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사 ‘매화’. 누군가는 치매를 일컬어 ‘매화에 이르는 길’[致梅]이라 비유한다. ‘맑은 마음’이라는 꽃말처럼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병이라서, 또 인생의 겨울 지나 아픔 없이 새봄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버지의 치매 발병 이후 의사로서, 자식으로서 오랜 세월 치매를 연구해온 최낙원(崔洛元·68) (사)대한통합암학회 이사장(성북성심병원장). 그 역시 더는 치매가 ‘어리석은 병’[癡呆]이라 불리지 않길 바라며 ‘나는 치매를 다스릴 수 있다’를 펴냈다.
뇌신경외과 전문의인 동시에 한의학을 전공한 최낙원 이사장. 현대의학과 전통의학의 융·통합 치료를 구상해온 그는 대한기능의학회 창립회장, 보건복지부 치매진단위원, 국민건강보험공단 치매등급판정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그가 ‘치매’에 집중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제가 수련의였던 당시만 해도 신경과가 없었어요. 치매 환자 대부분을 신경외과에서 진료했죠. 덕분에 치매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았던 것 같아요. 사실 그보다 더 강력한 계기는 아버지의 치매였어요. 당뇨 합병증으로 치매에 걸리셨는데, 당뇨는 우리 집안 내력이었죠. 주변에서는 ‘네가 의사면서 아버지 병도 못 고치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치매는 진전되면 나아지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유전적인 요인을 생각하면 저 또한 안심할 수는 없었죠. 그렇게 의사로서도, 개인적으로도 치매라는 병을 제대로 알아야겠다 싶더군요.”
현장형 의사로 곳곳을 누비다
최 이사장은 자신이 연구해온 치매를 총망라하여 2018년 ‘치매의 모든 것’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이듬해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그만큼 훌륭한 양서로 평가받았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인 용어와 내용이 많아 대중이 접근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이에 그는 최근 일반 독자도 쉽게 읽고 이해하게끔 ‘나는 치매를 다스릴 수 있다’를 선보이게 됐다. 치매 환자나 가족이 자주 하는 질문을 일러스트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했고, 270여 개의 항목을 질의응답식으로 친절하게 풀이했다. 의학용어 설명을 비롯해 직접 확인하는 체크리스트도 충실하게 담아 그때그때 궁금증을 해소하도록 배려한 점이 돋보였다.
“어떤 병도 제대로 알면 마냥 두렵지만은 않죠. 특히나 치매는 막연히 공포를 느끼는데, 그럴수록 적극적으로 공부해둘 필요가 있어요. 가령 뇌수두증, 만성경막하혈종 등 양성 종양으로 인한 치매는 뇌신경외과적 수술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또, 우울증 및 갑상선기능저하증으로 발생하는 치매도 호르몬 요법을 쓰거나 우리 몸속 미세 금속의 균형을 잡아주면 얼마든지 개선 가능합니다. 이렇게 전체 치매의 15%는 초기에 잘 대응하면 완전히 기능을 회복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병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가 많은 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대중이 치매를 쉽게 이해하고 조기에 대응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번 책 구성에 특별히 신경을 쓰게 됐죠.”
이번 책에는 의학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치매 진단 후 환자와 가족의 대처법, 요양시설의 선택, 치매 관련 제도와 지원책 등 치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이렇듯 폭넓은 분야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 ‘현장형 의사’를 자처했기 때문이라고.
“치매등급판정위원회에서 12년 정도 지역에서 봉사하며 전국 요양기관을 직접 답사했습니다. 물론 대학에서 연구하는 의사도 있습니다만, 저는 전천후로 현장을 누비며 그 병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예전보다는 많이 발전했다 해도, 제가 겪어온 바로는 아직 국내 요양시설은 열악한 편입니다. 물론 업계 종사자에 대한 처우 개선 문제도 따르기에 마냥 비판할 수는 없죠. 가능하다면 치매에 걸리셔도 익숙한 공간에 모시길 권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요양기관에 보낼 수밖에 없는 심정도 이해합니다. 안타까운 건 그런 치매 환자를 보면 가족의 애정이 덜할수록 빨리 돌아가시더군요. 시설에 모시더라도 가급적 자주 찾아뵙고 스킨십도 많이 하시고, 환자가 애용하던 물건이나 추억거리를 가져가면 좋습니다. 기억은 사라져도 정서는 남아 있으니까요.”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최 이사장은 매일 시시때때로 ‘내가 치매인가?’라는 생각을 한단다. 무엇보다 예방과 조기 발견이 중요한 질환이기에, 특히나 가족력이 있기에 염려를 놓을 수는 없다고. 그런 그도 한때는 약물에 의존한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치매 치료를 위해 환자가 처방받는 약은 아세틸콜린분해효소 억제제와 염산메만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두 약물은 어느 정도 효과는 보일 수 있지만 한계가 있어, 완화제로 사용된다. 그는 약물치료와 함께 좀 더 복합적인 측면에서 증세를 파악하고 예방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주변에 내로라하는 전문의들이 있는데, 제게 주는 약들을 보면 소위 혈압 하강제와 아스피린류 등이에요. 무심코 먹다 보니 불현듯 공포가 생기더군요. 이거 내가 약만 먹어서 해결될까 싶었던 거죠. 발병 원인이라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스트레스나 음주, 흡연, 비만 등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르죠. 그런 고민을 하다 결국 2007년에 한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왜냐, 현대의학은 증상 치료인 반면 한의학은 원인 치료니까요. 현재의 몸은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결과물입니다. 제 나이쯤 되면 내가 뭐 때문에 건강이 안 좋다는 걸 다들 알고 계시죠. 그렇게 원인을 알면 치매나 다른 질병도 새롭게 접근하고 예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실제 프랑스나 독일 쪽에서도 두침(頭針), 이침(耳針) 등 침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무엇이 최선이라는 건 없지만, 증상의 원인이 복합적이듯 그 치료법 역시 다양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제 오랜 화두는 ‘의학은 하나다’라는 겁니다. 여러 학문이 합쳐져서 하나의 질병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다면 그것이 환자에게 최선이죠. 그러나 우리는 양방과 한방을 서로 나눠 분리 의학을 하고 있어요. 서로 견제하고, 등한시하기도 하죠. 환자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고, 우왕좌왕하다 자칫 적절한 치료를 놓치기도 합니다. 이제는 여러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환자에게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가오는 9월 21일은 ‘치매극복의 날’입니다. 그렇게 우리만의 ‘K-의학’을 모색한다면, 치매를 극복할 날도 조금은 더 빨리 찾아오지 않을까요?”
‘두물머리 명반 감상실’ DJ 정상묵
음악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 후, 새벽 물안개 흐르는 강가를 거닌다.
‘인생은 비장한 것’이라며 창조주가 속삭이는 삶의 메시지를 밤새 들은 듯하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그 책임은 모두 나의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인생의 길이 외롭지 않기를…. 음악을 벗 삼아 평생 힘든 생태농업의 길을 걸어온 정상묵 씨를 만나 그가 사랑한 음악 이야기를 들어봤다.
몇 살인지도 모를 만큼 어린 시절이었다. 꼬마 정상묵은 전쟁이 끝난 후 혼란의 소용돌이 중 창궐하던 홍역에 걸려 앓아누웠다.
어른들이 방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해 몸에서는 불이 나는데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했다. 너무 답답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렸다. 몸은 뜨겁고 온몸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던 그때, 들려오는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안에서 뜨겁게 내뿜던 열기와 간지러움도 잊고 잠시 넋을 잃고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음악 감상은 강렬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꼬마의 귀에 환상의 소리로 들려왔던 그 음악을 다시 듣게 된 건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CBS 방송을 틀어놓고 일을 하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마치 감전된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이 음악을 도대체 언제 들었지? 무슨 음악이었지? 며칠을 고민하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시절 창호지에 코를 박고 들었던 기억 속의 선율이 스쳐 지나갔다.
아! 맞다. 그 음악이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음악의 제목을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CBS 방송 주파수를 고정하고 좋은 음악이 나오면 무조건 귀를 쫑긋하며 들었다. 제목을 쓰고 외우길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그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정상묵 씨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던 그 곡은 바로 베토벤의 ‘로망스 제2번 F장조 op. 50’.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협주곡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클래식 음악은 물론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미국의 포크, 영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하던 비틀스 노래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선율에 귀를 맡겼다.
당시 즐겨 듣던 미국 포크 음악의 대부인 피트 시거의 대표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비틀스의 ‘Ob-La-Di, Ob-La-Da’와 ‘Hey Jude’와 ‘Let it Be’, 사이먼&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 Water’ 등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즐겨 듣는 노래 중 하나다.
“당시 비틀스 음반 한 장 가격이 160원이었어요. 넉넉지 않은 생활이라 음악에 대한 갈증은 라디오로 많이 풀었죠. 그러다 꼭 사고 싶은 음반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카세트테이프나 LP 음반으로 사서 듣곤 했습니다.”
정상묵 씨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악기 연주에 대한 꿈으로 이어졌다.
카세트테이프로 감상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기타 연주는 너무 많이 틀어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겨우 이어 붙여 듣곤 했는데 늘어지고 해져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그의 손을 떠날 수 있었다. 이때 들었던 기타 소리가 너무 좋아 이 곡을 연주하겠다는 목표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당시 기타를 연습할 때 쓰던 너덜너덜해진 교재는 아직도 갖고 있다. 오랫동안 몸에 익은 곡이라 가끔 연주해보곤 했는데 2년 전, 손가락 세 개의 신경을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기타를 들지 못하게 됐다.
신의 독백 같았던 베토벤의 ‘합창’과 하이든의 ‘황제’
LP 음반을 사기 시작한 건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당시에는 듣고 싶은 음반을 사는 게 즐거움이었다면, 2000년대부터는 동묘와 신설동 시장 사이에서 열리는 풍물시장, 명동 회현역 지하상가 등 귀한 음반을 판매하는 곳은 어디든 가봐야 직성이 풀렸다.
주말만 되면 LP를 사러 갈 생각에 설레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장당 1000원에 보석 같은 원반을 발견할 때는 온몸에 엔도르핀이 솟구쳤다. 흥분된 마음으로 위대한 음악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 후, 새벽 물안개 낀 두물머리 강가를 거닐곤 했다는 정상묵 씨. 그에게 음악은 인생을 성찰하며 뚝심 있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해주던 친구 중의 친구, ‘절친’이었던 셈이다.
동묘 풍물시장에서 찾아낸 가장 값비싼 보석은 유진 오르먼디가 지휘하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9곡 전곡을 7장으로 녹음한 세트 음반이다. 1966년 콜롬비아사에서 발매한 이 음반 세트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상태로 눈에 띄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단다.
그날 그는 베토벤 교향곡 9곡 전곡이 담긴 LP 음반 세트를 지갑에 있던 돈 1만2000원과 바꿔 손에 넣고는 부리나케 두물머리로 돌아왔다. 음반을 들을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날 밤은 그렇게 턴테이블에 LP를 올려놓고 홀딱 새웠다. 정상묵 씨가 그동안 모아놓은 음반은 1만여 장. 이 중 80%는 클래식 음반이고 베토벤 작품 LP는 300여 장에 달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이다. 10명의 지휘자들이 연주한 작품들을 수집해 각각의 연주 특색을 체크하면서 감상하고 있다. 연주자의 반음 미스 터치까지 들릴 정도라 하니 득음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묵 씨는 작곡가의 의도를 재현하는 지휘자들의 다양한 표현을 캐치하는 게 클래식 음악을 듣는 즐거움 중 하나라 했다. 지휘자에 따라 연주시간이 10분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는데 음악을 감상하는 데 이력이 생기면 지휘자들의 이러한 세밀한 표현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초보자를 위한 클래식 길라잡이
‘두물머리 명반 감상실’은 지난 2009년 문을 열었다. 매월 셋째 주 수요일, 두물머리에 위치한 문화공간 두머리 2층 음악감상실에서 열리는 명반 감상회는 대구, 마산, 서울 등 각 지역에서 ‘두물머리 정상묵’의 명성을 듣고 올라온 음악 애호가들이 함께 음악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목 모임이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음악감상실이 꽉 찰 만큼 참가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20여 명의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정도다. 이 만남마저도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에는 힘들어 요즘은 개점휴업 상태다.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들으며 사는 삶을 꿈꾸는 은퇴자가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음악을 듣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야 한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어느 정도 귀가 열려야 감상할 수 있으므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하다.
정상묵 씨가 추천하는 방법은 클래식 FM 라디오를 무조건 틀어놓고 생활하기다. 제목도, 연주자도, 지휘자도, 오케스트라 이름을 몰라도 그저 듣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클래식 음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한 첫 발자국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음악을 들으면서 내 안에 샘솟는 슬픈 감정 혹은 기쁜 감정을 유추해 그 감정에 깊게 빠져보는 것이다.
정상묵 씨는 음악이 주는 깊은 감정의 세례를 맛봐야 음악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서 음악과 감정을 하나로 만들 것을 조언했다.
정상묵 씨는 누구?
1952년생. 한국 유기농의 모태라 불리는 ‘정농회’(正農會)에서 생명농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후 양평군 양서면 일대, 일명 두물머리 지역에서 1976년부터 유기농업을 시작한 농업인이다. 1975년 대도시 서울의 식수원인 한강 상류에 위치한 양평, 팔당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농약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농업인들과 함께 팔당 일대를 유기농 생태농업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후 ‘정농회’, 사단법인 ‘환경농업단체연합회’, ‘팔당친환경생산자연합회’, 영농조합법인 ‘팔당생명살림’을 이끌며 한국의 생태농업인으로서 결코 쉽지 않은 삶의 길을 걸어왔다. “힘든 길을 지치지 않고 꾸준히 걸을 수 있게 해준 건 순전히 음악의 힘이었다”고 말하는 자기고백 속에 그동안 그가 겪었을 온갖 어려움과 고난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정상묵 씨가 꼽는 내 인생의 음악
베토벤 교향곡 제9번 op.125 ‘합창’ | 베토벤은 자신을 천재로 자각했던 것 같다. 인류에게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합창’ 1악장을 듣다 보면 마치 하늘의 별들이 지구를 향해 쏟아지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천재적인 작곡가가 자신의 삶을 바쳐 작업한 음악들은 들어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op.73 ‘황제’ |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면 이 음악을 들으며 고민했다. 특히 1악장을 들을 때는 선택 후의 여러 갈래에 대해 고려해본다. 2악장은 비장함에 차 있다. 결국 삶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을 비장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 아닐까? 베토벤이 내게 주는 의미를 멋대로 해석한 셈이다.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가 베토벤에게 읊조리는 것을 선율로 만든 것 같다고나 할까? 어느 날 일몰시간에 이 곡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울 때는 2악장만 따로 녹음해 계속 들었다.
베토벤 현악 4중주 0p.130 ‘카바티나’ | 1977년 태양계 탐사를 위해 쏴 올린 무인우주탐사선 보이저 1, 2호에 실린 지구의 메시지 음악이다. 당시 이 탐사선에는 외계인을 만났을 때 지구를 알릴 수 있도록 54가지 언어로 각종 메시지를 담은 레코드를 실은 바 있는데 외계인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레코드 마지막 트랙에 1시간 30분짜리 분량의 음악을 선곡해 실었다. 그 곡이 바로 베토벤의 ‘카바티나’다.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에게 보내는 음악이라니…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나 인터스텔라를 떠돌고 있을 보이저 1, 2호에서 계속 플레이되고 있을 이 음악을 감상해보라. 들어보면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피트 시거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 피트 시거는 미국 포크계의 전설이다. 밥 딜런, 존 바에즈 등과 함께 반전평화운동을 벌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다. 나이가 들면 세상과 타협하며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산다고들 하는데 피트 시거는 미국의 매카시 광풍도 이겨내고 정말 옹골차게 살았다. 92세였던 지난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공연에 참가했다는 뉴스를 보고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월가 점령 시위대들이, 존 바에즈의 노래로 더 유명해진 시거의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함께 부르며 나아가는 걸 뉴스 화면으로 봤는데 전율이 느껴지더라.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는 원작자 시거의 음반뿐 아니라 피터 폴&메리, 존 바에즈, 나나 무스꾸리, 시티(독일 밴드) 등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갖고 있는 뮤지션들의 다양한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 요즘은 유튜브로도 듣는 나의 ‘최애’ 노래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난주에 ‘물서가 진란한 말장난’을 썼더니 재미있다고 하는 분이 의외로 많아 나 스스로 놀랐다. 원래 인간은 유희본능이 있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여서 그런 글이 먹히는가보다. 더구나 코로나19가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리는 데다 어디 나다니기도 겁나니 즐거운 걸 자꾸 찾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분이 글을 읽고 “절망 댄다하닙다!”라고 카톡을 보내왔기에 “내가 염오시켰나보다” 했더니 “전느 직잔 옴여되고 탁라한 삼라이닙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아, 그러니까 스타시군요”라고 응수했다. 스타는 스스로 타락한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애들같이 주고받다가 이왕 말장난을 시작한 거 이번엔 받침을 뺀 이름 이야기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친구 임철수와 나는 니은 하나 차이이지만, 받침을 빼면 지나 내나 똑같이 이처수가 된다. 사람 이름에서 받침을 빼는 이유는 놀려먹기 위해서다. 짝사랑 상대가 도대체 내 맘을 몰라준다면 그 사람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휴지가 없어 트월킹(twerking)으로 털어내는 걸 상상하면 좋다고 한다. 트월킹은 자세를 낮추고 상체를 숙인 채 엉덩이를 빠르게 흔들며 추는 춤이다. 받침 빼버리기는 이름에 대한 트월킹 같은 거다.
그렇게 받침을 빼고 보니 김대중은 기대주, 문재인은 무재이, 이재명은 이재며, 반기문은 바기무, 윤석열은 유서여, 조국은 조구, 정경심은 저겨시, 강경화는 가겨화, 윤미향은 유미햐, 손혜원은 소혜워, 최강욱은 최가우, 김어준은 기어주, 노영민은 노여미, 이성윤은 이서유 이렇게 바뀌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해차가 지고 이나여가 올라왔다. 그런데 와, 추미애는 역시 세다. 빼버릴 받침이 없어 온전하게 그냥 추미애다. 과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동안 받침 없는 삶이 얼마나 모질고 힘들고 억지였을까?
이렇게 받침을 빼고 사람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건 47년 전인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4학년 2학기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지방에서 교생실습을 해야 할 때 나는 이천북중에 가서 독일어 대신 영어를 가르쳤다. 중학교엔 독일어 과목이 없으니까 그랬던 건데, 지방 실습은 유신시대의 말도 안 되는 제도였다.
하여간 그 학교에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한 명이 있었다. 성이 Knapp인 그 젊은이를 교사들은 납도 아니고 냅도 아니고 크납도 아닌, 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받침을 빼고 편하게 부르려고 성을 나 씨로 지어준 것이었다.
그 나 선생이 내 지도교사(그도 독어과 출신 영어교사였다)와 이야기하면서 날 평하기를 “very sour”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엔 신랄하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맛이 간 녀석’이라는 뜻이었던 거 같다. 거 왜 있잖은가? 음식이 상했다는 산패(酸敗)라는 말. 그러니까 지도교사랑 둘이서 나를 흉보고 안주 삼아 씹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인 중에는 ‘바서오 선생님’이 있었다. 무슨 과목이었는지 잊었는데, 키 작고 머리가 약간 벗겨진 바서오는 이웃집 아저씨같이 사람 좋고 귀엽고 약간 어수룩하고 모자란 듯도 해 놀려먹기 좋았다. 그래서 교사들이 박성온이라는 이름에서 받침을 이 뽑듯이 다 빼버리고 바서오로 개명을 해준 것이었다. 알고 보니 대학 선배였던 바서오 선생은 역시 대학 선배인 교장과 함께 우리 교생 일동 5명(?)에게 거하게 저녁을 사준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짓궂은 내가 그날 술자리에서 바서오라고 부르며 놀려먹은 기억이 난다.
바서오 선생님을 안 뒤부터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름에서 받침을 빼보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대상이었던 건 아니고 이름이 좀 특이하거나 별나다 싶으면 그랬다. 이천북중 당시 내 지도교사는 오늘날 미국에서 저명한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인 박흥진 씨인데(나는 걸핏하면 바킁진이라고 쓴다), 받침을 빼니 바흐지가 됐다. 근데 이게 뭐야? 바가지도 아니고. 바흐친이라면 몰라도 좀 재미가 없었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친(1895~1975, 러시아의 사상가, 문학 이론가)
여러 사람의 받침을 빼 봐도 바서오만큼 재미있고 말맛이 좋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좀 재미가 있다 싶은 이름은 다음과 같다. 실명은 공개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글 읽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누군지 다 알 것이다. 기조피[血?], 소재피[血?], 이혀[舌?]규, 소우혀[舌?], 하태혀[舌?], 유태혀[舌?], 바과수, 바사도, 바서수, 바재우, 바저사, 바조지, 야조서, 이조거, 채여보….
이 글을 쓰면서 겨우 안 건데, 받침을 뺄 때는 박이나 반, 방 씨 성 가진 분들의 이름이 가장 인상적이고 재미있다는 점이다. 이런 발견을 하게 만들어준 바서오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살아가고 계실까. 정확히 모르지만 나이가 팔순을 좀 넘었지 싶은데, 혹시 이름이 성온(性溫)이라면 글자 그대로 따뜻한 성품으로 가족은 물론 이웃들과 잘 화목하게 지낼 것 같다.
이름은 남의 놀림감이 될 수는 있으나 젊어서든 늙어서든 변함없이 소중한 것이니 저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하면서 살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닮아간다는 말도 들었다. 전혀 아름답고 사랑스럽지 않은데 그렇다고 주장하면 정말 참 거시기한 일이긴 하지만.
사진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에 사진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필터 기능’이 있다. 처음 이 기능을 접했을 때 ‘어떻게 이런 천재적인 생각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터 기능은 사실을 진실로, 경험을 희망으로 보게 하는 비상구로 보였다.
사실과 사실인식(진실) 간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화 세계 ‘포토 페인팅’이 ‘필터 기능’의 시작이라는 것을 2020년 2월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작가 미상’으로 알게 되었다.
영화는 통일 전 동독 사회의 모습을 자주 소재로 삼는 독일인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작품이다. 그는 이미 영화 ’타인의 삶‘에서 통제된 사회에 살며 개인의 자유, 창의성을 위해 고뇌하고 행동하는 예술인의 모습을 보여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 영화에서도 나치 정권과 동독에서 성장기를 보낸 후 서독으로 탈출해 ’포토 페인팅‘ 기법으로 화가로 데뷔한 리히터를 모델로 하여 전반부에는 나치와 사회주의 치하에서 국가가 예술을 통제해 발생하는 한계를, 후반부에는 현대미술의 자유로운 창작활동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톰 쉴링, 폴라 비어, 세바스티안 코치 등 독일을 대표하는 명배우들이 흐릿한 시대를 예술로 담은 현대미술의 한 거장에 대한 서사를 풀어간다.
1937년 나치는 ‘국민의 교양을 함양하는 바람직한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독일 미술전’과 ‘국민정신을 호도하는 퇴폐적인 미술작품’을 선보이는 ‘퇴폐 미술전’을 열었다. 나치의 문화 예술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검열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였다. ‘퇴폐 미술전’에는 콜비츠, 칸딘스키, 클레, 샤갈, 뭉크, 피카소 등 미술사의 혁신을 이룬 20세기 대표 작가들의 작품 1만7000여 점이 출품되었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예술이 거기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작품은 몰수되었고 지목된 작가들은 작품 제작이 금지되었다.
영화는 이 전시회 ‘칸딘스키, 몬드리안의 그림 앞에서 국가중심주의 시각으로 빈정대는 도슨트의 설명으로 시작한다. 어린 쿠르트는 피카소와 칸딘스키의 그림에 시선을 빼앗긴다. 이모인 엘리자베스는 도슨트의 설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도 이 그림이 좋아”라고 어린 조카에게 속삭인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좋아해도 된다고 하면서 이모는 말한다.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건 기꺼이 봐도 되니 절대 눈을 돌리지 말라”고.
자유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감성이 뛰어났던 이모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행동을 일탈로 보는 사회 분위기와 정권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면서 시대의 희생자가 된다. 유럽 사회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특정 인종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우생학 등을 이용했다. 더군다나 나치 정권은 좋은 혈통 유지를 위해 그녀에게 강제 불임 수술을 하고 가스실에서 죽인다. 이모 엘리자베스의 이런 아픔은 나치 신봉주의자인 의사 칼 시반트에 의해 행해진다.
쿠르트는 전쟁이 끝난 후 미술대학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이모와 이름이 같은 패션과 학생 엘리자베스를 만나 결혼한다. 그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미술에 대한 통제와 제한된 역할에 염증을 느낀다. 결국 장벽이 세워지기 전 서독으로 탈출한다. 뒤셀도르프대학교로 간 쿠르트는 그곳에서 만난 안토니우스 교수에게 “이 그림들엔 네 것이 없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너만의 것을 해”라는 말을 듣고 강력한 깨달음을 얻는다.
예술가는 내면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길 원한다. 그리고 그 생각과 감정의 원천은 경험에서 나온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 쌓아온 경험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항해하던 쿠르트는 신문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전환점을 만든다. 현대 회화에 새로운 전기가 된 쿠르트의 페인팅은 엘리자베스 이모가 추구했던 자유와 아름다움의 발현이었다. 헤드라이트를 켠 여러 대의 버스 앞에 서서 쿠르트가 클랙슨 소리를 듣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쿠르트와 엘리자베스 이모가 함께 예술을 찾아가는 여정을 상징한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발전해온 회화의 목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완벽하게 캔버스 위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가시적인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가 중요했다. 미술의 전통적 장르가 그랬다. 영화에서도 “이제 회화는 끝났다”고 현대미술의 속성에 대해 단정한다. 하지만 쿠르트는 그 거대한 파도를 관통해 ‘포토 페인팅’을 창시한다. 지금 여기에서 보는 것을 뛰어넘어 체험이나 학습, 경험 등 과거의 기억을 종합해 사물을 바라본다. 그는 바라보는 매체로 사진을 활용했는데, 사진의 여러 이미지를 회화로 재해석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사진의 특징인 선명성을 배제하고 흐릿하게 화면을 뭉개거나 흘리는 스타일을 창안했다. 전에 없던 새로운 회화 양식의 창조였다. 영화 후반부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한 편의 명강의가 펼쳐진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집중 몰입하게 만드는, 구성과 연출이 뛰어난 수작이다. 독일의 드레스덴, 뒤셀도르프 등 도시 풍경이 나오는 영상도 아름답지만, 또 다른 리히터인 ‘막스 리히터’의 음악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배가한다. 옷을 벗은 채 바흐의 ‘사냥 칸타타’ 중 ’양들은 편안히 풀을 뜯고‘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광기에 빠진 세상에 대해 저항하는 힘없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치 신봉주의자에서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줘 전쟁 후에도 의사로 살고, 다시 서독으로 망명해 편하게 사는 칼 시반트의 기회주의적인 삶의 모습에서는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예술은 희망의 가장 고귀한 형태다, 정확하게 초점이 맞은 이미지보다 흐릿한 캔버스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에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적 태도라는 정의가 담겨 있다. 그의 말에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본 후 깨달았다.
외국 분위기로 꾸민 집에서 기내식을 먹고 이국적 요가와 유명 해외 여행지를 관광하며 현지 음식을 즐긴다? 언뜻 들으면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인터넷만 연결되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늘길이 막힌 탓에 올해 휴가가 아쉬운 당신을 위해 ‘랜선 해외여행’을 소개한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로 해외 여행길이 막혀 올해는 여름휴가를 집에서 보내야 할 형편이다. 하지만 집콕, 방콕만 하고 있기엔 너무 아쉬운 시간. “힐링은 여행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래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찾아봤다. 집 안에서 즐길 수 있는 해외여행이 잔뜩 검색된다. 이제 떠날 일만 남았다. 랜선 타고 떠나는 ‘집콕 해외여행’이다.
◇아침은 간단하게 ‘브런치’로
여름휴가가 시작됐다. 아침식사는 가볍게 준비할 수 있는 ‘에그드랍 샌드위치’,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하는 건 어떨까. 호텔 조식만큼은 아니지만 집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고 맛도 훌륭하다. ‘폰타나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사용해 유럽 정통 오리지널 머스터드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샐러드를 곁들여도 좋다. 이들 재료와 상품은 G마켓이나 옥션 등 오픈마켓에서 구하면 된다. 마켓컬리 등 새벽 배송을 이용하면 더 빠르게 준비할 수 있다. 외국산 유명 커피나 차 역시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어, 해외에서 맞이하는 아침 분위기를 즐기는 건 어렵지 않다.
◇해외 분위기에서 즐기는 ‘랜선 요가’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는 요가를 즐겨보자. 구독자가 161만 명에 달하는 유튜브 채널 ‘보호 뷰티풀’(Boho Beautiful)은 해외 여행지를 배경으로 요가 영상을 제공한다. 시청자는 20분 동안 이국적인 배경과 음악을 보고 들으며 마치 해외에서 요가를 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원하는 부위 운동과 복부 식스팩 만들기 등 다양한 콘텐츠가 업데이트되고 있으니, 맘에 드는 영상을 골라 동작을 따라하면 된다.
◇방 안에서 맛보는 ‘기내식’
모처럼 해외여행 분위기를 냈으니, 점식식사는 기내식으로 해결하자. 편의점 CU에서는 코로나19로 해외에 나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기내식 콘셉트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항공사가 종교나 개인적 신념 등으로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고객을 위해 다양한 기내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이 상품도 입맛과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게 했다. 은박 용기 하나에 다양한 음식이 담겨 나오는 기내식 특유의 감성을 그대로 살려 알루미늄 용기를 사용했다. 상품명도 ‘포크 플리즈’, ‘치킨 플리즈’, ‘비프 플리즈’로 실제 기내식 느낌을 살렸다.배달의민족 등 배달 앱을 활용해 온라인 주문도 할 수 있으니 집 안에서 편리하게 즐겨보자.
◇내 방에 꾸미는 ‘해외 여행지’
이제 방 안을 해외 여행지로 꾸며보자. 디자인 상품 전문 쇼핑몰 텐바이텐의 ‘여행 데꾸테리어’ 기획전을 살펴보면 다양한 해외 브랜드 인테리어 소품을 찾을 수 있다. 여행 감성을 자극하는 디자인 가전제품과 유럽풍의 취미용품들도 만날 수 있다. 데꾸테리어는 ‘데스크 꾸미기’와 ‘인테리어’를 합성한 신조어다. 빈티지 소품으로 유명한 브랜드 ‘하이타이드’와 ‘툴스 투 리브바이’도 해외 여행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소품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어 활용해볼 만하다.
◇본격적으로 떠나는 ‘랜선 여행’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보자. 먼저 유튜브를 통해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 각국의 유명 관광지를 실시간으로 방문하면 된다. 특별한 공연이 펼쳐지는 것도 아닌데,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비추는 유튜브 채널 ‘어스캠 라이브’(EarthCam Live)에는 해외여행에 목이 마른 수백 명의 사람이 접속해 대화를 나눈다.
◇‘가상현실’로 만나는 체험 투어
가상현실(VR)을 체험할 수 있는 영상도 준비해보자. 체코관광청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마스크 착용 운동부터 VR 투어, 오페라 등을 영상으로 소개한다. 타히티관광청도 VR 영상 등을 선보이는 디지털 캠페인을 웹사이트와 페이스북을 통해 진행 중이다.
◇현지 레시피로 만든 ‘로컬 푸드’
아침에는 브런치를, 점심에는 기내식을 먹었으니 저녁에는 해외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워보자. 집에서 즐기는 해외여행인 만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메뉴로 고른다. 베트남이나 태국 등 동남아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똠양꿍’은 어떨까. 현지 고유의 맛을 최대한 살리되 쉽게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로 알아봤다. 식재료는 동남아 식재료 인터넷 쇼핑몰인 아시아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두바이에서 뛰고, 스위스에서 오르고
저녁식사도 했으니 이번엔 트레킹을 해볼까. 해외 관광청들은 주요 여행지의 풍경을 홍보하는 캠페인 영상을 대부분 공개하고 있다. 두바이관광청은 이국적인 중동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알 시프와 사막을 보여주고, 황홀한 경험을 선사하는 스카이다이빙 등의 액티비티를 소개하고 있다. 스위스관광청도 산악 마라톤이라 불리는 트레일 러닝을 감상할 수 있는 영상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영상을 통해 6만5000㎞의 하이킹 트레일을 즐길 수 있다.
◇맥주와 해외여행 ‘영화 속으로’
해외 유명 도시가 나오는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전 세계를 둘러볼 수 있는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지구 반 바퀴를 돈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만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느낌이 충만한 ‘레터스 투 줄리엣’ 등을 보며 잠시 랜선 해외여행을 떠나보자. 영화를 감상하며 세계 맥주를 마시는 재미도 쏠쏠하다. 중국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칭따오’, 맥주 여행의 성지 독일의 ‘에딩거’, 체코를 대표하는 맥주 ‘필스너’, 집에서 즐기는 네덜란드 생맥주 ‘하이네켄’ 등을 추천한다.
◇내년엔 ‘누구랑 어디로’ 떠날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코로나19 종식 후 찾아갈 해외 여행지와 함께 떠날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왕이면 마음이 맞는 이를 찾아본다. 여행 플랫폼 트래블메이커의 ‘현지인 테스트’는 일종의 여행 심리 테스트다. 진단표는 취향과 성향에 알맞은 해외 도시들을 추천해준다. 제시된 문항은 총 12가지. 선택을 기반으로 한 결과 페이지는 최적의 동행자 유형도 알려준다.
1945년 4월 1일 아이젠하워는 1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미국 위스콘신 주에 있는 파커 사로 보냈습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케네스 파커. 회사 사장이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랬습니다. 만년필 선물은 잘 받았고, 유럽에서의 궁극적인 적대 행위의 종식(독일의 항복)에 공식적인 서명이 있다면 나는 그 만년필을 사용하겠다는 것. 이 두 사람은 1937년부터 친분이 있었습니다.
약 한 달 뒤 이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5월 7일 프랑스 상파냐 지방 랭스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관실에서 독일의 무조건 항복 조인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인식에서 미국, 소련, 프랑스, 독일 4개국 대표가 서명을 했고, 여러 기록에 의하면 이때 사용된 만년필은 세 자루였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서명한 사람은 4명인데 만년필은 세 자루. 이 중요한 순간에 누군가 한 사람이 실수로 만년필을 가져오지 않은 것일까요. 관련 필름을 찾아봤습니다. 독일 대표는 탁자 중앙에 놓인 만년필을 잡아 다른 종이에 써본 후 서명을 합니다. 펜 끝이 살짝 보이고 클립은 화살클립입니다.
미국과 프랑스 대표 역시 같은 모양의 만년필을 잡았습니다. 소련 대표만 다른 만년필입니다. 화살클립에 펜촉이 살짝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미국 파커 사의 파커51입니다. 서명식이 끝나고 아이젠하워는 파커51 두 자루로 V자를 만들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필름에서 본 것을 종합하면, 추측이지만 실상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조인식 전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각국 대표에게 만년필을 준비하지 말라는 연락을 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이 연락대로 했지만 소련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소한 에피소드가 앞으로 있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예언처럼 예고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음 달 6월 5일 독일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분할 점령되는, 나중에 동서(東西)로 45년간 분단되는 베를린조약 문서에 아이젠하워는 파커51로 서명합니다. 참고로 5월 7일 항복 조인식에서는 아이젠하워가 파커51만 제공하고 서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파커51은 항복과 분단까지 이래저래 독일에 아픔을 준 만년필입니다.
파커51 어떻게 생겼을까요?
파커51은 공식적으로 1941년에 처음 출시되었고 1978년에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펜촉의 대부분은 손잡이 속에 들어가 있고 펜 끝만 살짝 나와 있어 뚜껑을 열어놓아도 잘 마르지 않았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만년필의 최대 장점은 매우 튼튼하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생산된 1940년대 것들 중에는 아직 현역(現役)으로 있는 것이 많고 1948년 이후의 것들은 고장 난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아이젠하워가 좋아했던 것은 물론 올해 94세인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아직까지 파커51을 사용하는데 자주색 몸체에 금색 뚜껑의 모델을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밖에 트루먼 대통령, 니미츠, 마크 클라크 장군이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가장 인기 있는 만년필일까요? 이삼십 년 전이라면 몰라도 현재 1위는 정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몽블랑 사의 마이스터스튁 149입니다. 몽블랑 149는 1952년에 출시되었으니 파커51보다는 열한 살 적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어 현존 최장수 모델이면서 만년필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만년필입니다. 펜촉을 보면 파커51처럼 감싸져 있지 않고 시원하게 오픈되어 있습니다. 이런 펜촉을 오픈 펜촉이라고도 하는데 몽블랑 149는 오픈 펜촉의 대표, 파커51은 감싸진 펜촉의 대표입니다. 앞에서 정반대라고 말씀드린 것이 이제는 이해되시죠.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149가 51에게서 1위를 빼앗기도 했지만 1990년 독일의 통일 서명에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파커51이 독일을 나누었다면 독일의 몽블랑 149는 독일을 다시 이어준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만년필에는 만년필입니다.
파주시 광탄면 야트막한 산 앞, 3305㎡(약 1000평) 규모의 야외 스튜디오에 푸른색의 인사하는 조각품들이 서 있다. ‘그리팅맨’(Greeting Man, 인사하는 사람)과 ‘월드미러’(World Mirror, 세계의 거울)의 조각가 유영호(55) 씨가 작업 중인 작품들이다. 유 작가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자신의 작품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유영호 작가는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년에는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에 선정되는 등 다수의 수상 경력도 있다. 코로나19로 모든 행사와 교류가 중단된 초여름 날 만난 유영호 작가는 여전히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가 제일 바빠야 하는 해였어요. 연초부터 해외에 작품 설치가 계획돼 있었는데 다 연기됐죠. 베트남에도 3월에 보내려고 포장까지 해놨는데 미뤄졌어요. 멕시코 메리다에서는 아직 코로나19가 심각한 상황인데도 8월 말까지 작품을 보내달라고 해서 다음 주 중 컨테이너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6월에 프랑스 노르망디 쿠탕스에 설치할 예정이었던 작품은 1월 말에 자리만 잡아놓은 상태다.
자비로 해외에 ‘그리팅맨’ 설치
유영호 작가가 그리팅맨 해외 설치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뭘까.
“미술계에서 작가가 성장해가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뮤지엄에서 작품 발표를 해서 이름을 알리고 경력을 쌓는 것이죠. 선진국들은 그런 루트가 확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작가, 갤러리, 컬렉터가 어우러져 작품의 가치가 책정되는 케이스죠.”
그런데 한국은 대부분 국공립 뮤지엄이어서 작가들이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은 다음 국내에서 전시하는 방법을 선호한단다.
“국내의 조각작품 시장은 협소해요. 해외 극소수 작가의 작품만 거래되는 정도죠. 한국에서 조각가로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제 작품을 해외로 보내는 방식을 선택한 거죠.”
그가 자비를 들여 해외에 작품을 설치하는 이유는 기증 프로젝트가 아니면 힘들어서다. 어느 한 장소에 영구적으로 외국 작가의 작품을 설치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 작가가 그리팅맨을 제작하게 된 동기도 궁금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할 당시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깊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큰절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시하자 그것을 본 네덜란드의 유명 작가 헨크 비스가 “그 행위가 인사가 맞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유럽 사람들은 인사를 잘하잖아요. 그러고 나서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관계가 시작되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죠.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도 관계의 출발은 인사로부터 시작된다고 봤어요. 우리의 큰절 문화가 유럽인들에게는 낯설었겠지만 인사에는 어떤 보편성이 있다고 확신했어요.”
그는 헨크 비스의 질문에서 영감을 받았고 인사에 대해 재인식을 하게 됐다. 그리팅맨이 탄생한 배경이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상대방도 존중하는 자세는 고개를 15° 숙인 각도예요. 너무 낮추는 건 가식적으로 느껴지거나 비굴해 보일 수 있거든요. 정치적 행위로도 인식되죠. 그리팅맨의 15° 각도 인사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나온 결과예요.”
이 작품의 푸른색은 인종을 초월한 중립적인 색으로 전 인류를 의미하며, 고려청자의 빛깔을 띤 색은 작품 배경인 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해외의 폭발적 반응
2012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그리팅맨을 처음 세운 후, 지금까지 국내외 10여 곳에 작품을 설치했다. 당시 우루과이에서는 라디오 생방송에서 찬반토론을 할 정도로 반대가 극심했다.
“어느 곳이든 이질적인 것들에는 반감이 있기 마련이죠. 그러나 그리팅맨이 설치된 후에는 시민들 반응이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다음 해에 우루과이 관광청에서 만든 책자 앞 페이지에 그리팅맨이 소개될 정도였어요.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된 거죠. 작품이 설치된 자리는 우루과이에 입국하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인데 현재 ‘대한민국 광장’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어요. 해외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면 힘이 나요. 모두 자비로 설치하지만 문화 전파를 통해 더 큰 가치를 얻고 있죠.”
설치비보다 문화적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일 게다. 해외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됐고, 유 작가는 그리팅맨이 전 세계 소통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설치되는 도시들은 나름의 기준으로 선정합니다. 천재지변을 당한 지역, 분쟁으로 고통을 겪었던 곳, 그리고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들입니다.”
조만간 작품이 들어설 멕시코 메리다는 한국과도 관계가 있는 도시다. 1905년 ‘지상낙원’이라는 말만 믿고 멕시코 이민선을 탔던 조선인들이 애니깽(선인장의 일종)이라는 농장에서 노예처럼 지낸 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5~6세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요. 수만 명이 그곳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했고요. ‘대한민국로’로 이름이 바뀐 거리의 원형 광장에 그리팅맨을 세울 겁니다.”
연천 옥녀봉의 화해 메시지
국내에서는 2007년 파주 헤이리에 처음 그리팅맨을 세운 후 분단의 현장에도 작품을 설치했다. 유 작가에게 제일 의미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2016년에 10m짜리 그리팅맨을 세운 연천 옥녀봉이에요. 북한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곳이죠. 남북 화해의 메시지를 담았어요.”
북녘을 향한 그리팅맨은 현재 연천의 랜드마크로 불리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북한에도 그리팅맨이 설치되어 남과 북이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하기를 바란다.
“옥녀봉은 민간인이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역으로, 남북 간 DMZ에서 6km 정도 거리에 있어요. 그리팅맨을 남과 북에 설치한다는 것은, 70년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예술이 작은 힘을 보탠다는 걸 의미하죠.”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평화의 작가’라고 부르는데 그는 아니라며 겸손해한다. 단지 분단 시대를 사는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2014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 광장에 세운 월드미러는 영화 ‘어벤져스2’에서 소개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명 ‘미러맨’(Mirror Man)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두 사람이 붉은 사각 틀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거울이 없지만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우리는 결국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재작년에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월드미러를 설치했어요. ‘세상의 거울’이자,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도 있죠. 에콰도르는 적도에 위치한 나라여서 남반부와 북반부가 만난다는 의미도 됩니다.”
현재 터키 북서부의 항구도시 차낙칼레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최장 길이의 다리를 만들고 있다. 내년에 다리가 완공되면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만남을 상징하기 위해 그의 작품을 세울 예정이다. 그리팅맨은 형태가 둥글둥글한 반면 월드미러는 각과 면으로 이루어졌다. 누드를 부담스러워하는 나라에서는 각이나 면으로 그런 느낌을 순화한단다. 그래서인지 월드미러를 원하는 나라들이 꽤 있다. 현재 추진 중인 이슬람 국가들을 위해 옷을 입힌 작품도 만들고 있다.
5년 안에 20개국에 그리팅맨 세우겠다
그는 서울, 경기도, 강원도 등 여러 지역에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공공미술은 보기에 편안하고, 내용도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젊은 시절 실험적이고 난해한 작품들도 많이 만들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요.”
공공미술로 선정된 작품들의 수익금은 해외 프로젝트에 사용한다. 이러한 뜻에 공감하는 지인들이나 친목 단체가 후원도 한단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역시 그리팅맨에 관한 이야기다.
“5년 안에 20개 나라에 그리팅맨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업이에요. 지금의 시공간에서 선택한 특별한 일이기도 하죠.”
그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다. 몇 년 전까지 대학에서 강의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 말년에는 은둔자로 살고 싶어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소통, 공감 등을 추구하는 그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니 아이러니하다. 젊은 시절에는 늘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요즘엔 글을 쓴다. 최근에는 그리팅맨 프로젝트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리팅맨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서 그가 직접 낭송한 자작시 ‘프란체스코’, ‘형과 누나’ 등은 미세한 울림을 준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기자가 출발할 때까지 배웅하며 그는 그리팅맨처럼 15° 인사를 했다.
대한민국을 재발견하는 재미와 별개로 간절한 것이 바로 ‘먼 이국’으로의 여행이지만 지금은 해외로 나가는 발길이 묶여버린 상황. 언제까지 코로나19가 잦아들기만을 넋 놓고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홀로,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저비용 고효율로 즐길 수 있는, 이름하여 ‘한국에서 즐기는 외국 여행’ 가이드. 인생은 짧고 갈 곳은 많다. 한국에서 만나는 독일, 스위스, 사막, 지중해, 중국, 스페인 산티아고, 아프리카 등 지금 당장 가슴이 끌리는 그곳으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해외여행)을 떠나보자!
한국에도 사막이 있다?
신두리 해안 사구
우리나라 최대의 해안 사구 지대로서 해안 사구가 지닌 환경적, 생태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2년 11월 해양수산부에 의해 생태계 보존 지역으로 지정됐다. 오랜 세월 바람에 의해 날려온 해안의 모래가 쌓여 만들어졌으며 길이 약 3.4㎞, 폭 약 200m에서 최대 1.3㎞ 규모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사구 표면은 대부분 사초로 덮여 있으나 육지 쪽에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고 해안 가까이 해당화도 자라 사구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두리 해안 사구는 현재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생태계 보존 지역이니 자연을 아끼는 각별한 마음도 가져가야 한다.
위치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유럽풍 숲속 정원을 거닐다
제이드 가든
숲속 정원 ‘제이드 가든’(Jade Garden). 새소리와 물소리가 어우러진 자연의 공간 만병초원을 비롯해 어릴 적 즐겨 읽고 보던 동화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모티브로 지은 유럽풍 마을, 젊은이들의 프러포즈 장소로 인기가 좋은 이탈리아 웨딩가든, 그리고 수생식물원, 고산식물원, 꽃물결원, 피크닉가든, 은행나무미로원, 키친가든, 재배온실 등을 천천히 거닐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보자.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 등의 휴게 공간도 마련돼 있고 가든 가꾸기 프로그램도 상시 진행한다. 하절기 기준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9500원, 경로우대 7000원. 굴봉산역-제이드 가든 왕복 셔틀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위치 강원 춘천시 남산면 서천리 햇골길 80
독일 교포들의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
독일마을
1960년대 독일의 광산과 병원에서 일해온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은퇴 후 한국에 돌아와 살 수 있도록 마련한 생활 터전이다. 독일에서 반백 년 가까이 살았던 교포들이 실제로 살고 있어 독일 정취와 문화를 느끼고 경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2001년, 남해군이 사업비 30여 억 원을 들여 40여 동의 건축물 택지를 교포들에게 분양했다. 그 후 이 주택들은 교포들의 주거지 또는 휴양지로 쓰이는 동시에 일반 관광객들을 위한 민박으로도 운영되고 있다. 독일 전통 소시지와 맥주 맛보기, 독일마을 추억 만들기, 전통의상 입어보기, 파독 전시관 관람하기 등이 대표 체험 프로그램이다. 상주하는 독일 교포들이 해설사 역할도 한다.
위치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1074-2
오감 만족 스위스
에델바이스 스위스 테마파크
아름다운 숲과 마을, 스위스풍 건축물과 공원을 통해 스위스의 자연과 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커피, 치즈, 초콜릿, 와인 등 스위스를 대표하는 다양한 주제별 박물관을 포함해 스위스 테마관, 동물농장, 양떼목장, 사랑의 연못, 에델바이스 광장, 갤러리, 포토존 등 전시 시설과 전원 시설을 다채롭게 누릴 수 있다. 어둑해지면 인터라켄 마을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날 수 있다. 주말 기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9000원, 경로우대 7000원.
위치 경기 가평군 설악면 다락재로 226-57
포천 숲속에서 느끼는 아프리카의 숨결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카라반펜션캠핑장
태천만 관장이 수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 30여 개국을 다니며 150여 부족에게 수집한 유물과 민예품 560여 점, 석목 조각 330점, 미술품 30점 등을 통해 아프리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인식, 토속 춤, 혼례 및 장례 등 제례의식과 왕족, 족장, 전쟁과 사냥 등과 관련한 유물 및 악기, 각종 생활용품도 감상할 수 있다. 최근에는 카라반펜션캠핑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도심을 벗어난 자연에서의 낭만적인 하룻밤까지 즐길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에서 저녁 6시까지 운영하며 요금은 성인 1만2000원, 경로우대 1만 원.
위치 경기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967
산토리니의 호젓한 골목을 걷고 싶다면
지중해마을
푸른 지붕에 파스텔 톤 골목들이 알록달록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지중해에 접한 그리스의 섬과 프랑스 남부의 건축 양식을 빌렸다. 지중해마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원래는 너른 포도밭이었는데 주변 땅이 개발하면서 탈바꿈의 시기를 거쳤다. 3층짜리 60여 동 건물에는 레스토랑, 와인바, 베이커리, 카페, 기념품 숍, 식당,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 주민들의 거주 공간 등이 마련돼 있다. 야간에는 골목 위로 은하수 조명이 매달려 마을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또 마을 공원 곳곳에는 벤치가 있어 이국적인 건물을 바라보며 호젓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
위치 충남 아산시 탕정면 탕정면로8번길 55-7
사진 출처 충남 홈페이지
한국적 정취와 어우러진 작은 산티아고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
신안군 다도해에 자리 잡은 작은 섬이다. 목포나 무안에서 배를 타고 30분에서 1시간이면 갈 수 있다. 썰물 때면 드러나는 노둣길이 대기점도, 기점도, 소악도, 진섬을 마치 하나의 섬처럼 이어준다.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은 하나로 이어진 이 섬들을 걷는 12㎞ 트레일이다. 길을 이어 걷는 중간에 예수의 제자 12사도의 이름을 딴 열두 개의 예배당을 쉼터처럼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섬에는 마을 사무국에서 운영하는 식당과 게스트하우스가 한 곳 있으며 섬 누리집에는 교통편과 노둣길 물때 등 여행에 필요한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어 처음 가는 사람도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
위치 전남 신안군 증도면 병풍리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2020년은 나의 고교 졸업 50년, 대학 입학 50년이 되는 해다. 고교 졸업 50년 행사와 기념 여행은 코로나의 위험 속에서도 이미 6월에 강행했다. 이보다 앞서 5월에는 대학 동기들이 모교에서 재상봉 행사를 했다. 많이도 달라진 교정을 둘러보며 반세기 전에 맺은 우정을 되새긴 모임은 재미있고 유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은 탓일까. 고려대 독문과 70학번 동기들은 전북 군산 고창 일대를 도는 노래여행을 추가로 기획했다. 서울, 서천, 부산에서 각각 모인 여덟 명은 7월 25~26일 1박 2일 동안 호쾌(豪快)하게 술 마시고 창쾌(暢快)하게 노래했다. 동기인 전북대 독어교육과의 이신구 명예교수가 2월에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이라는 책을 낸 이후, 단톡방을 중심으로 음악에 대한 관심과 화제가 풍성해졌다. 그래서 ‘한번 신나게 노래 부르며 놀아보기로’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늘 친구들을 도와온 캠퍼스 커플 김한옥(사업)-김영숙 부부가 앞장을 서고, 군산의 뮤직 카페 단골인 이신구 교수가 생각을 더해 노래경연 모임은 이내 결성됐다. 모인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목자(目眥,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가 불량하다고 내가 늘 지청구하는 부산 사내 윤종기(1등 입학자다), 엄처시하(嚴妻侍下)에 사는 음악광 독일 전문가 배종은(그의 부인이 嚴씨다), 경쟁자 없이 동기회의 회장을 오래 맡고 있는 강국회, 서천에서 활동 중인 연극 연출가 고금석 등이다.
우리가 한바탕 푸지게 논 장소는 군산의 은파호수 옆 ‘Music4u’(뮤직포유) 카페. 토요음악회를 200회나 개최한 곳인데, 이 교수는 이곳에서 문학 강연도 해왔다고 한다. 카페 2층의 널따란 음악당에는 ‘4u’를 발음대로 옮긴 ‘抱裕’(포유) 액자가 걸려 있었다. 서로 너그럽게 안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인가. 나는 서로 끌어안고 노는 抱遊, 이렇게 쓰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왜 그렇지 않던가. 흥이 나서 노래를 하다 보면 어깨를 겯거나 서로 안고 놀게 되지 않던가.
우리는 누가 무슨 노래를 잘 부르는지 이른바 각자의 18번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내의 노래, 올챙이 멜로디(Unchained Melody), 엽서 한 장, 모란이 피기까지는, 명태, 메리케인부두 그런 노래들. 나는 이 중 ‘명태’(변훈 작곡)를 50년 전 대학 1학년 때 고금석에게서 배웠다.
고금석은 서예에 입문해 이미 입선도 두어 번 한 사람인데, 산곡(山谷)이라는 호를 쓴다. 내가 얻다 대고 중국 송나라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 1045~1105)과 같은 호를 쓰느냐고 따졌더니 그의 호가 산곡인 줄 몰랐다, 사는 동네 이름이 산너울이라서 그렇게 지은 것뿐이라고 했다. 괘씸하지만 용서해주기로 했다.
하여간 나는 50년 전 산곡에게 내 레퍼토리 ‘메리케인부두’(남일해 노래)를 떠넘기고 ‘명태’를 내 노래로 만들었다. 앞으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명태’를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나는 치사하게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원래 내 노래인 것처럼 두 가지를 다 불렀다. 결국 산곡에게서 노래를 빼앗은 꼴이 돼버렸다.
이번 군산 여행에서 나는 노래를 되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50년 전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 그는 ‘명태’를, 나는 ‘메리케인부두’를 불렀다. 그가 부르는 ‘명태’는 호소력이 컸다. 오래 연극을 해온 목소리의 울림이 좋은 데다 삶의 곡절과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노래에서 우러나왔다. 그에 비하면 내 노래는 흥은 좀 있으나 스스로 들어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다.
웃고 떠들고 노래한 뒤 호텔에 돌아와 산곡과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명태’를 부르며 둘의 가사를 대조해보았다. 내가 그에게서 배웠는데 왜 내 ‘명태’와 그의 ‘명태’는 다를까. 괄호 안이 그의 가사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큰물)을 호흡하고 길이나(기다란)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뭉치고 펑퍼지고 몰려다니다가) 어떤 어진(착한)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제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는 ‘명태’를 어떻게 부르게 됐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서 노래를 배운 뒤 가사를 찾아서 외우고 익혔다.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교과서처럼 살아왔고 산곡은 열정이 닿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데로 움직이며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 노래를 되바꾸자, 도로 ‘명태’를 가져가라고 한 데 대해서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메리케인부두’가 돌려주기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닌 건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던가. 모르겠다. 1965년 무렵 남일해가 부른 노래라는 것만 알 뿐인데 이 기억도 정확한지 자신이 없다. 2절에 “트위스트 춤을 추는 신나는 그 리듬에”라는 가사가 나오는 걸 보면 1960년대인 건 확실하다. 원곡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 노래를 한껏 늘어지게 타령조로 부르곤 한다.
다음 날은 고창으로 옮겨 선운사, 미당 시문학관, 인촌 김성수 생가 등을 둘러보았다. 비 내려 수량이 풍부해진 선운사 계곡의 물은 검게 보였다. 참나무의 낙엽에 들어 있는 탄닌 성분이 녹아든 탓이라고 한다. 덕분에 수면에 비치는 풍경은 훨씬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마지막 일정으로 점심을 먹을 때, 산곡은 노랫가락을 한자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기민요였다. “바람이 물소린가 물소리 바람인가/석벽에 걸린 노송 움츠리고 춤을 추네/백운은 허우적거리며 창천에서 내리더라.” 푸른 하늘에 흰 구름, 그리고 소나무와 바람과 물. 짧은 노래에 한 폭의 그림이 들어 있다. 경기민요의 많은 소절 중에서 가장 시적인 대목이었다.
그렇구나. 산곡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에 가 있고, 그의 노래는 더 풍부해졌구나. 그러니 굳이 ‘명태’를 되찾아갈 필요가 없겠지.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노래를 되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각자 ‘명태’를 깜냥껏 부르고 편한 대로 ‘메리케인부두’를 흥겹게 노래하면 되는 것이었다. 노래가 탄닌이 되어 그와 나, 그리고 우리 모든 벗들의 우정이 수량이 풍부한 냇물처럼 흐르고, 키 크고 잘 자란 나무처럼 여울지면(여울지다=식물의 열매나 꽃, 잎 따위가 몹시 많이 열리다.) 되는 거 아닌가.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것이고, ‘글이 곧 그 사람’이듯 ‘노래도 곧 그 사람’인 것이다.
한국의 서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떠난 여행길.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코 병산서원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병산서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지도에서 보면 낙동강의 물줄기는 S자로 흐른다. S자가 만든 골짜기 안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나란히 있다. 하회마을을 투어하고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꽉 찬 1일 코스로 손색이 없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6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하기 그지없다. 하회마을에서 곧장 갈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보니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내려 한참을 걷든지 아니면 다시 안동까지 가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안동의 관광 구역을 묶어 투어 버스를 운행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운전하면서 온갖 아이디어로 안동 지역 관광을 증진하는 말의 향연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신장이 족히 19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체격 좋은 외국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 차림으로 포장도 안 된 도로를 걷고 있는 옆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잠깐, 저 친구 병산서원 가는 거 아닐까?” 우리 일행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고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Are you going to Byeong San?” 맞았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걸어오는 길이란다. 아직 4km도 넘게 남은 길이었다. 이 친구를 앞좌석에 태우고 병산서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독일 청년이었다. 1년 전에 한국에 왔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곳곳을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했다.
한국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독일 청년이 안동까지 혼자 여행 와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습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생이 심해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어느새 병산서원 주차장이었다. 돌아갈 때도 태워줄 테니 편하게 서원을 관람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후 독일 청년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병산서원을 차근차근 훑어볼 시간. 중장년층 세대의 병산서원에 대한 관심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에서 시작됐을 듯싶다. 유 교수는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며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아울러 “하회의 답사적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하회마을보다 꽃뫼 뒤편 병산서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병산서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대루에 감탄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200여 명은 함께 모여 강학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망루다.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기둥들과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의 모습이 건축물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모래사장의 풍경과 낙동강 물줄기를 감싸 안은 산세들을 만대루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옛 서생들이 품었던 기개가 느껴진다.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대자연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한국 건축의 백미라는 유홍준 교수의 찬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입교당이 있다. 입교당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서원의 앞쪽을 바라보면 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대루 기둥 사이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해 잠시 말을 잃을 정도다.
병산서원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예로부터 선비, 유학자들이 서원 혹은 향교에 심었고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던 꽃나무다. 이 나무를 심는 데는, 1년에 한 번씩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배롱나무처럼 정진을 거듭해 심신을 수련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가 너무 황홀하다. 가끔 수련에 지장이 되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배롱나무 자태에 취하고 만대루 풍경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병산서원을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독일 청년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다 반겨준다. 우리가 떠나버린 건 아닌지 걱정한 모습이다. 오늘 밤 숙소를 물어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며 안동버스터미널에 내려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Of course!!” 병산서원의 황홀한 자태에 취한 저녁, 우리는 안동버스터미널에 눈동자 파란 외국인을 내려주며, 저 친구가 오늘을 평생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을 모체로 건립됐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던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산서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