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와 ‘시니어’ 하면 여전히 탑골공원을 떠올리는가?
그러나 이제는 편견을 거둘 때가 됐다. 중장년을 위한 즐길거리, 먹거리, 볼거리가 즐비한 지붕 없는 아지트, 그 다채로운 경험의 시작은 종로3가역 5번출구를 나서면서부터다.
종로3가역 5번출구 #1 송해길
1. 송해길의 마스코트 ‘송해 동상’ 종로3가역 5번출구
2016년 명예도로로 지정된 ‘송해길’(수표로)은 종로2가 육의전빌딩부터 낙원상가에 이르는 240m 구간이다. 50년 넘게 종로구 낙원동 일대를 제2고향처럼 여기며 활동했던 방송인 송해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거리다. 그 명성답게 곳곳에 송해 캐리커처가 붙은 가게들이 눈에 띈다. 종로3가역 5번출구로 나오면 거리의 상징인 송해 동상과 팻말을 바로 찾을 수 있다.
2. 젊은 시절 속으로 ‘실버영화관 추억을 파는 극장’ 삼일대로 428
한국 영화 중흥기를 대표하는 개봉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단 하나의 극장이 있다. 바로 옛 허리우드극장인 ‘추억을 파는 극장’이다. 2009년 실버영화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종로거리를 추억하는 시니어의 발길을 돌려놓았다. 55세 이상이면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타 상영관에 비해 자막이 크고 곳곳에 손잡이를 설치해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를 배려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바깥 활동을 꺼리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5월부터는 ‘종로는 맑음존’을 설치해 운영할 계획이다. 추억을 파는 극장 바로 옆에 마주해 있는 낭만극장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유리상자, 전영록이 출연했으며 김세레나, 송해 등의 공연도 이뤄진다.
3. 송해길 대표 맛집 ‘종로진낙지’ 수표로 122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먹방요정 이영자가 정우성과 함께 방문해 화제가 됐는데 원래도 송해길을 대표하는 맛집이다. 낙지볶음과 산낙지철판볶음 등이 소문날 만큼 맛은 보장됐으니 송해길 방문 시 잊지 말고 드셔보시길.
4. 노래 찐하게 부르고 싶다면 ‘송해길 가수 김미나 라이브 카페’ 수표로 125
성인가요 ‘만날사람’을 부른 가수 김미나가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 입소문 난 곳이다. 술 한잔 마시고 스트레스도 풀고, 노래 연습하는 장소로 좋다. 노래동호회나 출판기념회, 시낭송회 등 모임 공간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5. 따끈한 차 한잔 마셔요 ‘라이브 카페 스타하우스’ 수표로 120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카페이지만 평일 낮시간대에는 커피, 생강차, 유자차 등을 마시러 오는 손님도 많다. 코미디언이자 전문 MC인 김종수 사장이 평생 군대, 경찰서, 교도소 등지로 위문공연 다니며 받은 각종 상패가 벽면에 가득하다. 위문공연으로 사장님이 자리를 비우면 미모의 아내 구현숙 씨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
6. 퇴근길 추억의 음악을 청하다 ‘청춘1번지’ 수표로 108
장민욱, 차영민, 강해룡 3명의 베테랑 DJ가 돌아가며 음악 선곡을 한다. ‘추억 더하기’ 메인 DJ 장민욱 씨도 오후 6시 이후엔 ‘청춘1번지’로 이동한다. 소장하고 있는 LP와 CD만 5000여 장. 원하는 음악을 DJ에게 신청해 들을 수 있다. 40~50대 이상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붐비는 시간은 오후 7시 이후다.
7. 색소폰 입문은 ‘효은 색소폰 클럽’ 수표로 107-1
송해길이 시작되는 육의전빌딩 뒤쪽 건물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효은 색소폰 클럽 엔터테인먼트’라고 쓰인 푯말이 보인다. 말 그대로 색소폰을 배우는 곳. 색소폰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힐 수 있다. 송해길에 사람이 와글대는 시간이 되면 남효석 대표가 종로3가역 5번출구로 나와 모임 홍보 차 직접 색소폰 연주를 들려준다.
밤거리의 낭만 ‘포장마차’ 종로3가 5번출구 일대
종로3가 5번출구의 밤 분위기는 ‘포장마차’가 책임진다. 서울에서 잘 알려진 포차거리 중 하나로 중장년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인기다.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면 포차 천막이 하나둘씩 올라가고, 퇴근시간 이후에는 술자리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띤다. 쭉 늘어선 포장마차 중 어느 곳을 가더라도 곰장어, 오도독뼈, 닭발 등 20가지가 넘는 다양한 안주를 즐길 수 있으니,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송해길에서 송해 선생을 만나다
“안녕하세요, 송해입니다! 나들이하기 참 좋은 계절이죠. ‘송해길’ 오시면 2000원으로 든든하게 우거지국밥 한 그릇 드셔보세요. 개그우먼 이영자 씨가 단골인 낙지집도 아주 맛있답니다. 락희거리도 한번 둘러보시고요. 최근엔 익선동 거리에도 젊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때론 사람 구경도 취미로 삼으면 좋지요. 천태만상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재미가 있거든요. 종로에 자주 오셔서 맛난 것도 드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술이 있다.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보드카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 바로 ‘칵테일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마티니(Martini)다.
007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 2006
장르 액션, 모험
감독 마틴 캠벨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에바 그린 등
제임스 본드가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번도 빠짐없이 007 시리즈에 출연(?)한 마티니. 그의 유명한 대사(“보드카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마티니는 보드카를 베이스로 만든 칵테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통 마티니는 보드카가 아닌 진과 베르무트를 함께 ‘저어서’ 만든 칵테일이다. 그렇다면 본드는 왜 젓지 않고 흔들어서 만든 마티니를 선호했을까. 그 이유는 흔드는 과정에서 기포가 생기고, 얼음이 녹아 부드러운 맛을 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유리잔에 담긴 투명한 마티니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데 있다. 이때 진의 비율이 높을수록 ‘드라이(dry)’하다고 표현하는데, 쉽게 말해 드라이 마티니는 진이 많이 들어가 쓴맛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마티니의 섬세한 맛에 빠진 사람은 제임스 본드뿐만이 아니다.
마티니를 사랑한 명사들
윈스턴 처칠 마티니에 베르무트를 얼마나 넣느냐는 질문에 “진만 따른 마티니를 마시며 베르무트는 병만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대답한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줄리아 차일드 요리 연구가이자 요리사였던 줄리아 차일드는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을 1:5로 섞어 마시길 좋아했다. 기존 비율과 정반대여서 리버스 마티니라고 부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을 15:1로 섞어 마셨다. 전력 차가 15배 이상 나지 않으면 전투를 하지 않았다는 몽고메리 장군의 이름을 따 몽고메리 마티니라고 부른다.
린든 존슨 잔을 베르무트로 가득 채운 뒤 버린다. 그렇게 베르무트로 적신 잔에 진을 채워 그만의 마티니를 완성시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직접 마티니를 만들어 장관들에게 대접할 정도로 마티니 애호가였다. 1933년 금주법 해제를 알리면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열린 테헤란 회담 때에도 두 정상들(처칠, 스탈린)과 마티니를 만들어 마셨다.
영화 ‘007 카지노 로얄’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보드카 마티니가 아닌 새로운 마티니를 주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과 보드카, 그리고 키나 릴레이를 얼음과 함께 흔든 뒤 얇은 레몬 한 조각을 올린 ‘베스퍼’ 마티니다. 베스퍼는 본드의 첫사랑이었던 여인의 이름인데, 베스퍼가 본드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Because you’ve once tasted it, that’s all you want to drink.”
“한 번 맛보면 그것만 찾게 될 테니까.”
제임스 본드 덕분에 유명해진 ‘보드카 마티니’, ‘베스퍼 마티니’ 외에도 마티니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 그 맛에 지루할 틈이 없다. 또 다른 대표적인 마티니로 진과 베르무트, 그리고 올리브주스를 넣어 짭짤하게 만든 ‘더티 마티니’가 있다.
조금은 낯선 술, 베르무트
그 명성만 듣고 마티니를 시켰다면 맛을 보고 흠칫 놀랄 수도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베르무트(vermouth)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화이트 와인에 브랜디와 각종 향료를 우려 만든 베르무트는 독특한 향을 자랑한다. 특히 베르무트는 한 번 개봉하면 와인처럼 맛이 변하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힘들다. 코르크 마개를 딴 베르무트를 냉장실에 넣어두면 10주에서 15주 정도 더 보관할 수 있다. 만약 바에 갔을 때 개봉한 베르무트를 냉장고가 아닌 선반에 올려놨다면 그곳에선 마티니 주문을 하지 않는 게 좋다. 대표적인 베르무트 브랜드로는 이탈리아의 ‘마티니(Martini)’와 ‘친자노(Cinzano)’, 프랑스의 ‘뒤보네(Dubonnet)’가 있다.
한밤중에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큰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했다. 아들이 술이 취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집에 왔는데 아버님이 야단 좀 쳐달라는 내용이었다. 길거리에서 비틀거리는 아들을 보고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며느리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 밤중에 시아버지인 내게 고자질하려고 전화를 했을까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경찰의 도움으로 퍽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귀가했다니 다행이다 싶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아들을 호출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술이 센 직장 상사가 강권하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다가 취하게 되었는데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직장 상사가 술을 권하기도 했겠지만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승부욕이 있어 술자리에서는 술로 이겨보려 한다. 나도 젊은 시절 누가 더 센지 한번 붙어보자며 독기를 품으며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한때의 오기였다.
술을 너무 마시면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삼킨다는 말이 있다. 아들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의미로 계영배(戒盈杯)의 이야기를 해줬다. 계영배는 강원도 홍천 사람 우명옥이 만들었는데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다. 과음을 막기 위해 술이 일정 이상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절주배(節酒杯)를 그가 만들게 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며 술의 해악을 깨닫도록 했다.
우명옥은 뛰어난 도공 실력으로 궁궐의 자기를 만드는 광주분원에 발탁되어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면서 명성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기술을 시기한 동료들이 술집으로 끌고 다니며 그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도공에게 생명인 손이 떨리는 수전증까지 앓게 된다. 스승도 그를 내치자 자신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면서 술을 끊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계영배를 만들었다. 이 술잔은 조선시대 후기의 거상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의 손에 들어갔다. 임상옥은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인간의 과욕을 경계하면서 조선시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상으로 거듭났다. 이 술잔이 깨졌을 때 우명옥의 목숨도 끊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술을 경계하기 위해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
소설가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라는 작품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아내가 누가 술을 권했냐고 묻자 남편은 “부조리한 사회가 술을 권한다”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은 말 상대가 되지 않는 아내를 뿌리치며 비틀거리며 또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버린다. 사회가 술을 권한다 해도 술 마신 사람의 건강만 나빠진다. 술은 간에도 치명타를 입히지만 관절도 병들게 한다. 술을 이기는 천하장사는 없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장수하는 걸 나는 못 봤다.
술은 적당히 마셔야 삶의 윤활유가 된다. 인간관계에서 적당히 오가는 술잔은 뇌를 기분 좋게 해 대화도 풍성하게 하고 친밀도도 높여준다. 문제는 적당한 기준을 늘 넘어선다는 데 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분위기에 들떠 과음을 하는 것이다. 또 술에 취하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도 하게 된다. 참을성이 약해져 갑자기 욱하면서 사고를 치기도 한다. 술에서 깬 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두가 술의 해악이다. 직장에서 평소 얌전하고 일도 착실히 하던 사람이 술자리에서 상사에게 대들어 그동안 쌓아온 점수를 다 까먹는 것을 보기도 한다.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다. 그러니 술을 마실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계영배를 품자.
4) 데이비드 워나로비치(David Wojnarowicz, 1954~1992년)
화가, 사진작가, 영화제작자, 공연예술가, 에이즈 인권활동가로 활동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가족에게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6세에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했다.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했고 샌프란시스코와 파리에서 몇 달간 살다가 1978년에 이스트 빌리지에 정착했다.
이스트 빌리지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첫 멤버로 1980년대 초에 시빌리안 워페어, 클럽 57, 그레이시 맨션, 패션 모다, 림보 라운지 같은 전설적 공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85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그라피티 쇼’를 했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 등지에 그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38세에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투병 중에도 도발적인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5) 쳉 퀑 치(Tseng Kwong Chi, 1950~1990년)
홍콩에서 태어나 16세에 캐나다로 이주했다. 파리 명문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1년 공부한 후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 1978년 뉴욕으로 이주해 에이즈로 40세에 사망하기까지 이스트 빌리지에 거주하며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키스 해링의 ‘절친’인 그는 해링의 부탁으로 4만 장의 ‘키스 해링 아카이브’를 제작했다.
챙 퀑 치는 뉴욕에서 경험한 다민족주의, 대량 소비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애매모호한 외교관’을 예술적 페르소나로 설정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작업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작업한 ‘서양과 만난 동양’ 또는 ‘탐험 연작’은 서양이 아시아에 품는 순진무구한 선입견과 무지를 조롱하고, 서구라는 근대적 구성물이 동양과 어떤 연관 속에 구성되는지, 서구라는 상상 개념이 상징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어떻게 동양을 신비화하고 배제했는지를 묻는다. 챙 퀑 치는 중국인임을 적극 강조했지만 중국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6)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년)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를 가리켜 “흑인으로서 최초로 성공한 천재 아티스트, 검은 피카소”라 표현했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함께 3대 팝 아티스트로 불리며, 한때 마돈나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을 인정해줬던 앤디 워홀 사망 후에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바스키아는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가 미술 전문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7세 때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해 부모가 이혼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15세 때부터 가출을 반복하며 거리 생활을 했다. 뉴욕 거리와 지하철에 낙서화를 하며 이스트 빌리지의 신표현주의 경향을 주도했다.
노숙자들과 공원 벤치에서 숙식하고 구걸하고 마약을 거래했다. 작업 초창기에 손으로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뉴욕 거리와 상점에서 1~3달러에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7장의 엽서 시리즈 ‘무제(안티프로덕트 엽서)’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바스키아의 엽서 시리즈는 앤디 워홀이 구매했는데, 당시 워홀과 함께 있던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엽서를 사지 않았다가, 훗날 바스키아에게 그림을 달라고 애걸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7) 버스터 클리브랜드(Buster Cleveland, 1947~1998년)
소호 거리에서 우표 크기의 콜라주 작품을 판매하다 리무진을 빌려 소호 거리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리무진 쇼’를 열어 유명해졌다. 가난과 무명이 창조력을 발휘한 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장난감, 자동차 후드 장식품 등 일상 재료를 이용한 콜라주 작품을 우편으로 보낸 ‘메일아트’가 그것이다. 메일아트는 가난한 예술가가 기성 제도권 전시 공간인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벗어나 대안 네트워크 공간에서 대중과 소통하면서 작품을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자, 국가나 기관으로부터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방식이기도 했다.
그가 애용한 재료는 미술잡지 ‘아트포럼’ 표지였다. 또 벼룩시장에서 싼값으로 구매한 제품들,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 이스트 빌리지 작가들 사진, 담뱃갑, 거리에서 주운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은 재료 특성에 따라 변주됐는데, 누구든 월 구독료 100달러 혹은 평생구독료 1000달러를 내면 우편으로 그의 작품 ‘Art For Um’을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장은 월요일 휴관한다. 현대미술은 도슨트 설명 없이는 온전한 이해가 어렵다. 도슨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가길 권한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전시기간: 2018년 12월 13일~2019년2월24일)
‘반항의 거리, 뉴욕’(전시기간: 2018년 12월 21일~2019년 3월 20일)
‘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전시기간: 2018년 11월 24일~2019년 3월 17일)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전시기간: 2018년10월 3일~2019년 3월 3일)
누구나 젊은 날 짝사랑의 기억을 하나쯤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여학교 시절 바람같이 나타나 어린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교생 선생님으로부터 함께 성탄 연극을 준비하던 교회 오빠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대부분 예방주사 자국처럼 기억의 한 구석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낡아버린 기억은 이젠 나뭇잎 끼워진 책갈피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때론 ‘날카로운 키스’처럼 다가와 운명을 바꿔버리는 짝사랑도 있다. ‘사랑과 운명’을 다룬 작품 중 고전으로 불리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가 그렇다. 체호프의 4대 희곡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수없이 연극으로 공연되어 왔음에도 셰익스피어가 그렇듯 매번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는 연극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틈새에서 용케 찾아낸 남편 덕분에 영화 '갈매기(마이클 메이어 감독, 2018년 작)로 만나게 되었다.
영화는 어느 여름, 호숫가 별장을 무대로 다섯 인물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그들의 사랑 족보를 정리해 보면 별장 관리인의 딸인 마샤(엘리자베스 모스)는 주인집 아들 콘스탄틴(빌리 하울)을 사랑한다. 콘스탄틴은 동네 처녀 니나(시얼샤 로넌)를 사랑한다. 니나도 콘스탄틴을 사랑하지만, 그의 엄마 이리나(아네트 베닝)와 함께 온 연인인 작가 보리스(코리 스톨)에게 끌린다.
사랑의 파열음은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시작된다. 콘스탄틴은 희곡작가를 꿈꾸지만. 아직 역량이 모자란다. 배우가 되기를 소망하는 니나와 작은 시골에서 함께 연습도 하며 꿈을 키우는 도중 성공한 작가 보리스의 등장으로 질투의 화신으로 변한다. 보리스는 이미 명성을 얻고 있음에도 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걱정으로 초조하다. 그는 니나를 보는 순간 새 작품의 영감을 얻고 그녀를 유혹한다.
이미 여배우로 성공을 거둔 이리나는 자기보다 젊고 이지적인 매력남 보리스마저 얻어 부족함이 없다. 다만 자신만 아는 이기적 행동으로 주변과 충돌한다. 특히 보리스의 등장으로 날카로워진 아들 콘스탄틴과 대립한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절망적 짝사랑에 지친 마샤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교사와 충동적으로 결혼하나 짝사랑의 끈을 놓지 못한다. 어느 날 콘스탄틴은 갈매기를 총으로 쏘아 흔들리는 니나에게 던지고, 자신의 머리도 겨냥하나 다행히 상처만 남기고 빗나간다.
체호프는 이 작품과 관련하여 “인간은 항상 두 가지를 열망한다. 가질 수 없는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늘을 나는 갈매기는 어쩌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꿈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갈매기는 자유로워야 한다. 짝사랑도 꿈의 하늘을 날 때는 아름답지만, 소유하는 순간 죽고 만다. 갈매기를 쏘아 죽인 콘스탄틴은 자신의 갈망을 파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쏘아버린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볼 때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짝사랑도 지금은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는 밤을 새는 고통이었으리라. 아,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이여!
전대미문의 발견이었다. 대작이 전시장에 걸려도, 이번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예술품이라고 소리 높여 말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전문가 집단이 수군거렸다. 흔하디흔한 골동품이라며, 귀신 붙은 그림이라며 내다버리고 없애버린 민화. 곱게 단장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사람들은 바로 무장해제돼 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 깐깐한 개인의 취향에 몰입하며 수많은 민화와 미술품을 수집해온 김세종(金世鍾·62) 평창아트 대표를 만나봤다. 기나긴 세월, 호랑이 눈으로 발견한 가치가 담긴 예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예술계에 한 방 날리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기자(?)가 내 책에 대해 썼다는 거예요. 난생처음 책이라는 걸 썼는데 사람들이 알아줄지 몰랐어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책이 거의 다 나가 또 인쇄한다더군요. 글은 제가 다 썼어요. 이 내용을 쓸 사람이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거든요.”
김세종 대표의 등장을 1990년대 돌풍을 일으켰던 서태지와 견주어도 될까? 새바람처럼 천지개벽 같은 울림이 깊게 파고들었다. 7월 간행된 김세종 대표의 저서 ‘컬렉션의 맛’은 나오자마자 빠르게 각종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특히 김세종 대표가 ‘잘 알지 못하는 기자’라고 언급한 이는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출신인 정재숙 신임 문화재청장이었다. 문화계 통(通)으로 불리던 정재숙 청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보석 같은 예술을 발견했다는 뜻과도 같다. 김세종 대표가 실제로 민화 소장품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런 현상이 최근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7월 18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판타지아 조선’ 전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만도 50명 가까이 됐다. 그간 이름 높기로 유명한 예술가 전시회에 고작 열댓 명 기자가 와서 자리를 해도 성공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자회견장에 의자를 계속 내놓아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한 통신사 기자가 “현대화랑과 민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의도 아니냐”며 김세종 대표에게 물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은 김세종 대표의 민화에 대한 강한 집념을 알고 난 뒤 꾸준하게 지원하고 있는 숨은 조력자다. 예술의전당 전시 일주일 전 현대화랑에서는 ‘조선시대 꽃그림_민화, 현대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민화 전시전을 열어 김세종 대표 행보를 알리고 응원했다.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인자로 회자되는 박명자 회장이 합세했다니 기자의 얄궂은 질문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17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민화를 독립운동하듯 찾아 모아온 김세종 대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이 안 됐냐는 말이었죠. 정신 차리고 제대로 똑바로 보자. 외국 사람들은 조형으로 회화로 민화를 바라봐요. 우리는 맨날 귀신으로만 보려 한단 말이에요. 중국 책 찾아서 무슨 뜻이라고 해석하고요. 우리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을 몰라요. 민화는 순수 회화이고 예술이다. 세계 최고다. 기자들이 자꾸 말하라고 해서 평소에 말 잘 안 하는데 마이크 잡고 한 시간 이십 분은 떠든 것 같아요.(웃음)”
다음 날 이례적으로 ‘판타지아 조선’ 전시와 관련해 정성들여 쓴 기사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밤새워 기사를 썼다고 김세종 대표에게 전화했다. 책이 나오고 전시가 진행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는 김세종 대표는 물론이고 민화와 관련한 다양한 글과 사진이 쏟아졌다. 전시장을 다녀간 관람객들도 각종 SNS에 사진을 올렸다. 젊은 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나누었다. 김세종 대표는 그저 하루하루가 신기할 뿐이라고. 좋은 민화 작품을 찾아다니고 수집하는 사람에게 문화계가 큰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판타지아 조선’은 8월 말 예술의전당에서 전시 일정을 마무리하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10월 말까지 전시를 이어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안 그래도 예술의전당 전시 일정이 좀 짧게 느껴져 서운했는데 기회가 좋았죠. 9월, 10월 전국 여섯 곳에서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열렸습니다. 외국 작가들이 한국으로 많이 들어올 텐데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의 것을 세계에도 알릴 수 있으니 시기도 좋잖아요. 서울 전시 끝나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으로 넘어가서 순회 전시도 합니다. 민화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얻어지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김세종 대표가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 중 고수임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책이 나오고 문턱 높은 전시관 세 곳에 소장 작품을 걸 수 없다. 예리하고 넓은 식견으로 예술품을 바라보고 의미를 찾아가며 미술품을 대한 것만도 40년 세월이다.
“중학교 때 충남 보령에서 서울로 혼자 와 하숙을 했는데 춥고 가난해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문학평론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과 펄 벅 소설에 심취하다가 철학에 빠졌어요. 그러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미아리 산동네에서 하숙을 하면서도 인사동 서예학원에 찾아가 청소를 대신 해주며 무료로 붓글씨를 배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어린 김세종 대표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 힘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다. 그때 해방구가 바로 박물관이었고 미술관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양질의 그림과 다양한 작품을 꼼꼼히 보며 감각을 익혀갔다. 각 박물관을 천 번 이상은 갔다. 수년을 발품 팔아가며 예술품을 감상했더니 눈썰미가 생겨났다.
“서예를 배울 때였는데 학원에서 천재 화가로 불리는 소산(小山) 박대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나한테 들어와서 그림 공부해라’ 그러셔서 한 2년여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학교 들어갈 생각도 못했지. 돈도 없었어요.(웃음)”
군대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그림 그리는 재주는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막노동도 해보고 살아보려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나게 된 충무로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디자인이었다. 미적 감각도 있었고 서예도 배웠으니 승산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광고계에 뛰어들어 당시 아파트 지면 광고에서 방송 광고까지 손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광고기획을 했다. 업계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업체 대표들을 만나고 다녔던 시기가 20대 후반이었다. 쾌속 질주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취미에 눈뜨기 시작했다.
“정적인 걸 좋아해서 20대 중반부터 난초와 수석을 수집했어요. 오랜 시간 모았는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 문화였어요. 가만 보고 있자니 화분도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았고요. 몇 년 뒤 한두 개만 남기고 다 남들 나눠줬습니다.”
취미생활을 접은 뒤 그는 무턱대고 미술품 수집에 뛰어들었다. 사기를 당해 집 두 채 값을 날려 먹은 적도 있다고. 때마침 광고기획사 사무실 옆에 한국 고미술 상인 1세대이자 큰손 김재숭 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그때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미술품에 관한 공부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일본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책을 접하면서 수집에 대한 이해도 넓혀갔다.
“미적인 눈은 야나기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국립박물관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면서 오랜 세월 시각적 관점이 생겼고요. 소산 선생께 그림 수업을 듣고 서예도 배웠습니다. 서른 살 이후부터 김재숭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운 것이죠. 이후에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김환기 화백 작품 등을 수집했습니다.”
서른여섯에 잘하던 광고기획 일을 그만두고 IMF 때까지 미술관으로 가서 작품만 감상하며 살았다. 벌어놓은 돈은 잘도 없어지고 사라졌다. 마음치유를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공기 좋고 시원한 곳에 아지트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종로구 평창동에 들렀다가 지금의 갤러리 공간을 발견했다. 17년 전 작게 화랑 문을 열어 민화와 옹기 등을 모으고 미술과 관련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공력을 쌓았다.
“민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화랑을 열기 3년 전부터였어요. 민화가 너무너무 좋은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진 거야? 어렸을 때부터 수천 번 넘게 미술관, 박물관을 다녔는데 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민화는 내가 찾아서 수집해야겠다’ 마음먹고 갤러리를 하게 된 거죠. 나이 먹고 생일잔치하듯 소박하게 한번 해보자. 그렇게 미술품 수집을 하게 됐습니다.”
갤러리에는 종종 예술계 대가들이 찾아와 김세종 대표와 얘기를 나눈다.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에 앉아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현대화랑은 물론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사들이 김세종 대표가 추구하는 소위 ‘민화운동’의 지지자이고 후원자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김세종 대표의 진정성이 구심점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화도 그렇고, 지금 우리는 번지수 잘못 잡고 방황하고 있어요. 조형성, 아름다움, 예술성을 머리에 새기고 우리의 미를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품격높은 예술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요.”
스파이크 서브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선보인 장윤창(張允昌·59). 마치 돌고래가 수면 위를 튀어 오르듯 날아올라 상대 코트에 날카로운 서브를 꽂아 넣는 그의 ‘돌고래 스파이크 서브’는 수많은 배구 팬들을 매료시켰다. 15년간 국내 배구 코트를 지킨 장윤창 현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를 만났다.
“옛날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거의 수만 마리는 받은 것 같아요. 또 팬레터의 80~90%는 ‘오빠랑 결혼할 거다’라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제가 답장을 못했어요.(웃음)”
1980~90년대의 한국 남자 배구는 지금까지 통틀어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그 중심에는 ‘왼손 거포’ 장윤창이 있었다. 수많은 배구 팬들이 그의 시원시원한 공격과 스파이크 서브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몰려와 전 좌석을 꽉꽉 채우곤 했다. 그는 아니라며 수줍게 부인했지만, 그가 받았다는 팬레터와 무수한 종이학이 그의 인기를 증명해줬다.
사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남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거머쥔 여자 배구팀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8년 세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대표팀에는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를 비롯해 고등학교 2학년의 장윤창도 있었다.
“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장충체육관에서 공이 찌그러질 정도로 때리던 대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꼭 국가대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선배들과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나이에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죠.”
한국 남자 배구팀은 세계선수권 4강 진출의 기세를 몰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으로 당시 베스트 멤버였던 강만수, 김호철, 이인 등 국가대표 주전들이 잇달아 해외로 진출했다. 웬일인지 ‘철벽 블로커’로 이름을 알린 장윤창은 국내에만 머물렀단 사실이 의아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3개월 동안 뛰면 20만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그 당시에 20만 달러면 강남에 있는 아파트 8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협회에서 저도 모르게 거절했더라고요. 국가대표 주축 선수들이 다 외국으로 나가 있으니깐 저까지 빠지면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 이때 분노의 스파이크 서브가 탄생했어요.(웃음)”
당시 실망감으로 가득 찬 그는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난 대표팀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홀로 방황하는 시절을 보냈다.
“원로 선배들이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이래서 되겠냐’ 하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설득하셨죠. 결국 그분들의 말을 듣고 전지훈련에 합류했어요. 솔직히 연습도 하기 싫은데 스파이크 서브나 한번 해보자 해서 시도한 거죠. 근데 아무도 못 받더라고요. ‘아, 이거 조금만 다듬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파이크 서브’라는 무기까지 장착한 그는 1984년 처음 열린 대통령배 배구대회에서 고려증권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 베스트6, 인기상까지 휩쓸었다.
15년간의 선수 생활
비교적 선수 생활이 짧은 배구 종목에서 그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코트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워낙 어린 나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5년이 지나도 제가 대학생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팀에서 최고참 선수가 됐고 리더 역할을 해야 했어요. 놀고 싶어도 못 놀고, 딴짓할 생각조차도 못했죠. 어릴 땐 죽어라 뛰었고 나이가 들어선 후배한테 지지 않으려고 죽어라 연습했죠. 속에선 불이 나는데 안 나는 척,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괜찮은 척.(웃음) 항상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좀 멍청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 생활 내내 몸에 나쁘다는 술과 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술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다고. 그럼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따로 있었냐는 물음에 “개인 연습을 더 하고 등산을 했다”는… 정말 배구만 바라봤던 ‘장윤창’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러왔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에서 일본과 겨룬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배구를 일본한테 배우다 보니 일본팀에게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어요. 일본과 붙으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패배를 맛본 선배들은 일본과 맞붙는 걸 좀 두려워했어요. 반면 저나 김호철, 강두태 이렇게 세 명은 그런 상황을 몰랐으니까 두려움이 없었던 거죠. 그렇게 신구(新舊)의 조화가 잘 이뤄지다 보니 2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3대 2로 역전승을 거뒀어요. 일본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죠.”
네트를 사이에 두고 팀 간 신경전은 없었을까.
“대표적으로 득점에 성공하면 포효하는 방법이 있어요. 기를 확 눌러버리는 거죠.(웃음) 사실 신경전은 바깥이 아닌 코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아요. 공이 공중에 떴을 때 공격하는 사람과 블로킹을 하는 수비수 사이의 눈치싸움처럼요.”
배구선수로서 나름 명성과 내공을 쌓은 그가 왜 배구 지도자의 길이 아닌 교수의 길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제가 은퇴하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다 보니까 중압감이 컸어요. 팀이 이기면 ‘장윤창 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지면 ‘장윤창이 못해서’라고 하니 그 부담감 때문에 한 번도 마음 편히 운동을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은퇴 후에는 현장이 아니라 내가 못 해본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경기대학교에서 교직에 몸담은 지도 어언 10여 년째.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교수와 면담한다고 하면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데 제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은 편하게 와주는 것 같아 고마워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웃음) 제가 학교에 발 담그고 있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려줄 수 있는 그런 교수가 되고 싶어요.”
받은 사랑 베풀며 살고파
‘함께하는 사람들’은 1999년 장윤창이 창단한 봉사단체로 황영조, 전이경, 유남규, 현정화, 장재근 등 국민의 사랑을 받은 스포츠 스타들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매월 양로원, 보육원 등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간다.
“한 번은 비닐하우스 한 동에 70~80명이 사는 곳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가 한창 겨울이었는데 통풍이 안 돼서 그런지 옴진드기가 있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옷을 빨고 한쪽에서는 샤워를 시켜주고. 근데 옴이 옮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끝나고 샤워하러 가서 소금물로 씻고 또 씻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좀 죄스러워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그동안 잠시 쉬어왔던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답했다.
“일하면서 봉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한 3년간 황영조 선수에게 운영을 부탁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가려고요. 아내가 그 노력을 가정에도 좀 쏟으라고 잔소리하는데…(웃음) 그래도 이해해줘서 항상 고맙죠. 때론 힘들어서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했는데 이전에 봤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만두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국민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숲으로 들어서자 솔 그늘이 짙다. 부소(扶蘇)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을 일컫는 백제 말이란다. 부소에 산성을 쌓았으니 부소산성이다. 백제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산의 높이는 겨우 106m. 낮고 평평하나, 이 야산에 서린 역사가 애달파 수수롭다. 부소산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의 도성(都城). 백제 최후의 비운과 아비규환이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현장. 숲길은 참신하지만 106m 높이로 퇴적된 한(限)과 비애가 비쳐 서글프다.
8월의 지독한 폭염 아래서도 숲은 싱그럽다. 잎잎이 푸른 여름 나무들. 열정처럼, 정념처럼, 눈부시게 환히 너울거리는 저 초록 불꽃들. 매혹될 수밖에.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초록의 사태는 어디까지나 고요해 평화롭다. 지친 마음을 숲길에 부려놓기 적격이다. 번잡하게 날뛰는 마음의 날치를 평온하게 길들여볼 만한 시간이다. 하지만 평온한 시간은 짧게 지난다. 평화로운 시국도 그리 길지 않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했던 백제의 국력은 강성했다. 강성해서 평화로웠다. 하지만 종단엔 추락했다.
뭐 볼 게 있다고 부여를 여행하나? 흔히들 하는 야박한 소리가 그렇다. ‘백제문화제’가 열렬히 펼쳐지고, 백제 문화유산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가 웅장한 규모로 조성됐지만 백제 당시의 유적은 놀랍게도 소소하다. 정림사지와 능산리 고분, 궁남지, 테뫼식과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부소산성의 흔적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문화강국 백제의 다채롭게 빛났을 유적들을 옹골차게 접할 길이 아예 없다. 참혹한 전화(戰禍)에 스러지고, 점령군의 횡포에 찢겨서다. 시절의 평화도, 문화의 정채(精彩)도 이렇게 한순간에 산산조각 난다. 오호 통재라, 망국이란 실로 완전한 소진이다. 숲의 저 천진한 생동과 우수에 찬 역사의 배치(背馳)라니.
백제의 융성한 문화는 일찍이 일본으로 흘러 일본 고대 문화의 끌텅을 이루었다. 신라 왕경 경주의 랜드마크였던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의 명장 아비지의 작품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을 평하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던’ 백제의 정신과 백제인의 마음을 헤아리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찬사와 조의를 함께 표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숲의 초록 사이로 어둑한 소로가 거듭 이어진다. 뙤약볕이 간간이 스며들어 흰 강아지처럼 길에 드러눕는다. 가파를 게 없는 숲길이니 더위에 절여진 몸으로도 헐떡일 일은 없다. 길섶엔 백제를 상기시키는 건조물들이 들어서 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삼충사를 비롯해 군창지, 궁녀사,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등이 있다. 모두 백제 이후에 발굴되거나 복원되거나 현대에 이르러 신축됐다.
부소산성은 도성의 방어 기지이면서 왕궁의 후원 역할도 겸한 걸로 추정된다. 왕족들의 소풍과 산책이 숲에서 숲길에서 다반사로 펼쳐졌을 게다. 질박한 흙길로 자못 심원한 정취를 자아내는 태자골 숲길은 왕자들의 산책로였다지. 철부지 어린 왕자들이 간혹 참새처럼 조잘대며 이 숲에서 뛰놀았을까?
숲이 무성하니 고목도 숱하다. 상흔으로 겨우 선 나무도, 썩어가며 곰팡이에 몸통을 내주는 나무도 많다. 재난과 수난을 피할 길 없는 게 생태계이지만 생명은 이어진다. 한 줌 거름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의 밥이 되는 나무의 순환은 고고하다. 삶 안에 죽음이 있듯이 죽음 안에도 삶이 있다. 오직 사람만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낙화암 벼랑에서 꽃처럼 분분히 떨어져 죽었다는 삼천궁녀들은 언제 다시 오려나.
궁녀들뿐이었겠는가. 망국과 함께 노을처럼 시든 수많은 부녀와 노약과 군병들이 백마강의 고혼으로 떠돌겠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된 인물이었다. ‘과단성 있고 침착하며 사려가 깊어 명성이 홀로 높았다’는 기록 역시 의자왕이 준재였음을 웅변한다. 하지만 승자의 각색 속에 나오는 의자왕은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과 향락에 취한 얼간이. 해서, 고인 물처럼 썩어 무너진 게 백제였다는 투의 오진이 활개를 쳤다. 낙화암 ‘삼천궁녀 전설’ 역시 승자들이 부풀린 조작일 뿐이다. 패자의 봉욕이란 슬픈 과보란 말인가. 백마강 수면에 물살이 어린다. 쏴아,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허공에 일어 숲을 흔든다.
탐방 Tip
부소산성 숲길 탐방엔 한두 시간이 걸린다. 산을 끼고 도는 백마강 나루에서 황포돛배 유람선을 탈 수도 있다. 인근 부여읍내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을 함께 탐방해 백제 문화를 살펴본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도 둘러보자.
“여러분의 성공적인 귀농·귀촌을 응원합니다”
2018 지방선거에서 초박빙의 승부를 보인 지역, 바로 강원도 평창군이다. 한왕기 평창군수는 선거에서 현직 군수였던 심재국 후보를 단 24표 차로 이기고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쥐면서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평창에서 태어나 일생을 보낸 평창 토박이인 한왕기 군수는 요즘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한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평창의 미래를 미리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왕기 평창군수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요즘 바쁘게 움직이며 여론과 행정력을 끌어모으고 있다. 올림픽 후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서울올림픽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이란 재단을 설립해 유산사업을 현재까지 하고 있어요. 평창동계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사업에는 신경을 안 썼더군요. 그래서 평창올림픽법을 국회 문체위 상임위원장인 안민석 의원님께 요청했습니다. 이 법에 근거를 두고 평창올림픽에 대한 재단법인을 만들어서 일관성 있는 올림픽 유산관리와 발굴을 할 예정입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의 가장 큰 유산인 평화를 지역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 평화의 시대를 평창이 주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평화특례시 추진과 평화 관련 기관 유치, 세계평화포럼 개최를 실현해간다는 방침이다.
해발고도 700m의 쾌적함
평창군은 평균 해발고도가 700m인 지역이다. 이는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장 좋은 고도라는 슬로건으로 ‘HAPPY700’ 브랜드를 론칭하는 계기가 됐다. 브랜드를 선포한 게 1998년이니 벌써 20년 전 일이다. 한 군수는 “이제 평창 하면 HAPPY700을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고 자평했다.
“매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불볕더위에 700고지의 쾌적한 공간을 찾아 평창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었습니다. 지난 8월 5일에 막을 내린 평창더위사냥축제는 지난해보다 1만2000여 명이 더 많은 8만7000여 명의 방문객이 몰렸어요. 지금도 대관령 고원지대는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줄어드는 인구, 깊어지는 고민
이처럼 살기 쾌적한 도시로서의 평창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창의 설질(雪質)이 좋다는 사실은 동계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공인된 얘기다.
그러나 평창은 휴양도시로서의 딜레마 또한 분명히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수도권 외 대부분의 지역들이 앓고 있는 문제, 바로 지역 정착민이 적고,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창군 인구는 7월 말 현재 2만1071세대 4만2808명으로, 지난 1995년 5만 명 붕괴 이후 2005년 4만5033명, 2015년 4만3500명 등 점차 감소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구감소의 주요 원인은 2001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많은 현상인 데드크로스와 타 지역 전출로 확인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평창군은 2016년 10월 기술지원과 귀농·귀촌 부서, 2017년 10월 기획감사실 지역인구정책부서 등 전담부서를 신설 후 체계적인 정책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귀농·귀촌은 평창으로
한 군수는 평창이 귀농·귀촌에 강점을 가진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평창은 기후변화에 가장 유연하게 대처 가능한 이상적인 온도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평창의 농산물은 특유의 기후 덕분에 식물 세포가 오밀조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져 시장에서 고가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한 시간대 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강점도 있습니다.”
한 군수는 귀농·귀촌 현상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외지인과 평창인의 갈등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외지인이 평창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평창군 귀농·귀촌 페스티벌’을 시행하고 있다.
“무작정 외지인더러 들어오라고만 하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높습니다. 그래서 귀농·귀촌 페스티벌을 통해 귀농·귀촌에 관심 있는 도시민에게 우리 군의 귀농·귀촌 정책을 소개하고, 귀농·귀촌 선배들을 만나 생생한 정착기를 듣게 해줍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직접 농촌의 삶을 체험해보고 멘토 농가를 연결해 도움을 받게 합니다. 그래야 정착 성공률이 높아지니까요. 이외에도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 창업 및 정착 지원, 집수리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휴양도시로서의 강점 극대화
한 군수는 최근 국민적 트렌드인 귀농·귀촌을 활성화하기 위한 지원 대책을 강화하는 한편,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더욱 강화된 관광휴양도시로서의 강점도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올림픽 기간 중 시범운영을 거쳐 현재 본격 운영 중인 ‘HAPPY700 평창시티투어버스’다. 시티투어버스는 코스를 나누어, 올림픽 개최 현장과 시설을 보며 올림픽의 열기와 영광을 느껴보는 올림픽 로드, 평창 지역의 시골장을 돌며 ‘진짜 촌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전통시장 로드, 문화와 축제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페스티벌 로드 등 시기와 테마별로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최우수 축제인 평창효석문화제는 9월 1일부터 9일까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이자, 가산 이효석의 고향 평창군 봉평면 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는 ‘인연, 사랑, 그리고 추억’이라는 주제로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을 전하는 추억 만들기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넓은 메밀밭에서 펼쳐지는 축제는 문학과 체험을 아우르는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한다. 평창백일홍축제는 평창읍 평창강 둔치에서 오는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펼쳐진다. 시원한 평창강을 배경으로 백일홍 천만 송이가 장관을 이루는 낭만적인 축제다. 해마다 꽃밭 한가운데에 있는 포토존이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평창의 감자, 옥수수, 메밀로 만든 토속 먹거리와 낮과 밤에 끊이지 않고 펼쳐지는 문화예술공연도 운치를 더한다고 자랑했다.
농림축산업 고도화의 발판 마련
최근 평창군에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2018 농촌 신활력 플러스 사업’에 선정돼 70억 원을 지원받게 된 것이다. 전국에서 10개 지자체만 선정된 이 사업에서 평창군은 ‘평창 프리미엄 농식품 플랫폼 사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는 서울대학교 허철성 교수를 단장으로 선임해 ‘평창 프리미엄 농식품 플랫폼 추진단’을 꾸리고, 서울대학교의 기술을 활용해 지역의 우수 특용·약용 작물을 고부가가치의 기능성 농식품으로 개발한 후, 지역 내 가공업체로 기술 이전, 해외시장 개척 등 산업 고도화를 이룬다는 계획이다.
“평창은 농림축산업이 경제의 근간입니다. 올해부터 4년 동안 체계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해, 평창의 우수한 특용·약용작물로 프리미엄급 농식품을 개발·생산하고, 이와 접목한 체험·관광을 통합 마케팅할 것입니다. 농업인 소득증대와 일자리 창출, 농촌관광 활성화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시작으로 향후 서울대학교와 연계한 고령친화식품단지를 조성해, 평창군 농식품 산업 혁신을 앞당기고자 합니다.”
평창의 주산업인 농업·농촌의 소득 안정을 위해 청년농·여성농·고령농을 지원하고 농산물 판로 확보와 가공유통시설 기반 구축, 산림농업 육성 등 농축산업 경쟁력 강화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한다. 한 군수는 농업 예산을 전체 예산의 20%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평창에 귀농·귀촌인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갖추고 부족한 농촌 인력을 해결하기 위한 농업인력 지원센터도 마련할 계획입니다. 또 군 전체 면적의 83%를 차지하는 산림을 기반으로 산악관광, 산악스포츠, 산림 복합영농 등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 집중 투자해 경쟁력을 갖춘 자립적인 농촌기반을 조성해나가는 데 힘써보겠습니다.”
아울러 평화올림픽 개최를 통해 남북 화해와 세계 평화의 출발점이 된 평창을 평화의 중심지로 부각시키기 위해 평창 평화특례시를 추진하고, 남북 교류협력과 평화의 산실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민생 현장을 돌면서 잘살게 해달라는 평창군민들의 희망을 듣고 1%의 가능성이 평창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평화의 시작 평창과 함께, 사람이 행복한 문화관광, 더불어 잘사는 지역경제, 소득이 안정된 농촌, 모두가 행복한 복지 등을 군정 5대 목표로 정한 한왕기 군수는 농촌 가치 살리는 평창건설을 위해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평창의 변화와 도약을 이끌어내겠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세 번째는 안동 봉정사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봉정사는 조계종 16 교구 본사인 의성 고운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꼽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보유한 고찰(古刹)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심포 건축인 극락전과 가장 오래된 다포 건축인 대웅전이 각각 마당을 갖춘 병립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대웅전의 석가 신앙과 극락전의 아미타 신앙을 구현한 봉정사에는 종합 승원으로서 스님들과 신도들의 신앙과 수행, 생활을 위한 다양한 건축물들이 존재하며, 아직도 주변 밭에서 음식재료를 재배하고 식용하는 수행 합일을 실천하는 산사(山寺)이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으며,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을 보고 싶다며 찾아와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세계유산에 등재된 올여름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들르며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이 쏠린 곳이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이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히며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로도 수행을 이어간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 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이후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그리고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봉정사는 7개 산사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절집이며 여느 사찰처럼 오 리나 십 리 숲길도 없고 초입이나 산자락 어딘가에 수십 개의 승탑이나 탑비가 줄지어 있지도 않으며, 높다란 당간지주나 우람한 산문이 위압적으로 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해탈문이나 사천왕문도 없다.
안동시내에서 30분 남짓,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절 아래 사하촌도 복잡하지 않아 그 흔한 산채백반 식당가도 없고 몇 채의 민가와 식당이 있을 뿐이다. 매표소를 거쳐 오르막 왼쪽으로 퇴계 이황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 명옥대(鳴玉臺)를 지나면 잠시 평지가 되는 곳에 일주문이 서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인데 이내 평지 주차장 겸 작은 절집 앞마당이 나온다. 다시 경사진 돌계단을 올라 만세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하면 대웅전이다. 제법 긴 오르막 지형인데 그리 험하거나 지루하게 길지는 않아 차분하게 올라갈 수 있다.
누각 2층 안쪽에는 ‘萬歲樓’(만세루) 현판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과 ‘德輝樓’(덕휘루) 현판이 걸려있다. 즉, 만세루가 한때는 덕휘루였다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만세루로 바뀐 것인데 ‘癸丑中夏(계축중하) 金嘉鎭(김가진)’이라는 낙관을 보면 1913년 여름에 썼다는 것이니 최소한 100년 정도는 덕휘루라 불렀던 것 같다.
덕휘루라는 명칭은 이곳을 유생들이 제법 많이 찾아와 공부도 하고 경전을 읽으며 지낸 흔적이라고도 한다. 입구에 명옥대가 있는데, 이는 유교와 불교가 반드시 배척한 것만은 아니고 잘 지내기도 했다는 흔적으로 보인다.
만세루에 올라서면 대웅전 마당인데 왼쪽에 있는 극락전을 먼저 보기로 한다. 극락전 앞에는 대웅전 앞 만세루처럼 우화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영산암으로 옮겼다고 하며 바라보는 정면이 극락전, 왼쪽에 고금당, 오른쪽에 화엄강당이 ‘ㄷ’자 형태로 모여 있고 마당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통칭되어 왔으나 1972년 완전 해체 시 발견된 상량문에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한 기록이 나옴으로써 1376년 중수한 무량수전에 앞서는 건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옥의 건물 중수(重修)는 대개 150년에서 200년을 지낸 후에 하게 되므로 건축연도를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정확한 건축연도가 나온 것은 아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을 묶어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하는데 건축양식은 극락전이 더 고식(古式)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참고로 창건연도가 확실한 건물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1308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지만 측면 칸은 좁아서 정면이 긴 직사각형 건물이며 배흘림기둥을 세운 주심포식 맞배지붕 형식이다. 1972년도 해체 복원 시 근대식 안료를 이용한 단청을 했다는 등 졸속 복원의 비난이 있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극락전 옆은 대웅전 영역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보물 제55호였으나 2009년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선덕 10년: 1435년, 세종 17년)이라고 적혀있고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라고 되어있어 대웅전 창건이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나 앞선다는 것이니,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다시 대웅전으로 바뀔 판이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되어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를 걸었는데 이 부분을 보수할 때에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또 다른 후불탱화를 발견하였다. 대웅전 초창기 때 그린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 제161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사찰에서 별도 보관 중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둘러보았으면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을 다 본 것이다. 그만큼 봉정사의 규모는 크지 않고 당우(堂宇)들도 많지 않다. 그밖에는 작은 삼성각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 보았다고 하산을 해서는 안 된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에 영산암(靈山庵)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립문을 나서 흐르는 물을 건너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올랐다는데 지금은 계단이 잘 놓여 있다. 그저 고즈넉할 뿐 따로 볼만한 것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산사의 분위기가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이다.
극락전 앞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는 우화루(雨花樓)에 들어서면 정면에 응진전(나한전)과 삼성각이 있고 왼쪽에 송암당, 오른쪽에 관심당이 역시 네모꼴(ㅁ) 구조로 모여 있다. 가운데 마당에는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고 기암괴석을 심어 휘어진 향나무 고목과 함께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봉정사를 일컬어 목조건축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국보로 지정된 것을 일컫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고졸하고도 검박한 건물들인지라 더욱 맘에 끌린다. 과연 영국 여왕에게 보여줄 만큼 가장 한국적인 건물임에 틀림이 없다.
다른 절집들보다 작은 규모에, 크고 화려하게 추진하는 중창불사 하나 없어 더욱 맘에 드는 진정한 산사(山寺) 봉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