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오사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소설가 쿠사카베 요의 의학 미스터리 소설이다.
‘사라카와’라는 유능한 담당 의사가 항문 암 말기 환자인 갓 스무살 난 쇼타르란 청년의 고통스러움을 지켜보면서 안락사에 대한 의사로서의 고뇌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아들이나 다름없이 키워온 이모까지 안락사를 간곡하게 부탁하지만 법적으로 금해 있는 안락사를 시도할 수 없어 고민 고민 하다가 환자가 잠깐 진통에서 깨어나는 순간, 본인의 동의를 얻어 케타민이란 진통제를 다량으로 투입시켜 안락사 시킨다.
그 후 일본 사회는 정치인과 의사들이 안락사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이는 중에 의문사 사건이 줄줄이 일어난다. 사라카와 의사는 양쪽 이익 집단 사이에 끼어 진정한 의료 행위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대형 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내 놓고 동네 보건소 같은 데서 환자를 보살피는 일에 몰두 한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인간에게 가장 아픈 이별은 동반자와의 사별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이별은 애증의 관계로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나 대상에 대한 모든 흔적까지도 유골과 함께 묻어야 하는 형식이 곧 사별이다.
벌써 남편과 사별한지 4년이 되었다. 대장암 말기환자인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어떤 연명 치료도 거부한 채 한 달 일주일을 진통제만을 투여하며 이생에서의 이별을 준비했다. 삶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뛰어 내리질 못하고 가픈 숨만 몰아쉬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필자와 아이들이 교대로 환자 곁을 지키면서 약효가 떨어지면 밤중에라도 즉시 간호사를 불러 주사를 놓게 했다.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마약 때문에 헛소리를 하고 혼수상태가 되다가 결국에는 정을 떼기 위한 행위인지 나를 때릴려고 벌떡 일어나기도 했고 배변을 밤새껏 쏟아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망고즙과 흰 죽을 입에 넣어주면 제비새끼처럼 홀짝홀짝 받아먹었다. 참으로 질긴 것이 생명이라더니.
가족 전체가 동의하면 산호호급기를 꽂지 않을 수 있었으나 아들의 반대로 이루지못했다. 우리 가족 모두 파죽음이 되어가면서 그의 마지막을 빨리 보내고 싶어 기도까지했다. “저 불쌍한 생명을 빨리 고통에서 해방시켜 평안하게 잠들게 해 달라”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늘 하던대로 망고즙을 먹였더니 기도가 막혀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산소 호흡기를 꽂으면 아무것도 먹이지 말아야하는데 사전 지식이 없어서 결국 내가 안락사 시킨 셈이 되었다. 죄책감 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간병 할 때와 그를 떠나보낼 때의 심경을 표현한 필자의 졸시다
칼바람 스미는 12월의 창가 병실
한밤중 또,또,똥 그의 서툰 발음따라 팔이 치켜올라간다
저 바위의 기저귀를 어떻게 갈아야하나
돌돌돌돌 구심력에 끌려간 내 고향 마을을 가로지르는 샛강
냇물 따라 나도 돌돌돌 흘러간다
어느 철학자는 “한 번 담근 물에 두 번 발 담그지 말라” 했건만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암반 끌어안고 돌돌돌 바윗돌 씻으며 가야하네
바다가 가까워 왔는지 질머진 똥짐 모두 내려놓는 화석 한 덩이
별자리를 찾아 떠난 그대
그와 나의 절취선에 폭풍이 인다
아직은 말랑말랑한 기억의 지층에서 소리쳐본다
새로운 영토를 찾아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그대
안녕하신가
응답하라
-송시월 시 전문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백세시대, ‘얼마만큼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치를 두는 이가 많아졌다. 언론인 최철주(崔喆周·7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장수시대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삶이 더욱 오만하고 지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웰빙’을 위한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그의 생각을 에 담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웰다잉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된다. ‘죽음’과 관련한 법인 만큼 제정 단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시행을 수개월 앞둔 현재, 나라 안팎의 혼란과 희석되며 이에 대한 관심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동안 글과 강연을 통해 ‘웰다잉’을 알렸던 최철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작년에 김영란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웰다잉법’도 우리가 필요해서 여론을 모아 만든 건데, 막상 시행하려 하니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아니, 잊어버린 거죠. 우린 그렇게 죽음을 기피하고 도망가려 해요. 김영란법도 처음 시행됐을 때는 논란과 혼란이 많았죠. 이제 내년이면 웰다잉법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이 법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됐어요.”
웰다잉법은 ‘존엄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안락사로 오해하거나 죽음[死]이라는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다. 그는 괜한 시비를 막기 위해 되도록 ‘웰다잉법’이라 말하지만, 이번 책의 제목에는 ‘죽음’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그 앞에는 ‘존엄한’이라는 수식어가 묵직하게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존엄’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이 ‘존엄’이라 생각해요. 광화문 사거리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어요. 차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거죠. 여성을 성희롱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여성의 존엄을, 학교나 군대에서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건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 모든 부분에 존엄은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게 헌법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존엄이 없느냐.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해야겠다. 그게 웰다잉법의 목적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죽음을 논하라
웰다잉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서류에 따라 자신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생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쉬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연명의료는 더는 의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말기 단계에 이뤄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약물 투여 등을 말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치료할 것은 다 하고, 어느 때가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야 하는데 환자나 가족들이 그걸 인정 못하는 거죠. 그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굉장히 고달파 해요. 평소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막연히 본능적으로 연명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연명의료 과정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팔다리가 묶여 발악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더욱 애석한 점은 말기 환자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자녀나 주변인의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부모님이 사전연면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식으로서 쉽지 않다”며 “부모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평소 부모와 자식이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괘씸하게 여기죠. 그러니 집안의 어른이 먼저 대화의 단초를 열어야 해요. 또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문서화해두고 보관 장소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해져 다툼이 나고, 한 사람의 죽음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그럼 그게 자식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되고요.”
그는 식탁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통이 어렵다는 요즘 가족, 그들이 죽음을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죽음이 등장하잖아요. 가령 ‘얘, 그 주인공 보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게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나중에 그렇게 하기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장례식장을 다녀오거나 주변에 연명의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례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보기도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두 가지가 뭘까요? 생명과 돈이죠. 평생 벌어놓은 돈 자기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라가 또는 자식이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유서는 많이들 써두죠. 그럼 내 생명은요? 내가 결정해두지 않으면 의사나 가족이 연명의료하겠죠.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남에게 맡기나요? 죽음도 돈처럼 자기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죽음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근하게 설명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그다.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아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를 계기로 웰다잉 공부를 하고 책도 쓰게 됐어요. 내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웰다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난 그게 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아픔을 드러내게 되죠.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죽음을 공부하게 됐지만,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인생의 롤 모델을 정하듯, 죽음에도 롤 모델 찾기를 권했다.
“좋은 죽음은 우리 삶에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처럼 최후의 순간에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죠.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씨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자신이 시한부라고 밝히며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죠. 존엄하게 삶을 끝내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겠다고 느끼면,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난 이렇게 죽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알뜰하게 살게 돼요.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 웰다잉을 생각하면 삶은 자연히 웰빙이 됩니다.”
암과 같은 질환 환자의 말기는 무척이나 힘겹다. 진통제가 투여되어도 고통은 잘 가시지 않고, 치료를 중단하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고 싶어도 말을 꺼내기 힘든 상태가 된다. 그리고 환자 입장에선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힘든 상황이 몇 달 혹은 몇 년 지속될 수 있다. 올 8월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의 법이 시행된다. 그리고 이 법의 중심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한 장의 서류가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은 흔히 ‘김할머니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의 촉발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2008년 세브란스에서 고인의 뜻에 따라 김할머니의 가족이 병원 측에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병원 측은 연명의료 중단을 거절했고, 결국 1년여에 걸친 법적 공방 끝에 법원은 연명의료(인공호흡기 사용) 중단을 허용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후에도 김할머니는 200여 일을 자가호흡으로 생존했다. 이 사건은 국내 최초로 존엄사를 인정한 사례로 기록되면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와 의료기관이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연명치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 등이다.
이런 연명의료 거부에 관한 법률은 전 세계적으로 사례가 많은 편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아직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엔딩노트 등을 통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종류와 여명에 대한 고지 여부, 연명의료와 존엄사에 대한 의견 또는 장기기증, 의학용 시신기부를 위한 등록 유무를 작성해 가족에게 알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이란?
김할머니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환자의 자기결정권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보건복지부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지난해 2월 제정됐고, 올해 8월 4일부터 정식으로 시행된다. 그러나 연명의료 중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명의료 중단의 결정을 위한 관리 체계나 이행과 관련한 법률의 일부 조항은 2018년 2월 4일에 시행될 예정이다. 사실상 연명의료 거부는 내년에나 가능한 셈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을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로 인해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말기 환자가 임종 과정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할 수 있고, 담당 의료진은 환자의 의견과 환자 상태 등을 고려해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연명의료는 김할머니 사건에서 핵심이 됐던 인공호흡기뿐만 아니라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의미한다.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물, 산소, 영양분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연명의료 거절 방법
연명의료결정법에서 규정한 환자의 연명의료 거절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환자가 본인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의료기관)에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구하는 방법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정한 말기 환자가 담당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하면, 의사는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나 호스피스 이용 여부 등을 논의한 내용을 포함해 서류를 작성하게 된다. 물론 환자의 서명이나 담당의사의 서명은 필수다.
말기 환자는 아니지만 본인의 신념에 따라 사전에 미리 연명의료에 대한 중단 의사를 정해놓고 싶을 때 등장하는 것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법인이나 단체에서도 등록이 가능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결정과 호스피스 이용 여부, 작성 일시와 의향서의 보관 방법 등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실제로 아직 법 시행 전이지만 일부 사단법인에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양식을 공급하고, 작성된 의향서를 보관하거나, 의향서 기록에 관한 카드를 제작해주는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비영리기관의 형태를 띠지만 일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소액의 기부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현재 운영되는 사단법인이 연명의료결정법의 본격 시행 이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등록기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또 등록기관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해도 이들이 현재 제공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에서 정해놓은 규정과 다르거나 시행 전 개정 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주의해야 한다.
의료계에서는 여전히 논란 중
이 법 시행에 대해서는 아직 의료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상 환자가 사실상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환자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 죽음을 앞둔 많은 환자들의 권리는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법에서 정한 임종 과정이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 등의 표현이 모호해 이를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만 적용하는 보수적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연명치료 중단을 원하는 환자의 고통을 늘려 원래의 법 취지를 상실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법의 구조상 환자가 본인의 연명의료 거부를 분명히 밝히더라도 최종 집행에 관한 결정권은 의료인과 의료기관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원활한 제도의 시행을 위한 여러 가지 보완 노력은 정부 부처와 의료계를 통해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지는 내년 2월에는 시행령이나 시행 규칙에 따라 현재의 예상과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연명의료결정법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확실한 윤곽은 제도의 시행 시기까지 기다려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에도 노벨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大極)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재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일상과 무관하고, 삶과 거리가 있게 느껴지지만 사실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대단히 죽음에 인색하다. 입에 올리는 것마저 거북해한다. 매일 죽음을 접하는 사람은 다르게 느낄까?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마리아 병동(호스피스 병동)의 이인순(李仁順) 수녀를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저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니까요. 하루하루 죽어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있고요. 모든 여정에는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던진 우문(愚問)에 이인순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소인의 입장에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라니. 일이 어렵거나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이인순 수녀는 되레 의아해한다. 소임받은 일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인순 수녀가 이 호스피스 병동에 부임한 것은 국제성모병원이 개원한 2년 전.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서 근무하다 수녀회로부터 소임 이동 명을 받고 이곳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데, 이 수녀는 간호사이면서도,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에겐 이곳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다들 젊은 나이이기도 하고요.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환자와 가족들과의 만남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병동에서 함께 산다고 볼 수도 있죠. 돌보던 환자가 돌아가시면 습(襲)까지는 아니지만 시신을 정성껏 닦고 새 옷을 입혀드립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보내드리는 일까지 모두 직접 해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소진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가족이 치료 대상이 되는 이유
이렇게 어려운 일인 호스피스는 무엇일까?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보다는 통증 경감과 기타 신체적 증상 조절, 심리·사회·영적 돌봄을 통해 ‘남은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죽음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의 마감과 가족과의 이별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정부에선 지난해 7월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지정해 운영 중이다. 국민건강보험에서는 말기 암 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앞으로 그 대상이 다른 질환의 환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현재 이인순 수녀가 있는 마리아 병동에는 33개 병실이 있다. 환자가 머무는 시간은 평균 한 달 정도. 물론 길면 두 달, 짧으면 일주일 이내에서 몇 시간까지 차이가 있다.
호스피스 병동이 일반 병동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에 대한 관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선 가족도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이 수녀는 말한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어요. 말 그대로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죠. 보통은 13개월에서 3년 정도면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고들 해요. 하지만 그 이상 길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 정도 되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죠. 여전히 배우자와의 사별이 가장 큰 충격, 즉 삶의 스트레스 1위이지만 최근에는 형제·자매와의 사별도 그 충격이 매우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요.”
이러한 사별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겪는 분들이 말합니다. 자녀나 가족들로부터 ‘이제 그 얘기 좀 그만해. 잊을 때도 됐잖아’라는 말을 듣는다고요. 죽음을 터부시하고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까, 고인에 대한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별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심한 경우 50년이 지나서 사별 상실의 슬픔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사별을 겪었던 당시에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 결국은 표출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러한 슬픔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나’와 ‘슬퍼하고 있는 그 당시의 나’를 대면하고 인정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병명 알고 죽음 맞는 환자 적어
현재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입원하면 모든 환자가 암 환자다. 그러나 실제로 병명과 상태를 정확히 알고 오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이 수녀의 설명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것이 ‘진실 통고’ 혹은 ‘나쁜 소식 전하기’예요.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자는 것이지요. 환자에게 병명이나 의료적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보호자, 즉 자녀분들이 당사자들에게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환자에게 가벼운 병명으로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미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진실 통고’를 권하면 보호자들 반응이 대부분 비슷해요. ‘아마도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얼마 안 남으셨는데 꼭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요, 삶의 끈을 놓으실 것 같습니다’ 등등 이유가 많습니다. 하지만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 환자 본인이잖아요. 자신의 남은 삶을 삶의 주인이 갈무리해야 하는데, 그것을 자녀들이 막는 셈이죠. 환자의 권리를 앗아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본인들에게 진단명이라는 이름으로 말기 암을 알리고 현재의 의료적 상태를 알렸을 때 심리적으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만약 환자에게 진실 통고를 할 때 심적 부담이 된다면, 보호자가 그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원래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의료진의 몫이니까요. 가족 중에 말기 암 환자가 있다면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환자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주들, 즉 어린아이까지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수녀는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놀란다는 이유로 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 사별 현장 또는 조부모 사별 현장에서 배제된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뿐인데, 부모와의 마지막 추억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수녀의 이야기다.
병명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숨기더라도, 환자는 병 진행에 따른 본인의 몸 상태의 변화나 병동의 환자들, 주변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환자는 자신이 어떤 상태라는 걸 안다는 사실을, 또 가족은 환자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아도 입을 닫는다.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숨기는 것이다. 슬프게도.
시한부 환자가 겪는 5단계
그렇게 알게 된 말기 암에 대한,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한 환자의 심리적 반응은 어떨까.
“호스피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설명했어요. 맨 처음엔 부정하죠. 결과를 믿지 않고 다른 병원을 찾아가요. 그러나 같은 결과를 듣게 되지요. 그럼 ‘하필 내가 왜?’라며 자신이나 가족 또는 병원 직원, 더 나아가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존경과 이해와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면 격한 분노가 한결 누그러집니다. 진실과 인내가 필요하죠. 그러면서 사실을, 죽음을 인지하지요. 하지만 타협하는 과정을 거쳐요. 종국에는 신과의 타협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우울해지고 수용하는 과정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반드시 이 순서대로 감정 상태를 보이지는 않아요. 감정의 기복이 큽니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요.”
그렇게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은 죽음일까. 또다시 튀어나온 모호한 질문에 이 수녀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분명하게 해줬다.
“그 전에 바르게 사셔야 해요.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흥청망청 살다가 인생 말년에 웰다잉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가족과의 불협화음이 있는 경우의 환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아요. 마지막까지 외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되더라고요. 환자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해서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는 남은 가족한테 떠넘기지 말고 본인이 해결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별의 아픔을 겪는 가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남기는 셈이니까요.”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죽음 역시 인생의 방점이고 현실이니까. 로맨틱할 이유도, 동정만 할 일도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택 임종’ 하고 싶어도 못해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의학적으로 임종 시기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단다. 때문에 그 시기가 가까워지면 환자를 임종실로 모시고 차분히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족들과 이별할 시간도 마련한다.
“임종실을 해밀방이라고 불러요. 해밀은 비온 뒤 맑은 하늘을 뜻하는 우리말이에요. 해밀방으로 옮겨지면 환자와 가족들이 그간 하지 못했던 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라고 권해요. 서로가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해서 용서받고, 화해하라고요. 이런 과정은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돼요. 한번은 의식이 없는 아버지(환자)와 가족 모두가 마지막 인사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환자의 의식이 살짝 돌아와, 네가 했던 말 다 들었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표현하신 거예요. 환자의 큰아드님이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가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환자는 의식이 없어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귀는 열려서 듣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환자가 임종하면 이 수녀와 담당 간호사는 고인의 몸을 닦고 준비해뒀던 옷, 생전에 좋아했던 옷으로 갈아입힌다. 이 수녀는 이 과정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보람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피를 토하는 환자가 있어요. 그러면 고인의 얼굴을 잘 닦아드리고 정돈된 모습으로 가족과 마지막으로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드려요. 그러면 가족들이 기억하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피 토한 흔적 없는 깨끗하고 편안한 모습이에요. 그 모습에 가족은 위로를 받아요. 편한 얼굴을 보고 편하게 돌아가셨다고 믿고 싶은 거죠.”
환자들은 생의 마지막 장소로 병원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많은 환자들이 임종 장소로 집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병원이 선택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다.
“집에서 환자를 24시간 간호한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환자를 돌보는 문제도 있지만,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난 뒤에도 문제가 있어요. 사망 확인을 위한 행정적인 절차가 꽤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호자들이 겁을 먹는 경우가 많아요. 죽음의 현장이 자연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이니까요.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의 영향이 지배적인 거죠. 현재는 꼭 가정에서의 임종이 아니어도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를 통해 호스피스 서비스를 가정에서 받으실 수 있어요. 올 3월부터 시범사업을 시행 중인데, 병원에서와 같은 돌봄을 가정에서 받을 수 있고 돌봄 제공자들이 연계되어 가정으로 방문합니다. 환자들이나 가족들의 반응도 좋아요.”
죽음 앞에서 가족들의 모습은 어떨까. 이 수녀는 예외 없이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좋은 데로 가라”고.
“다들 그러세요.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데로 먼저 가라고 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다시 만나자고. 아마 우리네 민간신앙이 바탕에 깔렸겠지만, 죽음 너머에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해요. 좋은 곳에 먼저 가 있으라고. 다시 만나자고.”
이 수녀는 마지막으로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송나라의 주신중(朱新中)이 훌륭한 죽음에 대해 5멸(五滅)의 실천을 이야기했어요. 멸재(滅財), 재산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원(滅怨), 원한을 남기지 말 것. 멸채(滅債), 남에게 빚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정(滅情), 정분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마지막으로 멸망(滅亡),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것이라고요. 인생 여정의 붙잡고 있기와 놓아주기를 균형 있게 한다면 하루하루 잘 죽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생충 박사’로 잘 알려진 서민(徐民·50) 단국대 의대 교수가 쓴 , 등을 보면 기생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생충(寄生蟲)은 이름처럼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데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존재에 대해 느끼지 못한다. ‘죽음’ 역시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갖고 태어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실감하기 어렵다. 사람에게 이로운 기생충도 있다던데, 과연 죽음도 그럴 수 있을까? 서민 교수가 추천하는 은 왠지 그 답을 줄 것만 같았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책 제목이 별로라고 생각해요.” 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자 서 교수는 제목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뭔가 삶을 정리하고 죽음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는데 실제 내용은 뜻밖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책을 읽어보면 엄숙하기보다는 의외로 꽤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책인 것은 틀림없다. 조금 특별한 건 그것을 신경외과 의사의 시선으로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영국의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인데 자기 경험담을 글로 재미있게 잘 썼어요. 의사들은 어쨌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잖아요. 책을 보면 양쪽 전두엽이 파열된 한 환자를 두고 수술을 하되 평생 불구로 살 것인지, 오히려 평화로운 죽음을 맞게 할 것인지를 두고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이 생기죠. 그때 저자의 심정이나 고민이 가장 와 닿았어요. 물론 나라면 당연히 수술을 안 하겠지만요.”
심장병을 앓던 서 교수의 아버지는 4시간 동안 수술을 받고는 허무하게도 이튿날 돌아가셨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는 미련 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 서 교수가 책을 읽으며 가장 생각났던 사람은 지난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였다.
“정말 친한 친구였는데 갑자기 살이 10kg 넘게 빠지길래 병원 한번 가보라 했더니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어요. 나야 의대를 나왔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 말기에는 수술을 안 하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런 걸 모를 친구도 아닌데 갑자기 희망적인 메시지나 기적적인 이야기에 집착하더니 결국 수술을 받았어요. 고등학생 딸이 시집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면서요. 수술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 앞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걔는 자기가 그렇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 한 거죠. 결국 수술을 하고 항암제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난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항상 죽음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행복의 분모가 낮으면, 삶이 아름다워진다
서 교수가 말하는 ‘죽음 준비’란 언제 떠나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에서 온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삶에 대한 만족도가 드러났다. 아쉬운 것은 없는지, 더 하고 싶은 것은 없는지,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은 없는지. 집요하게 물어봤지만 그의 대답은 모두 “없다”였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모습이나 태연한 표정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서 교수는 “행복의 기준이 아주 낮은 덕분”이라며 인생의 실수를 통해 깨달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의사이기 때문에 작은 실수에도 사람의 목숨이 오갈 만큼 치명적이죠. 제가 손이 여물지 못한 편이라 실험하면서 실수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 봐야 기생충 몇 마리 죽는 거지만, 내가 이 일과 안 맞는 사람인가 하고 괴롭기도 했어요. 나중에서야 깨달았는데 내가 손이 거칠면 섬세한 아이를 조교로 두면 되더라고요(웃음). 생각을 바꾸니 일에서의 실수는 어느 정도 만회가 됐죠.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나를 바꿔놓았어요.”
그는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첫 번째 결혼’이라고 한다. 6개월 만에 이혼 도장을 찍었지만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 ‘천국’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1999년에 그 일을 겪고 결혼은 절대 안 한다며 8년을 버텼어요. 그 세월을 견디고 지금의 예쁜 아내를 만나 아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죠. 아마 그런 실수가 없었다면 대충 아무나 만나서 결혼했을 거고, 지금처럼 즐겁지도 않았을 거예요. 모든 시련은 의미가 있더라고요. 그때 바닥을 치고 나니까 웬만한 일에는 우울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후 나머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거라 생각하니 별거 아닌 것에도 감사하고 즐겁고 그래요. 저는 원하고 바라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면 자연히 행복 분모(기준)가 낮아지고 가진 게 적어도 더 행복할 수 있죠.”
서 교수의 꿈은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으로 그 꿈을 이뤘고, 아름다운 아내와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로 바라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0년 전부터 로또를 꾸준히 사고 있다고.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것이지만 말이다.
‘참 괜찮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며 ‘괜찮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고통이 없는 죽음.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죽음’을 원하면서도,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고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싶다고 썼다. “멋진 삶이었어. 우리는 할 일을 다 했어”라는 말과 함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그의 어머니처럼. 서 교수가 생각하는 ‘괜찮은 죽음’은 무엇일까?
“치매 오고 이런 건 무섭잖아요. 굳이 죽는 방법을 따지자면 저자의 얘기처럼 순간적인 소멸이 좋겠죠. 근데 꼭 마지막에 어떤 말을 남기겠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죽기 전에 하지 말고 평상시 할 말은 다 해놔야 한다고 봐요. 작년에 죽은 친구처럼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까요. 버킷리스트나 자서전 이런 것도 꼭 몇 살이 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게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올해는 강의 스케줄을 줄이더라도 가능한 한 책을 많이 내고 싶다는 그는 중·장년 세대에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신의 전문 분야나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을 쓰고 책을 남기는 것은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가 기생충 책을 내고, 그걸 읽고 나서 이 일을 하겠다고 온 사람이 많았어요. 책을 보지 않았다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젊은 친구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의사, 변호사, 과학자 뭐 이런 전형적인 몇 가지밖에 몰라요. 가령 소행성을 연구하는 사람이 쓴 책을 봤다면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다양한 꿈을 가질 수 있겠죠. 그래서 앞서 산 사람들이 책을 써야 하는 거예요. 물론 내 경험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글 쓰는 연습을 해야겠죠. 돈을 벌려고 내는 책이 아니니 화려한 문장도 필요 없어요. 조카에게 이야기하듯 내 삶이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쓰는 게 중요해요.”
“우리 모두 위험에 처한 아기들과 이웃을 위해 기도합시다.” 영화가 끝나고 한 관객의 말에 극장은 어느새 예배당이 되었고, 관객들은 한참동안 그곳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낙태를 결심했던 한 여성은 눈물로 참회하며 아기를 낳겠다고 마음먹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는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살 것을 다짐했다. 영화 가 불러온 변화였다. 엄밀히 말하면, 주사랑공동체 이종락(李鐘洛·62) 목사가 만든 ‘베이비박스’가 일으킨 기적과도 같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7년 12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새벽, 대문 앞에 정체 모를 굴비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비릿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그 냄새를 맡은 길고양이들이 상자 주변을 서성거렸다. 뚜껑을 열어 본 이종락 목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상자 속에 든 것은 바로 갓난아기였기 때문. 하마터면 추위에 동사하거나 길고양이들의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어쩌면 더 많은 생명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길거리에 방치된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 목사는 체코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들었고, 2009년 12월 가로 70cm, 세로 45cm, 높이 60cm의 베이비박스를 직접 만들어 서울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외벽에 설치했다. 보온효과가 있는 따뜻하고 푹신한 베이비박스에 아기가 들어오는 순간 교회 내부의 벨이 울리도록 설계했다. 막상 그렇게 마련해 놓고도 그 벨이 울리지 않길 바랐던 이 목사다.
“제발 어린 생명이 버려지지 않길, 그러나 버려질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이곳에 넣어 주길 기도했어요. 호기심에 사람들이 박스 문을 열어 벨이 울리곤 했는데 처음 아기가 들어온 것은 3개월 만이었어요.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탯줄을 달고 있었는데… 그 심정은 말로 표현 못 해요. 그래도 길 가에 버려지지 않고 베이비박스 문을 열고 우리에게 와준 것에 감사했죠.”
아이를 낳은 우리 아이들, 손가락질보다는 따뜻한 손길로
한국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접한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영화예술학교 학생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는 2013년 미국에서 먼저 개봉했다. 50개 주 870개 극장에서 500만 관객과 만나며 제9회 샌 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 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 영화상을 받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이 영화를 계기로 애틀랜타주에 베이비박스가 만들어졌고, 인디애나주에서는 병원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에 베이비박스를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한 법안이 나오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올해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개막작으로 첫선을 보였고, 최근까지 몇몇 소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종락 목사의 헌신에 감탄하고 대단한 일을 했다며 박수를 치지만, 그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베이비박스 사역은 목사 개인의 계획이나 목적으로 이만큼 온 것이 아니에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불이 난 것을 보면 신고하는 게 맞잖아요. 길 가에 버려진 아기들을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어요. 당연히 보호하고 구해야죠.”
단 한 명의 아기라도 더 살리기 위해 만든 베이비박스이지만 처음 이 사실이 매스컴을 탔을 때만 해도 곱지 않은 시선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미혼모들이 무책임하게 아기를 유기하게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100개가 넘는 베이비박스가 있지만 1년에 겨우 한두 명의 아이밖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면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2012년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는 입양특례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베이비박스를 통해 들어온 아기가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입양특례법이 실행되기 전 2년 7개월 동안은 76명의 아기가 들어왔는데, 그 이후에는 1년 5개월 동안 305명이 베이비박스에 남겨졌어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를 낳고 출생신고를 하는 게 별거 아니지만, 미혼모나 특히 미성년자들에겐 큰 부담이죠. 그래서 산부인과를 가지 못하고 몰래 출산을 하게 되고,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맡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아기를 두고 가는 미혼모 중 60% 이상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가슴 아픈 이 목사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린 미혼모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세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성교육을 하는 경우가 드물죠. 자신이 가진 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면 아이들도 그러한 행동을 잘 절제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일이 벌어졌다면 그땐 그들을 보호하고 이야기를 들어줘야죠. 우리 아이들이잖아요. 하지만 대부분 어른들은 학생이 임신했다고 하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며 손가락질하죠. 그게 다 우리 사회의 ‘체면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미성년자가 아이를 가지면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숨어버리게 되죠. 그러다 우울증을 겪거나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요.”
이 목사는 미혼모들이 찾아오면 “열 달 동안 아기를 지키느라 고생 많았다.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기와 함께 자살하려고 결심했던 엄마들도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돌려 자신을 찾아와 귀한 두 생명을 살릴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이 목사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아기를 키우겠다고 데리고 간 미혼모도 150여 명이다. 그런 미혼모들을 위해 분유, 기저귀,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고 주사랑공동체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며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목사는 어린 엄마들을 향한 따뜻한 손길이 그들의 부모세대로부터 뻗어 나왔을 때 진정한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인생 후반전에 행복 더하기 ‘입양’
그동안 베이비박스 문을 통해 세상의 품에 안긴 아기는 올해 900명을 넘어서 이제 1000명에 가까워졌다(2016년 7월 8일 기준 979명). 이 목사는 모든 아기의 베이비박스 일지를 쓰고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키울 수는 없지만 애정을 담은 엄마의 손편지도 함께 보관한다. 이는 부모가 다시 아기를 찾고자 할 때 귀중한 자료가 된다.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 목사도 그중 9명의 아이를 입양해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 그가 입양한 아이들은 장애가 있거나 전신마비, 다운증후군 등을 앓고 있다. 아이 한 명을 양육하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30여 년 전,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 둘째 아들 ‘은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보배 은만이 덕분에 생명의 거룩함, 소중함을 깨닫고 배웠어요. 몸을 움직이거나 말은 못하지만 그 아이는 눈빛으로 이야기하죠. 그 눈을 바라보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사는 게 아니라는 것, 하루를 만족하고 현재를 감사히 여기고 이웃을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지금 9명의 아이를 입양했지만, 몇 명 더 입양하고 싶어요. 그만큼 삶의 보람과 행복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입양 절차가 복잡하고 기준이 까다로운 국내에서는 입양 의사가 있던 이들도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 목사는 자녀들을 장성시킨 중·장년에게 입양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이 삶에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입양은 자신의 무언가를 할애하는 것이 아닌 인생에 행복을 더하는 일이라고 한다.
“어제 다섯 명의 아이를 입양한 70대 중반의 교수님이 다녀가셨어요. 그분 말씀이 입양을 하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다 크고 출가하면 부모들은 외롭고 쓸쓸해지는데 그럴 틈이 없는 거죠. 나도 우리 첫째 딸이 자랄 땐 모르는 것도 많고 정신없이 지냈어요. 이제는 더 능숙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키울 수 있어 좋더라고요. 특히 갱년기 주부들은 우울증을 앓기도 하는데, 입양을 계기로 다시 사랑으로 아기를 키우다 보면 그 아이가 주는 기쁨으로 삶이 더 행복하고 즐거워질 거예요.”
1000명의 부모, 하나뿐인 부부
를 본 관객이라면 이종락 목사의 아내 정병옥 여사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이 목사를 내조하느라 힘들고 고단할 텐데, 영화 속 그녀는 늘 명랑한 목소리로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는 그런 아내가 있었기에 수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목사에게 아내는 늘 고맙고도 가장 미안한 존재다.
“밤낮 안 가리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키우느라 서로 대화할 정신이 없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해오던 일들에 담당자도 따로 두고 아이들도 많이 커서 조금 여유가 생긴 편이에요. 나는 그전에 참고 인내했던 마음이 많이 다독여졌지만 아내는 오히려 그런 점들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죠. 가끔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낼 때도 있는데, 그만큼 내가 이 사람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하기도 해요.”
10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의 부모이자 수호천사 역할을 해온 부부이지만, 정작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했던 시간은 적었다고 한다. 무심하고 소홀했던 지난날은 묻어두고, 매주 목요일을 휴일로 정해 단둘이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낯간지러워 못했던 애정 표현도 이제는 자주 하려고 노력한다는 이 목사다.
“아내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큰 위로를 받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 외에 지금까지 내가 남편으로서 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력하고 고마움을 표현해야죠.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었는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아내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마지막엔 내가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죠. 처음엔 서투르고 어색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버릇이 되면 괜찮더라고요. 물론 서로 잔소리도 하고 툭툭거리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그게 바로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의 두터운 사랑이고 정이죠.”
어느 날, 남대문 시장 노점에서 메뚜기 설 볶아놓은 것을 한 대접 사왔다. 위생처리 겸 프라이팬에 다시 한 번 더 볶은 후 맛있게 집어먹고 있을 때, 퇴근하여 거실로 들어서던 며느리가 흠칫 놀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니… 어떻게 그것을, 잡수세요?”
“먹어봐라, 고소하다! 아, 이제야 메뚜기 솟증[素症]을 풀었다!”
노릿노릿 잘 볶아진 메뚜기 두세 마리를 집어건네자 며느리는 뒷걸음질을 치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웃었다. 물방개와 잠자리 여치를 잡아 구워먹은 옛이야기를 하면 꾸며낸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무논과 수초 많은 개울이나 못[池] 가장자리에서 우렁이와 개구리를 잡아먹었다면 그런 곳(무논 등)이 어디 있느냐며 과장하여 표현하는 줄 안다.
산속 계곡 물속에서 다슬기와 가재를 잡아먹었다면 그 정도는 믿어준다. 산행하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란다. 특히 참새 개구리 잠자리 물방개를 잡아 구워먹고 구운 물방개의 살찐 뱃대지가 입안에서 툭 터질 때의 쾌감이 좋았다고 하면 “아, 어머니 몬도가네!”라고 한다.
그렇다. 며느리는 나를 몬도가네 버금가는 못말리는 여사로 알고 있다. 김장배추도 푸른 잎이 많이 달린 뻣뻣하고 못생긴 야생 배추를 쭉쭉 찢어먹기 좋아하고, 썰어서 버리는 배추김치 대가리조차 와삭와삭 씹어먹는 나에게 더러는 연민의 눈초리도 보낸다. 뿐인가, 보리쌀을 두 번 삶은 순 꽁보리밥과 누런 다시멸치 몇 마리 넣은 멀건 된장국 만으로 식사하길 좋아하고, 찬밥 물에 말아 새우젓 한 가지로 혹은 된장에 박은 고추장아찌 두세 개로 한끼를 때우곤 “아 잘먹었다!” 만족한 낯빛의 나를 더러는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가마솥 가득한 보리밥을 보며
가난에 절어서 먹을 음식 같지 않은 조야한 것들로 목숨을 연명해온 당신의 성장과정이, 또한 그때로부터 수십년을 더 살고도 그것을 잊지 못해 즐기는 당신의 지금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고 불쌍하여 눈물을 머금기도 한다.
그럴 것이다. 수십년을 지나고도 상기도 그때의 입맛이 뇌리와 심층 켜켜에 박혀, 그렇게 양육된 살과 뼈와 피가 영혼까지 흡수하여 향수(鄕愁)라는 미명으로 그립고 그리워 찾게 되는, 그 즈음의 먹거리며 하늘이며 바람이며 공기며 사람냄새 풍기던 촌스럽고 순박하던 인심이며, 그것은 진득한 사랑이며 아픔이었다.
1950~60년대는 모두가 가난할 때였지만 농촌은 더욱 가난했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에서도 여자들은 더욱 바닥 대접을 받았다.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대가족으로 가마솥 가득 보리밥을 지으면 가운데 한움큼 얹은 쌀은 보리쌀과 섞어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 할머니 순서로 밥을 담고, 나머지는 전부 보리밥으로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 차지였다. 보리밥뿐만 아니라 나물밥 무밥 고구마밥 등으로 곡식을 아끼기도 했지만, 그나마 여자들에게는 별미이기도 했다.
당시의 김장밭 배추는 비료나 속성 영양분을 주지 않아 푸르고 질기고 가운데만 노란 속잎 이 조금 차 있었는데(지금은 푸른 잎이 거의 없지만) 노란 부위는 어른들 상에 썰어놓고 푸르고 억센 겉잎과 대가리는 여자들 차지였다. 갈치나 고등어를 굽거나 졸이면 살은 전부 어른 상이고 여자들은 대가리와 꼬리부분, 닭 백숙을 하면 껍질과 국물 정도 맛보는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막내라 어른 상이 물려지면 남은 반찬을 제일 먼저 차지하는 특혜를 누렸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섭취했던 음식은 그야말로 현대에 와선 웰빙식이나 다름없다. 비료나 속성 영양제를 주어 성숙시킨 인공식품이 아니라 천연의 햇살과 바람과 흙이 키워낸 ‘자연식’ 그대로였다. 사람들의 인성도 우직스러웠지만 대체적으로 순수하고 소박했으며 교활하거나 사기치는 사람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서 젊은이들은 다이어트 식품 섭취와 자기관리에 혈안이 되어 영양실조로 비틀거리는 웃지못할 현상이 일어나고, 오히려 못살 때 먹던 ‘자연식’을 찾는다. 자연식을 찾아 귀촌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상인가.
금쪽이야 보물이야 품던 ‘아들’들이 TV에서 걸핏하면 고만한 여성에게서 뺨을 맞고, 하이힐에 무릎이 차이는 수난과, 설거지며 아기 키우기에 비지땀을 닦고 있음을 본다. 장모 눈치 아내 눈치 살피기로 눈동자는 연일 충혈되어 있고, 사나이다운 기개는 어디에도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과연 저 남자들이 이 나라를 지켜줄 수 있을까 심히 불안해진다.
남녀 성의 특징은 유전자부터 너무나 다르다. 특성이 그 성의 적성이라면 각각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거늘, 여자 남자 특성이 뒤죽박죽 혼성되어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다.
당시, 딸들이라고 남자들에게 당하고 살지만은 않았다. 열 두세 살부터 열 대여섯 살까지 동네 여식들은 밤마다 수틀을 들고 어른 출타중인 동무집으로 몰려들었다. 시집갈 준비로 신부의 필수 혼수인 베갯잇을 수놓아 만들고 횃대보와 상(床)보도 십자수를 놓고, 버선을 수십짝 만드는 등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수를 놓았다. 재잘재잘 수다도 떨었다. 그러면서 사흘이 멀다하고 공동야식도 했다. 모두가 각자 집에서 쌀 두세홉, 배추김치 한 쪽씩을 훔쳐와 모두어 밥을 지었다.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노란 속 김치를 쭉쭉 찢어 걸쳐서 한입 가득 우겨넣고 씹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만 먹는 흰 쌀밥과 노란 속 배추김치를 그릇 수북히 담아 원을 풀었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햐얀 쌀밥은 입안에서 제대로 씹히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부드럽고 노란 배추속잎은 시퍼렇고 질긴 배추잎에 길든 이빨을 간지럽혔다.
어떤 동무는 자기 집 닭서리를 유도하여 닭백숙을 만들어 영양 결핍의 여식들 몸뚱이에 기름을 넣기도 했고, 더러는 집에서 담근 밀주를 퍼내와 마른 명태를 찢어 음주도 즐겼었다.
황혼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감히 집 곡식을 훔쳐와 이렇듯 야식을 즐길 수 있는 여자들은 그나마 딸자식들이었다. 며느리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행위들이었다. 딸자식은 부모에게 들켜도 나무람을 듣는 정도로 끝났지만 며느리들은 심하면 쫓겨나거나 좀 더 엄한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 숙녀가 신사의 빰을치는 것이 예사로운 세상이 된 것 이상으로 늙은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공경심 따위는 진작에 없어져 기대도 않는다지만, 일 나가는 며느리가 살림 사는 시부모 부려대는 모습에는 한숨이 절로 터진다.
세상이 미친년 널뛰듯 뒤집어져 버린 것을 어찌하느냐고 많은 어른들이 포기하는 척 이해하는 척 말들도 하지만, 삿대질에 거친 말 거침없이 내뱉는 젊은이의 눈앞 폭력이 두렵다 해도, 또한 그 며느리에 의지하여 밥을 먹는 상황이라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린 당신의 모습은 처량하다. 스스로 만들어낸 푸대접이며 상황설정이라는 생각이다.
황혼녘의 우리 모두에게 남아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오로지 ‘시간’뿐임을 누구나 다 알면서 그 시간을 온통 빼앗기고 사는,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착취 희생을 즐기며 자위하는 어른들도 많다니, 각각의 마음을 누가 어쩌겠는가.
누구나 인생은 한 번뿐이며,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유일한 내 재산인 ‘시간’은 천금 만금보다 더 윗자리의 소중한 것이거늘, 진정 나를 위해 그 시간을 보듬고 살고 있는지 열 번 스무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최근 ‘존엄한 죽음’을 위한 법이 통과되었다.
회복되지 못할 말기암 환자나 다른 위중한 병으로 회생불능의 상태임을 의사가 진단하면,더 이상 숨이 붙어 있게 연명치료를 하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전 법은 회생불능의 환자라 해도 온갖 생명 연장 장치를 환자에게 설치하여 숨이 끊어지는 시간을 늦추거나 기적처럼 회복도 시키는 의료법을 의사들이 강행했지만(그러지 않았을 경우 의사는 살인죄로 제소될 수도 있으므로),이제는 환자가 입원 당시에 승낙을 하지 않아도 가족들로 인해 생명 연장 장치를 거두어 버리거나 아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이다.
물론 옛날에도, 현재도 우리 풍습에 ‘객사시키지 않는다’며 가망이 없다는 환자를 가족들이 퇴원시켜 집으로 옮겨가는 경우는 있었다.그리고 실제 종합병원 등에서는 법이 통과되기 이전부터 내부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다.대개 가족들이 금전적인 이유로 혹은 환자의 원함으로 이루어지고는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정식으로 합법화된 것이다.
살아나지 못할 환자인데 온몸에 주저리 주저리 생명줄을(인공호흡기등) 시설하여 고통을 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인 듯싶지만(그러한 부분도 없지 않다),여기에는 의도적인 많은 위험한 요소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 죽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죽을 시간의 장단(길고 짧음)이 있을 뿐 모두 죽지만, 상호간(가족관계등)의 이해관계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내 자산’은 ‘내 시간’ 이다
몸이 건강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죽을 병이면 생명 연장 시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병원에 입원케 되면 백명의 환자 모두가 ”어떤 방법으로든 살려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린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둠이 어른들이 갖춰야 할 순서이다. 본인의 의사가 없으면 가족들이 각각의 의견을 내놓는 살벌한 분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연명’ 시설을 말자 하고 둘째아들은 ‘시설을 하자’는 상반된 의견으로 내 목숨이 자식 손에 달려 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그들에게 상처를 안겨주게도 된다.
정부도 그렇다. 이런 엄숙하고 중대한 법을 합법화시키려면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인생을 정리하면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호스피스 병동시설이 우선 만들어져 병행되어야 하고, 문제화될 수 있는 부분을 의혹이 없도록 규정을 마련해야 되겠지만,어쨌거나 가장 먼저 법시행을 맞이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 어르신(노안)들이다.
오로지 유일하게 내 재산인 앞으로의 내 ‘시간’을,즐길 일이고 아낄 일이다.당당하게 변한 세상과 맞서면서 소리도 질러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하고 싶은 일을 세상 눈치 볼 것 없이 즐길 일이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내 떠난 후의 남은 사람 걱정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다. 이제는 오로지 나만 위해 살아야, 후회없이 쉽게 미소 머금으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한약은 대중에게 ‘우리나라 전통의학의 원리에 따라 처방되며, 풀과 뿌리, 꽃과 잎 등을 재료로 주로 사용하고 독성이 거의 없으며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약’이란 인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한약이라는 것은 중병을 고칠 때도 많지만, 옛적부터 사람을 죽이는 목적으로 사용된 일도 많았다.
한약에는 독약도 분명히 존재했고 건강에 해를 주기 위한 역할도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독약으로 사용될 만한 한약은 그 당시에도 위험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내리는 사약이나 기타 음모와 얽힌 암살 등에 사용되던 것이 주류였다. 그러다보니 왕실이 자연스럽게 얽히게 된다. 아마 어진 임금이 재위할 때에는 사약을 내리거나 임금이 독살될 위기에 처하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그 반대로 폭군이 집권할 때는 한약을 독약으로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폭군으로 알려진 두 명의 임금을 소재로 다룬 영화를 통해서 한약을 독약으로 썼던 예를 보고자 한다.
포악한 연산군과 ‘사약’
영화 는 연산군의 불우한 기억과 그에 기인한 파격적인 행보에 초점을 맞춘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를 풍자하다 의금부에 끌려가서 모진 문초를 받던 남사당패의 광대 우두머리 장생과 그의 일행은 연산군 앞에서 공연을 하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극도로 긴장해 공연 전체를 망치고 목숨이 위험해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그들을 구한 공길의 기지로 위기를 벗어나게 되고, 이들을 맘에 들어 한 연산은 희락원이라는 궁내 거처까지 마련해준다. 그러나 광대들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왕을 위한 연회에서 왕의 충신인 처선이 꾸민 모종의 사건이 후세에 깊이 기억되는 장면을 만들게 된다.
왕의 권한을 견제하던 삼사를 풍자하면서 탐관오리를 비난하던 정극 공연에 이어서 여인들의 암투에 의해 왕이 후궁에게 사약을 내리는 장면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생모의 비극을 떠올린 연산이 분격하여 그 자리에서 선왕의 후궁들을 칼로 벤다. 사약을 마시고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 장면이 바로 연산의 포악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한 발단이었다. 조선시대에 사약을 만드는 기관은 내의원이었고, 그 조성은 비밀로 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비상, 부자, 초오, 천남성 등의 약재를 섞어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상은 비소화합물로 유해중금속인 비소를 일정량 이상 복용하면 구토, 설사와 함께 중추신경이 마비되게 한다. 부자에 들어있는 아코니틴이라는 성분은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비를 억제하여 근육마비를 일으킨다. 초오는 관절염, 신경통 등에 잘 사용되는 한약이지만, 과용하면 맥박을 떨어뜨리고 심장에 영향을 주어 호흡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는 작용이 있다. 천남성도 코니인이라는 맹독성 성분을 가지고 있다. 특히 초오는 약을 달인 후에 식지 않은 상태에서 마시면 흡수가 빨라지면서 더 강한 독성을 나타낸다.
이런 한약의 부작용을 경감시켜 주고 이들이 가진 약성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소금물에 담갔다가 찌거나, 강한 열에 오랫동안 쪄내는 과정을 거쳐 독성을 떨어뜨린 후 약재로 사용하곤 했다. 이렇게 강한 독성에도 불구하고 부자와 초오의 효과는 확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자는 한의학적으로 심장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남성의 성기능을 촉진시킨다고 알려져 있으며, 혈액순환을 촉진하거나 관절염을 치료하는 데 사용한다. 초오도 진통에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으므로 아코니틴의 함량만 기준이하로 떨어뜨려 줄 수 있다면 진통제로서의 활용가치가 높다.
한의학적으로는 이 초오의 독성을 낮추기 위해서 북어와 같이 끓이곤 했는데, 실제로 북어와 초오를 끓이면 신기하게도 독성 성분인 아코니틴의 함량이 떨어진다.
‘아편증기’에 중독된 광해
영화 는 광해군을 폭군이 아닌,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나 그것을 잃고 살았던 사람으로 묘사하며 풀어나간다. 실제로도 역사가들은 광해군을 폭정과 방탕에 빠진 임금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 그가 추구했던 실리적인 외교가 당시 조정의 대세였던 신하들의 전통적인 보수적 외교관을 극복하지 못해 그가 폐위된 원인으로 분석한다. 이 깊은 얘기의 출발은 영화 말미에 광해군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가 자리를 비운 틈에 그의 역할을 대신했던 평민 하선인지를 가리는 중요한 증거인 그의 왼쪽 가슴에 난 깊은 흉터와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의 격랑 속에서 피란가기에 바빴던 선조는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조정을 하나 더 만드는 분조(分朝)의 결정을 내렸다. 당시 적자가 없던 선조는 후궁 소생인 광해를 세자로 책봉하여 그 중임을 맡기게 된다. 동분서주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량을 모으며 몸을 바쳐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세자라면 당연히 전란이 끝난 후 어깨를 펴며 왕위를 계승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상식과는 달리 선조는 광해를 외면하고, 그 후 태어난 어린 영창대군이 그의 발목을 잡을 상황이 되면서 광해의 마음속에는 비정과 말할 수 없는 피해의식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영화의 서두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살해 위협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광해의 외침으로 시작한 이 의심의 굴레는 결국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는 자신을 대신하여 자리를 지켜준 하선을 죽여 입을 닫게 하라는 명령으로까지 이어진다.
현대판 왕과 거지로도 관객들에게 입소문이 바짝 났던 이 영화는 명분만을 앞세우고 양반들의 권익만 중요시했던 조정에 대한 따끔한 하선의 질책으로 맛깔이 난다. 현실에서도 후금에 대한 철저한 실리외교로 더 큰 전란을 막는 결과도 가져왔지만 말이다. 극중에서 이조판서는 광해군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조정랑을 시켜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한상궁에게 밀명을 내린다.
바로 광해군에게 아편증기를 쐬게 하여 서서히 중독시켜 극적인 죽음보다 자연사로 보이게 하려한다. 이것을 모른 광해는 아편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게 되고 그 공백을 내보일 수 없는 도승지 허균과 조내관은 광해와 모습이 흡사한 하선을 몰래 끌어들여 왕의 역할을 맡긴다.
아편은 양귀비의 덜 익은 열매에서 얻는 유액을 건조하여 굳힌 것이다. 주성분으로는 모르핀, 파파베린, 코데인, 테바인 등 진경과 진통작용을 가진 성분들이 많다. 지방에서도 집안에서 복통 등에 사용할 목적으로 조금씩 재배하다가 마약법 위반으로 단속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에서 모르핀은 계속 사용할 경우, 나중에 심각한 금단증상을 가져온다. 때문에 모르핀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 단번에 모르핀을 끊게 되면 금단증상이 격하게 밀려들면서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현상을 피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반응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줄여나가야 할 정도로 모르핀은 중독증상이 강하다. 주사제로 사용되기 때문에 민간에서 제조하는 것이 거의 힘들고, 말기암환자나 담석통 등의 진정에 사용되거나 전장에서 심각한 부상의 즉각적인 대응에 사용한다. 때문에 모르핀의 유출사고는 모르핀을 보관하는 곳이 병원과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의 한복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최혁재(崔爀在)약사 경희의료원 약제본부 예제팀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얼마나 힘이 세졌는지 확인해 봅시다.” 김영우 박사는 황병만씨를 보자마자 덥석 손을 잡아끈다. 당장 몸 상태를 체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겨도, 기분 상하면 안 됩니다.” 물론 팔씨름의 승패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황씨는 김 박사를 이겨보려 안간힘을 쓴다.
이들은 밝은 날씨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인사 대신 팔씨름으로 안부 인사를 건네는 둘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팔씨름을 하는 의사와 환자
황병만씨의 몸에는 4개의 장기가 없고, 5개의 장기가 일부만 존재한다. 2003년 위암 4기, 위암으로 전이된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대수술을 통해 위, 비장, 부신, 직장을 모두 제거했다. 소장·대장·췌장·십이지장도 일부 잘라냈다. 1%의 확률이었다. 그런데 살아났다. 그는 기적의 사나이로 불리며, 각종 방송을 누비고 있다. 암 환우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무수혈 수술의 대가인 김 박사는 2002년부터 국립암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위암 최소침습(몸에 내는 상처를 최소로 줄이는 방법) 수술을 주도하는 명의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두가 포기하려고 했던 황병만씨를 살린 점이다.
살아온 환경도, 나이도, 성격도 모든 게 다르기만 한 이 둘의 공통점. 10여 년 전, 생사가 오가는 그때를 한시도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서로가 감동이라는 생각. 이들은 완벽한 파트너로 죽마고우처럼,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팔씨름을 한바탕 벌인 뒤, 둘은 손을 꼭 부여잡는다. 녹아버린 장기를 일일이 떼어놓은 손, 고마운 손, 살아줘서 행복한 손.
“나는 죽을 수 없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죠. 화내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데요. 특히 암 환우들에게 부탁합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본인이 만나는 의사를 믿으세요. 그리고 의사가 명환자라고 느낄 수 있게 강렬한 의지를 갖기를 소망합니다.”
말 잘 듣는 명환자
황씨는 죽을 각오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의 나이 서른셋인 1985년. 첫 아기가 아내의 뱃속에 있을 때 직장암을 판정받았다.
이곳저곳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는 동안 4기로 진행됐고, 직장과 대장의 반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고3이 된 2003년엔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생존율 1%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그때 운명처럼 김 박사를 만났다. 황씨는 김 박사의 말을 무조건 따랐다. 운동을 하라는 김 박사의 말에 수술이 끝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당시 의료진이 제가 미친 줄 알고, 여기저기 연락을 하더라고요. 박사님 말대로 한 건데(웃음), 수술 후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데 바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죠. 근데 전 말 잘 듣는 명환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답니다.”
암 투병 이후에도 그의 ‘명환자 되기’ 프로젝트는 이어졌다. 김 박사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체온과 혈압, 혈당, 하루 운동량을 10년 이상 매일 기록하고 제출했다. 그는 만보걷기 운동을 하고 등산을 다니며 마라톤도 즐기게 됐다. 암 수술 이후에도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담낭절제수술도 받았지만, 문제없다는 그다.
“제 인생의 선장은 김 박사죠. 건강이 회복된 후,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그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더 열심히 뛰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두려움을 깬 수술, 타협은 없다
위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완치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4기로 진단받았을 경우 말기 환자의 생존율은 극히 낮아진다. 위암 말기가 되면 이미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고 수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항암치료를 제외하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들 한다. 그래도 예외적 상황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그랬죠. 황병만씨는 항암치료로 몇 달간 이어가다가 그렇게 보내야 하는 환자라고. 오히려 수술을 하면 생존 가능성이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살려는 의지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내게 보인 열정을 모른 척하고 타협하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김영우 박사는 수술을 결정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이 모든 것들의 중심은 믿음으로 빚어낸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암 치료는 정상적 범위를 벗어난,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곤 한다. 이럴 땐 흔히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만,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확고한 의지를 가진 자의 몫이다.
“암 환자에게는 무엇보다 면역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좋은 음식이나 식품을 권하기보다는 적절한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이 향상되면 자연스럽게 치료가 더 수월해집니다. 그런데 말처럼 이를 따라와 주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황병만씨는 굉장히 예외적 인물이었죠. 10%를 요청하면 100%를 해오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김영우 박사는 황병만씨를 살려냈고, 수술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둘은 여느 연인 못지않게 따듯한 산책을 즐기곤 한다.
사망 위험이 높은 암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단단해질수록 극복의 여지가 커진다고 한다. 그 신뢰관계가 약하다면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개선이 가능한 부분이 소멸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말기 암 환자는 우울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울증 여부에 따라 치료 성과가 달라진다는 연구보고도 나온 만큼 심리적 부분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확신을 갖고 이겨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게 하는 의사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환자의 자신감 회복과 치료 순응도 향상을 위해 모든 의사가 노력하겠지만, 더 큰 범위 내에서 환자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것도 의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전적인 수술이라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도록 하는 환자의 의지 역시 중요한 부분이죠.”
한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
둘의 목표는 비슷해졌다. 대한민국 암이라고 불리는 위암을 이겨내는 희망의 불씨를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김 박사가 먼저 황씨에게 부탁을 한다.
“위암 극복을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캠페인에 동참해주세요. 그리고 환자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계속 나서서 움직여주세요.”
그러자 황씨는 김 박사의 손을 잡고 말한다. “김 박사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이에요. 1% 확률의 지독한 위암을 당신이 치료해 준 것처럼, 나는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암은 극복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많은 환우들이 이것을 알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는 김 박사와, 그와 동행하는 황씨는 이미 의료계에서 특별한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위암 연구 활성화를 위한 R&D 예산 확보가 중요한 시점, 그 근거가 되는 둘의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소개될 전망이다. 1%의 확률을 이겨낸 환자의 집념과 이를 넘어서게 만든 의사의 노력은 묵직한 감동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