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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돈 볂호사의 법률 가이드] 사실혼 재산분할에도 재산세 특례 혜택
- [사례] A는 1984년경 B와 결혼하였다가 2002년 이혼하였다. A와 B는 이혼 이후에도 같이 살다가 결국 2011년경 사실혼 관계마저 파경에 이르렀다. A는 B를 상대로 사실혼 해소에 따라 재산분할소송을 하였고, 이에 따라 29억8800만원 상당의 부동산을 넘겨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살고 있는 K시는 일반 증여에 해당되는 3.5%의 취득세율을 적용하여 A에게 1억460만원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에 대해 A는 사실혼인 경우에도 법률혼처럼 혼인관계 해소에 따라 재산분할에 적용되는 취득세 특례세율 1.5%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A의 주장에 따르면 납부하여야 할 세금이 4480만원으로 5980만원이나 줄일 수 있다. 그러나 K시는 A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A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A는 승소할 수 있을까. 민법은 사실혼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지만 학설과 판례를 통해 일정한 법적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사실혼 관계에 있는 경우에도 법률혼과 마찬가지로 부부 사이에는 동거, 부양, 협조의무가 있으며 정조의무도 있다. 사실혼이 해소되는 경우에는 위자료와 재산분할 청구권도 인정된다. 법률혼 상태인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 재산분할에 따라 재산을 취득하게 되는데, 이때 일반 증여에 해당되는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특례에 따라 산정된 취득세를 납부하게 된다. 이와 달리 사실혼의 경우 법률혼이 아니기 때문에 재산분할로 인한 재산취득의 경우 일반 증여에 해당하는 취득세를 납부해야 했다. 위와 같은 사례가 문제된 시기에는 구 지방세법 제15조 제1항 제6호에서 협의이혼, 재산분할 청구가 있는 경우 취득세 세율에 대한 특례를 적용하고 있었지만 사실혼의 경우에는 위 특례를 적용하지 아니하였다(그러나 지금은 협의이혼, 재산분할청구, 재판상 이혼의 경우 특례를 적용하도록 지방세법 등의 규정이 변경되었다). 대법원은 올해 9월 19일 “위 지방세법 규정은 원칙적으로 협의상 이혼 시 재산분할에 관한 규정이지만 재판상 이혼 시에 준용되고 혼인의 취소 및 사실혼 해소의 경우에도 해석상 준용되거나 유추 적용된다”고 밝혀 사실혼 해소로 인한 재산분할의 경우에도 취득세 특례가 적용된다고 하였다(대법원 2016두36864 사건 참조). 이에 따라 위 사례의 경우 A는 5980만원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사실혼에 대하여 취득세율 특례를 적용하는 것은 획기적인 판결로 볼 수 있다. 과세 측면에서도 사실혼에 대하여 법률혼과 동일하게 인정을 해주어야 하고 이로 인해 사실혼 관계가 더 두텁게 보호되는 효과가 있다. 향후 취득세 특례를 적용받기 위해서는 사실혼 관계 존재에 대하여 입증하는 것이 중요한 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대법원은 사실혼 여부에 대하여 과세관청이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자료를 통해 이를 증명한 사람에게 사실혼의 존재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앞으로 사실혼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평소 사실혼에 대한 자료를 잘 모아둘 필요가 더 많아지게 되었다.
- 2016-10-2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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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읽기] 10월의 추천 전시ㆍ도서ㆍ영화ㆍ공연
- ◇ 전시 덴마크 디자인 전(DENMARK:DESIGN) 일정 11월 20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카레 클린트(Karre Klint), 한스 베그너(Hans J.Wegner) 등 11명의 거장 디자이너 작품을 만날 기회다.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뱅앤올룹슨(BANG&OLUFSEN)을 포함한 11개 브랜드가 참여했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 케네디 대통령이 앉았던 의자, 브릭아트의 대명사 레고(LEGO) 등 덴마크를 대표하는 디자인 작품 200점을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덴마크 근대 디자인의 황금기라 불리는 20세기 이후의 디자인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 전(The History of Korean Abstract Art) 일정 10월 29일까지 장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 발굴, 수집하여 제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아카이브 전시다. 1957년 이후 연대별로 최근 추상미술 전시와 단색화에 대한 관심까지 아우르며, 미술에 대한 관념과 형식을 뛰어넘고자 한 한국 추상미술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다. 추상미술 단행본, 도록, 팸플릿, 주요 전시 기사, 평론, 포스터, 사진, 작품 등 각종 실물자료를 다양하게 마련했다. ◇ 도서 여행자의 하룻밤 (이안수 저·남해의봄날)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촌장인 저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북스테이 ‘모티프원’에서 일어난 10년간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모티프원에서 하룻밤을 지낸 여행자들이 풀어놓은 진심 어린 이야기가 책에 온기를 더한다. 전 세계 방문객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각자의 삶을 나누는 경험을 ‘글로벌 인생학교’라 부르며 인생의 공감과 영감을 자아낸다. 마르지 않는 붓 (자유칼럼그룹 저·두리반) 지난 10년간 자유칼럼그룹이 발표한 3000여 편의 글 중에서 24명의 필진이 추린 74편을 담은 칼럼집이다. (재)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인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추천사를 썼다. ‘마르지 않는 붓’이라는 제목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붓, 평생 녹슬지 않는 펜을 들고 살아온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이 이사장의 추천사에서 따왔다. ◇ 영화 박카스 아줌마의 인생 딜레마 개봉 10월 6일 장르 드라마 감독 이재용 출연 윤여정, 전무송, 윤계상 등 종로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성매매하는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가난한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통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주인공이 사는 게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고객’들을 도와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죄책감으로 혼란에 빠지는 주인공 역에 배우 윤여정이 캐스팅돼 기대를 모았다.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20회 몬트리올 판타지아 영화제 등에 초청돼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마음이 먼저 가 있는 곳 개봉 9월 29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이소현 출연 박삼순, 이소현, 장춘옥 등 어린 시절 함께 살던 할머니의 자살 시도 소식을 들은 손녀가 다시 할머니 집에 들어가 동거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감독인 손녀가 담아낸 할머니와의 가슴 따듯한 이야기로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며 호응을 얻었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할머니 집을 배경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할머니와 손녀가 서로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에서 애틋함이 묻어난다. ◇ 공연 국화꽃 향기처럼 아련한 첫사랑 일정 10월 1~23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연출 이성모 출연 박형준, 장덕수, 서지유, 정서희, 황정윤 등 2000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김하인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2014년 이후 1년 8개월 만에 선보이는 이번 공연에서는 여주인공의 입장에서 고민이 극대화됐던 이전 무대와는 다르게 남주인공 ‘승우’의 시선과 심리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왕비의 얼굴 일정 10월 11~23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김선영, 조풍래, 정원영, 박영수, 이창엽 등 명성황후라는 실존 인물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한 창작가무극이다. 사진 찍기를 즐겼던 고종과는 달리 명성황후의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미스터리한 에피소드와 가상의 인물이 주는 신비감을 더했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일정 10월 26일~11월 6일 장소 LG아트센터 연출 장우재 출연 이호재, 오영수, 윤상화, 최광일, 이명행 등 조선시대 문인 성현(成俔)이 쓴 기행문 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작품으로, ‘기지’와 ‘경숙’이라는 두 대감이 왕의 질문을 갖고 금강산으로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장우재 연출은 “제목처럼 어두운 세상을 뒤집어 밝게 보려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햄릿으로 태어나 줄리엣을 꿈꾸다 일정 9월 30일~10월 16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김광보 출연 강신구, 최나라, 이지연, 윤나무, 황성대 등 셰익스피어의 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여자 햄릿’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연극이다. 기본적인 가족 구도와 인물 관계는 유지하면서 햄릿의 고독과 남성적인 복수극 뒤에 숨어 있는 섬세한 여성성에 주목했다.
- 2016-10-1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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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생 끝 영화
-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부임지로 떠나는 화려한 사또 행차를 밭 매는 남루한 아낙이 부러운 듯 한마디 합니다. ‘저 사또의 아내는 얼마나 행복할까?’ 사또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마에서 내려 아낙에게 다가 옵니다. ‘이 여인아 조금만 더 참지!’ 사또가 한숨 쉬며 한 말입니다. 그 아낙은 장원급제하기전의 사또의 본처였는데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개가 한 여인입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참을 인(忍)자 세 번을 마음속으로 쓰면 살인(殺人)할 일이 없다고 참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오늘 전철에서 60대 후반의 할머니 두 분이 내 옆에 앉았습니다. 두 분의 대화를 자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바람을 피워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지가 1년이 되었고 며느리는 10살 된 아들과 살고 있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살고 있는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세대는 남편이 첩을 얻거나 아내를 유기하여도 꾹 참고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착한 며느리는 직장 다니면서 할머니가 아프다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용돈 쓰라고 지난달에도 백 만 원이나 보내왔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안쓰러워 아들과 동거하고 있는 여자네 집에 가서 여자를 때려죽인다고 벼르고 갔는데 이 여자가 말하길 ‘나는 오직 이 남자만 있으면 됩니다. 혼인신고도 바라지 않고 돈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는 바람에 ‘왜 진작 만나지 늦게 만나서 이 고생을 하느냐!’ 는 말만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들을 때려죽인다고 가야지 아들은 감싸며 금지옥엽 남의 딸을 때려죽인다는 마음이 옳지 못한 것 같아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왕관도 버린다고 합니다. 숭고한 사랑은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원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륜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남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식이 있는 본처에게 대부분 돌아옵니다. 주위에도 보면 남편이 중풍이 들어 첩에게 버림받고 본처에게 돌아오거나 늙어서 찾아오는 경우를 봅니다. 이렇게 돌아온 남편을 보고 고생 끝에 영화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워야 할 젊은 날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는데 무슨 염치로 병든 육신을 끌고 본처라고 아내의 집을 찾아오는지 참 뻔뻔합니다. 이제 돌아와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 둘 부부사이에 사랑과 이별은 그렇다 치고 거기서 태어난 아이는 어찌 합니까 어머니가 시시때때로 아버지의 원망을 알게 모르게 내 뱉었을 텐데 아이가 정상적인 성격으로 자랐을 것이라 믿으면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에서도 별거나 이혼을 쉽게 그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파생되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드라마는 부족합니다. 더욱 불행하게 하여 시청률을 높이고 있습니다. 전철에서 듣게 된 할머니의 아들이 더 늦기 전에 본처에게 돌아오고 재산도 필요 없고 오직 그 잘난 사랑밖에 난 몰라 하는 여자도 정신 차리고 새 출발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2016-09-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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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스승이 못 되면 친구도 될 수 없다”
- 올해 7월 초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60)와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85)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우정이 화제가 됐습니다. 게이츠가 블로그에 올린 글 ‘배움과 웃음의 25년’을 통해 아버지뻘인 버핏과의 인연을 소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억만장자들의 사귐과 도타운 우정에 감동했습니다. 버핏을 처음 만난 1991년 7월 5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이츠는 그가 자신과 아내 멜린다의 삶을 모든 면에서 좋게 바꿔놓았으며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같은 존재’ 버핏처럼 사려 깊고 친절한 친구를 둔 것은 행운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워런이라면 어떻게 할까?” 자문해보면 최선의 해답이 나온다고 합니다. 25세의 나이 차는 두 사람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독일 바이마르시의 바이마르 극장 앞에는 괴테(1749~1832)와 실러(1759~1805)의 동상이 다정하게 서 있습니다. 괴테가 열 살 많고 성장배경과 문학관도 판이했지만 둘은 격의 없이 지냈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끊임없이 자극을 주면서 세계문학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괴테는 실러를 많이 도왔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은 26세나 차이가 났지만, 1558년부터 퇴계가 타계한 1570년까지 12년 동안 사단칠정론을 중심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 유학사에 길이 남을 논쟁과 우정을 펼쳤습니다. 우리는 흔히 친구라고 말하지만 이와 비슷한 단어에 붕우(朋友) 벗 동무가 있습니다. 지기(知己)라는 말도 친구와 뜻은 같습니다. 그런데 朋은 뭐고 友는 뭔가? 원래 朋은 동사(同師), 스승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복수, 집단개념이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友는 지동(志同), 뜻이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특히 屮(왼손 좌)+又(오른소 우) 형태로 이루어진 友라는 글자는 두 손이 서로 협력하듯 친하게 지내며 도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벗과 동무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동무는 잘 아시다시피 공산당이 사용하면서 거의 죽은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무는 참 좋은 말입니다. 글동무 길동무 꿈동무 노래동무 놀이동무 배움동무 소꿉동무 씨동무 어깨동무 책동무... “어깨동무 씨동무”로 시작되는 전래동요에서 씨동무는 씨앗처럼 소중한 동무라는 뜻입니다. 농사 지어 먹고살던 농경시대에 씨앗처럼 소중한 것은 없었겠지요. 지금 시니어들에게는 산행동무 골프동무 당구동무 술동무 여행동무 낚시동무 서예동무 사이클동무 조깅동무 트레킹동무, 이런 동무들이 있을 것입니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자꾸 보고 싶어집니다. 두보의 시에 나오는 춘수모운(春樹暮雲), ‘봄날의 나무와 해질 무렵의 구름’이라는 말이 멀리 있는 벗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성어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당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추야기구원외(秋夜寄邱員外)’도 음미할 만합니다. 동무생각을 잘 표현한 아주 유명한 시입니다. “懷君屬秋夜(회군속추야) 이 가을밤 그대 그리워 散步咏凉天(산보영량천) 서늘한 날씨에 거닐며 시를 읊네. 山空松子落(산공송자락) 빈 산에 솔방울 떨어지니 幽人應未眠(유인응미면) 숨어사는 그대도 잠 못 이루겠지.” 논어 첫 대목의 공자 말씀 중 두 번째 문장이 바로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아닙니까? 연암 박지원은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가 아닌 아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벗은 제2의 나”라는 말도 했고, 담헌 홍대용에게는 “그대와 나눈 대화가 10년 독서보다 낫소”라는 말도 했습니다. 소중한 벗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글로는 간서치(看書癡)로 잘 알려진 이덕무(李德懋)의 문장이 최고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 손수 오색실을 물들이리라. 열흘에 한 가지 빛깔을 이룬다면 50일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룰 수 있으리. 따뜻한 봄볕에 말린 다음,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정련한 금침으로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후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래된 옥으로 축(軸)을 만들어 높은 산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 사이에다 펼쳐 놓고 말없이 마주보다가 뉘엿뉘엿 해 질 녘에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정말 대단한 정성 아닙니까? 벗은 왜 소중할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자 나의 스승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 나오는 ‘익자삼우 손자삼우(益者三友 損子三友)’의 개념 중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고 박학한 벗이 바로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 반대로 나에게 해로운 벗은 편벽되고 굽실거리기 잘하고 빈말 잘하는 사람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양명학자인 이탁오(李卓吾)는 라는 책에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내가 말하는 스승과 친구란 원래 하나이니 어떻게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존재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바로 스승인 줄은 알지 못하니, 이리하여 네 번 절한 뒤 수업을 전해 듣는 사람만을 스승이라 하지요. 또 스승이 바로 친구인 줄은 모르고 그저 친교를 맺으며 가까이 지내는 자만을 친구라고 일컫습니다. 친구라지만 네 번 절하고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면 그런 자와는 절대로 친구하면 안 되고, 스승이라지만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를 또 스승으로 섬겨서도 안 됩니다. (중략)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若不可師 卽不可友] 그렇게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형제라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좋겠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당송 팔대가로 꼽히는 소식(蘇軾)-소철(蘇轍)은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며 평생을 함께하려 했던 형제이면서 친구이면서 사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유배지에 있을 때 흑산도의 형 약전이 숨지자 다산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며 통곡했습니다. “하늘도 땅도 무너지도록 원통히 부르짖으니 나무나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무슨 말을 하랴? (중략) 지금 그분을 잃었으니 이제는 터득하는 바가 있어도 누구를 향해 입을 열 것이냐? 사람에게 지기가 없다면 진작에 죽느니만 못하다. 아내가 나의 지기가 되지 못하고 아들도 나의 지기가 아니며 형제와 일가도 모두 지기는 아니다.” 법구경에는 “나보다 나을 게 없고 내게 알맞은 길벗이 없거든 차라리 혼자 가서 착하기를 지켜라. 어리석은 사람의 길동무가 되지 말라”[學無朋類 不得善友 寧獨守善 不與愚偕]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스승을 찾듯 친구를 찾아야 합니다. 친구에게서 배우고 친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있는가, 늘 생각해봐야 합니다.
- 2016-07-2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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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뻬씨의 행복 여행(Hector and the Search for Happiness)
- 감독에 피터 첼섬, 출연에 헥터 역으로 영국의 코미디언 겸 배우 사이먼 페그, 헥터의 동거녀 클라라 역에 로자먼드 파이크가 나왔다. 사이먼 페그는 코미디언 배우라서 표정이 순수하고 밝다. 로자먼드 파이크도 성격 밝고 금발의 미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다. 원제를 보면 ‘헥터와 행복 찾기’ 정도가 될 것이다.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원작자의 실화라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으니 내용의 수준에 대해서는 더 말 할 것도 없다. 정신과 의사 헥터는 별 탈 없이 클라라와 동거하며 의사 생활을 해오다가 어느 날 고객들의 다양한 행복 찾기 질문에 맞는 답변을 주기 위해 행복 찾기 여행을 떠난다. 고객들은 하나 같이 불행하다며 행복의 길을 찾는 방법을 묻는다. 헥터 또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는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행복 찾기 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첫 번째 여행지는 중국이었다. 경제가 한창 살아나는 중국의 무대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으로 보아서도 살맛나는 나라였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나 상대였던 젊은 중국여자와 그런대로 좋았는데 매춘녀로 밝혀지면서 동양의 이미지를 떨어뜨린 것은 좀 아쉽다. 눈 내린 산속의 스님에게 찾아가서도 행복은 어느 하나가 아닌 바람처럼 여러 가지가 섞이는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두 번째 여행지는 아프리카였다. 의료 봉사하는 친구가 있어서 들러 보았고 비행기에서 알게 된 주민의 초대를 받아 행복한 그들의 삶을 보았다. 오다가 강도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인데 마약을 재배하는 거부의 덕분이었다. 마약을 팔아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해보지만, 그 사람 덕에 살았으니 살아 있다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도 배운다. 세 번째 여행지는 로스앤젤레스였다. 옛 여자 친구가 살고 있는 곳이다. 12년 만에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났으나 이미 결혼해서 애가 둘이고 임신 중이다. 그동안 같이 찍은 사진을 고이 간직할 정도로 감정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나 그녀로부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포기한다. 문제는 행복 여행을 떠났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정작 동거하고 있던 여자 친구 클라라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인다. 결국 행복은 클라라였던 것이다. 결혼식을 치르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헥터가 새로 배운 행복의 요소들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행복은 돈이나 지위가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늘 장래에 있을 거라며 기다릴 것도 아니다. 지금 현실이 행복이라는 것을 여러 번 일깨워준다. 심지어 ‘사랑은 귀 기울여 주는 것’이라는 대목이 와 닿는다. 시니어들일수록 아는 게 많고 그럴 자랑하고 싶거나 얘기해주고 싶어 말이 많아진다. 그러나 말하는 쪽보다는 들어주는 쪽이 행복하다는 교훈이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원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찾아 갈 것인지 고민한다. 그러나 행복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딱 떨어지게 이것이 행복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현재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행복의 요소이며 다 같이 바람처럼 섞여 내 주변에 있는 자체가 행복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행복이 무엇일까 어디 있을까 찾는 중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손에 쥔 것은 소중한 줄 모르고 남이 가진 것만 탐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헥터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비행기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행복하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행복의 기준이나 요건은 서로 다르다. 처음엔 남이라 서로 꺼리지만, 그 사람의 관계로 인하여 행복 찾기 일이 전개되며 그 사람 덕에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 2016-07-1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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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 Review] 70세 할머니와 7세 손녀의 ‘한글 정복기’ <할머니는 일학년>
- 최근 영화 이 할머니와 손녀지간이라는 독특한 관계 설정으로 관객의 관심을 모았다. , , 등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를 그린 몇몇 영화들이 나왔었지만,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라는 점이 신선함을 주었다. 처럼 할머니와 손녀의 동거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 은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손녀의 한글 정복’이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돋보인다. 아들·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한글’로 채우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으로 시골에서 손녀 동이를 키우게 된 할머니 오난이는 아들이 남긴 다이어리와 편지를 읽기 위해 한글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죽기 전에 꼭 아들의 편지를 읽겠다’는 각오로 다문화가족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실에 다니기로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글 선생이었던 부녀회장이 병원에 실려 가고 더는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오난이는 어쩔 수 없이 혼자 한글 공부를 하지만, 선생이 없어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 모르는 채 지나가기 일쑤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본 동이는 그동안 유치원에서 배운 실력으로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되어 갈 무렵, 일곱 살밖에 안 된 손녀에게 가르침의 한계가 찾아온다. 할머니보다 한글을 잘 알았지만, 시골로 내려온 뒤로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어 완벽하지 않았던 것.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수밖에 없다고 느낀 오난이는 학교를 찾아가지만 이내 거절을 당한다. 학교 직원에게 아들의 유품을 보여주며 “그동안 아들이 내게 보낸 편지들인데 내가 글을 못 읽어 미안한 마음에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았다. 죽기 전에 꼭 읽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한다. 마침내 초등학교 입학 허가를 받은 오난이는 손녀의 핑크색 책가방까지 메고 등교한다. 학교에 다닌 뒤로는 이전과는 반대로 오난이가 동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서로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기에 처음부터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다. 대화도 없이 서먹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들은 한글을 배우는 즐거움을 함께 느끼며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한글을 익히고 아들의 편지를 열어보는데, 편지봉투 속 아들의 편지는 글이 아닌 사진이었다. 오난이는 “어미가 까막눈인 것을 알았구나”라며, 동이에게 “세상은 많이 안다고 잘 보이는 게 아닌가 보다. 글자도 세상도 마음으로 읽어야지”라고 이야기한다. 서로 한글을 가르쳐 주며 티격태격하는 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이 웃음 짓게 하고,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다.
- 2016-07-0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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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이주! 찬성 VS 반대] 살아보고 결정하자
- 여행을 좋아하는 필자는 해외 그 어느 곳보다도 제주를 좋아해서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제주행 항공권을 끊곤 한다. 혼자 아무 계획 없이 내려가서 주어진 시간만큼 걷거나 특별한 목적 없이 머물다 오기도 한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휴가지 선정 에서도 항상 0순위 후보 지역 아름다운 섬 제주이다. 이런 나의 제주사랑으로 보아 침대 위에 커다란 제주도의 지도를 붙여 놓고 ‘아이 러브 제주’를 읊조리며 제주도에서의 노후생활을 꿈꾸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항상 반신반의 하게 되는 것은 여행객으로 잠시 머물며 바라 봤을 때 꼭 여기서 살고 싶다 는 마음이 갖게 했던 제주도가 이주 실현 후 생활터전으로 서도 여전히 나에게 똑같이 매혹적인 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이다. 사람들이 흔히 꼽는 문화시설과 병원, 백화점 등의 편의시설 부족 등의 불편함에 대한 문제는 이미 내려간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되어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사실 여행 하면서 본 제주도는 그런 것들이 크게 부족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30분에 한대 이상 뜨는 육지 행 비행기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육지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지만 우리나라 최남단에 뚝 떨어져 있는 제주도라는 섬에 살면서 심리적인 고립감과 외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사소하지만 필자에게는 심각한 문제인 습한 섬 특유의 벌레, 특히 지네가 그리 많이 출현한다는데 그 들과의 동거를 잘 받아들이며 살 수 있을지가 필자에겐 오히려 큰 고민이 된다. 제주로 이주를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두려움과 고민을 가지고 나름의 스타일로 제주의 생활을 설계할 것이다. 잠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터전을 옮기는 이주라는 중요한 문제를 ‘일단 가서 살아 보자’ 할 수 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돌다리만 두드리면서 남의 경험만 주워 모으며 고민 만 할 수도 없다. 이런 복잡한 제주 이전에 대한 고민의 대안이 바로 ‘제주도 한 달 살아보기’ 이다. 제주 생활로 익히 알려진 방송인 허수경 씨도 방송에서 제주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지만 제주도에 정착하기까지 매우 힘들었음을 고백하면서 임시로 살아 본 후에 이주하기를 조언하고 있다. 요즈음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보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 검색창에 ‘제주도 한 달 살기’ 라고만 쳐도 굉장히 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있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아본 경험을 담은 블로그와 제주도 한 달 살아 보기에 대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는 카페도 속속 개설되고 있다. 제주 이주의 꿈이 각자 다 다르고, 불편함을 느끼고 기꺼이 견딜 수 있는 정도가 각기 다 다르니 다른 사람의 정보 만 가지고 결정 할 수는 없다. 제주 이전에 대한 여러 정보를 가지고 충분히 마음 속 시뮬레이션 한 후 그 모델을 가지고 최종적으로 한 달 또는 두세 달 직접 살아 보고 자신의 적응력을 테스트 해 본 후에 이주를 결정하는 것이 제주 이주의 오류를 최소화 하는 방법일 것이다.
- 2016-06-2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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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 이야기] (4) 한인 십대 아이들의 탈선
- 이민을 왜 꿈꿀까? 대부분 이민하는 이유는 단연 자식 때문이라고 부모들은 말한다. 도대체 자식이 뭐길래 자식교육을 위해서라면 내 나라도 등 지는 것일까. 필자는 미국에서 사는 동안 너무나 많은 한인들이 초심의 목적을 잃고 체념하면서 한숨으로 살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어린 아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한인타운에 사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시간 좀 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짬을 내기가 힘들었지만 좀처럼 편치가 않아 시간을 냈다. 달려가는 차창 밖으로 캘리포니아의 쾌청한 하늘이 묵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타운 내 카페로 갔을 때 그녀의 눈가는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많이 수척해 있었다. 지금 막 수용소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당황한 마음에 다그쳐서 묻기 시작했고 그녀는 가녀린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는 서러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국문화는 절대로 상대방의 나이를 묻거나 신상이야기는 금기사항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5년 전에 딸과 함께 전남편에게 내몰려 한국을 등지게 됐다고 했다. 미국에 와서는 5년 동안 주방 일부터 페인트칠하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전남편에게 버림받고 미국 까지와서 졸지에 불법 체류자가 되었고 한인식당에서 웨이츄레스 일을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새 남편은 시민권 자로써 3년 전 이혼을 하고 딸 하나와 살고 있었다. 결국 이쪽 저 쪽, 네 식구가 그녀의 한집에서 같이 동거를 시작했다. 살다 보니 새 남편의 12살짜리 아이가 얼마나 천방지축인지 지 멋대로 버릇도 없다며 침을 튀겨가며 하소연을 해왔다. 두 가정이 합치면서 좁은 아파트 하나에 사춘기에 접어든 전혀 남남의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부모와 두 딸들은 부딪치기 시작했고 새 남편은 자기 딸 편만 들었다고 했다. 불편한 가정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부모의 입장에서 참다 못해 작은 몸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새 남편의 아이는 손목에 조그만 상처가 남았고 그녀는 알지도 못했다고 했다. 어느 날, 집 앞에 폴리스가 와서 무조건 수갑을 채우고 그 길로 수용소로 끌려 갔다는 것이다. 아동학대 격리 수용을 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한 달이나 있다 왔다고 눈물 범벅이 되어 서러움을 토해냈다. 미국은 아동학대가 굉장히 무서운 법이었고 의무적으로 신고를 해야만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 아이 손목을 유심히 보고는 왜 그러냐고 물었단다. 아이는 그 길로 카운셀러(상담자)에게로 보내졌고, 그 아이는 대책 없이 느끼는 그대로 답을 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그 길로 가출을 해 버렸고 새 남편은 술로 산다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또 벌어진 엄청난 상황에 무어라 말문이 막혔다. 미국에서는 아이 때문에 내 나라를 등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들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단 아이를 찾고 그리고 아파트를 방3개짜리로 옮기라고 했다. 그녀는 지겹다며 남편과 빨리 헤어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3번 4번 복잡한 삶의 연속이 뻔하지 않느냐며 설득을 시켰다. 한인타운에는 살다 헤어지고 또 살다 싫으면 갈라서고 도대체 그것도 선진국 문화랍시고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을 무시한 채 부모들의 태만한 행동들이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아이가 나눔 선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그 곳은 갈 곳없이 버려진 아이들의 집합 소였다. 자기는 만날 수가 없으니 제발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내 아이들에게도 쏟아보지 못한 정성으로 선물을 준비했고, 사랑의 글이 담긴 예쁜 카드도 마련했다. 나눔 선교회는 말 그대로 나눔을 함으로써 선교를 하는 곳이었다. 그곳을 향하면서 깜짝 놀랐다. 어느 목사님의 봉사정신으로 시작된 곳이었는데, 건물은 허름하고 이층 비상계단 난간으로 머리 빡빡깍은 등치 좋은 아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이 섬찟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작게 나마 성의금을 전달하기 위해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주변에 널려진 마약으로 청소년기를 방황하는 한인 아이들이 대다수라고 설명을 하더니 그 아이를 만나게 해주었다.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아이가 얼굴은 엄청 밝았지만 진하게 화장을 해 성숙해보였다. 건들건들 껌을 씹고 필자를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었다. 담배 냄새가 코를 확 찔러왔다. 어린 나이에 망가져 버린 작은아이를 보며 화보다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은 채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그녀를 아줌마라고 불렀고 너무 간섭을 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친 엄마도 가끔씩 만나왔고, 같이 사는 이상한 언니가 싫다고 했다. 아이는 모든 것 들이 불만투성이였지만 나눔선교회는 또래 친구도 많고 관심을 갖고 잘해주니까 좋다고 했다. 필자는 돌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 아이를 뒤돌아보았다. 부모라는 이름이 무겁게 다가와 마음을 칙칙하게 했다. 어린 나이에 아무 생각 없이 부모 따라 온 아이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2세, 십대 아이들이 사춘기 혼란 속에 정체성을 잃은 채, 외로움에 허덕이고 불안감에 못 이겨 너무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모들은 말로는 아이들 때문에라고 하면서도 당장 먹고 살기 힘드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어쩔 수없이 그대로 아이들을 방치하고, 무분별한 미성년자는 활짝 열려있는 색다른 문화 속에 그 유혹에 못 이겨 그대로 망가져 갈 수밖에 없다. 부모는 과연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채워줘야 하는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나눔 선교회로 들어온 많은 아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아이도 오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3개 짜리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얼마 후 그 아이는 고모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녀의 아이는 못살겠다며 한국으로 나와 아빠와 함께 산다고 했다. 결국 미성년자의 모든 것들은 부모의 책임이었다. 초심을 잃은 부모들이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어린아이들을 험난한 곳으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 왔다. 로즈와이
- 2016-06-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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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기획... 내가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박열의 사랑이야기”
- 조국의 역사가 안겨다 준 수많은 비극이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 투사와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애절한 감동으로 다가와 그 여인이 옥중에서 쓴 수기 내용을 우선 써 내려가본다. “박열을 처음 사랑하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박열의 식민지 조선 독립운동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고…. 아무리 독립운동이 나의 사상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박열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래서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나섰다. 박열의 동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우리를 비웃어 달라고. 다음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모든 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 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박열, 그는 1902년부터 1974년의 생애로 마감을 한 독립투사로 본명은 박준식이다.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나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재학 중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한다. 1919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조선 최초 아나키즘 사상단체를 만들어 일본제국 왕을 폭탄으로 제거하려는 등 온몸으로 반제국주의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1920년 1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박 열은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그 해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후미코(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박 열과 가네코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박 열은 젊은 청년시절 22년 2개월간의 기나긴 옥살이를 마치고 1945년 10월 아키다 감옥에서 미군에 의해 석방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군대 축소 및 국제 중립국화 등에 노력을 기울였고 1974년 서거하여 그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 능에 묻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되었다고 한다. 1926년 박 열과 옥중부부가 된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여인이다.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한 그녀는 가난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불우하게 살아왔다.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으로 23살의 짧은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약7년 동안 조선 부강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1919년 에는 부강에서 횃불 만세운동을 목격한 바가 있다.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은 오뎅 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박 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곧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고 항일활동을 함께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히로히토 암살을 기도한 후 체포되었고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 부부가 된1926년 불과 몇 달 후 그녀는 결국 감옥에서 목을 메어 자살인지 타살인지 미스테리한 의문사로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일본 내에 그녀의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서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박 열의 형은 그녀의 유골을 인수하여 남편의 고향인 문경, 박 열 의사 기념관의 옆에 안장시켜 놓았다고 했다. 우리 조국의 사랑뿐만 아니라 투철했던 한 독립투사와 일본인 가네코의 끈질긴 사랑이 잔잔하게 가슴에 울려온다. 서로가 원수의 국적이었지만 남녀의 사랑으로 함께한 굳은 의지가 죽음도 불사했다. 한 독립투사는 조국을 위해서 앞장섰지만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아내로 두었던 것이 오히려 해가 된 것이었을까? 무서운 권력 앞에 처절히 죽어가며 한 남성을 사랑하는 어느 여인의 절규가 애절하기만 하다. 박 열의 업적과 가네코의 항일운동의 업적은 현재 남 북한 양쪽뿐만이 아니라 고향인 문경에서 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두 남녀의 시신은 남과 북으로 서로 떨어져 있어 더욱 깊은 아픔 으로 남는다. 필자에게는 지금도 의사 박 열은 가네코의 기일이 되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애달프게 다가온다.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도 구입해 봐야 할 것만 같다. [출처] “한 독립투사의 사랑이야기”|작성자 로즈와이
- 2016-06-2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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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동 변호사의 이혼과 법률] 이혼소송 중인 아내를 남이 건드렸다면?
- 사례 A와 B는 1992년 10월 19일 혼인신고를 마치고 법률상 부부로 살아왔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불화를 겪었다. 아내 B는 남편 A로부터 “우리는 부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2004년 2월경 가출하여 별거를 하기 시작했다. A는 그 후 B를 설득하려는 별다른 노력 없이 B를 비난하면서 지내왔다. 결국 B는 2008년 4월 29일 A를 상대로 이혼청구 소송을 제기해 2008년 9월 26일 이혼판결을 받았다. 이에 A가 항소하였고 2008년 11월 26일 B를 상대로 소위 맞소송을 제기하였다. 법원은 2010년 6월 18일 항소심에서 “B와 A는 이혼하고, A의 소송과 B의 맞소송에서 청구된 위자료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2010년 9월 30일 A의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그대로 확정되었다. 한편 C는 2006년 봄 등산모임에서 B를 알게 되어 연락을 주고받고 금전 거래를 하는 등 친밀하게 지내왔는데, 위 이혼소송 항소심(2심)이 진행 중이던 2009년 1월 29일 밤 B의 집에서 B와 애무하는 등 신체적 접촉을 하다가 당시 밖에 있던 A가 출입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A는 C를 상대로 “B가 A의 배우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성적 행위를 했으므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 이로 인해 입은 정신적 손해를 C가 배상할 의무가 있다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A의 청구는 인정될까. 부부는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할 의무를 진다(민법 제826조). 이러한 동거의무 내지 부부공동생활 유지의무는 부정(不淨)행위를 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성적(性的) 성실의무와 직결된다.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부정행위를 함으로써 배우자가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면 그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부부 중 어느 한 사람과 부정행위를 한 제3자도 혼인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부 공동생활을 침해하거나 그 유지를 방해함으로써 배우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부부 중 어느 한쪽과 제3자가 부담하는 책임은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책임으로서 손해배상액에 대해 모두 책임이 있다. 위와 같은 사례에 대해 대법원은 부부가 아직 이혼하지 아니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부부공동생활이 파탄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이른 경우, 제3자가 부부 중 어느 한쪽과 성적인 행위를 했다면 배우자에 대해 불법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법률관계는 재판상 이혼청구가 종결되지 않은 상태나 재판상 이혼이 청구되지 않은 상태도 마찬가지라고 판단하였다. 즉 재판상 이혼이 시작되어 끝나지 아니한 상태거나 아직 이혼이 청구되지 않은 상태라도 실질적으로 부부공동생활이 파탄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라면 제3자가 부부 중 어느 한쪽과 성적 행위를 했다고 해서 제3자의 배우자에 대한 불법행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C는 A에게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정서상 위와 같은 대법원의 판단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무리 혼인이 파탄상태라 해도 법률상으로는 부부관계인데, 이혼 이전에 다른 사람과 성적 행위 등을 한 것이 불법행위가 되지 않으므로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부 대법관도 위의 판단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 2016-06-21 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