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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50플러스센터, 20일 ‘내;일이 보이는 라디오’ 첫 선
- 서대문50플러스센터가 제작한 ‘내;일이 보이는 라디오’가 오는 20일 첫 시작을 알린다. 이는 2022년 신중년경력형일자리사업의 일환으로, 5월 20일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57분 센터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으로 생방송 된다. 2022 신중년경력형일자리사업은 퇴직 전문 인력에게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제공하고, 민간일자리 이동을 지원하는 고용노동부 사업이다. 내;일이 보이는 라디오 프로그램 운영진은 올 2월 2022신중년경력형일자리사업 참여자 공개 모집을 통해 선발된 방송 분야 전문가 3인으로 꾸려졌다. 내용 구성은 △5060세대를 위한 다양한 교육과 일자리 소식을 전하는 ‘여기는 서대문 50플러스센터’ △50플러스 세대의 관심 주제를 이야기하는 명사 초청 토크쇼 ‘초대석 4막 5장’ △퇴직 후 새로운 인생 개척에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는 ‘50+ 라디오쇼’ △다양한 문화예술 현장으로 찾아가는 ‘현장 라이브-멍때리기’ 등으로 마련됐다. 특히 20일 첫 방송 ‘초대석 4막 5장’에는 이은주 한의사(‘걸어라, 사랑을 위해’ 저자)가 출연해 5060세대를 위한 건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다. 내;일이 보이는 라디오는 서대문50플러스센터 유튜브 채널을 통해 누구나 실시간 방송을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신청을 하면 실시간 프로그램에 접속할 수 있는 링크를 문자 메시지로 전송받을 수 있고, 방송이 끝난 후 만족도 조사를 통해 ‘걸어라, 사랑을 위해’ 도서 제공 이벤트 또한 참여 가능하다.
- 2022-05-1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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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철도청장이 퇴직 후 삶을 와인에 바친 이유
- “이 친구가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1967년 프랑스 정부의 해외연수 담당부서. 담당관은 긴장한 한국인 유학생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프랑스어 실력은 기대 이하였지만, 돌려보낼 수는 없기에 체념해서 나온 말이었을 거다. 재미있게도 그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담당관이 베푼 작은 선의는 훗날 프랑스에 큰 기회를 제공했다. 그 청년은 프랑스의 고속열차 TGV와 선진 항만 기술의 도입을 주도했다. 또 그곳의 아름다운 와인을 소개하는 명사가 되었다. 최훈(86) 前 철도청장 이야기다. “필연이죠.” 최훈 전 철도청장은 그의 인생에서 프랑스와 계속된 관계를 그렇게 설명했다. 사실 청년 시절 그의 관심은 오직 취직뿐이었다. 프랑스와 길고 긴 인연을 이어갈 것이란 생각은 꿈에서도 못 했다. “경북대 사범대학을 졸업했을 때 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전쟁을 겪고 난 시기여서, 학교도 많지 않고 선생에 대한 수요도 적었죠. 일자리를 찾다가 국토건설단에 지원한 것이 공무원 생활의 계기가 됐어요. 영어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외무부 쪽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교통부 쪽에서 외무 업무를 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길래 배속을 받았죠.” 그렇게 영남 출신 청년의 서울 상경 생활이 시작된다. 1961년의 일이다. 바라던 해외 공관 자리는 아니었지만, 맡은 일은 재미있었다. 대한민국이 이제 막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춰가던 시기.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 과정에서 외국과 교류하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업무였다. 그의 첫 임무는 국제민간항공기구에 한국의 항공 운항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후에 미 제5공군 관할이었던 김포공항을 이양받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우리 의사를 정확히 제공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전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며 “그때 들인 습관을 아직까지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책상 정면에는 손때 묻은 낡은 사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 같았던 프랑스 유학 “교수님 믿어주세요.” 1967년 심사를 담당하던 교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 정부의 부탁을 받아 국비유학생을 선발하는 자리. 교통부에서 신청한 청년의 프랑스어 실력이 문제였다. 퇴짜 맞을 가능성이 컸지만, 자신을 뽑아주지 않으면 선발 예산은 다른 나라로 전용될 것이라는 이유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교통부에서 활약할 실력이면 현지에서 금방 배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결국 교수님이 제 설득에 넘어갔죠. 낭만이 넘치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죠. 프랑스 정부에서는 매년 국비유학생 형태로 지원자들을 받아 프랑스 유명 관광지의 호텔에 배치했어요. 프랑스의 선진 문화를 후진국에 전하면서 모자란 인력도 해결하는 정책이었죠. 결국 어렵게 프랑스에 도착하니, 현지 호텔에서도 제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다행히 현지 지배인이 기회를 줘서 프랑스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죠.” 그렇게 그의 프랑스 생활은 시작됐다. 세 개의 5성급 호텔에서 매니지먼트 과정을 이수했다. 고된 일들이 이어졌지만, 센강과 에펠탑, 샹송에 대한 로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가슴속 목마름과 호기심은 조금씩 기쁨으로 변해갔다. 임계점을 넘어 끓어 넘치던 프랑스의 다양한 문화는 열정 넘치는 청년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니스의 호텔에서는 모나코 왕비가 된 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파티에서 쟁반을 들고 수백 명의 귀부인 사이를 누비기도 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죠. 드레스를 차려입은 부인들로 가득했고, 하루에 수백 병의 최고급 샴페인이 소비될 정도였으니까요. 단순히 화려한 모습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회 문화나 와인 다루는 법 등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체득한 지식은 후에 제게 큰 도움이 됐죠.” 짧은 1년이었지만, 그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971년 교통부로 돌아온 그는 다시 프랑스행을 명받았다. 이번엔 출장이었다. 당시 영어와 프랑스어가 가능하고, 현지 경험 있는 공무원이 흔할 리 만무했다. “인천에 항만 시설을 지어야 하는데, 서해의 심한 조석간만의 차를 극복할 갑문 운영 기술은 국내에 없었어요. 우리 바다의 조건과 유사한 선진국 항구에 가서, 항만 시설을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할지 배워와야 했죠. 그래서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의 항구를 차례차례 들렀어요. 르아브르와 케르크, 안트베르펜, 브리스톨 같은 곳들이었죠.” 당시 그가 만들었던 항만 운영 시스템 규정은 인천항 갑문 운영의 뼈대를 이루었다. 선진국의 운영 노하우를 집약한 결과물은 세세한 부분이 바뀌었어도, 기본적인 운영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항만청 국제과장 시절에는 항만 개발을 위한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개발은행 등 각종 국제기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오일쇼크로 중동에 돈이 넘친다는 말을 듣고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까지 달려갔다. 무엇보다 종교가 우선시되던 시절, 알라에게 절을 하라는 무례한 요구에 머리도 숙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는 “정확히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확보한 차관을 합치면 1억 8000만 달러 정도 될 것”이라며 웃었다. 운송실장 시절, 부처 내에서 다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번에는 열차였다. 국내 고속철도 도입이 검토되던 시기였다. 당시 국내 기류는 ‘당연히 신칸센’이라는 분위기였다. 철도 기술자 상당수가 일본을 통해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레 익숙한 일본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최고의 열차는 프랑스의 TGV였다. 최고 영업 속도가 일제에 비해 시속 90km 이상 빠른 기술력을 자랑했다. “당시에 프랑스나 독일의 고속철도를 경험해본 사람이 부처 내에 많지 않았죠. 전 각종 국제회의나 조약 협상을 위해 왕래가 잦았으니 익숙했고요. 또다시 그렇게 프랑스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 열차의 속도는 시속 80km 정도였으니까 신칸센도 충분히 만족할 만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열차는 지연 없이 대량 수송이 가능한 최고의 물류 효율을 자랑하는 수단이었으니까, 경제 발전에 중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반대도 많았지만 세계 최고의 열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웠던 와인과의 재회 “여보! 이게 그 술이야! 바로 이 맛이야!” 1977년. 업무로 바쁜 일상을 보내던 그는 한국에서도 와인이 나온다는 소식에 가게에서 한 병을 집어 들었다. 마주앙 와인이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제조가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만든 와인이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모금이면 충분했다. 입에 대는 순간 의심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연수 시절 워낙 애주가였던 저는 밤마다 숙소 주변의 작은 가게에서 와인을 사 마셨어요. 1프랑짜리 싸구려 와인이었지만, 같은 값인 물을 사 먹을 순 없었죠. 저녁을 대신해 커다란 소시지 하나를 구워 와인 한 병을 비우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주앙을 먹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확 떠오르더라고요. 그 시절 추억의 맛이었어요. 미군에 연줄이 없으면 와인을 구하지 못하던 시절, 와인에 대한 갈증을 달랠 수 있었죠.”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그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핑계 삼아 여행도 갈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해답은 와인으로 귀결됐다. 우선 와인의 기본 정보를 요약해 알리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첫 번째 작품이 1997년 600페이지 분량의 저서 ‘포도주 그 모든 것’이라는 책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와인 불모지였으니까요. 와인에 대한 개론을 상식선에서 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책을 내고 나니까 주변에서 문의가 늘더라고요. 그래서 자원평가연구원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라는 교육기관을 세웠어요. 지금의 ‘와인 리뷰’라는 월간지도 그때 시작했죠. 처음엔 광고도 많지 않아 고생을 꽤 했지만, 몇 년 지나고 나니 업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지더라고요.” 2005년에는 국제 와인 대회인 코리아 와인 챌린지를 시작했다. 일본의 대회를 롤모델로 삼아 시작해 지금은 세계적인 대회가 됐다. 업계에서는 해외 와이너리의 와인을 가장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대회라는 평가를 듣는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21개국 888종의 와인이 출품됐다. 만나기 어려운 조지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의 와인도 참가했다. 대회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대회 심사위원들도 자긍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발행하는 ‘와인 리뷰’를 살펴보면 발행인인 최훈 前 철도청장이 작성한 기사들이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주요 기사의 대부분을 소화해내고 있다. 기사의 깊이도 대단하지만, 작성량 자체가 젊은 기자들을 뛰어넘는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유튜브도 시작했다. 와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채널이 필요하다는 유통업체들의 요청이 있었다. 와인 산지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특징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지잖아요. ‘와인 리뷰’를 발행하면서부터 새벽에 원고 작성하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새벽에 차분하게 글을 쓰다 보면 기사에 필요한 추가적인 자료나, 과거에 썼던 원고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과거에 다녀왔던 여행의 기억까지 말이죠. 기본적으로 와인을 이야기할 때 제가 가보지 않은 곳의 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부끄럽더라고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쓰는 것 같아서. 지역의 로컬 와인이나 토양, 기후 등을 겪어봐야 그 와인에 대해 정확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마트에서 칠레 와인만 사다 마신다는 말에 그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그저 털털한 인상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순간 ‘무언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진 그의 조언으로 오해는 풀렸다. “어느 나라의 와인이라도 시작을 위해 저렴한 와인을 마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좀 더 좋은 와인을 찾는 모험을 권하고 싶어요. 여러 나라에서 훌륭한 와인이 나오고 있으니까 너무 빨리 한정 지어 고집하기보다는 다양한 체험으로 와인의 즐거움을 누려보세요.”
- 2022-04-1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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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63년째 ‘온 에어’… 이성화 상업방송 최초 여성 아나운서
- 너나 할 것 없이 제 이야기 하고 싶어 야단인 세상이다. 들어보면 제각기 대단한 구석도 있고, 웃음 나는 구절도 있으며, 눈물 훔치게 하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재미난 이야기 들어줄 사람 없이 혼자 떠들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성화 관악FM DJ는 ‘듣는’ 아나운서다. 누구보다 말할 기회가 많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듣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고 듣는, 현역 최장수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른다. 잘 듣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지 않은가. 이성화 DJ는 1959년 부산 MBC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한 상업방송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다. 이후 서울 MBC, RSB 라디오 서울(동양방송의 전신), TBC 동양방송까지 다양한 방송국의 개국 아나운서로 자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초대 DJ를 1964년부터 1972년까지 8년 동안 맡기도 했다. 아나운서, 현대사 한복판에 서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그가 아나운서로 한창 이름 날리던 때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이 많던 시기였다. 부산 MBC 아나운서로 일하던 때였다. 그는 우연히 들어선 다방 창가에 앉아 있는 엄순영 씨를 발견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에 감탄한 이성화 아나운서는 엄 씨를 미스코리아 경남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를 설득해 심사 3일 전에 아슬아슬하게 후보 등록을 마쳤는데, 부산 미스코리아에 선발되면서 엄 씨는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할 자격까지 얻었다. 당시 한국일보사에서 실시했던 미스코리아 본선 대회는 경복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대회 전날 엄 씨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그는 당시 김지태 서울 MBC 사장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사모님이 그를 깨우며 하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 리, 쿠데타가 일어났대요’ 하시는데,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멍한 채로 대문을 열었더니 집 앞으로 탱크가 지나가지 뭐예요.” 그때가 1961년 5월 16일 아침이었다. 2년 차 사회 초년생이 5·16 군사정변의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아나운서 자리에 앉아 3·15 부정선거, 4·19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보도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치인부터 유명 가수, 배우 등 명사를 만날 일이 많았다. 만났던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 역사적 인물이 된 경우도 있다. 그가 부회장을 맡았던 여류방송인클럽이 한 군부대를 위문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안내받으며 사단 내부를 둘러보고 사단장을 비롯한 장성들과 기념 촬영을 했죠. 굉장히 대접받으며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죠.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던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역사적 인물이 될 거라고는 말예요.” 그는 지금도 김재규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면 권력이 다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한다.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와 배짱 인생무상,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전성기는 빛나기 마련이다. 그는 업계 안팎으로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은 1세대 커리어우먼이었다. 재치 있고 순발력이 좋다고 소문 난 덕분에 당시 생방송 스케줄이 잡힌 PD들에게는 섭외 1순위 아나운서였다. 게다가 당시 발간되던 잡지 ‘아리랑’에서 진행한 아나운서 인기 순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동양방송에서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처럼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남녀 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택시 기사와 전화 연결을 할 때 제가 ‘기사님 밤늦게 운전하고 들어가도 부인께서 식사 정성껏 챙겨주시면 덕분에 기운 나시죠? 그러면 기사님도 부인께 친절을 베풀어야지요’ 하면 바로 알아듣고 상대편에서 ‘그럼요. 다음 날 아침상에 달걀프라이가 올라온답니다’ 하고 대답하거든요. 듣는 사람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그의 인기에는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듣기 좋은 음성이 한몫 단단히 했다. 연극 연출가 오사량은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며 그의 목소리를 극찬했다. 목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 목 관리를 모르고 살았으니 천직이나 다름없다. 이성화 DJ의 방송 인생을 논할 때는 당찬 성격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 MBC의 방송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해 방송 인생이 시작된 것, 예상 못한 순간에 순발력을 발하는 기지도 그의 당찬 성격에서 비롯됐다. 전국체육대회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던 시절, 육영수 여사가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전국체육대회 중계방송의 진행석에서 방송 준비를 하던 그는 마이크를 쥐고 대뜸 육 여사가 앉은 단상으로 올랐다. 단상 밑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둘이 막아섰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양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잠깐 인터뷰만 할게요’ 하고서 그 둘이 망설이는 틈을 타 단상에 올라섰어요. 올라가는 동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한 다음 육영수 여사한테 ‘안녕하십니까. 이따 방송 시작하거든 날씨가 어떤지만 여쭤볼게요. 오늘 날씨가 좋지요? 하고 물으면 ‘네’ 하는 대답이랑 선수들 잘 뛰라는 말씀만 해주세요’ 그랬어요. 돌이켜 생각해도 보통 배짱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계획에 없던 영부인의 인터뷰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쾌지나 청춘에서 제2의 청춘을 열다 이후 1980년 신군부의 주도로 언론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당시 몸담고 있던 TBC 방송이 문을 닫았다. 이때 그의 활약상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 밖에서 그만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남편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후 방송에 대한 욕심, 재능, 외부의 인정을 모두 던져두고 30년을 주부로 살았던 그는 9년 전 뜻하지 않게 아쉬움을 풀 기회를 얻었다. TBC 방송국 막내 PD였던 동료의 소개를 받아 비영리 라디오 방송국 관악FM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서울 관악구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발음이 정확해 한국어 선생님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못했고, 방송을 맡은 그 역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 제작진과 함께 고민한 끝에 폐지됐던 ‘쾌지나 청춘’ 방송을 되살리는 카드를 선택했고, 그는 현재 9년째 ‘쾌지나 청춘’의 월요일 DJ를 맡고 있다. ‘쾌지나 청춘’은 국내 최초 어르신 방송단이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쾌지나 청춘’은 고정 코너 ‘생활의 지혜’, ‘생활 건강’과 요일마다 다른 여섯 가지 단독 코너로 이뤄진다. 이성화 DJ와 함께하는 월요일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인터뷰 코너가 진행된다. 코너의 아이템 기획부터 게스트 섭외, 인물에 대한 사전 취재와 원고 작성은 모두 그의 몫이다. 녹음을 진행해보고 더 끌어낼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판단하면 회차를 늘려 추가 녹음을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 및 진행자만으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없다. 관악FM 내의 오랜 파트너인 김우신 PD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베테랑 DJ로서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기에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방송 제작에 힘써준 그가 고맙기만 하다. “지금까지 기획진행 이성화, 기술편집 김우신 프로듀서였습니다.” 매 방송마다 빠짐없이 넣는 멘트만큼이나 그를 향한 애정이 빼곡하다. 한창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방송했던 베테랑 방송인에게, 30년이란 기나긴 공백기를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청취자에게 신청곡을 주문받으면 막내 작가가 서고로 뛰어올라가 CD를 찾는 동안 즉흥에서 멘트를 지어내던 시절과는 사뭇 딴판이지만, 라디오 DJ 일은 그에게 여전히 즐겁기만 한 분야다. 그는 매 방송이 끝난 뒤 직접 준비한 원고를 일일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곤 한다. 젊을 때부터 습관처럼 하던 기록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방송과 게스트를 홍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성·드라마, 그가 전할 새로운 이야기 평생을 진행자로 살았지만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꿈도 꾼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제작하는 일 말이다. 만약 PD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중장년 여성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라떼’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로만 살아오며 나이 들어버린 이들의 세월을 조명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모르게 겪은 고통과 고난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가부장 사회의 제도와 법률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거든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는데 각자의 가정에 자양분으로 쓰이고 만 거예요. 그래서 유능한 여자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많아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할 곳도 없으니 친구들이랑 만날 때나 털어놓고 말죠.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데 정말 가슴이 아파요.” 그만 해도 그랬다. 일에 욕심이 있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남편의 반대를 거스르지 못해 끝내 집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은행에 입사할 때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여자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바깥일을 하면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당대 여성들에게 선망받는 방송인이었던 그도 방송을 마치면 아내이자 엄마로서 일할 줄만 알았지 자기 계발에 시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로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30년의 시간이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쉬운 만큼 그는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에 열중하다 보니 새로운 목표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는 80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야 도전할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어엿한 스토리텔러로 활약하고픈 열정이 샘솟아 4년 전에는 전문 학원까지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쾌지나 청춘 기획하고 진행하랴, 집에 가면 블로그 글도 올리랴. 게다가 남편 밥도 챙겨줘야 해요. 쉴 새 없이 바쁜데도 드라마가 너무 쓰고 싶어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대본을 썼어요. 드라마라는 게 제각기 다른 갈래의 사람들이 한데 얽혀 진행되는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렇게 멋진 예술의 한 줄기로 끼고 싶은 거죠.” ‘옛날 사람’인 그는 그가 실제로 보고 들은 ‘옛날이야기’를 50분짜리 대본 한 편에 풀어냈다. 요즘 사람들의 AI, 우주 공간 같은 요즘 이야기 말고 욕심쟁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명예를 탐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담았다고 했다. 그 대본으로 당장 드라마를 제작할 수 없고, 촬영 현장에서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꾸준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처음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던 그 당찬 성격과 배짱을 무기로 내세우면서. 1세대 아나운서인 그는 아나운서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친화력을 꼽았다. 친화력이 있으려면 배려와 친절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처음 보는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며, 이를 이끌어내는 능력까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친화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관악FM에서만 4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400개의 이야기를 듣고 400개의 아름다움을 뽑아낼 줄 아는 그는 친화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야기가 익숙하거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좋고, 몰랐던 세월의 이야기라면 새로워 좋다. 들을 줄 아는 아나운서, 한결같은 그의 인생이 아름답다.
- 2022-03-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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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작가가 밝히는, 부자의 돈 버는 비밀
- 사실 흔쾌히 하고 싶은 인터뷰는 아니었다 고백하고 시작해야겠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신분 확인이나 팩트 체크가 어려울 수 있고, 독자의 신뢰를 얻기도 힘들다. 게다가 상대는 작가.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상대는 실력을 겨루는 느낌까지 들어 신경이 쓰인다. 그럼에도 그를 모시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연구해온 부자가 되는 방법이 궁금해서다. 카메라 앞이 아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부자들이 고백한 돈 버는 비밀 말이다. 명칭에서 느껴지듯 유령작가, 즉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는 흔한 직업이 아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정치후원금 등의 이유로 출판기념회가 필요한 정치인의 회고록이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성공담, 기업공개를 앞둔 기업가의 자서전 등의 출판물을 집필하는 이름 없는 작가를 말한다. 출판사의 기획의도나 의뢰인의 목적에 맞게 대신 글을 써주고, 본인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 대필 작가이기 때문에 고스트라이터라 불린다. 출판업계의 이름난 구원투수 이 유령작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인터뷰 후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인해야 했다. 사진 속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만, 사실 그는 꽤 번듯한, 막 중년이 된 사내다.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의 팀장으로 활동 중이며, 출판계에서는 꽤 이름난 작가로 본인 이름으로 낸 자기계발서도 10권이 넘는다. 그가 고스트라이터가 된 것도 출판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괴팍한 부자 의뢰인의 등쌀에 못 이겨 다른 작가들이 연이어 쓰러졌을 때 편집자가 그를 찾았고, 단시간 내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됐다. 글솜씨와 친화력, 빠른 일처리 등의 장점이 그를 곤란할 때마다 찾는 업계의 대표적인 ‘구원투수’로 만들었다. 의뢰인의 성향이나 과거의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습관을 따라 하거나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고집스러움은 그를 롱런하게 했다.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최근 출간한 한 권의 책이다. ‘히든 리치’란 제목 그대로 숨겨진 부자들을 만나 부를 형성한 과정과 현재 자산의 정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물어본 책이다. 그는 과거 유령작가로 활동하면서 작성한 집필 노트를 오랜만에 들여다보다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모든 직장인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저 역시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은 이 세계에서 가정을 지키고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인데, 직장에서의 소득은 충분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니까요.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손에 쥔 것은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방법이 있을지, 어떻게 시드머니를 준비할지 고민하던 중 본가에서 대필 작업할 때의 노트를 발견했고, 일반인들이 따라 할 수 있게 내용을 엮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단지 과거의 노트를 요약해 끄적인 책은 아니다. 과거 대필해주었던 책 속 주인공이나 그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을 다시 찾아 노크했다. 그러고는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현재 자산은 얼마입니까”, “처음 시작할 때 수중에 얼마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산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정성껏 대답해주진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성심껏 취재에 응해준 24명의 이야기를 자산 형성의 유형별로 구분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는 책에서 부자의 유형을 일단 아끼고 보는 ‘고전형’, 위험을 무릅쓴 ‘전투형’, 자신의 전문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안전형’, 천재에 가까운 ‘변칙형’, 물려받은 자산을 늘린 ‘보수형’, 감을 갈고 닦아 수단으로 삼은 ‘천리안형’으로 분류해 설명했다. 뻔하지만 따라 하기 힘든 비결 그는 이 책을 부자가 되고 싶은 대중을 위한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이야기했는데, 읽어본 소감을 더하자면 부자가 된 사람들의 세밀한 사례집에 가깝다. 그들의 자산 형성 과정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나온다. 더 매력적인 것은 다양한 부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산의 규모로 보면 상대적으로 수수한(?) 백억대 부자에서부터 수천억대 자산가의 이야기도 다룬다. 직업이나 자산 형성 과정도 다양하다. 그 과정에서 느낀 공통점은 바로 ‘돈에 대한 욕망’이었다. 모두 남에게 쉽게 지지 않을 만한 욕망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작가도 동의했다. “책 속에 등장한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얼마면 무릎을 꿇을 수 있냐? 1만 원? 10만 원? 쉽게 대답하지 못했죠. 그랬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라면 1원에도 꿇는다. 돈이 생기는 일인데 무릎 꿇는 것이 무슨 대수냐며 말이죠. 그럼 절을 한다면 얼마를 주겠냐고 되묻기도 했어요. 저울질 따위는 필요 없죠. 다만 작은 돈과 큰돈이 있을 뿐이죠. 돈에 대한 욕망을 바탕에 둔 실용적 사고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기기 힘들어요. 아마 그 과정에서 비리나 부정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겠죠.” 아끼고, 발품 팔고, 돈을 놀게 놔두지 않고,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돈 버는 기본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덕목은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부자가 되는 비결은 이 기본기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아니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사실 책 속 부자들의 자산 모으는 방법은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에요. 하지만 부자들은 그 뻔한 방법 중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실천했다는 점이 다르죠. 실제로 만나보면 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민감성이나 실천력의 차이가 매우 커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도 ‘나도 도전해야겠다,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기길 바랐어요.” 빚투 그리고 재테크 작가는 복권이나 코인에 매달리는 청춘들에게도 조언을 전했다. 최근 경제지를 중심으로 MZ세대라 불리는 20~30대들이 직장을 통한 자산 형성을 기대하지 않고, 코인이나 주식에 매달리는 ‘빚투 열풍’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20대의 복권 구입 비용은 코로나 이전보다 300% 넘게 증가했단다. 그러나 실제 부자들을 만나보면 월급쟁이 부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회가 계층화되고 고착화되었다는 분석이 많죠. 사다리가 치워져 젊은 세대가 계급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를 길이 잘 안 알려져 있을 뿐이에요. 블록체인, 메타버스 같은 첨단 기술의 발전은 젊은 직장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어요. 사실 이런 첨단 분야는 전통적인 부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죠. 정보를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일반인은 호재가 있을 때 삼성전자에 투자하지만 기술과 공정, 소재를 이해하는 사람은 관련주에 투자해 더 큰 이익을 얻기 마련이죠. 마치 용의 머리는 작게 움직이지만 꼬리는 크게 휘청이는 것과 같아요. 기술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능력은 회사 생활에 전념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죠. 또 그들이 근무하는 판교나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어떤 회사가 망해 나가고, 빈자리에 어떤 회사가 들어오는지, 주변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투자의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옛날처럼 큰 시드머니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최근의 투자 트렌드이기도 하고요. 갈수록 기회도 많아지리라 생각해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마음만은 청년’인 시니어들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의 책을 자세히 보면 직업상담사나 창업 컨설턴트들이 하는 이야기와 맥락이 닿는다. “은퇴 후 평생 직업이었던 분야를 접고 새로운 분야를 찾아 도전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하지만 성공 확률은 대단히 낮죠. 부자가 되는 방법도 비슷해요. 본인이 직장 다닐 때 잘 알던 해박한 분야에서 더 공부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업무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노력이 더 유리해요.” 흔히 몇 차례 소심한 시도가 실패하는 경험을 하면 재테크 무용론자가 되기 십상인데, 이 책에는 재테크를 통해 부자가 된 여러 사례가 등장한다. 각종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재테크의 전형 같은 부자도 등장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부자가 목표는 아니더라도 재테크는 하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큰돈을 벌지 않더라도 재테크는 누구나 해야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부는 팽창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조금씩 부자가 되고 있어요. 모두 다 움직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멈춰진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조금씩 가난해지고 있다는 뜻이 돼요. 사회가 부유해지는 것에 맞춰 재테크를 통해 나의 재산을 조금씩 늘려야 소득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요. 재테크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일이 된 셈이죠. 과거에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의 흐름만으로 연공서열에 따라 월급이 오르고 집값이 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관심을 갖고 흐름에 맞춰 함께 달려줘야 해요.” 뒷조사까지… 부자들의 ‘면접’ 각 분야의 성공한 명사들을 취재하다 보면 첫 만남은 ‘테스트’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본인을 상대하는 기자의 능력이나 이해도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해한다. 일종의 면접이다. 작가는 “부자들 중 대부분이 그런 테스트를 즐기고, 상대가 대필 작가라면 그 강도는 훨씬 세진다”고 말했다. “간단히 훑어보거나 몇 마디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테스트’가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심한 경우도 흔해요. 감당 못 할 만한 행동을 던지고 반응을 보는 경우도 있어요. 약속 시간에 늦는다거나,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식이죠. ‘이거 하면 얼마 버냐’며 묻기도 하고. 또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경우도 있고, 일부러 단답형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부자도 있었죠. 제 뒷조사를 몰래 한 분도 있었어요.” 그 까다로운 면접들을 어떻게 통과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뿐 다른 비결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저 비굴해 보이지 않게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난 부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작가는 간단히 유형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부자와 같은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만나기 힘들다고 그는 설명한다. “최근에는 젊은 부자들이 많아져서, TV 속 회장님 같은 분은 그리 많지 않아요. 자린고비 같은 타입이 있는 반면, 설렁설렁 있는 대로 벌고 쓰고 하는 사람도 있죠. 애써 공통점을 찾자면 본인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에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가족을 위해 애쓰셨던 분이에요. 흔히 부자가 되면 가족이나 친척들과 등을 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가난한 부모에 가정사가 행복하지 않은 분이었는데, 부자가 된 뒤 가족에게 베풀면서 사시더라고요. 흔히 알고 있는 부자의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분이셨죠.” 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작가는 부자가 되었을까?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면 어떤 길을 가고자 할까? “아직 부자가 되진 않았죠. 많은 이들과의 교류 속에서 배우려 노력하고 있어요. 자신의 비법이나 투자 방법 등을 서슴없이 알려주는 분도 많아요. 부자들은 자기 비법을 숨긴다는 것도 옛말이죠. 그렇다고 당장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회사원 신분에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책의 구분법으로 설명하자면, 지금은 ‘고전형’과 ‘안전형’의 방식을 따르는 정도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를 바탕으로 기회를 엿보는 중입니다. 다만 부자들과 함께하면서 저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곁에 있다 보면 그들에 대한 대접을 저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거든요. 그저 삶의 좋은 자극이 될 수 있게 유지해나가고 싶습니다.”
- 2022-01-0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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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익숙한 명사 다큐 영화가 뜬다
- 요즘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시니어, 우리 인생의 선배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삶을 살았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족적은 우리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 이에 해당하는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최근 개봉작을 살펴봤다. 왕십리 김종분 감독: 김진열 개봉 : 11월 11일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102분 벌써 50년, 서울 행당동 왕십리역 11번 출구 앞에는 노점을 운영하는 김종분 씨가 있다. 김종분 씨는 1991년 노태우 정권 당시 백골단 강경 진압에 목숨을 잃은 고(故)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다. 이번 영화는 김귀정 열사 30주기를 기려 제작됐다. 팔순의 현역 노점상인 김종분 씨는 항상 씩씩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그는 세상을 떠난 작은 딸을 가슴에 묻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영화는 김종분 씨의 길 위의 삶,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조명한다. 또한 김종분 씨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성균관대학교 동문이 참여해 고인을 향한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을 전한다. 노회찬6411 감독 : 민환기 개봉 : 10월 14일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127분 '노회찬6411'은 고(故) 노회찬 의원의 삶을 다룬 첫 번째 다큐멘터리로, 그의 3주기를 맞아 명필름에서 제작했다. '6411'은 노 전 의원이 2012년 진보정의당 당 대표 수락 연설에서 '새벽 노동자'의 버스 번호로 언급했던 것이다.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노회찬 의원에 대해 보여준다. 대학생 시절 용접공으로 위장 취업했던 노동운동가, 진보 정당 창당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치인 등, 인간 노회찬의 인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진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호평받고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노회찬보다는 그가 마음에 품었던 꿈과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는 한편,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 점이 좋은 평가를 이끌었다. 울림의 탄생 감독 : 이정준 개봉 : 10월 21일 등급 :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 96분 '울림의 탄생'은 마음을 울리는 단 하나의 소리를 찾기 위해 60년 넘는 세월 동안 북을 만들어 온 임선빈 악기장(경기무형문화재 30호(북 메우기))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다큐멘터리이다. 6·25 전쟁 중 태어나 고아로 자란 임선빈 악기장은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했는데, 이곳저곳 전전하며 돈을 구걸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패거리의 폭력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되고, 북 만들기가 그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임선빈 악기장은 60년 넘게 일에 매달렸고, 장인의 위치에 올랐다. 장인은 한쪽 청력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더 늦기 전에 자신만의 북을 남기려 한다. 어린 시절 들은 북소리를 잊지 못한 그는 그것을 재현하고자 23년간 아껴뒀던 나무를 꺼내 들었지만, 쉽지만은 않다. 임선빈 악기장의 옆을 지키는 아들 임동국 전수 교수와의 협업도 눈길을 끈다. 전통을 잇는 일이지만 세대교체를 고민하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영화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태일이 감독 : 홍준표 개봉 : 12월 1일 등급 :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 99분 고(故)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 됐다. 전태일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 것은 지난 1995년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후 두 번째다. '태일이'는 1970년 평화시장, 부당한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뜨겁게 싸웠던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를 그렸다. 홍준표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십분 활용, 보다 따뜻하고 밝은 색채로 이야기를 담아냈다. 전태일과 동년배인 시니어들은 과거를 추억하며 영화를 볼 수 있고, 젊은 세대는 몰랐던 역사를 새롭게 배워갈 것이다. 남녀노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홍 감독은 "대중에게 전태일의 최후가 분신으로 각인돼 있으나 열사의 이미지를 강조하기보다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청년 전태일을 그리고자 노력했다"면서 "너무 무겁지 않은, 인간적인 측면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 따뜻함도, 울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장동윤, 염혜란, 진선규, 박철민, 권해효 등이 목소리 연기로 영화에 힘을 보탰다. 오는 12월 1일 개봉.
- 2021-11-1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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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낱말의 속살] 결
- 원시의 인간이 언어를 시작했을 때 해, 달, 별, 풀, 불, 숲, 너, 나처럼 한 음절의 말을 툭툭 뱉으며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한 음절로 된 말들에는 대개 인간이 우주와 사물을 처음 대하던 때의 낯섬과 놀라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가장 긴급한 것부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저게 뭐지? 그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것. 그런데 결이란 말은 즉흥적으로 생각해내고 단호하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인간의 시선이 정교해지고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힘이 갖춰지기 시작했을 때 생겼음직한 명사다. 그런데 왜 한 음절일까. 그것도 약간 혀를 굴려 음을 흐르게 하는 듯한 소릿값을 지닌 한 음절. 아마도 이 말은 ‘두 음절 명사 시대’(지금도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로 진입한 이후에 무엇인가를 빠뜨린 기분으로 두리번거리다 문득 찾아낸 개념이 아닐까. 찾아낸 뒤 그 본능적이고 본질적이며 생의 원천을 이루는 느낌 때문에 애써 한 음절 시대로 돌아가 딱 한 글자로 언어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말이다. 원시의 일상 속에서 만난 첫 결은 나무와 파도가 아닐까 싶다. 나무 속에는 무엇인가가 마치 흘러간 듯한 자국들이 켜를 이루며 짜여 있다. 가로로 자르면 나이테가 결을 이루고 세로로 자르면 그 나이테의 원무를 그리며 나아간 무수한 줄들이 결을 이룬다. 나무껍질도 결을 이루며 나무뿌리와 잎들도 스스로의 결을 지니고 있다. 물은 흘러가는 지형이나 출렁이는 양상에 따라 결을 만들어낸다. 물결은 부드럽고 순하고 감미로운 것도 있지만, 때로 성난 감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섭게 흔들리며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것도 있다. 돌도 결이 있다. 돌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무늬와 금은 단단히 박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한때는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출렁거렸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돌은 단단하지만 결은 그 속에서도 부드러운 활성(活性)을 드러낸다. 조개 무늬도 결이며 그 결이 옮겨온 자개 무늬도 결이다. 결은 인간이 짓는 공예(工藝)에도 스며들었다. 찰랑이며 흩어지는 비단결이 그것이다. 실오라기가 가지런히 눕는 것도 결이다. 그런데 결은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면서 스스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말이 되었다. 숨결은 숨이 물결치고 무늬지듯 흐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시도 멈출 수 없는 생명의 오롯한 펌프질인 숨은 그 결이 곧 생명이다. 숨결이 부드럽고 고르고 온기가 있으면 잘 살아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위험한 것이다. 죽음을 숨이 졌다고 하는데, 지는 것은 숨결이 꺼지는 것이다. 또 인간은 스스로의 몸을 이루는 살의 결들을 가끔 애틋한 기분으로 내려다본다. 살결은 마치 물결처럼 흘러간다. 언제나 어리고 젊은 살결 그대로 있지 않고, 늘어나고 처지고 물컹해지는 살결로 흘러간다. 생체시계는 이 결 속에도 숨어 있다. 어린 시절의 얼굴과 늙어가는 얼굴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며 비교해본 사람이라면, 늙은 얼굴이 들어와 앉은 게 아니라 어린 시절 얼굴의 살결이 흘러내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살결은 수많은 감정을 실어내면서 조금씩 흘러온 것이다. 숨과 몸을 이루는 결에 마음을 두었던 인간은, 마침내 마음에도 결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결이 고운 경우가 있고, 그 결이 부드럽게 흐르고 따뜻하게 물결치는 경우가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눈으로 뚜렷이 볼 수 있던 결과는 달리, 마음결은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파도치는 결인지라 훨씬 높은 수준의 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린 심청이나 흥부의 착한 마음결을 들어서 알고 있고, 스스로도 가능한 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결이 고우면 마음도 고와진다고 믿는 ‘결의 신앙’을 갖고 있다. 그 사람은 ‘결’이 다르더라. 이 말보다 더 확실하게 그 사람의 삶과 내면을 규정하는 말이 또 있을까. 결은 묘하게도 ‘겨를’이란 말과 닮아서 가끔 넘나들기도 한다. 겨를은 무엇인가를 하다가 잠시 생각이나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말한다. 틈과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무심결에’나 ‘얼떨결에’ 같은 말에 쓰이는 결은 겨를을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고, 파도나 흐름의 결을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다. 무심과 같은 결을 타고 가는 것이나 얼떨떨함의 결을 타고 가는 것이나, 모두 그런 묘한 결의 맛이 끼어든다. 바람결이란 말도 바람이 불 때를 가리키는 맛도 있고, 바람의 흐름 자체를 가리키는 느낌도 있다. 또 꿈결도 그런데, 이것은 꿈의 흐름이란 뜻보다 꿈을 꾸던 겨를의 뉘앙스가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진다. 결에는 운동성(運動性)이 있고, 그 운동이 기입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시간성(時間性)이 있다. 결은 생동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내면의 잘 제어된 흐름을 말하기도 한다. 결에서 느끼는 의식과 무의식은, 생명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타고난 존재들이 공유하는 깊은 공감일지 모른다. 지속적인 움직임은 삶의 낌새이며 자국이다. 결은 그 꿈틀거림을 직조(織造)해나간 물성(物性)의 긴박하고 또렷한 자취라고도 할 수 있다. 화가 김덕용 선생의 ‘결’로 이룬 작품들을 보면서 몹시 매료되었다. 그 이미지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그 이미지에 흐르고 있는 익숙하고도 정겨운 결에 매료되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늘 보고 자랐던 장농이나 화장대의 무늬들, 대청의 천장과 벽에 드러나 있던 무늬들. 그 결의 흐름을 한동안 잊어버린 듯했는데, 그림들이 마치 무의식처럼 형상의 안으로 흐르게 해놓았다. 그 결이 형상을 이룬 것도 아니다. 형상이 마치 스스로 결을 지닌 것처럼 얼비칠 뿐이다. 나무의 질감이 형상을 품고 있는 서늘하고 우묵한 기분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결이 왜 이토록 마음을 상기시키며 안정시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결들과 우리의 목숨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왜 우리는 결에서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음이 일으키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 내 안에 흐르는 결, 내 눈앞에 늘 흐르던 결을 복원시켜주고 복각시켜준 어느 예술의 원형적 통찰. 신비란 신의 비밀이라고 한 사람은 다석 류영모였다. 신비는 도처에, 아니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이미 저절로 다 들어 있다.
- 2021-09-1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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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 손자손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 지난 7월, 우주여행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7월 11일 오전 7시 40분에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7월 20일 오전 6시 12분에는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달과 화성 탐사용 우주선 ‘스타십’을 개발해 그 뒤를 쫓고 있다. 앞다투어 우주로 떠나는 나이 든 ‘회장님’들은 로망으로 존재하던 우주여행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 달에 발을 딛는 우주인을 보며 상상만 했던 우주여행, 국내에서도 정말 가능한 걸까? 시니어가 우주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제각기 다양하다. 정달호 전 이집트 대사는 “기후 변화나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지구에 한계가 온 것 같다. 인류의 미래가 우주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가 어떤지 직접 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양승국 법무법인 로고스 대표변호사는 “영화처럼 몸이 둥둥 뜨는 무중력 상태에서 파란 지구를 내려다볼 걸 상상하면 짜릿하고 흥분된다”며 “실현 가능성이 낮을 것 같아 꿈만 꾸고 있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첫 번째로 신청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직까지 한국인이 우주여행을 다녀온 사례는 없지만, 비슷한 사건은 있었다. 2008년 4월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다녀온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의 이야기다. 2006년 진행된 우주인 선발 프로젝트는 당시 큰 이슈였다.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우주에서 태우고 싶습니다.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손자 손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당시 예순일곱의 나이로 최고령 도전자인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이 남긴 메시지는 사회에 울림을 주었다. 이외에도 산악인 고(故) 박영석 대장, 카레이서 황진우 등의 명사가 도전해 더욱 화제를 모았지만, 우주행 티켓을 거머쥔 주인공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소속의 이소연 박사였다. 이 씨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9박 10일간 머무르고 무사히 귀환했다. 이 씨는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직업 우주인으로, 그녀의 여정은 현재 이뤄지고 있는 민간 우주여행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그러나 당시 국민들은 ‘1호 우주인 탄생’이라는 경사를 지켜보며 머지않은 미래에 누구나 우주를 여행할 수 있기를 꿈꿨다. 실제로 이소연 씨의 귀환 직후 인터뷰는 시청률 조사회사 TNS미디어코리아 기준 17.2%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높은 관심을 받았다. 당시 국민적 관심을 인식한 듯 국내 한 관광사는 유사 우주관광 상품을 내놓았다. 2008년 판매된 ‘우주에서 살아남기-우주항공 체험과 러시아 일주 6일’이 그것이다. 관광객들은 직접 우주로 떠나는 대신, 러시아 여행 중에 모스크바의 가가린 우주훈련센터를 방문했다. 로켓보다 열기구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실제로 우주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지만, 오히려 국내 분위기는 예전만 못하다. 바다 건너 미국에선 우주여행 티켓을 팔며 분위기가 달아오른 모양새지만 우리나라에선 13년 전의 유사 우주 관광상품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기술로는 짧게 보면 10년, 길게는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어릴 적 상상하던 ‘달나라로 떠나는 수학여행’은 정말로 요원하기만 한 걸까.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력을 갖춘 어떠한 기업이 나타나 우주여행만을 목표로 기술 개발에 나서지 않는 한 10년 안으로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주여행 산업 진출을 꿈꾸는 국내 기업이 있냐고 묻자 “현재로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한화그룹의 방산·항공 계열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측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며, 아직 우주 산업 전반에 투자하는 단계라서 우주여행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을 논의하기는 이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휴성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미래스마트건설연구본부 본부장은 “기술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돈”이라고 콕 집어 지적했다. 우주여행에 필요한 발사체를 제작하고, 우주정거장처럼 궤도를 도는 우주호텔을 건설하는 일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다. 우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비용도 수백억 원 수준이다 보니 일상화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로켓 대신 열기구를 도입할 경우 시니어에게도 희망이 있다. 열기구를 이용하면 우주복을 입지 않고, 우주에서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나 체력 단련을 거치지 않아도 우주와 비슷한 환경에서 푸른 별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다. 실제로 스타트업 ‘스페이스퍼스펙티브’(Space Perspective)는 특수 제작될 열기구 ‘스페이스십넵튠’(Spaceship Neptune)을 이용한 관광상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열기구의 강점은 로켓보다 천천히 상승해 탑승자가 버텨야 하는 중력가속도로 인한 압력이 비교적 낮다는 데 있다. 즉 탑승자의 신체 조건이 완화된다. 현재 우주행 티켓을 판매 중인 블루오리진·버진갤럭틱의 우주여행용 로켓에 탑승하려면 2~3G를 버텨야 한다. 2~3G는 급회전을 하거나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에서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안형준 연구위원은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는 건강한 분이라면 탑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시니어들이 ‘열기구 우주여행’을 노려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엔 국내에서도 우주여행을 성공해본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 기업이 등장할 수 있다. 허환일 충남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수요가 있다면, 외국 기업이 제작한 발사체를 타고 국내 기업이 우주관광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가 가능할 수 있다”며 “아주 빠르면 10년 후에도 일반인의 우주여행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니 우주여행을 꿈꾼다면 지금부터 체크리스트를 챙겨 준비해보자. 꿈꾸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고,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가 올 테니까.
- 2021-09-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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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인생 졸업식의 모든 것, 브라보 마이 라이프 6월호 발간
-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일수록 웰다잉, 웰엔딩을 철저히 준비한다. 여생의 마무리와 졸업식을 아름답고 멋지게 맞이하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어서다.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어르신들은 마음처럼 준비가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죽음을 잘 준비할수록 삶을 더 잘 살 수 있게 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준비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6월호에서는 커버스토리로 건강하게 사는 것만큼 중요한 아름다운 인생 졸업식인 웰엔딩에 필요한 장례 문화부터 ‘생전 정리’를 통해 남겨진 가족의 회한을 줄이는 방법,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등에 대해서 살펴봤다. 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로부터 현 시점에서 웰다잉의 의미와 필요성, 실천 방법도 들을 수 있다. 42년 동안 푹 익힌 진심을 말하는 방송인이자 대표적인 베이비붐 세대인 시니어 임백천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장수 MC로 유명하지만 그 비결을 ‘살아남으려는 노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그는 편안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치열함을 내면에 담고 있었다. 가보고 싶은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에서는 ‘살아보니 더 좋은 곳이자 내 마음의 고향인 고창’을 이야기한다. 조상의 얼이 담긴 성곽과 고즈넉한 멋이 흐르는 선운사 등 문화유적과 수박, 풍천장어, 복분자 등 각양각색의 먹거리가 넘친다. 고창은 대한민국 최초로 2013년 5월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청정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생태계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생활 속 법률 상식에서는 ‘안전한 상속 솔루션, 신탁’을 소개한다. 전통적으로 유언을 통해 상속이 이뤄지는데, 유언은 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같은 분쟁을 없앨 수 있는 금융회사가 재산을 관리하는 신탁이 최근 새로운 상속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6월의 단상에서는 산처럼 물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 사대부들이 산행 뒤에 남긴 560편에 달하는 ‘유산기’(遊山記)를 통해 조선의 산행 방법을 담았다. 산행으로 풍류를 즐기고, 됨됨이도 길렀던 조선 선비들의 모습, 특히 퇴계 이황이 산을 사랑한 방식도 만날 수 있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겸 정신의학과 의사인 김창기가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송어게인에서는 최고의 듀오 ‘사이먼과 가펑클’의 ‘So Long, Frank Lloyd Wright’ 노래를 통해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감정을 재발견할 수 있다. 이달의 구독에서는 ‘터치’ 한 번으로 받아보는 맞춤형 화장품을 만날 수 있다. 각종 기능을 보완하는 화장품을 써봐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피부. 이런 시니어의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나온 것이 ‘비싸고 좋은 화장품’이 아닌 ‘맞춤형 화장품’이다.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6월호는 트로트 가수 이금수의 우리들의 화양연화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연세대 농구 감독으로 1990년대 농구 붐의 주역이었다가 사업가로 변신한 고려용접봉 부회장 최희암, 시인 안도현의 고백을 담은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떠오르는 부동산 투자 방법인 리츠를 다룬 은퇴 후 리츠 해볼까?, 숟가락만 들 힘만 있어도 그렇구나라고 하는 재미있는 性인문학, 3대 어깨 질환의 증상과 치료법을 제대로 소개한 시니어 헬스+ 같이 시니어들을 위한 재밌고 알찬 내용으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6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있다.
- 2021-05-2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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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꿈으로 일군 명품 제국
- 여행을 떠날 때 필요한 기술 중 하나가 짐 싸는 법이다. 가방 안에 여행 중 사용할 옷가지나 화장품, 생활용품 등 다양한 물건을 오밀조밀 담아내는 일에도 여행 전문가들은 노하우가 있다. 가령 와이셔츠는 두 개를 겹치고 옷깃을 세운 채 개어서 넣는 것이 좋다. 이러한 팁을 알려주는 한 브랜드의 영상이 유튜브에서 조회수 21만 회로 인기를 끌었다. 그 브랜드는 다름 아닌 루이비통이다.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 루이비통이 여행 가방 싸는 법을 알려주는 이유는 뭘까? 루이비통은 여행용 트렁크로 출발한 브랜드다. 루이비통은 지금도 정체성을 여행에서 찾는다. 창업자 루이 비통은 스위스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가 재혼하자 그는 새 삶을 찾아 나섰다. 14세에 길을 떠나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2년간 도보 여행을 했다. 이 여정을 루이비통은 브랜드 최초의 여행으로 꼽는다. 짐 싸주던 파리 청년 창업자 루이 비통은 파리에서 ‘패커’로 일했다. 패커는 여행 짐을 대신 싸주고 여행 가방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당시 파리의 귀부인들은 풍성한 드레스와 깃털, 리본으로 장식한 화려한 모자를 쓰곤 했는데, 여행할 때 이 모자와 드레스를 구김 없이 갖고 다닐 수 있게 포장해주는 전문 일꾼이었다. 그는 솜씨 좋은 패커로 유명세를 얻어, 나폴레옹 3세 황후의 전담 패커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여행은 고급 문화였기에 그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일했다. 이 분야 전문가였던 무슈 파레샬의 공방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1854년에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매장을 차렸다. 당시 프랑스는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며 여행 문화가 널리 퍼졌다. 그때만 해도 여행용 트렁크는 포플러나무로 만든 위쪽이 둥근 상자였다. 그래서 몹시 무겁고, 여러 개를 쌓기 어려우며, 마차가 코너를 돌면 넘어지곤 했다. 이에 창업자 루이 비통은 새로운 여행 가방을 개발했다. 사각 형태로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 올릴 수 있었고, 방수 처리된 천 소재를 써서 가벼웠다. 운반과 적재의 편의성을 높인 그의 가방은 프랑스 부유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평평하고 네모난 트렁크는 현대 여행 가방의 시초가 되었다. 인기가 많은 만큼 모조품도 성행했다. 모조품을 막고자 아들 조르주 비통이 가방에 무늬를 넣었다. 체크 모양의 다미에 패턴, 창업자 루이 비통의 이름 철자 L과 V를 딴 로고와 장미 문양으로 만든 모노그램 패턴이 만들어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난방지용 자물쇠 역시 당시 함께 개발되어 오늘날까지 루이비통 가방에 장착되며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핸드백 영역으로도 제품군이 넓어졌다. 샤넬 창업자 가브리엘 샤넬의 주문을 받아 만든 알마 백,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자신의 몸에 맞는 작은 사이즈를 주문해 만든 스피디 백 등 소형 핸드백을 만들었다. 이 제품들은 지금도 루이비통의 인기 핸드백이다. 셀렙을 위한 트렁크의 무한 변신 브랜드 창립 후 6년이 지나자 창업자 루이 비통은 파리 북서부 지역의 아니에르에 공방을 열었다. 이곳에서 각계각층 유명 인사를 위한 맞춤형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었다. 1879년 탐험가 피에르 브라자의 아프리카 탐사를 위해 만든 여행용 트렁크는 펼쳐놓으면 침대가 되었다. 1923년에는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위해 트렁크를 만들었는데, 수십 권의 책을 보관할 수 있어 여행지에서 펼쳐놓으면 서재가 되었다. 1926년에 인도 왕족을 위해 만든 트렁크는 찻잔과 찻주전자를 비롯한 티 세트를 담아 어디서나 차를 마실 수 있게 했다. 이후 루이비통은 더욱더 유명세를 얻어 다양한 셀렙들의 의뢰를 받으며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고, 이는 오늘날 글로벌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초석이 되었다. 아니에르 공방에는 지금도 장인들이 상주하며 세계의 명사들을 위한 맞춤형 트렁크를 만드는 일을 전담하고 있다. 현대에는 그 영역이 넓어져 월드컵 트로피 보관 트렁크,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명화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운송하는 트렁크도 제작했다. 피겨 여왕 김연아를 위해 스케이트 트렁크를 만들어 헌정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미국 프로농구협회와 NBA 우승 트로피 보관 트렁크를 제작하는 파트너십을 맺었다. 아니에르 공방에서 수작업으로 제작된 트렁크는 매년 6월 NBA 우승팀에 전달되어 트로피 보관, 전시, 운반 과정에 사용된다. 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CEO는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승리는 루이비통 안에서 여행한다’는 전통을 다시 한번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하며, 루이비통의 여행 헤리티지를 강조했다.
- 2021-04-0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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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는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 마지막 소를 실어 보낸 그날 이후 석 달이 지났다. ‘젖소는 내 운명’ 그 40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게 지난 초봄이었다. 수많은 톱니가 맞물려야 돌아가는 목장에서 문제가 생긴 올 2월 초 갑자기 남편이 일을 그만두자고 했다. 생명을 거두는 녹록지 않은 ‘먹고사니즘’의 긴장을 더는 겪고 싶지 않은 데다 10년 전에 다친 다리 상태도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일생을 바쳐온 일이니 느긋하게 그만두자고 맘먹고 있었는데 한순간 결정을 내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몇 날 며칠을 불면으로 새야 했다. 축사와 하고 많은 장비, 꾸준히 이뤄졌던 투자를 버리는 것은 물론 소가 맺어주었던 촘촘한 사회관계를 허무는 일이며 소 없는 인생, 빈 우사를 견디는 허무감은 깊이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만둔다고 석삼년은 결심해야 겨우 해치울 일이 그렇게 끝났다. 촌 나이로는 이른 나이에 소를 내려놓는 일은 당사자인 우리나 같은 일을 하는 주변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날씨 때문에 하늘 바라보며 조바심칠 일도, 우유가 남아돈대도 가슴앓이 할 일도 없고 목장 관리 때문에 속 썩을 일도 없이 홀가분한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줄기차게 해대던 목장 식구들 밥에서 놓여난 것은 해방 중의 해방이었다. 목장을 정리하며 들어온 소위 노후자금을 이리저리 나누어 통장에 넣었지만 이자가 바닥이니 원금을 조금씩 잘라먹을 게 눈에 선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냐며 만만했던 맘 위로 남모를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데 일방통행이 돼버린 돈이 너무 낯설었고 걱정스러웠다. 지난 40년 동안 늘 한 달에 두 번씩 우유 값 정산한 목돈이 들어와서 나가는 사이로 스쳐가던 푼돈들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자연스레 윤활유처럼 생활을 반들거리게 하던 씀씀이를 주저하며 쩨쩨해(?)지는 중이다. 인생에 계획이란 있기나 한 걸까. 서울 사람이 생면부지 땅에 소 키우러 들어와 40년을 살았는데 소도 안 키우면 이 땅에서 떠나야 하는 게 다음 순서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긴 은퇴를 책임져줄 자금의 어느 부분이 이 땅에 있으니 그건 우리 생애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이 분명했다. 한 곳에 뿌리박고 산 널찍한 시골집 살림에 눈길이 멈췄다. 어떤 장래에 우리가 이사라는 걸 하게 된다면 한숨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다. 그 쓸쓸함이 어떨지 미리 겁이 났다. 손때 묻으며 나이 들어간 물건들은 대개는 분리수거라는 이름으로 쓰레기통에 처박힐 운명이니 미리 버리고 비우자며 책부터 손을 댔다. 책 욕심이 유난히 많은 내게 서재 가득 들어찬 책은 한순간 무거운 짐으로 변할 터였다. 마당의 묵은 갈잎을 태우는 속에 먼지가 풀풀 나고 냄새가 나는 책을 한 권씩 던졌다. 차곡차곡한 물건들을 덜어내며 책은 최소한으로 사되 남을 것, 즉 물건은 되도록 사지 않으리라고 새삼 맘을 먹었다.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은 물질뿐이 아니었다. 평생을 임무와 도리에 매여 안달한 몸에게 시간을 오롯이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남짓 목장 관리인들 밥을 해준 것도 모자라 유난했던 도시 손님치레들로 삶은 더욱 번잡했다. 며느리는 엄마, 아내, 목장 집 아낙, 심지어는 이름자보다도 앞서 내 노동을 규정하는 명사였다. 아버님은 시골에 사는 자식들이 자랑스럽다 하셨고, 집안 대소사를 한 손에 거머쥐고 막힘없는 시어머니는 따로 살았어도 언제나 고달프고 힘에 부쳤다. 자랑의 얼굴은 연이은 손님치레로 드러났다. 내 생각은 아랑곳없이 ‘어느 날 어느 시 몇 명’ 이런 통보가 날아오곤 했다. 상다리가 휠 정도라야 흡족해하는 분들이 말씀은 언제나 ‘김치에 된장이면’이었다. 승합차도 오고 승용차도 오고 버스가 올 때도 있었다.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으나 이분들을 거스르지 않아야 겉으로라도 평화가 왔다. 나의 사람 됨됨이는 어른들의 만족에 달려 있었다. 누구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서울 사람들의 밥을 차리며 나는 흔들려야 하는가. 무의미하고 동의할 수 없는 노동에 대한, 내색도 못 하는 반감이 꼿꼿하니 여기저기가 자꾸 아팠다. 며느리 도리에 결박당해 젊음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마흔 후반이 지났다. 이런 와중에 잡은 공부라는 지푸라기로 오십 넘어 박사가 되었으니 평생을 모자란 시간에 애걸하고 매달린 셈이다. 영화 한 편을 봐도 평이 좋은 안전한 것을 봐야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안심을 했다. 그렇게 육십 평생 관계가 얽어맨 도리에 치인 삶, 목적지향형 삶에 복무하느라 닦달했던 시간과의 화해가 필요했다. 모든 노동이 의미로 치환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조급함을 내던지는 중이다. 내 식구만의 밥상을 차리니 한평생 바다를 걸레질하듯 맥 빠지고 지치던 부엌일이 할 만해졌다. 요즘 같은 여름날 텃밭의 펄펄한 채소들을 밥상에 올리니 장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냉장고를 뒤적여 요모조모 반찬을 만들며 진정한 부엌의 회복을 꿈꾼다. 내 인생에서 추구했던 의미는 이미 총량을 넘어선 느낌이다. 어느덧 예순셋,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라는 자각이 또렷해지니 더 이상 나를 혼내며 괴롭히지 않기로 한다. 미리 앞질러 돈 걱정하지 말 것. 짜장면을 먹으러 가도 귀걸이를 달고 나서는 예쁘고 쾌활한 할머니가 되자. 박사가 된 후 나가는 학교 강의가 아직은 중요한 일이지만 나머지 시간은 무용한 즐거움으로 채우고 싶다. 어찌 의미를 좇는 일만이 삶이랴. 더 이상 효율이라는 이름을 인생에 들이대지 말 것. 심상히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노을 녘의 산책도,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다 눈부신 인생이려니. ‘은퇴는 무릇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번개처럼 스친 문장 하나로 돈 걱정에 사로잡혔던 맘속이 비로소 환해졌다. 치열하고 빛나게, 남다르게 살고 싶었던 인생의 등성이를 넘어서니 102호도 103호도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란 말을 알겠다. 명주 같은 삶을 살고자 안간힘을 썼던 긴장감에서 벗어나 무명 같은 헐렁함으로 살아보려 걸음마를 뗀다.
- 2021-04-02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