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포츠 데뷔 10주년 기념 콘서트 공연을 보기 위해 다른 스케줄을 다 포기했다. 하필 그날 스케줄이 5개가 겹쳤다. 오랜만에 미국 바이어였던 친구가 온다 하여 선약을 잡았었다. 또 다른 친구들이 모처럼 용문으로 이사 간 친구 집에 가자며 전날부터 1박2일 코스로 날짜를 잡았다. 동네 수필가 모임에서는 북 페스티벌을 한다며 꼭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호회에서는 걷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길일인 모양이다. 이럴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일단 미국 친구와의 선약을 지키려고 했으나 폴 포츠 공연을 못 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우선 1박2일 용문 행을 결정했다. 미국 친구에게는 다음에 보자고 양해를 구했다. 용문으로 이사 간 친구 집에 가면 밤새 놀 텐데 그 다음날 또 미국친구와 만나 음주를 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았다. 걷기는 빠져도 양해할 것이고 북 페스티벌도 다음날 왔다갔다는 인사만 하면 될 일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친구와의 선약 때문에 이 공연 관람 기회를 포기했었다. 다른 클래식 공연에서 다른 성악가가 부른 “네순 도르마”를 들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나 아쉬워서 폴 포츠의 일정을 알아보니 며칠 후 공덕교회에서 내한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연락해봤다. 그러나 “벌써 매진되었습니다!”소리에 절망했었다. 다시 세종문화회관 공연에 면구스럽지만 표를 부탁했다. 남들도 모두 가고 싶어 하는 공연이라 표가 이미 매진되었을 것으로 짐작은 했지만 이상하게도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여석이 있었다.
폴 포츠의 공연을 꼭 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가 노래를 잘 부르기도 하지만, 감동적인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휴대폰 판매원이던 사람이 ‘브리튼즈 갓 탤런트’라는 TV프로그램에 나갔다가 우승하면서 인생 역전을 보여준 드라마 같은 사연이 그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인생 드라마인 것이다. 제대로 된 음악 공부를 하지도 않은 그가 꿈을 펼치며 세계적인 명사로 인생이 바뀐 것은 칭찬하고 격려해줘도 마땅한 일이다.
폴 포츠는 이번 공연 말고도 한국에 여러 번 왔다 갔다고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이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폴 포츠가 얘기했듯이 한국은 ‘친정’ 같다가 이젠 아예 ‘집’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의 ‘정’에 빠진 것이다.
폴 포츠의 실력은 사실 프로 성악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며칠 전 한국 성악가가 부른 ‘네순 도르마’와 또 달랐다. 그러나 보이스 칼라가 약간 다른 풍부한 성량, 어쩔 줄 몰라 하는 겸손하고 서민적인 풍모, 다리를 벌리고 배를 내밀며 노래를 부르는 그 매력은 그가 가진 매력이다.
폴 포츠는 원래 어눌하고 외모 또한 치아 교정 전의 사진을 보면, 왕따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악성 종양을 앓았고 자전가 타다가 쇄골 골절 까지 겪고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말라는 판정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인생이 지독하게도 꼬였던 사람이다. 이제 당당한 세계적인 성악가로 무대에서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는 인생으로 바뀌었다. 이날 필자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 댔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학 소설가께서 故김용덕 교수님께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더러 예전 초등학교 시절의 방학숙제를 떠올리듯 가끔 교수님을 생각하긴 했지만 ‘인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잘 계시겠지요? 이런 치렛말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그곳’, ‘계시다’ 등등의 언어들과도 전혀 무관하실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제 인사는 단지 저 혼자의 회억이고,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전해, 한국일보사가 우리나라 사상 초유인 1000만원의 원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일이 있었지요. 대상은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73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저는 그 몇 년 사이 작품 발표의 지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낙백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광고를 보곤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다시 공개 경쟁에 나서보자. 무명 신인작가의 설움을 씻을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한 조그만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동료 직원들의 양해를 얻어 반년 넘게 소설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신촌의 와우아파트라고 아시죠? 어느 날 한 동(棟)이 와르르 무너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파트. 제가 그 아파트의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딸애가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면 발로 아이를 밀어내면서 원고 칸을 메워나갔지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신문 한 면 가득히 심사평, 당선소감, 인터뷰 등 저에 관한 기사가 실린 다음 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작품을 들고 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학지 편집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작품을 달라지 않나, 미리 장편 출판을 계약하자면서 출판사 사장들이 번갈아 찾아오질 않나(교수님 생전에는 문자메시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요즘은 이런 문장 뒤에는 꼭 ‘ㅎㅎ’ 혹은 ‘ㅋㅋ’ 같은 이상한 부호를 붙인답니다. 옛사람들이 쓰던 ‘가가(呵呵)’와 흡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덕에 화곡동에 마흔두 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으며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고 출판사도 때려치웠습니다.
매일 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 해,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좋은 역사소설거리가 있어서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존함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옆에 있던 ‘종로다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말씀도 적으셨지요. 뒤늦게 셈해보건대, 그때 교수님은 쉰을 갓 넘긴 연세였고 저는 겨우 서른에 올라선 철부지였습니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때 주신 말씀의 대강은, 여러 해 동안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연구를 해봤는데 연구를 할수록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는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할 수가 없다, 누군가 역사에 관심 있는 작가가 이를 소설로 형상화해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관련 저술이 든 노란 봉투를 제게 넘겨주셨지요. ‘역사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작가는 위대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저를 부추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선선히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 또한 이전부터 이 사건에 소설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89년 전주에서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고 이로써 수백 명이 희생을 당한 옥사의 실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송익필 등의 음모론을 실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현대 역사가가 바로 교수님임은 누구도 부인치 못합니다.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조식 같은 선학(先學)은 물론 정철, 유성룡, 이발, 김성일, 이산해, 김장생, 조헌, 허엽, 허봉, 김우옹, 성혼 등 조선 중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죄 이 사건에 관련돼 있었기에 이를 소설화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소설의 한 정점을 긋는 일이며 그 작업은 지난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는 당시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교수님께 약속을 드리고서도 저는 쉬 작업에 들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딴짓거리를 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중에도 그 약속은 무슨 채무인 양 제 심중에 남아 무게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10년이 더 지나서였습니다. 홀연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저는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에 한동안 몸을 떨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쯤이었던가요? 교수님은 또 한 번 제게 서신을 주셨지요. 대전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 지내느냐? 그런 안부의 글이었지만 저는 마치 질책하시는 것만 같아 답장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15년 전쯤 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여겨 방학을 맞아 안동 지례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산골 한옥 뒷방에 들앉아 한 주일 꼬박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500여 장을 만들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한 달 후, 읽어보곤 주저 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2005년 교환교수로 중국 남경에 가 있는 동안은 전초작업이라 여기며 화담 서경덕에 관한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교수님, 종로다방에서 만났던 그 새파란 작가가 어느새 교수님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학 교단에 있다가 재작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그러곤 소설을 쓰겠다고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임시 거처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첫해를 어영부영 보낸 뒤, 올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주말 1300장을 넘겼습니다. 2500장은 돼야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주재하는 동안은 퇴계, 율곡 같은 이도 사료를 근거로 제 의도껏 주물러볼 요량입니다. 제가 이미 율곡 죽은 나이보다 17년을 더 살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1584년에서 1589년, 이 과거 5년의 시간에 몰입돼 있는 요즘의 나날이 제겐 경이입니다. 제 거처에서 5분만 걸어 나가면 김장생이 걸었던 길을 만나고, 차로 10분만 나가면 정여립이 머물렀던 절간 마당에 섭니다. 아, 그래서 누군가가 저로 하여금 이맘때 이곳에 있게 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많습니다. 명랑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새소리도 제겐 16세기 말의 것이 됩니다.
성패는 뒷전으로 돌리겠습니다. 내년 봄날, 상하 두 권짜리 소설책을 존경하는 김용덕 교수님 묘소에 놓을 수 있다면, 종로다방에서 드렸던 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여기겠습니다.
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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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저서로 창작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등.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가 흐른다. 목소리의 음파는 잔잔하고 웃음소리는 까르르 하늘로 밝고 높게 퍼진다. 유연하고 정직하고 때로는 강인한 느낌. 심상을 모아보니 여성이라는 글자에 다다른다. 신학자이며 여성학자인 현경 교수가 매년 개최하고 있는 ‘살림이스트 워크숍(주최 문화세상 이프토피아)’에 가면 누구든지 빛나는 눈빛과 밝은 에너지를 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낯선 이름의 행사가 올해로 벌써 13회째란다. 도대체 어떤 기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매년 꾸준하게 열리고 또 이렇게 뜨거운지 살림이스트 워크숍에 찾아가봤다.
뉴욕 유니온신학교(UTS)의 종신 교수이자 종교학자·환경운동가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현경. 여름방학이 되면 매년 한국으로 돌아와 뭔가 큰일을 꾸미느라 바쁘다. 그게 바로 살림이스트 워크숍이다. 올해는 7월 7일에서 9일까지 3일간 서울시 종로구 (재)여해와 함께 평창동 대화의집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살림이스트 워크숍은 국내외 명사를 초청해 명상하고 심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져 왔다. 이 행사의 중심은 여성이다. 여성의 온전함과 영성, 치유를 얻고 발전시키는 시간으로 해마다 꾸며지고 있다. 제주여성 평화기행, 여신 기행 등 이색적인 콘텐츠로 여성들과 함께 걸어온 ‘살림이스트 워크숍’이다.
지구 여성의 이야기, 영화가 되다
올해 ‘살림이스트1 워크숍’은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도전적인 워크숍이었다. 영화제로 살림이스트 워크숍을 진행한 것. 외국 작품 5편과 한국 작품 1편을 선정해 상영했다. 외국 작품의 경우, 미국 뉴욕에서 2014년부터 매년 진행돼 큰 호응을 얻고 있는 패러다임 전환 음악영화제2의 올해 출품작 중에서 골랐다. 영화는 세계여성의 지혜, 원주민의 영성, 지구를 살리는 생태적인 힘, 사회 정의를 기준으로 삼았다. 올해 첫선을 보인 영화제 형식의 살림이스트 워크숍은 쭉 고민해볼 계획이다. 3일이 아니더라도 2일 정도를 할 수 있게 추진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현경 교수는 말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세계 여성을 비추다
첫째 날은 원주민의 전통 속에서 배워야 할 가치, 둘째 날은 여성의 지혜와 지구 생태 정의,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세계 원주민의 영성과 한국의 샤머니즘이 주제였다. 첫날 오프닝 영화로 선정된 (감독 클라우스 쉥크)은 히말라야 산맥 고지대에서 사는 2명의 티베트 여성이 문명사회인 런던을 여행하며 겪는 이야기다. 여행 내내 보이는 이들의 통찰력 있는 행동이 ‘살림’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 날은 몽고 초원을 배경으로 독수리 사냥꾼을 꿈꾸는 소녀와 동물의 소통을 다룬 (감독 오또 벨)와 전통공예로 빈곤을 극복한 키르기스스탄 여성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감독 안드레아 오데진스카), 수천 명의 케냐 여성을 모아 나무를 심으며 환경·인권 보호 및 민주주의 운동을 펼친 왕가리 마타이(노벨평화상 수상·2004)의 일대기를 보여준 영화 (감독 리사 머튼·알란 데이터)을 상영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감독 안드레아 오데진스카의 영화 과 박찬영 감독의 영화 이 마지막 날을 장식했다. 은 영화감독인 안드레아 오데진스카가 여성으로서 겪은 일들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영화 은 국민 만신 김금화 일대기를 옛 영상과 배우의 재연을 섞어 만든 다큐멘터리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주인공 김금화 만신이 초대돼 참석자들과 교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로 신을 모신 지 70년이 됐다는 김금화 만신은 참가자를 향한 고마움과 함께 가정의 평안과 소원성취를 기원했다.
1. 살림이스트는 현경 교수가 만들어낸 용어다. ‘모든 것을 살려내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자연의 해방과 온전성을 회복하는 것이 여성의 원천성을 찾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내 안의 신성,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것이다. 살림이스트는 한국의 에코페미니스트라고 현경 교수는 규정한다.
2. 패러다임 전환 음악영화제(PARADIGM SHIFTS, MUSIC & FILM FESTIVAL).
이 영화제는 지구, 바다, 야생 동물 및 성지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전 세계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제다. 올해도 뉴욕에서 지난 6월 13일에서 17일까지 개최됐으며 내년에는 아시아를 주제로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고도원(高道源·64)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은 2001년 8월부터 시작한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통해 360만 명이 넘는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배달하고 있다. “좋은 글귀 하나가 하루를 행복하게 한다”는 그는 인생의 고독을 마주한 이들을 위한 글귀를 모아 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고갈된 마음의 우물을 채우고 창조의 샘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값진 시간이라는 그의 깨달음을 나누고자 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절대고독’이라는 화두는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담당 비서관으로 지내며 대통령의 고독을 바라보고, 자신의 고독과 마주했던 고도원 이사장이다.
“청와대에 있으면서 대통령의 고독한 시간을 견문하게 됐어요.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고, 책임져줄 수 없는 외로운 시간.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비단 한 국가의 지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 저는 그것을 꿈이라고 표현하는데, 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많은 이들 앞에 서야 하는 사람에게는 고독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그걸 우리 일상에 비춰보면 자식 앞에 서 있는 부모,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 등 누구에게나 절대고독은 찾아오거든요. 그걸 어떻게 견뎌내고 일어설 것인가에 대해 명상을 하며 깊이 고민했죠. 그때의 생각을 나누고,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잠깐 멈춤, 쉬어가는 용기도 필요하다
단지 ‘고독’이 아닌 ‘절대고독’이라는 제목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절대긍정, 절대사랑처럼 강조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데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개인이 겪는 고독은 당사자에겐 절대적 상황이죠. 때론 그 순간이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하고, 삶의 분기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요. 다른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독, 그런 점에서 누구나 절대고독의 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고 이사장에게 절대고독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는 작은 개울에서부터 깊고 넓은 강까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고독의 강을 건넜노라고 털어놨다.
“시골 목사의 아들로서 겪어야 했던 궁핍한 생활이 저에게 고독을 안겨줬어요. 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는데 나만 덩그러니 떨어져 굶어야 했고.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반복되니까 상실감이 컸어요. 대학 때는 긴급조치 9호로 제적당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청년기에는 이력서를 받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 절망감 등으로 범벅돼 있었죠. 기자생활을 할 때, 대통령 연설문을 쓸 때도 고독했어요. 글은 누가 대신 써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등바등 스스로 해결해야 했죠. 그런 절대고독의 강을 건너면서 두렵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내면이 더 단단해질 수 있었어요.”
고 이사장은 예방주사를 맞듯 고독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래야 불시에 강물이 밀려오더라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물의 깊이를 알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슬기롭게 고독의 순간을 넘기는 힘이 생긴다고.
“수많은 절대고독의 강을 경험하면 직관과 통찰력이 생깁니다. 강물의 깊이를 어림잡을 수 있게 되죠. 그러면 그 깊이에 맞춰 대비할 수 있어요. 때론 일부러라도 스스로 고독한 시간을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걸 ‘잠깐 멈춤’이라고 표현해요. 잠깐 멈춰서 내 안의 고요함, 평화 등을 찾는 거죠. 그렇게 고독의 면역력을 키워야 느닷없이 황량한 고독을 만났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에너지로 삼을 수 있어요.”
‘멈춤’이라고 하면 일상을 내려놓는 행위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멈춤은 더 나아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것이다.
“자동차로 치면 기름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 가는 거예요. 일을 아주 놓는 게 아니란 말이죠. 더 일하고, 더 달리기 위해서 잠시 쉬어가는 겁니다. 쉬는 것도 대단한 용기예요. 다들 마치 멈추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놓아버리면 다 잃어버릴 것만 같고. 그러나 쉬지 않고 계속 가다가 깜빡 졸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죠. 브레이크를 밟는 용기를 내서 잠깐 멈춰 쉬어가야 오히려 안전하고 슬기롭게 고비를 넘어 나아갈 수 있어요.”
내 얼굴 풍경이 주변 풍경을 만든다
잠시 멈춰 쉬어가는 방법으로 그는 ‘명상’을 적극 추천한다. 그는 그가 머무르고 있는 ‘깊은산속 옹달샘(아침편지문화재단)’을 찾아와 명상하는 이들에게 “미소를 지어라. 그리고 그 미소를 삼켜라”라고 제안한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동안 살아온 대로 다 얼굴에 나타나거든요. 나이 들수록 자기 표정을 인위적으로라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미소 짓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내 안의 미소로 바꾸는 것, 외면의 미소를 목구멍으로 탁 넘기고 그것을 꿀꺽 삼켜서 가슴과 배를 채워 얼굴의 표정과 내면의 표정이 일치하도록 해야 해요. 그래야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죠. 미소를 짓고 나무를 보세요. 나무 이파리들도 미소 짓습니다. 웃는 표정으로 구름을 보세요. 구름이 웃는 입꼬리 같기도 하고, 웃는 눈썹처럼 보이기도 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남에게 미소로 다가가면 그 사람도 나에게 미소로 다가와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황량하다면 그럴수록 좋은 표정을 지어야 내 삶의 조건들도 개선될 수 있습니다.”
고 이사장도 젊은 시절엔 표정이 어두워 무섭고 날카롭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미소를 머금으려 노력하다 보니 요즘은 “표정이 참 좋다”라는 칭찬을 자주 듣는다. 기분 좋은 표정과 더불어 그가 항상 다스리고 신경 쓰는 것은 ‘아우라’다.
“흔히들 포스, 카리스마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 사람이 주는 느낌이 있어요. 주파수라고도 하죠.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도 어떤 이는 기분이 좋은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괜히 불쾌할 때가 있어요. 이런 아우라도 표정과 같은 차원인데, 결국 자기가 만들어내는 겁니다. 고독의 강을 건너면서 얼마만큼 내면의 근육을 다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주파수가 다르게 생성되죠. 객관식처럼 딱 나오는 답은 아니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운 같은 거예요. 저 사람에게 신뢰가 가,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이런 느낌을 주는 게 좋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얼굴뿐만 아니라 자기가 내뿜는 기운, 그런 아우라도 책임질 줄 알아야 해요.”
스스로 터닝하지 않으면 거꾸로 터닝당한다
그는 내면과 외면을 가꾸기 위한 노력은 인생 후반전 중요한 터닝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터닝포인트의 원래 의미는 전환점이지만, 중년 이후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젊은 시절 터닝포인트는 인생을 180도 전환할 수도 있지만, 나이든 사람에게 그런 변화는 위험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단 1도씩 변화하더라도 그것을 멈추면 안 돼요. 휴대폰을 출시하면 생명력이 6개월 정도밖에 안 간다고 하잖아요. 그럼 이 휴대폰을 만든 사람은 6개월 후에 조금이라도 덧붙일 무언가를 미리 연구해두지 않으면 시장에서 밀리게 되겠죠. 앞서 이야기한 1도, 그걸 바로 덧붙이는 무언가로 보면 됩니다. 지식도, 인격도 계속 새로워지지 않으면 밀리게 돼 있어요. 고정관념과 편견에 갇혀 지내면 언젠가는 추락하고 슬럼프에 빠지겠죠. 작더라도 그런 터닝포인트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강제로 터닝당하고 말아요.”
변화는 더디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 속에서 그는 ‘만년 청춘’을 만끽하고 있었다. 육체적 한계는 있지만, 파릇파릇한 꿈을 꾸고 있기에 정신적 한계는 없다고 말한다.
“육체적으로 힘이 소진되니 빨리 지치잖아요. 근데 뇌는 젊었을 때보다 더 팔팔해요. 20~30대 때 못 보던 것들이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계속 새로운 꿈이 생겨나서 밤새 꿈을 꾸다 보면 몸은 피곤한데 가슴은 마구 뛰죠. 최근 김형석 교수가 강연에서 100세를 살아보니 65~75세가 인생의 전성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보면 내가 지금 전성기, 최고의 청춘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죠.”
새해가 밝으면 저마다 새로운 계획과 소망으로 기분이 들뜨곤 하지만, 고은(高銀·84) 시인은 인생에 해가 더해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가 살아온 80여 년의 세월 동안 먼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넋들과 앞으로 생을 이어가며 맞이하게 될 죽음들에 대한 가책과 슬픔이 늘 그의 세상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엇갈림 속에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방법으로 그는 오늘도 시를 쓴다. 시로써 삶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는 그는 역시 시로써 자신의 뜻을 나누고자 한다. 고 시인은 시집 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
에 실린 시 ‘초혼’은 원고지 130장에 이르는 장시(長詩)다. 김소월의 ‘초혼(招魂)’과 제목도 같고 먼저 떠난 영혼들을 기린다는 점에서 의미도 함께한다. 고 시인이 직접 낭독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깊은 애도의 뜻이 담긴 진혼곡 같은 시다. 그런 그의 시와는 달리 죽음을 경계하고 자신의 삶, 꿈, 자아에만 열중하는 이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고 시인이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게 대체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건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계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존재하게 한 내 부모, 또 내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를 헤아려보면 끝없이 뻗어 있잖아요. 내 밑으로는 또 어떻습니까? 내 자녀, 손주, 손주의 자녀 등 그 또한 한없이 뻗어 나가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결코 분리된 나 하나가 아니에요. 그물망처럼 촘촘히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죠. 이 광대한 세상에서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티끌로만 보이겠지만, 이 티끌이야말로 모든 우주를 담고 있어요. 나 자신은 곧 우주의 크기와 같죠. 그 안에서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합니다.”
혼자가 아닌 삶, 공적인 삶에 대한 의무
그는 나와 연결된 세상과 사람들을 인식했을 때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신중해진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개인의 노력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6·25, 4·19,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참사 등 역사에 남을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죽음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이 우리 세상에서 일어납니까? 그런 의식 없이 나 혼자만 잘살겠다는 건 후안무치한 태도죠. 나는 정말 나 혼자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내 속엔 수많은 기생충이 살고 있죠.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누가 만드나요? 여러 사람의 기술과 손길이 닿아 있죠. 내가 쓴 모자, 안경, 마시는 커피까지 무엇 하나 나 혼자 이뤄낸 게 없어요. 그런데 어찌 내 존재만을 과시할 수 있겠어요. 나는 언제나 타자와 함께, 그들의 희생 속에 존재하는 거죠.”
고 시인은 이러한 인식이 자신을 미미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닌 삶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준다고 조언했다.
“늘 떠난 자들의 넋을 어깨에 지고 애도하는 것이 산 자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얼핏 이타적인 삶이라 느낄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이로운 점이 많아요. 혼자라고만 생각하면 그런 죽음 앞에 나는 참 비겁하고 가난한 존재잖아요.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존재라고 느끼면 절대 공허하지 않죠.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자책할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해요. 그러면 삶의 책임감이 강해지고, 비로소 죽은 자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죠. 이때 누군가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가책이 생기기도 해요. 참 미안한 일이잖아요. 그럴 땐 그들의 못다 한 삶을 내가 대신 살아야 한다는 공적인 자아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더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어요.”
‘슬픈 열대’ 100세여, 좀 염치코치 없으셔
에 실린 시 ‘작은 노래 9’를 보면 ‘이 세상은/ 오래/ 오래/ 있어야 할 곳 아니셔/ (중략) ‘슬픈 열대’ 100세여/ 좀 염치코치 없으셔’라는 내용이 나온다. 죽음을 멀리하고 삶에 연연해하는 이들을 항해 고 시인은 ‘염치코치 없다’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나에게도 사람들이 100세 되면 기념 시집을 꼭 내라고 이야기하는데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뿐이지, 그렇게 바라보면서 가지는 않으려 해요. 이 세상의 시간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것이기도 하잖아요. 다 가지려고 하는 건 탐욕이죠. 나이 들수록 생애 집착하기보다는 더 의연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부여잡으려 하니….”
삶과 죽음에 대한 고 시인의 허심탄회한 감정은 ‘삼거리’라는 시에서 ‘나 또한 오지 않는 임종 같은 지긋지긋한 나이거니’라는 시구로 드러난다. 고 시인은 “죽음? 올 테면 오라!”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한 가지 염려스러운 부분은 있다고 고백한다.
“죽음이라는 건 나 역시 겪어보지 않았는데, 두려움이 왜 없겠소. 그러나 이런들 저런들 찾아오고야 마는 죽음이라면 즐겁게 받아들이자는 거지. 술자리 1차에서 2차를 가듯 신나게 생각하려 해요. 다만 지상에서의 사랑은 늘 아픔을 전제하는 법, 내가 죽고 나면 아내나 딸이 슬퍼할 것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결국엔 누군가 먼저 죽는데, 그때 살아남은 이가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먼저 간 이도 더 사랑하지 못하고 떠나니 원통할 테고.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사랑인데, 어찌 보면 모순이지요. 나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이들만 아니라면 나는 내일이든 모레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요.”
시인생활 59년, 시집 여럿
근래 나온 그의 시집을 보며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 맨 앞장 시인의 소개란에 적힌 글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화려한 경력이 빽빽했는데 이제는 단 열 자 남짓한 글귀만이 그의 시인 인생을 축약하고 있다. 지난해 나온 에도 그의 이름 두 자와 ‘시인생활 58년, 시집 여럿’이라는 문장 외에는 어떠한 수식어도 찾아볼 수 없다. 흰 종이 위 단출한 이력을 에워싼 여백은 빈 것이 아닌, 그의 겸손과 내공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뭘 쓰게 만들어요. 화려한 경력, 베스트셀러 그런 걸 자꾸 드러내고 채우려고 하는데 난 그게 싫더라고요. 시를 정말 많이 썼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시들을 다시 들춰보고 새기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우물에 물이 고여 있다고 그 물이 옛날의 그 물은 아니잖아요. 매일 새로 솟아나지. 내 시도 마찬가지예요. 늘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지난 것들에 매여 있을 틈이 없죠.”
하루하루를 새롭게 느끼고, 만물을 신비로이 여기는 그는 이 세상엔 아직 시로 쓰인 것보다 써야 할 것들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아직도 노래할 것을 노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고 시인의 창작에 대한 갈증과 애착은 그의 시집 의 서문에서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평소 시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존재 이유라 말하던 고 시인다웠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시를 짓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요. 시는 내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지요. 이 세상에 시로 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내 생애 안에서 그 나이마다 느끼고 발견하는 것들이 있으니 우물물 솟듯 계속 생겨날 수밖에. 죽음도 시라고 생각해요. 의식이 있다가 없는 세계로 탁! 가잖아요. 시처럼 놀랍죠.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 벼랑 끝에 부딪히는 파도, 이 세상이 다 시 아닐까요?”
나를 가장 정직하게 표현하는 한 권의 세계
1988년 시집 을 펴내며 그는 “6월 투쟁의 대열에 우선 발 벗고 나서야 했다. 최루탄은 눈물 없어진 나를 눈물단지로 바꾸어주었다”며 “이 시대의 당위가 나를 서재의 집념에 머물러 있게 하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전 30권 예정인 도 매듭지었고, 원로시인으로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 그이기에 이제는 서재에서 오롯이 시를 위해 전념하는 시간이 늘지 않았을지 궁금했다. 그의 첫마디에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거(기자와의 인터뷰) 말이오. 이런 거 하느라고 시 쓸 시간을 빼앗기지. 또 다른 나라에까지 내 시가 알려지다 보니 해외 출장도 많아졌고. 그렇게 나가면 그냥 나가는 게 아니라 기조연설 쓰고, 그걸 또 외국어로 번역하고, 시도 낭송해야 하고. 가기 전이랑 다녀와서 이틀에서 사흘을 쉬어야 하니 이래저래 서재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지요. 그런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요즘은 ‘초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긴 시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고 했다. 조금 전 그의 고충을 들었던 터라 서둘러 그를 서재로 보내드려야 할 것만 같아 냉큼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에 빠지지 않는 명사의 추천 도서 목록 요청이었다. 형식을 파해야 했지만, 짧지만 분명하고 확신에 찬 그의 조언을 그대로 담기로 했다.
“나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아주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 있어요. 누구든 백범 김구 선생의 를 꼭 읽었으면 합니다. 더 추천할 것도 없어요. 우선 그것부터 읽어보라 하시오. 그러고 나면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스스로 알게 될 테니!”
문학, 예술, 철학을 넘나들며 심미주의적 삶의 기술을 탐구해온 문광훈(文光勳·52) 충북대학교 교수. 지난해 을 통해 삶의 심미성과 인문학적 사유를 펼쳤던 그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책임 있는 말과 생각, 느낌 등을 통해 오늘의 삶을 쇄신하는 것이 인문학의 최종 수렴점이라는 것. 문 교수는 이를 위한 인문서로 를 추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는 김우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와 그의 제자인 문광훈 교수의 대담이 실린 책이다. 2008년 한길사에서 펴낸 이후 올해 (총 19권, 민음사) 중 한 권으로 다시 나오게 됐다. 7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일상의 삶과 학문의 삶, 감각과 사유의 의미, 예술과 현실의 관계, 정의와 너그러움 등 다양한 주제가 두 사람의 대담으로 이뤄져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문 교수는 우리 시대 대표 지성으로 알려진 김우창 교수의 지적인 넓이와 깊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권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에겐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이름을 올린 책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대학생 시절에 선생님을 보면 도망 다니곤 했어요. 경외심이라고 하죠.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거든요. 아직 선생님과 이야기할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선생님 책을 열심히 읽으며 흠모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는데 저에겐 학위를 따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김우창론’을 쓰는 거였죠. 돌아오자마자 집필 작업에 몰두해 (2001)를 펴냈어요. 그 뒤로도 몇 권 더 냈는데, 내세우면서 직접 보여드리진 못했죠.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대담 파트너로 저를 꼽으셨다는 거예요. 너무나 큰 영광이었죠.”
대담은 약 5개월 동안 11차례에 걸쳐 김 교수의 집에서 이뤄졌다. 평균 4시간 정도 질의응답이 오갔는데, 문 교수가 준비한 질문만 A4 용지로 50여 장에 달했다고 한다. 평소 김 교수의 책을 섭렵했던 그이지만, 대담 주제를 선정하고 질의서를 꾸리는 데만 두어 달이 걸렸다. 그만큼 인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묵직하게 실려 있다. 이 모든 것을 함축하는 책의 제목인 는 ‘마음, 이데아, 지각’이라는 부제를 갖는다. 세 개의 동그라미가 뜻하는 바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요소의 관계와 그 의미는 무엇일까?
“선생님께서 지으신 제목입니다.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을 지각이라고 하죠. 우리는 이것을 마음으로 느낄 거고요. 이 느낌은 우리가 경험하는 가시적인 것에 머물러 있지만 늘 그 이상을 꿈꾸잖아요. 그게 바로 이데아겠죠. 가장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것 속에 초월적인 것이 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보고 느끼는 것 속에 보고 느끼는 것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거죠. 인간이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갈망하고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 아닐까요? 꿈꾼다고 할 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지금 여기 감각과 경험의 세계죠. 이데아의 세계와 지각의 세계가 교차하는 것, 그 속에 삶의 신비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의 삶을 갱신하는 기쁨, 매일 새롭게 느끼기
문 교수는 이 책을 읽는 데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고 조언했다. 목차를 보며 마음에 닿는 부분부터 천천히 읽어가라는 것. 책을 읽는 데 조금이라도 의무감이 든다면 그때는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 인문학을 읽으며 삶을 곱씹고 사유를 넓혀가는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은 ‘휴식’이라고 강조했다.
“신사(愼思)해야 해요. 젠틀맨 말고요.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거죠.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해 생각하잖아요. 몽테뉴는 철학이란 죽음을 연습하는 거라 했어요.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생각한다는 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 고민을 깊고 넓게 하려면 일단 휴식해야 해요. 휴식이란 여행가고 놀고먹고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내려놓고 정지하라는 거예요. 하던 일을 계속하면 내가 왜 이것을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내가 지금까지 행해왔던 것들이 나에게 오거든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반성하고 성찰하게 되죠.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려면 잠시 정지하고, 가만히 나를 돌아봐야 해요.”
나를 돌아보는 데도 자신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가지 더 염두에 둘 것은 인간은 어리석고 맹목적인 존재이기에 쉽게 변하리라는 것은 헛된 희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 얽매여 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변하기 어렵습니다. 대개는 부질없음과 부질없음 사이에 끼어 있으리라는 것, 많은 것이 허황하게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뼈아픈 인정이죠. 그런 현실에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것, 신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단 1mm라도 고쳐나갈 수 있다는 것. 상당히 염세적이고 비관적이죠. 하지만 그게 오히려 솔직한 태도 아닐까요? 쉽게 행복해지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기만이죠. 부정적인 모습일지라도 나만큼은 속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해요. 어렵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우리는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그는 인간은 변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 인생의 기쁨이 숨어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살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요,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새롭게 느끼면서 얻는 거예요. 새롭고 신중하게 사유하면서 나의 감각이나 사고, 라이프스타일을 되돌아볼 가능성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만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의 기준과 형식을 스스로 조직해가는 과정을 경험하는 거죠. 그게 바로 자기 쇄신의 기쁨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기준이 높아지고, 삶의 원칙이 생기면 유행이나 세평에 민감해지지 않게 되죠. 그렇게 되면 내 삶이 결코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나이 들어 인생이 공허하다는 것은 남들이 좇아온 가치에 매진해왔다는 겁니다. 어제보다는 조금 다르게 새롭게 느끼다 보면 우리의 인생은 조금씩 나아지고, 허황한 죽음을 맞을 가능성도 줄어들게 되겠죠.”
개성 있는 주체가 만드는 이상적인 사회
자신만의 삶의 원칙이 있다는 것은 곧 남과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 아닐까? 문 교수는 자신만의 세계와 개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요즘은 SNS에 이런저런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자기과시용 얕은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개성의 하나이지만 오래가는 개성은 아니죠. 개성이 강하다는 건 남에게 과시할 목록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나 감각을 풍성하게 만드는 목록이 많다는 거예요. 빌린 언어나 관념을 자기 것처럼 쓰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책임 있는 말과 생각으로 서투르더라도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그게 참 개성이죠. 그런 책임 있는 주체가 많을수록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타인에게 정의를 내세우면서 옥죄는 것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한다면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느리지만 좋은 의미에서 전염되겠죠. 저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정말 혼잡하여 마치 전투를 치르는 기분으로 타고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출입문 위에 걸려 있는 Seoul Metro의 표어가 필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말입니다.” 군대에서나 가끔 쓰이는 표현으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형식으로, 도대체 멀리 있다는 말인지,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인지 문장 자체로만 보아서는 얼른 분간되지 않는다. 필자가 우리말 실력이 부족하고 새로운 감각이 없어서 그런가? 하는 의아심이 생긴다. 공사의 공익광고가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는데, 며칠 후에 본 또 다른 표어도 비슷한 형태였다.
“먼저 내리고 나중에 타기, 안전을 위한 상식이지 말입니다.” 이 문장도 ‘상식입니다’ 하고 마치면 될 텐데 왜 굳이 ‘상식이지 말입니다.’라고 표현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근자에 와서 우리말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쟁점이 되는 국정교과서 개정 문제에서도 우리의 역사를 너무 소홀히 취급한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우리말과 역사를 제대로 사용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했으면 하는 마음과 요즈음 젊은이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신조어와 그 풀이를 나열해 본다:
< 많이 사용하는 신조어 >
가드 올려: ‘맞을 준비해라’또는 ‘아파도 참아라’의 의미. ‘이 앙다물어라’ 또는 ‘이 꽉 깨물어’ 등에 해당하는 형용사.
개~ : 정말 또는 완전이란 뜻이다. 예를 들면, 개 좋음, 개 꿀(정말 재밌다), 개 이득 등
검은 머리 외국인: 핏줄만 한국인, 외국 국적을 가진 한국 사람을 말한다.
개인 톡(갠 톡): ‘개인끼리 하는 게임판’을 뜻한다.
귀요미: 형용사 ‘귀엽다’라는 의미이다. 종종 명사로 ‘귀여운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귀차니즘: ‘귀찮다’라는 동사와 ~nism 이라는 접미사의 합성명사. 만사가 귀찮을 경우에 쓰이며, 귀차니즘에 빠진 사람을 귀차니스트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글설리: 글쓴이를 설레게하는 리플(답글), 설리로 줄여 쓰기도 한다.
김 여사: 운전을 잘못하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써 여성운전자가 도로에서 쩔쩔매거나 황당한 사고를 냈을 때 쓰는 호칭이다.
깨알 같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깨알 같은 재미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데서 유래하였으며, 규모는 작으나 그 영향과 반응은 훨씬 큰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뜻. 눈치가 없는 사람을 표현하는 멘트(발언).
ㄴ ㄴ: 영어 ‘NO'를 두 개 합친 ’NO, NO'(노노)의 초성으로 ‘아니다‘라는 뜻
노답: NO+답 즉, 답이 없는 답답한 사람이나 짜증 나는 문제 등을 지칭한다.
노잼: NO+재미, 재미가 없다는 의미.
눈팅: 눈으로 채팅의 줄임말. 다른 사람의 대화 글을 읽기만 하고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추천이나 리플 등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냥 가는 행위.
느금마: ‘너희 엄마’가 변형된 단어, 상대방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 (너의 엄마 →너거 엄마 →느그 엄마 → 느금마)
대인배: 소인배의 반대말로 그릇이 크고 아량이 넓으며 신중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은 사람을 의미
마초맨: 남자다운 남자를 뜻하거나, 대마초(마약)를 한 사람을 뜻하기도 함.
반품 남,반품 녀: 결혼했다가 이혼한 남자와 여자를 뜻함.
배사: 배경 사진
볍신: 병신이라는 단어를 순화시켜 쓰고 싶을 때 사용.
빡돌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는 것을 이르는 말.
빼박캔트: ‘빼도 박도 못한다’의 의미로 빼도 박도+CAN'T의 합성어.빼박으로 줄여서 쓰기도 함.
뿜다: ‘빵 터지다 ‘와 같이 웃음이 입 밖으로 크게 뿜어져 나오는 현상.
므흣하다: 흐뭇한 기분을 표현할 때 쓰이던 말이나, 점차 야한 사진을 볼 때의 기분을 표현.
이러한 신조어나 약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우리가 모두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좀 더 지혜를 모아야 되겠다는 마음이다.
장석주(張錫周·62) 시인의 트위터 자기 소개란에는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라고 쓰여 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두 단어라고 이야기한다. 장 시인의 하루는 매일 걷고, 읽고, 쓰고, 단순하지만 풍요로운 사색으로 채워진다. 산문집 은 그런 그의 일상에 온유한 자극을 준 책이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매일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신간을 살펴본다는 그는 1년에 주문하는 책만 1000권에 달하는 독서광이다.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으로 된 책을 검색하면 100여 권이 나올 정도로 집필 작업도 충실히 하고 있다. ‘문장노동자’라는 별명이 꼭 들어맞는다. 그런 그가 추천한 도서 에는 영미 작가들의 아름다운 산문 32편이 담겨 있다.
“최근 읽은 산문집인데 자연이나 인생에 대한 성찰이 잘 녹아 있어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의 글들인데, 훨씬 여유가 느껴지고 글맛이 깊더라고요. 이런 책이 두루 많이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에 추천하게 됐죠. 저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읽고 있어요.”
길어진 중년,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하다
여러 주제의 산문 중에서도 그는 알도 레오폴드의 ‘산처럼 생각하기’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나무의 죽음’ 등 자연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글이 인상 깊다고 했다. 평소 자연을 바라보는 풍부한 시선을 따뜻하고 지적인 언어로 표현해온 장 시인다웠다.
“인간의 평안과 안위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있잖아요. 그런 데서 오는 생태계 불균형이 결국 고스란히 우리에게 오게 될 텐데, 인간은 너무나 무관심하죠. 글에도 늑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제가 1960년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런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돼버렸잖아요. 책을 읽고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중년 이후 꽃, 나무 등 자연에 관심을 두는 이가 많다. 그는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며 “생존 경쟁에서 물러나 삶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소 느슨해지는 중년의 삶을 묘사한 ‘오버롤스 작업복’이라는 글이 나온다. 소작농들이 입는 작업복인 오버롤스 세 벌을 각각 초기 중년, 중년, 후기 중년 단계로 설명했는데, 장 시인은 비유가 아주 탁월하다며 감탄했다.
“예전에는 30대 후반만 돼도 중년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마흔이 훌쩍 넘어도 중년이라는 생각을 잘 안 해요.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인데, 그래서 중·장년기가 상대적으로 더 길어졌죠. 그런 중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눠 옷에 빗대 설명했는데 정말 참신하더라고요. 새 옷은 솔기도 살아있고 옷감도 견고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단추도 헐거워지고 천도 닳아서 얇아지죠. 처음에는 깨끗하지만 빳빳해서 불편했던 작업복이 삶의 흔적대로 때가 묻기도 하고 해지기도 하면서 내 몸에 점점 익숙하고 편안해져요. 그런 은유가 중년의 삶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인생도 세월이 더해질수록 오버롤스처럼 부드럽고 느슨해지니까요.”
저자 제임스 에이지는 후기 중년 오버롤스를 ‘여전히 제구실을 완전히 해내며 최고로 편안한 단계’라고 설명했다. 장 시인은 나이가 들며 누리는 편안함은 양면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삶이 여유로워졌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태롭고 의욕이 떨어지기도 하죠. 꿈이나 생의 약동에서 멀어지는데 그러다 보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버릴 수 있거든요. 그러면 삶의 질이나 자기존중감도 떨어지죠. 중년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가장 활동적으로 살아야 할 시기이거든요. 뭔가를 이뤄낼 수 있는 나이에 느슨해지고 희미해지면 안 되죠. 적당한 긴장감을 느끼고 삶을 탄력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길어진 중년의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책 읽기는 뇌의 유산소 운동
그는 삶의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즉 자기성찰을 하라는 말인데, 이를 실천하고 도울 방법으로 ‘책 읽기’와 ‘미니멀라이프’를 제시했다.
“책 읽기는 뇌의 유산소 운동과 같아요. 뇌에도 근육이 있는데, 책을 읽지 않으면 뇌의 유연성이 떨어지죠. 시집과 철학책은 뇌에 좋은 자극을 주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줘요. 인간에게는 세 가지 기억이 있어요. 절차기억, 학습기억, 신념기억. 절차기억은 아기가 엄마 젖을 빠는 것과 같은 선천적인 기억이고, 학습기억은 책 읽기나 경험을 통해 얻는 것, 신념기억은 정치나 종교적인 기억을 뜻해요. 그런데 책을 읽지 않으면 학습기억이 줄고 그 자리를 신념기억이 차지하거든요. 그러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융통성이 없어지죠.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책을 읽고 학습기억을 키워 균형을 맞춰야 해요. 그래야 다른 세대와 원활히 소통할 수 있습니다.”
책은 많이 읽는 것이 삶에 이롭지만, 그 외의 것들은 최대한 적게, 단순하게 하는 것이 현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는 그는 적게 소유할수록 크게 생각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쌓여 있으면 그 물건의 진가가 잘 안 보여요. 겉으로는 풍족해 보일지라도 그 하나하나의 가치는 희석돼버리고 말죠. 불필요한 요소들을 걷어내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겼을 때,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어요. 물건뿐만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욕심이나 사심을 비워냈을 때 본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죠.”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지만, 막상 물건이든 마음이든 비워내려고 하면 쉽지 않다. 수긍이 가는 말들이지만 결국은 실천이 문제다.
“버리는 삶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요.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안심하고, 움켜쥐려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옷장을 열면 옷이 가득한데도 입을 옷이 없다고 하죠. 몇 년째 입지 않은 옷들이 걸려 있으니까요. 그러면 버리거나 누구에게 주거나 해야 하는데, ‘언젠가는 입을 거야’라는 생각에 그대로 걸어두죠. 하지만 그 ‘언젠가’는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특히 나이 들어서 갖는 그런 욕망을 노욕이라고 하는데 남들이 볼 때 굉장히 추합니다. 불편하고 쉽지 않겠지만 실천적 결단이 필요하죠. 우리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어요.”
삶의 단순화에 대한 장 시인의 시각은 그의 산문집 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고 최소화하려 하지만, 독서와 산책만큼은 충분히 즐긴다. 글을 쓰는 게 그의 일이기에 육체보다는 정신적 노동에 과부하가 걸리곤 한다. 그럴 때 산책을 하면 어지럽혀져 있던 생각을 정리하고 비울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피로를 푸는 데는 효과만점이라고.
“걷다 보면 사유가 깊어지고 자기성찰에 몰입할 수 있어요. 잡념은 사라지고 내면의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죠. 물론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 무엇보다 걷는 동안 내가 살아 있다는 행복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일까? 순진무구하고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자 김경집(金京執·57)은 “지금 내 나이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그는 중년 이후의 삶은 ‘의무의 삶’을 지나 ‘권리의 삶’을 사는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 그런 생각을 담아낸 책이 바로 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책을 쓸 때 그는 40대 후반이었다. ‘나이듦’에 관해 이야기하기엔 덜 늙은(?) 게 아닌가 싶지만, 10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제목에 쓴 ‘나이듦’이란, ‘늙어감’이 아닌 ‘제 나이를 사는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 그가 이야기하는 ‘제 나이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려서는 어른처럼 성숙해 보이려 하고, 반대로 어른이 되면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 하죠. 그러니 정작 제 나이를 살아본 적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자기 나이를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죠. 그렇게 힘들일 것 없이 제 나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즐기며 사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늙는 것을 막을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면 자기 삶의 결대로 즐겨 보자는 거죠. 그런 마음으로 제 나이를 인식하고 누릴 방법을 찾다 보면 진정으로 내 나이가 좋아져요.”
그가 나이 들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자유로운 삶’이다. 의무감으로 바쁘게 살아왔던 지난날 못해 본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기쁨이 크다고 한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역시 나이가 들어 얻게 된 것이니, 지금의 나이가 고마울 수밖에.
5차선 곡선도로를 달리며 음미하는 풍경
그는 40대에서 50대로의 변화를 도로가 4차선에서 5차선으로 확장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달려온 4차선 도로는 직선이었지만, 현재의 5차선 도로는 자유로운 곡선형이라고 한다. 바뀐 것은 도로만이 아니었다.
“운전할 때 속도를 올리는 것만 신경 쓰면 주변 풍경을 놓쳐 버려요. 풍경을 감상하면서 가려면 속도는 떨어지고요. 초보 운전 때(젊은 시절)는 노련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이제는 적당히 속도를 내면서 동시에 풍경도 볼 수 있는 나이가 됐죠. 직선도로의 속도와 곡선의 여유로움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어요.”
차선이 하나 더 늘어나며 생긴 변화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변곡점은 교수로 지내던 가톨릭대학교를 떠났을 때다. 당시 그의 나이 쉰넷이었다. 정년까지 10년은 더 남았기에 그의 행동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도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그려 보았던 인생 계획을 실천해 내기 위함이었다.
“서른 살 무렵에 막연히 ‘나는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고, 25년은 마음껏 책 읽고 글 쓰며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살겠다’는 꿈을 꿨었어요. 누구에게 말한 적도 없고 혼자 괜히 무게를 잡은 건데, 살다 보니 잊고 지냈었죠. 근데 쉰이 넘어서 갑자기 떠오른 거예요. 한편으론 두렵더라고요. ‘이걸 정말 해, 말아?’ 결국 하자고 결심했고, 교수생활 딱 25년을 채우고 미련 없이 학교를 나왔어요.”
‘나였던 그 아이’와 ‘나인 그 아이’가 만나는 시간
계획대로 세 번째 25년을 살고 있는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꿈들을 되새겨 보곤 한다. 일하느라 바빠 잊힌 꿈도 있고, 이룰 수 없기에 애써 잊은 꿈도 있었다. 그는 삶의 무게를 한 꺼풀 덜어 낸 지금이야말로 꿈을 되찾고 이뤄 나가기 좋은 때라고 했다.
“젊어서는 능력도 부족하고 여유가 없어 하기 어려운 일이 많죠. 나이가 들면 그동안 형성한 네트워크나 삶의 노하우가 더해져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커져요. 오래전 꿈을 자꾸 돌이켜보고 새로운 꿈도 꾸며 작게나마 이뤄갈 수 있는 것도 나이 들어 즐거운 일 중 하나죠.”
그는 “꿈을 실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라며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에 나오는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라는 문장을 인용했다.
“사람들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흔히들 ‘그렇다’고 해요. 돈은 많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고, 아이들 건강하게 잘 컸으니 이만하면 행복하다는 거죠. 그런 분들에게 ‘그럼 지금의 삶이 어렸을 적 꿈꾸던 그 삶입니까?’라고 되물어요. 그러면 대답을 잘 못 해요. 그 이유가 ‘나였던 그 아이’하고 ‘나인 그 아이’를 만나게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요. 꿈은 ‘나였던 그 아이’가 꾸는 게 아니라 ‘나였던 그 아이’가 꾼 꿈을 ‘나인 그 아이’가 지금 실현하는 거예요. 꿈이 없다는 건 ‘나인 그 아이’가 없거나, ‘나였던 그 아이’를 잊은 거죠.”
이 두 아이가 대화하고 서로 격려하며 때론 갈등도 하면서 자주 만나야 내적인 삶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그는 꿈을 잘 이뤄가며 사는지 궁금했다.
“‘꿈을 이룬다’보다는 ‘꿈을 누리다’라는 말이 더 좋더라고요. 꿈은 성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리고 있는 현실 자체가 즐거운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획득하려고만 하죠. 젊어서의 꿈은 목표지향적일 수 있지만, 나이 들어서의 꿈은 과정을 즐기는 데 의미가 있어요.”
그는 현재의 삶이 과거 꿈꾸었던 삶과 어느 정도 맞는 편이라고 했다. 30대 때 이루고자 했던 25년 단위 인생 계획도 잘 지켜가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라 불리는 요즘, 네 번째 25년에 대한 계획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는 10년쯤 후에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지만, 어느 정도 밑그림은 그려 놓은 듯 했다.
“75세쯤 되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이어 주고, 다음 세대를 격려해 주는 일을 해야겠죠. 문화공동체운동 같은 걸 계속해 나가려고 해요.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만나는 모임이라도 부딪히는 일이 생기죠. 그런 갈등을 풀어 주고, 다시 연결하는 ‘매개 점’ 역할을 하는 게 어른의 몫이라 생각해요. 꿈은 혼자 이루는 것도 있고, 함께 해 나가는 것도 있죠. 혼자 악악거리며 사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꿈에 벽돌 한 장 쌓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새해 첫날 쓰는 인생의 끝자락
매사 꿈을 꾸라고 조언하면서도 그는 해마다 1월 1일이면 유서를 쓴다. 지난해 서랍에 넣어두었던 유서를 꺼내 읽고 새 유서를 쓰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 남다르다고 한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예닐곱 살쯤 아버지랑 산에 갔다가 못 내려오게 됐는데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죠. ‘저 별이 아무리 예뻐도 너만큼 사랑스럽고 아름답지는 않아. 아버지는 널 제일 사랑해’라고요.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그 말이 살아서 마음이 흔들리고 어려울 때마다 생각나요. 그 한마디가 나를 지켜 준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도 인생을 사는 데 좌표가 될 만한 이야기를 남겨야 하잖아요. 언젠가 제가 떠나고 나면 서랍 속에 담아 뒀던 유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겠죠.”
매년 쓰는 유서는 일종의 인생 계획서이자 지침서가 된다. 다음 해 유서를 풍요롭게 채우기 위해 올 한해도 허투루 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고, 자기 성찰도 하며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의미 있는 유서이지만 모아 두지는 않는다. 그런 행동도 집착이고 결국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새 유서를 쓰기 전에 한 번 읽으면서 ‘올해 결산 괜찮네!’ 하고 탁 태워 버려요. 그러고 깔끔하게 잊어버리죠. 내가 정해 놓은 거지만 가끔은 쓰기 싫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그럼 음력설에 쓰지 뭐’ 그래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남의 눈치 봐야 하는 일도 아닌 내 자유니까요.”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몇 년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평생교육원에 다니고 있는 남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은 누구일까? 옷 잘 입는 여성? 돈 많은 여성? 요리 잘 하는 여성? 셋 다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은 단연코 ‘예쁜 여성’이었다. 젊으나 늙으나 남자에게는 예쁜 여성이 최고다. 남자는 참 단순하다.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른 게 그나마 다행일 정도다.
그럼 평생교육원에 다니는 여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남성은 어떤 사람일까? 잘 생긴 남자? 돈 많은 남자? 근육질 남자? 모두 아니다. 여성이 가장 좋아하는 남성은 ‘연금 많이 받는 남자’다. 잘 생기거나 근육질 남성은 온전한 내 남자가 되기 힘들고, 돈 많은 남자는 자식들 차지이거나 분란의 소지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정경제를 꾸려온 사람들답게 여성들은 참 현실적이다.
상대적으로 이성을 지배하는 좌뇌가 발달한 남성은 감성에 휘둘리고, 감성을 지배하는 우뇌가 발달한 여성은 이성에 좌우되는, 남녀관계는 정말로 모를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버파산, 노후파산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다. 노후에 생계를 꾸려갈 만큼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파산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현실적인 여성들이 미리 냄새를 맡고 연금에 손을 들어 준 이유를 알 만하다.
연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후에 일정한 주기로 일정액의 현금이 내 통장에 꽂히는 것. 일정한 주기는 매달일 수도, 분기일 수도, 매년일 수도 있다. 물론 매달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연금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사람마다 연금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세계적으로 유명인사인 오 노레드 발자크(1799~1850), 한스 안데르센(1805~1875),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78)를 통해 연금의 다양한 의미를 에이브러햄 매슬로(1908~1970)의 욕구 5단계설에 비춰 살펴보도록 하자.
오 노레드 발자크 : 절대적 생존 수단으로서의 연금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소설가로 사실주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 나폴레옹이 칼로 시작한 일을 자신은 펜으로 완성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나폴레옹 숭배자, 이라는 90여 편의 소설로 구성된 소설 위의 소설을 구상한 혁신자, 짓누르는 눈꺼풀을 커피로 녹여 낸 커피 중독자…. 오노레 드 발자크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서 발자크를 ‘현대 문학의 가장 위대한 노동자’ ‘환상적인 작업 기계’로 묘사한다. 사흘에 잉크병 하나를 비우고 펜 10개를 닳아 없앨 정도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에 색다른 별명을 하나 더 붙이고 싶다. 바로 ‘연금 애호가 발자크’다.
발자크의 소설에는 유독 ‘연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언어학에서는 작가가 특정 주제에 관련된 어휘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그 작품의 중심 테마일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본다. 발자크가 그의 소설에 ‘연금’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곧 ‘연금’이 소설의 중심 테마임을 의미한다.
발자크가 연금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잠시 엿보기로 하자. 에서 발자크는 연금을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한가로움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묘사한다. 에서는 딸의 사교 비용을 대느라 연금증서까지 팔아 치운 나머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절규를 숨 막힐 정도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연금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이 가장 잘 녹아 있는 대목은 에 나오는 하녀 나농의 이야기다.
“160㎝가 넘는 큰 키 때문에 키다리 나농이라 불리게 된 그녀는 35년 전부터 그랑데 집에 살고 있었다. 1년에 60리브르밖에 받지 못하지만 그녀는 소뮈르 지방에서 제일 부유한 하녀로 통했다. 35년 동안 60리브르를 차곡차곡 모은 결과 최근에 크뤼쇼 집에 4000리브르를 종신연금으로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루어진 나농의 끈질긴 저축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였다. 하녀들은 그것이 고된 노역의 대가라는 사실은 생각지 않고 60대의 노파가 마련해 놓은 노후자금에 질투심을 드러내곤 했다.”
위 구절을 보면 연금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과 당시 프랑스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①노후에 연금을 받으려면 오랜 기간 동안 차곡차곡 돈을 모아야 한다. ②연금은 고된 노역의 대가다. ③연금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④유력 집안이 금융회사를 대신해 연금을 지급한다. ⑤여자가 160㎝만 넘으면 큰 키로 인정받는다. ④와 ⑤번을 제외하면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발자크가 그의 소설 속에 연금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집안 내력과 극도의 경제적 궁핍을 겪은 경험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지 않을까. 츠바이크의 에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래 살려는 그의 의지는, 가입자가 죽으면 남은 사람에게 연금이 덧붙여지는 이른바 톤틴식 연금에 들었다는 사정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발자크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연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발자크는 젊었을 때 인쇄업과 활자제조업에서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평생 빚더미에 짓눌려 살았다. 다시 츠바이크의 말이다. “3년 동안의 사업가 활동에서 얻게 된 10만프랑의 빚은 그에게 ‘시시포스의 돌’이 되었다. 그는 평생 근육을 거의 망가뜨리면서 이 돌을 꼭대기로 굴려 올리곤 했지만, 언제나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생애 최초의 이 잘못은 그를 언제까지나 채무자로 남도록 운명지었다. 자유롭게 창작하고 종속 없이 산다는 어린 시절의 꿈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었다.”
발자크에게 연금은 생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생존의 문제였다. 빚의 노예로 노동자처럼 소설을 써야 했던 그이기에 같은 사회성 짙은 소설이든 같은 연애소설에도 어김없이 연금이 등장한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 접목하면 1단계인 ‘생리적 욕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안데르센 : 복합적 의미로서의 연금
한스 안데르센은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덴마크의 동화작가다. 하지만 안데르센과 관련하여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바로 안데르센이 그렇게도 연금 받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안데르센은 젊은 시절 엄청난 고통과 각고의 노력 끝에 정상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정상에 오르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에 빈 곳이 있었으니 바로 연금이다. 그의 경쟁자이면서 자신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연금을 받고 있는데,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은 연금을 받지 못하는 사실에 꽤 자존심도 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안데르센의 에 매료된 덴마크 총리가 그의 거처를 방문한다. 물론 안데르센은 그가 총리인지 모른다. 방문 목적과 자신의 신분을 밝힌 총리는 안데르센에게 어려운 점이 없는지 묻는다. 이에 안데르센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연금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국왕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총리는 돌아가 덴마크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외르스테드를 통해 국왕 면담을 주선한다. 국왕과 면담 후 안데르센은 그렇게도 원하던 연금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장면과 감정을 자신의 자서전인 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프레데릭 6세 때 이미 몇 년 전부터, 문학청년이나 예술가들을 해마다 선발해 여행 경비를 주는 제도 외에도, 이들 가운데서 이렇다 할 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골라 많지 않은 돈이지만 연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유명한 시인들이 모두 이 보조를 받고 있었다. 욀렌슐레게르, 잉게만, 하이베르그, 카를 빈터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헤르츠도 얼마 전부터 이걸 받고 있어, 그의 미래는 생계가 탄탄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나도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내 희망이자 소원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다. 프레데릭 6세는 내가 1년에 200릭스달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는 기쁘고 고마운 나머지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단지 살기 위해서 억지로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려도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확실한 버팀목이 생긴 것이다. 늘 신세를 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안데르센이 연금을 받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던 장면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안데르센이 연금에 집착한 이유는 뭘까? 하나는 안정적으로 창작활동에 몰두하기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은 여행을 매우 좋아했다. 당시 여행비용은 꽤 비쌌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정신과 사상을 깊게 하고 넓혀 나갔던 안데르센은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영국 여행에서는 찰스 디킨스를, 프랑스 여행에서는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 등 세계적 작가들을 만나고 교류했다. 결국 안데르센에게 연금은 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경제적 안정 수단이었던 셈이다. 매슬로의 욕구5단계설의 두 번째 욕망인 ‘안전욕구’였다.
“여행은 마법의 물약처럼 마음을 정화하고 육체에 원기와 젊음을 불어넣는다. … 나의 내면에 보석 같은 소재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 보석들을 제대로 다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이 보석들을 정력적으로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 종이에 옮겨 놓기 위해서는, 정신을 신선하게 재충전할 필요가 있다. 내게 있어서 여행은 정신을 정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늘 더 젊어졌고 더 강해졌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연금을 통해 국왕으로부터 인정받는 명실상부한 명사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욕구이지 않을까. 국왕과의 연결선이 없어 자신보다 못한 경쟁자가 연금받는 것을 부러워하고 시샘하던 안데르센이 드디어 자신도 그들의 리그에 속하게 된 것이다. 매슬로의 욕구5단계 중 3단계인 ‘사랑과 소속 욕구’를 쟁취한 셈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확실한 기반을 구축하는 덤까지 얻었다. 5단계 욕구 중 4단계인 ‘존경 욕구’를 충족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안데르센에게 연금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도구였던 것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정치 도구로서의 연금
비스마르크는 우리에게 독일의 철혈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스마르크가 철혈재상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근과 채찍을 효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항상 한 손에는 채찍을, 다른 한 손에는 당근을 들고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78년 10월 9일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법’ 제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당근책을 제시한다.
“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며, 노동자들에게 기업 이윤의 배당을 보장하고, 기업의 경쟁력과 시장상황을 고려한 범위 내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모든 계획들을 후원할 예정입니다. … 만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성적인 방법으로 미래를 내다 보면서 노동자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긍정적인 방안을 제안한다면 나는 국가부조라는 이념을 염두에 두면서 자구책을 강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방안을 호의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1881년 3월 8일 산재보험법을 제안하면서는 “국가란 오직 유복한 사회계급의 보호를 위해서만 창안된 것이 아니다. 무산계급의 요구와 이익에도 봉사하는 복지기구”라고까지 강조했다. 1881년 11월 17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황제교서에서는 “사회적 폐단을 단지 사회민주주의의 과격행위를 탄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노동자 복지를 적극적으로 도모함으로써 척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4대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은 사회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당근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다. 비스마르크에게 연금은 5단계 욕구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의 실현 수단의 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