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독일 통일을 이끈 빌리 브란트를 소개한다.
역사의 명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을 전하며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다”라고 말했다. 미리 계획된 행위도, 참모들이 급히 짜낸 전략도 아니었다. 왜 무릎을 꿇었느냐는 질문에 브란트는 “헌화를 하는 순간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였던 폴란드 총리는 그날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성찰과 참회의 힘
아무도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빌리 브란트의 이른바 ‘무릎 사과’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하지만 그의 나라 서독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2년 뒤 치러질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유대인들과 동구권 국가들을 의식한 행위라는 비판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은 하층민 출신인 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생아’라는 출생 배경은 사람들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1913년 독일 북부 뤼벡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히틀러의 독재에 맞서 투쟁할 때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가명이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미혼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람’이라는 이름은 그를 비하하고 비방하려는 정적들에게 종종 불려나오곤 했다. 그 때문일까.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는 더 이상 본명을 쓰지 않았다.
정치 망명객으로 지냈던 과거도 그를 꽤나 힘들게 했다. 사회민주당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다 게슈타포의 표적이 된 그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나치 정권에 대항했다. 1938년에는 국적을 박탈당해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했는데 이때의 이력으로 ‘어려운 시절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특히 보수 언론과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정치인들은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나치 독일에 대항했던 과거를 들먹이며 그를 코너로 몰아붙이곤 했다.
하지만 여러 난관 속에서도 브란트는 정치가로서 성공했다. 1949년부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의원, 시장, 외무부장관, 총리를 역임했고 정파를 떠나 국민과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로서 신뢰도 얻었다. 1971년에는 동·서독 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빌리 브란트가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미·소 냉전시대의 긴장 완화를 위한 ‘동방정책’(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화해 정책)을 펼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갈등과 대립’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정치란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류와 평화에 기여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통한 협상은 그가 추진했던 동방정책의 핵심이었다. 그 결과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그가 이끌었던 서독 정부는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동독과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브란트는 권력자가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어떤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오래 고민하고 가능한 한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좋아했다. 그래서 종종 동료들로부터 “커브 길만 나타나면 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노인”과 같다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브란트는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고수하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며, 더 궁리하고 관찰하면서 합리적인 방법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가 감행되기를 바랐고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하고 더 많은 공동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를 원했다.
한 인간으로 볼 때 그는 약점투성이의 인물이었다. 쉽게 상처받고, 예민했고, 갈등을 싫어했다. 누구에게 속마음을 잘 보여주지도 않았고, 더러는 사생활 문제로 참모들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이러한 약점들이 오히려 위대한 정치가가 되는 데 특별한 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치에서는 언제나 이길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평화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한 연설을 통해 말했다.
“평화가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해, 브란트는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 통일이 언제 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보기 힘들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보름 후 장벽은 무너졌다. 우리의 38선은 어떤가. 최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캄캄하다. 그래도 어느 날 벼락같은 큰 소식을 듣고 싶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을 때 “원래 하나였던 것은 함께 자라야 한다”고 분노했던 빌리 브란트는 1989년 장벽이 무너지자 “원래 하나였던 것이 이제 함께 성장하게 됐다”는 말로 자신의 연설문을 완성했다. 동방정책을 선언한 지 20년 만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정원을 사랑한 작가 헤르만 헤세를 소개한다.
바이러스에게 혼쭐이 나는 시절이다. 연분홍 치마 한 번 걸쳐보지 못하고 봄이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역병의 시간들을 “인간은 위태롭지만 지구는 회복하는 중”이라 표현하는 이도 있다. 이 또한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혹독한 깨달음이겠다. 겸손을 배워야 할 날들이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며칠 손에 들고 다녔다. 꽃과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한 뙈기의 땅을 사랑한 이 남자는 ‘작은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눈에 쉽게 띄지도 않으니, 잘 느끼고 보려면 고개를 높이 들라고 했다.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싯다르타’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 출신 작가. 1943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으니 그의 명성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그가 정원 가꾸기의 달인이었고, 30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더러 있다.
헤세가 쉬는 방법
헤르만 헤세는 정원을 지독히 사랑했다. 자연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진실을 체험할 수 있고 삶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정원은 영혼의 쉼터이자 안식처였다. 꽃과 나무들이 만들어낸 색채의 물결이 마당에 가득해지면 마치 천국에라도 와 있는 양 행복해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
헤세는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한 권의 책과 빵 한 조각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었던 어린 시절의 정원을 잊지 않았다. 그토록 소망했던 정원은 서른 살에 처음으로 갖게 됐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허름한 작업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 글은 해가 진 뒤에야 썼다.
초목에 물이 오르는 계절이 되면 그는 더 바빴다. 평화롭게 보이는 집들과 들과 꽃과 구름의 모습을 빠트리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친구와 지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한쪽에 수채화를 그려 넣곤 했다. 한 번도 그림을 배운 적 없고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맑고 투명했다. 정원 가꾸기와 그림 그리기는 믿음과 자유를 얻기 위해 그가 휴식하는 방법이었다. 헤세는 자연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봤고 생성과 소멸의 순환 과정을 이해했다. 그가 식물들을 관찰한 기록들은 그래서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재배 식물 가운데도 알뜰한 것과 헤픈 것이 있다. 절약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낭비가 심한 것도 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긍지를 갖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다른 식물에 기생하려는 것도 있다. 그 종이나 생명력이 고루하고 평범하다 못해 활기가 없는 식물이 있는 반면 어떤 것은 마치 위풍당당한 신사 같다. 그들 가운데도 좋은 이웃과 나쁜 이웃이 있다. 다정한 것이 있는가 하면 혐오스러운 것도 있다. 어떤 식물은 제멋대로 무한정 거칠게 피어나 당당히 살다 죽는 반면 볼품없는 존재 때문에 손해 보며 내내 굶주리고 창백한 모습으로 힘겹게 생명을 유지해가는 식물도 있다. 어떤 식물은 열매를 맺고 증식하면서 믿기지 않을 만큼 풍성하게 성장해가며 어떤 식물은 애써 돌봐야만 겨우 씨라도 남긴다.
스위스 몬타뇰라의 정원
정원과 함께한 후반의 삶은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그의 청년기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했고 부모에게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퇴학과 자살 기도 등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다. 결혼 후에도 아내의 정신병과 이혼, 세계대전을 겪으며 삶이 평탄치 않았다.
나치스에 반대하는 작가로 낙인찍힌 뒤 ‘배신자’, ‘매국노’라는 비난과 함께 탄압을 받던 헤세는 스위스로 망명한 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다. 1919년, 불혹을 갓 넘긴 나이에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 몬타뇰라에 정착한다. 조국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불행한 가정사로 방황하던 그가 마음 치유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그림은 종종 탈출구가 돼주었다.
그는 사교 활동보다 정원에 있길 좋아했고, 아무리 대단한 곳에서 강연 요청이 와도 몬타뇰라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40여 년간 이곳에서 거의 칩거하다시피 했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도움을 청할 때는 언제나 문을 열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작품세계는 더 확대되고 깊어져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탄생했다.
훗날 사람들은 헤세의 정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위 상류사회의 거드름을 피우는 속물은 보이지 않았고 (…) 그곳에서 필요한 것은 모양이 망가지고 가장자리 창이 넓은 밀짚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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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읽고 싶은 도서들 - by 한성희
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찰스 핸디 저)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닌 각계각층 60대 여성 29명의 이야기. ‘요즘 60대의 초상’을 콘셉트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경영철학자인 찰스 핸디가 글을 엮고,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핸디가 사진을 찍었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저)
인간의 고독을 바라보며 얻은 통찰을 글로 담아낸 시대의 지성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사람과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 성 정체성에 대한 고뇌 등을 비롯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 과학자들과의 우정 등을 들려준다.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저)
20세기 청춘들을 열광하게 한 성장소설. 사립학교의 문제아인 주인공이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간의 일화를 그린다. 10대들의 언어를 고스란히 살린 문장과 기성세대를 향한 예리한 성찰이 돋보인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호모 사피엔스부터 인공지능까지, 방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생물학, 경제학, 종교학 등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시원부터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인간의 끊임없는 진화를 조명한다.
2013년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를 통해 수많은 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던 한성희(韓星姬) 이한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딸의 결혼을 앞둔 한 엄마이자, 정신과 전문의로서 건넨 진정 어린 조언이 큰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잠시 절판됐던 도서가 최근 다시 출간됐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표지에 그려진 딸의 모습은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당시 50대였던 한 원장 또한 어느덧 60대에 이르렀다. 딸 못지않은 인생의 전환점을 지났을 터. 그녀는 “잘 성장하고 있다”며 담담히 안부를 들려줬다.
하나뿐인 딸아이의 결혼, 그것은 한 원장이 책을 펴낸 계기이자 크나큰 성장통을 앓게 한 사건이었다. 자녀의 독립이 시원섭섭한 건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상황은 좀 달랐다.
“딸이 미국 유학을 갔는데, 당연히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여겼죠. 그런데 어느 날 결혼 얘기를 꺼내더니 아예 미국에서 살 거라더군요. 제 나이와 여건을 감안할 때, 앞으로 20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본다 해도, 평생 딸을 볼 기회가 20번 남짓인 거예요. 너무나 기가 찬 노릇이었죠. 영원한 이별은 아니더라도, 그 못지않은 심정이었어요. 공항에서 서로 엉엉 울며 헤어졌지만, 즐거운 신혼을 앞둔 젊은 딸과 점점 늙어만 가는 엄마가 느끼는 아픔은 천지차이죠. 그 옛날 우리 친정엄마도 같은 마음으로 나를 보냈을 텐데, 이 정도로 상실과 아픔이 크리라고는 그땐 상상도 못했어요.”
아직 어린 딸을 이것저것 챙겨주고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녹록지는 않았다. 아쉬운 마음도 달랠 겸 그동안 딸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가 완성됐고, 덕분에 그녀는 엄마로서의 삶 1부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도 어렵지만, 부모가 자녀로부터 독립하는 건 더욱 쉽지 않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부모가 말로는 ‘독립하라’고 하면서도 막상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죠. 아이를 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하는데 내가 외롭고 힘들다고 계속 붙잡아두는 거예요. 겉으로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럴싸한 이유를 대겠지만, 사실상 소유욕에서 비롯된 착취나 다름없죠. 물론 저도 아주 쿨하게 딸을 보내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만큼 자녀에게서 독립하는 건 누구에게나 참 힘든 일이죠.”
입체적 삶을 위한 경험 투자
그토록 힘든 일임에도 해내야 하는 까닭은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에 있었다. 딸의 성장은 물론 엄마의 성장까지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것, 그리고 엄마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것. 한 원장은 이러한 성장을 통해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과정 같지만, 역할 변화에 따른 전환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시기가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들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죠. 자신에게 주어졌던 역할의 고리들을 과감히 끊어내는 용기가 필요해요. 물론 그것이 더러 외롭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라면 다 겪어야 할 일들이죠. 흔들리다가도 중심을 찾는 오뚝이처럼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하는 과정이고, 그렇게 성숙해야 왜곡과 갈등 없이 자녀와 잘 분리될 수 있습니다.”
삶의 키워드를 ‘성장’이라고 언급한 한 원장은 몇 해 전 과감히 유학을 결정했다. 딸도 결혼하고 안정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던 차였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선택을 의아해했다. 늦은 나이에 웬 공부냐는 반응이었다. 단순히 커리어만을 위했다면 단행하지 못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성장을 바랐기에 가능했다.
“커리어는 성장을 통해 얻는 일종의 부산물이죠. 애당초 그걸 목적에 둔 건 아니었어요. 물론 현실적인 면에서 내가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두고 저울질을 많이 했었죠. 금전적인 리스크도 있었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거예요. 그러나 돈이란 것은 결국 나의 잠재성을 실현하고 내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쓰이는 거잖아요. 나중에 죽음에 이르렀을 때 돈이나 나이 등등 때문에 성장의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갑자기 남자가 된다거나, 공학자가 된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바람도 아닌데 말이죠. 그저 내가 해오던 것을 더 심화하려는 욕구였기에 조금만 발돋움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돈을 경험에 투자하자’고 마음먹었죠.”
기품 있는 중년의 아름다움
그러나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자녀 세대의 경우 개인의 성장보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 원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워킹맘들의 우울한 심정을 절절히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워킹맘으로 고단한 현실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단, 허덕이며 사는 삶 속에서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땐 당연히 먹고살려고 일하지 자기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생계를 위한 일이 꿈을 이루는 일이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죠. 그러나 그런 중에도 자기 꿈을 위한 여지는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도 조각을 쌓다 보면 언젠가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애 키우고 일하느라 아직은 버겁더라도 가슴 한편에 꿈을 품고 살아야 언젠가 이모작, 삼모작의 기회도 잡을 수 있습니다. 짬짬이 단 15분이라도 취미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한 원장 역시 수십 년 동안 천천히 조금씩 즐겨온 취미가 있다. 바로 ‘첼로’다. 딸이 세 살 무렵 첼로를 샀는데, 이제 중급 정도의 실력은 된단다. 자신의 여든 살 생일에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하리라는 야무진 꿈도 생겼다. “인생 별것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라며 힘든 시절 그녀를 위로했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처럼,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다짐도 해본다. 그런 한 원장 역시 딸아이가 늘 즐겁게 또 아름답게 중년을 맞이하길 바란다.
“언젠가 제인 구달이 한국에 왔을 때 백발을 늘어뜨린 수수한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여든이 넘은 나이에 민낯이었는데도, 메이크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더군요. 코코 샤넬은 ‘스무 살 때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라고 했는데, 자기 삶을 잘 다져온 이가 뿜어내는 고유의 아우라가 있는 거죠. 그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만의 향기를 품는, 아름다운 중년의 딸을 보고 싶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질투로 얼룩졌던 마티스와 피카소의 우정을 소개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젊은 예술가들의 산실로 불리던 파리에는 다양한 국적의 보헤미안들이 몰려들었다. 스페인에서 온 풋내기 청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06년 그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당대 프랑스 화단에서 이름을 날리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였다.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법학을 공부하다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대 초반 파리로 갔다. 이후 회화 양식과 색채와 빛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명성을 얻었고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됐다.
‘색채의 혁명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던 이 대작가는 무명작가인 피카소의 그림을 보자마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마티스를 뛰어넘고 싶었던 피카소
그 무렵 마티스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만든 조각품의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서 콩고 조각품을 구입한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감상하고 싶어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아지트로 향했다. 마침 피카소도 그곳에 와 있었다. 그는 마티스가 가져온 ‘흑인 두상’ 나무 조각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황급히 일어나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원시 아프리카 미술을 재해석해 화폭에 옮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마티스는 아프리카 조각을 통해 인체의 비율과 ‘색채’를 고민했고, 피카소는 마법처럼 느껴지는 ‘초월적 힘’에 심취했다.
마티스가 아프리카 조각품의 원시성에서 영감을 받고 그린 ‘삶의 기쁨’(1906)과 ‘푸른 누드’(1907)가 발표됐을 때 비평가들은 “불편한 느낌을 주는 도발적인 작품”이라며 주목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피카소는 비판을 쏟아냈다. “무릇 화가라면 단순한 색깔로만 변화를 주는 게 아니라 형태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의 작품을 깎아내렸던 것. “색이 무엇인지 인류에게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말로 칭송되던 마티스의 작품에 대한 도전적 발언이었다.
피카소는 변신을 거듭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다. 마티스가 활용한 기법들은 철저히 지양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곡선으로 처리하고 강렬한 색으로 아우라를 발산한 ‘삶의 기쁨’은 피카소에겐 매우 중요한 도전 대상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고, 힘찬 직선으로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 ‘아비뇽의 처녀들’(1907)로 응수했다. 입체파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평론가들은 그림 경쟁을 벌이게 된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심리’를 분석하며 마티스보다 더 뛰어나고 싶었던 피카소의 속내를 지적했다.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해 미술계의 1인자가 되고 싶었던 피카소가 스승처럼 따랐던 마티스를 경쟁상대로 만들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흠모와 질투의 ‘붓 대결’
마티스는 신중하고 사색적인 사람이라 홀로 조용히 작업하는 걸 좋아한 반면, 피카소는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며 작업을 했다. 비슷한 취향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늘 서로의 작품에 끌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든 마티스와 피카소의 이른바 ‘붓 대결’은 그렇게 흠모에서 질투, 그리고 경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피카소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마티스를 강박증 환자로 몰아세우며 공격했다. 마티스도 이에 질세라 피카소의 콜라주 기법을 쓰레기라 비웃었다. 급기야는 서로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헐뜯었다.
피카소에게 실망한 마티스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교류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고 두 사람의 입장은 뒤바뀌었다. 피카소가 미술계의 거장이 됐을 때 병약해진 마티스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4년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가 생을 마무리하면서 남겼다는 한마디는 피카소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내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을 함께 전시하지 말아주게.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득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마티스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피카소는 슬픈 얼굴로 창밖을 보며 “마티스가 죽었어, 마티스가 죽었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책감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그는 ‘캘리포니아 아틀리에’를 그리며 떠나간 마티스를 추억하고 애도했다. “다시 태어나 그림을 그린다면 마티스처럼 그리고 싶다”고 말했던 피카소는 1973년 92세에 눈을 감았다.
2017년, 갑작스런 사위의 발령으로 인해, 손자들은 어학 준비를 못 한 채 파리의 국제학교에 입학했다. 영어, 불어, 모국어 사이에서 방황하는 손자들은 매일 아침 등교를 거부하였다. 낯선 이국생활의 시작은 딸 자신에게도 매우 버거웠다. 급기야 나에게 SOS가 날아왔고 딸바보인 나는 이틀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손자들의 등하교 챙기기였다. 군소리 안하고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등교 시 1유로씩, 하교 시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앞장서서 제대로 집을 찾으면 1유로씩을 지급했다. 그리고 각종 생활수칙을 잘 지키면 즉시 현금 포상을 하였고, 특히 그 돈들은 절대 딸 내외가 손을 못 대게 하였다. 이렇게 등하교 및 이국생활 문제들은 해결되었고 애들은 점차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손자들의 학교생활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먼저 식당에서부터였다. 프랑스에서는 급식시간에 모든 학생들에게 잼이 지급된다. 그런데 그 용기는 햄버거 가게의 토마토케첩처럼 손톱으로 찢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 아이들은 그것에 매우 서투르다. 하지만 우리 손자들은 옷에 흘리지 않게 귀퉁이를 잡아 찢는, 그 섬세한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사리 해 냈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에게 잼 봉지 찢기 봉사를 하며, 손자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 후 체육시간에 신발 끈을 제대로 못 매 쩔쩔매는 영국 애들, 교복 넥타이를 못 매는 독일 애들, 연필을 칼로 못 깎는 미국 애들까지 도와주면서, 타고난 손재주를 과시하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모두 한민족 유전자 덕분이었다.
프랑스 주최인 2019년 5월의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명성은 상한가를 쳤다. 딸네가 살고 있는 파리 근교의 자그마한 동네(Chatou) 영화관에서도 ‘기생충’이 상영되었다. 딸 부부는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자막 없이 보는 한국 영화가 반가웠기도 했지만, 영화 종료 후 동네사람들이 딸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축하를 받으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다.
2020년, 우울한 시작이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한반도를 급습했다. 그러자 프랑스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교장선생님은 직접 딸에게 전화를 해 겨울방학 중 한국에 다녀왔는지를 물었다. 길거리에서의 동양인들은 기피 대상이었고, 2월인 작은 손자의 생일파티는 당연히 취소되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은 검정색 마스크를 쓴 채 파리 중심가에서 쇼핑하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 코로나19 확산의 주역인 신천지교회 이만희 총회장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사진이 실리면서, 그동안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급락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IT산업 강국인 한국과 이상한 종교가 판치는 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원래 신체가 건장하고 생활수준도 높아 코로나19쯤은 걸려봤자 감기처럼 금방 낫는다고 자부했다. 자신들의 문화와 어긋나는 마스크 착용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그들에게 코로나19는 먼 극동의 비위생적인 국가들 얘기였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코로나19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는 마크롱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코로나19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로 인해 G20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다시 롤러코스트를 탔다. 이제는 한국 방역모델이라는 말이 일반명사화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하고, 한국을 걱정하던 이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로 급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앞으로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리에서 3명의 자녀와 함께 4년째 거주하고 있는 딸과 사위는 이렇게 고국의 위상 변화에 얹어져 어지러운 롤러코스트를 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퇴계 이황의 유별했던 매화 사랑을 소개한다.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난리법석이다. 자발적 격리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의 매너가 되어버린 이 봄, 아직 상춘(賞春)할 여력은 없지만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만화방창 소식에 자꾸 엉덩이가 들썩인다. 더욱이 매화 암향으로 가득해질 계절 아닌가.
예로부터 매화를 사랑한 이는 많았다. 추운 겨울에도 매화 소식이 들려오면 술을 꿰차고 길을 나섰다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과 ‘매처학자’(梅妻鶴子·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다)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매화를 좋아했던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 967∼1028)가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무릇 선비라면 매화의 맑은 자태를 감상하고 붓과 벼루와 술을 준비해 시 한 편씩 짓기를 원했으니,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기개와 품격을 너도나도 흠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매화를 ‘兄’이라 불렀다
우리의 옛 선조들도 이 도도한 꽃에 빠져 지낸 이가 한둘이 아니다. 강희맹, 박제가, 이덕무 등이 그랬고,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목이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매화의 포로가 됐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라는 말을 남겼다니 그의 매화 사랑은 거의 순애보 지경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퇴계연보’에는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아침 (선생은) 눈을 감은 채 말씀하시기를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했다. 오후 5시 무렵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라 하셨다. 부축해서 일으키니 앉은 채로 조용하게 떠나셨다.”
한번은 고향 안동에 사는 지인이 매화를 보여주겠다며 퇴계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임금의 소명이 내려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에 매화를 보지 못한 아쉬운 회포를 네 편의 시로 읊어 지인에게 보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한다.
매화가 나를 속인 게 아니라
내가 매화를 저버렸으니
그윽한 회포를 서로 펼 길
멀어졌네
멋스런 풍치가 도산 절우사에
없었다면
심사가 여러 해 전부터 또한
다 무너졌으리
梅不欺余余負梅
幽懷多少阻相開
風流不有陶山社
心事年來也盡頹
평소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 부르며 ‘혹애’(酷愛,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그는 요즘 말로 매화 마니아, 매화 덕후였다. 61세 봄에는 도산서원 동쪽에 절우사(節友社)라는 화단을 조성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다. 매화를 애지중지했던 퇴계는 어느 날 시를 쓰다가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아꼈다는 도연명을 언급하면서 “매화 형은 어찌하여 거기에 끼지 못했습니까(梅兄胡奈不同參)”라고 묻기도 했다. 그가 30여 년간 쓴 매화 시는 모두 107수. 이 중 91편은 매화시첩으로 엮어 남겼다.
두향과의 로맨스는 출처 불분명
그가 단양 군수로 지내던 시기(1548), 관기였던 두향과 매화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두 사람이 만난 기간은 9개월 남짓. 이황이 얼마 뒤 풍기 군수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이후 두향은 그리움 속에서 지내다가 이황의 임종 소식을 듣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데, 그녀의 묘를 이황의 제자 후손과 지역민들이 관리해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은 이 러브 스토리의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의 문헌 어디에도 두향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을 뿐더러, 과연 그녀가 이황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인지조차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정비석(1911~1991) 소설가가 발표한 작품 ‘명기열전’에 소개된 이야기를 출처 확인도 없이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된 것이라 보는 이도 있다. 실제로 단양 지방과 이황 후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야사를 근거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소설가의 고백도 있었다.
당시 이황이 처한 입장은 을사사화, 정미사화 등이 연이어 발생한 정치적 난국 속에서 한가롭게 기생과 정담이나 주고받을 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도피하듯 외직을 청했고 겨우 얻은 자리가 단양 군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아내와 아들과 형을 잃는 불행한 일들이 그즈음 있었다.
퇴계는 임금에게 신망 높은 인물이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 자연에 파묻혀 지내는 걸 좋아했던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50대에 조기퇴직(?)을 했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 쓰고 꽃나무 심는 일을 즐거워했다. 풀 한 포기에도 이름을 지어주며 의미 부여를 했다. 또 늙어 병이 들자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매화분을 옮기라 할 정도로 사물에게도 예의를 차렸다. 생이 다할 때까지 격물(格物)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도산서원에는 올봄에도 매화 향이 한가득 퍼질 것이다. 그러나 이황이 도산서당 주변에 직접 심고 키웠다는 고매(古梅)는 죽어버려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서운하다.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온몸으로 살았던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을 소개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봤을 바이블 같은 책이 있다. 바로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과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부부가 쓴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이다. 1930년대 초 뉴욕을 떠나 시골 버몬트의 한 낡은 농가에서 살았던 20년간의 일상을 기록한 이 책은, 생태적 삶을 실천하며 욕심 없이 사는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전 세계가 경제공황의 늪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자”
스코트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동 노동의 착취와 전쟁을 반대하다가 강단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그는 경제학자로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며 존경받던 대학 교수였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학 측과 마찰을 빚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무난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실천적 지식인이 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결국 해임 통보를 받고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주류 사회의 배척이 이어지면서 강연은 물론 언론 매체에 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여파로 첫 번째 아내와도 헤어지고 자녀들까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헬렌을 만난 건 그 무렵. 스코트의 나이 45세, 그녀의 나이 24세 때였다.
한때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기도 했던 헬렌은 1904년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예술과 명상과 우주 질서에 관심이 많고 자유분방했던 그녀는 1928년 스코트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선 건 스코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고자 했다. 그러나 직장도 잃고 생계수단마저 막혀버린 스코트에게는 당장 먹고사는 일이 절박한 문제였다. 미친 듯이 서두르며 속도를 내는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경제적 독립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답은 자급자족밖에 없었다. 그들은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시골 버몬트로 이사한 뒤 거칠고 쓸모없어 보이는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손수 살아갈 집을 지었다. 돈을 벌기 위해 애쓰지 않았으나 그때그때 필요한 현금은 단풍나무 수액을 채취해 시럽과 설탕을 만들어 팔아 마련했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양식이 마련되면 일도 하지 않았다. 대신 독서와 명상, 여행 등을 하며 여가시간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오늘 할일을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은 철저히 경계했다. 두 사람이 쓴 ‘조화로운 삶’에는 당시의 일상들이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우리는 할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 충분한 자유시간을 가졌으며, 그 시간을 누리고 즐겼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을 할 때는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그렇지만 결코 죽기 살기로 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이 일했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스코트 니어링의 유언
헬렌과 스코트는 버몬트에 개발 붐이 불자 1952년, 몇십 배로 가격이 오른 땅을 대부분 마을에 기부하고 떠났다.
새로운 삶의 터전은 메인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들의 집은 늘 열려 있었다. 문명에서 물러난 삶을 몇십 년째 살고 있는 이 기이한 부부를 보러 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귀농 붐도 일어났다. 야채, 과일, 곡물로 차린 소박한 밥상을 즐긴 두 사람은 잔병치레 없이 오래도록 건강했다.
90대가 되자 스코트의 육체적 기력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98세에도 강연을 할 정도로 정신만큼은 꼿꼿했다. 그러나 곧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1983년, 100세를 눈앞에 둔 어느 날 그는 지인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음식을 서서히 끊었고 물만 마시다가 7주 후에 세상을 떠났다.
헬렌은 훗날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통해, “우리는 누워서 병을 앓으며 무력한 삶을 계속 살아갈 필요도 없고, 요양원에서 이루어지는 긴 사멸의 공포를 느낄 필요도 없다”고 강조하면서 “스코트가 단식으로 자기 몸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은 느리고, 품위 있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80세 되던 해 썼다는 스코트의 유언은 오늘날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였던 셈이다.
헬렌 니어링도 삶의 마지막을 그렇게 맞이하고 싶어 했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1995년, 그녀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91세의 생을 마쳤다.
스코트가 건강할 때 미리 작성해뒀다는 유언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1. 마지막 죽을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다가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다.
3.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 따라서 주사, 심장충격, 강제급식, 산소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이든 환영해야 한다.
VVIP에게만 허용된 초호화 공간부터 소박한 맛집까지, 전 세계 슈퍼리치들이 사랑하는 핫플레이스를 소개한다.
글 브라보 마이 라이프 편집국 bravo@etoday.co.kr
◇ 쿠알라룸푸르 ‘마인즈 리조트&골프 클럽’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는 명문 골프장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마인즈 리조트&골프 클럽’은 상위 1% 슈퍼리치를 위한 멤버십 운영으로 주목받고 있다. 엄격한 선별 과정을 통해 500명 미만의 소수정예 회원만을 수용한단다. 덕분에 방문객이 거의 없어 여유롭게 황제라운딩을 즐길 수 있다. 타이거 우즈의 우승 코스로도 유명한 이곳의 63개 홀 중 18개 홀은 한국 골프 여왕 박세리가 직접 설계에 참여했다. 코스 중심에는 60만 ㎡가 넘는 거대한 호수가 있는데, 마인즈 리조트 쇼핑몰과 연결돼 유람선으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마치 바다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코스의 그린피(green fee)는 40만 원 선으로 알려졌다.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의 ‘더 클럽’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에는 회원은 물론 자식과 손주 세대도 이용할 수 있는 멤버십 ‘더 클럽’이 있다. 6만9000㎡의 너른 부지에 들어서 있는 호텔과 레스토랑, 최고급 레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한마디로 상류사회를 위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피트니스, 사우나, 골프 연습장, 풋살, 테니스, 농구 코트 등 다양한 운동시설은 가족끼리 단란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클럽을 구현하고 있다. 회원 전용 시설은 어린 자녀를 둔 가족을 배려한 노력이 엿보인다. 오아시스 야외 수영장에는 어린이를 위한 모래사장과 키즈풀이 있고, 사우나에서는 가족이 함께 즐기는 ‘패밀리 데이’를 진행한다. 키즈 클럽은 다양한 예체능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으며, 피트니스의 종목별 주니어 레슨은 시즌에 따라 새로운 주제로 운영된다.
◇ 빌리어네어숍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1300억 원짜리 요트를 살 수 있을까? 슈퍼리치를 위한 온라인 쇼핑몰 사이트 ‘빌리어네어숍’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다. 이 사이트 카테고리는 요트를 비롯해 전용기, 헬리콥터, 자동차, 모터사이클, 시계, 레지던스 등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어마어마한 상품(?)들을 판매한다. 3억1950만 유로(약 4161억 원)에 달하는 모나코 몬테카를로의 투어 오데온 스카이 펜트하우스가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가 하면 2억6079만3700유로(약 3356억 원)짜리 보잉 B787-8 항공기도 구매할 수 있다. 사이트 내에서 가장 가격이 싼 상품은 명품 모터사이클 브랜드 두카티의 디아벨크로모. 하지만 이조차도 1만6500유로(약 2124만 원)로 만만찮은 가격이다.
◇ 네커 아일랜드
카리브해의 이국적 풍경을 품은 지상낙원. 하지만 1인당 하루 숙박료가 1000만 원에 육박하고 기본 3박 이상부터 이용할 수 있으니 일반인들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곳. 영국 기업 버진그룹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이 소유한 ‘네커 아일랜드’는 타인의 시선과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럭셔리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초호화 섬 리조트다. 또한 전 세계 부호들의 단골 휴양지로도 유명한데,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를 비롯해 팝 디바 머라이어 캐리, 자넷 잭슨 등이 즐겨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문객들은 산호초와 터키색의 맑은 바다로 둘러싸인 네커 아일랜드에서 고급스러운 숙박, 워터 스포츠, 최고 수준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이용요금은 인원수에 따라 달라진다.
◇ 프레지던트 윌슨 ‘로열 펜트하우스 스위트’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프레지던트 윌슨 호텔의 ‘로열 펜트하우스 스위트’는 하루 숙박비만 약 9000만 원에 달한다. 빌 클린턴, 빌 게이츠, 마이클 잭슨 등 국빈급 명사와 셀럽이라야 예약 가능하다고. 국가 원수나 슈퍼리치가 주 고객인 만큼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위한 서비스가 눈에 띈다. 전용 엘리베이터와 비상구, 금고는 물론 객실 창을 모두 방탄유리로 설치했고, 보안팀이 항시 대기한다. 초호화 객실에서 희귀 고서와 예술품을 비롯해, 큰 창으로 몽블랑 호수와 알프스 산맥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개인 요리사와 집사 등이 특별 서비스도 제공한다.
◇ 거슨 클리닉
1920년대 미국의 맥스 거슨 박사가 창안한 거슨 요법을 중심으로 심신 안정과 건강 개선에 필요한 식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다. 거슨의 웹사이트(gerson.org)에서는 멕시코 티후아나(Health Institute de Tijuana)와 헝가리 부다페스트(Gerson Health Center)의 시설을 소개하고 있다. 항암을 비롯해 각종 질환 개선을 위해 설립됐으며 유기농 식단을 기반으로 생식 주스, 자연 보조제, 커피 관장 등을 통해 몸의 기능을 돕는 곳이다. 거슨 요법을 선호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스티브 잡스가 있다. 두 곳 모두 입소하면 최소 2주 동안 머무르면서 거슨 요법에 기반을 둔 힐링 프로그램을 따라야 한다. 멕시코 시설 이용비는 2주에 1만2000달러(약 1390만 원), 헝가리는 8100유로(약 1043만 원) 선이다.
슈퍼리치가 찾는 맛집은?
55도 와인앤다인 와인의 풍미와 어울리는 요리를 제공하는 ‘55도 와인앤다인’은 주식부자 김범수 카카오 의장을 비롯해 젊은 최고경영자(CEO)들의 단골집이다. 이곳 메뉴인 디너 코스 어드밴티지의 가격은 7만5000원으로 샐러드, 수프, 게살크림파스타, 푸아그라파테, 생선요리, 한우등심스테이크, 커피가 나온다.
시로’s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는 미국 시애틀의 초밥집 ‘시로’s’를 즐겨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의 코스 메뉴인 시로’s 테이스팅 디너 가격은 65달러(약 7만6000원)로 수프, 애피타이저, 회, 초밥 등이 제공된다. 1130억 달러를 보유한 자산가의 식사 치곤 소박해 보인다.
루스티코 미국 전 뉴욕 시장이자,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마이클 블룸버그의 단골 식당으로 버뮤다에 있다. 이탈리아식 파스타와 피자가 유명하며, 샌드위치와 샐러드 햄버거 등은 점심시간 한정 메뉴로 판매한다. 지역 해산물로 만든 요리 또한 유명하다. 식사는 전화 예약으로만 가능하다.
레스토랑 오늘 ‘레스토랑 오늘’은 한식을 주제로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이다. SK그룹이 설립한 식문화 전문 사회공헌재단인 행복에프앤씨재단이 운영한다. SK그룹 총수는 물론 임원진, 인기 연예인 방문이 잦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임 콘셉트에 맞춘 메뉴로 연회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메뉴는 계절마다 바뀌는 코스 요리다.
스미스&월렌스키 20년 넘게 열리고 있는 ‘워런 버핏과의 점심 경매’, 지난해는 약 54억7000만 원으로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 귀한 식사 자리는 워런 버핏의 단골 식당으로도 알려진 뉴욕의 스테이크 맛집 ‘스미스&월렌스키’에서 주로 이뤄진다고 한다.
잡어와 묵은지 서울 서초구 소재의 이곳은 만화 ‘식객’ 광어 편에 등장한 맛집이다. 단연 허영만 화백을 비롯해 LG, GS 계열 기업 총수들이 찾는 식당으로도 유명하다. 태안 신진도에서 매일 공수한 생선으로 뜬 회를 2년 숙성한 묵은지에 싸먹는데 그게 아주 별미란다.
영롱한 광채를 뽐내는 ‘오팔’은 밝은 에너지를 가졌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하고 욕망을 풀어놓는 오팔의 의미를 보면 기운이 솟구친다. 기성세대보다 더 스스로를 가꾸고 자기계발과 취미활동에 적극적인 50~60대 시니어들과 닮았다. 그래서 이들을 ‘오팔세대’라 부르나보다.
사실 오팔세대의 오팔(OPAL)은 ‘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앞 글자를 딴 조어다. 동시에 베이비붐세대의 상징 ‘58년 개띠’의 오팔을 의미한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오팔세대는 이제 은퇴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소비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시장은 오팔세대인 50~60대 시니어 고객 모시기에 집중한다.
2026년에는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된다. 시니어 비중이 커지는 만큼 기업들은 그들을 위한 서비스와 문화행사를 강화하며 고객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은행들은 저금리시대에 예대마진이 줄어들자 시니어에게 적합한 상품을 개발하며 이들의 자산관리와 똑똑한 소비를 도와 수익창출을 도모한다. 자연스레 최우수고객(VIP) 대열에 합류한 시니어들은 그들만의 ‘특권’을 누리며 화려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
백화점: 할인 혜택과 문화행사 강화
50~60대 시니어가 백화점 업계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신세계백화점의 최근 3년 실적을 분석해보면 50~60대의 매출 비중은 30~40대보다 낮지만 고객단가는 가장 높다. 비싼 상품에도 지갑을 잘 여는 우수고객이란 의미다. 이들 중 연간 2000만 원 이상 소비하는 VIP 비중이 일반고객보다 8배가량 높아 백화점으로선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고객이다.
이렇다 보니 백화점이 시니어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도 풍성하다. VIP의 경우 등급별로 차등 적용된 할인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다.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 갤러리아백화점에선 각각 5~10%, 현대백화점은 5% 할인된 가격으로 쇼핑을 즐길 수 있다. 아카데미 할인 혜택도 주어진다. 갤러리아백화점은 문화센터 정규강좌 50% 할인, 신세계백화점은 학기별 강좌 1개 30% 할인~무료 수강, 롯데백화점은 1개 강좌 20% 할인~2개 강좌 50% 할인, 현대백화점은 5% 할인 혜택을 준다. 뿐만 아니라 기념일 축하선물과 항공권 할인, 발레파킹, 무료주차 등이 VIP 등급별로 차등 제공된다.
시니어를 위한 문화행사와 이벤트 초청 서비스도 눈길을 끈다. 신세계백화점은 2011년부터 예술의전당과 제휴를 맺고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VIP 전용 문화공연 ‘신세계 클래식 페스티벌’을 연다. 그동안 서울시립교향악단,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피아니스트 조성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 세계 유수의 클래식 대가가 이 무대에 올랐다. 현대백화점도 매년 VIP를 위한 문화강좌인 ‘더 스튜디오 클래스’를 열고 있다. 연 4000만 원 이상 구매한 ‘쟈스민 클럽’ 회원만 참여할 수 있다. 요리,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강사로 나온다. 정치·사회·문화 등 각 분야 명사가 직접 추천한 책, 공기정화식물, 난, 꽃 등을 정기 배송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은행: 알짜 금융상품과 은퇴설계 지원
은퇴했거나 은퇴를 준비하는 고객을 위한 금융상품도 시니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올해 1955년생이 65세로 고령자가 되고 1960년생 은퇴자도 대거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은행들이 시니어 특화 금융상품과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어 꼼꼼히 들여다볼 만하다.
KB국민은행은 KB골든라이프 ‘열두번의 행복’ 시리즈를 추천했다. 이 상품은 매월 찾아오는 월급날의 행복을 은퇴 후에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분할지급식 투자상품으로 ‘낮은 위험, 높은 수익’을 추구한다. 현재 펀드와 신탁상품이 있다. KEB하나은행은 ‘행복 노하우 연금예금’을 소개했다. 안정적인 노후자금을 확보하고 매달 수령하는 원리금을 생활자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돈이 많이 필요할 때는 많게, 그렇지 않을 때는 적게, 이자만 필요할 때는 이자만 수령할 수 있다.
노후설계에 대한 실질적인 어드바이스가 필요하면 각 은행의 시니어 혜택 플랫폼을 이용해보자. 신한은행은 ‘신한 미래설계’로 고객의 은퇴를 지원한다. 금융 서비스와 함께 비금융 서비스도 제공한다.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 은퇴설계전문가(ARPS) 등 금융 관련 전문자격을 보유한 645명의 미래설계 컨설턴트를 전국 영업점에 배치해 고객의 은퇴 이후 현금흐름을 분석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다. 미래설계센터에서는 부부은퇴교실, 미래설계캠프 등 다양한 은퇴교육 프로그램이 열린다. 우리은행은 서울 신촌점과 명동점에 ‘우리 시니어 플러스 센터’를 열고 공간 대여와 맞춤형 금융정보 공유강좌, 은퇴설계교육 등을 진행한다. 자산관리와 연금 관련 세미나도 열린다. 이와 함께 시니어 맞춤 온라인 금융과 비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니어고객 전용 ‘시니어 플러스 홈페이지’도 운영 중이다.
카드: 똑똑한 소비 돕는 풍성한 혜택
시니어를 위한 똑똑한 카드 상품도 챙겨보자. KB국민카드는 ‘KB골든대로 체크카드’를 추천했다. KB골든대로 체크카드는 50~60대 고객의 생애주기에 특화된 업종 이용 시 결제금액의 5%가 포인트로 적립되는 중장년층 맞춤형 상품이다. 이 카드는 전월 이용 실적이 30만 원 이상이면 △병원, 약국 등 건강 관련 업종 △대형마트, 주유소 등 생활밀착 업종 △골프, 사우나 등 여가 업종 △생명·손해보험 등 보험료 결제 시 월 최대 2만 점까지 포인트를 쌓을 수 있다.
신한카드의 시니어 계층을 위한 ‘신한미래설계카드’도 주목할 만하다. 이 카드의 주력 서비스는 의료비 할인 혜택이다. 병원·약국은 물론 동물병원에서 월 최대 1만 원까지 결제액의 5%를 할인해준다. 생활비 할인 혜택도 돋보인다. 4대 주유소에서 ℓ당 60원(월 최대 30만 원), 3대 대형마트에서 5%(월 최대 1만 원), 대중교통과 택시 이용 시 5%를 할인해준다.
VIP를 위한 프리미엄급 카드도 시니어의 현명한 소비를 돕는다. 롯데카드는 최근 프리미엄 라인업을 확장하며 ‘엘클래스 L60’을 선보였다. ‘프리미엄의 깊이를 경험하다’라는 콘셉트를 가진 엘클래스 L60은 공항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롯데호텔과 롯데면세점의 VIP 멤버십 혜택을 제공한다.
KB국민카드의 탠텀은 해외여행을 할 때 사용하기 좋다. 페닌슐라 등 해외 유명호텔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객실 등급도 올려준다. 공항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항공 마일리지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신한카드도 ‘더 베스트’, ‘더 클래식’ 시리즈를 내놓았다. 여행과 레저, 라이프스타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할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다른 프리미엄 카드보다 쉽게 바우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호텔·문화: 포인트 적립과 클래식 향연
호텔 회원으로 등록한 시니어라면 할인된 가격이나 포인트를 적립하며 객실을 이용할 수 있다. 신라호텔은 객실 이용금액의 1~3%, 식음료 이용금액의 최대 1%가 적립된다. 또한 객실 업그레이드 서비스(연간 최대 5회)와 무료 세탁 서비스도 회원등급별로 적용해 지원한다.
롯데호텔은 객실 이용금액에 따라 3~6%의 포인트를 적립해준다. 이 포인트는 롯데호텔앤리조트 객실, 식음업장을 비롯해 롯데면세점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세탁 서비스 10~20% 할인, 식음료 5~10% 할인, 객실 업그레이드, 1박 무료숙박권 등의 혜택도 회원등급별로 제공한다.
풍요로운 문화생활도 시니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예술의전당의 노블회원(70세 이상·무료가입)이라면 공연 40% 이상 할인, 무대리허설 관람, 음악감상강좌 30% 할인, 월간 ‘노블N’ 발송 등의 혜택이 따라온다. 유료회원일 경우에는 공연·전시 5~40% 할인(최대 5매), 선예매 서비스, 음악회 초청, 아카데미 수강료 5% 할인, 제휴매장 및 우대 서비스 등이 제공된다.
세종문화회관의 회원은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과 무대 위의 몸짓, 오래된 명화의 감동을 저렴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다. 연회비는 5만~10만 원으로 공연당 4~6매를 최대 50%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세종예술아카데미 할인과 공연 프로그램북 등을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다만 현재는 유료회원가입이 제한된 상태. 향후 개선된 서비스를 다시 제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