靑島)로 가 일본에서 징집된 일본인 훈련병들과 또 한 번 6개월의 전투 훈련을 받았다. 전투에 곧바로 투입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저는 전투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뉴기니에 있는 제42사단에 배치를 받았는데 떠나기 바로 직전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보균자로 판명이 난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후 이 법무사는 중국에서 4개월여 병원 생활 후 히로시마 병원을 거쳐 우쓰노미아(宇都宮)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약이 없었어요. 오전, 오후 한 시간만 입원실에 누워 있거나 안정을 취하고 있으면 됐습니다. 그 외 시간은 공부하는 데 썼어요. 특히 우쓰노미아 육군 병원 도서관이 참 좋았어요. 그게 얼마나 좋아요. 어렵고 힘들 때는 소설보고 과학, 철학책을 많이 봐서 스스로 깨쳤습니다. 정식으로 공부한 것은 보통학교 과정이 전부였는데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독학을 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1944년 11월 말 경에 퇴원해 이듬해 광복을 맞았다.
교직생활 14년, 그리고 법원 생활 20년
광복이 되자마자 이 법무사는 교사의 길을 14년 동안 걸었다. 미 군정 당시 초등 공민학교, 고등 공민학교, 호서민중대학의 설립에 동참했다. 또한 학교 경영부서의 책임자로 일을 하면서도 초등 공민학교와 고등 공민학교의 국어 교사로 일했다. 호서중학교, 대전상고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면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부하들과 함께 남하하다 옥천 근처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대전 시내를 불태웠고 이때 이종태 법무사가 살던 집도 학교도 다 타버렸다.
“학교라도 빨리 복구하고 싶어 돈 있는 사람을 끌어 모았다가 그만 학교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참 그땐 많이 힘들었어요.”
평생 직업이 된 법무사, 우연히 시작된 봉사
이 일이 있은 뒤 대전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갔다. 대법원에서 판사를 하고 있던 장인 덕에 법원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임시 서기보로 들어갔다가 서기로 일했습니다. 법원에서 오래 일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죠. 그런데 또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법원에 눌러앉았다 결국 20년을 일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법무사로 37년간 살다보니 90이 넘었네요.”
법무사 일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바로 봉사활동이다. 그의 인생에서 교사와 법무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의 이사장직일 것이다. 서울가정법원에서 2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서소문에 법무사 사무실을 개소하고 일주일도 안 돼 한 일본 여자가 이종태 법무사를 찾아왔다.
“모치즈키 카즈(望月カズ)라는 여자였어요.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100여 명을 키우고 있던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의 호적 정리가 필요해 도움을 청하러 왔더라고요. 일본 고아 남자 아이 4명을 함경도에서 월남한 분들에게 부탁해 입적을 시켰다고 했습니다. 징병 통지서가 날아와 호적에서 거둬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더라고요. 그 아이들은 일본 사람으로 호적을 다시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도움준 것을 계기로 법률관계 관련해서 내가 돕기로 했어요.”
이후에 모치즈키 여사를 돕는 후원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법률문제와 관련해 뭐든 무상으로 봉사하기로 했다. 일을 좀 도왔나 싶었는데 1984년 모치즈키 여사는 60세가 채 안 돼 숨을 거뒀다. 10년 후, 일본과 한국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세웠던 모치즈키 여사의 유일한 재산인 서울 낙원동 상가 건물을 바탕으로 한국 아이들을 돕자고 법인을 만든 것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이다.
“사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이사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에 봉사상을 탄 적도 있고요.”
오랫동안 운동 마니아로 사시길 바라며…
사실 이종태 법무사는 운동 마니아다. 88세까지는 등산도 잘 다녔다. 작년까지 마라톤 대회에도 나갔다. 어딜 가든 늘 최고령자.
“참 다행인 게 머리숱이 많아요. 검게 염색도 했으니 내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더라고요.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영을 했는데 이제 체력이 떨어지는지 좀 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온몸이 쑤시고 아픈 데는 수영만한 것이 없어요. 90이 넘으면서 2층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서 요즘에는 간단히 체조하고 걷는 것 정도만 합니다.”
사실 요즘 이종태 법무사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해 10월 아내 송광섭(宋光燮)씨와 사별하면서부터다.
“신혼생활 때부터 자식들 키우느라 뭘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병이 들고서 얼마 안 돼 떠났어요. 지병을 알고 약 먹고 준비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종태 법무사는 어디를 가든 꼭 버선발로 나와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집 사람은 옛날 조선 시대 여자처럼 살다 갔습니다. 여보, 당신 해본 적도 없고 존댓말도 꼭 극존칭을 썼어요. 나는 그저 예사 높임 정도로 얘기했었고 대드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많이 위해줬죠.”
작년 10월에 떠났기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이종태 법무사. 꿈에 좀 나왔으면 하는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꿈에서라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미안했다,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안 나타나요.”
요즘 이종태 법무사는 5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무장으로 일하는 큰아들이 올해 예순 여섯인데 좀 더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 촬영을 하는 이종태 법무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주름 사이로, 순탄치 않았던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숱한 날들을 이긴 그의 이야기.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닌 우리 역사였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갑(여)은 을(남)을 중매로 만나 2011년 1월 3일 혼인하였다. 혼인생활 중 을은 갑과의 성관계를 극도로 꺼려왔다. 한 달에 겨우 2~3회 정도로 드물게 이루어지는 성생활에서도 제대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갑은 혼인 직후부터 임신을 원하였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을은 2011년 9월 24일 불임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을에 성기능 장애가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무정자증과 선천적인 성염색체 이상인 것으로 판명됐다. 이에 갑은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惡疾),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을을 상대로 혼인의 취소를 청구하였다. 갑의 청구는 인용될까.
A(남)와 B(여)는 1999년 5월 21일 혼인신고를 했다. 그 무렵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 1999년 7월경 A의 학업을 위해 함께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부부는 A의 유학생활 이래 한 차례도 성관계를 하지 못하였고, 7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성관계가 없었다.
그런 이유 등으로 불화를 겪던 남녀는 2007년 1월경부터 별거생활을 시작하였다. A는 B가 정당한 이유 없이 성관계를 거부하고 회피하였다는 이유로 이혼청구를 하였다. A의 이혼청구는 인용될까.
사례 1에 대하여 혼인의 취소 사유 중에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 기타 중대한 사유’의 예로서 성병, 불치의 정신병이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례처럼 성염색체 이상, 무정자증으로 인한 불임의 문제가 있는 경우 대법원은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 기타 중대한 사유로 판단하고 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갑이 을을 상대로 한 혼인취소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례 2에 대하여 부부 사이에 성기능 장애가 있다고 하여 무조건 이혼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부부 사이에 합심하여 전문적인 치료와 조력을 받아 정상적인 성생활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 없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경우 ㉡성적 기능의 불완전으로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한 경우 ㉢부부 상호간 성적 욕구의 정상적인 충족을 저해하는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이혼 사유가 된다.
위 사례 2의 경우 A가 B의 성관계 거부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한 것인데, A의 성기능 장애에도 불구하고 만일 B에게 위의 3가지 이유가 존재한다면 A의 이혼청구는 인용될 수 있다.
반대로 B가 A의 성기능 장애를 원인으로 이혼 청구하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성기능 장애는 이혼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위 ㉠, ㉡, ㉢의 경우에는 이혼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심인성 음경발기부전증의 경우, 무정자증으로 생식 불능이고 성적 기능이 다소 원활하지 못한 경우, 일시적 성기능 장애, 부부 사이에 단기간 성적 접촉이 없는 경우, 임신 불능의 경우는 이혼 사유가 되지 않는다.
만일 A에게 성기능 장애가 있고 성적 불능에 이른 상태라면 B의 이혼 청구가 인용될 수 있겠다.
사례 A와 B는 1992년 10월 19일 혼인신고를 마치고 법률상 부부로 살아왔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불화를 겪었다. 아내 B는 남편 A로부터 “우리는 부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2004년 2월경 가출하여 별거를 하기 시작했다. A는 그 후 B를 설득하려는 별다른 노력 없이 B를 비난하면서 지내왔다. 결국 B는 2008년 4월 29일 A를 상대로 이혼청구 소송을 제기해 2008년 9월 26일 이혼판결을 받았다.
이에 A가 항소하였고 2008년 11월 26일 B를 상대로 소위 맞소송을 제기하였다. 법원은 2010년 6월 18일 항소심에서 “B와 A는 이혼하고, A의 소송과 B의 맞소송에서 청구된 위자료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2010년 9월 30일 A의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그대로 확정되었다.
한편 C는 2006년 봄 등산모임에서 B를 알게 되어 연락을 주고받고 금전 거래를 하는 등 친밀하게 지내왔는데, 위 이혼소송 항소심(2심)이 진행 중이던 2009년 1월 29일 밤 B의 집에서 B와 애무하는 등 신체적 접촉을 하다가 당시 밖에 있던 A가 출입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A는 C를 상대로 “B가 A의 배우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성적 행위를 했으므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 이로 인해 입은 정신적 손해를 C가 배상할 의무가 있다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A의 청구는 인정될까.
부부는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할 의무를 진다(민법 제826조). 이러한 동거의무 내지 부부공동생활 유지의무는 부정(不淨)행위를 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성적(性的) 성실의무와 직결된다.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부정행위를 함으로써 배우자가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면 그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부부 중 어느 한 사람과 부정행위를 한 제3자도 혼인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부 공동생활을 침해하거나 그 유지를 방해함으로써 배우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부부 중 어느 한쪽과 제3자가 부담하는 책임은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책임으로서 손해배상액에 대해 모두 책임이 있다.
위와 같은 사례에 대해 대법원은 부부가 아직 이혼하지 아니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부부공동생활이 파탄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이른 경우, 제3자가 부부 중 어느 한쪽과 성적인 행위를 했다면 배우자에 대해 불법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법률관계는 재판상 이혼청구가 종결되지 않은 상태나 재판상 이혼이 청구되지 않은 상태도 마찬가지라고 판단하였다.
즉 재판상 이혼이 시작되어 끝나지 아니한 상태거나 아직 이혼이 청구되지 않은 상태라도 실질적으로 부부공동생활이 파탄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라면 제3자가 부부 중 어느 한쪽과 성적 행위를 했다고 해서 제3자의 배우자에 대한 불법행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C는 A에게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정서상 위와 같은 대법원의 판단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무리 혼인이 파탄상태라 해도 법률상으로는 부부관계인데, 이혼 이전에 다른 사람과 성적 행위 등을 한 것이 불법행위가 되지 않으므로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부 대법관도 위의 판단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A는 국제결혼 중개업자의 소개로 베트남 여성 B를 알게 돼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2012년 4월 9일 혼인신고를 마쳤다. B는 A와 혼인하기 전에 베트남에서 아이를 출산한 적이 있었다. B와 결혼 중개업자는 이 사실을 알려준 적이 없어 A는 혼인 당시 B의 출산 경력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A는 1년이 지난 2013년 8월 무렵 B가 혼인 전에 베트남에서 아이를 출산한 사실을 알게 됐다. 속았다고 생각한 A는 화가 나서 2013년 8월 28일 사기에 의한 혼인 취소 등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B는 만 13세 무렵이던 2003년 10월경 베트남에서 소수민족인 타이족 남성에게 납치돼 강간을 당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자주 술을 마시고 B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B는 2004년 6월경 친정집으로 도망 와 두 달 후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친정에까지 쫓아와 아들을 데리고 가버렸다고 주장했다.
혼인의 취소는 ①혼인적령(만 18세) 미달인 혼인 ②부모 등의 동의를 얻지 않은 혼인 ③근친혼(금혼범위에서 무효혼이 되는 경우를 제외) ④중혼(重婚) ⑤악질(惡疾) 등 중대한 사유가 있는 혼인 ⑥사기·강박에 의한 혼인의 경우에 가능하다. 혼인이 취소된다고 하더라도 혼인 취소의 효력은 소급하지 아니하고 혼인 취소 판결이 확정되면 그때부터 장래에 향하여 혼인이 해소되는 효력을 갖는다.
혼인 취소의 효력이 소급하지 않고 장래에 향하여 효력을 갖게 되어 취소된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자(子)는 혼인 취소 후에도 혼인 중의 자의 지위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혼인 당사자 일방의 사망 후 혼인이 취소된 경우에도 다른 일방은 이미 취득한 상속권을 잃지 않는다.(대판 1996. 12. 23. 95다48308)
위 사례에서 A는 B가 출산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혼인 취소를 구하였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출산 경력을 알려주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만을 들어 일률적으로 혼인 취소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임신을 하게 된 경위, 자녀와의 관계, 자녀의 양육 및 교류 상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출산 사실을 알리지 아니한 행위가 신의 성실에 비추어 비난받을 정도가 아니라면 혼인 취소의 사유라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국제결혼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중 많은 경우가 동남아시아 여성과의 혼인이다. 우리나라 남성이 동남아시아의 여성과 혼인을 하면서 여러 조건을 요구하고 있고, 혼인 이후에 조건에 부합되지 아니한 경우 혼인 취소나 이혼청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위 사례의 경우 베트남 여성이 어렸을 때 성폭력을 당해 아이를 출산한 것이 문제되었고, 이를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인 취소를 구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 대법원은 출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혼인 취소를 인정하지 않고,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해 A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재중동포 여성 A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한국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인 B를 만나 2001년 혼인했다. 하지만 이들은 12년이 지난 2013년 10월 협의이혼을 했다. A는 협의이혼 한 달 전에 ‘협의이혼하고 위자료를 포기하며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다. 이에 따라 남편 B가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 뒤 A는 B를 상대로 “내 아들을 B가 폭행해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위협을 당해 각서를 써 줄 수밖에 없었다”며 재산분할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B는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협의한 것 역시 재산분할에 관한 협의에 해당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A의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B를 상대로 한 A의 재산분할 청구는 인용될까.
재산분할 제도는 민법 제839조의 2에 규정된 것으로, 혼인생활 중 부부 쌍방의 협력으로 이룩한 실질적인 공동재산을 청산·분배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이혼으로 인한 재산분할 청구권은 이혼이 성립한 때에 발생한다. 이혼 전에는 구체적으로 권리가 발생했다고 할 수 없다.(대법원 2000. 2. 11. 선고 99므2049, 2056 참조)
따라서 재산분할 청구권이 구체적으로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작성하는 경우 이는 ‘재산분할의 포기 약정’이 아니라 ‘재산분할 청구권의 사전 포기’에 해당하여 무효다.
단, 이혼이 임박한 시점에 재산분할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과정에서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작성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효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례에서 대법원은 “두 사람이 협력해 형성한 재산액이나 쌍방의 기여도, 분할방법 등에 관해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고 볼 자료가 없고, A에게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며 “A가 비록 협의이혼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하는 서면을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성질상 허용되지 않는 재산분할 청구권의 사전 포기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다.
위 사례에서 A가 B에게 ‘협의이혼하고 위자료를 포기하며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하여 주었으나, 재산분할을 포기하는 내용은 재산분할 청구권의 사전 포기에 해당하여 무효이므로, A는 B를 상대로 재산분할 청구가 가능하다.
재산분할 청구권의 포기가 항상 무효가 아님을 주의하여야 한다. 즉 이혼이 임박한 시점에서 재산분할에 대한 진지한 논의 끝에 작성된 재산분할 포기 의사표시는 유효하다. 재산분할 청구권의 포기 각서가 유효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즉, 이혼이 임박한 시점에 진지하게 논의된 과정에서 작성되어야 하고 그 내용이 합리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A는 1977년 교육공무원으로 임용됐다. B는 1993년 A와 결혼해 약 15년간 혼인생활을 하면서 가사를 전담하였다. A는 2006년에 퇴직하면서 퇴직연금을 받기 시작해 지금은 매월 212만8600원을 받고 있다. B는 A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A가 받고 있는 퇴직연금도 재산분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A가 사망하기 전날까지 A가 받는 공무원 연금액 중 일정 비율을 자신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B의 주장은 인정될까?
위 사례의 쟁점은 ①공무원 퇴직연금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 ②공무원 퇴직연금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된다면 다른 일반재산과 다르게 재산분할의 비율을 정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재판상 이혼을 전제로 한 재산분할에서 분할 대상이 되는 재산과 그 액수는 이혼소송의 사실심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하여 정한다.
만일 그 당시 직장에 근무하는 부부 일방의 퇴직과 퇴직금이 확정된 바 없으면 장래의 퇴직금을 분할 대상이 되는 재산으로 삼을 수 없음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 뒤 부부 일방이 퇴직하여 퇴직금을 받았고, 재산분할청구권의 행사기간(이혼한 날부터 2년)이 경과하지 아니하였으면 수령한 퇴직금 중 혼인한 때로부터 사실심 변론종결일까지 제공한 근로의 대가에 해당하는 퇴직금 부분은 분할 대상이 된다.
이와 달리 부부 중 일방이 이혼 당시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경우 퇴직일과 수령할 퇴직금이 확정되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장차 퇴직금을 받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장래의 퇴직금을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재산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장래 퇴직금을 받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정은 재산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하는 데 필요한 기타 사정으로 참작될 뿐이다.
위 사례에서 대법원은 두 가지 쟁점에 대하여 모두 판단하였다. 먼저 이혼소송의 사실심 변론종결 당시에 부부 중 일방이 공무원 퇴직연금을 실제로 받고 있는 경우 이미 발생한 퇴직연금 수급권이 재산분할에 포함된다고 하고, 연금 수급권자인 배우자가 매월 받는 퇴직연금액 중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상대방 배우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재산분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두 번째로 공무원 퇴직연금 수급권에 대하여 정기금 방식으로 재산 분할을 할 경우 공무원 퇴직연금 수급권과 다른 일반재산을 구분하여 개별적으로 분할 비율을 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전체 재직기간 중 실질적 혼인기간이 차지하는 비율, 당사자의 직업 및 업무내용, 가사 내지 육아 부담의 분배 등 상대방 배우자가 실제로 협력 내지 기여한 정도 기타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의 위와 같은 판단에 의하면, B는 A가 받는 퇴직연금에 대하여 재산 분할을 청구할 수 있으며, 정기적으로 특정 금액을 지급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