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숙(52)은 세계스마트시티기구 WeGO의 사무총장이다.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다면 아마 방송인으로 활동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아침방송을 비롯해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MBC 드라마 ‘대장금’에 중전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를 떠나게 만들었을까. 방송인에서 행정가가 되기까지, 도전과 변화를 거듭한 박정숙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1990년대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 1993년 대전엑스포 개최라는 굵직한 역사를 썼다.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동시에 해외 진출의 길이 열렸다. 당시 영국의 팝, 일본의 만화 등 외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대학생 박정숙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던 것 같다.
어린 박정숙은 아나운서 출신 김연주를 롤모델로 삼았다. 88서울올림픽 당시 ‘우정의 사절단’ 홍보대사를 맡고, 이후 전문 MC의 길을 걷는 그녀의 행보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박정숙은 1993년 KBS에서 선발한 대전엑스포 홍보대사에 지원해 합격했다. 이후 엑스포와 대한민국을 알리는 외교사절단으로 활약을 펼쳤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죠. 대학생 홍보대사 선발 과정은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KBS에서 방송됐어요. 지원 조건은 준수한 외모에 외국어 두 가지 이상 할 줄 아는 대학생이었죠. 총 300명 정도 지원했던 걸로 기억해요. 최종 세 명이 뽑혔고, 그중 한 명이 저였죠. 해외에서 온 기라성 같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EBS에서 학생 리포터를 한 방송 경력이 있어 운 좋게 선발됐어요.”
박정숙은 대전엑스포 홍보대사부터 Wego의 사무총장까지, “가장 트렌디한 조직에서 일할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진 것 같다”면서 운이 좋았다고 자평했다.
“엑스포 홍보대사 활동으로 세계를 돌아다녔고, 그 다음에는 아침방송을 10년 동안 했죠. 사실 아침방송이 그전까지는 독립적인 프로그램이 아니었어요. 저는 아침방송이 완전히 꽃을 피울 때 진행자를 맡은 거죠. ‘대장금’도 우연히 한 건데 그 즈음 한류가 꽃피었고요.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의 한국 대표, Wego의 사무총장도 중요한 시점에 맡았다고 생각해요.”
‘대장금’과 한류 전도사
박정숙은 KBS 엑스포 특별 생방송 진행을 잘 소화해낸 덕에 SBS 특채 MC가 됐다. 이후 그녀는 SBS ‘출발 모닝 와이드’, MBC ‘아주 특별한 아침’ 등 아침방송을 10년 넘게 진행했다. 단아하고 편안한 이미지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문적인 진행 실력을 뽐내 아나운서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그녀의 목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끝내주는 모닝 쇼 호스트’였다. 매일 새벽 세시에 일어나고 진행자로서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신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가던 그때, 박정숙을 힘들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MBC ‘토크쇼 임성훈과 함께’의 MC를 맡게 되면서다.
박정숙이 합류하면서 원래 30분짜리였던 프로그램이 2시간짜리 프로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러나 당시 방송환경 탓에 그녀의 이름 석 자를 프로그램 제목에 올릴 수 없었다. 제작진은 그녀를 파격적인 대우로 캐스팅했지만, 박정숙은 여성 MC로서 한계를 느꼈다. 그녀는 방송인으로서 성공했지만,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자괴감만 느끼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자포자기 심정으로 진행을 하고 있을 때, 박정숙은 이병훈 PD로부터 ‘대장금’ 출연 제의를 받았다. 그녀의 단아한 이미지가 문정왕후 역할에 딱 맞다고 이 PD는 생각했다. 박정숙은 경험 삼아 연기를 하게 됐는데, ‘대장금’은 시청률 50%를 돌파하고 한류 드라마로 등극했다. 드라마의 인기는 그녀가 방송계를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드라마를 잠깐 한 6개월 했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저는 그냥 원 오브 뎀(One Of Them), 그 많은 연예인 중 하나가 돼 있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삶의 터전을 스스로 바꿔버린 거죠. 제가 꿈꾸던 MC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너무 힘들었고, 연예계를 떠나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장금’을 안 했다면 유학을 안 갔을 것 같아요.”
2004년은 ‘대장금’이 종영한 때이면서 박정숙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해다. 당시 그녀 나이 34세. 박정숙은 아직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느꼈다. 그녀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관계와 미디어를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장금’의 파워는 실로 대단했다. 외국에서 박정숙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고, 그녀는 한류를 몸소 느꼈다. 이에 박정숙은 문화 콘텐츠가 국경을 넘어 전달됨으로써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다. 2007년에는 가수 박진영과 하버드대학교에서 한류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었고, 미국 PBS에서 방영된 김치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한류 전도사로 우뚝 섰다.
백신에서 스마트시티로
박정숙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박정숙은 2008년부터 대학교 강단에 섰다. 2010년에는 TBS 교통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박정숙의 오늘’을 통해 5년여 만에 방송 활동을 재개했으며, YTN, EBS 등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현재는 방송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교수 겸 방송인이 된 박정숙. 더불어 그녀는 2008년 다문화 아동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후원 단체 호프키즈를 창단해 10년 넘게 운영했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는 국제기구인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의 한국 대표로도 활동했다. 박정숙은 팬데믹이 올 것을 예상했다고.
“GAVI는 빌 게이츠가 주도적으로 만든 조직이고, 다보스 포럼에서 만들어졌어요. 그걸 보면서 이제 국제기구는 더 이상 UN 같은 국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나 어젠다(Agenda, 의제)를 통해 움직이겠구나 느꼈어요. 제가 GAVI의 한국 대표를 10년 동안 하면서 한국이 아시아 최초의 백신 공여국이 되었는데, 기뻤죠. 아쉬운 점은 접촉성 전염병에 의해 팬데믹이 올 것이라는 신호가 계속 있었는데 우리의 관심이 부족했다는 거예요. 그런 걸 캐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박정숙은 방송 활동 덕에 언론과 홍보에 능한 한편, 세계백신면역연합 한국 대표로 활동하면서 이룬 성과를 인정받아 2021년 9월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WeGO는 정보통신기술(ICT)를 활용해 세계 도시 및 기업 간 스마트시티 협력과 교류를 촉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서울시가 2010년 9월에 창립한 국제 협의체다. 창립 당시 50개 도시로 출발해 현재는 200개 넘는 도시, 기관, 기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무총장이 된 지 6개월이 지난 박정숙은 업무에 적응하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국제기구이다 보니 회의 시간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할 일이 정말 많다고 한다. 더불어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WeGO의 사무총장이 된 그녀는 자긍심과 책임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제 임기는 3년이지만, WeGO가 10년 후에는 스마트시티의 UN 같은 단체가 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6개월을 돌아보면, 코로나19로 대면은 못 했지만 스마트 기기로 해외 각국과 자주 소통했어요. 해외의 많은 분들이 스마트시티에 대한 지식 공유라든지 새로운 프로젝트 개발을 위해 저를 찾는데요. 그런 면에서 큰 가능성을 본 6개월이었던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울이 스마트시티로서 굉장히 앞서 있고 전 세계에서 최고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총장으로서 박정숙의 목표는 ‘스마트시티에 대한 어젠다 세터(Agenda Setter, 의제 설정자)가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디지털 세상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편리한 세상을 만들고 싶고, 효율적인 스마트 행정을 많이 해서 WeGo를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모든 게 스마트화됐고, 스마트시티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죠.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6년 전에 만들어지긴 했지만, 너무 준비 없이 갑자기 우리에게 닥쳐버렸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생겨나는 부작용으로 디지털 소외도 있고, 딥페이크, 피싱, 디지털 성범죄 등의 범죄 문제도 있는 거죠. 그래서 WeGO 사무국에서는 윤리, 규범 등이 제대로 체계화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는 정책이 필요하죠.”
워킹맘, 그리고 미래
다른 나라는 여성 리더가 국제기구를 맡는 경우가 많은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다. 박정숙은 “사무총장이 여자라고 하면 그 나라의 이미지를 매우 좋게 본다고 한다.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
박정숙은 사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무총장이 될 때 제약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남편 이재영이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박정숙은 2012년 5살 연하의 이재영과 결혼했다. 사실 이재영은 박정숙이 사무총장이 되기 전에 정치계를 떠나 교수도 하고 스타트업도 운영하고 있지만 말이다.
“제 경력이라면 WeGo의 사무총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국회의원 출신이니까 누구의 부인이라서 선발됐다는 얘기가 나온 거죠. 저는 또 박정숙이 아닌 이재영의 아내가 된 거예요. 소문낸 그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싶었지만, 조직의 장으로서 조직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참았죠.”
30년 커리어를 무시당한 기분을 느꼈다는 박정숙은 “심지어 아들을 임신했을 때도 쉬지 않고 일했다”고 강조했다. 2013년 낳은 아들은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일과 가정을 분리하고 싶지만, 아들과 연락이 안 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워킹맘의 고충이다. 더불어 학구열이 높은 엄마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궁금했다.
“저는 사교육에 너무 매몰되어 있는 우리나라 교육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를 학원에 많이 보내지 않아요. 다만 영어, 체육, 코딩은 열심히 배우게 하고 있어요. 저는 무엇보다 아이가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어요. 자신감만 있다면 세상이 별로 두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사실은 특별히 사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유학도 서른 넘어서 갔지만 아이비리그에 갔고, 지금 국제기구에서 일하잖아요. 자신감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박정숙의 지난 30년을 돌아보니 혜안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 이전에 세계백신면역연합의 한국 대표를 맡았고, 석사 전공을 보면 스마티시티가 도래할 것을 예견한 것만 같다. 이처럼 시대를 읽는 눈을 가진 박정숙. 그녀는 앞으로의 미래를 내다보며 윗세대는 창직을, 젊은 세대는 창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와 같은 50대가 세상의 메커니즘을 캐치하고 자신의 경험치를 발휘한다면 최고의 경쟁력을 갖지 않을까 생각해요. 윗세대가 창직을 하는 리드 그룹이 된다면, 젊은 세대는 창작을 해서 새로운 걸 구현해내는 거죠. 메타버스 하면 우리는 어렵게 느끼지만 젊은 세대는 쉽게 만들 수 있거든요. 스마트시티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고 새로운 직업도 정말 많아요. 그런데 젊은 세대가 그냥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하고, 공무원이 되려고 공부하는 모습이 안타까운 거예요. 그래서는 앞서가기가 어렵다는 거죠.”
박정숙은 참 솔직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움으로 채워나갔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그 자신감을 놓지 않고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녀는 그 경험이 모여 현재의 여성 리더까지 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인품이 훌륭한 사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박정숙.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궁금하다.
눈을 뜬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우선 푹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을 때 쓴다. 눈을 떠야만 하루치 인생이 시작되고, 눈을 감으면 막이 내리기 때문에. 이제껏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깨우쳤을 때도 눈을 떴다고 한다. 성우 서혜정(61)은 새롭게 눈뜨기를 즐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롭게 시작한 하루치 인생이 기대돼 좋고, 일상 속 소소하지만 빛나는 깨달음이 반가워 좋다. 화수분 같은 목소리 나누며 살겠다는 다짐에 성우라는 한 우물을 40년 파온 경력까지 합쳐지니 금상첨화다.
서혜정 성우는 1982년 KBS 공채 17기 성우로 일찍이 데뷔했다. 이후 1988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외화 시리즈 ‘엑스파일’(X-Files)의 데이나 스컬리 역, KBS ‘생로병사의 비밀’, tvN 예능 프로그램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내레이션 등을 맡으며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현재는 한국예술원 성우과 겸임교수이자 서혜정낭독연구소 소장으로서 성우 지망생들을 만나고 있다.
양반 교육이 터준 성우의 길
‘국민 성우’의 될성부른 떡잎이 일찍이 보였던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는 양반가 핏줄인 어머니로부터 ‘양반 교육’을 받았다. “양반은 말을 빨리 하면 안 된다. 밥 먹을 때 소리 내서 말하면 안 되며, 식기 부딪히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서도 안 된다. 양반이란 걸을 때도 방정맞지 않게 걸어야 한다.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일부러 하신 건 아니었지만 성우 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언어 훈련을 받았던 셈이죠.”
게다가 어릴 적 집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드라마는 그가 목소리에 호기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라디오 드라마에 흥미를 느끼던 아이는 자라서 방송반 활동을 하고, 서울예대 방송 경연대회에서 대상과 개인상을 따내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경연대회 입상은 수시 특별전형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는 무리 없이 서울예대에 입학했다.
그도 꿈 많고 호기심 많은 여느 새내기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5월에 성우 선배의 추천으로 시험 삼아 본 KBS 공채에 덜컥 합격하고 말았다. 대학가요제도 나가고, 연기에도 도전하고 싶었던 꿈 많은 새내기는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휴학계를 내야 했다. 당시 KBS에 막 입사했을 때의 나이 스무 살. 동기 내에서도 여덟 살까지 차이가 났다. 막내 중의 막내였던 그는 어린 나이에도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한마디로 천방지축이었죠. 선배들에게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울기도 많이 울었으니까….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이 차이도 상당했거니와 나는 이 일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다, 고로 꾸지람 듣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모습을 선배들이 예쁘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성우실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훈훈하고 따뜻했기 때문이기도 했죠. 혼낼 때도 끝에 가서는 꼭 안아주거나 밥을 사주셨어요.”
칭찬은 천재를 노력하게 만든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칭찬은 막내 성우를 대성우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잘한다, 목소리 좋다’는 칭찬이 더 듣고 싶어 부단히 노력했다. 무슨 배역을 맡아왔는지 기억도 못 할 만큼 가리지 않고 대본을 받아 들었다.
가장 애정 가는 배역은 뭐니 뭐니 해도 ‘엑스파일’의 스컬리다. ‘엑스파일’은 1994년 10월 31일부터 2002년 10월 26일까지 방영된 미국 드라마다. 한 인물을 10년 동안 매주 한 번씩 만나는 기회는 그때도 지금도 흔치 않기 때문에 애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스컬리는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여성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이성적이며 똑 부러지고 빈틈없는 과학자. 타고난 성격이 정반대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단다.
반면 덮어두고 싶은 ‘흑역사’도 있다. 1992년에 개봉한 영화 ‘보디가드’의 휘트니 휴스턴 역이 그렇다. 녹음을 앞두고 목을 쓰는 성우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감기에 걸리고 만 것. 수많은 스태프들이 더빙 작업을 위해 어렵게 맞춘 일정을 미룰 수 없어 녹음 부스로 향했지만, 결국 기대한 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돌이켜봐도 여전히 아쉽다.
1982년부터 성우 일을 했으니 경력만 40년이다. 아침 10시부터 밤 12시까지 쉬지 않고 녹음 부스를 들락거렸다. 루브르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 베르사유 궁전부터 추억의 외화 시리즈, 유명 애니메이션, TV 프로그램 내레이션까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장을 보다가 직원에게 찾는 제품이 없는데 갖다달라고 요구하면 부탁한 물건 말고 ‘혹시 성우가 아니냐’는 질문부터 날아들곤 했다. 녹음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옛날 방송 속 자신의 목소리에 지레 놀랐던 적도 있다.
“저는 성우로서 할 건 다 해봤어요. 그래서 이젠 젊을 때처럼 일에 미쳐서 살지도 않고, 하나라도 더 하려고 욕심부리지는 않아요. 대신 그날그날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 하죠. 집에서 요리할 때나 청소할 때, 오디오 녹음이 필요한데 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도요.”
일에 미쳐 살던 40년 세월이 만들어낸 변화는 아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거창한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매일을 열심히 살다 보니 이 위치에 와 있더라고 회고할 수 있는 사람.
‘재능 재벌’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
늙지 않고 아무리 써도 축나지 않는 목소리를 나누는 일도 그렇다. 자칭 ‘재능 재벌’인 그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 활동에 나선 지도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배리어프리란 고령자나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이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어르신도, 장애인도 누구나 장벽 없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화면 해설과 자막을 동시에 제공한다. 화면 속 진희라는 인물이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장면이라면, ‘진희가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라고 해설해주는 식이다. 시각장애인연합회는 2000년대부터 배리어프리 버전 영화를 제작해 제공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그는 배리어프리 내레이션 녹음만 벌써 20년 넘게 해오고 있는 셈이다.
작년에는 서울노인복지센터와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시청자미디어센터의 협약으로 시니어 배리어프리 활동가 양성과정 중 하나로 창설된 수업을 새롭게 진행했다. 그는 교육과정 중 더빙과 내레이션 녹음하는 법에 대해 8주가량 강의했다. 녹음의 기초부터 영화 각 장면에 대해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일본어 대사를 한국어로 더빙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어르신들이 직접 대본을 써서 제작한 영화에 시니어들이 더빙한 배리어프리 영화는 지난해 ‘2021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기대 이상이었어요. 이미 목소리와 발성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모여서 그런지 무언가 가르쳐드리면 곧잘 흡수하시더라고요. 지난해 처음 시행한 게 워낙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올해도 같은 과정이 개설될 것 같아요. 다만 참여를 원하는 분들이 많아 수강신청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겠어요.”
그는 서혜경낭독연구소에서도 시니어 성우 지망생을 만난다. 기초부터 심화, 전문가반 등 다양한 낭독 강의를 제공하는 연구소를 지난해에만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거쳐갔다. 처음에는 목소리에 자신 있어 찾아왔다가 낭독의 매력에 빠져 오디오북 내레이터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성우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그가 추천하는 방법은 낭독이다. 사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추천하고는 있지만, 시니어를 대상으로 가르칠 때는 특히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목소리는 늙지 않아요. 그런데 분명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이건 말소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신체 기관, 즉 조음 기관들이 둔해져서 그래요. 나이가 들수록 말할 일이 줄어들거든요. 그러면 혀, 입술, 턱, 치아 같은 조음 기관이 점차 굳으면서 둔해져요. 목소리가 변한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이미 줄어버린 ‘말할 기회’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좋아하는 글을 혼자 소리 내 읽는 일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직접 말하고 본인 목소리를 직접 듣는 낭독은 눈으로만 글을 읽고 이해하는 묵독보다 뇌를 더 자극하기 때문에 치매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그렇기에 꾸준히 낭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젊어지려면 조음 기관을 깨워내고 훈련해야 된다는 것. 오죽하면 그가 써낸 책 제목이 ‘나에게, 낭독’일까.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는 강의 수강생들의 연령대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그는 최근 낭독연구소 덕분에 의외의 효과를 봤다. 낭독 수업이 세대 화합의 장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 청년들은 중장년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중장년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요즘 세상에 대해 배우는 식이다. 낭독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눈을 뜨는’ 기쁨을 함께할 수 있어 요즘 그는 기쁘기만 하다.
만 60세, 새로운 서혜정의 ‘지금 이 순간’
그는 사람 나이 60세 때 진정한 ‘인간’이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까지는 몸이 성장하는 시기이고, 스물부터 예순까지의 40년은 인간이 되기 위해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시기라는 것. 벼는 익어야 고개를 숙이듯, 60년이 지나야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의 그의 지론이다. 그는 새로 태어난 지금이 만족스럽다. 60세인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그립다거나 돌아가고 싶은 나이도 없다.
“올해로 103세이신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딱 100세 됐을 때 했던 인터뷰 기사가 기억에 남아요. 기자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이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분 대답이 60세였어요. 기자가 더 젊은 시절을 놔두고 왜 60세를 골랐느냐 되물으니 ‘60세는 돼야 철이 들어 그렇다’고 답하셨거든요. 60세가 된 지금 100% 공감해요.”
최근에는 ‘사랑’에 대해서도 눈떴다.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데, 그런 건 불가능하다 여겼던 생각을 고쳐먹은 지 얼마 안 됐다. 그렇다고 거창하거나 숭고한 희생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약속을 잡을 때 나보다 남에게 더 편한 곳으로 장소를 정하고, 나보다 남을 위해 먼저 기도할 줄 알게 됐다고나 할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삽입곡 ‘지금 이 순간’이 그의 테마곡이다. 그의 목표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오늘 만나는 사람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출근을 마실 나가듯 하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 즐길 뿐이다. 다만 하루하루 살다 보면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강렬한 느낌은 곧 경험이 뒷받침해주는 근거 ‘있는’ 직감이다. 매일에 충실했던 40년 세월이 국민 성우 서혜정을 만들었다. 그가 오늘보다 내일 더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려주리란 직감이 들었다.
봄볕이 이리도 눈부신데 가만히 있으라니, 봄바람 속으로 마음 놓고 산책하고픈데 조심하라니. 지금껏 갑갑한 일상도 잘 받아들였다. 봄 타령으로 호들갑 떨 때는 아니지만 이런 일상에서 자신을 잠깐씩이라도 끄집어내 주고 싶다. 자동차 핸들을 돌려 경기도 화성 쪽으로 달리면 잔잔한 서해 바다에 천혜의 갯벌과 물때가 있고, 어스름 저녁 무렵엔 해넘이가 예쁘다. 시원한 궁평항과 뻥 뚫린 방조제를 달리고 평화를 되찾은 매향리와 잊지 말아야 할 제암리까지 돌아보는 하루. 멀리 갈 필요 없다.언제라도 부담 없이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 촉촉한 서해로 달려보자.
화성의 궁평항은 갈매기가 떼 지어 나는 풍경이 우선 떠오른다. 무엇보다 서해 노을의 명소다. 방파제 끄트머리쯤의 정자에서 즐기는 궁평항의 은은한 일몰은 화성 8경에 들 정도로 일품이다. 이젠 계절별 데이트 코스로 수많은 인파가 찾아드는 핫플레이스이기도 하다. 바다 위로 걸을 수 있도록 설치한 데크에선 낚싯대를 던지기만 하면 해안 낚시터 피싱 피어가 가능하다. 물때만 잘 맞추어 가면 바다낚시의 짜릿한 입질과 손맛을 경험할 수 있다. 단, 요즘 코로나 방역지침이 불확실하니 피싱 피어 구조물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고 갈 일이다. 부근에 100년 세월의 해송으로 이루어진 군락지도 장관이다.
궁평항의 봄바람과 서해 일몰
산책이나 낚시를 즐기다가 출출해지면 주차장 옆으로 즐비한 푸드트럭이 있다. 20여 개의 빽빽한 푸드트럭에서는 새우튀김, 핫도그, 커피나 음료 등이 구비되어 군것질의 즐거움을 준다. 인근의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고, 생선이나 짭조름한 젓갈 등을 사올 만하다. 특히 전망대 카페에서 바다 쪽으로 쭈욱 나 있는 길은 최근 방영된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웅이와 연수의 이별 여행 촬영지로 알려졌다는 사실.
옛날 고려 시대 궁(宮)에서 관리하던 땅을 ‘궁평’이나 ‘궁들’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평항(宮坪港)은 일찍이 지형이나 기후 조건을 검증받은 셈이다. 평일 한낮에 찾아가면 천천히 산책하는 이들과 카메라를 든 몇몇 사진가들이 오갈 뿐, 그다지 붐비지 않아 비대면의 거리 유지가 가능한 궁평항이다.
궁평리에서 이어지는 화성방조제는 가슴이 뻥 뚫리도록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길이다. 가끔씩 차들이 지나가고, 우측의 자전거 도로엔 라이딩족들이 휙휙 달려나간다. 건물 하나 없고 도로조차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다. 장기간 이어지는 집콕의 갑갑함을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리며 해소할 만하다. 쭉 뻗은 직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저 길 끄트머리에 봄을 알리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게 보인다. 바야흐로 봄이다. 방파제 위로 부모님을 태운 듯한 휠체어를 밀며 걷는 풍경도 있다. 상쾌한 바닷바람 속 두 모자의 모습이 봄볕처럼 따뜻하다.
이곳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와 우정읍 매향리 사이의 바다를 막아 건립한 방조제다. 달리다 보면 화성방조제 중간 지점쯤에 선착장이 있다. 낚싯줄을 던지며 유유히 바다를 응시하는 강태공들의 여유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선착장엔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위로 무수한 갈매기들이 난다. 길 건너편에 보이는 화옹호(華饔湖)는 화성시에서 방조제를 막아 화옹 간척지구에 조성한 인공호다. 지금은 중요한 환경생태지역이다. 길 양옆으로 바다와 민물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수로엔 겨우내 얼었던 물 위로 철새들이 떼 지어 있고 갈대가 잔잔히 흔들린다. 그 옆으로는 캠핑카와 텐트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화성 매향리 마을의 변신
궁평리에서 화성방조제를 따라 달리면 한쪽 끝에 이름도 예쁜 매향리(梅香里)가 나온다. 지금은 자연과 예술의 마당 매향리로 불리지만, 한때는 폭격 소리와 포탄 연기로 지역주민들이 고통받았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곳에 미군의 사격장이 들어섰다. 매화 향기 날리고 갯벌이 아름답던 매향리 마을은 자그마치 50년이 넘도록 주민들이 일상의 불편함은 물론이고 생업에도 지장을 받으며 살아온 곳이다.
결국 2005년 사격장이 폐쇄되고, 그 자리는 포탄과 총알 흔적들이 모인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전쟁의 도구로 여러 아티스트들이 표현한 역사관 마당은 매향리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고 기억하는 문화예술 공간이 되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미군이 해상 표적으로 삼고 사격을 했던 부근의 농섬(籠島)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다. 매향리 역사관 주변으로는 화성드림파크가 있고, 최근 생겨난 평화생태공원도 들러볼 만하다.
멈춰진 시간, 4.15를 기억하다
만개한 봄꽃을 아직 보기 어렵다면 실내 식물원으로 화성시 우리꽃 식물원은 어떨지. 화성에서 봄을 먼저 알리는 곳이다. 한옥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대형 유리 온실 속에서 수백 종의 우리나라 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 야외에는 분수광장이나 생태연못, 철 따라 피어나는 다양한 목본류가 식재되어 있으나 아직은 푸릇푸릇해질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궁평항에서 30분 거리다.
우리 국민들이 잊지 못하는 3.1절이 지났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후 화성의 발안 장터에서는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이에 일본의 경고와 보복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에 의해 민간인 29명이 이곳 제암리에서 무차별 학살당했다.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 사건은 그대로 묻힐 뻔했지만,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영국 의학자 스코필드에 의해 외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4월 5일 시장에 모인 주민들과 교회 청년들이 만세를 외치고 시가행진을 했다. 이에 일본 경찰의 무차별 총질과 매질로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바로 4월 15일 제암리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해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시체를 끌어내어 칼질을 하고 불을 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제암리 기념관에 전시된, 1919년 4월 15일 당시를 증언하는 생생한 사진과 자료들은 온몸에 소름 돋는 분노를 일으킨다. 빠뜨리지 말아야 할 다크 투어 지점이다. 그 시간은 세월의 뒤안길로 흘러갔지만 실체적 진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제암리에 가면 절대 잊지 못할 우리의 진실이 있다.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 천종호 판사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8년 연속 소년 재판을 담당하며 때로는 서슬 퍼런 호통으로, 때로는 뜨거운 눈물로 비행 청소년의 곁을 지켜왔다. 2018년 법원 정기 인사로 소년부를 떠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른들의 방임과 학대, 가난 등으로 인해 내몰린 소년범이 삶을 새로 빚어내도록 돕고 있다.
2017년 인천 초등학생 유괴 살인 사건, 같은 해 부산 여중생 집단 폭행 사건, 2018년 인천에서 갓 졸업한 초등학생이 또래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 등 최근 몇 년간 이슈가 됐던 소년 범죄들은 소년범 처벌 강화, 소년법 폐지, 촉법소년 연령 하향 등의 논쟁에 불을 지폈다. 게다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의 세계적 흥행과 맞물리면서 이에 관한 여론이 또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소년심판’은 실제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년 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극화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단순히 가해자나 피해자, 엄벌주의 혹은 온정주의에 그치지 않고 개인과 가족,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다각도로 그린다. 대신 기존 가정법원의 소년부를 소년형사합의부로 명명했고, 현재 소년 재판이 판사 혼자 단독재판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한 명의 부장판사와 두 명의 배석판사가 소년보호사건과 소년형사사건을 모두 담당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천종호 판사는 ‘소년심판’ 제작진에게 자문을 한 장본인이다. 극 중 심은석 판사 역할을 맡은 배우 김혜수 또한 천 판사의 동영상과 책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처벌보다 중요한 건 아이들
소년과 천종호 판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8년간 소년범들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훈계하고 교화하는데 힘썼으며, 열악했던 소년 재판의 실상을 조명해 개선하려 했다.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선처를 호소하는 가해 청소년을 향해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주목받았다. 이 장면은 아직까지 인터넷에서 회자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당시 앞에 선 비행 청소년들의 눈물에 흔들리지 않고 엄중한 처벌을 내린다 해서 ‘사이다 판사’, ‘천10호’라 불렸으며, 반성의 기미가 없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해 ‘호통 판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천 판사가 소년 재판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하루에 약 100명을 담당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아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 이름 한 번 부르고, 죄목을 확인한 후 앞으로 그러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나면 끝이다. 때문에 호통은 고작 컵라면 하나 끓이는 짧은 순간 동안 강한 울림을 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터.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호통 치료’는 꽤 효과적이다. 그냥 목청만 대충 높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겼기 때문이리라. “사실 재판정만큼 호통과 안 어울리는 장소도 없어요. TV나 드라마에서 정숙하라고 외치며 법봉을 두드리는 판사를 상상하신 분들에게는 제가 호통 치는 모습이 더욱 낯설어 보이겠죠. 평소에는 다소 내성적인 편입니다. 혼자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하고, 마음도 약해요. 그저 아이들이 다시는 법정에 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호통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호통을 치는 것은 보통 경미한 범죄로 집에 다시 돌려보내는 아이들을 위한 방법이다. 중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호통 대신 그에 맞는 처벌을 내린다. 천10호라는 별명도 소년원에 2년 동안 보내는 가장 무거운 10호 처분을 많이 내린다는 의미에서 파생됐다. “아이들에게 미움을 사거나 원망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죠.” 그의 호통은 가장 기본 의무인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부모들, 교육자로서 아이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사태를 수수방관하거나 제 몸 사리기에만 급급한 선생님들에게도 향한다. “우리 사회가, 부모들이, 어른들이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라면서 말이다.
근본 원인이야 어찌됐든 일단 부모와 가족에게 심려를 끼치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것은 소년 자신이다. 그래서 스스로 ‘잘못했다’고 말하게 한다. 법정에 와서 판사의 이야기만 수동적으로 듣기 보다 스스로 무엇이든 해보게 하는 것이 반성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다. “보통 부모를 향해 꿇어앉고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거나, ‘사랑합니다’를 열 번 정도 외치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지만 한 번, 두 번 외치다 보면 밖으로 돌던 말이 그 소년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요. 덩달아 부모의 마음에도 울림을 주죠. 그런 뒤 소년과 부모를 껴안게 하는데 그럴 때면 대부분 울음을 터뜨립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법정이 떠나가라 엉엉 소리 내 우는 가족도 있어요.”
내던져진 비행 소년의 현실
말로 안 되는 아이들에게는 시나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온 ‘그 남자’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읽게 시키기도 한다. ‘그 아이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늘 그림자처럼 그대를 따라다니며 그 아이는 언제나 울고 있어요.’ 이 방법은 소년 재판 담당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서 배운 뒤 바로 실천했다. 아이가 자기 마음을 간접적으로라도 표현하게 하려는 의도다. 물론 법정을 나선 후 부모와 자식이 언제 화해했냐는 듯 다시 돌아설지도 모르지만, 찰나의 순간에라도 마음의 씨앗을 심어주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않을까 해서다.
사실 판사들에게 소년재판부 부임은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할 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 판사는 가해 학생들의 대변인을 기꺼이 자처한다. “소년들과 이렇게 진하게 얽힐 줄 몰랐죠. 저 역시 달동네에서 자라면서 극에 달한 가난과 사회의 무관심에 상처받았던 적이 있어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경험 덕에 위기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째서 비행을 저질렀는지,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그 배경과 맥락을 누군가 헤아려준다면 충분히 달라질 거라 믿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이 봤고요. 소년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책임감이 커집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호자나 가족의 보호 아래 있는 아이들은 비행을 저질렀을 때 도움을 받아 피해자에게 변상 혹은 용서를 받고 경찰 단계에서는 훈방 조치를, 검찰 단계에서는 기소유예처분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소년 법정까지 오는 것이다. 이들은 보통 가정 해체, 애착 손상, 가난을 겪고 있다. 죄목을 살펴봐도 경제적 곤궁으로 인한 생계형 범죄가 대부분이다. “전체 소년 사건 중 흉악범죄는 1%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9%의 아이들은 살인, 폭력, 성폭행 등 중범죄와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슈퍼에서 과자를 훔치다 법정에 서는 아이도 많죠. 스스로 보호할 힘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주위 환경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보호해 줄 어른이 없고, 좋은 동행이 되어줄 친구가 적은 상태에서 아이가 올곧게 성장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지도 몰라요. 죄를 지으면 물론 벌을 내리겠지만, 저에게는 소년들에게 세상을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고, 판결 이후 찾아올 삶까지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소년범을 둘러싼 가정과 사회의 보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다. 특히 경범죄를 저지른 소년들은 보호자가 잘 관리해 재범을 막으라는 취지로 1호 처분을 하는데, 가정이 붕괴된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보니 소년부 판사들이 처분에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천 판사는 대안이 될 수 있는 청소년회복센터(사법형 그룹홈)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가와 사회가 움직이지 않으니 정말 답답했죠.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며 고생하는 바람에 이명을 얻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 결과 2016년 청소년복지법 개정을 통해 ‘청소년회복지원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됐고, 2019년 1월부터 국가의 예산 지원을 받게 됐어요. 하지만 아직 시설들이 민간에 의존한 채 운영되고 있고, 국가가 운영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기 때문에 차차 보완이 필요합니다.”
좋은 어른이 좋은 소년을 만든다
현재 대한민국은 소년범을 만 10세 미만의 범법소년, 만 10~14세 미만의 촉법소년, 만 14~19세의 범죄소년 등으로 구분한다. 촉법소년은 형사책임 능력이 없기 때문에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더라도 형사처벌을 하지 않고, 가정법원이 소년원으로 보내거나 보호관찰을 받게 하는 등 ‘보호처분’을 할 수 있다. 이보다 어린 범법소년은 아예 보호처분도 내리지 않는다. 범죄소년은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살인과 같은 흉악범죄를 저질러도 형량은 최대 20년으로 제한돼 있다. 이렇다 보니 합법적인 처벌 면제를 악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의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는 데다 더욱 잔혹해지는 범죄 수위 탓에 촉법소년의 연령을 낮추거나 소년법을 폐지해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천 판사는 환경을 마련하지 않고 무작정 보호처분 기간을 늘리거나 형사처벌을 할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소년범에 대한 교화 가능성은 무시한 채 이른 나이에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면 오히려 사회성을 잃고 더 나쁜 범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소년 보호처분을 다양화하고 수용 시설을 증설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을 통틀어 소년교도소가 1개, 소년원이 10개로 인구 대비 시설 수가 턱없이 부족해요. 전국의 소년범을 한곳에 모아두면 다 한 패거리가 되어 출소하게 되는 상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처벌을 강화할 거라면 수용 시설이 먼저 증설돼야 합니다. 출소 이후 저소득층과 빈곤층 아이들의 재범률을 낮추기 위해 교육과 보호를 병행할 시설을 확충하는 것도 중요해요. 국가가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재편할 수 없으니 청소년회복센터 같은 ‘대안 가정’ 제공을 확대해 아이들의 비행성을 낮추는 방식으로요. 그게 더 현실적이라 봅니다.”
많은 이가 소년범을 둘러싼 주제에 대해 빠르게 불타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예컨대 “피해자를 위해서 가해자를 엄벌해야 해”라든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니 교화하면 돼” 등 여러 의견이 충돌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그러나 소년범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천 판사는 말한다. “비행이라는 거푸집을 벗기고 나면 삶의 부조리와 폭력 앞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내던져진 아이들의 유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비행 내용과 범죄 내용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실상을 어른들이 헤아려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소년범은 악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길러진 악이니까요.”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영화는 애잔해도 때로 설렘을 던진다. 누군가의 가슴속에선 상상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 扮)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아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울림이 남는 종소리처럼 여운이 길다. 때론 소리나 냄새로 또는 순간의 풍경으로 기억하는 여행이 있다. 군산은 영화 한 편만으로도 가능하다.
기억 속의 나만의 풍경이나 대사 몇 줄로도 군산을 떠올리게 하는 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초원 사진관은 군산 월명동의 어느 골목에 찰떡처럼 잘 어울리게 자리 잡았다. 그곳이 영화 속 정원과 다림(심은하 扮)이 정말 일상생활을 했던 곳인 양 착각하게 한다.
1998년의 영화였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이제는 고전 명작이라 할 때가 되었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절제된 연출과 섬세한 감정선을 조용히 담아낸 세련됨이 보는 이에겐 그저 잔잔하다. 어느 TV의 영화 프로그램에서는 “어쩜 20년 전인데도 촌스러움이 1도 없어요” 란 말을 했던 이가 있었다. 드라마틱했을 사랑과 죽음을 다루었음에도 아릿하지만 도무지 신파스럽지 않다. 군산엘 가면 나만의 보폭으로 나만의 영화적 감성으로 그 골목을 산책하듯 정원과 다림의 이야기를 들춰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여행일 수 있다.
초원사진관은 여전히 소박하다. 영화 속에서도 수수해 보이지만 그 모습이 푸근하고 친근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제작진은 기획 당시 세트 촬영을 배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다가 군산의 한 카페에 쉬러 들어갔다가 창 밖으로 내려다본 곳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한 것이다. 주인에게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개조하여 초원사진관이 되었고 영화 대부분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그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서 다시 영화 배경 속 모습으로 복원하는 탁월한 선택 덕분에 영화로운 군산을 찾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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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환상을 깨는 일일 수도 있다. 일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듯 주춤주춤 다가가게 된다. 스튜디오에는 8월의 더위에 지친 심은하에게 시원한 바람을 보내던 선풍기, 문틈으로 끼우던 편지, 영화 속의 스틸컷이 스토리 섹션별로 벽면에 그대로 붙어있고 심은하와 사뭇 다른 사람들이 심은하처럼 앉아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잇는다.
사진관 주변으로 정원이 타던 스쿠터와 주차요원이던 다림의 근무용 소형차 티코, 심은하가 한석규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통과했던 해망굴, “내가 어렸을 적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을 하곤 했다.” 망연히 앉아 독백하던 초등학교 운동장, 삶이 다해 가는 정원이 창문 넘어 어렴풋이 다림을 바라보는 텅 빈 감성의 섬세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이 초원사진관 주변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의 자취를 따라 걸어볼 만하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이후 군산이 배경이 된 영화나 드라마가 늘어났다.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 말죽거리 잔혹사, 마더, 화려한 휴가, 마파도, 변호인, 남자가 사랑할 때. 시네마 투어를 떠나도 좋을 군산이다.
군산을 걷다
볼거리가 대부분 가까운 근처에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걷는 여행이 가능한 군산이다. SNS 명소인 경암동 철길마을은 조금 멀리 있으니 택시 이용이 좋겠다.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오감 만족의 여행을 누릴 수 있는 지방 도시에서 보내는 하루는 여유롭다.
초원사진관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 강점기에 유명한 포목상이던 일본인 히로쓰가 살던 목조 주택이다. 당시 호남지역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여서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빨간 담장 안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단정하다. 일본식 고급 주택 양식의 전통 가옥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곳에서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와 같은 영화가 촬영되었다. 쭉 돌아보고 나오려는데 입구에서 안내하시는 분이 뒤편 뜰의 복(福)이라는 글자를 알려준다. 안으로 들고나는 뜰 바닥에 복(福) 자가 쓰였는데 복이라는 글자를 밟고 들어가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등록문화재 제183호다.
신흥동 일본식 주택 근처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가 있다. 그리고 부근에 일제강점기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립한 대표적인 금융시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는 금고 속 조선은행 이야기를 읽으며 분노가 치민다. 수탈의 잔혹사가 전해진다.
군산 근대건축관,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내항의 일명 뜬 다리 부잔교, 다다미룸 미즈 커피, 장미갤러리 근대미술관을 지나 근대역사박물관 바로 왼쪽으로 구 군산세관에서 거두어들이던 세금은 또 어땠을까. 지금 보아도 우리 민족의 고통이 피부로 느껴지는데 그 시절엔 얼마나 치를 떨었을지 짐작해 본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1908년에 지어진 옛 군산세관 창고가 정담(情談)이라는 인문학 창고로 재탄생되었다. 꽉 찬 서고의 든든함과 다양한 인문학 강좌와 놀이문화가 명물이 된 오래된 창고에서 기다린다. 정담 앞의 잔디밭과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곳에서 고종황제가 즐겨 마셨다는 커피 한잔의 휴식을 누려볼 일.
군산은 거리 곳곳의 표지판이 온통 근대 역사와 관련된 흔적과 문화들로 새겨진 도시다. 마침 이런 발자취를 따라 맘 편히 여행할 수 있는 군산 근대항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가 있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되는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는 걷기에 따라 약 2~3시간 정도 소요된다. 다니다 보면 스탬프 투어를 코스대로 관람하는 여행자들을 자주 본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스탬프 도장을 찍어가며 생기발랄한 촬영을 하는 젊은 커플들의 모습이 풋풋하다. 혹시 도보로만 다니기에 심심하다면 군산시에서 마련한 공용자전거 대여가 있다. 바람을 맞으며 달려보는 군산 거리도 즐거운 일이다.
이 밖에도 볼거리는 지천이지만 군산 여행도 식후경이다. 단팥빵 사러 이성당 빵집을 들러야 하고 짬뽕도 먹어야 한다. 탁류 길의 군산 짬뽕 특화 거리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인 빈해원이 있다. 실내는 흡사 홍콩영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다. 요즘 멋지게 꾸며놓은 ‘신상’ 명소와 달리 오래된 집이 주는 깊이는 확실히 다르다. 이 또한 근대문화 거리 근처에 있으니 금방 찾아갈 수 있다.
귀갓길엔 금강 변에 정박한 배의 모양을 한 채만식 문학관에 들러볼 일. 풍자적 글쓰기로 근대문학을 일군 탁류(濁流)의 채만식 문학관은 작가의 특별한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특기할만한 것은 한 코너에 채만식의 친일 작품이 나열되어 있고 '풍자적 작가 민족의 죄인'이라는 자료도 볼 수 있었다. 친일 활동에 참여한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철저히 반성하는 자의식은 의미 있다. 금강 들판이 내다보이는 문학관 광장을 나와 금강 갑문을 지나며 영화로운 군산 여행의 마무리를 한다.
군산 당일 여행
자동차: 서울 시준 약 두 시간 반 내외
기차: 군산역이 외곽에 있으므로 기차를 탈 경우 KTX 익산역 하차 후 군산행 시외버스가 용이함. 약 두 시간
강남고속터미널: 군산 약 2시간 30분
주소: 전북 군산시 구영2길 12-1 초원사진관
세상은 모든 게 빠르다.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어 있고, 신나게 쓰던 신조어는 한물간 취급을 받는다. 좁혀지지 않는 급격한 변화의 틈,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한눈에 세상을 파악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최신 문화를 소개한다.
광고 모델, 아나운서, 아이돌 등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여겼던 직업 분야에 ‘버추얼 휴먼’(Virtual Human)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버추얼 휴먼은 한마디로 ‘가상 인간’이다. 인공지능(AI)과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기반으로 대역 배우의 몸에 전혀 다른 얼굴을 입혀 실제 사람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가상 인간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적 존재였지만, 이제는 광고나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은행원이나 기상캐스터처럼 구체적인 직업군에서도 활약 중이다. 신한은행과 국민은행은 디지털 키오스크로 원하는 업무를 안내하는 AI 은행원을 도입해 운영하고, 여수 MBC에서는 AI 기상캐스터가 날씨 소식을 전한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가상 인간은 스물두 살 ‘로지’다. 지난해 7월 신한라이프 TV 광고로 얼굴을 알렸다. 발랄한 어깨춤과 자연스러운 미소 덕에 대중은 그를 신인 연예인 정도로 인식했다. 이후 개발사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를 통해 가상의 인물임이 알려진 로지는 더욱 큰 인기를 끌며 2021년에만 10억 원이 넘는 광고 수익을 올렸다. 최근 이서진 주연 드라마 ‘내과 박원장’에 특별 출연하고 데뷔곡 ‘후 엠 아이’(WHO AM I)를 발매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시동을 걸고 있다.
가상 인간 하나, 열 모델 안 부러워
사실 가상 인간은 대중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매력과 현재 트렌드를 치밀하게 계산해 개발된다. 이 과정에서 호감도 높은 유명인의 특징을 참고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외모나 정체성이 투영된 셈이다. 로지의 경우 동양적인 마스크와 171㎝의 서구적인 체형, 개성 넘치는 패션 센스, 자유분방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환경에 관심이 많아 ‘제로 웨이스트’(일상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설정이 있다. 게다가 소셜미디어(SNS)에서 실제 인간처럼 글이나 사진을 올리고 소통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가상 인간은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시간과 체력에 구애받지 않고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소통하거나, 동시다발적인 활동이 가능하다. 언제든 옷이나 헤어스타일을 바꿀 수도 있다. 특히 학교 폭력 같은 과거의 오점이나 열애설, 음주운전 등 사생활 문제에 휘말릴 일이 없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가상 인간이 광고 모델로 제격임은 물론,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평가한다. 미국 시장조사 업체 비즈니스 인사이더 인텔리전스는 “앞으로 전 세계 브랜드가 인플루언서(영향력 있는 개인)를 이용한 마케팅에 연간 약 17조 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중 상당 부분은 버추얼 휴먼이 차지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성세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집중하는 반면, ‘디지털 원어민’으로 나고 자란 세대는 그게 무엇이든 나에게 어떤 활력이나 즐거움을 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물론 실존 인물이 아닌 탓에 가상 인간과 깊은 감정 교류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대감과 연대감을 형성할 수 없어, 흥미를 갖는 것 이상으로 탄탄한 마니아층을 구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가상 인간은 당분간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발판 삼아 인기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들은 우리를 새로운 ‘가상 세계’로 인도할 안내자가 될 수 있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남은 재산과 빚은 일반적으로 법정상속인인 자식이 물려받게 된다. 법정상속인은 상속 재산의 규모를 고려하여 상속, 한정승인, 상속포기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 중 부채가 많아 상속포기 혹은 한정승인을 신청해야 하는 경우, 상속인은 신청 기간은 물론 상속 재산과 사망 보험금의 관계에 대해 알아둬야 한다.
피상속인의 사망 후 재산 상속이 개시되면 그의 재산은 물론 부채(채무) 또한 모두 상속인에게 이전된다. 이때 상속받을 재산보다 채무가 더 많아 피상속인의 빚이 고스란히 상속인에게 승계돼 곤경에 빠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런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지안은 엄마의 빚을 물려받은 뒤, 이를 갚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범죄까지 저지르며 힘겹게 살아간다.
우리나라 민법은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 제도를 두고 있다. 두 가지 다 상속 개시(사망)를 안 날로부터 3개월 안에 법원에 신청해야 한다. 한정승인은 피상속인의 채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어 무조건 상속을 포기하기 곤란한 상황일 때 선택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상속을 받기는 하되, 채무에 대해서는 자기가 받은 상속 재산 한도 내에서만 변제 책임을 진다는 의사 표시다. 상속포기는 상속 자체를 포기하는 것으로, 재산과 빚 모두 물려받지 않겠다는 의미다. 대신 내가 상속을 포기하면, 나 다음의 후순위 상속인에게 재산과 빚이 넘어간다. 아무런 신청을 하지 않으면 금액과 상관없이 재산과 빚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
상속받은 빚이 재산보다 많은 것을 3개월의 기간 내에 알지 못하고 단순 승인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정승인’ 제도도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신청해야 상속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만 피상속인 명의의 계좌에서 예금을 단 1원이라도 인출해 장례비 등으로 사용하면 재산의 임의 처분에 해당돼 상속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경우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이 제한돼 빚을 떠안을 수 있다.
상속포기 시 보험금 수령은?
상속을 포기하거나 한정승인을 신청하면 피상속인의 사망에 따라 보험회사로부터 수령할 수 있는 사망보험금도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대법원은 “보험 수익자인 상속인의 보험금청구권은 상속 재산이 아니라, 상속인의 고유 재산으로 봐야 한다(2004.7.9. 선고 2003다29463 판결)”고 판시했다. 즉 보험금 수익자인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하더라도 수익자는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상속인이 ‘사망보험금’도 상속 재산으로 간주해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거나, 피상속인의 채권자들이 사망보험금을 압류하겠다고 주장하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러나 상속을 포기한 상태에서는 어차피 피상속인의 채무를 승계받지 않았으니 채무 이행을 이유로 강제집행을 할 수 없다.
대신 보험금과 보험계약에 대한 압류는 별개다. 만약 피상속인이 사망하지 않은 상태라면 피상속인이 계약자인 보험계약도 이 사람이 소유한 금융 자산이므로 채권자가 그에 대한 채무 이행을 이유로 보험금 압류가 가능하다. 미리 계약자를 변경하는 방법도 있지만 채무 면탈을 목적으로 재산권을 이전했다면 채권자로부터 민법상 사해행위취소의 소를 제기당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사해행위취소의 소는 채무자가 채권자를 해함을 알고 재산권이 목적인 법률 행위를 했을 때, 그 수익자 또는 전득자에 대한 관계에서 채무자의 법률 행위를 취소하고 원상회복을 청구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보험 가입 시 계약자를 배우자나 자녀 등 상속인 명의로 가입하는 편이 안전하다.
덧붙여 교통사고로 사망해 가해자(상대방) 보험사가 지급하는 고인에 대한 위자료나 장래에 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입(일실수입)에 대한 손해액 등 피상속인에게 지급되는 금액은 상속 재산에 해당된다. 고인이 생전에 가입한 상해·질병보험도 마찬가지로 상속을 포기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 이때는 보험 가입 시 보험 수익인을 자신이 아닌 법정상속인으로 지정한다 해도 피보험자가 사망 전에 받을 수 있는 보험금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강경 읍내에 들어서기 무섭게 짭조름한 젓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한때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던 이름난 포구였고, 조선 말기에는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강경 장날이 있던 곳. 이제는 북적이던 그 자리에 그 시절의 낡은 건축물들이 세월을 지키고 빛바랜 표정의 골목 사이로 영화를 누리던 오래전의 시간들이 너울거리고 있다.
옥녀봉 아래 금강 물길 따라 흐른 세월
먼저 옥녀봉에 올라 강경의 풍경을 조망해보자. 강경 포구의 역사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좁다란 골목길을 오르면 나타나는 해발 44m의 야트막한 봉우리. 당시의 통신 방법인 봉수대가 우뚝하다. 해조문 아래로 금강 줄기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파시가 2~3km 늘어섰고 고깃배가 빈틈없이 정박해 있었다는 포구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뿌옇고 조용하다.
옥녀봉에 올랐으니 비탈 낮은 절벽 위에 위치한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의 배경이 된 집까지 들여다보고 내려와야 한다. 박범신 작가는 강경읍에서 익산으로 기차 타고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새벽밥 먹고 집을 나오면 저 아래 금강변 갈대밭에 들어가 하루에 책을 두 권씩 읽었다고 한다. 작가를 키워낸 옥녀봉 일대의 갈대밭과 강경은 여전히 옛 모습을 지닌 채 평온하다.
흐린 날, 읍내 길 걸어 근대 문화 속으로
강경 읍내는 느릿한 도보 여행으로 맞춤한 소읍이다. 골목을 오르고 그 거리를 구석구석 꼼꼼히 걸어서 다녀야 제맛이다. 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가면 그곳에 상주하는 해설사님과 잠깐만 이야기해도 강경의 면면을 알기 쉽게 안내해주어 매우 유익하다. 구 강경노동조합은 등록문화재 제323호로, 1920년대 영향력 있던 조직체였지만 지금은 강경역사문화안내소 역할을 한다.
강경은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시대부터 200여 년간 무역의 허브였다. 서해와 금강의 넉넉한 물길을 따라 강경포구에 이르러 활발한 장마당이 펼쳐지던 100년 전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관공서, 은행, 교회 등이 들어서며 가히 강경의 전성기였다. 그중에서 도시의 중심 상권을 본정통이라 했던 그 거리에 남겨진 근대 문화를 찾아가 본다.
그 길 초입의 강경상업고등학교 교장 관사는 뾰족한 기와지붕의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다. 문득 피천득님의 수필 ‘인연’이 떠오르는 느닷없는 상상력이 발동되기도 한다. 이제는 폐가인 듯 너무 낡아서 수필처럼 맑고 순한 이야기 속의 풍경은 아니지만, 교장 관사를 둘러보는데 아사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케케묵은 옛 일본식 가옥이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강경의 볼거리와 근대 문화유산은 양손의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정도다. 강경상고를 시작으로 1937년 준공된 등록문화재 제60호 중앙초등학교 강당과 스승의 날 발원지라고 하는 강경여중고가 그 길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다. 옛 사진에서나 보았던 듯한 1930년대 정도의 모습으로, 퇴색된 근대 문화의 흔적이 마치 릴레이식으로 이어진다.
강경읍 계백로에 위치한 붉은 건물의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강경의 번성했던 근대 문화를 상징한다. 지금은 강경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들어가 보면 복층처럼 낮은 위층까지 전시관으로 포함된다. 특히 당시 사용되었던 묵직한 은행 금고를 볼 수 있다. 건물 뒤편으로 새롭게 조성된 일제 강점기의 강경구락부는 마치 시대극의 드라마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날씨조차 흐려서 은근히 옛 맛을 더한다.
강경의 근대 역사는 골목에도 켜켜이 묻어 있다. 걷다 보면 그 길 끄트머리 어느 모퉁이에 반듯하고 정갈한 자태의 2층 주택이 눈에 띈다. 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은 전통적인 한식 건축물이지만 1층과 2층 사이의 난간에 기와를 얹은 것이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나이 많은 약방 건물이 동네 골목의 오래된 주택이나 낡은 적산가옥들과 잘 어우러진다.
고난을 감당해낸 선교의 성지, 강경
읍내 길을 걷다 보면 의외로 한국 초창기 선교 역사의 흔적을 자주 만나게 된다. 높은 건물은 별로 없고 예스러운 집들과 무수한 젓갈 가게 사이로 뾰족한 첨탑이 눈에 확 들어오는 강경성당, 배의 형상을 한 외관과 하얀 외벽에 붉은 지붕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김대건 신부 기념관도 가까이 있다.
한국에서 첫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기념비가 있는 구 강경 성결교회, 옥녀봉 아래 초가지붕의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와 한옥의 강경 북옥감리교회 예배당, 100년이 넘는 근대역사전시관이 있는 강경 제일감리교회 등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답게 일제의 탄압 아래서 종교적 굳건한 믿음으로 고난의 역사를 감당했던 증거를 곳곳에서 보여준다. 성지순례지로 강경이 손꼽히는 이유가 있다.
강경읍 외곽의 금강가에 자리 잡은 죽림서원은 대숲이 배경이다. 왼편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강학 장소인 임이정과 팔괘정이 나지막한 야산에 자연스럽다. 조선 시대 사설 교육기관인 죽림서원의 낮은 담장 돌계단에 서면 안이 훤히 보이고 대숲에서 세월의 바스락거림을 듣는다. 금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내려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좋다.
아름다운 미내다리 이야기
읍내를 조금 벗어나 강경천 제방길을 걸어보는 시간도 특별하다. 그 둑방길을 가다 보면 멀리서 둥그스름한 원형의 다리가 보인다.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1731년)에 석재만으로 만들어진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 시절 강경포구는 물길 따라 사통팔달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어느 해 큰 장마로 강경에 몰려든 상인들의 발이 묶였다고 한다. 비로 인해 그 길을 연결해주던 다리가 떠내려가고 오도 가도 못 할 지경. 강경포구에 살던 사람들이 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재물을 모아 다리를 만들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온다. 따뜻한 이야기와 어울리는 예술적 토목 건축술로 평가받는 다리다.
200년 전통의 곰삭은 감칠맛, 강경
강경을 입에 올리면 저절로 따라붙는 말이 젓갈이다. 잠깐만 둘러봐도 도처에 젓갈백화점과 젓갈상회 천지다. 강경 읍내에 위치한 젓갈 가게가 140여 곳이나 되고 전국 젓갈 유통의 60%를 차지한다고 하니 가히 강경만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주는 천하의 별미 젓갈 반찬.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과학적 숙성 방법으로 예전보다는 짠맛이 덜하고 고소하다. 간 김에 젓갈 한 병 사면서 잊었던 ‘덤’ 문화의 즐거움도 경험한다.
옛 영화를 간직한 골목골목마다 오래된 시간이 반기는 곳, 강경.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극의 장면 속을 걷는 기분이다. 덜 변하고 자취 없이 사라진 것들이 많지 않아서 그리움도 적을 것 같은 곳. 쇠락한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있는 옛 시간이 고스란한 지난 100년의 유장한 기록들. 강경젓갈만큼 곰삭힌 날들이 거기 있었다.
강경 근대 문화 거리와 젓갈 이야기
자동차 : 서울 기준 당일 여행. 경부고속도로 천안→천안논산 고속도로→논산시 강경읍 도착, 약 두 시간 소요
기차 : 서울역에서 강경역까지 무궁화호로 2시간 반 정도. 레트로 감성의 기차 여행이다.
주소 : 구 강경노동조합(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문의하면 근대 문화 여행 안내를 받을 수 있다. 041-746-5411
여행 코스 : 옥녀봉과 주변▷강경 읍내▷구 강경노동조합▷강경상업고등학교와 주변▷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구락부▷젓갈 가게▷강경성당과 성지순례▷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죽림서원▷미내다리
설거지를 사랑하는 남자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자 두 사람.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와 마이크로소프트를 탄생시킨 빌 게이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 두 부호(富豪)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하는 습관이 바로 설거지라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를 거르지 않습니다. 일과 삶,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균형 있게 운영하는 것을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은 나아가 직장과 가정의 조화, ‘워라하’(Work-Life Harmony)를 추구합니다. 가정에서 에너지와 사랑을 충전해 다음 날 일터로 나가는 두 남자.
해외에 두 남자가 있다면 국내에도 못지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남편이라면 ‘공공의 적’ 역대 1위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최수종 씨를 떠올립니다. 옆집 정 여사가 집안일에 과부하가 걸린 어느 날 숨도 못 쉬게 몰아치며 설거지까지 겨우 마친 순간, 하필이면 텔레비전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아니 어떻게 앉아서 밥을 차려달라 할 수가 있어? 난 단 한 번도 아내가 밥할 때 앉아 있어 본 적이 없어. 옆에 꼭 붙어서 뭐가 필요한지 챙기고 심부름하고 무거운 것도 들고 그래야지.”
그 순간 소파에 편안히 기대 휴대전화로 유튜브에 몰입해 있는 남편이 눈에 띕니다. 울컥 눈물이 속에서 차오릅니다. 분노를 넘어 슬픔입니다. 이거 정 여사만 느끼는 심정일까요?
엄마가 뿔났다!
마음 미장공 세 번째로 나눌 주제는 ‘살림’입니다. 살림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를까요. 엄마, 아내, 주부. 그렇습니다. 집안일을 도맡은 사람. 밥, 빨래, 청소, 육아, 공과금 납부, 저축, 분리수거, 제사, 경조사 챙기기 등 눈에 보이는 일과 보이지 않는 일이 산더미입니다. 해도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금방 티가 나는 그 일이 살림입니다.
2008년 방영되어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엄마가 뿔났다’(KBS-2TV).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주인공을 맡은 김혜자 씨는 그해 방송사와 백상 연기대상을 수상합니다. 엄마이자 며느리이자 아내인 주인공은 62세 되던 날, 당당히 1년 휴가를 선언하고 원룸을 얻어 집안 탈출에 성공합니다. 남편부터 세 자식, 며느리까지 모두가 반대하던 휴가를 단 한 사람 시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감행합니다. ‘엄마 파업’으로 획득한 자유와 나만의 시간을 누리기도 잠깐, 임신한 며느리는 하혈하고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복귀합니다. 66부작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하지만 다음 생에는 나도 내 이름 석 자로 불리면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금쪽같은 내 새끼와 82년생 김지영
그 뒤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강산이 적어도 한 차례는 바뀌었고, 세상은 빛의 속도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정은요? 책과 영화로 엄청난 공감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82년생 김지영’은 오히려 동서양 할 것 없이 나라 밖에서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요즘 ‘금쪽같은 내 새끼’(채널A)에는 집안일에 질식해 숨구멍 하나 찾지 못한 채 사회와 단절되어 정신적·육체적·정서적 고통을 안고 사는 엄마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201호도 그렇고 504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림의 힘
살림의 가치를 살려야 합니다. 살림하다 아프고, 마음 상하고, 병드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살림은 살리는 일이니까요.
살림은 OO이다!
빈 곳에 알맞은 답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침대가 가구가 아닌 과학이란 광고 문구처럼, 살림은 과학입니다. ‘밥은 하늘이다’, ‘밥심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밥을 지을 때 모든 과학이 다 동원됩니다. 물, 불, 가스, 전기 같은 에너지의 원리도 알아야 하며, 칼, 솥, 팬 등 각종 재질의 도구와 전자제품에 대한 이해와 능숙함도 필요합니다. 제철 식재료를 알아야 신선하고 영양 있는 것들로 값싸게 구입해 맛있게 조리할 수 있습니다. 김장김치만 해도 발효 기간과 온도가 맛과 선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요. 된장이나 간장 만들기는 어떻고요. 과학의 정수가 모여 있는 게 김치와 장맛입니다.
1단계를 통과하셨다면 이번엔 다섯 글자에 도전해볼까요?
살림은 OOOOO이다.
제가 준비한 답은 ‘정성 끝판왕’입니다. 정성이란 귀찮은 게 귀찮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아이 똥 기저귀를 가는 일, 산지에서 갓 올라온 생선과 채소를 사러 전통시장에 가는 일, 퀴퀴한 고린내 나는 양말을 빠는 일이 힘은 들어도 귀찮지 않습니다. 내 식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귀한 일입니다. ‘귀찮다’는 ‘귀(貴)하지 아니하다’는 말입니다. 귀찮지 않다는 그래서 매우 소중하고 귀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온 식구가 재택근무에 비대면 수업으로 삼시세끼 집밥 시대가 열렸습니다. 돌아서면 밥하는 ‘돌밥돌밥돌밥’으로 살림하는 일이 새삼스레 의미가 생긴 세상이니 참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 속입니다.
살림은 OOOO테스트다.
3단계는 좀 더 어렵습니다. 맞히셨다면 대박! 진정한 살림꾼, 프로 ‘살림 장인’으로 인정합니다. 최근 들어 세대 가릴 것 없이 유행하는 성격 유형 검사 MBTI라고 답하셨다면 정답에 거의 근접한 셈입니다. ‘성질머리’가 제가 원하는 답입니다. 살림을 해보면 자기 본성, 성품이 성질머리로 뾰족 튀어나오는 순간이 정말 많습니다. 배운 적이 있든 없든 계급장 떼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이 살림입니다. 예전에 살던 본가에서 해오던 습성을 새 식구, 새 풍습과 문화에 맞춰가는 과정에서 지지고 볶다가 툭툭 성질 하나가 머리를 들이밀기 마련입니다. 모난 마음, 욱하는 성질을 누르고 둥글리는 것이 살림입니다. 못된 생각, 원망하는 마음으로 칼질을 하면 꼭 손을 베거나 다칩니다. 피를 보고서야 아차 합니다. 식구들 먹일 음식, 살리려는 음식을 만들면서 독한 마음, 살기(殺氣)를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먹은 밥은 희한하게 체합니다. 귀신같이 어찌 알았을까요.
엄마라는 경력 왜 스펙 안될까?
그만큼 귀하고 소중한 살림을 우리는 오랫동안 어떻게 치부해왔을까요. ‘부엌데기’, ‘솥뚜껑 운전수’, ‘아줌마가 밥이나 하지’ 이런 말로 비하하고 업신여기지 않았나요? 남자들뿐만 아니라 살림의 주된 당사자인 여자들조차도 하찮거나 허드렛일로 여기고, 잡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습니다. 그 일을 잡일이니 막일이니 허드렛일이라고 대하는 그 마음이 하찮고 사소할 뿐이고, 그 태도가 값쌀 뿐입니다. 모두가 소중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살림은 신성하고 고귀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물건과 주변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허드렛일로 대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위축시키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고 맙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부, 살림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습니다.
“집에서 놀면서….”
‘놀면서’라고도 안 하죠. ‘처놀면서’라고 하죠.
“집에서 처놀면서, 잠이나 처자면서 도대체 하는 일이 뭐야?”
안 그래도 무보수 노동, 사적 영역에만 묶여 있는 삶에서 느끼는 소외와 단절로 살림하는 사람은 충분히 불안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하와 경멸과 조롱이 섞인 표현을 스스럼없이 한다면 댁의 아내는, 엄마는, 며느리는 위축되고 분노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몇 년 전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제약회사 자양강장제 광고도 있었잖아요.
(태어나서 가장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고 있는데)
“왜 엄마라는 경력은 스펙 한 줄 안 될까?”
이렇게 자조적으로 한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화나게도 하고 울렸던 부분입니다. 주부의 일, 살림살이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환산한 것도 한때 유행으로 그치고, 2022년 현재까지도 이력서, 자기소개서 한 줄도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남에게 맡길 때는 이 모든 살림살이 단계마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출산, 육아, 가사 노동, 가정 경영과 관리, 부모님이나 아픈 가족을 부양하고 돌보는 일이 아예 경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외의 영역에서 경력을 개발하라고 밖으로 내몰기만 하는 게 어불성설(語不成說)이고, 선후(先後)가 바뀐 이야기입니다.
먹을 때
밥 먹을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제아무리
난 척하려 해도
뻐기려 해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먹을 수 없기에
내 앞에서
정수리 보여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합니다.
-, 19쪽
오늘 아침 봄동으로 된장국을 끓였습니다. 멸치다시 육수와 쌀뜨물에 친정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된장과 생애 처음 담근 보리고추장으로 국물을 내서 상에 올렸는데 다들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국그릇에 고개를 박고 맛나게 먹는 남편과 두 아들의 정수리를 보고 저도 정수리를 보여줍니다. 누구나 밥 먹을 때 어떤 자리에서든 정수리를 보여주잖아요. 특히 한국 음식은 국물이 많기 때문에. 같은 동양 문화권이라도 중국이나 일본 음식처럼 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여서 먹습니다. 그런 것처럼 먹는 일, 살리는 일이 신성하고 고귀한 한편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바로 살림의 힘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요. 맛난 음식 드시고, 서로 정수리 보여주면서 낮추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제 이야기 하고 싶어 야단인 세상이다. 들어보면 제각기 대단한 구석도 있고, 웃음 나는 구절도 있으며, 눈물 훔치게 하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재미난 이야기 들어줄 사람 없이 혼자 떠들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성화 관악FM DJ는 ‘듣는’ 아나운서다. 누구보다 말할 기회가 많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듣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고 듣는, 현역 최장수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른다. 잘 듣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지 않은가.
이성화 DJ는 1959년 부산 MBC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한 상업방송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다. 이후 서울 MBC, RSB 라디오 서울(동양방송의 전신), TBC 동양방송까지 다양한 방송국의 개국 아나운서로 자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초대 DJ를 1964년부터 1972년까지 8년 동안 맡기도 했다.
아나운서, 현대사 한복판에 서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그가 아나운서로 한창 이름 날리던 때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이 많던 시기였다. 부산 MBC 아나운서로 일하던 때였다. 그는 우연히 들어선 다방 창가에 앉아 있는 엄순영 씨를 발견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에 감탄한 이성화 아나운서는 엄 씨를 미스코리아 경남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를 설득해 심사 3일 전에 아슬아슬하게 후보 등록을 마쳤는데, 부산 미스코리아에 선발되면서 엄 씨는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할 자격까지 얻었다.
당시 한국일보사에서 실시했던 미스코리아 본선 대회는 경복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대회 전날 엄 씨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그는 당시 김지태 서울 MBC 사장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사모님이 그를 깨우며 하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 리, 쿠데타가 일어났대요’ 하시는데,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멍한 채로 대문을 열었더니 집 앞으로 탱크가 지나가지 뭐예요.” 그때가 1961년 5월 16일 아침이었다. 2년 차 사회 초년생이 5·16 군사정변의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아나운서 자리에 앉아 3·15 부정선거, 4·19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보도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치인부터 유명 가수, 배우 등 명사를 만날 일이 많았다. 만났던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 역사적 인물이 된 경우도 있다. 그가 부회장을 맡았던 여류방송인클럽이 한 군부대를 위문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안내받으며 사단 내부를 둘러보고 사단장을 비롯한 장성들과 기념 촬영을 했죠. 굉장히 대접받으며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죠.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던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역사적 인물이 될 거라고는 말예요.” 그는 지금도 김재규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면 권력이 다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한다.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와 배짱
인생무상,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전성기는 빛나기 마련이다. 그는 업계 안팎으로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은 1세대 커리어우먼이었다. 재치 있고 순발력이 좋다고 소문 난 덕분에 당시 생방송 스케줄이 잡힌 PD들에게는 섭외 1순위 아나운서였다. 게다가 당시 발간되던 잡지 ‘아리랑’에서 진행한 아나운서 인기 순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동양방송에서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처럼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남녀 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택시 기사와 전화 연결을 할 때 제가 ‘기사님 밤늦게 운전하고 들어가도 부인께서 식사 정성껏 챙겨주시면 덕분에 기운 나시죠? 그러면 기사님도 부인께 친절을 베풀어야지요’ 하면 바로 알아듣고 상대편에서 ‘그럼요. 다음 날 아침상에 달걀프라이가 올라온답니다’ 하고 대답하거든요. 듣는 사람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그의 인기에는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듣기 좋은 음성이 한몫 단단히 했다. 연극 연출가 오사량은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며 그의 목소리를 극찬했다. 목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 목 관리를 모르고 살았으니 천직이나 다름없다.
이성화 DJ의 방송 인생을 논할 때는 당찬 성격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 MBC의 방송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해 방송 인생이 시작된 것, 예상 못한 순간에 순발력을 발하는 기지도 그의 당찬 성격에서 비롯됐다.
전국체육대회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던 시절, 육영수 여사가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전국체육대회 중계방송의 진행석에서 방송 준비를 하던 그는 마이크를 쥐고 대뜸 육 여사가 앉은 단상으로 올랐다. 단상 밑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둘이 막아섰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양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잠깐 인터뷰만 할게요’ 하고서 그 둘이 망설이는 틈을 타 단상에 올라섰어요. 올라가는 동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한 다음 육영수 여사한테 ‘안녕하십니까. 이따 방송 시작하거든 날씨가 어떤지만 여쭤볼게요. 오늘 날씨가 좋지요? 하고 물으면 ‘네’ 하는 대답이랑 선수들 잘 뛰라는 말씀만 해주세요’ 그랬어요. 돌이켜 생각해도 보통 배짱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계획에 없던 영부인의 인터뷰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쾌지나 청춘에서 제2의 청춘을 열다
이후 1980년 신군부의 주도로 언론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당시 몸담고 있던 TBC 방송이 문을 닫았다. 이때 그의 활약상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 밖에서 그만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남편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후 방송에 대한 욕심, 재능, 외부의 인정을 모두 던져두고 30년을 주부로 살았던 그는 9년 전 뜻하지 않게 아쉬움을 풀 기회를 얻었다. TBC 방송국 막내 PD였던 동료의 소개를 받아 비영리 라디오 방송국 관악FM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서울 관악구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발음이 정확해 한국어 선생님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못했고, 방송을 맡은 그 역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 제작진과 함께 고민한 끝에 폐지됐던 ‘쾌지나 청춘’ 방송을 되살리는 카드를 선택했고, 그는 현재 9년째 ‘쾌지나 청춘’의 월요일 DJ를 맡고 있다.
‘쾌지나 청춘’은 국내 최초 어르신 방송단이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쾌지나 청춘’은 고정 코너 ‘생활의 지혜’, ‘생활 건강’과 요일마다 다른 여섯 가지 단독 코너로 이뤄진다. 이성화 DJ와 함께하는 월요일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인터뷰 코너가 진행된다. 코너의 아이템 기획부터 게스트 섭외, 인물에 대한 사전 취재와 원고 작성은 모두 그의 몫이다. 녹음을 진행해보고 더 끌어낼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판단하면 회차를 늘려 추가 녹음을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 및 진행자만으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없다. 관악FM 내의 오랜 파트너인 김우신 PD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베테랑 DJ로서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기에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방송 제작에 힘써준 그가 고맙기만 하다. “지금까지 기획진행 이성화, 기술편집 김우신 프로듀서였습니다.” 매 방송마다 빠짐없이 넣는 멘트만큼이나 그를 향한 애정이 빼곡하다.
한창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방송했던 베테랑 방송인에게, 30년이란 기나긴 공백기를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청취자에게 신청곡을 주문받으면 막내 작가가 서고로 뛰어올라가 CD를 찾는 동안 즉흥에서 멘트를 지어내던 시절과는 사뭇 딴판이지만, 라디오 DJ 일은 그에게 여전히 즐겁기만 한 분야다. 그는 매 방송이 끝난 뒤 직접 준비한 원고를 일일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곤 한다. 젊을 때부터 습관처럼 하던 기록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방송과 게스트를 홍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성·드라마, 그가 전할 새로운 이야기
평생을 진행자로 살았지만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꿈도 꾼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제작하는 일 말이다. 만약 PD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중장년 여성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라떼’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로만 살아오며 나이 들어버린 이들의 세월을 조명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모르게 겪은 고통과 고난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가부장 사회의 제도와 법률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거든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는데 각자의 가정에 자양분으로 쓰이고 만 거예요. 그래서 유능한 여자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많아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할 곳도 없으니 친구들이랑 만날 때나 털어놓고 말죠.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데 정말 가슴이 아파요.”
그만 해도 그랬다. 일에 욕심이 있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남편의 반대를 거스르지 못해 끝내 집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은행에 입사할 때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여자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바깥일을 하면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당대 여성들에게 선망받는 방송인이었던 그도 방송을 마치면 아내이자 엄마로서 일할 줄만 알았지 자기 계발에 시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로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30년의 시간이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쉬운 만큼 그는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에 열중하다 보니 새로운 목표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는 80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야 도전할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어엿한 스토리텔러로 활약하고픈 열정이 샘솟아 4년 전에는 전문 학원까지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쾌지나 청춘 기획하고 진행하랴, 집에 가면 블로그 글도 올리랴. 게다가 남편 밥도 챙겨줘야 해요. 쉴 새 없이 바쁜데도 드라마가 너무 쓰고 싶어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대본을 썼어요. 드라마라는 게 제각기 다른 갈래의 사람들이 한데 얽혀 진행되는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렇게 멋진 예술의 한 줄기로 끼고 싶은 거죠.”
‘옛날 사람’인 그는 그가 실제로 보고 들은 ‘옛날이야기’를 50분짜리 대본 한 편에 풀어냈다. 요즘 사람들의 AI, 우주 공간 같은 요즘 이야기 말고 욕심쟁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명예를 탐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담았다고 했다. 그 대본으로 당장 드라마를 제작할 수 없고, 촬영 현장에서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꾸준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처음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던 그 당찬 성격과 배짱을 무기로 내세우면서.
1세대 아나운서인 그는 아나운서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친화력을 꼽았다. 친화력이 있으려면 배려와 친절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처음 보는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며, 이를 이끌어내는 능력까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친화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관악FM에서만 4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400개의 이야기를 듣고 400개의 아름다움을 뽑아낼 줄 아는 그는 친화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야기가 익숙하거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좋고, 몰랐던 세월의 이야기라면 새로워 좋다. 들을 줄 아는 아나운서, 한결같은 그의 인생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