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좋았어. 너무 신비스럽고 재밌으니까. 아홉 살 때 봤는데, 지금 봐도 재밌어. 김산호 작가는 나와는 띠동갑인데 대단한 분이야.” 진심에서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슈퍼히어로 만화인 에 대한 거듭된 찬사.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추억에 대한 감탄을 전하는 ‘ 동호회 회장’이자 시사만화계의 전설인 박재동(朴在東·65) 화백의 모습에는 세월을 고스란히 관통해온 천진함이 느껴졌다. 그 자신이 만화가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만화를 많이 읽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만화가 얼마나 재밌어요? 만화에 안 빠지는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어.”
박재동 화백은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부친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만화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원체 책을 좋아하셨죠. 원래는 서점이었는데 만화가 늘어나며 만화가게가 됐어요. 얼마나 행복하겠어. 집이 곧 보물섬이었으니 남들이야 뭐라건, 멋진 상상과 그림으로 가득한 만화책들을 매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무지 행복했어요. 그 만화들에서 받은 영향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전 지금도 그때 열광케 했던 만화가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문화예술이 주는 가치를 이젠 만화가 채워주기 시작한 거죠.”
등록금이 싸서 서울대를 가다
그러나 그가 자랄 당시만 해도 만화에 대한 편견은 강했다. 사실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수십 번은 변한 지금도 만화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고운 편만은 아닐 정도니, 그 편견의 역사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만화를 못 보게 하는 어르신들이 많았지. 하지만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공부도 잘해요. 그 자체가 독서거든.”
만화가 곧 공부가 된다는 말은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리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학교면 어디든 좋았지. 그런데 서울대를 가야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등록금이 쌌거든.”
전교 1등과 전교 꼴찌를 넘나들다
서울대를 들어갔을 만큼, 그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등도 해본 적 있다. 그러나 그는 좀 독특한 전교 1등이었다. 전교 꼴찌(꼴등)를 해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내가 꼴찌하는 걸 보고 이해를 못했지. 별세계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꼴찌도 기술이야. 천운이 있어야 해.”
그는 심지어 전교 꼴찌를 ‘쟁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꼴찌가 된 적도 있었다.
“나랑 꼴찌를 다투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에게 대신 시험을 봐달라고 했더니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이젠 자기가 꼴찌가 아닐 수 있으니까. 우선 내 책걸상을 없앴어. 누구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지. 그렇게 숨겨놓으면 선생님이 볼 때 결석이 없단 말야. 그리고 그 꼴찌 친구가 ‘선생님, 답지 하나 모자릅니다’라고 하면 선생님이 그랬나 하며 답지 한 장을 더 줘. 그러면 그 친구가 자신의 답안지와 똑같이 내 답안지를 쓴 후에,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도 일부러 틀리게 쓰는 거야. 그렇게 내가 꼴찌를 쟁취했었지(웃음).”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꼴찌를 차지한 ‘괴짜’ 박재동의 일면이다.
“아버지는 내 성적이 어느 정도였는지 몰랐어요. 우리 반에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인 애가 있었거든. 걔한테 통지표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걸 학교에 낸 거야. 그래서 내 성적 통지표가 아버지에게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런데 전교 꼴찌가 되니 학교에서 아버지를 호출했어.”
자신이 전교 472명 중 472등이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지. 속으로 화를 삭이신다는 걸.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래 ‘꼴찌는 너무 했다, 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하게 됐어.”
‘진짜’ 꼴찌와의 만남
전교 꼴찌를 경험한 그에게는 나름의 ‘꼴찌 철학’이 있었다. 꼴찌인 아이들을 봐도 그는 자신 또한 꼴찌였기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꼴찌한 아이에게 ‘저 새끼, 왜 맨날 꼴찌해?’ 하는 마음이 없거든. 되려 친구처럼 친근한 생각이 들지. 그리고 전교 꼴찌였던 나는 그놈한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아이들에게는 꼴찌 아닌 사람이 말하면 먹히지 않는 게 있는 것이고.”
그리고 사실, 그는 ‘진짜배기 꼴찌’에 대한 묘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서울민예총에 갔을 때 거기서 전국 꼴찌를 만난 거야. 난 전교 꼴찌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전국 꼴찌였지. 그런데 이 친구가 정말 사람이 좋아. 독특해. 나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 나는 꼴찌를 했지만 진정한 꼴찌는 아니야. 먹물이지. 그래서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사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아이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거지.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그냥 친구로 지내. 그게 훌륭한 거야. 진정한 전국 꼴찌야. 하지만 나는 수법을 써서 꼴찌가 됐으니 평범한 사람이지.”
고 김근태 의원은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노동자들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출신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꼴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박재동의 고민도 그와 비슷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과 동반자로서의 삶을 추구하기에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화두이기도 했다.
시사만화의 전설로 거듭나다
‘시사만화는 박재동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는 그이지만, 막상 그는 만화가가 될 생각이 그리 없었다.
“미대를 나와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민중미술가가 됐지. 그런데 민중미술은 메시지가 강해서, 저렇게 무섭게 하는 것보다는 만화가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만화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교사로서의 삶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하는데 너무 행복한 거야.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면 백 배로 돌아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극치감을 느꼈지.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려서 극치감을 느끼고 그림으로 인생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사람인데, 교육으로 극치감을 느끼면 그림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림을 안 그려도 불안하지 않다는 게 불안한 거야. ‘어유, 큰일 나겠다’ 싶어 학교를 그만뒀어.”
그는 학교를 그만둔 후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죽도록’ 그리고 싶었다.
“한겨레가 창간하면서 시사만화가를 모집했지. 후배가 해보라고 했고 응모를 했는데 된 거야. 그때만 해도 내가 만화가가 된 건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개념이었어. 그러다 보니 8년 동안 했는데, 하다 보니 내가 이 일에 맞다,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덕분에 진짜로 그림을 죽도록 그리게 됐어(웃음).”
시사만화를 그만둔 그는 현재 다시 한 번 교육자로서의 삶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 이상적인 교육이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교육은 뻑뻑한 게 있지. 선생이 어떤 수업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아이들에게 뭔가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별로 못해. 그건 아이를 정말로 존중하는 게 아닌 거지. 새로운 시대의 교육은 아이들을 믿고 맡겨야 해. 좋은 교육을 하려면 선생들끼리만 모여서 토론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해야 한다고. 과거 교육은 어떠했고, 현실적으로 기업에서는 이런 것을 원하고, 4차 산업혁명은 이렇고, 입시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등등 이 모든 것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봐.”
그는 또한 아이들이 일찌감치 자신의 직업을 확정해 그것에 몰두하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사를 할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장사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거야. 장사 외의 다른 과목들은 교양 삼아서 배우면 되잖아. 장사를 할 게 확실한데 영어가 필요하면 영어를 배우도록 하면 되는 거고. 의사가 되어야겠다면 의사 공부를 어릴 때부터 해야 해. 그리고 그걸로 돈 버는 경험도 해야 해.”
무언가에 푹 빠져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교육과 통일에 자신을 바치고 싶다
예순 중반을 넘었지만 교수 박재동이 아닌 인간 박재동은 여전히 미래를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개인적인 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섞인 것을 만들고 싶어. 그쪽에 나같이 ‘산만한 놈’이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이라는 영화를 만든 배용균 감독 때문에 한때는 영화배우가 될 뻔도 했지(웃음).”
그는 일각에 있었던 교육감 제안에 대한 얘기에는 손사래를 쳤다.
“그거 내 절대 안 하지. 그걸 하면 난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거니까. 그래서 ‘난 안 한다, 작품할 거다’라고 대답해줬어. 그런데 그쪽에서 ‘아니, 선생님.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이야말로 선생님의 작품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데 어휴 쒸…(웃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고사했지.”
박재동은 천생 자유인일 수밖에 없다. 장르에 대한 편견 없는 자유와 자신의 활동을 자신이 온전히 다루고자 하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로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기를 찾아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당당하게 살 수 있게끔 해주고 싶어. 그리고 남북관계가 잘돼서 막힌 혈이 확 뚫리면서 새로운 꽃이 피게끔 하는 것.”
당장은 특별한 일은 없지만 교육과 통일을 위해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그의 말은, 그의 육십 년 넘는 만화 사랑만큼이나 오랫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유로운 문화예술인으로서 묵묵히 자신만의 깊은 우물을 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우회해서 드러내고 있듯이.
“꿈이 많아서 힘들어, 하지만 그래서 행복해요.”
리동네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어른들 차지가 된다.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독서모임을 만들어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하는 시간을 그 곳에서 갖고 있다. 동양사상이나 그리스 철학 등 진지하고 묵직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던 다른 날과는 달리 자기가 하고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독서 토론을 할 땐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사람들 목소리가 활기에 찼다.
한 회원이 문득 고민을 내놓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본 것들을 스케치 하고 싶어 그림을 배웠는데 생각만큼 실력이 늘지 않으니 재능이 없는 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회원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림은 손으로 하는 것이라서 열심히 하면 누구나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무엇보다 노력이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눈높이가 너무 높거나 노력이 못 미친 건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그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도 글을 한번 써볼까?’ 누구나 한 번 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글쓰기 교실을 기웃거리고 어떤 글을 쓰면 좋을까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시도해보면 마음먹은 대로 써지는 건 아니다. 머릿속 생각은 가득한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빈 종이만 바라보다가 ‘나는 글 쓰는데 소질이 없어’하고 돌아서 버린다.
그러나 작가의 천재적 영감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믿고 있던 작품들도 사실 작가들의 인내와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걸 알게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존 그리샴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하루에 한 쪽씩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새벽 5시에 알람시계가 울리면 일어나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다. 어떤 날은 10분 만에 한쪽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두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다 쓰고 나면 생업인 변호사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는 ‘그렇게 나는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했다’고 말했다.
헤밍웨이도 하루 400~700 단어를 쓰기 위해 연필 7자루를 2번이나 깎아 써야 할 정도로 고치고 또 고쳐가며 글을 썼다고 한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 마지막 페이지는 서른아홉 번을 다시 쓰고야 만족했다니 그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한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공지영 작가도 인터뷰에서 자신이 쓴 글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1,000번 쯤 읽어 소설 전부를 외우게 될 때까지 퇴고를 멈추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래서 막상 소설이 나오면 쳐다보지도 않는단다.
위대한 작가들의 글쓰기 비결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인내와 노력에 있었다. 물론 영감이나 재능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글 쓸 일이 많아진 사회에서 노력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다행스런 일이다.
‘출판장인’으로 불리며 40년 넘게 ‘책’의 내실을 다지고 외연을 확대해온 한길사 김언호(金彦鎬·72) 대표. 지난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에는 그가 세계 곳곳을 탐방하며 체감한 서점의 역량과 책의 존귀함이 담겨 있다. “서점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의 숲이며, 정신의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하는 그를 한길사의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만났다.
지난 4월 서울 중구 순화동에 문을 연 ‘순화동천(巡和洞天)’. 1970년대 한길사가 잠시 머물렀던 순화동의 인연과, 노장사상의 이상향을 뜻하는 ‘동천’의 의미가 담긴 공간이다. 김 대표는 서점, 카페, 박물관, 갤러리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곳 역시 새로운 독서운동을 펼치는 문화의 장이라고 표현했다. 한편으로는 서점이 사라져가는 우리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희망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 서려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시민들이 순화동천을 많이 찾고, 을 꼭 읽어보길 권했다.
한 사회의 정신을 담은 풍경 ‘서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을 처음 마주했을 때 사뭇 놀랐다. 먼저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크기와 두께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스르륵 넘겨보았을 때 세계 서점의 모습을 담은 아름다운 사진에 매료됐다. ‘어느 작가가 찍었나?’ 하고 다시 책의 표지를 확인하니, ‘글·사진 김언호’라는 글자가 또렷했다. 단순히 기행을 위해 찍은 사진이라기엔 꽤 수준이 높아 그의 능력에 재차 감탄했다.
“사진을 찍은 지 오래됐어요. 처음에 시작한 계기는 내가 가는 곳, 즉 책이 존재하는 풍경을 기록해두기 위해서였죠. 도서관, 서점, 누군가의 서재 이런 게 다 책이 있는 풍경이자, 우리 사회와 개인의 정신이 담긴 풍경이니까요.”
순화동천에는 한길사에서 출판한 도서 3만여 권이 있다. 한 권 한 권마다 그의 땀방울과 열정이 스민 듯했다. “책은 머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김 대표의 말처럼, 그는 예나 지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만든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 달라졌다. 지혜의 샘 역할을 했던 동네 책방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책을 쥐던 사람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껌딱지처럼 붙게 됐다.
“중장년의 젊은 시절, 1980년대는 책의 시대였어요. 모든 젊은이가 책을 들고 다녔죠. 크고 두꺼운 책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 것인가 등을 고민하고 토론했죠. 그 당시 책의 정신은 위대했고, 그게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패스트푸드 같은 스마트폰에 빠져 쓸데없는 정보에 생각을 뺏기죠. 사람이 지식만 가지고는 안 돼요. 책을 통해 깊은 지혜를 얻어야 지혜로운 사회가 되고, 창조적인 발상이 가능해지죠.”
독서는 삶의 필요충분조건
은 600페이지가 넘지만, 사진과 글자가 크기 때문에 읽는 데 부담이 없었다. 종이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끝에서 감칠맛이 느껴지는 신선한 경험이랄까. 전자책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러나 스마트 기기의 발달로 전자책이 대중화되며, 현대인은 종이책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김 대표는 이러한 현상이 독서력과 사유의 시간을 줄게 만들었다며 우려했다.
“과거 종이책을 많이 읽던 시절에는 깊은 사유가 가능했어요. 현재 우리 사회가 경계해야 할 문제는 사유의 천박성이에요. 스마트폰에 의존해 쓸데없는 정보를 과하게 섭취하고 있어요. 지식이라는 건 축적이 돼야 지혜가 되는데, 스마트폰이 주는 지식은 휘발적이거든요. 자꾸 짧은 글만 읽으려 하죠. 물론 스마트폰이 유용하지만, 필요조건에 불과하지 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종이책을 통한 독서는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죠. 책을 읽지 않는다고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녜요.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언젠가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어른의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또 그런 이들이 찾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서점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김 대표는 최근 지인들에게 그동안 읽었던 책들로 ‘사랑방서점’을 열어보자고 권유에 나섰다.
“을 읽으면 서점에 가고 싶고, 또 자기 책방을 하나 차리고 싶어져요. 책을 보고 서점을 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생겼어요. 한 가지 염두에 둘 건, 들여놓는 책들이 특정한 주제의 신간이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학습지나 참고서 같은 걸 팔면 그건 가게죠. 서점 한 편을 카페 공간으로 만들면 토론이나 문화의 장으로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어요. 그런 작은 서점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차원의 문화운동이 될 수 있다고 봐요.”
김 대표는 서점을 내려는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 순화동천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그렇기에 순화동천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굳은 의지를 보였다.
“순화동천 같은 지적 사랑방은 하나만으론 부족해요. 동네마다 곳곳에 생겨나야죠. 번쩍거리는 네온사인만 있다고 해서 도시가 아닙니다.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는 책방, 그 옆에 자그마한 찻집 등 다양한 문화예술 시설이 공존해야죠. 그중에서도 서점은 한 사회의 정신을 유지해주는 실핏줄 같은 존재이자 지적 정신의 오아시스 같은 공간입니다.”
서점에서 사는 한 권의 아름다움
그는 책을 쓰고, 만드는 일만큼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애써 서점을 열더라도 책을 사가지 않는다면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책과 서점을 대하는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충북 괴산에 있는 한 서점은 들어가면 책 한 권을 꼭 사도록 의무화했대요. 그게 옳은 일 아닌가요? 서점의 책은 공공재입니다. 아무렇게나 만지고 훼손하면 팔 수 없는 헌책이 돼버려요. 내 물건이 아니잖아요. 그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런 문화가 안 돼 있죠. 서점에서 책 보고 화장실 간다고 따로 돈 받지 않잖아요. 그럼 그건 주인 부담인데, 책이며 물이며 휴지며 너무 함부로 쓰고 있어요. 책방을 하는 분들이 참 많이 속상해해요.”
김 대표는 줄곧 책을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책의 미학’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책은 더없이 귀한 존재다. 그런 자신의 마음처럼 우리 시민이 책을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길 바라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끊임없다.
“책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해요. 형식이라는 건 결국 미학적인 거잖아요. 우리뿐만 아니라 누구든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책을 더 아름답게 만들려고 해야 해요. 책이 아름다워야 그 내용도 돋보이지만, 그래야 더 마음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한 권의 책을 독자의 가슴에 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출판장인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독하게 더웠던 2016년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올해도 그 끔찍한 시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무더위를 피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더위의 고통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은 의외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도 책과 함께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들이, 알고 보면 근처 한 시간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북캉스’로 하루 보낼 곳을 기웃거려볼까.
*북캉스: 책을 뜻하는 영어 단어 ‘북’에 ‘바캉스’를 결합시켜 만든 신조어
책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TV, 영화 등 화려한 영상 문화와 게임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조류에 밀려 문화의 중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책이었다. 우리들에게 지금 책은 영상과 말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일상을 힐링하는 촉매로서 그 역할을 되찾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의 도서관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일상을 힐링하는 책의 공공기능적 역할을 간파한 기업들은 너도나도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 공간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이제 젊은 시절처럼 산으로 바다로 가지 않아도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났다. 여름휴가를 떠나는 대신 도서관이나 동주민센터, 백화점 북카페, 서점 등에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식히는 이른바 ‘북캉스’ 문화가 시니어들에게도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책 향기 그윽한 서점과 강연과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복합공간의 도서관은 무더위를 식히는 도심 속 정자마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 순화동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한길사 ‘순화동천’
책 좀 읽었다는 시니어들에게 인문학 중심 도서들을 주로 펴낸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만들어내는 무게감은 각별하다. 그 한길사가 오랜 준비 끝에 지난 4월 말에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의 문을 열었다. 한길사가 창업 초기 자리했던 서울 중구 순화동에 만들어진 순화동천은 3만여 권의 책이 즐비한 550평 규모의 공간이며 책 박물관, 갤러리, 강의실, 회의실, 서점으로 구성됐다.
한길사는 오래전부터 독자가 중심이 된 ‘책 놀이터’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순화동의 ‘순화’와 노장사상에 나오는 이상향인 ‘동천’을 더해 ‘순화동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문·예술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의 ‘평화를 순례하는 유토피아’가 되겠다는 의미다.
책 박물관은 근·현대출판문화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고서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또한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어 음악과 미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강의실과 회의실로 사용할 수 있는 4개의 공간은 각각 ‘퍼스트아트’, ‘한나 아렌트 방’, ‘윌리엄 모리스 방’, ‘플라톤 방’으로 불린다. 전시회나 출판기념회, 8~15명이 참석하는 소규모 회의, 50~70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강연을 진행할 수 있으며 인터넷으로 접수를 받는다.
아트갤러리와 한길책방은 60m에 이르는 긴 복도로 이뤄져 있다. 복도의 한쪽 벽은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이 걸린 아트갤러리로, 다른 쪽 벽은 한길사가 지난 40년 동안 펴낸 고품격 인문·예술도서가 들어찬 한길책방이다. 복도 중간에는 ‘카페뮤지엄’이 있어 커피와 함께 잠시 쉬며 책과 미술 작품을 즐길 수 있다.
◇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시원한 자유, 신세계 ‘별마당 도서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코엑스 안에 초대형 도서관이 있다? 사실이다. 신세계가 지난 5월 말에 문을 연 ‘별마당 도서관’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이다. 회원카드도 따로 없다. 오래 머물러도 된다. 음료를 가지고 와도 괜찮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책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별마당 도서관은 총면적 2800㎡에 2개 층으로 구성돼 있다. 도서관 내부에는 13m 높이의 대형 서가 3개를 중심으로 소파형·계단형 등 총 200석의 의자와 책상을 배치했다. 또 은은한 간접조명을 설치해 개인 서재 분위기를 냈고, 곳곳에 콘센트와 USB 단자를 구비해 노트북과 휴대전화 충전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5만여 권의 장서와 600여 권의 잡지가 준비되어 있는데, 잡지 코너만 보면 국내 최대 규모다. 고객들의 도서 기증도 받고 있기에 집에 보관해둔 책을 기증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별마당 도서관은 대출은 불가능하며 열람만 가능하다. 또한 도난방지 장치가 없다. 도서관과 쇼핑몰 사이에 출입구가 따로 없이 사방으로 열려 있는 구조이지만, 도난경보기 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믿는 구조다.
별마당 도서관은 문화와 휴식을 갖춘 열린 도서관을 찾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도서관이 지역 상권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시설이라고 판단해 만들어졌다. 별마당 도서관의 모델은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인 일본 다케오 시의 ‘다케오 시립 도서관’이다. 다케오 시립 도서관은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열린 도서관 콘셉트로 2013년에 리뉴얼한 이후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 키덜트 겨냥한 예스24 ‘홍대던전’
인터넷 서점들의 오프라인 서점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그동안 인터넷 서점들이 오프라인 거점을 주로 중고서점 중심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예스24는 콘셉트 서점을 기획해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 서브컬처(하위문화) 복합문화공간인 ‘홍대던전’을 열었다.
홍대던전은 청소년에서 키덜트까지를 주 고객으로 하는 라이트노벨(가벼운 느낌의 장르소설)·애니메이션·게임 등 ‘서브컬처’ 맞춤문화공간을 지향한다. 5월에 문을 연 예스24 중고서점 홍대점과 아래위층으로 연결돼 있다. ‘홍대던전’에는 누구나 무료로 라이트노벨을 읽을 수 있는 열람공간, 피규어와 퍼즐 등 캐릭터 상품과 코스프레 전문용품을 모아둔 판매공간,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메뉴를 모티브로 한 음식을 판매하는 매점 등이 마련되어 있다.
◇ 지적 세계로의 여행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현대카드는 ‘혁신’을 기업 이미지로 삼으면서 아날로그와의 적극적인 결합을 꾸준히 지향했다. 서울 도심의 네 곳에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세워진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는 아날로그의 대표적 콘텐츠인 책에 주목한 현대카드의 또 다른 실험이다. 공연과 문화공간 등을 통해 컬처 브랜딩의 선두주자로 각인된 현대카드에서 책을 통해 지적 브랜딩의 출발점을 잡은 것이다.
가회동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는 디자인 서적들이, 이태원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음악 관련 서적들이 있다.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책과 함께 1950년대 이후에 나온 1만여 장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LP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LP를 통한 음악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 계속 업데이트하는 중이다. 신사동 ‘쿠킹 라이브러리’는 음식 관련 서적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어 있다. 재료 카드를 사면 현장에서 요리도 가능하다고 한다. 청담동 ‘트래블 라이브러리’는 독서를 여행과 동일하다고 여기고 1만5000여 권에 달하는 여행 관련 서적들뿐만 아니라 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여행을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모든 형태의 지적 활동’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하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분당구 정자동의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자리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도서관, 서점, 북카페를 결합시켜 책이 있는 공간의 장점들을 모두 경험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뒀다. 디자인과 IT에 특화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디자인 장서 1만7000여 권, IT 장서 7000여 권, 전 세계의 전문 백과사전 1300여 권, 국내외 잡지 250여 종이 준비되어 있다. IT 기업이 운영하는 도서관이라는 특색을 살리면서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비싼 디자인과 IT 분야의 책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고르기 쉽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반적인 도서관들과는 달리 ‘절대 정숙’ 문화가 아닌 대화하고 토론하는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네이버의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사서는 시니어들이 맡고 있으며 안에 위치한 카페는 발달장애인의 일터를 만드는 회사 베어베터와 함께 운영되며 지적장애나 자폐를 가진 청년들이 커피를 만든다.
◇ 도심 속 한옥 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운문학도서관은 종로구에서 16번째로 만들어진 도서관이자 최초로 한옥으로 만들어진 공공 도서관이다. 지붕은 전통 방식의 수제 기와를 사용했고 담 위에 얹은 기와는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의 기와 3000여 장을 가져와 사용했다. 그야말로 전통 한옥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청운문학도서관 1층은 한옥이며 지하는 반지하식 양옥 건물이다. 1층에서는 시, 문학 창작교실, 문화예술교육, 인문학 콘서트 등이 열린다. 지하층은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문학 도서를 만날 수 있는 자료실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이 있다. 또한 온돌식 독서공간도 마련되어 한옥 도서관이라는 콘셉트를 충실하게 살리고 있다. 물론 여름에는 에어컨을 통해시원하게 유지된다고 하니 냉방은 합리적인 현대기술을 이용했겠다.
도서관 같은 서점 인터파크 ‘북파크’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2, 3층 총 2000㎡ 공간에 자리 잡은 ‘북파크’는 북카페나 도서관처럼 이용할 수 있는 서점이다. 50여 개의 테이블과 200여 개의 의자, 앉아서 책 읽기가 가능한 계단 등이 마련돼 있다. 독서공간의 분위기도 다락방 스타일, 테라스 스타일, 응접실 스타일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고를 수 있다. 또 계단 밑이나 서가 뒤 숨은 공간에서 아늑한 분위기를 즐기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린이책 코너 부근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일곱 곳이나 있다. ‘보신 책은 북박스에 넣어주시면 직원이 정리한다’는 안내문구까지 있으니, 책의 구매 여부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서점이다.
북파크는 인터파크의 과학재단인 카오스재단이 2016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카오스재단의 설립 목적인 ‘과학의 대중화와 과학지식의 공유’ 취지에 맞춰 총 10만여 권의 보유 서적 중 절반 정도가 과학 관련 책이다. 서점 안에는 35석 규모의 다윈룸과 8석 규모의 뉴턴룸 등 모임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북파크는 이태원이나 경리단길 유명 맛집과 가깝고 공연장이 같은 건물에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다. 여름방학이 되면 손주 손을 잡고 다녀와도 좋겠다.
이밖에도 CJ CGV와 쉐라톤워커힐 호텔도 도서관을 만들었다. 금융계에서도 KEB 하나은행 본점인 을지로 사옥에도 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이고 대신증권도 명동 사옥에 도서관을 열었다. 기업들이 앞다퉈 사회공헌 차원에서 도서관을 개장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과거에는 한 노인의 죽음을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에 비유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식의 총량이 매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막대하게 늘어나고 있다. 때문에 인생 경륜을 어설프게 드러내는 것은 자칫 뭘 모르면서 꼰대 노릇하는 걸로 비치기 십상인 세상이 됐다.
나이 듦에 따라 정신과 지식의 세계도 변모하기에 품위 있게 늙는 일은 중요하다. 문화지성인으로서의 비움과 채움이 필요한 시니어에게 도서관은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자 여행지다. 다시 찾아온 무더운 여름, 어디를 갈까 고민 말고 가까운 도서관에 놀러 가보자.
사회에서 은퇴하고 재미있는 제2 인생설계를 위하여 많은 평생교육에 참여하였다. 한두 달 동안의 단기 교육동기들은 학창시절 동창과 전혀 다르게 20년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새 친구 사귀기도 전에 교육을 마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육 중 수업이 끝나면 막걸리 잔을 나누면서 지속가능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한다.
몇 년 전, KDB 시니어브리지센터 제8기 사회공헌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면서 교육동기 친목모임 ‘두레월회’를 결성하였다. 매달 둘째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친목을 도모한다. 봄과 가을에는 둘레길 도보여행ㆍ문화유적 탐방 등 야외활동을 주로하고, 여름과 겨울에는 영화감상ㆍ소양강좌ㆍ독서토론 등 실내모임을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보여행을 많이 하였다. 첫 행사는 젊은 시절 즐겨 걸었던 단풍이 곱게 물든 남산에서 시작하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즐거웠던 그때가 그리워졌다. 둘레길을 돌아 장충동 족발골목에서 걷기를 마무리하였다. 막걸리잔 높이 들고 메아리를 남산으로 날렸다. 고양시 한북누리길, 사당역에서 양재역에 이르는 우면산 둘레길 새해맞이 도보여행을 하였고, 원당역에서 왕복 행주누리길 산책을 하였다.
회원 간의 교양강좌도 보람이 있었다. 사진전문가 조영대 회원의 강의와 SNS 전문가 오경순 회원의 지도로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기법 강좌를 진행하였다. 동영상의 기능부터 촬영, 저장, 편집과 보내기까지 전반에 걸쳐 강의가 진행되었다. 전문지식과 체험을 갖춘 강사의 열강으로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서 회원끼리 공유하는 실습까지 완료하였다.
문화해설이 곁들인 창덕궁, 덕수궁 고궁산책은 소양을 기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한 바퀴 휙 돌아보는 구경이 아닌 살아있는 보물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을 하였다. 저명한 산악인의 실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숭고한 도전을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알려졌던 히말라야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올해는 양평 물소리길, 삼남길 걷기로 친목을 도모하고 체력을 증진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둘째 월요일에 전철을 타고 양수역에 갔다. 나지막한 부용산은 걷기 좋은 호젓한 산길이다. 한강변 신원역으로 내려가면 서울로 가는 길이다. 복잡한 전철은 오후 4시가 넘으면 썰물 빠지듯 매우 여유가 있다.
친구모임은 재미가 있어야 활성화 된다. 수십 년 학교동창 모임도 주제가 있어야 한다. 막걸리 사발 돌리는 음식점 회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사회에서 늦게 만난 친구일수록 재미있게 사귀는 방법을 더 생각하여야 한다.
◇학교 소개를 부탁하였다.
“학생 수는 800 명 정도이며 600여 명이 독서에 참여하고 있다. 도서는 2만 5000여 권을 보유하고 있는데 매월 1만 여 권의 책이 대출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서울미성초등학교는 ‘학교도서관 활성화상, 독서교육대상’ 등 서울시 교육감 단체상과 개인상을 수상하였다. 도서관 활동을 매우 잘하고 있다는 주위의 평가다.
◇특별히 독서권장 방법이 있는가?
“책 읽기가 즐거워야 한다. 책 일기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 달에 몇 권에 해당하는 목표를 정하였다. 학년에 따라서 1년에 30~60권의 책 읽기를 권장한다. 목표를 달성하면 표창을 한다. 요즘처럼 표창받기 어려운 때 어린이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된다. 전체 학생의 4분의 3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60여 년 전 산골 조그만 교무실 한 귀퉁이에 꽂혀있던 몇 권의 책이 생각났다. 한국전쟁 종전 몇 년 밖에 되지 않는 그때에 책이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호롱불 밑에서 밤을 밝혔던 추억에 가슴이 아리다. “책은 영원한 마음의 양식이다. 재미있게 책을 읽어라. 어릴 때 독서는 일생을 좌우한다.” 쌍둥이 손주에게, 아이들에게 힘주어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교실 3개 크기의 도서실과 많은 장서를 관리하고, 개구쟁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인데?
“물론이다.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교장·교감 선생님과 도사담당 교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120여 명으로 구성된 어머니 명예교사가 날마다 2 명씩 교대로 도서관활동을 돕고 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기자와 대화중에도 개구쟁이들은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린이의 독서습관을 어떻게 기르면 좋다고 생각하는가?
“어린이의 독서습관은 부모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가정에서 독서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면 아이들은 싫증을 느낀다. 독후감 토론 등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도 큰 보탬이 된다.”
같은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소나기 한 방에 무더위는 쫓겨나고 책 읽기 좋은 계절이 다가왔다. 개구쟁이들은 책과 더 친할 것이다. 배인식 선생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면서 미성초교 도서실을 조용히
박원식 소설가
인문학 열풍이 거세다. 인문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강좌와 콘서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얼마 전 나는 찻집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옆 자리에 앉은 50대 꽃중년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걸 보았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을 두고 벌이는 갑론을박이었다. 은 여순반란사건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동과 굴곡을 파헤친 소설로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봄날의 햇살이 화사하게 들이치는 찻집 창가에 둘러앉은 꽃중년들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 모두 흐뭇하게 합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한 아줌마가 조정래 소설의 문체가 지닌 몰개성(沒個性)을 문제 삼으면서 갑자기 논쟁의 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꽃중년 특유의 드높은 목청이 실내 가득 번지어 자못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귀는 은근히 즐거웠다. 흔히 찻집에 모여 앉은 아줌마들의 화제라는 게 돈 얘기나 건강 타령, 또는 자식 자랑 따위의 수다이기 십상이지 않던가. 범속한 일상의 권태와 스트레스를 그저 범속하게 푸는 일을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게 우리네 삶이지 않던가. 그러나 이 아줌마들은 ‘역사’와 ‘문학’을 얘기하며 봄꽃처럼 생동하는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신선하고도 수려한 정경이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해방전후사를 주제로 삼은 어느 인문학 강좌의 수강생들이었다.
‘문사철(文史哲)’에 주목하는 이유
인문학이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에 관한 통찰을 돋울 수 있는 공부이다. 머리에 지식을 우겨넣는 지식 축적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파랑(波浪)을 유쾌하게 건널 수 있는 구체적 항해술을 배울 수 있는 지혜의 전당이다. 자비로운 신에게 의탁하고서도 어쩔 수 없이 엄습하는 불안과 고독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올 수 있는 노하우의 숲이다.
나이를 먹는 일, 늙어가는 일은 쾌거일 수 있다. 내부에서 날뛰는 욕망이라는 망둥이를 잘 제어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살아온 경륜의 힘으로 눈 없이 헤매는 욕망에 눈을 달아줄 수만 있다면 노경(老境)이란 실로 삶의 절정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놈이 어디 만만하던가.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욕망이라는 난적을 어떻게 해치우느냐에 달려 있다. 인문학이라는 인간학에 조예를 키울 경우 이 난처한 욕망의 농간을 제어할 병법을 체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 움직이는 방향과 동향을 성찰하고 통찰하게 하는 학문이 아니던가.
시니어의 삶에 문사철이 붙어 있을 경우 더 즐겁고 더 행복할 수 있다.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노년의 정신에 촉과 가락이 서려 새삼 감각적일 수 있으며 한결 치열할 수 있다. 세상은 그럴싸한 욕망들이 날뛰는 난장이지만 대체로 재미가 없다. 삶이 재미없는 건 빤한 수족관처럼 너무도 범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학과 긴밀한 교제를 할 경우, 범속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이 한낱 진부한 습성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밤하늘에 빛나는 초록별 하나처럼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현실의 억압과 틀에 얽매일 수만은 없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문학은 일깨워준다.
인문학에 취하다
내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아울러 여자로 몸 바꾸어 조선을 만날 수 있다면, 꼭 한번 만나 수작을 걸어보고 싶은 사내 하나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다. 예술에, 학문에, 처신에 추사는 인생의 모든 종목에 탁발(卓拔)했다. 타고난 준재였는가 하면,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추사를 생각하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그가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홀로 엄동설한을 견디던 모습이 떠오른다. 병든 몸으로 사시나무처럼 삭풍에 떨면서도,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곧추세운 자세로 방바닥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는 게 아닌가. 후세 사람들 그 누구도 추사의 정신세계를 따를 수 없다는 게 이미 중론이지만, 추사가 지녔던 시적 상상력, 다시 말해 문기(文氣)라는 건 가히 독보적이자 독창적인 것이었다. 추사는 이 장려한 자기 세계를 무엇으로 구축했는가. 모태에서 받은 천품(天稟)이라는 게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 문사철의 힘이 그를 추동했다. 문사철의 방대한 섭렵과 그에 따른 도저한 서권기(書卷氣)! 추사는 그 자체로 인문학의 바다이자 대륙붕이었다.
공부가 많았으니 혜안이 열렸으렷다. 삶이란 실로 가소로운 곡예일 수 있으나 추사에 이르러선 얘기가 달라진다. 추사는 이마에 매단 등불처럼 환한 혜안으로 걸릴 게 없는 활보를 거듭했으며, 예술과 학문의 산정에 도달했다. 풍류에도 소홀한 바가 없었으니 그가 후끈하게 열을 냈던 로맨스가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이 매력적인 조선의 인걸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남정네들에게 널리 권장한 풍류의 필수 종목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독서요, 둘째는 여색이고, 셋째는 음주다. 고명한 사대부가 웬 여색과 음주를 권했을까, 그렇게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셋 중 독서를 으뜸으로 내세운 데에서 추사의 깊고 깐깐한 속뜻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을 견디자면 때로 주색잡기도 썩 괜찮은 묘약일 수 있지만, 그러나 야야, 놀 때는 흐벅지게 놀더라도 미리 공부부터 해두렴! 이런 훈계였을 게다. 나날이 일삼은 독서로 세상 물정과 인간에 대한 개안이 있고 난 뒤여야 풍류도 비로소 떳떳하다는 경책일 게다. 삶을 읽는 꿈과 지향을 가지지 못한 자는 여색과 음주를 즐길 자격조차 없다는 힐난으로도 들린다.
추사뿐이랴. 아름다운 생을 살다 떠난 사람들의 족적엔 인문학적 수련과 체험의 양광(量光)이 아롱진다. 인문학의 저수지에 풍덩 몸을 담가 얻은 에너지로, 삶의 시원한 지평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얘기는 신빙성 있는 오래된 뉴스다.
시니어들은 대체로 건강과 시간, 그리고 돈을 행복의 척도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들에 관한 과욕은 오히려 타락을 부추긴다. 인문학이 유혹하는 대로 부응하여 지혜를 거둬들일 경우 행복의 척도부터가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인문학은, 물신(物神)이라는 주님에게 길들여진 욕망기제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대안과 상상력을 열어주기도 한다. 인문학이라는 성찰의 숲에 뛰어드는 일은, 그래서 기쁜 제전이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다. 등의 저서가 있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1966년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교양학부 도서관의 세미나 룸에서 송년다과회가 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 매월 책 한 권을 정해 읽고 토론회를 열어온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마지막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그 모임을 지도해온 철학과 S 교수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S 교수가 말을 마치더니, 학생들에게 새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다. 여러 명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이, 2학년에 올라가면 전공 공부를 하면서 교양도서도 열심히 읽겠다고 말했다. 기대한 반응이었는지, S 교수는 줄곧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J 차례가 되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남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많은 학생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에 여학생이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J는 언행을 절제하는 모범생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그렇게 당돌함을 보이기도 했다.
차례가 오자 나는 J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빤히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나는 ‘남학생’을 ‘여학생’으로 바꾼 것 말고는 J의 말에 한 자도 보태지도, 덜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J도, S 교수도 웃었다.
내가 J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학기 초 독서토론회 이후였다. 지정도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두 연인의 순수성을 예찬했다.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 희곡의 주제이자, 대학 새내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몇 학생이 두 연인의 무모함이나 맹목성을 지적했다. 어떤 학생은 우연한 사건이 중첩되고 있다며 작품의 플롯을 비판했다. 그러나 누구도 분위기를 뒤엎지는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를 보며 S 교수가 말했다.
“김 군. 작품을 읽었을 텐데, 독후감을 말해보게.”
기다리던 바였다. 1학기 말의 토론회에서 S 교수로부터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교수가 나에게 반드시 발언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저는 이 희곡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도 사회적 상황을 덮어두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보면, 스토리가 전개되는 16세기 후반에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시작됩니다.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새 세력이 대두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구세력은 뒤로 밀립니다.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뒤흔든 엄청난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구세력 지배층인 귀족 자녀들이 사랑에 탐닉해 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회변화의 변곡점에서 볼 수 있는 말기적 현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역사성이나 사회성이 배제된 그런 사랑을 지고지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나는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제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제 곁에 줄리엣 같은 여인이 있었다면, 물론 저 역시 앞뒤 살피지 않고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었다. 누구보다도 S 교수의 웃음소리가 컸다. 토론회가 끝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J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나요?”
“가지고 놀다니?”
“학생들 뒤통수를 쳐놓고, 마무리로 앞이마까지 쳤잖아요?”
J는 고개를 돌려 상긋 웃고는 버스에 올랐다. 바로 그 미소가 화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찰나에 J는 말 위에서 등을 돌리고 화살을 쏜 고구려 궁사였다.
1967년 1월 1일 자정이 되자 나는 5분 동안 나와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종교가 없는 내가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철필에 검은 잉크를 찍었다. 편지를 다 쓴 뒤에 날짜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땐 0시 5분이 훨씬 지난 뒤일 것이었다. 나는 편지지 맨 위에 ‘1968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J에게 보낼 편지였다. 마을 앞에도 우체통이 있지만,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십리를 걸어 우체국으로 가서 편지를 부쳤다.
드디어 1월 4일이 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도 없는데 울안에 서 있는 동백나무에서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뚝 떨어졌다. 이건 길조일까, 흉조일까? 나는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집배원이 우편물을 가져왔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J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그 편지지 맨 위에도 ‘1967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J의 편지를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그야말로 천하가 내 손 안에 있었다.
편지 내용에, 보고 싶다든가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상대를 마음에 담고 있음을 서로 확인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 후 2월 20일까지 5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받고 그 답을 쓰는 식이 아니었다. 답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편지를 썼다. 나도 그도 몇 번인가는 하루에 두 통을 써서 부치기도 했다. 평생 쓸 편지의 반쯤을 50여 일 동안에 쓴 셈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안개처럼 말없이 다가와 나를 휘감는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사랑이라면 나의 J에 대한 사랑은 안개보다 짙었다. 사랑이란 내 곁에 그가 없어도 그를 내 마음에 담는 것일까? 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 마음에서 사랑은 흘러넘쳤다.
그래서 나는 편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쓸까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끼고 싶었다. 그래. 그 말은 직접 만나서 할 거야. 그것도 여러 번 만난 뒤에 해야 해. 나는 그런 절제가 사랑의 품격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2월 20일에 상경할 예정이라며 21일에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J는 하루 뒤에 보자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숫자를 맞추어 2월 22일 오후 두시에 둘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장소도 J가 정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근사한 곳을 찾으려고 여러 군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가 결론을 내린 곳이 바로 신설동 로터리의 어느 다방이었다.
둘이 만나 나눌 이야깃거리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J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삶의 지표 셋을 밝혔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게 그것이었다.
J는 처음에는 가난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라고 했다. J가 강조한 것은 전문성이었다. 언젠가 나라가 전문인을 요구할 것이고, 그 준비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서른 통쯤 주고받은 무렵부터, J도 가난의 의미를 재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기 강조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둘이 만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접점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터였다.
21일 상경한 나는 절친인 P의 집으로 갔다. P는 나에게 깜짝 놀랄 사실을 털어놓았다. 겨울방학 동안에 다른 사람이 아닌 J에게 집요하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편지도 보내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골목길에서 기다리다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J가 끄덕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P가 말했다.
“나는 부모 없이 자랐어. 피난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잃었어. 내 꿈은 출세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야. 난 여자를 찾았어. J야. 내가 걔하고 결혼한다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 그렇지 못하면 난 살 이유가 없어.”
사랑에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P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결연했다.
그날 저녁 나는 P의 집을 나와 제기천 천변의 어느 판잣집 주막에 들어가 혼자서 막걸리를 마셨다. 주막을 나온 나는 무심결에 J의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는 기억에 생생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섰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식 2층 저택이 골목 양 쪽에 죽 늘어서 있었다. J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부티가 났다.
문득 희곡 이 생각났다. J는 줄리엣이지만, 안타깝게도 로미오와 나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었다. 오래전부터 심하게 해소를 앓는 아버지와 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더욱 불행한 것은, 독서토론회에서 내가 한 말,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내 말이 J의 집 앞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도 친구려니와, 이런 부잣집 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2월 22일 오후 두 시에 J와 만나기로 한 다방에 가지 않았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것이 젊은 시절의 내 삶의 지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삶의 지표를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내 뜻과는 무관하게 아직 가난하게 살고는 있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내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서울의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J는 빈민운동을 하는 가난한 목사와 결혼해 평생을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미 손자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어 있을 J가 그리울 때가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그에 대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중년 우리들의 생각도 좋지만 젊은 사람들은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젊은 사람들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한다. 그들이 은퇴와 퇴직 이후 얻은 삶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내용들을 이란 책에 담았다.
정퇴자(정년퇴직), 조퇴자(조기 퇴직), 졸퇴자(졸지에 퇴직) 세 명이 모였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어김없이 전날 토론한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어제는 동화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새롭더라고요.”
책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문을 두드린 곳은 숭례문 옆 ‘숭례문학당’. 책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좇아 모인 것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업연수원에서 기업교육을 담당하다 조기 퇴직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병일(崔炳一)씨. 그도 책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의 기초가 전혀 안 된 자신을 발견하곤 한겨레문화센터의 글쓰기 과정에 등록한다. 거기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가 소개를 받은 곳은 바로 숭례문학당.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수산회사, 무역회사, 교육회사 등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지만, 부도를 맞은 회사와 함께 파산한 윤석윤(尹錫潤)씨. 졸지에 퇴직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교육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사 활동을 하던 그였다. 동경하던 것은 책을 쓰는 것도 아닌 글쓰기. 그가 찾은 곳도 한겨레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최씨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던 윤석윤씨에게 숭례문학당을 추천한다. 최씨가 2011년 초 그곳에 들어간 지 한 달 뒤였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하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생소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방식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뽐내 남들에게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윤씨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2년만 공부에 투자해보겠다고.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시절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은 빛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과 민간연구기관에서 32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던 윤영선(尹永善)씨. 사실 그가 숭례문학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두 명에 비하면 가장 최근이다. 2014년 12월 31일 정년퇴직을 한 뒤, 지난해 1월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두 명과 다르지 않다. 책을 내보고 싶다는 것. 단지 그 꿈을 위한 열정이 발을 이끌었다. 두 명보다는 시작이 늦은 탓에 그들보다는 아직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서히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외부활동보다 더욱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변화다. 자신감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생겼다. 몇 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굳어진 습관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
이들은 모두 신중년들 또한 똑같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으면 말이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고, 발로 뛰었을 때 비로소 변화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도 변화하는 것. 그리고 열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들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
세 명 모두 숭례문학당에 대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다. 이곳은 토론을 할 때 정답도 없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그저 자신이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말이다. 윤석윤씨는 이곳에서 토론을 할 때 ‘나이와 계급장을 모두 떼는’ 대화의 장이자 아고라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유독 ‘경청’하려 한다. 20~30대의 사람들과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달라 생각이 다를 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인문학’이 있었다. 숭례문학당에서는 대부분 인문학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한다.
“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이 있죠. 여기에서 많은 문학책을 읽고 공부하니,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문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최병일)
토론의 매력은 소통과 대화다. 그리고 그 속에 배려가 존재한다. 토론은 2시간. 각 10분의 발언권이 주어진다. 꽤 긴 시간 같지만, 막상 토론에 들어가면 토론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10초와 같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지혜의 나눔에 목마르다. 그리고 치열하다.
“나눔이 없는 독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더라고요. 독서토론은 제 생각을 나눠주고, 남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셈이지요. 또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발언권이 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정말 평등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면서, 제 생각의 깊이가 그보다 깊지 않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겸손해지고,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윤석윤)
이들은 독서토론이 신중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계속해서 토해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그들에게서 인정받을 때의 희열은 퇴직 이후 떨어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30세대에게 인정을 받고, 책 친구와 말 친구가 생겼다는 것. 그것은 60년 이상 살면서 굳어진 생각의 패러다임을 깨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토론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했고 말이에요. 나이 먹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수하는 것 아닐까 생각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평가라는 게 없더라고요. 그저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뿐. 자연스럽게 저도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수용하게 됐습니다. 어쩔 땐 젊은 친구들이 그래요. ‘선생님, 이번 토론 꼭 나오셔야 된다’고 말입니다. 재미있어요.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이.”(윤석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행복해요. 행복해졌어요.”(윤석윤)
“은퇴 후 소속감이 없고, 고독감이 와서 두려웠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삶의 자신감도 생겼어요. 밤을 새워가면서 책 읽는 것이 매우 즐거워요. 마음에서 오는 자긍심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최고의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윤영선)
“예전에는 일이 없으면 초조했는데, 지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일 사이의 공백기는 책으로 채우면 되니까요.”(최병일)
독서 공부가 인생을 바꿨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독서와 토론의 즐거움을 전한다. 독서토론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토론 진행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열기도 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씨는 과목과 강의 방식을 180도로 바꿨다. 경영학에서 독서토론, 생각과 표현이라는 과목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씨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도 확실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피드백 정도만 하는데도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이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어 생산성본부, 학교 도서관 등의 초청 강의도 줄을 잇고 있다.
“2015년은 태어나서 가장 많이 강의를 한 해예요. 특히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느낀 점은 신중년들이 변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숭례문학당을 소개했더니 회사 다니는 것도 즐겁고, 책에 지출하는 비용도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하게 변했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것을 똑같이 상대방이 느끼니 이보다 좋은 게 있겠어요?”(최병일)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은퇴 후 인생에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은퇴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와 토론을 하면서 느낀 젊은이들은 신중년의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게 맞물려 그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파릇파릇 잎사귀가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 5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존재를 만끽해보고 싶다면 국립생태원이 제격이다. 손주와 함께 생태원 구경도 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까지 심어주면 어떨까? 그런 이들에게 국립생태원 최재천(崔在天·61) 원장은 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온 가족이 함께 생각을 마주하는 어른동화
최 원장이 추천하는 은 프랑스 동화작가 프랑수아플라스의 어른용 동화다. 어른, 아이 모두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최 원장은 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여느 책처럼 추천사를 부탁받아서 처음 접하게 됐는데, 이 책은 굉장히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해줬어요.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읽기 어려운 책도 아니죠. 또, 어른이 읽어도 마치 자기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를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요. 아이가 놓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고, 생각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하죠. 저는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지만, 절대로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하거나 독후감을 써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 부담을 가지고 읽으면 책 읽는 재미가 없거든요.”
평소 최 원장네 부자(父子)는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을 서로 허물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게 책은 그와 아들 사이의 소통의 매개체이자 대화의 소재가 된다.
“이제 이십대 후반인 아들이 가끔은 제가 읽는 책을 뺏어서 읽기도 하고, 서로 빌려 읽기도 해요. 읽고 나면 다짜고짜 앉아 토론하듯 말하는 게 아니라 얼마가 지난 후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면서 책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하죠. 그러고 있으면 아내도 ‘무슨 책인데?’라며 궁금해서 책을 읽게 되고, 그렇게 온 가족이 독서를 하고 대화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요. 도 세대마다 느끼는 바가 조금씩 다를지라도 온 가족이 쉽게 읽고 저녁을 먹으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해요. 대화를 하다 보면 때론 아이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죠.”
소중한 자연, 알아가고 보듬어야 할 세대
책의 주인공은 한 노인에게서 산 ‘거인의 이’의 지도 속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간다. 순수하고 다정한 거인들과 2년 7개월여 동안 겪은 일을 책으로 펴냈는데, 책을 통해 거인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이 거인을 해치고, 그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목이 잘린 거인이 주인공에게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죠.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라고. 그 말이 굉장히 큰 감동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예전에 학생들과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 탐사를 하다가 반딧불이를 발견한 적이 있어요. 요즘에 어디 반딧불이를 발견했다고 하면 먼저 신문에 났겠죠? 그러면 사람들이 몰리고, 축제를 하고 야단법석을 떨어 자연이 훼손될 거예요. 그래서 그냥 우리만 알고 세상엔 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학문적인 기록에는 작은 구멍이 날지라도, 가끔은 이렇게 자연을 숨겨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거인의 마지막 말처럼요.”
그는 전 세대가 다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특별히 중·장년에게 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중·장년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자연에 대한 공감, 감성이 제일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배워보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연, 환경이 중요하다고 하니, 그걸 공감하기 어려운 세대가 되어버렸어요. 이 나이에 자연공부를 다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더욱 아니죠. 세대를 불문하고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우리가 사는 지구, 자연을 어떻게 더 망가지지 않게 하느냐이거든요. 배우지 않았다 해서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까지 보듬어야 할 세대인 거죠. 다짜고짜 학술적인 책 등을 읽고 덤비는 것보다는 일단은 을 통해 그런 것들을 감성적으로 공감하고 접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자연에 대한 생각을 키우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노는 법도 10년은 배워야
2005년 는 도서로 인생 이모작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최 원장.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인생 이모작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준비돼 있건 없건 다가오는 은퇴라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나에게 다가올 인생을 기획하자. 그래서 인생을 딱 두 번 나눠서 살아보자. 일하면서 사는 인생, 그리고 일을 멈추고 사는 인생으로 이모작하자고 해서 지어낸 말이죠. 근데 인생 이모작하라 해놓고 정작 나는 뭘 하고 있나. 그런 것으로 치면 나는 낙제점이에요. 사실 제 경우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놀 준비를 못 하고 있어요. 다들 일 걱정은 많이 하지만 놀 걱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한 교장 선생님 말씀이 노는 것도 10년은 준비해야 한다더라고요. 운동이든 뭐든 노는 방법도 10년은 준비해야 은퇴해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는 거죠. 은퇴하고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이라도 노는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어디 끼지도 못할 거 아녜요. 그럼 노후가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저도 노력해야겠지만, 다들 어서 놀 준비하시라고 말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