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월의 문화행사
-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진해군항제 일정 4월 1~10일 장소 중원로터리 및 진해 일대 국내 최대의 벚꽃축제로 손꼽히는 ‘진해군항제’가 개최된다. 벚꽃 명소인 여좌천, 경화역, 진해탑 등에선 36만 그루의 아름다운 왕벚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축제 동안에는 평소 출입이 어려운 해군사관학교, 해군진해기지사령부의 영내 출입이 가능하며 해군복 입기, 요트크루즈 승선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린다. 특히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 개최되는 군악의장페스티벌은 진해군항제에서만 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 일정 4월 3~8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는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으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없앴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중년 여성들에게 아직도 아름답고 열정을 내뿜을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지난 6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민참여형예술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신나는 예술여행 등의 사업에 선정됐다. 돌아온다 일정 4월 5일~5월 6일 장소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출연 강성진, 정상훈, 김수로, 김곽경희 등 포스터에 ‘그리운 사람이 돌아옵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연극 ‘돌아온다’는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초등학교 여교사, 집 나간 필리핀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 욕쟁이 할머니 등 후회와 미련이 많은 주인공들의 사연을 통해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우 김수로와 강성진을 필두로 다양한 연극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정상훈, 김로사, 김사울 등이 참여한다. 아드만 애니메이션 – 월레스&그로밋과 친구들 일정 4월 13일~7월 12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아드만 스튜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클레이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대표작 ‘윌레스와 그로밋’, ‘숀더쉽’, ‘치킨런’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8 앙상블마티네 개막 4월 2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지휘 윤승업 연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단 모차르트 시리즈를 목관, 현악, 금관, 심포니 총 4가지 테마로 나눴다. 이번 첫 번째 시리즈에서는 모차르트 작품 중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1악장’이 연주될 예정이다. 사랑해요, 당신 일정 4월 28일~6월 3일 장소 KT&G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출연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등 연기 베테랑 이순재, 장용이 남편 '한상우' 역을, 정영숙, 오미연이 아내 '주윤애' 역을 맡았다. 연극 '상랑해요, 당신"은 평범했던 부부에게 치매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렸다.
- 2018-03-29 10:38
-
- 모차르트의 징슈필 오페라 <마술피리>
- 어느 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기온 때문에 겉옷을 집어들게 되었지만, 한낮에 내리쬐는 태양은 아직 그 위력을 잃지 않았다.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쨍쨍한 햇볕은 꼭 필요한 고마운 존재이니 덥다고 불평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뜨거운 햇볕을 양산으로 가리고 오후 3시 공연인 오페라를 보러 예술의전당에 갔다. 천재 작곡가라 불리는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를 관람했다. 는 1993년 오페라 하우스 개관 이래 예술의전당이 가장 많이 제작했던 오페라 작품이다. 지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총 9차례나 토월극장 무대에 올려 매년 매진기록과 함께 가족 오페라라는 공식을 세우며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2015~2016년에는 의 작품성을 관객들이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기획해 큰 감동을 주었다는데 이번 공연에선 ‘우리 가족 첫 오페라’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어린이들도 재미있고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도록 모든 대사를 한국어로 준비했다. 또 누구든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징슈필(Singspiel)을 통해 극의 재미를 느끼도록 했다. ‘징슈필’이란 연극처럼 중간에 대사가 들어 있는 독일어 노래극이다. 필자는 공연 내내 무대를 보랴 양옆에 마련된 자막을 보랴 눈이 매우 분주했다. 도로가 한가로운 시간에 출발했기 때문에 예술의전당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20여 분 정도 일찍 자리에 앉았는데 무대 저편에서 리허설 중인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악기도 조율하고 하모니도 맞추어보는 듯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 연극 등을 감상할 때는 항상 조용한 분위기에서 막이 오르길 기다렸는데 이번처럼 리허설을 보게 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마침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초등학생 자녀를 동반한 가족이 많아 공연 시작 전의 객석도 약간 소란스러웠다. 공연을 자주 다녀봤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와 무대 뒤에서 연습하는 소리가 뒤섞여 소음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잘 어우러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인터미션 15분에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긴 공연의 막이 올랐다. 무대는 어린 관객을 생각해서인지 머리에 풍선을 단 세 어린이가 등장하면서 동화적인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신전 부근. 현자 ‘자라스트로’가 지배하는 지혜의 세계와 밤의 여왕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커다란 뱀에게 쫓기던 ‘파미노’ 왕자를 밤의 여왕을 모시는 시녀 세 명이 구해준다. 밤의 여왕은 납치된 딸을 구해달라며 초상화 한 장을 보여주는데 바로 ‘타미나’ 공주였다. ‘타미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왕자는 꼭 공주를 구하겠다며 길을 나선다. 그때 밤의 여왕은 위험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마술피리를 왕자에게 준다. 왕자는 나쁜 ‘자라스트로’에게서 공주를 구하려 하지만 ‘자라스트로’는 현명한 사람이다. 사악한 밤의 여왕인 어머니로부터 공주를 보호하려고 데려온 것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왕자와 공주가 만나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특한 ‘밤의 여왕 아리아’를 들을 수 있는 즐거운 오페라다. 매우 고음으로 부르는 ‘아아아~’는 모든 성악가가 어려워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수미의 밤의 여왕 아리아가 유명하다. 출연진의 노래도 멋지고 무대장치도 환상적이어서 동화 속 꿈나라에 다녀온 듯 재미있었다. 특히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파파파’하는 경쾌한 이중창이 오페라가 끝난 후에도 귓가에 계속 들려오는 듯했다. 아이들이 많아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우리 손주들 생각을 하니 이해가 됐다. 여섯 살인 우리 손녀도 내년쯤이면 오페라 공연장에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하다.
- 2017-09-05 10:23
-
-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바꾼 도시,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끼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유럽의 배꼽’이라 불리는 슬로바키아는 한국인에게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유명세는 적지만 매력이 폴폴 넘치는 곳. 사람들은 흥이 많고 무엇보다 물가가 싸니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다. 한국 기업들이 속속 자리를 튼 이유일 것이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다. 시내라고 해야 차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11세기의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다뉴브 강 조망 한국의 많은 이가 아직도 슬로바키아를 ‘체코 슬로바키아’로 안다. 현지인들에게 나라 명을 잘못 말하면 발끈하면서 다시 일러줄 것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월 1일,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시내는 걸어서 여행해도 충분하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호조로 광장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1760년에 건축된 그라살코비크 궁전을 현재 관저로 이용하고 있다.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브라티슬라바 성이 보인다.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해서 ‘테이블 캐슬’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납작한 사각형 상이 뒤엎어져 상다리 4개가 솟아오른 듯하다. 11세기에 지어진 후 1800년대 헝가리의 지배 때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성이다. 성안에 스바토플룩 1세와 모라비아인 동상이 있는 것은 당시 모라비아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가장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성 내부는 갤러리로 이용하고, 외부에는 성녀 엘리자베스의 동상과 부서진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성 니콜라이 교회의 첨탑 밑으로 보이는 구시가지의 지붕들, 다뉴브 강을 잇는 노비 모스트(Novy′ Most, 새로운 다리란 뜻), 성곽 옆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변 풍치가 아름답다. 간헐적으로 운행되는 도심 투어용 빨간 꼬마 열차도 예쁘다. 중세의 물결 일렁대는 올드 타운에 남은 교회와 건물들 성곽을 비껴 조약돌이 박힌 옛 골목길을 걸어 성벽 샛길로 들어서면 올드 타운이다. 성벽 앞에는 십자군 중세 군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카피툴스카 좁은 골목에서 만난 바는 와인이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포도 줄기를 넝쿨 채 치장했다. 해묵은 골목 바에 앉은 연인들의 속닥임이 잘 숙성된 포도주 향처럼 진하게 번진다. 회색빛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르틴 대성당(2002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이 가득하다. 무려 230여 년(1221~1452)에 걸쳐 완성된 성당에서는 합스부르크 왕 11명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베토벤(1770~1827)이 4년 동안 매달려 만든 ‘장엄미사(1823년 완성)’가 초연되었다. 이 도시를 사랑한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1801년 작곡)’를 만들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살아생전 15번이나 방문했다. 특히 브라티슬라바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리스트는 사망하기 1년 전(1885년)에도 이 성당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곤 했다고 한다. 또 성 프란시스칸 교회와 성녀 엘리자베스를 봉헌한 성 엘리자베스 교회도 유명하다. 특히 성 엘리자베스 교회는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건물 내·외부가 모두 푸른색이라 ‘블루처치’라고도 불린다. 헝가리 왕 앤드류 2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14세에 독일 튜링가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20세에 미망인이 된다. 이후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쳤다. 골목 속에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 찾기 올드 타운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골목은 더 규칙 없는 미로다. 국민 시인, 파볼 오르사그 흐비에즈도슬라브(1849~1921)의 이름을 붙인 광장에는 1572년,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분수대(롤랑드)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주변에는 구시청사, 국립미술관 등을 비롯해 온통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다. 특히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메인 광장 벤치에서 ‘대화를 엿듣는 나폴레옹’, ‘추밀(Cumil)’은 맨홀 뚜껑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 추밀의 동상 머리가 반질반질한 것은 만지면 행복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또 벽 뒤에 숨은 파파라치, 중절모를 벗고 인사하는 노신사 등. 모두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볼거리들이다. 길거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과 쉽게 구분되지 않아 동상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구시청사에서는 수시로 축제가 열린다. 때마침 중세 복장을 한 까마귀 무술단원들이 공연시간을 알리면서 손님몰이를 한다. 펜싱과 총을 들고 싸우는 전통극의 스토리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현지의 속살을 들여다본 듯 흐뭇하다. 타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14세기의 미하엘 성문이 있는 벤투르스카 거리에 이른다. 옛 도시 성벽의 4개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성문 주변은 중세 분위기다. 오래된 약국은 박물관이 되었고 연륜 깊은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길거리에서는 ‘섹시한 여성’이 와인 시음판을 펼치고 있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브라티슬라바. 경제 발전이 되지 않아 그대로 간직된 유적들이 여행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가른 도시 벤투르스카 골목의 데 파울리(De Pauli, 11번지) 궁 외벽에는 세기적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를 기념하는 명판이 새겨져 있다. “9세에 이 연주회를 발판으로 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당시 헝가리 땅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의 라이딩)에서 태어난 리스트.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의 토지 관리인이면서 궁정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리스트는 9세(1820년 11월 26일) 때 이 궁전에서 첫 연주회를 갖는다. 당시 이 도시의 귀족은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리스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고 그다음에는 즉흥 연주를 했다. 몇몇 귀족이 내민 악보의 난해한 곡도 거침없이 연주해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음악교육을 시킬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그를 6년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후원자 중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의 니콜라우스 후작도 있었다. 예술을 대대적으로 사랑하는 이 가문은 당시 궁정음악가로 하이든을 두었다. 이후 리스트는 19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리스트가 이 도시를 잊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올드 타운의 관광안내소 건물은 음악가 요한 네포묵 후멜(1778~1837)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피아노 교본을 써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유럽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거장이다. 당시 베토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사후에는 거의 잊히고 말았다. 또 이 도시가 음악의 도시임을 알려주는 멋진 국립극장도 있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체코 프라하나 오스트리아 빈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빈의 수드반호프 역에서는 평균 한 시간 단위로 열차가 다닌다. 1시간(50㎞ 정도) 정도 소요된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물가 정보 오스트리아, 체코 프라하보다 저렴하다. 맛집과 숙박정보 올드 타운의 레스토랑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또 도시에서 가장 큰 즐라테 피에스키 호수 옆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역피라미드 모양의 시내 라디오 방송국의 송전탑 위의 회전 레스토랑에서는 브라티슬라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류로는 와인은 물론 자두 증류주인 슬리보비츠가 괜찮다. 숙박은 올드 타운이나 시내 중심가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슬로바키아 북서부의 트르나바 주에 있는 피에스타니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스파 도시다. 수질과 효능이 좋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단지다. 숙박시설 등을 잘 갖추고 있어 휴양지로 아주 좋다. 또 폴란드의 슐레지엔(Schlesien,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체코어로는 슬레스코, 영어로는 실레지아) 산간 지역에도 수많은 온천이 있다. 슬로바키아 하면 떠오르는 ‘의적’ 유라이 야노식(Juraj Ja′nos˘k, 1688~1713)이 태어난 테르초바에서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전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 3개월 이상도 모자랄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겨도 경제적 부담이 적은 나라, 기억해둬야 할 곳이다.
- 2017-07-17 11:48
-
- 이다음 우리는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적 사유를 함께했던 오랜 벗을 그리워하며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소설가께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서종택 소설가ㆍ고려대 명예교수 한형,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려니 자네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줄을 서누만. 나의 기억력은 참으로 한심한 편인데도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60여 년 전의 자네 주소가 그대로 떠올랐네.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본정리 산 12번지. 내가 자네에게 처음 쓴 편지의 지번이지. 우린 그때 중2였고 당시의 학생잡지 지에 다투어가며 소설(콩트)들을 발표했지. 그때 나는 자네의 인가 하는 작품을 읽고 긴 편지를 보냈고. 자네는 그보다 더 긴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우리는 그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무엇을 그리거나 끄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외롭고 허기에 찬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 한형, 나는 지금도 자네가 나에게 처음 소개해주었던 모차르트를 잊을 수 없네. 우리가 처음 만난 겨울이었지 아마. 나는 천안에서 내려오는 자네를 마중하기 위해 옆구리에 이보 안드리치의 (아마 그즈음 노벨상 수상작이었을 거야)를 끼고 광주역 플랫폼에 서 있었지. 최인훈의 에 흥분하고 방 한 칸을 찾아 밤길 헤매는 마렉 플라스코의 의 젊은 애인들을 가슴 아파하고, 그러나 이제는 이 아닌 이나 을 옆구리에 낀 채 담배를 넣고 다니던 오만방자한 고2의 겨울이었지. 진눈깨비 어지럽게 흩날리던 그해 겨울 역 광장에서 우리는 처음 수줍게 악수했고 악수가 끝나자마자 자네는 굵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광주엔 클래식 감상실이 있느냐고 물었어. 그리고 충장로의 그 지하다방에서 자네가 리퀘스트 곡으로 써낸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5번’을 그때 처음 알았지. 대학생이 되어 종로의 ‘르네상스’를 들락거리면서부터 나도 덩달아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문득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대책 없이 감미롭고 경쾌해지기 시작했고 베토벤이나 브람스가 대책 없이 무겁고 둔중하게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다네. 평생 이어폰을 끼고 지낸 나의 음악 사부인 한형의 후광이었지. 한형, 그리고 그즈음 나와 함께 아파준 한형께 감사하네. 청파동의 어느 대학에 우리들의 ‘그녀’들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와도 함께 기숙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하숙집을 함께 옮겨 다녔지. 한쪽이 각혈을 시작하자 의사의 휴학과 별거 권유를 무시한 채 우리는 국 따로 반찬 따로 먹기를 맹세했지만 이내 3개월 간격으로 결핵 감염을 확인했고 주사와 투약으로 병원을 함께 들락거렸지.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지내는 게 편했노라고 자네는 훗날 그때를 회고했고, 문단 데뷔도 못한 주제에 식민지 시대 작가의 폐결핵 동기들 흉내만 냈노라고 우리는 함께 웃었지. 우리가 앓았던 결핵은 그대로 60년대의 절망과 우울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어. 억압과 감시, 수배와 투옥, 휴교와 계엄령으로 이어진 이 시기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문과대학의 실속 없는 문학청년의 꿈은 서서히 마모되고 스러지기 시작했지. 문청 시절의 자존심이 대학에서 구겨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문학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문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차리고 말았지. 한형, 창작을 접어두고 대학의 연구실이나 강단에서 우리가 보낸 세월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1970년을 전후해서 문단에 함께 데뷔했고 1980년을 전후해 함께 대학의 교수 자리는 얻을 수 있었지만, 그리고 논문에 각주를 달고 이론서를 꾸려내고 학생들에게 문학론을 강의했지만, 막을 수 없는 허허로움을 어떻게 삭이고 있었는지는 서로가 다 짐작하는 비밀이었지. 화려한 문청 시절은 추억으로 끝나고 동년배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들이 서점가의 중심 코너를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 안타까움은 엉뚱하게도 강의실에서의 폭언으로 표출되기도 했어. 사실 어느 해 자네가 대학원 강의실에서 퍼부었다는 당시의 어떤 대하소설에 대한 폄하는 좀 심했었네. 자네는 그때 그 소설을 김승옥의 에 빗대면서 그 작품의 반만큼의 감동도 없는 지루한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고 당시의 소설을 비난했다지.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열등감을 학생들에게 들키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가령 어느 소설에 대한 평가를 질문받고는 나는 짐짓 ‘너무 길어서’ 읽지 못했노라고, 한 권으로 마칠 이야기를 열 권으로 써내는 일은 창작가들이 저주를 퍼부어야 마땅하다고, 언어의 감각이나 경제성이야말로 서사미학의 종점이라고 갈파(!)했지. 창작보다는 비평에 몰두해버린 우리들의 파행(?)은 그러나 상실감이나 공허감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네. 자네가 펴낸 은 서사학계의 쾌거이자 성과였어. 이 책은 서사에 관련한 용어를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이 형성된 배경과 이론의 전개 과정을 소논문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의 개념들과 그 쟁점들을 아울러 익히게 한 획기적인 책이었지. 이혼하지 못한 부부처럼 창작과 비평의 어색한 동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정년을 맞았고, 문학은 써내는 즐거움 못지않게 향유하는 즐거움도 있다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었지. 한형, 자네가 보여준 그동안의 편식과 편애와 편파를 나는 존중하네. 그리고 자네의 폭력마저도. 그것은 자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이념이었어. 도선불여악(徒善不如惡), 어쭙잖은 선은 차라리 악함만도 못하다 했던가. 자네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기피했고 과시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으며 위선을 경멸했었지. 호불호가 분명했고 어떤 제자에 대한 편파적인 애정은 징그러웠고 그 반대 또한 무서울 정도였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자네를 성질 더러운 인간이라 했고 60년 지기인 또 하나의 우리의 친구 오탁번은 그러한 자네를 대책 없는 놈이라 말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연코 ‘개성’으로 결론지었다네. 이 편파적인 판정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거네. 왜냐면 우리보다 자네를 더 잘 아는 친구들은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지. 자네는 편식했지만 그 음식은 순정했고 편견은 심했지만 결백했으며 사람을 편애했지만 그들을 감식하지는 않았지. 폭력 교수로 몰아세우는 학생 대표를 폭력으로 제압했던 자네의 80년대식 무용담은 지금 들으면 자네는 운도 많이 따랐었지. 한형, 자네가 중환자실로 옮겨가기 하루 전, 자네는 나에게 “당분간은 죽을 기미가 안 보인다”고 껄껄 웃었고 나는 “그래, 우린 아직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어쩌고 지껄였지. 그것이 자네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였네. 자네는 그날 담당 간호사에게 생뚱맞게도 멘델스존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지. 잠깐 당황하던 간호사가 이내 그의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봄노래를 좋아하노라고 대답해 자네를 감동시켰고, 자네는 이런 병원이라면 편하게 입원할 수 있겠노라고 기뻐했다지. 한형, 아버지께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후유증만을 허락해달라는 아들 근이 녀석의 기도도 헛되이 자네는 의식을 잃은 지 2주일 만에 먼 길 떠나고 말았지. 삼우제를 준비하면서 근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 짧은 묘비명이 필요하다고 했네. 나는 주저 없이 자네의 짧은 소설의 긴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냈네. “이다음 우리는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서종택 1944년 전남 강진 출생, 광주 사레지오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1969년 , 에 첫 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 , , , , 등의 창작집과 , , 등의 논저가 있다.
- 2017-04-13 15:29
-
- [잘나가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 PART3] 잘 풀리는 인생, 특별한 삶의 노하우
-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 2017-02-06 18:54
-
- 명화로 보는 남자의 패션
- 일본의 나카노 교코(中野京子)라는 독문학 및 문화사 강사가 쓴 책이다. 책을 쓸 때 박물관을 따분해하는 남편이 과연 재미있게 읽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패션, 그림에 무감각한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미술이론을 강의하는 이연식 미술사가가 번역했다. 일본에는 남들이 관심을 안 갖는 분야에서 집중 연구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명화만 해도 몇몇 이름난 화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공부할 것이 엄청나다. 그런데 유럽에 가보면 웬만한 오래된 성이나 고건물에는 사람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서양 역사나 문화사를 모르면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다. 황제였는지 왕비였는지 우리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봐도 잘 모르는 것이다. 알게 되었다 해도 그림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다. 초상화의 경우는 대부분 얼굴 표정을 본다. 그러나 저자는 패션을 봤다. 이 책은 남성 패션에 한정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옷은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중요했다. 오늘날에는 패션이라고 하면 여성들을 떠올리지만, 20세기 이전에는 남자들의 패션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남성은 각선미를 과시했고, 여성들은 다리를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수컷이 더 화려한 동물도 많다. 공작새, 꿩, 사자 등을 보면 그렇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처형당한 루이 16세가 도망치다가 붙잡혔는데 처음에는 평민복으로 남루하게 갈아입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궁전에서 시중 들던 신하를 불러 확인했을 정도란다. 그 당시 옷은 바로 그 사람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는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그림부터 시작해서 세례자 요한, 다윗, 모차르트, 스위스 용병,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 루이 14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잉글랜드 왕 찰스 1세, 그 외 다른 귀족들과 서민들을 그린 그림과 패션 설명이 나온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프란시스코 고야 등 유명 화가도 있지만, 미술사를 따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화가들도 그렸다. 그래도 미술가들이 인정하는 명화 반열에 속한다. 남자의 패션은 황제급이나 군인들 패션이 화제에 오를 만하다. 황제라면 막강한 권력과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다 했을 것이다. 옷에 들어가는 돈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패션도 권위의 상징이다. 서양에서는 붉은 색을 황제 칼라로 썼다. 군인의 복장에도 권위라는 특별한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남자 패션의 정점이 군복이라는 말은 틀린 말 같지 않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인데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실제로는 산길에 익숙한 나귀를 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대하게 보이려고 볼품없는 나귀를 근육질의 잘생긴 말로 바꿔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은 그래서 과장이 많이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시대만 해도 옷을 제대로 격식을 차려서 입으려면 많이 불편했다고 한다. 일단 옷감이 신축성이 없으니 입으면 답답했을 것이고, 지퍼도 없을 때이니 단추나 끈을 사용했을 것이다. 옷 한 번 입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실감이 난다. 귀족들이 즐겨 입었던 모피는 값도 비싸지만 벼룩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중고 의상을 내다 파는 시장을 벼룩시장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벼룩을 없애는 약이 딱히 없어서 모피를 입으려면 벼룩에 물리는 괴로움을 참아야 하는 불편함 있었다고 하니 웃음이 난다. 오늘날에는 모피를 포함한 중고 의류를 살 때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되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 2016-11-21 10:31
-
- 그림 전람회
- 파란 하늘빛으로 상큼한 9월이 시작된 첫 주말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샤갈, 달리, 뷔페 전시회에 다녀왔다. 초대권이 있어 나서긴 했지만 어린 손녀, 손자와 그림을 감상한다는 게 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는 했다. 꼭 보고 싶은 그림전시회인데 아기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지루해하면 빨리 퇴장해야 할 테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예술의 전당 광장에서는 시간에 맞추어 분수 쇼도 펼쳐지고 있으니 꼭 그림 감상만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나들이에 나섰다. 주말이어선지 관람객이 상당히 많았으며 미술 공부하는 학생들인 듯 단체로 온 사람도 꽤 보였다.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 이들은 세계 현대 미술을 이끈 거장들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화, 판화, 드로잉, 조각 작품으로 총 128점이 전시되었는데 수채물감과 비슷한 ‘과슈’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스타일은 각기 다르지만, 평생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샤갈과 달리는 익히 들었던 이름이고 작품도 많이 보았지만, 솔직히 뷔페는 생소해서 작품을 보기 전에 미리 검색해 보았더니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생전에 상업적 성공으로 부유하게 살았지만,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전시회 퇴장하는 문 앞에 감동한 세 거장에게 스티커 붙이는 판이 있는데 뷔페의 판에 가장 많은 사람이 스티커를 붙여서 그의 인기를 알 수 있었다. 전에 마크 로스코 전시회 때는 도슨트가 있어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했었지만 이번 전시회에 도슨트는 따로 없어 설명문을 열심히 봐야만 했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은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말한 샤갈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등 폭풍 같은 세계사를 온몸으로 맞으며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겪었고 고난 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만은 좌절의 수렁에 빠트리지 않고 꽃과 동물, 자유로운 연인들의 모습 등으로 오늘의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냈다. “나에게 그림은 창문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샤갈의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떠오르는 말이다.미친 사람 같다는 평을 들은 광기 어린 천재 화가 달리는 ‘나는 미치지 않았다’며 세간의 편견을 일축했다. 그가 매우 독특한 인물로 비친 것은 강렬한 콧수염과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 그리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성취에서 비롯되었는데 달리가 말했다. “나는 매일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최고의 희열과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 나 살바도르 달리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할 거냐고.” 매우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작가로 느껴진다.베르나르 뷔페는 1950년대 당시 ‘모던아트의 모차르트’라는 평을 받으며 피카소의 대항마로 여겨졌다는데 그의 작품은 쓸쓸하고 메말랐으며 삭막하기 짝이 없다. ‘가감 없는 직시와 표현, 쓸데없는 화장으로 희망을 고문하지 말자’가 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고 또한. 뷔페는 자신의 화풍에 대해 ‘즐거우려면 서커스에 가라. 미술이 세상을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 고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다섯 살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감상을 시작했다. 달리의 유명한 늘어진 시계 작품을 본 우리 손녀가 “할머니, 저 시계가 잠자나 봐요, 아니면 녹아내리고 있나?”라고 한다. 매우 정확하고 귀여운 표현에 놀라며 우리 어린 손녀가 벌써 미술 보는 눈이 있는 건가? 팔불출이 발동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직은 작품을 만지려 하기도 해서 통제하느라 힘들었지만 이런 전시회나 공연에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자가 지루한지 보채기 시작해 좀 일찍 퇴장했다.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멋진 음악에 맞춰 피어오르는 분수의 화려한 모습에 아이들과 함께 매우 즐거웠다. 먼 훗날 손녀가 할머니와의 미술전시회 나들이를 즐거웠다고 기억해 준다면 행복할 것 같다.
- 2016-09-12 09:47
-
- [해외투어]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오스트리아 빈
-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 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5-23 09:09
-
- [임성빈의 문화공감] 기본은 역시 클래식, 시작은 왈츠곡 ‘도나우’
- 첫 번째 음악이야기에서 고2 때인 1960년에 팝송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필자의 음악세계가 바뀌었다고 썼지만 일곱 번째 이야기를 쓰고 나서야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음악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필자가 중3이던 1958년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막내고모부가 1년간의 미국연수를 끝내고 귀국했다. 그 집에서 처음으로 전축과 TV를 보았다. 우리나라의 첫 TV방송이 1956년에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시험방송 정도의 수준이어서 그랬는지 고모부는 주로 미군방송(AFKN)을 보는 것 같았다. 전축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롯한 몇 장의 LP판을 들었을 때 너무 맑고 아름다운 소리에 완전히 매료됐다. 특히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은 처음 들었음에도 매우 친숙하게 다가왔고,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후에 빈이나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에는 그 멜로디가 귀에서 맴도는 듯했다. 또 클래식은 아니지만 일본가수 프랭크 나가이의 ‘유락정에서 만나요’나 ‘밤안개 낀 제2국도’ 등도 매력적인 저음이 너무 좋아 그 후에도 종종 듣곤 하였다. 1959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고성능 오디오시설을 갖춘 새 음악당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음악시간에는 이론보다 주로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등의 교향곡, 협주곡 등과 같은 기본적인 클래식 음악들을 감상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마 필자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기초가 다져졌을 것이다. 그러던 그해 가을 어느 날 음악선생님께서 LP 한 장을 들고 들어오셔서 마리오 란자라는 테너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정통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않아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재능은 뛰어나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얼마 전에 갑자기 사망했다면서 그의 노래를 들려주셨다. 오페라 토스카 중에서 ‘별은 빛나건만’, 리골레토 중에서 ‘여자의 마음’, 사랑의 묘약 중에서 ‘남 몰래 흘리는 눈물’ 등과 같은 오페라 아리아들은 나중에는 꽤 친숙해졌지만 처음 듣는 순간에는 엄청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 후 그가 주연한 두 편의 영화를 단체로 관람하였다. 하나는 라는 영화로, 그는 중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중에서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 중에서 ‘오 사랑스런 아가씨여’ 등의 오페라 아리아들과 함께 ‘세레나데’, ‘돌아오라 쏘렌토로’,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등과 같은 가곡들도 불렀다. 또 하나는 으로서 여기에서는 중에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이여’, 중에서 ‘청아한 아이다’, 중에서 ‘의상을 입어라’ 등의 아리아들과 함께 ‘코메 프리마(Come Prima)’, ‘오 솔레 미오’ 등과 같은 가곡들을 불렀다. 그 외에 라는 영화도 단체로 관람하였다. 이 영화에서는 16세의 상큼한 소녀 디아나 더빈이 중 ‘축배의 노래’를 열창하였다. 그리고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직접 출연하여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제2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4악장’, 그리고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서곡’ 등을 연주하였다. 또 지금의 집사람과 대학 때 함께 본 라는 영화는 주연배우인 20대 초반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배경이 된 스위스의 취리히, 생 모리츠도 아름다웠지만 영화 속에서 연주되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제2번’과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Gypsy Air)’의 선율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 외에 제1회 국제 차이코프스키 음악경연대회 피아노부문에서 우승했던 반 클라이번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실비 바르탕이 부른 ‘친애하는 모차르트(Caro Mozart)’라는 샹송으로 인해 익숙해진 ‘모차르트 교향곡 40번’과 의 주제가였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등이 상당히 유행했다. 지난달까지 여러 가지 음악이야기를 했지만 음악의 기본은 역시 클래식이다. 그래서 대학시절에도 경음악실보다는 르네상스나 아폴로 같은 클래식 홀을 훨씬 더 자주 갔었다. 또 1974년의 어느 요일에는 오전에 공릉동에 있던 서울대 공대, 오후에는 흑석동의 중앙대, 그리고 저녁에는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야간강의를 했는데 이동 중 남는 시간에는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클래식 중에서는 ‘베토벤 피아노소나타’를 많이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열정’(Appassionata)을 좋아해서 루돌프 제르킨,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등 연주자별로 9장 정도의 판을 가지고 들었다. 군복무 중에는 청소하다가 실내스피커에서 이 곡이 흘러나와 필자도 모르게 멍하게 서서 듣는 바람에 기합을 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도 많이 좋아했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와 ‘파리의 아메리카인’,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 ‘보로딘의 교향곡 2번’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가 들어 있는 ‘Russian Impressions’라는 LP판도 자주 들었다. 헌 책방에서 구한 조셉 매클리스(Joseph Machlis)의 보면서 주요한 곡들의 판을 구해 듣기도 했다. 또 음악 연주에도 욕심을 부려 피아노는 체르니까지, 기타는 종로2가에 있던 세계기타학원에서 가요 몇 곡 칠 정도까지, 그리고 선친의 아코디언에도 손을 좀 댔었으나 연주에는 워낙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 2016-03-25 12:53
-
- [PART8 2막에서 이룬 꿈] 성악가로 제2의 인생을 향해 한 걸음 내딛다
- “대학생일 때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죠. 고등학교 때는 시골에 있었으니 좀 여유 있게 놀 수 있었죠. 노래를 좋아했어요. 주위에서 목성이 좋다고 하고 발음도 명확하다며 성악을 하라고 하더군요.” 한영섭(韓永燮·61)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성악이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더듬어보기 위해 10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오래된 꿈을, 그는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루게 됐다. 지난해 12월 10일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서 그간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 그에게 꿈을 이룬 제2의 인생 담론을 들어본다. 운동에 재능이 있고 배짱이 있었던 한영섭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얼떨결에 교련 과목에서 연대장을 맡게 됐다. 당시 교련은 굉장히 비중이 큰 과목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교련 연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령을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잖아요. 산에 가서 차렷, 열중쉬어를 많이 외쳤어요. 마이크 없이 질러대는 거예요. 그때 목이 많이 개발됐죠.”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레코드를 자주 사게 됐는데, 특히 가곡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생의 노래로 꼽는 곡도 그때 만나게 됐다.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였다. “다른 가곡들도 좋았지만 ‘명태’를 듣는 순간 이런 노래가 있구나 싶었어요. 엄청나게 따라 부르면서 외우곤 했죠. 학교를 다닐 때도 부르고 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그렇다고 성악의 길을 간 건 아니고 그보다는 좋은 공부를 해서 직장을 가야겠다 싶어 전경련에 들어갔어요.”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그가 전경련에서 맡은 건 CEO 교육이었다. 그래서 연사를 초청하다 보니 당연히 그중에 성악가들도 있었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됐다. 그런데 그들의 공연을 보다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무대에 서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혼자서만 불렀지 교육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노래는 사사를 받아야 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에 감성CEO 오페라 과정에 들어가서 성악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명태’를 부르는 걸 보고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막에 나오는 ‘Non piu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를 부르라는데 다른 사람은 다 2분 내에 끝나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5~6분 되는 거예요. 악보가 일고여덟 장 돼요. 다 이탈리아죠. 처음에는 자신 없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싶었어요.” ‘더 이상 날지 못하리’가 한 원장 손에 쥐어진 건 2015년 5월 중순. 연습 시간은 한 달. 그는 집에서 엄청나게 연습했다. 횟수로 세진 않았지만 천 번은 거뜬히 넘었다고 한다. “재미도 있지만 외우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행스러운 게 비슷한 패러그래프가 반복된다는 거였는데, 그게 또 헷갈려요. 반복이 정기적으로 되면 되는데 엇박자로 가는 게 있더군요. 그리고 노래가 경쾌하다보니 템포가 굉장히 빨라요.” 안 좋은 기억이 생기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연습을 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지난해 7~8월 휴가 때 제주포럼에 가서 한 번 불러본 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달 뒤에 그를 가르치던 분 앞에서 자신 있게 이 노래를 다 불렀다. 그러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걸 노래라고 불렀어요?’ 그러더라고. 충격 먹었어요. 자신 있게 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을 할까. 상처가 됐죠. 일주일 정도 지난 다음에 선생님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학생에게는 상처가 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게 해야 다시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질책은 잘못한 거죠.” 그러나 예순 살의 나이에 겪게 된 그런 강렬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 원장은 자신의 노래를 계속 가다듬었다. 혼자 알아서 해야 했던 연습이기에 박자가 안 맞고 숨을 엉뚱한 데서 쉬는 등의 실수를 나중에 가르침 받았다. 감정에 치여 좌절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제가 평행봉을 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손에 땀이 너무 나니까 평행봉을 하다가 떨어졌어요. 하필 비탈에 떨어지면서 배를 쫙 긁혔죠. 보통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운동을 단념해요. 철봉이 꼴도 보기 싫어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 더 열심히 했어요.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때, 그 지점에서 더 열심히 하면 이겨낼 수 있는데 쇼크를 받아서 안 하면 완전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에도 그런 쇼크를 받았어도 계속 코치를 받고 발전하려고 노력했죠.” 잠재력을 증명한 열정의 무대 “하고 싶은 노래를 하니 좋은 점이, 내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했다는 거죠. 그리고 전경련을 나와서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나이를 들어서 꿈이 없으면 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모습은 무엇일까? “올해 5, 6월즈음 개인 발표회를 하려고요. 한 곡 한 곡 사사를 받아 날 좋을 때 발표를 해야겠다 싶어요. 제가 바리톤으로 7~8곡은 부르고 소프라노 한 분, 테너 한 분 모셔서 함께 공연하는 식으로 진행하면서 단독으로 개인 발표회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 있음을 감지한다. 그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행복해한다. 그는 노래를 할 때 행복감이야말로 사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노래는 혼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줬다. 이렇게 꿈을 이룬 그에게 꿈에 대한 다른 시선을 물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발을 움직여 스스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며 꾸준히 노력하고 직접 몸으로 맞서 꿈을 이룰 것을 조언했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세요.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막연한 간절함이 아닌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지와 다짐이 분명한 간절함이 필요해요. 24시간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면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과 즐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 그는 전경련에서 33년 3개월을 보냈다. 초년기 중년기를 거기서 다 지낸 것이다.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서 훌륭한 직장이었죠.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고 저는 다른 데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조찬회를 만들어 회사를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는 훌륭한 경영자 스토리를 교육하고 정치, 외교, 통일 안보에서 훌륭한 사람을 데려와 그쪽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이 저에게 그 장을 마련해준 거죠. 혼자 그걸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려워요. CEO지혜산책을 만드는 등 제게 그런 지식과 기회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은 30여명의 기업인이 1975년 조찬 공부 모임으로 창립한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를 모태로 설립돼 지금까지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세미나 등 각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인간개발연구원 경영대상 시상식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공연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다. 일과 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그의 인생 2막의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한영섭 원장과의 1문1답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렸을 적부터 성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취업과 생활을 위해 바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성악가들의 공연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CEO를 위한 오페라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됐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은 운동선수였으나 지금은 꿈을 이루고 나니 나만의 개인 공연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서정시를 음악으로 낭송하는 행위가 얼마나 멋집니까. 완전히 몰입된 감정 상태의 시인이 돼 노래하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훌륭하게 부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스승)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난 이후부터가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성악을 색깔별로 표현하면 노래마다 다르긴 한데, 특히 가을에 부르는 성악은 완전히 익은 갈색 같아요. 그런데 모차르트의 노래는 경쾌하고 파릇파릇한 게 초록색 같습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그저 잠재력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해냈다는 거죠.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 2016-02-18 10:04