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장식장과 콘솔 등 소품 자리가 빈 휑뎅그렁한 거실 한가운데에 찌무룩이 섰다가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찬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가슴께로 싸하게 번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뱉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긴 출근길에 아내의 딸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을 보았으니 오늘 짐을 빼겠구나 짐작은 했다. 그리 놀랄 일이나 새삼스러운 충격은 아니란 뜻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재혼한 지 1년 반 만에. 말이 1년 반이지 한 공간에서 지낸 것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다툴 때마다 아내는 버릇처럼 집을 나갔으니까. 친정도 없는 사람이 변변히 갈 데가 있을 리 없건만 마치 가출 자체로 위로를 삼는 것처럼 수틀리면 훌쩍 집을 나갔고, 그렇게 한번 나갔다 하면 몇 달씩 들어오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거의 내 쪽에서 화해를 청했고, 아내가 마음을 풀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내가 불안해졌다. 다시 나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불안할 일도 없으리라. 서로가 재혼이라 혼수를 따로 장만한 것도 없고 아내가 아끼던 자잘한 것들만 가지고 내 아파트에서 합쳤던 터라, 이번 가출은 전과 달리 물건을 모두 실어서 나간 걸 보면 이로써 우리의 인연도 끝난 것일 터. 그렇게 자꾸 나갈 거면 아주 나가버리라고 했던 건 나니까.
다시 혼자가 되어
이렇게 둘이서 서둘러 결정할 게 아니라 그 흔한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봤어야 했던 거 아닐까. 갈등의 뿌리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서로 자존심만 세우다 아내도 나도 얼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나는 아내를 사랑했을까. 아내는 나를 사랑했을까. 함께 연주를 하기도 전에 조율 중인 악기를 내팽개쳐버린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뒤엉키며 혼란스레 오갔다.
아내와 나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다. 그저 잠깐 동거한 관계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 홀가분하다가도 성대히 치른 결혼식이 마음에 걸린다. 그랬다. 우리는 결혼식을 꽤나 성대히 치렀다. 남들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과시욕에서만큼은 아내와 내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허탈감과 자괴감이 든다. 재혼의 형식만 그럴 듯했지 부부의 내실은 너무나 허약했고, 그나마 이제는 관계를 쌓아갈 토대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재산을 지키자고 아내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내도 그건 인정할 것이다. 내 재산 못지않게 아내도 자기 몫이 알찬 사람이니까. 그러니 혼인신고를 미룬 이유는 서로 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라 할밖에. 말이 부부지 결속의 끈은 느슨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사랑
나는 20년 전에 상처(喪妻)를 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난 두 살 아래 전처와의 10년 결혼 생활은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른 살에 결혼하여 이듬해와 또 그 이듬해에 연년생 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영리했다. 안정된 나의 직장과 가정을 소중히 보살피는 아내, 무엇을 더 바란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 만큼 평범하지만 안온한 생활이었다. 아내가 간암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그랬던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는 죄라도 지었던 것일까. 서른여덟 살 젊디젊은 아내는 그렇게 우리 세 식구를 남겨두고 1년 투병 끝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홉 살, 여덟 살 남매는 엄마를 잃었고 나는 나이 마흔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되었다. 이후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여 돌봐야 했던 지난 20년, 고달프고 서글프고 버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아내의 묘를 찾아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태연히 누워 있을 수 있냐”고 원망과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아내가 떠난 후 남은 우리 세 식구는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내가 없는, 엄마의 자리가 빈 가족 외식은 그 존재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키며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건만 식당에 앉아 있는 내내 위축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저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다는 쓰라림과 함께.
아내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내 책임을 다한 후 이담에 저세상에서 아내를 만나 단단히 생색을 내자며 오기 아닌 오기로 버텨온 것이 어느덧 20년. 30세가 가까운 남매는 아직 미혼이긴 해도 둘 다 직장이 있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지금 막 헤어진 두 번째 아내를 만났다. 그간 주변에서 재혼 권유나 소개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마다해왔던 것을 이제는 마음을 좀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였다.
막 헤어진 지금의 아내도 나와 비슷한 시기인 38세 때, 세 살 많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아왔다. 설 명절을 지방 시댁에서 보내고 귀경하던 눈길 고속도로에서 타고 오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박으며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피로를 덜고자 부부가 교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사고 당시 운전대는 아내가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남편은 중상을 입은 후 병원에서 사망했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딸과 자신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허울뿐인 결혼
딸을 키우며 20년 가까이 혼자 살아온 아내. 야무지게 자신을 지키며 강한 생활력과 다져진 실력, 철저한 자기 관리로 직장의 잔뼈가 제법 굵어져 나를 만날 무렵에는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나는 지금 대표 자리에 있는 회사에서 당시는 중역이었기에, 어느 경제인 조찬 모임에서 회사를 대표하여 참석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열 개 남짓 마련된 원탁 가운데 마침 한 테이블에 앉게 되어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사별의 아픔을 겪은 공통점으로 인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같은 모임에서 다시 한번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자 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필연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갈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고 할까. 느낌이란 게 있다고 할까. 우리는 연민과 연정으로 그렇게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조찬 모임 참석자들을 의식한 점도 작용했다. 경제인 단체 회원 중에 커플이 탄생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아예 가족끼리 조촐히 치르면 모를까, 식을 올린다면 하객들의 신분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 아니라 크게 벌인 만큼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상 말이 가족끼리지 그녀에게는 부모님도, 가까운 친척도 안 계셨고, 나도 다른 형제 없이 홀로 자라 연로하신 어머니 한 분뿐이니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모양새가 될 게 뻔했다. 결국 사회에서 연결된 지인들을 모시다 보니 나와 그녀의 직장 관계자까지 초대하여 그만 식이 커져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대학 3학년 때 양친을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때도 어느 해 설에 부모님과 함께 지방의 조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던 때였다고 한다. 뒷좌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졸고 있었던 그녀는 사고 후 혼자 살아남았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녀에게는 같은 운명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학생 때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결혼 후에는 역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니. 또한 부모를 잃은 자신의 운명을 딸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굶주린 애정
아내와 그녀의 딸은 처음에는 나와 한집에 살았다. 아내를 위한 나의 배려였다. 또한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두 아이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서 내보냈다.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온 아내와 아직 미혼인 아내의 딸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모녀는 한 몸처럼 결합되어 도무지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툼의 원인이 아내의 딸 때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무질서한 생활 습관이나 늦은 귀가 시간에 대해 몇 번 주의를 줬더니 그게 서운했던지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엄마랑만 속닥거린 후 독립을 해버렸다. 그때 나는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 발로 나가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내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 본격적인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가는 아내의 버릇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딸의 아지트가 있었으니까. 채 정이 들지 않은 나와 사는 것보다 딸과 지내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겠지. 관계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부로 정이 들기도 전에 균열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오늘의 결별을 맞은 것이다.
나도 아내도 첫 결혼에서 배우자를 일찍 여의고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외롭고 팍팍한 길을 걸으며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상대의 빈 가슴을 채워주기보다 나의 허기가 먼저였다. 그만큼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남자로서 내가 좀 더 아량이 넓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또한 생각일 뿐,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을 터. 누구를 탓하랴. 탓할 것은 내 팔자요, 그녀의 팔자일 뿐. 여하튼 지금은 쉬고 싶을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내일(5일)부터 식당과 카페 등 다중이용시설 12종의 영업시간이 오후 11시까지로 한 시간 더 연장된다.
전해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2차장(행정안전부 장관)은 4일 중대본 모두발언을 통해 “고심 끝에 현재 밤 10시까지 허용되고 있는 식당, 카페 등 12종 다중이용시설의 영업시간을 내일(5일)부터 1시간 연장키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영업시간 연장은 오는 20일까지 적용된다. 사적모임 6명 제한은 현행대로 유지된다.
이에 따라 식당·카페, 노래(코인)연습장, 목욕장업, 실내체육시설, PC방, 멀티방·오락실, 파티룸, 카지노, 마사지업소·안마소, 유흥시설, 평생직업교육학원, 영화관·공연장은 내일부터 밤 11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전 차장은 “그간 추진된 손실보상 확대, 거리두기 일부 완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계속되어온 자영업·소상공인분들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위험군 관리를 중심으로 방역체계가 개편됨에 따라 방역패스 중단, 동거인 자가격리 의무 면제 등의 다양한 조치들이 시행 중인 만큼 거리두기도 이와 연계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 지자체, 일상회복 지원위원회 그리고 다양한 현장 의견을 바탕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개편안을 면밀히 검토해왔다”며 “앞으로도 위중증의 안정적 관리를 비롯한 의료 여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 등을 바탕으로 코로나19 대응체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중대본은 4일 0시 기준 신규 확진자가 26만6853명 발생해 누적 369만1488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사망자는 186명으로 전날에 이어 다시 역대 최다치를 기록했다. 위중증 환자도 31명 늘어나 797명이 집계됐다.
전 차장은 “1월 3째주부터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 모두 위험도 ‘높음’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며 “이번 주 중환자 병상 가동률은 약 50% 수준까지 증가했지만, 누적 치명률, 중증화율 등 핵심 방역지표들은 현재까지 의료대응 역량 내에서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늘부터 내일까지 이어지는 제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와 관련해서는 “격리자 등의 선거권 보장을 위해 내일 오후 5시부터 자가 격리자의 선거 목적 외출을 허용했다”면서 “오후 6시 이전에 투표소에 도착한 경우 일반 투표소와 분리된 전용 임시 기표소에서 투표에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하고 발열체크와 거리두기 등 투표소 내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해 달라”고 당부했다.
‘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 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오늘 대통령 주재로 코로나19 대책 회의를 갖고 오미크론 특성을 고려한 새로운 방역·재택치료 체계를 발표했다.
오미크론은 델타에 비해 중증·치명률이 낮고 무증상·경증 환자가 다수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모든 확진자에 대하여 동등하게 집중하는 현재의 방역·의료체계가 효율성이 떨어지고 고위험군의 관리가 미흡해질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때문에 오미크론 맞춤형 방역·의료체계로 개편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정부는 설명했다.
먼저 확진자조사와 격리방식이 바뀐다. 기초 역학조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자기기입식 조사서’를 도입하고, 조사항목도 단순화하여 역학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확진자가 직접 설문조사 URL 주소에 접속해 접촉자 등을 기입하는 역학조사 방법이며, 고령층이나 장애인 등 직접 기입이 어려운 사람은 보호자가 수행하면 된다. 그간 바깐 출입이 불가능했던 확진자 동거가족의 경우 방역수칙을 준수하면 의약품 처방·수령, 식료품 구입 등 필수적 목적 외출도 허용된다.
재택치료 키트와 생필품 지급방식도 변경된다. 재택치료 키트를 60세 이상 등 집중관리군 확진자에게 지급하는 등 꼭 필요한 환자 위주로 빠짐없이 키트가 보급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재택치료 키트는 해열제, 체온계, 산소포화도 측정기, 세척용 소독제 등 4종으로 간소화된다. 동거가족의 필수 외출 허용으로 생필품 등 직접 구매 가능해짐에 따라, 생필품 지급 여부는 각 지자체에서 현장 여건에 맞게 결정하게 된다.
재택치료 환자를 집중관리군(60세 이상 등)과 일반관리군 환자로 분류하여, 집중관리군 환자를 중심으로 건강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집중관리군은 재택치료관리의료기관에 배정하여 모니터링, 일반관리군은 보건소에서 현재증상, 기저질환등 건강상태를 확인 후 비대면 진료 등 재택치료 시의 의료상담법을 안내하게 된다. 먹는 치료제 역시 60세 이상 혹은 50세 이상 고위험·기저질환자에게 처방된다.
또한 정부는 코로나19 확진자나 공동격리자의 심근경색, 뇌출혈, 뇌경색 등 응급 상황이나 투석 등의 질환 대응을 위해, 현재 55개인 외래진료센터를 112개까지 확보하고 감염병전담병원 진료과목 추가 개설, 코로나용 분만·투석 병상 등 특수질환 인프라를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노년에 독립에 도전하는 이들이 있다. 20~30년 짊어졌던 책무, 스스로 옭아맨 관성, 혹은 삭막하고 답답한 도시 등 벗어나고자 하는 대상도 다양하다. ‘노년 독립자’들이 독립을 꿈꾸게 된 이유, 그 밖의 것들로부터 독립을 시도하게 된 계기와 이유를 들여다봤다.
노년과 독립, 두 단어의 조합이 낯설다면 MBN ‘나는 자연인이다’(이하 ‘자연인’) 프로그램을 떠올려보자. ‘야생 체험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를 모토로 2012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중장년층 시청자의 ‘최애’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2020년에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순위에서 다큐멘터리로는 지상파와 비지상파 통틀어 최초로 1위에 오를 만큼 연령에 관계없이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노년 독립, 시초에 자연인이 있다
자연인들이 살던 세상을 떠나온 이유는 다양하다. ‘자연인’ 프로그램의 공동 MC인 윤택은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연인의 유형을 몸이 아파서, 사업에 실패하거나, 주변 지인들에게 배신당해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자연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눴다.
사연은 제각기 다르지만 자연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일구며 살아간다. 친숙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삶의 이야기와 그들의 행복한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한다.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신동민 PD는 2019년 이달의 PD상 수상 소감으로 “시청자들의 로망을 간접적으로 실현해주는 부분이 있어 큰 호응을 보내주시는 것 같다”고 전한 바 있다.
프로그램 방영이 햇수로 10년이 되어가면서 ‘자연인’ 프로그램을 보고 자연인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화면 속 자연인들이 선배로서 자연인 꿈나무들을 양성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710만 명에 육박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를 앞두고 있는 상황. 다수의 중년이 은퇴 후 귀농·귀촌을 꿈꾸는 걸 고려한다면, 자연인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는 목소리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시니어 1인 가구 “간섭 싫어, 연락 안 해”
실제로 시니어 1인 가구는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인다. 통계청의 2021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고령자 1인 가구는 166만 가구로 전체 고령 가구의 35.1%에 달한다. 노인 세 명이 모이면 그중 한 명은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명확하다.
책 ‘2022 대한민국이 열광할 시니어 트렌드’에 시니어 1인 가구 증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실려 있다. 자녀와 살고 싶다고 대답한 노인 비율은 2008년 32.5%에서 2011년 27.6%, 2014년 19.1%, 2017년 15.2%, 2022년 12.8%로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추세다. 자녀와 동거하는 비율 역시 2017년 23.7%에서 2020년 20.1%로 내려앉았다. 흔히들 중장년층이 자녀와 함께 살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그렇지도 않다.
무엇보다 시니어들 스스로 독립적인 삶을 원한다. 혼자 살든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든 젊은 세대를 포용하며 살든, 가족에게 간섭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노인 단독 가구로 사는 이유에 대해 응답자의 62.0%가 ‘건강과 경제적 안정 등 자립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2017년 노인 실태조사 결과와 비교하면, 따로 사는 자녀들과의 연락 빈도는 줄어들었으나 친구나 이웃과의 연락 빈도가 더 높아지는 양상도 보였다. 노인들 삶의 모습이 자녀와 같이 살지도 않고 자주 연락하거나 왕래하지도 않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결혼 대신 따로 또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 도움받지 않고 자립적으로 사는 것. 이 시대 중장년층의 바람을 실제로 실천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9월, KBS1에서는 한 집에 살며 서로를 돌보고 생활하는 68세 노인 3명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결혼 유무부터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른 이들이 함께하는 공간의 이름은 ‘노루목 향기’다.
노루목 향기는 요양원, 복지시설이 아닌 마을형 노인 생활공동체를 꿈꾼다. 지난해에는 고용노동부와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주관하는 ‘2021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도 선정됐다. ‘사회적협동조합 사람과세상’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밝힌 사업 목표는 ‘노인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지역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성공 모델을 제시하는 것’. 심재식 노루목 향기 대표는 ‘2021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최종 선정 소감으로 “노인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노루목 향기의 노인 공동생활이 남긴 경험과 사례는 분명 사회적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 진행된 크라우드 펀딩(후원, 기부, 투자 등을 목적으로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인터넷으로 자금을 모으는 일)에서는 후원자들에게 무공해 국내산 행주, 스카프, 차받침, 농촌 민박 1박 등 다양한 후원 보상품을 제공했다.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고 노루목 향기를 응원하는 이들이 늘어 목표액보다 더 많은 후원금이 모였다. 이는 기대수명이 연장되면서 길어진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노년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선 이들도 있다.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협동조합’(이하 ‘비비’)의 조합원들이 그렇다. 올해로 20년 된 비비 역시 삶을 함께하는 비혼 여성 1인 가구 생활공동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전주시 반영구 임대아파트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2006년의 일이다.
이제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비혼 여성들만 20~30명 정도다. 같이 살지 않지만 회비를 내는 회원까지 합하면 비비는 50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 중에서도 50세가 넘었거나 50세를 앞둔 창립 멤버들의 최근 관심사는 여성 노인 공동체 주택이다. 이들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비혼이라는 정체성보다 노인이라는 정체성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울”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답한 바 있다. 이들은 노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살 수 있는 공동체 주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뉴 그라운드’, 프랑스 파리 ‘바바야가의 집’ 등 여성 노인들이 꾸린 사회적 주택을 방문해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는 식이다.
독립이 항상 선택지로 남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떠밀리듯 독립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런 연고 없이 혼자 거주하는 독거노인, 혹은 실직자의 경우가 그렇다.
경기도 부천시 범안종합사회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하는 권오예 어르신은 기초수급자다. 반찬을 제공해주는 복지관 직원들이 너무 바빠 보여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다. “받은 만큼의 백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복지관 팀장님한테 그랬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도울 테니 봉사 좀 시켜달라고.”
원치 않는 독립, 그럼에도 일어서다
권 어르신은 남편의 상습적인 폭행에 못 이겨 집을 도망쳐 나왔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 지인과 함께 살았지만, 그 역시 2017년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복지관 담당자에게 봉사를 자청하며 나선 그는 그 뒤로 쉬지 않고 봉사에 임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배달 봉사를 하면서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한마디 겨우 건넬 뿐이지만, 더 좋지 못한 처지의 노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게 행복하기만 하다.
중장년 남성의 원치 않은 독립으로는 실직이 흔하다. 50대에 실직으로 원치 않은 독립을 하게 된 가장들은 특히나 ‘사추기’(思秋期)를 겪기 쉽다. 사추기란 50대 전후 중년들이 겪는 변화를 사춘기에 빗댄 표현이다. 일자리를 잃어버린 중년들은 ‘나는 뭘 위해 살아왔나’ 하는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된다. 또 일자리를 잃으면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경제적 위기, 사회적 지위의 박탈 등으로 은퇴남편증후군을 겪는 이들도 종종 있다.
책 ‘남자 독립 선언서’를 낸 이치원 씨 역시 50대 초반 실직 후 얼마간 혼란을 겪어야 했다. 교사, 광고회사, 제조회사, 금융회사 등 30년 동안 다양한 직업과 직장을 거쳤지만 50대 초반의 실직은 그간의 실직과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규직으로의 재취업이 어렵고, 실직이 은퇴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크고 치명적인 차이점이었다.
게다가 ‘실직 후 대처 매뉴얼’이 전혀 없었다. 사회는 사람 채용하는 데만 관심이 있고, 회사를 나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실업수당은 어디서 신청하는지, 의료보험 지역가입자는 얼마를 보험료로 내야 하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한참을 헤맨 끝에 의료보험 지역가입 신청을 끝낸 그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실직은 인생이란 책에서 독립의 페이지로 넘길 수 있는 터닝 포인트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는 실직을 독립의 계기로 삼기 위해 일자리를 찾았다.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직장을 갖는 게 중년 남성의 정체성을 찾는 데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후 자금이 충분한 사람에게도 일을 할 것을 권한다. 그 다음이 건강과 취미다. 원치 않은 독립, 실직 후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를 찾는 이에게 ‘평생 운동’과 ‘평생 취미’를 한 개씩은 구비해두라고 조언한다. 아무리 독립이 좋다고 해도 건강 없는 장수, 즐거움 없는 삶은 형벌이나 다름없기에.
갑작스러운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서 상속주택이 발생했다. 이미 보유한 주택이 있는 경우 다주택자로 인해서 세금폭탄을 맞을까 봐 두렵다. 이렇게 상속주택이 생겼을 때 알아두면 좋은 각종 세율 및 제도를 소개한다.
취득세
상속주택은 취득세율이 대체로 낮다. 일반적으로 주택을 매수해 취득하는 경우 1주택자라면 1.1~3.5%, 다주택자는 8.4~13.4%의 취득세율이 적용된다. 상속주택의 취득세율은 3.16%, 상속인이 무주택자라면 0.96%에 불과하다.
종부세
상속인이 여러 명이라면 공동 소유 지분을 조정해 종합부동산세 부담을 덜 수 있다. 세법에서는 종합부동산세 부과 시 상속주택의 소유 지분이 20% 이하면서 소유 지분의 기준시가가 3억 원 이하면 주택 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동거봉양
1주택을 보유하고 1세대를 구성하는 자가 1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60세 이상의 직계존속을 동거봉양하기 위해 세대를 합침으로써 1세대 2주택을 보유하면 합친 날부터 10년 이내에 먼저 양도하는 주택을 1세대 1주택으로 보고 비과세를 적용한다.
중장년이 되면 부모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는 순간이 생긴다. 이로 인한 상실도 크지만, 상속과 관련해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 혼란과 더불어 경제적 부담이 증가한다. 특히 상속주택은 특례 규정 덕분에 비과세가 가능하지만,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는 않기 때문에 꼼꼼히 살펴야 한다. 상속주택이 생겼을 때 알아두면 좋은 세금 상식을 소개한다.
상속주택은 비과세가 가능하다. 상속주택은 돌아가신 분으로부터 상속받은 주택이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받은 것이므로 양도세와 관련해 특례를 두고 있다. 상속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본인 명의의 주택이 있는 상태에서 2주택이 되더라도, 때에 따라서 세금이 달라진다. 적용되는 조건이 복잡하기에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일반주택 먼저…상속주택은 6개월 안에
일반주택 1채를 보유한 상태에서 별도 세대원인 상속인으로부터 주택을 물려받았다면 ‘시점’과 ‘순서’가 중요하다. 일반주택을 먼저 팔아야 양도세 비과세가 가능하다. 이 일반주택은 상속 개시일 당시에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즉 상속 개시일 이후 산 주택은 비과세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소득세법 시행령을 개정한 2013년 2월 15일 이전에 취득했다면, 상속 개시 이후 취득했더라도 비과세 특례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상속주택을 먼저 팔면 어떻게 될까? 동일한 상황에서 상속주택을 먼저 팔면 양도일 시점에 2주택자로 보아 양도세가 과세된다. 다만 상속받은 날로부터 5년 이내에 팔면 다주택자로 중과되지 않는다. 상속주택을 상속 개시일 6개월 이내 처분하면 양도차익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배환균 세무사는 “상속주택을 6개월 이내 처분하면 양도가액과 취득가액이 같고, 이로 인해 양도차익이 생기지 않아 양도세를 낼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우선순위와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비과세
상속주택이 여러 채거나 상속받은 인원이 여러 명일 경우엔 달라진다. 사망한 부모로부터 2채 이상의 주택을 상속받은 경우에는 1채만 인정되며 나머지는 일반주택으로 분류된다. 복수의 주택 중 상속주택으로 결정되는 우선순위는 ▲피상속인이 가장 오래 보유한 주택 ▲피상속인의 거주가 가장 긴 주택 ▲사망일 시점에 거주한 주택 ▲기준시가가 가장 큰 주택 순이다. 따라서 자녀가 여럿이라면 해당 상속주택을 물려받은 상속인만 일반주택 비과세를 적용받을 수 있다.
반대로 상속주택을 여러 형제가 물려받았을 때는 기준이 또 다르다. 통상적으로 공동 지분으로 소유한 주택은 각자 한 채씩 소유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상속주택은 다르다. 상속 지분이 가장 큰 상속인을 주된 상속인으로 판단한다. 소수 지분의 상속자는 주택 수를 산정할 때 공동 상속주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만약 상속 지분이 동일하다면 상속 개시 당시 상속주택에 거주한 자, 최연장자 순으로 상속주택을 소유한 것으로 본다.
주된 상속인이 사망일 당시 일반주택을 보유하고 있으면 상속주택 특례를 적용받는다. 세법상 상속주택의 소수 지분 상속인은 상속 개시 당시 보유하던 상속주택 외에 본인 일반주택을 매도할 때, 상속주택은 주택 수에서 제외되며 비과세를 적용한다. 다만 주된 상속인은 5년 안에 상속주택을 팔아야 중과세가 배제되지만, 소수 지분 상속인은 기간의 제한이 없다.
상속받은 재건축·재개발 조합원 입주권은 비과세 특례가 가능할까? 첫 번째는 입주권이 주택이 된 상태로 양도하면 된다. 다만 1세대 1주택 비과세 요건(보유 2년, 조정대상지역은 거주 2년)을 갖춰야 한다. 두 번째는 관리처분인가일 이전에 1세대 1주택 비과세 요건을 충족한 주택이 입주권으로 변했을때, 상속을 받고 양도하면 비과세될 수 있다. 이종훈 세무사는 “두 번째 유형의 경우엔 동일한 세대원이어야 하며, 다른 주택을 보유하지 않아야 비과세를 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상속주택 세금 상식
취득세 ▶ 상속주택은 취득세율이 대체로 낮다. 일반적으로 주택을 매수해 취득하는 경우 1주택자라면 1.1~3.5%, 다주택자는 8.4~13.4%의 취득세율이 적용된다. 무상취득(증여)의 경우 3.8%(다주택자는 13.4%)를 취득세로 내야 한다. 하지만 상속주택의 취득세율은 3.16%, 상속인이 무주택자라면 0.96%에 불과하다.
종부세 ▶ 상속인이 여러 명이라면 공동 소유 지분을 조정해 종합부동산세 부담을 덜 수 있다. 세법에서는 종합부동산세 부과 시 상속주택의 소유 지분이 20% 이하면서 소유 지분의 기준시가가 3억 원 이하면 주택 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동거봉양 ▶ 1주택을 보유하고 1세대를 구성하는 자가 1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60세 이상의 직계존속을 동거봉양하기 위해 세대를 합침으로써 1세대 2주택을 보유하면 합친 날부터 10년 이내에 먼저 양도하는 주택을 1세대 1주택으로 보아 비과세를 적용한다.
취업난과 고용 불안, 급등하는 집값, 육아 문제 등 청년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중장년층의 근심과 고통도 함께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11일 발표된 라이나전성기재단 ‘전성기 웰에이징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거주 만 55세~74세 남녀 1068명 중 현재 자녀를 돌보고 있는 비율이 14.5%에 달해 손주나 노부모를 돌보는 비율보다 많았다. 보고서는 늦어지는 결혼과 취업으로 인해 자립하지 않고 부모와 동거하고 있는 자녀가 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캥거루족’은 학교를 졸업해 자립할 나이가 됐는데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 사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용어다. 과거 캥거루족은 학업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대가 거의 다수였지만 최근에는 30대와 40대 캥거루족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일 기준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부모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캥거루족은 314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의 비율이 20.7%에 달한다. 캥거루족 5명 중 1명이 3040인 셈이다. 30대 미혼 인구 비중은 10명 중 4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문가들은 캥거루족의 증가 원인으로 취업난과 늘어나는 주거비를 꼽는다. 김진영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벌주의와 고학력 일자리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함에도 그에 걸맞는 기업의 일자리는 여의치 않아 취업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다”라며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하니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발간한 ‘KOSTAT 통계플러스 2021년 봄호’에 실린 ‘저(低) 혼인 시대, 미혼남녀 해석하기’에 따르면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 인구의 주거형태를 보면, 자가가 70.7%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은 월세(14.8%), 전세(12.1%) 순이었다. 캥거루족은 대체로 부모가 소유한 집에서 살기에 별도로 주거비를 낼 필요가 없는 반면 미혼 청년 1인 가구는 59.3%가 월세이고, 자가는 11.6%에 불과했다. 청년 1인 가구는 대체로 남의 집을 월세로 빌려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야 하기에 수입의 상당액을 주거비로 쓰는 경우가 많다.
청년 1인 가구는 주거비 부담은 크지만, 주거 형태는 더욱 열악했다. 부모와 같이 사는 미혼의 주거 형태는 아파트(56.8%)가 많았지만, 미혼 1인 가구는 51.2%가 단독주택에 살았다. 대체로 캥거루족은 부모의 아파트에서 살고, 나 홀로 가구는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떨어진 빌라 등에서 셋방살이를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박시내 통계개발원 서기관은 “청년층 고용 불황이 지속되고 주거비용이 상승하는 가운데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세대에게서 경제적·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캥거루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캥거루족이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면 그 부모도 경제적 자립능력이 취약해진다. 미혼 자녀를 부양하는 기간이 늘어나면 부모가 은퇴 시기까지 노후준비를 하지 못하고 경제력과 노동력을 쏟아붓는 현실이다. 지난해 60세 이상 고령자 중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한 사람의 비중은 57.7%로 직전 조사인 2015년(49.7%)과 비교해 8%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김 교수는 “캥거루족은 부모세대의 노후준비를 방해하여 경제적 부담을 주고 돈을 벌어야 할 기간을 늘릴 뿐 아니라, 가사업무 부담까지 증가시킨다”라며 “성인 자녀도 식사 준비나 청소 등 집안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데 부모님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청년 문제는 한 가구 내에서 윗세대로까지 전이되는 문제를 낳고 있다. 하지만 청년 주택, 청년 전세대출 등 청년을 위한 정책은 쏟아지는 반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부모세대의 설움은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다. 가난한 청년세대를 봉양해야 하는 부모세대의 소득감소·빈곤 등 이들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 교수 역시 “기초연금 등 부모세대에 대한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세대에 대한 지원에 비해 충분하지 않다”라며 “청년세대가 빨리 자립할 수 있는 지원과 함께 저소득층 부모세대에 대한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요즘 방송가가 노리는 주요 시청층은 시니어, 즉 중장년층이다. 젊은 세대는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은 OTT 프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TV 앞에 남은 세대는 시니어가 된 것. 이에 방송가에서는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즘 방송의 트렌드를 보면, 트렌디하고 재밌기보다는 시니어들이 보기 편한 프로그램들이 많은 편이다.
그 프로들을 보면 공통점이 많다. 먼저 장치적인 부분을 보자면, 자막은 보통 시니어들이 알아보기 편하게 크고 강한 편이다. 소리를 잘 못 들었을 경우의 시청자를 위해 이해를 돕는 자막도 찾아보기 쉽다. 사회자도 톤이 높고 큰 목소리로 알아듣기 쉽게 얘기한다. 다인원의 패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의 큰 리액션은 시청자도 함께 반응하게 하고,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제작진의 노력에 시니어들은 응답했다. 물론 앞서 말한 장치적인 부분은 부가적인 것이고, 콘텐츠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어떤 콘텐츠의 프로그램이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공통점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오디션 프로의 식지않는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에 젊은 세대가 열광한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다. TV조선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이후 판도가 바뀌었다. '미스-미스트롯' 이전에 트로트는 기성 세대의 전유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등장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젊은 세대가 간드러지게 트로트를 부르자, 시니어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푹 빠져버렸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이 주는 긴장감과 함께, 덧붙여지는 참가자들의 사연이 시니어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 마음에 드는 참가자를 아들, 혹은 딸을 보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고, 팬덤까지 형성하게 된다.
최근 '미스-미스트롯' 제작진은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 '국민가수'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트로트가수가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K-POP스타, 국민가수를 뽑는다. 1회 16.1%, 2회 15.4%(닐슨코리아 유료방송가구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미스-미스터트롯' 시청자들이 '국민가수'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에서 'K-POP'으로 주제가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구성이 이전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앞서 말한 자막, 진행자, 패널 등 장치적인 부분 역시 비슷하다. 아무 정보 없이 '국민가수'를 본 시청자는 '새로운 트로트 오디션인가?'라고 착각하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미스-미스터트롯'과 달리 이번에는 다양한, 시니어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는 노래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의 오디션을 거치면서 시니어들도 실력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길러졌기 때문에 무리가 없다. 중장년층은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오디션이 특히 그러한데, 한 번 빠지면 끝까지 보고 진심으로 출연자를 응원하게 되는 것. 때문에 '국민가수'가 더욱 대박나려면, 송가인, 임영웅과 같이 시니어들을 확 사로잡을 출연자가 필요해 보인다.
# 전원생활도 예능으로
나이가 들수록 전원 생활에 대한 욕망이 강해진다. 과거에는 드라마 '전원일기'가 있었다면, 현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니어들은 대리 만족하고 있다. 전원 생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힐링하게 되는 것. 특히 이러한 프로들은 잠깐만, 어쩌다 봐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이다. 2012년부터 방송된 스테디 인기 프로그램으로 중년 남성들에게 특히 인기 있다. 현재도 평균 시청률 4%대가 나오고 있다. 여성 중년들은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마음을 뺏겼다. 현재 세 번째 시즌이 방영 중이고, 수요일 저녁 방송인데도 5~6%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 중인 혼자 사는 중년 여자 스타들의 동거 생활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전원생활과 함께 같이 밥 해 먹고 수다 떠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만, 오고 가는 아줌마 입담이 웃음을 자아낸다. 리얼하고 현실적이어서 공감하면서 보기 좋다.
# 스포츠 예능의 감동
스포츠 예능도 시니어들이 사랑하는 TV 프로그램이다. 시니어들이 올림픽 경기에 열중해서 보는 것과 유사한 심리다. 스포츠 예능의 인기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잘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시니어들은 출연자들을 자신의 자녀를 보는 듯이 보고 응원하게 되는 것. 또한 '왕년에는 나도 저랬는데'라는 생각으로 이입해서 예능을 보기도 한다.
시니어들에게 인기를 끈 대표적인 스포츠 예능으로 JTBC '뭉쳐야 찬다'를 꼽을 수 있다. 현재 시즌2가 방영 중이며, 6~8%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화려한 스타 캐스팅은 물론, 웃음과 감동이 이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다. 지난 6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SBS '골 때리는 그녀들' 또한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업이 축구선수인 것처럼 연습하고 임하는 출연진을 보면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시니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재밌거나 공감이 되어서 몰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웃음보다는 감동과 서사가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보여진다. 시니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다음 프로그램은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손효정 기자 shjlife@etoday.co.kr
영화표를 받아든 김 씨는 빠른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표를 사려는 오십대 여자 셋이 보였다. 카드를 꺼내고 지갑을 뒤적이며 네가 사네, 내가 내네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웬 젊은이들이’ 김 씨는 여자들을 보자 이 공간의 냄새가 달라지고 자신의 연령대가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고 혹여 영감들 가슴에 바람이 들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요건 몰랐지 하는 기분으로 중년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당 삼천 원이고, 쿠폰에 도장을 다 받으면 나중에 공짜로 한 편 더 볼 수 있다우.”
김 씨는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쿠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호호, 이제 뭐…… 오 년 전이면 모를까.”
김 씨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모르며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르신’이란 호칭 대신에 ‘할머니’라고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왜 호칭에 민감한지. ‘할머니, 할아버지’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인데 사람의 심리가 요상하여 ‘나이가 들어’ 라는 앞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는 ‘늙은 사람’이란 뒤의 말에 민감해진다. 앞에 붙여진 ‘나이가 들어’라는 다섯 글자에는 사람들 제각각의 얼마나 많은 의미와 사연이 담겨 있던가? 김 씨는 아등바등하지 않고 탐욕스럽거나 심술궂지 않게 나이 들기를 원하면서도 할머니란 호칭이 꺼려지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뜨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요의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간 김에 거울 한 번 들여다보고 하나뿐인 꽃분홍 립스틱으로 입술도 덧칠하고 나왔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좀 전에 만난 여자들이 상영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공책만 한 인쇄물은 멀리서 보기엔 힘들었다.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된 영화관이다 보니 상영작 포스터도 없고 상영관은 하나뿐이고 테이블이 세 개 놓인 대기실 한쪽엔 천 원짜리 믹스 커피를 파는 간이매점이 고작이었다. 그 중 한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용지에 코가 닿도록 얼굴을 내밀었고 김 씨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노안 수술을 한 김 씨 눈엔 웬만한 글씨는 잘 보이고 고가의 보청기 덕분에 청력도 좋지만, 좋아서 오히려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것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고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는 것이라지만,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는 이유로 젊은이들로부터 괄시받고 싶진 않았다. 오메가 쓰리와 은행잎 제제를 매일 챙겨 먹고 영어 공부도 30분씩 했다. 휴대폰을 켜면 바로 영어 단어 앱이 떴고, 건강 보조 식품 챙겨 먹는 시간도 휴대폰의 알람이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한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땐 신인류의 일원이 된 것처럼 기뻤다. 설레는 김 씨를 위해 처음에는 휴대폰 사용법을 부드러운 말씨로 설명해 주던 아들이 반복적으로 물었더니 나중엔 짜증을 냈다. 아들의 구박을 감수한 덕분에 이젠 인터넷을 통한 물건 구입과 영화 예매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 한때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동영상이며 좋은 글귀를 친구들한테 퍼 나르기도 했으나 글대로 실천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강요하듯 보내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그만두었다. 망측한 사진을 받고 놀라서 휴대폰을 던져버린 적은 있지만, 적어도 김 씨가 자식한테 잘못 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노인들 사이에 떠다니는 가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고 흥분하기도 했다. 태극기 부대에 참석한 경험도 있는데 정치적 신념이 확실해서라기보다는 군중 심리와 함께 이 나이에도 정치에 관심이 있는 깨인 노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상영할 건 이거예요.”
김 씨가 손가락으로 용지를 짚으며 말하기가 무섭게 일행 중 한 명이 톡 튀어들었다.
“아닌데…… 요거네요.”
김 씨 얼굴이 붉어졌다.
“나 좀 봐, 참.”
계면쩍은 김 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람들이 들고나느라 문 주변이 번잡했다. 상영관 입구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김 씨는 오지랖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간 김 씨는 실내 전체를 훑어보다가 특정 위치에 잠시 시선을 던지곤 미소를 지었다. 등받이를 손으로 잡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G7 자리를 향해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뉴스에서 G7이란 단어를 가끔 들어서 익숙한 탓도 있고 근사해 보이기도 해서 그 자리를 고집하는 김 씨를 위해 카운터에서는 표를 따로 빼서 보관해두곤 했다.
전에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른 영감이 있었다. 김 씨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들도 내가 넘어지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민망해하겠지.’
G7 바로 앞자리엔 박 씨가 앉아 있었다. 김 씨는 박 씨를 실버 영화 카페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소위 M.C커플이다. 산행을 같이 다니는 연인들도 M.C커플이라고 부르고 콜라텍에서 만난 인연들은 C.C커플로, 복지관에서 만난 연인들은 B.C커플로 불린다. 박 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영화 얘기만 나오면 술술 말을 잘 이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웬만한 영화 제목과 주인공 이름들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김 씨는 영화 얘기를 들을수록 박 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젊어서부터 영화는 혼자 본다는 말 때문에 그가 더욱 근사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김 씨는 알은 체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부러 큰 소리로 음, 음 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박 씨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김 씨는 답례를 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박 씨가 야속했다. ‘어서 오시게, 라고 한마디 하면 입술이 부르트나.’ 김 씨는 입을 샐쭉거렸다.
아직 영화 상영 전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김 씨가 고개를 돌렸다. 통로 건너편에서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 있는 여자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노인은 굳이 빈자리도 많은데 여기에 앉아야겠냐며 버텼다. ‘저러니까 젊은이들이 질색하지.’ 김 씨는 중얼댔고 주변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뒷자리로 갔고, 카운터에 말해서 쫓아내세요, 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소란을 잠재우듯 실내가 어두워지자마자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제목과 함께 1936년 작품이란 숫자가 떴다.
“어머, 이상하다. 2008년에 만든 줄 알았는데.”
“게다가 흑백이야. 웬 구닥다리?”
“86년 전 영화네. 우리 아버지가 저 때 태어나셨거든.”
“말도 안 돼. 같은 제목의 영화가 또 있었나? 그냥 갈까? 냄새도 퀴퀴하고……”
김 씨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자 여자들의 수다가 잦아들었다. 좀 전에 보았던 일행들이 막 들어와 앉은 참이다. 오래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했을 김 씨였다. ‘니들도 실수할 때가 있지.’ 김 씨는 미소를 지었다.
화면이 바뀌었고, 여자들은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래. 그냥 보자.”
“그래, 감독도 유명한 사람이네.”
“쉬, 쉬.”
영화의 첫 장면은 미국의 어느 대저택의 거실이었다. 보석으로 치장한 젊어 보이는 여자가 등장했다. 김 씨 눈에는 여주인공의 나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얼굴 구분도 힘들지만, 나이 추측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나이는 김 씨가 추측한 숫자에 10 정도를 더해야 했다. 여주인공은 파티장도 아닌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김 씨 평생에 입어본 적은 고사하고 사진에서만 보았던 옷이다. 부러우면서도 이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뒤이어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이어졌다. 남자는 거실로 들어와서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종일 남편을 기다리느라 수고했다고.
김 씨는 정해진 팔자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씨 남편은 며칠씩 집을 비우다 돌아와도 첫마디가 개밥 줬어? 였다. 김 씨는 아내가 아니라 밥솥이었고 세탁기였고 청소기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 김 씨는 긴장이 되었다. 자막이 서 너 줄일 땐 마지막 문장의 꼬리를 놓치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읽는 중에 화면이 넘어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왜 그리 이름이 길고 호칭 방법도 가지가지인지.
여주인공은 남자의 뺨에 입술을 비벼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김 씨의 눈에 남자는 아버지뻘로 보였지만 여자의 행동이나 자막으로 미루어보아서는 남편 같았다.
‘아니, 저런 도둑놈이 있나, 곱빼기 띠동갑도 넘겠네.’ 예나 지금이나 지팡이 토막을 가운데 달고 다니는 인간들이 젊은이를 밝히는 건 변함없지만, 김 씨가 보기에도 못생기고 잘생긴 걸 떠나서 싱싱하다는 점만으로도 모두 예뻐 보였다. 심지어 다섯 살 아래인 여자도 김 씨 눈엔 젊어 보였다. 흥분했던 김 씨는 이내 인정 모드로 태도를 바꾸었다.
변덕을 부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면서 김 씨는 혀를 찼다. ‘젊고 얼굴 반반하면 저렇다니까.’ 김 씨는 며느리를 떠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인데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 해도 콕 박힌 미운털이 빠지지 않는 애였다. 좀 산다는 집에서 자란 며느리는 액세서리 수집이 취미였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시댁에 올 때마다 몸에 치장하고 있는 액세서리가 바뀌었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볼 정도로 색상이며 디자인이 확확 달라졌다. 며느리를 떠보느라 나도 네가 한 것 좀 차 보자, 고 했더니 어머, 사람들이 웃어요, 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며느리가 미워 보이는 이유가 말을 얄밉게 하는 탓도 있지만 자신의 삐딱한 시선도 섞여 있다는 걸 김 씨는 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자기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사는 행위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주인공과 비교해 보니 며느리가 그다지 변덕 부리는 애도 아니고, 딱히 지 남편이건 시댁에 못 하는 편도 아니었다. 김 씨는 며느리의 미운털이 다름 아닌 질투라는 생각에 새삼 부끄러웠다. 그것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며느리는 여자의 촉으로 벌써 눈치 챘을 게다. ‘앞으로 며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크린의 영상이 유럽을 항해하는 크루즈 내부로 바뀌었다. 은퇴한 남편이 아내와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한국 여자들은 보리죽 한 숟갈도 자식 입에 넣어주느라 배곯고 쪼그라져 있을 때 서양 여자들은 양장을 빼입고 삐딱 구두 신고 파티에 가거나 세계 일주를 했다니.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날에도 김 씨는 고작 빌려 입은 단색의 한복에 면사포만 쓰고 혼례를 치렀다. 김 씨는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서양 여자들에 비해 고루하게 살았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면서 장기 여행을 하는 사이에 여주인공은 서 너 명의 남자들과 사랑 행각에 빠졌다. 여자는 쉽게 남자를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길 반복했다. ‘지 멋대로군, 착한 남편이 딱하네, 결혼 전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지.’ 흥분지수가 높아진 김 씨는 자세를 바꾸다가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하긴, 선봐서 한 달 만에 식을 올린 나는 어떻고.’ 그러고 보니 그런 도박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어이없는 일들이 다반사였는데 죄다 그러려니로 통했다. 어쩜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몇 십 년 후엔 또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김 씨가 젊어서 여주인공처럼 했다면 돌팔매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김 씨가 영화에 집중할 만하면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뒷좌석의 한 여자가 또 말을 꺼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가자.”
“나갈까?”
“그래, 질 떨어진다.”
“아냐, 노벨상 받은 작품이라잖아, 뭔가 있을 거야.”
한 여자가 일행을 달랬다. 김 씨 뒤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카톡 소리, 사부작사부작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 따위가 영화 중반이 넘어가도록 줄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벨 소리도 울렸다. 늴리리아 늴리리…… 맨 앞줄에 있던,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쥔 휴대폰을 끊거나 벨소리를 줄일 생각은 안 하고 느그적 느그적 걸어 나갔다. 남자를 따라서 사람들 고개도 돌아갔다. “걷지 말고 좀 뛰요.” 영화 시작 전에 큰 소리로 면박을 주었던 동일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속이 후련해진 김 씨는 중얼거렸다. ‘어여 가야 해, 어여.’
김 씨는 다시 영화에 몰두하면서 좀 전과는 다른 생각도 했다. ‘하기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뭘 따져, 몸뚱이 아꼈다 뭐 하게, 못 노는 것들이 바보지.’ 여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어느새 주인공 편이 되어있었다. 뭐랄까, 김 씨는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양가적 감정이 늘어났다. 어떤 상황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 애매할 때가 있다. 편 가르는 행위가 불편해지면서 교집합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기억력은 물론 얼굴도, 몸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서운한 감정과 소외감도 자주 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긋해졌다고 할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하겠지만, 신체 중에서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부위가 신성한 부분이자 최고의 성감대인 인간 자체가 모순덩어리 아닌가.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외도한 상대는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상대를 이혼녀이고 연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둘을 강제로 갈라놓는 장면이었다. ‘딱, 나구먼.’ 김 씨는 아들이 자신보다 연상인 여자를 데려왔던 적을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것도 없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져도 연애 상대는 어릴수록 좋다는 영감들이 김 씨 눈에는 철없어 보였다. 박 씨 속을 떠보기 위해 왜 두 살 연상인 자신을 만나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거기서 거기라고, 나이만 적다고 젊은 거고, 나이가 많다고 늙은 거냐고 반문하던 박 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이들이 상대를 고를 때 이혼, 사별, 동거, 비혼 따위를 따지는 일이 별 의미가 없어보였고, 잘 생긴 사람보다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이는 박 씨가 끌린 이유이기도 한데 김 씨 눈엔 박 씨의 딱딱한 말투마저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역사물을 주로 보던 김 씨에게 로맨스 영화는 피로를 씻어주는 꿀물 같았다. 일부러 로맨스물을 외면해오던 김 씨의 마음을 열게 한 계기는 박 씨다.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 내용을 들려줄 때 소도둑처럼 생긴 박 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아는 듯 보였다.
김 씨는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새로 만난 애인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탄 보트가 애인이 사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다가올 장면을 앞질러 상상하면서 잘했다, 잘했어, 란 말을 연발했다. 한 사람과 애정도 없이 의무적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남편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명령하고 김 씨는 복종하고 따르는 식이었다. 김 씨는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재떨이를 남편의 턱밑에 갖다 대고, 남편이 밥을 먹는 내내 생선 가시만 발라야 했다. 남편은 다리에 깁스를 한 김 씨에게 2충에 올라가서 부채를 가져오라고 호통 친 적도 있었다.
혼자면 외롭기나 하지, 둘이면 외로우면서도 괴롭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채워가고 싶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서 안겼다. 남편과 사는 동안 포옹은 언감생심이었다. 지 기분 내키면 아무 때나 김 씨를 자빠뜨렸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손끝조차 스치지 않고도 20년을 더 살아냈다. 김 씨는 남편이 매일 만지는 문고리나 수저만도 못했다.
김 씨는 남자의 품이 얼마나 따뜻할지에 대해 상상했다. 어릴 적 포근한 엄마의 품이나 듬직한 아들의 품과는 다른 느낌일 게다. 박 씨의 품에 안겨 지난날을 위로받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기 위해 이성을 만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같이 사그라들기 위해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반찬이 김치 하나일망정 마주 앉아 식사하고, 약 먹을 때 물이라도 떠다 주고, 피곤한 발을 얹고 잠들 수 있는 사이를 원했다. 노년의 로맨스를 망측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죽어야만 성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박 씨가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상상을 했다. 저…… 순자 씨, 김 씨는 맘 가는 대로 달려가는 자신의 생각이 주책이라고 느꼈다. 거의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는 박 씨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가 고개를 홱 돌릴 것만 같았다. 머리숱이 인제의 자작나무숲처럼 듬성하지만 박 씨의 뒤태는 늘 정갈했다. ‘저 영감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나.’ 김 씨는 그뿐 아니라 영화관 내의 모든 노인들 감상평이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뒷좌석의 여자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내용이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김 씨는 영화를 보면서 주변 사람을 떠올리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연애 감정의 불씨를 키우는 계기도 되었건만 중년 여자들은 빤하다고 했다. 김 씨의 귀에는 이 영화를 끝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들 수준이 빤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게,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얼른 가자.”
“예의 지키다가는 어느 세월에 나갈지 몰라.”
중년 여성 셋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김 씨가 영화의 여운을 즐길 겨를도 없이 불이 켜졌고 사람들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면은 일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거의 가려졌다. ‘모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와서 서둘러 가는 게지.’ 김 씨는 중얼거리며 박 씨가 일어날 때까지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다. 박 씨가 일어나더니 김 씨를 보며 말했다.
“안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러죠.”
김 씨는 순순히 박 씨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나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둘은 데면데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김 씨는 박 씨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요?”
박 씨가 타박하듯 답했다.
“뭘, 어색하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정류장이 있었지만 김 씨는 길이 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멀게 느껴졌다. 박 씨를 만날 때만 신는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김 씨가 가지고 있는 두 켤레의 구두 중 동절기용이었다. 평소엔 운동화를 주로 신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박 씨는 김 씨를 재촉하지 않고 보조를 맞춰 걸었다. 김 씨가 영화 본 소감을 물었더니 박 씨는 그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겠다고,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답했다. 주인공에 관한 얘기 끝에 ‘나이 듦’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김 씨가 박 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두려워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않겠소. 늙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추하게 늙는 걸 경계해야지.”
김 씨는 늘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박 씨가 야속하면서도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럼 아름답게 늙는 게 뭔데요?”
“내가 정답도 아니고 뭘 묻소?”
“그래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뭐 별거 있소? 그냥 다 덜어내는 거지. 감정도 덜어내고 그런 거 아니겠소?”
“덜어낸다는 말은 줄인다는 말과 어감이 다르네요. 뭔가 내가 덜 쓴 만큼 남이 쓸 기회를 주는 느낌이 드네요. 여하튼 자신이 가진 것이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자는 거지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는 얘기죠, 태봉씨?”
김 씨가 슬쩍 박 씨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도 덜어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 있지.”
김 씨가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거요?”
박 씨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내와 아들이 죽기 전에 사랑한단 표현을 많이 해주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걸까.’ 겉으로는 담담해보이지만, 평온한 얼굴 아래 숨겨져 있을 부단한 노고에 대해 김 씨는 생각했다. 젊어서 한 성질 했다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버스는 금방 왔다. 박 씨가 손을 내밀어 김 씨 먼저 타라는 신호를 했다. 차에 오르는 김 씨는 뒤따라오는 박 씨에게 힘들어하는 동작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부지런히 발을 놀려서 계단을 다 올라왔으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에구, 소리로 허사가 되어버렸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나 질투의 감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여전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내부의 앞쪽 노약자 좌석은 젊은이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지만 김 씨는 못 들은 척하고 뒤로 갔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고 속력이 나면서 덜컹대기 시작했다. 운전까지 과격한 탓에 엉덩이가 공중으로 떴다가 내려앉았다. 김 씨는 워메, 하면서 박 씨의 손을 잡았다. 꼬리뼈에 충격이 느껴졌다. 박 씨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거 운전 좀 살살 하소.”
덕분에 둘은 착 달라붙게 되었고 김 씨가 손을 놓으려 하자 박 씨가 더 세게 쥐었다. 박 씨의 손이 야들야들하고 따뜻했다. 빼려던 손을 박 씨의 손에 맡긴 채 김 씨는 얼굴을 창으로 돌렸다.
박 씨가 물었다.
“뭐 볼 거 있소?”
“나뭇잎들이 제법 물들었네요.”
김 씨는 생각했다. 나뭇잎 색이 변하는 걸 앞으로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를.
“같이 좀 봅시다.”
박 씨가 고개를 돌리면서 김 씨의 머리카락에 뺨이 닿도록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김 씨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박 씨의 행동에 의도가 있기를 바랐다.
네댓 정류장을 지나서 내릴 때가 된 두 사람은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박 씨가 왼쪽 기계에, 김 씨는 오른쪽 기계에 카드를 태그 한 후 출입구를 막은 채 서 있었다. 여학생이 박 씨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 사이로 손목을 내밀어 태그를 시도했다. 연이어서 실패한 학생을 보고 김 씨는 카드를 가운데로 대요, 라고 말했지만 학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또 손목을 갖다 댔다. 기계음이 들렸고 그제야 김 씨는 학생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물건이 요즘 광고에 나오는 뭐시기란 걸 알았다. ‘또 오지랖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김 씨는 자신이 하루살이만도 못한 3초의 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영화관으로 오던 버스 안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 씨의 앞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시선이 갔다. 큼직한 흰색 라벨이 옷의 바깥쪽에 붙어있었다. 김 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옷을 뒤집어 입었네요, 라고 속삭이듯 말했고 청년은 아, 이거요, 요즘 유행이에요, 라며 목 뒤의 라벨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 앞을 지나쳐서 쏜살같이 내리는 여학생의 귀에 무선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두 사람도 손잡이를 잡고 발 앞을 살피면서 내렸다. 여학생이 내리는 속도의 다섯 배는 족히 걸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왠지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니들도 답답하지. 당사자는 오죽하겠냐.’ 김 씨는 버스 기사가 야속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한 줄기의 센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몇 점 떨어졌다. 김 씨가 옷깃을 여미자 박 씨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목에 걸어주려고 박 씨가 손을 뻗자 김 씨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맛에 데이트하는 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김 씨는 머플러를 목에 늘어뜨린 채 눈을 내리떴다.
“갑시다, 순자씨.”
박 씨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김 씨는 뒤따라가며 웃음이 나왔고, 목덜미가 자꾸 간지러웠다. 박 씨가 몇 미터도 안 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코너의 편의점을 끼고 꺾어 들어서자마자 생선구이집이 보였다. 김 씨는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박 씨에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구부터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홀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김 씨는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행복감에 폭 빠졌다. 빈자리는 입구 근처밖에 없었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안쪽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물도 따라주었다. 수저도 놓아주려고 하자 김 씨가 손을 저으며 막았다.
“아, 제가 하지요.”
“선심을 쓰면 좀 받으세요.”
박 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황송해서 그렇죠.”
대접받는 게 어색한 김 씨가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자는 주고 싶고 여자는 받고 싶은 게 연애의 재미 아닙니까?”
“그래도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래요.”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메뉴라고 해봐야 갈치구이와 갈치조림 두 가지였다. 정갈한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김 씨는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다 박 씨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봉씨, 여긴 자주 오셨던 곳인가요?”
“오긴 누가 와요.”
박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받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박 씨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막상 잘 안 되네요.”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기름이 차르르 흐르는 갈치구이가 나왔다. 박 씨는 왼손으로 갈치 토막을 잡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으로 잔가시가 있는 양쪽 끝을 바깥으로 당겼다. 가운데 뼈 위에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살을 들어 올렸다. 살덩어리가 부서지지 않고 네모로 분리되었다. 김 씨는 능숙한 손놀림을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박 씨가 발라 준 생선살을 수없이 먹었을 과거의 여인에 대해 생각했다.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손만 쳐다보고 있자 박 씨가 한마디 했다.
“가시 바르는 거 처음 봅니까? 밥 좀 떠보세요, 순자 씨.”
김 씨는 얼떨결에 수저로 밥을 떴다. 박 씨가 뽀얀 쌀밥 위에 생선살을 얹었다. 김 씨가 당황하여 수저를 빼려다가 주춤했다.
“또 그러시네.”
“남의 밥에 반찬을 얹어주기만 하고 받아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럽니다.”
말하는 도중에 삼십여 년 전 한정식 식당에서 며느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불쑥 떠오를 게 뭐람, 시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음식에 젓가락을 댈 엄두도 못 내는 며느리를 위해 아들이 갈비 한 점을 옮겨 주던 모습이 박 씨의 행동을 보자 떠올랐다. 그때의 섭섭함이 지금에서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박 씨가 김 씨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감동 먹은 거요?”
“네. 제대로 먹었지요.”
“밥도 많이 먹어요, 순자 씨.”
김 씨는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박 씨의 자상함과 배려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또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으로부터 흔들림이 적어 보였다. 팔십 가까이 살아온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남편은 김 씨를 백 번도 더 울렸다.
김 씨는 밥을 먹는 중간에 국이나 물을 자주 마셨고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당황했다. 그리 맵지도 않은 도라지 초무침을 먹으면서 기침도 더러 했다. 박 씨가 김 씨에게 티슈를 내밀기도 하고 직원에게 따뜻한 물도 달라고 했다. 김 씨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따뜻한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태껏 먹어본 밥 중에 제일 달았다. 박 씨는 김 씨를 보며 흐뭇해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네 번째인 김 씨의 눈에 박 씨의 모든 점이 좋아 보였다. 김 씨는 나중에 콩깍지가 벗어지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이 들어서 이성을 만날 때는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어도 한 가지 맘에 드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박 씨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왔다. 김 씨는 박 씨가 자신의 어깨에 오도카니 앉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웃음이 났다. 옷도 벗지 않고 며느리에게 전화부터 했다.
“너 좋아하는 약식하고 식혜 해 놓을 테니 내일 와서 가져가거라.”
“꺄악.”
김 씨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괴성 때문에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김 씨는 자신이 얼마나 박한 시어머니인가를 생각하다가 바빠서 글피에 갈게요, 라고 이어진 며느리의 말 때문에 좋다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전화를 끊고 개운치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어머니 행세, 연장자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박 씨에게 되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 며느리도 나름의 스케줄이 있는 건데.
박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엔 상념에 잠기게 된다. 김 씨는 아무리 잘 살았어도 마무리가 부실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느낌이 들고 잘 못살아왔어도 끝이 좋으면 지나온 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리라. 인생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간절함의 가운데 박 씨가 있었다. 왜냐하면 김 씨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박 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긴 있었다. 내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간호사들이 불러 주는 이름은 달갑지 않았다.
* 영화 제목은 ‘공작부인’이며, 원제는 남자 주인공 이름인 ‘Dorthworth’다.
•수상소감 - 우수상 단편소설 박상희
“저의 허당끼가 소설을 쓰는 모티프가 되기도”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가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절에 대한 호기심과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자세를 고민하면서 써 놓았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이번 공모전의 주제와 어울리는 한 편을 골라서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저의 허당끼로 인해 소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꼼꼼하지 못해서 영화감독이나 제작년도를 확인하지 않고 영화관에 간 실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공작부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만 1936년에 제작된, 같은 타이틀의 다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수상까지 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의 허당끼는 소설을 쓰는데 모티프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저명한 작가들은 글 쓰는 작업을 습관처럼 매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따라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던 터에 선배가 제안을 해왔습니다. 하루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읽든가, 필사를 하든가, 소설 한 장 분량을 쓰든가, 써 놓은 소설을 수정하든가, 매일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내기로. 지키지 못할 경우는 밥을 사기로 했습니다. 올해 초부터 선배는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을 지켜왔는데 저는 밥 사러 몇 번을 선배 동네로 가야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사의 밑그림이나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쓰는데 만 급급했습니다. 부모님 댁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가면서도 노트북을 들고 갔습니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설의 중간 토막부터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구성을 해놓고 소설을 써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소설의 줄거리, 캐릭터, 작가의도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소설은 시작도 못 한 상태에서 두세 달이 그냥 가버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첫 문장을 쓰다가, 중간 중간에 몇 줄씩 쓰기도 하고 결론의 한 문장부터 쓰기도 하는 등 규칙 없이 쓰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은 듯해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설을 놓아버릴까 말까 고민을 반복할 때도 선배는 꾸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는 하루라도 소설과 관계된 읽기나 쓰기나 수정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배와의 다짐이 이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합니다. 목표를 거창하게 잡으면 얼마 가기도 전에 지쳐버리지만,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하니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가기는 합니다. 다이어트 할 때 일주일에 1킬로그램 또는 한 달에 4킬로그램 감량을 목표로 하지 않고, 매일 200그램씩 빼겠다는 덜 부담스러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같은 저만의 방식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글이 안 써지면 딴 짓을 합니다. 제 취향이 아닌 영화도 보고, 딸을 앞세워 젊은이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과 조카들까지 모아 놓고 마음 알아채기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막힌 골목이나 민예품이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펜션 주인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기절할 각오하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도 해봤습니다.
TV를 보거나 버스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폰에 단어 나열식으로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기록 당시에는 이해되었던 내용들을 한참 후에 찾아보면 어떤 의도로 저장해 두었는지 암호 해독 수준이 되기도 하고, 메모해 둔 제 글씨체를 읽을 수 없는 어이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는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태껏 보편타당하다고 여겼던 점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글이 쓸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으로 인해 격려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