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예술이다. 토양의 기운과 그 땅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전통예술이다. 역사의 질곡에 이은 현대사회 전환기에 살았던 한 소년. 그는 음악에 눈뜨면서 막중한 임무처럼 국악계의 문을 두드렸다. 전통음악의 한계를 허물고 한국 예술 전반에 주춧돌을 쌓다 보니 어느덧 30여 년 세월. 우리 음악이고 예술이고 하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다고 말하는 KBS국악관현악단 이준호(李準鎬·59) 상임지휘자. 대금과 소금 연주자를 거쳐, 작곡가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에서 명성 높은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악, 문턱 낮추고 저변을 넓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 여의도 너른 길을 걸어 한국방송공사(KBS)로 향했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방송사. 일하러 오는 사람과 그들을 보러 오는 사람으로 매일 인산인해인 곳. 여기에 KBS국악관현악단이 있다. 오전 연주 연습을 마치고 단원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준호 상임지휘자와 마주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살아온 지 올해로 14년째. 국악기를 손에 쥔 사람들 정중앙에서 음악이 갈 길을 제시하고 함께 호흡한다. 1985년 소금 연주자이자 창단 단원으로 KBS국악관현악단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같은 해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을 결성해 대중과 눈 맞춤하기에 앞장섰다. 대금과 소금 연주자로서 활약은 물론, 작곡가로서 친근한 국악 창작을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한국청소년국악관현악단(1988)과 경기도립국악단(1996) 창단에도 힘을 보탰다. 두 단체에서 또한 상임지휘자를 맡아 활동했다. 지난 6월에는 대금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우리 고유의 악기 대금 보존과 계승, 발전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슬기둥’, 국악이 변화하다
지금은 소규모 국악 그룹이 넘쳐나지만 ‘슬기둥’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준호 지휘자와 함께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동기인 강호중, 김영동, 민의식 등 20대 국악 연주가들은 경계 없는 신선한 음악을 해보자는 마음에 ‘슬기둥’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가 공감하고 나누는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슬기둥’이 세상에 나오면서 국악은 관객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옛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슬기둥 1집에 발표된 ‘산도깨비’와 ‘소금장수’는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슬기둥을 창단했던 저와 제 친구들의 선택이 맞았습니다. 모두가 국악의 정통성을 외칠 때였어요. 그런 역할은 국립국악원에서 충분히 하고 있잖아요. 영산회상(조선시대 후기 기악곡 형태의 풍류음악)이나 수제천(관악합주곡, 원곡명 ‘정읍(井邑)’)으로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어요. 일반 대중이 국악을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국악가요 같은 것을 따라 부르면 더 편하지 않나요? 민요도 전통음악이잖아요. 슬기둥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제가 작곡에 열을 올게 된 것이죠. 19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이준호 지휘자는 지금까지 국악을 바탕으로 1000곡 가까이 창작해왔다. 무용극, 뮤지컬, 연극, 창극, 마당극에 사용하는 공연음악과 TV드라마 음악 등 국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국악의 대중화에 발 벗고 나섰다. 20여 편 되는 MBC마당극 중 일곱 개의 작품도 작곡가 이준호의 손에서 탄생했다. 국악과 현대음악을 접목시키고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후배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새로운 장르를 개발해서 국악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이 갈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길이 있어야 젊은 친구들이 국악을 공부하며 열정을 보일 거 아니에요. 전통음악이든 현대음악이든 음악계 전체가 풍성해져야죠.”
새로운 국악을 주창했던 슬기둥 원년 멤버들은 모두 국악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준호 지휘자도 4년 전부터 모교인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대금과 작곡, 지휘를 가르치고 있다.
“음악 만들면서 현장에 있는 게 좋지, 학교에 있는 걸 원하지는 않았어요. 이제 제가 나이를 꽤 먹었다는 거겠죠.(웃음)”
트럼펫 대신 대금을 손에 쥐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준호 지휘자는 음악 하는 외삼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외삼촌 주변에 학교 다니면서 브라스 밴드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동네에서 행진곡 합주를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영향이 저한테 굉장했죠.”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브라스 밴드에 들어갔다. 다양한 서양악기를 접했고 트럼펫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립국악원 연수를 한 달 정도 다녀온 음악선생님으로 인해 국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밤낚시를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곳에서 국악에 대한 깊이와 역사를 이야기하시면서 ‘국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듣고 잊어버려야 했는데 그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대전환이었다. 그때부터 트럼펫을 내려놓고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목표로 고입 준비를 해 입학했다. 대금과의 인연도 국립국악고등학고 입학과 함께였다.
“국악을 처음 접하는 거라 뭐든 생소했어요. 악기 주법과 모양새도 그랬고요. 국악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학교에 들어갔어요. 결국에는 대금을 선택했는데 나하고 잘 맞았던 거죠.”
젊음으로 한바탕 놀다
이준호 지휘자가 추구하고 생각하는 국악의 장점은 언제든 변형 가능하고 다른 장르와도 잘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국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다양한 음악, 예술 장르와의 협연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KBS국악관현악단 혹은 슬기둥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해외 여러 나라에 나갔다. 그리고 우리 가락의 흥을 가지각색 협연 무대로 펼쳐 보이기도 했다. 사물놀이패는 물론이고 비보잉, 재즈, 록 등 국악과 접목할 수 있다면 뭐든 함께 무대에 세우고 실험을 이어갔다.
“언젠가 카자흐스탄에 한국어과가 있는 대학교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아무리 통역을 붙여 강의한다고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서 비보잉 그룹과 함께 갔습니다. ‘10분에서 15분만 내가 할 테니까 나머지는 너희들이 해라!’ 하고요.(웃음)”
우리나라 문화를 잠깐 소개하고 비보잉 그룹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 곳에서도 비보잉이 인기가 있었는지 20여 명되는 팬이 몰렸다. 우리 가락에 맞춰 한국 비보이에게 동작을 배웠다.
“그때 국악과 비보잉의 결합은 새로운 방식의 문화 융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열리는 하라레축제에 갔을 때는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과 함께 공연했습니다. 그들에게 국악과 록의 접목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런데 공연 끝나고 뒤풀이가 더 오래 걸렸어요. 우리 예술인과 깜짝 협연이 열린거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리듬을 좀 알잖아요. 우리 것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고 좋은 일입니다.”
창작은 멈추지 않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바로 국악관현악단의 연습실이었다. 방송 전파를 위해 존재하는 방송사 공간에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의 아지트가 있다는 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생기고 30년 동안 제대로 된 연습실이 없었어요. 라디오 공개홀에서 본관 뉴스센터, KBS별관으로 옮겨 다녔어요. 제가 여기 창단 멤버이고 오래 활동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3년 전에 공간 좀 제발 마련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때까지 국악관현악단 명의로 된 연습실이 없었답니다.”
방송사 건물이 한정적인 데다 사람과 장비가 늘어나 이해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참고 참다 큰맘 먹고 연습실 문제를 알렸던 것이다.
“사실 방송사 내에 사무실 없는 분들도 있으니 그 사정은 지금도 이해가 돼요. 어쨌든 요즘은 연습이 중단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없어서 단원들이 좋아해요. 대신 저희는 열심히 뛰어야겠죠. 연주회도 하고 좋은 레퍼토리도 만들고요. 한국음악을 접하지 못하는 소외 지역이나 교도소, 군부대 등도 저희가 찾아가서 음악회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공연으로 국민들에게 보답하면 됩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라는 높은 위치가 늘 행복하고 달가운 자리만은 아니다. 현재 이끌고 있는 악단과 단원들을 위해서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서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받거나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는 공영방송사 한 분야의 수장으로서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수’라는 것도 나이가 익어가면서 알아갔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있는 단원들과 함께하는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어떤 것을 더 하고 싶냐고 물으니 당연히 국악 얘기로 다시 돌아온다.
“곡 써야죠. 작곡가니까. 판소리 5마당 중에서 심청가만 남았어요. 판소리만 한 대목 한 대목 연주해왔는데 그걸 전체 다 오케스트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산회상 전 바탕, 종묘제례악 합창가….”
지금까지 1000곡 가까이 작곡했다는 분이 아직도 정리할 곡도 많고 할 일이 많단다. 시간이 나면 KBS 신관 길 건너 연구동 5층 사무실에서 곡 쓰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이 열정을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언젠가 휴식의 시간이 찾아온다면 펜도, 지휘봉도, 대금도 다 내려놓고 좀 쉬시기를 간청드려본다.
수은주가 40℃까지 치솟는 폭염이 절정에 달했던 2018년 8월 4일부터 5박 6일간 ‘민족의 성산’ 백두산과 그 일대를 다녀왔습니다.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백두산 탐방의 목적은 단 하나.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국생종) 등에 등재된 엄연한 ‘우리 꽃’이지만 자생지인 북한 지역에는 갈 수가 없어 만나지 못하는 야생화들을,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마지막 안식처라고 하는 백두산에서라도 그 실체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언젠가 북녘 땅에 직접 가서 반갑게 만나야 할 우리 꽃을 마음에 담아놓고 기억하는 것이,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백두산에서 가장 가깝다는 연길(延吉)공항 기온은 서울보다는 다소 낮았지만 역시 36℃ 정도여서 뜨거운 열기가 한반도에 못지않았습니다. 도심을 벗어나자 곧 들녘에 노란색 마타리가 줄지어 핀 게 우리 산이나 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으로 한 발 들어서자 ‘북부 지방에 다소 생산되나 중·남부 지방에서는 별로 볼 수 없다’는 방풍과 ‘서흥(황해도), 회령(함경도) 및 경성(함경도) 근처에서 자란다’는 실쑥을 비롯해 원지, 절국대, 금혼초, 좁은잎사위질빵, 황금 등 남한에서는 멸종됐거나 드물게 자라는 북방계 식물들이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동행한 탐사대원들이 처음 대면하는 우리 꽃에 환호성을 지릅니다.
날이 바뀌어 백두산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서울과 진배없던 날씨가 서서히 바뀌더니 먹구름이 끼고 비가 오락가락합니다. 새벽녘부터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해 백두산 정상까지의 셔틀버스 운행은 끊겼다는 소식. 일단 중간 지점인 왕지(王池)까지 가서 주변을 돌아보며 추이를 보기로 합니다. 해발 1400m 지점인 왕지 일대에는 참취와 민박쥐나물, 도깨비엉겅퀴, 분홍바늘꽃, 조밥나물, 각시취, 그리고 여러 종의 산형과 식물 등이 가득 피어나 ‘야생화 초원’이란 명성을 뽐냅니다. 서너 시간을 보내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후 2시, 악천후로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는 비보가 전해집니다. 대신 다음 날 새벽 2시 재도전을 약속합니다.
“아무리 일기가 불순한 고산이라 해도 설마 한여름에 1박 2일간이나 비가 오겠느냐”고 큰소리쳤지만, 잠을 설치며 애태운 보람도 없이 다음 날에도 빗줄기는 긋질 않습니다. 다행인 것은, 탐사대를 태운 차량이 일단 정상 바로 밑까지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새벽 3시 20분,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1432개 계단을 올라 2750m 서(西)백두 정상에 섭니다. 비는 쏟아졌지만 서서히 날은 밝아, 최정상 능선에 핀 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흰색과 연한 분홍색을 띤 바위구절초 행렬입니다. 그 곁에 실타래 모양의 흰 꽃을 곧추세운 산오이풀의 풀빛 군락이 펼쳐집니다.
‘단 5분만이라도 열렸으면….’ 오전 6시 무렵까지 2시간 반 넘게 빗속에서 기다렸으나 끝내 안개는 걷히지 않습니다. 내려오는 길 계단 옆에 산용담이 서너 송이 보이더니, 9부 능선 아래로 내려서자 가파른 초지에 삐죽삐죽 돋아난 산용담의 미색 꽃봉오리와 비로용담의 보랏빛 꽃봉오리가 빼곡합니다. 그 곁에 검게 익어가는 들쭉나무 열매와 꽃이 진 두메분취, 돌꽃, 가지돌꽃, 구름범의귀, 좀참꽃 등이 나란히 엎드려 백두산에는 8월 초순 이미 가을이 닥쳤고, 눈이 펄펄 쏟아져 켜켜이 쌓이는 겨울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
바위구절초를 에워싼 안개 너머 짙푸른 천지를 보지 못한 그 큰 아쉬움은 유령란과 쌍잎난초, 큰송이풀, 대송이풀, 왕별꽃, 실별꽃 등 남한에서는 만날 수 없는 북방계 식물들이 있어 한결 누그러졌습니다. 특히 ‘부전고원에서부터 백두산 지역까지 북부 지역 침엽수림 밑에서 자란다’는 유령란은 만나기도 어렵고 개화기를 맞추기도 쉽지 않다는데, 만개한 개체를 여럿 만났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고생물학자이자 과학 저술가인 리처드 포티가 “낯선 환영을 본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고 말한 바 있듯,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유령처럼 사라져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말입니다. 콩팥 모양의 잎을 마주 단 쌍잎난초 또한 백두산 지역 침엽수림에서만 자란다는데, 다행히 스러지기 직전의 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
“자신을 비운 자리에 상대를 받아들이듯 서로 다른 나무가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가구가 완성됩니다.” 50여 년 ‘외길 인생’에 값하는 사유의 언어로 ‘전통 짜맞춤’을 설명하는 소병진(蘇秉辰·68) 씨. 1960년대 중반, 가난 때문에 학교 공부도 포기한 그는 열다섯 살에 가구공방에 들어가 ‘농방쟁이’ 목수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맥이 끊긴 조선시대의 가구 전주장을 재현해내고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 1호,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가 됐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작업대 위의 시간들이 가져다준 당연한 결과였다.
전북 완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는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6월 4일까지 열렸던 2018한옥박람회에서 ‘전통예술과 현대미술의 만남’을 주제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가 잡힌 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약속 시간을 조금만 미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의 작품과 제자들이 출품한 가구를 관람하고 전시장을 몇 바퀴 돌고 난 뒤에야 그가 나타났다. 사실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늦잠을 잤다고 털어놨을 때 아직 건강한 그의 시절이 반가웠다. “좀 더 일찍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여전히 필드에서 펄펄 날고 있는 선수처럼 보였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도 믿기지 않았다.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 건강한 거 같아요. 가구를 만들다 보면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끼리 서로 끼워 맞추는 게 짜맞춤인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뇌를 써야 하니까 치매 예방에 좋지, 온몸을 움직여야 하니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시간도 잘 가지, 정서적으로도 좋지, 성취감도 있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요.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도 ‘전통문화는 미래산업의 최후 승부처’라고 했잖아요. 곧 시니어에게 짜맞춤이 최고의 직업이 되지 않을까 전망해봅니다.”
실제로 완주에 있는 그의 교육관에는 퇴직자들이 꽤 온다. 대부분 취미로 배우지만 제2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청년들도 문을 두드리기는 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부가가치를 내다보고 적극 지원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전통 짜맞춤 기법은 총 45가지인데 지금은 5가지밖에 안 가르쳐요. 돈 내고 그걸 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교육생들에게 손 연마(수공구 연마)만 시키면 지루해합니다. 빨리 물건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6개월이면 사방탁자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흉내 내는 것밖에 안 돼요. 기술자가 되려면 눈을 감고도 나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음매를 딱딱 때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맞춤이 제대로 되었는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가구를 배울 때는 청소와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해가면서 스승 밑에서 10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공부할 젊은이들이 과연 있을까요. 정부가 전통문화를 짊어질 이수자들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소목장 기술
‘농방쟁이’. 과거에는 가구 만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가 소목장이 된 인연은 5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매청에 다니던 아버지가 직업을 잃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열다섯 살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젓갈장사 등을 하며 7남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보며 무슨 기술이든 배워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채 8촌 형을 따라 들어간 곳이 ‘전주 중앙가구’ 목공부 소목반. 그곳에서 운명처럼 전통 소목 기술자 이해민 명장을 만나 사사한다. 어린 소병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알 정도로 눈썰미가 남달랐다. 남들은 10년 넘게 배우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통달했다. 이 똘똘한 소년을 주변에서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어느날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던 유명 목수 유춘봉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유춘봉 선생님은 서울에서 일하던 최고 기술자였지요. 전주 중앙가구에서 디자인 개발을 위해 모셔왔는데 그렇게 인연이 된 거죠. 내게 넓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은인입니다. 음료수 한 박스 사 들고 갔더니 ‘자네 인사성도 좋고 성실하고 솜씨도 참 좋네. 여기 놔두기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돈 벌고 싶은가, 기술 배우고 싶은가? 내가 만약 동일가구 보내주면 갈랑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깜짝 놀랐죠. 동일가구는 아무나 들어가는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더 큰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유춘봉 씨가 써준 편지를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과연 소문대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였다. 그는 일본으로 가구를 납품하는 수출반에서 일하게 됐다. 최고급 가구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려한 디자인의 가구들을 보며 그는 가슴이 뛰었다. 함께 일할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었다. 이때 배운 기술, 특히 디자이너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배운 디자인 기술은 그가 조선시대 가구 전주장을 복원해낼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다
“전주장을 처음 본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할 때였어요. 휴일이면 인사동엘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 있는 물건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자그마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가구였어요. ‘전주태극이층장’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길래 직원에게 물어보니 조선시대에 전주 지방에서 부잣집 마님들이 쓰던 가구라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조상들이 쓰던 가구라고?’ 귀가 번쩍 뜨였죠.”
그때부터 전주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월급을 타면 죽은 느티나무와 먹감나무를 사서 고향집에 쌓아 뒀고 전주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가구를 통해 형태와 장석문양도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면 어렵게 구한 전주장을 분해해서 제작 기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는 마침내 전통가구 전주장의 원형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전주장 앞면에 들어가는 문양과 장석 하나까지 정통 그대로 살려냈어요. 장석은 너무 번쩍거리지 않도록 처리했고, 가구 보존을 위해 마무리는 동백기름으로 칠했지요. 전주장은 지방에서만 쓰이던 가구가 아니에요. 한때는 하사품으로 이용될 만큼 명성이 있었던, 조선시대 가구의 백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명감을 갖고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어요. 2004년 전승공예대전에 ‘전주버선장’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내가 결국 해냈구나’ 하며 자부심을 느꼈지요.”
그 후 소병진은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2014년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로 선정이 됐다.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세월이 가져다준 보상이었다. 한때 부도를 맞아 ‘그만 살자, 격포에 가서 죽어버리자’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왔던 날들은 이제 추억이 됐다. 그는 자신의 기술이 3대를 잇는 기술이라고 했다. 스승의 선대 기술까지 배웠으므로 100년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전주장 기술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소목장(전주장) 등재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
좋은 나무만 보면 아직도 설레는 사람
짜맞춤 가구에 사용되는 목재는 주로 오동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 등으로 보통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쓰인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좋은 나무만 보면 탐이 나고 설렌다고 말한다.
“나무를 들여오면 눈과 비바람과 햇볕을 맞히고 건조 과정을 거쳐 가구를 만들기까지 20여 년이 걸려요. 지금 내 나이가 곧 70인데 20년 뒤면 90입니다. ‘내가 이 나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미쳤지!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좋은 나무만 보면 ‘얼마여?’ 하고 물어요. 이게 바로 정신 같아요. 여기 쟁여놓은 나무들, 누가 10억 준다 해도 안 팔아요.(웃음)”
그의 교육관에는 귀한 목재들이 가득하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나무를 구하고 제자는 그 나무를 쓰며 스승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가는 마음의 길은 비움과 받아들임을 반복하며 상대를 꽉 안은 채 열릴 것이다. 순환의 사랑이 100년의 기술만큼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인천공항에서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는 비행기로 네 시간 남짓. 비행기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마음먹어볼 수 있는 피서지 몽골! 그 낯선 땅에 발을 딛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툭 치며 환영 인사를 던진 건 사람도 동물도 아닌 바람이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해봤지만 몽골의 바람은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다. 초원의 상큼함 같기도 하고 동물의 썩은 가죽 냄새 같기도 한, 뭐라 한마디로 형용하기 힘든 태초의 냄새 같은 것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지구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머물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을 그런 바람이 지니고 있는 냄새. 그제야 난 깨달았다. 불과 네 시간 만에 와 닿은 곳은 대륙의 이편저편이 아니라 내가 살던 삶의 방식과 정반대의 삶이 있는 땅임을.
한여름 최적의 피서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몽골은 평균고도 1580m에 위치하며 5분의 1이 고비사막이다. 넓게 퍼져 있는 사막의 영향으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에 속한다. 이르면 9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4월까지 겨울이 계속되고 매우 춥기 때문에 7월과 8월 한여름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다. 여름 한낮의 평균기온은 16℃이고 밤엔 살짝 한기가 느껴질 정도.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쾌적한 휴양지를 찾고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비라도 내리면 파카를 꺼내 입고 밤새도록 불을 지펴도 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 7.5배의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인구는 고작 서울의 한 구에도 못 미치는 280만 명이 사는 곳.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바다라 불리는 호수 홉스굴까지 한 바퀴 돌아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2499km의 길고 험한 여정이다. 피서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지만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에겐 맞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몽골 여행은 바람에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난다. 초원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구릉의 바람으로, 구릉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호수의 바람으로. 러시아,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초원과 구릉 외에 4000개에 달하는 호수와 강이 있는 대자연이 몽골이다. 그렇다고 대자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를 품은 에르덴조(Erdene Zuu) 사원, 간단(Gandan) 사원 같은 불교 사원, 칭기즈칸 기념관, 자이승 전망대, 이태준 공원 등 역사적 건물들과 화산, 협곡까지 다채로운 자연을 품고 있다. 지구상에 아직 이런 땅과 이런 유형의 삶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원시적이다.
실크로드와 칭기즈칸의 나라
기원전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건설한 몽골 대제국은 ‘용감함’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나와 있듯 러시아와 중국, 동남아와 유럽, 중동 국가에 이르기까지 동서 문물교류에 큰 영향을 끼치며 실크로드를 열었다.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던 이 야생의 유목제국도 결국 막을 내리고 내륙 중앙부가 1688년 중국 청나라에 복속되어 ‘외몽골’로 불리다가 1911년 제1차 혁명과 1921년 제2차 혁명을 통해 독립을 이루게 된다. 고비사막을 주변으로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며 내몽골은 아직도 중국에 속해 있다. 몽골 여행 하면 대부분 울란바토르와 테를지를 중심으로 한 옛 몽골 제국으로의 여행을 말한다. 지금도 도시 한가운데서 전통 복장에 무공훈장을 단 노인을 볼 수 있는데 현대식 마트 앞 벤치에 앉아 먼 과거로 시선을 둔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자아낸다.
한국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마트
울란바토르 마트에는 한국 음식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 집 건너 한국 음식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에만 머무른다면 먹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몽골의 대표적 휴양지인 테를지에는 전통 가옥 게르를 호화롭게 개조한 호텔부터 유럽식 리조트까지 편리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말을 타며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기에 좋다. 그러나 몽골까지 와서 이런 편리함만 만끽하고 간다면 진정 몽골을 여행했다 할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수만 마리의 양떼와 말떼들을 호령하는 거친 유목민의 삶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몽골의 옛 수도 하르호린(Kharkhorin)을 지나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호숫가 차강노르와 푸른 진주라 불리는 홉스굴까지 적어도 열흘간의 유목생활을 체험해보길 권한다. 유목민 전통 천막 게르에서 잠들고, 삶은 양고기 허르헉을 먹고, 30도의 독한 칭기즈 보드카에 취해보는 것. 그리고 새벽에 깨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대자연에 온몸과 마음을 맡겨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몽골 여행이다.
스타렉스와 초원 화장실
몽골 여행은 눈뜨면 4륜 구동차를 타고 온종일 초원 사이로 난 울퉁불퉁한 오프로드를 달리다가 아무 데서나 철퍼덕 앉아 도시락을 먹고 볼일도 수풀 사이로 찾아들어가 보는 일이다(아프리카에선 이를 ‘부시 토일렛’이라 표현하는데 몽골에선 초원 화장실쯤 되겠다). 처음엔 우산이나 옷으로 가리면서 불편해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익숙해지면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간혹 길 한가운데 간이화장실처럼 보이는 곳도 있는데 재밌는 것은 앞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얼마나 귀한 대자연과의 교감인데 문으로 풍경을 굳이 가릴 필요가 있을까.
말과 양 외에 초원을 달리는 차는 딱 두 종류, 한국 차 스타렉스와 러시아 차 푸르공뿐이다. 편한 아스팔트길은 없고 대부분 협곡과 구릉을 번갈아 넘어가는 롤러코스터 같은 길이다. 그중에서도 차강노르에서 홉스굴까지 12시간이나 달려야 했던 비포장도로는 내 생애 가장 고단한 여정으로 기록될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답답했던 가슴속을 한방에 뻥 뚫어줬다. 도로 곳곳엔 ‘어워’라는 이름의 파란색 천을 두른 돌무덤이 있었다. 샤머니즘의 강한 전통을 보여주는 어워의 돌 사이사이에는 음식과 돈이 놓여 있었는데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도 이 어워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며 기도를 드렸다. 거친 비포장 길을 달리다 차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차를 타고 가지만 말을 타고 가는 것처럼 끝없이 요동치던 길. 어이쿠, 어이쿠 비명을 지르다 나중엔 그마저 체념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어쩌면 이 길을 가장 잘 만끽하는 방법은 칭기즈칸을 떠올리며 말 타고 달리는 상상을 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옛 수도 하르호린에서 만난 에르덴조 사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은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모든 종교를 허락하고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옛 수도 하르호린의 폐허 위엔 1585년에 세워진 몽골 최초의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다. 바로 에르덴조 사원. 108개의 불탑으로 성벽과 같은 벽을 이루고 있어 한참을 걸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광활하다. 사원 주변에서는 9세기경 투르크 기념비와 8세기경 위구르 왕국 수도의 폐허 등 역사적 유적도 만날 수 있다. 대륙 횡단용 캠핑카를 타고 이동하는 유럽의 단체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다. 어떻게 저들이 몽골 한 귀퉁이까지 왔을까 신기했지만 칭기즈칸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홉스굴의 비 내리던 밤과 차탄족 소녀
‘푸른 진주’라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 홉수굴 근처 타이가 숲에서 진정한 노마드로 불리는 차탄족을 만났다. 전 세계에 약 2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차탄족은 순록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영하 40℃의 날씨에도 순록의 등에서 잠을 잘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부동산이 부의 상징이지만 이들 유목민들에겐 순록의 숫자가 부의 상징이다. 오르츠라 불리는 천막은 게르와 다르게 생겼는데 에스키모족의 원추형 천막 티피와 닮았다. 여름엔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거나, 손수 만든 전통 장신구와 사탕, 꿀, 옷을 팔기도 한다. 전통 복장을 다소곳이 차려입은 차탄족 소녀의 수줍은 미소가 오랜 여운으로 남아 있다.
단순한 삶을 보여주는 땅
전통 음식 허르헉을 끓이는 강인한 인상의 몽골 여인. 밤새도록 난롯불이 꺼지지 않도록 두세 시간 간격으로 야크 똥을 넣어주던 무뚝뚝한 아들. 평생 번 돈을 주고 산 스타렉스를 애지중지 닦으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하던 무뚝뚝한 아트레 아저씨. 그들의 웃음은 요란하지 않았고 그만큼 귀한 감동을 주었다.
노을이 지고 칠흑 같은 밤이 오자 별이 쏟아지더니 어느새 여명이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몇 곳이나 될까? 짜릿한 볼거리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몽골 여행이 허무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하루 종일 초원과 구릉을 달려 게르에 도착한 뒤 작은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일, 게르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일, 바람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못해본 경험을 하면 그만큼 인생이 레벨업되는 것”이라던 어느 일본 영화의 대사처럼 한 번쯤은 복잡한 삶의 시간을 멈추고 단순한 야생의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한 여행지로서 몽골은 최고의 땅이 아닐 수 없다.
도보여행은 조금 특별해야 한다. 많은 곳을 바쁘게 보는 것보다는 좀 더 느리고 여유로운 여행, 사람이 무조건 많은 관광지보다는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행, 단순히 사진만 찍고 돌아서기보다는 그 지역의 풍경과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시니어 전문 테마여행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링켄리브와 함께 준비했다. 천천히 길 위를 걸으며 문화와 예술,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일곱 색깔의 여행지, 시니어가 걷기 좋은 길이다.
스톡홀름 감라스탄 옛길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의 감라스탄 지역은 약 800년 전에 조성된 거리로 중세의 건축물과 왕실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느린 걸음으로 천년 세월을 견딘 돌길을 걷고 있으면 북유럽 고유의 정경이 그림 같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이라는 명성답게 감라스탄 주변으로 헬게안스홀멘 등 작은 섬들이 물 위에 떠 있다.
3대 피오르 트레킹
수만 년 동안 빙하가 조각한 장엄한 협곡을 ‘피오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특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오르가 많기로 유명한데, 이 중 대표적인 3대 피오르(시에라볼텐, 프레이케스톨렌, 트롤퉁가)를 등산하는 트레킹 코스는 살면서 꼭 한 번 걸어볼 만한 길이다. 걸음마다 진귀한 꽃이 꼬리를 물고, 등반 끝에는 마치 지구가 아닌 것 같은 피오르가 황홀하게 펼쳐진다.
코펜하겐 아트 스트리트
감라스탄이 북유럽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길이라면 코펜하겐 도심의 예술 거리는 북유럽 감각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감성과 소박하지만 값진 행복을 의미하는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는 바쁘게 살아온 한국의 시니어에게 삶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코펜하겐의 디자인센터, 세계적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의 공방, 가구 갤러리를 걷다 보면 북유럽 문화 예술 및 라이프스타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토스카나 사이프러스의 정경
프로방스가 예술가들이 흠모했던 곳이라면 전 세계 문인과 작가들이 찬사를 보낸 지역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다. 태양의 땅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따뜻한 햇살이 막힘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른 길 양옆으로 길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잘 익은 와인과 한없이 넓은 와이너리, 풍성한 올리브나무가 천국을 상상하게 한다.
남부 절경의 해안마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들어선 작은 마을들(소렌토, 아말피, 포시타노)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절경을 선물한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아찔한 절벽과 가슴 탁 트이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절벽 위에 아기자기하게 지은 마을들을 반나절씩 걷고 나면 카프리 해의 맑은 바람이 다정하게 땀을 식혀준다.
프로방스 작은 예술마을 길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파리를 떠올리지만 사실 수많은 예술가와 명사가 사랑하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지역은 따로 있다. 프랑스의 찬란하고 눈부신 남쪽 땅 프로방스. 고흐부터 피카소, 샤갈, 마티스, 세잔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감을 얻고 말년에 정착했던 곳이다. 아를, 액상프로방스, 생폴드방스, 그라스 등 작고 동화 같은 마을을 걷고 있으면 따뜻한 남프랑스의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삶의 영감은 더욱 풍성해진다.
기적의 알펜루트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알펜루트는 봄가을에 각기 다른 정경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오죽하면 기적의 알펜루트라 불릴까. 봄에는 자그마치 높이 22m의 설벽이 30km에 걸쳐 펼쳐지고, 가을에는 온갖 단풍이 세상을 가득 물들인다. 잠시이지만 이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은 알펜루트를 잊지 못해 다시 방문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걷기좋은길 #해외 #여행
1995년, 핸드볼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최초로 동양인 선수가 등장했다. 13년 뒤 그는 독일인들이 핸드볼의 신이라 칭송하는 영웅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과 동고동락한 윤경신(46) 감독을 만났다.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의 오전 훈련이 한창인 의정부종합운동장, 그곳에서 윤경신 감독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m가 넘는 키 덕분에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옆에 서니 마치 개미가 된 기분이랄까. 앉으면 괜찮을까 싶어 서둘러 카페를 찾았다. 웬걸… 앉아서도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아버지 181cm, 어머니 170cm, 누나 174cm, 남동생이 194cm이니까 가족이 다 크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저희 가족을 보면 흠칫 놀라곤 해요.”
그는 203cm로 가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중학교 때부터 키가 빠르게 크기 시작했는데 2학년 땐 3주 만에 11cm가 자라 거인병을 의심했을 정도라고.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90cm만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큰 키의 장점이요? 별로 없어요. 공기가 맑나?(웃음) 오히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불편하고 맞는 옷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하죠. 그래서 어릴 땐 큰 키가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핸드볼 선수인 그에게 큰 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장점이었다. 2m 3cm 장신이 꽂아 내리는 시속 120km의 속사포를 막아낼 사람은 없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득점왕,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며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핸드볼 정상에 오르다
우리나라 3대 스포츠가 축구, 야구, 농구라면 유럽에선 핸드볼이 그중 하나다. 특히 독일의 핸드볼 분데스리가는 전 세계 핸드볼 리그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1부 리그 18구단, 2부 리그 20구단 등 남녀 1, 2부를 통틀어 60여 개가 넘는 팀과 시합할 때마다 경기장을 꽉 채우는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그 인기를 증명해준다. 1995년, 핸드볼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인 분데스리가에 윤경신이 진출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성적이 좋다, 전통 있는 팀이다 해서 들어갔죠. 근데 가서 보니까 성적이 밑바닥이더라고요. 그 당시 16구단 중에서 13~14위를 다투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들어간 굼머스바흐 핸드볼팀은 1부 리그에 겨우 발을 걸치고 있던 최하위 팀 중 하나였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뻔했던 굼머스바흐를 살려낸 주인공이 바로 윤경신. 그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파워풀한 공격을 앞세워 굼머스바흐를 3위의 막강 팀으로 만들었다. 유럽 선수들 가운데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한국에서 핸드볼을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무기였어요. 탄탄한 기본기와 경기 기술을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죠. 유럽 선수들보다 뒤처지는 웨이트 부분은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보완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몸싸움에서 항상 밀려 나가떨어지곤 했거든요. 동료들이 오죽했으면 절 북한 괴뢰군이라고 불렀겠어요.(웃음)”
그는 첫 시즌이던 1996-1997시즌부터 2001-2002시즌까지 연속 여섯 시즌 득점왕, 다시 2003-2004시즌과 2006-2007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역대 분데스리가 최다 골을 기록했다. 그중 2000-2001시즌엔 324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유일한 300골 이상의 기록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2002-2003시즌 득점왕을 놓친 이유가 유럽 선수들이 동양인에게 계속 득점왕을 내주는 게 자존심 상해서 한 선수에게 7m 드로우를 몰아줘 득점왕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독일에 갔을 땐 텃세성 파울이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 마늘 냄새가 난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 고정관념을 깨주기 위해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마늘이 들어간 불고기랑 잡채를 해주셨거든요. 애들이 밥을 다 먹으면 제 역할은 술 게임을 알려주는 거였어요. 독일엔 술 게임 문화가 없다 보니 ‘369’나 ‘007빵’ 같은 걸 가르쳐주면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술 게임을 하면서 서로 친해졌던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독일과의 작별
2006년 윤경신은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는 굼머스바흐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굼머스바흐의 구단주가 바뀌면서 그의 연봉을 삭감하는 등 부당한 대우가 많았다는 것.
“이적할 땐 배신감을 느껴서 번호도 7번에서 77번으로 바꿨어요. 그 당시엔 21번 아래 번호 선수가 주축을 이뤘는데 제가 높은 숫자로 바꾼 이후엔 다들 저를 따라 하더라고요. 나 때문에 유행한 게 맞나…?(웃음)”
2008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서 가진 마지막 경기에서 공교롭게도 함부르크와 굼머스바흐 두 팀이 맞붙었다. 걱정과는 달리 굼머스마흐 팬들도 그의 마지막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함부르크가 두 골 차로 이겼어요. 굼머스바흐를 상대로 제가 여덟 골인가 넣었죠. 유럽 사람들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이 사태를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굼머스바흐 팬들이 마지막이라고 예우를 많이 해준 것 같아요. 끝날 때 박수도 쳐주고 북도 쳐주고. 특히 대형 유니폼을 만들어서 작별인사해주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독일에서 윤경신의 인기는 ‘한국은 몰라도 윤경신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아직도 ‘핸드볼의 신’, ‘득점기계’, ‘구기종목의 전설’이라는 연관검색어들이 뜬다. 문득 그도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는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는 거 좋아해요.(웃음) 사실 안 좋은 기사가 있으면 어떡하나 더 걱정하는 편이죠.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기수로 섰는데 하필 태극기가 바람에 뒤집힌 순간에 찍힌 사진이 뉴스로 나갔더라고요. 아휴… 욕 엄청나게 먹었죠. 그래도 종종 제 이름 검색해보고 새로운 기사 나오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핸드볼 선수에서 감독으로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은 지금까지 2014년을 제외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강팀이다. 윤경신 감독은 지난 2013년, 두산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임 첫해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줬다.
“처음엔 두산이 날 감독으로? 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승승장구하는 팀인데 과연 내가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컸죠. 한편으론 ‘스타플레이어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인 2014년 지금은 해체한 웰컴론 코로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 없는 두산에게 준우승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첫해에 우승하니까 나태해진 거죠. ‘아 이제 됐어, 이렇게 하면 2년 차에도 우승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만했던 게 결국 패배로 이어졌어요. 그래도 한 번 넘어져봤기 때문에 3년 차, 4년 차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경신 감독은 우승의 비결로 선수들과의 소통을 꼽았다. 비시즌에는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술도 마시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핸드볼과 함께한 지 어언 30여 년.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아직도 핸드볼이 좋을까.
“중간중간 농구해라, 배구해라 유혹이 많았었는데 핸드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 제 자신을 칭찬해요. 핸드볼을 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명성과 명예를 얻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을 했지만, 정말이지 매 순간 행복했어요.”
다가오는 11월에 국내 핸드볼의 최강자를 가리는 핸드볼코리아리그가 열린다. 경기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윤경신, 그의 다섯 번째 우승 도전을 응원한다.
도보여행은 조금 특별해야 한다. 많은 곳을 바쁘게 보는 것보다는 좀 더 느리고 여유로운 여행, 사람이 무조건 많은 관광지보다는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행, 단순히 사진만 찍고 돌아서기보다는 그 지역의 풍경과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시니어 전문 테마여행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링켄리브와 함께 준비했다. 천천히 길 위를 걸으며 문화와 예술,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일곱 색깔의 여행지, 시니어가 걷기 좋은 길이다.
북유럽
Sweden
스톡홀름 감라스탄 옛길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의 감라스탄 지역은 약 800년 전에 조성된 거리로 중세의 건축물과 왕실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느린 걸음으로 천년 세월을 견딘 돌길을 걷고 있으면 북유럽 고유의 정경이 그림 같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이라는 명성답게 감라스탄 주변으로 헬게안스홀멘 등 작은 섬들이 물 위에 떠 있다.
Norway
3대 피오르 트레킹
수만 년 동안 빙하가 조각한 장엄한 협곡을 ‘피오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특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오르가 많기로 유명한데, 이 중 대표적인 3대 피오르(시에라볼텐, 프레이케스톨렌, 트롤퉁가)를 등산하는 트레킹 코스는 살면서 꼭 한 번 걸어볼 만한 길이다. 걸음마다 진귀한 꽃이 꼬리를 물고, 등반 끝에는 마치 지구가 아닌 것 같은 피오르가 황홀하게 펼쳐진다.
Denmark
코펜하겐 아트 스트리트
감라스탄이 북유럽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길이라면 코펜하겐 도심의 예술 거리는 북유럽 감각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감성과 소박하지만 값진 행복을 의미하는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는 바쁘게 살아온 한국의 시니어에게 삶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코펜하겐의 디자인센터, 세계적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의 공방, 가구 갤러리를 걷다 보면 북유럽 문화 예술 및 라이프스타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서유럽
Italy
토스카나 사이프러스의 정경
프로방스가 예술가들이 흠모했던 곳이라면 전 세계 문인과 작가들이 찬사를 보낸 지역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다. 태양의 땅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따뜻한 햇살이 막힘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른 길 양옆으로 길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잘 익은 와인과 한없이 넓은 와이너리, 풍성한 올리브나무가 천국을 상상하게 한다.
남부 절경의 해안마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들어선 작은 마을들(소렌토, 아말피, 포시타노)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절경을 선물한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아찔한 절벽과 가슴 탁 트이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절벽 위에 아기자기하게 지은 마을들을 반나절씩 걷고 나면 카프리 해의 맑은 바람이 다정하게 땀을 식혀준다.
France
프로방스 작은 예술마을 길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파리를 떠올리지만 사실 수많은 예술가와 명사가 사랑하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지역은 따로 있다. 프랑스의 찬란하고 눈부신 남쪽 땅 프로방스. 고흐부터 피카소, 샤갈, 마티스, 세잔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감을 얻고 말년에 정착했던 곳이다. 아를, 액상프로방스, 생폴드방스, 그라스 등 작고 동화 같은 마을을 걷고 있으면 따뜻한 남프랑스의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삶의 영감은 더욱 풍성해진다.
아시아
Japan
기적의 알펜루트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알펜루트는 봄가을에 각기 다른 정경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오죽하면 기적의 알펜루트라 불릴까. 봄에는 자그마치 높이 22m의 설벽이 30km에 걸쳐 펼쳐지고, 가을에는 온갖 단풍이 세상을 가득 물들인다. 잠시이지만 이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은 알펜루트를 잊지 못해 다시 방문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시니어를 위한 테마여행사 ‘링켄리브’
느림의 미학이 있는 여행, 삶의 여유와 행복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을 지향하는 국내의 대표적인 테마여행사 링켄리브는 시니어를 위한 다양한 여행을 기획, 진행하고 있으며 그동안 아무나 쉽게 떠날 수 없었던 여행들을 선보이고 있다. 시니어가 걷기 좋은 도보여행,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여행,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있는 테마여행, 유명 작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 등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숲으로 가는 산언저리마다 눈부시다. 밭두렁에 애기똥풀 흐드러져 숫제 샛노란 화단이다. 다랑논 이고 있는 석축에 어린 그늘이 푸르도록 짙은 건, 5월 한낮의 봄 햇살이 밝아서다. 민들레는 수과(瘦果)를 매단 채, 건듯 부는 미풍에 갓털을 휘날린다. 진초록으로 이미 농익은 초목 잎사귀들. 산야에 뿌리박은 식물마다 의기양양하다. 길로 나다니는 사람만이 계절을 타 들썩인다.
개심사(開心寺) 일주문을 지나자, 일변 눈으로 가득 차오르는 소나무들. 고찰(古刹)치고 들머리 풍광 허술한 곳이 드물다. 개심사 숲길도 기중 반열에 든다. 솔숲에 불그레한 빛살이 어린다. 적송(赤松)들이어서다. 미끈한 붉은 살갗에 건강한 지체, 게다가 저마다 미묘하게 굽어 허리를 요리저리 비트니 수려하다 못해 관능적이다. 흐뭇하면 안고 싶고, 심취하면 안기고 싶어진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굽고 휜 소나무는 내심 안도할 게다. 쭉쭉 곧게 자란 나무들보다 더 온전하게 수명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목수의 도끼날을 피할 수 있어서다. 목재로서는 별 쓸모가 없게 생긴 덕분이다. 목수의 눈엔 무용지물이지만 소나무 입장에선 천행이다. 그게 나무만의 일이랴. 우리네 인생사에도 자주 적용되는, 일종의 이치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에 실린 메시지를 생각해보라.
물매진 들머리 숲길, 그 이후로는 돌계단길이 가지런하다. 여기서도 소나무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펼쳐진다. 나무들의 청신한 향이 그윽하게 번진다. 개심사 전각들 지붕마다 초록이 서린다. 초록 숲 안의 산사여서다.
뜰에 걸린 연등들로 경내가 환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면 석탄일이다.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꾸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연등공양이란 부처를 숨 쉬고 꿈꾸고 그리는 일이겠지.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고, 그리해서 나를 찾아가는 기도일 게다.
천년도량의 위세에 걸맞게 개심사 전각들은 방정하거나 준수하다. 혹은 허심히 잘 늙은 고로(古老)처럼 고졸하다. 전각 속엔 나무가 박혀 있다. 휜 채로, 비틀어진 채로, 그러니까 굽은 원목 그대로를 베어 말려 기둥을 삼고 들보로 채택했다. 주야로 법당의 향훈을 취할 저 고색창연한 재목들. 남벌 탓에 곧은 목재를 구할 수 없어 굽은 나무를 그냥 그대로 썼을까? 쓸모없어 보였을 나무가 쓸모 있게 쓰였다. 거룩한 불상과 동거하며, 더 온전히 살아남았다. ‘곡즉전(曲則全)’이라, ‘굽어서(曲) 온전할(全) 수 있다’는 묘리를 전갈한 이는 노자였다.
개심사는 실로 수목의 향연장이다. 그 친숙한 명성으로 한 벼슬 걸친 거목들의 장원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전나무, 서어나무, 왕벚나무…. 국내엔 이곳에만 있다는 청벚나무에선, 시나브로 봄이 가건만 여전히 끝물 꽃잎들 분분히 낙화한다.
개심사를 벗어나 다시 숲길을 오른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들. 곧게 뻗어 하늘 한 자락 움켜쥐는 활엽 교목들. 온갖 나무들이 빼곡 들어차 기세를 돋운다.
인간의 도시는 삼엄한 사각의 링을 닮았다. 나무들은 코피를 쏟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경쟁을 능사로 삼는 대신,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한다. 바위 벼랑에 위태롭게 매달린 소나무만 해도 그렇다. 곰팡이와 공생해 균근(菌根)을 만들고, 그 균근에서 발달한 팡이실로 바위 틈새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소나무는 공생과 상생, 인류의 그 오래된 이상(理想)을 소리 소문 없이 오롯이 구가한다.
숲길에 하오의 놀빛이 어린다. 폐사지 보원사지에 간신히 남은 석탑에도 황혼녘 주황물이 흥건하다. 간절한 탑돌이를 하며 합장 비손했을 옛사람들, 지금은 천상의 어느 푸른 공간에 머무시나. 옛사람들에겐 나무도 석탑과 매한가지였다. 성황당 신목(神木)에 의지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을 천상에 탄원했다. 삶이, 영혼이, 견딜 수 없이 슬플 땐, 조용히 숲에 들어가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서 숲은 일쑤 정결한 지성소였다. 그들은 숲에서 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탐방 Tip
개심사와 보원사지를 잇는 숲길은, 충남 내포 지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내포문화숲길’ 코스들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구간이다. 개심사에서 보원사지까지는 약 2km 거리. 산마루를 넘자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유하지만 가파르지 않다. 보원사지에서 1.3km를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
71세라니? 전혀 믿기지 않는다. 주혜란 박사의 몸매와 패션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자칭 타칭 한량인 이봉규가 그동안 수많은 여인을 만나봤지만 70세가 넘은 섹시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딱 달라붙는 원피스에 망사스타킹을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언뜻 스치듯 보면 40대로 보인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스테이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최소한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한량의 잣대로 좀 더 솔직하게 외모를 분석한다면 몸매는 30대이고 얼굴은 50대, 목소리는 60대로 보인다. 71세에 신인 가수로 활동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인생은 70부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흑인들이나 취할 수 있는 몸짓을 한다. 얼마 전 그녀의 하우스콘서트에서 라운지를 꽉 메운 100여 명의 관객들은 그녀의 노래와 춤과 섹시한 모습에 흠뻑 취했다.
주혜란 박사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고 집안이 대단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금 주혜란의 70대 가수 인생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콘서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재능도 대단하고 용기도 높이 평가하고 즐길 줄 아는 철학도 존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마치 ‘Bravo My Life!’를 온몸으로 토해내는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살아온 이력과 집안 내력을 알면 지금 스테이지에서 열창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하고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충북 청원군에 있는 작은 마을 보건소에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보건소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후 UN과 워싱턴 정가에서 에이즈 퇴치운동 등 각종 국제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친화력과 유창한 영어 소통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힐러리 클린턴, 카터 전 대통령 부부와도 인연이 깊다.
김대중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는 누나
1984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나 친해졌다. ‘오빠’라는 호칭으로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임창렬(전 경기지사) 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결혼을 망설일 때도 DJ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똑똑한 사람 같다”는 DJ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임창렬 전 지사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살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임창렬 전 지사와 부부 관계일 때 정치적으로 성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유명해진 탓에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받고 살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천당과 지옥을 한꺼번에 오간다. 그 당시 구속도 당하면서 “이것이 정치구나!” 통감했다고 회상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또다시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고 행복한 그녀의 지금 삶을 방해하기 싫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당시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양평 강가에서 스트레스 풀려고 목이 터져라 노래하면서 돌아다녔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주혜란의 모습에서 처음 어두운 표정이 묻어나온다.
부친 주인호 박사 그리고 100세 모친
주혜란이라는 이름과 ‘Helen Chu’라는 영문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지어줬다고 한다. 예방의학계의 개척자이자 주혜란 박사의 부친인 주인호 박사는 27세 때인 미군정 시기 의정국장(醫政局長, Medical Police) 자리에 있었는데 인연이 된 이승만 박사가 딸(주혜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인호 박사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이라는 단어를 한국에서 처음 사용했고 한국에 노인대학을 최초로 설립한 분이다(2000년 80세로 타계). 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분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부터 1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전염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바이러스 분리에 성공한 의학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정도로 세계가 알아주는 의사였는데도 “아버지는 평생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시고 검소한 삶을 사신 분이었다”고 딸 주혜란은 말한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존경심이 저절로 묻어나온다.
주인호 박사의 제자 중 한 명은 2000년 8월 9일 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3남 4녀 모두 해외로 유학을 보냈기 때문에 일부에선 재력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18평 자택에서 살고 있다. 무소유의 철학을 평생 실천하고 사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신여성 엘리트로서 아버지 못지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울여자의대(현 고려대 의대 전신) 출신의 의사였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올해 100세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에 피아노와 가야금을 연주할 정도로 총명했고 혼자 미국 여행을 할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3월 초에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아 지금은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갑자기 치매가 발명한 이유는 올해 미국을 방문하려니까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갑자기 가져오라 하더라는 것. 어머니는 “내가 의사인데… 내가 건강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데… 100세가 되었다고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요구하다니…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치매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하고 주혜란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71세 된 딸이 100세 어머니가 조만간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찾는다 한다. “70년 동안 ‘엄마’를 부르며 살다가 엄마의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슬프다”고 말하며 그녀의 눈은 어느새 충혈된다.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분위기를 바꿀 겸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100세나 되시고 작년까지 미국 여행도 다니실 정도로 건강했으면 어머님이나 딸인 주 박사도 여한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욕심이 크신 것 아닙니까?”라는 이봉규의 우문(愚問)에 주혜란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몇 년 만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를 띠웠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었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지역 5개 나라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연천 통증의학과에서 9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심히 환자를 돌보셨기 때문에, 비록 100세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은 사실을 어머니나 주혜란 박사도 믿지 못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100세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셨기 때문일까. 주혜란은 늘 “노인들이여, 움직여라, 행복할 때까지!”를 주창하고 다닌다. 대한노인회에서 의료봉사단장을 비롯해 문화, 예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서울시노인회의 행복건강이사를 맡아 ‘노인행복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본인도 71세의 노인이지만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신바람 나게 생활하면 젊어진다”고 힘을 주어 강조한다.
유식하고 에너지 넘치고 늙음을 거부하는 주혜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멋진 말을 남긴 적이 있다.
“If I rest, I rust!(쉬면 녹슨다). 이 말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이 말에 100% 동감합니다. 노년이라는 상황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봉규가 아무리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주혜란의 과거 사교계와 정치계의 경력을 이제 와서 가타부타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71세의 나이에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신바람 나게 한바탕 놀고 있는 그녀가 지금은 무척 존경스럽다.
녹음이 짙은 6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전시) 샤갈 러브 앤 라이프展: 그것은 사랑의 색이다
일정 6월 5일~9월 26일 장소 한가람미술관
이스라엘 박물관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샤갈(Chagall)과 그의 딸 이다(Ida)가 직접 기증하거나 후원자로부터 기증받은 샤갈 작품 중 150여 점을 소개한다. 앞서 이탈리아 로마와 카타니아에서 전시가 이뤄져 총 30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한 바 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총 7섹션(초상화, 나의 인생, 연인들, 성서, 죽은 혼, 라퐁텐의 우화, 벨라의 책)으로 구성해 샤갈의 사랑과 삶을 집중 조명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일정 6월 8일~8월 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출연 케이윌, 윤형렬, 차지연 등
추한 외모를 지닌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와 아름다운 집시 여인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룬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98년 프랑스 파리 초연부터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어 버전은 2008년 초연 이후 올해 10주년을 맞이했다. 초연 캐스트인 윤형렬과 최수형의 복귀, 실력파 가수 케이윌과 배우 차지연 등의 합류로 기대를 모은다.
(무용) 발레 춘향
일정 6월 9~10일 장소 CJ토월극장 출연 강미선, 이현준, 홍향기 등
한국의 아름다운 고전 ‘춘향전’이 발레로 재탄생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대표작이자 두 번째 창작 발레인 ‘발레 춘향’이 4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 공연에서 눈여겨봐야 할 장면은 춘향과 몽룡의 ‘긴장과 설렘, 슬픔과 애틋함, 기쁨과 환희’라는 세 가지 유형에 사랑의 감정을 아름다운 몸짓의 언어로 담아낸 2인무다. 수석무용수 강미선과 이현준, 홍향기와 이동탁이 각각 춘향과 몽룡으로 분해 열연을 펼친다.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일정 6월 12일~9월 2일 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출연 서현철, 오용, 장이주, 양소민 등
100세 생일날 잠옷 차림으로 양로원을 탈출한 ‘알란’이 우연히 갱단의 돈 가방을 훔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다.
(영화) 아일라
개봉 6월 21일 장르 드라마, 전쟁 감독 칸 울카이 출연 김설, 이스마일 하지오글루
한국 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양국에서 공동으로 제작한 영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참전 용사 ‘슐레이만’과 전쟁으로 고아가 된 소녀 ‘아일라’가 휴전 이후 60년 만에 재회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전시) 니키 드 생팔展: 마즈다 컬렉션
일정 6월 30일~9월 25일 장소 한가람미술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은 1961년에 발표한 ‘사격회화(shooting painting)’라는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후 그는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작품처럼 풍만한 체형의 여인을 온갖 자세로 표현한 ‘나나(Nana)’ 연작 작업에 주력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마즈다 컬렉션의 대표 작품 127점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