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함과 솔직함이 매력적인 ‘쌍칼’, 배우 박준규. 그가 당당할 수 있는 힘은 가족으로부터 생긴다.
박준규의 아버지는 영화 ‘용팔이’ 시리즈로 알려진 배우 故 박노식이다. 두 아들 박종찬과 박종혁 역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부터 두 아들까지, 박씨 가문이 적어도 100년은 연기자 생활을 하는 셈이에요. 가업으로 10대까지 이어졌으면 합니다.”
박준규는 처음부터 배우를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끼와 재능을 깨닫고서 아버지에게 ‘배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그는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를 통해 비로소 배우 박준규로 주목받았다. ‘박노식 아들’에서 벗어나기까지 15년이 걸린 것.
박준규에게 앞으로의 목표란 없다. 배우는 주어진 것을 잘하는 것이 우선인 직업이라고 생각해서다.
다만 아내 진송아를 ‘죽을 때까지 웃게 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촬영 현장을 찾은 진송아 역시 흐뭇해했다는 후문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는 잘될 거야’라고 외치며 당당하게 사세요!”
박준규(59)는 인터뷰 중 ‘구태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구태여는 ‘일부러 애써’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는 방송에서든 일상에서든 어떤 일에 대해 ‘구태여’ 거짓말하지 않고, ‘구태여’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중의 눈에 비친 박준규는 항상 당당하고 솔직하다. 자존감이 높다고도 느껴지는데, 그 힘의 원천은 가족이었다.
‘3대째 가업을 잇는 집안’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음식점을 운영하는 집안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박준규 집안의 이야기다. 박준규는 ‘1960년대 스타’ 고(故) 박노식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배우가 됐다. 박준규의 두 아들 박종찬과 박종혁도 아버지를 따라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박준규는 두 아들이 가업을 이어 배우가 된 것을 고마워하며, 배우 집안의 연대가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배우가 어떤 직업보다 좋다고 여기거든요. 아이들이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정말 좋았죠. 다만 ‘박준규의 아들’로서 받을 편견 어린 시선을 잘 알기 때문에 그걸 감수해내라고 얘기했을 뿐이죠. 아버지부터 두 아들까지, 박씨 가문이 적어도 100년은 연기자 생활을 하는 셈이에요. 가업이 계속 이어져서 10대까지도 배우 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박노식과 쌍칼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액션 영화 전성시대였다. 그 중심에는 박준규의 아버지 박노식이 있었다. 박노식은 영화 ‘용팔이’ 시리즈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버지의 성공과 인기 덕분에 박준규는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스스로 자신을 ‘금수저’라고 표현할 정도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가사도우미, 운전기사, 정원사까지 다 있었어요. ‘엄마 손맛이 그리워’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저는 어머니보다 가사도우미가 해준 밥을 더 많이 먹고 자랐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라요. 평생 여사님 대접을 받은 어머니는 지금도 천생 공주 같으세요. 그래서 더 잘 챙겨드리려고 합니다.”
박준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배우로 데뷔했다. 첫 작품은 박노식이 제작쪾감독쪾주연을 맡은 1971년 영화 ‘인간 사표를 써라’다. 이후에도 그는 아버지의 작품에 여러 번 출연했고, TV 광고도 찍었다. 박준규는 당시를 회상하며 “어린애가 배우가 뭔지나 알았겠나. 아버지를 따라 촬영장 다니는 게 그저 재밌었다”고 말했다.
박준규에게 박노식은 배우로서, 아버지로서 어떤 사람일까. 그는 “작품 속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아버지가 매우 엄한 줄 안다. 사실은 유쾌하고 친구 같은 아빠다. 배우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박준규는 1980년대 청년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미국에서 졸업했고, 현지에서 일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2년간 운영한 주유소에서도 일했고, 일본 식품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을 떠나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배우로 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단다. 하지만 내재되어 있던 끼와 열정을 발견한 그는 귀국 후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한국 친구들과 있으면 늘 제가 제일 웃기더라고요. 사람들을 웃기는 데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죠. 그리고 비디오를 통해 한국 작품을 접하고는 했는데 ‘나도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배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요. 귀국 후 아버지에게 ‘배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제가 배우가 되기를 기다리셨던 것 같아요.”
배우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뭘 해도 대중은 그를 ‘박노식 아들’로 생각했다. 박준규는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쌍칼 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마침내 주목받았다. ‘박노식 아들’에서 벗어나 ‘박준규’라는 이름을 알리기까지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했다. 박노식은 1995년 세상을 떠났고, 박준규는 아쉬움을 가슴에 품었다.
“‘박노식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정말 부담이었어요. 다른 동료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비교당한 거죠. 다행히 쌍칼로 잘 되고 나서는 아무도 ‘박노식 아들’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지금 어린 친구들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쌍칼은 알죠. 유튜브에서 ‘야인시대’를 접한 경우도 많고요. 어쨌거나 ‘야인시대’는 저의 인생작이에요.”
이후 박준규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기 굳히기에 돌입했다. 그는 “쌍칼이 아닌 내 이름 석 자를 알리는 데 예능 출연은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하며 “예능 프로그램에 한 번 출연했더니 계속 나를 찾아주더라. 일주일에 10개까지 녹화를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예능에 출연하기 전에는 쌍칼 때문에 대중들이 저를 무섭게 봤는데 이후에는 편하게 생각해주시더라고요. 저는 구태여 예능에까지 나가서 연기하고 싶지 않았고, 일부러 웃기고 싶지도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드리니 시청자들이 좋아해주신 것 같아요. 제 최대 장점은 안티가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아들이 이어가는 배우 집안
박준규의 아내 진송아 역시 배우 출신이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진송아는 촉망받는 신예였다. 박준규와 진송아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오디션장에서 처음 만났다. 박준규는 “1989년 1월 30일이었다”라고 정확한 날짜를 기억했다.
“뮤지컬 연습을 하면서 아내가 저의 진면모를 보기 시작했죠. 연기 연습도 열심히 하고 착하니까 아내가 먼저 저를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제 이상형이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이었거든요. 아내가 저를 좋아하는 게 느껴지니 어느새 아내가 좋아졌죠. 성격상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지 못하기도 하고요. ”
박준규와 진송아는 1991년 결혼해 부부가 됐다.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두 사람은 변치 않는 부부애를 과시한다. 진송아는 박준규의 표지 촬영 현장에도 동반 참석, 내조의 여왕다운 면모를 뽐냈다. 남편이 촬영을 잘할 수 있도록 옆에서 세심하게 챙겨줬다. 평소와는 다른 남편의 멋진 모습을 보고는 감탄을 쏟기도 했다. 박준규는 “30년이 지났는데도 내가 그렇게 좋나?”라며 너스레로 화답했다.
박준규에게 아내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존재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이 말은 진송아가 시댁살이를 30년 넘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행히 고부 관계는 좋은 편이다. 박준규는 시댁살이보다 아내가 결혼 후 자신의 꿈을 접은 것에 대해 더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
“아버지가 ‘집안에 배우는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아내가 배우를 그만두고 저를 내조하게 됐죠. 아내가 요즘 다시 연기를 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 촬영은 현장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아내의 출연을 반대하고 있어요. 작은 역할을 맡아서 고생만 하는 것이 보기 싫은 거죠. 그런데 아내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주인공 역을 맡는다든지 연극 무대에 선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 있어요. 좋은 작품이 있다면 둘이 함께 출연할 수도 있겠죠.”
박준규의 두 아들은 부모의 끼를 그대로 물려받아 배우로 활동 중이다. 첫째 박종찬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진송아를 빼닮은 외모를 지녔고, 뮤지컬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박준규를 닮아 다재다능한 둘째 박종혁은 2017년 tvN 드라마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로 데뷔했다.
‘박노식의 아들’이었던 박준규는 두 아들이 겪는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애들이 어디 출연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박준규가 꽂아줬다’고 하더라. 요즘 시대에 꽂아주기 출연이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면서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두 아들이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느낀다.
“우리 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대학교에서도 연기를 전공했어요. 뮤지컬, 연극 등 오디션을 열심히 보러 다녀서 역할도 자신들이 따냈고요. 그렇게 열심히 하는 애들인데 매번 제가 꽂아줬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너무 안타까운 거죠. 내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열심히 하는 만큼 좋은 배우가 될 거예요. 언젠가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준규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배우는 어떤 목표를 갖기보다 주어진 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배우한테 ‘연기 변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싫어한다”고 덧붙였다. 배우가 다양한 연기를 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연기 변신’은 맞지 않은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박준규는 “꼭 지키고 싶은 목표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웃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진송아는 박준규가 인터뷰하는 내내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어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코로나19에 경제까지 어려워지니 사람들이 ‘죽겠다’,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힘들죠. 안 힘든 사람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말이 씨가 되기 때문에 저는 부정적인 말을 싫어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반드시 좋은 일이 올 테니 ‘나는 잘될 거야’라고 외치면서 당당하게 사세요!”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등 말랑말랑한 구절로 199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은 원태연 시인. 다시 독자들을 만나고자 펜을 들었지만 시가 너무 써지지 않아 ‘별짓’ 다했다. 잠을 설치고, 스스로에게 욕을 내뱉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다 머리로 천장도 뚫었다. 20년 만의 새 시집 ‘너에게 전화가 왔다’는 고뇌의 시간만큼 솔직한 사랑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원태연 시인의 집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높고 좁은 계단이 있다. 뒤뚱뒤뚱 계단을 오르면 약 1m 높이의 어둑한 다락방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을 비집고 등장한 원 시인은 “천장이 낮아. 이거 타고 와요”라며 바퀴 달린 작은 의자를 데구루루 굴려 보낸다. 아, 예사롭지 않다.
날것의 미학
원태연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는 중학생 때부터 7년간 쓴 시를 엮은 것이다. 공부는 못했지만 매일 뭔가를 썼다. 오늘의 나는 볼품없지만, 시는 오늘 내가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작은 출판사에서 매절계약(출판사가 저작자에게 일정 금액만 지급하고 향후 저작물 이용을 통해 얻는 수익은 모두 독점하는 계약)으로 출판했는데 베스트셀러가 됐다.
150만 부가 팔렸다지만 정작 그에게 들어온 인세는 없었다. 두 번째 시집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이후 낸 시집들은 출판사 대표의 야반도주 등으로 인세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의 저서는 총 600만 부 팔렸다고 추산할 뿐 정확히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른다.
“시집을 많이 팔았대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고, 술자리를 같이하려 했지. 버스를 열 번 타면 한두 번 정도는 누가 옆에서 내 시집을 읽고 있었어요. 어릴 땐 천재였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교만했어요. 가진 걸 당연하게 여겼으니까요. ‘너에게 전화가 왔다’는 그랬던 과거의 나를 바닥까지 반성하면서 작업했어요.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 자전거를 타다 체인이 빠졌음에도 멈출 수 없는 기분이었죠. 시한테 많이 혼났어.”
새 시집 속 ‘버퍼링’은 9개월 동안 70번 넘게 수정한 시다. 어떻게 적어봐도 도대체 매력을 살릴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퇴고한 원고를 모으면 버퍼링으로만 책 한 권을 낼 수 있을 정도란다. 그러다 우연히 자판을 잘못 눌러 ‘끊어진다/마음/이’라는 일곱 글자만 남았다.
안녕하세요, 난독증 겪는 시인입니다
그는 시인이자 작사가이자 영화감독이다. 1995년 가수 김현철의 ‘왜 그래’를 시작으로 드라마 ‘시크릿 가든’ OST ‘그 여자’와 ‘그 남자’, 개그맨 박명수의 청혼곡 ‘바보에게 바보가’, 허각 ‘나를 잊지 말아요’, 유미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등의 노랫말을 썼다. 권상우, 이보영 주연의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도 제작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사랑과 이별의 번민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난독 증세다.
“40살이 넘어 난독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현재 한국난독증협회 홍보대사기도 해요. 난독증은 글자를 ‘아예 못 읽는’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증상은 제각기 달라요. 난 ‘잘못 보이는’ 거예요. 그래도 시도 쓰고 작사도 하고 다 해요. 오히려 난독증의 수혜자야. 사람들에게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남들에게 낯선 단어가 익숙하게 떠오를 때가 있죠. 덕분에 훨씬 표현에 자유로워요. 이번 시집, 후회할 확률 27% 미만. 10%라고 하려 했는데 건방져 보일까 봐.”
멋있는 작가와 독자
요즘은 원태연의 해석으로 다시 풀어쓴 ‘단어 사전’을 쓰고 있다. 가제는 ‘원태연의 오리지널’. 그의 눈에 비친 것들을 그대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겼다. ‘이방인’의 경우 국어사전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정의돼 있지만, ‘나를 위해 울어줄 이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이라 썼다. 언제쯤 책을 볼 수 있겠냐는 질문에 잠깐 침묵하던 그는 “출판사에서 보내셨어?”라며 볼멘소리를 던졌다.
“열다섯 살 때 장래희망 난에 ‘멋있는 남자’라고 썼었어요. ‘원태연이, 멋있는 남자가 직업이야? 뭐 먹고 살라고?’라는 담임선생님의 한마디에 우스운 놈으로 여겨진 일이 있었어요. 참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독자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줘요. 내 시를 칭찬하고, 공감해주죠. 책이 김밥천국 소고기김밥보다 비쌀텐데. 글이 아니라 내 마음을 읽은 기분도 들고요. 잠시 한눈팔았지만 돌아올 곳은 결국 ‘시’였을지도 몰라요.”
인터뷰가 끝나고 현관 밖까지 나와 “재밌었다”며 씩 웃는 그를 보곤 생각했다. ‘멋있는 남자’라는 꿈, 어쩌면 이루었을지도.
취미 앞에선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평등하다.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즐길 자격은 충분하다. 다 큰 어른이 장난감이나 만화, 게임에 열광하는 게 정 눈치 보인다면, 손주 혹은 아들 손을 잡고 소개된 장소를 방문해봐도 좋겠다.
한우리
서울 서초구 남부터미널 근처에 있는 국제전자센터 9층은 키덜트의 성지다. 게임기, 피규어 등 다양한 상품을 구경할 수 있고 중고 거래도 가능하다.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심형탁, 지숙이 방문한 후로 더욱 주목받았다. 한우리는 게임기 위주 소매상이다. ‘호객 행위가 없고, 정품만 취급하며, 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고 소문이 나 인기가 높아졌다. 서울 신도림 테크노마트, 노원역 근처, 대구 반월당역 근처에 분점이 있으며, ‘겜우리’라는 온라인 상점도 영업 중이다.
건담베이스
일본 회사 ‘반다이 스피리츠’에서 운영하는 직영 모형점이다. 주력 상품은 건프라(건담 프라모델)이며, 프라모델 조립 관련 공구들도 판매하고 있다. 소매점이나 대형 할인점에 비해 많은 종류의 상품군과 물량을 갖추고 있다. 넓은 매장에 크고 작은 프라모델이 전시돼 있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각종 피규어나 식품 완구도 취급한다. 서울을 포함해 수원, 고양, 대구, 대전, 부산 등 전국 곳곳에 매장이 있다.
킨키로봇
베어브릭(곰 모양의 블록)을 중심으로 다양한 디자이너 토이와 피규어를 취급하는 브랜드다. 전 세계 예술가들이나 브랜드들의 협업 제품을 엄선해 수입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과 용산구 한남동에 매장을 두고 있다. 깔끔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꾸민 매장 내부와 늘어서 있는 다양한 베어브릭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유명 미술관에 온 듯하다.
옥인오락실
옥인오락실은 서촌에서 가장 오래된 오락실인 ‘용오락실’(1988년부터 2011년 5월까지 운영)을 모티브로 그 자리에 2015년 문을 열었다. 10평 정도 좁은 공간엔 고전 게임 오락기 10여 대가 늘어서 있다. 보글보글, 테트리스, 스트리트파이터, 철권 1945, 스노 브라더스 등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추억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레트로 열풍 덕인지 서촌의 대표 데이트 코스로 자리 잡았으며, KBS ‘동백꽃 필 무렵’, tvN ‘쌉니다 천리마마트’를 비롯해 다양한 드라마, 영화, 광고 등이 촬영된 곳이다.
스누피가든
‘스누피’는 미국의 작가 찰스 슐츠가 1950년부터 신문·잡지에 50년간 연재했던 네 컷짜리 만화 ‘피너츠’(Peanuts)의 주인공이다. 스누피가든은 스누피를 비롯한 ‘피너츠’ 캐릭터들을 주제로 제주에 조성된 2만 5000평 규모의 테마 공원이다. 실내 전시 공간에는 ‘피너츠’를 탄생시킨 찰스 슐츠의 철학, 캐릭터들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야외 정원에는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과 희귀식물, ‘피너츠’ 캐릭터들이 조화를 이루어 오랜 시간 거닐기 좋다. 스탬프 투어를 하며 가든을 둘러보면 재미가 배가된다. 스누피가든 지도에 정원 8곳의 도장을 찍는 것이다. 스탬프를 다 모으면 작은 기념품도 받을 수 있다. ‘피너츠’ 친구들의 밝고 솔직한 유머는 아이뿐 아니라 삶에 지친 어른들에게도 뜻밖의 위로가 된다. 스누피가든을 기획한 김우석 에스앤가든 대표는 “스누피가든은 아이, 엄마, 할머니 3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숨 가쁘게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덧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겨울 차디찬 공기와 그 풍경 속으로 데려다주는 대청호의 새벽을 찾아간다. 자동차로 어두운 새벽길을 두 시간여 달려 쨍한 추위 속에 호수의 새벽 공기를 맞는 일, 신선하다.
엄동설한의 캄캄한 새벽길은 생각처럼 어렵진 않다. 달려갈수록 조금씩 걷혀가는 어둠을 확인하는 일도, 중간에 잠깐 들른 휴게소의 적막함도 어두운 길을 달리는 사람들만의 즐거움이다. 서울이나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새벽길을 달리면 시골길 드문드문 몇 채의 농가와 들판이 내다보이고 대청호를 향한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청호 오백리길 제4구간 출발점인 윗말뫼 주차장은 한적하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총 21개 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간 안에 대전, 청주, 충북 옥천군과 보은군이 경유한다. 그 속에 마을과 산과 들과 강과 호수가 오백리길을 이어준다. 원래는 대덕군과 청원군 사이에 있다고 하여 대청호라 이름 붙였다. 이 지역에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80년 대청댐 완공과 함께 지역 마을 담수화가 시작되면서 생겨난 인공 호수가 대청호다. 이때 수몰 지역은 86개 마을로 4000세대가 넘었고, 주민은 2만 6000여 명이나 되었다.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생긴 대청호로 인해 어릴 적 따뜻했던 추억 속 아름다운 시골 마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대청호는 인공 저수지로는 저수량 기준으로 소양호와 충주호에 이어 국내 세 번째다. 스무 개가 넘는 대청호 오백리길 구간을 편안히 즐기는 방법은 호수 둘레길을 산책하듯 걷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4코스 호반 낭만길은 대청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습지공원과 자연생태관 등이 걷는 길마다 이어지며, 총길이는 약 12.5㎞이고 5~6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지금도 호반길을 걷기 위해 찾아드는 이들에게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2023년 열린관광지 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대청호 일대는 장애인, 노약자 등 이동 약자들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무장애 관광 환경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이제는 이동 약자의 문턱이 더욱 낮아진 대청호 오백리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정보취약계층이 불편 없이 관련 홈페이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도 개선한다.
취향에 따른 구간별 길을 걷다가 갈대숲이나 호숫가에 멈춰서 조용히 대청호를 즐길 수도 있고, 또는 드라이브만으로도 좋다. 굳이 걷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발걸음에 따라 또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일부를 걷거나 쉼을 택하면 된다. 걷는 속도나 그 길을 모두 걸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일인가. 단 한두 시간을 걸었어도 그저 자연 속에서 음미하는 시간이 의미 있다.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다독이는 그 순간만으로도 충만하다.
동이 트기 전 호수에 도착하는 이들에겐 새벽 물안개에 대한 기대가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마냥 맑고 쾌청한 호수를 보게 된다. 일교차가 큰 봄과 가을에 주로 발생하는 물안개가 이날따라 피어오르지 않았다고 글렀구나 생각할 일은 아니다. 새벽의 거대한 호숫가에 서보았는가. 온몸이 떨리고 시리도록 쨍한 상쾌함으로 간단하게 마음의 평안을 던져준다. 이렇게 겨울과 마주한다.
호수 주변에 들면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공기 맛이 다르다. 건너편의 산과 능선이 호수 안으로 잠겨 흔들림 없는 반영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호반 둘레길에 깊숙하게 들어가면 질퍽한 습지 위로 풍성한 억새가 숲을 이루었다. 가끔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가 나곤 한다.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철새가 푸드덕 날고 먹잇감을 찾는 백로의 날갯짓을 보게 된다. 계절에 따라 개구리는 물론이고 메뚜기나 거북도 볼 수 있다. 자연환경이 청정해 구간 안에 자연생태관도 운영한다.
수변탐방로에서 한없이 호수에 취했다가 명상정원 방향으로 향하면 무엇이 기다릴까. 호수와 숲이 함께하는 곳이다 보니 발밑에는 여전히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10분여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숲길의 자연스러움에 젖어든다. 호수와 정원 사이 언덕처럼 완만한 등성이에 ‘대청호 오백리길’ 표지판이 보인다. 쉼을 제공하는 벤치와 정자가 호수를 앞두고 나무 아래 고즈넉하다. 이곳에서 호수를 빙 돌아보며 각자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명상정원은 물속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건네주는 공간인 듯싶다. 한 번쯤 들러서 간단하게라도 그리움을 풀어보도록 전통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옛 마을길의 한옥 담장, 장독대, 널찍한 평상 등으로 그들의 깊은 그리움이 해소될까마는 수몰민들을 위로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마을 어귀에서 자라던 나무였는지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나무는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어 언제까지나 물속에 잠겨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물속의 작은 섬들이 이루는 반영의 멋과 함께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상정원에는 드라마 ‘슬픈 연가’, 영화 ‘역린’, ‘창궐’, ‘7년의 밤’ 등의 촬영지였다는 안내가 줄을 잇는다. 이런 이유 말고도 이곳에 서면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아련한 마음이 생겨난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가는 현장과 그들의 어제와 오늘, 그뿐 아니라 이 모습을 대하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힐링의 장소로 이곳을 찾는다. 포토존에서 셔터를 누르고 나무 그네에 앉아 눈앞의 호수를 마냥 누리며 새벽의 호수를 만끽한다.
4구간 호반 낭만길은 계속 이어지는데, 명상공원에서 조붓한 길을 따라 1km쯤 거리에 자연생태공원과 추동 취수탑이 자리 잡고 있다. 상수원 취수구역이다. 가래울 마을과 황새바위와 연꽃마을에 이어진 오리골 제방이 시원하다. 철 지난 논과 밭을 끼고 걷는 길에 몇 가구 안 되는 작은 마을도 지나고, 데크로 연결되는 길도 나온다.
감나무에 넉넉히 남겨둔 까치밥의 푸근함을 올려다보면서 마을 옆 데크를 걷다가 예닐곱 단쯤 되어 보이는 알타리 무더기를 보았다.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라는 인심이었다. 이런 인정 넘치는 구경은 여행의 덤이다. 도로 옆으로 나오니 자전거 부대들이 씽씽 달린다. 시골길을 달리는 라이딩족들의 활기찬 질주가 상쾌함을 듬뿍 얹어준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을 찾는 이들이 들르는 곳이 또 있다. 3구간 종착지인 윗말뫼의 더리스. 호수를 앞에 두고 탁 트인 풍경이 압도한다. 더리스&테라베오는 슈하스코 브라질 바비큐 전통요리 레스토랑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청호 오백리길 산책로와 호숫가의 전경을 보려고 찾아온다. 더리스 정원 아래로 계단을 내려가면 프라이빗한 장소가 나타난다. 커플 의자에 앉아 마음껏 물멍에 빠져들면 된다. 때가 맞으면 거위 떼가 찾아와 물속에서 노니는 모습도 볼 수 있는 평온한 시간이다. 혹시나 비가 많이 내린 후라면 벤치와 나무가 물속에 잠긴 그림 같은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추운 겨울날 그리움 속 마을을 찾아 떠난 여행지에서 문득 유년의 시간을 발견한다. 그 길 위에서 기억 저편의 할머니와 내 부모 형제들을 만난 듯 뭉클함도 얻는다. 소박한 자연 속에서 비로소 들여다보는 내면 깊숙이에 위로 한 줌 들여놓았다. 떠돌던 마음은 차분히 잦아들고 한없이 따뜻하다. 세상 소음 따윈 잊고 호숫가를 걷는 내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전부였던 하루가 한동안 몇 알의 비타민이 되어줄 것이다.
여행 정보
자동차로 서울 기준 두 시간 정도 소요. 특히 청주에서 출발해 근교 문의문화재단지와 대청호를 함께 둘러보는 코스도 좋다. 전통문화와 호수의 멋을 제대로 느껴볼 만한 곳이다. 대청호 코스 대전역발 시티투어 순환버스가 토·일 주말에 있다.(2시간 반 정도 소요)
외로움 수업
김민식·생각정원
드라마 ‘뉴논스톱’과 ‘내조의 여왕’으로 유명한 김민식 PD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인생의 파도를 어떻게 넘나들고 있는지, 삶에서 한발 나아가고 깊어지도록 이끈 50가지 지혜를 책에 담았다.
죽음의 키보드
미하엘 초코스·에쎄
독일의 유명한 법의학자인 저자는 법의학자의 능력을 ‘죽음의 키보드’라고 말한다. 특히 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 법의학자의 키보드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주요한 매개가 된다.
운이란 무엇인가
스티븐 D. 헤일스·소소의책
운이란 무엇일까.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신화적 이야기부터 현대의 이론까지 운의 역사를 짚었다. 이를 통해 운의 실체를 밝혀낸 그는 ‘운은 인지적 착각이며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깃털 달린 여행자
멜리사 마인츠·도서출판가지
저자는 35년 넘게 철새의 여정을 쫓은 조류학자로서 새의 이주를 총망라한 책을 펴냈다. 이주를 해야 하는 새의 종류, 다양한 이주 형태, 철새들이 하늘에서 길을 찾는 법 등을 알 수 있다.
서이숙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여배우 중 한 명이다. 얼마나 바쁜가 하면, 동시에 네 작품의 촬영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정도다. 많은 작품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는 배우라는 뜻이다. 그러나 서이숙은 아직 목마르다고 말한다. 전성기 또한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언제, 어떤 작품을 통해 서이숙(56)이라는 배우를 알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JTBC ‘부부의 세계’ 속 최 회장의 아내로, 누군가는 tvN ‘호텔 델루나’의 마고신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서이숙이 드라마에 출연해 연기를 펼친 지는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배우가 아니다. 그가 드라마에 출연하기까지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중에 무명 연극배우로 지내며 빛을 보지 못한 시간이 20년이다.
서이숙은 긴 어둠의 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믿는 시간의 공력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시간의 공력이란 시간을 들인 만큼 값진 결과가 언젠가는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이숙은 시간의 공력 끝에 행복의 경지가 있고,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
“저는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도대체 전성기는 뭘까 하는 질문이 생기죠. 제 연기에 대한 만족감이 10점 만점에 5점을 넘겨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직 전성기가 안 왔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언젠가는 올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시간의 공력을 믿거든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초조함이 없답니다.”
갑상선암, TV 출연으로 전화위복
서이숙은 배우로서 행복을 연극 무대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그때도 자신의 연기에 만족해서는 아니었다. 관객과의 호흡을 통해 짜릿함을 느꼈다. 그는 “정동환 선생님과 함께한 ‘고곤의 선물’과 ‘오이디푸스’ 무대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서 “내 연기에 관객들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행복을 느끼기까지 서이숙은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스무 살에 우연히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서이숙은 수원예술극장 단원에 지원해 합격했다. 궁핍한 배우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89년에 극단 미추에 입단했지만, 15년간 코러스로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러다가 2003년, 마침내 보상의 시간이 찾아왔다. ‘허삼관 매혈기’로 첫 주연을 맡은 서이숙은 동아연극상 연기상, 히서연극상 기대되는 연극인상 등을 휩쓸었다. 동시에 연극계에 서이숙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까지 거의 2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허삼관 매혈기’ 때 연기가 정말 재밌었어요. 대본이 좋으면 연기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20년 만에 주연을 맡은 것인데, 시간의 공력이 저를 그렇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허삼관 매혈기’로 상을 받기 시작했으니까 인생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드라마는 아직 인생작을 못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인생의 빛을 보려던 때인 2011년, 서이숙은 갑상선암을 선고받았다. 그는 “진짜 이건 뭐지 싶었다. 열심히 20년 넘게 연기한 것밖에 없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갑상선암 치료와 수술로 무대에 서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서이숙은 이때부터 방송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2010년 홍창욱 감독의 SBS 드라마 ‘제중원’을 통해 드라마에 발을 내딛은 상황이었다.
“제가 활동하는 산악회 모임에 홍창욱 감독님도 계셨죠. 감독님께서 ‘제중원’을 준비 중이셨어요. 명성황후 역할이 있는데 신선한 얼굴을 캐스팅하고 싶으셨나 봐요. 저한테 출연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중원’에 출연했고, 시청자분들이 ‘저 배우 누구야, 목소리 좋다’ 하면서 관심을 보이셨죠. 그 이후 계속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온 거죠. 그때를 생각하면 인생이 마냥 코너로 몰리지는 않는구나, 힘든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구나 하고 느껴요.”
이후 서이숙은 MBC ‘짝패’, ‘기황후’, KBS2 ‘착하지 않은 여자들’, tvN ‘호텔 델루나’, JTBC ‘부부의 세계’ 등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최근작은 tvN ‘슈룹’이다. 폐비 윤 씨 역을 맡은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열연을 펼쳤다. 서이숙을 향한 시청자의 연기 호평은 나날이 쌓여가는데,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드라마를 처음 찍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연극배우로서는 베테랑일지 모르지만 방송국에서는 초보잖아요. 매일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면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하는 후회만 남는 거죠. 지금 10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이 매일 후회해요. 제가 성향상 한번 연기한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을 힘들어하거든요. 드라마는 똑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어야 하는데, 저는 매번 100%의 감정이 나오지 않는 거죠. 드라마 위주로 활동한 배우들은 그 감정 배분을 잘하더라고요.”
촬영 때 100%의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한 번에 100%의 감정을 쏟기 때문에 촬영이 지속되면 그 강도의 에너지가 계속 나오긴 어렵다는 뜻이다. 연극할 때의 연기가 몸에 밴 그는 상대방이 연기할 때도 100%의 감정을 실어 리액션을 해주기 때문이다. 서이숙은 이 부분을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만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은 장점으로 본다.
현재 ‘여배우가 찾는 여배우 1순위’로 통할 만큼 이러한 연기 방식은 방송가에 입소문이 났다. 호흡을 맞춰본 배우들은 그때의 감동을 기억하며 서이숙을 또 찾는다. 같이 연기를 해본 적 없는 배우들도 소문을 듣고 러브콜을 보낸다는 후문이다.
그렇다면 서이숙이 가장 호흡이 좋았다고 느낀 배우는 누구일까. 단번에 ‘부부의 세계’에서 만난 김희애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이숙과 김희애가 ‘부부의 세계’ 첫 신을 찍을 때 주고받은 에너지는 압도적이었다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표현했다. 서이숙과 김희애는 넷플릭스 드라마 ‘퀸 메이커’로 재회했다. 올 상반기 방영 예정으로 두 사람이 보여줄 시너지가 기대를 모은다.
건강하게 잘 늙어가기
서이숙은 좋은 연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도 결국 사람이고, 그가 살아온 인생이 연기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다. 그는 연극계의 거장으로 통하는 고(故) 장민호의 연기를 보고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장민호 선생님은 ‘3월의 눈’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명장면을 남기셨어요. 어떤 특별한 장면이 아니고, 그냥 선생님이 걸어가다가 의자에 앉는 장면이에요. 선생님이 걸어가는 모습에서 살아온 삶이 보이더라고요. 이게 연기구나, 살아온 삶이 연기구나라고 그때 깨우쳤죠. 그게 연기의 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아직 답이 안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저의 답은 죽을 때 나올 것 같아요.”
연기는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이숙. 그래서 그의 목표는 ‘잘 늙어가기’다. 한해 한해 나이가 들수록 잘 늙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느낀다고. 서이숙은 최근 갱년기를 겪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내 나이쯤 되면 흔히 겪는 병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보통 병이 아니더라”는 토로가 이어졌다.
갱년기는 어느 날 불쑥,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찾아왔다. 서이숙은 신체적인 변화보다 정신적인 변화가 힘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세상에 재밌는 일도, 맛있는 것도 없어졌다. 젊었을 때는 사람들과 술 마시고 수다 떠는 것이 재밌었는데 이제는 뭘 해도 재미없다”면서 “그래서 시니어들이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다. 잘 늙어가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서이숙은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동료들이 많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인간관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면서 “나의 제일 친한 친구는 반려견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1년생인 반려견 ‘노을이’와 ‘준이’를 키우고 있다.
서이숙에게 반려견들은 가족 그 이상의 존재다. 이를 두고 “사람하고 살아야지 왜 개하고 사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이숙이 결혼하지 않고 미혼으로 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면서도 “사람 만나는 횟수를 줄이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안 될 것 같다”고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결혼할 때를 놓친 것 같아요. 20대 때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여자는 결혼하면 집에서 밥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죠. 저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어머니도 일찍 결혼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제가 연극을 할 때라 돈이 없기도 했죠. 딸이 결혼해서 고생만 할까 봐 어머니가 더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해요.”
서이숙은 하나뿐인 가족,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중학생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모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열심히 살았다. 서이숙은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가 이제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어머니 생각을 하던 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어머니는 1938년에 태어나셨어요. 전쟁을 겪은 보릿고개 세대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저를 홀로 키우시면서 정말 힘든 삶을 사셨죠. 돈이 없어서 집에 냉·난방기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한 여인으로서 어머니의 삶이 너무 안쓰러워요. 잘해드리고 싶어서 용돈을 드려도,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잘 안 쓰려고 하시더라고요. 그 모습이 또 안타까워서 저도 마음과 다른 말이 나오게 되고…. 참 속상합니다.”
서이숙은 어머니에게 잔소리하는 자신을 보면서 ‘말실수를 줄이자’는 새해 다짐을 했다. 또 다른 목표는 ‘후회 좀 하지 말자’, ‘내 건강에 신경 쓰자’다. 그중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건강’이다. 그래야 잘 늙어가고, 좋은 연기도 나오는 법이니까. 나이가 들수록 더 짙어질 서이숙의 연기가 기대된다.
“누군가에게 인사할 때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 너무 잘 알죠. 잘 늙으려면 먼저 건강해야 하는 것 같아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고, 욕망과 미움도 사라지죠. 시니어 독자 여러분, 올 한 해 더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늘 그곳에 있지만 보여주는 모습은 늘 다르다. 갈 때마다 바닷빛은 새롭고 숲은 바람결의 맛이 또 다르다. 섬 전체가 여행길이고 단 한 군데도 빠뜨릴 수 없는 천혜의 경관이다. 섬 속에 딸린 자그마한 섬들이 또한 볼거리이고, 유구한 세월이 담긴 생태 숲과 치유와 명상의 숲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소소한 힐링 코스와 제주의 자연을 간 김에 모두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적당히 게으른 여행이 제맛이므로.
제주는 서부권과 동부권으로 나뉜다. 동서남북으로 빙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우왕좌왕할 수도 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여유롭게 힐링하려면 동선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걷기 좋은 길을 다 욕심낼 일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다 먹을 수도 없다. 에너지를 막 쓸 나이도 아니고, 2~3일 정도 제주의 바람결 따라 몸을 옮긴다. 이번엔 제주 서쪽이다.
은빛 일렁임, 새별오름
제주 애월의 평화로를 달리다 보면 봉긋하게 삼각형으로 솟은 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와~ 제주구나’ 이런 생각이 확 드는 순간이다. 얼핏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서 제주는 바다를 먼저 떠올릴 수 있으나, 이제는 이렇게 억새가 반짝이는 오름이나 둘레길이 제주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제주 서부 중산간 오름 지대의 저녁 하늘에 샛별처럼 외롭게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도 예쁜 새별오름이다. 해발 519.3m라고는 하나 경사를 겁낼 정도는 아니다. 굳이 정상까지 꼭 가야 할 일도 아니고. 오름길에 억새의 숲을 마음껏 누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산 위로 오르면 분화구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여럿임을 비로소 보게 된다. 멀리 한라산과 비양도도 볼 수 있으며 상쾌함의 절정이다. 탁 트인 새별오름의 전망과 바람결에 은빛 털북숭이처럼 일렁이는 억새 물결의 군무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다. 오름에 올랐으니 잠깐 머무르면서 실컷 바람을 맞아야 제맛이다.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제주의 대표 축제인 들풀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이곳 새별오름이다. 여행 기간이라면 꼭 경험해볼 만한 축제다.
제주의 건축 기행, 방주교회와 본태박물관
여행 중에 찾아가는 전시장은 유난히 행복감을 준다. 이런 여유로움이라니… 하면서 말이다. 그뿐 아니라 다니다 보면 비가 오거나 악천후를 만날 때가 없으란 법 없다.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이럴 때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유동룡(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 실내와 실외가 각기 다른 공간이 아닌 함께 어우러지는 건축 예술의 멋을 보게 된다.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지어진 신비로운 건축물이다. 물 위로 교회가 떠 있고 노을이 담기기도 하는 시각적인 묘미를 보여준다. 이런 독특한 풍경으로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실내를 들여다보면 개인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조용하고 신성한 시간 속의 여행이다. 교회 옆으로 수(水)·풍(風)·석(石) 뮤지엄, 포도호텔도 들러볼 만하다.
중문 위 중산간에 위치한 본래의 형태를 뜻하는 본태박물관, 건축의 철학자라 일컫는 안도 다다오(Ando Tadao)의 건축이다. 제1전시관 한국 전통 수공예품, 제2전시관 현대 예술 작품 등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푹 빠진다. 공간들이 얽힌 듯 미로 속을 걷는 듯하다. 잠깐씩 길을 잃을 뻔했다. 파격적인 느낌의 공간과 복잡하게 연결된 길에서 알 수 없는 느낌에 빠져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듯, 기왕이면 조금 공부하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으로 제주 동쪽 섭지코지의 글라스하우스와 유민미술관도 특별하다.
자연 친화적 건축 속에서 명상의 시간을 가질 만하다. 저지리의 현대미술관과 공공수장고, 승효상 건축가의 추사관이나 미스터밀크, 정기용 건축가의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 조민석 건축가의 오설록 티 뮤지엄 다도 체험관, 박현모 건축가가 지은 애월의 빵집 ‘버터 모닝’ 등. 제주 섬의 자연과 멋스럽게 어우러지는 다양한 건축물 덕분에 제주의 건축 기행이 따로 있을 정도다.
길에서 만난 평화 순례자의 교회, 명월국민학교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라는 순례자의 교회는 올레길 13코스에 위치한다. 덥거나 추울 때, 마음이 외로울 때 한경면 외딴집처럼 저편에 예쁜 교회가 보일 것이다. 신앙인이 아니라 해도 고개 숙여 좁은 문을 통과해 한 번쯤 쉬어갈 수 있도록 제주의 벌판에서 기다리는 듯하다. 여행 중에 거리낌 없이 들어가 3평 남짓의 작은 기도처에서 조용히 묵상에 잠겨 평안히 머물다 나올 수 있다. 정신없는 세상 속에서 잠시 기도하고 차분히 비워내고, 작음이 주는 커다란 느낌도 담아올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명명된 지 오래지만 여기는 명월국민학교다. 이미 폐교한 지 30년이라고 했다. 명월리 마을회가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여행자들에게 그 옛날 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로 만들어냈다. 삐걱대는 낡은 복도 바닥을 밟으며 걸어 들어간 교실은 아기자기한 소품 갤러리가 되었고, 색다른 분위기의 카페가 되었다. 너른 운동장에는 앞마당에서 뛰어놀듯 아이들은 자유롭고 어른들은 추억을 더듬는다. 이곳의 운영 수익은 마을에 환원되어 마을 발전 기금으로 쓰인다.
낙천 아홉굿마을의 의자공원
여러 가지 의자들로 공원을 이룬 곳, 예쁘고 신기하고 다양한 의자들이 무수하다. 앉아보거나 쉬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새 오래 머물게 된다. 올레길 13코스 중간 지점의 의자공원은 아홉 개의 샘이 있다 하여 아홉굿마을로 불리는 곳에 자리한다. 천 개가 넘는 의자에 앉아 바쁘거나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시간이다.
이윽고 한낮의 햇살이 옅어지며 뉘엿뉘엿 하루가 저물 때. 협재해수욕장을 옆으로 끼고 차귀도를 향해 달린다. 옛날 송나라 호종단이라는 사람이 제주 땅의 지맥을 끊기 시작했는데, 차귀도의 지맥과 수맥을 끊어놓고 돌아가려 할 때 한라산 날쌘 독수리가 이들이 탄 배를 침몰시켰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섬이다.
저무는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이날따라 조금 이르게 해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조금 더 가야 하는데 3, 4분 정도 늦게 차귀도 해안에 들어선 까닭이다. 도중에 어디든 무조건 내려서 바닷가로 뛰어 내려갔더니 이미 중간쯤 해가 떨어지고 있다. 밤낚시에 몰두한 강태공은 낚싯줄을 던지고, 잔잔한 바다 위로 고깃배가 지나가는 풍경이다. 멈춰 서서 넋을 잃을 수밖에.
적당히 드리운 구름과 고요함 속으로 일몰이 진행되는 중이다. 하늘과 바다가 순간순간 달라진다.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인 저녁노을이 바다에 닿을락 말락 한다.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숨죽여 보다가 오메가 현상을 이루는 경이로운 찰나를 맞는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제주의 차귀도에선 이런 벅찬 순간을 기대할 수 있다.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 세대의 창업을 통한 도약을 지원하기 위해,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을 펼칩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점프업5060 프로젝트를 통해 창업에 성공하고 새 인생을 펼치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나이 들면 무얼 하면서 살까? 어떻게 해야 일터와 삶터를 분리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김은주, 박유하 부부는 은퇴 전부터 이어진 오랜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살고 있는 주택 지하에 자리 잡은 모모책방으로 말이다.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사람들은 모모책방에 모여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관람한다. 늦은 시간까지 필사를 하거나, 외국 드라마 ‘빨간머리 앤’을 보며 영어 공부를 한다. 수업을 이끄는 강사는 물론 도봉동 이웃 주민이다.
모모책방에서는 번개모임이 잦다. 김은주 씨와 책방을 함께 운영하는 그의 동생이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지면 모모책방 밴드나 카카오톡 오픈채팅에 소식을 올린다. 곧 관람을 희망하는 이웃들이 각자 간식을 챙겨 들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빔프로젝트를 내리고 책방이 어두워지면 모모책방은 영화관으로 변신한다. 흥미로운 마을공동체 사업에 응모하거나 새로운 활동을 기획할 때에도 주민들은 자연스레 모모책방을 찾는다.
문화 갈증 채우는 동네 책방
모모책방을 탄생시킨 김은주, 박유하 부부는 인생 후반부 계획을 세우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점프업5060 공고를 발견했다. 미래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해결해줄 프로그램이라고 판단해 지원을 결정했다. 교육과정을 충실히 따라 수료할 때쯤에 맞춰 모모책방의 문을 열었으니 그야말로 모범생이었다.
“책방을 사업 아이템으로 결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예요. 제 오랜 꿈이 서점을 여는 것이었고, 마을 문화공간에 대한 높은 수요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도봉구의 문화공간 인프라는 창동에만 몰려 있어요. 도봉동 주민들이 집 주변에서 문화생활을 즐길 만한 곳이 없죠. 책방을 비롯한 문화공간에 대한 갈망이 클 수밖에 없어요.”
걸림돌은 단 하나, 공간이었다. 책방을 열 공간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때에 이웃의 한마디가 해결책이 됐다.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의 지하층을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 일터와 삶터를 분리하지 않고도 마을 책방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묘수였다. 그렇게 모모책방은 2019년 12월 도봉동 주택단지 한가운데, 부부가 거주하는 주택 지하에 자리 잡았다.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지만 정작 마주한 건 코로나19 대유행이란 이름의 터널이었다. 부부는 넋 놓고 앉아 있는 대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섰다. 스마트 기기 조작이 서툴고,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집에 홀로 있어야 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돌봤다. 적은 인원이라도 모여 책방에서 비대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왔다. 부모를 대신해 숙제나 준비물, 가정통신문 같은 학급 전달 사항을 읽어줬다. 김은주 씨와 그의 동생은 심리학을 전공한 지식을 살려 ‘점심 도시락’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점심을 함께하며 종일 붙어 지내야 했던 엄마와 아이들의 마음 건강을 살폈다.
위기 속에서 탄생한 고향
김은주 씨는 힘든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모모책방이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감정적으로 위로가 필요한 날 불쑥 찾아갈 수 있고, 누구에게나 친구가 되어주는 문화공간. 그게 바로 김은주, 박유하 부부가 생각하는 모모책방의 지향점이다. 이는 사업을 구상할 때부터 막연하게 품고 있던 목표다. 어떻게 해야 실현할 수 있을지 막막하던 차에 되레 악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나 할까.
책방에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책들이 가득하다. 모두 김은주 씨와 그의 동생이 전공을 살려 선정했다. 이외에도 필사나 컬러링 키트를 구비해뒀다. 흉흉한 세상에 쫓겨 책방으로 찾아든 사람들이 마음을 돌보게끔 하기 위해서다. 도봉동 주민들은 갑갑한 집을 벗어나 책방에서 글씨를 끄적이고 책을 뒤적이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뛰어놀기 좋아할 나이에 집에만 있어야 했던 아이들에게는 더욱 답답한 시간이었을 터. 코로나19 시국에 유일한 놀이방이었던 책방은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줬다.
“고향이란 단순히 과거에 살던 동네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공유하는 추억이나 문화가 있어야 충족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고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책방을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고향을 돌려주자’였어요. 요즘 아이들은 태어난 동네, 살던 동네, 학교 다닐 때쯤 이사 간 동네가 다 다르잖아요. 이웃 간 왕래도 없죠. 개인적으로 그 점이 안쓰러웠는데, 책방에서 아이들이 행복한 추억을 만드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모모책방과 마을 아이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됐다. 하교하던 길에 신발 끈이 풀어졌으니 묶어달라며 불쑥 책방을 찾고, 학교에서 그렸다는 동네 지도에는 모모책방이 ‘우리 동네 명소’로 표시돼 있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책방에 찾아올 때, 책방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부부는 큰 보람을 느낀다.
모모책방의 사업 목표는 ‘적정 수준의 적자를 유지하기’다. 지금도 서적 판매로는 책방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익 모델만 운영하고 있다. 수익을 내는 데에만 급급하다 이웃들이 모모책방을 찾으려던 발걸음을 망설이게 될까 조심스럽기 때문. 책방의 공간을 활용해 유튜브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지만 역시 고개를 저었다. 하나의 영상을 기획하고 촬영한 뒤 편집하고 채널을 관리하는 동안 책방과 마을에 소홀해지기 싫어서다.
모모책방은 앞으로도 돈은 적게 벌더라도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선택해나갈 것이다. 큰길가 대신 주택가 안쪽에서, 누구든 들어올 수 있도록 언제나 문을 열어두고 있는 동네 책방. 모모책방은 아이들에게 고향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MBC충북이 로컬에 정착해 지역의 가치를 담고 지역 문제 해결까지 도전하는 청년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창업가의 심장은 용감하다-브레이브 하트 50(Brave Heart 50)"을 지상파와 뉴미디어 오리지널 콘텐츠로 선보인다.
"브레이브 하트 50"은 ‘로컬’(지역)에서 창업해 주목 받고 있는 19명의 충북 로컬크리에이터들의 이야기다. 매일 매일의 창업 생존 인사이트를 드라마와 인터뷰로 결합해 ‘팩추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한 최초의 크로스 미디어 콘텐츠다.
12월 22일(목) 밤 9시 MBC충북 TV를 통해 첫 선을 보인 후, 뉴미디어 콘텐츠로 재편집돼 유튜브 채널 ‘안녕!MBC충북’에서 구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로컬크리에이터'는 윤석열 정부 119번째 국정 과제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번 "브레이브 하트 50"은 본격 심층 ‘팩추얼 드라마’ 콘텐츠로,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로컬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에피소드는 총 다섯 챕터로 ‘나는 지방으로 갑니다’, ‘로컬의 가치를 믿어요’, ‘대표란 자리 결코 쉽지 않아요’, ‘왜 굳이 일을 벌이냐고 묻는다면’, ‘경쟁이 아닌 협업을 합니다’ 등 현실감 넘치는 깊은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도록 담아냈다.
이번 방송 이후에도 지역 가치에 집중하고 미래 충북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충북 로컬크리에이터를 찾아 글로벌 브랜드 콘텐츠로 이어나갈 예정이다.
"브레이브 하트 50"의 기획을 맡은 MBC충북 이영락 신성장전략국장은 "2023년 새해에는 로컬 창업 강연 콘텐츠 '브레이브 하트 50 -The Class(콜로키움)-'과 로컬 창업가의 글로벌 도전을 담은 '브레이브 하트 50 -Dive in World-'를 추가로 기획한다"며 "충북 로컬크리에이터가 바꿔 나가는 지역의 모습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그려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첫 크로스 미디어 콘텐츠이자 팩추얼 다큐멘터리 '브레이브하트 50'은 방송문화진흥회와 청주시의 제작지원을 받아 새해 정규 시리즈를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